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론
이탈리아 건축역사학자 만프레도 타푸리(Manfredo Tafuri, 1935~94)가 건축사 서술과 비평에 끼친 영향은 크다. 특히 건축사를 걸작과 거장의 연대기가 아니라, 제 도와 기관, 사회와 자본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려고 할 때, 타계한지 20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향으 로부터 자유롭기란 거의 불가능하다.1) 그럼에도 불구하 고 악명 높은 난해함과 이탈리아어-영어 번역의 문제 등 으로 타푸리의 저술은 폭넓게 분석되고 논의되지 못했 다.2) 영어 번역에 거의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했던 한국 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타푸리의 이데올로기 비판은 국내에서 80년대부터 회자되어 왔으나,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의 근거나 입장을 취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말았다. 타푸리에 대한 역사적이고 비판적인 접근은 찾아보기 어 려웠다. 이런 단편적인 이해는 르네상스 연구에 매진한 후기 타푸리를 과거로 후퇴했다는 또 다른 단순한 평가 를 낳았다. 타푸리의 지적 유산에 대한 포괄적인 접근은 비교적 최근에야 시도되었다.3) 그러나 이 시도 역시 기 존의 관성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거듭된 독해를 통해 지 속적으로 이해의 깊이를 더해오지 못한 채, 때때로 호출 되어 유령처럼 출몰했다. 반면 해외에서는 타푸리의 지 적 여정에 초점을 맞춘 모노그래프가 속속 출간되어 타 푸리의 저술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제공해주었다.4) 한편 건축 분야 바깥에서 이루어진 연구 성과도 타푸리가 처 한 상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1960년대 이탈 리아 아우토노미아 운동에 대한 관련 저술은 타푸리의 초기 저술을 이해할 수 있는 문맥을 제공해준다.
본 논문은 이런 선행 연구를 바탕으로 1960년대 타 푸리의 이데올로기 비판이 주조된 역사적 배경을 추적 한다. 역사적 문맥에서 타푸리 입장을 이해함으로써 타푸리의 역사관을 역사화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타 푸리를 특정한 틀에 가두지 않고 파악할 수 있다. 또 본 논문은 타푸리의 이데올로기 비판이 수용되던 한국 의 상황을 살핀다. 제한적인 사료와 빈약한 해석학적 깊이에도 불구하고 해외 이론의 수용 과정을 살피는 일은 당시 한국 건축계의 관심이 어디에 있었는지 확 인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2반(反)계획과 이데올로기 비판
2-1국가의 계획과 건축의 이데올로기
우리는 이탈리아에서 잡지 시대라 부를 만한 것을 경험 했어요. 소련공산당 20차 대회와 1956년 헝가리 봉기 이후 극좌파 진영에서 시작되었습니다.5)
50년대 말부터 이탈리아에서 창간과 폐간을 거듭하며 쏟아져 나온 잡지에 타푸리가 처음 등장한 때는 1969년 이다. 타푸리는 알베르토 아소르 로사, 마시모 카치아리, 안토니오 네그리가 공동 편집인으로 창간한 『콘트로피아 노』(Contropiano, 1969년 1호)6)에 저 유명한 『건축 이 데올로기 비판을 향하여』 를 기고하며, 본격적인 저술활 동을 시작한다.7) 이 글에서 타푸리는 19세기 중엽에서 2 차 세계대전까지를 세 국면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마르 크스주의자에게 시기 구분은 자본주의의 전환점을 어디 에 두는가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타푸리에 따르면, 첫째 는 낭만주의 신화를 도시 이데올로기로 극복하는 단계다. 두 번째는 이데올로기를 투사하고 충족되지 않는 욕구를 부각시킨 아방가르드가 부흥한 시기다. 세 번째는 건축의 이데올로기가 계획의 이데올로기로 바뀌는 시기로 1929 년 대공황 이후의 국면이자, 자본이 국제적으로 재편되고 러시아의 첫 5개년 계획(1928~32)이 시행되던 때다.8) 20세기 초의 급변기를 구분할 때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7년과 대공황과 파시즘이 도래한 1920년대 말~1930 년대 초를 중요한 분기점으로 삼는 일, 즉 역사적 아방가 르드와 바이마르 공화국이 존재한 시기 전후를 나누는 것은 그다지 낯설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는 예술사 의 양식적 변화나 파시즘의 도래로 많은 건축가와 예술 가가 유럽을 떠나게 되는 사건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세 번째 단계, 건축이 계획(plan)에게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내준 1929년에 주목하는 타푸리는, 1929년을 근대 국가의 변모 과정에서 근본적인 계기로 여기는 안토니오 네그리를 거의 전적으로 따르고 있다. 실제로 네그리는 케인즈 그리고 1929년 이후의 자본주의적 국가이론 이라는 글을 타푸리의 에세이보다 1년 먼저인 『콘트로 피아노『(1968년 1호)에 기고했다.9) 잡지 발행이 곧 운 동이었던 시대, 네그리와 타푸리, 그리고 카치아리 등 은 『콘트로피아노』를 통해 비슷한 목소리(동시에 갈등 의 씨앗을 내포한)를 한데 모으고 있었다.
타푸리는 『건축과 유토피아』의 영문판 서문에서 『건 축 이데올로기 비판을 향하여』 가 실린 잡지의 문맥을 언급한다.
이 에세이(그리고 동일한 노선에 따라 동료들과 내가 쓴 다른 에세이)가 실린 잡지는 잡지의 정치적 역사와 관심과 사유의 특정한 노선에 의해 매우 명쾌하게 정의 된다. 그래서 애매모호한 해석을 애초에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잡지의 이론적 문맥에서 다루었 던 건축 문제를 따로 떼내면 내 에세이는 묵시론적 예 언으로 여길 수 있다. 말하자면 “포기의 표현”이자 “건 축의 죽음”에 대한 궁극적인 선언이었다.10)
잡지가 표명한 동일한 노선과 전략에 따라 글을 썼다 는 것을 분명히 하는 동시에, 그 문맥을 벗어나도 글이 독자적인 생명력이 있음을 밝히고 있는 셈이다.
네그리는 『케인즈 그리고 1929년 이후의 자본주의적 국가이론』 에서 1848년, 1871년, 1917년 그리고 1929년 으로 시기를 나누는 것이 현대국가의 이론화에 유일하 게 적합한 틀을 제공한다고 말한다.11) 1848년에서 1929 년을 하나의 시대 단위로 생각하는 네그리의 테제는 여러 글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타푸리가 조르 조 추치, 프란체스코 달 코, 마리오 마니에리-엘리아와 함께 1969~70년에 수행한 연구를 펴낸 『미국의 도시: 남북전쟁에서 뉴딜까지』(1973)의 시간 구분도 그 대표 적인 예다. 미국의 문맥에서 유럽의 1848년에 해당하는 것을 남북전쟁으로 여긴다면 이 연구가 다루는 시기는 네그리의 시기와 그대로 일치한다.12)
1848년은 최초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라 할 수 있 는 6월 혁명이, 1871년은 파리코뮌이, 1917년은 성공한 최초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인 러시아혁명이, 1929년은 대공황이 발발한 해이다. 노동자 계급의 자율성을 도모 하고자 하는 네그리가 노동자와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 의 목소리를 뚜렷이 한 앞의 세 사건과 분기점을 강조 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인다. 반면 1929년 대공 황은 자본주의의 모순이 폭발한 중요한 분수령이었음에 틀림없지만, 노동자 계급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사건은 아니다. 오히려 국가권력이 노동계급을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대하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네그리에 따르면 1917년 러시아혁명은 노동계급이 완전히 독립적으로 자 신을 표현한 것이었다. 노동계급을 온전히 통제해야 하 는 국가의 입장에서는 이 불안요소야말로 위협이자 해 결해야 할 최우선 과제였다. 1929년이 결정적인 까닭은,
국가계획의 동역학은 일종들일 수밖에 없는 체제의 필연적 특징으로 제시한, 체제 내부의 제거불가능한 적대한 인식이었다.13)
노동계급의 존재를 인정하되 부정적인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고 체제 내부의 동력으로 받아들이는 것, 체제의 위협을 역설적으로 발전의 요소로 바꾸어 낼 묘책을 발견한 이가 바로 케인즈였다. 자유방임의 시대가 끝나고 국가가 계획의 주체로 등장한다.14) 이 제 국가는 “계획자로서의 국가”, 더 정확히는 “계획의 국가”가 되었다. 단적으로,
국가계획의 동역학은 일종의 ‘영구혁명’을 자신의 목표 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영구혁명을 자본의 입장에서 역설적으로 지양(Aufhebung)하는 것이다.15)
자본주의-국가체제가 존재하는 한 노동계급은 끊임없 는 부정성을 유지하면서 영구적으로 혁명을 추구해야 한 다는 트로츠키의 입장이 무색하게, 영구혁명은 이제 국 가의 목표가 되었다. 이 공식이야말로 경제 전반에 걸쳐 개입하는 현대 국가의 핵심이라는 것이 네그리의 설명이 다. 계획하는 국가의 임무는 미래를 불확실한 것으로 내 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통제하고 조작할 수 있는 것으로 조직하는 일이다. 이는 뉴딜뿐만 아니라, 소련의 경제개 발계획, 나아가 한국의 경제개발계획도 마찬가지이다.16) 그래서 케인즈의 제1명령은 미래에 대한 공포를 제거하 는 것이다. 미래는 현재로서 고정되어야 한다.
국가는 미래로부터 현재를 방어해야 한다. 만약 이러한 일을 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 현재 내부로부터 미래를 기획하고 현재의 기대에 따라 미래를 계획하는 것이라 면, 국가는 개입을 확대하여 계획자의 역할까지 맡아야 하며, 그 결과 경제는 사법적인 것 속으로 병합된다.17)
타푸리의 『건축과 유토피아』 3장 『이데올로기와 유토 피아』 는 네그리의 이 테제에 대한 응답이다. 공교롭게도 이 챕터는 『건축과 유토피아』의 근간이 된 『건축 이데올 로기 비판을 향하여』 에는 빠져 있는 글로, 초고는 『콘트 로피아노』 1970년 2호에 수록된 『지적 노동과 자본주의 발전』 (Lavoro intellettuale e sviluppo capitalistico)이 다.18) 타푸리가 네그리의 글을 읽고 건축과 도시의 관점 에서 분석한 글을 추가해 넣은 것으로 여겨도 좋다.
노동자 계급이 국가의 계획에 복속되지 않고 자율성 (autonomia)을 견지해야 한다는 것은 네그리를 비롯한 당시 아우토노미아 운동을 이끈 이들의 기본 입장이었다. 이런 계급적 이해 이전에 타푸리는 베네치아에 자리잡기 전 로마 시절에 시도했던 여러 활동을 통해 국가의 계획 앞에 건축의 한계를 경험한 바 있다. 1960년대 초반 타푸 리는 ‘로마 도시계획가 건축가 연합’(Architetti e urbanisti associati di Roma)과 ‘건축가학생협회’(Associazione studenti e architetti) 같은 활동을 통해 전후 이탈리아 경제가 급 속히 발전하는 것과 보조를 맞춘 경제개발계획(piano regolatore generale, PRG)이 야기하는 문제와 씨름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데올로기 비판이 이론적으로 정교 하게 정립되기 전에 이미 공공 프로젝트를 뒷받침하는 자본주의 체계에 건축이 반격을 가하는 것은 무기력함을 절감한 것이다.19)
2-2부정성의 변증법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는 타푸리의 지적 배경으로 흔히 지목되는 벤야민과 아도르노 같은 프랑크푸르트 학 파와는 정치적, 사상적 입장이 상당히 다른 짐멜, 베버, 케인즈, 슘페터, 만하임 등이 주요 참고문헌으로 등장하 는 것으로도 눈길을 끈다. 이 글은 미래를 그려 보이는 것이 본령인 유토피아가 미래에 대한 완전한 지배를 추 구하는 것으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진단으로 시작한다. 이제 미래는 이데올로기를 투사하거나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을 실험해볼 수 있는 곳으로 비어 있지 않 다. 국가가 계획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조작하고 장악해 야 할 대상으로 전락했다. 자본주의가 건축에서 빼앗아 간 이데올로기가 바로 이것이다. 타푸리는 케인즈에 관 한 네그리의 분석을 거의 그대로 수용한다.
베버와 케인즈, 슘페터 그리고 만하임에게, 관건은 긍정 적인 기능과 부정적 기능(자본과 노동의 노동계급적 측 면)을 하나로 만들고, 이 두 개념을 뗄 수 없게 하고, 이들을 상보적인 관계로 만들 수단이었다. 그들 모두 핵심 주제는 현재가 투사되는 미래, 미래의 “합리적 지 배”, 이에 수반되는 “위험”의 제거였다.20)
전통적인 미적 규범과 제도를 위반하는 아방가르드(체 제의 입장에서는 부정성) 역시 위의 구도에 따르면(계획 과 개발의 변증법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종류의 긍정성 일 따름이다. 아방가르드의 위반은 부정적인 것을 받아 들일 수 있게 만드는 예방주사와 같은 것이다. 격심한 “고통의 원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임으로써 그 고통을 없 애버리는 것이 부르주아 예술의 주된 윤리적 요구”라는 『건축과 유토피아』의 유명한 첫 문장도 바로 이런 의미 에서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부정적인 것은 무제 한적인 개발의 한 요소가 됨으로써 체제에 흡수되고 체 제가 한 단계 더 앞으로 나아가는 데 필연적인 요소로 탈바꿈한다. 결국 이는 역사의 변증법적 운동의 주체를 누구로 설정하느냐에 달린 문제다. 속류 마르크스주의는 역사가 종국에 이르러 공산주의로 귀결될 것이기에 자본 주의를 역사의 필연적인 단계로 설정할 수 있었다. 때문 에 봉건단계에서 자본주의 단계로 빨리 이행해야 한다고 믿었다. 미래가 국가의 것이라고 여길 때 상황은 완전히 반대다. 노동계급의 자율성을 꾀하고자 한 당시 이탈리 아의 여러 사회-노동 운동 분파들의 입장도 이 상황을 어떻게 여기는지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뉜다. 예컨대, 노 동자주의운동(operaismo)의 핵심 논자이자 이탈리아 공 산당원이며 『콘트라피아노』의 주요 필진이었던 트론티는 노동계급의 노동 없이는 자본이 작동할 수 없으므로 비 판과 저항의 거점에 대해 낙관적이었다.21) 심지어 관료 적인 이탈리아 공산당이 그 거점이 될 수 있다고 믿었 다. 이에 반해 네그리는 기존 제도를 통한 전술은 개혁 주의적일 뿐이며,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빼고는 어떤 동 맹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가 추구한 것은 노동 계급이 자본의 (변증법의 구도에서 통합되어 지양되고 마는) 모순이 아닌 적대가 되는 것이었다.22)
다른 한편으로 이는 예술(나아가 건축)이 사회와 어 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하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공장에서 사회전반으로 자본주의가 확대될 때 진보적 인 입장을 견지하려는 아방가르드 예술은 무엇을 해야 할까? 한 가지 방법은 일종의 리얼리즘적 전략이다. 산업현장과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을 문학이 어떻게 품 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다. 이탈로 칼비노와 잡지 『일 메나보』(Il Menabò, 1959~1967)를 함께 펴내던 작가 엘리오 비토리오는 리얼리즘적 전략을 대변했다. 당시 이탈리아를 휩쓸었던 네오리얼리즘의 여파이기도 했다. 이에 시인이자 비평가였던 프랑코 포르티니는 격렬히 반대했다. 같은 잡지 5호에 실은 『비둘기처럼 영리하게』 (Astuti come Colombe)에서 포르티니는 비 평가는 자본주의 발달이 어떻게 이데올로기의 원천이 되는지를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배 계급의 권력을 재현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되며 진보적 지식인조차 현 실에 만족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를 파헤쳐야 한다는 것 이다. 말하자면 객관적인 현상을 다루려는 시도, 모든 개 혁적인 시도를 거부하고 블로흐나 아도르노식의 부정성 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포르티니의 입장이었다.23) 타 푸리가 전자가 아니라 후자의 입장을 견지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실제로 타푸리는 자신이 60년대 이탈리아의 논쟁에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당시 참조했던 주요 인물 로 포르티니를 언급한다.24)
허무주의나 염세주의로 비칠 수도 있는 타푸리의 이데 올로기 비판은 총체적인 탈주술화의 결과다. 부정성을 유 지해야 하지만 이 부정성마저 자본과 국가의 변증법적 운 동에 포섭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비평가 또는 역사가 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타푸리는 과연 이데올로기 의 격전장에서 패퇴하고 르네상스로 도피했던 것일까?
3타푸리와 80년대 한국
3-1마르크스주의자로 발견된 타푸리
비록 자의적 수임이었지만 나는 어떤 거대한 중심이자 전략단위로부터 비평의 무기를 수임받았다는 의식 속에 서 글을 써왔다. 논쟁을 할 때도 설득을 할 때도 내겐 언제라도 돌아가 내 입장을 조회받고 유권해석을 받아 올 어떤 중심이 있었다.25)
80년대 중반 민족문학-민중문학 논쟁을 촉발한 한 비 평가는 그 당시를 회고하며 위와 같이 말했다. 물론 ‘거 대한 중심이자 전략 단위는 마르크스주의이다. 여전한 냉전구도에 군사 정권의 폭력과 학원 탄압이 이어지던 80년대에 지식인과 대학생들에게 마르크스주의는 거의 유일한 ‘과학’이었다. 이 큰 우산은 확고한 비평적 입장 을 제공해 주었지만, 세계를 이해하는 다른 시선을 가리 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실제로 1980년대 내내 한국의 지식-담론계는 세계를 휩쓴 ‘프랑스 이론’의 무풍지대였 다. 문학 비평의 거두이자 프랑스 지성계에 눈이 밝았던 김현조차 미셸 푸코를 단지 문학 비평가로 이해할 정도 였다. 이런 사정에 비하면 건축계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 다. 국가와 체제 바깥에(적어도 그들의 인식과 목표에 따 르면) 저항의 진지를 마련하려고 했던 문학이나 미술과 달랐다. 건축은 여전히 국가-자본주의에 얽매여 있었다. 1960년대 이래 산발적이면서 지속적으로 등장한 전통 논 쟁은 결국 대형 국가 프로젝트가 무엇을 표상해야 하는 지를 둘러싼 논박이었다. 한편에서는 강남 개발의 여파 로 생겨난 프로그램인 근생을 중심으로 상업 건축물이 속속 들어서고 있던 시절이었다. 이 시절 건축계는 포스 트모더니즘과 씨름하고 있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적극적 으로 옹호한 이는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80년대 내내 건축계는 전통-재현-상업-파편 등의 키워드로 이어지는 포스트모더니즘론의 수용과 해석을 두고 갑론을박했다. 인문사회학계와 건축계는 서로 어긋나 있었다. 한국에서 만프레도 타푸리는 인문사회와 건축의 간극, 마르크스주 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간극 사이에 위치한다.
타푸리가 국내에 처음 소개된 대략적인 시점은 80년대 초 이다. 피에르 루이지 네르비(Pier Luigi Nervi)가 편집하고 이탈리아 엘렉타에서 펴낸 총 14권의 『세계건축사『(History of World Architecture)의 영문판이 국내에 영인본으로 출 판된 때가 1981년이다. 이 시리즈 중 하나로 프란세스코 달 코가 함께 쓴 『근대 건축』(Modern Architecture)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타푸리의 저서이다. 다만 이때는 마르크스 주의 역사가이자 비평가 타푸리로 독해되지 않았다. 원 시시대 건축에서부터 콜럼부스 이전의 남미 건축, 아시 아 건축까지 아우르는 야심찬 프로젝트에서 근대 건축편 을 집필한 한 명의 역사가였지 한국 건축의 현실을 비판 을 위한 이념적 지원군은 아니었다. 타푸리는 마르크스 주의 비평가로 재발견되어야 했다. 이상헌과 함인선은 1981년 여름 학교도서관에서 우연히 『건축과 유토피아』 (Architecture and Utopia, 1976)를 발견했다고 진술한 다.26) 78학번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이 폭압적으로 진압되 고 서울의 봄이 좌절되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이 들은 이데올로기 비판의 근거로서 타푸리를 수용한다. 이들이 타푸리를 읽어나간 배경은 루카치나 브레히트, 아 도르노 같은 문예비평가나 비판이론가들이었다.27) 이들의 독해도 이론적이고 학문적인 관심이라기보다는 1970년대 중반 이후 본격화된 문화운동의 문맥이었다. 비슷한 시기 타푸리를 적극적으로 독해한 다른 경로도 있었다. 『건축 과 유토피아』(태림문화사, 1988)를 번역하기도 한 김원갑 은 러시아구성주의에 대한 관심으로 타푸리를 읽게 되었 다고 술회한다. 70년대 말 일본 잡지를 통해 접한 체르 니코프에 관한 문헌들을 뒤좇다 타푸리를 발견하게 되었 다고 전한다.28)
이들 중 가장 적극적으로 타푸리를 국내에 소개한 이 는 이상헌이다. 그는 1984년 7월 『공간』에 『만프레도 타 푸리의 건축론』 을 기고한 이래 여러 지면을 통해 타푸리 의 기본적인 입장을 소개하는 글을 썼다.29) 그는 타푸리 를 마르크스주의 비평의 틀 안에서 이해하며, 이 비평의 “선도적인 역할”은 “그것[건축]의 사회적 역할이란 무엇 인가라는 근본적 의문제기로부터 출발하여 건축을 정치, 경제, 문화와의 관계 속에서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라고 정식화한다. 마르크스주의 예술론의 일반적인 입장 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계급 건축은 가 능하지 않으며 계급 비평만이 가능하다는 타푸리의 유명 한 테제를 인용하며, 이상헌은 타푸리를 통해 마르크스 주의의 선명성을 재확인한다. “건축을 이같이 제도로 파 악하게 된 타푸리의 전환은 건축적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구체화시키면서 모든 개량적 마르크시즘과 결별한 채, 계급투쟁이라는 마르크스 독트린으로의 회귀를 가능케 해주었다.” 그러나 계급 건축이 불가능하다는 타푸리의 입장은 80년대 중반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쉽게 이해하기 도 해명하기도 힘든 지점이었다. 타푸리의 발견 자체가 마르크스주의 건축 이론에 대한 갈급함에서 이루어졌기 에, 독해 역시 그 방향으로 정향될 수밖에 없었다. 계몽 주의 이래의 현대 건축을 이데올로기로 파악함으로써 타 푸리는 한국 현실을 새롭게 조망할 안경을 제공했으나, 계급 건축의 가능성을 여지없이 닫아버리는 타푸리의 입 장은 건축을 통한 ‘운동’이 절실했던 이들에게 해결해야 할 딜레마였다. 위의 글에서 국한해서 말하자면, 이상헌 은 계급투쟁의 독려로 절충했던 셈이다. 당시 국내 문화 계의 거의 모든 이론적, 실천적 관심은 ‘운동’을 중심으 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로 공유할 수 없는 입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는 운동을 하 고 있었다. “한 사회가 요구하는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람들의 집단적이고 지속적이며 계획적인 움직임”을 꾀 한다는 생각에는 큰 이견이 없었다.30)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었기에, 문화운동은 프로파간다와 대항 이데 올로기의 역할을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로 생각했다. 결 국 관건은 타푸리에 읽어낸 건축의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당시 운동에 효용이 있는지 여부였다.
3-2이데올로기 비평의 딜레마
부정성의 역사가에게서 운동의 도구를 찾아야 하는 이 과제는 이후 타푸리를 읽는 8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의 운 동가들에게 그대로 이어진다.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던 타 푸리 독해가 진영을 갖추기 시작한 때는 1987년 이후다. 1987년 민주화운동의 결실로 얻어낸 대통령직선제의 결 과가 다시 군사정권으로 이어지자, 각 분야별로 민주화 운동이 확산되는 시기였다. 건축 분야에서 일어난 대표 적인 움직임은 청년건축협의회(이하 청건협)이다.31) 청건 협의 기관지인 『청년건축』 1호에 전재된 『한국도시문제 의 재인식』 은 도시와 공간을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비판한 최초의 문헌 중 하나다.32) 제3세계의 자본주의 발전 양식, 환경 문제, 도시화와 주택보급률 등 여러 이슈를 제기하는 이 글은 도시와 건축을 지배계급 의 이데올로기로 단언한다. 도시의 정치경제적, 통계를 동원한 정량적 분석과 건축물의 표상과 건축가의 역할 같은 정성적 내용을 매개하는 지점에서 타푸리가 언급된 다. 이들에 따르면, 도시와 건축의 공공성마저 도시발전 의 모순을 은폐하는 더 세련된 이데올로기이고, 속속 들 어선 문화공간 역시 도시 민중의 문화적 욕구와 힘이 자 발적으로 우러나와 형성된 것이 아니다.33) 타푸리는 이 글에서도 자본주의 사회의 도시와 건축의 이데올로기를 폭로한 비평가로 등장한다.
여기서 독해의 관건은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이해하느 냐였다. 무엇이 한국사회 모순의 최종심급인지를 두고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볼 수 있듯 변혁 운동의 흐름에는 그 갈래를 일일이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이론적 입장이 존재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해는 평면적이었다. “이데올로 기는 허위의식이라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이데올로기 논의만 절대적 진리나 상식처럼 이해되고 있을 뿐”,34) 만하임, 바버, 뒤르켐 등의 이데올로기 논의에 대한 이해 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말하자면, 『건축과 유토피아』에 등장하는 베버를, 어떤 미망에도 빠지지 않고 총체적인 탈주술화를 통해 현실을 냉혹하리만치 있는 그대로 직시 하려 하는 비평가를, 그래서 자본주의적 현실을 부정하 지 않는 역사가를 읽지 못했던 것이다.
1987년이 열어젖힌 담론장은 출판의 폭발적인 증가로 이어졌다.35) 타푸리의 『건축과 유토피아』도 복수의 번역 물이 출판되었다. 1987년 세진사는 정영철의 번역으로, 1988년에는 태림문화사(신석균 외 번역)와 기문당(김원 갑 번역)에서도 각각 번역판을 출간했다. 당시 국내에서 건축서적을 활발히 펴내던 모든 곳에서 타푸리의 주저를 출간한 것이다. 번역서에 저작권법이 적용되지 않았기에 복수의 출판물이 나올 수는 있었지만, 중복 출판을 삼가 는 것은 출판계의 일종의 불문율이었음을 감안하면 『건 축과 유토피아『의 대중적 소구력을 짐작할 수 있다.36)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푸리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번역을 넘어선 저술 등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80년대 말 90년대 초 건축계에서 가장 학술적인 움직 임은 건축운동연구회(이하 건운연)였다. 서울의 주요 대 학 건축학과의 대학원생이 중심이 된 건운연은 스스로를 “진보적 건축운동이론을 견지하며 각 부문으로 분산되어 있는 건축운동의 각 역량을 진정한 부문들의 협의체적 조직으로 발전시킬 전망을 공유하는 건축운동 종사자들 의 모임”으로 규정했다.37) 청건협이 제도 개선과 실제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활동한 실무 단체였다면, 건운연은 이론적, 학술적 단체였다. 제도권 내에서 이루어진 건축 역사 수업에 갈증을 느낀 이들이 4년 동안 주력한 것도 건축사 연구였다.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컸던 시기였 던 만큼, 러시아혁명과 구성주의를 비롯한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민중적 시각에서 한국 건축사를 서술하는 일 등에 관심을 기울였다. 매주 이루 어진 이들의 세미나와 연구활동에서 레퍼런스로 선택한 건축사가는 타푸리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운동을 지원 해줄 역사가가 필요했다. 빌 리제베로가 그들이 선택한 ‘대안적 역사’가였다.38)
전문가들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진실로 관여하 고자 한다면, …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데에 ‘객관적으 로 관여하는’ 대중 계급 조직’의 일원이 되어야 하며,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과 가능성을 ‘주관적으로 인식해 야’”만 할 것이다.39)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운동으로서의 건축을 분명하게 내비치는 리제베로의 글은 80년대 내내 서양문화와 예 술사의 기본 텍스트 역할을 한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 과 예술의 사회사』의 건축편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미 래를 구체적으로 그리고 현재의 목적에 봉사하기 위해 과거의 역사를 동원하는 일을 역사가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고 주장한 타푸리가 아니라, “미래를 창조하 기 위해 부르주아 체제가 일구어 놓은 비속하고 위험 한 사상들이 아니라 바로 그 진정한 전통”을 공부해야 한다고 말하는 리제베로가 여전히 운동이 절박했던 한 국 사회에 더 호소력을 발휘한 것이다.
타푸리의 역사론을 소개하거나 글의 일부분을 번역 해 기고하는 것이 아니라, 타푸리의 시각으로 한국의 건축을 분석한 글은 정작 마르크스적 문맥과 무관한 곳에서 등장했다. 운동의 동력이 소진되어 가던 1992 년 12월에 개최된 4.3그룹 전시회 도록에서 김광현은 타푸리의 『규방의 건축』 을 원용한 『규방閨房의 건축建 築을 벗어나기 위해서』 를 발표한다.40) 형식주의적 분 석과 현상학적 접근을 해온 김광현이 타푸리적 스펙트 럼으로 4.3그룹을 읽은 일은 징후적이다. 현실 참여적 인 건축 운동이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건축 담론의 분위기가 현상학과 비움, 침묵과 같은 개념어 중심으로 재편되려고 하던 길목에서 네오 아방가르드 의 무용함을 알리는 타푸리의 진단이 동원되었기 때문 이다. 역설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패배가 현실에서 돌 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을 때, 건축이 내면으로 침잠 해 들어가려고 할 때 오히려 타푸리가 호소력을 발휘 했다.41) 90년대 이후 한국 건축의 담론에서 마르크스 주의는 거의 완전히 사라진다. 타푸리 역시 역사서술 론에 대한 관심을 제외하면 한국 건축계에 등장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42) 적어도 국내에서 타푸리에 대한 관심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요구와 추구의 부침과 함 께 했다. 이 배경이 타푸리를 강하게 필요로 한 만큼 이나 타푸리를 좁게 이해하게 하는 구속력으로 작용하 기도 했다.
4결론
타푸리의 이데올로기 비판은 1960년대 이탈리아의 노 동자 운동과 이 운동을 둘러싼 여러 갈래의 지적 교류 속에서 배태되었다. 아방가르드의 부침, 아우토노미아 운 동의 성쇠,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유산, 니체에서 베버로 이어지는 총체적 탈주술화에 따른 니힐리즘, 국가 주도 경제의 본격화, 공산당의 관료화 등이 타푸리의 지적, 정 치적 배경이다. 모든 베일이 걷히고 난 뒤, 남은 것은 현 실의 메커니즘을 탐구하고 이해하고 재현하는 일이다. 타푸리의 동료였던 아소르 로사는 이데올로기 비판을 온 전히 끝냈기에 ‘자료의 확실성(certainty of datum)’을 추구할 수 있었다고 지적하며, 타푸리의 르네상스사 연 구가 결코 단절이나 후퇴가 아니라고 말한다. “총체적 탈주술화는 위대한 역사가를 낳는다. 타푸리가 이런 종 류의 위대한 역사가”라는 것이다.43)
한국의 타푸리 독해는 1980년대 학생운동의 에너지와 떼어서 파악할 수 없다. 비록 해석학적 깊이를 논하기 힘들 정도로 얕은 이해였고 수용사라 일컬을 수 없을 만 큼 파편적 독해이긴 하지만, 마르크스주의가 사유의 중 심이던 시절 ‘타푸리’는 강력한 기표였다. 그러나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를 굴리는 데 동참하고 있다는 의식은 다른 무엇보다 운동에 필요한 동력을 필요로 했다. 타푸 리는 한국의 건축과 도시의 이데올로기를 폭로하는 데 유용했지만, 이를 위해서 타푸리의 미로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 이유는 없었다. 당시 유행하던 종속이론과 같은 사회과학 담론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민중의 궁극적 승리에 대한 믿음”이 당연하게 요구되었던 1980년대 말 부정성 자체는 추구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니었다.44) 이탈 리아 노동자 운동과 한국의 학생운동은 모두 도시와 건 축, 나아가 세상을 바라볼 새로운 틀을 요구했다. 전자가 탈정치적 정치이론을 낳았다면 후자는 정치적 주체가 되 고자 했다. 이 교차와 어긋남, 이론과 실천의 서로 다른 요구 사이 어딘가에서 타푸리는 호출되고 또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