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 론
1-1연구의 목적
조선시대의 주거문화는 다양한 지역성을 근거로 발전 해왔다. 개성에서 한성으로의 천도 이후 귀족계층의 판 도가 바뀌었고, 호족의 세력은 급격히 변화되었다. 고려 귀족의 몰락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杜門洞七十二 賢1)이며, 이들은 다시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렇 게 조선에의 벼슬을 거부하고 은둔한 대표적인 가문으 로 안동권씨를 들 수 있다. 이들이 조선에 벼슬할 수 없 었던 명분은, 태조 왕건에게서 성을 하사 받은 태사 권 행(太師權行)2)의 후손이었기 때문으로도 볼 수 있다.
조선이 건국되자 不事二君했던 고려 귀족의 대표적 인 인물이 안동권씨 15世권인(權靷)3)이다. 그는 고려 가 망하자 바로 안동으로 이주하였고, 그의 후손들은 안동문화권 4곳에서 큰 상류주거들을 갖춘 씨족마을4) 을 형성했다. 이것은 고려의 귀족이 조선의 시작과 함 께 안동문화권으로 전입하여 어떻게 적응해 갔는지의 의문을 제기한다. 즉 안동문화권의 대표적 씨족인 안동 권씨 가문5)을 대상으로 그들의 상류주거인 뜰집6)의 변 천과정을 분석하는 것은 안동문화권 상류 주거문화의 맥락을 파악하는 데 배제할 수 없는 중요한 과제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안동문화권에 조선 초기에 정착한 대표적 씨족인 안동권씨의 뜰집을 대상으로 그 변천과 정을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1-2연구의 방법
고려시대까지의 재산상속법은 균분제였지만, 유교를 국교로 한 조선시대에는 중국의 宗法制7)를 근간으로 한 장자우대 상속체계로 변경되자, 주거의 승계 또한 장자 승계체계로 자리 잡았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의 상 류 주거의 변천을 분석하기 위한 계보인 직계와 분가 의 체계는 각 씨족의 族譜를 통하여 그 변천과정을 명 확한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안동권씨가 안동문화권에 정착한 이후 어떤 분파과정을 거쳐 각 지역에 정착하였는지를 분석하 기 위하여, 문화인류학적 방법론에 의거, 우리나라 家系 의 가장 정확한 기록유산인 氏族의 族譜를 통해 변천과 정을 추적하고자 한다. 족보에는 일반적으로 건축 유구 에 명확히 나타나 있지 않은 가계의 분파과정이 정확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를 바탕으로 하여 가계의 구조를 파악함으로써 뜰집의 전후 맥락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 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뜰집의 건축 연원을 확인하되 건 축연대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의 기준을 족보의 분파를 통해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안동권씨 뜰집의 초창과 증개축의 조영활동을 조선시대부터 20C 까지의 전기·중기·후기의 시기별8)로 나누어 안동문화권 뜰집의 변천과정을 분석하고자 한다. 다만 이 과정에서 증·개축된 개별 뜰집의 공간적 변화에 대한 분석9)은 제 외하고, 주거유형의 배치10)의 분석만 포함하였다. 따라서 뜰집의 변천을 분석하기 위한 본 연구의 진행은 안동권 씨의 계보를 파악한 후, 전기·중기·후기로 나누어 각 시 기별로 어떤 조영의 특성이 있는가를 분석한다.
안동권씨는 10世에 15개 계파로 나뉘는데, 23호의 뜰 집을 보유했던 僕射公派외에도 안동문화권에 정착한 타 계파11)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안동문화권 입 향 시기는 대부분 조선 중기 이후에 이루어졌고, 계파 의 뜰집 수가 약소하여 명확한 변천의 맥락을 분석하 기 어려우므로, 이들은 본 연구에서는 제외하고, 복야 공파만을 연구 대상으로 한다. 연구 조사기간은 2014년 6월부터 2016년 2월까지 진행되었다.12) 표 1
2안동권씨의 안동 입향과 분파과정
2-1안동권씨의 형성
고려의 창업공신 권행(權行)을 시조로 하는 안동권씨는 원래 경주김씨로 古昌(지금의 안동)지역의 토호였다. 그는 견훤의 팔천병력에게 수세에 몰린 왕건을 甁山(안동시 와 룡면 서지동)전투에서 城主인 김선평(金宣平) 및 장정필 (張貞弼)과 함께 후원해 승리로 이끌었다. 왕건은 고려건 국의 기틀을 형성한 이들을 太師에 봉하고, 이 지역을 안 동으로 개칭해, 이를 삼태사의 土姓으로 하사하였다. 이후 안동권씨는 15계파로 번성하면서 고려의 많은 관직을 지 낸 가문으로 자리 잡았다.13)
2-2안동권씨의 안동 입향 및 분파 과정
안동을 토성으로 하는 삼태사의 묘소 및 재실은 모 두 안동시 서후면에 위치하는데,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성씨의 고향인 안동으로 찾아온 15世권인(權 靷)이 서후면의 입구인 松破(서후면 교촌리)에 입향한 것도 그러한 인연 때문14)으로 볼 수 있다. 그는 僕射公 派祖인 10世수홍(守洪)의 후손으로 고려 禮儀判書를 지냈으며, 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켜 안동으로 귀환한 입 향조이다. 그러나 송파에는 후대에 건축한 재실만 남아 있을 뿐 상류계층 세거지의 상징인 뜰집은 지어지지 않았다. 4대 후 19世사빈(士彬, 1449~1535)이 외가인 西原鄭氏의 別墅가 있던 안동시 북후면 도촌리로 移居 (1472년)15)하여 세거지로 자리 잡게 된다. 19世사빈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인 20世의(檥, 호 野翁, 1475 ∼1558)는 후손이 없는 밀양손씨의 妻家奉祀를 위해 예천의 예천군 용문면 제곡리(맛질마을)로 이주하였고, 둘째인 벌(橃)16)은 1520년에 72세의 부친(士彬)을 모시 고 외가인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닭실마을)로 이주했 다. 도촌에는 20世의(檥)의 6번째 아들인 21世심행(審 行)의 후손이 남아 뜰집을 건축하며 세거했다. 표 2, 표 3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가일마을)의 입향조인 18世항(恒, 1403∼1461)은 외가인 울진 平海에서 출생하였는데, 풍산 유씨의 사위로 가곡에 처가 입향17)했다. 그의 손자인 20 世주(柱)18)가 갑자사화(1504)에, 그의 아들들이 기묘사화 (1519)에 화를 당하자, 23世경행(景行)이 1611년에 외가 인 예천의 오룡으로 이주했으며, 그의 손자대인 25世징 (澄, 1636∼1698)이 17C말에 가곡으로 돌아왔는데, 이는 유성룡의 증손녀와 혼인한 것이 인연이었을 것19)이며, 화 산이 살던 뜰집에 다시 거주하게 되었다. 그림 1
이렇듯 안동권씨 복야공파는 크게 두 系派로 안동권 에 정착하는데, 고려가 망하고 송파로 轉居한 계파의 후예들과, 평해에서 처가 입향한 가곡계파로 구분된다. 송파계는 이후 여러 마을로 분파하여 세 곳의 씨족마 을을 형성하는데 비하여, 가곡계파는 잠시 마을을 떠나 있기도 했지만, 다시 돌아와 가곡에서 후손이 크게 번 창하였고, 타 지역에까지 파생되지는 않았다.
분파의 계기가 되는 입향 동기를 <표 4>에서 보면 안동에 정착한 100여 년 이후에 후손들이 토착화된 인 연을 가지는 처가 혹은 외가의 주거지로 이주하여 세거 지를 확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가곡의 경우는 특이하게도 세 번의 이주가 모두 처가와 외가의 인연이 었다. 15C초 처가입향 이후에 정치적 핍박을 받아 23世 경행(景行)이 고향을 떠나 외가인 예천군 용궁면 오룡리 로 이주하였다가, 다시 돌아온 25世징(澄)이 옛 고향으 로 재입향한 것은 매우 특이한 예이다. 이후 가곡은 크 게 번성하여 안동권씨의 대표적 세거지로 발전하였다.
이렇듯 안동권씨 분파의 과정은 모두 처가나 외가의 인연을 통해 移入한 것을 알 수 있다.
3안동권씨 뜰집의 형성과정
안동권씨의 뜰집이 형성된 시기를 조선시대의 전기·중기·후기로 구분하면 전기에 4호, 중기에 6호, 후기에 13호가 건축되어 모두 23호가 있었지만, 20C에 7호가 없어지고, 현재는 16호20)만 남아 있다. 표 5, 그림 2
3-1전기(15~16C)의 뜰집 형성과정
고려가 망하자 안동 송파에 정착한 안동권씨는 한동안 적응기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송파에는 안동권씨의 뜰집 이 건축되지 못했지만, 이웃에 많은 뜰집이 후대에 지어졌 고, 이들과 안동권씨는 통혼을 통한 밀접한 교류21)를 했다. 송파로의 입향 100여 년이 지난 뒤인 15C말에 19世사 빈이 도촌으로 이주하였고, 다시 그의 아들들이 봉화 유 곡(1520년)과 예천 제곡(1545년)으로 이주했는데, 이 세 마을에서 비로소 모두 뜰집을 건축하고 번성했다. 전기 (15∼16C)에 안동권씨가 건축한 뜰집은 가곡에 1채(D1), 도촌에 1채(B3), 유곡에 2채로 모두 4채(C1, C5)였지만, 도촌에는 후대에 철거되었다.
가곡에 최초의 안동권씨 뜰집인 D1 屛谷宗宅을 창건22) 한 20世주(柱, 호 花山, 1457∼1505)는 안동권씨 가문에 서 가장 먼저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정승의 벼슬을 하였 던 인물로, 사대부가의 격에 맞는 뜰집을 건축할 배경을 갖추고 있었다. 花山은 당시 안동의 벌족인 고성이씨 이 칙(李則, 1438∼1496)의 사위였고, 이웃 안동김씨 마을인 소산에는 최초의 뜰집으로 볼 수 있는 15C 전반에 건축 된 比安公舊宅23)이 있었으므로, 이러한 뜰집이 지어지기 위한 충분한 건축적 배경이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花山이 甲子士禍(1504)로 일시에 몰락한 이후에 한동안 가곡마을에서 안동권씨의 기반이 약해졌다. 이 집 의 전면 행랑은 기둥간격이 후면의 간격과 차이가 있고, 사랑채도 후대에 훼철되었다가 최근 복원했기 때문에 정 확한 원형은 알 수 없다. 그러나 화산의 주거였던 것은 분명하며, 후손이 다시 이 집의 보수한 것을 감안하더라 도 가장 오래된 안동권씨의 뜰집이라 볼 수 있다.
19世사빈(士彬)이 도촌에 들어온 지 100여 년 뒤에 22 世위(暐, 호 玉峰, 1552∼1630)가 서당인 晩對軒(1587년 건축)과 함께 뜰집(B3)을 처음 건축했다. 玉峯서거 후 숙종 13년(1687)에 마을에 도계서원을 세웠는데, 대원군이 서원철폐시 毁撤되었다가, 1928년 復設했다. 이때 목재가 부족하여 玉峯宗家를 가져다 서원건축에 사용했다.24)
20世벌(橃, 호 沖齋, 1478∼1548)은 기묘사화(1519)에 파직되어 외가인 봉화의 유곡으로 1520년 이주하여, 서실 인 충재와 뜰집(C1)을 1526년에 건축했고, 다시 복귀하기 까지 14년간 유곡에 기거했다. 유곡의 인근에도 1450년에 건축된 광산김씨의 뜰집인 雙璧堂이 있어, 예조참판을 한 충재의 주거에 모범이 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충재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작은 아들 21世동미(東美, 호 石亭, 1525∼1585)는 유곡 내의 작은 마을인 토일로 분가할 때 뜰집(C3)을 건축했다. 그의 아들인 22世채(采, 호 松巖, 1557∼1599)는 별당인 송암정을 건축했고, 그 후손 25世 두익(斗翼, 호 瑞雪堂, 1651∼1725)이 1708년에 조금 떨 어진 현재의 위치로 이건했다.
따라서 안동권씨가 안동권으로 전입하자마자 바로 뜰집 을 건축한 것은 아니며, 세 번째 이주지역인 봉화 유곡의 20世권벌을 제외하고, 모두 두 세대 혹은 세 세대가 지 난 이후에 뜰집을 건축한 것을 보면, 고려의 건축적 맥락 이 뜰집에 직접 移入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안 동문화권에의 토착화 과정을 거쳐 이곳의 상류주거 유형 인 뜰집을 주거형식으로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3-2중기(17~18C)의 뜰집 형성과정
중기의 뜰집은 모두 5채가 건축되었는데, 17C에 예천 제곡(A1, 1649)에 1채, 18C에 도촌(B2, 1750경), 가곡 (D2, 1792), 제곡(A2, 1795), 유곡(C2, 17C중)에 각각 한 채씩 건축되었다. 전기와 중기를 이어서 보면 가곡에는 한 채의 뜰집이 건축된 이후에 약 300년이 지나 뜰집이 한 채 더 생겼고, 도촌에는 전기 이후 150년 만에 한 채 가 늘었으며, 제곡도 17, 18C에 150여년의 간격을 두고 한 채씩의 뜰집이 건축되었다. 유곡에는 전기에 2채가 건 축된 지 100여년이 지난 뒤에야 한 채가 더 건축되었다. 이는 뜰집의 건축이 무척 쉽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17, 18C에 각각 한 채씩의 뜰집을 지은 제곡에는 1545 년에 20世권의(權檥, 호 野翁, 1475∼1558)가 문경송씨와 밀양손씨의 양대 외손봉사를 위해 입향한 곳이다. 그의 아 들 심언(審言)이 부친을 위해 야옹정(1566)을 지었는데 초 익공 양식으로 된 조선 전기의 높은 건축 수준25)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예천군 용문면에는 조선 전기에 건축된 규모 큰 뜰집인 의성김씨의 남악종택(1498)과 예천권씨의 초간종택(1589)이 인근에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뜰집을 건 축할 잠재력이 충분히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림 3
안동 도촌은 안동권씨가 유곡과 제곡으로 분파하게 된 중간 정착지인데 비하여 뜰집의 건축이 상대적으로 활발하지는 않았지만, 옥봉종택(B3, 1591) 이후 또 한 채의 뜰집(B2, 1750경)이 건축되었다. 이 집은 안마당 의 폭이 두 칸으로 구성된 소규모 뜰집의 전형적인 유 형으로, 지역의 부농가옥으로 정착한 사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가곡에 지어진 두 번째 뜰집인 수곡고택(D2, 1792)도 병곡종택 이후 300여년 만에 매우 오랜 기다림 후에 비로소 뜰집의 건축이 재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안동권씨는 이렇게 적지만 지속적인 건축활 동을 전기와 중기에 걸쳐 계속 진행했다고 볼 수 있다.
3-3후기(19~20C)의 뜰집 형성과정
조선 후기에 지어진 안동권씨의 뜰집은 전체의 2/3 를 차지하는 14호인데, 그중 4채가 멸실되어 현재 10호 가 남아 있다.
19C는 모든 시기 중 안동권씨의 뜰집 건축활동이 가 장 왕성한 시기라 할 수 있지만, 마을마다 조금씩 양상 은 다르다. 우선 이미 쇠퇴의 길로 들어서 한 채의 뜰 집도 더 건축되지 못한 예천의 제곡이 있다. 전기와 중 기에 각각 한 채씩의 뜰집(B1, B3)을 건축했던 도촌에 서는 후기에 중·소규모의 뜰집을 세 채(B2, B4, B5)나 더 지었지만, 현대에서의 보존이 이루어지지 못해 세 채(B3, B4, B5)가 훼철되었다.
후기에 2채의 뜰집(C3, C4)이 더 건축된 유곡에도 마지막에 건축된 이들이 1960년대에 훼철되기도 했고, 중기의 뜰집(C2)도 2007년에 실화로 소실되어 현재는 가장 오래된 전기의 두 뜰집(C1, C5)만 남아 있다.
안동권씨 마을 중에서 후기에 가장 괄목한 뜰집의 건축활동이 일어난 곳은 가곡이다. 후기에 총 9채가 건 축되었고, 특히 19C에 8채가 건축되어 전성기를 맞았 다. 1950년경에 한 채(D4)가 화재로 소실된 것을 제외 하고는 모두 11채의 뜰집이 잘 보존되어 있다.
따라서 후기의 뜰집 형성은 부침이 심한 말기적 상 황으로 볼 수 있다. 19C에 가곡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건축활동이 있었지만, 대부분 20C에는 성장이 둔화되 거나 건축 활동이 멈춘 것으로 볼 수 있다. 후기의 전 반기인 조선 말 19C에는 이앙법과 이모작 등 농법의 개량과 보의 구축 및 저수지 확장 등 관개용수의 확보 등26)이 경제력의 향상을 가져왔기 때문에 뜰집의 성장 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비 하면 대한제국과 일제감정기의 격변을 거치게 되는 20C에는 단 한 채의 뜰집만이 지어져 건축활동의 부침 이 상당히 비교되는 시대라 할 수 있다. 나라의 국운과 현대적 변화에 의한 결과라 할 수 있다.
4안동권씨 뜰집의 변천과정
뜰집의 변천은 뜰집의 형성과정을 기반으로 중기와 후기에서의 뜰집의 변화과정을 분석함으로써 파악한다.
4-1중기(17~18C)의 뜰집 변화과정
안동권씨는 전기에 4채의 뜰집을 건축했으며, 중기에 도 크게 활발하게 활성화되지는 못하여 6채의 뜰집을 건축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초기의 입향 이후의 잠재 기를 거쳐 지역에서 완전히 주도적인 토착세력을 확보 하는 시기로 볼 수 있다. 특히 18세기에는 3의 뜰집을 신축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지어졌던 뜰집의 중수를 세 채나 하여 뜰집의 규모를 늘렸다. 이들은 대 부분 마을의 종가집들인데 후손들이 먼저 종가를 확장 하거나 중수하여 保宗하고 있는 노력이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유곡에서는 전기에 분가했던 서설당을 인근의 넓은 터로 이전(1708)하면서 사랑채와 행랑채를 크게 증축27) 했다. ㄷ자형의 안채 공간은 초창시의 공간이며, 사랑 채와 행랑채의 공간은 이전시 확장되었다. 행랑과 사랑 채가 맞붙은 곳의 구조와 부재의 변색 차이28)가 시차 적 특성을 반영해 주고 있다.
특히 가곡마을은 전기의 정치적 혼돈에 의한 가문의 몰락 이후 마을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17C말) 조상의 집인 병곡종택을 매입하여 사랑채를 증축(18C말)하고, 이후 후손들이 마을의 중심씨족으로 자리했다. 이와 비 슷한 시기에 건축한 수곡고택(D2, 1792)은 안마당의 폭 이 4칸인 규모 큰 뜰집에 속한다. 전기에 건축된 같은 규모인 봉화의 서설당 및 병곡종택의 안채 구성과 달 리, 안방의 위치를 안마당의 전면으로 구성시켜, 하회마 을 충효당, 양진당과 같은 형식을 취함으로써, 시대적인 특성을 반영함과 동시에 인근 저명 씨족과의 유형적 교 류의 특성을 찾아볼 수 있게 한다. 여기서는 사랑채의 구성도 역ㄷ자의 형태를 이루는 특이한 구성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구성은 일반적인 뜰집의 구성과는 매우 다른 형식으로 가곡의 건축적 열정이 후기의 적극적인 건축활동으로 이어졌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기에 건축되거나 증축된 이 세 뜰집(C5, D1, D2) 은 규모 큰 안마당의 동일한 구성(4칸 폭)에서 안채와 사랑채의 다양한 공간구성의 유형적 사례를 제시함으 로써, 중기 뜰집의 고정적인 요소와 가변적인 요소들의 변천을 잘 비교할 수 있게 한다. 그림 4, 그림 5, 그림 6
4-2후기(19∼20C)의 뜰집 변화과정
형성과정에서 나타났듯이 후기는 가장 많은 뜰집의 건 축이 이루어졌지만, 아울러 뜰집의 쇠퇴를 보여주는 시기 이다. 후기의 전반부인 19C에는 가장 많은 뜰집의 형성 이 이루어진 시기이지만, 20C에는 건축활동의 급격한 감 소와 동시에 적지 않은 소멸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후기의 특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마을은 도촌이다. 19C 에는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세 채(B1, B4, B5)의 뜰집이 건축되었다. 그러나 훼철되었던 도계서원29)을 복설(1928) 하는 과정에서 재정상의 이유로 옥봉종택(B3)의 목재가 사 용되면서 뜰집은 철거되었고, 근년(2001)에 두 채(B4, B5) 가 동시에 훼철되었다.
유곡의 경우도 도촌과 비슷한데, 19C에 지어진 뜰집 (C3, C4)이 1960년대에 모두 훼철되었고, 중기에 지어진 뜰집(C2)은 실화로 소실(2007)되었다.
이들과 달리 후기에 최고의 건축이 이루어졌던 곳은 가곡인데, 전기와 중기에 각각 한 채씩 지어졌던 뜰집 이 19C에만 8채, 20C에 한 채(D8)가 건축되었으며, 한 채(D3)를 제외하고 모두 잘 보존되었는데, 그 이후의 증·개축은 거의 없었다. 표 6, 그림 7
가곡마을 뜰집의 공통적인 특징으로는 안마당의 폭이 4칸으로 규모 큰 뜰집에 속한다는 것이다. 가곡은 전기 이후 중앙의 정계에 진출하지 않았다. 재입향한 이후에 모두 10채의 큰 규모 뜰집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농업 경영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사화의 피해 이후 정계보다, 농법개량과 치수(治水)에 전념한 결과30) 큰 뜰집들을 보 유하게 된 것이다. 인근의 풍산류씨의 하회마을, 안동김씨 의 소산마을, 풍산김씨의 오미마을과 함께 안동문화권의 저명 씨족마을로 자리 잡은 것이다.
예천의 제곡에서는 17C초반에 건축된 춘우재(A1)의 화 재 이후 새로 중수(1910)한 공간을 매우 발전된 평면형식 으로 탈바꿈 시켰는데, 특히 안채의 혁신적인 변화를 이 루었다. 안방의 위치를 모서리에서 마루에 걸쳐 설정함으 로써, 부엌의 위생성을 개선하고 동선 길이를 줄이면서도, 안방의 채광을 확보하였고, 안채 후면으로의 공간 연장을 통해 영역성을 확장하여, 새로운 시대의 건축적 요구를 충분히 반영한 공간으로 발전시켰다. 표 7, 그림 8, 그림 9
20C의 가장 큰 변화는 일제강점과 동란으로 인한 격동 기의 결과 뜰집의 주인이 바뀌게 된 것이다. 도촌에서는 한 채(B2)의 주인이 바뀌었지만, 가곡에서는 세 채(D7, D10, D11)의 주인이 바뀌었다. 그러나 타성으로 바뀌지 는 않고 동족내에서 뜰집을 매도하는 것을 통해, 뜰집 의 가치를 문중에서 잘 보존하려고 하는 의지가 안동 권씨 내에 잘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3안동권씨 뜰집의 변천과정
안동권씨 뜰집의 변천과정은 선행연구의 구분에 따라 유형별로 분석할 수 있으며, 세부적으로 시대별(건축빈도 기준), 단위별(증개축 기준), 소유별(소유권 기준)로 건축 변천을 분석한다.
뜰집 본채의 배치유형에 따라 완결형, 연결형, 분리형31) 으로 구분되는데, 유형별 건축변천을 분석하면, 안동권씨 의 배치유형은 <표 8>과 같다. 안동문화권 전체의 평균 에 비하여 안동권씨의 배치유형의 비율은 완결형은 적은 편이며, 분리형은 많은 편이다. 이는 대부분의 분리형이 후기에 형성되었는데, 가곡마을의 건축이 후기에 이루어졌 기 때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시대에 따른 규모의 변천을 <표 9>을 통해 비교 해보면, 각 시대별 뜰집의 수는 차이가 많지만 건축되어지 는 면적의 차이는 많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선행연구인 의성김씨32)의 경우는 시대에 따라 점차 間수가 작아지는 데 비하여 안동권씨의 경우는 거의 평균인 21間을 기준으 로 비슷한 규모로 건축되고 있다. 후대로 갈수록 가구의 수는 늘어나고 재산의 규모가 작아질 수밖에 없는 일반적 인 경향에 비하면 매우 특이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세부적으로 시대별 건축 빈도의 변천을 보면 안동권씨 는 전기(15~16C)에서 중기 전반(17C)까지는 태동기였다고 볼 수 있다. 중기 후반(18C)의 성장기를 거쳐, 후기 전 반(19C)에 가장 전성기를 맞았다고 볼 수 있으며, 20C 에는 쇠퇴기를 맞았다고 볼 수 있다. 태동기는 길었고, 매우 짧은 기간에 성장과 쇠퇴를 이룬 것이다.
증·개축의 요구에 따른 주택 단위별 변천은 안동권 씨의 경우는 4채였다. 규모의 증축은 두 채(A1, C5)로 사랑채의 증축이었으며, 다른 경우는 화재에 의한 개축 시 시대에 따른 변경(A1, B1)으로 파악된다. 일반적으 로 초창 이후에 많은 증·개축을 하는 경향과는 달리, 지속적인 형태를 유지하는 뜰집이 많았는데, 이는 상대 적으로 전기의 뜰집 수가 적었으며, 공간적 요구를 충 분히 학습한 이후인 후기에 많이 건축되었기 때문에, 증·개축의 요구가 상대적으로 적었을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안동권씨의 경우도 원래의 주인이 변경된 경우 가 적지 않았는데, 모두 5채(B2, D1, D7, D10, D11)였 다. 가곡의 경우가 많은데, 초기에 정치적 수난에 의한 변경도 있었지만, 근대의 많은 변경은 뜰집과 같은 대 규모 주택을 유지하는 것이 시대의 곡절에 많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5결론
본 연구는 안동문화권 안동권씨 복야공파의 뜰집을 대 상으로 조선 초기~20세기까지의 기간을 약 2세기씩 삼 분하여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 변천을 분석한 결과 다음과 같은 특성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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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기(15~16C)에는 입향과 분파에 의해 씨족의 정착 이 완성된 시기라 할 수 있다. 고려 충신인 입향조는 조 선 초기에 안동 송파에 입향하였지만, 뜰집을 짓지는 않았 다. 四代후에 안동 도촌(道村)으로 이거하였으며, 곧 그 아들들이 예천 제곡(渚谷)과 봉화 유곡(酉谷)으로 분파하 였는데, 이곳은 처가나 외가의 인연을 가진 곳이었다. 또 일족이 안동 가곡(佳谷)의 처가로 입향하였는데, 이 네 마 을을 중심으로 안동권씨 복야공파가 번성하였다. 그러나 초기에는 정치적으로 핍박을 받아 위축되기도 했다. 전기 에는 4채의 뜰집이 건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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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기(17~18C)에는 각 마을에서 입향조의 종가와 차 종가를 중심으로 뜰집의 건축이 시작되었으며, 점차 활동 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전반인 17C 는 전기의 영향으로 활발하지는 않았지만 3채의 뜰집이 건축되었고, 후반인 18C에는 5채의 뜰집이 건축 혹은 증·개축되면서 서서히 활기가 일어났다. 신축보다는 오히려 종가를 증축하거나, 가곡과 같이 떠났던 마을로 돌아와 조 상의 주거를 되찾으려는 노력들이 이루어졌다. 18C는 조 상의 유지를 회복하고, 정치보다는 농업경영에 집중하여 경제력을 키운 건축의 성장기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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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후기(19~20C)의 전반에는 가장 뜰집의 건축활동이 활발한 시기였으며, 모두 12채의 뜰집이 건축되었다. 특 히 가곡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뜰집 건축활동이 적극적이 었다. 후반인 20C에는 건축활동이 거의 줄어 오직 한 채 만이 건축되었고, 오히려 7채의 뜰집이 훼철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과정을 종합하여 다음과 같은 변천 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다.
안동권씨는 초기에 안동에 이주하여 고려의 건축적 특 성을 유지한 것은 아니며, 100여 년의 잠재기 이후에 안 동문화권의 토착화를 이루고, 뜰집을 건축하기 시작하였 다. 전기에 후손의 중앙 정계 진출은 오히려 士禍로 핍박 을 받았는데, 영남사림의 입장과 동일했다. 뜰집의 건축은 오랫동안의 태동기를 거치며, 정계보다는 농업경영에 힘 썬 이후에, 탄탄한 경재력을 기반으로 건축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 19C에 가장 번성하였다. 그러나 20C에 국운의 쇠함과 현대적 변인에 의해 뜰집의 건축 열기가 지속되지는 못하였다.
안동권씨 뜰집 변천의 특성은 일관된 규모에 있는데, 초기의 종가와 중기의 파종가 및 후기의 지손들의 뜰집 규모가 거의 20간 내외로 비슷하다. 이는 일반적으로 후 대로 갈수록 작은 규모의 뜰집이 건축되는 경우와 달리 우수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건축경영의 탁월한 능력을 발 휘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건축의 일관성을 통하여 공간의 발전에는 많은 기여를 했는데, 다변적인 사랑채뿐 만 아니라 고정적인 요인이 많았던 안채의 공간적 변화에 도 노력을 기울여, 뜰집의 근대적인 공간성을 이룩한 성 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안동권씨 복야공파는 조선 전기부터 조선 중기 까지 안동문화권에 4곳의 씨족마을을 형성하여 정착기를 거치며 점진적으로 뜰집의 건축에 노력하였으며, 특히 19C를 정점으로 뜰집의 건축을 가장 활발히 하였으며, 공간적 발전에 많은 성과를 이룬 안동문화권의 대표적 가문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