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 론
1-1.연구배경 및 목적
조선 건국 후 30여 년이 지나자 한양은 조선의 新都 로 자리 잡게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明과의 관계가 정 리되면서 외교의례가 다양한 시도를 거쳐 정리되었다. 따라서 의례행위를 담을 수 있는 건축공간에 대한 검 토가 요구되었는데, 그 중 明과의 의례행위를 담당하 는 곳이 太平官과 慕華館이다.
태평관과 모화관은 국왕과 신료들이 儀狀을 갖추고 行幸하는 공간이다. 그 공간에서 일어나는 의례행위의 정치적·사회적 실현가치로 볼 때, 도성 안에서 태평관 과 모화관의 위상은 상당히 높았다. 또한 두 건축은 태 조와 태종이 시급하게 고려의 관사를 모방한 건축이었 기 때문에, 세종은 치밀한 연구를 거쳐 두 건축을 개조 하였다. 따라서 태평관과 모화관은 태조·태종대와 분명 히 다른 세종의 건축행위를 알 수 있는 사례이다. 세종 의 건축행위는 다양한 전문가 집단과의 논의를 통해 이상적인 합의점에 도달하였다. 이에 본 연구는 조선 초기 태평관·모화관의 건축과정을 살피고, 세종대왕을 비롯하여 그 役事에 참여한 인물들의 건축행위를 함께 조명하고자 한다.
1-2.연구방법
태평관 및 모화관의 건축적 내용에 대한 연구1)는 현 존 구조물이 없기에 창건초기 건축 상황을 고찰하기 어려운 관계로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따라서 본 연구는 왕조실록, 明使들의 문집, 기록화, 지리지의 내 용을 고찰하였다. 실록은 태평관, 모화관의 건축공사뿐 만 아니라 건축에 관련 인물들과 그들의 건축행위를 전해주고 있다. 따라서 실록의 내용을 중심으로 두 건 축물에서 일어나는 의례행위 및 절차, 공간 사용사례와 건축에 참여한 관련인물의 건축 활동을 분석하였다. 명 사들의 기록은 실제로 두 건축공간에 머물며 명사들이 느낀 소회를 남긴 것이기 때문에 태평관의 내부 의장 과 주변 경관에 대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이외 부족한 부분은 문집, 지리지 및 기록화를 통해 보완하였다.
2.太平館과 慕華館의 건축과정
2-1.태평관의 기능과 의장
(1)기능
태평관은 고려 말 明使를 위한 전용 객관으로 지어졌 다. 처음에는 고려 行征東省의 관서를 개조하였고2) 한양 천도 후에는 다시 개성 태평관을 모방하였다. 즉, 서울에 처음 세워진 태평관은 조선의 표준화된 영접행례가 없 는 상태에서 고려시대 관아의 모습을 따른 것이다.
그런데 ╚宣和奉使高麗圖經╝의 ┎館舍┛편에 의하면 관 사의 격식은 왕의 거처보다 더 화려하고 사치스러웠 다. 이는 태평관이 다른 객관과 달리 왕이 親臨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3) 따라서 왕의 擧動시 보좌하는 신 료들의 규모를 고려할 때, 궁에 비교될 정도로 격이 높은 건축이다. 그러나 명사가 상시 한양에 머무는 것 은 아니기에 평소에는 가례, 책례 등의 왕실행사 장소 로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임란 이후 태평관은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고, 인조 대에 완전히 철거되었다. 철거부재는 홍제원 근처에 새로운 객관을 짓는 데 사용되었다. 홍제원의 객관은 明사신에게 도면을 받아 지었는데, 도성 밖에서 의복 을 갈아입거나 유숙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고 한다.4)
태평관은 숭례문 안 養生坊5)에 위치하였다. ╚세종실 록╝에 의하면, 태평관 정청을 중심으로 동헌과 서헌, 동서낭무, 북루, 관사, 중문, 외문과 홍문이 있었으며, 태평관 북에서 남산 방향으로는 태종대에 박자청이 식 재한 소나무가 있었다. 그중 태평관 북루는 사신 黃儼 의 건의로 지은 것으로, 신덕왕후 강씨의 貞陵정자각 을 헐고 그 부재로 지은 3칸 규모의 누각이다.6) 기존 에 있던 廳舍의 부재로는 동헌과 서헌을 신축하였다. ‘중국 명사의 의견을 따라 북루를 지었다’는 것은 의례 및 공간 활용에 대해 조선이 명의 문헌과 의견을 주시 하면서 개조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태평관 북루에는 황제의 信標인 節을 두는 별도 의 공간도 있었다.7) 태평관 북루는 모화관이 지어지기 전까지 명사들의 객관으로서 사적인 휴식공간이자 공 적인 의례공간을 겸하였다.
(2)등루시를 통해 본 태평관 의장
많은 明사신들은 登樓詩를 지어 태평관 누벽의 그림 과 누에서 보이는 도성 경관을 다음과 같이 극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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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조선에 사신으로 와서 태평관에 묵었는데, 그 관사 뒤에 누각이 있어 전망이 좋았다. (중략) 잠시 틈을 내 어 公堂에서 휴식 취한다. 누각 하나 우뚝 높이 서 있 는데, 그 규모가 자못 장대하다. 기둥에는 오색 꿩 나는 모양 그려져 있고, 난간에는 가시나무 화살이 조각돼 있다. 밤 달빛이 서까래 끝에 가득 비치고, 봄 구름이 붉은 벽에 어른거린다. 상쾌한 바람이 시원하게 통해서 막히지 않고, 첩첩 높은 하늘에 홀로 우뚝 솟아 있다. 황학을 부를 수 있을 것 같고 푸른 이내 당길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중략) 층층 섬돌 밟고 여러 기둥 붙잡 고 올라가, 굽은 난간 의지하여 높은 지붕 굽어보니, 온 나라가 얼음병인양 바라보이고, 구슬 섬 신선나라 여기 인 듯 여겨지네. (중략) 멀리 들린 방문과 대문들 흰 벽 돌 어슷비슷, 구슬 수풀 엇갈렸는데, 만장의 기와에 하 얀 눈 가득 쌓이고, 천 채의 문은 백토가 엉킨 듯하였 다. (중략) 층루의 높음이여, 구조가 정밀하기도 하구나. [倪謙, 세종31년(1449) / 출처: ╚신증동국여지승람╝, 김용국 譯, 고전번역원; ╚사조선록 역주 2╝, 김한규 譯, 소명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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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누에 올라 사면을 바라보니, 일만 경치 한곳에 모였 도다. 왕궁은 울울하고도 빛남이여, 성곽이 저 멀리 에워 쌓도다. (중략) [祁順, 성종7년(1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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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새벽에 홀로 조선루에 오르니 누대 앞 경치 어찌 그 리 유유한가. 손으로 황학을 불러도 오래토록 오지 않고, 여러 층의 처마, 겹겹이 포개진 집에 바람만 솔솔 부누 나. (중략) 악양루 또렷이 갠 날 냇가의 수림, 이 누의 그 림 그대로보다는 못하리. 난간 밖의 저 산은 무한히도 푸른데 흰 구름 들보에 가득 차고, 푸른 소나무 외롭다. (중략) [高潤, 세조3년(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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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화려한 집 층층 누대구조도 깊은데 3천 리 밖 외지에 서 여기 한번 올라 보네. 웃고 말할 때, 난간에 기댄 흥 취 있었지만, 느낀 회포는 임 그리운 마음이니 어이하리. (중략) 흰 구름 땅 위에 가득하고 황학이 나니, 사람은 瑤臺에 있고 자리엔 녹음일세. [陳鑑, 세조3년(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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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날 듯 솟은 누각이 아득하게 창공에 솟았는데, 서쪽 으로 보니 장안과 벌써 통하였다. (중략) 평평하고 가지 친 뽕나무가 갓 녹색 펼치고, 池亭가의 살구나무 벌써 붉은 꽃이 피었네. (중략) 흥이 나서 난간 기대 긴 피리 를 불고, 오래 앉아 처마 둘러보다 짧은 공죽 지팡이 집 는다. (중략) 향기 두른 주렴 장막을 流蘇가 에워싸고, 짙푸른 산 두른 난간 비단 명주 총총하다. (중략) 빛이 나는 전각에 신한을 모셔두고, 기쁨 넘치는 길거리에 채 색 베를 묶어 둔다. [張寧, 세조6년(1424) / 출처: ╚신증동 국여지승람╝, 김용국 譯, 고전번역원; ╚사조선록 역주 2╝, 김한규 譯, 소명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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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동행의 김태복이 나를 이끌어 태평관의 누에 올랐는 데, 누가 높고 서늘한 기운 많아 5월이지만 가을 같네. (중략) 태평관에 이제 와서, 높은 누에 다시 올라 크게 한번 웃어 보노라. [張珹, 세조10년(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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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아로새긴 문지방, 비단 난간에 하늘빛도 깊은데, (중략) [陳嘉猷, 세조5년(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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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태평이라는 객관이 있고(숭례문 안에 있는데, 가운데에 는 전이 있고 앞에는 이중문이 있으며 뒤에는 누각이 있고 동 서에 낭무가 있다. 천사를 대접하는 곳이다) 종고라는 누각 이 있다(성의 서쪽 네거리에 있는데, 매우 높고 크다). 나라 가운데에서 높고도 크고, 도로 주변에서도 높고도 크다. 연희도 하고 쉬기도 하고 초대하기도 하고, 놀기도 한다. 와탑은 8면이 휘장과 병풍으로 둘러싸이고(그 나라 풍속 에 그림을 거는 경우가 적다. 무릇 공관의 사방 벽에는 모두 휘장과 병풍을 펼쳐놓았는데, 그 위에는 산수와 대나무, 돌 등 이 그려져 있거나 초서가 씌어져 있다. 높이는 2~3자고 와탑 도 그러하다) 성긴 주렴은 향내 나는 갈퀴로 반쯤 말아 올린다. 말 타고 나가면 길 양옆에 종자들이 탄 말들이 운다. (중략) 태평관과 모화관 등 두 객관은 그 제도가 모두 궁전과 같고 오로지 천자의 칙서를 받들어 맞기 위 해 설치하였으며, 일이 없을 때에는 왕이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와서 연회를 베풀 때마다 반드시 먼 저 관문 밖의 전각에 있다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꼭 고칠 필요는 없음을 알게 되었다. [출처: 동월, ╚사조선록 역주 3╝, 김한규 譯, 소명출판; ╚국역 조선부╝, 김영국 譯, 심미안]
명사들의 기록 중 태평관 건축의 내용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누가 매우 높아서 누에 오르면, 한 양이 한눈에 보였다. 마치 얼음병을 통해 바라보는 것 처럼 주택의 지붕, 대문, 들어열개문과 태평관 앞의 남 산과 뒤의 궁전, 도성, 북악, 소나무 등의 조망이 뚜렷 하였다. 여러 층의 섬돌과 기둥을 붙잡고 올라가야 하 는 높은 누각이면서도 구조 또한 매우 정밀하였다.
둘째, 단청이 사실적이면서 화려하였다. 기둥에는 날 아가는 꿩을 장엄하게 그렸고, 들보에는 구름을 그렸 다. 난간에는 벽사의 의미를 담은 조각을 하였는데 실 제로 마귀를 쫓아 줄 것처럼 정교하고, 단청과 비단으 로 치장하였다. 그러면서도 기대거나 의지하여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튼튼하였다.
셋째, 북루의 벽에는 매우 사실적인 한 그루의 소나 무 그림이 있었다. 董越의 ╚朝鮮賦╝8)에는 “이 나라 풍 속에 그림을 거는 경우가 적다”고 기록하였는데, 당시 조선은 그림을 거는 것보다 벽에 직접 그림이나 글씨 를 붙이는 付壁畵혹은 付壁書가 더 일반적이었다.
이외에 정전 앞 돌계단에 용머리 모양의 장식이 있 는데, 사신이 용머리의 움푹 파인 부분에 먹물을 담아 글을 쓰거나, 술에 취해 기단에서 떨어지기도 하였다.
넷째, 동월의 ╚조선부╝에는 태평관 내부공간에 대한 묘사가 있다. 높이 2~3자의 와탑과 와탑 주위 8면을 산수, 대나무, 글씨 등이 있는 병풍이 둘러져 있어 태평 관은 입식을 기본으로 설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시 에 태평관의 문 밖에는 임금이 임시로 머무는 전각이 있었고, 입구는 二重門이었다.9) 이중문을 지나면, 가운 데에 殿이 있고 그 뒤로 樓가 있었다. 전의 동서는 낭 무를 배치하였다. 전에는 正廳을 두었는데 전반적으로 두 객관의 제도가 궁전과 같다고 하였다.
다섯째, 陳鑑과 高閏의 등루시에는 태평관의 황학이 언급되었다. 현재 멸종위기 동물인 학은 조선시대 상류 층에서는 애완동물로 기르곤 하였다. 그 사례가 단원 김 홍도의 ┎三公不換圖┛에서 보인다. 그림 속의 학과 사람 은 서로 피하지 않고 함께 생활하고 있다. ┎동궐도┛ 에는 박제한 학의 모습도 보인다. 학은 습지에서 생활하기 때 문에 태평관의 살구나무가 있는 樓亭주위에 학을 키우 거나 박제한 학을 두었을 가능성도 있다. 현재 태평관은 터만 남아 있지만 명사들의 등루시를 통해 세종대 태평 관 북루의 건축과 탁 트인 주변을 짐작할 수 있다.그림 1
2-2.모화관
(1)기능과 구성
모화관은 도성 밖에서 국왕이 직접 사신과 칙서를 맞 이하는 곳으로10) 태종7년(1407) 송도의 延賓館을 참고 하여 세웠다.11) 태종 및 세종실록에 따르면, 모화관에는 경복궁 경회루에 버금가는 큰 연지, 무과시험장이었던 모화루 앞뒤의 마당, 모화루, 홍문, 담장 및 개천이 있 었고 모화관 입구에는 천태종 소속의 초막이 있었다.
모화관 입구에 있던 천태종의 초막은 태종대까지도 세제혜택이 있었는데 각종 행사시 주변정비 및 식전행 사 준비를 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12)
모화관 입구의 영조문은 세종12년 모화루 개축과 함 께 紅門구조로 세워졌다. 그 이전에는 의례에 따라 홍 문의 위치가 변하거나, 행사가 끝나면 철거되는 임시설 치물로 추정된다. 중종대에는 홍살문을 웅장하고 화려 한 층각문이나 중국의 패루처럼 고치려고 하였으나13) 모화관 마당의 활용도 때문에 무산되었다.14)
모화관 전후의 빈 터는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명사가 올 경우에는 각종 연희와 악대가 따르는 행사무대가 되 었고, 평시에는 무과시험이나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었다.
모화루 남쪽에는 태종8년(1408) 박자청과 홍리가 조 성한 연지가 있었다. 실록 기사에 따르면 못에서 모화 루까지 150보, 길이 380척, 넓이 300척, 깊이 2~3장이 다. 특히 모화루 연못 가운데에는 穴柱를 세우고 連桶 을 묻어, 가뭄과 홍수를 방지하는 수리시설까지 구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목종의 원찰이었던 崇敎寺의 연 을 모화루 남지로 옮겨 심어 연꽃 구경하는 사람들이 붐볐으며, 세종대는 버드나무를 심었다.15)
(2)특별관리 대상 건축
모화관은 근정전 및 경회루와 함께 주요 중층건축으로 분류되는 특별관리 대상이자 최고의 수장을 들인 건축이 었다. 세종은 화재 발생시 도성 내 중층 건축에 대한 대 책을 지시하면서16) 도성 밖 모화관을 포함시켰다.17) 세 종7년에는 명 사신이 모화루에 올라 활을 쏘겠다고 하 자 대신들이 모두 화를 내며 반대한 일이 있었다. 모화 루는 ‘임금’이 사신을 접대하는 곳이기 때문에 주인인 ‘임금’ 없이 사신 혼자 공간을 사용한다는 것이 불가하 기 때문이다. 이는 모화루의 공간 사용 주체가 임금이 며, 다시 말해 모화루는 당시 궁궐처럼 왕과 세자의 전 용 공간에 맞게 건축의장을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18)
예를 들어, 모화루의 문종이와 수장은 上品擣鍊紙를 사용하였다. 도련지는 마른 종이 사이에 젖은 종이를 끼워 다듬잇돌로 다듬어 네 귀퉁이를 가지런히 자른 종 이인데, 최상품의 경우 임금이 명령을 내리는 문서에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상품의 도련지를 모화루 공사에 사용한 것이다. 건축공사에서 도련지를 사용하 는 예는 도배지나 문종이 정도이며, 태평관에도 도배지 는 초지를 사용하고 창문 종이만 하품의 도련지를 사용 하였다.19) 이렇듯 최고급 수장을 사용한 기록을 통해 모화관이 특별히 관리되는 건축이었음을 알 수 있다.
(3)명사를 맞이하는 장소로서의 모화관
모화관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명사의 진영을 맞이하 고 祗送하는 것이다. 백성들은 명사의 방문시마다 모 화관에서 경복궁에 이르기까지 대문마다 결채를 하여 환영의 의지를 보였다. 또한, 왕이 직접 거둥하는 장소 이며 백성들에게 구경거리가 많은 번화한 곳으로 도시 적 위상이 높았다고 추정된다.
현재 세종시대 모화관의 공간구성을 파악하기 어려 우나, 세종대 정리된 武科殿試儀와 迎接儀注그리고 조 선후기의 기록화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첫째, 세종12년 모화루 공사 후에는 모화루를 모화 관으로 명명하면서 무과시험장으로 삼고 무과의 식년 시, 증광시, 최시를 이곳에서 보고 武二所館이라고 하 였다.20) 모화루에서 시행한 무과시험은 騎射, 擊毬, 步 射가 있다. 때로는 왕이 직접 經書와 武經을 講하기도 하였다. 세종11년 만들어진 무과전시의에 의하면 보사 의 경우 좌우 25보씩 3개의 과녁을 두고 과녁 사이의 거리는 50보로 정하였다. 세종16년에 모화루에서 시행 한 무과에서는 보과 180보를 시행하였는데, 이것은 중 후에 해당하였다.그림 2
둘째, 세종대 처음 설치된 영접의주에 따르면, 명 사신 을 맞이하기 위해 영접도감을 설치하고 의례공간으로서 모화루와 경복궁을 설정하고 있다. 명사가 모화관에 도 착하기 하루 전날, 모화관 서북쪽에 帳殿을 세우고, 장전 앞에는 오색 비단으로 꾸민 홍문을 세운다. 龍亭과 褥位 는 정전 한가운데에, 향정은 그 남쪽에 둔다. 上王과 王 의 자리는 장전 서쪽 길가에 동향하여 배설하고 문무 군 신들은 장전 남쪽에 위치하되 문관은 동쪽, 무관은 서쪽 에 섰다. 金鼓, 儀仗, 鼓樂은 모두 모화루 앞에 두었다.
명사가 도착하는 날이 되면, 왕과 군신들은 모화루로 나 가고 사신이 장전 앞에서 말에 내리면 왕과 군신이 사신 을 영접한다. 이때 사신은 말을 타고 홍문을 통과한다.21)그림 3
마지막으로 기록화의 경우, 중종 32년과 34년 두 번 제작되었으나22)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조대의 청계천 준천 후 그 전말을 그림으로 남긴 ┎慕華館親臨試劑圖┛ 가 있어 모화관 앞마당의 사용 모습과 영은문, 연지 등 주변 경관 상황을 알 수 있다.그림 4
물론 이 두 기록화는 18세기 모화관을 묘사하고 있지 만, 모화관의 입지와 기능은 15세기와 큰 차이가 없기 때 문에 세종대 모화관의 모습을 유추하는 데 도움이 된다.
(4)태평관과의 차이
모화관이 태평관과 뚜렷이 구분되는 것은 태평관과 달리 유숙의 기능이 없는 점이다. 그 외에 모화관도 태평관처럼 명사가 머무르지 않는 기간에는 왕실과 각 관청 소속 衙門에 의해 다양한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國葬시에는 노제를 지내고, 국왕이 개인별장으로도 사 용하였다.23) 국가 장의는 국가의 최대 이벤트로 백성 들이 연도에 달려 나와 실제 볼 수 있는 의식이다. 이 는 모화관 부근이 좋은 경관과 넒은 공터가 있었기 때 문이다. 특히 모화루 앞의 연지는 관과 백성들이 蜥蜴 祈雨祭를 올리는 곳으로 국가의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백성들이 모여 구심점을 이루는 곳이다.24)
모화관은 모악산과 평지가 만나는 곳에 입지하여 국 가 의례에 사용할 수 있는 좋은 잔디가 많아 莎草로 사용하였다.25) 뿐만 아니라 백성들과 관리들이 공공연 히 돌을 채취하는 등, 돌의 산지로도 유명한 곳이었 다.26) 이는 태평관이 철저하게 왕실과 관에서만 사용하 였던 것과 구분되는 점이다. 여기에는 모화관이 도성 밖에 위치하는 점과 넓은 마당 및 좋은 경치로 인해 일반 백성들의 접근이 훨씬 용이하였기 때문이다.
태평관은 명사들의 연회 장소였기 때문에 正樂과 좀 더 정제된 연희가 있었지만, 모화관에서 행한 연희는 鄕 樂으로 조선의 특색이 잘 드러났다. 이러한 부분들은 같 은 외교용 공간이라도 모화관이 태평관과 다른 부분이 며, 그만큼 도시적 위상이 큰 공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3.건축에 관여한 인물들
3-1.태종 이방원(李芳遠)
(1)태평관 경영
태평관은 남산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평탄치 않은 서고동저 지형이었고, 땅도 협소하였다. 개국당시는 태 평관에서 명사에게 행하는 禮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 기 때문에 官舍와 客官의 역할이 강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태종은 세종1년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터를 새로 마련하여 이전하려 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은 민가 철거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가지 민원과 외국 사 신이 머무는 곳이 대궐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반대 하였다. 결국 태종은 태조가 세우신 터를 버릴 수 없 고, 민력동원의 어려움을 이유로 공사를 무산시켰다.27) 태종대 태평관은 오직 객관의 역할만 있었다. 고려의 관아를 모방하였기 때문에 왕실에서 사용할 다른 용도 는 생각할 수 없었고, 유교적 외교행례를 행하는 데 있 어 매우 부족한 공간이었다. 따라서 태종은 개경 환도 시절에는 명사의 접대를 위한 연회장소로 태조의 잠저 였던 敬德宮내 無逸殿이나, 혹은 대신들의 제택을 사 용하였다. 서울의 태평관도 개경의 태평관 제도를 따랐 기 때문에 태종은 태평관을 옮겨 크게 지으려 하였고, 이러한 태평관 이전 논의는 세종대에도 계속되었다.
(2)모화루 건설과 운영
태종은 태평관 이전이 불가함을 인지하고 모화관을 세 워 객관과 의례 공간으로 역할을 나누었다.28) 모화관 건 설시에는, 한양 재천도와 함께 박자청을 보내 모화루를 우선 짓게 할 정도로 모화루 건축에 관심을 기울였다.
태종은 모화루를 짓기 이전부터 이 터에 관심이 많 았다. 반송방이라 불리던 모화루 일대는 도성의 밖이 지만, 사신의 왕래와 전국에서 모인 물자가 하역되어 도성으로 유입되는 통로였기 때문에 정치적·경제적으 로 중요한 곳이었다. 태종은 이곳을 정식으로 확장하 여 명사접대기구를 세운 것이다. 태종은 모화루 운영 에도 많은 정성을 쏟았다. 태종은 모화루 연지가 완성 되자 연꽃을 옮겨 심고 빈 터에 밤나무를 심었다.29) 모화루 연지의 물고기는 쌀로 기를 정도였다.
태종은 유숙, 피서, 수박희(手拍戲) 관람 등 모화루를 왕의 유희공간으로도 활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실제 모 화루에서 머물며 정사를 보거나, 도성으로 들어오는 태 조의 진영을 잠시 봉영하여 쉬는 곳으로도 삼았다. 즉, 태종대 모화루 공간은 궁궐 내 왕의 집무실 혹은 眞殿 의 역할을 겸하였고, 도성 밖 서쪽에서 성내로 진입하 기 전 예를 정비하는 완충 공간 등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하였다.
태종은 모화루를 창건하고 그에 따른 입지 선정부터 주변정비까지 감역관 박자청과 함께 완성하였다. 그러 나 그 규모가 크고 주변 정비를 포함하여 여러 번 공 사가 반복되자 박자청에 대한 三司의 탄핵요구가 여러 번 있었다.30)
3-2.박자청(朴子靑)31)
김사행과 박자청은 각각 태조와 태종대의 대표적인 감역관이다. 박자청은 태조3년 繕工少監에 배치되어 감 역활동을 시작하였고, 왕자의 난으로 김사행이 숙청되 자 그의 뒤를 이어 태종대에 한양과 개경 공사의 대부 분을 담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공역을 총괄하는 공조 판서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박자청은 출신배경 때문에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여러 번 모함을 받았다. 모화루 건설 중에만 공식적으로 3번이 나 탄핵 받는데, 이때 탄핵의 내용을 통해 박자청의 모 화루 건축내용을 유추할 수 있다.
첫 번째 탄핵은 태종8년 5월 모화루 연지에서 물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사헌부의 계획된 수사였기에, 오히려 탄핵을 올린 사헌부 관원이 파직되 었고,32) 같은 달 南池가 완공되자 태종은 부역자들에게 까지 상으로 쌀 한 섬씩을 내렸다.
두 번째 탄핵은 태종11년 10월, 사간원에서 급하지 않은 공사를 무리하게 하여, 백성을 괴롭힌다는 이유로 박자청의 파면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자신이 명 한 일이라며 재론하지 못하게 하였다.33)
세 번째 탄핵은 세종1년 5월, 臺諫이 함께하였는데, 모화루와 시중행랑이 기울어졌으니 박자청에게 죄를 주 라 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아예 반응도 하지 않았다.34)
이상의 내용을 보면, 모화루 연지 공사는 대단히 어 려운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수맥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아 난공사가 여러 번 거듭되었다.
박자청이 지은 모화루의 모습은 경회루와 흡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태종은 신하들에게 경회루의 용도는 모화루와 같이35) 왕 개인을 위한 곳이 아니라 사신접 대를 위함이라고 하였다. 여기에, 연지에 접하여 지은 대규모 누각 건축이라는 점, 같은 건축가 박자청이 건 축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두 건축이 유사한 형태를 지녔을 가능성을 충분히 유추해 낼 수 있다.
박자청은 세종1년 태평관 御室공사도 감역하였다. 당 시 박자청은 탄핵을 받은 상태였으나 상왕 태종은 태평 관 어실 공사 제조로 박자청을 임명하고 군인 200명을 주었다. 그러나 당시 태평관 어실 공사는 보만 고치라는 태종의 명을 넘어서 세종의 뜻에 따라 공사를 확장하여 문제가 있었다. 병조와 승정원에 품의하는 절차를 제대 로 밟지 않은 것이다. 이때에도 태종은 대간들 모르게 자신이 처리하겠다며, 물량조달을 맡은 송남직36)만 견책 하고 공사를 계속 진행하게 하였다. 이렇듯 박자청은 태 종의 든든한 신임을 바탕으로 모화관과 태평관 건축을 완성할 수 있었다. 박자청은 모화관의 입지선정, 건축기 획, 공사시행 등의 건축공사 및 연지 건설 등의 조경 및 토목에 이르기까지 모화루의 구체적인 틀을 갖추고 주변을 정비하였다. 또한, 고려의 관청을 따라 만든 태 평관을 조선의 상황에 맞게 개선하였다.
3-3.홍리(洪理)
(1)홍리의 생애
홍리는 徐仁道37), 李命敏38)과 함께 세종대의 대표적 인 전문 감역관이다. 그러나 홍리의 출신과 생몰에 대 하여는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세종21년(1439)에 70이 넘어 常參을 면하였다는 기사로 보아 1370년 이전에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홍리는 태종8년(1408) 처음 실록에 등장한다. 齊陵의 선공소감으로 석물공사를 마치고 박자청과 함께 말 1 필을 포상 받았다. 그리고 2달 후, 박자청과 함께 모화 루 남지 공사 때문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지만, 태종의 적극적인 보호 아래 끝까지 일하였다.
태종17년에는 태종의 명으로 서북면 기근을 진휼하고 돌아왔다. 태종은 홍리를 파견하기 이전에 議政府의 관 리들을 파견하여 가뭄과 기근의 형세를 살피게 하였으 나, 큰 어려움이 없는 것으로 보고받았다. 하지만 실상 은 기근이 심하여 백성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고 초옥이 마른 상황이었다. 이에 태종은 전일에 보낸 사람들이 모두 거짓보고를 했다며 홍리를 파견한 것이다. 이는 홍리에 대한 태종의 신임이 매우 두터웠음을 뜻한다.
홍리는 모화루 창건역사부터 세종15년까지 모화관 및 태평관 役事의 감역관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중추원부 사 및 중추원사로서 명사를 접대하고 사은사로 직접 명 에 오가며 외교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는 홍리가 건축 의 실무 지식만이 아니라 건축공간에서 행하는 의례 전 반과 그 행위가치를 모두 숙지하였음을 의미한다.
외교업무까지 성공적으로 수행한 홍리는 더욱 세종의 신임을 얻어,39) 세종이 독단으로 진행한 흥천사 사리전 각 공사의 제조를 맡았다.40) 흥천사 사리전각은 조선의 창건주인 태조의 원찰로 그 의미가 크며, 김사행이 터 를 닦고 박자청에 의해 1차 완공된 것이다. 목구조의 속틀과 석구조의 겉틀로 이루어진 유례가 없는 이중구 조의 건축으로 세종17년 완전 해체하여 크게 개축하였 는데, 당시 선공제조가 홍리였다.41)
(2)세종시대 감역관 홍리
태종이 살아 있던 세종 집권초기까지 김사행, 박자청 의 역할은 건축의 기획, 구조, 시공, 감리에 이르기까지 독보적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건축을 감역관에게만 맡 기지 않았다. 공간을 규정할 때,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 들과 함께 논의하여 결정하였다.42) 모화관, 태평관 같 은 예제건축은 예제를 다루는 유학 관료와 토의하고, 중국 및 고려의 사례를 면밀히 검토하며, 우리 실정에 맞게 조선식 行禮를 만들어 나갔다. 그 과정에서 건축 을 책임지는 감역관도 참여하여, 건축 실현여부를 함께 검토하였다.43) 게다가 세종은 시공의 세밀한 부분까지 관여하여 자재선택과 구조변경을 직접 지시하기도 했 다. 따라서 세종시대의 건축 감역관은 현장 운영능력 뿐만 아니라 공간에서 행할 예제에 대한 이해와 예제 를 실행할 이용자와의 소통이 요구되었다. 달리 말하면 더 이상 건축 감역관 개인의 뛰어난 능력에 의존하지 않게 된 것이다. 구조와 의장에 있어서도 내부 공간사 용에 대하여 명확한 설명이 제시되어야 했다. 이러한 점은 세종대 활동한 홍리와 이명민의 사례가 김사행 및 박자청과 다른 경우라고 사료된다. 세종은 창덕궁 인정문 외행랑과 도성건설의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박 자청만 파직하고 홍리는 그대로 두어 상참의 나이까지 일하게 하였다. 물론 上王의 신하였던 박자청이 부담스 러웠던 면도 있었겠지만, 세종은 박자청도 김사행처럼 고려왕조부터 활동하여 왔고, 독보적이지만 독단적이었 던 박자청의 업무스타일이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 이다.44) 게다가 세종은 이미 세워진 건축의 오류를 보 완하기 위해 대신들과 토론하고 검증하는 과정을 반복 했는데, 자신이 세운 건축을 자신이 직접 고쳐야 했던 박자청보다는 새로운 감역관 홍리가 더 어울린다고 여 겼을 것이다.표 1
3-4.세종
그동안 건축에 있어 세종의 역할은 한글, 음악, 과학 등 다른 분야에 비해 주목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세종 은 새로운 공간과 기존공간의 개조 필요성이 대두되면, 대신들과의 논의과정을 통해 새로운 공간을 창출해 나 갔다. 그 어느 시대보다 王이 주도하는 논의가 활발하 였다. 세종은 하나의 건축공간을 구상할 때에도 이 건 축이 왜, 어떻게, 얼마나 필요한가를 본인이 먼저 고민 하고 의견을 제시했기 때문에, 토론을 통해 서로 이질 적인 집단들을 이끌며 과학과 문화 전 영역에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이는 세종 자신이 각 분야의 전문가만 큼 지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태평관과 모화관 공사는 건축에 대한 세종의 기획의 도가 잘 나타나는 사례이다. 흠경각이나 보루각처럼 기 존에 전혀 없던 건물을 조성할 때는 당연히 세종의 건 축능력이 유감없이 나타난다. 그러나 기존에 있던 건축 공간을 守成의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여 고쳐나가는 과 정에서 드러나는 세종의 건축행위 또한 이전시대와 다 른 차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1)태평관 이건 및 확장논의
실록에는 세종1년에 있었던 상왕 주도의 태평관 이전 논의에 대해 실록에서는 세종의 의견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親政이후 태평관의 증축과 이건 논의과정을 보 면 태평관 확장에 대한 세종의 강한 의지를 알 수 있다.
첫째, 세종1년 선공제조 박자청이 태평관 어실 공사 를 시작한지 한 달 만에 宋南直에게 견책을 내렸다. 상 왕은 어실의 보만 수리하라고 하였는데, 박자청과 송남 직이 세종의 명이라는 목수 오덕해의 말을 듣고 병조와 승정원에 보고 없이 공사의 범위를 확대한 것이다.45) 당시 상왕이 모든 실권을 갖고 있었던 세종 집권초기 상황과 송남직만이 견책된 상황을 놓고 볼 때, 태평관 확장 의견은 세종의 기획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세종8년, 세종은 직접 태평관 확장공사를 주도 하였으나 이미 공사가 진행 중인 곳이 많아 이루지 못 하였다. 세종은 중국 사신 두어 명이 오면 태평관이 협 소하여 연회를 베풀고 악현을 배설하기 부족하니 넓게 새로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태평관이 협소한 것은 박자청의 독단 때문이며, 태종 또한 태평관을 확 대하려 하였다고 대신들을 설득하였다.46) 분명 세종1년 공사에서 박자청은 세종의 명으로 전달받은 대로 공사 를 하였다가 태종의 오해를 받았었다. 당시 태종이 박 자청을 처벌하지 않은 것은 이 일이 세종에 의해 시작 된 것이며, 세종이 미리 태종에게 의견을 구하지 않았 기 때문인데 이를 박자청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물 론 태종도 태평관 확장 의지가 있었지만, 모화관 건설 이후로는 보수에만 힘썼다.
마지막으로 세종11년, 태평관 이건을 다시 시도하였 다. 세종은 태평관 개수공사가 끝나기 전에 명사가 도 착할 것을 우려하여 새로운 터에 신축하는 방안을 제 시하기도 하고, 저자를 옮겨서라도 크게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공사제조 안순의 의견에 따라 현재의 터 에 그대로 고쳐지었다. 그 과정에서 明使를 대신과 종 친의 사가 및 흥천사에 나누어 머물게 해서라도 이번 기회에 크게 지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세종이 태평관 건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의례행위 와 공간의 대응이었다. 실제로 의례의 내용도 상황에 따라 달라서, 그에 따른 지속적인 공간 보수를 염두하 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기존의 태평관의 규모가 작다 고 계속 언급하는 데서 알 수 있다. 태평관을 단순한 객관으로 한정한다면 굳이 확대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 나 태평관에서 행하는 각종 연회가 법식화하면서, 규정 대로 예를 행할 수 있는 인력과 업무공간을 산정해 보 면, 고려 관사를 모방한 당시의 태평관은 어울리지 않 았다.47) 저자를 옮겨서라도 태평관을 확장하겠다는 세 종의 뜻은 대신들의 반대로 좌절되었지만, 기획에 해당 하는 대지선정과 확대의지를 통해 세종이 태평관의 공 간사용과 규모산정 등 건축기획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 였음을 알 수 있다.
세종대는 외교행례에 대한 영접도감이 설치되고, 各 司별로 준비해야 할 품목과 업무가 상세히 분장됨에 따라 각사들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여 검토하고 공간을 확보해나갔다. 따라서 태평관 증축과 공사가 계속 요구 되었으며, 세종은 이에 대해 신료들보다 적극적으로 나 서 대안을 제시하고 공사를 독려하였다.
(2)규모변경
모화관 공사를 진행하던 세종12년, 세종은 모화루 공 사현장을 거둥하였다. 幄次에서 감역관들의 공을 치하 하며 잔치를 베풀고, 工匠과 군인들에게도 술을 내렸 다. 마지막으로 偉事들의 활쏘기를 시험하던 세종은 다 시 현장을 돌아본 후 재공사를 지시하였다.48) 규모가 낮고 어둡다며 重屋으로 개조할 것을 명한 것이다.
건축규모와 구조는 건축기획의 초기단계에서 결정되 며, 세종의 업무스타일상 여러 번의 토의를 거쳐 결정 된 사항을 건축에 옮겼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즉시 시정명령을 내린 것은 실록에서 전하듯 이 현장거둥이 노역자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자리 이외 에, 설계의 의도대로 건축이 실현되었는지 확인하려는 목적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동안 도면으로만 상상했 던 모화관을 실견하고, 직접 내부에 들어가 200보의 활 쏘기와 연회를 행하면서, 안에서 밖의 상황을 파악하기 에 모화관이 낮고 어둡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세종이 구조변경을 명한지 석 달 후, 홍수로 개천의 둑이 무너졌다. 공사가 지연되면서 애초에 정했던 공기 를 맞추지 못하고, 중층으로 건물을 높이면서 주변 담 장, 문과 행랑 등 많은 부분의 공사 변경이 있었기 때 문이다. 결국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미리 제도를 맞추 지 못하고 규모를 잘못 規畫한 안순, 홍리, 윤린, 오해 덕의 처벌요청이 있었으나,49) 세종은 공사 진행의 어려 움을 이해하고 처벌하지 않았다. 대신에 공사를 견고히 하지 못하고 빨리 마치려고만 하였던 개천 감역 관련 자를 처벌하였다.
세종14년 세종은 재차 태평관 개조를 계획하고 승군 천여 명을 동원하여 이듬해 실행하였다. 대청이 비좁아 덥고 연회에 지장이 있다는 이유이다. 이는 세종이 각 건축의 정확한 용도와 예제에 따른 공간 사용의 방법 까지 정확하게 숙지하였기 때문에, 현장에서 바로 판비 하여 건물의 규모변경까지 지시하고 그 내용을 바로 설득시킬 수 있을 정도로 건축에 대한 이해가 깊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4.결 론
본 연구는 조선 개국부터 한 세기 동안 일어난 태평 관 및 모화관의 건축과 그 과정에 참여한 인물들의 건 축행위를 고찰한 것으로 그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양이 新都로 자리 잡고 대명의리가 國是로 결 정되면서 명과의 외교의례도 정리되었다. 명과의 외교행 례는 조선 국왕이 의장을 갖추고 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외교행례가 이루어지는 태평관과 모화관은 백성들의 참 여와 군집을 유도하고, 새로 개창한 조선의 정당성과 대 외적 위상을 백성과 신료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었다. 조선은 유교적 예제를 행함에 합당한 공간이 요구되었 고, 그 결과로 태평관 및 모화관을 구현하였다.
둘째, 태종은 모화루를 창건하여 객관인 태평관과 그 외의 의례를 분담하였다. 또한, 왕실의 각종 행사에서 모화루를 적극 활용하여 도성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禮를 정비하는 완충공간으로도 활용하였다. 계속 되는 모화루 공사에 대한 반대가 컸지만, 태종은 본인 의 의지대로 모화루와 그 주변을 정비하고 왕실사용에 맞는 의장을 갖추었다.
셋째, 박자청은 태종의 명으로 모화루를 창건하였고, 세종대에 태평관 공사에 참여하였다. 그 과정에서 여러 번 탄핵을 받았지만, 태종의 비호로 끝까지 공사를 완 수할 수 있었다. 박자청은 모화루 창건과 입지선정, 건 축기획, 공사시행 등의 건축공사 전반과 소나무 식재, 연지 건설 등 오늘날 조경 및 토목에 이르기까지 모화 루의 틀을 만드는 역할을 하였다.
넷째, 홍리는 모화관의 창건공사부터 태평관 및 모화 관 증축까지 감역하였다. 세종시대의 제조는 이전시대 의 김사행과 박자청처럼 개인적인 역량에 의지하여 일 을 처리하기보다는 세종과 대신들의 예제 검토사항을 현장에서 실현하는 역할이었다. 그 과정에서 홍리는 세 종의 신임을 얻어 70의 나이까지 일할 수 있었다. 따라 서 홍리는 태종과 박자청이 구현한 태평관 및 모화관 의 틀을 유지하면서 유교행례가 가능한 공간으로 수정, 보완함으로써 두 건축의 완성도를 높였다.
다섯째, 세종은 백성을 위한 문물을 창제하고, 능력 에 따른 인재를 발탁하여 국가를 운영한 성공한 지도 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태평관과 모화관의 건축과정 에서 세종의 역할은 건축의 사용목적과 용도를 지시하 는 통치행위를 넘어, 건축전문가에 준하는 건축 행위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세종은 대지 및 자재선정, 규모 및 구조변경의 명확한 지시, 행위에 대응하는 공간 구 현, 서로 이질적인 전문가집단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조 정자, 그리고 그에 맞는 감역관을 발탁하여 건축으로 완성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