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 론
목조건축의 가구형태를 논할 때 가장 먼저 언급하는 것이 종단면상에 고주를 몇 개 사용했는지, 또 도리를 몇 개 사용했는지의 여부다. 고주를 몇 개 사용했는지 에 따라 무고주, 1고주, 2고주라고 칭하고, 도리를 몇 개 사용했는지에 따라 3량, 5량, 7량의 가구라고 부른 다. 이것은 한국건축역사를 처음으로 접하는 초심자가 가장 먼저 습득하는 기초적인 용어이기도 하고, 목조 건축과 관련한 용어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라 할 수 있다.그림 1
그 동안 조선시대의 전각 건립 내용을 담고 있는 영 건의궤류를 연구한 결과가 많이 발표됐다. 각 개별 전 각의 역사 및 변천에 관한 내용에 더해 건축 용어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됐는지를 고찰하기도 했고,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건축 부재 명칭을 새롭게 찾아 내기도 했다. 매우 광범위한 내용들이 연구 대상이 되 어 발표됐지만 유독 ‘량(樑)’에 대한 것만은 소략하다. 영건의궤류에 량이 기록된 경우가 극히 적은 것이 가 장 큰 이유일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조선시대에는 량 이라는 용어가 현재와 같이 큰 의미를 갖지 않았을 가 능성도 있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조선시대에 량이라는 용어가 어떻게 사용됐는지 량이 기록된 사례들을 검토 해보고자 한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가구 용어 ‘량’의 정통성을 고찰한다는 점에서 여러 사례들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시대 문헌에서 량이 기록된 사료들은 각 사례마 다 문헌의 성격이 크게 다르다. 의궤 및 등록류에 량이 기록된 경우 건물의 내용을 훨씬 자세하게 기술해 건 물 형태를 짐작할 수 있는 반면, 편년체로 기록된 ╚조 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는 단순히 량에 대한 언급만 있어 대상이 되는 건물의 모습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본 글에서는 많은 사례 중에서 건 축물의 형태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사료들을 대 상으로 연구를 진행하고자 한다.
2.조선시대 량의 표기 방법
조선시대 문헌에서 건축가구 용어인 량을 사용한 양 상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량을 단 독으로 기록해서 건물의 가구만을 묘사한 경우다. 또 다른 하나는 가구용어인 량에 더해 평면의 크기를 지 칭하는 칸[間]을 동시에 기술해서 건물의 전체적인 크 기를 묘사한 경우다.
량을 단독으로 사용한 경우는 임금과 신하 간에 특 정 건물의 가구나 간가에 대해 논한다거나, 신하가 임 금에게 특정 건물을 보고하는 내용으로 등장한다. 량 을 단독으로 사용한 몇 가지 사례는 다음과 같다.
╚궁궐지(宮闕志)╝ 창덕궁지 청방각(淸防閣)조에 량이 등장한다. 청방각은 어수당 북쪽에 위치했던 전각으로 이곳에 병풍과 장지를 보관하고 있었다. 청방각 인근에 는 진장각(珍藏閣)을 두어 어필 누판(鏤板)들을 보관했 다. 청방각에는 숙종(1674~1720)이 지은 어제 명(銘)이 걸려 있었다. 임금이 직접 지은 글에 건축 가구용어인 량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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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량(九樑)의 각이 연못가에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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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간직하고 있나, 병풍과 병풍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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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도 있고 그림도 있고, 잘된 것도 못된 것도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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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됐건 못됐건 혼나기도 하고 본이 되기도 했도다.1)
╚사릉도감의궤(思陵都監儀軌)╝에서도 량을 단독으로 사용했다. 사릉은 단종비 송씨의 능이다. 1698년(숙종 24)에 단종이 복위되면서 단종비 송씨 역시 정순왕후 로 추존되었다. 이때 능 주변에 여러 부속건물을 새로 건립했는데 안향청과 전사청을 4량각으로 조성해야 할 지를 묻는 내용이 의궤에 수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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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릉의 전사청과 안향청은 신재로 만들며 … 후릉(厚陵) 의 제도는 비록 3칸이라 하더라도 보[栿]를 한칸 반(間半) 들여서 4량각(四樑閣)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번 역시 그렇 게 거행해야 할지 …2)
╚승정원일기╝ 1795년(정조 19) 11월 25일자 김정국 (金鼎國)의 상소문에 량이 등장한다. 상소문은 당시 사 람들의 사치가 심해 가사규제가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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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대신들이 살던 집을 본 사람들이 말하기를 집이 매우 좁으며 세상에서 말하는 3량옥(三樑屋)이라고 합니 다. … 지금은 예법이 무너져 등급이 명확하지 않아 재 력만 있으면 하인과 천인의 집이라도 누군들 5량(五樑) 으로 짓지 않겠습니까?3)
╚승정원일기╝ 1720년(숙종 46) 6월 28일자에도 량이 등장한다. 이때는 숙종의 장례 절차가 진행 중이었다. 산릉에 가재실을 만들어야 하는데 ‘5량’이 아닌 ‘평가’ 로 조성한다는 내용이다. 민폐를 줄이기 위해 가재실 을 축약해서 만든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기 때문에 ‘평 가’는 ‘3량’을 지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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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실을 이제 만들어야 합니다. 계해년 등록에 수시릉 관 입접처는 5량가(五樑架)로 만들었다고 하고 신사년에 는 여타 재실 일체를 평가(平架)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금번에는 민폐를 염려해 재목을 한양 시장에서 사오고, 가재실 역시 성약(省約)해서 신사년 예에 따라 평가(平 架)로 조성하고자 합니다.4)
이상과 같이 량을 단독으로 사용한 경우에는 현재 사용하는 가구용어 량의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표 1>은 ╚승정원일기╝의 기사 중에서 량이 포함된 사례들을 정리한 것이다. ╚승정원일기╝는 1623년(인조 1)부터 1910년(순종 4)까지 임금의 일상을 매일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승정원일기╝에 등장하는 량의 사용 사 례는 조선후기에 량이라는 용어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알아볼 수 있는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량이 사용된 기사는 모두 32차례에 해당한다. 시기적으로는 18세기(숙종~정조)의 기록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궁궐영건이 가장 활발했던 19세기(순조~고종) 에 오히려 량을 기록한 사례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는 점이 독특하다. 32가지 사례 중에서 10가지 사례는 량을 단독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훨씬 많은 22가지 사 례는 량수에 더해 평면 크기인 칸수를 같이 기록했다. ╚승정원일기╝ 외에 의궤 및 등록류에서도 량수와 칸수 를 동시에 기록한 사례가 월등히 많다. 따라서 조선시 대에는 목조가구 용어인 량을 단독으로 사용하는 것보 다 량에 더해 평면크기를 동시에 기록해서 건물의 전 체적인 규모를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현재 사용하는 가구용어 량과 개념에서 유사하지만 사용 방법에서는 매우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다음 장에는 량수와 칸수를 동 시에 기록한 사료를 중심으로 량이 어떻게 사용됐는지 를 알아보고자 한다.
3.조선시대 량의 사용 사례
3-1.╚성종실록╝의 소공주 집(1478년)
1478년(성종 9) 4월 27일에 유진(兪鎭)과 표연말(表 沿沫)이 임사홍(任士洪)의 비리를 고발하는 상소를 올 렸다. 상소문에는 임사홍의 죄상과 더불어 그의 며느 리인 소공주(예종의 딸)가 가사규제를 어겼다는 내용 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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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주(小公主)의 집은 칸수가 적음을 불평하여 모두 7 량4영(七樑四楹)의 제도를 써서 참람함이 궁궐에 비기고 편전(便殿)에 비교해도 더 지나쳐 도성(都城)의 사녀(士 女)들이 놀라고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5)
이 기록은 량이 등장하는 사료 중에서 가장 이른 사 례다. 건물이 7량4영(七樑四楹)이라고 기록했다. 량과 더불어 영(楹)을 사용한 사례로는 이것이 유일하다. 영 은 원래 기둥을 뜻하는 글자지만 건축물에 영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경우 칸[間]을 지칭한다. 일반적인 칸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도리통의 칸수만을 지칭하기도 하 고 전체 면적을 가리키기도 한다. 영을 사용한 대표적 사례로 ┎태안객사신창기┛ 를 들 수 있다. 이 기문은 조 선초 남수문(南秀文; 1408~1442)이 지은 것으로 ╚동문 선╝에 전하고 있다.
대청 5가3영, 좌우중방 5가5영, 남청 5가3영, 동서헌 5가4영, 좌우중방 5가3영 등 모두 83영을 지었다는 내 용이다. 앞서 ╚성종실록╝의 내용과 비교하면 ‘량(樑)’과 ‘가(架)’의 사용에만 차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가 (架) 역시 도리 숫자를 지칭하는 가구용어다. 이미 ╚당 회요(唐會要)╝에 건축법으로 등장하고 있고, ╚명사(明 史)╝에도 등장한다. 남수문과 같이 조선시대 문집류에 서도 ‘가(架)’를 사용한 사례가 확인된다.6) 하지만 ╚성 종실록╝의 사례를 통해 조선초에 이미 고유 용어인 ‘량(樑)’이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소공주 집이 7량4영이라고 했는데 이는 가구에 도리를 7개 사용했고 도리통이 4칸이라는 의미다.
1563년(명종 18) 박영준(朴永俊)이 원계검(元繼儉)의 사치한 생활을 임금에게 고해바치면서 죄 줄 것을 청 하는 내용이 ╚명종실록╝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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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는 강가에 정자를 지으면서 참람하게도 9량(九樑) 의 제도를 썼으며 다른 사람의 장획(종: 하인)을 받고서 도 끝내 값을 치르지 않았습니다.7)
칸수에 대한 언급 없이 9량이라는 가구만을 기록한 사례다. 시기적으로 사료 수가 극히 적은 임진왜란 이 전 기록이다. 원계검이 지은 정자는 9량으로서 신분을 뛰어넘는 것이라고 했다. 조선초 획정한 가사규제에 량이라는 용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앞선 사례 와 더불어 가구에 사용한 도리 숫자 역시 일정한 규율 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3-2.╚창덕궁수리도감의궤╝ 내궁방별조청(1647년)
1647년(인조 25) 창덕궁 영건기록인 ╚창덕궁수리도 감의궤╝의 5소에서 량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전각 을 건립한 의궤 및 등록류 중에서 량이 기록된 가장 이른 사례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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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형을 보니 외사옹원 서쪽 루랑이 8칸이고 내궁방별조 청 3량평가5칸(三樑平家五間)입니다. 중사가 분부한 것 중에 외사옹원 서쪽 누랑은 5칸을 더 만들고 내궁방별 조청은 역시 5량가(五樑家)로 만들라고 한 까닭에 품합 니다.8)
1647년(丁亥) 8월 2일자 기록에 수록된 내궁방별조 청에 관한 내용이다. 원래는 3량평가5칸짜리 건물을 지으려고 했으나 이것을 오량으로 바꾸라는 내용이다. 3량을 기록한 다음에 이것이 일반적인 집의 형태라는 의미에서 평가(平家)가 더해졌다. 몇몇 기록에서는 ‘3 량’이라는 언급 없이 ‘평가(平家, 平架)’를 단독으로 사 용해서 5량과 다른 형태의 가구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3량5칸의 의미는 가구가 3량이고 도리통이 5칸인 건물 을 지칭한다. 5소에서 건립한 건물을 기술한 조성질에 내궁방별조청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내궁방 7칸을 만들었는데 일반적인 칸[作平]으로는 14칸이라고 기록 했다(內弓房七間作平十四間東樓四間西樓四間). 내궁 방별조청이 내궁방과 다른 건물인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때 만들어진 내궁방이 3량이 아닌 것 만은 명확하다고 할 수 있다.
3-3.╚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궤╝의 5량각(1656년)
╚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궤╝는 1656년(효종 7) 창덕 궁 서쪽편에 왕대비를 위해 만수전을 건립한 내용을 수록한 의궤다. 량이 기록된 건물은 주건물인 만수전, 천경루 등을 건립한 1소에서 담당했다.
건물에 따로 전호나 당호가 없어 5량가로 기록했다. 5량가8칸 중에 온돌이 2칸이고 마루가 6칸이라고 했다. 가구가 5량인 것은 알겠지만 8칸이 도리통 8칸 건물을 지칭하는지 아니면 면적이 8칸이므로 도리통 4칸 건물 을 지칭하는지 알 수 없다. 맞보를 사용하고 있기 때 문에 양통이 2칸 이상인 것은 명확하다. 같은 1소에서 건립한 만수전은 4면퇴를 포함해 36칸이라고 했고, 천 경루는 4면퇴를 포함해 20칸, 헌선합은 전퇴를 포함해 30칸이라고 했다. 다른 건물들은 모두 면적 개념의 칸 수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5량가에 대해서는 전퇴나 후퇴 언급 없이 8칸이라고만 기록했다. 이 5량가 역시 다른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면적의 칸 개념을 사용해 도리통 4칸의 건물일 가능성도 있지만 명확하지 않다. 참고로 이 건물에 사용한 창호는 선자귀 32짝, 쌍창 8 짝, 사창 22짝이라고 기록했다.
3-4.╚승정원일기╝의 북한산성 창고(1651년, 1721년)
량이 기록된 건물 유형 중에서 상당히 많은 수를 차 지하는 것이 창고에 대한 내용이다. 가장 이른 것은 1651년(효종 2)에 대동미를 보관할 창고를 짓는 기록 이다. 대동미 보관 곳간[庫間]은 인경궁 월랑에 있는 곳간 10칸을 옮겨 짓도록 했는데 이것이 모두 5량이라 는 내용이다. 5량이라고 기록한 이후 칸수에 대한 언 급이 있으나 이 부분이 훼손되어 보이지 않는다.9)
1721년(숙종 38)에는 북한산성을 짓는 공사가 진행됐 다. 공사를 진행하면서 여러 창고를 지었는데 수구 북 쪽으로 장대하고사(將臺下庫舍) 5량각20칸, 상운암고사 (祥雲菴庫舍) 5량각20칸, 화약고 5량각6칸을 지었고,10) 수구 남쪽으로 고사(庫舍) 5량각20칸, 평고사(平庫舍) 8 칸반을 지었다.11) 기록된 창고의 칸수가 매우 큰 것을 알 수 있다.12) 현재 조선시대 창고 건물이 남아 전하는 경우가 드물어 정확한 창고의 형태를 알 수 없다. 량수 와 더해진 칸수가 과연 도리통 칸수를 의미하는지 건 물 면적 칸수를 의미하는지 짐작하기 어렵다. 만약 이 것이 도리통의 칸수라면 건물의 규모가 너무나 거대해 당황스럽다.
신후재(申厚載; 1636~1699)의 문집인 ╚규정집(葵亭 集)╝에는 ┎유비창기(有備倉記)┛ 가 수록되어 있다. 유비 창은 강화도에 설치한 창고로 1690년(경오)에 조속(漕 粟) 3만석과 강원, 황해, 충청 등지에서 벌목한 재목으 로 만들었다.13) 창고에 대해 “架以七樑計三十有一”이 라고 했는데 가구는 7량으로 만들었고 칸수가 31칸이 라는 내용이다. 이것만으로는 31칸이 도리통을 지칭하 는 것인지 아니면 전체 면적을 지칭하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 그런데 이후 “매 5칸마다 하나의 문을 두었다 (每五間置一門)”는 기록을 통해 31칸이 도리통 31칸을 지칭하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1761년(영조 37) 5월 7일자 ╚승정원일기╝에는 한성 부 호적창고 공사에 대한 논의가 기록되어 있다. 호적 창고를 고치라는 명령이 이미 있었다. 하지만 여건상 수리를 진행하지 못했고 수리하지 못한 사정에 대해 변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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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고를 고쳐야 하는데 5량각(五樑閣) 20여칸입니다. 평 칸(平間)으로 계산하면 50여칸입니다. 본부 당상에게 명 이 전달됨에 인하여 진청의 쌀과 돈을 획급하고서도 고 치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물력이 십분 부족했기 때문입 니다.14)
‘平間計之’는 ‘일반적인 칸수로 계산하면’으로 해석된 다.15) 즉 5량각 20여칸이 일반적인 칸수 계산으로는 50 여칸이 된다는 의미다. 해당 건물은 2고주 5량이며 양 통이 3칸, 도리통이 20여칸인 평면을 갖고 있었던 것으 로 판단된다. 이런 평면이라면 양통의 어칸이 1칸이고, 전퇴와 후퇴가 각각 반칸이 되어 각 칸마다 2칸씩의 면적을 갖는다. 이들 사례를 통해 앞서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여러 창고들의 칸수는 전체 면적이 아닌 도리 통의 칸수를 지칭하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3-5.╚사직서등록╝의 대문, 안향청, 악공청(1689년, 1701년, 1709년)
╚사직서등록╝은 1661년부터 1718년까지 사직서에서 작성한 문서를 모아 놓은 등록이다. 이 중 1709년(기 축, 숙종 35) 8월에 찬수청(纂修廳)에서 작성한 문서에 량과 관련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문서에는 사직서에 위치한 모든 건물들에 대해 규모와 연혁을 간략하게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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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쪽 모서리에 신실이 있는데 5량각1칸(五樑閣一間)이 고 북향이며 사면에 완렴을 달았다. 1634년 10월에 중 건했다. 안향청은 5량각8칸(五樑閣八間)이고 좌우에 방 이 있으며 남향이다. 1641년 9월에 중건했다. 동서에 집 사청이 각 3칸씩 있고, 남쪽에는 월랑 10칸 있으며, 서 쪽에는 악기고 4칸이 동향했고, 악곡고 3칸이 남향하고 있다. … 사직단 서쪽에는 전사청등 고사가 있고 동쪽 에는 악공청 5량각5칸(五樑閣五間), 대문 5량각3칸(五樑 閣三間)이 동향하고 있다.16)
신실, 안향청, 악공청, 대문에 대해 모두 5량각이라고 기록했다. 이들 건물 중에서 안향청과 대문이 현전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은 대문이다. 대문은 현 사직 단 정문에 해당한다. 대문이 5량각3칸이라고 기록했는 데 현재 사직단 정문에는 종도리, 중도리, 주심도리, 외 목도리의 총 7개 도리를 사용했다. 따라서 당시에는 가 구의 량수를 기록하는 데 있어 외목도리는 포함하지 않 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칸수를 3칸이라고 했다. 현 재 사직단 정문은 양통 2칸 × 도리통 3칸 = 6칸의 크 기를 갖고 있다. 따라서 기록의 3칸은 도리통만을 지칭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그림 2
안향청은 5량각8칸이라고 했다. 현전하는 안향청의 가 구는 5량으로 구성되어 있다. 평면은 양통 2칸 × 도리통 4칸 = 총 8칸의 모습을 하고 있다. 따라서 안향청은 대 문과 다르게 도리통이 아닌 면적 개념의 칸을 쓰고 있 다. 이 시기의 다른 사료들과 비교해 매우 특이한 모습 이다. ╚사직서등록╝보다 조금 앞선 1701년 ╚승정원일기╝ 에도 사직서 안향청에 대한 내용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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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가을에 사직서 안향청을 선공감역관과 본서 관원 에게 중건하라 명하셨습니다. … 고쳐쌓고 초석을 놓아 4칸5량(四間五樑), 칸내 좌우에 온돌을 두고 각 (마)루 4 칸을 모두 신재로 구제도와 같이 개건했습니다.17)
이 기록에서는 유사한 시기, 같은 건물에 대해 4칸5 량이라고 기술했다. 량수보다 칸수를 먼저 기술하고 있는 것이 다른 사료와 크게 다른 점이다. 여기서 기 록한 4칸은 명확히 도리통 4칸을 지칭하고 있다.
사직서 악공청와 관련한 다른 기록도 전하고 있다. 역시 ╚사직서등록╝의 기록보다 앞선 1689년(숙종 15) 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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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서의 악공청 5량각3칸(五樑閣三間)이 바람에 무너져 재목과 기와가 모두 부서졌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 불가불 긴급히 수개해야 하니 감역관을 정해 감동하도 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18)
5량각3칸(五樑閣三間)이기 때문에 칸수는 도리통을 지칭한 것으로 판단된다. 후대 기록인 ╚사직서등록╝에 는 악공청이 5량5칸이라고 했다. 이때 수개를 진행하 면서 건물을 증축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1783년 기록 인 ╚사직서의궤╝의 ┎사직서전도┛ 에는 악공청이 4칸으 로 묘사되어 있다.
3-6.╚승정원일기╝의 계성사(1701년)
1701년(숙종 27) 한양 성균관에 계성사를 건립했다. 계성사의 모습은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성균관 배 치도 및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계성사 건립 당 시 간가를 설정하는 모습이 ╚승정원일기╝에 기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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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성묘 영건하는 것을 명하셨습니다. 돌을 떠내는 일이 가장 시급한데 먼저 묘우의 간가다소를 정한 이후에야 주초와 계체석 등 돌의 수를 짐작해 일을 시작할 수 있 습니다. 묘우는 5량각3칸(五樑閣三間), 신문은 3칸, 전사 청은 5칸, 제기고는 2칸, 수복방은 2칸으로 하면 부족함 이 없을 듯하여 대신들에게 이미 품의했습니다.19)
묘우는 5량각3칸으로 조성하겠다고 했다. ╚조선고적 도보╝에서 확인되는 계성사의 모습은 도리를 5개 사용 한 5량 건축물이다. 또 전면에 고주를 설치해 평면에 서 전퇴를 두어 총 4칸반의 크기를 갖고 있다. 하지만 ╚승정원일기╝에서는 이 건물을 5량각3칸이라고 기록했 다. 따라서 3칸이 면적 개념의 칸이 아니라 도리통 3 칸을 지칭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그림 3
3-7.╚종묘개수도감의궤╝의 정전, 제기고, 공신당 (1725년)
1725년(영조 1) 종묘에 경종의 신주를 봉안해야 하 는데 신실이 부족해서 종묘 증축 공사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이에 신실 3칸을 증축하기로 하고 종묘 정전 의 증축공사를 진행했다. 공사가 진행되는 도중에 종 묘 신실을 1칸 더 늘려 4칸으로 증축하자는 의견에 따 라 최종적으로 4칸의 신실이 증축됐다. 종묘 정전의 동쪽편으로 4칸을 증축하면서 제기고, 종향실, 동월랑, 남신문, 동문, 수복방이 이건됐다. ╚종묘개수도감의궤╝ 1725년(을사) 11월 21일자 기록에는 정전 3칸을 증축하 는데 필요한 기와를 수록하면서 각 건물의 량수와 칸 수를 기록했다.그림 4
종묘 정전은 7량3칸이라고 했다. 현재 종묘 정전은 종도리, 상중도리, 하중도리, 주심도리, 외목도리의 9개 도리로 이뤄진 건물이다. 이 건물을 7량이라고 기록한 것으로 판단하건데 외목도리는 량수에 포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증축할 평면이 3칸이라고 했는데 종묘 정전은 전후퇴를 갖는 건물이기 때문에 증축할 총 칸수는 6칸 또는 9칸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 기록 의 3칸은 도리통 크기만을 지칭하고 있다.
제기고는 5량2칸이라고 했다. 종묘 제기고와 관련한 기록은 ╚승정원일기╝ 1749년(영조 25) 5월 10일자 기 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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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의 제기를 소장하는 건물은 4칸인데 사벽으로 하지 않아 깨끗하지 못하며 기와가 많이 깨졌고, 서까래 역 시 손상돼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종묘의 제기를 소장 하는 건물은 5량각2칸(五梁閣二間)인데 가운데에 제기장 이 하나밖에 없어 유제기는 넣을 수 없습니다. 이에 판 자를 하나 매달아 나머지 제기를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보기에 깨끗하지 못했습니다.20)
이 기록 역시 종묘 제기고에 대해 5량각2칸이라고 기록했다. 하지만 종묘 제기고는 6개의 도리를 사용한 6량의 가구를 하고 있다. 5량으로 만들어진 건물 전면 에 퇴칸이 첨가된 형태다. 앞서 ╚사릉도감의궤╝의 전 사청과 안향청에 대해 4량각이라고 했던 것과 마찬가 지로 종묘 제기고는 6량각이라고 해야 한다. 하지만 2 개의 기록 모두 5량으로 기록했다. 한편 종묘 제기고 가 2칸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종묘 정전과 마찬가지로 도리통의 크기만을 표기한 것이다.
남신문과 동문은 모두 5량3칸이라고 했는데 이 역시 현재와 비교하면 도리통의 크기만을 표기한 것이다.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은 종향실이다. 종향실은 공신당 을 지칭한다. 이때 건물은 5량3칸이라고 했다. 현재 종 묘 공신당과 칠사당은 3량 건축물이다. 1778년(정조 2) 2월 6일자 ╚정조실록╝에 공신당을 증축했다고 했고,21) 1802년 ╚정종대왕부묘도감의궤╝에 공신당이 6칸이라고 했다. 따라서 1778년 공신당에 대한 공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증축의 이유는 간가가 부족해서였다. 그런 데 건물을 증축하면서 공신당 가구를 5량에서 3량으로 축소했을까? 만약 공신당의 가구를 축소했다면 반대편 의 칠사당 역시 5량에서 3량으로 축소했을 것이다. 하 지만 이런 경우는 상정하기 어렵다. 증축은 가능하다 하더라도 축소는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종향실이 5량3칸이라는 것은 3량3칸을 잘못 기술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1836년 공신당 이건 기록인 ╚종묘개수 도감의궤╝에 공신당은 6칸이며 도리를 18개 사용했다 고 기록해 3량 건축물임을 확인할 수 있다.
3-8.╚승정원일기╝의 북한산성문루(1739년)
1739년(영조 15)에는 북산산성에 있는 여러 건물에 대한 보수공사를 진행했다. ╚승정원일기╝ 7월 29일자 에는 중수에 참여한 관원들의 시상에 대한 내용이 수 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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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간의 물력을 획급해서 유영의 감관, 교련관, 절충 신옥(申沃)을 시켜 감동대청 22칸반, 낭청소 10칸, 중군 소 4칸반, 집사청 4칸, 군기고 8칸, 화약고 5칸, 5량각고 사(五樑閣庫舍) 35칸, 5량각대문(五樑閣大門) 1칸, 군사 수직방 2칸, 마랑 5칸, 협문 5곳 2칸반, 서각 1칸, 고자 가 7칸, 합 143칸반을 수보했습니다. 또 대성문루 5량각 3칸(五樑閣三間), 대동문루 5량각3칸(五樑閣三間)은 개수 했습니다. …22)
5량 건물은 총 4차례 등장한다. 이중 5량각고사와 5 량각대문은 형태를 짐작하기 어렵다. 반면 5량각3칸인 대성문루와 대동문루는 형태를 유추해 볼 수 있다. 현 재 북한산성에 대성루와 대동루가 전하고 있다. 이들 두 건물은 1993년에 복원한 것이다. 모두 양통 2칸, 도 리통 3칸으로 총 6칸의 평면을 갖고 있고, 공포는 외1 출목을 갖는 주심포식이다. 북한산성을 처음 영건할 당 시 기록인 1712년(숙종 38) 10월 8일자 ╚승정원일기╝에 는 여러 건물의 규모에 대해 기록했는데 이중 남문루 가 6칸이며, 동문루 역시 6칸이라고 했다.23) 1993년에 건물을 어떤 과정으로 복원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최소한 원래의 초석위치를 검토해 복원했을 것이기 때 문에 양통 2칸은 명확할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기록 에서 ‘3칸’이라고 한 것은 도리통만을 지칭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3-9.╚진전중수도감의궤╝의 영희전(1748년)
1748년(영조 24)에는 영희전(永禧殿) 정전을 3실에서 5실로 증축하는 공사가 진행됐다. 기존 3실에는 태조, 세조, 원종의 어진이 봉안되어 있었는데 새로 숙종의 어진을 추가로 봉안하기 위해 증축이 필요했다. 이때 공사 내용은 ╚진전중수도감의궤╝에 수록됐다. 이 의궤 의 1748년 정월 22일자 기록에는 정전의 규모와 정전 증축에 사용할 건축 부재가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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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은 7량5칸이며 좌우에 각 1칸의 퇴칸이 있다. 2칸 을 좌우에 새롭게 건립해 첨가하는데, 좌우의 퇴칸 각 1칸을 개건하는 데 들어간 목물은 다음과 같다. (正殿七 樑五間左右退各一間內二間左右添補新建左右退各一間 仍爲改建所入後)
기존 도리통 5칸(정전 3칸 + 좌우퇴 1칸)짜리 건물을 도리통 7칸(정전 5칸 + 좌우퇴 1칸)으로 증축한 내용이 다. 그 결과 정전이 7량5칸이라고 했다. 7량은 도리의 숫자가 7개임을 지칭하고, 5칸은 정전의 도리통 크기가 5칸이라는 내용이다. 앞선 사례들과 마찬가지로 건물의 전체 면적이 아니라 도리통의 크기만을 기록하고 있다.표 2
이후 기록된 부재중에서 가구부재만을 보면 “고주 4, 퇴평주 4, 창방 22, 대보 2, 중보 2, 가보 4, 종보 2, 도 리 18, 동자주 6, 대공 6”개를 사용했다고 한다. 사용한 보 부재로 대보(大椺), 중보(中椺), 가보(假椺), 종보(從 椺)가 나타난다. 가보는 퇴량을 지칭하고 있다. 이들 부재만 고려하면 정전은 7량이 아닌 9량의 가구로 보 인다. 도리 숫자가 18개라고 하니 더욱 9량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9량 가구에는 동자주가 8개 필요하다. 그 런데 동자주를 6개라고 기록해 오히려 부족하다. 영희 전은 1858년(철종 9)에도 순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 1칸을 증축한 일이 있다. 이 공사 내용은 ╚남전증건도 감의궤╝에 수록됐다. 이 의궤의 1858년(戊午) 9월 17일 자 기록에는 ‘正殿所入’ 항목으로 정전에 사용된 목부 재를 기록했다. 사용한 보 부재는 대량(大樑) 1, 종량 (宗樑) 1, 퇴량(退樑) 2개뿐이다. 중보는 보이지 않는다. 동자주는 2개만 사용했다. 따라서 기존 영희전 건물이 명확히 7량임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진전중수도감 의궤╝에 기록된 중보는 주가구가 아닌 좌우 퇴칸 또는 상부 합각을 형성하는 곳에 사용한 부재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3-10.╚경모궁의궤╝의 중대문과 외대문(1783년)
╚경모궁의궤╝는 1783년(정조 7)에 만들어진 것이다. 의궤 서두에 ┎본궁전도설(本宮全圖說)┛ 을 수록해 경모 궁의 모습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했고 이후 경모궁을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건물에 대해 기록했다. 너무나 많은 건물에 대해 기록하고 있지만 량수를 포함하고 있 는 것은 중삼문(中三門)과 외대문(外大門)뿐이다. 중삼 문과 외대문 모두 ‘5량3칸(五樑三間)’이라고 기록했다. 이 두 대문은 모두 1776년(정조 즉위)에 만들어진 것이 다. 이 건물을 만드는데 사용한 목물 기록은 ╚경모궁개 건도감의궤╝에 기록되어 있다. 외대문 3칸을 만드는데 기둥 12개, 16자짜리 보(椺) 4개, 8자짜리 단보(短椺) 4 개, 동자주 8개, 대공 4개를 사용했다. 도리[仇兀道里]는 12자짜리 15개를 사용했다. 일반적인 삼문과 마찬가지 로 양통 2칸, 도리통 3칸의 평면을 갖고 있는 5량 건물 이다. 중삼문 3칸도 양통의 길이가 14자인 것을 제외하 면 대동소이하다. 다만 중삼문은 초익공, 외대문은 이익 공으로 차이를 두었다. 따라서 중대문과 외대문의 5량3 칸은 도리를 5개 사용한 5량이며 도리통이 3칸인 건물 을 지칭하고 있다.
3-11.산릉도감의궤의 수도각(1789년 이후)
수도각은 능상의 옹가 정면에 만들어서 통로로 이용 하는 임시 건물이다. 따라서 국장이 치러질 때는 항상 수도각이 만들어진다. 수도각 중에서 량이 기록된 것 으로 가장 이른 사례는 1673년에 기록된 ╚(효종영릉) 천릉도감빈전소의궤╝다. 수도각에 대해 ‘수도각제도(隧 道閣制度)’ 항목을 두어 형태를 자세하게 기술했다.24) 다만 량수와 칸수를 연결해서 기술하지 않고 각각 따 로 기록했다. 수도각의 칸수는 4칸이고 가구는 7량으 로 꾸몄다[七樑爲架]. 보 부재는 36자짜리 장복(長栿), 22자짜리 종복(從栿), 12자짜리 종복(從栿)을 사용했다. 주심도리와 중도리는 ‘도리(道里)’라는 명칭을 썼지만 종도리만은 ‘량목(樑木)’이라고 기록했다. 1731년 ╚인조 장릉천봉산릉도감의궤╝에서도 삼물소 1731년(신해) 7 월 12일자 기록에 수도각을 7량2칸반(七樑二間半)으로 만든다고 기록했다.25) 두 기록은 수도각을 7량으로 만 든 독특한 사례들이며,26) 동시기에 두 의궤를 제외하 면 량이 기록된 산릉도감의궤는 찾기 어렵다.
17~18세기에 걸쳐 계속 수도각이 만들어졌지만 산릉 도감의궤에 량을 기록한 것은 발견되지 않는다.27) 량이 기록된 수도각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789년 ╚(장 조)현륭원원소도감의궤╝부터다. 이 의궤에는 기존에 없 던 ┎수도각도설(圖說)┛ 이 첨가됐다. 도설이 첨가되면서 도설에 대한 해설이 같이 수록됐는데 이때 수도각을 ‘5량2칸반’이라고 기록했다. 1805년 ╚(정순왕후)원릉산릉 도감의궤╝부터는 ┎수도각도설┛ 의 해설을 기존보다 훨씬 자세하게 기록했다.그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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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각은 5량2칸반인데 6개의 기둥 위에 3개의 보(椺), 6개의 도리(道里)를 설치한다. 이 위에 8개의 동자주(童 子柱)를 세운 다음, 4개의 종보(從椺)를 설치하고 종보 좌우에는 각각 도리를 얹는다. 가운데에 대공(臺工)을 세우고 그 위에 량(樑)을 얹는다.28)
╚(정순왕후)원릉산릉도감의궤╝ 이후 19세기 내내 이 상과 같은 내용이 계속 반복해서 산릉도감의궤에 수록 됐다.29) 기록에는 ‘椺’, ‘從椺’, ‘道里’, ‘童子柱’, ‘臺工’, ‘樑’ 이라는 부재가 등장한다. 가장 눈에 띄는 부재는 ‘樑’이 다. 이 기록에서 지칭하는 ‘樑’은 종도리를 말하고 있다. 주심도리와 중도리는 ‘도리’라고 했지만 유독 종도리만 은 ‘樑’이라고 했다.30)╚(문조)수릉천봉산릉도감의궤╝와 ╚(순조)인릉천봉산릉도감의궤╝에서는 독특하게 “三椺(二 樑長十六尺一樑長十三尺)”와 같이 도리를 ‘椺’라고 기 록한 일도 있다. 하지만 각 부재의 길이를 기술하면서 는 역시 ‘樑’이라고 기록했다.
‘從椺’는 19세기 후반 ╚철종예릉산릉도감╝ 이후 몇 차례 ‘宗椺’로 기록했다. ╚(효현왕후)경릉산릉도감의궤╝ 에서는 수도각에 종보를 8개 사용했다고 한다. 이후 대 부분의 산릉도감의궤에서 수도각에 종보를 8개 사용했 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수도각에 사용한 종보는 4개뿐 이다. 앞선 사례가 잘못 기록되면서 이후 모든 산릉도 감의궤 기록이 잘못 기술됐다. 즉 산릉도감의궤에 있어 서 후대 의궤는 앞선 시기의 의궤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표 3
전각의 영건 기록을 담고 있는 의궤에서는 보 부재 에 대해 17세기에는 ‘栿’을 사용했고, 18세기에 ‘椺’를 사용했으며, 19세기에는 ‘樑’을 사용했다.31) 하지만, 산 릉도감의궤 수도각도설의 해설 부분에서는 19세기임에도 18세기에 사용했던 ‘椺’를 계속 사용하고 있다.32)╚(문조) 수릉천봉산릉도감의궤╝와 ╚(순조)인릉천봉산릉도감의궤╝ 의 기록은 오히려 독특하다. 도설을 기술하면서 8개의 ‘宗樑(從樑)’을 설치하고, ‘宗椺(從椺)’ 좌우에 각각 ‘圓棟’ 을 얹는다고 기술했다. 종량과 종보를 모두 기술하고 있 다. 이것은 ‘宗椺(從椺)’가 당시 시대와 맞지 않는 용어 였기 때문에 두 가지 표기법이 동시에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상과 같은 이유로 19세기 산릉도감 의궤에 기록된 ┎수도각도설┛ 의 내용이 19세기의 시대성 을 반영하고 있다고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오히려 18세기의 특성을 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 서는 더 많은 연구와 보완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3-12.╚화성성역의궤╝(1801년)
╚화성성역의궤╝는 단일 의궤에서 가장 많은 건물에 대해 량을 기록한 사례다. 특히 화성행궁에 건립한 건 물에 대해서 대부분 량을 기록했다. “架屋三樑”, “架屋 五樑”과 같이 량수만을 단독으로 기록한 경우도 있다. 모두 도설에서 건물을 해설한 부분에 나타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성신사(城神祠) 정당(正堂)에 대 한 것이다. 이 건물에 대해 “五樑三架”라고 기록했다. 량과 더불어 칸이 아닌 가(架)를 기록했다. 이런 방식은 다른 사례에서 전혀 등장하지 않는 새로운 것이다. 이 것이 혹시 칸[間]의 오기가 아닐까? 도설에 따르면 성 신사는 전퇴를 갖는 1고주5량이며 도리통 3칸으로 만들 어졌기 때문에 이런 추정이 가능하다.표 4
하지만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된 다른 건물들을 살펴 보면 량과 같이 기록한 칸이 기존과 크게 다르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앞서 ╚사직서등록╝ 중 안향청에 대해 5 량각8칸(五樑閣八間)이라고 한 사례를 제외하면 대부분 의 건물은 칸이 도리통 크기를 지칭하고 있었다. 그런 데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된 건물들은 일관되게 모두 도리통이 아닌 면적 개념의 칸을 사용하고 있다. 일례 로 문선왕묘(文宣王廟), 즉 수원향교 대성전이 7량20칸, 명륜당이 7량10칸이라고 했다. 명확히 도리통 크기가 아닌 면적 개념의 칸인 것을 알 수 있다. 화성행궁을 구성하는 건물들 역시 ╚원행을묘정리의궤╝에 수록된 도설을 통해 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데, 모두 면적 개념 의 칸수를 사용했다. 앞선 시기의 량을 기록한 사례들 과 매우 큰 차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표 5
3-13.╚각사당각묘소제향신정식등록(各祠堂各墓所祭 享新定式謄錄)╝의 사당(1866년)
이 등록은 1866년(고종 3)에 만들어진 것이다. 19세 기에 매우 많은 영건공사가 시행됐고, 매우 많은 수의 의궤가 만들어졌지만 량이 기록된 사례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이 기록은 매우 큰 의미를 갖 는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수진궁(壽進宮)에 봉안했던 각 위패를 묘소가 있는 재청으로 이안한 것을 기록한 등록인데 이 중에서 ‘各墓所祭廳七廟奉安十三位’라는 항 목에 각 사당의 규모를 기록했다. 앞선 사례들과 달리 칸수를 먼저 기록하고 뒤에 량수를 기록했다. 이와 같 이 칸수를 먼저 기록한 것은 ╚승정원일기╝ 숙종 27년 (1701) 10월 24일자 사직서 안향청에 대한 기록이 유 일했다. 내용에는 ‘4칸반4량’이 2채, ‘3칸5량’이 2채, ‘6 칸5량’이 2채며 2칸4량, 2칸5량 건물이 각 1채씩 기록 됐다. 대부분 사당은 도리통 3칸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이를 고려하면 ‘4칸반4량’은 전퇴가 있는 4량구 조이며, 4칸반은 도리통이 아닌 전체 면적 개념의 칸 을 사용하고 있다. 또 ‘6칸5량’은 전후퇴가 있는 2고주 5량의 구조이며, 6칸은 도리통이 아닌 전체 면적 개념 의 칸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기록 역시 ╚화성성역의궤╝와 마찬가지로 면적 개념의 칸을 량수와 함께 기록한 사례에 해당한다. 량수와 더 불어 칸수를 사용하는 방법에 시대적 변화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4.결 론
비록 현재 사용하고 있는 것과 사용 방법에 있어 약 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도 량이라는 용 어가 꾸준히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 다. 남아 전하는 문헌이 극히 적은 조선초기의 사례도 확인되는데 1478년 소공주의 집이 ‘七樑四楹’이었다는 기록이다. 임진란 이후인 17세기와 18세기에는 량을 기 록한 문헌이 상당수 확인되고 있어 이때에는 량이라는 용어를 널리 사용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현재와 마찬가지로 량수를 단독으로 사용한 경우도 있다. 이때 사용한 량은 현재 사용하고 있는 목조가구 용어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량을 언급할 때에는 량수와 더불어 칸수를 결합해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이때 사용 한 칸수는 도리통의 칸수를 지칭하고 있다. 즉 량수를 기술하면서 양통의 크기를 밝히고, 도리통의 칸수를 기술하면서 도리통의 크기를 밝혀 전체적인 건물의 규 모를 알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다. 이런 방식의 량 표 기 방법은 현재 사용하는 목조가구 용어로서의 량 개 념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19세기에는 량을 기록한 문헌의 수가 극히 적어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 량을 기록한 경우라 하더라도 사용 방법에 있어서 이전 시기와 약간 다른 모습을 확 인할 수 있다. 량수와 더불어 칸수를 기록한 면에서는 앞선 시기와 같은 모습이다. 그런데 목조가구 용어로서 량의 의미는 동일하지만 칸수의 의미에서 변화가 있었 다. 기존에는 도리통의 크기만을 지칭했지만 이때부터 는 전체 면적을 지칭하고 있다. 량수와 칸수를 같이 기 술해서 건물의 크기를 표현하고자 했던 원래의 의도에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