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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 1598-1142(Print)
ISSN : 2383-9066(Online)
Journal of architectural history Vol.25 No.3 pp.47-62
DOI : https://doi.org/10.7738/JAH.2016.25.3.047

A Study on the Characteristics of Building Composition of Zen Buddhist Temples in Northern Song Dynasty

Ji-Man Han*
Corresponding Author : g-mahn@hanmail.net
April 15, 2016 May 24, 2016 May 30, 2016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clarify the characteristics of Zen Buddhist temple’s building composition of the Northern Song dynasty, through the analysis of literature historical material, such as Seonwon chenggyu(禪苑淸 規), Cham cheontae odaesan gi (參天台五臺山記) and so on. The building composition method of Zen Buddhist temple in Northern Song dynasty, which grasped from the Seonwon chenggyu, reflects the actual situation of the temples in that time. And it was ascertained that, the Zen Buddhist temple’s building composition of the Northern Song dynasty was basically same to that of Southern Song dynasty. And the comparative analysis was attempted between Zen Buddhist temples and that of other Buddhism sect described in Cham cheontae odaesan gi. From this analysis, the common features as Buddhism temple and the characteristics of building composition as Zen Buddhist temple was clarified.


북송대 선종사원의 가람 구성 특징에 관한 연구

한 지 만*
명지대학교 건축학부 조교수

초록


    1.서 론

    1-1.연구의 배경과 목적

    한국과 중국 및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선 종사원의 연구에서, 원류가 되는 중국 선종사원이 갖는 중요성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현재까지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선종사원에 관한 연 구는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어 왔으며, 시기적으 로는 남송(南宋, 1127~1279)에 집중되어 있다. 그 이유 는 먼저, 일본은 중세 카마쿠라시대(鎌倉時代, 1180~ 1333)에 남송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선종과 선종사원을 도입하였고, 또 12세기 중엽 일본인 입송 유학승들이 남송 강남지역에 위치한 거점 선종사원의 형태와 의례 등을 상세하게 조사·기록한 오산십찰도(五山十刹圖) 가 일본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중국 불교 사에서 선종이 가장 번성했던 때가 남송이었기 때문에, 그 시대에 연구가 집중되는 것 또한 당연한 귀결일지 도 모른다.

    일본의 학계에서 오산십찰도를 중심으로 한 남송대 선종사원에 관한 연구는 20세기 초부터 시작되었고,1) 요코야마 히데야(横山秀哉)가 이를 집대성하여 일본 중 세 선종사원 전반에 대한 연구의 기반을 다졌다.2) 그리 고 세키구치 킨야(関口欣也)는 남송 오산에 대해, 전등 서(傳燈書), 사지(寺志), 지방지(地方志) 등 방대한 문헌 사료의 섭렵에 현지 조사를 더해, 사원의 연혁과 가람 배치 및 건축 구조와 양식에 관한 연구 성과를 발표했 다.3) 일본에서의 연구 성과는 이른 시기부터 중국에 소 개되었고,4) 이에 기반해 근래까지 남송을 중심으로 선 종사원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5)

    국내의 연구로는 서아리6)가 북송(北宋, 960~1127) 1103년(崇寧2)에 자각종색(慈覺宗賾) 선사가 저술한 선 원청규(禪苑淸規)에 나오는 가람 구성요소들의 기능과 의례를 분석하고, 이것을 남송 오산십찰도의 가람배 치도 및 건축도와 비교 고찰했다. 선원청규는 현재까 지 북송대 선종사원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거의 유 일한 자료로 인용되어 왔고, 앞서 소개한 일본 학자들 의 연구에서도, 이 청규의 내용을 근거로 오산십찰도 등을 통해 확인되는 남송대 선종사원의 가람 형태가 북송대에 출현해 있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근래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고려 말 나옹(懶翁, 1320~1376) 이 중창한 회암사지의 가람 유구를 해석한 일련의 연 구7)에서, 송·원대 선종사원의 가람에 대한 단편적인 고찰이 이루어진 바 있다.

    그런데 남송에 초점이 맞추어진 기존의 중국 선종사 원에 관한 연구에서는, 그 전 시기인 북송대 선종사원 에 대해 선원청규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그것이 당시 실제 선종사원의 정황을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한 검토는 이루어진 바 없다. 그리고 기존 에 송대 선종사원의 특징이라고 주장되고 있는 것들이, 당시 다른 종파의 사원과 어떤 차이를 가지는지에 대 해서는 다루어지지 않은 점은, 기존 연구가 가지는 한 계라 할 수 있겠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기존 연구에서 다소 소홀히 다 루어졌던 북송대 선종사원을 대상으로 그 가람 구성 내용에 초점을 맞추어, 선원청규의 내용이 당시 선 종사원의 실상을 반영하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고, 또 당시 타종파 사원과의 비교 고찰을 통해 그 특징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2.연구의 범위와 방법

    연구의 공간적, 시간적 범위는 중국의 북송대 선종사 원을 대상으로 하며, 주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시기 선종사원의 유구는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문헌사료 분석을 위주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먼저 선원청규에 대한 분석은, 일본과 한국에서 출 판된 역주본8)을 참고하였고, 기존 연구에서도 다루어진 바 있기 때문에, 본문에서는 청규에 나오는 전각들을 성격별로 분류하여 각 전각의 기능과 의례를 중심으로 최대한 간략하게 정리했다.

    그리고 북송대 선종사원의 실례로, 덕홍각범(德洪覺範, 1071~1128)의 저작 석문문자선(石門文字禪)(卷第二十一 ) 수록 담주대위산중흥기(潭州大潙山中興記)9), 즉 당(唐) 후기 9세기 초 위산영우(潙山靈祐, 771~853)가 창 건한 동경사(同慶寺)가 북송 1104년(崇寧3)에 화재로 소 실된 직후 가람을 재건하는 과정의 기록을 분석해, 선원 청규에서 파악되는 가람 구성과 비교하여, 청규와 실제 사원과의 관련성을 검토했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천태종(天台宗) 승려 죠진(成尋, 1011~1081)이 북송 1072년(熙寧5)에 중국에 건너가 이 듬해까지 천태산(天台山), 개봉(開封), 오대산(五臺山) 등 지의 사원을 유력하며 남긴 일기 형식의 견문록인 참 천태오대산기(參天台五臺山記)10)(전 8권)에 기록된 주 요 사찰의 가람 구성 내용을 고찰하고, 앞서 고찰한 선 종사원과의 비교를 통해, 북송대 선종사원 가람 구성 의 특징을 찾아보았다.

    2.북송대의 선종과 선종사원의 운영

    송대의 불교는 선종을 비롯해 천태종, 율종(律宗), 화 엄종(華嚴宗), 정토종(淨土宗)이 주요 종파로 전개되고 있었고,11) 그중에서 선종은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한 사대부(士大夫)의 지지를 얻으며 서서히 불교계의 주류 로 부상해 갔다.12)

    오대(五代)를 거치면서 성립된 선종오가(禪宗五家) 중 에서 북송 초기에는 임제종(臨濟宗), 운문종(雲門宗), 법 안종(法眼宗)이 흥성했고, 중기 무렵부터는 조동종(曹洞 宗)이 재도약했다. 그리고 임제종 계통에서 양기방회(楊 岐方會, 992~1049)와 황룡혜남(黃龍慧南, 1002~1069)의 두 선장(禪匠)이 출현해, 그들 문하가 선종을 이끌며 양 기파(楊岐派), 황룡파(黃龍派)를 각각 형성, 기존의 오가 에 더해 오가칠종(五家七宗)으로 불리게 되었다. 남송대 에는 운문종이 점차 쇠퇴하고 임제종과 조동종이 주류 가 되었는데, 특히 임제종 양기파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선의 수행 방법으로 임제종에서는 원오극근(圜悟克勤, 1063~1135)에서 비롯되어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 가 완성한 간화선(看話禪)13)을, 조동종에서는 굉지정각 (宏智正覺, 1091~1157) 이래의 묵조선(黙照禪)14)을 각각 표방했다. 원대(元代)에도 선종은 여전히 불교계의 중심 을 점했고, 특히 임제종 승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한편 북송대에는 선종사원의 주지 계승 방식에 구별 이 생겨나, 기존의 사제 간에 주지를 계승하는 갑을도 제원(甲乙徒弟院)에 더해, 시방주지제(十方住持制)라 하 여 특정 문파에 국한하지 않고 두루 명덕(名德)의 주지 를 맞이하는 시방원(十方院)이 출현했다. 이 중에서 시 방원의 격이 더 높았고, 남송 오산(五山) 주지제도의 기초가 되었다.15)

    선원청규에서 보이는 북송대의 선종사원 운영은, 주지를 중심으로 동반(東班)의 지사(知事)와 서반(西班) 의 두수(頭首)가 각각 주지를 보좌해 핵심 업무를 분장 하였다. 지사는 사원의 경영과 관련된 일체의 업무를 관장하고, 두수는 중승(衆僧)의 수행과 교육을 맡았다. 지사와 두수는 담당하는 업무의 내용에 따라 세분되어 있었고,16) 이들 아래에 다시 소두수(小頭首)와 행자(行 者)가 배속되어 실무를 처리했다.

    사원의 경제기반은 장원(莊園) 경영과 단월(檀越)의 기진(寄進)에 의해 운영되었고, 이를 담당하는 역직(役 職)으로 장원의 관리와 수세(收稅)를 맡는 장주(莊主) 와, 시가(市街)에 나가 권화(勸化)하여 단월과 시주를 모으는 화주(化主)가 있었다.

    선종이 최고로 번성했던 남송대에는 선종사원의 시방 주지제나 지사·두수에 의한 사원 운영 등이 교종이나 율종 사원에도 채용되어 일반화되었다. 또 유명한 선사 들에게 배움을 청하는 천태종 승려들도 다수 출현했고, 천태종 사원에도 선종사원의 청규가 채용되는 경우도 있었다.17)

    3.『선원청규』에 기록된 선종사원의 가람 구성

    청규는 선종사원에서 수행승들이 지켜야할 의례, 수 행 및 생활의 규범을 성문화한 것이다. 따라서 청규에 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도량인 가람을 구성하 는 각종 건물의 종류와 기능을 비롯한 다양한 정보들 이 담겨 있다. 그중에서 선원청규는 현재 북송대 선 종사원의 가람 구성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살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우선 선원청규(이하, 청규)를 통해 그 명칭이 확인 되는 건물은 삼문(三門), 불전(佛殿), 나한당(羅漢堂), 수 륙당(水陸堂), 진당(眞堂), 토지당(土地堂), 법당(法堂), 방장(方丈), 침당(寢堂), 고당(庫堂) · 주(廚) · 창름(倉廩), 승당(僧堂), 본료(本寮), 장전(藏殿), 간경당(看經堂), 욕 실(浴室), 동사(東司), 독료(獨寮), 단과료(旦過寮), 객위 (客位), 전자료(前資寮), 수좌료(首座寮), 시자료(侍者寮), 연수당(延壽堂), 중병각(重病閣), 동행당(童行堂), 행자료 (行者寮), 낭무(廊廡), 보동탑(普同塔), 해원(廨院), 마원 (磨院) 등이다.

    다만, 청규에는 이들 건물의 형태와 배치 정황을 알 수 있는 내용은 거의 없고, 각 건물들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의례와 수행·생활에 관한 작법과 행법, 즉 기능 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선행 연구18)에서 고찰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음 장 에서 소개하는 북송대 선종사원의 실제 사례와 비교를 위해, 건물들의 성격에 따라 의례 공간, 주지의 교화 (敎化) 공간, 수행 및 생활 공간, 사무(寺務) 공간, 삼 문 및 기타로 분류하고, 각 건물의 기능을 간략히 소 개하는 수준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3-1.의례 공간

    불전, 나한당, 수륙당, 토지당, 진당, 장전, 간경당 등 을 의례 공간으로 분류했다.

    불전은 대전(大殿), 존전(尊前) 혹은 전(殿) 등으로 표 기되어 있는데, 주지가 설법하는 법당이나 중승들이 수 행하는 승당 등에 비해 언급되는 내용은 매우 소략한 편이다. 이곳에서는 새 주지가 부임할 때 독경(讀經)· 소향(燒香)하고,19) 삼팔염송(三八念誦)20) 때에는 소향과 삼례(三禮)21)하며,22) 황제의 성절(聖節)에는 간경도량(看 經道場)이 열렸다.23) 행자(行者)는 매일 저녁 불전에서 염불하도록 했다.24) 또 노동할 때 입는 옷인 작무의(作 務衣)를 입은 채로 불전에 오르는 것을 금하는25) 등 불 전에 대한 존숭의 예를 규정했다.

    청규에는 나한당과 수륙당26) 자체에 대한 언급은 없 으나, 두 건물의 관리를 담당하는 나한당주(羅漢堂主), 수륙당주(水陸堂主)의 업무를 적은 내용27)을 통해 그 존재가 추정된다.

    토지당에 대해 청규에서는 가람과 불법의 수호신인 진재(眞宰)28)와 토지용신(土地龍神)을 모신다고 했다. 토 지당에서는 신임 주지가 입원할 때 독경·소향하고, 삼팔 염송 때에는 주지와 지사, 중승들이 차례로 소향하며, 하안거(夏安居) 결제(結制) 전날(4월 14일)에 중승들이 하안거의 무사원만과 사원의 융성을 기념하는 염송을 행했다.29)

    진당은 선종의 초조 달마(達磨)와 개산(開山) 및 역 대 주지의 진영을 봉안하는 건물로, 조사당(祖師堂) 또 는 조당(祖堂)이라고도 한다. 청규에는 신임 주지가 입 원 때 독경·소향하고, 주지의 장례 기간에는 침당(寢 堂)30)에 입적한 주지의 진영을 안치했다가, 신임 주지 가 들어오면 그것을 진당으로 옮긴다고 했다.31)

    불립문자(不立文字)·교외별전(敎外別傳)을 표방하며 소 의경전을 인정하지 않는 선종에서는 경전을 중시하지 않 았다고 하지만, 청규에는 경전을 보관하는 장전과 간경 당에서의 작법이 상세히 적혀 있어, 북송대 선종사원에 서도 통상적으로 간경이 행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장전은 장주(藏主)가 관리를 맡고, 간경당에는 성상(聖 像)이 안치되고 간경용 책상이 갖추어져 있었으며 간경 당수좌(看經堂首座)가 관리와 간경 작법을 주재했다.

    3-2.주지의 교화 공간

    주지의 교화 공간은 주지가 설법하는 법당과, 법당 에서의 설법 외에 따로 가르침을 베푸는 방장 일곽이 해당한다.

    법당은 주지가 수행승들을 깨달음의 경지로 이끌기 위해 설법하고 문답하는 건물이다. 주지가 법당에 올라 정규의 설법을 하는 것을 상당(上堂) 혹은 대참(大參)이 라고 하며, 또 이른 아침에 하기 때문에 조참(早參)이라 고도 부른다. 청규에는 ‘오일승당(五日陞堂)’이라 하여, 매월 5일마다(1, 5, 10, 15, 20, 25일) 행하도록 정해져 있다. 설법 때에는 행자와 시주, 그리고 임기를 마치고 퇴원(退院)하는 주지도 법당에 들었다. 법당 안에서 두 수는 수행승들을 이끌고 서쪽에 서고, 지사는 행자들을 이끌고 동쪽에 서며, 퇴원 주지와 시주는 각각 두수와 지사 앞에 자리한다.32) 법당 안에 불상은 없고, 중앙에 마련된 법좌(法座) 위에 선의(禪椅)가 놓여 있을 뿐이 며, 주지는 이 선의에 올라 앉아 설법한다. 설법에 임하 면 법당 안의 북을 쳐 각자의 진퇴(進退)와 법회의 절 차를 진행했다. 그 밖에 법당에서는 수계(受戒)33), 시주 의 청에 의한 간경34)이나 중연재(中筵齋)35) 등도 행해 졌다. 그리고 주지 장례식 때에는 법당 내부를 중앙과 동·서 세 공간으로 나누어, 서쪽에는 감(龕: 관)을 놓고, 동쪽에는 와상(臥床), 의가(衣架) 등 주지가 생전에 사 용하던 물건을 진설하고, 중앙에는 주지의 진영을 걸고 의식을 거행했다.36)

    방장은 주지의 거처임과 동시에, 입실(入室)이라고 하 여 수행승을 한 명씩 방장으로 들여 친히 수행의 정도 를 확인하고 지도하는 곳으로, 당두(堂頭)라고도 부른 다. 청규에 의하면 입실의 때는 특별히 정해져 있지 않 고, 수시로 수행승의 청에 응해 행해졌던 듯하며, 주지 는 방장 안에 놓인 선의에 앉아 문답했다.37)

    또 주지와 관련하여 침당이라는 건물이 나오는데, 이 곳에서 정기적으로 소참(小參)38)이 행해지고, 주지의 장 례식 때에는 진영을 걸고 장례 의식을 행했다.39) 남송의 오산십찰도에는 침당을 ‘전방장(前方丈)’이라 했고, 가 람배치도상의 법당 뒤 방장 앞에 위치한다.<그림 1>40) 남송대 청규에 의하면 침당은 위의 기능 외에도 주지가 직접 빈객을 접대하거나, 특별히 지사와 두수 등 역직들 에게 차를 베푸는 곳이기도 했다.41) 즉, 침당은 주지의 일상 거처인 방장에 대해 공식적인 응접과 의례의 공간 으로, 북송대에도 방장과 더불어 그 전방에 배치되어 주 지 영역의 일곽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3-3.수행 및 생활 공간

    승려들의 수행과 생활의 공간으로 승당과 중료가 있 고, 아직 득도(得度)하지 않은 동행(童行), 즉 행자들을 위한 건물로 동행당과 행자료가 있었다. 그리고 욕실과 동사, 즉 변소도 생활 공간으로 분류했다. 이 중에서 특히 참선수행과 일상의 생활을 겸하는 승당과 중료는 법당 및 방장 일곽과 더불어 송대 선종사원을 특징짓는 대표적인 가람 구성 요소이다.

    승당은 수행승들이 구름처럼 모이는 곳이라 하여 운 당(雲堂) 또는 운수당(雲水堂)이라고도 부르며, 수행승 들이 좌선과 식사 및 수면을 하는 곳이다. 그 외에 청 규에는 삼팔염송 때의 소향, 하안거 결제·해제 전날의 순당(巡堂)42)과 염송 및 중승들을 위한 고사(庫司)43)의 차 공양44), 그리고 수계의식45)이 승당에서 행해진다고 했다.

    승당(그림 2) 안 중앙에는 성승상(聖僧像)이 안치되 고, 그 주위에 길게 이어진 상(床)이 설치되어 있었다. 새로 입원한 수행승은 이 상에서 법랍에 따라 단(單) 이라 부르는 자리를 지정받는데, 이것을 괘탑(掛搭)이 라 한다. 각 단의 안쪽 끝에는 가사와 이불들을 수납 하는 함궤(函櫃)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상이 일반 중승 들이 수행하는 내당(內堂) 부분이며, 그 전면에 지사와 두수 등 역직들이 좌선과 식사를 하는 외당(外堂)이 부 가되며, 지사의 단은 상칸(上間: 정면에서 봤을 때 오 른쪽), 두수의 단은 하칸(下間: 왼쪽)에 각각 마련된다. 역직들은 각자에게 배정된 별도의 요사에서 잠을 자기 때문에 외당의 단의 깊이는 내당에 비해 짧다. 또, 승 당 후면에는 후가(後架)라고 하는 세면장이 마련되어 있었다.46)

    승당이 좌선수행의 공간이라면, 중료(그림 3)는 경전 과 어록을 읽고, 쉬면서 차를 마시거나, 바느질, 세탁, 이발 등을 하는 휴식과 생활을 위한 공간이며, 청규에 는 상료(上寮) 혹은 본료(本寮)로도 적고 있다. 중료 안 에는 중앙에 성상(聖像)이 안치되고, 주위에는 승당과 마찬가지로 길게 이어진 상이 설치되며, 여기에서도 중 승들의 법랍을 기준으로 각자의 자리를 정하는 괘탑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승당과는 달리 중료의 단에는 경전 이나 어록을 읽을 수 있는 책상과, 각자의 소지품을 수 납하는 경궤(經櫃)가 설치된다. 요주(寮主), 요수좌(寮 首座)가 배정되어 중료에 머물면서 관리했고,47) 건물 후면에는 바느질, 세탁, 이발 등을 하는 파침처(把針處) 라는 부속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48)

    행자들이 수행하는 동행당은 행자당(行者堂)이라고도 한다. 청규에 기록된 동행당은 승당과 마찬가지로 내부 중앙에 성승이 안치되고 주위에 긴 상이 마련되어 있으 며, 역시 괘탑을 통해 자리를 지정받았다.49) 행자료에서 도 간경이 이루어졌으며,50) 중료에 준하는 내부 진설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욕실은 선명(宣明)이라고도 하며, 욕주(浴主)가 관리를 담당한다. 청규에는 입욕 때 중승, 행자, 주지, 지사 순으 로 욕실에 들도록 하여, 청규가 수행승 본위의 규범임을 짐작케 한다. 욕실 내부는 상당(上堂)과 하당(下堂)의 구 분이 있어, 법랍이 높은 노숙(老宿)이 상당을, 낮은 이가 하당을 각각 사용토록 했다.51)

    선종사원에서 변소를 흔히 동사라고 하며, 동정(東淨), 서정(西淨) 혹은 서사(西司)라고도 하는데, 이들 명칭과 실제 가람 내에서의 위치와는 관련이 없다. 청규에는 정 두(淨頭)가 동사의 관리를 맡는다고 했고, 대소변에서 용변 후의 세정에 이르기까지 동사에서의 행법에 대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52)

    3-4.사무 공간

    사무 공간에는 고당, 두수 이하 제반 역직의 요사, 그리고 마원과 해원 등이 해당된다.

    고당은 일반적으로 고원(庫院)이라고 하며, 지사의 요사와 음식을 조리하는 주방, 그리고 식재료 등을 보 관하는 창고 등으로 구성된 복합 건축군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청규에 의하면 지사에는 감원(監院), 유나(維 那), 전좌(典座), 직세(直歲)의 네 지사가 있었는데,53) 이 중에서 유나의 요사인 당사(堂司)만 따로 세우고,54) 나머지 세 지사의 요사는 고당 안에 마련되었다.55) 그 리고 주방 앞에는 소종(小鐘), 운판(雲板), 목어(木魚), 북을 걸어두고 중승의 기상, 식사, 노동(作務) 등의 때 와 진퇴를 알렸다.56)<그림 4>

    청규에는 위의 지사 외에, 각종 사무를 담당하는 다양 한 역직들이 나오는데, 수좌(首座), 서기(書記), 장주(藏 主), 지객(知客), 욕주(浴主), 고두(庫頭)의 여섯 두수57), 그리고 죽가방(粥街坊)·미맥가방(米麥街坊)·채가방(菜街坊)· 장가방(醬街坊)·장가방(藏街坊)의 가방화주(街坊化主)58), 화 엄두(華嚴頭)·반야두(般若頭)·경두(經頭)·미타두(彌陀 頭),59) 수두(水頭)·탄두(炭頭),60) 마두(磨頭), 원두(園頭), 장주(莊主),61) 해원주(廨院主), 연수당주(延壽堂主), 정두 (淨頭), 전주(殿主)·각주(閣主)·탑주(塔主)·나한당주(羅漢堂 主)·진당주(眞堂主), 종두(鐘頭), 성승시자(聖僧侍者)·노두(爐 頭)·직당(直堂),62) 요주(寮主)·요수좌(寮首座), 당두시자(堂頭 侍者)63) 등이다. 그리고 그 아래에 각각 행자들이 배속 되어 잡역에 종사했다. 당시 사원에는 두수를 비롯한 이들 역직의 요사가 독립된 건물이나 혹은 관리를 맡은 건물의 부속실 등의 형태로 마련되어 있었다.

    고당에서의 식량 조달과 관련하여, 마두(磨頭)라는 역 직의 명칭을 통해 마원의 존재가 추정되는데, 마원은 방 앗간이며, 마두는 마주(磨主)라고도 하여 마원의 관리를 담당한다. 청규에는 마원에 누사(漏篩)와 진사(塵篩) 두 종류의 설비가 있고, 누사는 곡식을 곱게 빻고 돌을 제 거하며, 진사는 거칠게 빻되 먼지를 제거한다고 했다.64)

    해원주(廨院主)는 해원의 책임자로, 청규에는 해원이 곡식 매매, 행각승의 숙식, 대관업무, 시주의 수취(收聚), 원지에서 오는 시주의 영접 등과 같이 주로 외부의 세 속과 관련된 일체의 사무를 처리하는 곳이라 했고,65) 사 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설치되었다.66)

    3-5.삼문, 제료(諸寮), 보동탑 및 기타

    먼저 삼문67)은 불전 앞에 위치하는 문으로, 고대 사 원의 중문(中門)에 해당한다. 새로 입원하는 승려는 삼 문 아래에서 삿갓을 벗어야 하고,68) 신임 주지는 삼문에 서 소향하며,69) 이곳에서 관인(官人)을 영접하는 등,70) 사원으로의 정식 출입 의식이 행해지는 곳으로 인식되 고 있었다.

    청규에는 각종 역직들의 요사 외에도, 새로 입원하 는 신도(新到)가 승당에서의 정식 괘탑을 허락받을 때 까지 임시로 머무는 요사로 독료, 전자료, 단과료가 있 다고 했다.71) 독료는 단료(單寮)라고도 하며, 명덕(名 德)의 선사가 입원할 때 머문다고 했다. 전자료는 이 전에 본 사원에서 지사나 두수, 화주를 역임했던 승려 가 머물며, 이들에 해당하지 않는 자는 단과료에 머문 다고 했다. 그리고 다른 사원의 주지가 방문하면 객위 에서 안하(安下)토록 했다.72)

    그리고 병승(病僧)이 요양하는 건물로 연수당이 있 는데, 이를 성행당(省行堂)이라고도 했다.73) 연수당주가 간호를 비롯한 제반 사무를 담당했고, 병이 심해지면 중병각(重病閣)으로 옮긴다고 했다.74) 또 병승이 입적 하면 다비(茶毘)하여 유골을 보동탑에 매안하고,75) 이곳 의 관리를 담당하는 탑주(塔主)를 두었다.

    그밖에 대종(大鐘)의 관리를 맡은 종두(鐘頭)76)의 존재 를 통해 대종이 걸린 종각(鐘閣)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고, 낭무(廊廡)에서 경행(經行)한다고 했으니,77) 영역을 두르거나 건물 사이를 연결하는 낭의 존재도 짐작된다.

    4.북송대 선종사원의 실례: 대위산 밀인사

    현재 호남성(湖南省) 영향현(寧鄕縣)에 있는 위산(潙山) 밀인사(密印寺)는, 중국 선종 오가의 하나인 위앙종의 개 조(開祖) 위산영우가 당 원화(元和, 806~820) 말 무렵에 개창한 사원에서 비롯되었다. 송고승전(宋高僧傳)(988) 에 의하면, 당시 이곳은 담주(潭州) 장사현(長沙縣)에 속 했는데, 영우가 위산을 지나다가 머물고자 하니 그곳 백 성들이 힘을 모아 함께 절을 지었고, 이때 인근 상담현 (湘潭縣) 일대를 통치하고 있던 양양연솔(襄陽連率) 이경 양(李景讓)이 귀의해 조정에 산문의 이름을 주청하여 동 경사라 불리게 되었다.78) 이후의 자세한 연혁은 확인되 지 않는데, 북송대에는 ‘대위산(大潙山) 밀인사(密印寺)’로 불렸고, 진여모철(眞如慕喆, ?~1095)이 주지로 있을 때에 는 2천 명의 승려들이 수행하던 대가람이었다고 하나,79) 1104년에 화재로 가람이 소실되고 말았다. 이후 10여 년 에 걸쳐 가람의 재건이 이루어졌고, 이 과정을 기록한 것 이 덕홍각범의 담주대위산중흥기 (이하 중흥기 )이다. 중흥기 에 기록된 밀인사 가람의 재건 과정을 시간 순으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먼저 화재로부터 3년이 지난 1107년(大觀1)에는 법 당과 대전, 침실이 겨우 건립되었다고 했는데, 대전은 불전, 침실은 주지의 방장으로 보이며, 중승들이 수행 과 생활하는 데 필요한 부속 시설들은 아직 갖추어지 지 못했다.80)

    당분간 가람 재건 공사는 지지부진하다가, 1110년에 공인선사(空印禪師) 식(軾)이 주지로 부임하여 재건에 박차를 가했다. 먼저 종을 주조해 불전 동무(東廡)에 종루를 세워 걸었고, 불전 서무에는 경장(經藏)을 지어 경전을 보관했다.81)

    이듬해 1111년(政和1)에는 선법당(善法堂) 뒤에 우화 당(雨花堂)을 짓고, 불전 앞 낭(廊)의 동쪽에 여러 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고원(庫院)을, 그리고 조감(祖龕) 서쪽 으로 낭을 달아내 당사(堂司)를 지었다고 했다.82) 선법 당은 곧 법당이고, 그 뒤쪽에 신축한 우화당은 원문에 ‘야참(夜參)이 파하니 (달빛이) 마당 가득 빈분(繽粉)하 도다(夜參旣罷繽粉滿庭)’라고 한 것으로 보아, 만참(晩 參), 즉 소참(小參)이 행해지는 건물로 보인다. 선원청 규에 의하면 소참은 침당에서 행한다고 했으니, 우화당 은 방장과 더불어 주지 영역을 구성하는 침당이라고 생 각된다. 그리고 조감과 당사는 각각 조사당과 유나료이 다. 고원은 ‘서무(庶務)를 총괄하는 곳’, 당사는 ‘청정한 대중(淸衆)을 이끄는 곳’이라고 했는데, 각각 선원청규 에 언급된 고원과 유나료의 기능을 잘 표현하고 있다.

    다음 1112년에는 승당을 다시 짓고, 오백나한을 조 성하여 각(閣)에 봉안했다고 하니 나한각이 건립된 것 으로 보인다.83) 다시 이듬해 1113년에는 나무로 장륙 (丈六)의 불보살상을 조각해 천공주(天供廚)라 편액한 주방 남쪽에 불전을 세워 봉안하고, 방장 앞에는 신종 (神宗, 1068~1085 재위)의 어서를 봉안하는 어서각(御 書閣)를 지었다.84)

    이듬해 1114년에는 삼문을 중건했는데, 삼문 위에서 주위를 조망하는 풍광을 읊은 내용으로 보아 중층의 문으로 보인다. 또 삼문 앞에 있는 대(臺) 모양의 지형 을 이용해 구층탑을 세우고 안에 불사리를 봉안했다. 절 서쪽에는 보동탑을 세우고 대원선사(大圓禪師), 즉 개산조 위산영우의 탑을 수리했으며, 비정(碑亭) 두 채 를 지어 신·구의 두 비를 각각 덮었다.85)

    이상을 토대로 북송대 12세기 초에 재건된 대위산 밀 인사의 가람 구성을 보면, 먼저 중층의 삼문 안에 불전 과 법당인 선법당, 방장, 승당이 있고, 불전 앞마당을 두르는 회랑의 동쪽에는 종루, 서쪽에는 경장이 있었다. 법당 뒤에는 침당인 우화당, 방장 앞에는 어서각이 각 각 있었다. 불전 앞 동회랑 동쪽에는 여러 채의 건물로 구성된 복합건물인 고원이 건립되었고, 그 중에 음식을 조리하는 주방을 천공주라 했다. 천공주 남쪽에 목조 장육불보살상을 안치한 불전이 있었다. 삼문 앞에는 구 층 사리탑이 건립되고, 사원 서쪽에는 개산조 위산영우 의 유골을 봉안한 탑과 일반 승려들의 유골을 모아 안 치한 보동탑, 그리고 탑비와 비정이 조성되었다. 또 위 치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오백나한을 봉안한 나한각, 그리고 유나료가 조사당 서쪽에 건립되어 있었다.

    이들 전각들은 구층 사리탑을 제외하고 대체로 선 원청규에서도 언급되고 있으며, 그 밖의 토지당, 중료 와 행자당·행자료, 욕실, 동사, 연수당 및 제반 역직들 의 요사 등 나머지 전각들도 중흥기 이후에 순차적 으로 확충되어 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선원청 규중흥기 에서 확인되는 전각들과 그것의 위치는 오산십찰도에 수록된 가람배치도의 내용과 대부분 일치한다.86)<그림 5>

    이것은 결국 선원청규를 통해 파악되는 가람의 구 성 내용과 전각 이용방식에 관한 규범은 당시 선종사 원의 실상을 반영하는 것이며, 동시에 당시 선종사원 가람제도의 개요가 대략 일정한 형태로 규범화되어 있 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오산 십찰도에 기록된 남송대 선종사원의 가람배치 형식은 적어도 북송대 12세기 초에 선원청규가 저술될 무렵 에는 이미 일반화되어 있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송대 선종사원에서 나한을 봉안한 전각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배경과, 불탑의 문제에 대해 부언 해 두고자 한다.

    먼저 불교에서 나한, 즉 아라한(阿羅漢)은 대해탈(大 解脫), 대지혜(大智慧), 무생지(無生智), 대도덕(大道德) 을 모두 체현하고 있는 성자(聖者)로, 대승불교에서는 자신의 깨달음만을 추구하는 소승의 성자라 하여 대승 의 수행자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보지만, 이와는 달리 잠시 위인도생(爲人度生), 즉 중생 구제를 위해 소승성 문(小乘聲聞)의 모습으로 나타난 존재로 보는 것이 선 종의 나한관이다. 또 13세기 초 남송에 유학하여 조동 선(曹洞禪)을 배워 간 일본의 선승 도겐(道元, 1200~ 1253)은 ‘불아라한(佛阿羅漢)’이라 하여, 아라한이 곧 부 처이며, 수행승들이 추구해야할 극과(極果)라고 했다.87) 이처럼 나한과 선종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당 (唐) 이래로 선종사원에서는 나한당이 건립되고 나한공 양(羅漢供養)이 행해지고 있었다.88)

    일반적으로 선종사원에는 불탑을 세우지 않는 것으 로 알려져 있다. 선원청규를 비롯한 청규에도 불탑이 언급되어 있지 않으며, 언상(言像)을 거부하고 오로지 주지의 설법과 참선수행을 통한 깨달음을 추구하는 선 종의 종지에서 보면, 선종사원에서 불탑의 건립을 생각 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 이 12세기에 재건된 밀인사에는 절 입구에 구층 사리 탑이 당당하게 건립되어 있었고, 승려들의 요잡의례도 행해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항주(杭州)의 유명 한 선종사원 정자사(淨慈寺)에도 9층 석탑이 있었다.89) 이러한 정황들은 당시 선종사원에 일반적으로 탑이 없 었다고 단정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5.북송대 선종사원 가람 구성의 특징

    5-1.『참천태오대산기』에 기록된 북송대 사원상

    서두에 소개한 바와 같이, 참천태오대산기는 1072 년(熙寧5)에 송으로 건너간 죠진이 이듬해까지 중국 각지의 사원을 순례하며 남긴 일기 형식의 견문록이다. 여기에 소개되고 있는 사원은 항주(杭州)의 용화보승사 (龍華寶乘寺), 흥교사(興敎寺), 정자사(淨慈寺), 영은사 (靈隱寺), 천축사(天竺寺), 태주(台州) 천태산(天台山)의 국청사(國淸寺), 정혜진신탑원(定惠眞身塔院), 대자사(大 慈寺), 적성사(赤城寺), 태주 성내의 경덕사(景德寺), 신 창현(新昌縣)의 보엄사(寶嚴寺), 섬현(剡縣)의 실성원(實 性院), 월주(越州)의 광상사(光相寺), 경덕사, 소주(蘇州) 의 보문원(普門院), 보은사(報恩寺), 윤주(潤州)의 금산 사(金山寺), 사주(泗州)의 보조왕사(普照王寺), 도성 개 봉(開封)의 태평흥국사(太平興國寺), 계성선원(啓聖禪院), 대상국사(大相國寺), 복성선원(福聖禪院), 개보사(開寶寺), 수성원(壽聖院), 양주(揚州)의 수녕사(壽寧寺), 오대산 (五臺山)의 진용원(眞容院), 태평흥국사, 대화엄사(大華 嚴寺) 등이다. 본 절에서는 앞서 고찰한 북송대 선종 사원과 비교를 위해, 선종 이외의 사원을 대상으로 가 람 구성 내용을 살피고자 한다.

    먼저 항주의 용화보승사90)에서는 대불전과 예당(禮 堂), 오백나한원, 관음원, 수보리원(須菩提院) 등이 확 인되고, 흥교사91) 가람에서는 대문, 대불전, 강당, 십육 나한원, 오백나한원, 문수당, 심사대왕당(深沙大王堂)92), 아미타당, 귀자모당(鬼子母堂)93), 천태종 아홉 조사의 등 신상을 안치한 당, 식당, 교주방(敎主房), 방지(方池) 등 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 사원은 우선 중심의 대불전 외 에 다양한 불보살을 봉안한 다수의 불보살전과 원(院) 으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흥교사 강당에 대해서는, 불상이 안치된 강당에서 교주(敎主) 가 고좌(高座)에 올라 경전을 강의하고, 유나가 진행하 는 강경법회(講經法會)가 묘사되어 있어,94) 당시 강경 법회가 베풀어지는 강당의 내부 모습을 살피는데 좋은 참고가 된다.

    중국 천태종의 거점 도량인 천태산 국청사95)는 죠진 이 1072년 5월 13일부터 8월 5일까지 3개월 가까이 머 물렀기 때문에, 가람 구성이 다른 사원들에 비해 비교 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우선 대문과 문 앞의 교정(橋亭), 대불전, 법화법당(法華法堂), 심사대장 당, 재당(齋堂), 진수(鎭守), 승당, 식당, 대사당(大師堂)96) 등의 전각들이 보인다. 또 부속 원(院)으로는 삼현(三賢) 의 상을 봉안한 당이 있는 삼현원97), 나한원, 수(隋) 양 제(煬帝, 604~618 재위)의 칙명으로 건립된 계단(戒壇) 이 있는 계단원, 사주(寺主)의 방과 지자대사참당(智者 大師懺堂)98) 등이 있는 교적원(敎蹟院), 지관당(止觀堂) 이 있는 정혜원(定惠院), 팔각 전륜장(轉輪藏)을 설치한 이층의 누가 있는 명심원(明心院), 강당과 식당 등이 있 는 시방교원(十方敎院), 관음보전, 방등참당(方等懺堂), 원실(圓室), 노숙(老宿)의 방 등이 있는 혜광대사간경원 (惠光大師看經院), 법화참법원(法華懺法院), 고원(庫院), 욕원(浴院) 등이 있다고 했고, 전체 가람 규모를 ‘전, 당, 옥이 총 8백 칸(殿堂屋摠八百間)’이라고 했다.

    국청사 또한 대불전과 법화법당이 있는 중앙의 대불 원(大佛院)을 중심으로 다양한 부속 원들이 구성된 다 원식(多院式) 가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속 원의 대부분은 천태종에서 신앙하는 불보살과 고승을 안치 하거나, 또는 참법(懺法)이나 지관(止觀)과 같은 천태 종의 행법(行法)을 수행하는 전각들 위주로 구성되어 있어 천태종 가람으로서의 특징을 잘 보이고 있다. 또 각 원의 원주(院主)와 사주(寺主), 부사주(副寺主), 감 사(監寺), 고주(庫主) 등 각종 사무를 분장하는 역승들 과 그 아래에서 잡역에 종사하는 행자(行者)의 존재 및 그들이 기거하는 방(房)도 확인된다.

    그리고 절에서 멀리 떨어진 태주성(台州城) 안에 관 아의 행정을 비롯해 각종 세속의 일을 맡아 처리하는 해원(廨院)이 운영되고 있었고, 태주성에서 국청사에 이 르는 도중에는 사원 소유의 장원(莊園)을 관리하기 위 해 설치한 신방장(新坊庄)이라는 원이 운영되고 있었다. 이들 원에는 숙박의 기능도 있어, 죠진 일행이 이곳에 서 머물기도 했다. 이처럼 사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해원이나 장원을 경영하는 것은, 앞서 본 바와 같이 당시 선종사원에서도 확인된다.

    다음으로 송대 승가대사(僧伽大師, ?~708)99) 신앙의 중심 도량이었던 사주(泗州)의 보조왕사(普照王寺)100)를 소개한다. 일기에 기록된 가람은 대문과 ‘보조명각대사 (普照明覺大師)’의 편액이 걸린 중문이 있고, 그 안에 사방이 회랑으로 둘러싸인 가람 중심부가 구성되어 있 었는데, 서쪽과 북쪽 회랑에는 승가대사의 42변상도(變 相圖)가 그려져 있었다. 회랑 안쪽에는 팔각 십삼층 승 가대사탑과 이층의 대불전이 각각 동쪽과 서쪽에 나란 히 서 있었다. 불전의 동서 양쪽에는 중층의 종루와 경 장이 있고, 불전 뒤에는 일층에 석가모니, 이층에 백의 관음을 각각 본존으로 봉안한 석보암지각(石寶巖之閣) 이라는 중층 불전이 있었다. 중문 북쪽에는 불상과 승 가대사의 변상도를 수놓은 비단이 걸려 있는 보전(寶 殿)과 예전(禮殿) 일곽이 있고, 승가대사탑 뒤의 회랑 바깥에는 건물 내부에 승가대사 진영을 봉안한 감실이 설치된 강당이 있었고, 가람 동측에는 진적대사(眞寂大 師)101)의 진영을 안치한 소전(小殿)과 중층의 비각이 있 다고 했다. 이외에도 승당, 구층탑, 법화경을 새긴 석경 (石經), 그리고 건명선원(乾明禪院)이 확인된다. 그리고 대문 바깥 좌우의 회랑에서 각종 서적들을 사고파는 모 습102)이 묘사되어 있어 이채롭다. 가람의 전체적인 구 성을 파악하기에 충분치 않은 내용이기는 하지만, 승가 대사신앙의 중심도량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당탑 구성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죠진은 보조왕사의 승당에 대해, ‘1백50명이 쉬 고 있는데, 자리마다 의발(衣鉢)이 있고, 누워 있거나, 앉아 있거나, 법문(法門)을 베껴 쓰거나, 독경(讀經)하 고 있다(次入僧堂, 坐各有衣鉢, 或臥或坐, 或書法門, 或 讀經)’고 묘사했다. 본래 승당은 선종사원을 특징짓는 가장 대표적인 전각의 하나로, 모든 수행승들이 좌선을 비롯해 식사와 수면을 함께 하는 곳으로, 수 명의 승려 들이 수행·생활하는 작은 방들이 연속된 형태의 기존 사원의 승방(僧房)과는 기능과 건축 형태면에서 크게 다르다. 그런데 우선 보조왕사에도 1백50명에 이르는 대규모 승려들을 수용하는 승당이라는 전각이 있었다 는 점은 분명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103) 그러나 선종사 원의 승당에서는 정해진 시간 이외에 자리에 누울 수 없고, 경전을 읽거나 필사하는 등의 행위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조왕사 승당의 쓰임새는 오 히려 기존 사원의 승방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다.104) 앞서 소개했던 국청사에도 승당이 확인되는데, 국청사 에는 별도의 식당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 역시 선종사 원의 승당과는 성격이 달랐다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개봉의 태평흥국사105)는 죠진이 1072년 10월 13일부터 오대산으로 순례를 다녀왔던 기간(11월 1일부터 12월 25일까지)을 제외하고 이듬해 4월 11일까 지 머물렀던 곳이다. 가람에 대해서는 중앙의 대불전이 있는 원을 중심으로 주위에 전법원(傳法院), 그 서쪽의 인경원(印經院), 인경원 남쪽의 칠객원(七客院), 계단원 (戒壇院), 그리고 욕원(浴院)106) 등이 기록되어 있어, 앞 서 소개한 사원들과 마찬가지로 다원식 가람이었을 것 으로 추정된다.

    전법원은 중문 안에 중층의 강당, 삼층의 태종황제 어필비각(太宗皇帝御筆碑閣), 진종황제(眞宗皇帝)의 어 필비를 봉안한 건명지전(乾明之殿), 승방, 창고 등이 있다고 했다. 강당의 이층에는 화엄해회관음상(華嚴海 會觀音像)107)과 선재동자상(善財童子像)이 안치되어 있 고, 승방에는 역경(譯經)을 맡은 서역 출신의 승려를 포 함해 50명의 승려와 행자 70명, 그리고 전좌(典座) 2명 등이 거처하고 있다고 했다. 칠객원에는 구층의 칠보무 가탑(七寶無價塔)과 중층 불각이 있고, 인경원에 대해서 는 원을 두르는 사면의 1백30칸 회랑 전체가 경판(經 板)으로 가득 차 있다고 했다.

    이 중에서 죠진 일행은 전법원의 승방에서 머물렀는 데, 그가 머물렀던 방은 중문 서쪽 세 칸 규모의 방이 라고 했고, 중문 동쪽의 한 칸 방에는 그를 수행했던 이들이 머물렀다고 했으며,108) 죠진의 옆방에도 승려가 거처하고 있다고 했다.109) 그리고 이 전법원에 승려와 행자 등 120여 명이 거처하고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 승방은 전법원의 사방을 둘러싸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과 관련하여 개봉 상국사 불아원(佛牙院)의 승방에 대해 원을 둘러싸고 있는 ‘사 면의 회랑이 모두 승방으로 되어 있다(四面廊皆有僧房)’ 고 했다.110) 이처럼 북송대 선종 이외 사원의 승방은, 보조왕사의 승당과 같이 모든 승려들이 하나의 공간에 기거하는 형태도 있었지만, 대체로는 수 명의 승려들이 생활하는 방들이 이어져 원을 둘러싸는 당대 이래 삼면 승방(三面僧房)과 같은 형태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음 을 알 수 있다.

    5-2.선종과 타종파 사원 가람 구성의 비교

    앞서 선원청규와 대위산 밀인사를 통해 고찰한 북 송대 선종사원과, 위에서 살핀 참천태오대산기에 기 록된 타종파 사원의 가람 구성 내용에서 확인되는 공 통점과 차이점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먼저 공통점으로 가람 중심부의 구성을 들 수 있다. 즉, 선종사원의 삼문, 불전, 법당은 타종파 사원의 중 문, 불전, 강당에 각각 해당하며, 이들 전각이 가람 중 심축선상에 배치되고 회랑으로 둘러싸여 전체 가람 배 치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주불전 전면 동서 에 종루와 경장을 각각 건립하는 것 또한 종파를 막론 하고 당시 불교 사원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단, 타종파 사원의 경우 이 중심원에 주불전을 포함해 복수의 불전이 전후로 배치되는 경우도 있다.

    불전 이외에 나한당 역시 종파와 무관하게 보편적으 로 나타나는데, 이는 당시 불교계에 나한신앙이 널리 유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11) 그리고 종루와 경장, 주 방을 핵심 시설로 하는 고원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며, 승려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된 욕실과 변소 역 시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더해 선종사원의 운영과 관련된 각종 사무를 분장하는 지사에 해당하는 역직 또한 타종파 사원에서도 확인되며, 사원 바깥에 대관업무를 비롯한 각종 세속 관련 사무를 처리하는 해원을 운영하고, 사원 재정 충당을 위해 장원을 경영 하는 것 역시 당시 불교사원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한편 불탑의 경우, 선종사원에서도 불탑이 건립되는 경 우도 있고, 타종파 사원에는 불탑이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당시 사원에서 불탑의 유무 자체가 가람의 종 파적 특성을 반영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서로 차이나는 부분을 보면, 우선 타종파 사원은 당 대 이래의 다원식 가람112) 형태가 유지되고 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즉, 가람 중심원의 주위에 다양한 원이 구성되고, 원 안에는 다양한 불보살 혹은 고승을 안치 한 전각이나 탑, 그리고 종파별 행법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회랑으로 구획된 각 원에는 원주가 있고, 또 별도의 강당이나 식당, 승방까지도 갖추어 어느 정도는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원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선종사원은 기본적으로 다원식 가람 구성이 아 니다. 침당과 방장으로 구성되는 주지 영역이나 고원 혹은 마원과 같은 것들이 보이지만, 이것들은 기능적 으로 전체적인 사원 운영의 한 부분으로 통합되어 있 었고, 건축 형태적으로도 회랑으로 구획된 독립된 영 역을 구축하고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타종파 사원의 원들과는 달랐다.

    그리고 타종파 사원에는 가람 중심원의 대불전 외에 도 다양한 불보살전이 있는 반면, 선종사원은 주불전 외에 나한당을 건립하는 정도가 기본이었고, 전반적으 로 불보살전의 수가 타종파 사원에 비해 극히 적었다. 또 역대 조사와 주지의 진영을 안치하는 조사당과 이들 의 유골을 안치한 탑, 그리고 일반 중승의 유골을 모아 안치한 보동탑을 건립하는 것도 선종사원에서만 확인된 다. 특히 선종사원에서 조사당과 승탑의 건립은, 주지를 오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현세의 부처로 보는 선종 특유의 주지관이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선종사원에서 주지, 수행승, 행자들을 위한 생활, 수 행, 의례 공간으로 침당과 방장, 승당과 중료, 그리고 행자당과 행자료를 각각 구성하는 방식은, 타종파 사원 에서는 확인되지 않으며, 선종사원 가람 구성에 나타나 는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선종사원 에서는 모든 수행승들이 승당에서 좌선과 취침, 식사를 함께 하기 때문에, 승당은 그것에 적합한 규모와 형태 를 가졌을 것이며, 별도로 식당을 두지 않았다. 이에 반해 타종파 사원의 승방은 당대 사원의 삼면승방과 같이, 수 명의 승려들이 기거하는 방들이 길게 연접되 어 회랑처럼 원을 둘러싸는 형태였고, 별도로 식당을 두고 있어서, 기능과 형태면에서 선종사원의 승당과는 매우 달랐다.

    단위 전각에 관한 내용 한 가지 사족을 달면, 선종사 원의 법당에는 내부 중앙에 법좌가 마련되고 그 위에 놓은 선의에 주지가 올라 앉아 설법했던 것에 반해, 이 에 해당하는 타종파 사원의 강당에는 경론을 강의하는 강사가 올라앉는 고좌와 더불어 불상도 안치되어 있었 다는 점도 주목되는 사실이다. 그 밖에 선종사원에서 주지를 도와 수행승의 지도를 담당하는 두수에 해당하 는 역직이 타종파 사원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도 지적해 둘 필요가 있겠다.

    이상에서 고찰한 북송대 선종사원과 타종파 사원의 가람 구성 내용을 주요 전각을 위주로 도식화하면 아 래와 같다. 그림 6, 그림 7

    6.결 론

    이상에서 고찰한 북송대 선종사원의 가람 구성에 대 하여, 청규 내용과 실제 사원과의 부합성, 그리고 타종 파 사원과 대별되는 선종사원의 특징과 불교사원으로 서의 공통점의 측면에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북송대에 재건된 대위산 밀인사의 가람 구성은, 선원청규에서 파악되는 그것과 거의 일치하며, 남송 대 오산십찰도에 수록된 가람배치도에서도 대부분 확 인되고 있는 바, 중국 불교사에서 선종이 가장 번성했 던 남송대 선종사원의 가람 구성과 배치는 북송대에 이 미 나타나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다만, 당시 밀인사를 비롯한 일부 선종사원에서 불탑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 기 때문에, 불탑의 유무가 선종사원의 가람 구성을 특 징짓는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북송대 선종사원과 참천태오대산기에 기록된 타종 파 사원의 가람 구성을 비교한 결과 아래와 같은 차이 점과 공통점을 갖는다.

    먼저, 차이점부터 들면, 첫째, 타종파 사원은 중심원 원 주위에 다수의 불보살전을 포함한 다양한 기능의 부속 원들이 구성된 다원식 가람이었던 반면, 선종사원 은 다원식 가람 형태가 아니었고, 불전과 선종에서 특 별히 중시했던 나한전 이외의 불보살전은 대체로 세우 지 않았다.

    둘째, 역대 조사와 주지의 영정과 유골을 봉안하는 조사전과 탑, 그리고 입적한 승려의 유골을 매안한 보 동탑은, 참선수행을 통해 현세에서의 깨달음을 추구하 는 선종의 사원에서만 타나나는 특징적인 가람 구성 요소이다.

    셋째, 주지와 수행승 및 행자들을 위한 수행, 의례, 생활을 위한 공간으로 방장과 침당, 승당과 중료, 그리 고 행자당과 행자료를 각각 구성하는 것 역시 선종사 원의 가람에서만 확인되는 특징이다.

    넷째, 승려들이 기거하며 수행하는 건물로, 선종사원 에서는 승당에서 모든 수행승들이 좌선수행과 식사, 수 면을 함께한 반면, 타종파 사원에서는 원을 두르는 회 랑 형태의 건물을 다수의 실로 구획하여 실마다 수 명 씩의 승려들이 사용하는 당대 이래 삼면승방 형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일부 타종파 사원에서도 승당을 건립 하는 경우도 확인되나, 그 기능이 선종사원의 승당과는 달랐고 승려들의 식사는 식당에서 행해진 반면, 선종사 원에서는 식당을 별도로 두지 않았다.

    다섯째, 타종파 사원의 강당에는 강사의 고좌와 더 불어 불상이 안치되어 있었으나, 이에 해당하는 선종 사원의 법당에는 불상을 안치하지 않았고, 주지가 올 라 설법하는 자리인 법좌와 선의만 배설되어 있었다.

    여섯째, 선종사원에서 주지를 도와 수행승의 지도를 담당하는 두수에 해당하는 역직은 타종파 사원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음으로 공통되는 점을 들면, 첫째, 삼문·불전·법당 으로 구성되는 선종사원의 가람 중심부 구성은, 타종 파 사원의 중문·불전·강당에 각각 해당하며, 모두 가람 중심축선상에 배치되고 회랑으로 둘러싸여 전체 가람 배치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또한 주불전 전면 동서에 종루와 경장을 건립하는 것도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둘째, 송대에는 나한신앙이 유행했기 때문에 나한당 은 선종과 타종파 사원 모두에서 널리 건립되고 있었 다. 더불어 주방을 핵심 시설로 하는 고원, 욕실 등의 전각들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셋째, 사원의 유지 및 운영과 관련하여 사원 외부에 각종 세속의 일을 처리하는 해원을 운영하고, 재정 충 당을 위해 장원을 경영하는 것, 그리고 사원의 운영과 관련된 각종 사무를 분장하는 지사 류의 역직을 두는 것 역시 선종과 타종파 사원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Fig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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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산십찰도『 영은사(靈隱寺) 배치도의 법당, 침당(前 方丈), 방장 부분; <그림 5>의 ③, ④, ⑤에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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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산십찰도『의 경산사(徑山寺) 승당 평면

    JAH-25-47_F3.gif

    『오산십찰도』의 중료 평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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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산십찰도』 천동사(天童寺) 배치도의 고원 부분 ; <그림 5>의 ⑬에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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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산십찰도』 영은사 배치도의 주요 전각 ; 関口欣也, 『五山と禪院』 수록 모사도 위에 번호 기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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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송대 선종사원 가람 구성 모식도

    JAH-25-47_F7.gif

    북송대 타종파 사원 가람 구성 모식도

    Table

    Footnote

    • 伊東忠太, 「五山十刹圖に就いて」, 『佛敎史学』, 1-4, 1911.7; 田邊泰, 「大唐五山諸堂圖に就いて」, 『早稲田建築学報』, 8, 1931; 白石虎月, 「大 宋諸山圖に就いて」, 『禅宗』, 538, 1939; 横山秀哉, 「支那禅刹圖式の研 究2: 大乗寺藏五山十刹圖其他に就いて」, 『東北大学建築学報』, 2, 1953; 石井修道, 「中国の五山十刹制度について: 大乗寺所蔵寺傳五山十刹圖を 中心として」, 『印度学仏教学研究』, 31-1, 1982.12 등
    • 横山秀哉, 『禅の建築』, 彰國社, 1967
    • 関口欣也, 「中国江南の大禅院と南宋五山」· 「中国両浙の宋元古建築(1): 両浙宋代古塔と木造様式細部」· 「中国両浙の宋元古建築(2): 両浙宋元木造 遺構の様式と中世禅宗様」, 『佛敎藝術』, 144·155·157, 每日新聞社, 1982.9 · 1984.7 · 1984.11
    • 일찍이 양사성(梁思成)이 『오산십찰도』에 관한 타나베 야스시(田辺 泰)의 연구(1931)를 중국어로 번역하여 소개한 바 있다; 梁思成, 『大唐 五山諸堂圖考」, 『中國營造學社彙刊』, 第3巻, 第3期, 1932
    • 張十慶, 『五山十刹圖與南宋江南禪寺』, 東南大學出版社, 2000; 『中 國江南禪宗寺院建築』, 湖北敎育出版社, 2002이 대표적이다.
    • 서아리, 「송대 선찰의 건축 공간: 『禪苑淸規』와 『五山十刹圖』를 중심으로」,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4
    • 한지만·이상해, 「회암사의 연혁과 정청·방장지에 관한 복원적 연구」, 건축역사연구, 17권 6호, 2008.12; 한지만, 「회암사지 日자형 건물지에 관한 연구」, 건축역사연구, 19권, 2호, 2010.4; 한지만, 「회암사지 고원 영역의 전각 배치에 대하여」, 대한건축학회논문집(계획계), 30권, 7호, 2014.7 등이 있다.
    • 鏡島元隆外, 『譯註禪苑淸規』, 曹洞宗宗務廳, 1992(1972). 최법혜, 『고려판 禪苑淸規역주』,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2(2001). 『선원청규』 는 전문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청규이다. 한국어 역주본의 저본인 고려판 청규는, 초간본 간행 8년 후인 북송 1111년(政和1)에 중첨(重 添) 간행된 송본(宋本)을 고려로 가져와 1254년(고종 41) 분사대장도 감(分司大藏都監)에서 중조복각(重雕覆刻)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어 역 주본의 저본은 남송 1202년(嘉泰2)에 우상(虞翔)이 재각(再刻)한 중조 보주(重雕補註)본이다; 최법혜, 「고려판 선원청규 해제」 , 위의 책, 20쪽
    • 명대(明代) 1597년(萬曆30)에 간행된 사부총간본(四部叢刊本)을 참 조하였다.
    • 島津草子, 『成尋阿闍梨母集·参天台五臺山記の研究』(大蔵出版株式 会社, 1959)와 藤善真澄訳注, 『参天台五臺山記上』(関西大学出版部, 2007)을 참조하였다.
    • 鎌田茂雄, 『中國佛敎史』, 岩波書店, 2006(1978), 293~298쪽
    • 伊吹敦, 『禪の歷史』, 法藏館, 2004(2001), 85~88쪽
    • 과거 위대한 선승의 언행(言行)을 통해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한 공안(公案)의 참구(參究)에 의해 깨달음을 구하는 수행법
    • 큰 깨달음을 추구하지 않고 단지 묵묵히 좌선하는 것을 통해 자기 본래의 불성(佛性)을 찾는 수행법
    • 이것 외에도 조정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원에 칙명을 내려 주지를 임명하는 칙차주지원(敕差住持院)이 있었고, 최고의 격식과 처우가 내려졌는데, 여기에도 선종사원이 가장 많았고, 교종과 율종 사원은 그 수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鎌田茂雄, 앞의 책, 287쪽
    • 『선원청규』에 나오는 지사와 두수의 구성에 대해서는 본 논문 「3-4. 사무(寺務) 공간」 부분 참조
    • 예를 들면 천태종의 근본 도량이었던 국청사(國淸寺)는 남송 초 1130년(建炎4)에 칙명으로 선종사원으로 바뀌었다. 청규와 관련해서, 원대 1347년(至正7) 운외자경(雲外自慶)이 재편(再編)한 천태종의 청 규인 『교원청규(敎苑淸規)』의 조본(祖本)은 임제종의 대혜종고(大慧宗 杲)에게 수학한 천태종 승려 청수법구(淸修法久, ?~1163)가 만든 것 으로 추정되고 있다; 伊吹敦, 앞의 책, 116쪽
    • 서아리, 앞의 논문
    • 『선원청규』, 권7, 「존숙입원(尊宿入院)」; 이미 역주본이 출판되 어 있으므로, 구체적인 청규 내용의 원문 및 번역문의 제시는 특별 한 경우를 제외하고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 ‘염송(念誦)’이란 마음으로 부처를 생각하고 입으로 그 명호(名 號)를 읊는 의례로, 선종에서는 매월 3·8·13·18·23·28일에 승당에서 십불명(十佛名)을 읊으며 기도하는 의례가 행해졌다. 3의 날에는 국 가와 불법의 융성 및 시주(施主)의 안녕을 기원하고, 8의 날에는 수 행승 자신의 수행 완성을 기원한다; 鏡島元隆外, 앞의 책, 76쪽
    • ‘삼례(三禮)’는 계수(稽首: 上禮), 궤(跪: 中禮), 읍(揖: 下禮)의 세 가지를 말하는 것으로, 계수는 머리를 바닥에 닿도록 엎드려 절하는 가장 정중한 예법이고, 궤는 무릎을 꿇고 올리는 예법, 그리고 읍은 양손을 가슴 앞에서 합장하여 올리는 예법이다; 駒澤大學內禪學大 辭典編纂所, 『新版禪學大辭典』, 大修館書店, 2003(1968)
    • 『선원청규』, 권2, 「염송(念誦)」 : 三八日, … 住持人從土地堂·大殿· 僧堂次第燒香, 唯佛前三禮.
    • 『선원청규』, 권10, 「백장규승송(百丈規繩頌)」
    • 『선원청규』, 권9, 「훈동행(訓東行)」
    • 『선원청규』, 권10, 「백장규승송」 : 或披作衣時, 不得上殿而過.
    • ‘수륙당’은 수륙회(水陸會)를 행하는 도량으로, 수륙회는 비제회 (悲濟會) 또는 아귀회(餓鬼會), 시식회(施食會), 시아귀회(施餓鬼會)라 고도 하여, 물과 육지에 음식을 흩뿌려 기아로 고통 받는 조상이나 무연의 혼귀를 구제하는 법회이다. 505년(天監4) 양(梁) 무제(武帝) 가 금산사(金山寺)에서 처음 행했다고 하며, 이후 일시 중단되었다가 당 말 무렵부터 성행했고, 송대 후기 이후로는 중국 전역에서 일반 적으로 행해졌다; 西山美香, 「五山禪林の施餓鬼會について- 水陸會靈 響」, 『駒澤大學禪硏究所年報』, 17, 駒澤大學禪硏究所, 2006.3, 47쪽
    • 『선원청규』, 권4, 「전주(殿主)·종두(鐘頭)」: 殿主·閣主·塔主·羅漢堂 主·水陸堂主·眞堂主·鐘頭, 拂拭塵埃, 列正供具, 以時洒掃莊飾香燈, 參 後展蓆, 以待衆人瞻禮.
    • ‘진재’는 진실주재(眞實主宰)라는 뜻으로, 불법을 수호하는 제천 (諸天), 선신(善神)을 말한다; 中村元, 『佛敎語大辭典『, 東京書籍株式 會社2006(1981)
    • 『선원청규』, 권2, 「결하(結夏)」
    • 다음 「3-2. 주지의 교화공간」 의 침당(寢堂) 부분 참조
    • 『선원청규』, 권7, 「존숙천화(尊宿遷化)」
    • 『선원청규』, 권2, 「상당(上堂)」 ; 한편, 법당 안에서 지사가 동쪽, 두수가 서쪽에 자리하기 때문에 이들 역직을 각각 동반(東班), 서반 (西班)으로도 부른다.
    • 『선원청규』, 권9, 「사미수계문(沙彌受戒文)」
    • 『선원청규』, 권6, 「간장경(看藏經)」
    • 『선원청규』, 권6, 「중연재(中筵齋)」 ; 중연재는 길하거나 흉한 일이 있을 때 재를 베풀어 중승들을 공양하는 길흉재(吉凶齋)를 말한다; 駒澤大學內禪學大辭典編纂所, 『新版禪學大辭典』
    • 『선원청규』, 권7, 「존숙천화」
    • 『선원청규』, 권2, 「입실(入室)」
    • 『선원청규』, 권2, 「소참(小參)」 ; 매월 5일마다 이른 아침에 법당 에서 행해지는 설법을 대참 혹은 조참이라고 했던 것에 반해, 매월 3·8일 밤에 침당에서 행해지는 설법을 소참 혹은 만참(晩參)이라고 했다. 또한 소참은 가훈(家訓)이라고도 하여, 선의 종지부터 일상적 인 사원생활에 대한 세세한 가르침까지 이루어졌다; 鏡島元隆外, 앞의 책, 79쪽
    • 『선원청규』, 권7, 「존숙천화」
    • 『오산십찰도』는 13세기 중엽 남송 시기의 자료이지만, 본 논문 4장과 기존 연구와 같이 『선원청규』에서 확인되는 전각이 『오산십 찰도』의 내용과 대부분 일치하기 때문에, 이해의 편의를 위해 『오산 십찰도』의 수록 그림을 제시하였다. 이하 동일.
    • 韓志晩, 「宋元時代の禪宗伽藍における寢堂について」, 『駒澤大學禪 硏究所年報』, 19, 2008.3, 49~50쪽
    • 승당 안을 한 바퀴 도는 것; 駒澤大學內禪學大辭典編纂所, 『新 版禪學大辭典』
    • ‘고사’는 고사지사(庫司知事)의 줄임말로, 주지를 도와 각종 사무 (寺務)를 총괄하는 지사의 우두머리 격이며, 『선원청규』에서는 감원 (監院)으로도 표기되고 있다; 駒澤大學內禪學大辭典編纂所, 『新版禪 學大辭典』
    • 『선원청규』, 권2, 「결하」
    • 『선원청규』, 권9, 「사미수계문」
    • 이상 승당의 건축구성에 관한 내용은 『선원청규』에서 산견되는 내용과 선행연구(横山秀哉, 「禪宗寺院伽藍の殿堂」, 앞의 책, 174~190 쪽)을 참고하여 기술하였다.
    • 『선원청규』, 권4, 「요주(寮主)·요수좌(寮首座)」
    • 이상 중료에 관한 내용은 『선원청규』에서 산견되는 내용과 선행 연구(韓志晩, 「中國宋·元時代の禪宗寺院における衆寮に關する硏究」(『日 本建築學會計劃系論文集』, 73권, 626호, 日本建築學會, 2008.4, 851~857 쪽)를 참고하여 기술하였다.
    • 『선원청규』, 권9, 「훈동행」
    • 『선원청규』, 권9, 「훈동행」
    • 『선원청규』, 권4, 「욕주(浴主)」
    • 『선원청규』, 권7, 「대소변리(大小便利)」
    • ‘감원’은 지사의 업무를 총괄하고, ‘유나’는 각종 의례에서 중승의 선두에 서서 이끄는 역할, ‘전좌’는 음식 조리 총괄, ‘직세’는 건물과 각종 기물의 수리를 각각 담당한다. 남송대에는 감원이 도사(都寺)·감 사(監寺)·부사(副寺)로 세분되어 육지사(六知事)가 되며, ‘도사’는 이전 감원의 역할, ‘감사’는 도사를 보조, ‘부사’는 회계와 출납을 각각 담당 했다; 駒澤大學內禪學大辭典編纂所, 『新版禪學大辭典』
    • 『선원청규』, 권2, 「청지사(請知事)」 : 如請維那, 即知客白云, 請大衆送 維那入堂司; 만약 (새로) 유나를 청하게 되면, 즉 지객(知客)은 ‘대중은 유나를 배웅하여 당사(堂司)에 들게 하도록 청합니다’라고 고한다.
    • 『선원청규』, 권2, 「청지사」 : 維那白云, 請大衆送知事入庫堂.
    • 『선원청규』, 권6, 「경중(警衆)」
    • ‘수좌’는 승당에서의 좌선 지도, ‘서기’는 각종 문서 작성, ‘장주’는 장전에 보관된 경전 관리, ‘지객’은 접객, ‘욕주’는 욕실의 관리, ‘고두’는 출납과 회계를 각각 담당했다. 남송대가 되면 고두의 역할을 지사로 옮겨가고, 불전의 관리를 담당하는 ‘지전(知殿)’이 추가되어 육두수(六 頭首)가 운용되었다; 駒澤大學內禪學大辭典編纂所, 『新版禪學大辭典』
    • 화주(化主)는 본래 ‘권화(勸化)의 주인(主人)’이라 하여 주지를 뜻했으나, 『선원청규』에서는 사원을 대표하여 세속 신자를 권화하는 주임으로 그 의미가 변했고, 매년 교대로 다른 지방에 파견되었다. ‘가방화주(街坊化主)’는 사원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물품을 조달하기 위해 수시로 시가(市街)에 나가 탁발하거나 구입하는 역직이다; 鏡島 元隆外, 앞의 책, 142·168쪽; 駒澤大學內禪學大辭典編纂所, 『新版禪 學大辭典』
    • 이들은 속세에 나가 재가신자들에게 해당 경전을 강설하는 속 강승(俗講僧)으로, 포교와 더불어 시주를 모으는 목적도 있었다; 鏡 島元隆外, 앞의 책, 142쪽
    • ‘수두’와 ‘탄두’는 욕실의 관리를 담당하는 두수인 욕주 아래에 배속되어 물과 시탄(柴炭)의 공급을 맡았다.
    • ‘원두’는 사원의 농지를 경작하는 일체를 관장한다. ‘장주’는 사 원 소유의 장원(莊園)을 관리하는 역직으로, 객호(客戶), 즉 소작인 을 고용하여 장원을 경작시키고, 수확물에서 관아에 내는 세금과 사 원에서 징수하는 전곡(錢穀) 일체를 관장했다; 『선원청규』, 권4, 「마 두(磨頭) 원두(園頭) 장주(莊主) 해원주(廨院主)」
    • ‘성승시자’, ‘노두’, ‘직당’은 승당의 성승, 화로, 전반적인 관리를 각각 담당한다.
    • ‘당두시자’는 주지를 보좌하는 시자를 말한다. 『선원청규』(권4, 「堂 頭侍者」)에는 내시자(內侍者), 외시자(外侍者)가 있어 각각 주지의 일 상생활, 주지의 접객 및 의례를 보좌한다고 했다.
    • 『선원청규』, 권4, 「마두 원두 장주 해원주」: 磨頭之職. 漏篩欲細, 所以去瓦礫也. 塵篩欲麁, 所以去塵坌也; 또 누사는 수차(水車), 진사는 가축을 이용해 동력을 얻는다는 견해도 있다; 鏡島元隆外, 앞의 책, 144~145쪽
    • 『선원청규』, 권4, 「마두 원두 장주 해원주」: 廨院主之職. 主院門 收糴買賣僧行宿食, 探報郡縣官員交替, 應報公家文字. 或收簇院門供施 財利, 或迎待遠方施主.
    • 鏡島元隆外, 앞의 책, 149쪽
    • ‘삼문’은 선종사원에서 불전 앞에 놓이는 문으로, 공(空)·무상(無 相)·무원(無願)의 삼해탈문을 상징한다. 불전을 해탈, 즉 열반의 경 지로 보고, 이에 도달하기 위해 거치는 문인 삼해탈문에 견주어 부 르는 것이다.(中村元, 『佛敎語大辭典』) 남송 『오산십찰도』에는 외산 문(外山門)·중문(中門)·정문(正門)의 세 문이 나오는데, 이를 가람배 치도에서 확인하면 불전 앞에 위치한 정문이 삼문에 해당하며, 산문 이 최외곽, 그리고 중문은 산문과 정문 사이에 각각 위치했다.
    • 『선원청규』, 권1, 「장포(裝包)」
    • 『선원청규』, 권7, 「존숙입원(尊宿入院)」
    • 『선원청규』, 권2, 「영접(迎接)」
    • 『선원청규』, 권1, 「괘탑(掛搭)」
    • 『선원청규』, 권2, 「영접」
    • 『선원청규』, 권6, 「장식(將息)」
    • 『선원청규』, 권4, 「연수당주(延壽堂主)」
    • 『선원청규』, 권7, 「망승(亡僧)」
    • 『선원청규』, 권6, 「경중」 ; 대종은 새벽, 점심식사 때, 저녁에 친 다고 했고, 종두가 타종행자(打鐘行者)를 시켜 종을 치게 한다.
    • 『선원청규』, 권2, 「소참」 ; 경행은 승당에서 좌선할 때 피곤과 졸 음을 물리치기기 위해 중승들이 일제히 천천히 걷는 것이다; 駒澤大 學內禪學大辭典編纂所, 『新版禪學大辭典』
    • 『宋高僧傳』, 巻第十一, 「習禪篇」, 第三之四, 「唐大潙山靈祐傳」: 元 和(806-820)末, 隨緣長沙因過大潙山, 遂欲棲止. … 有山民見之, 羣信 共營梵宇. 時襄陽連率李景讓統攝湘潭, 願預良緣, 乃奏請山門號同慶寺.
    • 石井修道, 「大潙山の中興について: 曹洞宗との接点を考慮にして」, 『中国仏蹟見聞記』, 中国仏蹟参観団事務局, 1984, 41~50쪽
    • 歳移三霜, 纔辦法堂大殿寝室而已, 然又苟簡斎庖垣廡皆未具, 上雨 旁風無所蓋障. 故禅学者, 分処山間林下蜂房蟻穴; 3년이 지나(1107) 법 당·대전·침실을 겨우 마련했을 뿐이며, 간단한 부엌(斎庖)과 담장, 부 속건물(廡)은 아직 갖추지 못해, 비바람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그래 서 선을 배우는 자들은 산속 나무 아래 벌집과 개미구멍 같은 곳에 거처하고 있었다.
    • 越明年三月, 空印來自帰宗, 山川改觀, 叢席增氣. … 鐘成萬斤, 塗 以黄金, 建閣館于殿之東廡. 佛菩薩之語, 藏於龍宮. 傳自五天, 学者所 當盡心, 所以資智證之妙, 而盡細微之惑. 卽室五千軸者, 蔵於殿之西廡; 이듬해(1110) 3월, 공인선사(空印禪師) 식(軾)이 귀종사(歸宗寺)로부터 오니, 산천이 바뀌고 총림은 기운을 더했다. … 종을 만들었는데 만 근이나 되고, 황금을 칠했으며, 각관(閣館)을 불전 동쪽 무(廡)에 세 웠다. 불보살의 말씀을 용궁(龍宮)에 보관하는 것은 인도에서 전래된 것인데, 배우는 자들은 마땅히 마음을 다해야 할 것인 바, 그로인해 지증(智證)의 묘를 갖추고 작은 미혹도 떨쳐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실(室)의 5천 축을 불전 서쪽 무에 보관했다.
    • 又明年, 增廣善法堂之後, 爲雨花堂. 含風而虗明, 吐月而宏深. 夜參 旣罷繽粉滿庭. 自兩廊之左, 繞以復屋建庫院, 所以總庶務也. 自祖龕之 右, 翼以脩廊建堂司, 所以牧淸衆也; 이듬해(1111) 선법당(善法堂) 뒤를 넓혀 우화당(雨花堂)을 지었다. (절은) 바람을 품어 허명(虗明)하고, 달이 떠오르니 굉심(宏深)하다. 야참(夜參)이 파하니 (달빛이) 마당 가득 빈분(繽粉)하도다. (불전 앞 좌우) 두 낭(廊)의 왼쪽(동쪽)에 여 러 채의 건물을 둘러 고원(庫院)을 세웠는데, 서무(庶務)를 총괄하는 곳이다. 조감(祖龕: 조사당)의 오른쪽(서쪽)에서 낭(廊)을 내어 당사 (堂司)를 지었는데, 청정한 대중(淸衆)을 이끄는 곳이다.
    • 又明年, 重修僧堂, 廣博靖深, 冬溫夏涼. 曰『僧者天人之福田, 佛祖 之因. 十方如來同一道, 故出離生死. 曠野深山, 聖道場地, 皆阿羅漢所 住持. 世間麤人, 所不能見, 旣以廣延其所見, 則所不見者, 敢不敬乎』. 又刻五百尊者之像, 閣而供事之; 또 이듬해(1112) 승당(僧堂)을 다시 지었는데, 넓고 편하고 깊이가 있으며,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시 원하다. (공인선사께서) 이르기를, “승려는 천인(天人)의 복전(福田) 이요, 부처의 인연이다. 시방여래(十方如來)와 같은 길을 가는 까닭 에, 태어나지만 생사에 연연하지 않는다. 황량한 들판과 깊은 산이 라도 성스러운 도량이요, 모두가 아라한(阿羅漢)이 주지하는 곳인데, 세간의 모자란 사람들은 볼 수가 없도다. 이미 그 터를 넓힌 것을 보니, 보지 못한 자라 할지라도 어찌 감히 공경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또 오백존자의 상을 깎아 각(閣)에 모셨다.
    • 又明年, 得異木於絶壑, 斷而爲三, 大合抱, 長倍尋, 刻淨土佛菩薩之 像, 莊嚴妙麗, 千花照映, 如紫金山並高爭峻, 建殿于天供廚之南. 又特 建閣于寢室之前, 綠踈靑瑣, 下臨風雨, 奉安神宗皇帝所賜御書; 또 이듬 해(1113)에는 깎아 세운 듯한 골짜기에서 기이한 나무를 얻었는데, 잘라서 셋으로 하니, 굵기가 한 아름이고 길이가 두 심(倍尋= 1丈6尺, 1尋= 8尺)이라, 정토의 불보살상을 깎았는데, 장엄이 묘려하고, 수많 은 꽃들로 환히 빛나며, 마치 자금산(紫金山)과 더불어 높이를 다투 는 듯하다. 천공주(天供廚) 남쪽에 전(殿)을 세웠다. 그리고 특별히 각(閣)을 침실 앞에 세웠는데, 쇠약해진 황실에서 우여곡절을 겪었던 신종(神宗) 황제께서 하사하신 어서를 봉안했다.
    • 又明年, 重修大三門, 宏壯傑立, 鏤金鏤碧, 寶翰飛動於千巖萬壑之 上, 而太師楚國公, 爲書其額. 却望形勝, 衆峯來朝, 如趨如俯, 如屹立如 踏舞. 有臺自獻其前, 以寶積靈牙舍利, 葬臺之中, 而建塔其上. 千尺九層, 蕩摩雲煙, 微風徐來, 塔鈴和鳴, 比丘來往, 旋遶作禮. … 建普同塔于寺 之西, 又修大圓禪師之塔, 而峙立兩亭, 以覆古今碑; 또 이듬해(1114) 삼 문(三門)을 다시 지었다. 웅장하게 솟았고, 금과 옥으로 장식하여 보 배로운 깃털이 수많은 바위와 계곡 위로 날아 움직이는 듯하며, 태사 (太師) 초국공(楚國公)이 그 편액을 썼다. (삼문에 올라) 고개를 돌려 형승을 조망하니 여러 봉우리들이 내조(來朝)하는데, 달리는 듯하다 가 잦아지고, 우뚝 서다가도 춤을 추는 듯하다. 그 앞에 저절로 나타 난 대(臺)가 있어 보적(寶積)의 영아사리(靈牙舍利)를 그 안에 묻고 위에 탑을 세웠다. 높이가 1천 척에 9층으로, (바람에) 움직여 구름과 서로 스치며, 천천히 불어오는 미풍에 탑에 매단 풍경들이 조화로운 소리를 낸다. 왕래하는 비구들이 탑을 돌며 예를 행한다. … 절 서쪽 에 보동탑(普同塔)을 세우고, 대원선사(大圓禪師= 위산영우)의 탑을 수리하고, 두 채의 정자를 세워 옛날과 지금의 비를 덮었다).
    • 『오산십찰도』에는 영은사(靈隱寺), 천동사(天童寺), 만년사(萬年 寺)의 가람배치도가 수록되어 있다. 『선원청규』에 나오는 전각들과 『오산십찰도』 수록 가람배치도와의 비교는 서아리의 연구에서 고찰 된 바 있다.
    • 『正法眼藏』, 「阿羅漢」: これ大阿羅漢なり, 學佛者の極果なり. 第 四果となづく, 佛阿羅漢なり; 이것이 대아라한이요 부처의 가르침을 배우는 자의 극과(極果)이다. 제4과(第四果)라고 부르며, 불아라한(佛 阿羅漢)이다.(이상 『道元禪師全集』, 春秋社, 1930)에서 인용. 여기서 극과는 최상의 깨달음, 궁극의 이상을 뜻하며, 대승에서는 불과(佛果: 부처의 경지)를 말하고, 소승에서는 아라한과(阿羅漢果)를 가리킨다; 中村元, 『佛敎語大辭典』
    • 이상 原田弘道, 「禪宗における羅漢思想」, 『宗敎學論集』, 9, 駒澤 大學宗敎學硏究所, 1979, 269~292쪽
    • ‘정자사’는 오대(五代) 말 오월(吳越)의 왕 전숙(錢俶)이 954년(顯 德4)에 법안종(法眼宗)의 도잠선사(道潛禪師, ?~961)를 맞아 혜일영 명원(慧日永明院)이라 사액하여 개창한 선종사원이다.(『景德傳燈錄』, 卷第25, 「杭州永明寺道潛禪師」) 이후 961년 전숙은 지각선사(智覺禪 師) 연수(永明延壽, 904~975)를 제2세로 청했고, 연수는 이곳에 15년 간 주지하면서 유명한 『종경록(宗鏡錄)』 1백 권을 저술하고 제자 1천 7백 명을 배출했으며, 연수 입적 후에는 북송 태종(太宗)으로부터 수 녕선원(壽寧禪院)이라는 사액이 내려졌다.(『景德傳燈錄』, 卷第26, 「杭 州慧日永明寺智覺禪師延壽」) 1072년 죠진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에는 정자사(淨慈寺)로 불리고 있었고, 각 층마다 오백나한을 조각한 9층 석탑을 비롯해 석조 장륙 석가상을 봉안한 대불전, 오백나한원 등이 있었다.(『參天台五臺山記』, 卷第1; 熙寧5年(1072) 4月29日: 從興敎 寺北隔二里, 有淨慈寺. 參拜大佛殿石丈六釋迦像, 次禮五百羅漢院, 次 禮石塔, 九重高三丈許, 每重彫造五百羅漢) 이후 남송대에는 오산(五 山) 제4위로 정해졌다.
    • 『참천태오대산기』, 권제1, 熙寧5년(1072) 4월 25일; 『함순임안 지(咸淳臨安志)』(1268) 권77에 의하면 용화보승사는 오월 왕 전홍좌 (錢弘佐)가 945년(開運2) 단악내원(端萼內園)을 불교 사원으로 개조 하여 전대사탑(傳大士塔)을 세운 것에서 비롯되며, 북송 1008년(大 中祥符1)에 용화보승사로 개칭되었다.
    • 『참천태오대산기』, 권제1, 熙寧5년 4월 29일; 『함순임안지』 권78에 의하면 흥교사의 전신은 오월 왕 전숙(錢俶)이 972년(開寶5) 남병산 (南屛山)에 건립한 선경사(善慶寺)로, 북송 태평흥국(太平興國, 976~ 983) 때 흥교사로 개칭되었다.
    • ‘심사대왕’은 심사대장(深沙大將)을 가리킨다. 기괴한 모습을 했고, 여러 가지 고난을 없애주는 호법신으로, 현장(玄奘)이 인도에 다녀올 때의 수호한 신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봉교귀(奉敎鬼)로도 불린다; 中 村元, 『佛敎語大辭典』
    • ‘귀자모’는 애자모(愛子母), 천모(天母), 공덕천(功德天)이라고도 하 며, 원래는 성질이 포악하여 다른 사람의 아이들을 잡아먹는 야차녀 (夜叉女)였으나 나중에 부처로부터 교화를 받아 불법(佛法)과 유아 육성(幼兒育成)의 신이 되었다; 中村元, 『佛敎語大辭典』
    • 『참천태오대산기』, 권제1, 熙寧5년 4월 29일: 次講堂講經, 百餘人 著座, 敎主一人禮佛登高座, 只一座無讀師座, 高六尺許. 有橋如說佛法. 儀式唄二人, 維那打柱出唄, 敎主表白. 讀玄義釋籤第六卷了; 다음으로 강당에서 강경법회가 있었는데, 1백여 명이 자리해 있고, 교주(敎主) 한 명이 부처에 예를 올리고 고좌(高座)에 올랐다. 단지 (교주의) 자리 하나만 있을 뿐, 독경사(讀經師)의 자리는 없다. (고좌의) 높이는 6자 남짓인데, 부처가 (금강보좌에 올라) 설법하는 것처럼 (고좌에는) 계단 (橋)이 있다. 의식에는 범패(梵唄)하는 이가 둘인데, (그중에서) 유나가 타주(打柱)하고 범패를 하면(出唄), 교주가 법회의 시작을 고하고(表 白), 『현의석첨(玄義釋籤)』 제6권을 읽었다; 타주(打柱)는 법회를 진행 할 때 대중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짧은 막대기 모양의 추(槌)를 잡고 침(砧: 나무로 짧은 팔각 기둥모양으로 만든 법구)을 두드려 소 리를 낸다는 뜻으로 해석되며, 이를 흔히 추침(槌砧)이라고 한다.
    • ‘국청사’는 수대(隋代) 598년(開皇18) 황제의 칙명으로 지의(智 顗, 538~597)의 유지에 따라 그의 수행처에 절을 세우고 천태사(天 台寺)로 명명한 것에서 비롯되며, 대업(大業, 605~617) 연간에 국청 사로 개칭되었다. 당대에는 회창폐불(會昌廢佛, 845) 때 폐사되었다가, 851년(大中5)에 중건되어 대중국청사(大中國淸寺)로 불렸고, 북송 1005년(景德2)에는 경덕국청사(景德國淸寺)로 개칭되었다. 죠진이 국 청사를 방문한 이후 병화로 소실되었다가, 남송 초 1128년(建炎2)에 중건되었고, 1130년에는 황제의 명으로 선종사원으로 편제되었다. 이 상 『참천태오대산기』 및 『가정적성지(嘉定赤城志)』(1223), 『천태산방 외지(天台山方外志)』(1601) 참조.
    • 지자대사(智者大師) 지의를 비롯한 천태종 고승들의 진영이 봉 안되어 있다고 했다; 『참천태오대산기』, 권제1, 熙寧5년 5월 13일
    • 각각 미타(彌陀), 보현(寶賢), 문수(文殊)의 화신으로 알려진 풍간 선사(豐干禪師), 습득보살(拾得菩薩), 한산보살(寒山菩薩)의 상이 안치 되어 있다고 했다; 『참천태오대산기』, 권제1, 熙寧5년 5월 14일
    • 참당 안에는 3척 크기의 석가, 미타, 관음의 상을 비롯해 수십 개 의 지자대사 지불(持佛)과, 지자대사, 십육나한, 사주화상(泗州和尙)의 진영, 그리고 지자대사의 지경(持經)인 『법화경(法華經)』 제7권이 안치 되어 있다고 했다.(『참천태오대산기』, 권제1, 熙寧5년 5월 14일) ‘참 당’이란 법화참법(法華懺法), 즉 지의가 지은 『법화참의(法華懺儀)』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당이다.
    • 승가대사는 중앙아시아 쿠샤니카(Kushanika) 출신의 승려로, 당 용삭(龍朔, 661~663) 초에 중국으로 건너와 초주(楚州)의 용흥사(龍 興寺)에 머물다가, 사주(泗州, 지금의 安徽省·江蘇省에 걸친 泗縣, 天 長, 盱眙, 明光, 泗洪일대) 임회현(臨淮縣)에서 향적사(香積寺)와 보 조왕불(普照王佛)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금불상을 얻게 되어, 보조왕 불을 본존으로 하는 절을 세웠다. 이후 중종(中宗, 684~710)의 청으 로 입내(入內)하여 장안(長安)의 천복사(薦福寺)에 주석하며 국사(國 師)에 봉해졌으나 이듬해 입적했다(708). 이후 조정과 민간으로부터 널리 신앙되어 수신(水神) 혹은 항해의 수호신으로서 관음과 마찬가 지로 각지의 불당에 봉안되고 각종 영험설화가 생겨났다. 사주대사 (泗州大師), 임회대사(臨淮大師) 등으로도 불렸고, 관음보살의 현신으 로 믿어졌다. 당 861년(함통 2)에 증성대사(証聖大師), 북송 1013년 (大中祥符6)에 보조명각대사(普照明覺大師)의 호가 각각 조정으로부 터 내려졌다; 藤善眞證역주, 앞의 책, 369쪽
    • 『참천태오대산기』, 권제3, 熙寧5년 9월 21일; 『불조통기(佛祖統 紀)』(1269) 권40에 의하면 보조왕사는 당 고종(高宗) 재위 기간(650 ~683)에 서역 출신 승가대사가 사주(泗州)에서 세속 단월로부터 기 진받은 주택에 개창한 향적사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절터에서 금 으로 된 보조왕불을 얻은 것을 계기로 보광왕사(普光王寺, 측천무후 의 휘인 照자를 피하기 위해 光자를 사용)로 불리게 되었다. 708년 (景龍2) 승가대사가 장안 천복사에서 입적하자, 대사의 유체(遺體) 에 옻칠을 하여 제작한 등신상을 봉안한 탑을 건립하였으나, 도성에 악취가 진동하여 사주로 보내니 향기가 가득했다. 누구의 상이냐는 황제의 물음에 모두가 승가대사라고 답하자 황제가 관음의 화신이라 고 했다고 한다. 이후 북송 980년(太平興國5)에 황제의 명으로 보조 왕사에 13층의 승가대사탑이 건립되고 태평흥국사(太平興國寺)로 개 칭되었다고 한다.
    • 죠진은 진적대사를 승가대사의 영형(令兄)이라고 했다; 『참천 태오대산기』, 권제3, 熙寧5년 9월 21일
    • 『참천태오대산기』, 권제3, 熙寧5년 9월 21일: 大門外廊左右, 置 內外典籍賣買.
    • 당시 불교계의 주류로 부상하고 있던 선종사원의 영향으로도 생각할 수 있겠으나,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 각 자리마다 의발(衣鉢)이 놓여 있다고는 했으나(『참천태오대 산기』, 권제3, 熙寧5년 9월 21일), 식사를 이곳에서 했는지 아니면 각자의 발우를 가지고 별도의 식당에 가서 했는지는 죠진의 일기를 통해서는 확인할 수 없다.
    • 『불조통기』 권43에 의하면, 북송 태종(太宗)이 977년(太平興國 2) 후주(後周) 세종(世宗, 954~958 재위)의 폐불 때 폐사되었던 용흥 사(龍興寺)를 재건하여 태평흥국사로 명명하고, 개선전(開先殿)을 세 워 태조(太祖)의 어진을 봉안하고, 이듬해에는 사원 서쪽에 역경원 (譯經院)을 짓고 그 안에 역경당(譯經堂), 윤문당(潤文堂), 증의당(證 義堂)을 만들어 서역 출신 승려들로 하여금 경전의 번역에 종사토록 했다. 983년에는 역경원의 명칭을 전법원(傳法院)으로 바꾸고, 그 서 쪽에 인경원(印經院)을 지었다. 그리고 1010년(大中祥符3)에는 칙명 으로 봉선감로계단(奉先甘露戒壇)을 설치했다고 한다.
    • 熙寧5년 10월 26일 일기에는 욕원에서 승속(僧俗) 수백 명이 모여서 목욕을 했다고 했는데(向太平興國寺浴院, 沐浴僧俗數百人集), 이를 통해 당시 태평흥국사 욕원에서 세속 신자들을 위한 시욕(施 浴)이 베풀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어 흥미롭다.
    • ‘화엄해회(華嚴海會)’란 해인삼매(海印三昧)를 뜻하는 것으로 해 인정(海印定)이라고도 한다. 부처가 『화엄경』을 설할 때 해인삼매에 들었다고 했는데, 과거·현재·미래 일체의 것들이 마음속에서 나타난 다고 했다. 인(印)은 ‘그려내다 즉, 드러난다’는 뜻으로, 넓은 바다에 일체의 사물이 두루 드러나는 것과 같은 마음의 고요한 상태를 의미 한다. 화엄사상에서는 일체의 것들이 이러한 과정으로 드러난다고 한다.(이상 中村元, 『佛敎語大辭典』) 화엄해회관음상은 해인삼매에 든 관음상이다.
    • 『참천태오대산기』, 권제4, 熙寧5년 10월 13일: 中門西僧房爲安 下所, 三間大房也. 老僧幷小師五人同宿. 中門東一間小房安下賴快兩供 奉; 중문 서쪽 승방을 안하소로 했는데, 세 칸의 큰 방이다. 노승과 다섯 소사(小師)들과 함께 거처했다. 중문 동쪽 한 칸 작은 방에는 賴緣과 快宗두 공봉(供奉: 죠진을 수행한 승려)이 안하했다.
    • 『참천태오대산기』, 권제4, 熙寧5년 10월 14일: 定照大師來請, 卽隣房. 行向喫茶; 정조대사가 와서 보기를 청했는데, (그의 방은) 바로 옆방이다. 가서 차를 마셨다.
    • 『참천태오대산기』, 권제6, 熙寧6년 3월 24일
    • 최성은, 「천안 성불사 고려시대 마애십육나한상」 , 문화재, 33호, 국립문화재연구소, 2000, 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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