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 론
1-1.연구배경과 목적
청나라 학자 阮元(완원: 1764~1849)은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책을 읽을 때 마땅히 경학(經學)에서 시작 해야 하고, 경학은 주(注)·소(疏)에서 시작해야 한다.” 라고 하였다. 곧, 주석이 없이는 경전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임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특히 유가 경전은 선진(先秦)시대의 언어문자와 역사문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옛날의 전주(傳注)에 의존 하지 않고 원문을 직접 읽으려 한다면 단 한 줄도 이 해할 수가 없다.1)
이러한 점에 유념해볼 때 전근대 2천 년간의 『주례 (周禮)』 연구를 통틀어 도성건설과 관련된 핵심내용이 현재와 같은 관점에서 논술된 역사는 단 한 줄도 없 다. 본질적으로 관련 문구에 대한 해석의 결정적인 근 거가 “辨方正位”라는 최상위 지침에 있고, 구체적인 내 용은 ‘匠人建國’의 문구를 통해 논의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도성건설과 관련하여 핵심적인 화두로 인식 되었던 ‘匠人營國’의 문구는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통상 『주례』「고공기」 라 불리며 도시계획의 원리로 주 목받은 문구는, “匠人營國, 方九里, 旁三門國中九經九 緯, 經涂九軌左祖右社, 面朝後市, 市朝一夫”이다. 이 에 대한 해석은 대략 ①정방형의 성곽(형태·규모·門)에 ②격자형 가로망을 갖추고 ③‘左廟右社·前朝後市’에 따 라 왕궁을 중심으로 주요시설을 배치한다는 등의 내용 을 골자로 한다. 여기에 덧붙여진 것이 왕궁의 위치이 다. 왕궁이 왕성 정중앙에 놓였는지의 여부와, 왕궁을 중심축으로 하여 그 좌우가 대칭인지의 여부 또한, 「고 공기」 라는 원칙의 적용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 다.2) 그러나 이러한 평면형태는, 명청시대 북경정도가 거론되고 있을 뿐,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3) 사실 상 이론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셈이다.
그럼에도 ‘「고공기」 = 원리’라는 인식이 여전히 유효 하게 작용하는 이유는, ‘왕성도(王城圖)’라는 근거가 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4) 곧, 지금까지 연구방법으로 활용된 ‘분석의 틀’이라는 것이 실질적으로 도형의 분 석을 통해 도출된 결과라는 데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 이다. 그러나 담론이 형성된 배경과 전체적인 맥락에 대한 논리적인 이해를 수반하지 않고는 그 본의를 제 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택중론(擇中論)은 청(淸)대 “辨 方正位”를 논하는 과정에서 나온 전제조건으로 그 자 체가 핵심은 아니다. 때문에 왕궁을 기준으로 좌우가 대칭인지의 여부는 거론된 바조차 없다. 3문을 기준으 로 편성된 도로의 체계는 청(淸)말에 이미 파기된 내 용이다. 더욱이 이것은 “體國經野”라는 전혀 다른 관 점에서 논술된 담론으로, 현재의 시각과는 어느 정도 괴리가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곧, 주석자의 ‘관점’과 ‘서술의도’에 각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에 따라 본고에서는, 한(漢)대부터 청 (淸)대에 이르는 해석의 일관된 흐름을 통해, 2천 년간 형성된 논리체계와 진화된 이론의 실체를 밝혀내고자 하였다. 이는 동아시아 도시사 연구의 가장 근원적인 화두로서, 전근대 도시공간을 비교·분석할 수 있는 기 준틀이 될 것이다. 아울러 본 연구는, 현대의 학문적 경계를 뛰어넘어, 청(淸)대 경학의 탁월한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소산(所産)된 소통의 결과물임을 밝힌다.
1-2.연구대상의 선별과 검토범위
『주례』가 경전이 된 것은 전한(前漢)이 망하고 王莽 (왕망: BC.45~AD.23)이 신(新)을 개창한 서기 8년경으 로 추정이 된다. 동시에 학관(學官)에 설치되면서 『주 례』 연구의 터전이 마련되었다. 이후 『주례』에 대한 해 석은 후한(後漢: 25~220)대 賈逵(가규: 30~101)의 『주 관해고(周禮解詁)』를 계기로 활발해지기 시작하여, 鄭 玄(정현: 127~200)을 통해 총결되기에 이른다.5) 이상 을 주(注) 혹은, 후대에 임의로 쓰는 경우와 혼용을 피 하기 위해, 고주(古注)라 칭한다.6)
주(注)가 경(經)만을 해석한 것인데 반하여, 소(疏)는 주(注)의 해석을 겸한다.7) 주요 문헌을 정리하면 <표 1> 과 같다.8) 다만, 『주례』가 성립한 이래 달린 수많은 주석을 일일이 다 검토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더 욱이 주석자마다 해석에 다소 차이는 있을지라도 일관 된 관점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굳이 모두 확인 해서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최소한 본고 에서 검토한 범위에 한해서는 鄭玄이 제시한 해석의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곧, 『주례』 연구의 출발선상에 鄭玄이 있음을 뜻한다.
이에 따라 본고에서는 鄭玄의 주(注)를 논의의 주축 으로, 경학(經學)의 기조(基調)에 따라 연구대상을 선별 하였다. 전체적인 맥락을 이어갈 수 있는 주석으로 중 점 검토한 문헌은 필독서에 해당하는 賈公彦(가공언: 唐)의 소(疏)를 비롯하여, 송유(宋儒)의 특색이 반영된 王與之(왕여지, 宋)의 『주례정의(周禮訂義)』, 청(淸)대 주 석을 총결산한 孫詒讓(손이양: 淸, 1848~1908)의 『주례 정의(周禮正義)』 등 <표 1>의 ★ 표시한 주석이다.9) 이 외, 송(宋)대 주석은 鄭玄의 주(注)와 賈公彦의 소(疏) 에 대한 소통을 전제로 참고하였다. 두 해석의 본의와 요체를 파악하는 데 상당히 유용하다.
연구의 출발은 담론의 결과로 갈무리되는 “匠人營 國, 方九里, 旁三門國中九經九緯, 經涂九軌左祖右 社, 面朝後市, (市朝一夫)”에서 시작하였다. 두 가지 다른 관점의 논리가 중첩되기 때문에, 우선적인 검토 가 필요하였다. 이 과정에서 “經涂九軌”와 “面朝”에 대 한 해석에 오류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두 문구는 본고 에서 도출한 결과에 따라 해석에 수정을 요한다. 기존 해석의 문제점을 짚어보고, “辨方正位”에 대한 종합적 인 검토를 통해 본격적인 연구를 수행하였다.
<일러두기>
一. 경전은 해석된 이후에도 여전히 상고의 여지를 지닌다. 같은 문 자일지라도 시대마다 용례가 다르고, 여러 시대에 걸쳐 해석에 해석 이 덧붙으면서 그 본의가 변질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전 과 해석된 내용은 분명히 구분이 되어야 한다. 이에 따라 본고에서 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웠다.
-
⑴ 『周禮』 원전의 문구는 모두 큰따옴표(“ ”)를 달아 주석 등과 혼 동이 없도록 하였다.
-
⑵ 원전의 문구라 할지라도 주석에 인용된 구절, 해석된 내용이나 사전적 의미 등은 필요에 따라 작은따옴표(‘ ’)를 붙였다.
-
⑶ 다만 “匠人營國, 方九里, 旁三門國中九經九緯, 經涂九軌左祖 右社, 面朝後市, 市朝一夫”는 ‘匠人營國’으로, “匠人建國” 이하 전 문(全文)은 ‘匠人建國’으로 간략히 표기하여 번잡을 피했다.
二. 고문헌이 연구자에게 전하는 정보는 문자에 한정되지 않는다. 특히 의도된 편집은 기본적으로 문헌의 분류체제와 편집자의 사고 논리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에 따라 본고에서는 각주의 인용에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웠다.
-
⑴ 賈公彦과 孫詒讓은【疏】에 주석의 범주를 설정해놓았다. 주해대 상은 논의대상에 해당하는 원전과 鄭玄의 주(注)이다. 이는 소 (疏)와 구분이 용이하도록 모두 굵은 글씨로 표시하였다.
-
⑵ 원전의 문구는 [주석자, 쪽수, “원전의 문구”]와 같은 형식으로 출처에 포함시켰다. 여기서 반복되는 자료명은 참고문헌에 상세 하므로 굳이 중복해서 기재하지 않았다.
三. 본고에서 참고한 鄭玄·賈公彦·孫詒讓의 주석은 구두(句讀)가 표 기된 판본이다. 문장부호가 본 학회의 편집규정과 차이가 있으나,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실었다. 다만, 문헌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 혼동을 피할 수 있는 최소한의 표기를 원칙으로 하였다. 자세한 내 용은 영인본을 참고하기 바란다.
2.‘匠人營國’의 話頭와 전근대적 논의
2-1.“體國經野”: 이상도시의 이론적 배경
“體國經野”는 「考工記」를 제외한 『주례」 각 편 서두 에 반복적으로 삽입되어 있는 지침 중 하나로, 일명 ‘이상도시’의 이론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 서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문구가 지금까지 이목 을 끌지 못한 이유는 “匠人營國…… ”의 주석 그 어 디에도 관련성을 언급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 사 이의 맥을 잇는 해석은 제1편 「천관총재(天官冢宰)」 의 “體國經野”에서 논의되었다. 다음과 같이 ‘匠人營國’의 문구가 “體國經野”의 근거로 인용된 것이다.10)
위는 鄭玄의 주(注)이다. 해석에서 “體”와 “經” 두 문자의 정의는 鄭玄이 鄭衆(정중, 司農: 後漢, ?~83)의 학설을 그대로 수용한 결과물이다. 鄭玄이 鄭衆의 말 을 인용해 「考工記」[匠人]을 거론한 것은 “體國”의 의 미를 발굴하기 위함이었다. 함께 인용된 ‘野則’ 이하는 「지관(地官)」 [소사도(小司徒)]에서 발췌한 문구로 “經 野”의 의미를 대변한다. 이때의 “經”은 리수(里數)로써 구획하는 것을 말하므로, “經野”는 사실상 구혁(溝洫) 과 정전(井田)을 아우른다.11)
“國”과 “野”는 성의 안과 밖으로 대별되지만, “體國” 의 이치는 “經野”와 다르지 않다.12) 賈公彦은 ‘體는 分 과 같다(猶)’는 鄭玄의 설(說)에 근거하여, ‘分國’ 곧 “體國”이란 ‘성안을 9經9緯로 구획하고, 左祖右社·面朝 後市로 분별하는 것’이라고 풀이하였다.13) 인용의 출처 는 「고공기」 에 있지만, <그림 5>의 과 같이 해석상 으로는 “經野”의 논리를 따른 것이다. 곧, 정전(井田) 과 마찬가지로 토지구획을 의미한다.14)
본래 ‘體’에는 ‘나누다’라는 뜻이 없다. 해석된 “體”는 “經”에 상응하도록 변통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청 (淸)의 孫詒讓은 鄭玄이 ‘猶’라고 표현한 것에 주목하 였다. “體”를 대체할 한자가 없어, ‘分’에서 뜻을 가차 했다는 것이다. 두 문자의 의미상 소통의 근거는 『묵 자(墨子)』의 ‘개체(體)는 전체(兼)에서 나뉜 것이다(體 分於兼也)’15)라는 문구에서 찾았다. 즉, 총(總)은 일체 (一體)가 되고 분(分)은 중체(衆體)를 만든다는 의미를 통해 ‘體’에서 ‘分’을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16)
2-2.‘匠人營國’의 句讀와 해석
경학에서 “匠人營國”이하 “市朝一夫”까지, 「고공기」 라고 알려진 부분은 통상 세 문장으로 끊고 네 부분으 로 나누어 해석을 한다. 구두점(句讀點)을 기준으로 사 실상 논의대상을 구분지어 놓은 것이다. 이를 반영한 원문과 鄭玄의 주(注)는 아래 각 내용과 같다.
첫 번째 문장은 “匠人營國, 方九里, 旁三門”이다. 이에 대하여 鄭玄이 던진 화두는 다음과 같다.17)
위 해석에서 논점은 두 가지로 나뉜다. 먼저, “匠人 營國, 方九里,”는 왕도(王都) 영건을 말한다.18) 그 규모 가 의미하는 바는 “營”이라는 문자를 통해 풀이되었다. 賈公彦은 ‘丈尺’과 ‘大小’가 각각 ‘고하(高下)’와 ‘원근(遠 近)’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으나, 孫詒讓은 이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광아(廣雅)』「석고(釋詁)」 에 ‘營은 度’라고 했으므로, “營國”은 장(丈)을 척도로 한 도량의 대소를 뜻한다는 것이다. 마치 [양인(量人)]에서 말하는 ‘측량(量)’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19)
한편 ‘天子12門’은 ‘4旁×3門’ 곧, ‘4面×3門’을 뜻한다.20) 賈公彦은 이것이 ‘12子와 통한다’는 것을 논증하기 위 해 ‘천자는 곧 정(政)이므로 3공(公)·9경(卿)·27대부(大 夫)·81원사(元士)를 두고, 문명(文命) 아래 각 12자(子) 를 따른다.’라는 『효경(孝經)』「원신계(援神契)」 를 인용 하였다. 이는 마치 ‘甲乙丙丁에 속한 10일(日)은 모(母), 子丑寅卯등 12진(辰)은 자(子)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 로써, 행정단위의 하나인 도성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 었다는 것이다.21)
두 번째 문장은 “國中九經九緯, 經涂九軌”이다. 이 에 대하여 鄭玄이 던진 화두는 다음과 같다.22)
-
國中, 城內也(p)經緯謂涂也經緯之涂, 皆容方九軌(q)軌 謂轍廣, 乘車六尺六寸, 旁加七寸, 凡八尺, 是爲徹廣九軌 積七十二尺, 則此涂十二步也(r)旁加七寸者, 輻內二寸半, 輻廣三寸半, 綆三分寸之二, 金轄之間三分寸之一
위 해석에서 주된 논의사항은 성내 도로의 도량과 그에 따른 실제 도로의 폭이다. 통상 도로란 수레가 다니는 길을 말하기 때문에, 수레에 달린 양쪽 바퀴 사이의 너비를 1궤(軌)로 하여 도로의 폭을 산정하는 기준으로 삼았다(q). 다만, 「고공기」 에서는 1궤가 아닌 원전에 명시된 9궤를 기준으로 도로를 논한다. 이는 鄭玄이 “九軌”를 ‘1軌×9涂’라 풀이한 데서(p) 기인한 것 으로 보인다. 賈公彦은 ‘鄭玄의 九軌’를 ‘4面×3門’과 ‘門 有三涂’에 근거하여, ‘3門×(1軌×3涂)’라 해석하였다.23) 곧 각 면(面) 3개소의 문(門)은 9개의 도(涂)를 아우르고, 도(涂)마다 모두 1궤(軌)를 허용하기 때문에 총 9궤(軌) 가 된다는 것이다.24)
오랫동안 ‘3門×(1軌×3涂)’로 통했던 ‘鄭玄의 九軌’는 고 증학이 발달하면서 해석에 의문이 제기되었다.25) 대표적 으로 청의 焦循(초순: 1763~1820)은 ‘九軌= 1軌×9涂’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道中三涂’라는 근거로 추정하였 다. 1道는 셋으로 나뉘어 3涂로 통하기 때문에, “九軌”는 ‘1軌×9涂(최대)’ 혹은 ‘9軌×1涂(최소)’ 혹은 ‘3軌×3涂’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런데 ‘9軌×1涂’일 경우 1道(= 3涂) 는 27軌나 되므로 도량으로써 너무 크고, ‘3軌×3涂’는 3道 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경전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26)
이에 따라 실제 도로의 폭 또한 마찬가지로 ‘(수레 너비6尺6寸+여분)×9涂= 8尺×9涂= 72尺(12步)’라 하여, ‘1軌×9涂’를 기준으로 추산되었다(q). 수식 중, 여분의 값은 ‘7寸×2 = 1尺4寸’이다(r). 이는 수레바퀴를 포함하 여 수레 좌우 양쪽으로 돌출된 부분의 너비에 해당한다. 수레 너비와 여분의 값은 각각 「고공기」 총서(總敍)와 [윤인(輪人)]·[여인(輿人)]·[거인(車人)] 등에 기재된 부 재의 치수를 근거로 산출되었다.27)
세 번째 문장은 “左祖右社, 面朝後市, 市朝一夫”이 나, 통상 규모를 다룬 “市朝一夫”는 따로 떼서 별도로 해석을 붙인다. 단락의 핵심에 해당하는 “左祖右社, 面朝後市”에 대하여 鄭玄은 다음과 같이 화두를 던 졌다.28)
위 해석에서 祖·社·朝·市등 건축이 지닌 의미는 ‘왕 궁이 있는 곳이다’라는 압축된 문장을 통해 표출되었다. 왕궁을 세우는 것은 곧 건국을 의미하는 것으로, 왕궁 을 중심으로 배치된 자리는 모두 건국(建國)의 정법(定 法)이었다.29) 祖·社, 朝, 市의 존립근거는 각각 「춘관 (春官)」 [소종백(小宗伯)], 「추관(秋官)」 [조사(朝士)], 「지 관(地官)」 [사시(司市)] 등에서 찾을 수 있다.30) 그 뒤를 잇는 서술은 뜻이 애매한 문자를 풀어놓은 것이다. “祖”는 ‘廟(종묘)’요, “面”은 마치 ‘鄉(嚮: 향하다)’와 같 은 것이라고 하였다. 현재와 같이 ‘面= 前’이라는 인식 은 송(宋)대 이후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31)
해석은 미괄식 글쓰기 문화의 특성상 핵심에 해당하 는 ‘王宮當中經之涂也’로 마무리되었다. 왕궁과 마주한 ‘中經之涂’가 중요한 키워드로 떠오른 것이다. 賈公彦 은 ‘中經之涂’라는 문구에서 남-북 방향으로 형성된 축 선을 연상한 것으로 보인다. “左祖”가 ‘존존(尊尊)’을 숭상한 데서 기인한 것이라 하여, 좌우의 배치기준과 의미를 예(禮)로써 논술하였다. 이것은 은(殷)이 ‘친친 (親親)’을 숭상하여 종묘를 오른쪽에 배치하였던 것과 비견되는 것이다.32) 孫詒讓은 왕궁이 자리한 곳이 ‘中 經之涂’와 마주한 지점이라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인식 하에 논지를 전개하였다. 이에 따라 ‘궁은 국성(國城) 의 정중앙에 있고, 입궁(立宮)은 건국(建國)의 방위와 반드시 상응한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33)
3.평면적 형태해석의 근거와 오류
3-1.“經涂九軌”와 성내 격자도로
이상도시의 모형이자 근거로 빠지지 않고 원용되는 것이 ‘왕성도(王城圖, <그림 1>)’이다. 聶崇義(섭숭의: 宋)의 『삼례도집주(三禮圖集注)』와 戴震(대진: 淸, 1724~ 1778)의 『고공기도(考工記圖)』에 삽도로 실려 있다. 두 문헌은 찬술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삽도의 구성, 내용이 나 표현방법 또한 다소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戴震의 「王城」은 聶崇義의 「宮寢制」와 「王城」을 한데 합쳐놓 은 것이어서, 사실상 모본이 『삼례도집주』에 있고 도형 이 전달하고자 하는 골자 또한 서로 다르지 않다.
특히 정중앙에 왕궁이 위치한 가운데, 격자로 교차 하는 도로와 도로로 구획된 왕성이 인상적이다. 그러 나 문자를 압도하는 각인된 이미지는 鄭玄과 賈公彦이 원전에 주(注)·소(疎)를 달면서 ‘완성된 경전’을 그대로 도해한 것이다. 해석의 근거는 원전인 “國中九經九緯, 經涂九軌”에 두고 있지만, 오래된 고정관념은 鄭玄의 다음과 같은 풀이에서 시작되었다.34)
위에서 밑줄 친 부분은 “經涂九軌”를 근거로 서술한 것이다. 원전에 “經涂”만을 명시하고 있음에도 經·緯를 모두 거론한 것은, 경도(經涂)의 너비가 9궤이므로 위 도(緯涂)의 너비 또한 9궤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方 九軌’라 하여 鄭玄이 추론한 9궤는 나란히 늘어선 9개 의 궤도를 말한다.35) 도로배열과 관련된 구체적인 형 상은 賈公彦이 ‘門有三涂’라는 개념을 곁들이면서 완성 된 것이다.36) 결국 왕성 내 격자도로는 “九軌”를 9개 의 도(涂)로 분할하고, 분할된 도로의 적용범위를 경도 (經涂)뿐만 아니라 위도(緯涂)까지 포함시키면서 유추 된 도식(圖式)이었다.
그러나 전술(前述)에 “九經九緯”가 언급되었다 하여, “經涂九軌”의 의미를 ‘緯涂九軌’로까지 확장시킬 수 있 는37) 근거는 없다. ‘緯’는 ‘經’과 마찬가지로 ‘涂’이기 때문에, 별도의 언급이 없더라도 매한가지로 상정할 수 있다는 것은38) 논리비약이다. 이러한 논리는 도로 규정과 관련된 “ …… ㈎經涂九軌, 環涂七軌, 野涂五軌 …… ㈏環涂以爲諸侯經涂, 野涂以爲都經涂”에도 그대 로 적용되었다.39) 2천 년간의 권위에 기댄 해석에 따 르면 ㈎에서 “經涂”는 經·緯를 포괄하는 직선도로, “環 涂”는 성곽안쪽을 두른 곡선도로, “野涂”는 성 밖 밭 사이의 도로를 뜻한다.40) 이 해석대로라면 “涂”는 앞 서 1궤를 허용한다고 했으므로, “環涂”는 1궤의 도로 일곱이 나란히 배열된 형태가 되어야 한다. 또한 ㈏에 서 언급한 바와 같이 왕성의 환도 규정에 따라 제후 (諸侯)의 경도(經涂)를 7궤로 삼는다면, 1門에는 3涂가 통과하기 때문에 “涂”는 ‘1궤의 도로’라는 당초의 전제 와 맞지 않는다.41)
이러한 맥락의 논리적 결함은 근본적으로 “經涂九 軌”에 대한 논의의 초점이 “九經九緯”에 맞춰진 데서 기인한 것이다. 본래 격자도시의 원형은 鄭衆이 “體 國”과 관련하여 ‘營國方九里, 國中九經九緯, 左祖右社, 面朝後市’라 언급한 데서 찾을 수 있다.42) 이때, 논점 과 무관한 “經涂九軌”는 인용되지 않았다. “體國”의 논 리에 맞게 관련 문구만을 선별한 것이다. 문제는 이 틀이 이후 원문 해석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는 점이 다. 이론의 정점을 찍었다고 평할 수 있는 賈公彦은 “體國經野”에 대한 기존 견해를 종합하여 다음과 같은 논술을 펼쳤다.43)
위의 뒤를 잇는 서술은 鄭玄의 주석을 풀이한 것이 다. 賈公彦은 위에서 밝힌 정의를 전제로, 鄭玄이 인용 한 鄭衆의 설(說)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44)
<인용 2. 體國經野②> 注「體猶」至「是也」45)
위 밑줄 친 부분과 같은 논증과정을 거쳐, “國中九 經九緯, 經涂九軌”는 공식적으로 다음과 같이 소통되 었다.46)
위 인용문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國中九經九 緯, 經涂九軌”에 대한 실질적인 논의는 “體國經野”에 서 수행되었다. <인용 2>와 <인용 3>에서 볼 수 있 는 서술상의 차이는 왕성 내 격자의 도로라는 것이 “體國經野”의 논리에 따라 도출된 부수적인 결과임을 시사한다. <인용 2>에서 鄭衆이 ‘營國方九里, 國中九 經九緯,’라 한 것에 대하여, 賈公彦은 “營國方九里, 旁 三門”을 말한 것이라고 운을 떼었다(g). 말인즉, “旁” 은 사방(四方)을 말하므로 “經涂”는 經·緯를 아우르는 2차원 평면상의 논의라 할 수 있다(h; j). 또한 ‘3門 ×3道’는 9道가 되기 때문에48) ‘九軌= 1軌×9涂’라는 등 식이 성립한다는 것이다(i; k). 결국, “營國方九里, 旁三門”을 통해 유도된 결론은 묵시적으로 ‘鄭玄의 九 軌’를 말한다. 곧, 鄭衆이 “國中九經九緯”라고 한 말의 취지를 鄭玄의 해석을 매개로 헤아린 것이다.
賈公彦이 鄭衆의 ‘營國方九里, 國中九經九緯,’를 “營國 方九里, 旁三門”으로 추정했다는 것은(g), 鄭衆의 말을 ‘營國方九里, (旁三門) 國中九經九緯, (經涂九軌)’로 해 독했다는 것을 뜻한다. 鄭衆이 발췌한 문구를 근거로, “營國方九里”와 한 문장으로 끊기는 “旁三門”을 해석에 끌어들인 것이다. 당초, “經涂九軌”는 鄭玄이 經·緯를 ‘涂’라고 정의하면서 “九經九緯”와 문맥상 일조(一條)를 이루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涂’라는 공통분모에 착안하 여 ‘營國方九里, (旁三門)’을 ‘國中九經九緯, (經涂九軌)’ 와 엮은 것이다. 이 대목에서 제기할 수 있는 첫 번째 의문은 鄭衆의 “營國方九里”를 ‘營國方九里, (旁三門)’이 라 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營國方九里, 旁三門”이라 는 것은 [匠人]에서 논의된 鄭玄의 구두(句讀) 해석을 말 한다. 이를 전제로 해석을 가미했다는 것은 일단 “體國” 의 논리가 아닐뿐더러, 이미 鄭衆의 뜻과도 거리가 있는 것이다. 더욱이 “旁”이 ‘方’을 뜻한다고 해서, 논점이 “旁 三門”으로 전이되지는 않는다.
두 번째 의문은 “旁三門”을 왕성의 구획기준으로 볼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賈公彦은 <인용 1>에서 공간 을 분할(分)하는 기준이 “九經九緯”에 있음을 밝힌 바 있다. <인용 2>에서는 經·緯가 남-북·동-서 방향의 도로로 형성된 구획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왕성 각 면 (面)의 각 문(門)마다 3涂가 통과하기 때문에, 왕성이 “九經九緯”로 분할되는 것은 자명하다는 것이다. 결국 ‘3門×(1軌×3涂)’란 ‘鄭玄의 九軌’를 추론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발상으로, <그림 2>와 같이 “旁三門”의 편입취 지가 사실상 ‘經涂九軌= 1軌×9涂’라는 것을 입증하는 데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3門×(1軌×3涂)’ 는 ‘1軌×9涂’의 논거가 될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3門×(1軌×3涂) = 1軌×9涂’라는 등식 은 현실은 물론 이론상으로도 성립하지 않는다. <인용 3>에서 賈公彦은 3門의 3涂를 ‘男子由右, 女子由左, 車 從中央’이라 부연하였다. 기본적으로 ‘수레가 다니는 길 (軌)’이라는 鄭玄의 전제조건에 어긋나는 것이다. 인도(人道)는 애초 논의대상이 아니기 때문 에, 男·女·車등으로 구분된 3 涂는 하나의 집합체로 볼 수 있다. 이때 실질적인 분할(分) 기준은 3門이므로, 鄭玄이 ‘1軌 ×9涂’를 말한 취지와 맞지 않 는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청의 焦循은 鄭玄이 말 한 ‘1涂’의 본의가 男·女·車가 다니는 각 도로를 모두 아우른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孫詒讓은 성문과 마주한 도로는 <그림 3>과 같이 9군데 중 3곳 뿐이고 나머지는 환도(環涂)로 통한다 하여, ‘3門×(1軌 ×3涂)’가 실상과 다르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49)
3-2.前朝로 고착된 面朝
통상 ‘前朝後市’라고 뇌리에 주입된 문구는 본래 원 전의 기록이 아니다. 원전에는 “面朝後市”로 기술되어 있다. “面”이라는 문자의 인상이 암시하듯, ‘前’이 “面” 의 의미를 오롯이 전달할 수 있는 글자인지는 원전을 확인하는 동시에 의문으로 되돌아온다. 이에 대해 혹 자는 ‘前’의 사전적 의미를 공간상의 ‘앞쪽’이 아니라, 시간상의 ‘앞서’로 해석할 수 있음을 지적하기도 하였 다. 즉 ‘前朝後市’는 도성건설시 먼저 관청을 조영하고 차후 시장을 조성한다는 뜻으로, ‘前’과 ‘後’는 시간상 의 선후관계를 의미한다는 것이다.50) 이러한 논리는 ‘面’에 ‘前’·‘向’·‘嚮’·‘鄕’의 뜻이 있고, 고전에서는 ‘面’이 ‘前’의 역할을 하는 용례가 많기 때문에, ‘面’과 ‘前’은 의미상 상통한다는 전제하에서 가능한 것이었다.51) 그 러나 ‘面’의 사전적 의미에 시간의 개념은 없다. 이때 의 ‘前’은 ‘面’을 대체할 수 있는 한자가 아니기 때문 에, 분석 자체로써 논리적인 모순을 안고 있다.
일반적으로 “面朝”가 ‘前朝’로 통하게 된 것은 후대 해석에 따른 것이다. ‘前朝’는 鄭玄이 “左祖右社, 面朝 後市”에 대해 ‘王宮所居也’라고 한 것을, 賈公彦이 다시 ‘言王宮所居也者, 謂經左右前後者, 據王宮所居處中而言 之, 故云王宮所居也’라 보충한 데서 비롯되었다.52) 鄭 玄이 한 말의 논리는 祖·社·朝·市가 갖추어진 곳이란 ‘왕궁이 있는 곳’으로, 좌우·전후의 기준이 왕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賈公彦은 ‘鄭玄이 말 한 왕궁이 있는 곳’이란 경(經)의 좌우전후를 말하는 데, 鄭玄이 ‘王宮所居也’를 거론한 것은 왕궁이 위치한 곳이 중심이라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고 주석을 달았 다. 결국 ‘前’은 賈公彦이 왕궁의 자리가 중심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기 위해 건물의 상대적인 위치를 서술 하면서 출현한 것이지, “面”의 의미를 정의한 것이 아 니다. 이와 관련하여 孫詒讓은 “面朝後市”에 다음과 같은 풀이를 첨부하였다.53)
-
“面朝後市”라는 것은 노침(路寢)의 앞, 북궁(北宮)의 뒤 를 말한다. 「天官」賈씨의 소(疎)에 이르길, ‘삼조(三朝) 는 모두 군신이 정치를 하는 곳으로, 양(陽)인 고로 앞 에 있다. 삼시(三市)는 모두 식(食)·리(利)·행(行)·형(刑) 이 자리하는 곳으로, 음(陰)인 고로 뒤에 있다.’고 하였 다. 상고해보건대 『서소고(書召誥)』 공(孔)의 소(疎)에 인 용된 고씨(顧氏)가 이르길, ‘시(市)를 두는 곳은 왕성의 북쪽이다. 조(朝)는 양(陽)인 고로 남쪽에 있고, 시(市)는 음(陰)인 고로 북쪽에 둔다.’고 하였다. 즉, 賈씨가 소(疎) 의 본(本)으로 삼은 것이다. [조사(朝士)]·[사시(司市)]의 소(疎)에 상세하다.
위 주석은 賈公彦의 소(疏)를 논증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밑줄 친 ‘ 「天官」賈씨의 소(疎)’란 「天官 冢宰」서두의 서술 중, “體國經野”에 덧붙은 ‘面朝後市 者, …… ’를 말한다.54) 孫詒讓은 이것이 본래 ‘匠人建 國’의 문구라 하여 「天官」에 있던 풀이를 「考工記」에 그대로 옮겨 붙였다.55) 그러나 賈公彦이 이를 「天官」 에 둔 이유는 朝·市의 위치를 ‘구분’하는 것이 “體國” 의 일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56) 賈公彦의 논지 에 따라 인용문에서는 개체(體)간의 위치관계를 음과 양의 논리로 서술하고 있으나, 그 이상의 철학적인 범 주까지를 포괄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본격적인 문자해독은 다음과 같이 鄭玄의 ‘面猶鄕也’를 풀이하면 서 시작되었다.57)
첫 번째 인용문에서 [탐인]의 주해란, 다음과 같은 ‘面’자의 여러 용례를 말한다.58)
-
- ‘面猶鄕也’라는 것은 [장인(匠人)]의 “面朝後市”의 주해 와 동일하다.
-
- 『설문(說文)』「面部」에 이르길, ‘面은 얼굴 앞모습이다’ 라고 하였다. 또한 「人部」에 이르길, ‘偭은 鄕이다’라고 하였다.
-
- 「소의(少儀)」 에 ‘尊壺者偭其鼻’라 하였다. 이 ‘面’은 즉 ‘偭’의 가자(叚字)로 지금 「소의(少儀)」 의 ‘偭’ 역시 ‘面’으 로 쓴다.
-
- 『맹자(孟子)』「양혜왕(梁惠王)」 에 조(趙)씨의 주해에 이 르길, ‘面이라는 것은 向이다’라고 하였다.
-
- 『광아(廣雅)』「석고(釋詁)」 에 이르길, ‘面은 嚮이다’라고 하였다. ‘鄕’·‘向’·‘嚮’은 아울러 통한다.
-
- 정왕면(正王面)은 [사의(司儀)]에서 말하는 “정주면(正 主面)”이다.
이상에서 제시된 논거에 따르면, ‘面’은 ‘鄕’·‘向’·‘嚮’ 과 의미상 통한다. ‘鄕’과 ‘面’은 ‘前’이라는 뜻을 공유하 고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面”은 ‘鄕’과 같다(猶)는 것이다. 그러나 孫詒讓이 제시한 논증과정은 鄭玄의 권 위를 전제로 한 순환논증의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근 본적인 문제는 한자가 지닌 고유한 의미나 문맥상의 정황은 배제한 채, 대체 가능한 한자만 나열해 놓은 데 있다. ‘面猶鄕也’를 풀이하기 위한 중요한 관건은 鄭玄 이 말한 ‘鄕’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 다. 鄭玄은 “面”을 정의하면서, ‘猶’라는 표현을 썼다. ‘鄕’이 “面”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딱 들어맞는 한자는 아닌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의례(儀禮)』「사상견례(士 相見禮)」 중 ‘上大夫相見, 以羔飾之以布, 四維之, 結于 面左頭, 如麛執之’에 붙은 鄭玄의 풀이를 보면, ‘面 前也繫聯四足, 交出背上, 於胸前結之也’라 하여 바로 논의의 당사자가 ‘前’과 ‘鄕’을 다른 용례로 구분하였 다.59) 이러한 鄭玄의 의도를 차치하더라도, 「考工記」에 서 말하는 “面”을 ‘前’이라는 문자로 한정지을 수 있는 것인지는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4.“辨方正位”와 도성건설의 핵심
4-1.“辨方正位”의 해석과 근거
“辨方正位”는 앞서 2-1절에서 살펴보았던 “體國經 野”와 마찬가지로, 『주례』 각 편 첫머리를 여는 지침 중 하나이다. 그 전문(全文)은 “惟王建國, 辨方正位, 體 國經野, 設官分職, 以爲民極”이라 하여60), <그림 4>와 같이 육관(六官)의 성립취지를 밝혀놓은 것이다. 다만 「고공기」 서두만은 이를 대신해 국가의 6직(職)을 논하 고 있는데, 백공(百工)의 소요가 나머지 5개의 직(職)과 관련이 있어 동관(冬官)도 그 체제의 하나임을 밝힌 것 이다. 곧, 다섯 개의 어구는 天·地·春·夏·秋·冬官을 포괄 하는 상위개념에 해당한다. 이 중, 핵심은 끝자락에 위 치한 “設官分職”과 “以爲民極”에 있다. 특히 문장을 종 결짓는 “以爲民極”은 건국의 시작이었다. 왕(惟王)이 나 라를 세워(建國) 통치한다는 것은 “以爲民極”을 실현하 기 위함이요, “以爲民極”은 “設官分職”을 통해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61) “設官分職”은 “體國經野”에서 기인한 것으로, 『주관(周官)』은 이로써 성립되었다.
그러나 “體國經野, 設官分職,” 등 제도정비에 앞서 선행되어야할 것이 도읍의 건설이었다. “惟王”을 동인 으로 한 “建國”의 진정한 의미가 도읍의 건설에 있음 을 뜻한다.62) “建國”을 위한 수행과제로써, 도성건설의 핵심은 “辨方正位”를 통해 논의되었다.63) 鄭玄은 “辨方 正位”를 논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문을 열었다.64)
위 해석에서 鄭玄이 “辨”을 ‘別’이라 한 것은 “辨方” 을 ‘사방을 분별한다(別四方)’라고 정의한 鄭衆의 설 (說)에 따른 것이다. 鄭玄은 이에 다음과 같은 ‘匠人建 國’ 전문(全文)을 덧붙여, 鄭衆이 한 말의 의미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65)
-
玄謂: 考工「匠人建國, (a)水地以縣, (b)置槷以縣, 視66)以景 (c)為規, 識日出之景與日入之景(d)晝參諸日中之景, (e)夜 考之極星, (f)以正朝夕」, 是別四方
위는 [匠人]의 직무 중 맨 처음부분이다. ‘匠人營國’· ‘匠人爲溝洫’과 내용상 구분이 된다. 위 서술 중 “辨方” 과 관련하여 특히 관심을 끈 구절은 ‘置槷以縣, 視以 景’이다.67) 동서남북을 바로하기 위해 땅에 막대를 세 워 그림자를 관찰한다는 것이다(b). 그 전·후의 서술 은 이를 기준으로 한 문맥상 흐름에 따라 독해되었다. 그림자를 관찰하기 위한 막대기둥은 땅을 평평하게 고 른 연후에 먹줄을 띄워 바로 세운다(a; b). 일출과 일몰시 그림자 길이를 ‘규(規: 컴퍼스)’로써 측정하여 (c) 東-西방향을 찾게 되면, 수직으로 교차하는 南- 北방향은 아울러 알 수 있다. 더불어 한낮의 그림자 길이와 한밤중 북극성 위치를 참고해서(d; e) 南-北 방향을 살피면, 東-西방향이 정확하게 잡힌 것인지 (f) 거듭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68)
이어서 鄭玄은 “正位”의 본의를 『서경(書經)』「소고 (召誥)」 에서 찾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다음은 鄭衆의 ‘正君臣之位, 君南面臣北面之屬’이라는 기존 학설에 이 견을 단 것이다.69)
-
召誥曰: 「越三日戊申, 太保朝至於雒, 卜宅, 厥既得卜, 則 經營越三日庚戌, 太保乃以庶殷攻位於雒汭越五日甲 寅位成」70)正位謂此定宮廟
위에서 논거로 발췌한 부분은 주(周)가 은(殷)을 정 복하면서 낙양(洛陽)으로 천도하는 과정을 서사적으로 기술한 「소고」 앞머리에 해당한다.71) 이 대목을 인용해 “正位”를 논하게 된 것은 ‘攻位’와 ‘位成’에 그 뜻이 있 기 때문이었다.72) 鄭玄은 ‘이렇게 宮·廟를 정하는 것’이 “正位”라 하였고, 孫詒讓은 鄭玄이 한 말에 다음과 같 은 기록을 덧붙여 ‘宮·廟의 자리를 바로잡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73)
-
㈀ 盤庚旣遷, 奠厥攸居, 乃正厥位74) (『尙書』「盤庚下」)
-
㈁ 正宗廟朝廷之位(鄭玄의 注)
-
㈂ 乃作大邑成周于土中, 乃位五宮、大廟、宗宮、考宮、 路寢、明堂(『周書』「作雒」)
위에서 제시한 도읍영건의 증거는 ‘鄭玄의 位’가 ‘宮· 廟의 자리’에 뜻을 두고 있음을 말한다. “左祖右社, 面 朝後市”라는 「고공기」 의 뜻과 일견 상통하는 것이다.75) “左祖右社, 面朝後市”가 鄭玄의 주장과 동일시되면서76) “左祖右社, 面朝後市”에 관한 논의는, <그림 5>와 같이 “正位”와 “體國” 두 가지 논리가 중첩된 형상으로 전개 되었다. 앞서 鄭衆은 “位”를 ‘君臣之位’라 하여 군신의 위계로서 논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기존에 정설 로 굳어진 “體國”의 이치와 호응하지 못하고, 새로이 “辨方”의 취지를 전하는 ‘匠人建國’의 차례와도 맞지 않는다.77) “辨方”과 “正位”가 ‘匠人建國’과 ‘匠人營國’에 대응하는 논리로 치환되면서, 상·하위 개념의 논리구도 가 일치하는 경전의 틀이 완성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鄭玄이 설파한 이론은 ‘匠人建國’과 ‘匠人營國’의 논리 적 연결고리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4-2.“辨方正位”에 관한 구체적 논의
孫詒讓은 “辨方正位”와 鄭玄의 ‘王宮當中經之涂也’를 주석하기 위해 晏嬰(안영: ?~BC. 500)의 『춘추』를 인 용하였다. 둘을 같은 맥락의 논의로 이해한 것이다. 孫 詒讓은 논의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파악하였다.78)
-
『안자춘추(晏子春秋)』「잡편하(雜篇下)」 에 이르길, 景公이 새로 백침(柏寢)의 건물을 완성하자, 악사(樂師)인 개(開) 가 “건물이 서향이다.”라고 말하였다. 공(公)이 대장(大 匠)을 불러 “건물을 어찌 서향이 되도록 하였는가?”라고 물었더니, 대장(大匠)이 “건물은 궁구(宮矩)로써 세웠다.” 라고 말하였다. 이에 사공(司空)을 불러 “궁(宮)을 어찌 서향이 되도록 하였는가?”라고 물었더니, 사공(司空)이 “궁(宮)은 성구(城矩)로써 세웠다.”라고 말하였다.
위 기록은 전근대 오랜 기간 통용되던 원칙을 명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인용문에 서 핵심은 마지막 문답 중, ‘궁(宮)은 성구(城矩)로써 세웠다’라는 말 속에 있다. 孫詒讓이 ‘王宮當中經之涂 也’에서 ‘입궁(立宮)은 건국(建國)의 방위와 반드시 상 응한다’라고 맺은 결론은, 이 구절을 풀어쓴 것이다.79) 孫詒讓은 이를 “辨方正位”라 하여, ‘성구(城矩)와 궁구 (宮矩)를 정하는 것이다’라고 개념을 정의하였다.80) 그 런데 여기서 서술상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 “辨方”과 “正位”를 논한다고 하면서 실상은 두 논술의 초점이 모두 방위에 맞춰진 것이다. 이때, “正位”가 배 제된 것은 이미 ‘왕궁은 정중앙에 위치한다’라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었다.
孫詒讓이 ‘王宮當中經之涂也’에서 “辨方正位”를 논하 게 된 것은 ‘王宮當中經之涂也’를 ‘왕궁은 반드시 국성 (國城) 정중앙인 곳에 있는 고로, 9군데 경도(經涂) 중 에서 항상 중경(中經)의 도(涂)와 마주한다.’라고 해석 한 것과 관련이 있다.81) “辨方正位”에서도 晏子를 논 하기에 앞서, 『여씨춘추(呂氏春秋)』「신세편(愼勢篇)」 의 ‘옛날의 왕은 천하의 중심을 택하여 국(國)을 세우고, 국(國)의 중심을 택하여 궁(宮)을 세우고, 궁(宮)의 중 심을 택하여 묘(廟)를 세운다.’라는 말을 인용하였다.82) 방위와 위치 두 가지 변수 중, 위치를 통제한 상태에 서 방위만을 논한 것이다. 孫詒讓은 왕궁을 세우기에 앞서 먼저 건국의 방위를 정하고, 이로써 왕궁을 세우 는 기준으로 삼는다는 원칙을 말했다.83) 사방을 분별하 는 일차적인 목적은 건국의 방위를 찾는 것이나, 궁극 의 목표는 왕궁에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에 ‘궁구(宮 矩)’를 논하고, “辨方”의 불분명했던 실체를 ‘성구(城矩)’ 로서 명명하였다.
* * *
통상 “營國”의 주체를 ‘王宮’으로 파악한 것과 맞물 려, “建國”의 대상은 성곽을 표방한 ‘王城’으로 인지되 고 있었다.84) 이러한 인식은 賈公彦이 다음과 같은 鄭 玄의 주(注)에 소(疏)를 달면서 굳어진 것이다.85)
위는 鄭玄이 ‘匠人建國’의 서술 중 “水地以縣”에 풀 어놓은 것이다. 賈公彦은 ‘於四角立植, 而縣’으로 시작 하는 첫 대목을, ‘植은 곧, 柱’이고 ‘於造城之處, 四角立 四柱而縣,’이라 하여 축성에 관한 논의로 개진(開陳)하 였다.86) ‘성 쌓을 곳’이라는 설정근거는 “匠人建國”의 “國”이라는 문자가 성(城)과 성제(城制)라는 물리적인 의미까지 포괄할 수 있음을 밝히고,87) “惟王建國”에서 말하는 도읍건설을 성곽축조와 동일시한 데 따른 것이 다.88) 또한 성 쌓을 자리 ‘네 모퉁이에 네 개의 나무기 둥을 세운다’는 말은 건축이 성립하기 위한 구조적인 요건을 의미한다. ‘그리고, 매달아 (물로써 그 높고 낮 음을 본다)’라는 것은, 평지에 세운 나무기둥에 먹줄 (繩)을 띄우고 물 수평을 보아 나무기둥을 바로잡았다 는 것이다.89) 원리는 다음과 같다.90)
-
鄭鍔(정악: 宋, 1088~1154)이 이르길: 천하가 고르다(平) 하나 물만 못하니, 장차 땅의 높낮이를 알고자 하면 물 을 이용해서 본다. 천하가 곧다(直) 하나 먹줄만 못하니, 장차 막대(槷)의 기울기가 바른지를 알고자 하면 먹줄을 이용해서 보고 말한다. “水地以縣”이라는 것은 이미 땅 은 헤아렸으나 ‘건축할 곳’의 높낮이를 알지 못하매, 물 을 이용해서 땅의 높낮이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물의 높낮이는 반드시 먹줄로써 볼 수 있고 증험한다. 물을 이 용해서 땅을 평평히 하여91) 나무기둥(柱)을 세우고, 먹줄 을 띄워 물을 본다. 그리고 다시 먹줄을 보면 수평(平)과 수직(直)을 모두 알 수 있다.
위 내용은 땅과 건축에 얽힌 수평-수직의 관계를 함 축하고 있다. ‘건축할 곳’이라는 말은 건물을 앉힐 자리 뿐만 아니라 방향 또한 이미 정해진 상태라는 가정을 전 제로 한다. 여기서 晏子가 ‘구(矩: 직각으로 굽은 자)’를 논하고, 晏子의 ‘矩’가 문맥상 방위를 뜻하게 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땅의 수평을 통해 건물의 수직을 구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다음과 같이 논의되었다.92)
-
㈀ 江永(강영: 淸, 1681~1762)이 이르길: 공인(工人)이 건물을 짓는데, 물을 다스리는 방법이 있다. 각(各) 나무 기둥(柱)에 짤막한 길이로 임의의 선을 긋고, 선을 따라 사면(四面)에 횡으로 실을 두른다. 실아래 대나무로 물 을 받치고, 실에 직물(直物)을 달아 기울기를 잰다. 나무 기둥(柱)이 평평하게 놓이면 직물(直物)이 물에 이르러 두루 균일하고, 물이 균일하지 않으면 나무기둥(柱)에 높고 낮음이 있음을 알고 다시 정한다. 아마 옛 사람도 이 방법을 사용했으리라.
-
㈁ 戴震(대진: 淸, 1723~1777)이 이르길: “水地”라는 것 은 수척 길이의 도구로 물을 받치고, 수평에 꼭 맞게 먹줄을 끌어당겨 먼 곳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다. 즉, ‘平’이라는 것은 모두 ‘準’이다. 평평한 방향으로 표시해 놓은 곳을 따라 말뚝(植)을 세우고, 먹줄을 띄워 말뚝 (植)을 바로잡는다. 즉, 땅에서 떨어져있는 수면(水面)을 측량한다는 것은 모두 ‘準’이다.
이상의 내용으로 미루어 賈公彦이 ‘柱’라고 정의한 ‘植’은 규준틀을 맬 말뚝으로 추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건축공사시 요구되는 측설(測設)을 의미하는 것이다.93) 이에 따라 그 뒤를 잇는 다음의 서술은 “置槷以縣, 眡 以景”과 별개의 논지로 전개되었다.94)
孫詒讓은, “左祖右社, 面朝後市”뿐만 아니라, 이때의 ‘位’도 “辨方正位”의 “位”라고 하였다. 鄭玄이 “辨方正 位”에서 ‘이렇게 宮·廟를 정하는 것’이라고 한 말의 본 의를 “水地以縣”의 주(注)에서 찾은 것이다. 孫詒讓은 鄭玄의 두 번째 문장에 대하여 ‘모든 건국(建國)은 반 드시 먼저 宮·廟의 자리를 정하고, 후에 땅을 평평하 게 고른다.’라고 부연하였는바95), 건축공정상 지정(地 定)을 뜻한다. 이에 문장 첫머리의 ‘고하(高下)가 이미 정해졌다’라는 것은 ‘건축할 높이를 잡았다’는 뜻으로 추정할 수 있다.96)
* * *
이상의 논의를 배경으로 주(周) 낙양의 건설기록을 되 짚어보면, 「소고」 첫머리의 시작은 본래 다음과 같다.97)
위는 「소고」 맨 처음 부분이다. 鄭玄이 ‘正位’와 관 련하여 발췌한 기록 바로 앞에 위치한다. 이에, 뒤를 잇는 내용은 ‘相宅’에 따라 수행된 결과였다. 『서경』의 또 다른 판본인 『위공전(僞孔傳: 孔安國傳)』은 鄭玄이 발췌한 부분을 다음과 같이 보다 명확한 의미로 전하 고 있어 참고해볼만 하다.98)
-
朏, 明也月三日, 明生之名三月丙午朏於朏三日, 三 月五日召公早朝, 至于洛邑, 相卜所居其已得吉卜, 則 經營規度城郭、郊廟、朝市之位處於戊申三日庚戌, 以 衆殷之民治都邑之位於洛水北, 今河南城也於庚戌五日, 所治之位皆成
‘鄭玄의 正位’가 “左祖右社, 面朝後市”와 동일시 된 것은 송(宋)대 이후로 추정이 된다.99) 경학에서 논의된 바에 따르면, 위에서 “左祖右社, 面朝後市”를 대변할 수 있는 내용은 ‘도읍의 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건 축할 자리를 모두 완성했다’라는 대목이다. 그런데 인 용의 서두는 ‘자리할 곳을 자세히 살피고 점을 쳤다. 이미 그 길한 점을 얻어, 성곽·교묘(郊廟)·조시(朝市)가 자리할 곳을 측량하고 계획했다.’라는 기록으로 시작한 다. “正位”의 본의를 ‘攻位’와 ‘位成’만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굳이 발췌할 필요가 없는 내용이었다. 곧, 건 축공정 자체를 논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더 욱이 ‘經營·規度’의 대상에 왕궁은 포함되지도 않았다.
앞서 鄭玄은 “正位”에 대하여 ‘이렇게 宮·廟를 정하 는 것’이라고 하였는바, 孫詒讓은 ‘이렇게’ ‘정하는 것’ 이란 ‘자리를 바로잡는 것’ 곧 ‘矩를 정하는 것’이라 하 였다. 다시 말하면 이렇게 정한 ‘자리’라는 것은, ‘지정 (地定)’ 자체가 아닌, ‘矩’를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宮 과 廟로 자리를 구분한다는 것은 “體國”의 논리이다. 이는 계획·설계단계에 해당하기 때문에, “正位”는 “體 國”에 선행한다는 원칙과 맞지 않는다. 건축과정상으 로 본다면, 정의 자체에 논리적인 모순이 잠재되어 있 는 것이다. 이에 孫詒讓은 「소고」 첫머리를 덧붙여 일 부 내용이 누락되었음을 상기시켰다.100) 곧, 「소고」 첫 머리에 ‘相宅’은 왕궁의 터를 본다는 말이므로, “正位” 와 “體國”은 왕궁과 祖·社·朝·市로 건축대상이 구분된 다는 것이다. 결국 “正位”는 왕궁에 한정된 논의로, 孫 詒讓이 ‘궁구(宮矩)’로서 압축한 정의는 ‘鄭玄의 正位’ 에 일말의 수정을 가한 것이다.
4-3“經涂九軌”와 “面朝後市”
‘正位는 이렇게 宮·廟를 정하는 것을 말한다’라는 정 의는 한(漢)대 이후 사회특성이 반영된 해석이다. 이에 따르면, 도읍건설시 “市”는 논의대상이 아니다. 그럼에 도 “朝”와 “市”를 평면적이고 수평적인 관계로 오인하 게 된 배경에는, 鄭衆이 “左祖右社, 面朝後市,”를 “體 國”의 논거로 차용한 이후, 줄곧 “體國”의 문구 중 일 부로 인식하였던 것과 관련이 있다. 특히, 賈公彦이 “體國”의 논리를 입증하기 위해 음과 양의 관계로 논 증한 것이 크게 주효한 것으로 보인다.101) 그러나 고 공기 에 “左祖右社, 面朝後市, 市朝一夫”라 하여 시장 의 구역(後市)과 규모(市朝一夫)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주나라 노예제사회의 특성이 반영된 결과였다. 이때의 “市”는 ‘궁시(宮市)’를 말한다. 궁정 복무시설의 한 부분일 뿐, 거주민의 필요에 따라 설치된 시장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102) “面朝”와 “後市”는 사회변 화에 대응하는 “市”의 성격상 “左祖右社”와 같은 호응 관계를 기대하기 어렵다.
“辨方正位”의 논리에 따르면, ‘匠人建國’에 서술된 일련의 과정은 문맥상의 종점인 “左祖右社, 面朝後市,” 를 논하기 위한 말머리에 해당한다. 鄭玄은 “左祖右社, 面朝後市,”라는 핵심논제를 ‘王宮所居也祖, 宗廟面 猶鄉也王宮當中經之涂也’라고 하였는바, ‘匠人建國’은 <그림 5>의 2와 같이 ‘왕궁이 있는 곳이다’라는 화두 에 접목되는 것이다. 여기서 鄭玄이 한 말의 전체적인 문맥을 살펴보면 <그림 6>과 같이 ‘祖, 宗廟’와 ‘面猶 鄉也’는 ‘王宮所居也’를 부연한 것이고, ‘王宮當中經之 涂也’는 ‘面猶鄉也’라는 정의에서 파생된 말이라는 것 을 알 수 있다. “面”은 마치 ‘鄕(향하다)’와 같으므로, 왕 궁은 ‘中經之涂’와 마주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鄭玄이 말한 ‘中經之涂’가 왕궁 앞쪽으로 방향이 한정된 것임을 뜻한다. ‘王宮|朝-(面≒ 鄕)-中經之涂’와 같은 논리구도가 성립하는 것이다. 왕궁과 중심도 로 간, 관계에 대한 공 간상의 인식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기존의 “國中九經九緯, 經涂九軌左祖 右社, 面朝後市,”는 “國中九經九緯,(혹은 ) 經涂九軌, 左 祖右社, 面朝後市,”와 같이 끊어 읽을 수도 있다는 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經涂九軌”가 “左祖右社, 面朝後 市,”와 개연성을 지니게 된 것이다. 후자와 같이 구두점 을 찍을 경우 “經涂九軌”는 문맥상 “左祖右社, 面朝後 市,”를 수식하고, 의미상 “面朝”로 귀결이 되는 ‘9軌’ 폭 의 ‘經涂’라 정의할 수 있다. 여기서 ‘숫자9’는 천자를 상 징하는 임의의 수로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經涂”는 왕궁 앞쪽으로 뻗어 나온 어도(御道)요, “九軌” 는 어도의 도량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곧, 鄭玄의 ‘中 經之涂’다. 이에 따라 “經涂九軌” 전후에 대한 해석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 “九經九緯”는 그 자체가 ‘分(분할)’ 을 뜻한다. 성 밖과 차별화된 공간의 구획기준(經·緯)이 도로인 것은 자명하나, 이때의 ‘숫자9’ 또한 천자를 의미 하는 수라고 볼 수 있다.
한편, ‘面’은 건국(建國)의 방위가 표출되는 방향이 다. 『說文『에 이르길 ‘面’은 ‘얼굴의 앞모습’이라고 하 였다. 문자자체에 이미 ‘앞(前)’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 는 것이다. 얼굴의 앞모습(面)은 <그림 7>과 같이 얼 굴의 윤곽과 눈(目) 하나를 그려 넣은 모습으로 상형 되어 있다.103) 자원(字源)의 핵심을 ‘目’에 두고, 눈을 얼굴의 표상으로 인식한 것이다. 이러한 형상을 공간 에 대입해보면, 공간상 “面”에 내재된 앞이란 대상이 지닌 이미지를 함축하고 있는 방향을 의미한다. 鄭玄 은 [탐인]의 “使萬民和說而正王面”에서도 ‘面猶鄉也’를 논한 바 있다.104) 백성이 왕의 뜻을 듣고 마음이 기쁘 면, 왕에게 바로(正) 향한다는 것이다.105) 여기서 주목 해볼 대목은 왕에게 향하도록 하는 동인이 ‘왕의 뜻’이 라는 점이다. 왕이 있는 곳은 ‘왕의 뜻’이 있는 곳으로 인지될 수 있다. 이를 가시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근 거가 [장인]의 “面”인 것이다. 정치적 이상(理想)을 공 간적으로 구현해냈다는 표현은 이로써 가능하다.
5.결 론
본고에서는 『주례』「고공기」 를 이해하는 초석이 “辨 方正位”와 “體國經野”라는 문구에 있음을 파악하고, 두 지침에 따라 2천 년간 논의된 주요 내용을 <그림 8> 과 같이 되짚어보았다. 곧, 鄭玄이 집성한 이론을 토대 로 완성된 경전의 틀이다. 이를 통해 전개된 담론의 양상은 ①‘匠人營國’의 문구가 오랜 기간 “體國經野”의 논리에 따라 논구되었다는 점, ②동시에 “左祖右社, 面 朝後市”가 鄭玄이 “正位”의 근거로 제시한 『서경』「소 고」 와 상통하는 문구로 파악되었다는 점, ③‘匠人建國’ 은 문장을 “匠人建國, 水地以縣,”으로 읽느냐, “水地以 縣, 置槷以縣, 視以景”으로 읽느냐에 따라 논의대상에 대한 이해의 범주를 달리했다는 점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세 갈래의 흐름을 孫詒讓의 논술을 토대로 추적한 결과, 도성건설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왕궁을 앉힐 자 리와 방향을 정하는 것’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보 편적인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결론은 다음과 같은 논리적 맥락에 따라 도출되었다.
첫째, “正位”의 논의대상은 “左祖右社, 面朝後市”의 주체인 ‘왕궁’에 한정이 된다. “正位”를 논하는 “左祖右 社, 面朝後市”는 “左祖右社, 面朝後市”를 ‘왕궁이 있는 곳’이라고 풀이한 鄭玄의 논리와 상통하는 것이다. 대 상에 대한 분류는, 왕궁의 터를 정한 연후에 주요시설 을 배치한다는, 「소고」 첫머리의 서사적 기술을 근거 로 한다.
둘째, “正位”의 ‘位’는 ‘矩’를 뜻한다. 鄭玄이 「소고」 를 통해 전하고자 한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匠人 建國’에서 논의된 “水地以縣”은, “置槷以縣, 視以景”의 의미를 포괄하는, 땅에 대한 건물의 수직을 말한다. 곧, “正位”에 선행하는 “辨方”의 논리를 함축한 것이 다. “正位”는 좌우·전후의 위치관계가 논점으로 부각된 “體國”의 논리와 해석상 차이를 지닌다.
셋째, 건국(建國)의 방위는 곧 왕궁이 향하게 될 방 향으로 “面”을 통해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건국 의 방위는 성구(城矩)로서 논의되었는바, 성구(城矩)는 궁구(宮矩)를 논하기 위한 가상(假想)의 기준이다. 성곽 을 통한 구획은 祖·社·朝·市와 더불어 “體國”의 논리에 속한다. 이는 鄭衆의 설(說)에 따른 것으로, 『위공전『의 기록을 전거(典據)로 논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