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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 1598-1142(Print)
ISSN : 2383-9066(Online)
Journal of architectural history Vol.25 No.2 pp.31-44
DOI : https://doi.org/10.7738/JAH.2016.25.2.031

Construction History of the Old House “IMCHEONGGAK” in Andong and Estimation of its Original Structure

Jong-Seo Lee*

이 논문은 2016년 울산대학교 교내연구비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Corresponding Author : ljs6102@naver.com
December 8, 2015 March 7, 2016 March 18, 2016

Abstract

Imcheong-gak[臨淸閣] was a familial residence constructed in the early half of the Joseon dynasty period. It was partially destroyed by a fire during the 1590s war[壬辰倭亂] with the Japanese, and another fire that was caused between 1631 and 1634. The inner chamber[An-chae] and the Sarang section[Sarang-chae] today is the result of a partial reconstruction that took place back in 1626 and again around 1634. The residence also went through some changes because the new Ondol[溫突] heating system had to be applied to the structure. Based upon sections that remain in their original forms, we can presume that the Imcheong-gak residence originally had an inner chamber which was composed of the following elements: A main structure which was built upon a foundation featuring a Matbae[맞배] roof, two “Ik’rang[翼廊, flank]” sections on the East and West sides of the inner chamber, and a “Haeng’rang[行廊, passage]” structure on the opposite side of the main structure. Unlike the main structure, other portions of the inner chamber were all built directly upon the ground, and showed multiple stories, with Matbae roofs of their own. We can also assume that the Sarang section in the south would have been a pre-Ondol[溫突] bedroom, with a Board platform[板房] and a Gomi-ceiling[Gomi-banza] fashion.


안동 “임청각(臨淸閣)”의 건축 이력과 원형 가구(架構) 추정
-사랑채와 안채를 중심으로-

이 종 서*
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초록


    University of Ulsan

    1서론

    살림집의 보편적 유형은 재료나 기술력과 같은 공학 적 요인과 사상과 정서, 미감과 같은 인문적 요인이 결 합되어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현존하는 전근 대 상류주택은 대부분 조선후기 건축이다. 조선후기 상 류주택의 보편적 유형을 구성하는 요소를 세부적으로 구분하면 온돌난방, 단층구조, 안채와 사랑채의 분리, 팔작지붕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조선전기의 상류주택에서는 이와 다른 요소들 이 확인된다. 기존 연구에서는 사랑채가 발달하지 않았 고,1) 온돌난방이 보편적이지 않았으며,2) 평면에서 중층 구조가 많은 면적을 차지했음을3) 확인하였다. 맞배지붕 및 이를 응용한 지붕양식이 유행했음도4) 확인하였다.

    경상북도 안동시에 있는 고성이씨 종택 임청각은 이 러한 요소를 뚜렷하게 갖추고 있는 조선전기 주택이 다.5) 고식을 잘 간직하고 있을뿐더러 규모도 가장 커 군자정과 사당을 포함하여 60칸이 넘는다. 또한, 현존 하는 조선전기의 주택들이 후대의 수리·보수를 거치면 서 벽체와 창호는 물론 가구(架構)까지 달라진 경우가 많은 반면, 임청각은 초창기의 원형을 가늠할 수 있는 요소들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현존 건물을 문헌기록과 결합하여 임청각의 원형을 추정하고 시대적 특징을 밝히는 연구는 충분치 못하였다. 그 결과 본래 바깥 행랑채와 누문(樓門)을 갖춘 99칸 집이었는데 철도 부설로 인하여 지금의 규 모로 축소되었다는 구전이 사실인 양 소개되고 있다.6) 또한, 성리학이나 풍수지리적 믿음과 같은 인문적 요인 에 근거하여 과도한 해석을 이끌어내기도 하였다.7) 이 러한 해석에 앞서 수행해야 할 것은 후대의 수리이력 과 이에 기인한 구조와 양식의 변화를 규명하고 초창 시의 원형을 도출하는 작업이다.

    본고에서는 문헌자료와 현존 건축물을 이용하여 임 청각의 초창과 보수 이력을 확인할 것이다. 그리고 이 에 근거하여 원형이 남은 부분과 후대에 변형된 부분 을 파악함으로써 본래의 원형가구를 도출할 것이다. 이 러한 작업은 조선전기 양반 주택의 한 유형을 도출하 고 전파 경로와 지역적 특성을 파악하는 거시적 연구 의 일환이 될 것이다.

    2조선시기 기록의 임청각 창건과 수리 이력

    임청각의 주인 고성이씨는 본래 고려말 개경과 조선 전기 한양에서 번성한 벌열가문이다. 고성이씨가 안동 에 살게 된 것은 좌의정 이원(李原)의 막내아들 이증 (李增, 1419~1480)의 낙향이 계기가 되었다. 이증은 안 동부의 남문 밖에 집을 짓고 살았다.8) 안동을 주 거주 지로 삼은 것은 이증의 셋째아들 이명(李洺)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이명은 안동부 동쪽 법흥사의 서쪽 비탈에 ‘임청각(臨淸閣)’을 지었다. 지금의 군자정에 해당하는 임청각은 정식 거주처가 아닌 ‘별업(別業)’ 즉, 별장이었 다. 임청각을 상시적인 거주처로 삼은 것은 이명의 6째 아들 이굉(李肱)부터였다. 이굉은 이곳에서 생활했으며 관직에서 물러난 뒤 이곳으로 돌아와 삶을 마쳤다.9)

    이로부터 임청각은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규모로 지 은 것이 아니라 별장 용도에 적합한 규모로 지은 뒤 점 차 확장하여 지금의 규모에 이르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먼저 ‘임청각’, 즉 현재의 군자정을 별장으로 짓고, 이후 안채와 사랑채 등 살림채를 확장하여 지금과 같은 규모 를 갖추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후 여러 가지 이유 로 구조나 양식에 변화가 발생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이력은 임청각에 전해오는, 16세기 전반부터 작성된 문서들에서 살필 수 있다. 우선, 1540년에 작성 된 분재기에서는 임청각을 상주처로 삼았던 첫 주인 ‘이굉의 집’이 확인된다.

    • 문서명: 이명처공인문씨허여문기(李洺妻恭人文氏許與文記)

    • 작성연대: 1540년

    • 임청각 관련 기록: 장자 부자가 모친 문씨보다 먼저 죽고, 증손 이춘수는 어려서 제사를 주관하기 어려우므 로 봉사조 노비와 토지는 장자의 집에서 소유하되 이명 부처의 신주는 막내아들 이굉(李肱)의 집에 그대로 두고 제사하다가 이춘수가 장성하면 돌려주라고 당부함.10)

    위에서 보듯 문씨는 장자 부자가 먼저 사망하자 어린 장증손에게 제사를 맡기지 못하고 막내아들 이굉의 집 에서 부모의 신주를 제사지내다가 장증손이 장성하면 돌려주게 하였다. 이로부터 이명 사후에 임청각은 ‘막내 아들 이굉의 집’이었으며, 이곳에 이명의 신주를 두고 제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명의 신주를 이굉의 집에 두고 제사하는 이유가 장자 부자의 사망 때문이라 는 점에서 임청각은 이명은 물론 이명 장자의 거주처도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명은 경치가 뛰어난 곳에 별 장으로 임청각을 지어서 왕래하다가 막내아들 이굉의 몫으로 주었고, 이명이 사망하자 임청각에 살던 이굉이 신주를 모시고 제사한 것이다. 따라서 임청각은 이굉과 그 후손이 거주하면서 종가의 면모를 갖춰 나갔다고 판 단할 수 있다. 또한, 이굉이 부친 이명의 신주를 모셨다 는 점에서 이명 사후 문씨가 허여문기를 작성한 1540년 무렵에 사당을 창건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임청각은 ‘임청각’ 즉 현재의 군자정을 먼저 지었고, 살림채는 이굉이 상시 거주한 이후 점차 규모 를 늘려 현재의 칸수를 갖추었으며, 1540년 무렵에는 사당도 지었다고 추정된다. 전체적인 규모가 완성된 시 점을 확정할 수는 없지만 임진왜란 이전에는 대략 현 재와 같은 규모를 갖추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임청각의 문서들은 살림채의 현재 모습이 임진왜란 이 전에 비해 많은 부분 달라진 모습임을 알려준다.

    • 문서명: 이지남매화회문기(李遲男妹和會文記)

    • 작성연도: 1618년

    • 임청각 관련 기록: 종가는 명나라 군대가 주둔했을 때 실화(失火)했으므로 사당 동쪽의 작은 집을 채워 준다.11)

    위의 내용은 이복원의 자녀가 1618년에 재산을 나누 면서 외아들이자 종손인 이지(1560~1631)의 몫 부분에 기재한 것이다. 종가는 명나라 군대가 주둔했을 때 실 수로 불이 났으므로 작은 집을 보태준다는 내용이다. 이로부터 임청각은 임진왜란 때 명군의 실화로 손상을 입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실화로 인한 손상의 정도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이 때문에 작은 집을 보태준 것으로부터 분재문서를 작성한 1618년까지 도 화재로 인한 손상을 회복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현존하는 임청각의 구조와 양식이 반영하는 시대적 특징을 판단하려면 먼저 화재로 인한 손상의 정도와 복구 시점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약 건 물이 전소되었다면 현재의 임청각 건물은 1618년 이후 에 재건한 것이 될 것이며, 그렇다면 임진왜란 이전의 양식을 간직하고 있다고 보여도 이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은 어렵다. 반면에 일부만 손상을 입었다면 원형을 보존한 부분과 화재 이후에 재건한 부분을 비교하여 현존 건물 중 각 영역의 건축 시기를 파악하고 실화하 기 전의 모습대로 추정 복원하는 작업이 가능하다.

    필자는 손상이 건물 일부에 국한되었다고 판단한다. 살림채가 모두 소실되었다면 1618년에 이르기까지 종가 를 재건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적다. 또한, 실화를 이유로 종손 이지에게 작은 집을 보태준 것을 보면 건물의 일부 분만 주거 기능을 상실했을 가능성이 크다. 건물의 많은 부분이 주거 기능을 유지했기에 1618년까지도 소실된 부 분을 복구하지 않을 수 있었고, 작은 집을 주어 기능을 잃은 부분을 보충해 주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임청각은 이후에 또 화재가 나서 손상을 입 었을 가능성이 확인된다. 이지의 처 신씨(申氏)는 1634 년에 안동부사에게 고소장[白活]을 제출하였다. 본래 이지의 여동생이 자신의 몫으로 받은 토지를 류인갑에 게 방매하였다. 이에 이지는 조상전래의 토지가 남에게 넘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값을 쳐주고 돌려받았다. 그런데 류인갑은 이지와 이지의 아들이 연이어 사망하 고 임청각에 화재가 나 재산이 불타자 환퇴문기도 탔 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땅을 찾아달라고 관청에 고소하 였다.12) 이에 이지의 처가 류인갑의 주장을 반박하는 고소장을 제출한 것이다. 이지 남매가 1618년에 부모의 유산을 분할한 것으로 미루어 이지의 여동생이 류인갑 에게 판 토지 역시 1618년에 여동생의 몫으로 정한 것 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임진왜란 때에 불탄 뒤 1618년 까지도 복구되지 못했던 살림채가 이지가 사망한 1631 년 이후 이지의 처 신씨가 고소장을 제출한 1634년 이 전에 또 화재를 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고소 장 중의 ‘재산이 모두 타서 류인갑이 환퇴문기도 탔을 것이라고 생각하여’라는 내용이나, 류인갑이 이지에게 작성해 준 환퇴문기가 재판의 증거로 제출된 것을13) 고려하면 이때의 화재로 인한 손실은 매매문서 등 재 산이 비치된 내실에 집중되었고, 가구(架構)의 대폭적 인 파괴를 초래하지는 않았다고 추정된다. 따라서 1634 년 이후에 화재나 대규모의 구조 변경이 없었다면 지 금의 임청각은 임진왜란 때의 1차 화재와 1634년 무렵 의 2차 화재로 인한 손상을 복구한 모습이 될 것이다.

    1634년 이후의 문헌기록에서 임청각의 건축이력에 대한 기록은 이종악(李宗岳, 1726~1773)이 작성한 『임 청각중수기』 에서 확인된다. 여기에서 이종악은 임진왜 란 때에 내사(內舍) 즉, 살림채가 다 불타고 군자정만 타지 않은 것처럼 기술하면서 살림채의 대략적인 복구 시점까지 제시하였다.

    ① (임청각을) 처음 창건한 시기는 당시의 문적을 모두 병화에 잃어버려 전혀 파악할 수가 없다. 어찌 자손의 큰 한스러움이 아니겠는가?…전해오기를 ‘정덕(正德) 기 묘년(1519)에 창립했다’고 하니 아마도 헛된 말이 아닐 듯하다. … ② 지금 임금 43년 정해년(1767) 늦은 봄에 좋은 날을 택하여 일을 시작하였다. 썩은 마룻대는 갈아 서 새롭게 했고, 새는 기와는 바꿔서 덮었다. 당과 실, 난간, 창호, 층계는 훼손된 대로 수리해서 고쳤다. 모두 여섯 달 만에 일을 마쳤다. ③ 동쪽의 양가(兩架)를 당으 로 하고, 서쪽의 2가(二架)를 실(室)로 했으며, 실의 남쪽 과 북쪽에 각기 1가(一架)의 날개[翼]가 있는데 남쪽 날 개는 협실(夾室)로 하고 북쪽 날개는 저장소[夾藏]로 하 여 일용에 편하게 조금 제도를 바꿨으니 조상이 남긴 건축양식을 바꾸지 않는다는 의리로 책망한다면 나의 죄가 진실로 크다. ④ 이보다 앞서 벽에 채색이 완연하 고 고친 흔적이 없었으므로 ‘창건 후 지금까지 아직도 중수(重修)하지 않았나보다’하고 생각하였다. 공사를 시 작한 뒤에 헐고서 보니 전에 보지 못한 들보 끝 서까래 에 옛 단청의 흔적이 있었다. 대들보 위에는 백서(白書) 가 있었는데 “병인년(1626) 4월에 그리기 시작한다”는 등 의 글이 있었고 그 옆에 7대조[이지; 필자]의 호를 써 놓 았다. ⑤ 대개 그 때에 왜란을 겪었는데 ‘중국 군대가 여기에 머물다 살림채[內舍]가 실화로 다 타고[消盡], 이 임청각에 옮겨 붙으려 하는데 중국 장수가 구하여 면할 수 있었다’라는 말이 전해온다. 이로써 본다면 임진왜란 뒤에 살림채를 고쳐 지을 때에 아울러 이 임청각을 개 수했다고 하여도 이상할 것이 없다.14)

    위의 인용문은 이종악이 1767년에 ‘임청각’, 즉 지금 의 군자정을 수리하고 남긴 글이다. 우선, 1519년에 창 건했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고 기록하였다(①). 이는 구전을 적은 것이기는 하나 임청각의 창건연대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고 ‘정덕 기묘년’이라는 구체적인 연도를 적시한 것으로 미루어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할 수 있다. 다음으로, 가구(架構)와 벽체, 창호, 계단 등을 훼손된 대로 수리하는, 즉 원형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군자정을 수리했음이 확인된다(②). 다만, 남쪽과 북쪽 의 날개 공간을 전과 다른 용도로 꾸며 공간 구획에 약간의 변화가 있을 뿐이었다(③). 이종악이 이러한 변 경조차 “나의 죄가 진실로 크다”고 한 것에서도 군자정 의 가구와 창호는 원형을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군자정은 본래 채색이 되어 있었으며, 1626년에 이지가 다시 채색한 사실을 확인했음을 기록하였다(④). 마지 막으로 임진왜란 때에 중국 군대의 실화로 살림채[內 舍]가 다 탔으나[消盡] 임청각(군자정)은 명군이 구원해 서 타지 않았다는 구전을 기록함과 더불어, 1626년의 새 단청은 불에 탄 살림채를 복구하면서 함께 했을 것 이라고 추정하였다(⑤).

    이러한 내용은 군자정이 초창 시의 구조와 양식을 대부분 유지하고 있는 반면, 살림채[內舍]는 많이 변형 되었을 가능성을 알려준다. 이종악은 임진왜란 때에 살 림채가 다 불타 1626년경 다시 지었다고 추정하였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현존하는 살림채는 17세기 전반의 건축이 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소진되었다는 것은 화재로부터 170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 전해오는 이야 기를 적은 것이므로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게다가 앞 서 살핀 것처럼 1618년에 작성된 분재기는 살림채의 일부분만 소실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또한, 1634년 의 문서는 임진왜란 이후 화재가 또 발생했음을 알려 주지만 이종악은 이에 대해 기술하지 않았다. 1634년 어간의 화재로 인한 피해는 후대에 기억되지 않을 정 도로 경미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임진왜란과 그 이후의 화재로 인한 손상의 정도와 이를 수리·재건 한 부분은 현존 건물의 구조적 특징을 살피고 나아가 조선전기의 다른 주택들과도 비교하면서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군자정을 수리한 지 20년 후에 이종악의 아 들 이의수(1745~1814)는 오래된 사당을 헐고 다시 지 었다. 이종악이 원형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군자정을 수 리한 반면, 이의수는 이전 제도에 구애받지 않고 사당 을 다시 지었다.

    ① 정미년(1787) 3월 18일에 집을 헐었고 26일에 터를 닦았으며 6월 11일 미시(未時)에 기둥을 세우고 상량하 였다.…기와를 걷고 집을 헐자 도리와 보 서까래가 썩어 서 하나도 쓸 만한 것이 없었으니 집이 오래된 줄 알 수 있었다. … ② 집의 제도를 살피면 3칸을 설치했는데 전후에 각기 퇴주를 두었다. 모양은 9칸이나 더하면 불 과 6칸이다. 앞쪽의 3칸은 각기 4개의 문을 두어 합하면 12쪽이다. 퇴주에 근거하여 청사[廳事]를 만들었으니 일 을 행하고 배알하는 곳이다. … ③ 제도는 전처럼 하되 주두와 서까래[榱桷]와 같은 것은 철거했으며, 보의 길이 를 조금 줄였다. … 무신년(1788) 3월 16일에 또 역사를 시작하여 먼저 마루를 놓고 다음으로 감실을 만들었으 며, 다음으로 풍판[風遮]을 달았다. 5월에는 외문(外門)을 세웠다. … 옛적에 음식을 조리하는 건물[廚廊] 3칸이 뜰 동쪽에 있었는데 심하게 퇴락하였으나 재목과 기와가 없어 수리하지 못하고 철거하였다.15)

    위에서 보듯 이의수는 1787년부터 1788년 사이에 사 당을 다시 지었다. 사당은 지은 지 오래되어 상부 부재 가 다 썩어 새 부재로 지었다(①). 헐기 전의 사당은 3 칸으로 앞뒤에 퇴를 두었으며 가구는 이고주오량(二高 柱五梁) 구조였다. 전퇴는 내부 공간과 분리되었으며, 전면 고주칸에는 1칸에 4짝씩 총 12짝의 문이 설치되 어 있었다. 전면 고주칸은 벽 없이 문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의수는 이전 사당의 모습을 자세히 기록하 였다. 그런데 새 사당 즉 지금의 사당은 이의수가 묘사 한 옛 사당과 모습이 많이 다르다. 비록 이의수는 ‘제 도는 전과 같이 하였다’고 하였지만 스스로도 ‘주두와 서까래[榱桷]’와 같은 부재를 철거하고,16) 보를 줄였으 며, 동쪽에 있는 부엌건물(廚廊)도 철거하였다고 기록 하였다(③). 뿐만 아니라 지금의 사당은 전퇴를 둔 일 고주오량 구조로 1787년 이전의 ‘모양은 9칸이나 더하 면 6칸에 불과한’ 이고주오량가와 구조가 다르다. 또한, 전면 고주칸을 문으로만 구성했던 것과 달리 지금 사 당은 칸마다 벽을 설치하고 중간에 한 짝의 쌍여닫이 문을 달았다.<그림 5>

    이로부터 이의수가 사당을 중건한 방식은 이종악이 임청각을 수리한 방식과 크게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임 청각은 가구뿐 아니라 창호까지 기존 제도를 유지하는 보수적인 방식으로 수리한 반면, 사당은 옛 제도에 구 속되지 않고 새로운 구조와 양식으로 지었다. 따라서 군자정과 사당의 창호는 살림채 영역의 각 부분을 편 년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군자정의 창호는 1519년의 양식을 유지하고 있는 반면, 사당의 창호는 1788년에 새로 제작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호의 양식이 군자정과 같으면 이로부터 그 부분은 화재 전의 구조를 간직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사당의 창호와 같으면 이는 임진 왜란 이후 변형된 부분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할 수 있 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방법론을 적용하여 임청각 살 림채의 안채와 사랑채 부분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겠다.17)

    3살림채[內舍]의 현재 구조와 추정 원형

    3-1살림채의 가구와 창호 분석

    앞 장에서 살폈듯 지금의 군자정은 1767년에 원래의 구조와 양식을 보존하며 수리한 것이고, 사당은 1788년 에 기존 건물에 구애받지 않고 중건한 것이다. 살림채 는 훼손된 시기와 대략적인 보수시점이 확인될 뿐 훼 손의 정도와 수리 방식은 확인되지 않는다. 우선, 입면 구조와 창호 양식을 준거로 삼아 사랑채와 안채를 살 펴보겠다.18)

    살림채는 가파른 경사면을 3단으로 고른 대지 위에 자 리 잡았다. <그림 1>에서 보듯 살림채는 용도와 위치에 따라 안채, 사랑채, 곁채, 아래채로 구분할 수 있다. 안채 와 사랑채는 주인의 거주공간이다. 안채는 폐쇄된 마당 을 지닌 ‘口’자 형으로 상단의 몸채를 하단의 동·서 익랑 과 남쪽 행랑이 둘러싼 영역이다. 사랑채는 안채의 몸채 와 행랑이 각기 동쪽으로 3칸씩 연장된 공간이다. 곁채 는 안채의 몸채와 행랑이 서쪽으로 연장되고 서쪽 양 끝 에서 익랑이 직교하여 역시 폐쇄된 마당을 지닌 ‘口’자 형의 공간을 형성하였다. 아래채는 2m가 넘는 축대 아래 에 자리 잡았다. 총 13칸, 40여 미터에 달하는 바깥행랑과 바깥행랑의 서쪽 두 번째 칸과 동쪽 여섯 번째 칸에서 행 랑과 직교하는 각기 2칸의 바깥익랑으로 구성되었다.

    임청각 살림채는 익랑과 행랑의 기둥이 매우 높고 많은 부분이 중층으로 구조된 점이 특징이다. 하단 행 랑 중 세 칸이 중층이고, 좌우 각 두 칸의 익랑 역시 중층이다.<그림 2, 左> 안채의 행랑과 동쪽 익랑 역시 기둥 길이가 3.5m에 달하며 이 중 세 칸에 2층 공간이 배치되어 있다.<그림 2, 右> 곁채의 행랑은 현재 중층 이 아니지만 안채 행랑과 동일한 길이의 기둥을 사용 하여 높이가 매우 높다. 경사면을 따라 지어진 곁채의 익랑은 세 칸 중 두 칸이 중층이다. 살림채에서 중층 공간은 12칸에 달하며, 통층이지만 중층을 구조할 수 있을 만큼 기둥 높이가 높은 공간 역시 6칸에 이른다. 이렇듯 기둥이 높고 중층 공간이 많은 것은 임청각 살 림채의 뚜렷한 특징이다.

    그런데 중층공간을 많이 배치한 것은 조선전기 양반 주택의 한 특징이라는 점에서19) 임청각 살림채는 조선 전기 양식을 간직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러한 판단은 살림채의 창호를 군자정의 창호와 비교해 보아 도 타당성을 확인할 수 있다.

    초창 당시의 구조와 양식을 간직한 군자정에서 창과 문은 연귀맞춤 한 액자형태의 문얼굴만 벽면에 드러나 는 것이 특징이다.20) 문얼굴 부재의 외면 두께인 문선 도 창의 크기에 따라 폭이 15~18cm에 달하여 두툼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쌍창은 예외 없이 중간에 설주를 설치한 ‘영쌍창(楹雙窓)’이다.<그림 3> 영쌍창은 조선전 기 이전에 유행한 창호 양식이라는 점에서도21) 군자정 의 창호는 초창기의 양식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 다.22) 따라서 살림채에서 이와 동일한 양식의 창호, 특 히 <그림 1>의 영쌍창이 설치된 부분은 초창 내지는 임진왜란 이전의 구조를 간직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군자정의 고식 창호와 동일한 양식의 창호는 사랑채와 안채에도 설치되어 있다.<그림 4> 북쪽사랑채의 창호는 모두 군자정에 있는 것과 같다. 마루의 북벽과 방의 전 면에는 영쌍창이,23) 방의 측면과 후면에는 작은 붙박이 창과 외여닫이창이 설치되어 있다. 방문 역시 액자형 문 얼굴만 드러나는 형태이다.<그림 4, 左上> 남쪽사랑채에 도 고식 창호가 설치되어 있다. 동쪽 판방 정면에는 영 쌍창이 설치되어 있고,<그림 6> 동쪽과 후면에는 작은 붙박이창이 설치되어 있다. 동쪽 판방과 서쪽 온돌방 사 이의 벽에 설치된 문도 문얼굴만 드러나는 고식이다.

    안채에서도 군자정과 동일한 창호가 다수 확인된다. 안 채 대청 후벽과 서쪽방 안뜰쪽, 그리고 동쪽방 바깥쪽 벽 에는 영쌍창이 설치되어 있다.24)<그림 4, 右上> 또한, 문 얼굴만 갖춘 외여닫이창이 서쪽방의 행랑 쪽에 설치되었 으며<그림 4, 左下> 서쪽 익랑의 상층부와 행랑의 하층 부에는 붙박이창이 설치되어 있다.<그림 4, 右下>

    이렇듯 사랑채와 안채에서는 군자정에 있는 것과 양 식이 일치하는 창호가 다수 확인된다. 이로부터 이들 창호가 설치되어 있는 부분은 초창기의 구조를 간직하 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군자 정과 다른 양식의 창호도 일부 확인된다. 이들 창호는 사당에 설치된 것과 양식이 같다.

    앞서 문헌기록을 통하여 현재의 사당은 1788년에 새 로 지은 것임을 확인하였다. 특히, 사당의 전면에는 본 래 칸마다 네 짝의 문이 달려 있었다. 이것을 철거하고 지금처럼 칸마다 중간에 한 짝의 쌍여닫이문을 두었다. 따라서 사당 정면의 창호를 제작할 때 목수는 이전 사 당의 창호 양식에 구애받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림 5>에서 보듯 현존 사당의 전면 문은 문설주와 결구된 상인방 전체가 외부에 노출되어 있다. 이는 문얼굴 이외의 부분을 벽속에 묻음으로써 외부에 액자형 문얼굴만 노출되는 군자정의 창호와 전혀 다르 다. 그리고 이와 같은 양식의 문이 사랑채와 안채의 일 부 공간에서도 확인된다.<그림 1>

    <그림 6>에서 보듯 3칸으로 구성된 남쪽사랑채는 현재 동단의 한 칸은 구분된 판방(板房)으로, 서쪽의 두 칸은 통합된 온돌방으로 구획되어 있다. 판방(板房) 의 전면에는 창을, 온돌방의 전면에는 칸마다 문을 설 치하였다. 그런데 판방(板房)에는 고식 영쌍창을 설치 한 반면, 온돌방의 2개 문은 인방에 설주를 연결하여 양식상 사당 전면의 문과 일치한다. 따라서 온돌방의 문은 건축 당시의 모습이 아니라 임진왜란 후대에 변 형된 모습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25)

    사당과 동일한 양식의 문은 안채에서도 확인된다. 앞 서 안채의 창호 다수가 군자정과 양식상 일치하는 것 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대청 좌우 벽면에 설치된 문들 은 사당 전면의 문과 양식이 같다. 우선, 대청 동쪽 벽 면을 보면 북쪽 칸에 설치된 문은 상인방에 설주를 연 결하여 만들었다.<그림 13> 서쪽 벽의 문 두 개도 상 인방 전체가 외부로 노출되었다.<그림 12> 따라서 이 부분도 초창기의 원형이 아니라 후대에 변형되었다고 볼 수 있다.26)

    이제까지 임청각의 입면 구조와 창호 양식에 근거하 여 사랑채와 안채의 각 부분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중 층구조이거나 기둥이 중층과 동일하게 긴 부분은 조선 전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군자정과 창호 양식이 일치하는 부분 역시 임진왜란 이전의 구 조와 형태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였다. 그리 고 사당 전면의 문틀과 양식이 일치하는 남쪽사랑채의 서쪽 두 칸과 몸채 대청 좌우의 벽면은 후대에 변형되 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근거하면 임청 각의 안채와 사랑채는 많은 부분 초창 내지 조선전기 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일부 영역은 조선후기에 변형된 모습이라는 판단이 가능하다. 화재로 인한 손상 이 살림채의 일부 영역에 국한되었다는 추정이 문헌 기록 뿐 아니라 창호 양식에 근거한 분석에서도 도출 되는 것이다.

    3-2사랑채와 안채의 원형 추정과 구조적 특징

    앞 절에서 임청각 살림채의 기둥 길이가 길고 중층 공간이 많은 것에 근거하여 임청각 살림채는 대부분 조 선전기의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창호의 양식을 군자정과 사당에 있는 것과 비교 하며 조선전기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부분과 후기에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부분을 추정하였다. 그 결과 남쪽사랑채와 안채의 일부 창호는 사당의 것과 양식이 일치하여 초창시의 모습이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따라 서 화재로 인한 손상이나 다른 이유에서의 수리도 이 부분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세 칸으로 구성된 남쪽사랑채는 현재 동쪽 끝 한 칸 이 판방(板房)이고, 서쪽 끝 두 칸이 온돌방이다. 앞 절 에서 확인했듯 판방(板房)의 창은 고식 영쌍창인 반면 두 칸 온돌방 전면의 문은 사당 전면의 문과 양식이 일치한다.<그림 6> 따라서 구조가 변경되었다면 지금 의 온돌방 영역에서 발생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필자는 남쪽사랑채는 본래 동쪽의 두 칸 판방과 서쪽 의 한 칸 마루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판단한다. 이러한 판단의 근거는 첫째, 판방(板房) 천정의 고미반자 흔적 과 온돌방 동쪽 칸의 고미반자 둘째, 정면과 배면에 설 치된 하인방의 상이한 수평 셋째, 온돌방 서쪽 칸 배면 창의 양식 때문이다.

    현재 판방의 상부에는 고미반자 틀을 걸었던 홈이 장혀와 보 상부에 분명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그림 7>에서 보듯 두 칸으로 구성된 온돌방 중 판방과 연접 하는 동쪽 칸에는 지금도 고미반자가 있다. 반면에 서 쪽 칸에는 고미반자가 없다. 여기에 근거하면 본래 동 쪽 두 칸의 용도가 같았고, 서쪽 한 칸은 이와 달랐다 고 추정할 수 있다. 고미반자는 방한에 유의한 시설이 므로 판방의 고미반자 흔적과 온돌방 동쪽 칸의 고미 반자는 과거에 이 두 칸이 침실이었음을 시사한다. 이 는 현재 침실로 쓰이는 북쪽사랑채의 방에 역시 고미 반자가 있는 것에서도 뒷받침된다.

    다음으로 세 칸 기둥을 연결하는 하인방의 수평이 일정치 않을 것을 볼 수 있다. <그림 6>에서 보듯 정 면은 두 칸 온돌방 하인방의 수평이 같고 판방의 하인 방은 이보다 낮게 걸렸다. 반면에 <그림 8>에서 보듯 배면은 고미반자가 시설된 동쪽 두 칸의 하인방 수평 이 같고 온돌방 서쪽 끝 칸의 하인방은 이보다 높게 걸렸다. 이렇듯 전면과 배면 하인방의 수평이 일정치 않은 것으로부터 이는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 후대에 변형된 결과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동쪽 한 칸은 판방이고 서쪽 두 칸은 온돌방 이라는 점에서 온돌방 두 칸의 하인방이 일직선상에 있는 전면의 구조가 더 합리적이다.<그림 6> 그렇다면 현재의 용도에 비추어 비합리적인 배면의 구조가 원형 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그림 8> 그리고 배면에서 하인방이 일직선상에 있는 동쪽 두 칸에 고미반자가 시설된 것을 고려하면, 본래 침실로 쓰인 동쪽 두 칸의 하인방이 일직선을 이루었고, 그 수평은 현재 배면의 하인방 위치가 된다고 판단할 수 있다.

    다음으로 판방의 전면에는 고식 영쌍창이 설치되어 있다.<그림 6> 이 영쌍창은 군자정에 있는 것과 같은 양식이어서 본래의 모습으로 판단할 수 있다. 영쌍창은 고미반자가 있는 온돌방의 배면에도 설치되어 있었다 고 생각된다.27) 반면에 <그림 8>에서 보듯 온돌방 서 쪽 칸의 창은 설주와 결합된 상인방이 노출되었다는 점에서 사당의 창호와 양식이 같다. 여기에서도 고미반 자를 설치한 동쪽 두 칸이 통일성을 보이고, 고미반자 가 없는 서쪽 한 칸은 다른 모습을 보인다. 따라서 본 래는 동쪽 두 칸을 침실로 사용했고, 서쪽 한 칸은 다 른 용도로 사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쪽 한 칸의 구조와 용도는 개방된 마루였을 가능 성이 크다. 서쪽 끝 칸 마루를 통해서 천정과 벽면에 고미반자와 영쌍창을 설치한 두 칸의 침실용 판방으로 진입하는 구조였던 것이다. 그리고 현재 온돌방 전면의 문 양식은 두 칸 판방 중의 한 칸과 개방된 마루였던 한 칸을 통합하여 온돌방으로 개조한 시기를 가늠할 단서가 된다. 앞서 확인했듯 온돌방 전면 문의 양식은 현재 사당 전면에 있는 문과 같아 임진왜란 이후에 개 조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정면 하인방의 수평도 이때 변했을 것이다. 사당형 문을 설치한 두 칸의 통일성을 기하고자 하인방의 수평을 맞춤으로써 지금과 같은 모 습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래 남쪽사랑채는 동쪽의 두 칸 판방과 서 쪽의 한 칸 마루로 구성되었다가, 임진왜란 이후 현재 와 같은 구조로 바뀌면서 사당형 창호가 설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동쪽 판방에 고미반자의 흔적 과 영쌍창이 남아 있는 것을 고려하면, 변화의 주원인 은 침실용 판방 두 칸 중 서쪽의 한 칸을 마루 한 칸 과 합쳐 온돌방으로 개조한 것에서 찾는 것이 타당하 다. 또한, 이종악의 『임청각중수기』 에 따르면 화재로 손 상된 살림채를 1626년경에 수리했을 가능성이 크므로 본래 판방만 있었던 남쪽사랑채에 온돌을 시설한 것도 이때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창건 시점에는 임청각에 온돌이 없었거나 부분적으로만 시설되었을 가 능성을 시사한다. 이에 대해서는 안채 영역까지 살펴본 뒤 종합적으로 판단하겠다.

    앞에서 안채는 대청 좌우 벽의 문 양식이 군자정과 다르고 사당과 유사한 것을 확인하였다. 이외에 다른 부분에서도 후대의 변형 가능성이 보인다. 우선 익랑의 입면이 비대칭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림 9> 에서 보듯 임청각의 서쪽 익랑은 중층구조로 기둥 높 이가 3.5m에 이른다. 반면에, 동쪽 익랑은 기둥 높이가 2.7m에 불과한 단층이다.

    그런데 임청각 안채의 ‘口’자 형 건물배치는 경주의 관가정과 서백당, 예천의 예천권씨 영사당종택 및 초간 종택 안채, 안동의 의성김씨 종택 안채 등 조선전기 주 택은 물론 안동의 충효당과 양진당 안채, 상주의 양진 당, 예천의 남악종택 안채 등 17세기 전반의 주택들과 평면 구조가 같다. 나아가 임청각에서 분파된 가계에서 1700년경에 임청각 옆에 지은 고성이씨탑동종택의 안 채와도 같다.28)

    이들 주택들에서 좌·우 익랑 도리의 수평이 다른 경 우는 찾을 수 없다. 조선후기의 ‘口’자 형 주택들에서도 이러한 경우는 확인하기 어렵다. 안동의 충효당이나 고 성이씨탑동종택처럼 좌우 대지의 수평이 다를 경우 기 둥의 높이를 달리하여 좌우 익랑의 상부가구를 같은 수평에 위치시켰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현재 단층 으로 되어 있는 임청각 안채의 동쪽 익랑도 본래 서쪽 익랑과 동일한 높이의 중층구조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 하다. 이러한 판단은 창호의 양식에서도 뒷받침된다.

    중층인 서쪽 익랑 창호의 양식은 군자정과 같다. 반 면에 동쪽 익랑은 안뜰 쪽에 지게문을 달았고 바깥 쪽 벽에는 붙박이창을 달았다. 붙박이창은 문선의 폭이 12cm에 불과하여 15cm를 상회하는 군자정은 물론이고 건물의 위상이 가장 낮은 아래채 행랑 하부 붙박이창 의 14.5cm와 비교해도 현격히 좁다. 이렇듯 안으로 지 게문을 달고 밖으로는 다른 창과 통일성이 없는 붙박 이창을 설치한 것에서도 이 부분이 본래의 모습이 아 님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18세기 이전의 ‘口’자형 주택들 및 군자정 창 호와의 차이점을 고려하면 현재의 동쪽 익랑은 본래의 모습에서 가구까지 달라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 면 동쪽 익랑 부분은 임진왜란 때에 발생한 화재로 심 각하게 손상된 부분일 가능성이 크다. 본래 중층이었는 데 화재로 소실되자 1626년 무렵에 단층으로 다시 지 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몸채 대청 동·서 벽면의 문 양식이 사당과 유사한 것 역시 화재와 관련 이 있을 가능성을 고려할 수 있다.

    이는 대청 상부 가구가 비대칭 구조이고, 대청 동·서 벽면 상부의 결구 역시 비대칭인 것에서도 확인된다. 조선전기는 물론 조선후기 양반주택에서도 5량 가구 전면에 다시 퇴칸을 달아 지붕 모양을 비대칭으로 한 경우는 찾기 어렵다. 그런데 <그림 10>에서 보듯 임청 각의 대청 상부 가구는 일고주육량, 즉 반칠량가로서 전면 기둥이 배면 기둥보다 짧다.

    따라서 대청 상부 가구는 후대에 수리나 확장으로 인하여 변형된 모습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퇴주의 단면 크기가 대청의 고주와 같고 퇴주 상부에도 역시 정교하게 초각한 보아지를 설치하여 다른 부분들과 통 일성을 보이는 것을 고려하면 임진왜란 때에 발생한 화재 때문이 아니라 조선전기에 이미 이러한 모습으로 공간을 확장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두 가능성을 모두 열어놓겠다.29)

    그런데 대청에서는 임진왜란 이후에 변형되었음이 확실한 부분이 확인된다. <그림 11>과 <그림 12>에서 보듯 대청 서쪽 벽면의 상부가구는 동쪽 벽면과 다르 다. 서쪽 벽면은 오량가구 부분 전체를 건너지르는 통 칸보를 양쪽 기둥 중간에 끼우고 그 위에 대공을 얹었 다. 그 결과 중대공의 길이가 비정상적으로 길어졌다. 무고주오량 가구에서 기둥 중간에 홈을 파고 대보를 끼운 사례는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을뿐더러 법식도 매우 불합리하다.

    그리고 통칸보를 끼운 북쪽 기둥을 보면 이 보가 본 래 이 위치에 있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현재 북쪽 기둥은 직접 도리를 받치지 못하고 있다. 기둥 상부를 잘라내고, 잘라낸 단면 위에 나무토막을 얹어 도리를 받게 하였다. 게다가 본래 기둥머리와 보가 결구되어 있던 자리에는 별도의 짧은 부재가 장혀 및 도리와 결 구되어 있다.<그림 11>

    이로부터 서쪽 벽의 상부 가구는 대보와 기둥이 훼손 되자 지붕을 해체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존의 부재를 철 거한 뒤 지금의 통칸보를 양쪽 기둥에 끼워 넣었음을 알 수 있다. 보의 상태를 보면 새 부재가 아니라 다른 곳에 썼던 것을 재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편법 적인 수리로 인하여 서쪽 벽의 상부 가구는 기형적인 모습이 되었다. 반면에 <그림 12> 동쪽 벽면의 상부 가구는 예천권씨초간종택 등 경북지역에 분포한 조선전 기 양반주택의 서산각지붕 구조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법식에 맞을뿐더러 원형에 가깝다고 판단할 수 있다.

    따라서 대청 동쪽 벽면의 상부가구는 초창기의 원형 을 유지하고 있거나, 1626년경에 수리했어도 본래의 구 조를 잃지 않았다고 판단된다. 반면에 대청 서쪽 벽면 의 상부가구는 1626년보다 더 늦은 시기에 수리한 모 습일 가능성이 크다.

    대청 서쪽 벽면은 동쪽 행랑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임진왜란 때의 화재가 동쪽 행랑 부분에 집중되었을 가능성과 대청의 동쪽 벽면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대청의 서쪽 벽면이 동쪽 행랑과 함께 화재 를 당하거나 수리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또한, 대 보만 교체하는 부분적이고 편법적인 수리가 이루어졌 다는 점에서 전면적인 수리의 결과라고 보기도 어렵다. 나아가 법식에 맞지 않는 불합리한 방식의 수리이고 대보도 재활용한 것이라는 점에서 임청각의 제반 여건 이 매우 어려웠던 시기에 수리가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임청각중수기』 에서는 1626년에 군자정에 단 청을 다시 할 정도로 여유가 있었음이 확인되므로 대 청 서쪽 벽면 상부가구의 편법적인 수리는 이보다 후 대에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필자는 1634년 경에 화재로 손상을 부분을 수리한 결과일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다.30)

    이제까지 안채의 익랑과 대청을 살펴 익랑은 서쪽의 것이 원형에 가깝고 동쪽은 임진왜란 때의 화재로 소 실된 것을 1626년경에 단층으로 재건하였다고 판단하 였다. 대청 상부는 본래 오량가였으나 조선전기 또는 1626년 무렵에 현재와 같은 반칠량가로 증축되었을 가 능성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대청 동쪽 벽면의 상부 가 구가 원형에 가깝고, 서쪽 벽면은 조선후기에 편법적으 로 수리한 결과임을 확인하였다.

    마지막으로 행랑을 보면, 기둥의 길이와 도리의 높이 가 서쪽 익랑과 일치하여 기본적인 골격은 원형을 유 지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누하부에 온돌방을 설 치하거나, 상부의 누를 철거하여 통층으로 만드는 등의 변화가 있었음이 확인된다.

    안채 행랑은 동·서 익랑과 만나는 두 칸을 포함하여 모두 네 칸이다. 이 중 동쪽과 서쪽 끝 두 칸은 위에 다락을 둔 중층이다. 동쪽 끝 칸은 아래를 개방한 반 면, 서쪽 끝 칸은 다락 아래에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그런데 동쪽 끝 칸은 본래 중방을 끼웠던 장부구멍을 나무토막으로 막고 그 위에 새 장부 구멍을 뚫어 다락 귀틀을 지탱하는 보 방향 중방을 설치하였다. 도리 방 향 중방도 그만큼 올렸다. 그 결과 다락 바닥의 수평이 본래의 위치에서 15cm가량 높아졌다. 이 중방들을 본 래의 장부구멍에 맞추어 내리면 중간 부분 2칸의 중방 과 수평이 같아진다. 따라서 동쪽 끝 칸은 다락만 낮추 면 본래의 구조가 된다.

    서쪽 끝 칸은 중방이 동쪽 칸보다 더 높이 설치되어 있다. <그림 13>에서 보듯 보 방향 중방을 24cm 가량 낮추면 중간 두 칸의 중방 및 동쪽 칸 본래의 중방 위 치와 수평이 같아진다. 외면 벽의 중방 역시 아래로 24cm 가량 낮추면 중간 칸 외벽의 중방과 수평이 같아 진다. 따라서 서쪽 끝 칸의 다락은 본래 지금보다 24cm 가량 낮게 설치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쪽 끝 칸의 중방을 올린 것은 다락 하부를 온돌방 으로 개조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된다. 현재 다락 하부 온돌방의 바닥 수평은 바깥의 흙바닥보다 20cm 정도 밖 에 높지 않다. 이는 구들을 지상에 설치하면 천정 높이 를 확보할 수 없는 구조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지하에 구들을 설치하는 한편, 다락을 들어 올려 거주공간에 필 요한 천정 높이를 확보한 결과 <그림 14>에서 보듯 온 돌방 상부의 다락은 익랑 상부의 다락보다 높게 되었다.

    하부 온돌방과 상부 다락의 이와 같은 구조는 본래 누하부에 온돌방이 없었음을 알려준다. 안채 행랑의 서 쪽 끝 칸은 본래 동쪽 끝 칸처럼 하부가 개방된 구조였 는데 조선후기에 온돌방으로 개조하여 현재와 같이 되 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온돌방 외벽 하부의 영쌍창도 이 위치에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그 림 13, 右> 본래 행랑의 다른 칸과 동일하게 붙박이창 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누하부를 방으로 개조하면서 다 른 곳에 있던 것을 옮겨와 재활용했다고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행랑 중간의 두 칸을 살펴보겠다. 현재 이 부분은 통층으로 되어 있다. 안뜰 쪽으로는 중방 하 부를 개방하고 상부를 벽으로 막았다. 이와 반대로 바 깥쪽으로는 중방 상부를 개방하고, 하부를 벽으로 막았 다. 바깥쪽 중방 상부의 개방된 공간에는 사롱창을 설 치하였다.<그림 13> 그런데 이들 칸에도 본래 상부에 다락을 설치했던 흔적이 분명하게 남아 있다.

    두 칸 중 서쪽 칸의 외벽 부분 도리에는 창틀을 고 정시켰던 좌우 두 개의 홈이 분명하다. 아래 중방에도 역시 같은 위치에 홈이 있다. 동쪽 칸 외벽의 도리는 1970년대에 교체한 부재여서 홈이 없으나 하부의 중방 에는 역시 좌우에 두 개의 홈이 있다. 또한, 좌·우 기둥 의 측면에도 장부 구멍이 대칭으로 나 있다. 따라서 현 재 개방되어 있는 상부에도 벽과 창이 있었음이 확실 하다. 이 두 칸에도 동·서 끝 칸과 동일하게 다락이 설 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제까지 사랑채와 안채에서 본래의 모습을 간직한 부분과 후대에 변형된 부분을 판단하면서 임진왜란 이 전의 모습을 추정해 보았다. 이것을 그래픽으로 나타내 면 다음과 같다.

    <그림 15>에서 보듯 남쪽사랑채는 서쪽에 한 칸의 마루를 두고, 동쪽에 두 칸의 방을 두었다. 방은 마루 를 깐 판방이었고, 상부에는 고미반자가 설치되어 있었 다. 안채는 지금의 일고주육량 가구가 아니라 무고주오 량 가구로 지붕이 대칭을 이루었다. 대청 서쪽 벽면의 상부 가구도 지금의 대청 동쪽 벽면과 같은 모습이었 다. 이 대청 좌우로 입면이 대칭을 이루는 중층 익랑이 직교하였으며, 익랑은 다시 중층 행랑과 직교함으로써 ‘口’자 형의 폐쇄된 안뜰을 형성하였다.<그림 16> 그리 고 익랑과 행랑의 상부에는 <그림 17>과 같이 ‘ㄷ’자 형태로 다락이 설치되어 동쪽 방에서 서쪽 방으로 순 환할 수 있었다.

    이렇듯 추정 복원한 임청각의 원형은 현재에도 느낄 수 있는, 기단 위의 몸채를 중층의 익랑과 행랑이 에워 쌈으로써 풍기는 호방하고 웅장한 느낌을 배가한다. 임 청각의 호방하고 웅장함은 그 자체로 임청각의 특징이 다. 더불어 침실로 사용했던 판방이 남아 있는 것과 온 돌을 시설하기 어려운 구조였던 것을 또 다른 특징으로 제시할 수 있다.

    남쪽사랑채의 동쪽 두 칸은 본래 온돌이 시설되지 않 은 침실이었으며, 안채 행랑 누하부의 온돌방도 본래 개방된 공간이었던 것을 조선후기에 개조했음이 분명하 다. 임청각 살림채에서 이들 부분을 제외하면 전체 칸 수에 비해 온돌을 시설한 공간이 매우 적다. 전체 평면 이 9칸이고 이 중 두 칸이 중층인 곁채에는 지금도 온 돌방이 전혀 없다. 또한, 안채의 익랑과 행랑은 본래 하 부가 허청이고 상부는 다락이어서 온돌시설을 의도하지 않고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안채와 사랑채의 추정 원형 에서 하부에 구들을 설치하여 온돌난방을 적용할 수 있 는 공간은 기단 위에 자리 잡은 몸채 좌우의 네 칸과 북쪽사랑채의 한 칸에 불과하다. 그러나 남쪽사랑채의 사례를 고려하면 이들 공간에 본래부터 온돌을 시설했 는지도 불분명하다. 오히려 향후 규명해야 할 과제이다.

    이는 곧 임청각이 중층공간이 많고 온돌 난방이 보 편적이지 않았던 조선전기 상류주택의 특징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조선전기의 상류 주택에는 온돌이 없 거나 부분적으로만 설치되었다. 온돌은 노약자나 병자 를 위한 시설이었고, 대부분 판방에서 풀로 엮은 자리 를 깔고 살았다.31) 임청각 남쪽사랑채는 이에 해당하는 실례이자 17세기에 상류 주택에 온돌이 보편화됨에 따 라 기존 구조를 변화시킨 실례가 된다.

    그러므로 기단위의 몸채를 중층의 익랑과 행랑이 둘 러싼 안채의 평면과 입면, 고미반자를 시설한 남쪽사랑 채의 판방 등은 16세기 전반에 건축된 임청각의 뚜렷 한 건축적 특징이다. 이는 곧 조선전기의 다른 주택들 과 비교·분석할 수 있는 준거가 된다.

    4결론

    본고에서는 임청각의 사랑채와 안채의 현재 모습을 문헌기록과 결부하여 살피면서 건축 이력을 확인하고 임진왜란 이전의 원형을 추정해 보았다.

    임청각은 1519년 무렵 이명이 ‘임청각’이라는 명칭의 정각을 지은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살림집으로서의 임청각은 이명의 아들 이굉으로부터 시작하였다. 그리 고 1540년경에는 사당까지 지었다고 추정되므로, 임청 각은 이 무렵에 대략 현재와 같은 평면을 갖추었다고 짐작된다. 살림집으로서의 임청각이 조선전기에 완성되 었다는 것은 중층공간이 배치된 익랑과 행랑의 높은 입면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임청각’, 즉 현재 군자정으로 부르는 정각은 지금도 대부분 초창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반면에 사당은 1788년에 헐고 새로 지은 것이다. 군자정과 사 당은 창호의 양식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임청각 안채 와 사랑채의 창호 대부분은 군자정에 있는 것과 양식 이 일치하지만, 일부는 사당에 있는 것과 일치한다. 이 로부터 원형을 유지한 부분과 후대에 변형된 부분을 판단할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임청각의 살림채는 임진왜란 때에 명 군의 실화로 큰 손상을 입었고, 1634년 무렵에도 또 한 번의 화재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의 화재로 손상된 부 분은 안채의 동쪽 익랑 부분에 집중되었을 가능성이 크 다. 본래 중층구조였던 동쪽 익랑이 화재로 소실되자 1626년경에 단층으로 재건함으로써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외에 반칠량가인 대청 부분도 처음 건축되었을 때와는 구조가 달라졌을 가능성이 크 지만 그 시기를 임진왜란 이후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대청 서쪽 벽면의 현재 모습은 임청각의 여건이 좋지 않았던 시기에 1634년의 화재로 인한 손상을 편법 적으로 수리한 결과일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그런데 임청각 살림채에서는 화재가 아닌 다른 이유 에서의 변화도 이루어졌다. 이는 상류주택에 온돌이 확 산되었기 때문이다. 임청각에서도 온돌이 없던 공간에 온돌을 설치하였다. 현재 남쪽사랑채는 서쪽 온돌방 두 칸과 동쪽 판방 한 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 임진왜란 이후 서쪽 두 칸에 온돌을 설 치함으로써 현재와 같은 구조와 기능을 지니게 되었다. 안채 행랑 서쪽 칸의 누하부도 본래는 개방된 공간이 었으나 후대에 다락을 들어 올리고 지하에 구들을 설 치하는 방식으로 방을 만들었다. 임청각 살림채는 본래 온돌이 없거나 부분적으로만 시설되었는데 상류주택에 온돌이 보편화됨에 따라 구조를 변경한 것이다.

    이렇듯 화재로 인한 복구와 편법적인 수리, 온돌 도입 으로 인한 구조 변경 등의 이력을 통하여 임진왜란 이 전 임청각의 안채와 사랑채의 원형을 추정할 수 있다. 임청각의 남쪽사랑채는 두 칸의 동쪽 판방과 한 칸의 서쪽 마루로 구성되어 있었다. 안채는 기단 위에 무고주 오량 구조의 대청과 대청 좌우의 방이 있었다. 여기에 중층구조인 동·서 익랑이 교차하고 역시 중층구조인 행 랑이 익랑과 교차함으로써 간결하면서도 웅장한 평면과 입면을 갖추었다. 이 영역을 기본으로 하고 좌우로 공간 을 확장하여 사랑채와 곁채를 형성했으며, 다시 하단부 에 아래채를 지음으로써 공간구획이 완성되었다.

    이처럼 임청각은 기록에 근거한 편년이 분명할뿐더 러 구조와 양식상으로도 원형이 많이 남아 있어 이에 근거하여 전체적인 원형을 도출할 수 있다. 따라서 임 청각의 안채와 사랑채는 그 자체로 건축역사학적 의미 가 클 뿐 아니라 임청각 살림채와 유사한 구조의 주택 들을 분석하고 편년하는 데에도 유용하다.

    또한, 임청각은 중앙에서 번성한 명문 가문의 인물이 1500년대 전반에 지은 건물이다. 이러한 점에서 임청각 은 조선전기에 상급 양반층이 선호하고 희구했던 주택 의 한 유형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현존하는 조선전 기의 주택들을 임청각과 비교하면 조선전기의 양반층 전체에 적용할 수 있는 보편성과 지역별 차이점을 확 인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창건 연대를 알 수 없는 주택을 해석하는 데에도 유용할 것이다.

    Fig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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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당 전면의 문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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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청각 살림채의 영역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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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청각 안채와 아래채의 중층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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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자정 측면 벽의 창과 문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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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청각 살림채의 창과 문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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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쪽사랑채의 창호와 하인방의 수평(정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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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돌방 동쪽 칸의 고미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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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쪽사랑채 배면 하인방 수평과 창호(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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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채 동쪽 익랑(좌)과 서쪽 익랑(우)의 높이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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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채 몸채의 비대칭 상부 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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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청 서쪽 벽면의 상부 가구와 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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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청 동쪽 벽면의 상부가구와 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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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측면(좌)과 바깥쪽(우)의 중방 위치와 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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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쪽 익랑과 행랑 상부 다락의 단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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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쪽사랑채 내부 공간의 추정 원형 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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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채 영역의 추정 원형 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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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채 다락 평면의 추정 원형

    Table

    Footnote

    • 김종헌·주남철, 『한국 전통주거에 있어서 안채와 사랑채의 분화과 정에 대한 연구』 , 대한건축학회논문집, 12권, 2호, 1996
    • 이종서, 『고려~조선전기 상류 주택의 방한 설비와 취사 도구』, 역 사민속학, 24호, 2007
    • 이종서, 『조선전기의 주거용 층루 건축 전통』, 역사민속학, 22호, 2006
    • 류성룡, 『조선전기(15~16세기) 주택건축의 특징과 변화 양상 연구 -엇도리 맞배지붕에서 맞춤도리 팔작지붕으로-』, 대한건축학회논문 집(계획계), 28권, 10호, 2012
    • 원래 ‘임청각’은 지금의 군자정을 가리키는 명칭이었으나 지금은 주택의 전체 건물군을 포괄하는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본고에서도 ‘임청각’을 전체 건물군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하겠다. 임청각은 서쪽에 상·하 두 단으로 구성된 살림채가 있고, 살림채의 동쪽에 군 자정이 있으며, 군자정 동쪽에 사당이 있다. 살림채와 군자정은 ‘안동 임청각 정침 군자정’이라는 명칭으로 보물 182호로 지정되어 있다.
    • 임청각 주인 이종악(1726~1773)이 1763년에 그린 『山水遺帖』에는 임청각 아래에 별도의 작은 기와집과 초가집 몇 채가 있을 뿐 임청각 에 포함되는 행랑채나 대문채는 없다. 철도가 놓이기 전인 1910년대 유리원판 사진(국립중앙박물관, M972-02)에도 임청각 영역에 포함할 만한 격식 있는 건물은 없었음이 확인된다. 따라서 지금의 임청각은 최대로 확장된 시기의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 오지현은 임청각의 사당과 폐쇄적인 ‘口’자형 평면을 성리학의 영 향을 받은 결과로 해석하였다(오지현, 『안동 임청각의 공간구성에 관 한 연구』 ,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1; 오지현·김진균, 『안 동 임청각의 공간구성에 관한 연구』 , 대한건축학회 학술발표대회 논 문집(계획계), 20권, 2호, 2000). 그러나 임청각이 건축된 16세기 전반 은 아직 사족층의 삶에 성리학적 질서가 깊게 침투하지 못한 시기였 다는 점에서 살림채의 평면이 성리학에 기인하여 결정되었다고 보는 것은 성급한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장백기는 가문의 번영을 위 해 특정 문자 형태로 가옥을 구조했다고 보았다(장백기·조성기, 『안동 임청각의 문자형태에 나타난 의미와 택법에 관한 연구』 , 건축역사연 구, 10권, 3호, 2001). 그러나 이와 같은 믿음은 조선후기에 유행한 것 으로 보일뿐더러, 이러한 믿음이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는 건축도 많 지 않다. 또한, 조선후기에 꺼렸다고 하는 ‘工’자 형이 조선전기 건축 에서 비교적 흔하게 발견된다는 점에서도 문자 형태에 근거한 설명은 근거가 충분치 못하다.
    • “公諱增(중략)景泰癸酉中進士(중략)見永嘉山水明麗風淳俗古而可居也 遂卜于治之南門外家焉.”(『李增神道碑』)
    • “臨淸閣在安東府五里許江上我先祖知縣公所刱也知縣公諱洺左議政 容軒襄憲公之孫贈吏曹參判諱增之子也參判公自廣州來居于府之城東 與一鄕耆德十二人結友鄕稧四佳徐相國作長歌以美之此吾李落南之始 也參判公第二子留守浤棄開城歸作亭于府南瓦釜灘上曰歸來亭知縣 公棄義興歸作亭于府東法興寺西岸曰臨淸閣(중략)初以別業創建生居自 別提公始別提公諱肱知縣公之諸六子亦辭官終老于此於不肖十代祖 也.”(『虛舟遺稿』記『臨淸閣重修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고문서집 성 49: 안동 법흥 고성이씨편』, 2000, 840~846쪽, 『臨淸閣重修記事』)
    • “嘉靖十九年庚子六月十八日子息等亦中成文爲臥乎事叱段矣夫妻 邊奴婢乙…長子요(月+擢-扌)亦不意先我父子相繼身死長曾孫椿壽迷 少俾之主祭心甚惻然爲乎等乙用良奉祀條奴婢畓庫乙良長子家亦執 持使用耕食爲遣矣夫妻神主乙良末子肱家良中仍留(중략)生前祭祀設 行爲如可汝徒等身後椿壽長成爲□□福附爲齊.”(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앞의 책, 146~152쪽, 『李洺妻恭人文氏許與文記』)
    • “宗家段天兵留駐時失火乙仍于祀宇東邊小家乙充給爲旀.”(한국정신문 화연구원 편, 앞의 책, 220~243쪽, 『1618년 李遲男妹和會文記』)
    • “去辛未年分家翁身死獨子繼沒孑孑無依朝夕難保而本府居柳 仁甲稱名人亦承其困頓之日誣訴呈狀(중략)大槪家翁在時同生妹衿付 畓三十三卜九束庫放賣之際仁甲買得祖上傳來田畓孫外放賣殊甚惕 然同仁甲相議準給價還退成文爲有如乎家翁身死是旀家中失火財 産盡燒爲乎等以仁甲亦同還退明文亦爲火燒是可向入□□設計爲臥乎 所其爲凶詐莫此尤甚(중략)同仁甲自筆明文細細勘當敎是後明正闕罪.”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앞의 책, 54쪽, 『故李遲妻申氏白活』)
    • 주12)의 내용과 같음.
    • “始創年條當時文蹟皆失兵燹茫然無徵豈非子孫之大恨也(중략) 流傳所謂正德己卯創立恐不虛也年久頹落自曾王考府君之世已營重 修逮至不肖之身今上四十三年丁亥暮春卜日始事棟之朽者易而新 之瓦之漏者飜而蓋之堂室欄檻窓戶階砌隨毁修改首尾六閱月功告 訖東兩架爲堂西二架爲室室之南北各翼一架南翼爲夾室北翼爲夾 藏從便於日用稍變其制責以不改門牆之義不肖之罪誠大矣先時畵 壁宛然不見改痕意謂刱建後至今猶未重修始役後毁而見之梁端椽 木所未見處有古靑痕大樑上有白書丙寅四月肇畵云云其傍書七代 祖號蓋其時新經倭亂傳言天兵留住于此內舍失火消盡將蔓及此閣 唐將救之得免由是觀之壬辰後改構內舍時幷修此閣亦無怪矣”(『虛舟 遺稿』記『臨淸閣重修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앞의 책, 840~846 쪽 『臨淸閣重修記事』)
    • “丁未三月十八日破屋二十六日開基六月十一日未時立柱上樑 (중략) 搴瓦毁屋棟樑椽欀之屬沒數朽敗無一可用者屋宇久遠槪可知 矣(중략)審屋制度中設三間前後各懸退柱依樣九間而計之不過六間前 面三間各設四門之合十二片退柱因作廳事爲行事拜謁之地後退柱幷 作廟內設四龕於北壁中橫大樑二木揷於前柱之中間盖居中六柱直上爲 中樑之柱高可十二尺餘長可九尺廣則八尺有寸退八柱高可八尺長 可五尺有寸(중략)制度依前而撤去柱斗榱桷之屬稍損樑長(중략)戊申三 月十六日又始役先安抹樓次造龕室次懸左右風遮至五月立外門(중 략)古有廚廊三間在庭東頹落殊甚拘於材瓦未克修葺仍爲毁之.”(한국 정신문화연구원 편, 앞의 책, 847~852쪽, 『祠宇重修時日記』)
    • 사당은 기둥과 보와 같은 핵심 부재까지 모두 새것을 썼는데, 서 까래[榱桷] 제거를 명시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 ‘榱桷’는 부연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 안채와 사랑채는 주인의 거주공간이라는 점에서 살림채의 핵심 영역이고 또 가장 먼저 건축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공 간에서 확인되는 구조나 양식에 의거하여 임청각의 시대성을 도출할 수 있다. 또한, 아래채는 상단의 건물과 칸살이 일치하지 않을뿐더러 건축적으로도 시기가 다른 양식이 혼재되어 있어, 일원적인 계획에 따라 지었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안채와 사랑채만을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 본고에서 제시하는 수치와 기존 도면은 필자가 측정하여 ‘대략’ 이나 ‘가량’ 등으로 표현한 사례를 제외하면 모두 『안동 임청각 정침 군자정 실측조사보고서(도판)』(문화재청, 2001)에 의거한 것이다.
    • 이종서, 앞의 논문(2006) 참조
    • 군자정에 설치되어 있는 창호 중 영쌍창 하나에는 <그림3>에서 보듯 인방 형태의 세장한 부재가 문얼굴 상부에 노출되어 있다. 전 면 출입문도 문설주 측면에 세장한 수직의 부재가 노출되어 있다. 이들 부재는 창호의 안정성을 보강하기 위해 후대에 덧댄 것이다.
    • 김일진, 『한국건축의 영쌍창에 관한 연구 -향교·서원·사찰건축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88; 『조선시대 15세 기 주택의 영쌍창에 관한 연구』 , 대한건축학회논문집, 9권, 9호, 1993
    • 영쌍창은 17세기 건축에서도 흔히 발견되므로 ‘欞(중간설주)’의 존재에만 근거하여 임진왜란 이전의 양식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창호를 구성하는 부재 중 연귀맞춤 한 액자형태의 문얼굴만 외부에 드러나고 나머지 부재는 벽 속에 묻혀 드러나지 않는 양식은 조선전기 주택건축은 물론, 고려후기 사찰건축에서도 확인된다. 반면 에 임진왜란 이후로 편년되는 경상북도 지역의 건물에서는 이와 같 은 양식의 영쌍창을 확인하기 어렵다. 이 역시 군자정의 창호가 1519년 초창시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게 한다.
    • 방 전면에 설치된 창은 외면으로는 영쌍창이 아닌 것처럼 보이 나 상부와 하부에 설주를 설치했던 홈이 남아 있다.
    • 영쌍창은 행랑의 서쪽 칸 하층부에도 설치되어 있으나 이는 본 래의 위치가 아니다. 허청이었던 공간을 방으로 꾸미면서 이 위치로 옮겨온 것이다(본고 3장 2절 참조).
    • 사당의 창호는 1788년에 제작되었지만 이것과 양식이 일치하는 살림채의 창호는 더 이른 시기에 설치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유 형의 창호는 1628년에 완공된 상주 양진당이나 1634년 이전 건축으 로 추정되는 예천 남악종택 등 17세기의 주택에서도 흔하게 확인된 다. 따라서 1626년이나 1634년경에 화재로 인한 손상을 수리하면서 창호를 새로 설치했어도 이러한 유형의 창호가 설치될 수 있었다. 또한, 사당과 양식이 일치하는 사랑채의 창호는 본래 침실용 판방이 었던 공간을 온돌방으로 변경하면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본고 42쪽 <그림 15> 참조). 그런데 궁궐을 비롯한 상류주택에서 온돌이 17세기 전반에 일반화된 것을 고려하면(이종서, 2007 참조), 판방을 온돌방으로 개조한 시기 역시 17세기 전반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렇듯 화재로 인한 임청각 살림채의 수리 시점과 상류주택에 온돌이 보편화된 시기가 일치한다는 점에서 현재 남쪽사랑채 온돌방의 사당 형 창호는 제작시기가 17세기 전반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 필자는 임청각의 군자정과 사당형 창호를 주요한 지표로 삼아 원형의 유지나 조선후기의 구조변경 및 공간개조를 추론하지만, 오 로지 창호형태에만 의지하여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창호는 훼손되 기 쉽고 후대 양식의 적용도 수월한 만큼 가구를 유지한 채 창호만 교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임청각 살림채가 화재로 손상을 입은 것 이 문헌자료에서 확인되므로 사당형 창호가 있는 부분은 다른 부분 에 비해 화재로 인한 손상을 복구하면서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 판단할 수 있다.
    • <그림 8>에서 보듯 현재 중간 칸의 창은 액자형 문얼굴만 드러 나는 쌍창이면서도 중간설주가 없다. 이 문은 1970년대에 수리하면 서 새 부재로 다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래는 북쪽사랑 채의 전면 창처럼 후대에 설주를 제거했는데 1970년대에 새로 제작 하면서 설주를 설치했던 홈이 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 문화재청, 『한국의 전통가옥: 법흥동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 2008 참조
    • 대청 상부 가구가 본래부터 지금과 같은 비대칭구조였을 가능성 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대청부분을 반칠량가로 구조한 것은 사 례를 찾기 극히 어렵다는 점에서 필자는 초창 이후의 변형으로 추정 한다. 또한, 대청 후벽의 영쌍창은 군자정과 같은 액자형 창호인데 창호 상부에 별도의 인방을 설치하였고, 영쌍창 하부부재와 마루 사 이의 공간도 토벽이 아닌 목재로 채워 넣었다. 이 역시 후대에 변형 된 것으로 판단된다.
    • 조선시대 임청각의 역사에서 1630년대는 가장 어려웠던 시기였다. 1631년에 이지가 사망한 2년 뒤 이지의 독자 이종배가 불과 31세의 나이 로 연이어 사망하였다. 이에 이지의 미망인 신씨가 세 살이었던 손자 이 분(1631~1685)을 며느리와 함께 양육하며 임청각을 지켰다. 그런데 2장 에서 확인했듯 이지가 사망한 1631년 이후 미망인 신씨가 류인갑에게 대 항하여 고소장을 제출한 1634년 이전에 또 한 번의 화재를 당하였다. 고 소장의 내용으로부터 화재는 매매문기 등 소중한 재산이 비치된 내실에 서 발생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서쪽 벽면의 기형적인 구조는 이 때의 화재로 인한 손상을 수리하면서 발생했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임청각은 법식에 맞는 대규모의 수리를 감당할 여건이 되지 못했기에 이와 같이 편법적인 방법으로 수리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 이종서, 2006·2007 앞의 논문 참조.

    Reference

    1. 이 종서 (2007) 「고려∼조선전기 상류 주택의 방한 설비와 취사 도구」 , 역사민속학,
    2. 이 종서 (2006) 「조선전기의 주거용 층루 건축 전통」 , 역사민속학,
    3. 장백기·조성기 (2001) 「안동 임청각의 문자형태에 나타난 의 미와 택법에 관한 연구」 , 건축역사연구, Vol.10 (3)
    4. 오 지현 (2001) 「안동 임청각의 공간구성에 관한 연구」, 서울대 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오지현·김진균 (2000) 「안동 임청각의 공간구성에 관한 연구」 , 대한건축학회 학술발 표대회 논문집(계획계), Vol.20 (2)
    5. 김종헌·주남철 (1996) 「한국 전통주거에 있어서 안채와 사랑채의 분화과정에 대한 연구」 , 대한건축학회논문집, Vol.12 (2)
    6. 김 일진 (1988) 「한국건축의 영쌍창에 관한 연구 -향교·서원·사 찰건축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3) 「조선시대 15세기 주택의 영쌍창에 관한 연구」 , 대한건축학회논문집, Vol.9 (9)
    7.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2000) 『고문서집성 49: 안동 법흥 고성 이씨편』,
    8. 문화재청 (2008) 『한국의 전통가옥: 법흥동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
    9. 문화재청 (2001) 『안동 임청각 정침 군자정 실측조사보고서 (본문)』,
    10. 문화재청 (2001) 『안동 임청각 정침 군자정 실측조사보고서 (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