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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 1598-1142(Print)
ISSN : 2383-9066(Online)
Journal of architectural history Vol.25 No.4 pp.31-44
DOI : https://doi.org/10.7738/JAH.2016.25.4.031

Construction of Geum’yeok-dang, the Heung’hae Bae Clan House, and its Structural Changes during the Late Joseon Period

Jong-Seo Lee*
Corresponding author : ljs6102@naver.com
June 15, 2016 August 2, 2016 August 5, 2016

Abstract

Geum’yeok-dang house in Andong was originally constructed in 1558. The original floor plan of the upper base featured a 90-degree tilted ‘日’ shape, and had inner court(內庭) on each side of ‘Jungdang(中堂, center hall)’ building that was placed on the south-north axis. When designing the building, the Neo-Confucian client of Geum’yeok-dang applied his understanding of how Ga’rye(╚家禮╝) defined the structure of ritual space. Consequently, ‘Daecheong(大廳)’, the place where guests were greeted and ancestral rites and coming of age ceremonies for male were held, was built in a protruding fashion. ‘Jungdang’[otherwise known as ‘Jeongchim(正寢)’], where coming of age ceremonies for females were held, the master of the house faced death, and memorials for close ancestors were held, was placed at the center of the residence on the south-north axis. The Geum’yeok-dang today was greatly renovated in the early and mid 18th century, due to the spread of ‘Ondol’ heating system. As the Ondol heating system became popular, the pre-existing drawbacks and the inconvenience of the house stood out clearly. As a result, the house was renovated into today’s structure consisting of ‘口’ shape ‘Anchae’ and ‘Daecheongchae’ in separate building.


흥해배씨 종가 금역당(琴易堂)의 건축과 조선후기의 구조 변화
건축이념 및 실용성과 관련하여

이 종 서*
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초록


    1.서 론

    조선의 지배이념이었던 성리학에서는 우주의 이치에 근거하여 인간의 본성을 설명했다. 그리고 본성에 부 합하는 행위를 ‘예(禮)’로 규정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예(禮)’의 해석과 실천을 중시했다. 특 히, 남송의 주희(1130~1200)가 편찬했다고 전하는 가 례를 전범으로 여기고 이를 실천하는 데 열중하였다. 그 결과 주택의 구조에도 변화가 발생하였다.

    기존 연구에서도 사당의 건축이나 안채와 사랑채의 분리 등을 성리학과 결부하여 파악하였다. 그러나 이들 연구는 변화를 발생시킨 요인을 ‘성리학’으로 단순화시 키거나 ‘사당’, ‘제사’, ‘남녀분리’와 같은 특정 요인을 적용했다는 점에서 부족함이 있다.1)가례가 의례의 실천 공간으로 전제하고 있는 주택에 대한 구조적인 해석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사당의 건축, 안채와 사 랑채의 분리 등은 성리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주 거생활의 실용성과도 결합된 것이었다. 현존하는 조선 시기 상류주택의 사당은 가례에 설정된 것보다 구조 가 간략하며, 뒤에 보겠지만 조선전기의 성리학자들이 가례와 부합하는 것으로 이해한 주택은 안채와 사랑 채가 결합된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양반 주택과 크게 다른 것이었다.

    그런데 가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생각되는 주택들이 조선전기에 건축되었다. 이들 주택은 조선후기 의 보편적인 양반 주택과 구조가 크게 달랐다. 또한, 조 선후기에 더 이상 지어지지 않았을뿐더러 기존의 주택도 철거되거나 변형되어 지금은 본래의 평면을 유지하고 있 는 사례가 극히 드물다.2) 따라서 이들 주택은 가례의 영향을 받아 성립했다가 특정한 이유로 변형되거나 소멸 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본고에서는 안동의 흥해배씨 종가인 금역당의 구가와 현재의 금역당을 분석하여 가 례의 영향을 받아 성립한 주택의 구조를 확인하고, 현 재와 같은 구조로 변형된 이유를 추론해 보겠다.

    2.금역당 구가와 현 금역당의 구조

    2-1.금역당구가도 의 주택 구조

    경상북도 안동시 송천동에 있는 금역당은 임연재 배 삼익(1534~1588)을 불천위로 제사하는 흥해배씨 종가이 다. 본래 예안면 도목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인하 여 1973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3) 종가의 구전에 따 르면 금역당은 배삼익이 부친 배천석을 따라 도목촌으로 ‘복거(卜居)’한 1558년4)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금 역당은 안동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口’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다. 이외에 별채인 대청채가 있다.<그림 4>

    그런데 금역당 종가에는 금역당구가도(琴易堂舊家 圖) 가 전한다. 구가도는 1812년 간기가 있는 상례비 요(喪禮備要)의 건(乾) 권 후면의 빈 종이에 그려져 있 다. 가도의 획선을 보면 건축을 위한 설계도면이 아니 라 기존의 가도를 옮긴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금역당 에는 현 종손의 9대조 배집(1710~1755)이 종가를 대폭 개축했다는 구전이 있다. 따라서 칸의 구획과 용도, 창 호의 위치, 쪽마루까지 표시되어 있는 구가도는 배집이 현재의 모습으로 개축하기 전의 모습일 가능성이 크다.

    금역당구가도 의 평면은 현재의 금역당은 물론, 다른 주택들과도 크게 다르다. 구가도의 가장 큰 특징은 중심 건물의 위치와 방향이다. 경북지역에 보편적인 ‘口’ 자 집은 상단에 동서축으로 몸채를 배치하고, 하단에 남 북축의 좌·우 익랑과 이들 익랑의 양단을 잇는 동서축 의 행랑을 배치하여 완성된다. 그러나 금역당 구가의 상 단은 중심 건물을 남북축으로 놓고 중심 건물의 남단과 북단에 낭무5)를 연결하여 공간을 확장해 나갔다. 그 결 과 상단의 평면은 중심 건물의 좌우에 각기 내정을 갖 춘, 옆으로 누운 ‘日’자형이 되었다. 현존 주택 중에서는 경주시 향단의 평면이 이와 유사하다.<그림 11>

    아래의 <그림 1>은 구가도의 원본 및 이에 근거하 여 칸의 구획과 명칭을 정리한 것이다. 건물 배치를 보면 단변 두 칸의 ‘중당(中堂)’(①)이 남북축으로 놓이 고, 이 중당의 남단과 북단에 각기 동·서축의 단칸통 낭무가 연결되었다. 이들 낭무의 양 끝단에 다시 남북 축 건물이 연결되어 옆으로 누운 ‘日’자형 평면을 이루 었다. 서쪽에는 단변 두 칸의 ‘대청’(㉖) 건물이 돌출했 다. 누운 ‘日’자형 평면의 하단 동쪽에는 남북축의 낭 무를 동·서로 평행하게 배치하고, 이 낭무의 양 끝단 을 다시 동서축의 낭무로 연결하여 별도의 ‘口’자형 평 면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하단 동서축의 낭무를 서쪽 으로 4칸 연장하고, 이 낭무의 서단과 대청 건물 사이 에 담을 쌓아 다시 별도의 내정을 형성하였다. 그 결 과 금역당 구가는 4개의 내정과 돌출된 대청이 있는 평면을 갖추게 되었다.

    이렇듯 금역당구가도 는 구가의 평면과 칸 구획을 보여줄뿐더러 각 칸에 글자를 기입하여 용도나 구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하였다. ‘중당’은 내부를 구획 하지 않고 바닥에 마루를 시설한 공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중당 남단의 동쪽 낭무는 2칸을 ‘침(枕)’(③)으 로 2칸을 ‘내방·실’(②)로 표기하였다. ‘침(枕)’은 공간의 구조를 짐작하기 어려우나 ‘베개’를 뜻할뿐더러 ‘침(寢)’ 과 음이 같아 침실로 짐작된다. ‘내방’과 ‘실’은 내밀한 공간으로 여성이나 부부의 전용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 다. 중당의 남변 동쪽 낭무는 외부인의 접근이 통제되 는 사적인 공간이었던 것이다. 반면에 중당 남변의 서 쪽 낭무에는 각 1칸의 ‘장(藏)’, ‘방’, ‘사랑’, ‘책방’(④·⑤· ⑥·⑦)이 있다. 이러한 표기는 이 공간이 남성 가족과 손님을 위한 공간이었음을 알려준다.

    중당의 북쪽 낭무를 보면 동쪽은 단지 ‘협문간육칸 (俠門間六間)’(⑬)이라고만 표기되어 외부로 통하는 협 문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뿐, 구체적인 용도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낭무의 동단에 ‘주(廚, 부엌)’(⑭)가 표 기된, 단변 두 칸의 건물이 연접한 것을 보면 중당의 동쪽은 전체가 여성 위주의 공간으로 설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중당의 서쪽 대면에는 두 칸의 ‘묵실 (墨室)’(⑩)이 있어 중당 서쪽은 남성 위주의 공간으로 설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서쪽의 ‘대청’(㉖) 건 물은 돌출된 평면이나 외부의 용이한 접근성 등으로 미루어 남성 전용의 사교나 의례용 공간이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따라서 중당을 기준으로 동쪽은 여성 중심 의 내밀한 가족 공간으로, 서쪽은 남성 가족 및 손님의 독서나 숙박 공간으로, 대청 건물은 남성의 사교나 의 례 공간으로 설정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중당’은 서 쪽 남성 공간과 동쪽 여성 공간의 점이지대로서 가족· 친족관계에 있는 남녀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금역당구가도 를 통하여 금역당 구가의 칸 구획, 각 칸의 용도, 성별에 따른 공간 설정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일부 건물은 중층구조였던 것도 확 인된다. 하단에 배치된 남북축의 두 낭무에는 ‘각(閣)’ 이 기재되었다. 동쪽 낭무에서 북쪽 첫 칸은 ‘내각(內 閣)’(⑯)으로, 남쪽 세 칸은 ‘동각(東閣)’(⑰)으로 기재하 였다. 서쪽 낭무도 북쪽 세 칸을 ‘내각’(㉑)으로 기재하 였다. 이 ‘각(閣)’은 서쪽으로 연장된 낭무에도 기재되 었다(㉗). 자의를 고려하면 ‘각(閣)’은 공간의 용도보다 는 구조나 품격을 표현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하단 동서축 낭무의 서쪽 두 칸에도 ‘각’을 표기하고 그 하부에 마구간인 ‘구(廐)’를 표기한 것을 볼 수 있다(㉒). 이는 가도의 ‘각(閣)’이 중층 건물의 상 층을 뜻함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 낭무의 동쪽 두 칸 역시 상부가 ‘고방(庫房)’이고 하부가 ‘구(廐)’여서(⑱), 이 부분도 중층이었음을 알려준다. 따라서 하단에 남북 축과 동서축으로 놓인 낭무는 모두가 중층이었음을 알 수 있다.

    2-2.금역당구가도 원본의 작성 시점

    금역당 구가는 상단의 옆으로 누운 ‘日’자형 평면에, 서쪽의 대청과 하단의 중층 낭무가 연결된 형태였다. 배삼익의 부친 배천석이 1558년에 도목촌으로 ‘복거(卜 居)’한 기록이 있거니와 이와 유사한 평면을 지니고 현 존하는 향단이 1543년경 건축으로 전한다는 점에서6) 금역당은 구전대로 1558년 건축일 가능성이 크다. 중층 건물의 배치는 조선전기 주택 건축의 한 특징이라는 점에서도7) 금역당 구가는 조선전기 건축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금역당구가도 가 어느 시점의 모습을 반영하 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초창시의 모습이라면 이는 조 선전기의 구조와 칸의 용도를 알려주는 것이 된다. 반면 에 현재의 모습으로 개축되기 직전의 모습이라면 이로 부터 초창 이후 발생한 변화, 나아가 조선후기에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개축된 이유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런데 구가도에는 ‘주(廚)’와 ‘조(竈)’가 표기되어 있어 이를 통 하여 구가도가 반영하는 시점을 판단할 수 있다.

    ‘조(竈)’는 현재 ‘부엌’이나 ‘부뚜막’ 등으로 해석된다. 구가도에 ‘조(竈)’는 모두 3곳에 표시되었다. 이들 ‘조 (竈)’가 독립된 칸에 표시되었다는 점에서 ‘조(竈)’는 취 사용 부뚜막을 뜻함을 짐작할 수 있다. 더불어 3곳의 ‘조(竈)’가 모두 ‘방(房)’과 연접한 것으로부터 이들 ‘조 (竈)’는 난방을 위한 온돌 시설과 결합되었음도 짐작할 수 있다. 구가도의 주택은 온돌 아궁이에 부뚜막을 설 치하여 취사용으로 사용하던 시기에 그려진 것이다.

    이로부터 구가도의 주택은 초창시의 모습이 아니라 현재의 모습으로 개축되기 직전인 조선후기의 모습이 라고 판단할 수 있다. 조선전기에 상류주택에는 온돌이 보편화되지 않았다. 온돌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급격 히 확산되었다.8) 그러므로 조선전기에는 온돌을 고려 하지 않고 주택의 평면과 입면을 결정할 수 있었다. 반 면에 조선후기에는 아궁이가 취사시설을 겸했으므로 아궁이와 부뚜막이 설치된 공간이 곧 부엌이 되었다. 아궁이의 위치가 부엌의 위치를 결정한 것이다.

    금역당 구가가 가문의 구전대로 1558년 건축이라면 초창시에는 온돌이 없거나 부분적으로만 시설되었을 것이다. 주택의 평면과 입면도 온돌을 고려하지 않고 결정했을 것이다. 금역당 구가가 온돌이 보편화되지 않은 시기에 건축되었다는 점은 구가도에 ‘주(廚)’가 표시되어 있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주(廚)’ 역시 취사 공간, 즉 ‘부엌’을 뜻하는 한자이다. 금역당 구가에서 ‘주(廚)’는 상단의 동쪽 끝에 있으며 6칸에 이르는 넒 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부엌의 위치나 구조가 온돌 시설과 결부하여 결정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금역당을 처음 지었을 때에는 온돌 난방이 보편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금역당구가도 에는 ‘주(廚)’ 외에 총 3곳에 ‘조(竈)’가 표시되었고, 이 중 ‘북조(北竈)’는 두 칸을 차 지하고 있다. 이렇듯 ‘주(廚)’와 ‘조(竈)’가 함께 그려진 금역당구가도 는 본래 부엌으로 설정된 ‘주(廚)’의 취 사 기능이 약화되어 가는 한편, 온돌 시설과 결합된 ‘조(竈)’가 등장하여 취사 공간으로 기능하게 되었음을 알려준다. ‘조(竈)’가 본래부터 독립된 칸에 설정되었다 면 6칸이나 되는 넓은 면적에 별도로 ‘주(廚)’를 설정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구가도의 금역당은 처음 지었을 때의 모습이 아니라 현재의 구조로 변형되기 직전의 모습이라고 판단 할 수 있다. 가문의 구전이 사실이라면 금역당구가도 에 그려진 주택은 18세기 전·중반에 배집(1710~1755)이 대 대적으로 개축하기 직전의 금역당이 될 것이다.

    2-3.금역당 구가의 개축과 현 금역당의 구조

    (1)구가 건물 중 현존하는 부분

    현재 금역당의 평면은 금역당구가도 와 전혀 다르 다. <그림 2>에서 보듯 현재 금역당의 안채는 경북지 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口’자형이며, 안채 서쪽에 별 동의 대청채가 있다.9)

    그런데 현재의 건물 중 상당부분은 금역당 구가의 일 부가 남은 것이다. 구가 건물은 안채에서 몸채와 직교하 는 동·서 익랑 및 별동의 대청채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위 <그림 3>은 금역당 안채의 평면과 칸살을 표시 한 것이다.10) 이 중 상단의 동A·B와 서A·B 칸은 안마 루와 함께 몸채를 구성하는 부분이다. 동C·D·E 칸은 동쪽 익랑 부분이고, 서C·D·E 칸은 서쪽 익랑 부분이 다. 동F와 서F 칸은 각기 동·서 익랑과 남쪽 행랑이 중첩되는 부분이다. 현재는 이 두 칸의 층고가 행랑과 같아 행랑에 포함시킬 수 있다.

    그런데 평면 및 높이가 대칭인 동·서 익랑은 행랑보 다 층고가 높을뿐더러 많은 부분이 중층으로 되어 있 다. <그림 4>에서 보듯 현재 동익랑은 C·D·E칸이 중 층이다. 하부는 부엌이고, 상부에 다락이 있다. 또한, E 와 F칸의 경계를 이루는 중방에는 C·D·E칸과 동일한 높이에서 다락 장선을 끼웠던 장부구멍이 있어 이 역 시 중층이었음이 확인된다.<그림 5, 상>

    이처럼 동익랑에서 현재 중층이거나 과거에 중층이었 음이 확인되는 부분은 금역당구가도 에서 모두 중층을 의미하는, ‘각(閣)’으로 표시된 부분이다. 또한, 구가도에 서 동익랑은 4칸 전체가 ‘각(閣)’이고, 이 중 북쪽 첫 칸 이 ‘내각(內閣)’으로, 남쪽 세 칸이 ‘동각(東閣)’으로 구 분되었다. 이와 같은 칸의 구획은 현 금역당에서도 확 인된다. 동C 칸과 동D 칸의 경계를 이루는 다락 상부 의 보와 하부의 보방향 중방에는 문 혹은 벽선을 설치 했던 홈이 대칭으로 나 있어 동C 칸이 다른 칸들과 분 리되어 있었음을 알려준다.<그림 5, 중·하>

    중층의 흔적은 서익랑에서도 확인된다. 현재 서익랑 은 C칸만 중층이지만, <그림 6>에서 보듯 단층 창고 로 사용하고 있는 서D 칸에도 다락 장선을 걸었던 장 부구멍과 청판을 끼었던 홈이 중방에 남아 있다.

    이처럼 현 금역당의 동·서 익랑은 칸 구획과 중층구 조 면에서 금역당구가도 의 하단부에 배치된 남북축의 동·서 낭무와 일치한다. 특히 동익랑은 동쪽 낭무의 ‘내 각·동각’ 4칸과 완전히 일치한다. 서익랑은 구가도의 ‘내 각삼칸’과 비교하여 현재 두 칸만 중층구조로 확인되지 만 지붕의 높이를 고려하면 역시 구가도와 일치한다고 판단할 수 있다. 현 금역당의 동·서 익랑은 금역당 구 가 하단의 중층 낭무가 남은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현 금역당의 행랑도 구가의 중층 구조가 단 층으로 변형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앞서 동쪽 익랑과 접하는 북쪽 벽의 중방에는 다락 장 선을 설치했던 홈이 익랑의 다락과 같은 수평에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또한, 행랑의 상부 벽면에는 익 랑과 동일한 양식의 고식 붙박이창이 설치되어 있다. <그림 2, 상> 현 금역당의 행랑도 본래 익랑과 동일한 높이였는데 개축하면서 지금처럼 단층 높이로 낮추었음 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동·서 익랑은 평면뿐 아니라 입면까지 금역당 구가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행랑 은 구가의 평면을 유지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익랑과 행랑 외에 별채인 대청채도 구가의 대청 건 물이 일부 변형된 상태로 남은 것이다. 대청채의 평면 구획은 금역당구가도 중의 ‘대청(大廳)’ 건물과 일치 한다. 아래의 <그림 7>에서 보듯 현 대청채는 전면 네 칸 측면 두 칸의 8칸 건물이다.

    그런데 구가도의 대청 건물은 서쪽의 네 칸이 ‘대청’ 이고, 대청과 접한 전후 두 칸이 ‘방’이다. 그리고 방과 연접한 낭무 부분에 각기 한 칸의 ‘당’과 ‘책방’이 전후 로 배치되었다.<그림 1> 구가도의 대청 건물에 낭무 부분을 포함하면 역시 8칸이어서 칸의 수와 구획이 현 재의 대청채와 일치한다.

    지금의 대청채가 금역당 구가의 대청 건물 6칸 및 연접한 낭무 두 칸이 남은 것이라는 점은 대청채의 칸 살에서도 확인된다. 대청채의 측면 2칸은 칸살이 9자로 일정하다. 그런데 정면 네 칸은 서쪽 세 칸이 9자인데 반해 동쪽 끝 칸은 이보다 두 자가 짧은 7자이다. 이렇 듯 동쪽 끝 칸만 칸살이 다른 것은 이 부분의 기능이 나 성격이 다른 부분과 달랐음을 시사한다. 이는 이 부 분이 구가에서 대청 건물과 연접한 낭무의 남쪽 ‘책방’ 과 북쪽 ‘당’이었음을 시사한다.

    현 대청채에 구가의 낭무가 포함되어 있음은 정면 7 자 칸살의 남쪽 칸은 바닥이 온돌이고, 북쪽 칸은 마루 라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조선시기의 주택 관련 기록을 보면 ‘당’은 마루 시설을 전제하는 용어였다고 판단된 다. ‘방’은 폐쇄된 주거용 공간으로, ‘당’은 개방된 공용 공간으로 인식되었음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후기 기 록에서 ‘방’은 으레 온돌이 시설된 공간을 뜻했으며, 바 닥이 마루인 경우 ‘판방(板房; 마루방)’으로 구분해서 불렀다. ‘당’과 ‘방’에 대한 이와 같은 통념은 현재에도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 개축 직전의 모습을 담고 있는 구가도에서 대청과 연접한 낭무 두 칸 중 남쪽 칸은 ‘책방’으로 북 쪽 칸은 ‘당’으로 표기되었다. 이로부터 ‘책방’은 사방이 벽으로 구획된 온돌방이었을 가능성이 크고, ‘당’은 개 방된 마루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구가도의 ‘책 방’과 ‘당’에서 추론한 바닥 구조는 현 대청채의 동단에 남북으로 배치된 두 칸의 바닥 구조와 일치한다. 현재 남쪽 칸은 온돌방이고 북쪽 칸은 마루방이다.<그림 7>

    따라서 현 대청채는 구가도의 6칸 대청 건물 및 ‘책 방’과 ‘당’으로 구성된 낭무 두 칸이 남은 것이라고 판 단할 수 있다. 현 대청채 동단에 남북으로 배열된 두 칸은 금역당 구가에서 대청 건물과 연결된 낭무였다. 금역당 구가에서 대청 건물은 동서와 남북의 칸살이 모두 9자였다. 반면에 이 건물과 연접한 낭무는 동서 (보방향)의 칸살이 7자였다. 이에 도리방향 칸살은 대 청에 맞추어 9자가 된 반면, 보방향은 7자가 되었다. 이 낭무를 포함한 총 8칸이 남아 현재의 대청채를 구 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현 금역당 대청채는 지붕구조만 구가와 달 라졌음을 알 수 있다. ‘대청’이 있는 동쪽은 현재와 같 은 팔작지붕인 반면, 서쪽은 동서축의 5량 맞배지붕과 2칸 낭무를 구성하는 남북축의 3량 맞배지붕이 직교하 는 구조였을 것이다. 이 서쪽 부분을 동쪽과 동일하게 팔작지붕으로 개조하고 이외의 낭무를 철거한 결과 현 재와 같은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또 한, 현 금역당 대청채에서 확인되는 측면 9자의 척도는 금역당 구가뿐 아니라 현 금역당 안채의 몸채 부분 평 면을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준다.

    (2)구가 건물 중 대폭 개축된 부분

    현재의 금역당 건물 중 안채의 익랑과 행랑, 별동인 대청 건물은 구가의 평면을 유지하고 있으며 가구도 상당부분 본래의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구가도 와 평면이 전혀 다른 상단의 몸채에도 구가의 공간 구 획이나 가구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몸채의 칸 구획 및 안마루의 상부 부재에서 확인된다.

    몸채의 안마루 부분은 전면 3칸 측면 2칸이고 상부 구조는 오량가이다. 안마루의 서쪽 두 칸은 통칸이고, 동쪽 한 칸은 후면을 고방으로 구획하였다.<그림 3> 따라서 안마루에는 전·후 평주를 연결하는 통칸 대보가 한 곳에 쓰였고, 중간 기둥 위에서 전후로 결구된 맞보 가 세 곳에 쓰였다. 그런데 전·후 평주 위의 도리가 보 편적인 구조나 법식과 전혀 맞지 않게 결구되었다.

    <그림 8>에서 보듯 대청의 평주 위에는 장혀와 납 도리를 결구하고 그 위에 다시 굴도리를 얹었다. 게다 가 굴도리의 접합부가 기둥과 일치하지 않고 기둥과 기둥의 중간에 위치한다. 최상부의 굴도리는 서까래의 무게를 받는 도리의 역할을 온전히 하지 못하고 있다. 굴도리와 대보의 결구도 부자연스럽다. 대보 머리에는 굴도리를 얹을 수 있도록 치목이 되어 있다. 그러나 하 부에 납도리가 결구되었기 때문에 굴도리는 얹혔어야 할 자리보다 높이 얹혀 있다.

    이처럼 전·후 평주 위의 가구는 보편적인 법식에서 크게 벗어난다. 반면에 중대공과 종대공 위의 부재는 기본적으로 법식에 부합한다. 중대공 위에는 장혀와 굴 도리를 결구했으며, 종대공 위에는 뜬창방과 장혀를 결 구하고 그 위에 굴도리를 얹었다. 부재의 종류나 순서 는 법식에 맞는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굴도리의 접합부 가 대공과 대공 사이에 놓여, 굴도리 하부의 장혀가 실 질적인 도리의 역할을 하고 있다. 대공 위의 결구는 부 재의 종류 면에서는 법식에 부합하지만, 도리 접합부의 위치는 정상이 아니다.

    이로부터 안마루의 상부 가구는 본래의 모습이 아니 라 후대에 크게 변형된 모습임을 알 수 있다. 평주 위 에 처음부터 도리를 이중으로 놓았을 리는 없다. 처음 에는 장혀와 납도리만 결구했다가 개축하면서 굴도리 를 덧얹었을 것이다. 중대공과 종대공의 상부는 부재의 종류나 결구 면에서 평주 위보다 본래의 모습에 가깝 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도리의 접합부가 대공과 어긋 난다는 점에서 이 역시 개축하면서 변형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안마루 상부의 굴도리는 본래 지금의 안마루보다 도리칸의 칸살이 큰 건물에 사용되었던 부 재를 옮겨 재사용한 것이 분명하다. 그 결과 도리의 접 합부가 기둥이나 대공과 어긋나게 된 것이다.

    안마루 상부의 결구를 금역당구가도 와 종합해서 살펴보면 <그림 9>에서 보듯 현 몸채의 평면 구획과 가구가 어떻게 성립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흐린 선으 로 그린 부분이 구가의 철거된 건물이고 기둥 위치가 표시되고 진한 선으로 그린 부분이 현재의 금역당이다. 구가도에 따르면 금역당 구가에는 현재의 몸채 자리에 동서축으로 총 5칸의 단칸통 낭무가 있었다. 이 낭무의 도리칸은 지금의 익랑인 하단 낭무와 연접했으므로 칸 살이 8자가 된다. 반면 보칸은 대청 건물과 접하는 낭 무가 연장된 것이므로 대청의 측면 칸살과 동일하게 9 자가 된다. 주택의 중심에 자리한 ‘중당(中堂)’ 건물의 칸살 역시 대청과의 관계를 고려하면 남북 방향(도리 칸)이 9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동서 방향(보칸)은 현 안마루와 익랑의 8자 칸살을 고려하면 역시 8자였을 것이다. 따라서 측면 2칸의 중당에 걸린 대보의 길이는 16자가 된다. 또한 중당은 동서 2칸 남북 2칸이므로 중 당에는 통칸 대보가 1곳에 설치되고, 벽면의 중간 기둥 에 전후로 결구된 맞보가 2곳에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대보 위의 종보에는 동일한 규격과 형태의 종대공이 각각 설치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중당의 칸살과 부재는 수치나 개 수, 형태의 통일성 면에서 현 금역당의 몸채 부분과 일 치한다. 몸채는 전면이 5칸, 측면이 두 칸이다. 전면의 칸살은 8자로 균일하다. 이 중 동쪽과 서쪽 끝 칸은 보 칸 중간의 기둥에 의거하여 남북으로 방을 구획하였다. 그런데 기둥이 보칸의 중심에 있지 않고 중심에서 1자 북쪽에 있다. 그 결과 측면의 칸살이 남쪽 방(동·서 B 칸)은 9자가 되고, 북쪽 방(동·서 A칸)은 7자가 되었다. 측면 두 칸의 총 길이는 16자로서 전면 칸살 8자의 배 수가 되면서도 9자와 7자로 불균등하게 구획된 것이다.

    이는 현 금역당 몸채에 구가 낭무의 칸 구획이 남아 있음을 알려준다. 몸채의 동 서 끝 칸에서 남쪽 방(동· 서 B칸)의 측면 칸살이 9자인 것은 본래 이 자리에 있 었던 낭무의 보방향 칸살과 일치한다. 위에서 금역당 구가에서 이 부분에 있었던 5칸 낭무는 대청 건물과의 관계 속에서 남북 방향(보칸)이 9자로 설정되었음을 확 인하였다. 또한, 본래 구가 하단의 낭무였던 현 익랑의 동서 방향(도리칸) 칸살이 8자라는 점에서 현 몸채 부 분에 있던 구가의 낭무 5칸 모두 도리칸의 칸살이 8자 였음도 확인하였다. 이러한 칸살로 구획된 5칸의 낭무 를 현재와 같은 평면으로 확장한 결과 중간 기둥이 보 칸의 중심에서 한 자 북쪽에 서게 된 것이다. 9자 간격 으로 서 있는 기둥은 본래 이 자리에 있었던 5칸 낭무 의 전면(남쪽)과 후면(북쪽)의 평주 자리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로부터 몸채 보칸의 전체 길이 16자는 중 당의 단변 길이에 의거하여 결정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위에서 확인했듯 남북 두 칸, 동서 두 칸으로 구 획된 중당의 칸살은 남북 방향이 9자이고 동서 방향이 8자여서 남북 방향이 길었다. 게다가 중당을 포함하는 건물의 남북 방향 칸수가 총 세 칸이고, 구가도에 따 르면 이 중 반 칸만 통로칸이어서 중당의 남북축 길이 는 동서축보다 길었다. 중당은 동서 방향이 16자였음 이 분명하다. 남북 방향 3칸은 칸살이 9자로 동일했다 면 중당의 남북 길이는 통로칸 4.5자를 뺀 22.5자 가 된다. 따라서 중당에 설치된 통칸보의 길이는 16자이 고, 한 칸 도리의 길이는 대략 11.25자 정도였다고 추 측된다.<그림 9>

    그러므로 현 금역당 몸채의 단변(보칸) 길이는 구가 중당의 단변(보칸) 길이에 의거하여 결정되었다고 판 단할 수 있다. 몸채 안마루의 통칸보는 본래 구가의 중당에 설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구가의 남북축 중당 건물을 철거하고 기존의 동서축 낭무를 현 몸채로 확 장하면서 방 부분은 낭무의 기존 구획을 유지하는 한 편, 안마루 부분에는 중당의 부재를 옮겨 사용한 결과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된 것이다.

    중당의 부재를 옮겨 사용한 것은 상부의 종대공에서 도 확인된다. 위의 <그림 10>에서 보듯 현재 안마루 부분에는 총 4개의 종대공이 있다. 3개는 통합된 마루 부분에 있고(① ② ③), 1개는 동쪽 끝 칸의 벽 위에 있다(④). 그런데 통합된 마루 부분에 있는 종대공 3개 의 구조와 형태는 동쪽 끝 칸의 종대공과 전혀 다르 다. 통합된 마루 부분의 종대공은 모두 판대공으로 운 형(雲形)으로 초각한 반면, 동쪽 끝 칸의 종대공은 제 형(梯形) 대공과 초공(草栱)을 결합하여 형태와 구조가 전혀 다르다.

    그런데 통합된 마루부분의 종대공도 양식에 일부 차 이가 있다. 통칸 대보 상부의 종대공은 양면을 동일한 모습으로 초각하였다(①). 반면에 통칸 대보 동·서쪽의 종대공(② ③)은 방 쪽은 초각하지 않고, 마루에 면한 쪽만 초각하였다.11) 그 결과 전면은 중앙의 종대공과 같은 운형이나 배면은 단순한 판대공이다.

    이로부터 기본적으로 양식이 일치하면서 부분적으로 차이가 나는 이들 3개의 종대공은 본래 금역당 구가의 중당에 설치되었던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구가의 중 당에서 이들 종대공은 각기 남·북의 벽면과 중앙의 대 보 상부에 설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남·북 벽면의 종대 공은 배면이 벽속에 묻히므로 밖으로 드러나는 정면만 정교하게 초각한 반면, 대보 위의 종대공은 전체가 노 출되므로 좌우를 동일하게 초각하였다. 이것을 현재의 몸채에 옮겨 사용한 결과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남게 된 것이다. 그리고 구가의 중당은 정면이 두 칸이어서 총 3개의 종대공을 설치했는데 개축한 몸채의 안마루 는 정면이 세 칸이어서 총 4개의 종대공이 필요했으므 로, 중당에 사용했던 운형 판대공 3개 이외에 초공과 결합된 제형대공 1개를 옮겨 설치한 것이다. 이렇듯 현 재의 몸채에 구가 중당에 설치했던 대보와 종대공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법식에 맞지 않는 굴도리 역시 중 당에서 옮겨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굴도리의 접합부가 기둥이나 대공과 어긋나는 것은 중당에 사용했던 도리를 몸채의 정면 칸살에 맞게 치 목하지 않고 얹었기 때문이다. 측면 두 칸의 오량가인 현 대청채에 굴도리가 사용된 것을 고려하면 역시 측 면 두 칸의 오량가로서 주택의 중심부에 있었던 중당 의 도리 역시 굴도리였을 것이다. 그런데 구가 중당의 굴도리는 한 칸의 길이가 대략 11.25자 정도여서 현 몸 채의 정면 칸살인 8자보다 길었다. 이렇듯 현 몸채의 칸살보다 긴 굴도리를 양단의 이음부만 제거하고 얹은 결과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전면과 후면 평주 위의 납도리는 본래 현 몸 채 자리에 있던 구가 낭무의 주심도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구가 낭무의 구조를 간직하고 있는 하단부 익 랑과 행랑의 도리는 모두 납도리이다. 또한, 위에서 확 인한 것처럼 현 몸채의 남쪽 칸(동·서 B칸)의 칸살은 구가 낭무의 칸살과 일치한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현 몸채 전면과 후면 평주 위의 납도리 결구는 구가 낭무의 결구를 유지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남쪽 평주 위의 도리는 본래의 자리이고, 북쪽은 본래의 자 리에서 7자 후방으로 옮겨진 것이다.

    3.금역당의 건축 이념과 개축 요인

    3-1.금역당 구가의 건축 이념

    (1)가례의 의례공간과 그 명칭

    현 금역당의 구조는 개축 전의 구가와 크게 다르면 서도 구가의 공간구획과 구조를 상당부분 간직하고 있 다. 금역당 구가와 현 금역당의 가장 큰 차이는 남북축 의 중당 건물을 철거하고 기존 낭무를 확장하여 동서 축 몸채를 지은 것이다. 따라서 구가를 현재와 같은 모 습으로 개축하게 된 핵심적인 이유는 중당 건물에 있 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금역당 구가처럼 남북축의 건물을 중심부에 배치한 경우는 확인되는 사례가 많지 않다. 기록이나 가도에서 금역당을 포함하여 4건이 확인될 뿐이고, 현존하는 사례 로는 경주의 향단이 있다.12) 금역당 구가와 유사한 주택 은 금역당 구가가 건축된 16세기 중반에도 드물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후기에는 더 이상 건축되 지 않고 기존의 주택도 철거되거나 변형되었다. 그런데 이들 주택의 건축주는 권벌, 이언적, 배삼익 등 영남 지 역의 대표적 성리학자였다. 따라서 금역당 구가 건축의 주된 동인은 실용성보다는 주택과 관련된 성리학적 이 념이었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금역 당 구가가 건축된 16세기 중반 양반층의 성리학 열기, 특히 주희의 가례에 대한 열정을 주목할 수 있다.

    조선전기 성리학자들의 가례에 대한 존숭과 실천 은 사서와 문집 등 각종 기록에서 쉽게 확인된다. 그런 데 가례를 실천하려면 이에 적합한 구조의 주택이 필요했다. 따라서 조선전기 양반 주택의 보편적인 구조 가 가례를 실천하기에 적절치 않은 구조였다면 가 례의 의례공간을 이해하고 이 의례공간을 주택에 도 입하고자 하는 지향이 발생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가 례에는 관례(冠禮)·혼례(婚禮)·상례(喪禮)·제례(祭禮)를 집행하는 공간이 기술되어 있다.13)

    아래의 <표 1>은 가례에서 사당 이외에 의례용 공 간이 적시된 사례를 정리한 것이다. ‘청사(廳事)’, ‘외청 (外廳)’, ‘정침(正寢)’, ‘중당(中堂)’이 확인된다. ‘청사’는 ‘당(堂)’과 더불어 ‘선조(先祖)’를 제사지내는 곳으로 설 정되었다(①). 선조는 시조 이하 고조 이상의 조상을 뜻 하므로14) 대종가에서는 시조가, 소종가에서는 고조가 제 향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초조(初祖; 시조)’ 제사의 보주(補註)에는 “소종 집안에서 사친(四親)[부·조·증조· 고조]의 사당에서 제사할 때 남자는 주인의 오른쪽에 있고, 여자는 주부의 왼쪽에 있으면서 세대가 한 열을 만든다”고 한 뒤에 “대종가에서 시조와 선조를 제사할 때에는 … 여자는 안에 있지 않는다. 사친의 사당[廟]에 대한 제사는 사친의 자손이 모두 세대가 가까운 친속이 어서 남녀가 한 당에 모여도 거리낄 것이 없다. 그러나 시조와 선조를 제사지내면 시조와 선조 이하의 자손은 모두 세대가 멀고 소원하며 또한 사람의 수가 많기 때 문에 여자는 안에서 열을 지을 수 없다”고 하였다.15)

    이로부터 ‘선조’ 제사에서 ‘당(堂)’은 사당이고, ‘청사’ 는 이보다 규모가 큰 공간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시 조’를 제사하는 곳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시조’ 제사에는 여자가 함께 대열을 지을 수 없다고 한 것으 로부터 ‘청사’의 위치는 내실에서 떨어진 곳임을 짐작 할 수 있다.

    혼례에서 확인되는 ‘청사’의 위치도 이와 다르지 않다. 혼례에서는 신랑이 처가의 ‘청사’에 올라 장인에게 의례 를 행한 뒤 중문을 나온 신부를 맞이하여 친가로 돌아 오는 것으로 설정되었다(②). 의례를 행하는 ‘청사’는 중 문 밖, 대문 안에 위치한다. 중문을 경계로 내실과 분리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외청(外廳)’의 입지도 ‘청사’ 와 다르지 않다. ‘외청’은 남성의 ‘관례’를 치르는 곳이고 (③), 혼례에서 남자 손님을 접대하는 곳이다(④). 또한 상례에서 문상객이 호상(護喪)을 만나는 곳이며, 문상을 마치고 나와서 접대를 받는 곳이다. 따라서 ‘외청’은 ‘청 사’와 위치와 용도가 동일한 공간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다음으로 ‘정침’은 주인이 사망하는 장소이다(⑥). 빈 소도 이곳에 설치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사시제 와 녜(禰; 아버지)제, 기일제를 지내는 곳이라는 점에서 (⑦·⑧·⑨) 남녀가 함께 고조 이하의 조상을 제사하는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부터 ‘정침’은 주택의 중 심부에 설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중당’은 여성을 위한 의례공간으로 확인된다. 여성의 성인식[계 례]을 행하는 곳이고(⑩·⑪), 혼례 때에 여자 손님을 접 대하는 곳이다(⑫). 따라서 중당 역시 정침과 더불어 가옥의 깊숙한 곳, 즉 중문 안에 위치함을 알 수 있다.

    (2)조선전기 성리학자의 가례 공간 이해와 주택 건축

    가례에는 예의 집행 공간으로 ‘청사(廳事)’, ‘외청(外 廳)’, ‘정침(正寢)’, ‘중당(中堂)’이 확인된다. 이 중 ‘청사’ 와 ‘외청’은 중문 밖에 위치하며 동일한 공간으로 이해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침’과 ‘중당’의 관계는 분명치 않 다. ‘정침’은 주인이 사망하고 상·제례를 거행하는 공간 이며, ‘중당’은 여성의 성인식과 축하연을 행하는 공간이 다. ‘정침’과 ‘중당’은 주택의 안쪽에 있는 것은 분명하지 만, 정침이 곧 중당인지 혹은 별도의 건물인지는 분명치 않다. 이는 조선전기 성리학자들도 고민했던 문제이다.

    • 문) ‘정침’은 지금의 ‘중당’이고 ‘청사’는 지금의 ‘외청’ 입니까? 답) 지금의 ‘정침’은 동·서헌(東西軒)으로 빈객을 접대하는 곳이지만 옛사람[중국]의 ‘정침’은 모두 앞에 있 었지 동·서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정침’을 ‘전당 (前堂)’이라고 한 것입니다.16)

    • 옛 사람은 ‘정침’이 ‘전당(前堂)’이 된다고 했습니다. 대 개 옛날의 정침은 모두 집의 정남에 있었으므로 사당이 모두 그 동쪽에 있어도 가로막히지 않았습니다.17)

    • 중국의 주택은 모두 정침이 있어서 신주에게 고할 때 ‘내어서 정침으로 간다[出就正寢]’는 표현이 있습니다. 우 리나라 사람은 이미 정침이 없는데도 습관적으로 정침이 라고 칭하니 매우 편치 않습니다. 지금 ‘정당(正堂)’으로 개칭하려 하는데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 정구는 선세로부터 주택이 없어서 조만간 지으려고 하는데 대략 당·침의 제도를 모방하려 합니다.18)

    위 인용문은 이황과 그의 제자가 정침과 중당에 대 해 언급한 것이다. 이황은 ‘정침’과 ‘중당’을 동일시하는 질문에 대하여, ‘정침’은 동·서가 아니라 앞쪽에 있는 것으로서 ‘전당(前堂)’과 같은 것이라고 답하였다(①). 또한, 정침을 동 서쪽이 아니라 정남쪽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②). 정침을 남북축의 건물로 이해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이황의 제자 정구는 조선의 주택에는 정침 이 없는데도 ‘정침’으로 부르는 잘못을 지적하고, 중국 의 제도를 모방하여 주택을 짓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견해의 옳고 그름을 떠나 가례에 설정된 의례공간을 심도 있게 탐색하고 이를 주택 건축에 적용하려고 한 성리학자들의 열의를 느낄 수 있다.

    또한, 당시의 성리학자들은 주희의 연보[實記]에 주 희가 ‘정침’에서 사망했고, 이 정침이 ‘중당’으로도 표현 되었다는 사실을 널리 알고 있었다. 주희의 연보에는 주희가 ‘정침’에서 사망했다는 기록에 이어 ‘중당’으로 옮긴 당일에 사망했다는 주가 달려 있다.19) 따라서 조 선의 성리학자들은 주희의 연보를 통하여 ‘중당’을 곧 정침으로 이해할 가능성이 컸다. 이는 위의 “정침은 지 금의 중당입니까?”라는 질문에서도 확인된다.

    이로부터 이황과 제자의 문답이 이루어진 16세기 중 반에는 가례에 대한 해석에 근거하여 주택을 짓는 사 례가 발생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지어진 주택 에는 가례에 언급된 ‘정침 중당’, ‘외청 청사’ 등에 해 당하는 공간이 설정되었음도 짐작할 수 있다. 금역당 구가도 이에 해당한다. 금역당 구가는 주택의 중심부에 남북축의 ‘중당’ 건물이 놓이고, ‘대청’ 건물이 서쪽에 돌출하였다. 건물의 위치를 보면 ‘대청’은 가례의 ‘청 사’나 ‘외청’과 같은 기능을 할 수 있고, ‘중당’은 ‘정침’ 의 기능을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중당’ 건물은 이황 이 이해한 것처럼 남북축으로 놓였다.

    게다가 현재 금역당에서 불천위로 제향하는 배삼익 은 주자연보(朱子年譜)를 직접 교정하고 개간한 인물 이다. 배삼익은 1566년에 이황에게 기존에 유포된 주 자연보의 오류를 지적하며 다시 간행할 것을 건의하 고 실행하였다.20) 그런데 금역당 구가는 배삼익이 25세 였던 1558년에 건축되었다. 따라서 금역당 구가는 가 례의 의례공간 및 주자연보(朱子年譜)의 ‘정침·중당’ 에 대한 이해에 근거하여 건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금역당 구가는 가례를 실천하려는 의도 에서 건축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금역당 구가의 ‘대 청’과 ‘중당’은 가례를 행하기 위한 공간이었으며, 이 들 건물의 위치와 방위는 가례에 설정된 ‘청사 외청’ 및 ‘정침 중당’과 부합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가례 를 철저하게 실천하고자 한 조선전기 성리학자들의 열 의가 금역당 구가 건축의 핵심적인 요인이 되었던 것 이다. 이러한 요인은 남북축 중당을 배치한 다른 주택 들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3-2.금역당 구가의 개축 원인

    금역당 구가는 남북축의 중당(정침) 건물을 주택의 중앙에 배치한, 옆으로 누운 ‘日’자 형태였다. 그러나 현 금역당의 평면은 ‘口’자 형태이다. 앞에서 확인한 것처 럼 상단의 몸채는 본래 이 자리에 있던 5칸의 낭무를 북쪽으로 확장한 것으로, 상부 가구는 구가의 중당에 있던 부재를 활용하였다. 그런데 금역당과 유사한 구조 의 조선전기 주택들도 조선후기에 개조되거나 철거된 사실이 확인된다. 향단(香壇)은 중당 부분을 온돌방으로 개조하고 방으로 구획되었던 남쪽 낭무를 터서 마루로 개조하여 공간의 구획과 용도가 원형과 크게 달라졌다. 1520년에 권벌이 처음 짓고 그의 아들과 손자가 증축 한, 역시 중앙에 ‘정침’을 둔, 누운 ‘日’자형 주택은 1678 년에 권벌의 6세손 권두인이 철거하였다.21)

    이러한 사례를 보면 금역당 구가처럼 가례의 해석 에 기반하여 건축된 주택들은 조선후기에 철거되거나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변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더 이 상 건축되지 않았음도 알 수 있다. 이는 이들 주택이 주거에 적합하지 않게 여겨졌음을 알려준다. 가례의 의례공간을 철저하게 구현하는 것이 주거의 불편함을 감내할 만큼 의미 있게 받아들여지지는 못한 것이다.

    금역당 구가의 불편함은 동선에서부터 확인된다. 남 녀의 공간이 중당 건물의 좌우에 분리되어 배치됨으로 써 가족 구성원의 교류가 원활치 못하게 되었다. ‘부엌 (廚)’이 주택의 동쪽에 치우쳐 있어 의례공간인 ‘대청’에 이르는 동선이 매우 길뿐더러 음식이나 정보의 전달에 도 불리하다. 또 다른 불리함은 ‘중당’의 남북축 배치로 인한 기후 환경이다. 한국의 기후는 겨울에는 북풍이, 여름에는 남풍이 우세하며, 여름에는 남쪽으로 볕이 들 지 않고, 겨울에는 남쪽 깊숙이 볕이 든다. 이를 고려하 면 북쪽 기단 위에 동서축으로 몸채를 배치하는 것이 통풍과 채광에 유리하다. 그러나 중당을 남북축으로 배 치한 금역당 구가는 통풍과 채광에 매우 불리하다. 금 역당 구가의 기후적 단점은 권두인의 종가신창기 에서 잘 확인된다. 권두인은 금역당 구가와 같은 구조였던 구 종가를 철거하고 “좌·우가 높고 중정이 좁아서 으슥 하니 밝고 상쾌하지가 않았다”, “비워놓고 여러 해 들 어가 살지 않았다”고 철거의 이유를 밝혔다.22)

    그러나 금역당 구가 등의 주택들이 철거 또는 개축된 이유가 단지 이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위에서 거 론한 불편함과 불리함은 초창 때에도 충분히 예상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축의 중당을 배치한 것에서 이들 주택은 이에 기인한 불편함과 불리함을 충 분히 감내할 만한 의미 있는 주택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처음 지을 때에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이후 감내하기 힘든 불편으로 여기게 된 특별한 이유가 발생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필자는 온돌의 보편화가 그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남북축의 중당(정침)을 배치한 주택 중 건축 시기가 확인되는 것은 가장 이른 권두인의 구 종가가 1520년이 고 가장 늦은 금역당 구가가 1558년으로 16세기 전·중 반에 분포되어 있다.23) 이때는 상류주택에 온돌이 보편 화되지 않은 시기였으므로 온돌 시설을 고려하지 않고 주택의 평면과 입면을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금역 당 구가와 같은 주택들은 온돌을 시설하기에 매우 불리 한 구조였다. 온돌은 아궁이와 굴뚝의 위치가 중요하다. 아궁이는 접근하기 쉬운 곳에 있어야 하고, 굴뚝은 외 부에 두어 연기가 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게 해야 한다. 아궁이와 방바닥은 일정한 높이 차를 두어야 한다. 상 단에 몸채를 두고 하단에 익랑과 행랑을 배치한 ‘口’자 형 주택은 초창 때에 온돌이 없었어도 후대에 이와 같 은 조건을 충족하며 온돌을 시설하기에 용이하다. 그러 나 기단 위의 평탄한 대지에 건축한 누운 ‘日’자형 평면 은 아궁이와 구들, 굴뚝을 시설하기 매우 불편할뿐더러 내정에 연기가 차기 쉽다.

    따라서 전면적으로 온돌을 시설하려면 철거하고 새로 짓거나 대대적으로 개축해야 했을 것이다. 게다가 온돌 난방의 보편화는 기존의 부엌 공간에도 변화를 초래했 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금역당구가도 에는 온돌의 보편 화에 따라 기존 구조의 불편함이 부각되고, 부엌의 위치 와 구조가 변한, 개축 직전의 상황이 잘 반영되어 있다.

    2장 1절에서 금역당구가도 에 ‘주(廚)’ 1곳과 ‘조(竈)’ 3곳이 표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에 근거하여 구가도의 평면은 온돌 설치 이전의 취사공간과 온돌 설 치 이후 새롭게 형성된 취사공간이 병존하고 있는 상태 라고 판단하였다. 그런데 구가도를 보면 활용도가 낮아 진 ‘주(廚)’ 외에도 상당한 공간이 방치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주(廚)’와 연접한 동쪽 내정의 북쪽 공간은 단지 ‘협문간육칸(俠門間六間)’이라고만 표시했을 뿐 구 체적인 용도를 기재하지 않았다. 서쪽 낭무가 ‘북조(北 竈)·상방·묵실’ 등으로 표기된 것을 보면, 동쪽 내정에 면한 공간도 본래는 용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 가도를 작성한 시점에는 쓰임새 없이 방치된 상태였음 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온돌 도입 이후에 발생한 변화일 가능성이 크다. 금역당구가도 에 ‘조(竈)’로 표시된 칸은 모두 ‘방(房)’ 과 연접하고 있다. 이는 다른 용도로 사용하던 칸을 아 궁이를 설치하기 위해 ‘조(竈)’ 칸으로 개조했을 가능성 을 시사한다. 또한 북쪽의 ‘조(竈)’가 두 칸인 것을 보면 ‘조(竈)’가 난방과 취사 기능을 겸했음을 짐작할 수 있 다. 이처럼 취사기능이 ‘조(竈)’로 옮겨감에 따라 본래의 부엌인 ‘주(廚)’ 및 이와 관련된 공간의 용도는 점차 약 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금역당구가도 가 작성된 시점에 금역당 구가는 상당한 면적에 온돌을 시설하는 한편, 12칸 이 상의 공간이 쓰임을 잃고 방치된 상태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처럼 연기와 열기의 배출에 불리하고, 취사 기능이 분산되며, 많은 공간이 방치되자 금역당 구가는 초창시부터 지니고 있던 단점까지 부각되면서 주거에 부적절한 주택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금역당 구가를 대대적으로 개축한 주된 이유가 온돌 의 보편화에 있음은 현재 금역당 구가와 유사한 평면을 지니고 있는 향단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11>에 서 보듯 향단의 현재 평면은 금역당 구가의 ‘중당’에 해 당하는 부분이 온돌방이고, 남쪽 낭무가 개방된 마루이 다. 이는 온돌 난방을 위해 개조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향단의 서쪽 내정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비탈져 있다. 따라서 서쪽 내정 쪽에 아궁이를 설치하면 중심 건물, 즉 중당 부분에 온돌을 시설하기 용이하다. 이에 본래 마루였던 중당을 개조하여 서쪽 일부 공간에 아궁이와 부뚜막을 설치하고 실내를 온돌방으로 만들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24)

    그러나 금역당 구가의 대지는 이와 같은 조건이 되지 못했기에 상단의 낭무를 확장하여 몸채로 삼고 여기에 하단의 기존 ‘ㄷ’자형 낭무를 결합시켜 ‘口’자형 안채로 변형하였다. 그러므로 금역당이 현재와 같은 구조로 변 형된 가장 큰 요인은 온돌 난방의 보편화에 있다고 판 단할 수 있다.

    4.결 론

    이제까지 금역당구가도 에 근거하여 구가의 평면을 분석하고 이러한 평면으로 건축하게 된 이유를 분석하 였다. 또한, 금역당 구가를 현재와 같이 ‘口’자형 안채와 별동의 대청채로 개축한 사실과 방식을 확인하고 개축 의 이유를 추정하였다.

    금역당 구가의 상단 평면은 남북축 ‘중당’ 좌우에 각 기 내정이 형성된, 옆으로 누운 ‘日’자형이었다. 내정의 남쪽 낭무는 내방, 사랑 등의 주거 공간으로 구획되었 으며, 북쪽에도 동일한 규모의 낭무가 배치되었다. 동 쪽 끝에는 ‘주(廚)’ 건물이 동쪽 내정에 면해 있었고, 서쪽 끝에는 ‘대청’ 건물이 서쪽 낭무와 연접하며 돌출 하였다. 구가의 하단에는 중층의 낭무를 배치하였다.

    금역당 구가는 가례를 철저히 실천하고자 한 16세 기 성리학자들의 열의를 배경으로 건축되었다. 가례 에는 관·혼·상·제의 의례공간을 갖춘 주택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전기 양반층 주택의 구조는 이와 전 혀 달랐다. 현존하는 조선전기 주택들을 보면 남녀의 공간 구분이 엄격하지 않은 ‘口’자형 평면이 보편적이었 다. 이에 금역당의 건축주는 가례에서 확인되는 ‘청 사·외청’, ‘정침·중당’을 그가 이해한 구조대로 건축하였 다. 그 결과 관례를 행하고, 문상객을 접대하며, 선조(시 조)를 제사하는 ‘대청(청사·외청)’이 바깥쪽으로 돌출하 였다. 계례를 행하고, 주인이 사망하며, 빈소를 차리고, 가까운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중당(정침)’은 주택의 중 앙에 남북축으로 놓였다. 금역당 구가가 건축될 무렵 다른 곳에도 이와 같은 주택들이 건축되었다.

    그런데 금역당 구가는 조선후기에 대대적으로 개축 되어 구가도가 없으면 이전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구조가 크게 바뀌었다. 현재 금역당의 대청채는 구가의 대청 건물이 연접한 낭무 두 칸을 포함한 채 별채로 남은 것이다. 또한 구가 하단의 ‘ㄷ’자형 낭무가 본래의 평면과 입면을 상당부분 유지하며 안채의 익랑 과 행랑으로 남아 있다. 안채 상단에 동서축으로 놓여 있는 전면 5칸 측면 2칸의 몸채는 본래 이 자리에 있 던 5칸의 낭무를 북쪽으로 7자 확장하여 만든 것이다. 몸채의 상부에는 중당에 사용했던 부재를 옮겨 법식에 맞지 않게 결구하였다.

    금역당 구가를 개축하게 된 핵심적 이유는 온돌 난방 의 보편화였다. 금역당 구가를 건축할 1558년에는 상류 주택에 온돌이 보편화되지 않았으므로 온돌을 고려하지 않고 평면과 입면을 설계하였다. 이후 온돌이 보편화되 자 금역당 구가는 초창시부터 지니고 있던 채광과 통풍, 동선 등의 불리함에 더하여 온돌을 설치하기 어렵고, 설 치해도 불편함이 해소되지 않는 단점이 부각되었다. 초 창시의 부엌인 ‘주(廚)’와 온돌 설치 이후의 부엌인 ‘조 (竈)’가 공존하는 금역당구가도 는 온돌이 보편화되면 서도 구가의 평면을 유지하고 있던 마지막 시기를 반영 한다. 금역당의 개축을 전후하여 유사한 구조의 다른 주 택들도 철거되거나 변형되었다.

    금역당 구가는 사상적인 요인을 기반으로 건축되었 다가 온돌난방이라는 실용적인 요인이 작용하여 개축 되었다. 따라서 온돌난방은 조선후기에 상류주택의 평 면과 입면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금역당 구가는 16세기 성리학자의 신념이 주 택 건축에 끼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현재의 금역당은 온돌의 보편화가 조선후기 상류 주택 건축에 끼친 영향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점에서 현 금 역당은 조선시기 상류주택 건축의 산 증인으로서, 문화 재적 가치도 매우 높다고 평가할 수 있다.

    사 사

    필자에게 금역당구가도 의 존재와 가문의 자료 및 구전을 알려준 금역당 종손 배찬일 선생과 금역당의 수리복원을 감독하면서 본고의 작성에 필요한 다양한 정보와 편의를 제공한 김전 소장님께 감사드린다.

    Fig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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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역당구가도 의 칸 구획과 칸의 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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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 금역당의 안채(상)와 대청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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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역당 안채의 칸 구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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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역당 안채 동쪽 익랑부의 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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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역당 안채 동F 칸의 다락 장선 흔적(상) 및 동C와 동D 사이의 칸 구획 흔적(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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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역당 안채 서D 칸의 다락장선 및 청판 설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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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역당 대청채의 칸 구획과 바닥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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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주와 대공 상부의 결구(좌) 및 굴도리 접합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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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역당 구가의 부재 이동과 현 금역당의 평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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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역당 안마루의 종대공(숫자는 <그림 9=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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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단의 현 평면 및 부뚜막의 위치

    Table

    ╚가례sub>╝의 의례 관련 공간과 관계기사

    Footnote

    • 현존하는 조선시기 상류주택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성리학의 영 향을 전제하고 있는 듯 보인다. 성리학의 영향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분화되었음을 밝히는 성과를 올렸지만(김종헌·주남철, ┎한국 전통주 거에 있어서 안채와 사랑채의 분화과정에 대한 연구┛ , 대한건축학회 논문집, 12권, 2호, 1996), 이와 같은 변화에 성리학의 어떠한 요소가 구체적으로 작용했는지는 분석하지 않았다. 주희의 ╚가례╝ 및 조선 시기의 예서(禮書)에 근거하여 조선시기 상류주택을 분석한 연구가 주목되나(홍승재, ┎조선시대 예서에 나타난 건축적 도면의 해석에 관한 연구┛, 건축역사연구, l권, 2호, 1992; 이정미·이재헌, ┎영남지역 전통상류주거건축의 평면특성에 관한 연구 -영남학파의 예학사상을 중심으로-┛ , 대한건축학회논문집(계획계), 19권, 1호, 2003), 조선시 대 예서에 설정된 의례공간에 대한 사료 비판 및 이해가 충분치 못 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다.
    • 본고 3장 참조
    • 금역당은 1973년 8월 31일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 정된 뒤 그해 12월에 국비를 들여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따라 서 평면과 입면, 건축부재 등은 원형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이전하였 다. 다만, 각기 별동인 대청채와 안채, 사당의 상대적 위치까지 원형 을 유지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종손 배찬일은 작고한 부친으로 부터 북쪽 사당이 현 위치보다 더 멀리 있었다고 들었다고 필자에 게 알려 주었다. 이전하기 이전의 후면 사진을 보아도 안채와 대청 채 배면 기둥의 상대적 위치가 지금과 달라 보인다. 따라서 각 건물 간의 상대적인 위치는 원형과 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 ╚臨淵齋集╝ 부록 ┎年譜┛: “(皇明世宗嘉靖)三十七年戊午[先生二十 五歲]春從參判公始卜居于桃木村”
    • ‘口’자형 주택에서는 몸채를 기준으로 ‘익랑’과 ‘행랑’의 정의와 구 분이 명확하다. 그러나 금역당 구가에서는 단변 두 칸의 남북축 중 당 건물 상·하에 단칸통의 홑집이 연장되면서 공간이 형성되는 바, 이 홑집 건물은 ‘익랑’으로도, ‘행랑’으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그런데 ‘낭무(廊廡)’는 고려시기부터 부속건물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된 것이 확인된다. ‘청·당·낭무(廳堂廊廡)’와 같은 표현이 이에 해당한다. 또 한, 익랑의 배치를 뜻하는 “익이낭무(翼以廊廡; 낭무로 곁채를 달았 다)”에서 보듯 낭무는 ‘익랑’이나 ‘행랑’을 포괄하는, 중심건물에 딸 린 부속채의 개념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에 필자는 ‘口’자형 주택인 경우에는 ‘익랑’과 ‘행랑’으로 구분하여 표기하고, 금역당 구가처럼 익랑과 행랑의 구분이 모호한 경우에는 ‘낭무’로 표기하겠다.
    • 향단은 이언적이 경상감사로 있을 때에 지었다는 구전이 있으므로 구전이 사실이라면 경상감사로 임명된 1543년 이후, 의정부우찬성으 로 임명된 1545년 이전의 건축이 된다.
    • 이종서, ┎조선전기의 주거용 층루 건축 전통┛ , 역사민속학, 22호, 2006
    • 이종서, ┎고려~조선전기 상류 주택의 방한설비와 취사도구┛ , 역 사민속학, 24호, 2007
    • 건물이나 공간은 현 금역당 종가에서 사용하는 명칭대로 표기하 였다. 금역당 종가에서는 안채의 마루 공간을 ‘안마루’로, 별동의 마 루를 ‘대청’으로 부른다. 본고에 제시된 주택 사진은 필자가 2016년 6월 11일과 7월 28일에 촬영한 것이다.
    • 본고에서 8척으로 표시한 칸은 243cm 내외로서 영조척을 사용 했음을 알 수 있다. 본고에서는 단위를 ‘자[尺]’로 표시하며 실측치가 아닌 설계 치수를 기입하겠다. 불가피하게 ‘자’로 표시하는 것은 ┎금 역당구가도┛ 의 건물 중 지금은 철거되어 실측할 수 없는 부분과의 관계도 규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 전면과 후면의 양식이 다른 종대공(② ③)은 통칸대보 상부 종 대공의 동쪽에 있는 것(③)을 대표로 제시한 것이다. 서쪽의 종대공 도 이와 형태가 동일하나 현재 배면이 벽에 묻혀 있어 보이지 않는 다. 필자는 수리보수를 위해 벽을 해체한 2016년 4월에 ②번 대공과 ③번 대공의 배면 형태가 일치함을 확인하였다.
    • 이종서, ┎조선전기 ‘향단형(香壇型)’ 주택의 건축과 공간 구획의 특징┛ , 대한건축학회논문집(계획계), 32권, 7호, 2016; 이외에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 있는 의성김씨종택(청계종택)도 남북축의 중당을 배 치한 주택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현재의 평면은 동향(東向)의 ‘口’ 자형 주택이라고 볼 수도 있으므로 초창시의 원형과 후대의 변형을 규명해야 중당 배치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이 가능하다.
    • ╚주자가례╝; 임민혁 옮김, ╚주자가례: 유교공동체를 향한 주희의 설계╝, 예문서원, 1999
    • ╚주자가례╝, 권5 제례 先祖: “繼始祖高祖之宗得祭繼始祖之宗則 自初祖以下繼高祖之宗則自先祖以下”, “程子曰初祖以下高祖以上之 祖也”
    • ╚주자가례╝, 권5 제례 初祖: “在小宗家之祭四親廟則男在主人之 右女在主婦之左世爲一列在大宗家之祭始先祖(중략)而女不在內者 蓋祭四親廟則四親之子孫皆在世近屬親男女會於一堂自不爲嫌若祭 始祖先祖則自始祖先祖以下子孫皆在世遠屬疏又人數衆多故女不得 在內列者”
    • ╚退溪全書╝, 권39 書┎答鄭道可問目┛: “문) 祠堂之制欲依文公家 禮而家禮所載圖今觀之似有未解不知正寢是今之中堂廳事是今之外 廳否답) 祠堂圖多與本文不相應未詳何意但正寢與廳事非係祠堂之 制正寢今之東西軒待賓客之處然古人正寢皆在前而不在東西故曰正 寢前堂也廳事如今大門內小廳所謂斜廊者耳”
    • ╚退溪全書╝, 권27 書┎答鄭子中別紙[庚午(1546)]┛ : “古人謂正寢爲 前堂蓋古之正寢皆在人家正南故祠廟皆在其東而無所礙”
    • ╚退溪全書╝, 권39 書┎答鄭道可問目┛: “中國人家皆有正寢故告請 神主有出就正寢之文我國之人旣無正寢而襲稱正寢頗爲未安今欲改 稱正堂不知可否但逑自先世未有家室早晩營構欲略倣堂寢之制”
    • ╚沙溪全書╝, 권25 家禮輯覽家禮序┎遺命治喪┛: “實記慶元六年 三月甲子以疾終于正寢註前夕癸亥精舍諸生入問疾甲子卽命移寢中 堂(중략)揮婦人無近諸生揖而退良久恬然而逝”
    • ╚臨淵齋集╝, 권5 부록 ┎年譜┛: “丙寅[先生三十三歲](중략)又上書退 溪先生論朱子年譜改刊事(중략)又以年譜印本往復于退溪先生(중략)戊辰 [先生三十五歲]三月上書退溪先生印送朱子年譜”
    • 이종서, 조선전기 ‘향단형(香壇形)’ 주택의 건축과 공간 구획의 특징 , 대한건축학회논문집(계획계), 32권, 7호, 2016; 2장 1절 참조
    • ╚荷塘集╝ 권4 記┎宗家新創記┛: “惟我舊宗家創自先祖沖齋先生 迄今百六十餘年(중략)其制爲日字樣聯兩邊爲樓直跨行廊正寢居中 左右高中庭隘以故幽䆳不明爽歷歲寢遠日就頹圮曠不入處者累年”
    • 이종서, 앞의 논문, 2016
    • 이종서, 앞의 논문, 2016

    Reference

    1. 홍 승재 (1992) ┎조선시대 예서에 나타난 건축적 도면의 해석 에 관한 연구┛ , 건축역사연구, Vol.1 (2)
    2. 김 종헌 , 주 남철 (1996) ┎한국 전통주거에 있어서 안채와 사랑채의 분화과정에 대한 연구┛ , 대한건축학회논문집, Vol.12 (2)
    3. 이 정미 , 이 재헌 (2003) ┎영남지역 전통상류주거건축의 평면특성 에 관한 연구 -영남학파의 예학사상을 중심으로-┛ , 대한 건축학회논문집(계획계), Vol.19 (1)
    4. 이 종서 (2006) ┎조선전기의 주거용 층루 건축 전통┛ , 역사민 속학, Vol.22
    5. 이 종서 (2007) ┎고려∼조선전기 상류 주택의 방한설비와 취 사도구┛ , 역사민속학, Vol.24
    6. 이 종서 (2016) ┎조선전기 ‘향단형(香壇型)’ 주택의 건축과 공간 구획의 특징┛ , 대한건축학회논문집(계획계), Vol.32 (7)
    7. (1999) ╚주자가례╝; 임민혁 옮김, ╚주자가례: 유교공동체를 향한 주희의 설계╝, 예문서원,
    8. ╚沙溪集╝, ╚臨淵齋集╝, ╚退溪集╝, ╚荷塘集╝;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번역원, ┎한 국고전 종합DB┛ (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