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 론
1-1.연구의 배경과 목적
한국과 중국 및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선 종사원의 연구에서, 원류가 되는 중국 선종사원이 갖는 중요성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현재까지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선종사원에 관한 연 구는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어 왔으며, 시기적으 로는 남송(南宋, 1127~1279)에 집중되어 있다. 그 이유 는 먼저, 일본은 중세 카마쿠라시대(鎌倉時代, 1180~ 1333)에 남송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선종과 선종사원을 도입하였고, 또 12세기 중엽 일본인 입송 유학승들이 남송 강남지역에 위치한 거점 선종사원의 형태와 의례 등을 상세하게 조사·기록한 『오산십찰도(五山十刹圖)』 가 일본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중국 불교 사에서 선종이 가장 번성했던 때가 남송이었기 때문에, 그 시대에 연구가 집중되는 것 또한 당연한 귀결일지 도 모른다.
일본의 학계에서 『오산십찰도』를 중심으로 한 남송대 선종사원에 관한 연구는 20세기 초부터 시작되었고,1) 요코야마 히데야(横山秀哉)가 이를 집대성하여 일본 중 세 선종사원 전반에 대한 연구의 기반을 다졌다.2) 그리 고 세키구치 킨야(関口欣也)는 남송 오산에 대해, 전등 서(傳燈書), 사지(寺志), 지방지(地方志) 등 방대한 문헌 사료의 섭렵에 현지 조사를 더해, 사원의 연혁과 가람 배치 및 건축 구조와 양식에 관한 연구 성과를 발표했 다.3) 일본에서의 연구 성과는 이른 시기부터 중국에 소 개되었고,4) 이에 기반해 근래까지 남송을 중심으로 선 종사원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5)
국내의 연구로는 서아리6)가 북송(北宋, 960~1127) 1103년(崇寧2)에 자각종색(慈覺宗賾) 선사가 저술한 『선 원청규(禪苑淸規)』에 나오는 가람 구성요소들의 기능과 의례를 분석하고, 이것을 남송 『오산십찰도』의 가람배 치도 및 건축도와 비교 고찰했다. 『선원청규』는 현재까 지 북송대 선종사원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거의 유 일한 자료로 인용되어 왔고, 앞서 소개한 일본 학자들 의 연구에서도, 이 청규의 내용을 근거로 『오산십찰도』 등을 통해 확인되는 남송대 선종사원의 가람 형태가 북송대에 출현해 있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근래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고려 말 나옹(懶翁, 1320~1376) 이 중창한 회암사지의 가람 유구를 해석한 일련의 연 구7)에서, 송·원대 선종사원의 가람에 대한 단편적인 고찰이 이루어진 바 있다.
그런데 남송에 초점이 맞추어진 기존의 중국 선종사 원에 관한 연구에서는, 그 전 시기인 북송대 선종사원 에 대해 『선원청규』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그것이 당시 실제 선종사원의 정황을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한 검토는 이루어진 바 없다. 그리고 기존 에 송대 선종사원의 특징이라고 주장되고 있는 것들이, 당시 다른 종파의 사원과 어떤 차이를 가지는지에 대 해서는 다루어지지 않은 점은, 기존 연구가 가지는 한 계라 할 수 있겠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기존 연구에서 다소 소홀히 다 루어졌던 북송대 선종사원을 대상으로 그 가람 구성 내용에 초점을 맞추어, 『선원청규』의 내용이 당시 선 종사원의 실상을 반영하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고, 또 당시 타종파 사원과의 비교 고찰을 통해 그 특징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2.연구의 범위와 방법
연구의 공간적, 시간적 범위는 중국의 북송대 선종사 원을 대상으로 하며, 주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시기 선종사원의 유구는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문헌사료 분석을 위주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먼저 『선원청규』에 대한 분석은, 일본과 한국에서 출 판된 역주본8)을 참고하였고, 기존 연구에서도 다루어진 바 있기 때문에, 본문에서는 청규에 나오는 전각들을 성격별로 분류하여 각 전각의 기능과 의례를 중심으로 최대한 간략하게 정리했다.
그리고 북송대 선종사원의 실례로, 덕홍각범(德洪覺範, 1071~1128)의 저작 『석문문자선(石門文字禪)』(卷第二十一 「記」) 수록 「담주대위산중흥기(潭州大潙山中興記)」9), 즉 당(唐) 후기 9세기 초 위산영우(潙山靈祐, 771~853)가 창 건한 동경사(同慶寺)가 북송 1104년(崇寧3)에 화재로 소 실된 직후 가람을 재건하는 과정의 기록을 분석해, 『선원 청규』에서 파악되는 가람 구성과 비교하여, 청규와 실제 사원과의 관련성을 검토했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천태종(天台宗) 승려 죠진(成尋, 1011~1081)이 북송 1072년(熙寧5)에 중국에 건너가 이 듬해까지 천태산(天台山), 개봉(開封), 오대산(五臺山) 등 지의 사원을 유력하며 남긴 일기 형식의 견문록인 『참 천태오대산기(參天台五臺山記)』10)(전 8권)에 기록된 주 요 사찰의 가람 구성 내용을 고찰하고, 앞서 고찰한 선 종사원과의 비교를 통해, 북송대 선종사원 가람 구성 의 특징을 찾아보았다.
2.북송대의 선종과 선종사원의 운영
송대의 불교는 선종을 비롯해 천태종, 율종(律宗), 화 엄종(華嚴宗), 정토종(淨土宗)이 주요 종파로 전개되고 있었고,11) 그중에서 선종은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한 사대부(士大夫)의 지지를 얻으며 서서히 불교계의 주류 로 부상해 갔다.12)
오대(五代)를 거치면서 성립된 선종오가(禪宗五家) 중 에서 북송 초기에는 임제종(臨濟宗), 운문종(雲門宗), 법 안종(法眼宗)이 흥성했고, 중기 무렵부터는 조동종(曹洞 宗)이 재도약했다. 그리고 임제종 계통에서 양기방회(楊 岐方會, 992~1049)와 황룡혜남(黃龍慧南, 1002~1069)의 두 선장(禪匠)이 출현해, 그들 문하가 선종을 이끌며 양 기파(楊岐派), 황룡파(黃龍派)를 각각 형성, 기존의 오가 에 더해 오가칠종(五家七宗)으로 불리게 되었다. 남송대 에는 운문종이 점차 쇠퇴하고 임제종과 조동종이 주류 가 되었는데, 특히 임제종 양기파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선의 수행 방법으로 임제종에서는 원오극근(圜悟克勤, 1063~1135)에서 비롯되어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 가 완성한 간화선(看話禪)13)을, 조동종에서는 굉지정각 (宏智正覺, 1091~1157) 이래의 묵조선(黙照禪)14)을 각각 표방했다. 원대(元代)에도 선종은 여전히 불교계의 중심 을 점했고, 특히 임제종 승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한편 북송대에는 선종사원의 주지 계승 방식에 구별 이 생겨나, 기존의 사제 간에 주지를 계승하는 갑을도 제원(甲乙徒弟院)에 더해, 시방주지제(十方住持制)라 하 여 특정 문파에 국한하지 않고 두루 명덕(名德)의 주지 를 맞이하는 시방원(十方院)이 출현했다. 이 중에서 시 방원의 격이 더 높았고, 남송 오산(五山) 주지제도의 기초가 되었다.15)
『선원청규『에서 보이는 북송대의 선종사원 운영은, 주지를 중심으로 동반(東班)의 지사(知事)와 서반(西班) 의 두수(頭首)가 각각 주지를 보좌해 핵심 업무를 분장 하였다. 지사는 사원의 경영과 관련된 일체의 업무를 관장하고, 두수는 중승(衆僧)의 수행과 교육을 맡았다. 지사와 두수는 담당하는 업무의 내용에 따라 세분되어 있었고,16) 이들 아래에 다시 소두수(小頭首)와 행자(行 者)가 배속되어 실무를 처리했다.
사원의 경제기반은 장원(莊園) 경영과 단월(檀越)의 기진(寄進)에 의해 운영되었고, 이를 담당하는 역직(役 職)으로 장원의 관리와 수세(收稅)를 맡는 장주(莊主) 와, 시가(市街)에 나가 권화(勸化)하여 단월과 시주를 모으는 화주(化主)가 있었다.
선종이 최고로 번성했던 남송대에는 선종사원의 시방 주지제나 지사·두수에 의한 사원 운영 등이 교종이나 율종 사원에도 채용되어 일반화되었다. 또 유명한 선사 들에게 배움을 청하는 천태종 승려들도 다수 출현했고, 천태종 사원에도 선종사원의 청규가 채용되는 경우도 있었다.17)
3.『선원청규』에 기록된 선종사원의 가람 구성
청규는 선종사원에서 수행승들이 지켜야할 의례, 수 행 및 생활의 규범을 성문화한 것이다. 따라서 청규에 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도량인 가람을 구성하 는 각종 건물의 종류와 기능을 비롯한 다양한 정보들 이 담겨 있다. 그중에서 『선원청규』는 현재 북송대 선 종사원의 가람 구성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살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우선 『선원청규』(이하, 청규)를 통해 그 명칭이 확인 되는 건물은 삼문(三門), 불전(佛殿), 나한당(羅漢堂), 수 륙당(水陸堂), 진당(眞堂), 토지당(土地堂), 법당(法堂), 방장(方丈), 침당(寢堂), 고당(庫堂) · 주(廚) · 창름(倉廩), 승당(僧堂), 본료(本寮), 장전(藏殿), 간경당(看經堂), 욕 실(浴室), 동사(東司), 독료(獨寮), 단과료(旦過寮), 객위 (客位), 전자료(前資寮), 수좌료(首座寮), 시자료(侍者寮), 연수당(延壽堂), 중병각(重病閣), 동행당(童行堂), 행자료 (行者寮), 낭무(廊廡), 보동탑(普同塔), 해원(廨院), 마원 (磨院) 등이다.
다만, 청규에는 이들 건물의 형태와 배치 정황을 알 수 있는 내용은 거의 없고, 각 건물들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의례와 수행·생활에 관한 작법과 행법, 즉 기능 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선행 연구18)에서 고찰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음 장 에서 소개하는 북송대 선종사원의 실제 사례와 비교를 위해, 건물들의 성격에 따라 의례 공간, 주지의 교화 (敎化) 공간, 수행 및 생활 공간, 사무(寺務) 공간, 삼 문 및 기타로 분류하고, 각 건물의 기능을 간략히 소 개하는 수준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3-1.의례 공간
불전, 나한당, 수륙당, 토지당, 진당, 장전, 간경당 등 을 의례 공간으로 분류했다.
불전은 대전(大殿), 존전(尊前) 혹은 전(殿) 등으로 표 기되어 있는데, 주지가 설법하는 법당이나 중승들이 수 행하는 승당 등에 비해 언급되는 내용은 매우 소략한 편이다. 이곳에서는 새 주지가 부임할 때 독경(讀經)· 소향(燒香)하고,19) 삼팔염송(三八念誦)20) 때에는 소향과 삼례(三禮)21)하며,22) 황제의 성절(聖節)에는 간경도량(看 經道場)이 열렸다.23) 행자(行者)는 매일 저녁 불전에서 염불하도록 했다.24) 또 노동할 때 입는 옷인 작무의(作 務衣)를 입은 채로 불전에 오르는 것을 금하는25) 등 불 전에 대한 존숭의 예를 규정했다.
청규에는 나한당과 수륙당26) 자체에 대한 언급은 없 으나, 두 건물의 관리를 담당하는 나한당주(羅漢堂主), 수륙당주(水陸堂主)의 업무를 적은 내용27)을 통해 그 존재가 추정된다.
토지당에 대해 청규에서는 가람과 불법의 수호신인 진재(眞宰)28)와 토지용신(土地龍神)을 모신다고 했다. 토 지당에서는 신임 주지가 입원할 때 독경·소향하고, 삼팔 염송 때에는 주지와 지사, 중승들이 차례로 소향하며, 하안거(夏安居) 결제(結制) 전날(4월 14일)에 중승들이 하안거의 무사원만과 사원의 융성을 기념하는 염송을 행했다.29)
진당은 선종의 초조 달마(達磨)와 개산(開山) 및 역 대 주지의 진영을 봉안하는 건물로, 조사당(祖師堂) 또 는 조당(祖堂)이라고도 한다. 청규에는 신임 주지가 입 원 때 독경·소향하고, 주지의 장례 기간에는 침당(寢 堂)30)에 입적한 주지의 진영을 안치했다가, 신임 주지 가 들어오면 그것을 진당으로 옮긴다고 했다.31)
불립문자(不立文字)·교외별전(敎外別傳)을 표방하며 소 의경전을 인정하지 않는 선종에서는 경전을 중시하지 않 았다고 하지만, 청규에는 경전을 보관하는 장전과 간경 당에서의 작법이 상세히 적혀 있어, 북송대 선종사원에 서도 통상적으로 간경이 행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장전은 장주(藏主)가 관리를 맡고, 간경당에는 성상(聖 像)이 안치되고 간경용 책상이 갖추어져 있었으며 간경 당수좌(看經堂首座)가 관리와 간경 작법을 주재했다.
3-2.주지의 교화 공간
주지의 교화 공간은 주지가 설법하는 법당과, 법당 에서의 설법 외에 따로 가르침을 베푸는 방장 일곽이 해당한다.
법당은 주지가 수행승들을 깨달음의 경지로 이끌기 위해 설법하고 문답하는 건물이다. 주지가 법당에 올라 정규의 설법을 하는 것을 상당(上堂) 혹은 대참(大參)이 라고 하며, 또 이른 아침에 하기 때문에 조참(早參)이라 고도 부른다. 청규에는 ‘오일승당(五日陞堂)’이라 하여, 매월 5일마다(1, 5, 10, 15, 20, 25일) 행하도록 정해져 있다. 설법 때에는 행자와 시주, 그리고 임기를 마치고 퇴원(退院)하는 주지도 법당에 들었다. 법당 안에서 두 수는 수행승들을 이끌고 서쪽에 서고, 지사는 행자들을 이끌고 동쪽에 서며, 퇴원 주지와 시주는 각각 두수와 지사 앞에 자리한다.32) 법당 안에 불상은 없고, 중앙에 마련된 법좌(法座) 위에 선의(禪椅)가 놓여 있을 뿐이 며, 주지는 이 선의에 올라 앉아 설법한다. 설법에 임하 면 법당 안의 북을 쳐 각자의 진퇴(進退)와 법회의 절 차를 진행했다. 그 밖에 법당에서는 수계(受戒)33), 시주 의 청에 의한 간경34)이나 중연재(中筵齋)35) 등도 행해 졌다. 그리고 주지 장례식 때에는 법당 내부를 중앙과 동·서 세 공간으로 나누어, 서쪽에는 감(龕: 관)을 놓고, 동쪽에는 와상(臥床), 의가(衣架) 등 주지가 생전에 사 용하던 물건을 진설하고, 중앙에는 주지의 진영을 걸고 의식을 거행했다.36)
방장은 주지의 거처임과 동시에, 입실(入室)이라고 하 여 수행승을 한 명씩 방장으로 들여 친히 수행의 정도 를 확인하고 지도하는 곳으로, 당두(堂頭)라고도 부른 다. 청규에 의하면 입실의 때는 특별히 정해져 있지 않 고, 수시로 수행승의 청에 응해 행해졌던 듯하며, 주지 는 방장 안에 놓인 선의에 앉아 문답했다.37)
또 주지와 관련하여 침당이라는 건물이 나오는데, 이 곳에서 정기적으로 소참(小參)38)이 행해지고, 주지의 장 례식 때에는 진영을 걸고 장례 의식을 행했다.39) 남송의 『오산십찰도』에는 침당을 ‘전방장(前方丈)’이라 했고, 가 람배치도상의 법당 뒤 방장 앞에 위치한다.<그림 1>40) 남송대 청규에 의하면 침당은 위의 기능 외에도 주지가 직접 빈객을 접대하거나, 특별히 지사와 두수 등 역직들 에게 차를 베푸는 곳이기도 했다.41) 즉, 침당은 주지의 일상 거처인 방장에 대해 공식적인 응접과 의례의 공간 으로, 북송대에도 방장과 더불어 그 전방에 배치되어 주 지 영역의 일곽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3-3.수행 및 생활 공간
승려들의 수행과 생활의 공간으로 승당과 중료가 있 고, 아직 득도(得度)하지 않은 동행(童行), 즉 행자들을 위한 건물로 동행당과 행자료가 있었다. 그리고 욕실과 동사, 즉 변소도 생활 공간으로 분류했다. 이 중에서 특히 참선수행과 일상의 생활을 겸하는 승당과 중료는 법당 및 방장 일곽과 더불어 송대 선종사원을 특징짓는 대표적인 가람 구성 요소이다.
승당은 수행승들이 구름처럼 모이는 곳이라 하여 운 당(雲堂) 또는 운수당(雲水堂)이라고도 부르며, 수행승 들이 좌선과 식사 및 수면을 하는 곳이다. 그 외에 청 규에는 삼팔염송 때의 소향, 하안거 결제·해제 전날의 순당(巡堂)42)과 염송 및 중승들을 위한 고사(庫司)43)의 차 공양44), 그리고 수계의식45)이 승당에서 행해진다고 했다.
승당(그림 2) 안 중앙에는 성승상(聖僧像)이 안치되 고, 그 주위에 길게 이어진 상(床)이 설치되어 있었다. 새로 입원한 수행승은 이 상에서 법랍에 따라 단(單) 이라 부르는 자리를 지정받는데, 이것을 괘탑(掛搭)이 라 한다. 각 단의 안쪽 끝에는 가사와 이불들을 수납 하는 함궤(函櫃)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상이 일반 중승 들이 수행하는 내당(內堂) 부분이며, 그 전면에 지사와 두수 등 역직들이 좌선과 식사를 하는 외당(外堂)이 부 가되며, 지사의 단은 상칸(上間: 정면에서 봤을 때 오 른쪽), 두수의 단은 하칸(下間: 왼쪽)에 각각 마련된다. 역직들은 각자에게 배정된 별도의 요사에서 잠을 자기 때문에 외당의 단의 깊이는 내당에 비해 짧다. 또, 승 당 후면에는 후가(後架)라고 하는 세면장이 마련되어 있었다.46)
승당이 좌선수행의 공간이라면, 중료(그림 3)는 경전 과 어록을 읽고, 쉬면서 차를 마시거나, 바느질, 세탁, 이발 등을 하는 휴식과 생활을 위한 공간이며, 청규에 는 상료(上寮) 혹은 본료(本寮)로도 적고 있다. 중료 안 에는 중앙에 성상(聖像)이 안치되고, 주위에는 승당과 마찬가지로 길게 이어진 상이 설치되며, 여기에서도 중 승들의 법랍을 기준으로 각자의 자리를 정하는 괘탑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승당과는 달리 중료의 단에는 경전 이나 어록을 읽을 수 있는 책상과, 각자의 소지품을 수 납하는 경궤(經櫃)가 설치된다. 요주(寮主), 요수좌(寮 首座)가 배정되어 중료에 머물면서 관리했고,47) 건물 후면에는 바느질, 세탁, 이발 등을 하는 파침처(把針處) 라는 부속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48)
행자들이 수행하는 동행당은 행자당(行者堂)이라고도 한다. 청규에 기록된 동행당은 승당과 마찬가지로 내부 중앙에 성승이 안치되고 주위에 긴 상이 마련되어 있으 며, 역시 괘탑을 통해 자리를 지정받았다.49) 행자료에서 도 간경이 이루어졌으며,50) 중료에 준하는 내부 진설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욕실은 선명(宣明)이라고도 하며, 욕주(浴主)가 관리를 담당한다. 청규에는 입욕 때 중승, 행자, 주지, 지사 순으 로 욕실에 들도록 하여, 청규가 수행승 본위의 규범임을 짐작케 한다. 욕실 내부는 상당(上堂)과 하당(下堂)의 구 분이 있어, 법랍이 높은 노숙(老宿)이 상당을, 낮은 이가 하당을 각각 사용토록 했다.51)
선종사원에서 변소를 흔히 동사라고 하며, 동정(東淨), 서정(西淨) 혹은 서사(西司)라고도 하는데, 이들 명칭과 실제 가람 내에서의 위치와는 관련이 없다. 청규에는 정 두(淨頭)가 동사의 관리를 맡는다고 했고, 대소변에서 용변 후의 세정에 이르기까지 동사에서의 행법에 대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52)
3-4.사무 공간
사무 공간에는 고당, 두수 이하 제반 역직의 요사, 그리고 마원과 해원 등이 해당된다.
고당은 일반적으로 고원(庫院)이라고 하며, 지사의 요사와 음식을 조리하는 주방, 그리고 식재료 등을 보 관하는 창고 등으로 구성된 복합 건축군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청규에 의하면 지사에는 감원(監院), 유나(維 那), 전좌(典座), 직세(直歲)의 네 지사가 있었는데,53) 이 중에서 유나의 요사인 당사(堂司)만 따로 세우고,54) 나머지 세 지사의 요사는 고당 안에 마련되었다.55) 그 리고 주방 앞에는 소종(小鐘), 운판(雲板), 목어(木魚), 북을 걸어두고 중승의 기상, 식사, 노동(作務) 등의 때 와 진퇴를 알렸다.56)<그림 4>
청규에는 위의 지사 외에, 각종 사무를 담당하는 다양 한 역직들이 나오는데, 수좌(首座), 서기(書記), 장주(藏 主), 지객(知客), 욕주(浴主), 고두(庫頭)의 여섯 두수57), 그리고 죽가방(粥街坊)·미맥가방(米麥街坊)·채가방(菜街坊)· 장가방(醬街坊)·장가방(藏街坊)의 가방화주(街坊化主)58), 화 엄두(華嚴頭)·반야두(般若頭)·경두(經頭)·미타두(彌陀 頭),59) 수두(水頭)·탄두(炭頭),60) 마두(磨頭), 원두(園頭), 장주(莊主),61) 해원주(廨院主), 연수당주(延壽堂主), 정두 (淨頭), 전주(殿主)·각주(閣主)·탑주(塔主)·나한당주(羅漢堂 主)·진당주(眞堂主), 종두(鐘頭), 성승시자(聖僧侍者)·노두(爐 頭)·직당(直堂),62) 요주(寮主)·요수좌(寮首座), 당두시자(堂頭 侍者)63) 등이다. 그리고 그 아래에 각각 행자들이 배속 되어 잡역에 종사했다. 당시 사원에는 두수를 비롯한 이들 역직의 요사가 독립된 건물이나 혹은 관리를 맡은 건물의 부속실 등의 형태로 마련되어 있었다.
고당에서의 식량 조달과 관련하여, 마두(磨頭)라는 역 직의 명칭을 통해 마원의 존재가 추정되는데, 마원은 방 앗간이며, 마두는 마주(磨主)라고도 하여 마원의 관리를 담당한다. 청규에는 마원에 누사(漏篩)와 진사(塵篩) 두 종류의 설비가 있고, 누사는 곡식을 곱게 빻고 돌을 제 거하며, 진사는 거칠게 빻되 먼지를 제거한다고 했다.64)
해원주(廨院主)는 해원의 책임자로, 청규에는 해원이 곡식 매매, 행각승의 숙식, 대관업무, 시주의 수취(收聚), 원지에서 오는 시주의 영접 등과 같이 주로 외부의 세 속과 관련된 일체의 사무를 처리하는 곳이라 했고,65) 사 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설치되었다.66)
3-5.삼문, 제료(諸寮), 보동탑 및 기타
먼저 삼문67)은 불전 앞에 위치하는 문으로, 고대 사 원의 중문(中門)에 해당한다. 새로 입원하는 승려는 삼 문 아래에서 삿갓을 벗어야 하고,68) 신임 주지는 삼문에 서 소향하며,69) 이곳에서 관인(官人)을 영접하는 등,70) 사원으로의 정식 출입 의식이 행해지는 곳으로 인식되 고 있었다.
청규에는 각종 역직들의 요사 외에도, 새로 입원하 는 신도(新到)가 승당에서의 정식 괘탑을 허락받을 때 까지 임시로 머무는 요사로 독료, 전자료, 단과료가 있 다고 했다.71) 독료는 단료(單寮)라고도 하며, 명덕(名 德)의 선사가 입원할 때 머문다고 했다. 전자료는 이 전에 본 사원에서 지사나 두수, 화주를 역임했던 승려 가 머물며, 이들에 해당하지 않는 자는 단과료에 머문 다고 했다. 그리고 다른 사원의 주지가 방문하면 객위 에서 안하(安下)토록 했다.72)
그리고 병승(病僧)이 요양하는 건물로 연수당이 있 는데, 이를 성행당(省行堂)이라고도 했다.73) 연수당주가 간호를 비롯한 제반 사무를 담당했고, 병이 심해지면 중병각(重病閣)으로 옮긴다고 했다.74) 또 병승이 입적 하면 다비(茶毘)하여 유골을 보동탑에 매안하고,75) 이곳 의 관리를 담당하는 탑주(塔主)를 두었다.
그밖에 대종(大鐘)의 관리를 맡은 종두(鐘頭)76)의 존재 를 통해 대종이 걸린 종각(鐘閣)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고, 낭무(廊廡)에서 경행(經行)한다고 했으니,77) 영역을 두르거나 건물 사이를 연결하는 낭의 존재도 짐작된다.
4.북송대 선종사원의 실례: 대위산 밀인사
현재 호남성(湖南省) 영향현(寧鄕縣)에 있는 위산(潙山) 밀인사(密印寺)는, 중국 선종 오가의 하나인 위앙종의 개 조(開祖) 위산영우가 당 원화(元和, 806~820) 말 무렵에 개창한 사원에서 비롯되었다. 『송고승전(宋高僧傳)』(988) 에 의하면, 당시 이곳은 담주(潭州) 장사현(長沙縣)에 속 했는데, 영우가 위산을 지나다가 머물고자 하니 그곳 백 성들이 힘을 모아 함께 절을 지었고, 이때 인근 상담현 (湘潭縣) 일대를 통치하고 있던 양양연솔(襄陽連率) 이경 양(李景讓)이 귀의해 조정에 산문의 이름을 주청하여 동 경사라 불리게 되었다.78) 이후의 자세한 연혁은 확인되 지 않는데, 북송대에는 ‘대위산(大潙山) 밀인사(密印寺)’로 불렸고, 진여모철(眞如慕喆, ?~1095)이 주지로 있을 때에 는 2천 명의 승려들이 수행하던 대가람이었다고 하나,79) 1104년에 화재로 가람이 소실되고 말았다. 이후 10여 년 에 걸쳐 가람의 재건이 이루어졌고, 이 과정을 기록한 것 이 덕홍각범의 「담주대위산중흥기」 (이하 「중흥기」 )이다. 「중흥기」 에 기록된 밀인사 가람의 재건 과정을 시간 순으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먼저 화재로부터 3년이 지난 1107년(大觀1)에는 법 당과 대전, 침실이 겨우 건립되었다고 했는데, 대전은 불전, 침실은 주지의 방장으로 보이며, 중승들이 수행 과 생활하는 데 필요한 부속 시설들은 아직 갖추어지 지 못했다.80)
당분간 가람 재건 공사는 지지부진하다가, 1110년에 공인선사(空印禪師) 식(軾)이 주지로 부임하여 재건에 박차를 가했다. 먼저 종을 주조해 불전 동무(東廡)에 종루를 세워 걸었고, 불전 서무에는 경장(經藏)을 지어 경전을 보관했다.81)
이듬해 1111년(政和1)에는 선법당(善法堂) 뒤에 우화 당(雨花堂)을 짓고, 불전 앞 낭(廊)의 동쪽에 여러 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고원(庫院)을, 그리고 조감(祖龕) 서쪽 으로 낭을 달아내 당사(堂司)를 지었다고 했다.82) 선법 당은 곧 법당이고, 그 뒤쪽에 신축한 우화당은 원문에 ‘야참(夜參)이 파하니 (달빛이) 마당 가득 빈분(繽粉)하 도다(夜參旣罷繽粉滿庭)’라고 한 것으로 보아, 만참(晩 參), 즉 소참(小參)이 행해지는 건물로 보인다. 『선원청 규』에 의하면 소참은 침당에서 행한다고 했으니, 우화당 은 방장과 더불어 주지 영역을 구성하는 침당이라고 생 각된다. 그리고 조감과 당사는 각각 조사당과 유나료이 다. 고원은 ‘서무(庶務)를 총괄하는 곳’, 당사는 ‘청정한 대중(淸衆)을 이끄는 곳’이라고 했는데, 각각 『선원청규』 에 언급된 고원과 유나료의 기능을 잘 표현하고 있다.
다음 1112년에는 승당을 다시 짓고, 오백나한을 조 성하여 각(閣)에 봉안했다고 하니 나한각이 건립된 것 으로 보인다.83) 다시 이듬해 1113년에는 나무로 장륙 (丈六)의 불보살상을 조각해 천공주(天供廚)라 편액한 주방 남쪽에 불전을 세워 봉안하고, 방장 앞에는 신종 (神宗, 1068~1085 재위)의 어서를 봉안하는 어서각(御 書閣)를 지었다.84)
이듬해 1114년에는 삼문을 중건했는데, 삼문 위에서 주위를 조망하는 풍광을 읊은 내용으로 보아 중층의 문으로 보인다. 또 삼문 앞에 있는 대(臺) 모양의 지형 을 이용해 구층탑을 세우고 안에 불사리를 봉안했다. 절 서쪽에는 보동탑을 세우고 대원선사(大圓禪師), 즉 개산조 위산영우의 탑을 수리했으며, 비정(碑亭) 두 채 를 지어 신·구의 두 비를 각각 덮었다.85)
이상을 토대로 북송대 12세기 초에 재건된 대위산 밀 인사의 가람 구성을 보면, 먼저 중층의 삼문 안에 불전 과 법당인 선법당, 방장, 승당이 있고, 불전 앞마당을 두르는 회랑의 동쪽에는 종루, 서쪽에는 경장이 있었다. 법당 뒤에는 침당인 우화당, 방장 앞에는 어서각이 각 각 있었다. 불전 앞 동회랑 동쪽에는 여러 채의 건물로 구성된 복합건물인 고원이 건립되었고, 그 중에 음식을 조리하는 주방을 천공주라 했다. 천공주 남쪽에 목조 장육불보살상을 안치한 불전이 있었다. 삼문 앞에는 구 층 사리탑이 건립되고, 사원 서쪽에는 개산조 위산영우 의 유골을 봉안한 탑과 일반 승려들의 유골을 모아 안 치한 보동탑, 그리고 탑비와 비정이 조성되었다. 또 위 치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오백나한을 봉안한 나한각, 그리고 유나료가 조사당 서쪽에 건립되어 있었다.
이들 전각들은 구층 사리탑을 제외하고 대체로 『선 원청규』에서도 언급되고 있으며, 그 밖의 토지당, 중료 와 행자당·행자료, 욕실, 동사, 연수당 및 제반 역직들 의 요사 등 나머지 전각들도 「중흥기」 이후에 순차적 으로 확충되어 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선원청 규』와 「중흥기」 에서 확인되는 전각들과 그것의 위치는 『오산십찰도』에 수록된 가람배치도의 내용과 대부분 일치한다.86)<그림 5>
이것은 결국 『선원청규』를 통해 파악되는 가람의 구 성 내용과 전각 이용방식에 관한 규범은 당시 선종사 원의 실상을 반영하는 것이며, 동시에 당시 선종사원 가람제도의 개요가 대략 일정한 형태로 규범화되어 있 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오산 십찰도』에 기록된 남송대 선종사원의 가람배치 형식은 적어도 북송대 12세기 초에 『선원청규』가 저술될 무렵 에는 이미 일반화되어 있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송대 선종사원에서 나한을 봉안한 전각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배경과, 불탑의 문제에 대해 부언 해 두고자 한다.
먼저 불교에서 나한, 즉 아라한(阿羅漢)은 대해탈(大 解脫), 대지혜(大智慧), 무생지(無生智), 대도덕(大道德) 을 모두 체현하고 있는 성자(聖者)로, 대승불교에서는 자신의 깨달음만을 추구하는 소승의 성자라 하여 대승 의 수행자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보지만, 이와는 달리 잠시 위인도생(爲人度生), 즉 중생 구제를 위해 소승성 문(小乘聲聞)의 모습으로 나타난 존재로 보는 것이 선 종의 나한관이다. 또 13세기 초 남송에 유학하여 조동 선(曹洞禪)을 배워 간 일본의 선승 도겐(道元, 1200~ 1253)은 ‘불아라한(佛阿羅漢)’이라 하여, 아라한이 곧 부 처이며, 수행승들이 추구해야할 극과(極果)라고 했다.87) 이처럼 나한과 선종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당 (唐) 이래로 선종사원에서는 나한당이 건립되고 나한공 양(羅漢供養)이 행해지고 있었다.88)
일반적으로 선종사원에는 불탑을 세우지 않는 것으 로 알려져 있다. 『선원청규』를 비롯한 청규에도 불탑이 언급되어 있지 않으며, 언상(言像)을 거부하고 오로지 주지의 설법과 참선수행을 통한 깨달음을 추구하는 선 종의 종지에서 보면, 선종사원에서 불탑의 건립을 생각 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 이 12세기에 재건된 밀인사에는 절 입구에 구층 사리 탑이 당당하게 건립되어 있었고, 승려들의 요잡의례도 행해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항주(杭州)의 유명 한 선종사원 정자사(淨慈寺)에도 9층 석탑이 있었다.89) 이러한 정황들은 당시 선종사원에 일반적으로 탑이 없 었다고 단정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5.북송대 선종사원 가람 구성의 특징
5-1.『참천태오대산기』에 기록된 북송대 사원상
서두에 소개한 바와 같이, 『참천태오대산기』는 1072 년(熙寧5)에 송으로 건너간 죠진이 이듬해까지 중국 각지의 사원을 순례하며 남긴 일기 형식의 견문록이다. 여기에 소개되고 있는 사원은 항주(杭州)의 용화보승사 (龍華寶乘寺), 흥교사(興敎寺), 정자사(淨慈寺), 영은사 (靈隱寺), 천축사(天竺寺), 태주(台州) 천태산(天台山)의 국청사(國淸寺), 정혜진신탑원(定惠眞身塔院), 대자사(大 慈寺), 적성사(赤城寺), 태주 성내의 경덕사(景德寺), 신 창현(新昌縣)의 보엄사(寶嚴寺), 섬현(剡縣)의 실성원(實 性院), 월주(越州)의 광상사(光相寺), 경덕사, 소주(蘇州) 의 보문원(普門院), 보은사(報恩寺), 윤주(潤州)의 금산 사(金山寺), 사주(泗州)의 보조왕사(普照王寺), 도성 개 봉(開封)의 태평흥국사(太平興國寺), 계성선원(啓聖禪院), 대상국사(大相國寺), 복성선원(福聖禪院), 개보사(開寶寺), 수성원(壽聖院), 양주(揚州)의 수녕사(壽寧寺), 오대산 (五臺山)의 진용원(眞容院), 태평흥국사, 대화엄사(大華 嚴寺) 등이다. 본 절에서는 앞서 고찰한 북송대 선종 사원과 비교를 위해, 선종 이외의 사원을 대상으로 가 람 구성 내용을 살피고자 한다.
먼저 항주의 용화보승사90)에서는 대불전과 예당(禮 堂), 오백나한원, 관음원, 수보리원(須菩提院) 등이 확 인되고, 흥교사91) 가람에서는 대문, 대불전, 강당, 십육 나한원, 오백나한원, 문수당, 심사대왕당(深沙大王堂)92), 아미타당, 귀자모당(鬼子母堂)93), 천태종 아홉 조사의 등 신상을 안치한 당, 식당, 교주방(敎主房), 방지(方池) 등 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 사원은 우선 중심의 대불전 외 에 다양한 불보살을 봉안한 다수의 불보살전과 원(院) 으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흥교사 강당에 대해서는, 불상이 안치된 강당에서 교주(敎主) 가 고좌(高座)에 올라 경전을 강의하고, 유나가 진행하 는 강경법회(講經法會)가 묘사되어 있어,94) 당시 강경 법회가 베풀어지는 강당의 내부 모습을 살피는데 좋은 참고가 된다.
중국 천태종의 거점 도량인 천태산 국청사95)는 죠진 이 1072년 5월 13일부터 8월 5일까지 3개월 가까이 머 물렀기 때문에, 가람 구성이 다른 사원들에 비해 비교 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우선 대문과 문 앞의 교정(橋亭), 대불전, 법화법당(法華法堂), 심사대장 당, 재당(齋堂), 진수(鎭守), 승당, 식당, 대사당(大師堂)96) 등의 전각들이 보인다. 또 부속 원(院)으로는 삼현(三賢) 의 상을 봉안한 당이 있는 삼현원97), 나한원, 수(隋) 양 제(煬帝, 604~618 재위)의 칙명으로 건립된 계단(戒壇) 이 있는 계단원, 사주(寺主)의 방과 지자대사참당(智者 大師懺堂)98) 등이 있는 교적원(敎蹟院), 지관당(止觀堂) 이 있는 정혜원(定惠院), 팔각 전륜장(轉輪藏)을 설치한 이층의 누가 있는 명심원(明心院), 강당과 식당 등이 있 는 시방교원(十方敎院), 관음보전, 방등참당(方等懺堂), 원실(圓室), 노숙(老宿)의 방 등이 있는 혜광대사간경원 (惠光大師看經院), 법화참법원(法華懺法院), 고원(庫院), 욕원(浴院) 등이 있다고 했고, 전체 가람 규모를 ‘전, 당, 옥이 총 8백 칸(殿堂屋摠八百間)’이라고 했다.
국청사 또한 대불전과 법화법당이 있는 중앙의 대불 원(大佛院)을 중심으로 다양한 부속 원들이 구성된 다 원식(多院式) 가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속 원의 대부분은 천태종에서 신앙하는 불보살과 고승을 안치 하거나, 또는 참법(懺法)이나 지관(止觀)과 같은 천태 종의 행법(行法)을 수행하는 전각들 위주로 구성되어 있어 천태종 가람으로서의 특징을 잘 보이고 있다. 또 각 원의 원주(院主)와 사주(寺主), 부사주(副寺主), 감 사(監寺), 고주(庫主) 등 각종 사무를 분장하는 역승들 과 그 아래에서 잡역에 종사하는 행자(行者)의 존재 및 그들이 기거하는 방(房)도 확인된다.
그리고 절에서 멀리 떨어진 태주성(台州城) 안에 관 아의 행정을 비롯해 각종 세속의 일을 맡아 처리하는 해원(廨院)이 운영되고 있었고, 태주성에서 국청사에 이 르는 도중에는 사원 소유의 장원(莊園)을 관리하기 위 해 설치한 신방장(新坊庄)이라는 원이 운영되고 있었다. 이들 원에는 숙박의 기능도 있어, 죠진 일행이 이곳에 서 머물기도 했다. 이처럼 사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해원이나 장원을 경영하는 것은, 앞서 본 바와 같이 당시 선종사원에서도 확인된다.
다음으로 송대 승가대사(僧伽大師, ?~708)99) 신앙의 중심 도량이었던 사주(泗州)의 보조왕사(普照王寺)100)를 소개한다. 일기에 기록된 가람은 대문과 ‘보조명각대사 (普照明覺大師)’의 편액이 걸린 중문이 있고, 그 안에 사방이 회랑으로 둘러싸인 가람 중심부가 구성되어 있 었는데, 서쪽과 북쪽 회랑에는 승가대사의 42변상도(變 相圖)가 그려져 있었다. 회랑 안쪽에는 팔각 십삼층 승 가대사탑과 이층의 대불전이 각각 동쪽과 서쪽에 나란 히 서 있었다. 불전의 동서 양쪽에는 중층의 종루와 경 장이 있고, 불전 뒤에는 일층에 석가모니, 이층에 백의 관음을 각각 본존으로 봉안한 석보암지각(石寶巖之閣) 이라는 중층 불전이 있었다. 중문 북쪽에는 불상과 승 가대사의 변상도를 수놓은 비단이 걸려 있는 보전(寶 殿)과 예전(禮殿) 일곽이 있고, 승가대사탑 뒤의 회랑 바깥에는 건물 내부에 승가대사 진영을 봉안한 감실이 설치된 강당이 있었고, 가람 동측에는 진적대사(眞寂大 師)101)의 진영을 안치한 소전(小殿)과 중층의 비각이 있 다고 했다. 이외에도 승당, 구층탑, 법화경을 새긴 석경 (石經), 그리고 건명선원(乾明禪院)이 확인된다. 그리고 대문 바깥 좌우의 회랑에서 각종 서적들을 사고파는 모 습102)이 묘사되어 있어 이채롭다. 가람의 전체적인 구 성을 파악하기에 충분치 않은 내용이기는 하지만, 승가 대사신앙의 중심도량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당탑 구성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죠진은 보조왕사의 승당에 대해, ‘1백50명이 쉬 고 있는데, 자리마다 의발(衣鉢)이 있고, 누워 있거나, 앉아 있거나, 법문(法門)을 베껴 쓰거나, 독경(讀經)하 고 있다(次入僧堂, 坐各有衣鉢, 或臥或坐, 或書法門, 或 讀經)’고 묘사했다. 본래 승당은 선종사원을 특징짓는 가장 대표적인 전각의 하나로, 모든 수행승들이 좌선을 비롯해 식사와 수면을 함께 하는 곳으로, 수 명의 승려 들이 수행·생활하는 작은 방들이 연속된 형태의 기존 사원의 승방(僧房)과는 기능과 건축 형태면에서 크게 다르다. 그런데 우선 보조왕사에도 1백50명에 이르는 대규모 승려들을 수용하는 승당이라는 전각이 있었다 는 점은 분명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103) 그러나 선종사 원의 승당에서는 정해진 시간 이외에 자리에 누울 수 없고, 경전을 읽거나 필사하는 등의 행위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조왕사 승당의 쓰임새는 오 히려 기존 사원의 승방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다.104) 앞서 소개했던 국청사에도 승당이 확인되는데, 국청사 에는 별도의 식당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 역시 선종사 원의 승당과는 성격이 달랐다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개봉의 태평흥국사105)는 죠진이 1072년 10월 13일부터 오대산으로 순례를 다녀왔던 기간(11월 1일부터 12월 25일까지)을 제외하고 이듬해 4월 11일까 지 머물렀던 곳이다. 가람에 대해서는 중앙의 대불전이 있는 원을 중심으로 주위에 전법원(傳法院), 그 서쪽의 인경원(印經院), 인경원 남쪽의 칠객원(七客院), 계단원 (戒壇院), 그리고 욕원(浴院)106) 등이 기록되어 있어, 앞 서 소개한 사원들과 마찬가지로 다원식 가람이었을 것 으로 추정된다.
전법원은 중문 안에 중층의 강당, 삼층의 태종황제 어필비각(太宗皇帝御筆碑閣), 진종황제(眞宗皇帝)의 어 필비를 봉안한 건명지전(乾明之殿), 승방, 창고 등이 있다고 했다. 강당의 이층에는 화엄해회관음상(華嚴海 會觀音像)107)과 선재동자상(善財童子像)이 안치되어 있 고, 승방에는 역경(譯經)을 맡은 서역 출신의 승려를 포 함해 50명의 승려와 행자 70명, 그리고 전좌(典座) 2명 등이 거처하고 있다고 했다. 칠객원에는 구층의 칠보무 가탑(七寶無價塔)과 중층 불각이 있고, 인경원에 대해서 는 원을 두르는 사면의 1백30칸 회랑 전체가 경판(經 板)으로 가득 차 있다고 했다.
이 중에서 죠진 일행은 전법원의 승방에서 머물렀는 데, 그가 머물렀던 방은 중문 서쪽 세 칸 규모의 방이 라고 했고, 중문 동쪽의 한 칸 방에는 그를 수행했던 이들이 머물렀다고 했으며,108) 죠진의 옆방에도 승려가 거처하고 있다고 했다.109) 그리고 이 전법원에 승려와 행자 등 120여 명이 거처하고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 승방은 전법원의 사방을 둘러싸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과 관련하여 개봉 상국사 불아원(佛牙院)의 승방에 대해 원을 둘러싸고 있는 ‘사 면의 회랑이 모두 승방으로 되어 있다(四面廊皆有僧房)’ 고 했다.110) 이처럼 북송대 선종 이외 사원의 승방은, 보조왕사의 승당과 같이 모든 승려들이 하나의 공간에 기거하는 형태도 있었지만, 대체로는 수 명의 승려들이 생활하는 방들이 이어져 원을 둘러싸는 당대 이래 삼면 승방(三面僧房)과 같은 형태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음 을 알 수 있다.
5-2.선종과 타종파 사원 가람 구성의 비교
앞서 『선원청규』와 대위산 밀인사를 통해 고찰한 북 송대 선종사원과, 위에서 살핀 『참천태오대산기』에 기 록된 타종파 사원의 가람 구성 내용에서 확인되는 공 통점과 차이점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먼저 공통점으로 가람 중심부의 구성을 들 수 있다. 즉, 선종사원의 삼문, 불전, 법당은 타종파 사원의 중 문, 불전, 강당에 각각 해당하며, 이들 전각이 가람 중 심축선상에 배치되고 회랑으로 둘러싸여 전체 가람 배 치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주불전 전면 동서 에 종루와 경장을 각각 건립하는 것 또한 종파를 막론 하고 당시 불교 사원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단, 타종파 사원의 경우 이 중심원에 주불전을 포함해 복수의 불전이 전후로 배치되는 경우도 있다.
불전 이외에 나한당 역시 종파와 무관하게 보편적으 로 나타나는데, 이는 당시 불교계에 나한신앙이 널리 유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11) 그리고 종루와 경장, 주 방을 핵심 시설로 하는 고원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며, 승려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된 욕실과 변소 역 시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더해 선종사원의 운영과 관련된 각종 사무를 분장하는 지사에 해당하는 역직 또한 타종파 사원에서도 확인되며, 사원 바깥에 대관업무를 비롯한 각종 세속 관련 사무를 처리하는 해원을 운영하고, 사원 재정 충당을 위해 장원을 경영 하는 것 역시 당시 불교사원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한편 불탑의 경우, 선종사원에서도 불탑이 건립되는 경 우도 있고, 타종파 사원에는 불탑이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당시 사원에서 불탑의 유무 자체가 가람의 종 파적 특성을 반영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서로 차이나는 부분을 보면, 우선 타종파 사원은 당 대 이래의 다원식 가람112) 형태가 유지되고 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즉, 가람 중심원의 주위에 다양한 원이 구성되고, 원 안에는 다양한 불보살 혹은 고승을 안치 한 전각이나 탑, 그리고 종파별 행법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회랑으로 구획된 각 원에는 원주가 있고, 또 별도의 강당이나 식당, 승방까지도 갖추어 어느 정도는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원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선종사원은 기본적으로 다원식 가람 구성이 아 니다. 침당과 방장으로 구성되는 주지 영역이나 고원 혹은 마원과 같은 것들이 보이지만, 이것들은 기능적 으로 전체적인 사원 운영의 한 부분으로 통합되어 있 었고, 건축 형태적으로도 회랑으로 구획된 독립된 영 역을 구축하고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타종파 사원의 원들과는 달랐다.
그리고 타종파 사원에는 가람 중심원의 대불전 외에 도 다양한 불보살전이 있는 반면, 선종사원은 주불전 외에 나한당을 건립하는 정도가 기본이었고, 전반적으 로 불보살전의 수가 타종파 사원에 비해 극히 적었다. 또 역대 조사와 주지의 진영을 안치하는 조사당과 이들 의 유골을 안치한 탑, 그리고 일반 중승의 유골을 모아 안치한 보동탑을 건립하는 것도 선종사원에서만 확인된 다. 특히 선종사원에서 조사당과 승탑의 건립은, 주지를 오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현세의 부처로 보는 선종 특유의 주지관이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선종사원에서 주지, 수행승, 행자들을 위한 생활, 수 행, 의례 공간으로 침당과 방장, 승당과 중료, 그리고 행자당과 행자료를 각각 구성하는 방식은, 타종파 사원 에서는 확인되지 않으며, 선종사원 가람 구성에 나타나 는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선종사원 에서는 모든 수행승들이 승당에서 좌선과 취침, 식사를 함께 하기 때문에, 승당은 그것에 적합한 규모와 형태 를 가졌을 것이며, 별도로 식당을 두지 않았다. 이에 반해 타종파 사원의 승방은 당대 사원의 삼면승방과 같이, 수 명의 승려들이 기거하는 방들이 길게 연접되 어 회랑처럼 원을 둘러싸는 형태였고, 별도로 식당을 두고 있어서, 기능과 형태면에서 선종사원의 승당과는 매우 달랐다.
단위 전각에 관한 내용 한 가지 사족을 달면, 선종사 원의 법당에는 내부 중앙에 법좌가 마련되고 그 위에 놓은 선의에 주지가 올라 앉아 설법했던 것에 반해, 이 에 해당하는 타종파 사원의 강당에는 경론을 강의하는 강사가 올라앉는 고좌와 더불어 불상도 안치되어 있었 다는 점도 주목되는 사실이다. 그 밖에 선종사원에서 주지를 도와 수행승의 지도를 담당하는 두수에 해당하 는 역직이 타종파 사원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도 지적해 둘 필요가 있겠다.
이상에서 고찰한 북송대 선종사원과 타종파 사원의 가람 구성 내용을 주요 전각을 위주로 도식화하면 아 래와 같다. 그림 6, 그림 7
6.결 론
이상에서 고찰한 북송대 선종사원의 가람 구성에 대 하여, 청규 내용과 실제 사원과의 부합성, 그리고 타종 파 사원과 대별되는 선종사원의 특징과 불교사원으로 서의 공통점의 측면에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북송대에 재건된 대위산 밀인사의 가람 구성은, 『선원청규』에서 파악되는 그것과 거의 일치하며, 남송 대 『오산십찰도』에 수록된 가람배치도에서도 대부분 확 인되고 있는 바, 중국 불교사에서 선종이 가장 번성했 던 남송대 선종사원의 가람 구성과 배치는 북송대에 이 미 나타나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다만, 당시 밀인사를 비롯한 일부 선종사원에서 불탑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 기 때문에, 불탑의 유무가 선종사원의 가람 구성을 특 징짓는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북송대 선종사원과 『참천태오대산기』에 기록된 타종 파 사원의 가람 구성을 비교한 결과 아래와 같은 차이 점과 공통점을 갖는다.
먼저, 차이점부터 들면, 첫째, 타종파 사원은 중심원 원 주위에 다수의 불보살전을 포함한 다양한 기능의 부속 원들이 구성된 다원식 가람이었던 반면, 선종사원 은 다원식 가람 형태가 아니었고, 불전과 선종에서 특 별히 중시했던 나한전 이외의 불보살전은 대체로 세우 지 않았다.
둘째, 역대 조사와 주지의 영정과 유골을 봉안하는 조사전과 탑, 그리고 입적한 승려의 유골을 매안한 보 동탑은, 참선수행을 통해 현세에서의 깨달음을 추구하 는 선종의 사원에서만 타나나는 특징적인 가람 구성 요소이다.
셋째, 주지와 수행승 및 행자들을 위한 수행, 의례, 생활을 위한 공간으로 방장과 침당, 승당과 중료, 그리 고 행자당과 행자료를 각각 구성하는 것 역시 선종사 원의 가람에서만 확인되는 특징이다.
넷째, 승려들이 기거하며 수행하는 건물로, 선종사원 에서는 승당에서 모든 수행승들이 좌선수행과 식사, 수 면을 함께한 반면, 타종파 사원에서는 원을 두르는 회 랑 형태의 건물을 다수의 실로 구획하여 실마다 수 명 씩의 승려들이 사용하는 당대 이래 삼면승방 형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일부 타종파 사원에서도 승당을 건립 하는 경우도 확인되나, 그 기능이 선종사원의 승당과는 달랐고 승려들의 식사는 식당에서 행해진 반면, 선종사 원에서는 식당을 별도로 두지 않았다.
다섯째, 타종파 사원의 강당에는 강사의 고좌와 더 불어 불상이 안치되어 있었으나, 이에 해당하는 선종 사원의 법당에는 불상을 안치하지 않았고, 주지가 올 라 설법하는 자리인 법좌와 선의만 배설되어 있었다.
여섯째, 선종사원에서 주지를 도와 수행승의 지도를 담당하는 두수에 해당하는 역직은 타종파 사원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음으로 공통되는 점을 들면, 첫째, 삼문·불전·법당 으로 구성되는 선종사원의 가람 중심부 구성은, 타종 파 사원의 중문·불전·강당에 각각 해당하며, 모두 가람 중심축선상에 배치되고 회랑으로 둘러싸여 전체 가람 배치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또한 주불전 전면 동서에 종루와 경장을 건립하는 것도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둘째, 송대에는 나한신앙이 유행했기 때문에 나한당 은 선종과 타종파 사원 모두에서 널리 건립되고 있었 다. 더불어 주방을 핵심 시설로 하는 고원, 욕실 등의 전각들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셋째, 사원의 유지 및 운영과 관련하여 사원 외부에 각종 세속의 일을 처리하는 해원을 운영하고, 재정 충 당을 위해 장원을 경영하는 것, 그리고 사원의 운영과 관련된 각종 사무를 분장하는 지사 류의 역직을 두는 것 역시 선종과 타종파 사원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