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 론
본 연구의 목적은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에 있는, 1996년에 중요민속문화재 제231호로 지정된 ‘엄찬 고택’이 조선전기의 건축으로서 본래 성삼문의 구택이었 음을 밝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평면배치, 입면구조, 창 호, 건축부재의 순으로 각 부분에서 조선 전기와 후기의 양식을 확인하고 이에 근거하여 초창시의 원형 구조를 파악할 것이다. 이어 노은리의 ‘성삼문 구택’과 관련된 조선시기의 문헌자료를 살펴 건물의 내력과 용도를 확 인함으로써 건축 구조에 근거한 판단을 보강할 것이다.
노은리에 소재한 고택이 ‘엄찬고택’이라는 명칭으로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이 집이 본래 성삼문의 외후손 엄찬의 집이었고, 여기에 성삼문(1418∼1456)의 신주를 잠시 안치했다는 주장에 의거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한문 기록을 잘못 해석한 데에서 비롯한 것으로, 이 고택은 엄찬과 전혀 관련이 없다. 이 고택이 기록에 나오는 대로 성삼문의 신주를 잠시 안치했던 곳이라면 ‘엄찬고택’이 아니라 17세기 중엽에 ‘성삼문의 구택’으 로 알려졌던 집에 해당한다.1) ‘엄찬고택’은 잘못된 명 칭임이 분명하므로 본고에서는 편의상 ‘노은리 고택’으 로 지칭하겠다.
노은리 고택은 현재 충청남도와 경상북도 등에 분포 해 있는 ‘口’자형 조선시대 양반주택의 배치양식을 따 르고 있다. 구조면에서는 조선후기 양반주택에서는 볼 수 없는, 입면이 매우 높고 중층공간이 많이 배치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 후술하겠지만, 이는 현존하는 조 선전기의 양반주택 및 문헌기록에서도 확인되는 것이 다. 따라서 노은리 고택의 현재 모습과 문헌 기록을 종합적으로 살펴 건축 양식의 시대적 특징을 확인하고 건축 시기와 원형 가구를 판단하고자 한다.2)
2.홍성 노은리 고택의 건축구조 분석
2-1.평면 분석
노은리 고택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비탈진 땅을 상하 두 단으로 고른 대지 위에 중정을 둘러싼 ‘口’자 형으 로 지었다. 상단과 하단의 단차는 약 1m에 달한다. 상 단에는 몸채를 지었고, 하단에는 좌·우 익랑 및 익랑 의 양 끝단과 직교하는 정면 행랑을 지었다.3)
이 고택의 평면과 입면의 특징은 중정에 면한 쪽은 대칭을 이루는 반면 바깥쪽은 비대칭이라는 점이다. 우선 중정을 둘러싼 공간의 칸살을 보면 <Fig.1>에서 보듯 칸마다 간격이 정연하다. 가로×세로 2.5m 내외의 각 칸이 중정을 둘러싸고 정연하게 배열되어 있다. 대 청은 앞·뒤 2칸으로 구성되었으므로 이를 포함하는 평 면은 좌우로 대칭을 이룬다.
그런데 내부에서는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반면, 외부 에서는 일부 돌출된 부분이 있어 비대칭을 이룬다. 비 대칭을 이루는 공간은 첫째, 몸채 우측에서 우익랑으로 이어지는 총 6칸의 퇴칸 둘째, 몸채 좌측단에서 외부로 연장된 2칸 셋째, 행랑채 좌측 끝단의 1칸이다.4)
우선, 우측의 퇴칸은 2.5m 폭의 주칸 밖으로 1.2m가 확장된 공간이다. 이에 따라 좌측 익랑과 우측 익랑의 평면이 비대칭을 이루게 되었다. 다음으로 몸채 좌측 의 F·E칸 외부로 각기 1칸씩 총2칸이 확장되었다. 따 라서 내정을 둘러싸고 있는, 길이와 폭이 각기 2.5m의 칸살로 구성되는 부분을 기본 공간으로 설정하면, 몸 채의 우측과 좌측에 공간이 덧붙어 비대칭을 이루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행랑은 주출입구 쪽 외부에 2칸이 배치된 반면, 반대쪽 외부에는 1칸이 배치되어 역시 비대칭을 이룬다.
그러므로 노은리 고택의 평면은 중정을 둘러싼 좌우 대칭의 ‘口’자형 공간과, 이 공간에 덧붙어 전체 평면 을 비대칭으로 만드는 공간으로 구분할 수 있다. 단순 히 여기에만 근거하여 ‘口’자형 대칭 공간과 여기에 덧 붙은 공간 사이에 건축의 시간적 선후를 설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집을 지을 때 ‘口’자형 공간을 기본 평면으로 삼았다는 판단은 가능하다. 나아가 이후에 증축한 공간이 있다면 이는 비대칭을 이루는 공간에 해당할 가능성이 크다는 판단 또한 가능하다.
2-2.입면 및 가구 분석
노은리 고택의 평면은 내정 쪽은 좌우대칭을 이루고 바깥쪽은 비대칭이다. 이렇듯 내부에서는 대칭을 이루 고 외부에서는 비대칭인 양상은 입면에서도 나타난다.
내정에서 볼 때 입면은 평면과 동일하게 좌우 대칭 을 이룬다. 좌측 익랑과 우측 익랑은 동일한 높이로 구조되어 주심도리와 종도리의 수평이 일치한다. 행랑 의 높이도 익랑과 같다. 따라서 몸채의 중심에서 행랑 의 중심을 연결하는 선을 기준으로 하면 고택의 내정 쪽 입면은 완전한 좌우 대칭을 이룬다.
반면에 외부의 입면은 대칭을 이루지 않는다. 우선 평면상의 대칭에서 벗어나는 행랑 I칸은 지붕 양식이 우진각이다. 이에 비해 반대편 G칸은 맞배지붕이다. 공 간 뿐 아니라 지붕양식에서도 비대칭인 것이다.
다음으로 좌·우 익랑은 우측 익랑의 퇴칸으로 인하 여 역시 비대칭을 이룬다. <Fig.2>에서 보듯 좌측 익 랑은 지붕 가구가 삼량구조인 반면, 우측 익랑은 삼량 공간 밖으로 퇴칸을 덧붙인 반오량가이다. 그 결과 우 측 익랑 바깥벽의 기둥이 좌측 익랑 바깥벽의 기둥에 비해 짧은 비대칭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몸채 좌우의 지붕 양식을 보면 모두 팔작 지붕이어서 표면적으로는 대칭을 이루는 듯하다. 그러 나 좌측 지붕은 충량과 외기도리를 갖추어 구조상 완결 된 반면, 우측 지붕의 팔작 구조는 매우 억지스럽다.
<Fig.3>에서 보듯 우측 익랑의 퇴칸은 몸채 우측 후면까지 이어졌다. 따라서 몸채 후면 퇴칸의 모서리 기둥은 다른 후면 기둥에 비해 짧다. 다른 후면 기둥 은 길이가 2.53m정도인데 반해 퇴주는 길이가 2.28m 에 불과하다. 이 짧은 퇴주 위에 추녀가 올라감으로써 몸채 우측의 추녀는 몸채 좌측보다 낮게 걸렸다. 매우 부자연스러운 구조이다.
또한 추녀 뒷뿌리도 매우 불합리하게 결구되었다. 일 반적으로 오량가구의 팔작지붕에서 추녀 뒷뿌리는 정 면의 중도리와 측면의 외기도리가 직각으로 결구된 부 분에 얹힌다. 그러나 노은리 고택 몸채 우측의 추녀 뒷 뿌리는, 퇴칸 고주 상부의 도리 위에 얹혀 있다. 이 또 한 유례를 찾기 힘든 구조이다.
더욱이 퇴칸이 없었다면 모퉁이 기둥 역할을 했을 후면의 평주와 그 옆의 기둥 위에 곡선의 보가 결구된 것을 볼 수 있다. 당연히 직선의 도리를 얹었어야 하는 부분이다. 이 보는 1998년 보수할 때에도 갈아 넣지 않 은 구부재이다. 이렇듯 자연스럽지 못한 구조는 이 부 분이 후대에 변형되었을 가능성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그러므로 노은리 고택은 평면과 입면 구조면에서 건 축 시점에 차이가 있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건 축 시점에 선후의 차이가 있다면, 대칭을 이루는 부분 이 먼저 건축되었고 대칭을 이루지 못하는 부분이 나 중에 증축되었을 것이다. 또한 후벽의 휜 보가 도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지붕가구 또한 후대에 변 형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런데 내정에 면한 익랑과 행랑의 입면은 조선전기 의 특징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익랑과 행랑의 기둥은 높이가 3.24m여서 하부에 통로나 창고, 허청 등의 공간 을 배치하고도 상부에 다락을 설치할 수 있을 만큼 높 다. 일부 공간에는 지금도 다락이 남아 있다. <Fig.1> 에서 보듯 현재 대문간 옆 행랑 1칸과 부엌으로 사용한 공간 1칸의 상부에 다락이 있다. 1998년에 보수하기 전 의 사진에는 D칸과 연접한 익랑 상부에도 다락이 있었 던 것이 확인된다. 뿐만 아니라 주남철은 「문화재지정 대상건물현지조사의견서」 5)에서 ‘안채와 사랑채의 끝단 부터 문간채 위에 ‘ㄷ’자형으로 다락을 꾸몄는데 현재 외양간 등으로 쓰면서 일부 다락이 훼손되어 있다’고 기술하였다. 안뜰에 면한 익랑·행랑 상부 전체에 다락 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Fig.4>에서 보듯 보수 전의 사진에는 지금은 다락이 없는 좌측 익랑과 행랑의 상부 에 다락 문틀의 모습이 분명하다. 따라서 익랑과 행랑 상부 전체에 다락이 설치되어 있었음은 추가적인 논증 이 필요치 않다.
그런데 기록에서는 익랑이나 행랑에 중층공간을 많 이 배치한 것이 조선전기 상류주택의 한 특징이었음이 확인된다.6) 세종 때 부녀자가 ‘낭루(廊樓)’에서 얼굴을 내밀고 구경하는 것을 비난한 사례도 이에 해당한다.7) 이 기사에서 비판의 대상은 ‘대소부녀’ 즉, 대소 양반가 의 부녀이므로 ‘낭루’ 역시 양반 주택에 배치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고위 관직을 역임한 유희춘(1513 ∼1577)의 서울 집도 이러한 구조였다. 비가 오자 부인 은 ‘낭루(廊樓)’에 올라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였다.8)
또한 서울에 거주했던 상층 양반 오희문(1539∼1613) 은 임진왜란으로 황폐해 진 죽전동 친가의 모습을 기록 하면서 주택의 배치를 ‘북·동·서 누칸, 몸채, 부사랑[北 東西樓間身梗付斜廊]’이라고 표현하였다.9) 표현이 간략 하여 구체적인 공간배치를 도출하기는 어렵지만 낭루가 몸채[身梗]를 둘러싸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 한 사례들은 조선전기 한성의 상류 건축에서 층루가 보 편적인 요소였으며, 특히 익랑이나 행랑 등의 낭무(廊 廡)를 중층으로 지은 집이 많았음을 알려준다.
이와 같은 구조는 현존하는 조선전기 및 임진왜란 직후의 주택들에서도 확인된다. 조선전기 건축인 예천 의 초간종택 안채의 좌우 익랑과 안동 임청각의 서쪽 익랑이 중층이다. 1628년 건축으로 조선전기 양식을 강 하게 지니고 있는 상주 양진당의 좌우 익랑 역시 중층 이다. 나아가 행랑까지 중층으로 구조한 사례도 확인된 다. 조선전기 건축인 안동의 임청각과 의성김씨종택 안 채의 정면 행랑이 중층이다.10) 이러한 사례들은 조선 전기 기록에서 확인되는 건축적 특징과 일치한다.
따라서 노은리 고택은 익랑과 행랑을 중층으로 지었 던 조선전기 양반 주택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고 판 단할 수 있다. 초창 시기를 조선전기 이전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칭을 깨뜨리는 외부 공간 과, 결구가 어색한 몸채 우측 입면은 조선후기에 증축 한 부분이거나 변형된 구조일 가능성이 크다. 다음 절 에서는 창호와 건축부재에서 조선전기의 양식이 확인 되는지, 건물 각 부분에 건축의 시간적 선후를 적용할 수 있는지 살펴보겠다.
2-3.창호 분석
심하게 퇴락한 노은리 고택은 1996년에 ‘엄찬고택’이 라는 명칭으로 문화재 지정된 뒤 1998년에 가구를 완 전히 해체하는 대규모의 수리보수를 하였다. 가구(架 構)는 수리 전의 모습을 충실하게 재현하였으나, 일부 창호에서 변형이 발생하였다. <Fig. 5>
현재 대청 후벽의 판문은 수리 전의 모습과 전혀 다 르다. 수리 전의 사진을 보면 본래는 3칸으로 구성된 대청 후벽에 좌우로 띠살 쌍창이 있고, 중앙에 띠살 두짝문이 있었다. 그러나 수리보수 과정에서 액자형 문얼굴에 판문을 단 바라지창으로 바뀌었다.
대청 후벽 창호에 대한 분석을 뒤로 미루면, 노은리 고택의 창호는 양식과 용도에 따라 크게 네 종류로 구 분할 수 있다. 띠살문과 띠살창 그리고 다락 진입구와 민살붙박이창이다. 띠살문과 띠살창은 대부분 몸채에 있으며, 기둥 사이를 가로지른 인방에 설주가 직교하 는 방식으로 문얼굴을 형성하였다. 이는 조선후기에 흔히 보이는 것이므로 조선후기에 제작되었다고 판단 할 수 있다.
반면에 다락 진입구와 민살붙박이창의 양식은 조선 전기 내지는 임진왜란 직후의 양반주택에서 확인되는 양 식이다. <Fig. 6>에서 보듯 다락 진입구는 몸채의 A칸 주칸과 D칸의 벽면에 각기 설치되었다. 이 두 개의 진입 구는 문의 크기가 0.6m×1.2m로 협소하며 벽의 중심선에 놓였다. 문지방은 다락 바닥과 같은 수평에 설치되어 사 다리나 받침대를 쓰지 않으면 진입하기에 불편하다. <Fig. 7>
그런데 조선전기나 임진왜란 직후의 주택에서도 이 와 같은 양식의 진입구가 확인된다. 조선전기 건축인 안동의 임청각과 예천의 예천권씨 초간종택 및 영사당 종택에서 확인되며, 상주의 양진당에서도 확인된다.
반면에 조선후기 양반주택의 다락문은 대개 한쪽으 로 치우쳐 있다. 문지방이 방바닥과 비슷한 수평에 놓 이고 안으로 층계를 설치하였으며 문 높이도 높아 진 입에 편리하다. 따라서 벽의 중심선상에 다락바닥과 같은 수평으로 설치된 높고 작은 진입구는 조선전기 양식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한편, 조선후기 양식으로 볼 수 있는 진입구는 노은리 고택 우측의 퇴칸에도 설 치되어 있다(<Fig.6> 우측 사진의 우측 문). 크기는 0.7m×1.5m로 주칸의 문보다 크다. 이 또한 퇴칸이 조 선후기에 증축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민살붙박이창은 창틀이 연귀맞춤한 액자 형으로, 중층으로 구조된 익랑과 행랑의 외벽 상부에 남아 있다. 이러한 양식의 창은 초창시기를 고려후기 까지 올려볼 수 있는 아산의 맹씨행단을 비롯하여 조 선전기의 주택에서 흔히 확인되는 것이다<Fig.11>.
따라서 노은리 고택의 창호 중 몸채의 창과 문, 그 리고 우측익랑 퇴칸의 다락 진입구는 조선후기에 제작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좌측 익랑과 우측 익랑 주 칸의 다락 진입구 및 익랑과 행랑 상부의 민살붙박이 창은 조선전기에 제작되어 그 형태를 지금까지 유지하 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1998년에 대청 후벽의 창호를 본래의 모습과 다르게 바꾼 것은 이전 양식의 흔적이 있는 구부재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것은 곧 조선전기의 전형적인 양 식인 액자형 영쌍창이다. <Fig.8>에서 보듯 대청의 우 측 후벽에는 창틀의 상부를 구성했던 연귀맞춤한 구조 가 남아 있었다. 하부의 부재는 소실되었지만 설주에 는 하부 부재를 연귀맞춤했던 흔적이 보인다. 그리고 연귀맞춤 흔적을 기준으로 설주 상부와 하부를 비교하 면 하부를 가늘게 깎은 것이 확인된다. 이로부터 완성 된 창의 모습은 문얼굴을 제외한 부분이 벽속에 묻혀 문얼굴만 외부로 드러나는 액자형이었음을 알 수 있 다. 그런데 이 액자형 창틀의 상부에는 중간설주를 걸 었던 작은 삼각형의 홈이 분명하게 확인된다.11) 중간 설주가 있는 액자형 쌍창은 조선전기의 전형적인 양식 이다.12) 대청 후벽에는 본래 고식 영쌍창을 설치했으 나 후대에 조선후기 양식으로 교체하여 창문틀의 흔적 만 남은 것이다.
이렇듯 노은리 고택에는 조선전기와 후기 양식의 창 호가 혼재되어 있다. 특히 수리보수 전까지 남아 있었 던, 대청 후벽의 고식 영쌍창 흔적은 이 고택이 조선 전기에 건축되었을 가능성을 더욱 높여준다.
2-4.기둥과 보·도리 분석
노은리 고택 각 영역의 건축 시기는 기둥과 보의 단 면 크기와 길이 등의 통일성 여부에 근거해도 선후 관 계를 판단할 수 있다.
고택의 기둥은 대부분 단면이 24cm 내외로서 몸채 와 행랑채의 구분 없이 크기가 일정하다.13) 그런데 일 부 기둥의 단면 크기는 이 범위에서 많이 벗어나 있 다. 우선 우측 퇴칸의 평주 단면이 다른 기둥에 비하 여 매우 왜소하다. 총 7개의 기둥은 단면이 18cm∼ 19cm에 불과하여 육안으로도 다른 기둥과 쉽게 구별 된다. 앞서 입면을 분석하면서 퇴칸을 후대에 증축했 을 가능성을 확인했거니와 여기에서도 이러한 가능성 이 확인된다. 다음으로 대청 전면 퇴칸의 평주 2개는 각기 20cm×20cm과 21cm×21cm로서 역시 단면 크기가 작다. 기둥의 단면 크기가 건물의 변형이나 수리 이력 을 반영한다면 대청 전면의 퇴주는 후대에 교체된 것 일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보는 일고주오량가인 몸채의 주칸에 27cm×41.5cm의 대보와 21cm×24cm의 종보를 설치하였다. 익랑과 행랑 의 보는 21cm×24cm로 균일하다. 이를 보면 처음 건축 할 때에 오량가인 대청의 종보와 삼량가인 익랑·행랑 의 보를 같은 크기로 계획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 청 툇보의 단면은 18cm×21cm이다.
도리는 몸채부분은 지름 21cm의 굴도리를 사용하 고, 하부에 장혀를 설치하였다. 반면에 익랑과 행랑에 는 18cm×21cm의 납도리를 사용하였다.14) 몸채의 굴도 리와 익랑과 행랑의 납도리는 건물의 격에 차이를 두 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건축부재의 규격에 근거하면 단면이 24cm 내외로 통 일성을 보이는 기둥과, 규격이 동일한 몸채의 종보와 익랑·행랑의 보는 같은 시기에 일관된 계획 하에 설치 되었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그리고 중층을 구조 하는 데 사용된 3.23m에 달하는 높은 기둥은 조선전기 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단면의 크기가 작은 대청 전면 퇴칸의 두 기둥과 우측 익랑 퇴 칸의 7개 기둥은 시기를 달리하여 설치했을 가능성이 있다. 대청 전면의 기둥은 교체한 것인 반면, 퇴칸의 기 둥은 후대에 증축하면서 새로 설치한 것일 가능성이 크 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자세히 살펴보겠다.
3.홍성 노은리 고택 가구의 원형 추정
3-1.초창 이후 변형된 부분 분석
앞장에서는 노은리 고택의 평면, 입면, 가구, 창호, 기둥과 보 등의 건축부재를 분석하여 대칭을 이루는 부분과 대칭을 깨뜨리는 부분, 조선전기적인 양식과 조선후기적인 양식, 건축 시기에 선후의 차이가 있을 가능성이 있는 부분 등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익랑과 행랑의 중층구조와 영쌍창의 흔적 등을 통하여 이 고 택이 조선전기에 건축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 단하였다. 이 장에서는 앞에서 확인한 내용에 기반하 여 초창 이후에 공간이 추가되거나 가구가 변형된 부 분을 확인해 보겠다. 이는 노은리 고택의 원형으로 추 정되는 가구를 도출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노은리 고택에서는 우선, 후대에 증축되었음이 분명 한 부분이 확인된다. 몸채 우측면에서 우측 익랑으로 이어지는 긴 퇴칸이 이에 해당한다. 앞서 팔작을 구성 하는 추녀의 결구, 다락진입부의 양식, 기둥의 단면 크 기 등에 근거하여 이 부분은 후대에 증축되었을 가능 성이 높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후벽에 걸려 있는, 지금 은 도리 역할을 하는 보가 기능상으로도 보의 역할을 하던 시기에는 지붕의 구조가 현재와 달랐을 가능성도 확인하였다.
몸채 우측면의 가구는 본래 맞배 오량가의 몸채 지 붕에 우측익랑이 연장된 맞배 삼량가의 지붕이 직교하 면서 부분적으로 중첩되는 형식이었다. 이러한 구조였 던 것을 퇴칸을 증축하면서 몸채 우측 지붕을 팔작으 로 변경한 결과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된 것이다. 이는 반자 위에 남아 있는, 지금은 구조적으로 역할이 없거 나 역할이 달라진 부재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Fig.9>는 현재 몸채 우측의 C칸 반자 위에서 확인 되는 가구이다. ‘부재1’은 B칸과 C칸 경계에 있는 삼량 가구의 보로 팔작지붕에서는 필요하지 않은 부재이다. ‘부재8’은 ‘부재1’과 평행으로 놓인 것으로 현재 몸채 후벽에서 도리 역할을 하는 보이다. ‘부재2’는 본래 ‘부 재1’과 ‘부재8’ 위에 놓여 삼량가구를 형성하던 종도리 이나, 지금은 후면 보 즉, ‘부재8’과 연결되지 못하고 중간에서 절단되어 있다. ‘부재2’의 절단면은 아래쪽의 ‘부재3’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15) ‘부재3’ 위에 놓인 목 침이 ‘부재2’를 받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변형된 것은 본래 오량 맞배지붕과 삼량 맞 배지붕이 직교하는 구조였던 것을 팔작지붕으로 고친 결과이다. 중도리에 해당하는 ‘부재6’을 설치하고 여기 에 후면 서까래인 ‘부재7’을 얹기 위해 본래 보였던 ‘부 재8’ 위에 결구되었던 종도리, 즉 ‘부재2’를 잘라내고 지금과 같이 처리한 것이다. ‘부재4’는 현재 몸채의 우 측면을 형성하는 서까래이다. 그런데 그 너머에도 서까 래 즉, ‘부재5’가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부재5’는 현재 전혀 기능이 없지만, 과거에는 ‘부재4’와 더불어 몸채와 직교하는 삼량 가구를 형성했던 서까래이다.
이렇듯 본래 몸채의 우측면과 직교하면서 삼량가의 지붕을 형성했던 부재 대부분이 팔작지붕으로 바뀐 지 붕의 하부에 지금도 남아 있다. 따라서 몸채 우측의 지붕 가구는 팔작이 아니라 몸채의 오량 맞배지붕과 익랑이 연장된 삼량 맞배지붕이 직교하는 구조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몸채 우측면에서 익랑으로 이어지 는 퇴칸 전체가 후대에 증축되었음은 별도의 논증이 필요치 않다.
다음으로 행랑에서 비대칭을 이루는 부분을 살피면, 우측은 G칸이 외부로 돌출된 반면, 좌측은 H·I 두 칸 이 돌출되었다. 따라서 초창 이후에 추가되었다면 좌 측 끝의 I칸일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가능성은 행랑 우측 끝 G칸이 맞배지붕인데 반해 I칸은 우진각지붕이 라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또한 I칸의 인방 수평이 다른 칸들과 다르다는 점도 이러한 가능성을 높여준다.
그런데 인방의 수평은 H칸과 I칸이 동일하다. <Fig. 10>에서 보듯 H·I칸의 인방이 통일성을 띠면서 다른 칸들과 다른 위치에 걸려 있다. 그러나 기둥의 홈을 보면 H칸은 본래 다른 칸들과 같은 위치에 인방이 걸 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배면에서 I칸을 구성하는 두 기둥은 새로 교체한 것이어서 홈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H칸과 그 옆 칸 사이에 있는 기둥에는 옆 칸 의 인방이 걸린 수평에서 H칸 쪽으로 파인 홈이 남아 있다. 즉 H칸에도 옆 칸과 동일한 수평에 인방이 설치 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전면에서 더욱 뚜렷하게 확인된다. 전면에서 H칸과 I칸 사이의 기둥은 교체하지 않은 구 부재이다. 그런데 H칸과 I칸 사이의 기둥은 H칸 쪽으 로는 다른 칸의 인방과 동일한 수평에 홈이 있는 반 면, I칸 쪽으로는 해당 위치에 홈이 없다. 그리고 H칸 과 그 옆 칸 사이의 기둥에도 역시 H칸 쪽으로 난 홈 이 남아 있다.
따라서 현재 I칸의 인방은 본래의 위치인 반면, H칸 의 인방은 후대에 변경된 위치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 다. 그러므로 행랑 좌측 끝의 I칸은 후대에 증축한 부 분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더불어 H칸의 인방이 다른 칸들과 같은 위치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므로 H칸 상 부에도 다른 칸과 동일하게 다락이 시설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16) 또한 행랑의 우측 끝 칸이 맞배지 붕이라는 점에서 행랑 좌측의 지붕가구 역시 맞배지붕 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렇듯 노은리 고택은 ‘口’자 공간의 외부에서 대칭 을 깨는 부분 중 우측 퇴칸과 행랑 좌측의 I칸이 후대 에 증축되었음이 확인된다. 몸채 우측의 지붕 가구도 맞배에서 팔작으로 변형되었음이 확인된다. 반면에 몸 채의 좌측 부분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몸채 우측 퇴칸과 행랑 I칸의 사례를 고려하면, 이 부분도 후대에 증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상부 가구가 전형적인 팔작 구조일뿐더러, 1998년 수리할 때에 기둥과 도리를 새 부재로 교체했 으므로 후대의 변형 여부를 판단할만한 흔적이 확인되 지 않는다. 이 부분의 평면과 가구가 초창시의 모습이 라면 사랑채가 확장되어 주택의 대칭성이 교란되기 시 작한 초기의 양식을 반영한다는 판단이 가능하다. 조 선후기 한옥에서는 익랑이나 행랑 공간이 사랑채로 확 장되었지만 노은리 고택의 익랑과 행랑은 전체가 중층 구조여서 주거공간으로 삼기에 적절치 않았으므로 몸 채 바깥으로 공간을 확장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근거를 갖추지 못한 추정일 뿐이다. 게다가 바닥의 장마루는 조선 전기는 물론 조선 후기 에도 일반적이지 않는 양식이라는 점에서 매우 늦은 시기에 증축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여, 본래부터 현재의 모습으로 건 축되었을 가능성과 후대에 증축되었을 가능성을 모두 열어두겠다.
몸채 좌측의 확장된 공간을 논외로 하면, 주택의 평 면은 완벽한 좌우 대칭을 이룬다. 이는 현존하는 조선 전기의 양반 주택 대부분에 적용할 수 있는 평면이라 는 점에서도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입면은 조선후기의 다른 주택들과 달리 대칭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몸채 우측의 상부 가구는 본래 익랑과 동일한 구조 의 A·B·C칸이 몸채의 측면으로 연장되어 후벽까지 뻗 어나가는 구조였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몸채 좌측에 서 확장된 공간을 제거하면 오량 맞배지붕의 거대한 박공이 몸채의 측면에 노출되고, 몸채의 전면에 삼량 구조의 D칸이 연접하는 형태가 된다. 같은 맞배지붕이 면서도 좌우의 구조가 같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F·E칸 외벽에 놓인 대보와 그 위 종보에 놓인 운형 대공 때문이다. F·E칸의 외벽 에는 단면이 29cm×40cm인 대보를 통칸으로 건너지르 고, 그 위에 종보와 운형(雲形) 대공을 올렸다. 대보 중간 하부에는 기둥을 설치하였다<Fig.11>. 통칸보와 보 중간의 기둥, 운형 대공은 대청과 대청 좌우의 벽 면에도 설치되어 통일성을 보인다. 특히 총 5개에 달 하는 운형 대공은 재질이나 색감이 일정하여 시기를 달리하여 설치한 흔적이 확인되지 않는다. 게다가 몸 채 좌측 외벽의 기둥 위에는 정교하게 깎고 초각한 주 두를 올려놓았다. 대청 좌우 벽의 통칸보 밑에도 기둥 을 두었지만, 주두는 유일하게 F·E칸 외벽 기둥 위에 만 두었다. 이처럼 정교한 주두를 설치한 것은 외부에 서 바라보는 시각적 효과를 노렸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F·E칸 외부의 확장된 공간이 본래 없었다고 해도 몸채 좌측의 지붕 구조는 우측과 달랐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몸채 우측처럼 삼량 구조의 좌측 A· B·C칸이 뒷벽까지 이어졌다면 외벽에 대보와 종보, 대 공을 설치하는 것은 필요 없을 뿐더러 설치 자체가 불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건축 당시부터 맞배 오 량가의 박공을 노출시켜 시각적 효과를 거두고자 이러 한 구조를 채택했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3-2.노은리 고택의 원형 가구와 시대적 특징
앞 절에서는 조선전기 건축으로 판단되는 노은리 고 택에서 후대에 추가되거나 변형된 부분을 확인하면서 본래의 평면과 입면을 도출하는 작업을 하였다. 그 결 과 몸채 좌측으로 확장된 2칸은 증축 여부를 판단할 수 없지만, 우측의 퇴칸과 행랑 좌측 끝 칸은 후대에 증축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판단을 보류한 부분 을 논외로 하면, 노은리 고택의 원형은 좌우 대칭의 평면과 맞배지붕의 좌우 비대칭 입면을 이룬다. 이러 한 평면과 입면 구조를 도시하면 아래와 같다. <Fig.12>
<Fig13>과 <Fig.14>에서 보듯 노은리 고택의 원형으 로 추정되는 지붕 가구는 몸채는 오량 맞배, 익랑과 행랑 은 삼량 맞배였다. 우측은 익랑과 동일한 구조의 A·B·C 칸이 오량가구의 몸채와 일부 중첩되면서 후면까지 연장 되었다. 좌측은 E·F칸이 오량가구 몸채의 일부분을 구성 하였으며, 좌측 익랑과 동일한 삼량 가구의 D칸이 몸채 전면에 연접하였다. 그 결과 좌측은 몸채의 큰 박공이 외 부로 노출되는 시각적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Fig.14>.17)
입면은 중층으로 구조된 칸이 매우 많았다. 판단을 유 보한 두 칸의 공간을 제외하면, 고택의 본래 칸수는 총 25칸이다. 이 중 하단부에 자리한 익랑과 행랑 13칸의 상부에 모두 다락을 설치하였다. 이렇듯 많은 평면에 다 락을 배치한 사례는 조선후기 주택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이러한 구조는 조선전기 양반 주택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특히, 안동의 임청각은 노은리 고택과 유사하게 익랑과 행랑을 중층으로 구조하여 전체 평면에서 중층 공간이 차지하는 비율이 매우 높다.
이처럼 중층 공간을 많이 배치한 것은 온돌이 보편화 되지 않았던 조선전기 주택의 건축 양식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기록에서는 임진왜란 이후에 궁궐을 포함한 상류 주택에 온돌이 급속히 확산된 것이 확인된다. 그 전에는 방바닥에 풀로 짠 자리를 두텁게 깔고 벽에 병풍 과 휘장을 둘렀으며, 화로로 난방을 하였다.18) 따라서 조 선전기 양반 주택에서는 온돌을 설치한 공간이 없거나 조선후기에 비해 매우 적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에도 노은리 고택에서 구들을 시설할 수 있는 공 간은 대청 좌우의 6칸에 불과하다. 이 중 C칸과 F칸은 화기가 충분히 미치지 못하므로, 겨울철 난방이 가능한 공간은 4칸에 불과하다. 이렇듯 전체 칸 중 온돌을 설치 할 수 있는 공간이 적은 것 역시 노은리 고택이 조선전 기의 건축 양식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노은리 고택의 추정 원형이 조선전기의 양식을 간직하 고 있음은 지붕의 가구에서도 확인된다. 초창 시기를 고 려후기까지 소급할 수 있는 맹씨행단의 지붕 구조는 본 고에서 원형으로 도출한 몸채 우측의 가구와 일치한다. 맹씨행단의 몸채는 노은리 고택과 동일하게 오량가이다. 이 몸채와 직교하는 삼량가구의 종도리를 몸채의 중도리 와 같은 수평에 배치한 결과 지붕 중간부터 기와골이 형 성되었다. 이는 곧 노은리 고택 몸채 우측면의 원형 구 조이다. 이러한 지붕 구조는 임진왜란 이전의 건축양식 을 간직하고 있는 상주의 양진당에서도 확인된다. <Fig.15>
이제까지 노은리 고택의 추정 원형을 도시하고 이에 근거하여 조선전기 양식으로 판단할 수 있는 특징들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중층 공간이 많고, 온돌을 시설하기 불리하며, 조선전기 주택에서 확인되는 지붕 가구를 지 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 근거하면 노은 리 고택은 조선전기에 건축되었으며, 이후 시대의 흐름 에 따라 변화된 양식과 필요한 공간을 추가하여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4.문헌으로 살펴본 홍성 노은리 고택의 연혁
4-1.‘성삼문 구택’에 대한 초기 기록
앞에서 노은리 고택의 각 요소를 분석하여 이 주택 이 조선전기에 건축되었으며, 현재도 조선전기의 양식 을 많이 간직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렇듯 수백 년 동안 유지되어 왔으면서도 이 고택의 유래나 조선시대 의 소유자 및 가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전혀 없 다. 이러한 규모의 고택 중에서 신빙할 만한 기록이나 전승이 전혀 없는 건물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점 에서 노은리 고택은 다른 주택들과는 다른 특별한 사 정을 간직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노은리가 성삼문(1418∼1456)이 생장한 곳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 고택을 문화재로 지정 하면서 ‘엄찬고택’으로 명명한 것도 이 때문이다. 1672년 에 인왕산에서 성삼문의 신주가 발견되자 이를 노은리고 택에 안치했으며, 이 집의 주인이 바로 엄찬이었다는 것 이다. 그러나 이는 1672년에 송시열이 「작성한 홍주노은 동천봉성선생신주기」 19)를 잘못 해석한 것으로 전혀 사실 이 아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엄찬은 서울에 살고 있었는 데, 신주가 발견되자 잠시 그의 집에 봉안했다가 송시열 의 자문을 받아 지금의 노은리에 있던 ‘성삼문의 구택’으 로 알려진 집으로 옮겨 안치하였다.20) 그런데 문장을 잘 못 해석하여 성삼문의 신주를 안치한 노은리의 고택을 엄찬의 집으로 오인한 것이다. 이는 “공의 외후손 엄찬의 집에 임시로 안치했다가 홍주에 사는 외후손에게 알려 받들고 남쪽으로 갔다. 홍주 노은동에는 아직도 공의 구 택이 있기 때문이었다”라는 『연려실기술의』 기록에서도 분명하게 확인된다.21) 또한 성삼문의 신주가 발견되었을 때 박호의 신주도 함께 발견되었다. “박호는 성삼문의 맏 사위 박임경의 아들이고 엄찬은 또 박씨의 외후손이다” 라고 한 『성호사설』의 기록은 엄찬과 성삼문의 관계를 분명하게 알려준다.22) 성삼문의 신주는 박임경의 외후손 으로서 서울에 살고 있던 엄찬의 집에 안치되었다가 노 은리에 있는 성삼문의 고택으로 옮겨간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엄찬고택’이라는 명칭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지금의 노은리 고택이 성삼문의 신주를 안치했던 바로 그 집이라면 명칭은 마땅히 ‘성삼문고택’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고택에 성삼문의 신주를 모셨다는 확실 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삼문의 구택으로 알려진 집이 노은리에 있었다는 사실은 현재 노은리 고택의 유래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가 된 다. 앞 장에서 구조 분석을 통하여 노은리 고택이 조선 전기 건축임을 확인하였다. 그러므로 성삼문의 신주를 노은리에 있던 ‘성삼문의 옛집’으로 옮겨 봉안했을 당시 에도 지금의 노은리 고택은 이 자리에 있었음이 분명하 기 때문이다. 노은리에 있었던, ‘성삼문의 옛집’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은 1652년에 확인된다.
조경(趙絅)은 사육신을 표창하자고 건의하며 “예전에 홍주(홍성) 땅에 살면서 자세히 물어 보니, 성삼문은 본 디 홍주 사람으로 그 옛집[舊廬]이 아직 무너지지 않았 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23) 비록 전해들은 것이지만, 당 시 성삼문의 집이라고 전해 오는 고택이 홍성에 있었음 을 알 수 있다. 1652년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겨우 60 년이 지난 시점이므로 당시 성삼문의 집으로 알려진 고 택은 조선전기 건축임이 분명하다.
‘성삼문의 옛집’은 이후 송시열이 1668년에 작성한 「홍 주성선생유허비(洪州成先生遺墟碑)」 에서 확인된다. 여기 에서는 “선생은 본관이 창녕이고 영락 무술년에 홍주의 적동리(赤洞里)에서 태어났다. 고을 사람이 그 집을 숭상 하여 지금까지 들보와 기둥이 탈이 없다”고 기술하였다. 사육신을 추앙하는 분위기 속에서 성삼문을 기념하는 의 미를 지닌 집으로 인식되어 관리를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건축된 지 오래된 만큼 심하게 퇴락했음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지금 임금 9년(1668)에 여흥 민유 중 공이 관찰사가 되어 와서 살펴보니 나무는 늙고 집은 무너져 보이는 것이 다 황량하였다”는 표현에서도 확인 된다.24) 그리고 1672년의 「홍주노은동천봉성선생신주기 (洪州魯恩洞遷奉成先生神主記)」 에서는 고택의 소재 및 들보와 도리 등 주요 부재는 그대로 두고 벽체만 새롭게 하는 방식으로 고택을 수리한 사실이 확인된다.
일찍이 감사 민유중에게 ‘선생의 옛집이 홍주 노은동에 있으며 당시 뜰에 있던 나무도 탈이 없다’고 하는 것을 들었다.(중략)마침내 청사(廳事)에 들어가 북벽 아래에 남쪽을 향하여 안치하였다. 대개 민 감사가 일찍이 그 앞에 비석을 세우려고 먼저 수리를 하였으므로 들보와 도리는 갈지 않았지만 벽은 마침내 새롭게 되었으니 마 치 기다린 것 같았다.25)
위의 내용에 따르면 충청도 관찰사 민유중이 송시열에 게 성삼문의 옛집이 홍주 노은동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성삼문의 구택 앞에 비석을 건립할 계획을 세우 고 먼저 집을 수리하였다. 수리는 들보와 도리는 원형을 유지하되 벽을 새롭게 하는 방식으로 하였다.
이로부터 ‘성삼문의 옛집’은 주인 없이 비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인이 있었다면 그 때까지 집이 보존된 이 유를 ‘성삼문을 숭상하는 고을 사람들’에 두지 않았을 것 이다. 응당 ‘아무개의 집’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며, 신주를 안치하는 과정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한 인물로 기록에 등장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성삼문의 옛집’이라고만 표현 되었을 뿐 이 집과 관계되는 인물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이를 고려하면 ‘성삼문의 옛집’은 주인 없이 비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는 이 집이 당시의 전승대로 성삼문의 옛집이었을 가능성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성삼문이 역적으로 규정된 뒤 국가에 몰수됨으로써 빈집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서울에 있던 집이 관청 건물이 되었고,26) 연산(連 山) 한양촌에 있던 별업(別業)의 토지와 노비가 충훈부 에 몰수되었다는 기록에서도 확인된다.27) 따라서 ‘성삼문 의 옛집’으로 알려진 집은 실제로 성삼문이 살았던 집이 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의 노은리 고택이 ‘성 삼문 구택’으로 알려졌던 그 집이라면 현재 노은리 고택 에 주인이나 가문에 대한 전승이 전혀 없는 이유를 충분 히 납득할 수 있다. 주인 없는 빈 집이었기 때문이다.
기록에서 전하는 ‘성삼문의 옛집’이 곧 지금의 노은리 고택일 가능성은 감사 민유중이 ‘들보와 도리는 원형을 유 지하되 벽을 새롭게 하는 방식’으로 수리했다는 기록에서 도 확인된다. 앞장에서 살핀 것처럼 노은리 고택의 창호는 대부분 조선후기 양식이다. 익랑·행랑 상부의 민살붙박이 창과 다락 진입구가 조선전기의 양식일 가능성이 있고, 고 식 영쌍창의 흔적 하나가 1998년 수리 전까지 남아 있었 을 뿐이다. 반면에 가구는 조선전기의 모습을 비교적 충실 하게 간직하고 있다. 이는 민유중이 수리한 결과와 일치한 다. 이와 같은 점들은 지금의 노은리 고택이 ‘성삼문의 옛 집’일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할 수 있게 한다.
4-2.사우 창건 이후 ‘성삼문 구택’의 이력
성삼문의 신주는 1672년에 노은동의 옛집에 안치되었 다가 1676년에 사우(이후에는 노은서원)를 지어 옮겨 안 치하였다. 이후의 고택과 관련된 기록은 연대기와 문집 등 다양한 자료에서 확인된다. 1676년에 윤증은 성삼문 의 신주를 사우로 옮겨 봉안하면서 “아아, 여기 노은동 에는[噫玆魯洞] 성삼문의 구택이 있는데[神問舊宅], 집이 우뚝 섰으니[有廬巋然] 지나는 자가 예를 표한다[過者所 式]”라는 표현이 있는 제문을 지었다.28)
또한 1692년 홍주 유생의 상소문에는 “성승의 무덤이 본 고을 노은동에 있는데 구택에서 몇 리 정도로 가깝 다”는 표현이 확인된다.29) 1725년의 상소문에도 “고을의 노은서원에서 사육신을 제향하며, 성삼문의 구택이 아직 도 남아 있고 성삼문의 아비 성승과 성삼문 처의 무덤이 또한 있다”라는 표현이 있다.30)
‘성삼문 구택’의 존재는 1744년에 작성된 「홍주성선 생삼문유허비추기(洪州成先生三問遺墟碑追記)」 에서 더 욱 분명하게 확인된다. 여기에서는 ‘구려(舊廬)’ 즉, 성 삼문의 옛집이 1706년부터 성삼문의 부친 성승을 제사 하는 사우로 이용된 것이 확인된다.31) ‘성삼문 구택’은 신주를 옮긴 뒤에도 서원에 소속되었거나 서원의 관리 를 받으며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홍주성선생삼문유허비추기」 에서는 이 유허비 가 세워진 지점과 성삼문 구택과의 거리를 판단할 수 있 는 표현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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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송시열[尤菴]이 현종 무신년(1668)에 찬술한 비문을 민 유중[文貞]이 돌에 새기려다 이루지 못하였다. 숙종 경오 년(1690)에 비로소 비석을 세웠는데 단지 ‘창녕 성선생 아무개의 마을[閭]’이라고만 쓰고 글은 비워 두었다.(중략) 지금(1744년) 이기진이 이 고을의 수령이 되어 비석을 보 고 탄식하며 “비가 있는데 글이 없으니 어떻게 뒷사람에 게 보일 것인가? ‘유허(遺墟)’라고 하지 않고 ‘마을[閭]’이 라고 했으니 의가 없지 않은가?”라고 하고 드디어 다시 갈아서 전액을 쓰고 법식대로 그 글을 새겼다. 그 돌은 실로 민유중이 갖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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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송시열이) 비문을 이룬 지 4년 뒤인 임자년(1672)에 성삼문의 신주가 인왕산 벼랑에서 나오자 경외의 선비들 이 송시열의 지시를 받아 유허의 옛집[舊廬]에 봉안했으 니 집 또한 민유중이 수리한 것이다. 그 상세한 내용은 송시열의 기문 중에 있다. 또 병진년(1676)에 여러 선비 가 사우를 그 옆에 세우고 선생을 제사하며 신주를 위판 으로 옮겨 받들었다.32)
위의 인용문에서는 비석에 새긴 글의 변천과(①) 성 삼문 구택과 사우(서원)의 상대적인 위치가(②) 확인된 다. 송시열은 1668년에 비문을 작성했고, 민유중은 비 문을 새길 돌을 마련했으나 결국 새기지 못하였다. 비 석은 이로부터 22년이 지난 1690년에 세워졌다. 그러 나 단지 ‘성삼문의 마을[閭]’이라고만 새겼을 뿐이다. 송시열의 비문을 새긴 비석은 이로부터 다시 54년이 지난 1744년에 건립되었다. 1690년에 새긴 글을 깎아 내고 1668년에 작성된 송시열의 기문을 새긴 이 비석 은 지금도 노은서원 터에 남아 있다.
그런데 1690년에 세운 비석에 ‘성삼문의 집’이 아니라 ‘성삼문의 마을’이라고 새긴 것이 주목된다. 비석을 성삼 문의 집 앞에 세웠다면 당연히 ‘성삼문의 집’이라고 새겼 을 것이다. 이로부터 1690년에 비석을 세운 자리는 성삼 문의 집 앞이 아니라 사우(노은서원) 앞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본래 민유중은 1668년에 성삼문의 옛집 앞에 기념비를 세우려고 돌을 마련했다. 그런데 1772년에 신 주가 발견되고 사우(서원)에 신주를 봉안하게 되자 1690 년에 그 돌을 사우 앞에 세웠다고 볼 수 있다. 그 위치 는 성삼문 구택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는 지점이어서 ‘성 삼문의 마을’이라고 새겼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곧 현재 ‘성삼문선생유허지’로 지정된 노은서원 터와 노은리 고택 사이에 적용할 수 있는 거리이다. 유 허비가 서 있는 노은서원 터는 노은리 고택에서 약 400m 거리에 있다. 노은리 고택이 성삼문의 구택이라면 서원 앞의 유허비에 ‘성삼문의 집’이라고 새기는 것은 적 절치 않다. ‘성삼문의 마을’이 적절하다. 또한 이기진이 ‘‘유허(遺墟)’라고 하지 않고 ‘마을[閭]’이라고 했으니 의 가 없지 않은가?”라고 한 것에서도 비문에서 가리키는 것은 성삼문 구택이 아니라 구택을 포함하는 노은리 일 대였음을 알 수 있다.33) 그리고 1784년에도 성삼문의 구 택이 성승의 별묘로 사용되면서 존재한 것이 확인된다.
성상 재위 8년 갑진(1784년, 정조 8)년.(중략) (1672년에; 필자) 선비와 관리들이 신주를 받들어 홍주 노은동에 있 는 선생의 구택으로 신여에 실어 돌아왔다. 또 여섯 분 선생의 원우(노은서원)를 그 옆에 세우고 구택은 별도 로 총관공(성승)을 제사하는 곳으로 삼았다.(중략)지금 (1784년) 이 첩(증직첩)을 이 사당에 보내는데(중략)총관 공을 찬성으로 증직하는 첩과 아울러 작은 궤에 담아 서원의 유생에게 붙여 구택에 간직하게 하였다. 이에 시말에 대한 기록을 갖추어 기문을 쓴다.”34)
위의 인용문은 엄숙(嚴璹, 1716∼1786)이 찬술한 기문 으로 1784년에 성승을 추증한 교첩을 성삼문의 구택에 봉안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로부터 1784년 시점에도 ‘성 삼문 구택’이 여전히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서원 의 관리를 받으며 별묘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퇴락하지 않고 장기간 유지되었음도 짐작할 수 있다. 김정호가 1861∼1866년 사이에 작성한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는 노은서원의 현황을 소개하면서 성승을 ‘별사(別祠)’에 배향하였다고 기록하였다.35)
이처럼 성삼문의 구택은 서원이 철폐되기 전인 1871년 까지는 노은리에 존재하였다. 따라서 지금의 노은리 고 택은 ‘유허의 옛집’이나 ‘구택’으로 표현된 성삼문의 고택 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서원이 철폐된 뒤에 어 떠한 변화를 겪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고택의 존재를 명 시적으로 알려주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서원 철폐령으로 인하여 노은서원이 헐린 뒤에도, ‘성삼문 구 택’은 헐리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집은 본래 서 원과 분리되어 있는 주택 형식의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철폐령으로 인하여 서원이 헐릴 때 주사(廚舍) 또 는 재사(齋舍)로 불린 주거건축은 헐리지 않고 남은 사 례들에서도 방증할 수 있다.36)
한편, 고택과 성삼문과의 관계에 대한 기억이 점차 희 미해져 갔을 가능성이 기록에서 확인된다. 노은서원을 곧 성삼문의 구택 자리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1787년에 성 삼문의 방계 후손이 제사를 주관하겠다고 요청하자37) “옛 적에 충문공[성삼문]의 신주가 드러났을 때 조야가 함께 의논하여 마침내 선정신[송시열]의 의견에 따라 노은서원 에 보내 안치하였다”며 반대하는 의견이 제기되었다.38) 1788년에는 “선정신[송시열]이 (신주를) 노은동의 옛집에 두게 하고 훗날 옛집에다 서원을 세웠다”고도 하였다.39) 비록 한성의 조정에서 나온 의견이지만, 숭모의 기능이 서 원에 집중됨으로써 노은리의 고택과 성삼문의 관계에 대 한 기억이 약화되고 왜곡되어 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 히 노은서원이 철폐되어 서원의 유림이 흩어진 뒤에는 성 삼문과 관련된 기억이 완전히 사라졌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지금의 노은리 고택에 유래나 주인과 관련된 전 승이 전혀 없는 것도 이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서원이 훼철된 1871년 이후 지금의 노은리 고택의 상 황은 노은리 거주민의 구술에서 확인된다. 아래의 내용 은 노은리의 최연장자로서 평생 이곳에서 생활한 김문환 (1928년생)의 구술을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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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네 어구에 있는 샘이 ‘울안샘’일 정도로 고택의 규 모가 컸는데 이 집에 살던 과수댁이 아들이 장래성이 없자 집을 뜯어서 줄였다고 전해 옴(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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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택에 산 인물은 ‘조 진사’부터 알고 있음. 조 진사는 조대비의 조카로 덕산에서 살다가 이주해 왔으며 행실이 나쁜 사람을 거느리고 위세를 부렸음(전문). 조진사의 아 들이 허약해서 일찍 죽자 양자를 들였음(전문). 양자가 죽 은 뒤 신창 출신인 부인이 아들 4형제를 데리고 그 집에 서 나왔음(목격). 이들은 현재 김문환이 사는 집터에서 살 다가 살림을 탕진하고 다른 곳으로 떠났음(목격).
구술내용에서 민담 성격의 ‘과수댁’을 제외하면, 이 집 에 산 구체적인 인물에 대한 기억은 조대비의 조카로 알 려진 ‘조 진사’에서부터 시작된다.40) 그런데 구술의 내용 이 당시의 시대 상황과 부합함을 볼 수 있다.
조대비 즉, 신정왕후는 대원군의 집권을 도왔으므로 조대비의 친족이 우대를 받거나, 조대비의 친족 또는 친 족을 사칭하는 인물이 유세를 부렸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다른 지역에 살던 ‘조 진사’가 연고가 없는 노은리로 이주해 온 것은 서원 철폐와 관련이 있음을 짐 작할 수 있다. 또한 구술자들이 고택에 거주한 인물을 ‘조 진사’부터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것은 그가 비어 있던 고택에 거주한 첫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나 아가 ‘조 진사’가 이 고택에 거주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고택이 개인의 사유물이 아니라 서원 소유였기 때문이라 고 추정할 수 있다.
앞 장에서 노은리 고택을 조선전기 건축으로 판단했거 니와 연대기 등 각종 문헌기록에 근거하면 ‘성삼문 구택’ 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지 않다면 25칸을 넘는 규 모 있는 고택에 19세기 중반 이전의 주인이나 가문에 대 한 전승이 전혀 없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또한 지역 민의 구술은 대원군을 지지하는 세력이 서원철폐를 통해 이득을 얻었던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한다. 따라서 ‘엄찬 고택’으로 문화재 지정된 노은리 고택은 곧 ‘성삼문의 구 택’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1668년에 감사 민유중이 수리 했고, 1672년부터 1676년까지 성삼문의 위패를 봉안했으 며, 1706년부터 1871년까지 성승을 제향하는 별묘로 사 용되었고, 이후 조대비의 조카로 알려진 ‘조 진사’가 살 았던 집이 현재 노은리에 있는 고택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 전기 건축인 노은리 고택의 건축 하한은 성삼문이 사형당한 1456년이 된다.
5.결론
한국의 전통가옥은 목재를 이용한 가구식 구조이므로 일정 기간마다 반드시 해체하여 재조립해야 한다. 이 과 정에서 새로운 양식이 적용되고, 공간이나 구조에 변화 가 발생하기 쉽다. 그러므로 고택의 창건 연대나 원형 구조를 판단하려면 평면과 입면, 부재를 면밀히 살펴 후 대에 중축하거나 변형된 부분을 가려내는 작업을 선행해 야 한다. 고택과 관련된 문헌기록도 세밀히 살펴야 한다. 가까운 시기는 지역 주민의 구술을 채록하는 것도 필요 하다. 본고에서는 ‘엄찬고택’이라는 명칭으로 문화재로 지 정된 노은리 소재 고택에 이러한 방법을 적용해 보았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하였다.
첫째, 노은리 고택에는 조선 전기와 후기의 건축 양식 이 혼재되어 있다. 창호는 대부분 후기 양식이지만 상부의 붙박이창과 다락 진입구는 전기의 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대청 후벽의 고식 영쌍창 흔적은 이 고택이 조선전 기 건축일 가능성을 높여준다. 둘째, 익랑과 행랑부의 중 층 구조는 조선전기의 양식을 강하게 반영한다. 셋째, 몸 채 우측 지붕은 본래 5량 맞배와 3량 맞배가 직교하는 구 조였으나 후대에 퇴칸을 증축하면서 지금과 같은 팔작 구 조로 변형되었다. 넷째, 조선후기에 증축되거나 변형된 부 분을 제거하고 본래의 원형을 재현하면 중층의 익랑과 행 랑을 갖춘 맞배지붕의 ‘口’자 형 주택이 도출된다. 이러한 구조는 현존하는 임진왜란 이전의 양반 주택 및 조선전기 의 주택 관련 기록에서도 뚜렷하게 확인되는 특징이다.
이어 노은리에 있던 ‘성삼문의 구택’으로 알려진 집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17세기부터 18세기의 각종 기록은 현재의 노은리 고택이 곧 장기간 사람이 거 주하지 않은 ‘성삼문 구택’이라는 판단을 가능하게 하였 다. 또한 마을 주민의 구술로부터 ‘조 진사’로 알려진 사 람이 서원이 철폐된 직후부터 이 고택에 거주하기 시작 했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구조면에서 조선전기 건축 으로 판단되는 노은리 고택은 기록에 의거하여 성삼문이 사망한 1456년을 건축 하한으로 편년할 수 있었다.
다만, 필자가 조선전기 양반 가옥의 보편적 유형을 염두에 두고 처음 시도한 작업인 만큼 가옥의 원형 구 조에 대한 판단이 사실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자신하기 는 어렵다. 또한 몸채 좌측의 확장된 공간에 대한 판 단을 보류하였다. 향후 본고에서 사용한 것과 동일한 방법을 적용하여 경북 안동의 임청각 살림채와 충남 예산의 추사고택 등을 분석함으로써 추정의 신뢰도를 더욱 높일 것이다. 이는 곧 조선전기에 유행했던 ‘口’ 자형 상류 주택의 보편 유형과 지역별 특성을 도출하 는 성과로 귀결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