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 론
1-1.연구의 배경 및 목적1)
건축학의 주요 분과의 하나로 취급되는 건축사학은 고 유한 학문의 역사를 갖고 있다. 서구 유럽에서 건축사 연 구는 일찍부터 실무적 목적을 위해 일부 건축가에 의해 수행된 바 있다.2) 한편으론 골동품 연구나 고고학적 관 심에서 비롯한 아마추어 역사가들도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와트킨이 잘 지적했듯이 자체의 개념적 틀을 가 진 지적인 학문 분야로서 건축사 연구는 근대의 도래와 함께 거의 전적으로 독일에서 시작되었다.3) 학문으로서 건축사학은 독일어권에서 수립되었으며, 독자적인 이론 과 방법, 특히 양식의 기술과 설명에 근거한 건축사를 낳 았고, 20세기 초까지 건축사 서술(historiography)을 주도 하였다.4) 즉, 본격적인 건축사학의 기원도, 아카데미적 학문의 지위로 승격한 것도 독일에서였다. 그들은 실무 적인 이유나 양식적 취향과 무관하게 순수한 학문적 관 심으로 건축의 역사를 연구하였으며 독립된 학문 영역으 로 건축사학을 정착시켰다.
독일에서 건축사학은 미술사학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는 데, 조형 예술을 구성하는 회화, 조각, 건축이라는 세 가지 범주의 예술 형식 중의 하나에 대한 역사적 연구로서였다. 건축사가 회화나 조각보다 부차적 지위의 연구에 머문 것 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건축사학의 시작이고 뿌리이자 성 장의 배경이었음도 사실이다. 우선 조형 예술의 한 분야로 연구되었다는 사실이 건축사학의 학문적 성격에 적지 않 은 영향을 미쳤다. 그 원리와 방법, 개념과 체계가 미술사 학에서 비롯했고 동일했기에 그렇다. 더 중요한 사실로 미 술사학, 더불어 건축사학이 본격적인 학문으로 수립할 수 있게 된 데는 독일의 관념 철학, 특히 헤겔의 막강한 영향 이 있었다는 것이다. 헤겔은 철학의 역사를 다시 썼을 뿐 아니라 이후 다방면에서 인간 지성과 인식, 나아가 실천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미술사학 역시 그의 역사철 학과 미학에 힘입어 학문의 토대를 이루는 주요 개념들이 나왔으며 방법론을 수립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헤겔 없이 미술사학이나 건축사학은 가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리고 그것은 20세기 초엽까지 건축사학의 학문적 정체성 과 연구 방향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즉, 미술사와 건축사학은 헤겔적 사유에 정초하고 있 으며 그것이 학문의 체계와 주요 학파의 전통을 이루 는 근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으론 헤겔식 건축사 서술 방식에 대한 비판도 꾸준히 제기되었으며 그 극 복과 대안적인 텍스트의 생산이 계속 시도된 것도 사 실도 중요하다. 본 연구는 건축사의 서술과 방법에 스 민 헤겔적 영향을 헤겔적 유산으로 규정하고, 그것의 내용과 의미는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 해야 할지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1-2.연구 범위 및 방법
본 연구는 건축이론 분야에 해당하며 문헌 조사 위 주로 진행될 것이다. 미술사에서 헤겔의 영향에 대한 국내외 연구는 적지 않으나 건축사에 미친 헤겔적 유 산에 대한 연구는 그다지 흔하지 않다.5) 우선 학문사적 으로 헤겔의 영향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 살펴보고 헤겔주의 건축사학의 특성을 규명하고 정리하고자 한 다. 헤겔의 역사철학과 미학을 간단히 개관하고 그것이 건축사학에 미친 영향과 적용의 양상을 살펴볼 것이다. 나아가 그 담론의 계승과 확장을 추적하면서 사학사적 영향력과 공과를 검토하려 한다. 본 연구는 건축사 서 술에서 헤겔주의 건축사학의 특성과 의의와 한계에 집 중해 논지를 전개하는 방식으로 수행될 것이다. 헤겔주 의의 유산을 (재)평가하면서 오늘의 상황에서 무슨 교 훈과 가능성을 제공하는지 고찰해 볼 것이다. 본 연구 의 논지는 분석과 기술을 병행하여 전개된다.
2.헤겔과 건축사학의 전통
1977년 슈투트가르트 시가 수여하는 헤겔상을 받으면 서 저명한 미술사학자 곰브리치는 “헤겔과 미술사”라는 강연을 한다. 미술사 해석에서 시종일관 반(反) 헤겔적 입장을 견지해온 곰브리치가 헤겔상을 탄 것은 분명 아 이러니지만6) 미술사학에 끼친 헤겔적 영향을 비판하면 서 그 유산의 극복을 자기 학문의 목표로 삼아온 곰브 리치의 수상이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곰브리치는 헤겔을 미술사의 아버지로 칭하면서 미 술사학에서 미친 헤겔의 압도적인 영향을 강조한다. 곰 브리치에 의하면 빈켈만이 아니라 헤겔이 서구 미술사 학의 원조이며,7) 이후 근대까지 전개되어온 미술사(조 형예술사)의 역사는 그의 미학과 역사철학의 영향 하에 있다고 단정한다. 위대한 대가들이며 미술사학의 전통 을 만들어간 칼 슈나제, 야콥 부르크하르트, 하인리히 뵐플린, 알로이스 리글, 막스 드보르작, 그리고 에르빈 파노프스키 같은 학자들 모두가 헤겔의 예술 철학을 수 용해 자신의 학문을 일구어간 학자들이다.8) 우리는 여 기에 그들의 제자 격이자 후속 세대인 파울 프랑클이나 에밀 카우프만, 니콜라우스 펩스너 그리고 지그프리드 기디온 같은 저명한 건축사학자들을 덧붙일 수 있을 것 이다. 그들은 모두는 헤겔 미학의 전제와 방법을 적용하 여 조형 예술의 역사에서 일관된 체계와 내적 질서를 찾 으려는 연구를 수행한 이들이다. 헤겔의 영향 하에 미술 사는 엄밀한 학(Geistes-wissenshaft)으로 정립하였으며, 건축사학 역시 그런 배경에서 성장했다.
곰브리치는 헤겔의 예술사 해석을 “미학적 선험주의, 역사적 집단주의, 역사 결정론, 형이상학적 낙관주의, 상 대주의의 다섯 개념으로 정리하면서9) 실제의 역사를 재 단하는 헤겔의 방식이 미술사 연구에 여전히 힘을 발휘 하고 있으며, 미술사에서 헤겔적 유산의 위험성은 그것 의 손쉬운 적용가능성이 주는 유혹에 있다고 지적한다. 곰브리치는 헤겔주의에 반대하여10) 그것의 오류와 위험 성을 경고하는데, 장대한 형이상학적 체계로서 조형 예 술의 역사를 정리하는 헤겔 미학(예술철학)은 예술을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 바깥의 정신(Geist)이 발현되고 표상되는 매개물의 수준으로 격하시킨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강의 말미에 동시대 근대 건축과 관 련해 언급한 곰브리치의 발언이다. 그는 신학도가 성경 을 공부해야 하듯이 모름지기 미술사학자라면 반드시 헤겔을 공부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럴 때라야 근대건 축의 승승장구와 작금의 위기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는 것이다.11) 근대건축의 발생과 성장, 그리고 그 위기 적 상황은 헤겔주의와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그는 1923년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의 전시 회에서 행한 연설을 인용하며 그것이 얼마나 헤겔적 사고에 물들어 있는 지 지적한다. 근대건축이 재앙인 것은 단지 실천적 결과 때문만은 아니다. 역사의 전위 를 자처하면서 근대건축이 내비친 순진한 낙관주의와 도덕적 정당성이 더 큰 이유이다. 그 저변에 헤겔이 도 사리고 있으며, 그의 사상은 중독성이 아주 강하다고 곰브리치는 말한다. 그는 근대건축을 둘러싼 비판적 논 쟁을 환영하면서 그는 지난 몇 십 년간의 실수에서 교 훈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2)
헤겔상 수상 10년 전에 이미 곰브리치는 “문화사의 탐구”(In Search of Cultural History)라는 제목의 강연 에서 미술사학에 미친 헤겔의 영향을 자세히 논구하면 서 왜 그의 역사 철학이 문제인지, 그리고 그 잘못된 가치관이 미술사 해석에 미친 폐해를 설명하고 있다.13) 구체적으로 부르크하르트나 리글, 뵐플린, 드보르작, 파 노프스키의 관점과 방법이 어떻게 헤겔주의에 정초하 고 있는 지를 기술하면서, 그것들이 독단이고 근거가 없는 형이상학적 이론이라고 비판한다. 상이한 입각점 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는 개별 작가와 작품에 관심 을 두기보다 그것들을 시대의 표현으로 보면서, 역사의 행로 속에 조형 예술의 정형화된 진화 패턴을 제시하 거나, 민족이나 시대, 인류의 정신의 발현이나 의지로 보는 등 역사 해석에서 초개인적이고 집단주의적 성향 을 띤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미술사학의 계보에서 곰브리치는 비크호프, 리글, 보 링거, 드보르작, 슐로써, 제들마이어, 카우프만으로 이 어지는 비엔나 학파에서 막내의 위치를 점한다. 나치를 피해 고국을 떠나 영국으로 망명해 바르부르크 연구소 의 소장을 역임하기도 하면서 곰브리치는 작슬 등과 함께 영국이 미술사학/건축사학의 주요 근거지가 되게 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곰브리치의 헤겔주의 비판과 그의 연구 방법이 같은 비엔나 출신이며 유태인 망명 객인 저명한 철학자이자 과학사가인 칼 포퍼(Sir Karl Popper)에게 크게 힘입고 있음은 잘 알려져 있다.14) 흥 미로운 사실은 저명한 건축 이론가이자 비평가, 역사가 인 콜린 로우 역시 유사한 입장과 노선을 견지하고 있 다는 것이다. 근대 건축, 그리고 근대건축사 서술에 스 며있는 이데올로기와 이상향주의(utopianism), 그에 따 른 도덕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수행해온 로우 역시 바르부르크 연구소에서 비트코버에게 배운 바 있 으며, 칼 포퍼의 지적 세례 속에서 자신의 건축 이론과 비평의 기초를 마련했다.15)
근대건축과 건축사학의 담론에 가하는 곰브리치나 로우의 헤겔주의 비판은 충분히 경청할 가치가 있다. 그것은 근대건축의 허구적 신화와 거기에 일조한 건축 사학의 전통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그러나 한편 그들의 비판적 담론 역시 나름의 이데올 로기적 입장에 기초하고 있고, 비판과 공격의 근거 역 시 일종의 도덕적 입장에서 비롯된 것임은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거기서 우파 보수주의의 논리를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오늘날 일각에서 헤겔 관념론은 완전히 시대에 뒤떨 어진, ‘죽은 개’ 취급을 받고 있다. 건축사 서술에서 헤 겔적 사유를 고수하면서 그의 해석적 입장을 추종한다 는 표명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건축사학계에서도 헤 겔의 유산은 한물 간 학문적 경향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동시대의 건축사학과 역사 서술에 그 것이 완전히 소멸했다고 단정할 수 있는 지는 의문이 다. 더불어 헤겔적 사유의 한계를 의식하면서 그 의의 를 고찰하고 새로이 조명할 여지는 없는 지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건축사 학에서 헤겔 철학 혹은 그의 영향은 여전히 문제적 주 제이다.
3.헤겔의 역사철학과 미학
난해하기 짝이 없고 사변적이며 관념적인, 그러나 이 제 와서 그 대강이 무엇인지는 잘 알려진 헤겔의 사상을 상세히 반복하는 일은 적절하지 않다. 그러나 연구의 주 제와 관련해 건축사학에 드리워진 헤겔주의를 구성하는 핵심적 사고의 기원을 추적하기 위해 그의 사유의 특성 과 핵심적 내용을 파악할 필요는 있다고 보인다.
피터 싱어는 헤겔 철학을 이해하는 출발점을 그의 『역 사철학』에서 찾고자 한다. 헤겔 이전에 유럽의 어느 철 학자도 역사 혹은 역사철학을 사유의 중심 주제로 두 지 않았다.16) 헤겔은 개념 혹은 관념이 고정 불변의 것 이 아니라 시대와 사회가 변함에 따라 같이 변하는 것 이라는, 지금 보면 당연한 생각을 거의 처음으로 제기 하고 강조했다. 더불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어떤 패턴, 즉 진보 내지 발전의 큰 틀이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했 다. 부연하자면 그는 역사의 과정에는 방향성이 있다고 보았으며 어디론가 향하고 있음을 말하고자 했다.
헤겔이 찾아낸 역사의 과정에 대한 도식이 잘 알려진 변증법이며 그것은 지양(Aufhebung)이라는 유명한 형 태로 역사의 진화를 추진해 간다.17) 역사의 방향과 목 적은 자유를 향한 정신(Geist)의 전진이며, 이성으로서 정신이 자유로 나아가는 과정은 필연적인 것이다. 역사 는 이성, 곧 정신의 자기실현 과정에 다름 아니며, 이는 세계와 역사가 오직 이성적인 것으로만 파악되고, 세계 역사를 지배하는 주체가 이성 그 자체임을 뜻하는 것이 다. 이렇게 볼 때 역사는 이성의 외양이자 행동이 된다.
헤겔의 역사철학에 의해 인간의 삶의 세계는 영원한 변화의 과정에 놓인 것, 즉 역사 속에 존재하는 것이 되었다. 하지만 헤겔의 역사관에서 보자면 개인이나 집 단은 자신의 욕망이나 열정 혹은 의도에 따라 행동하 지만 그것은 정신의 자기실현이라는 고상한 임무에 봉 사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인간은 역사를 창조하지만 역사의 주역이라기보다는 정신이 더 높은 단계로 이행 하는 과정에 봉사하는 실무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데 머문다는 것이다.18)
이해하기도 어렵고 수긍하기도 어려운 헤겔의 역사 철학을 이해하는 출발점은 그것이 자신이 처한 현실과 과거를 지적으로 파악하려는 고투로서 역사를 ‘의미 있 는 전체’로 보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사 실이다. “역사와 문화에 대한 총체적 접근”을 최초로 시도하고 또 그 전경을 보여주고자 한(보여주었다고 주 장하는) 최초의 철학자가 헤겔인 것이다. 그러므로 헤 겔의 역사는 인간 세계의 전체사이며 또한 보편사가 된다. 그는 표면의 우연성 대신 세계와 현실, 그리고 과 거에서 ‘질서’와 ‘구조’를 발견하려 했고, 그것은 역사의 체계화의 욕망으로 나타난다. 주요한 것은 그 질서와 구조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성을 도입한 역동적인 것으로서, ‘계기와 이행’으로 점철되고 대립과 모순이 해소되는 과정이다.
결국 헤겔이 찾고자 한 것은 역사 진행에 내재하는 논리인데, 그것은 세계 속에 정신이라 불리는 사유와 이성의 확장이며 자유라는 이념이 점차 자기를 드러내 는 (진보와 해방의) 과정이다. 대담하게도 헤겔은 역사 속에서 사유와 존재가 하나가 되는 이성의 자기실현 과정을 본다.19) 그리고 그것이 바로 보편적인 역사의 진행인 것이다. 그것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립하는 가치와 모순들은 서로 갈등하고 투쟁하며, 보 존하고 극복하면서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더 높고 발 전된 차원으로. 그것이 바로 ‘지양’이며 그 단계적 과정 이 역사의 법칙으로서 변증법이다.
헤겔의 『미학 강의』(이하 『미학』)가 획기적인 것은 종래의 감성과 느낌의 미학에서 탈피해 자신의 역사 철학을 예술에 적용하여 진정한 ‘예술의 철학’을 펼친 데 있다. 헤겔은 “이념이 역사를 통해 상이한 형식들 속에서 전개 된다”고 주장한다.20) 예술은 종교나 철학 과 함께 인류가 성취한 최고의 성과이며, 정신을 객관 화시키는 한 가지 형식이다. 이때 예술은 역사의 표현 이 되고, 정신이 발전의 각 단계 마다 얼마나 진보했는 가를 보여주는 유력한 증거가 된다. 헤겔에 따르면 예 술이 아름다운 것은 그 속에 정신이 ‘깃들어 있기’ 때문 이며, 정신이 그 속에서 하나의 이념을, 그가 “이념의 감각적 출현”이라는 유명한 말로 나타낸 것을 표현하 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예술의 아름다움은 이념, 곧 진리를 드러내는 일인데, 감각과 지각을 매개로 해 서 그렇게 한다. 이때 건축이나 조각, 회화, 시, 음악 같 은 “예술과 문화의 형식들은 이념의 현현이 인식가능 해지도록 감각 자료를 조직하는 수단에 해당한다.”21)
헤겔은 『미학』에서 예술의 ‘보편적 역사’를 수립하려 한다. 각 시대는 정신 발전의 필연적 계기를 통해 시대 의 의미를 드러내는데, 이는 예술의 역사에도 그대로 해당된다. 예술의 진화 발전은 역사 속에서 정신이 물 질에 승리를 거두고 자신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이때 예술사는 역사 속에서 예술 형식이 단계적으로 진화해 간 과정이 되며, 각 시대들은 그 안에 정신의 발전이 표현되는 적합한 예술 형식을 지닌다. 헤겔은 예술을 형식과 내용 사이의 일치 정도에 따라 상징적, 고전적, 낭만적 예술로 나눈다. 상징적 예술은 건축이 대표하 고, 고전적 예술은 조각이, 낭만적 예술은 회화와 음악 과 시(詩)가 대표한다. 역사 속에서 예술의 위치와 상 태를 자리매김하는 것이다.22)헤겔은 미학에서 예술의 ‘보편적 역사’를 수립하려 한다. 각 시대는 정신 발전의 필연적 계기를 통해 시대 의 의미를 드러내는데, 이는 예술의 역사에도 그대로 해당된다. 예술의 진화 발전은 역사 속에서 정신이 물 질에 승리를 거두고 자신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이때 예술사는 역사 속에서 예술 형식이 단계적으로 진화해 간 과정이 되며, 각 시대들은 그 안에 정신의 발전이 표현되는 적합한 예술 형식을 지닌다. 헤겔은 예술을 형식과 내용 사이의 일치 정도에 따라 상징적, 고전적, 낭만적 예술로 나눈다. 상징적 예술은 건축이 대표하 고, 고전적 예술은 조각이, 낭만적 예술은 회화와 음악 과 시(詩)가 대표한다. 역사 속에서 예술의 위치와 상 태를 자리매김하는 것이다.22)
상징적 예술 형식인 건축의 과제는 거친 자연의 재료 를 다듬어서 내적인 정신을 수용하는 일이다. 건축에서 물질, 즉 감각적인 질료는 정신적인 것, 곧 이념을 내부 에 보존하지만 아직 물질이 우세한 상태로, 내용에 부 합하는 적절한 형식에 이르지 못한 상태이다. 그 다음 단계인 고전적 예술에서 내용과 형식은 조화로운 일치 에 이르며, 그 후의 낭만적 예술에선 다시 내용이 형식 을 압도하는 양상을 띤다. 내용과 형식 사이의 대립과 물질과 정신 사이의 양극성에서 우리는 헤겔이 예술사 에도 변증법적 전개 과정을 대입하고 있음을 본다. 낭 만적 예술 중에도 시야말로 이성, 곧 정신이 가장 고도 로 발현된 장르이다. 하지만 예술은 매체의 감각성과 물질성이라는 한계로 말미암아 완벽하게 절대 정신을 표현하지는 못한다. 정신이 실체화 된 것으로서 예술은 이념을 관조를 통해 인식할 수 있게 해주지만, 모순과 대립으로 특징지어지는 근대에 이르러서는 사유와 성찰 이 예술을 초과하기에 예술은 그 지고한 사명을 다 감 당할 수 없다. 예술은 철학에 그 지위를 넘긴다.23)
관련하여 헤겔이 예술에 관해 내린 충격적인 결론이 저 유명한 “예술의 종언 테제”이다. “그 최고의 규정에 서 예술은 우리에게 과거사이며 한물 간 것이 되고 말았 다”고 헤겔은 엄숙히 선언한다.24) 정신의 발현이 예술의 최고의 사명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오늘날 더 이상 “진리가 자신에게 존재를 부여하는 최고의 방식이 아니다.”25) 그 역할은 철학이 담당하게 되었다. 이제 예 술은 모든 가능성을 소진해 버렸다. 현대적 상황에서 예 술은 인간 삶을 위한 총체적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다. 헤겔의 예술 종말론은 예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든가 창작 행위를 그만두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 술은 앞으로도 계속 존재하고 작품은 계속 생산될 것이 다. 그러나 예술은 자신의 최고의 사명인 인류의 보편적 이고 심오한 관심을 담아낼 능력을 상실했기에 그 중요 성을 상실했다.26) 그것은 이제 그저 낡은 주제를 새롭게 변주할 뿐이다. 그러기에 우리 시대는 예술행위 그 자체 보다 예술에 대한 이론이 더 요구되는 시대이다. 헤겔을 따르자면 미학, 즉 예술철학의 출현이야말로 예술의 종 언의 징후적 현상인 셈이다. 논란거리인 예술의 종언 테 제는 단순히 예술 장르의 쇠퇴를 가리키는 게 아님은 물 론이다. 헤겔이 ‘산문적’이라 불렀던 혼란스럽고 모순에 가득 찬 시대에, 예술이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이념 과 정신을 담고 표현하기에는 적절치 않은 역사적 국면 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결국 문화 전반에서 예술의 역할 과 지위가 하강하고 과거의 가치와 지위를 잃게 되었는 데, 이는 그냥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역사 발전의 논리 적 필연성에 따라 일어난 사태이다.
이상에서 헤겔은 미학, 즉 예술의 철학을 자신의 관념 철학과 역사 철학과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견고한 건축 물로 구축한다. 헤겔을 통해 예술작품의 내용들은 (거의 처음) 그 배경에 있는 역사와 연관 지어서 이해되고 설 명되는 단초를 마련했다. 베르너 융은 헤겔 이후에 처음 으로 예술사나 독문학사 같은 분과들이 1830년에서 70 년 사이에 형성되었음을 지적한다.27) 우도 쿨터만 역시 제반 역사학들의 성립, 특히 학문으로서 미술사학의 성 립에 헤겔이 크게 기여하였음을 말한다.28) 당시 개별 분 과 학문으로 부상하는 미술사학(그리고 건축사학)이 주 요개념과 원리와 방법을 헤겔에게서 빌려왔다는 뜻이다.
정리해 말하자면 헤겔의 역사 철학과 미학이 담고 있 는 주요 사상이 후대에 미술사 연구와 서술의 내용이자 방법에 막강한 영향을 미쳤고 조형예술사, 혹은 건축사 학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미술 사학/건축사학의 전통 속에서는 다양한 학파와 학자들 이 등장하여 여러 상이한 관점으로 자신의 학설을 개진 하면서 대상과 시대를 달리하는 많은 텍스트들을 생산 하였음을 발견한다. 하지만 헤겔주의를 공유하고 있다 는 점에서 그것들은 동일한 기초에 터 잡고 있다. 역사 주의, 즉 각 시대의 고유성과 개별성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모든 역사적인 것은 초인간적이고 초시간적인 어떤 원리의 표명이라는29) 선험적인 형이상학을 발견하 게 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열거하자면 각 시대의 정 신의 소산으로 미술/건축을 간주하는 것, 보편사 혹은 전체사로서 미술과 건축의 역사를 서술하는 것, 역사의 방향과 진로를 구하는 목적론적 사관, 역사 발전의 내 적 논리가 존재한다는 전제 하에 그 규칙을 제시하려는 것, 발전의 동인과 원동력을 건축 외부에서 찾으려는 것, 대립적이거나 모순적인 쌍을 내세우고 통일과 화해 를 구하는 것, 작가와 작품을 시대의 표현이자 증인으 로서 바라보려는 집단주의적 관점 등과 같은 것들이 그 것이다.30) 이렇게 볼 때 헤겔을 미술사학의 아버지 혹 은 기원이라 부르는 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4.헤겔주의 건축사학
독일에서 본격화된 미술사학이 사변적인 성격을 띠고 양식의 발생과 진화를 중심으로 서술되면서 그것을 역사 속에 시대정신의 발현으로 본 것은 우연이 아니다. 헤겔 의 영향 하에 미술사는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학문으로서 자리 잡을 수 있었고, 건축사 연구는 조각, 회화사와 더불 어 조형 예술사로 수행되었다. 그 학문적 전통 내에서 19 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사이에 미술사학은 독자적인 분 과학문으로 등장하게 된다. 개별 작품, 작가에 앞서 “원리 에 입각해 역사 경과의 법칙성을 추구하는 것”이 더 중시 되었고,31) 작가와 작품 연구도 그런 목적과 병행하여 이 루어졌다. 무엇보다도 형식(form)과 양식(style)을 분석 비교하며 그 진화를 추진하는 내재적인 힘이나 원인을 발견하는 것이 연구의 주요 목표가 됐다. 베를린에서 헤 겔의 강의를 들은 법관 출신인 칼 슈나제 같은 인물에서 이미 그런 영향은 나타나지만 본격적인 학문적 전통의 수립은 야콥 부르크하르트 같은 학자를 통해서였다.
헤겔의 또 다른 제자인 쿠글러 밑에서 성장한 부르크 하르트는 독일계 미술사학의 양대 학파인 바젤학파와 비엔나 학파 중 전자의 태두로 간주되곤 한다. 작품의 형식적 발전과 양식의 징표를 구하는 게 바젤학파의 특 징인데, 개별 작품들을 유형화하고 공통되는 특질들을 분석하면서 미술사의 개념을 세우고자 하였다. 이태리 건축사를 주로 다룬 『이태리 르네상스의 역사』에서 부 르크하르트는 건축사를 연대기적으로 보지 않고 유형학 적인 접근을 시도했다32). 그는 조형 예술이 독자적인 삶과 역사를 갖는다고 보아 양식의 역사를 쓰고자 했고 그 법칙을 공식화하여 했다. 바젤학파의 전통은 부르크 하르트의 제자인 뵐플린과 슈마르조, 간트너, 그리고 본 격적인 건축사가인 프랑클과 기디온으로 이어졌다.
걸출한 미술사학자인 뵐플린은 양식의 변화를 내재 적으로 결정되는 자율적 과정으로 보고 그 발전의 논 리를 수립하려 했다. 그는 형식 분석을 통해 한 시대의 보편적인 표현 형식을 밝히고자 하였는데, 양식이 작가 나 사회적 조건과 무관하게 자체의 내적 원리에 따라 발전한다는 이론을 펼쳤다.33) 그것은 『예술사의 원리』 에서 다섯 쌍의 대립 개념으로 구체화되는데, 르네상스 건축과 바로크 건축을 이해하는 유력한 이론으로 오늘 날까지도 통용되고 있으며 양식의 이행 과정을 공식화 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34) “모든 것이 모든 시대에 가 능한 것은 아니다”라든가 “새로운 시대정신이 새로운 형식을 강요한다”는 유명한 그의 경구는 헤겔적 사유 의 미술사적 판본인 셈이다.35)
이런 사고가 뵐플린의 제자인 프랑클이나 기디온에게 계승되어 특유의 건축사를 쓰게 했으며 근대건축을 보 는 독특한 관점을 낳았다. 두 사람은 슈마르조가 건축을 공간의 견지에서 해석한데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36) 19 세기 이전까지 건축을 설명하는데 등장하지 않았던 ‘공 간’이 갑자기 건축의 고유하고 본질적인 개념으로 부상 한 것이다. 공간은 건축에서 시대정신을 담고 표상하는 매체가 되었다. 프랑클이나 기디온은 건축사에서 양식의 역사를 공간 형식의 역사로 대체하여 건축사학의 학문 적 자율성을 확보하는데 큰 기여를 한 인물들이다37).
리글, 드보르작, 보링거, 파노프스키, 바르부르크, 제 들마이어로 이어지는 비엔나 학파의 전통은 작품의 이 해를 위해 시대정신을 규명하는 것으로, 작품과 양식 배후의 의미, 정신, 세계관을 탐색하는 데 더 주력한다 고 한다. 장식이 기술과 재료의 소산이라는 젬퍼의 유 물론적 해석에 반대하여 『양식론』에서 시대 고유의 ‘예 술 의지’(kunstwollen)가 작동한다는 학설을 편 리글이 나, 이념의 표현으로서 ‘정신사로서 미술사’를 시도한 막스 드보르작, 고딕 건축을 중세 스콜라 철학과 동등 한 물리적 구축물로 보았던 파노프스키가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건축사학, 그리고 근대 건축사학 역시 헤겔주의에 기 초를 둔 전통 속에서 성장하였기에 그 특질을 공유하 고 있음은 당연하다. 특히 나치의 집권은 다수의 학자 들이 영미로 망명하여 대학과 연구소에 정착하는 계기 가 되었고, 이는 원리와 방법에 근거한 헤겔식 미술사 학이 아마추어리즘을 제압하고 정통 학문으로 뿌리내 리는 상황을 제공했다.38) 영어권에서의 독일계 미술사 학의 정착과 그 후학 양성이 제도권의 건축사 프로그 램으로 정착하고 그들의 텍스트 생산이 주류 건축사의 담론을 형성한 것이다. 그 전통의 학문적 기여는 아무 리 강조하여도 지나칠 것이 없겠지만, 시각(양식) 중심, 혹은 공간 중심의 건축사는 가장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예술인 건축에서 다른 측면을 도외시하는 대가를 치르 게 했고, 이후 대안적 역사나 비판적 역사가 등장하는 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고 보인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전통이 펩스너나 기디 온 같은 건축사학자를 통해 모더니즘 건축의 수립과 성장, 그리고 역사적 역할과 의미에 대한 결정적인 지 식으로 제공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모더니즘 건축에 대 한 이론적 설명과 역사 서술에 헤겔주의가 깊이 침투 했다는 것이다. 모더니스트 건축가들은 자신들이 추구 한 신건축에 ‘시대정신’이 깃들어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시대에 적합한 건축을 발명하는 것을 사명으 로 삼았다.39) 그들이 ‘모던’한 형태를 추구했던 이유는 그것이 근대라는 시대와 정신을 표상하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최초의 근대건축사가라 할 펩스너는 근대 건축이 시대적 요구의 산물이며 우리 시대의 보편적 양식(universal style)임을 주장했다. 근대건축의 출현은 다른 무엇보다도 정신(Geist)의 요청에 의한 것이다. 펩 스너에게 근대운동(Modern Movement)은 19세기의 혼 돈 상황을 뚫고 우리 시대의 진정한 양식이 출현하는 과정이었다.40) 뵐플린의 제자인 기디온에게 근대건축의 출현은 대립되는 가치들과 문제들의 화해와 일치의 역 사가 된다. 영향력 있는 저술인 『공간, 시간, 건축』에서 피력했듯 그것은 전 시대의 갈등과 모순의 해결이자 종합의 과정이다. 기디온은 문명사와 결부된 전체론적 관점에서 근대건축의 출현의 의미를 언급한다.41)
두 역사가는 모두 근대 건축이 19세기 건축이 노정 한 혼돈과 갈등의 종결이자 새로운 출발이라는 관점을 취하고 있다. 근대건축은 전 시대의 모순과 문제들이 지양되고 변증법적으로 해결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이 신건축을 정당화할 근거가 되고 동참해야할 윤리적 이유가 된다. 역사의 진로를 대립 구도 속에서 파악하면서 진정한 것과 사이비, 옳은 것과 그른 것, 영 속할 것과 단명할 것 등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일 역시 마찬가지이다. 근대건축을 동일성으로 포착하려는 역사 해석이며, 목적론적 서사이자 구원의 서사로서, 진실이기보다 신화에 가까운 담론의 생산인 것이다.42)
펩스너의 제자인 레이너 밴험은 스승의 편협한 역사 서술을 극복하고 있지만 ‘기술’에서 현대 건축의 진화 를 추동하는 힘을 본 데서 여전히 헤겔적인 사관에 머 문다. 기술은 근대화의 추진력이고 역사 발전의 동인이 다. 밴험은 기술과 예술 양자의 대립에 주목하지만 스 승과 달리 양자의 행복한 통합이나 화해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43) 외양상 반헤겔주의자의 면모를 띠는 로 우의 경우에도 근대건축의 전개를 르네상스 이후의 유 럽 건축사와 상동적(parallel)인 것으로 읽어내려는 데 서 여전히 역사의 단계적 계기를 가정하는 것으로 보 인다. 근대건축의 진화에서 매너리즘이나 신고전주의적 성향을 포착하려는 것이나 뵐플린식 형식 비평 역시 헤겔의 영향이 얼마나 뿌리 깊은 지 보여주고 있다.44)
우리는 헤겔의 역사 철학을 낡은 것, 실재와 동떨어 진 것, 비합리적이어서 설명력이 떨어진 것으로 간주하 고 무시하곤 한다. 그렇다면 왜 그다지도 추상적이며 난삽한 헤겔의 역사관이 근대 역사학과 미술사학/건축 사학에 큰 호소력을 발휘하고 실제의 역사서술의 개념 과 방법을 좌우했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그의 철학 이 지극히 관념적이고 사변적이기에 우리는 헤겔을 먼 과거의 인물로 인식하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채 추상적 인 사유 속에 거한 철학자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헤겔 철학이, 19세기 격동의 역사 속에서 과거의 기준 과 통념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시기에, 분열되고 갈 등하는 세계 속에서 근대(Modern)에 대한 시대적 자각 가운데 태어난 것임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헤겔이야말로 근대성을 대변하는 철학자인데, “철학의 임무는 그 철학이 속한 시간을 사유로 파악하 는 것이라 생각했고 헤겔이 속한 시간이 바로 근대”였 다는 것이다.45) 시대의 분열 속에서 스스로를 정립하고 자 하는 욕구가 헤겔의 거대한 사유의 체계를 수립시켰 던 것이고, 그것은 불안하고 종잡을 수 없는 동시대의 상황에서, 현재와 관련해서 역사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 는 적실한 이론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헤겔의 사상 전체가 정치적인 성격을 띠며, 시대 상황의 산물이자 당대의 고민에 대답하려는 진지하고 야심찬 지적 프로 젝트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마르크시즘에서 보듯 헤겔의 영향사는 실로 심대하다. 헤겔적인 논변이 상당 기간 동안 건축사학 그리고 근대건축사 서술에서 ‘실재’ 의 설명처럼 받아들여진 이유도 수긍하게 되는 것이다.
또 하나 지적해야 할 것은 독일어권에 뿌리를 둔 미 술사학과 그것에서 분파한 건축사학은 헤겔로부터 도 출한 원리와 방법을 바탕으로 엄밀하며 체계적인 학문 을 구축할 계기를 제공받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바젤 학파나 비엔나 학파 같은 두드러진 학문적 전통과 계 보를 성립시켰다. 뿐만 아니라 유능한 다수의 학자 군 을 배출하여 전공의 분화와 심화를 꾀할 수 있었으며, 훗날 영미 학계에 진출하여 주류 사학으로 자리 잡음 으로써 학문적 전통을 수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46) 한편 그들이 헤겔 미학과 역사관의 기계적 적용에 머 물렀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중요하다. 헤겔주의라는 공동의 지반이 있었지만 독자적인 이론과 학설을 내세 우면서 학파 간, 그리고 개별 학자 간에 차이와 개성을 지닌 학풍이 생겨났다. 또한 학파 내에서 스승을 계승 하면서도 비판 극복하려는 학문적 노력과 동료 상호 간에 격한 논쟁과 경쟁 구도로 건설적인 학술 담론을 생산하는 환경이 조성되었다.47) 거기에 더해 이들은 당 대에 부상하는 새로운 학문이나 과학을 수용하여 더 포괄적이고 설명력을 지닌 텍스트를 생산하려는 지적 시도를 계속했고 이는 분과 학문의 발전을 낳았다. 도 상학의 파노프스키, 지각심리학의 곰브리치 역시 전 시 대의 업적을 일정 부분 계승하고 일부를 비판 극복하 면서 헤겔주의의 끝자락에 있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19세기적 학문인 역사학과 관념 철학의 영 향 하에 생산된 미술사학, 혹은 건축사학의 오랜 정전들 은 헤겔의 텍스트가 그렇듯이 난해하고 사변적인 내용과 생경한 용어, 고답적인 진술로 독해에 장벽으로 다가오 는 경우가 많다. 경험적으로나 실재와의 조응에서 받아 들이기 어려운 내용은 더 큰 장애물이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학문적 유산과 방대한 텍스트들은 무시할 것도 아 니고 무시할 수도 없다. 그들의 업적과 성과를 바탕으로 현대 건축사학이 수립되었고 아직도 그들의 텍스트와 담 론들에는 건져내야할 유용한 통찰과 혜안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의 생산적인 재조명과 재전유는 건축사 학의 헤겔적 유산을 새롭게 바라보고 평가할 기회를 제 공할 지도 모른다(부언하자면 헤겔주의에 반대했던 곰브 리치 식의 역사 서술 역시 신미술사의 대두와 더불어 급 격히 낡은 것이 되어가고 있기도 하다).48)
최근 우리는 인문학과 예술사의 담론 장에서 헤겔의 귀환을 목격하고 있다. 수잔 벅 모스의 『헤겔, 아이티, 보 편사』49)나 급진적인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텍스트 들50), 나아가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1997)51), 그리고 미술사가 T. J. 클라크의 비평들이 좋은 예이다. 하지만 오늘의 건축사 서술의 경향을 보자면 헤겔의 귀환은 건축사학에서 생소할 뿐 아니라 뜬금없어 보인 다. 아마도 동시대 건축의 전개가 미술과 상이한 양상 을 띠고 있어서라고 판단되지만 어쩌면 건축사학계의 지적 게으름 때문일 지도 모른다.
5.결론
이상으로 건축사학에서 헤겔적 유산에 대해 살펴보 았다. 그렇다면 현 시점에서 우리는 건축사학에 스민 헤겔적 유산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하여야 할까 라는 문제가 남는다.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는 미술사가 “양식의 역사라는 원리적 유형의 원리를 극복하고”, “초 역사적인 미의 형이상학으로부터 해방될 때에만” 역사 로서 유효하리라고 말한다. 이는 헤겔적 역사서술로부 터의 탈피를 뜻하는 것일 것이며, 건축사학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해당되는 말이라 하겠다. 실제로 오늘의 건축 사 서술이 헤겔주의를 계승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근대 초기의 정전들에서 두드러졌던 헤 겔적 사관으로부터 벗어나 다른 해석들을 추구하고 있 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할 것이다.
시간의 경과에 따른 근대 건축의 변용과 동시대 건축 의 전개 양상은 헤겔주의적 관점으로 근대건축의 역사 를 해석하는 일이 유효하지 않고 근거도 없음을 인식시 켰다. 그의 영향을 받아 쓰인 건축사학의 선행 담론들 의 주장과 논리는 무리(non sense)하거나 궤변으로 받 아들여지곤 한다. 실로 모더니즘 건축과 그 역사 서술 에 대한 비판은 헤겔주의적 전제와 가정을 겨냥한 것이 었다. 한편으론 최근 근대건축에 대한 새로운 서사와 해석의 등장은 헤겔식 역사 서술을 급격히 흘러간 과거 로 만들고 있다. 오늘의 건축사학도 해석학, 현상학, 마 르크시즘, (탈)구조주의, 정신분석학, 페미니즘, 탈식민 주의 같은 다양한 시각을 수용하여 역사 쓰기를 실천하 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건축사학에서 헤겔주의의 유산 은 청산된 것처럼 보이며 이런 저런 ‘비판적’ 역사가 대 신하고 있다고 말하는 게 옳을 것 같다.
건축사 서술에서 헤겔주의의 문제와 폐해를 간단히 말 하자면 그것이 실제 역사와 합치하지 않으며, 그 가정과 믿음과 주장이 근거 없고 위험하며 공허한 관념이라는 것 이다.52) ‘역사주의’(historicism)라는 이름으로 비판받아온 헤겔의 사관은 건축사에서 이념과 도덕과 목적을 상정하 면서 현실이 아니라 이상(ideal)에 의해 건축이 판단되고 실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좌파 역사가인 타퓨리는 역사 의 진행 방향에 선험적인 도식을 가정하고 사실을 왜곡하 여 동시대 건축의 생산과 미래 진로에 영향을 미치려는 사가들의 서술 행위를 ‘작위적’(operative)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53) 그 표적의 대표 격으로 헤겔주의 역사가 해당 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흥미롭게도 이는 우파 자유주의 적 입장에서 이데올로기와 도덕으로 왜곡된 역사 해석에 비판적이었던 콜린 로우와 합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건축사학에서의 헤겔주의를 전 시 대에 유행한 관념론 정도로 폄하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외면하면 될까? 거대 담론과 거대 서사의 생산 자, 장대한 체계의 구축자인 헤겔을 비판하고 무시하기 는 쉽다. 실제로 건축의 (근대) 사학사는 자신을 가능케 한 헤겔주의적 전통으로부터의 탈주와 극복의 역사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 간단치 않은 문제들 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보인다. 건축사학에서의 헤겔적 유산과 관련하여 고려해야 할 사항은 다음과 같다.
우선 헤겔식의 역사서술은 오늘의 건축사 서술에서도 여전히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고 또 우리의 건축 의 인식 역시 그 영향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는 자각 이 중요하리라 본다. 건축사학의 전통을 감안할 때 헤겔 에 반대하든 헤겔을 무시하든 헤겔과 무관한 건축사의 서술을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키스 먹시는 미술사 학에 깃든 헤겔주의를 빗대어 ‘헤겔적 무의식’이란 용어 를 사용했다.54) 무의식이란 말을 쓴 데서 알 수 있듯이 헤겔주의는 학문적 전통 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관행으 로 정착해 잘 의식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는 우리가 헤겔적 유산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뜻한다.
안토니 비들러는 ‘포스트모던’, ‘후기 모던’, ‘해체주의 적’ 같은 용어가 오늘날 실제로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 은 양식들의 교체라는 뵐플린식 접근 방식이 가지는 지속적 힘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55) 이런 역사 서술은 시대와 관련하여 표준형이 만들어지고 변형되 는 과정을 측정하기 위해 특정한 양식들에 핵심이 있 음을 가정하는 것이다. 역사의 진화 과정을 이행으로 도식화하거나 ‘주의’라는 이름으로 레테르를 붙이는 일 이야 말로 헤겔주의의 유산이다. 문제는 이런 방식을 기피하거나 비판하기보다 그것의 일정한 유효성과 불 가피함을 인식하는 일이다. 결국 범주화나 개념화는 역 사 서술에 피할 수 없는 한 가지 방식인 것이다.
장 프랑소와 료타르는 『포스트모던의 조건』에서 근대 의 거대 서사(grand narrative)를 비판하며 “우리가 보편 사의 이념에 기초하여 사건들에 여전히 유기적 질서를 부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이는 헤겔이 가장 대담하고 원대하게 시도한 바이고 료타르가 거기 에 대해 부정적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56) 현대 건축의 다원적 양상을 일별해 보기만 해도 거기서 내재하는 질 서나 방향을 찾고 전경을 그리려는 시도는 분명 무모해 보인다. 그러나 한편 우리는 역사 해석에서의 개념화, 특히 보편성과 총체성을 무조건 포기해야하는가라는 문 제에 당면한다. 그 위험성은 자각하되 일정 범위 내에 그 유용성을 인정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좋은 예로 최근 현대 건축의 전개와 양상을 설명하는 데 지구화(globalization), 혹은 세계화라는 보 편적 추세/과정보다 더 유효한 개념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57) 후기 자본주의와 디지털 기술과 영상 문화 등을 아우르는 지구화라는 도저한 역사적 과정이야말로 현대 건축의 복잡하고 다기한 현상들을 가장 포괄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할 실마리를 제공한다 고 본다. 그것은 현대 건축을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끊 임없는 문화적 재생산 과정으로 파악하게 한다.58)
예술의 종말 테제 역시 동시대 건축사의 이해와 해 석에 여전히 쓸모 있는 한 가지 관점을 제공한다. 일찍 이 근대의 여명에 빅토르 위고는 『파리의 노트르담에』 서 “이것이 저것을 죽이리라”며 책에 의한 건축의 죽음 을 선언했다. 그것은 건축이 근대 이전의 문명사적 비 중, 문화적 역할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고 일개 예술 형식으로 전락하리라는 예언적 언명이었다. 근대 이후 를 이야기하는 오늘날, 우리는 또 다시 건축의 종언/죽 음을 목격하고 있다. 미학을 내세우는 동시대의 건축은 실체감을 잃고 탈물질화하여 한갓 기표나 표층이 되고 있고, 나아가 스펙터클이자 시뮬라크르가 되어 메트로 폴리스에 부유하고 있다. 근대 건축이 기획한 지향들은 다 휘발했고 현대사회에서 건축의 역할과 의미는 과거 와 전혀 다른 것이 되어가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또 하 나의 건축의 종언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보편성을 무조건 금기시하고 타파해야 할 공적(公敵)으로 간주해야 할까? 보편성이 실천이 아니라 인식적인 것이라 할 때 우리는 그것을 무조건적으로 기 피할 이유는 없다고 보인다. 아직 거기에 유용한 가능성 이 남아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론과 비평, 역사가 헤겔을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가장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예술인 건축에서, 실천 차원에서든 담론 차원에서든, 윤리, 유토피아, 이념을 완전히 망각할 수는 없다는 건축 특유의 성격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