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 론
철도는 산업혁명의 산물이자, 근대화를 이끄는 원동력 이었다. 철도운행에 따른 시간의 단축, 도시와 도시, 더 나아가 국가와 국가 간의 공간적 연계는 철도 중심으로 문화권이 재편성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열강국가들은 아시아에 식민지, 조계지를 개척하는 데 있어 우선 항구 에 기지를 선점하고, 그 후에 항구에서 내륙까지 철도를 연결하였다. 철도는 식민지 내륙개척의 도구로 사용되어 경제수탈을 통해 열강이 식민지를 확장하는 원동력이 되 었다. 그러므로 열강 본국에 지어진 철도와는 달리 아시 아에 지어진 철도는 철도를 기반으로 도시의 근대화를 촉진하는 성격뿐만 아니라 식민지 침략과 수탈의 양면성 을 가지고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을 둘러싼 열강들의 철도부설 권 다툼은 청일전쟁 패배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 다. 이렇게 부설된 철도선은 열강 간의 영역 표시의 수 단이자, 물자침탈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당시 중동철도 (영문: Chinese Eastern Railway, CER) 및 남지선(南支 線)은 중국 동북에 대한 러시아의 세력권을 나타냈다. 게 다가, 1896년 아관파천 이후 한국에서의 위상이 높아진 러시아는 중동철도와 경의철도의 연결을 통해 한국으로 까지 세력권을 넓히려고 하였다. 하지만, 러일전쟁 이후, 일본에 의해 남만주철도와 한국철도와 연계되면서 초국 가적인 철도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철도네트워크 형성으로 성곽도시였던 심양은 만철본선1)의 핵심 교통요 충지가 되었다.
본 연구는 중국 동북부의 철도요충도시 중 심양의 근 대도시로의 발전과정을 철도 부설과 확장과정을 통해 알 아보고, 철도와 도시공간의 관계를 분석하고자 한다. 이 는 근대화의 산물인 철도가 동양문화권의 전통도시에 미 친 영향에 대해서 살펴봄으로써 한국 근대도시의 유사한 발전과정을 이해하고자 함이다.
2중국 남만주철도 네트워크 형성과 철도요충 도시 심양의 탄생
1895년 청일전쟁 이후, 청국과 일본 간 『시모노세키조 약』 을 체결함에 따라, 요동반도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커졌다. 이에 위협을 느낀 러시아는 삼국간섭을 통해 요 동반도는 다시 청국에게 반환되었다. 러시아는 중국을 열 강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1896년 9월 청국과 『합 판중동철로공사합동(合办中东铁路公司合同)』 을 맺어 만주 리(满洲里)부터 수분하(绥芬河)까지의 중동철도의 부설권 을 획득하였다. 1897년 11월 독일이 교주(胶州)를 점령 하자, 러시아는 요동반도 보호의 구실을 핑계 삼아 1898년 3월 『여대조지조약(旅大租地条约)』 을 체결하여 여순과 대련을 점령하고, 7월 동성철도지선합동(东省铁 路支线合同)』 을 통해 남지선(하얼빈-여순) 건설에 착수 하여 1903년에 987km의 전 구간을 개통하였다.
하지만, 러일전쟁의 패배로 러시아는 1905년 9월 『포 츠머스조약』 을 통해 관동(关东)조계권과 중동철도남지선 장춘-여순 구간을 일본에게 양도하였다. 1907년 4월 남 만주철도주식회사2)는 정식으로 대련-장춘선, 여순지선, 소가둔(苏家屯)-무순(抚顺)선, 봉천(奉天)3)-안동(安东)선 등 7개 철도선 약 1145.7km 및 연선 철도부속지4)를 운 영하였다. 만철은 이후에 철도네트워크 확장, 윤선, 항만, 광산, 제철, 전기 및 부속지 건설 사업을 통해 철도 중심 의 식민지화 작업에 착수하였다. 만주국이 성립 전 해인 1931년에 2360.8km, 1945년 종전 당시 5307.2km의 철도 선이 만철에 의해 운영되었다.5) 그림 1
만철의 철도네트워크는 만철본선을 중심으로 확장되 어 갔고, 철도선이 교차하고 연락(联络)되는 도시는 교 통요충지가 되어 근대도시로 급격하게 발전하였다. 그 대표적인 도시로는 하얼빈, 장춘, 심양, 대련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도시는 각 지역의 교통 중심뿐만 아니 라, 행정, 경제 중심으로 재편성되어 집중적으로 발전 하였다. 이 중에서 심양은 만철본선 뿐만 아니라, 북경 으로 연결되는 京奉(북경-봉천)철도, 한국으로 연결되 는 安奉(안동-봉천)철도가 경유하였고, 이후 봉계군벌 (奉系軍閥)에 의해 瀋海(심양-해룡)철도가 부설됨으로 써 중국 동북부뿐만 아니라, 동북아 철도네트워크의 요충도시로 발전하였다.
3철도네트워크 형성 및 발전으로 본 심양의 근대도시 발전과정6)
3-1철도부설 이전 심양7)
철도부설 이전, 심양은 西漢시기부터 도읍을 형성하였 고, 토성을 축조하였다. 이후, 심양의 군사적 위치가 중요 해짐에 따라, 1388년(명 홍무21년)에는 元代土城을 기초 로 하여 둘레 9리 30보, 높이 2장 5척의 전돌 성벽으로 개 수하였고, 성벽 동서남북에 네 개의 문을 두었고, 성내는 네 개의 문을 관통하는 十자가도를 건설하였다. 1625년 淸태조 누르하치[努尔合赤]는 後金의 수도를 요양에 서 심양으로 천도하게 되었고, 1631년 淸태종은 명조 때 축조하였던 성경성을 둘레 9리 332보, 높이 3장 5 척으로 증설하였다. 또한 네 개의 성문을 8개 개수하 였고, 기존의 十자가도를 井자형 가도로 개수하였다. 1644년(순치 원년) 청조는 북경으로 천도하고, 심양을 청 조의 제 2의 수도(陪都)로 삼았다. 그 군사적 중요성에 따라 1680년에 내성을 중심으로 한 원형평면의 외성을 축조하여 성곽을 완성시켰다. 그 규모는 둘레 32리 48보, 높이 7척 5촌이었고, 새로 축조한 외성에 8개의 문을 내 어, 내성의 문들과 관통하도록 건설되었다. 그림 2
근대시기 성경성의 井자형 가도는 도로개수가 진행되 어 구시가지 내의 주요간선도로로 정비된다. 이 도로 중 대서문(大西門)과 대서변문(大西邊門)을 연결하는 대서로 (大西路)와 소서문(小西門)과 소서변문(小西邊門)을 연결 하는 소서로(小西路)는 이후, 상부지(商埠地)와 만철부속 지까지 관통하는 도로와 연결되어 근대도시 심양의 주요 동서간선도로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근대시기에 들어서면 서 여타 성곽도시와 마찬가지로, 심양의 성곽은 본래 방 위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또한 도시가 발전하면서 성곽은 오히려 도시 내 심각한 교통과 위생문제를 야기 해 훼철수순을 밟게 되었다.
3-2철도부설 이후 심양
(1)1898~1904: 철도형성기
1898년 9월 중동철도 남지선의 부설이 확정된 후, 러 시아는 심양에 철도역 건립 및 철도용지를 설치할 계획 을 세웠다. 당시 러시아가 청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심양에 철도역 및 철도용지를 계획한 것에는 두 가지 이 유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지리적 이유이다. 심양은 북경, 영구, 대련 및 조선으로의 육로교통이 편리하였다. 또한, 성경성 남측에 혼하(浑河)가 흐르고 있어, 철도용수 및 건축자재 운반에도 유리하였다. 두 번째는 정치적 이유이 다. 심양은 근대 이전부터 동북의 경제 중심지였기 때문 에 러시아가 중동철도로 중국동북부 전체를 통치하기 위 해서는 철도가 심양을 통과하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또한, 북경까지 연결된 육로에 따라 경산(북경-하북성 산해관) 철도를 심양까지 연장시킬 계획을 세웠기 때문에,9) 수도 와의 연락이라는 측면에서 더욱 중요해졌다.
성경성 서측 5㎞ 떨어진 지점에 철도역 및 철도용지 약 6㎢를 선정하였다.10) 이곳은 심양 토착세력의 간섭을 피하면서 성경 북경에서 심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인접 해 위치하고 있어, 심양의 육로교통을 통제하려는 러시 아의 의도가 숨어 있었다.11) 남지선 부설 시작과 함께 심양 최초의 기차역인 Mukden12)역 건설에 착수하여 1899년 완공하였고, 거의 황무지였던 그 주변에 철도시 설들이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그림 3, 그림 4
러시아에 의한 심양의 철도용지 설치계획은 계획범위 의 설정과 철도역, 혼하철교 및 ‘철로대가(현재의 勝利大 街)’를 포함한 몇 개의 도로 건설을 제외하고는 구체적인 도시계획이 진행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중동철도회사가 설정한 철도용지범위는 이후 만철이 양도받음으로써 철 도부속지 도시계획의 기본골자가 되었다. 그림 5
(2)1905~1931: 철도 확장기
러일전쟁 이후, 만철의 기존 철도에 대한 정비 및 다 른 철도회사들의 철도부설로 심양 내의 철도망 확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이는 심양의 도시계획에까지 영 향을 미쳤다. 철도연선 및 운영주체에 따라, 심양 도시계 획지역을 세 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러시아에게 양도 받 은 약 6㎢의 철도부속지이다. 일본은 러시아가 세운 Mukden역이 철도부속지의 북쪽에 편중되어 있고 그 규모가 영세했기 때문에, 기존 역사의 남측 1.2㎞ 지점 에 신봉천역을 세우고 안봉선의 종점을 새로운 봉천역 으로 수정하였다. 그림 6
만철은 이 새로운 철도역을 중심으로 격자형 도로망과 방사형 도로를 결합한 도시계획을 진행하였다.<그림 7> 만철의 철도부속지 경영 이후, 철도부속지의 도로, 배수, 급수, 전기, 공원 등 도시기초시설이 완비되었고, 의료와 교육의 복리시설, 공공건축, 주택, 상업시설, 문화시설 등 이 건설되어, 근대 도시기초가 완비되었다.13) 이 시기 봉 천 철도부속지는 근대 심양 도시발전의 중심지였다.
두 번째 지역은 청정부가 영국과 러시아의 차관을 통해 북경 영정문역과 심양 황고둔역까지 개통한 경봉 철도가 연선하는 상부지(商埠地)14)이다. 러일전쟁 이후, 『중일회의동삼성사의조약(中日會議東三省事宜條約)』 에 의거해서봉천성을 포함한 길림성 및 흑룡강성의 16개 도시의 통상을 체결하였다.15) 그리하여 1906년 6월 심 양은 동측 서변문(西邊門)부터 서측 만철부속지 경계선 까지, 남측 혼하 북안부터 북측 황사대가(皇寺大街)까 지, 약 21.3㎢의 면적을 정식으로 열강에게 개방하였 다.16) 상부지는 도시계획 시행순서에 따라 정계(正界), 부계(副界), 예비계(預備界) 세 개 구역으로 구분되었 다.17)<그림 8>
초기에 공사가 이루어진 정계지역은 마차철도(馬車鐵道, 현재의 시부(市府)대로)와 소서변문 부근에 1913년 경봉철도 종점 성근(城根)역18)이 건설되어, 도시 내외의 교통이 편리하게 하여 내외국인들의 유입을 유도하였고, 상부지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정계지역에 는 영사관 건축, 외국상사, 은행 등이 집중 건설되었고, 부계에는 중국인 상점, 중, 하층민들의 거주지가 형성되 었다. 상대적으로 지가가 높고 우선 개발된 정계는 지리 적으로 부계보다 성근역까지의 접근성이 좋았다.19)
이후, “경봉철도가 상부지의 경제를 더욱 부흥시키고, 만철본선과 동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철도선이 되기 위 해”20) 성근역 서측으로 약 1㎞ 떨어진 곳에 요령총역(遼宁總驛)을 1930년에 낙성하였다.21) 그림 9
상부지는 만철부속지와 고성(古城) 간의 간선도로를 중 심으로 계획이 되었고, 일본의 만철부속지와 중국정부의 고성 간의 완충지(bufferzone) 역할을 수행하였다.
세 번째 지역은 봉계군벌(奉系軍閥)22)이 주체적으로 건 설한 심해(瀋海)철도 연선 지역이다. 1911년 신해혁명 이 후 奉天省城(이전의 성경성)은 북양정부 봉계군벌 수장 장작림의 수부(首府)가 되었다. 청 말까지 성내 25개, 성 외 17개의 중요 가로가 있었는데, 최대 폭은 21m를 넘지 않고, 어떤 가로는 3m도 안 되었는데, 전부 흙길이었다. 봉계군벌에 의해 1912년부터 1931년까지 봉천성의 도로개 수 사업이 진행되어, 성내외의 간선도로의 개수와 확장사 업을 진행하였다.<그림 10><표 1>
또한, 1923년 5월 설립된 봉천시정공소23)는 1923년부 터 1931년까지 도시발전의 장애물로 전락한 외성의 8 개문과 성벽 훼철을 진행하였고, 성 내의 교통이 원활 할 수 있도록 고루(鼓樓)와 종루(鐘樓)를 철거하였다. 훼철한 성벽 자리에 순환식 전차와 버스노선을 계획하 였다.24)
봉계군벌은 민족공상업의 부흥을 통해 일본의 영향에 서 벗어나 스스로의 세력기반을 마련하려고 하였다. 그 리하여, 성경성을 중심으로 동북에 심해공업구(瀋海工業區), 서북에 혜공공업구(惠工工業區), 동측에 대동공업구 (大東工業區)의 세 개의 공업구를 개발하였고, 심양동역 에서부터 동북으로 가는 심해철도를 건설하였다. 이 세 개의 공업구는 철도선과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다. 심해 공업구는 심해철도를 중심을 계획된 공업구로, 격자형도 로망과 방사형 도로를 결합한 근대도시계획에 따라 건설 되었다. 혜공공업구 인근에는 요령총역이 위치하고 있고, 경봉철도와 심해철도의 연락선이 지역을 관통하고 있다. 대동공업구는 성경성의 동측에 위치하여 일본의 영향권 에서 벗어나고, 기밀유지에 유리한 지리적 위치로, 봉계 군벌의 무장군비를 위해 건설되었다. 이 지역에는 심해 철도로 연결되는 철도전용선이 부설되었고, 급수, 배수, 전기 등 시정시설 또한 기타지역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건설되었다.25) 그림 11
(3)1932~1945: 군용철도기
만주사변 이후, 만주국 수도로 선택되지 못한 심양은 차선책으로 1932년 8월 봉천상공회의소에서 만철, 만주 국, 일본정부에게 『봉천공업발전진흥안』 을 제출하였다. 그 연장선상에서 다음해 3월에 만주국은 『만주국경제 건설강요(滿洲國經濟建設綱要)』 를 통해 심양을 대공업 도시로 계획하였다. 그 시작으로 만철본선의 서측에 철서(鐵西)공업구 건설에 착수하였다.
이 시기에 최초로 심양전체에 통일된 근대도시계획이 실시되었다. 1932년 여러 계획안의 수정을 통해 관동군은 1933년 8월 『봉천도시계획강안(奉天都市計劃纲案)』 을 발 표하였고,26) 그 다음해에 심양의 도시계획이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1936년 도읍계획법이 공포되어 심양에도 1938년 『봉천도읍계획(奉天都邑計劃)』 이 시행되었는데, 이 계획은 1932년 이후 시행된 도시계획의 총결과물이 었다.<그림 12>
당시 심양의 도시계획의 주요 목적이 만주의 공업중 심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도시계획상에서 철도선의 연락 및 공업지역과의 연계가 중시되었다. 이 시기 만주 국은 만철본선을 심양철도네트워크의 중심선으로 설정하 였고, 봉천역을 심양의 중앙역으로 설정하였다. 그 외, 기타 철도선은 이 노선의 지선으로 전락시켰고, 봉천역 이외의 철도역의 여객기능을 약화시키는 대신 화물운수 기능을 강화시켰다.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심양의 도시건설계획이 중단되 었고, 공업구는 군수물자 생산수단으로 이용되었고, 철도 는 군수물자 운송을 위한 병참수송기로 전락하였다.
4철도와 심양의 도시공간의 관계
남만주철도 건설 이후 주요연선도시의 공간은 철도 중 심으로 재편성되어, 철도는 도시구조, 도시계획, 도시경관 등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4-1철도와 심양의 도시구조27)
심양의 도시구조는 철도의 형성과 확장에 따라 변화 하였다. 철도부설 이전, 심양은 성경성 중심의 단핵구 조였다. 이후 철도부설과 함께 러시아에 의해 철도용지 가 구획되었고, 일본은 이를 기초로 하여 철도부속지 를 설정하여 성경성과 떨어진 독립적인 신시가지를 형 성하였다. 그로 인해, 철도연선의 철도부속지와 철도와 거리가 있는 성경성은 쌍핵구조 관계를 형성하였다. 이후 경봉철도와 심해철도가 건설되면서, 도시 내에 十자형으로 철도망이 형성된다. 이에 十자형 철도망이 교차하는 동남 방향으로, 철도역과 철도선에 연계하여 지역들이 부분적으로 발전하는 다핵의 “연계형” 구조 를 가지게 되었다. 만주국 성립 이후, 모든 철도선은 만철에 의해 위탁경영되었고, 철도부속지를 포함한 심 양 도시전체 또한 봉천시공서에 의해 운영되면서, 통 일된 근대도시계획이 실시되었다. 이전의 시가지들은 하나의 계획 아래 병합되었고, 철도가 도시계획의 일 부로 적용되어 철도와 도시는 점차 “일체형”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표 2>
4-2철도와 심양의 수계(水系)
철도와 수계는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철도건설에 있어서 수계는 재료의 운송, 증기기관의 용수 공급 등, 철도역과 용지 선정의 중요한 조건이지만, 반대로 근 대철도 건설 과정과 운행에 있어서 지형적 제약으로 작용하였다.
중국동북의 하류(河流)로는 송화강, 요하, 압록강 및 두만강이 있고, 이 중에서 남만주철도가 통과하는 수 계로는 송화강과 송화강의 지류인 이통하(伊通河), 요 하(遼河), 혼하(浑河)가 있다. 그 중, 성경성 이남의 혼 하는 성경성의 건설과 확장, 건축자재 등 물자를 운반 하는 중요한 교통수단이자, 그 지류는 성경성의 생활 용수를 공급하였다. 혼하는 중동철도 남지선이 요동반 도 종점인 여순까지 남하하기 위해 극복해야하는 지형 적 제약이었다. 그리하여 육지 사이를 연결하는 혼하 철교가 1899년에 착수하여 1902년 8월에 준공되었는 데, 길이는 819.2m로 건설되었다.28)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는 혼하를 방위선으로 잡고, 일본이 철도부설로 북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혼하철교 및 그 북쪽의 철로를 폭파시켰다. 이는 전쟁에 있어서 철도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철도운행에 있어서 수계 극복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후, 일본 이 남만주철도를 러시아로부터 양도 받은 후, 철교 재 건을 시작으로 철도 복구작업을 진행하였고, 철교의 철도궤를 러시아가 사용했던 광궤가 아닌 표준궤로 개 조하고 보수하였다.<그림 13>
비록 혼하 이남의 발전은 종전이후에서야 진행되었지 만, 이미 그 전에 봉천도읍계획의 도읍계획구역의 범위 에 혼하 이남의 지역까지 포함되어 있어, 혼하철교와 기 타 교량의 건설으로 성경성을 포함한 혼하 이북에 한정 되어 있던 도시계획과 발전이 자연조건의 제약을 극복하 고, 장래의 도시발전 방향에도 영향을 미쳤다.<그림 12>
그 외, 철도와 수계가 밀접한 관계를 갖는 시설물로 철도역 급수탑을 들 수 있다. 물은 증기기관차의 동력이 었기 때문에, 철도역 선점에 있어서 강, 하천 등의 수원 의 위치를 고려하여 계획되었다.
러시아(중동철도공사)에 의해 남만주철도가 운영되었던 시기에 심양은 4등급 역사로, 급수탑은 설치되었지만, 기관차고가 없는 철도역이었다.29) Mukden역의 급수탑에 대한 사진자료는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 같은 등급이었 던 장춘역과 도면자료를 통해 형태와 구조를 추측할 수 있다. 러일전쟁 이전의 급수탑은 상하부가 분리된 형태 로, 하부는 벽돌조로 구성된 원통형 평면으로, 급수관 내 부에 설치되어 있는 형태였고, 상부에는 물탱크를 설치 하고, 철근을 이용하여 물탱크를 지탱하였다. 그 외부에 는 목재를 다각도로 감싸면서 추운 겨울 물탱크가 동파 되지 않도록 보온의 기능을 하는 동시에 장식성을 살렸 다. 중동철도공사의 표준 급수탑의 높이는 약 15~20m 로, 대부분이 조적식 구조였다.30) 그림 14
만철의 봉천역 부근에 근처에 급수탑을 설치했다는 기 록은 존재하지만, 구체적인 위치와 형태에 관한 기록이 부족한 실정이다. 다만, 당시 철도부속지 내에는 생활용 수의 목적으로 세워진 급수탑의 사진자료와 비슷한 시기 에 다른 도시에 세워진 급수탑을 통해 당시 급수탑의 형 태를 추정할 수 있다.
1910년대 만철에 의해 지어진 급수탑은 상·하부 분리 식으로 계획했는데, 하부를 철근을 이용하여 노출식으로 구성하여 내부구조를 볼 수 있었고, 상부는 콘크리트를 이용하였다. 현존하는 급수탑 중에서 비슷한 시기에 비 슷한 형태로 만들어진 장춘 서광장 급수탑을 통해 유추 해보면, 약 30m의 높이로 세워졌다. 만철은 급수탑에 콘 크리트를 사용함으로써 중동철도회사에 비해 높이와 용 수 수용량이 더 큰 급수탑을 세울 수 있었다.
<그림 15>를 통해 만철의 1910년대 급수탑(오른쪽)과 1920년대말 급수탑(왼쪽)을 비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만철부속지 내에 1920년대 말부터 비노출식의 상·하 일 체형 급수탑이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현존하는 치요다공 원 급수탑의 높이가 약 54m인 것을 통해 1910년대에 비 해 더 높은 급수탑들이 지어진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심양동역(심해역)은 동쪽으로 1.5km에 떨어진 지 점에 높이 약 40m의 원주형의 급수탑이 존재한다. 이는 1927년 전후로 심해철도 부설 당시 건설된 것으로 추정 된다. 특이한 점은, 이 급수탑의 건축구조와 주재료는 벽 돌과 나무로, 만철보다는 초창기 중동철도회사의 급수탑 과 유사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철도회사의 건축기 술 수준, 재료 보급과 연관시켜서 볼 수 있다.31) 그림 16
급수탑은 근대시기 등장한 시설물로, 철도역과 함께 당시 건축기술의 발전을 보여줄 수 있는 도구로 사용되 었고, 고저낙차를 이용했기 때문에 주변건축물에 비해 높아 랜드마크의 역할을 하여 심양의 도시경관에 큰 영 향을 미쳤다.
4-3철도와 심양의 도로 및 광장 계획
근대시기 봉천 철도부속지는 철도선과 평행하게 격자 형 도로체계를 도입하였다. 심양시 내에서 만철본선은 북 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지나가고, 철도부속지의 대지는 성 경성과 마주보는 동남향으로 위치한다. 철도부속지가 철 도와 연하는 중앙 위치에 철도역을 계획하여, 이를 중심 으로 철도부속지 전체의 도시계획이 진행되었다. 이에 따 라, 철도역광장을 기준으로 하여 철도부속지의 경계선까 지 직선의 간선도로 치요다통(千代田通, 현재의 中華路) 가 건설되었다. 이 간선도로 양측에는 철도선, 간선도로 와 평행한 격자형도로체계가 구축된다. 철도역전 광장은 지역 내 주요광장인 대광장(大廣場, 현재의 中山광장)과 평안광장(平安廣場, 현재의 民主광장)과 두 방사형 도로 를 통해 연결된다. 이 중 대광장(1919년 나니와[浪速]광 장으로 개칭)은 당시 철도부속지의 중심광장으로, 방사형 도로와 직선도로 등 7개의 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광장 이 설치되었고, 광장 중심으로 7개의 필지가 형성되었다. 매 필지마다 당시를 대표하는 은행, 회사, 여관 등 상업 건축과 공공건축이 건설되어 대광장은 심양을 대표하는 상업중심가가 되었다. 표 3
만주사변 이후, 기존의 격자형도로체계와 방사형 도로 를 연장하여 철도부속지의 범위를 확장하였다. 연장한 격자형 도로와 방사형이 교차하는 지점에 1932년에 朝日 광장(현재의 和平광장), 다카치호[高千穗]광장(현재의 新 華광장)이 건설되었는데, 이들 광장은 철도 역전광장 혹 은 대광장과 연결되었다.<그림 17>
또한, 만주사변 이후 심양이 경제중심도시로 자리 잡 으면서 개발하기 시작은 철서공업구(铁西工业区)는 만철 부속지의 반대편인 철도선의 서측에 위치하여 철도선에 평행하게 격자형 도로체계를 구축하였다. 비록 철도선으 로 인해 만철부속지와 철서공업구는 두 개의 지역으로 분리되었지만, 만철부속지의 남오마로(南五馬路)가 서측 으로 연장되어 현재의 건설대로(建設大路)를 통해 연결 되었다.
4-4철도와 심양의 근대도시계획
만철 초대 총재 고토 신페이[後藤新平]32)의 지시 아 래, 봉천 만철부속지는 장춘 만철부속지와 함께 카토우 요노키치[加藤与之吉]33)에 의해 계획되었는데, 장춘 만 철부속지와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바로크 도시계획 수법 으로, 철도역 중심으로 격자형 도로망에 방사형 도로를 가미한 도시를 계획하고 교차지점에는 광장을 설계하였 는데, 이는 심양의 근대도시계획의 시작이었다.
1938년에 실시된 봉천도읍계획<표 4>은 만주 지역의 기타 도읍계획법35)과 한국의 『조선시가지계획령』 과 마찬 가지로, 식민지통치의 수단으로 사용되었지만, 근대도시계 획의 실시라는 점에서는 부정할 수 없다. 봉천도읍계획 내 용 중 근대도시의 성격을 살펴볼 수 있는 것으로는 용도 지역제 실시, 그린벨트의 설정, 전원도시이론의 적용, 철도 를 통한 교외지역과 타도시간의 연계 등으로 들 수 있다.
봉천도읍계획 중 기존 내성에 위치했던 심양시공서(만 주국 시기 봉천시정공서로 개칭)를 소서변문으로 이전하 여 신청사를 건립하여 행정 중심이자 심양도시의 중심으 로 설정하여 계획하였다. 이는 철도부속지와 성경성 사 이에 위치시켜 하나의 행정체계에서 도시를 관리하기 유 리한 위치로 이전시킨 것이다. 그림 18, 그림 19
용도지역제를 살펴보면, 시 중심을 기준으로 하여 상 업지역은 만철부속지, 상부지 및 혜공공업구와 심해공업 구의 일부지역으로 구획하였다. 이를 통해 주요 상업지 역은 철도선을 연해서 위치하였고, 철도용지와 그 부근 까지 포함하고 있어 경제활동에 있어서 유동 인구 및 상 품운송을 중요시 여긴 것을 알 수 있다. 공업지역은 설 비운송이 편리한 철도전용선, 풍향이 시가지에 영향을 주지 않고, 혼하에 인접하여 공업용수의 공급을 고려하 여 만철본선 서측에 철서공업구와 기존의 철도전용선 및 공장이 지어진 대동공업구를 공업지역으로 선정하였다. 성경성, 상업, 공업지역의 주위에 주거지역을 선정하였다.
또한, 심양시내의 무분별한 확장을 방지하고 위생문 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외곽에 1~7km의 그린벨트를 설정하였다. 도시인구의 팽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철 도를 통해 시내·외를 연결하여 인구를 교외로 분산시 켰다. 1940년에는 시내에서 외곽까지 연결하는 지하철 을 계획하여 교외이전을 장려하였다. 이와 같이 도시계 획은 시가지를 방사환상형태로 계획하였고, 도시중심부 에는 공공시설, 중간지역에는 상업지역과 주거지역 그 외곽에 공장지대를 두고, 그 외측에 다시 농업지대를 계획하고, 주요 교통수단이 철도라는 점에서 하워드의 전원도시 개념36)과 국토계획(Regional Planning) 등의 근대 서양도시계획이론과 밀접한 관련성을 보인다. 그림 20
다만, 심양의 근대도시계획 또한 기타 식민지도시계획 과 마찬가지로, “근대”라는 단어를 내세워, 피지배층에 대한 식민지통치와 물자침탈을 위한 수단이자, 지배계층 의 생활환경과 권익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전락하였다. 만주사변 이후 심양의 도시계획은 일본인을 위해 진행되 었다. 그 예로 철서공업구 내에 일본인거주지와 중국인 거주지가 계획되었는데, 일본인 거주지는 철도에 연하여 위치하였고, 중국인 거주지는 공업구의 서측에 위치하였 다. 이는 일본인들에게 기존 만철부속지의 도시기반시설 을 연장하여 사용할 수 있게 제공한 반면, 중국인 거주 지에는 토막촌이 형성되어 식민도시의 차별적 도시계획 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만주국에 의해 시행된 도시계획 에서 중국인의 경제기반이었던 성경성에 대한 계획은 배 제된 것을 통해 도시계획의 수혜자가 명확히 드러난다.
4-5철도와 도시경관
철도부설 이전에는 도시경관을 이루는 주요 건축은 성 곽과 성문, 궁궐과 관아건축 등 봉건사회의 주체 중심이 었지만, 철도부설 이후 도시공간이 철도를 중심으로 재 편성되고, 철도를 효율적으로 운행, 관리하기 하기 위해 서 철도관련 건축과 시설들이들이 세워지기 시작하면서 도시 경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철도역은 기존의 성문을 대체하여 도시 문호(門戶)의 역할을 하였고, 열강은 철도역을 통해 국력과 경제력을 보여주는 상징물이자, 동시에 식민지배의 타당성을 뒷받 침해주는 상징물이었다. 철도요충도시는 국가의 행정, 경 제, 교통중심으로 재편성되었기 때문에 도시의 중요성과 근대화 정도를 보여주기 위해 최신의 건축양식, 건축재 료와 기술을 이용하여 역사를 설계하였다.
중동철도회사 운영시기에 심양역은 중동철도 간선과 지선을 연결하는 하얼빈이나 종착역인 여순보다는 상대 적으로 등급이 낮은 역사로 계획되었다. 하지만 만철이 남만주철도를 운영하면서 심양의 지리적 중요성이 커지 면서 철도역을 이전하고, 다츠노식(辰野式) 고전주의 양 식의 신역사를 세우게 되었다.37)
만철본선과 경쟁하기 위해 설계된 경봉철도의 요령총 역은 유럽의 철도요충도시에 보이는 양상과 유사하게 철 도역이라는 근대화의 상징물을 내세워 철도회사의 건축 기술과 경제력을 자랑하는 동시에, 관광을 통한 경제적 효과를 누리고자 하였다.
철도를 통해 도시에 도착한 여객들이 가장 먼저 접하 는 철도역 앞 광장이다. 봉천역에서 나오면 가장 먼저 보이는 건물은 건너편에 위치한 만철 봉천지방사무실 건 축과 철도역을 중심으로 넓게 직선으로 뻗어나가는 방사 형 도로였다.<그림 21> 이러한 도로들은 만철부속지의 주요광장과 주요 철도관련 건축과 연계되어 접근이 유리 하였다. 다시 말해, 철도부속지 내의 관련 철도관련 건축 들은 철도 기능 중심으로 배치되었기 때문에, 기본적으 로 철도역과의 거리를 감안하여 배치되었다.<그림 22>
철도역 부근에는 철도운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만 철봉천지방사무소는 철도역 광장 맞은편에 위치하였다.38) 만주국 설립 후, 심양의 철도교통의 기능이 더욱 중요해 지자 만철철도총국이 심양에 세워졌다. 그 위치는 기존 의 헌병대와 수비대 주둔지에 위치시켜 인근 철로대가를 통해 철도역까지 접근이 용이하였다.39) 그림 23
철도도서관과 구락부40)는 철도역과 철도사무소 1km 반경 내, 철도역과 곧바로 연결되는 치요다통과 가까이 위치하였다. 철도도서관은 현지 자료를 수집하고 사무업 무에 사용하였고, 동시에 철도직원의 개인수양을 위해 제공되었고, 철도구락부는 철도직원들의 생활수준 향상과 복지를 위해 제공되었기 때문에 철도역이나 철도사무소 에서 접근이 용이하게 배치되었다. 그림 24
철도역과 방사형 도로 나니와통은 대광장과 연결되 었다. 대광장 주변으로는 조선은행, 요코하마 정금은행,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당시 대표적인 식민지 경제침탈 기관뿐만 아니라, 철도여객에게 숙소를 제공하기 위해 만철에서 운영하던 철도호텔이 지어졌다. 심양의 야마 토여관(大和旅馆)은 철도역과 직통으로 연결되어 여객 들이 접근하기 편한 위치에 배치되었다.41) 철도병원은 철도직원과 가족들의 건강을 위해 서양의학 중심으로 의 료서비스가 제공되었는데, 대광장 주변에 위치하고 있어 철도역과 사무소뿐만 아니라, 철도관사와도 인접하여 접 근이 용이하였다.42) 그림 25
여객과 화물운수를 담당하는 철도역에서 시작하여 철 도역 뒤편으로는 철도기관의 용수 공급하는 급수탑, 기 관차 정차와 정비를 담당하는 기관차고 등 철도운영과 관리에 있어서 중요한 기초시설이 배치되었고, 역전광장 주변에는 철도관리사무, 여객과 철도직원의 복지를 위해 제공되는 주요 철도건축이 간선도로 통해 철도역과 주요 광장과 연계되었고, 그 사이에는 만철 직원관사와 만철 의 교육시설, 그리고 시민과 관광객을 위한 상업건축들 이 세워지면서 철도기능 중심의 도시경관이 완성되었다.
5결론
철도부설 이전에 축조된 심양성경성은 중국동북의 경 제중심지였기 때문에 철도역 선정의 큰 이유가 되었다. 근대시기 심양의 도시발전에 있어서 구시가지와 신시가 지의 연계가 중요하였기 때문에, 성경성의 도로 중 내성 과 외성을 잇는 도로는 상부지에서 만철부속지까지 관통 하는 도로와 연결됨으로써 심양의 주요 동서간선도로의 일구간이 되었다. 철도부설 이후, 도시는 중동철도의 심 양역과 철도용지 형성의 철도형성기, 만철본선, 경봉철도, 심해철도가 부설되고 운영되었던 철도확장기, 만주국 성 립이후 만철본선을 중심으로 철도체계를 재편성하여 병 참기지의 군수물자 운송선으로 전락했던 군용철도기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 이를 통해, 철도의 운영주체 따라 각기 다른 도시계획이 진행되었으며, 모든 운영주체는 철도를 통해 지역경제 부흥 혹은 공업발전을 이루고자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근대시기 심양의 도시공간은 철도를 중심으로 재편성 되었고, 철도는 다음과 같이 도시구조, 도시계획, 도시경 관 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첫째, 철도와 시가지의 도시구조 관계를 살펴보면, 철 도부설 이전에는 성곽중심의 단핵구조였다가, 점차 철도 연선의 다핵구조의 연계형으로 발전하다가 근대도시계획 으로 일체형 구조를 가지게 된다. 둘째, 철도건설에 있어 서 수계는 철도역과 용지 선정의 중요한 조건이었는데, 훈하 철교와 철도역 급수탑은 철도의 부설과 함께 심양 에 출현한 근대적 산업시설물로, 자연적 제약을 극복하 는 수단이자, 철도역과 함께 당시 철도회사의 건축기술 의 발전을 보여주었다. 셋째, 도시 내 철도역의 위치와 방향, 철도선의 교차와 연결 등은 도시 도로체계와 필지 형태에 영향을 주었다. 동시에, 도시 지리적 위치 상 철 도역의 중요성으로 인해, 도시의 주요광장과 접근이 유 리하도록 계획되었다. 넷째, 봉천도읍계획에서 철도요충 으로서의 중요성에 따라 철도선 정리를 계획하였고, 용 도지역제의 각 지역 설정에 있어서 철도와의 지리적 관 계를 고려하여 전원도시이론에서와 같이 교외지역과 주 변도시간의 연계를 담당하였다. 마지막으로, 철도 중심의 도시공간 재편성으로 인해 기존의 봉건사회의 상징이었 던 도시경관 요소들이 철도역, 급수탑, 철도시설물 등의 근대화의 상징물로 대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