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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 1598-1142(Print)
ISSN : 2383-9066(Online)
Journal of architectural history Vol.25 No.3 pp.63-70
DOI : https://doi.org/10.7738/JAH.2016.25.3.063

A Study on the Main-path Remains in the Hwangnyongsa Temple Site

Sookyung Kim*
Corresponding Author : sk2kim@hotmail.com
April 15, 2016 May 19, 2016 May 25, 2016

Abstract

This paper aimed to identify a main-path remains in the Hwangnyongsa temple site based on studying published the excavation survey report and researching relics related to the path in the ancient temple site. Hwngnyongsa temple, there were three type’s paved footway, straight path to the central axis line of the layout, outside path around the main buildings and the front square of the lecture hall. These remains were expected that installed for some purposes, such as marches, touring, sort of a Buddhist ceremony been performed at the time of Silla. Straight path shows there were two rows of the main access inside the roofed corridor. A row consisted of the 2~3 pieces processed stone(Jangdaeseok) altogether with 92cm width and combined with square stone and stepping stone on the end of the road. It is regarded as very characteristic form and one of the architectural elements of Hwangnyongsa temple in Unified Silla period.


황룡사 답도 연구

김 숙 경*
국립문화재연구소 건축문화재연구실 황룡사복원정비사업단 선임연구원

초록


    1.서 론

    황룡사 주요 건물지 외부에서 발견된 부전(敷塼) 및 포석(鋪石)시설은 아직까지 그 기능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금당의 차양칸과 목탑의 탑구(塔區)에는 1m가 넘는 폭의 부전시설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예배대상 을 중앙에 두고 바깥으로 도는 당시의 불교의례에 사 용된 답도로 기능하였다고 생각한다. 건물 외주의 답도 는 금당과 목탑에만 설치되어 있는데, 기단의 외주에 일정한 폭으로 방전을 깔아 포장하고 지대석으로 마감 하였다. 이 답도는 구지표면 레벨보다 약간 높으며 황 룡사 목탑은 그것이 2중으로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 이다. 건물 외주의 부전시설은 사천왕사지, 고선사지, 천군동사지, 전(傳)인용사지 등의 주요 건물지에서 많 이 확인되고 있다.

    강당의 경우에는 강당 서남편과 금당 서북편에 남아 있는 지대석 때문에, 강당과 금당 사이의 넓은 마당에 부전시설이 설치된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넓은 면 의 부전시설이 발견된 것은 아니며 당시 조사된 유구 로 판단했을 때 구획범위 정도를 확인할 수 있다.

    황룡사 중심사역 내 종축선을 따라 중문~목탑~금 당의 사이에서 발견된 2열의 포석시설은 2열의 진입방 식에 따라 설치된 직선 답도로 판단된다. 이것은 2~3 매의 가공석재를 놓아 전체 62~92cm1) 폭으로 1열을 구성하고 있다. 발굴조사 당시에는, 중금당과 목탑의 발굴범위에서 노출되는 유구만 조사하고 전반적인 양 상을 밝히거나 보고서에 기술하지 않았다.

    답도는 구지표면상에 설치한 보도(步道)로, 전돌이나 석재를 깔아놓은 것이어서 기초가 얕고 쉽게 파괴되어 고대 유적지의 발굴조사시 그 흔적을 찾기 어려웠던 유구이다. 유적에 남아 있는 답도는 폐사되기 전, 그 유적의 최종시기까지 사용되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고대 가람에서 종축선상의 건물 간을 연결하는 답도 가 능산리사지, 미륵사지, 제석사지 등 백제 사원에서 발견되었다. 주로 중금당과 목탑의 중심축선상에서 5 0~75cm 폭의 판석을 일렬로 깔아 설치하였다. 반면에 신라지역의 불교유적에서 이러한 유구는 사례가 적어 아직까지 크게 조명되지 못했다.

    그런데 황룡사의 직선 답도는 그것이 2열이며, 일정 한 포석형식을 갖추고 있어서 매우 특징적이다. 황룡 사 답도는 황룡사가 존속하고 있던 시대를 설명하는 생생한 증거의 하나이지만 건축 유구라고 할 수 없어 발굴조사 당시에도 중요하게 취급되지 못하였다. 그러 나 답도에 주목해보면 황룡사의 가람계획 속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고 서로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는 건축계획의 한 요소였음을 알 수 있다.

    본 연구는 황룡사 중심 사역 내에 남아 있는 부전시 설과 포석시설을 살펴보면서, 특히 2열의 직선 답도에 대해 집중하여 고증하고자 한다. 유구에 관해서는 황 룡사 발굴조사보고서2)와 실측 자료3)를 바탕으로 살펴 보고, 답도의 기능은 불교의례와 관련시켜 최근의 연 구성과4)를 참조하였다. 황룡사는 각 건물들이 일시에 조성된 것이 아니므로 답도의 건축적 특징을 통해 그 설치시기와 목적을 규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연구가 고대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건축 유구를 통하여 고대 건축을 보다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연구 자에게 하나의 참조자료가 되기를 희망한다.

    2.황룡사지 유구

    2-1.중심축선상 포석시설: 직선 답도

    황룡사 직선 답도는 남북 중심축선상에서 동 서로 약 6.35m 떨어진 위치에 남아 있었다. 발굴조사 당시 중금 당과 목탑의 트렌치 내에서 답도석이 노출되었으나 당 시 전체 현황이 조사되지 못했다. 결과보고서(1984)에 답도석에 대한 실측치수, 평·단면도 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된 것이 없다. 정비공사를 하면서는 노출된 답도석 사이 바닥면에 잔디를 심는 등 이것을 답도면의 동·서 양측 경계석 정도로 이해했던 것 같다.(<그림 1> 참조)

    발굴도에서 목탑지 남편과 북편, 금당 남편에서 발견 된 답도석은 그 남북축이 일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 다. 발굴조사 이후 정비공사를 진행하면서 목탑지 남편 석등지(보고서상 제5석등지)와 함께 발견된 답도석은 석등지 주변의 유구만 표현되어 있다. 또 중문지 남면 에도 동쪽 계단지에 면해 있는 장대석 2매가 남아 있는 것을 사진과 도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그림 2> 참조)

    발굴도에서 양쪽 유구의 축선을 남북방향으로 연장해 보면, 남문~중문~목탑~중금당의 사이에 축이 일치되 는 2열의 답도를 확인할 수 있다. 황룡사지에서 건물 간 횡적인 연결5)은 익랑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이 부분은 검토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고대 사원 내부에서 2열의 답도가 확인된 것은 황룡사가 유일한 사례가 된다.

    2-2.주요 건물 외주 부전시설: 외주 답도

    황룡사에서 건물 외주 부전시설은 목탑과 금당에 설 치되어 있다. 목탑지는 탑구가 2중으로 설치된 것이 특징적인데, 일정한 폭의 면에 방전을 깔고 지대석으 로 마감하였다. 탑구는 목탑의 구획을 정하게 되는 경 계석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답도의 역할을 하였을 것으 로 생각된다. 2중의 탑구는 그 폭과 높이에 차이가 있 었다. 안쪽의 제1탑구 폭이 1.65m, 바깥쪽의 제2탑구 폭이 1~1.15m이며 제1탑구의 지대석은 기단 지대석보 다 15cm, 제2탑구석은 그보다 7.5cm 낮게 설치되어 있다.6) 이렇게 목탑 외주에 답도가 남아 있는 사례는 많으나 2중의 답도는 황룡사가 유일한 사례가 된다.

    중금당은 본 건물(9×4칸)의 외주에 차양칸을 덧붙인 구조의 건물이다. 차양칸의 기단은 목탑의 탑구와 같은 레벨이다. 그 폭은 기단규모 실측치7)를 토대로 추산하 면 2.9~3.33m이다. 차양칸에는 초석(한 변이 0.7~1m인 정방형)이 남아 있으므로 기둥을 세워 본 건물의 외진 주와 연결시키고 처마를 내게 되겠지만, 외주 답도의 기능도 하였으리라 생각한다. 황룡사 동금당도 창건시 에는 본 건물(7×4칸)의 외주에 차양칸을 덧붙인 형식으 로 밝혀졌다.8) 차양칸이 답도의 기능을 한다고 보는 이 유는 신라 불교유적의 금당지 외주 부전시설의 설치목 적을 규명하기 위함이 그 발단이었다. 특히 하층기단에 기둥을 세운 사천왕사지 금당지처럼 차양칸 초석의 위 치가 본 건물 쪽에 치우쳐져 있는 것은 구조적인 목적 외에 답도 폭을 확보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건물 외주 답도는 신라 고대 불교유적지의 금당지나 목탑지 등 주요 건물지에서만 확인된다. 사천왕사지의 금당지, 동 서목탑지, 동 서단석지와 고선사지 금당지, 천군동사지 금당지, 전 인용사지 십자형건물지 등에서 발견되었다. 답도는 신라시대 불교사원에서 전(殿)과 탑(塔)을 도는 의례(福會)를 설행하기 위해 설치한 것 으로 생각한다.9) 황룡사지외 유적의 답도 폭을 검토해 보면 고선사지 금당지의 폭은 좁은 편이나 그 외 건물 지는 1m가 넘어 보행에 충분한 폭이 확보된 것을 알 수 있다.(<표 1> 참조)

    2-3.건물 전면 부전시설: 강당 외부 의례공간

    황룡사 중금당과 강당 사이에 직선 답도의 흔적이 없다. 그런데 중금당 북면 기단 서쪽 끝과 강당 남면 기단 서쪽 끝에 남북 길이방향으로 장대석이 일렬로 남아 있었고, 중금당 북면의 장대석에는 이와 직교하는 33.6m 길이의 홈(凹溝)10)이 노출되었다.(<그림 3> 참 조) 이 홈은 장대석이 빠져나간 자리라고 생각된다. 황 룡사지에서 보통 지대석은 하부 적심석군의 기초 위에 설치하고 있으나, 목탑의 탑구 지대석처럼 하부 적심 없이 설치한 경우도 있다.

    이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중금당과 강당 사 이에 강당 폭만큼의 넓은 공간(약 52.5m × 22.3m, 도상 실측)을 구획하고 그 마당을 활용하였다는 것이다. 발 굴조사 결과로는 구획한 경계만 확인될 뿐 당시 이 공 간이 전부 조사된 것은 아니었다. 경계석이 있는 것으 로 보아 그 내부는 방전으로 포장하고 강당에서 행해 졌던 백고좌회, 강경의식 등 각종 의례나 행사를 위해 활용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11)

    황룡사 강당은 높은 기단 위에 세워지지 않았다. 강 당 기단이 목탑의 탑구, 중금당의 차양칸과 마찬가지 로 장대석 외벌대 1단의 높이에 건축된 것이, 강당을 중심으로 수백 명의 사람이 운집한 가운데 법회와 관 련 의례를 설행하기 위해 건물 내·외의 구분 없이 사 용하고자 함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주요 건 물의 남면에 넓은 야외공간을 구획하고 사용한 사례가 고대 건축에서 뚜렷이 확인된 것은 아직 없었다.

    단, 위의 <그림 4>에서 보는 것처럼 아스카시대 건 축된 일본 사천왕사의 경우, 금당 남면의 전열(塼列)12) 은 그러한 공간이 있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해준 다. 이 전열은 방전을 세워 박아놓고 일정한 영역을 구획하였던 양상으로 보이는데, 전돌을 세워 박는 것 은 고대건축에서 답도나 기단 등의 경계구조로 흔히 사용하였던 방식이다. 따라서 이것은 사천왕사에서 금 당과 목탑 사이의 넓은 외부 공간을 특정한 목적으로 활용하였던 흔적이라고 생각한다.

    3.직선 답도의 건축적 특징

    3-1.답도 배치

    직선 답도의 유구를 따라 축선을 중문에서부터 북쪽 으로 연장시켜 보면, 이 축선과 목탑 남편의 동 서 계 단의 중심이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목탑 남편 계단은 총 7칸의 평면에서 서에서 2, 4, 6번째 주칸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즉 이 답도는 현재 남아 있는 목탑의 남편 진입에 유리하도록 계획된 것이다.

    마찬가지 논리로 보면, 중문이나 중금당의 계단위치 에는 의도적으로 맞추려는 조정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2열의 진입방식은 그 축선이 기존 중금당 과 중문의 계단위치에는 맞지 않고 또 이를 변경하지 않고 있으며 직선축의 배열은 목탑을 중심으로 하여 매우 고정적이 되게끔 계획되었다는 것이다.

    목탑지 북편에는 중앙에만 계단이 있는데, 답도는 목탑 남편과 마찬가지로 직선축을 일치시켜 다시 2열 의 배열을 보이고 있다. 중문은 중심사역의 문으로서 답도의 배치가 중요해 보이는데, 그 배열이 동·서 계 단폭의 중앙에 일치하지 않고 다만 가 쪽으로 치우쳐 서 그 범위 내에는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직선 답도 는 목탑을 중심으로 그 배치가 확정되었고, 목탑의 중 건과 답도가 함께 계획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각 건물지의 계단위치와 직선 답도의 배치를 발굴도 를 통해 분석해보면 아래 <그림 5, 6>과 같다. 그림에 서 중금당과 중문의 계단위치는 건물지 유구분석 결과 를 반영한 것이며, 목탑 남쪽의 선대 석등지와 답도 간의 유구 중첩 현황은 4장에서 서술하였다.

    3-2.포석 형식

    직선 답도 부재는 폭 20~30cm, 길이 1~2m의 장대 석(화강석)이며 2~3개가 남북방향으로 길게 배치되어 1열을 구성하고 있다.13) 답도석은 건물지 사이 구간별 로 조금씩 다른 양상으로 남아 있다.

    특히 중금당과 목탑 사이 구간의 동편 답도는 장대 석 3개를 병렬로 깔았는데, 중앙의 부재가 양쪽 가의 부재보다 폭이 넓은 편이다. 그것을 판석이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나, 각 부재 상면 폭이 약 200-450-200mm 으로 배치되기 때문에 답도 포석의 형식적인 일면으로 이해된다. 또한 남북 길이방향의 답도석의 끝이 각 건 물 기단 지대석과 면하는 위치에는 반드시 방형석(方 形石)을 두고 있어서, 이 또한 포석의 기법으로 볼 수 있다. 방형석과 기단지대석이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니며 그 사이에는 일정한 공간이 있다. 이격 간격은 도상실 측한 결과 목탑 북편은 50cm, 목탑 남편과 금당 남편 의 경우 45cm, 60cm 등이다. 방형석은 답도의 동서 폭 (860~900mm)과 일치하며 장방형 또는 정방형이다.

    황룡사에서는 답도석의 포석 방법이 ‘(A) 장대석+장 대석’과 ‘(B) 장대석+판석+장대석’의 두 가지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고, 모두 그 시점과 종점에는 방형석을 설 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간별로 확인되는 답도석 의 유구는 대체로 다음 <표 2>와 <그림 7>에서 보는 것과 같다.14) 두 형식이 설치된 경위는 알 수 없고 조 정과 변경의 흔적도 현재로서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B형식이 보다 더 격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동편의 열이 우위를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즉 불교의례를 거 행할 때 동편에서 행진하는 쪽이 서편보다 신분이나 지위가 우위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경주 성동동 전랑지의 답도는 황룡사지 B형식(장대 석+판석+장대석)과 일치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 답도는 전랑지 내에서 목탑지로 추정되었던 전당지Ⅳ의 동 서 면에서 확인된다.15) 성동동 전랑지는 통일신라시대 궁 궐지 또는 명당지16) 등으로 추정되고 있는 유적이다.

    이 중 3×3칸 평면의 전당지Ⅳ는 유적에서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齋藤忠이 조사한 결과를 살펴보면, 전당지Ⅳ의 동 서 중심축선상에서 동 서 회 랑(장랑지Ⅳ 및 Ⅴ)과 연결되는 답도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보고서에는 이를 석도랑지(石渡廊址)로 보고, 정교하게 치석한 배수구의 하나로 판 단17)한 것 같다. 성동동 전랑지의 배수구는 대부분 전 돌이나 기와를 사용해서 만들었는데, 양쪽 가에 길이 방향의 전돌을 세워 놓고 가운데 방전 또는 기와를 놓 고 있어서 평면적으로 볼 때 비슷하다고 본 것이지만, 이것은 배수구가 아니라 익랑과 같이 중앙의 건물에 동·서방향으로 연결시킨 답도라고 보아야 한다.

    답도는 전체 폭이 850mm(2.8척)이며 중앙 판석이 조금 높게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또 길이방향의 답 도 끝에는 황룡사지 답도처럼 방형석을 설치하였으며, <그림 8>에서 보는 바와 같이 회랑지 기단과 접하는 위치에는 마치 재료분리대처럼 전돌 1열을 가로로 세 워 박고 다시 길이 1.8m(6척)의 가공석을 가로로 놓아 회랑지에 들어가기 위한 디딤석으로 사용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성동동 전랑지의 답도는 황룡사 직선 답도 B형식의 완형이자 원형으로 생각되며 황룡사 답도에 그 끝이 건물지에 면하는 부분(이격된 부분)에는 이처럼 가로 로 넓은 디딤석을 설치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4.직선 답도 설치 목적

    4-1.설치시기

    목탑 남면에서 발견된 석등 지대석(보고서상의 제5 석등지)은 방형의 선대 석등지(추정) 적심석군 위에 설치되어 있었다. 세 개의 적심석군은 표토에서 50cm 깊이에서 발견된 것으로 가람 중심축에서 동서로 6.5m 거리를 두고 나란히 마련된 것이다.

    이 세 석군의 규모는 동편이 동서 3m, 남북 3.2m, 중앙은 동서 2m, 남북 1.9m이며 서편은 동서 3.4m, 남 북 3.2m으로 모두 정방형이라고 할 수 있다. 중앙의 것이 좀 작은 편이다. 이들 석군은 18~20cm 크기의 냇돌을 층층이 다져 묻은 것으로 잔존 깊이는 약 1m 이며, 냇돌층은 5층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18) 보고서에 서는 이 세 석군을 모두 석등지로 추정하고 있으나 중 앙 적심석군의 크기가 작기도 하기 때문에 석등 외에 배례석, 향로석 등을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동 서 적심석군 위에서 답도석이, 중앙 석군 위에서 후대 석등 기단지대석이 발견된 것이다. 후대 석등은 선대 유구 중심에서 약 2.1m 남쪽으로 옮겨진 것이며 목탑지 탑구 지대석에서 남쪽으로 약 9.5m 위 치에 있다. 답도의 위치는 현재 남아 있는 목탑의 규 모와 계단위치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유구 중첩 현 황으로 볼 때 직선 답도는 목탑 창건 당시부터 있었던 것이 아닐 수 있으며 목탑의 중건 등으로 석등의 위치 와 규모가 변경되고, 중건 목탑의 평면과 그 사용 의 례에 맞게 답도가 설치된 것이다.

    3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2열 직선 답도는 그 축선 이 목탑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그 외, 중금당과 중 문 등의 계단위치에는 맞추어져 있지 않다는 것은 중 금당과 중문이 목탑보다 먼저 건축되어 있었던 정황을 알려주고 있다.19) 또한 답도석과 석등 기단지대석의 레벨이 큰 차이가 없고 포석기법이 동일한 유구가 통 일신라시대 유적에서 확인되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이 답도의 설치시기의 상한은 872년경 경문왕대의 중성시 기가 가장 유력하다고 생각한다. 그림 9

    4-2.2열의 진입방식

    황룡사와 마찬가지로 경주 사천왕사지에도 두 개의 진입로가 마련20)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2012년 사천왕 사지 중문지 중심에서 남쪽으로 약 40m 떨어진 위치에 서 발견된 석교는 사천왕사지 가람배치상의 중심축에서 동서로 약 3.6m 지점에서 동·서 귀부 북편에 조성된 배 수로를 건널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는 것이었다. 석교 와 중문의 높이차는 약 6m로서 두 석교의 중심선을 가 람배치도 상에서 연장시켜 보면 중문의 동 서 협칸의 중심에 정확히 맞추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석교 북쪽으로는 그 폭과 동일한 부전시설이 설치되 어 있어 2열의 답도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답도는 경사를 이루며 방전이 깔려 있는데, 전돌은 무문전 (30×40cm)과 보상화문전(한 변 33cm 정방형)이며 답도 의 경계에는 무문전을 세로로 2줄로 세워 박아서 마무 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석교에서 중문지 사이에는 석계가 있었던 흔적 도 발견되었다. 석교 중심에서 북쪽으로 9.2m 지점에 통돌식 계단석이 확인되었는데 이를 통해 계단 너비는 175cm인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제 위치에서 계단석이 출토된 것은 아니지만 석교에서 중문까지 경사지이기 때문에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 서 석교의 간격과 중문지의 동서 폭이 거의 동일하고, 동 서 통돌식 계단의 적심석이 그 열에 존재하는 것으 로 보아 석교에서 계단, 계단에서 중문지까지 하나의 통로로 연결된 것을 알 수 있다.21) 그림 10

    4-3.2열의 행렬과 불교의례

    황룡사는 창건 이후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왕 의 친행이 잦았고 국가적인 불교의례를 행할 수 있는 대규모 공간이 마련되어 있던 곳이다. 신라에서는 진 흥왕대부터 혜량을 승통으로 삼고 백좌강회와 팔관회 가 열리기 시작22)하였다. 황룡사에서는 613년 수나라 사신(왕세의)이 왔을 때 백고좌회를 처음 열었다고 한 다. 기록에 의하면 황룡사에서는 백고좌회, 보살계본 강연, 인왕경 강론, 연등회 등 여러 가지 강경법회와 불교의례23)가 설행된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당시 중국 사신이나 원광법사 또는 왕과 왕비 를 모신 불교의례를 재현해본다면, 그들이 황룡사에 도착한 후 남문에서부터 들어와서 주요 행사가 진행되 는 장소로 이동하여 자리를 정하기까지, 2열로 나란히 행진하고 그 뒤를 관리나 승려들이 따르며 목탑에까지 또는 금당에까지 이르는 행진24)이 선행되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 있다.

    9세기 당(唐) 사원 및 적산법화원 등지에서의 불교 의례를 상세히 기록한 일본 승려 엔닌의 일기25)를 참 조해 보면 당시 의례의 시작이 2열의 행렬에서 시작되 어 매우 절도 있게 진행된 것을 볼 수 있다. 행렬은 강당까지 이르고 동 서 북쪽의 회랑에 승려들이 줄지 어 앉은 가운데 강당과 그 동 서 공간이 의례를 진행 하는 장소가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26) 황룡사 중심 사역 내의 2열의 답도와 사천왕사지에서 석교에서부터 중문에 이르기까지 2열의 답도 역시 이러한 의례의 행 진을 고려하여 설치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5.결론

    황룡사 중심사역 내 외부공간에서 발견되는 부전시 설과 포석시설은 특정한 목적에 의해 설치되었다. 이 러한 시설은 당시에 일상적으로 또는 정기적으로 행해 졌던 각종 불교의례의 행진, 순회, 정렬 등의 목적으로 설치된 것으로 보이며, 건물과 건물군 전체의 관계 속 에서 계획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황룡사 중심축선상의 2열 직선 답도는 고대 불 교유적지에서도 유일한 사례로 주목된다. 이 직선 답 도는 통일신라시대 목탑의 중건과 함께 설치된 것으 로, 목탑의 남편 계단위치에 일치되도록 계획되었으며 목탑 중건 이전에 세워져 있던 중금당과 중문 등 기존 건물의 진출입 위치에 맞추어 조정되지는 않았다. 또 한 이 답도는 긴 장대석 2~3개로 1열을 구성하고 있 으며 건물지에 면하는 위치에 방형석과 디딤석을 사용 하여 매우 형식화된 통일신라시대의 포석기법을 보여 준다. 이러한 기법은 성동동 전랑지에서 그 완형을 확 인할 수 있다.

    직선 답도를 통해 황룡사 내에 2열의 진입방식이 통 일신라시대부터 폐사 전까지 존속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것은 황룡사와 사천왕사 등 특별히 국가에서 건립하고 국가적으로 중요하게 활용되었던 사원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계획요소이기 때문에 추후 고대 궁궐 유적과의 비교고찰27)도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

    Fig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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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룡사지 발굴조사 이후 답도 정비 현황; 국립문화재연구소 경주시(2014), 75쪽, <그림 3-51>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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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룡사 답도 유구;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1982), 『황룡사 유적발굴조사보 고서Ⅰ(도판편)』, <도판 11-1, 29-1, 217-2, 147-1<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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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룡사 중금당~강당 간 부전시설 범위() 및 관련 유구;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1982), <도판 13-1, 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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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사천왕사 금당~목탑 간 전열(塼列) 배치도 및 외부공간범위() 추정도; 天沼俊一(1937), 「제99도」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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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룡사 중문~목탑 간 답도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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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룡사 목탑~중금당 간 답도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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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 황룡사지 답도석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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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성동동 전랑지 실측도 및 답도 사진

    ; 朝鮮古蹟硏究會(1938), <도판 78> 편집, <도판 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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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룡사 목탑 남편 석등지 및 직선 답도;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1982), <도면 26-1> 편집, <도판 217-2, 2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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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천왕사지 배치도와 관련 유구; 국립경주문화재연 구소(2014), <도면 4> 편집, <사진 68, 98>

    Table

    신라 불교유적지의 건물 외주 부전시설 실측치

    ※황룡사 금당지 차양칸 폭은 발굴조사보고서의 하층기단 실 측치에서 상층기단 실측치를 뺀 값의 절반으로 구하였음.

    황룡사 직선축 답도 유구 폭과 형식

    Footnote

    • 국립문화재연구소·경주시, 『황룡사지 1단계 정비계획』, 2014, 46쪽
    •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황룡사 유적발굴조사보고서Ⅰ』, 1984
    • 국립문화재연구소·경주시, 앞의 보고서, 2014, 76~77쪽; 이 보고 서에 실린 답도석의 실측치 외 가람배치와 부가적인 치수는 발굴도 면을 캐드상에서 실측한 결과임을 밝혀둔다.
    • 국립문화재연구소 경주시, 「고대 불교의례 연구」 , 『황룡사 복원 기반 연구』(황룡사연구총서 6), 2010
    • 황룡사지에서 익랑은 세 금당과 원(原) 동·서 회랑을 연결하는 익랑, 종·경루(추정)와 동·서 회랑을 연결하는 익랑 등이 있다.
    •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앞의 보고서, 1984, 61쪽
    •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앞의 보고서, 1984, 53쪽
    •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앞의 보고서, 1984, 68쪽
    • 당시 탑돌이 의례는 민속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 절기에 따라 왕실구성원이 정기적으로 행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일반 신도나 승 려들은 일상적으로 탑돌이 공양의례를 행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金現感虎」, 『三國遺事』 권 5; 주경미, 「탑돌이 의례」 , 국립문화재연 구소 경주시, 앞의 책, 2010, 147~151쪽; 정해두, 「통일신라기 석탑 기단부 조영에 관한 연구」 , 경일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 2011.12, 53~55쪽
    •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앞의 보고서, 1984, 54쪽; 발굴조사 보고서에서는 중금당 북면의 홈을 중금당의 지붕면 낙수에 의한 홈 으로 해석하였다.
    • 황룡사에서 7세기 초반부터 행해졌던 백고좌회 등의 법회와 대 규모 불교의례가 강당과 강당 전면 공간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신복룡 역, 선인, 2007) 에 의하면 신라시대 적산법화원에서 행해졌던 경전강독에 대해 구체 적으로 알 수 있다. 당시 법회가 열릴 때는 200~250여 명의 신도들 이 참여하며, 법화경 강의는 2달간 강독되기도 하고 운집 장소는 주 로 강당이었으나 앉을 자리가 없는 신도들은 서서 이 강독을 들으면 서 참여하였을 것이다; 조범환, 「강경법회 의례」 , 국립문화재연구소 경주시, 앞의 책, 2010, 135~136쪽
    • 天沼俊一編纂, 『四天王寺圖錄伽藍編』, 四天王寺, 1937, 59~61쪽; 제95~99도 전열 내에는 방전을 깔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것은 천군리사지 금당지 외주 답도면 부전시설과 흡사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 국립문화재연구소·경주시, 앞의 보고서, 2014, 75쪽
    • 답도석 실측치는 국립문화재연구소·경주시의 보고서(2014)에 실 린 치수를 재인용하였다. 이 실측치는 현재 정비되어 있는 상태에서 상면의 전체 폭을 실측한 것이며 부재 간 이완된 폭을 포함하고 있 어서 개별 부재 실측치의 합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 朝鮮古蹟硏究會, 『昭和十二年度朝鮮古蹟調査報告』, 1938; 영인 본, 도서출판 민족문화, 1987, 87~88쪽
    • 이강근, 「성동동 전랑지의 성격에 대한 재조명」 , 선사와 고대, 38호, 2013년 6월
    • 齋藤忠, 『新羅文化論攷』, 吉川弘文館, 1973, 146쪽
    •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앞의 보고서, 1984, 120~121쪽
    • 답도 축이 중금당과 중문의 계단위치에 맞지 않으나 중금당 남 편은 차양칸으로 이어지고, 중문의 계단폭 내에 있기 때문에 답도를 따라 진행되는 2열의 행렬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사천왕사Ⅲ 회랑외곽 발굴조사보고서』, 2014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앞의 보고서, 2014, 105쪽; 답도축을 북 쪽으로 연장하면, 금당의 서에서 2, 4번째 주칸의 중심에 위치하나, 계단위치와는 맞지 않았다. 목탑 사이의 적심석군 위치를 감안하면 동·서 목탑 사이에 진입축이 설정되어 각 목탑의 진입이 서동방향 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 혜량은 551년 신라로 귀화한 고구려 승려로 신라 최초의 승통이 며 신라불교 사상 처음으로 백좌강회와 팔관회를 주재한 인물이다. 그래서 진흥왕이 궁궐을 지으려다 사찰로 고쳐 지은 것은 혜량의 역 할이 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 혜량은 북조 불교의 경향 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고, 혜량이 진흥왕에게 국가적인 규모의 법회를 권고하였을 것이다. 둘째로 큰 불사를 신축하는 데 따른 부 담감을 진흥왕은 황룡의 출현이라는 상황을 연출시켜 극적으로 표현 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즉 혜량이 북위의 영녕사를 알고 있었을 수 있고, 백고좌회나 팔관회와 같은 대규모의 법회를 위해서는 궁궐 크기의 거대한 국찰이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신라에서 팔관회가 572년 개최된 것으로 보면 백좌강회의 연도도 그 어간으로 생각된다; 김복순, 「황룡사에서 이루어진 불교의식」 , 국립문화재연구 소 경주시, 앞의 책, 2010, 102~104쪽
    • 『삼국유사』 및 『삼국사기』의 황룡사 법회기록; 국립문화재연구 소 경주시, 『황룡사 건물복원 기초연구』(황룡사연구총서 10), 2012, 129쪽 <표 5-6>
    • 신라시대 왕의 출궁행차에 대해 알 수 없지만 후대 고려시대 왕의 거동 시에 갖추었다는 여러 가지 의장과 그 행렬이 있었던 것 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조범환, 「팔관회」 , 국립문화재연구소 경주 시, 앞의 책, 2010, 131쪽
    • 엔닌 저, 앞의 책(2007)을 말한다.
    • 권1(838년) 12월 8일자, 당(唐) 국기일(國忌日)의 의례; 엔닌 저, 앞의 책, 2007, 66~68쪽
    • 당 대명궁 함원전의 용미도(龍尾道)나 발해상경성의 제2 궁전지 주건물과 같이 중국과 우리나라의 고대 궁궐지에서도 장방형 건물 의 동 서 계단에 진입축이 일치되도록 답도가 계획된 사례를 찾아 볼 수 있다.

    Reference

    1.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1984) 『황룡사 유적발굴조사보 고서Ⅰ』,
    2. 朝鮮古蹟硏究會 (1987) 『昭和十三年度朝鮮古蹟調査報告』, 昭和十三年八月, 도서출판 민족문화,
    3. 엔닌 저, 신복룡 역주 (2007 )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4. 국립문화재연구소·경주시 (2010) 『황룡사 복원 기반 연구』(황 룡사연구총서 6),
    5.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14) 『四天王寺Ⅲ 회랑외곽 발굴조 사보고서』,
    6. 국립문화재연구소·경주시 (2014) 『황룡사지 1단계 정비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