1.서 론
개로왕의 죽음으로 공주로 급히 천도한 백제 왕실은 다시 538년에 부여로 도읍을 옮긴다. 이후 부여경영이 시작되면서 왕궁과 관련 시설물들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러한 시설물 중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시설물 중 하나가 바로 사찰이었다. 당시 백제 사찰은 목탑과 금 당, 강당, 회랑으로 구성되면서 1탑1금당이라는 한성이 나 웅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가람배치 방식으로 만들 어졌다. 또한, 사찰도 사비도성 내부에만 15개소, 사비 도성 외부에 10개소가 만들어졌으며, 현재까지 확인된 백제 사찰은 모두 31개소이다.1)
이 가운데 사비도성 내부의 15개소 중 정림사는 부 여의 중심에 위치한 지정학적인 위치, 공주에서부터 교 류한 중국 남조 남량(南梁)의 상정림사(上定林寺)·하정 림사(下定林寺)가 유지되는 점으로 인해 사비천도 전후 시기인 6세기 중~후반에 남조의 영향을 받아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었다.
‘정림사’ 사명은 1917년 야쓰이 세이이치(谷井濟一)가 평제탑2) 주변에서 수습한 ‘大平八年武辰定林寺大藏唐草’ 기와에서 처음 확인되었다. 공식적으로 정림사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후지사와 가이지로(藤澤一夫)가 1942 년의 발굴조사 후 1949년 ╚人文╝ 잡지에 ‘廢定林寺の硏 究’를 내면서부터이고,3) 해방 이후 윤무병은 ‘大平八年 武辰定林寺大藏唐草’ 기와 명문에 따라 사지에 대한 명 칭을 정림사로 호칭하였다.4) 따라서 대평팔년이 1028년 이고, 동 기와가 고려시대의 유물임에도 불구하고 그 이 후로 정림사로 불리게 되었다. 따라서 원래 백제시대의 사찰 이름에 대해서는 현재 알 수 없다.5)
이처럼 현재 백제시대의 사명은 알 수 없지만 그 창 건시기를 6세기 중~후반으로 인식되었으나, 최근 발 굴조사6) 결과를 통해 그 창건시기가 7세기로 수정되 었으며,7) 백제사찰의 건물배치 형식 등이 같이 검토되 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고고지자기 검 토라는 과학적인 증거와 동·서승방지 배치의 형식적인 발전에 따라 정림사의 창건시기를 규정하고 있어 백제 문화사를 규명해내는 중요한 단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고고지자기 분석은 정림사의 가장 남쪽에 위 치한 중문지 하부의 노지에서만 실시되었고, 동서승방 지의 배치형식이 역으로 이 고고지자기 검토에 따라 7 세기 초반으로 비정된다는 점은 쉽게 수긍하기 어렵 다. 가장 남쪽에 위치한 문지가 과연 창건기에 만들어 졌는지, 또한 동서승방지도 이러한 사찰배치가 유효한 하나의 형식으로 적용될 수 있는지 의문이 남는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정림사의 창건연대가 7세기라는 점에 대해 다시 한 번 발굴조사 자료를 가지고 재검토 하여 7세기 창건이 타당한 것인지 재고해 보고자 한다.
2.고고지자기 분석 검토
2-1.고고지자기 분석
고고지자기 분석은 불에 탄 흙(소토)에 포함되어 있는 자성(磁性) 광물의 냉각을 통해 열잔류자화를 획득하여 소토가 될 당시의 시기를 추정해내는 과학적인 조사방 법이다. 이러한 자료들이 모여 하나의 고고지자기영년 변화곡선이 만들어지지만, 현재 한국은 시료분석 결과 를 서남일본의 고고지자기영년변화곡선에 대입하여 검 토하고 있다.
이러한 과학적인 조사방법이 발굴조사에 적용되는 점 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한국에서 확 보된 시료 분석이 보다 완벽해지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시료 분석을 통한 한반도 자체의 고고지자기영년변화곡 선의 제작이 요구된다.8)
2-2.고고지자기 분석 결과
정림사지 9차 발굴조사(2009~2010)에서는 정림사 창 건 이전 백제시대 층위(백제시대 생활면 1단계)에서 3개 의 유구가 확인되었다.(<그림 1> 참조)
이 중 고고지자기 분석은 중문지 하부에서 확인된 노 지9)(<그림 2> 참조)를 대상으로 실시되었다. 이외 정림 사 창건 이전의 백제시대 유구는 중문지 남쪽의 와열유 구(<그림 3> 참조)와 동석축배수로 주변에서 확인된 장 방형 소성유구(<그림 4> 참조)가 있다. 이들 유구는 바 로 상부에 통일신라시대토층, 고려시대토층이 확인되어 실제 정림사가 창건될 당시 대지조성이 이루어졌는지 의심스럽다.10)
노지는 중문지 내에 설치한 너비 1m의 탐색구덩이 내에서 직경 40cm 크기로 확인되었고, 그 동쪽으로 재 층과 소토층이 넓게 퍼져 있었다. 내부 조사에서 와편과 슬래그편이 소량 출토되었고 노지 주변과 동쪽으로 재 층과 소토층이 확인되었다. 여기서 확보한 12개의 시료 중 최종 5개의 시료분석 결과 <그림 5>와 같이 연대가 A.D. 625 ± 20년으로 확인되었다. 이 조사를 통해 정림사 창건 이전 노지 연대는 상한 연대가 605년이 되었다. 따 라서 정림사 창건 연대는 605년 이후, 즉 7세기로 새롭 게 추정되었다.11)
2-3.고고지자기 분석 결과 검토
고고지자기 분석은 주거지 경우 노지나 아궁이의 소 토에서 시료를 채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러 한 소토는 소성범위가 넓지 않고, 높은 온도에서 소성 되지 않아 요지의 소토 시료와 비교하여 정밀도가 떨 어지는 고고지자기 분석 결과를 얻는 경우가 많다.12) 이 조사에서 결과를 얻은 노지도 보고서상에는 따로 설명이 없으나, 12개의 시료 중 5개의 시료만이 유효한 것을 보면 데이터 확보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판 단된다. 제시된 A.D. 625 ± 20년의 연대도 원형노지에 서 확인된 소량의 와편과 S2(E0) 5m 지점에서 확인된 와편의 고고학적인 검토를 병행했다면 보다 신뢰할 수 있는 연대가 제시되었을 것이다.
3.토층 검토
3-1.토층조사 결과
원형노지는 중문지 축조를 위한 조성토층보다 아래 위치하고 있는 백제시대 생활면 1단계인 자연퇴적층에 서 확인되었다. 따라서 S3E0을 중심으로 왼쪽은 정림사 지 오층석탑이 있는 마당을 포함하여 사역조성성토층이 고 왼쪽은 문지 조성을 위한 성토층이다. 따라서 사역조 성성토층보다 아래에 위치한 원형노지의 연대가 605년 이후가 되어 전체 창건연대가 7세기로 추정되었다.
<그림 6>에 따르면 전체적으로 정림사 창건 이전 자 연퇴적층은 가장 하부에 위치하고 있다. 그 위로 사역조 성성토층이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남면에서 약 10m 정도 떨어진 구간부터 중문지 적심 사이까지 조사되었다. 적 갈색·암갈색 점질토사가 약 45°경사를 가지고 유사판축 형식으로 성토되었고, 가장 남쪽 하부에 원형노지가 사 역조성성토층 바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중문지기초성 토층은 중문지 북쪽 적심부터 중문지 기단범위까지 암 갈색사질점토, 마사 및 사질성분이 다량 혼입되어 만들 어졌다. 내부에서 구분되는 다른 토층선이 없어, 그 조 성과정은 짧은 시간에 빠르게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마 지막으로 중문지기초성토층 위로 중문지조성성토층이 중 문지 북쪽 적심보다 조금 북쪽부터 중문지 기단석렬을 벗어난 구간까지 암갈색·적갈색·암황갈색 사질점토로 조 성되었다.13)
한편, 정림사 창건 이전의 유구로 보고된 중문지와 연 지 사이에 위치한 와열유구의 상면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층-고려시대층-최근 정비층 순서로 토층이 확인되었다. 동회랑지 남측에서 확인된 장방형 소성유구는 상면에서 고려시대층이 확인되어 과연 이 유구들이 확인된 지역이 당시 정림사 사역 내에 포함될지 의문을 남겨준다.c
3-2.토층조사 결과 검토
먼저 원형노지의 축조연대에 따르면 사역조성성토층이 일시에 만들어져 원형노지의 구역까지 조성되어야 하며, 또한 원형노지는 만들어져 사용될 때까지 정림사 건물이 아무것도 없다고 가정해야 정림사 창건연대를 7세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역조성성토층에서 보이는 방식은 기 조사되 었던 정림사지 오층석탑 주변의 토층과 차이가 발견된다.
<그림 7>에서 보면, 석탑지 바로 하부에서 확인된 황 색판축토와 그 아래에 위치한 적갈색판축토 주변으로는 대체로 토층이 평탄하게 확인되었다. 이러한 차이는 <그 림 6>은 남북방향, <그림 7>은 동서방향으로 조사된 차 이도 있지만, <그림 7>에서 왼쪽에서 보이는 대지조성 토, 그리고 그 옆의 황갈색토, 오른쪽에서 보이는 적갈색 준판축토에서 전혀 토층선이 보이지 않는 것은 최근 조 사와 차이가 있다.
이는 곧 사역을 조성하고자 성토할 때 석탑 주변은 기 제시된 <그림 6>에서 볼 수 있는 경사지게 성토하 는 방식과는 다르게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차 이는 사찰 조성에 있어 조성토를 동시에 만들었다고 가정하면, 다른 방법으로 구축되었거나 두 지점 사이를 축조할 때 시간적인 차이가 있음을 의미한다.
이제까지 정림사 창건 시점은 원형노지의 고고지자기 분석 결과인 7세기 초반이 나오기 전에는 대체로 사비 천도 시기인 538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판단되었다.14) 물 론, 이러한 점은 당시까지 발굴조사 결과와 더불어 성왕 19년(541)의 임나부흥회의(任那復興會議)의 사비 개최15) 즈음에는 사비도성 내 궁 관련 시설과 주요 시설 등이 어느 정도 완공되었을 것이란 가정이 필요하다.
부여의 중앙에 위치하면서 당시에도 중요한 위치로 판단되는 정림사에 지금처럼 석탑이 있었다고 생각하기 는 어렵다. 그렇다면 처음의 정림사 모습을 다시 추정해 볼 필요가 있다.
백제 사찰 중 창건과 완공에 관해 기록이 가장 잘 남 아있는 것은 왕흥사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법왕 2년(600)에 창건16)하여 승려 30인을 두었다’고 하 며 이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17)과도 일치한다. 이후 무왕 35년(634)에 완공18)되었다고 하나, 발굴조사 시 확인된 사리기에는 577년으로 되어 있어 실제 전체 건립기간은 577년부터 634년까지 약 58년 이상 걸린 것 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목탑 착공이 577년임에도 불구 하고 다시 창건까지 23년, 이후 완공까지 35년이 걸린 점19)은 사찰 조성에 그만큼 시간이 오래 소요됨과 동시 에 많은 장애요인이 있었다고도 판단된다.
이 기간을 정림사에 적용하여 가장 빠른 시기인 605 년부터 역산해보면 그 사리 봉안 시점이 548년이 된다. 이 시점은 부여천도를 대외적으로 알리면서 위세를 보 여줄 수 있었던 임나부흥회의(541)보다는 늦다. 따라서 정림사의 위치상 임나부흥회의 실시보다는 먼저 착공하 여 새로운 수도로 옮긴 국력의 과시를 했을 것으로 판 단되지만 현재로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실제 부여천 도가 오랜 기간이 걸려 완공된 것이라 하더라도 유구나 유물에서 확인될 수 있는 자료는 현재까지 없기 때문이 다. 만약 부여천도 시점인 538년으로 가정해보면 538~ 605년으로 68년 동안의 건립기간도 고려해볼 수 있다.
3-3.정림사 목탑축조의 여부
앞서 설명했지만 정림사가 처음부터 석탑이 조영된 사찰로 건립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렇다면 현재까지의 조사 결과로 목탑의 존재 여부를 다시 한 번 파악할 만한 가치는 있다고 판단한다.
해방 이후 정림사를 발굴한 윤무병은 현재의 오층석 탑을 수막새의 형식 검토와 더불어 미륵사 석탑보다 건 립연대가 빠른 것으로 제시하였다.20) 이후 미륵사 석탑 과 정림사 석탑의 선후 논란이 발생하였지만, 김정기에 의해 정림사 석탑의 현재 기단부는 목탑의 기단부로 제 시된 바 있다.21)
이에 다시 제기된 문제는 미륵사 석탑과 정림사 석탑 의 건립연대 선후문제로, 기존의 연구결과에 따르면22) 역시 미륵사지 석탑이 먼저 조영되었다는 점은 연구자 들 사이에서 동의되었었다. 또 최근에는 미륵사서석탑 사리봉영기(舍利奉迎記)가 발견되어 미륵사서석탑의 건 립연대가 무왕 말년인 639년으로 밝혀진 바 있다. 그리 고 정림사지 석탑은 2008년부터 시작된 발굴조사를 통 해 백제 멸망 직후에 건립되었다는 의견도 제시된 바 있다.23) 또한, <그림 7>을 분석하여 굴광판축토 자체를 석탑을 위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24)
그렇다면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 과연 목탑이 있었을 가능성에 대해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발굴조사 후 제시 된 토층도에서는 경사진 굴광선이 확인되고 있고, 미약 하지만 2개의 토층이 서로 상하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목탑의 기단토를 굴광판축하여 구축한 사례는 미륵 사, 용정리사지, 능사, 오합사, 왕흥사, 제석사, 금강사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형목탑으로 추정되는 미륵사 지 목탑 등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굴광한 깊이는 0.6~ 1.4m 정도이다.25)
<그림 8>과 같이 석탑 지대석 아래로 굴광판축한 깊 이는 약 1.2m 정도이다. 그리고 그 위로 1m 정도의 기 단토가 올라간다면 기단토 폭이 약 9~10m가 된다. 이 는 기존에 밝혀진 군수리사지 12.1m, 능사 10.32m, 왕 흥사 12.2m26)와 유사한 기단부 길이이다.
따라서 이 굴광판축한 토층이 석탑을 위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목탑 건립을 위한 굴광판축토로 볼 수 있 는 개연성이 충분이 있으며, 결과적으로 현재의 석탑 자 리에는 원래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27)
그렇다면 원래 있던 목탑이 사라지고 석탑의 건립시 기도 중요한 부분이다. 고고지자기 분석 결과 A.D. 625 ± 20년으로 확인되었음은 중문지를 만드는 시점이 605~ 645년 사이이다. 가장 빠른 시기인 605년부터 중심연대 인 625년으로 가정하면 사리봉영기에서 639년으로 확인 된 미륵사지 서석탑보다 건립연대가 빠르게 된다. 따라 서 정림사지 석탑이 미륵사지 서석탑보다 늦은 시기의 탑이라면, 640년~645년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4.사찰배치 형식의 검토
4-1.발굴조사 결과
정림사는 최초 발굴조사에서 일본 사천왕사 배치의 원형적인 형태로 주목받았다. <그림 9>와 같이 중문- 목탑-금당-강당이 일직선에 배치되고 그 주변을 회랑 이 둘러싼 형식으로 이해되었다.28)
그러나 <그림 10>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실제 토층조 사 결과 남회랑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금당 동서축선을 중심으로 남측으로는 회랑이, 그 북측부터 강당 북측 기단선을 조금 넘어선 범위까지 승방지가 위치하고 있다. 또한, 강당지 북쪽으로 북승방지가 위 치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따라서 당초 일본 사천왕사의 배치와는 차이가 있으 며 남쪽 회랑이 없고 금당과 강당 좌우에 별동의 건물이 생기는 방식에 대해 새로운 탐구가 제기되었다.
이러한 배치형식은 ‘정림사식 가람배치’로 새롭게 명 명되면서 <그림 11>과 같이 백제 사찰 배치 형식을 새 롭게 3가지로 제시하는 기반이 되었다.29)
여기서 재고해야 할 점은 앞서 설명한 고고지자기 분 석 연대인 7세기 전반에 그 건립연대가 맞추어져 고려 되면서 7세기에 창건한 미륵사지, 제석사지 등과 같이 3유형 강당+승방지로 분류하였다. 앞선 시기의 1유형에 서는 강당 좌우에 종경루지가 배치되고, 2유형에서는 종경루지가 사라지면서 부속건물이 배치되다가 3유형에 서는 승방지가 배치되는 것으로 분류한 것이다. 이 분 류방식은 어느 정도 기존의 백제사지에 대한 연대순을 반영하면서 정림사를 새롭게 7세기 초반에 조영된 사찰 로 보아, 3유형 중 가장 빨리 나타나는 사찰 배치 형식 으로 보았다.
4-2.정림사식 사찰배치의 검토
앞서 설명한 3가지 유형 분류방식의 가장 큰 차이점 은 백제 사찰 배치의 기본 골격인 중문-목(석)탑-금당 -강당의 중축선을 유지한 상태에서 강당 좌우의 소형 건물지가 탈락되고 회랑 북단의 건물지가 강당 좌우에 완전하게 자리 잡았다는 점을 들고 있다.30) 그러나 이 렇게 분류하는 방식에서 몇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먼저, 강당 좌우의 소형건물지가 있는 사찰은 군수리 사지와 동남리사지이다. 그리고 이러한 형식은 제시한 2유형 강당+부속건물지로 보면 능산리사지는 처음에는 빈전으로 운용되다 사찰로 변경되어 그 계획성을 논하 기 어렵다. 다만, 왕흥사는 여전히 강당지 동서쪽에 부 속건물지가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인 3유 형부터 강당 좌우에 있는 작은 건물지가 없어졌는데, 미륵사지는 3원 구성으로 배치 형식을 동일선상에 놓 고 논의하기 어렵고 제석사와 유사한 점을 비교해야 한다. 결국, 강당 좌우의 종경루지가 없어지면서 이후 규모가 큰 부속건물로 변화하는 것인데, 이 건물지에 대한 성격은 명확하지 않다. 대체로 승방이나 선방 등 으로 추정된다.
부여에서 가장 빨리 건립된 사찰로 추정하는 군수리 사지에서의 작은 건물지를 종루와 경루라고 가정한다면, 강당지보다 더 외곽으로 이동하여 그 자리에는 다른 기 능의 건물이 대신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건물지의 기능은 능사에서 확인된 동서회랑의 북단에 연결된 공방 지Ⅰ(금동대향로 출토 건물지)과 불명건물지Ⅱ, 그리고 왕흥사에서 볼 수 있는 동건물지와 서건물지에서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유구의 성격에 대해서는 다소의 이견이 있으나, 공통적인 기능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31) 그렇다 면 이들의 규모가 사실상 점차적으로 커진다는 측면이 있지만, 오히려 왕흥사 동·서건물지 규모가 정림사와 제 석사 동·서건물지 규모보다 커서 과연 창건 시점을 577 년 또는 600년으로 보았을 때 오히려 목탑 건립이 먼저 시작되고 이후 착공된 왕흥사 건립을 600년으로 보면 오 히려 정림사에서 제시된 7세기 초반과 큰 차이가 없어 배치형식에서 시간적인 차이는 없게 된다.
또한, 이러한 건물지가 강당 좌우에 완전하게 자리 잡은 점이 강조되었는데, 실제 정림사와 같이 강당 좌 우를 둘러싼 동·서건물지가 있는 경우는 미륵사 1개의 사례가 더 있을 뿐이다.표 1
결국 각각의 사찰 배치에서 중문부터 강당에 이르는 중축선이라는 측면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 외 회랑 과 기타 건물지간의 관계를 살펴보면 어느 사찰에서도 똑같은 배치형식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러한 개별적인 배치 형식을 3유형으로 나누 고 다시 ‘정림사식 가람배치’를 논의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한다. 오히려 기존의 1탑1금당, 1탑3금당, 3 원식 등의 가람배치 형식에서 세부적인 변화 양상을 탐 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이제는 각각의 세부 변화 양상에서 그 건립시기에 대해 보다 세밀한 탐구가 요구된다 할 수 있다.
다만, 사찰 건립시 가장 먼저 건축되는 건물과 가장 마지막에 건축되는 건물을 고려해보면 그 시기 차이가 상당 기간이 될 것이므로, 짧은 시기에 모든 건물이 동 시에 건립된 것으로 보는 것은 다소 어려운 점이 있다.
현대도 건물의 계획은 끊임없이 수정되고 변화된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정림사 역시 장기간 동안 건립 되었다면, 당초의 계획과는 달리 필요에 의해서 그 계 획이 변경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왕흥사 건립이 57년 동안 이루어진 것을 보면 이러한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5.맺음말
1942년부터 2011년까지 총 10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 진 정림사는 중문지 하부에서 확인된 노지의 고고지자기 분석 결과 A.D. 625 ± 20년으로 제시되었다. 이는 기존의 정림사가 백제가 사비로 천도하면서 거의 처음으로 창건 했던 기존의 견해와는 상당부분 차이가 있었다. 이에 본 고에서는 정림사 발굴조사 내용의 검토를 통해 제시된 7 세기의 창건연대를 재고하였다.
먼저, 고고지자기 탐사를 통해 제시된 연대에 대해서 는 그 자체로 인정하여야 한다고 판단한다. 물론, 아직 까지 한국의 고고지자기영년변화곡선이 마련되지 않아 서 일본의 고고지자기영년변화곡선을 차용했지만, 그 오 차는 크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두 번째, 그렇다면 중문지 하부의 고고지자기 연대를 A.D. 625 ± 20년으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중문지의 토층 관계, 현재 남아 있는 오층석탑과의 토층관계를 살펴보 면 오층석탑 주변과 중문지는 다른 방식으로 대지가 조 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일시적으로 축조된 것이 아니라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건립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원래 오층석탑 자리에 목탑이 있 었기 때문에 건립에 긴 기간이 필요했던 것으로 판단되 며, 본고에서는 목탑의 존재 여부 가능성을 토층관계를 통해 제시하였다.
세 번째, 시기에 따른 사찰배치 형식의 변화가 언급 되었으나, 실제 사찰배치는 각 사찰마다 부속건물지의 배치와 연관하여 구분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오히 려 1탑1금당이라는 기존의 사찰 배치관계에서 세부적인 변화양상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상과 같이 과학적인 조사방법인 고고지자기 분석을 통해 제시되었던 정림사지의 7세기 창건설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7세기에 정림 사가 창건된 것으로 보기에는 대지 조성 방식, 목탑의 존재 여부 가능성을 통해 재고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 다. 또한, 사역 전체가 일시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요 건물부터 순차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가정해보면 특정 시기에 전체적인 건물 배치를 논의하는 점에 대해 재고가 필요한 점을 제시하였다.
따라서 본고에서 정림사 창건시점은 538년~548년 중 으로 판단할 수 있고, 현재 남아 있는 오층석탑이 640 년~645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제시할 수 있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