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ournal of Architectural History ::
Journal Search Engine
Search Advanced Search Adode Reader(link)
Download PDF Export Citaion korean bibliography PMC previewer
ISSN : 1598-1142(Print)
ISSN : 2383-9066(Online)
Journal of architectural history Vol.24 No.6 pp.67-82
DOI : https://doi.org/10.7738/JAH.2015.24.6.067

A Study on Layout and Operation of Suk-seol-so and Jung-bae-seol-cheong at Court Banquets in the Late Joseon

Se-Jin Kyoung, Jae-Mo Cho*
Corresponding Author : zozemo@knu.ac.kr
August 15, 2015 December 1, 2015 December 17, 2015

Abstract

With regard to Gung-jung Yeon-hyang(宮中宴享; court banquet), the frequency of banquets that were held at one time beginning Mu-ja J in-jak(戊子進爵; a royal banquet held in 1828) in 1828 (the 28th year of King Sunjo (純祖)’s reign). In proportion to this frequency, there was an increase in the need and importance of Suk-seol-so(熟設所; a kitchen built in temporarily house for court banquet) and Jung-bae-seol-cheong(中排設廳; a temporary place to put offerings) as a space to assist court banquets. Although Suk-seol-so was a temporary but large-scale facility, it was frequently used for long periods. This facility was flexibly established using the variability of Dong-gung(東宮; Palace for Crown Prince) and enhanced the efficiency of censorship and security in conjunction with palace gates and Suk-wi-cheo(宿衛處; guard station, guard room). In addition, it was reused according to the period when the nation and royal family gave finances or banquets. Jung-bae-seol-cheong was established in the place connected to the central space of court banquets and worked as buffer space to resolve the tension on the day of the event. The location where Jung-bae-seol-cheong was established enabled us to confirm the applicability of Bok-do(複道; corridor) connected to Chimjeon(寢殿; royal residence) when holding court banquets. In short, Suk-seol-so and Jung-bae-seol-cheong were auxiliary spaces, but were considered importantly in the palace operation when holding court banquets.


조선후기 궁중연향 시 숙설소와 중배설청의 배치와 운영에 관한 연구
-궁중연향의궤를 중심으로-

경 세 진, 조 재 모*
(경북대학교 건축학부 박사과정)
(경북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초록


    Ministry of Education
    NRF-2011-0009425

    1.서 론

    1-1.연구의 배경과 목적

    궁중연향은 禮樂을 중시하는 조선시대에 사회통합을 목적으로 꾸준히 베풀어졌으며, 궁궐의 수많은 행사 중 설행되는 시간에 비해 구성되는 물리적 요소와 절차가 가장 화려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한 만 큼 보이지 않는 인력과 물력이 상당히 뒷받침되었을 것 이라 짐작된다. 따라서 궁중연향 공간의 전말을 전체적 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왕실 중요 인물들이 사용하는 연향 중심공간뿐만 아니라 행사를 준비하고 뒷받침하는 인물들이 사용하는 보조공간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 생각된다. Tab.1

    본 연구에서 주목하는 연향 보조공간은 음식을 조리하 는 일에 관련된 熟設所와 연향 참례자들의 자리 및 장막 과 음식을 배설하는 일에 관련된 中排設廳이다.1)2) 숙설 소는 연향 보조공간임에도 상당히 큰 규모였고 중심공간 에 비하여 사용 기간이 상대적으로 길었다는 점에서 주 시해볼 만하다. 그리고 중배설청은 연향 당일의 긴박한 상황 속에서 원활한 행사 진행을 위해 완충 공간을 어떻 게 계획하였는지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될 것이라 생각 된다. 아울러 이들 연향 보조공간들은 중심공간에 대하 여 긴밀하면서도 경계를 지켜야하는 양면적인 성격을 가 졌다는 점에서도 궁궐 공간 운영의 한 면모를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현재까지 조선시대 궁중연향 공간에 관한 연구는 왕실 의 중요 인물들이 사용하는 공간에만 한정된 연구가 대 부분이다.3) 이에 본 연구는 궁중연향이 설행되는 중심공 간에 관한 그 동안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궁궐의 공간 운영이라는 맥락에서 궁중연향 보조공간인 숙설소와 중 배설청의 배치 및 운영 양상을 함께 조명하여, 조선시대 궁중연향 시의 공간 운영 방식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다.

    1-2.연구의 범위와 방법

    조선시대 궁중연향은 전시대에 걸쳐 꾸준히 전승되었 으나 순조28년(1828) 戊子進爵을 기점으로 설행체계에 변화가 생겼다. 하루 동안 베풀던 행사를 며칠에 걸쳐 여러 차례 설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연향에 투입되는 인력과 물자는 더 많아졌고 그에 상응하는 계 획과 관리체계가 필요했을 것이다. 즉, 이러한 연향의 특 징에 따라 주빈이나 참례자가 달라질 때마다 요구되는 공간적 변화에 대처해야 했고, 연향 횟수가 여러 차례였 던 만큼 장만해야 할 음식의 양도 상당하여 숙설소와 같 은 보조공간의 규모 역시 증대되었을 것이다.4) 또한, 순 조28년 무자진작은 의궤 내 찬품이라는 항목에 숙설소와 중배설청의 설치 관련 내용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기 시작 한 연향이기도 하다.5) 따라서 본 연구의 범위는 조선시 대 궁중연향 중 순조28년부터 대한제국기까지 의궤로 기 록되어 숙설소와 중배설청의 설치 양상을 파악할 수 있 는 총 12차례의 연향을 대상으로 하였다.6)

    숙설소와 중배설청에 대한 배치와 건축 정보는 의궤의 饌品과 修理항목을 분석하여 도출하였다. 찬품 내용을 통해 숙설소와 중배설청의 위치, 숙설소의 규모/시역일/ 숙직규칙 등을 파악하였고, 수리 내용을 통해 숙설소 假 家의 종류/규모/건축자재내역 등을 파악하였다. 그리고 궁중연향 공간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인만큼 상기의 의궤 분석 결과를 관련 궁궐 그림 상에 중첩시켜 숙설소와 중배설청의 배치 경향 및 공간적 관계를 해석하였다7).

    2.연향 공간의 계획과 보조공간의 마련

    2-1.연향 공간의 구성과 연동

    궁중연향 공간은 크게 연향이 직접 설행되는 중심공간 과 이를 뒷받침하는 보조공간으로 구성된다. 연향 보조 공간은 음식을 보관·조리하는 숙설소와8) 참례자들의 자 리·장막·음식을 배설하는 중배설청 등으로 구성된다. 특 히, 음식은 궁중연향을 구성하는 여러 인자들 중 왕을 비롯한 왕실가족과 수많은 참례자들의 신체적 안위에 직 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아주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9) 따라서 이와 관련된 공간 계획에는 각별한 주의와 함께 조직적인 연동체계가 요구되었을 것이다.

    연향 보조공간인 숙설소는 임시 건물임에도 제법 긴 시간동안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물론 연향 중심공간도 몇 차례의 습의(의례연습)를 하는 것까지 모두 고려하면 사용 시간이 길다고 할 수 있지만, 그 패턴이 간헐적이 라는 점에서 지속적으로 사용되는 숙설소와는 차이가 있 다.10) 또한, 숙설소는 설치 규모가 상당히 커서 궁궐 내 점유면적이 꽤 넓은 편이었고, 음식을 조리하는 과정 중 에 사용하는 불 때문에 항상 화재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 었다. 게다가 궐 밖에서 차출된 사람들까지 사용하는 곳 이었으므로 연향 중심공간에 근접 배치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연향 설행기간 동안 대량의 음식을 중심공간으 로 운반해야 하는 사정을 고려하면 중심공간에서 너무 멀지 않고 적당히 떨어진 곳이라야 했을 것이다. 즉, 숙 설소의 배치·운영 계획에는 궁궐 내 대규모 임시 건물 의 장기간 수용, 화재로부터의 안전, 왕실 중요인물들의 보안 확보, 효율적인 운반체계 구축 등이 종합적으로 반 영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배설청은 연향 당일의 혼잡하고 긴박한 상황 속에서 순조로운 행사 진행을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완충 공간 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빈을 비롯한 주요 참례자들의 자리와 장막, 그리고 연향에 올릴 음식이 적 절하게 비치될 수 있도록 중심공간과 긴밀한 관계로 배 치·운영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연향 절차에 따라 형성되는 여러 개의 중요하고 복잡한 동선과 교착 되지 않는 곳에 마련되었다고 간주된다.

    요컨대 연향 중심공간에 대한 보조공간의 조성에서 가 장 중요한 고려사항은 최적의 동선을 설정하여 연향 전 말의 효율성을 극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일 것이 다. 또한, 중심공간은 주빈을 비롯한 참례자들이 사용하 는 곳이고 보조공간은 행사 제반준비를 하는 하급계층 사람들이 사용하는 곳이므로, 둘 사이에는 경계와 동시 에 연향을 순조롭게 진행시키기 위한 연계도 형성되어야 한다는 점 역시 중요하게 반영되었을 것이다.

    2-2.궁궐의 임시 주방, 숙설소의 체계와 구성

    궁궐의 주방에는 소주방, 수라간, 생과방, 퇴선간과 같 은 상시 주방과11) 숙설소로 대표되는 임시 주방이 있다.

    궁중 연향 시에는 평소의 식사를 담당하는 상시 주방 만으로는 잔치에 필요한 대량의 음식을 조리하기에 상당 한 무리가 있었으므로 숙설소와 같은 임시 주방을 별도 로 조성해야했다. 궁중의 평상시 수라상은 나인인 소주 방 상궁들이 담당하였으나, 잔치 때는 남자 조리사인 待 令熟手들을12) 중심으로 소주방 상궁들과 생과방 상궁들 이 도와 음식을 마련하였던 것이다.13)

    숙설소는 궁궐 행사에 필요한 음식을 조리하거나 식자 재 및 연료 등을 보관하기 위하여 궁중연향 설행 몇 개 월 전부터 미리 설치되었다. 이때에는 음식 조리 과업을 수행할 숙수와 그밖에 관원, 여령 등이 머물 임시 숙소 의 시역도 함께 이루어졌다. 숙설소는 이른바 ‘假家와 處 所’로 지칭되었으며, 간단하지만 건축적인 구조를 갖추었 고 규모도 상당히 큰 편이어서 궁궐 공간 운영 시 나름 의 중요한 고려 대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점은 연향의 주된 공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역일까지 전교 나 영교 아래 택일한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14)

    숙설소의 체계는 크게 內숙설소와 廚院숙설소로 나 뉘었다.15) 주원 숙설소는 다시 주원 내숙설소와 주원 외 숙설소로 구분되었고, 고종 32년(1895)에 ‘주원’이 ‘전선 사’로 개칭된 이후부터 典膳司숙설소로 일컬어졌다.16) 내연만 설행한 경우에는 통상적으로 내숙설소가 중심이 되었으므로 그 규모가 주원 내숙설소에 비해 상당히 컸 다. 그러나 내연과 외연을 함께 설행한 때에 주원 외숙 설소의 규모는 내숙설소 만큼이나 매우 컸다.17)

    숙설소는 크게 음식을 조리하고 보관하는 곳, 조리에 필요한 도구나 연료 등을 관리 보관하는 곳, 각종 연향 보조자들의 처소, 연향 참례자나 보조자들의 음식을 차 리는 곳으로 구성되었다.18) 표내용을 보면 준비해야할 음식의 양이 방대했던 만큼 용도별로 세분화시켜 체계적 으로 운영했다는 것을 추측해볼 수 있다. 또한, 숙설소 건축을 담당한 역군들의 사용 공간이 별도로 조성되었다 는 것은 공사 규모가 꽤 컸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숙설소의 구조는 단출한 편이었지만 건축물로서의 모 양새는 나름대로 갖추었으므로 가가를 짓는 데 필요한 자재는 부재마다 각각의 수량이 기재되어 있었다. 하단 의 내용은 여러 가지 가가 종류 중 어상가가에 국한된 것이기는 하나 여타의 가가 역시 대체적으로 유사한 부 재와 방식을 사용하여 설치되었다.

    御床假家. 二十五間所入: 高柱次扇子大椽木五箇, 高柱 貿大椽木二十箇, 每柱每佐非及龍甘伊並葛乼二艮衣, 柱 頭裏次草飛乃一舍音, 道里樑椺 間椽並文乃木九十箇, 每間椽次中竹十四箇, 沙? 中竹二十箇, 蓋覆盧簟入立, 每佐非條小二把, 草芚十浮. ……19)

    요컨대 숙설소 건물은 기둥과 보 도리를 사용하여 건 물의 몸채를 구축하고, 그 위에 대나무로 서까래 부분을 형성한 후 이엉 등으로 짠 덮개를 씌운 간단한 형식의 지붕을 올렸던 것으로 추측된다. Tab.2

    3.궁궐별 연향 보조공간의 조성과 배치

    순조조부터 대한제국기까지 임어한 궁궐은 크게 창덕· 창경궁, 경복궁, 경운궁으로 나뉜다. 순조·헌종조에는 주 로 창덕·창경궁에 임어하였다. 고종조에는 대부분 중건 경복궁에 임어하였지만 때때로 발생하는 화재 때문에 창 덕궁으로 이어하기도 하였다. 이후 아관파천을 계기로 경운궁을 수리한 뒤부터는 줄곧 경운궁에 임어하였고 이 러한 상황은 대한제국기까지 이어졌다. 이에 본 장에서 는 크게 창경궁, 경복궁, 경운궁으로 절을 나누어 궁중연 향 보조공간의 설치 양상을 살펴보도록 한다. Tab.3

    3-1.창경궁 내 연향 보조공간의 조성과 배치20)

    순조 28년 이후 창경궁에서 설행된 연향은 4차례가 있 었다.21) 순조28년 내진작은 자경전에서, 순조29년 외진찬 과 내진찬은 각각 명정전과 자경전에서, 헌종14년 내진 찬과 고종14년 내진찬은 모두 통명전에서 설행되었다.22) 창경궁 내의 연향 중심공간은 내연의 경우 자경전과 통 명전이, 외연의 경우 명정전이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자경전 연향 시 숙설소는 동쪽의 건례당 영역에 설치 되었다. 자경전은 삼면이 언덕으로 둘러싸인 채 통명전 북쪽의 높은 부지 위에 자리하였다.23) 이곳으로 출입할 수 있는 경로는 동쪽과 남쪽에 있었지만, 남쪽으로는 경 사도가 높아 몇 개의 단을 거쳐야만 이동할 수 있었다. 따라서 숙설소의 규모나 동선을 고려할 때 자경전과 인 접해서 숙설소를 조성할 만한 적당한 부지는 비슷한 높 이에 동쪽으로 위치한 건례당 영역이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처소는 건례당과 중정문24) 내외에, 가가는 건례당 전정 동서에 나뉘어 설치되었다. 중배설청은 자경전 남 행각에 마련하여 연향 중심공간에 완전히 밀착시켰다.25)

    통명전 연향 시 숙설소는 시민당 터 북동쪽의 추경 원26) 영역에 주로 조성되었다. 통명전은 자경전 남쪽의 넓은 터에 영건된 창경궁 내전의 정전이다.27) 북쪽의 높 은 경사지 위에는 자경전이 있었고, 서쪽으로는 창덕궁 과 경계를 짓는 언덕이, 동쪽으로는 내전의 생활기거공 간이 밀집되어 있었다.28) 주된 출입이 남쪽으로 길게 뻗 은 터와 연결된 정양문을 통해 이루어졌을 것을 감안하 면, 숙설소 부지도 남쪽의 어딘가를 활용하는 것이 유리 하였다고 추측된다. 이에 따라 숙설소는 통명전의 남쪽 이자 시민당 터의 북동쪽인 추경원 영역에 조성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29) 숙설소 처소와 가가는 주로 추경원 에 설치되었고, 호궤가가는30) 진수당 서쪽 뜰에, 소규모 의 주원 숙설소는 외연을 담당하는 주원 외숙설소와 함 께 주자소에 설치되었다. 중배설청은 통명전의 정문 역 할을 하는 정양문31) 밖 동쪽 뜰에 마련하는 것이 통상적 이었다.32)

    명정전에서는 순조29년 기축 진찬 시 한 차례의 외연 이 설행되었다. 창경궁은 조선의 여느 궁궐에 비해 정전 으로 진입하는 축이 짧고 단계가 축소된 편이라 홍화문 전후로는 숙설소를 설치하기 위한 마땅한 부지가 없었다. 그리고 상대방위로 볼 때 명정전 영역 북쪽으로는 내전 이 조밀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숙설소는 남쪽에 조성되는 것이 적절하였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명정전 연향 시 주원 외숙설소는 내각주자소인 규영신부33) 영역 을 중심으로 설치되었다.34) 중배설청은 명정전의 행각문 인 영청문 밖 동행각에 마련되어 숙설소 영역과 대칭을 이루었다.35) Tab.4

    창경궁 내 연향 공간의 구성을 요약해보면 중심공간은 자경전, 통명전, 명정전으로 나뉘었고, 이 공간들에 각각 대응하여 건례당 영역, 시민당 터 북동쪽의 추경원 영역, 내각주자소 영역에 숙설소가 배치되었다. 가가 규모는 건례당과 주자소 영역은 소규모였지만, 추경원 영역에는 143~190여칸이 조성되어 상당히 넓은 면적을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36) 그리고 중배설청은 대체적으로 중심전각 을 위요하는 행각 자체 혹은 행각에 딸린 문과 바로 인 접한 공간에 마련되었다.

    3-2.경복궁 내 연향 보조공간의 조성과 배치37)38)

    경복궁 내의 연향은 모두 고종조에 베풀어졌다.39) 고 종5년(1868) 경복궁 중건40) 이후 국호를 바꾸기 전까 지41) 경복궁에서 설행된 연향은 네 차례이다.42)

    고종5년/10년/29년 내연은 모두 강녕전에서 설행되었 고, 내전 화재로 강녕전이 소실되고 없었던 고종24년 내 연은 만경전에서 설행되었다. 고종29년 연향은 고종이 주빈이었으므로 내·외연을 함께 베풀었고, 외진찬은 근 정전에서 설행되었다.

    강녕전은 왕의 일상을 담는 침전이면서 대비와 중궁전 의 내전의례가 설행되는 내전의 핵심적인 전각으로서 경 복궁 중심축의 심장부에 위치하였다. 따라서 강녕전과 연동되는 숙설소는 응당 남북 중심축에서 동쪽이나 서쪽 으로 벗어나 있어야만 했다. 이렇게 선정된 곳이 광사문 안쪽과 계조당 영역이었고, 이 두 곳은 경복궁 내를 흐 르는 水路와 상당히 근접해 있다는 점에서도 특징적이 다.43) 광사문 안쪽의 숙설소는 동서로 가로지르는 수로 나 병정처소(숙설소)의44) 위치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45) 계조당 영역에 숙설소를 조성할 때, 처소는 전각 자체나 전정에 마련하였고, 가가는 명사문 바깥의 춘방·계방·별군직청의 공간까지 함께 사용하기도 하였 다. 중배설청은 경복궁 내전 화재 이전에는 강녕전 서행 각 내의 선안당에, 화재로 중건된 이후에는 경성전과 향 오문 밖 동정에 설치되었다.46)

    만경전은 경복궁 중건 때 창건된 이후 고종22년(1885) 부터 고종28년(1891)까지 화재로 소실된 강녕전을 대신 하여 여러 가지 내전 행사의 중심공간으로 활용된 전각 이다.47) 고종24년(1877)의 진찬도 이러한 이유로 만경전 에서 설행되었고, 이때 대규모의 내숙설소는 자경전의 전문인 만세문 안에, 소규모의 주원 숙설소는 사정문 안 에 설치되었다.48) 만세문 안쪽을 아주 큰 규모의 내숙설 소 부지로 사용할 수 있었던 까닭은 고종13년(1876) 경 복궁 내전의 대형 화재로 강녕전부터 만경전의 전문인 대유문 바로 앞까지가 모두 소실되어 자경전이 빈터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49) 만경전과 숙설소가 있던 자경전 은 적당히 떨어진 거리에 있어 연향 시 제법 효율적인 동선 구성이 가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전에 숙설소 부지로 사용했던 광사문 안과 계조당 영역이 만경전 연 향 때에 다시 사용되지 않은 것은 동선이나 거리상 불리 하였던 까닭으로 보인다. 광사문 안쪽에서 만경전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조밀한 내전 영역과 여러 개의 담장 을 지나야만 했고, 계조당은 만경전에서 꽤 먼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중배설청은 만경전 서편의 건복합과 만세문 밖 동정에 마련되어50) 중심 전각에 인접했던 강 녕전이나 창경궁 자경전, 통명전의 중배설청 설치 양상 과는 다르게 나타났다. Tab.5

    근정전에서는 고종29년(1892) 고종의 망오와 즉위 30 년을 경축하기 위한 외진찬이 설행되었다. 주원 외숙설 소 역시 강녕전 연향 때와 마찬가지로 계조당 일곽을 중 심으로 조성되었는데, 처소는 계조당 전정에,51) 가가는 계조당 전정부터 서북 담장, 그리고 명사문 밖 뜰까지 아우르는 영역 전부에 걸쳐 설치되었다52). 중배설청은 근정전 동중 계상에 설치되어 연향을 보조하였다.53)

    경복궁 내 연향 공간의 구성을 간추려보면 내연 시에 는 강녕전과 만경전이, 외연 시에는 근정전이 중심공간 으로 활용되었다. 강녕전 연향 시 숙설소는 경복궁 중심 축에서 동서로 벗어난 광사문 안과 계조당 영역에 주로 조성되었다. 만경전 연향 때는 내전 화재로 소실된 만세 문 안의 자경전 터를 내숙설소 부지로 활용하는 궁궐 운 영의 해법이 보였다. 근정전 연향 시 주원 숙설소는 상 당히 큰 규모였으며 계조당 영역에 조성되었다. 숙설소 가가 규모는 고종 초 연향 때는 소규모로 설치되다가 고 종24년부터는 141~180칸의 대규모로 설치되어, 연향이 베풀어진 특정한 기간 동안 궁궐 내 많은 면적을 숙설소 부지로 배분했음을 알 수 있다.

    3-3.경운궁 내 연향 보조공간의 조성과 배치54)55)

    경운궁 내 연향은 네 차례였으며 모두 대한제국기에 치러졌다.56) 1901년(광무5) 5월에는 경운당에서 내진찬 이, 동년 7월에는 함녕전에서 외진연과 내진연이 베풀어 졌다. 1902년(광무6) 4월에는 함녕전에서 외진연과 내진 연이, 동년 11월에는 중화전에서 외진연이, 관명전에서 내진연이 설행되었다.57) Tab.6

    내연은 경운당, 관명전,58) 함녕전에서 베풀어졌고, 이 를 보조하기 위한 내숙설소는 모두 평성문 안에 조성되 었다. 반면, 전선사 내숙설소는 각각 돈례문 안 右侍御 廳59)과 전정, 대안문 안, 평성문 안, 중화문 밖에 달리 설치되었다.60) 내숙설소가 모두 평성문 안에 설치되었던 것은 경운당 연향 시 조성된 대규모의 숙설소를 철거하 지 않고 계속 증축해가며 사용했기 때문이다. 평성문 안 쪽은 면적도 워낙 넓은데다가 위치상으로도 내전·외전 등 궁궐의 중심영역과 뚜렷히 구분되는 곳이어서 대규모 임시 건물을 장기간 유지시키는 것이 가능했다고 간주된 다. 반면에 대안문 안과 중화문 밖에 설치했던 전선사 내외숙설소는 연향을 마치면 완전히 철거하였다. 아마도 돈례문, 대안문, 중화문 근처는 궁궐의 정문과 중심전각 들 사이를 이동하는 과정에서 항상 시각적으로 노출되는 곳이었으므로 장기간 방치해두기는 곤란했을 것이다. 중 배설청은 경운당, 함녕전, 관명전에 대하여 각각 의록문 밖,61) 응춘문 밖, 건원문 밖에 마련되어62) 중심전각의 행 각문에 바로 연접해 있었다.

    외연은 함녕전에서 두 차례, 중화전에서 한 차례가 설 행되었다. 함녕전 연향 시 전선사 외숙설소는 대안문 안 과 평성문 안에 각각 조성되었는데, 평성문 안에서는 전 선사 내숙설소와 겸하여 설치되었다. 그리고 중배설청은 내연 때와 마찬가지로 응춘문 밖에 마련되었다.63) 중화 전 연향 때는 중화문 밖 뜰에 전선사 외숙설소가 설치되 었고, 중화전 서편 중계 위에 중배설청이 마련되어64) 근 정전 외연 시 중배설청과 유사한 배치 형태를 나타냈다.

    경운궁 내 연향 공간의 구성을 요약해보면 중심공간의 경우 내연 시에는 경운당, 관명전, 함녕전이, 외연 시에 는 함녕전, 중화전이 활용되었다. 내숙설소는 모두 평성 문 안에 설치하되 연향이 끝나도 철거하지 않고 재사용 하였는데, 이는 경운궁의 배치 구조에 적절히 대응한 결 과라고 해석된다. 전선사 외숙설소는 기존의 내숙설소를 증축하여 사용하거나 대안문 안 뜰과 중화문 밖 뜰에 거 대한 규모로 조성되었다.

    4.궁중연향 보조공간 설치의 변통과 대응

    4.1.동궁 영역의 가변성과 숙설소 설치의 변통

    창경궁과 경복궁에서 베풀어진 연향을 보조하는 숙설 소의 주된 배치 경향성을 보면 동궁 전각과 그 주변 영 역을 활용한다는 것이다. 반면, 경운궁의 동궁은 궐내의 위치나 점유 면적을 볼 때 창경궁이나 경복궁과 같은 활 용 양상을 보이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65)

    창경궁에서 숙설소로 활용된 동궁 영역은 건례당과 시 민당 영역이다. 건례당은 현종11년(1670)에 건립되었으 며, 영조27년(1751) 장자 효장세자의 빈이 승하한 곳이 다. 숙종, 경종, 영조대에는 건극당이라 불리웠고, 정조2 년에 건례당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건례당 바로 동쪽의 신독재가 세자의 서당이었다는 궁궐지의 기록을 볼 때 건례당 역시 세자의 생활공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66) 건례당 영역이 숙설소로 활용된 때는 순조조이다. 이 당 시 왕위 계승자는 순조의 장남인 효명세자로 시민당 바 로 북쪽의 진수당,67) 수강재와 창덕궁 중희당 등의68) 동 궁 전각에서 생활했다. 따라서 순조28/28년(1828/29) 자 경전 연향 시 건례당 영역은 동궁 기능을 하지 않았고, 전술한 바와 같이 자경전과 동선 관계상 유리하였으므로 숙설소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시민당은 인조조에 세자의 서연 장소로 건립된 동궁의 대표적인 중심 전각이다.69) 시민당은 정조조에 소실된 후 재건되지 않았고 새로운 동궁으로서 중희당이 영건되 었다. 이후 헌종13년에 낙선재를 조영할 당시 동궁의 중 심은 중희당 영역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동궁의 부속시 설인 춘방과 계방은 그 기능을 유지하면서 원래의 위치 에 계속 남아 있었다.70) 시민당 영역이 숙설소로 활용된 시기는 헌종조와 고종조이다. 헌종조는 세자가 부재 상 황이었던 데다가71) 연향이 설행된 시기는 동궁의 중심이 이미 시민당에서 중희당 영역으로 이동한 뒤였다. 때문 에 헌종14년(1848)과 고종14년(1877)의 통명전 연향 시 대규모 숙설소가 시민당 북쪽의 추경원과 진수당 영역에 조성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복궁에서는 동궁 전각 중 계조당 영역에 숙설소가 설치되었다.72) 계조당은 문종이 대리청정을 하게 되면서 영건된 동궁의 정당이다. 단종 즉위 후 훼철되었다가 고 종조 경복궁 중건 당시 동궁의 외당으로 다시 건립되었 다. 이때는 세자의 거처인 자선당과 비현각, 세자 시강원 인 춘방, 세자 익위사인 계방과 별군직청이 함께 조성되 어 동궁일곽의 체제를 갖추었다. 이후 1891년부터 1893 년까지 개수공사를 거쳤다가 『북궐도형』이 제작되던 1905~1908년 이전에 훼철되었다.73) 계조당 영역이 고종 조 연향 시 숙설소로 활용된 데는 세자의 재위 기간 및 거처와 연관이 있다. 헌종과 철종은 후사가 없었고, 고종 의 원자는 출생 직후 사거하였으며, 차남인 순종은 1874 년 2월에 탄생하여 이듬해 세자로 책봉되었다.74) 때문에 조선 궁궐에서 동궁 전각은 헌종이 왕위에 오른 1834년 부터 순종이 탄생한 1874년까지는 기능이 정지된 상황이 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속하는 고종5년(1868)과 고종10 년(1873)의 연향 시 숙설소는 동궁 영역에 설치될 수 있 었고 그 중심전각이 계조당이었다. 그리고 고종29년 (1892) 연향이 설행되던 때는 순종이 세자로 재위 중이 었다. 당시 세자는 자선당과 비현각을 중심으로 생활하 였고, 계조당 일곽은 개수공사 중이었다. 세자가 사용 중 이지도 않았고 공사가 완전히 마무리된 상황도 아니었으 므로, 계조당 영역은 연향 시 숙설소로 활용될 수 있었 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계조당 영역에 숙설소를 설치할 때는 동궁 전각과 전정 외에도 춘방, 계방, 별군직청의 공간까지 두루 사용하기도 하였다.75) 이는 동궁 시설 상 호간의 결속력을 강화시켜 궁중연향 설행 시 원활한 진 행을 도모한 현상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동궁 영역이 연향을 보조하는 숙설소 처소와 가가로 활용된 데는 이 공간이 갖는 轉用의 다양성과 관 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해, 동궁 영역은 세 자가 비연속적으로 재위하였다는 점과 궁궐 안에 복수로 존재하였다는 연유로 공간에 대한 인식과 용도가 가변적 이었고,76) 이로 인해 본질적 기능 외에 연향 보조공간을 수용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는 궁중연향 시 필요 한 대규모 임시 건물인 숙설소의 설치를 동궁 전각과 주 변 영역이 갖는 가변적 특성을 통해 해결함으로써 궁궐 운영의 변통성을 구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4.2.숙설소와 궁성문 및 숙위처의 연접 활용

    숙설소는 연향이 설행되기 전에 장기간 궁궐 내에서 유지되어야 하는 대규모 임시 주방이다. 주방 용도 외에 도 식자재와 각종 기물, 도구 등을 보관하는 창고나 연 향 보조자들의 거처로도 활용되었다. 즉, 수많은 연향 관 련 종사자들이 궁궐 밖으로부터 출입하고, 식자재를 비 롯한 각종 물품 등이 계속해서 운반 되어야하는 곳이었 다. 따라서 숙설소 설치 부지로는 인력의 출입과 물자의 내입이 수월하면서도 이들에 대한 검열과 보안까지 유리 한 곳이 선택되어야 했을 것이다. Fig.1,2

    창경궁의 숙설소는 시민당과 내각주자소, 건례당 영역 에 조성되어 동궁의 정문인 선인문과77) 북동쪽의 월근 문, 통화문을 주출입문으로 사용하면서, 세자 익위사인 계방과 궁성 숙위 기관인 도총부, 수문장청을 비롯한 인 접 숙위처들과 연동 운영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Tab.7

    경복궁에서 숙설소가 설치된 곳은 계조당 영역과 만세 문 안, 광사문 안으로서 주된 출입문은 건춘문과 영추문 이었을 것으로 간주된다. 계조당 영역의 숙설소는 건춘 문과 워낙 가까웠고 동궁 영역 정비 시 함께 조성된 계 방과 별군직청이 있어 보안 체계가 잘 형성되었을 것이 다. 광사문 안 숙설소는 같은 영역권의 병정처소와 영추 문 내의 숙위처들과 연동 운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경운궁의 숙설소는 대부분 궁성문 안쪽에 바로 연접해 있어 주된 출입은 평성문,78) 대안문,79) 건극문80)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궁성문마다 숙위처가 연접해 있 었는데 평성문 안쪽에는 근위병직소가 있었고,81) 특히 대안문 바로 옆에는 원수부가 있어82) 숙설소 운영 시 검 열과 보안에 유리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궁궐별로 숙설소가 설치된 영역을 보면 궁성문 에 비교적 가까우면서도 궐내의 보안을 위해 궁궐 숙위 처와 연접해 있는 곳이 대부분이었다.83) 더불어 숙설소 가 대규모 시설이었던 만큼 그 설치 면적을 충족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이러한 배치 방식을 통해 숙설소의 운영과 궁궐의 수비가 조직적인 협력 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고 해석된다.

    4.3.숙설소 가가 건물의 재사용과 경비절감

    대한제국기에 설행된 연향을 보조하는 숙설소의 설치 와 운영은 경운궁의 중건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 으로 보인다. 즉, 대한제국기는 외세의 압력과 침입으로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상당히 불안정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나 이러한 시기에 고종이 아관파천으로 러 시아 공사관에 머물면서 진행한 경운궁의 복구와 증축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더더욱 어려운 사정과 맞닿아 있었을 것이다.84)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어한 후에도 재정적인 고충과 맞물린 채 설행한 궁중연향은 행사경비를 최대한 절감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며,85) 이러 한 의도는 숙설소 가가의 설치 양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Fig .3

    대한제국기에 경운궁에서 설행된 연향은 1901년부터 1902년까지 총 4차례이다. 1901년 5월 신축 진찬 시 평 성문 안 쪽에는 150칸 규모의 내숙설소 가가가 설치되었 다. 연향이 끝나면 통상적으로 보조공간인 숙설소는 철 거하지만 이를 유지시킨 채 다음 세 차례 연향에서 증축 해가며 계속 재사용하였다.86) 물론 이전 시기(순조·헌종· 고종조)에 비하여 연향 설행 주기가 짧았다는 점과 궁궐 중심 영역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위치적 특징도 숙설소 가가의 재사용에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숙설소의 재사용은 왕실의 재정 상태를 비롯해 궁궐의 공역 과정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실제 숙설소가 설치되었던 평성문 안 뜰은 현재의 석조전과 부속시설이 있는 부지였다. 석조전은 기초를 닦은 뒤 경 제적 난항으로 공사가 중단 되었는데,87) 이 시기 동안 연향이 설행되었고 그 부지에 숙설소를 설치한 것이다. 대규모이면서 장기간 사용되는 숙설소를 궁궐의 공역 과 정과 조절해 가면서 조성한 것은 궁궐의 공간 운영에 있 어 융통성이 두드러지는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4.4.중배설청의 마련과 침전 측면 복도의 활용

    궁중연향이 설행될 때는 수많은 동선이 복잡한 의식의 수순에 따라 구성된다. 중배설청은 이러한 연향 당일의 긴장감을 완충시키는 기능을 하며, 주빈을 비롯한 참례 자들의 자리·장막과 연향에 올릴 음식을 배설하기 위해 필요한 공간이다. 외연 시의 중배설청은 정전의 동쪽이 나 서쪽의 階上에, 내연 시의 중배설청은 주로 침전을 위요하는 행각 자체 혹은 행각문 바로 밖에 마련되었다.

    특별한 경우는 1892년(고종29/壬辰) 강녕전 내진찬 시 마련된 내숙설소 소속의 중배설청이다. 이는 강녕전의 동쪽 소침인 경성전에 마련되었다.88) 여기서 주시해볼 부분은 강녕전과 소침을 연결하는 복도의 존재와 이것이 궁중연향 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다. Fig .4

    1868년 무진 진찬과 1892년 임진 진찬의 강녕전 도식 을 상호 비교해보면 복도의 형식이 변화된 것을 알 수 있다.89) 1868년 도식에 묘사된 복도가 정교한 건축구조 를 갖춘 것에 비해 1892년 도식 상의 복도는 몹시 소략 한 가설 형식으로 묘사되어 있다. 쉽게 철거할 수 있고 궁궐 중심 전각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형태로 보인다. 이것은 1892년 도식에 묘사된 강녕전 측면의 복도가 특 별한 경우에 임시로 설치한 가설물이며, 1892년 궁중연 향 설행 당시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1868년 도식에 경성전과 남행각을 연결 하는 복도가 1892년 도식에서는 묘사되지 않는 것으로 볼 때, 연향의 동선 등과 관련해 필요에 따라 적소에 임 시로 설치한 것으로도 추측된다. 1868년과 1892년의 두 가지 도식에 차이가 있는 이유는 1876년(고종13) 경복궁 내전 일곽의 대형화재로 강녕전이 소실된 후 복도가 재 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1873년(고종10) 발생한 내 전 화재 후 중수 공사에 대한 논의를 하던 중, 복도가 화재 확산의 주된 요인이 되므로 재건 시에는 간소화시 켜야한다는 주장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90) Fig .5

    창건 경복궁의 강녕전을 비롯해91) 1868년 무진 진찬 때에도 정식으로 존재했을 복도가 사라지고 1892년 연향 시 임시로 설치되었을 가능성은 『경복궁배치도』와 『북궐 도형』의 비교를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 『경복궁배치 도』는 1876년 경복궁 내전의 대화재 후 1888년부터 시 작된 재건공역에 실무적 용도로 쓰기 위해 1888년~1890 년 사이에 제작된 것이다.92) 도면에 강녕전 주변의 복도 가 도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경성전 남쪽의 복도는 제 외하더라도 침전 측면의 복도를 설치할 계획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05년~1908년 사이에 제작된 것 으로 추정되는 『북궐도형』에 복도가 도시되지 않은 것으 로 볼 때 1888년 재건공역 시의 계획은 지켜지지 않은 듯하다. 즉, 강녕전 주변의 복도는 상시로 설치되어 있어 야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화재 등을 염려하여 소실 후 재건하지 않았고 궁중연향을 비롯한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임시로 설치하여 사용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Fig .6

    궁중연향 시 복도의 활용 가능성은 함녕전에서 연향을 설행할 때 마련된 중배설청의 위치에서도 확인된다. 이 때의 중배설청은 응춘문 밖에 마련되었는데,93) 응춘문은 함녕전 동측면 복도와 행각이 교차되는 지점 바로 가까 이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94) 『경운궁중건 배치도』와 1901년(신축) 『진찬의궤』 도식은 상이하지만 응춘문은 동행각 내의 복도와 상당히 연접한 곳에 있었 고 중배설청은 응춘문과 복도를 통해 함녕전과 연결되었 을 것으로 추측된다.

    요컨대 강녕전과 함녕전 연향 시 마련되는 중배설청의 위치와 이동 동선을 볼 때, 침전 측면의 상설 혹은 임시 로 설치된 복도는 궁중연향 시 공간 상호간의 연계성을 증대시킬 수 있는 용도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5.맺음말

    궁중연향은 조선시대 전범위에 걸쳐 예악의 실천과 사 회통합을 목적으로 꾸준히 설행된 중대한 국가 의례이다. 이는 순조 28년 무자 진작을 기점으로 설행 체계에 변화 를 맞이하게 되는데, 바로 한 가지 목적 하에 치르는 연 향의 횟수가 많아진 것이다. 이처럼 성대해진 연향의 규 모에 비례하여 연향을 보조하는 공간의 필요성과 비중 역시 증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궁 궐의 공간 운영이라는 맥락에서 순조 28년 이후 12차례 연향에 관련된 숙설소와 중배설청의 배치 및 운영 양상 을 살펴보았다.

    숙설소는 연향에 소용되는 대량의 음식을 보관하고 조 리하기 위한 대규모 임시 주방으로서, 궁궐 외부에서 차 출된 보조자들까지 장기간 출입하며 사용하는 곳이었다. 따라서 궁궐 내 숙설소가 설치되는 영역은 연향 중심공 간에서 너무 멀거나 가깝지 않고, 되도록 긴 시간 동안 대규모 건물을 수용·유지할 수 있는 넓은 곳이 선택 되 었다. 연향 중심공간으로부터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 다는 것은 중심공간이 어디인가에 따라 숙설소의 위치도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95) 즉, 숙설소는 궁궐 내 어느 한 곳에 고정되어 있던 게 아니라 중심공간의 위치에 대 응하면서 그 시설이 갖추어야 할 조건을 적절히 충족시 킬 수 있는 곳에 설치되었던 것이다. 이를 반영하여 숙 설소는 연향을 베풀던 당시의 궁궐 운영 상황을 반영하 여 동궁 전각과 주변 영역의 가변성을 활용하면서 융통 성 있게 설치되었다. 더불어 동궁의 부속시설인 춘방·계 방·별군직청 등의 공간까지 두루 사용함으로써, 기 구축 된 결속력을 기반으로 연향의 원활한 진행을 위한 협력 체계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궁성문 및 숙위처와 연접한 곳에 위치하여 이들 시설이 갖춘 수비 기능과 연 동됨으로써 운반과 검열, 보안의 효율성을 높였다. 이로 써 원활한 작업 동선을 충족하면서도 궁궐의 수비제도를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 숙설소의 운영 체계가 구축된 것 으로 볼 수 있다. 한편, 경운궁의 숙설소는 연향이 끝난 후에도 철거하지 않고 몇 차례 더 재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는 국가와 왕실의 어려운 재정 상황에 대응하여 궁궐 의 공역 과정과 배치 특성을 숙설소 조성 계획에 반영한 것으로 이해되며, 이를 통해 궁궐의 재정 및 공간 운영 이 숙설소의 그것과 연동되었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중배설청은 연향이 거듭될 때마다 변동되는 복잡한 동 선에 적절히 대응하면서도 연향 중심공간과 연접한 곳에 마련되어 행사 당일의 긴박함을 해소하는 완충적 공간으 로 기능하였다. 특히, 강녕전과 함녕전 연향 시 설치되는 중배설청의 위치를 통해 궁궐 침전 측면에 연결된 가설 혹은 상설 복도가 궁중연향 시 공간 상호간의 유기적 연 결을 위해 활용되었을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연향 시 전각 사이에 복도를 가설하였다는 것은 일시적이지만 공간적 변동을 시도하여 궁궐의 공간 운영 시 융통성을 구현한 것이라 해석된다.

    궁중연향을 준비하고 설행하는 동안에는 역동적인 공 간 인식과 탄력적인 공간 활용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이 를 위해 설치되는 숙설소와 중배설청은 임시로 사용되었 음에도 궁중연향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요소였으며, 궁중 연향 시 수립되는 궁궐의 공간 계획에서 간과될 수 없는 하나의 공간으로서 인식되고 운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Figure

    JAH-24-67_F1.gif

    Structure and duration of use of banquet space

    JAH-24-67_F2.gif

    System of Suk-seol-so by banquet type

    JAH-24-67_F3.gif

    Reuse of Suk-seol-so

    JAH-24-67_F4.gif

    Changes in corridors of Gangnyeongjeon in Gyeongbokgung (경복궁 내전 화재 전후 비교)

    JAH-24-67_F5.gif

    Palaces and corridors of Gangnyeongjeon

    JAH-24-67_F6.gif

    Installation of Jung-bae-seol-cheong when holding banquets in Hamnyeongjeon

    Table

    List and basic information about court banquets

    Structure of Suk-seol-so (1848, 戊申『進饌儀軌』 稟目)

    Palaces which gave banquets and related images

    Information about structure and installation of banquet space in Changgyeonggung

    (그림: 『東闕圖』_동아대소장본 상에 재작도, 표: 의궤의 擇日과 饌品내용 정리)

    Information about structure and installation of banquet space in Gyeongbokgung

    (그림: 『景福宮配置圖』_캐드도면 상에 재작도, 표: 의궤의 擇日과 饌品내용 정리)

    Information about structure and installation of banquet space in Gyeongungung

    『慶運宮重建配置圖』_캐드도면 상에 재작도, 표: 의궤의 擇日과 饌品내용 정리)

    Layout of Suk-seol-so, palace gates, and Suk-wi-cheo by Palace type

    [범례 : ■_궁궐 숙위처, □_궁성문/궁문]

    Footnote

    Reference

    1. 『慈慶殿進爵正禮儀軌』純祖27, 1827), 규장각, 奎 14535,
    2. 『進爵儀軌』戊子(純祖28, 1828), 규장각, 奎14364,
    3. 『進饌儀軌』己丑(純祖29, 1829), 규장각, 奎14370,
    4. 『進饌儀軌』戊申(憲宗14, 1848), 규장각, 奎14372,
    5. 『進饌儀軌』戊辰(高宗05, 1868), 규장각, 奎14374,
    6. 『進爵儀軌』癸酉(高宗10, 1873), 규장각, 奎14375,
    7. 『進饌儀軌』丁丑(高宗14, 1877), 규장각, 奎14376,
    8. 『進饌儀軌』丁亥(高宗24, 1887), 규장각, 奎14405,
    9. 『進饌儀軌』壬辰(高宗29, 1892), 규장각, 奎14428,
    10. 『進饌儀軌』辛丑(光武05, 1901.05), 규장각, 奎14446,
    11. 『進宴儀軌』辛丑(光武05, 1901.07), 규장각, 奎14464,
    12. 『進宴儀軌』壬寅(光武06, 1902.04), 규장각, 奎14494,
    13. 『進宴儀軌』壬寅(光武06, 1902.11), 규장각, 奎14499,
    14. 『日省錄』
    15. 『承政院日記』
    16. 『朝鮮王朝實錄』
    17. 『新增東國輿地勝覽』제2권, 비고-동국여지비고 제1권,
    18. 『東闕圖』『東闕圖形』,
    19. 『景福宮配置圖』『北闕圖形』,
    20. 『慶運宮重建配置圖』
    21. 문화재청 (2005) 『덕수궁 복원․정비 기본계획 3-1』 ,
    22. 문화재청 (2009) 『경복궁 복원기본계획』 ,
    23. 문화재청 (2010) 『창경궁 복원정비 기본계획』,
    24. 문화재청 (2010) 『덕수궁 준명당 수리 보고서』,
    25. 서울학연구소 (1996) 『서울학번역총서Ⅱ 궁궐지2』,
    26. 홍 순민 (1999) 『우리 궁궐 이야기』 , 청년사, 서울,
    27.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3) 『조선 후기 궁중연향문화 권1』, 초판, 민속원, 서울,
    28.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3; 2004) 『규장각소장의궤해제집 1』; 『규장 각소장의궤해제집 2』,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9. 문화재청 (2005) 『동궐도 읽기』,
    30. 박소동 역 (2005) 『국역 진연의궤 1, 고종 임인년』, 민족문 화추진회, 서울,
    31. 전통예술원 편 (2005) 『국역 헌종무신진찬의궤 권2_한국공연 예술사료번역총서7』, 민속원,
    32. 한 복진 (2006) 『조선시대 궁중의 식생활문화』 , 초판, 서울대 학교출판부, 서울,
    33. 정은임 외 (2007) 『궁궐 사람들의 삶과 문화』, 초판, 태학사, 파주,
    34. 안 창모 (2010) 『덕수궁』 , 초판, 동녘, 파주,
    35.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
    36. 여찬영 외 (2012) 『조선시대 의궤 용어 사전Ⅰ-왕실 전례 편』, 초판, 경인문화사, 서울,
    37. 정은우 외 (2012) 『동궐『, 동아대학교박물관,
    38. 지 두환 (2014) 『왕실친인척과 조선정치사』 , 역사문화, 서울,
    39. Sa Jin-Sil (2000) 『Theatrical Feature of Royal Palace in Choson』 , 『The Journal of Seoul Studies』,
    40. Kim Jong-Soo (2003) 『A Study of Literature in Kyujang-gak on Royal Court Banquet』 , 『Hankuk Hakpo』, Vol.29 (4)
    41. Kyoung Se-jin , Jae-Mo Cho (2013) 『Space Utilization and Boundary Control of Court Banquets in the Era of King Sunjo and Heonjong : Focused on Court Banquet Uigwe』 , 『National Archives of Korea』, Vol.29 (4)
    42. Hong Sun-min (1996) 『The Management of Royal Palaces and the Changes of "the Dual Palace Managing System" in Choson Dynasty』 , Ph.D. Dissertation The Graduate School of Seoul National University,
    43. Kwak Soon-Jo (1999) 『A Study on the Characteristics of Layout of Kyongbokgung Palace in the Early Period of Chosun Dynasty from the Management and Use of the Palace』 , Master Dissertation Sung Kyun Kwan University,
    44. Cho Jae-Mo (2003) 『The Rituals and Architectural Norms in the Royal Palaces of Joseon Dynasty』 , Ph.D. Dissertation The Graduate School of Seoul National University,
    45. Lee Hyo-Seok (2005) 『A Sutdy on the Space Using of the Royal palaces by Crown prince in Joseon Dynasty』 , Master Dissertation The Graduate School of Seoul National University,
    46. Cho Ok-Yeon (2008) 『A Study on the Dongjo Architecture of the Choseon Royal Palace』 , Ph.D. Dissertation. The Graduate School of Kyonggi University,
    47. Yi Hye-Won (2009) 『A Study on the Changes to the Jeongak Complex after the reconstruction of Kyeongbokgung-With a focus on 'Kyeongbokgung Baechido' and 'Bukgwoldohyeong』 , Ph.D. Dissertation The Graduate School of Kyonggi University,
    48. Choi Ji-Young (2009) 『A Study on the Function and Characteristic of 'Cha-Il(遮日)' through the Analysis of Royal Rituals in the Joseon Dynasty-Focus on the Royal Banquets since 19C-』 , Master Dissertation The Graduate School of Hanyang University,
    49. (2014) 『Study on the Human and Physical Space of the Royal Court Kichen of Joseon Dynasty』 , Master Dissertation The Graduate School of Sookmyung Women’s Univers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