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 론
베트남 중부에 위치한 Hue1)는, 1802년부터 1945년까 지 존속한 응우옌(阮) 왕조의 수도였으며, 1993년에는 그 일대의 역사적 기념물 및 건축물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 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Hue 일대는 응우옌의 선조들인 院主2)와 西山朝의 도 성이기도 하였다. 院主는 16세기 레 왕조의 통치가 약화 되자 북쪽의 정주와 더불어 베트남을 분할 지배하였다. 院主의 첫 본거지는 愛子였으며, 茶鉢, 福安등을 거쳐 5대 阮福溱이 1688년 6월에 富春으로 거점을 옮겼다. 한 동안 院主의 都城으로 사용되던 富春은 1774년 12월 西 山朝에 점령당한 후 阮의 초대 황제인 阮福暎이 수복하 는 1801년 5월까지 西山朝의 수도로 사용되었다. 황제에 즉위한 阮福暎(嘉隆帝)은 1803년 3월부터 새로운 수도 건설에 착수하였으며, 2대 明命帝치세기인 1830년대까 지 궁궐, 관청, 의례시설을 비롯하여 도로, 하천, 성벽 등 의 시설이 건설되면서 수도로서의 모습을 갖추어 나갔고, 1945년 응우옌이 몰락할 때까지 수도로 사용되었다.
Hue에 대한 연구는, 20세기 초기 프랑스인들에 의해 진행된 것이 대표적이다. 베트남의 제도, 문화, 건축, 도 시 등 다방면에 걸친 조사와 연구가 진행되었으며, 특히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의 Hue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3) 이와 함께, 일본 와세다대 학교 中川武연구실에서는 Hue의 복원에 초점을 맞추 어 장기간에 걸친 현지 조사와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4) 이들에 의한 정밀한 조사 결과는 Hue 이해의 기본 자료 가 된다. 최근 들어 발표되는 베트남 연구자들의 연구 결과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5) 이들의 논문에는 문헌사료 와 현상을 비교 검토하여 응우옌 시기의 도성과 각종 시 설에 대해 개괄하고 있으며, 특히 상세한 현지 조사 결 과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동아시아 속에서 한국과 베트남에 대한 비 교가 가치 있다는 인식과 함께 진행되고 있는 일련의 국 내 연구도 관심 있게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 다.6) 이 가운데 응우옌 왕조의 보방(Vauban)식 요새 도 입에 관한 연구7)는 Hue의 보방식 성벽 구축 배경을 이 해할 수 있는 선구적 연구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응우옌의 각종 제도는 중국, 특히 淸의 것을 바탕으로 정비되었다.8) 清의 『大清一統志』 및 『清會典事例와』 제목 뿐만 아니라 체제와 구성까지 본뜬 『大南一統志』와 『欽定 大南會典事例』가 있으며, 특히 1812년 嘉隆帝는 清의 『大 清律例를』 거의 그대로 모방하여 『皇越律例』라는 법전을 편 찬했는데, 이것이 중국과 응우옌 제도의 관련성을 단적으 로 보여준다.
중국 제도에 대한 응우옌의 의존 태도는 도성의 구성 에서도 확인된다. 京城, 皇城, 宮城이라는 표현을 시작으 로, 太廟, 社稷, 六部등 각종 도성 시설의 명칭이 동일 하며, 특히 皇城의 정문을 午門, 宮城을 紫禁城이라 칭 한 것은 응우옌의 도성이 전통적인 중국의 도성제도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Hue 도성의 내부 시설을 조금만 유심히 지켜 봐도 중국의 전통 도성과는 다른 상황을 발견할 수 있다. 도성의 좌향, 외부 성곽의 형상, 皇城과 일부 도성 시설 의 상대적 위치가 그러하다. 특히 社稷壇처럼, 중국의 경 우 황성 내에 자리한 시설의 일부가 황성 밖에 위치하고 있는 것들도 확인된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의 한양이나 고려의 개경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Hue 연구가 한국의 전통적인 도시가 지닌 특징을 규명하는 데 참조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부분이다.
주례 고공기의 기록을 근거로 삼는 중국의 역대 도성 조차 완벽히 그것에 따르는 것이 없으므로, 중국 도성과 Hue의 도시 구성 차이를 단순한 지역적 변용으로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응우옌이 중국의 제도에 강하게 의존하고 있었으며 도성의 여러 측면이 중국의 전통적 도성제도에 준하고 있다는 것은, 그러한 차이점이 Hue만의 특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언급한 선행 연구는 중국의 도성 과 Hue의 차이에 대해 현상을 그대로 서술하거나 간단한 배경 언급에 머물고 있다. 프랑스인들에 의한 연구는 중 국의 도성과 심도 있는 비교가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中 川武연구실의 연구는 성벽과 주요 건물의 복원에 초점 을 맞추고 있어 시설의 위치와 척도, 그리고 각종 부재의 고증을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본 논문은 전통적인 중국 도성제도와 차이를 보이는 Hue 도시 구성의 형성 배경에 대해 규명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응우옌의 정사인 『『大南寔録』』, 지리지인 『大南 一統志』, 각종 사례를 기록한 『欽定大南會典事例를』 기본 자료로 활용하며, 중국 사료는 응우옌의 기록과 비교하는 데 이용한다. 그리고 Hue의 각종 시설을 표기하는 데에 는 프랑스인들이 작성한 지도를 사용하고자 한다.
이상의 자료를 바탕으로 2장에서는 선행 연구를 바탕 으로 베트남의 역사를 간략히 서술한 후, Hue 정도 과정 과 그 의미에 대해 검토한다. 3장에서는 Hue의 좌향, 보 방식 성벽, 그리고 황성의 위치 결정의 배경에 대해 검 토한다. 다만, 베트남 사료에는 보방식 성벽의 축성 과정 이나 배경에 대해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선행 연구를 바탕으로 축성 배경을 재구성하여 서술하고자 한 다. 4장에서는 Hue 황성 구역의 구성에 대해 검토한다.
이 논문이 응우옌의 도성인 Hue에 대한 이해와 더불 어, 고려나 조선의 도성 구성의 특징을 밝히는 데 참고 가 되기를 기대한다.
2.Hue 정도 과정과 선지의 배경
19세기 이전 베트남의 역사는 북거남진(北拒南進)으로 요약될 수 있다.9) 기원전에 세워진 베트남 최초 국가인 文郞(?∼B.C.258?)과 甌駱(B.C.257?∼B.C.208), 漢이 베 트남을 정복하고 세운 9군, 唐의 안남도호부에 이르기까 지 현재의 하노이 일대를 그 거점으로 삼았다. 1천년 이 상 이어지던 중국 지배로부터 벗어난 吳왕조(939∼968), 최초로 국호와 칭제, 그리고 개별 연호를 사용한 丁왕조 (968∼980), 前黎왕조(980∼1009), 李왕조(1009∼1225), 陳왕조(1226∼1400), 胡왕조(1400∼1406)도 이전과 마찬 가지로 하노이 일대를 거점으로 하여 남부 베트남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던 것이다. 後黎왕조(1428∼1789)는 1527년 莫登庸의 찬탈로 멸망되었다가 회복되었지만, 鄭 主와 阮主10)의 권력싸움으로 인해 남북으로 분리되었다. 이후 阮主의 지배지에서 일어난 西山朝가 鄭主와 阮主 를 무너뜨렸고, 그들에게 밀려난 阮主는 베트남 남부의 嘉定(현, 호치민시 부근)으로 거점을 옮겨야만 하였다. 1792년 西山朝光中皇帝의 사거로 지배력이 약해진 틈 을 타 세력을 키운 阮主의 후예인 阮福暎은, 1801년에 는 阮主의 고도였던 富春을 수복하여 도성으로 삼고,11) 1802년에는 하노이 일대까지 점령하였다. 그는 같은 해에 연호를 嘉隆으로 정했으며, 1803년에는 淸으로부터 越南 이라는 나라 이름을 받았다. 이후 阮은 프랑스의 침입으 로 1860년대에 이미 독립성을 상실하기 시작하였으며, 1880년대에는 완전히 주권을 빼앗겨 식민지화하였다가 1945년 8월 제13대 保大帝가 퇴위하며 막을 내렸다.12)
Hue 일대가 본격적으로 기록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鄭主와 투쟁하던 阮主가 Hue 일대를 거점으로 삼으면서 부터이다. 즉, 1대 阮主阮潢이 1558년 10월 Hue의 북쪽 인 愛子를 그들의 본거지로 삼았다가13) 茶鉢으로 옮겼으 며, 다시 愛子의 동쪽으로 옮긴 후 葛營이라 불렀다. 2대 阮福源은 葛營에서 福安으로 옮겼으며, 3대 阮福瀾은 1635년에 金龍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이후 5대 阮福溱때 인 1744년 富春14)으로 옮긴 후, 8대 阮福濶때인 1754년 에는 그 내부에 12영을 설치하고 都城으로 칭하였다.15)
그런데 문제는 愛子가 Hue와 마찬가지로 順化에 설 치되었던 것으로 기록16)되어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順化는 Hue 일대로 이해되고 있어 동일 지역에서 阮主 의 근거지 이동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愛子는 廣治縣, 茶鉢은 登昌縣, 福安은 廣田縣, 金龍은 香茶縣으로 기 록되어 있어 일반적인 이해와 달리 모두 다른 지역에 위 치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愛子가 자리했던 廣治縣은 현재의 Quang Tri시 일 대로서, Hue가 위치한 承天府의 豊田縣경계에서 북쪽 으로 29리 거리에 위치17)하였다. 茶鉢이 설치되었던 登昌縣이 속한 肇豊府는 廣治省동북쪽 1리 반 거리에 위치했는데,18) 廣治省城북쪽의 강 건너에서 登昌縣의 위치가 확인19)된다. 福安이 있던 廣田縣은 承天府의 동북 14리, 金龍이 있던 香茶縣은 府郭, 즉 Hue 성벽 서북쪽 4리 떨어진 곳에 위치20)하고 있었으며, 富春은 곧 Hue에 해당한다.(<Fig.1> 참조)
이처럼 阮主의 근거지가 각기 다른 곳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順化에 위치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順化라는 명칭은 14세기 무렵 陳朝가 廣治縣과 Hue 일대에 설치했던 順州와 化州에서 유래 한다.22) 阮主들은 이곳 順州와 化州에 그들의 근거지 를 마련하였고, 이후 順州와 化州가 順化로 불리게 됨 에 따라 위치 확인에 오해를 가져왔던 것이다.
북거남진한 베트남의 역사처럼 阮主의 근거지 역시 점차 남진한 점이 흥미롭다. 어쨌거나 Hue는 嘉隆帝에 의해 응우옌의 도성으로 선정되어 왕조의 마지막까지 함께하게 된다. 嘉隆帝가 Hue를 도성으로 정한 것은, 이곳이 阮主즉, 조상 전래의 땅이라는 이유도 있었지 만, 보다 중요한 것은 지리적으로 베트남의 중앙에 위 치하여 중앙집권화에 유리할 뿐만 아니라 북부 하노이 에 기반을 둔 구세력을 약화시키기에 유리하였기 때문 이었다. 건국 초기 안정되지 않은 방대한 영토를 갖게 된 왕조가 균형 있게 국가를 운영하고자 했던 통치철 학이 내포되어 있다23)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Hue 구성의 특징-성벽, 좌향, 外朝
기록에 따르면 Hue 성벽의 둘레는 2,487장 3척 6촌, 높이는 1장 5척 6촌, 두께는 5장이며,24)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보방식 성벽을 채용하고 있다. 성문은 남쪽에 4개 소, 북쪽과 서쪽에 각 2개소, 동쪽에 3개소와 동북쪽에 위치한 자성인 鎭平臺로 통하는 鎭平門을 포함하여 모 두 11개소25)가 설치되었다. 鎭平臺는, 서쪽으로부터 Hue 의 남쪽을 지나 동쪽의 바다로 흘러가는, 香江을 거슬러 올라오는 적함을 공격하기 위해 설치된 것으로, 중국의 도성제도에서는 보이지 않는 형식이다. 남쪽 성벽 중앙 부에는 3단의 旗臺가 위치하고 있으며, 성벽 상부에는 24개소의 砲臺가 설치되어 있다.
성벽 외부에는 너비 5장 7척27)의 해자가 조성되어 있 으며, 그 외부에는 護城河로 불리는 폭 40m의 호가 Hue 의 전면을 흘러 지나는 香江과 연결되며 조성되어 있다. 성벽-해자-호성하가 3중으로 도성을 둘러싸며 견고한 방 어 요소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28) 또한 내부에는 동서 방향으로 御河가 흐르고 있으며, 그 북쪽에 설치된 京倉으 로 물자를 운반하는 통로로 사용되었다(<Fig.2> 참조).29)
직선의 가로를 종횡으로 교차시켜 도성 내부를 바둑 판 모양으로 구획하고, 궁궐과 이궁, 제사시설과 관청, 각종 군사시설과 창고 등의 정부시설, 그리고 시장과 주택 등을 배치하였다. 내부에는 95개의 坊을 설치하여 도성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羽林營左翊에 11개, 右翊에 8개, 前鋒營五衛에 6개, 龍武營五衛에 12개, 神機營五衛 에 8개, 虎威營五衛에 12개, 䧺鋭營五衛에 18개, 五保十 衛에 16개, 耆武四衛에 4개씩 할당되어 있었다.30) 八旗 軍에 의해 관할되던 청나라 북경처럼 도성 내부에 설 치된 坊의 관리를 군영이 담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응우옌의 각종 제도가 淸의 것을 참조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다른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Hue가 전통적인 중국 도성제도를 근간으로 조성되 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과 다른 부분도 적지 않 다. 가장 분명한 차이는 도시를 둘러싼 성벽의 형상이 다. 베트남 사료에서는 축성 과정이나 배경이 확인되지 않으나 보방식 성벽은 프랑스인들로부터 전래된 것으 로 알려져 있다. 西山朝에 의해 멸망한 院主의 후손인 阮福暎은 베트남 남부인 호치민시 일대에서 세력을 구 축하고 西山朝와 대치하는 초기 단계부터 프랑스인의 협력을 지속적으로 받았다. 그는 프랑스로부터 전함과 총포를 구입하고 대포를 제작하는 등 군사 기술을 도 입하여 西山朝와 대립하였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인들 은 요새의 건설, 무기제조, 조선, 군사 훈련31) 등에서 阮福暎을 지원하여 西山朝의 패망을 이끌어 내었다.
서양의 군사 기술과 그에 맞추어 훈련된 군사의 활 용은,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군사시설 없이는 불가능 하게 된다. 결국 응우옌의 도성은, 비군사적 부분은 전 통적인 중국 도성제도에 따라 조성하는 것이 가능했지 만, 군사적으로 중요한 성벽은 프랑스인들이 지닌 근 대서양의 축성법을 채용할32)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동양의 전통적인 중국의 도성제도와 서양의 축성법이 혼용된 응우옌의 도성은, 19세기 응우옌이 처한 시대 적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33)
다음으로 눈에 띄는 차이점은 Hue가 취하고 있는 좌향이다. 한 변 약 2.2km 정도로 거의 정방형의 도성 이 동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Hue는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중국의 도성제도 를 근간으로 평탄한 지형 위에 조성되었다. 그렇다면 도성의 형상을 결정 짖는 요소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 고 할 수 있는 좌향 역시 중국의 도성제도에 따라 남 향으로 설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Hue의 좌향은 阮主시기에 조성된 도성과 관련되어 있다. 즉 5대 阮主인 阮福溱은 1688년 7월 金龍에서 富春으로 도성을 옮기면서 앞산인 御屛山을 案山으로 삼아 좌향을 설정하였던 것이다. 담장을 쌓고 궁전을 만들고 연못을 파고 나무와 꽃들을 심었으며, 도시를 鎭護할 탑을 강변에 축조하여 장려한 도성34)을 조성하 였다. 5대 阮主가 영건한 도성은 응우옌 시기 각황사 가 위치하였던 瑞和坊일대, 즉 Hue의 동남쪽에 자리 하고 있었다.35)
案山을 설정하고 도성 을 鎭護할 탑을 축조하였 다는 것은, 富春도성에 풍수 원리가 반영되었다 는 것을 의미한다. 御屛 山은 도성의 동남쪽에 위 치하고 있다. 따라서 이 를 案山으로 삼은 阮主시 기의 富春도성은 북좌남 향한 중국과 달리 동남향 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Fig.3> 참조).
7대 阮主阮福澍때인 1754년에 이르러 富春도성은 정연하고 번화한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궁궐에 여러 전 각이 세워지고 정자와 사찰이 추가되었으며, 각종 군사 시설과 관료들의 제택들이, 종횡하는 직선 가로에 의해 바둑판처럼 구획된 도성 내부에 질서정연하게 배치되 었다. 도성의 외부에는 시장 건물이 줄지어 있었고 수 많은 어선과 상선이 왕래하는 대도회가 되었다.37)
1801년 嘉隆帝는 1774년부터 Hue를 도성으로 사용 하던 西山朝38)를 몰아내고, 그들이 사용하고 있던 궁궐 에서 구도 수복을 축하받았으며, 1802년 4월에 皇城을 ‘修築’하고 즉위39)하였다. 같은 해 8월에는 황성 좌측에 太廟를 영건하기 시작하였으며, 1803년 3월부터는 기존 도성을 넓혀 새로운 도성 건설에 착수하였고,40) 1804년 2월에 太廟가 완성되었다.
신축이 아니라 ‘修築’하였다는 것은 황성이 이전부터 존재하였다는 것을 말하며, 도성의 확장 공사와 관계 없이 태묘의 영건이 지속되었다는 것은, 응우옌 초기 의 도성 확장이 전조 때 구축된 富春도성의 기반을 상당부분 수용하면서 진행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확 장된 도성의 가로망이 阮主시기와 동일한 바둑판 형 상이라는 점을 통해서도 그것은 확인된다. 이러한 사 실은 御屛山을 案山으로 삼아 동남향했던 富春도성의 좌향 또한 유지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嘉隆帝가 Hue 일대의 패자였던 阮主의 정통성을 계승하려는 의지는, 그가 모방하려했던 중국의 도성제도의 중요성을 넘어, 선조들의 유산을 존중하고 유지하려는 태도 속에 분명 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성 확대 건설 과정에서 드러나는 위와 같은 태도는, 皇城과 그 전면 지역의 구성 차이를 낳게 된다. 즉, 응 우옌의 경우 궁성과 그 전면의 사묘 부분을 아울러 皇 城으로 지칭하였는데, 이는 궁성과는 구분되면서 궁성 전면의 사묘 구역과 그 전면의 관청 구역을 아울러 황 성으로 구분하는 중국의 도성제도와는 다르다. 더구나 응우옌의 경우 皇城전면에 관청이 위치하는 外朝구역 이 존재하지 않으며, 주요 관청인 6부는 황성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Fig.2> 참조). 이 역시 응우옌 도성의 확장 건설 과정과 관련이 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Hue의 皇城은 京城의 확장이 결정되기 전, 전조 도성의 시설 일부를 ‘修築’한 것이다. 전조의 도성이 응우옌 京 城의 동남쪽41), 즉 香江가까이 위치하는 지리적 조건으 로 인하여, 도성의 확장은 수축된 황성의 북쪽으로 전개 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응우옌의 황성은 도성의 남 쪽으로 치우쳐 위치하게 되었다.42) 香江에 근접한 황성 은 전면의 여지 부족을 가져와 外朝의 형성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6부 관청은 황성의 측 면으로 자리를 옮겨 건설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803년 3월부터 시작된 京城의 개조는, 1804년 4월 부터 宮城을 돌로 쌓기 시작하여 6월에 宮城과 皇城이 준공되었고,43) 1805년 4월부터 시작된 도성 성벽의 축 성은 8월에 완성되었다.44) 이후 관청과 단묘 등 각종 시설의 건립과 정비가 지속적으로 진행되었으며, 2대 明命帝통치 시기인 1830년대에 이르러 응우옌의 京城 정비가 일단락된다.
嘉隆帝에게 도성 Hue는 농민 위에 군림하는 군주의 상징이자 군사적 요새였으며, 왕조의 권위를 높이고 중앙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45) 도성이 지닌 이러한 의미는 프랑스의 선진 군사기술을 반영한 보방식 성벽과 전통적 중국의 도성제도의 수용, 그리 고 그것을 넘어 선조들이 구축한 유산의 존중과 유지 라는 세 가지 서로 다른 가치를 담은, 소위 ‘응우옌식 도성’의 구축을 가능하게 한 배경이었다.
4.황성의 구성과 그 특성
Hue의 皇城은 1804년에 1차 준공46)된 후 1830년대까 지 수차례에 걸쳐 수축되고 시설이 추가되었다. 皇城의 규모는 남북 151장, 동서 155장 5척, 둘레 614장 1척, 높 이 1장 5촌, 두께 2척 6촌이다.47)
황성 정문인 午門이 남쪽 가운데 위치하며 그 안에 太和殿이 오문의 축 위에 놓여 있다. 그 뒤에 위치한 大 宮門안쪽에 勤政殿이 위치하는데, 이곳부터가 紫禁城으 로 명명된 宮城48)에 해당한다(<Fig.2> 참조).
일견 Hue의 皇城은 중국의 도성제도를 근거로 조영된 것으로 보이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淸北京의 시설과 동일한 명칭을 사용하면서도 그 위치는 따르지 않은 것 들이 다수 존재하는 것이다. 황성을 기준으로 일부 시설 만 언급하면, 光祿寺는 皇城내부(北京)와 외부(Hue)로, 太醫院은 皇城외부(北京)와 宮城내부(Hue)로, 奉先殿 은 宮城내부(北京)가 아니라 皇城내부(Hue)로 서로 다른 배치 결과를 보여준다. 특히 六部의 경우 北京은 皇城내부 전면, Hue는 皇城외부 동쪽49), 社稷壇의 경 우 北京은 皇城내부, Hue는 皇城외부 서쪽50)에 위치 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큰 차이로 지적할 수 있다.51)
중국식 도성제도에 따라 구분해 보면 大宮門외부는 황성 구역에 해당하며 이곳에 태묘와 사직, 그리고 각종 관청이 위치하게 된다. Hue 皇城의 경우 궁성의 전면 좌측에 太廟가 위치하며, 그 북쪽에 肇廟, 다시 그 북쪽 에 內務府가 자리한다. 太廟와 肇廟는 별도의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다. 궁성의 전면 우측에는 世廟, 그 뒤에 興 廟가 독립된 영역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다시 그 북쪽에 奉先殿이 위치하고 있다. 사직단 자리에 廟가 조성되어 있는 것이다(<Fig.2> 및 <Fig.4>). 고려의 개경이나 조 선의 한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社稷壇이 皇城우측에 위치하므로 左廟右社의 원리를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 다. 그러나 皇城의 대부분을 太廟를 비롯한 여러 廟가 차지하고 있는 것을, 단순하게 지역적 혹은 시대적 특성 으로만 보기에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전통적인 동양 의 도성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시설이자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社稷壇을 외부로 밀어내고 여러 종류의 廟를 세운 것에는 응우옌 초기의 특별한 사정이 나 배경이 작용했을 것이다.
먼저, 廟의 건립 순서와 변화에 대해 살펴보자.
太廟는 1802년 3월부터 건립하기 시작하여 1804년 2 월에 완성하였으나, 같은 해 3월 肇祖廟, 皇考廟와 더불 어 다시 건축되기 시작하여52) 그해 9월에 완성되었다.53) 太廟가 앞쪽, 肇祖廟가 그 뒤쪽에 위치하며 宮城좌측의 太廟영역을 구성한다.
興祖廟의 전신은 1804년 宮城전면 서쪽 영역에 단독 으로 건립되었던 皇考廟로서, 明命帝때인 1821년에 같 은 영역에 世廟가 영건55)됨에 따라 그 북쪽으로 옮겨져 興祖廟로 개칭56)되었다(<Fig.4> 참조). Hue 皇城은 社 稷壇이 조영되는 1806년 이전에 이미 廟로 채워져 있었 던 것이다. 社稷壇은 皇城을 벗어난 도성 공간에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은 변칙적인 Hue 皇城의 구성은 嘉隆帝의 충분 치 않은 유교 인식57) 때문일 수도 있지만, 皇考廟가 社 稷壇보다 중요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국이나 중국의 경우 새롭게 국가가 건국되면, 무엇 보다 우선하여 종묘를 건립하여 추존한 선조를 모시고, 사직을 영건하여 신들에게 제사를 올려 정권의 적통성 을 드러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Hue의 太廟에 는 嘉隆帝의 조부나 부친이 아니라 황제로 추존된 9명 의 院主를 모셨으며, 그 뒤에 위치한 肇祖廟는 1대 院 主의 부친인 阮淦을 肇祖貽謀垂猷欽恭惠哲顯佑橫休濟 世啟運仁聖靖皇帝로 추존하고 신위를 모신 곳이다. 太 廟영역 전체가 院主의 제사 공간으로 설정되었기 때문 에 초대 황제 부친의 신위를 모실 별도의 廟가 필요해 진다. 이곳이 곧 太廟, 肇祖廟와 동시에 宮城전면 서쪽 에 영건된 皇考廟로서, 嘉隆帝의 부친인 阮福㫻, 즉 興 祖仁明謹厚寬裕溫和孝康皇帝의 신위를 모시는 곳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社稷壇을 宮城전면 우측에 건립하 기 위해서는 이미 사용 중인 皇考廟를 별도의 장소로 이건해야만 하는데, 皇城내는 이미 여지가 없는 상태이 다. 반면 社稷壇은 宮城의 우측에만 위치하면 전통적인 도성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기능을 수행하는 데도 큰 지장이 발생하지 않는다. 또한 공간적인 제약이 나 皇考廟이건에 따른 추가 비용도 발생하지 않는다.
社稷壇이 무리 없이 Hue에 자리 잡은 뒤 明命帝가 즉위하면서 Hue 皇城구역은 다시 한 번 변화한다. 嘉 隆帝의 신위를 모실 별도의 廟가 필요해졌기 때문이 다. 이를 위해 皇城의 서쪽의 皇考廟자리에 世廟를 건립하고 皇考廟를 興廟로 개칭하여 世廟의 북쪽으로 옮겼다. 世廟는 이후 응우옌의 역대 황제들의 신위가 안치된다. 비록 宮城의 서쪽에 위치하지만 엄격히 말 하자면 世廟가 응우옌의 太廟라고할 수 있을 것이다.
阮主를 위한 太廟의 가운데 칸에 1대 太祖嘉裕皇 帝, 좌1실에 2대 熙宗孝文皇帝, 우1실에 3대 神宗孝 召皇帝, 좌2실에 4대 太宗孝哲皇帝, 우2실에 5대 英宗 孝義皇帝, 좌3실에 6대 顯宗孝明皇帝, 우3실에 7대 肅 宗孝寧皇帝, 좌4실에 8대 世宗孝武皇帝, 우4실에 9대 睿宗孝定皇帝와 각 皇后들의 위폐가 봉안되어 있는 데, 소목제도와 동당이실 형식을 채용한 것이다.
사실상의 太廟에 해당하는 世廟의 가운데 칸에는 1 대 世祖高皇帝(嘉隆帝), 좌1실에는 2대 聖祖仁皇帝 (明命帝), 우1실에는 3대 憲祖章皇帝(紹治帝), 좌2실에 는 4대 翼宗英皇帝(嗣徳帝), 우2실에는 7대 簡宗毅皇 帝(建福帝), 좌3실에는 9대 敬宗純皇帝(同慶帝)와 각 皇后들의 위폐가 모셔져 있으며, 우3실에 해당하는 서 쪽 마지막 칸은 비어 있다. 世廟역시 太廟와 마찬가 지로 동당이실 형식이며 소목제도에 따라 위폐가 안치 되었다. 다만 5대 恭宗育德帝, 6대 協和帝, 8대 咸宜 帝, 10대 成泰帝, 11대 維新帝, 12대 啓定帝, 13대 保大 帝는 신위가 모셔져 있지 않다. 5대 育德帝의 경우 恭 宗이라는 묘호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별도로 恭宗廟58) 에 신위가 모셔져 있다. 6대 協和帝는 朗国公으로 폐 위되었고, 8대 咸宜帝는 프랑스에 의해 축출되었으며, 13대 保大帝는 응우옌의 마지막 황제라서 신위가 모셔 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837년 건립된 世廟와 興廟북쪽의 奉先殿에는 제1 대부터 4대까지의 황제와 황후들의 신위가 소목제도에 따르면서 동당이실에 나뉘어 봉안되어 있다.
중국의 전통적인 도성제도에서 社稷壇의 건립은, 태 묘나 궁궐과 마찬가지로 가장 우선하여 건립하는 것이 상례였다. 궁궐은 국가 통치의 중심 시설이고, 태묘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통해 통치자로서의 적통성을 확인 하는 시설이며, 사직단은 하늘과 신에 대한 제사를 통 해 국가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천하에 고하는 시설이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응우옌의 嘉隆帝 에게는 社稷壇보다 선대, 즉 부친과 阮主의 제향시설이 우선시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응우옌 초기 Hue를 포함 한 베트남 지배의 정통성 확인이 嘉隆帝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즉, 太廟와 皇 考廟등의 제향시설은, 嘉隆帝가 응우옌의 선대인 阮主 의 계승자임을 주장하고 가시화할 수 있는 장치이므로, 社稷壇보다 우선하여 건립해야 했던 것이다.
5.결론
동양 도시사에서 중국의 도성제도는 일종의 전범이자 규범이었다. 그러나 이를 수용한 주변 국가의 역대 도성 은 물론, 중국의 역대 도성조차 해당 제도가 완벽하게 구현된 예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즉 전범이나 규범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적절히 수용되고 적용되었던 것이다.
Hue는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 응우옌의 도성으로 전통 적인 중국의 도성제도를 바탕으로 영건되었다. 그러나 Hue 도성의 내부 시설을 조금만 유심히 지켜봐도 중국 의 전통 도성과는 다른 상황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논문은 중국 도성제도와의 차이를 Hue의 특성을 설명해 줄 단서로 보고, 외부 성곽의 형상, 도성의 좌향, 황성의 구성과 일부 도성 시설의 위치에 대해 형성과정 과 배경을 검토한 것이다.
먼저 院主에서 시작된 근거지 이동 기록을 바탕으로 그 위치와 Hue 정도의 배경을 검토하였다.
16세기부터 시작된 院主의 근거지 이동은 북쪽에서 점차 남진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종착지인 Hue를 그들의 도성으로 삼아 그 일대를 통지하였다.
잠시 西山朝의 도성으로 사용되던 Hue를 응우옌의 도 성으로 정한 것은, 그곳이 조상 전래의 땅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지리적으로 베트남의 중앙에 위치하여 중앙집 권화에 유리할 뿐만 아니라 북부 하노이에 기반을 둔 구 세력을 약화시키기에 유리하였기 때문이었다. 건국 초기 안정되지 않은 방대한 영토를 갖게 된 왕조가 균형 있게 국가를 운영하고자 했던 통치철학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Hue 외성의 성벽이 보방식으로 불리는 서 구의 축성술에 따라 축조된 배경에 대해 살펴보았다. Hue의 보방식 성벽은 프랑스인들로부터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방식 성벽이 Hue에 적용된 것은 院主의 후손인 阮福暎이 프랑스인들의 요새 건설, 무기제조, 군 사 훈련 등의 지원을 배경으로 西山朝를 패망시키고 응 우옌의 황제가 된 것과 관련이 있다.
즉, 응우옌 건국 과정에서 프랑스인들에 의해 서양의 군사 기술과 그에 맞추어 훈련된 군사 활용은, 건국 후 에도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군사시설 없이는 불가능하게 된다. 결국 응우옌의 도성에서 군사적으로 중요한 성벽 에 프랑스인들이 지닌 근대서양의 축성법을 채용할 수밖 에 없었던 것이다. 동양의 전통적인 중국의 도성제도와 서양의 축성법이 혼용된 응우옌의 도성은 19세기 응우옌 이 처한 시대적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중국의 도성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도 Hue가 동남쪽을 향하고 있는 이유를 살펴보았다.
阮主시기의 도성은 풍수 이론을 바탕으로 전면에 위 치한 御屛山을 案山으로 삼아 영건됨으로써 동남쪽을 향하게 되었다. 이후 같은 자리를 확장하여 응우옌의 도 성이 건설되었는데, 관련 기록을 통해 이 시기의 도성 확장이 전조 때 구축된 富春도성의 기반을 상당부분 수 용하면서 진행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御屛山을 案山으로 삼아 동남향했던 富春도성 의 향 또한 유지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嘉隆帝가 Hue 일대의 패자였던 阮主의 정통성을 계승하려는 의지는, 그가 모방하려했던 중국의 도성제도의 중요성을 넘어, 선조들의 유산을 존중하고 유지하려는 태도 속에 드러나 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Hue 皇城의 위치와 그 전면의 外朝 영역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응우옌의 황성은 경성의 확장이 결정되기 전, 전조 도성의 시설 일부를 ‘修築’한 것이다. 전조의 도성이 응우옌 京城의 동남쪽, 즉 香江 가까이 위치하는 지리적 조건으로 인하여, 도성의 확장 은 수축된 皇城의 북쪽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Hue 皇城은 도성의 남쪽으로 치우쳐 위치하게 되 었다. 香江에 근접한 皇城은 전면의 여지 부족을 야기했 고, 이로 인하여 6부 관청은 皇城의 측면으로 자리를 옮 겨 건설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Hue 皇城은 宮城과 그 전면의 廟부분을 아우르는 것으로, 궁성과는 구분되며 궁성 전면의 사묘 구역과 관 청 구역을 아울러 황성으로 구분하는 중국의 도성제도와 는 다르다.
일견 Hue의 皇城은 중국의 도성제도에 따라 배치된 것으로 보이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즉 태묘와 사직이 자리하는 皇城은 廟로 가득 차 있고, 황성 내에 있어야 할 社稷壇은 皇城서쪽 외부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배치는 응우옌이 西山朝에 의해 멸망한 阮主 의 후계자라는 태생적 특성에 기인한다. 이로 인하여 전 대 황제의 신위를 모시는 태묘는 院主들의 신위가 모셔 지게 되었다. 더구나 太廟의 뒤쪽에 위치한 廟조차 1대 阮主부친의 신위를 안치하는 곳으로 사용되면서, 응우 옌의 1대 황제인 嘉隆帝의 부친을 위한 廟는 궁성의 우 측, 즉 사직단이 들어서야할 자리에 건립되었던 것이다.
嘉隆帝가 社稷壇보다 그의 부친과 阮主의 제향시설을 우선시한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은, 응우옌 초기 Hue를 포함한 베트남 지배의 정통성 확인이 嘉隆帝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즉, 嘉 隆帝가 응우옌의 선대인 阮主의 계승자임을 확인시켜주 는 요소로 阮主의 제향시설 건립을 우선시했던 것이다.
嘉隆帝에게 도성 Hue는 농민 위에 군림하는 군주의 상징이자 군사적 요새였으며, 왕조의 권위를 높이고 중 앙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도성이 지닌 이 러한 의미는 프랑스의 선진 군사기술을 반영한 보방식 성벽과 전통적 중국의 도성제도의 수용, 그리고 그것을 넘어 선조들 유산의 존중과 유지라는 세 가지 서로 다른 가치가 어우러진 ‘응우옌식 도성’의 구축을 가능하게 한 배경이었다. Hue는 전통적 가치가 해체되던 19세기에 다 시 전통적 가치를 적극 반영한 특이항으로서, 중국 문화 의 영향권 내에 있다는 지역적인 상황과 새로운 기술을 바탕으로 한 군사시설이 요구되었던 시대적인 상황이 동 시에 반영된 결과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Hue처럼 여러 도성 시설이 皇城을 벗어나 도시 공간 속에 포치되어 있는 사례는 한국의 전통 도시에서도 발 견할 수 있다. 베트남의 도성 연구가 한국의 도시를 규 명하는 데 참조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부분이며, 이와 관련된 비교 연구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