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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 1598-1142(Print)
ISSN : 2383-9066(Online)
Journal of architectural history Vol.24 No.6 pp.45-55
DOI : https://doi.org/10.7738/JAH.2015.24.6.045

The Characteristics of Gwanghwamun reconstruction in the 1960’s

Nan-hyoung Kang, In-Ho Song*
Corresponding Author : inos@uos.ac.kr
August 15, 2015 December 3, 2015 December 25, 2015

Abstract

After the Korean war, two major attempts were made to reconstruct Gwanghwamun Gate as an important part of Korea’s lost cultural heritage. In December 2006, the Korean government replaced the concrete gate with a wooden one, yet traces of the attempts made in the 1960s to transform Gwanghwamun Gate and the main road remain to this day. At the time, the Third Republic of Korea, sought to legitimize itself in the name of modernity, and went on to modernize the architecture and urban landscape of Seoul. The location and design selected for the rebuilt Gwanghwamun illustrated the symbolic relationship between historic heritage and urban development. The reconstruction of the gate began as part of the Third Republic’s project to restore the Central Administration Building and culminated in the transformation of the main road in front of the gate. By reconstructing the traditional gate using concrete, the military government intended to convey the message that we could inherit our proud tradition using modern materials, and that we should actively adopt the new technologies of the modern era. This study begins with the premise that the Gwanghwamun reconstruction project of 1968 represents the application of new technological thinking to Korea’s architectural style, and has two objectives. The first is to summarize the reconstruction process and method using the records and drawings from the 1968 project, which was then under the leadership of architect Kang Bong-jin. The second is to analyze the characteristics of the architectural style and structure of the reconstructed Gwanghwamun so as to reinterpret the relationship between Korean tradition and modern technology.


1960년대 광화문 중건과정의 특성

강 난 형, 송 인 호*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 박사과정)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초록


    Ministry of Education
    NRF-2013S1A5B8A01055322

    1.시작글

    1-1.연구의 배경과 목적

    2006년 12월 중앙청 정문에 서있던 콘크리트 구조의 광화문이 철거되고 원위치에 목구조 광화문이 중건되 었다. 그러나 1960년대라는 시점은 여전히 역사도시 서울의 광화문 앞길에 가장 큰 변화를 남겼다. 제3공 화국시기, 광화문 앞길은 도시의 기념비적 공간이었다. 앞길은 100미터로의 도로 확폭과 군사퍼레이드, 동상 의 등장 등의 크기, 성격변화를 겪었다. 또한 광화문의 입지와 양식선택은 유산과 도시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광화문 중건은 제3공화국의 중 앙청 복구로 시작된 그 앞길변화과정에 실현되었기 때 문이다. 콘크리트 구조로 전통양식을 구현하는 것은 물질이 바뀌어도 전통을 계승할 수 있으며1), 오히려 새로운 시대의 기술을 덧붙여져야 한다는 사유에 바탕 을 두고 있다. 이 연구는 광화문 중건(1968)이 새로운 기술적 사고를 통해 창작하였던 양식의 결과물이라는 가설에서 시작되었다. 연구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첫

    째, 건축가 강봉진의 작업으로 건설된 광화문은 전통 목조건축을 철근콘크리트구조로 중건한 것이었다. 당 시의 문헌과 도면을 토대로 광화문의 건축계획과정과 구축방식을 정리하고자 한다. 둘째, 1968년 중건된 광 화문의 구축방식과 구성요소의 분석을 통하여 근대 기 술과 전통양식의 관계를 해석하고자 한다.

    1-2.연구의 대상과 방법

    건축가 강봉진이 1968년도에 설계했던 광화문중건의 성격에 대한 연구는 크게 세 가지 방법으로 진행하였 다. 첫째, 문헌연구와 실물을 분석하였다. 광화문에 대 한 두 번의 설계(목구조: 67년12월21일/콘크리트구조: 68년2월28일)를 진행했던 강봉진은 설계 과정에서 몇 개의 논문, 기고문2)을 남겼다.

    이후 설계가 실현되기까지의 과정은 자문회의3)기록과 서울역사박물관 외부에 있는 광화문(1968)의 해체부분 을 통해 분석하였다. 둘째, 관련 도면을 비교하고 분석 그림을 만들었다. 강봉진의 목조건축 광화문에 대한 해석과 변용작업을 살펴보기 위해 기준이 되었던 도 면4)을 비교분석하였다. 마지막으로, 당시 실무자의 인 터뷰와 소장자료를 통해 구축방식을 보완하였다.5) <Fig.1>

    2.광화문(1968)입지변화의 배경

    광화문(1968)은 원위치에 지어지지 않았다.6) 서울시 와 문화재관리국의 위치논쟁(건춘문 북측과 중앙청 정 문)은 경복궁의 경계와 관련되어있다. 해방이후 경복 궁의 경계는 국유재산의 건물목록(1960.9.30.)과 사적지 정(1963.1.23.)을 통해 알 수 있다. 식민시기,7) 궁역의 운영은 조선총독부(중앙청)/경복궁/총독관저(청와대)의 3 영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해방이후 제도적으로 실 질적인 토지의 분할이 이루어진 것은 국유재산법 (1970.1.1.)이었다. 그러나 1962년 중앙청을 복구한 것 은 이시기에도 경복궁의 영역에 대한 실질적인 운영이 축소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Tab.1> 은 영구보존재 산8) 목록이다. 광화문은 중앙청과 경무대를 제외한 영 역(94,121.5py/ 185,841py)9)의 해당건축물로 기록에 포 함되어 있다. 이 시기 광화문의 입지를 중앙청 정문으 로 정하는 것은 경복궁 영역 밖으로 위치를 변경하는 문제였으며, 원위치가 아닌 새로운 기준을 논의를 가 능하게 했다.10)<Fig.2>

    강봉진의 논문11)을 통해 입지변화의 기준을 추론해 볼 수 있다. 광화문 입지선정에 있어서, 원위치(1-58번 지)보다는 중앙청을 중심축으로 새로이 만들어질 광화 문 앞길과의 관계가 더 중요했다. 또한, 경복궁의 중심 축보다는 새로이 만든 도시 축을 사용하여 유산을 이 동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장소로부터의 자유로 움은 새로운 양식에 대한 사고와 연관된다.

    3.강봉진의 고건축실측과 복원설계

    3-1.선행연구를 통해 본 1960-1970년대 콘크리트구 조 전통양식

    1960년대부터 시작된 콘크리트 구조의 전통양식에 대한 선행연구는 크게 ‘현대성(새로운 대공간, 경제성, 속도)/ 전통성(한국성)’을 중심으로 정의될 수 있다. 건 축계의 담론으로써 후자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루고 있다.12) 안창모(1999, 2007)13)는 기존 학계에서 콘크리 트 구조의 전통양식이 정치적 도구로 전통건축을 모사 하고 재현한 산물로만 여겨졌기 때문에 후대 역사적 대상에서 제외되었음을 말했다. 조재모(2005)14)는 60년 대 말 전통논의의 시도가 ‘계승해야하는 타자’로써 전 통의 수동적 성격을 갖고 있으며, 민족과 국가라는 거 대담론을 담아내야 하는 ‘형태적 아이콘’으로 활용되기 위한 한계를 지적했다. 또한 이은진(2002)15)은 1960-7 0년대의 전통논의를 기점으로 전통성 구현에 있어서 형태에서 공간으로 변화하게 되었음을 정리하였다. 이 제까지 콘크리트 구조 전통양식은 건축의 부정적 측면 을 압축해 놓은 평가를 받아왔다. 이는 건축의 가치가 건축가의 사유와 디자인에 있다는 전제를 암시하는 것 이기도 했다.

    사회적 조건에서 만들어진 특정한 구축 경험은 선행 연구에서 가벼이 여겨졌다.16) 그러나 이 시기의 건축 은 권력이나 역사적 사건의 건축적 표상이 아닌 구축 의 경험으로 다루어 질 수 있다. 국가와 관료, 산업이 라는 조건에서 주도된 역사17)에 대응해야 했던 건축의 양상을 추적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본 연구는 전통양 식에 대한 선행연구와는 차별성을 갖고자 했다. 담론 보다는 구축방식을 주목하고자 했다. 새로운 산업재료 와 기술로 고건축을 재현하는 것은 기존 도면과 다른 건축의 분류, 생산방식18)이 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3-2.강봉진의 고건축 실측과 복원설계

    강봉진(姜奉辰, 1917-2003)은 목구조설계가 익숙한 건 축가였다. 1960년대 문화재 실측작업에서부터 문화재 를 설계하는 독보적 존재였다.19) 1960년에 국보 건설 단이라는 사무실을 시작하였지만, 초기에는 주로 현대 건축물(유류공장, 학교교사, 호텔, 체육관 등)을 설계하 였다. 1962년 문화재실측설계자격을 딴 이후 본격적으 로 문화재의 실측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가 되었 다. 이 시기에는 1963년 문화재 이양20)하고 보물을 재 지정21)하는 등 많은 문화재영역이 다시 문화재관리국 의 관리 하에 있게 되면서 실측, 보수, 복원 작업이 이 루어졌다. 강봉진에게 문화재를 실측하는 작업22)은 실 리적인 측면이 있었다.23) 문화재의 세밀한 실측은 후 에 진행될 수 있는 복원설계를 위한 토대가 되었기 때 문이다. 해체복원을 하거나 전쟁으로 파괴된 문루를 복원하기 위하여 남아있는 부분을 실측하고 기록을 참 고하여 복원도를 작성하였다. <Tab.2>

    그러나 국가차원의 현존하는 고건축물 실측조사는 사 라진 고건축물을 복구하는 작업에만 사용되지 않았다. 국가가 새로이 만드는 사당과 박물관 등 국가의 전통 성을 대변하는 건축설계에도 활용되었다. 국립박물관 설계(1966.1)를 시작으로 실측된 도면은 문화적 산물로 해석되기 보다는 건축의 모본으로 활용된다. 장소, 문 화, 사회적 배경은 사라지고 요소를 과감하게 적용한 설계가 이루어졌다.24)

    3-3.강봉진의 건축유형과 콘크리트에 대한 생각

    광화문 중건은 입지를 새로운 축으로 변경한 것 이외 에도 파괴된 문루를 콘크리트로 중건한 것이다. 담당 건축가였던 강봉진은 입지 뿐 아니라 재료에 대한 생 각을 글로 남겼다. 그는 광화문을 콘크리트로 중건하 는 것에 의미를 두었다. 처음 목구조로 광화문의 설계 가 맡겨졌을 때에도 ‘백년대계의 견지로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광화문을 제안했었으며25), 이후에도 양회공업 의 잡지를 통해서도 광화문을 ‘고전식(classic style)’이 라 하여 고층건물의 한 유형으로 편입시켰기 때문이 다.26) <Tab.3>

    그에게 콘크리트라는 재료는 어떠한 의미였을까. 영 원성을 줄 수 있는 새로운 재료이며, 물질이 바뀌어도 전통이 계승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한국양회공업지를 통해 1960년대에 대한 건축사를 기 술함에 있어 그는 철근콘크리트의 발달로 새로운 양식 적 사고가 필요함을 주장했다. ‘양식’에서 ‘유형’으로의 개념적 이동이란 새로운 재료로 인해 건축물이 어떤 지역에 속한 문화를 보여주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했 다.27) 그는 해당 건축물의 용도, 의미와 상관없이 구조 (구조형태)와 장식(치레방법)으로 건축을 분류했다. 국 제적으로 비지역적이고 비역사적인 보편적인 건축유형 속에 유일하게 고유미와 정신(전통)을 보존하는 방법 을 콘크리트 구조로 만든 한옥이라고 생각하고, 현대 건축물의 분류에 있어 하나의 건축 유형으로 의미를 부여했다.

    광화문을 설계하는 것은 고전의 시공방식으로 전통을 보존하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콘크리트 구조 광화문을 고전식이라 분류한 것은 새로운 기술로도 지역의 문화 를 보여줄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에게 산업은 그 시대의 건축생산방식으로의 유형을 보여주는 중요 한 의미였다.

    4.광화문(1968)중건과정의 성격

    4-1.전통미와 척

    강봉진은 전통미를 표현하기 위해 콘크리트 구조와 목구조의 갈등관계를 고민했다. 그가 생각한 고건축의 미를 표현하는 중요한 요소는 안정감(기둥), 구성미(공 포), 곡선미(처마)이며, 치레(장식)이었다.28) 그의 첫 설계과정은 다케우치(武內保二)의 도면과 실측치수를 비교하여 曲尺29)을 營造尺으로 환산하는 것이었다. 육 축(궐문)의 경우는 1尺(營造尺)= 0.962尺(曲尺)과 같고, 문루의 경우는 1尺(營造尺)= 0.97尺(曲尺)30)과 같음을 밝혔다.

    광화문 도면은 모두 척을 기본단위로 가로 안에 미터 를 간간히 적혀있다. 콘크리트 구조의 건축물에 관한 도면이지만, 미터가 기준이 되지 않았다. 척은 ‘건물 복원의 기준’31)으로 전통목수의 작업을 염두에 둔 것 이다. 비록 콘크리트 구조체이지만 전통 목수가 작업 해야 한다고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새로운 기술 로 문화를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전통목수의 기술이 전제되었음을 뜻한다.

    4-2.재료변화에 따른 크기와 비례

    전통 목조건축을 콘크리트 구조로 재현하면서 광화 문의 주 구조요소는 변경된다. 목구조에서 부재들이 밀집되는 주심도리, 처마도리, 중도리, 서까래 등에서 보이지 않는 부분은 삭제되고 변형이 이루어졌다. 또 한, 재료의 특성상 총 지붕과 문루의 자중이 무거워지 고 기둥, 보 방식으로 구조가 새로이 해석되면서 주 구조요소와 그 부재의 크기가 변화되었다.32) 주 구조 요소라 분류된 것은 반자, 포벽 등이 있다. 포벽은 내 외부를 구분하는 단순한 기능에서 공포 간을 결합시키 고 지붕에서 기둥까지 상하부의 하중을 전달하는 중요 내력벽으로 21.4CM(목구조:10.745CM)의 폭이 된다. 반 자는 천장실내마감재료 후 시공되는 부분이지만, 콘크 리트 구조에서는 창방, 보, 상부도리, 서까래가 생략되 고 주 구조체로 시공되었다.

    건축가가 중건설계과정에서 유지하였던 기준이 무엇 이었을까. 그가 정리했던 표를 보면, 부재의 폭이 다르 게 변경된 것에 반하여 부재의 높이는 그대로 유지되 었다.33) 또한 1968년 도면의 중심선과 치수를 감안해 볼 때, 복원의 수직적인 기준선이 주고(기둥의 높이)로 지켜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1926년에 실측된 도면과 강봉진의 도면을 비교해보면 상하층 평주와 중 앙고주의 높이를 기준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 다.<Fig.3>

    그러나 용마루선, 처마도리 등의 위치는 다르다. 구광 화문의 높이는 1926년 실측도면에 비해 0.3척(9.09cm) 높게 계획된다.34) 물매는 1:0.4로 목구조 물매(1:0.45)보 다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처마가 좀 더 들리는 형상이 되었다.35) 결과적으로, 재료의 변화와 새로운 구조해석 으로 목구조에서 중요한 구조관계를 만들었던 도리와 서까래의 관계는 해체된다.

    4-3.단위요소의 구축방식

    광화문(1968)은 다른 재료(콘크리트와 돌)로 계획되었 는데, 생산체계36) 뿐이 아니라 구축방식에 차이가 있 다. 단위요소에 대한 새로운 사고로, 수평적 공간분할 과 건축 요소 나눔이 이루어졌다. 목구조 광화문의 중 층문루는 반 칸 물림방식으로 귀 고주와 고주가 사용 되기 때문에 수평적 단위로 나눌 수만은 없다. 이와 달리 콘크리트 구조방식은 바닥, 벽, 기둥, 지붕을 일 체화하는 구조이지만, 시공과정이 적층방식이다. 거푸 집을 이용하여 빈 공간을 만들고 타설하는 방식은 적 층되는 수평단위로 분절된다. 이는 기존의 목구조 광 화문이 고주를 함께 세워 도리와 보를 연결하는 것과 는 다르다.

    또한 일체형 콘크리트가 아닌 부분에 있어서 단위요 소를 사용했다. 60년대까지는 단위요소는 공장생산보 다는 현장에서 도목수가 나무형틀을 제작하여 대략 10 회 정도이내에 사용되었는데,37) 광화문의 경우도 나무 거푸집을 제작하여 지상에서 부재를 제작하고 후에 조 립하였다.38) 이때, 일반 거푸집을 작업하는 목수가 아 닌 전통목수가 참여하면서 단위요소의 제작에는 전통 목구조 기술이 적용되었다. 대표적인 단위요소는 서까 래, 선자연, 공포, 순각판 등으로 PC(precast concrete) 로 제작된다.

    (1)공포와 순각판

    거푸집의 현촌도를 제작한 것은 전통목수 이시형이었 다. 그는 거푸집제작에 있어서 전통목구조의 조립기술 을 이용하여 부재요소를 결합했다. 일체식 구조체와 프리캐스트 구조체를 연결하기 위해 각 부재거푸집에 는 철근을 연결하는 부분을 표기하였다.39) <Fig.4>

    부재요소를 조립하는 방식 또한 새로이 고안하였다. 대표적인 요소인 공포는 포벽을 주구조체로 내외부로 나누어 부착되었다.40)<Fig.5> 이는 세트로 제작할 경 우 대형 양중장비가 필요하기 때문에 인력으로 가능한 부재의 하중이 고려하였다.41) 전통 목구조는 부재의 조립 후 수정이 가능하지만, 콘크리트 구조는 수정이 불가능하며, 실제 지어지는 형상 밖에 구조물을 만들 어 거푸집을 해체해야 하는 방식이다. 순각판은 이점 을 염두에 두고 pc로 제작되었으며 일체형 거푸집의 역할도 겸하였다.<Fig.6>

    (2)도리와 서까래

    서까래를 pc로 제작하면서 처마도리를 기준으로 바깥 은 역보로 안쪽은 일반 보를 사용하여 구조와 하중, 형상을 해결했다.<Fig.7>

    시공 상 더 어렵게 제작해야하지만 지붕부분에 있어 서는 형상에 맞추어 역보를 사용한 것이다. 역보 하부 에는 부착되는 서까래는 지붕공사과정 중 마지막에 시 공되었다. 추녀거푸집을 설치하고 곡선부재를 만드는 목재 틀과 슬라브 틀을 제작하여 타설한 후 미리 심어 놓은 연결철물에 후에 서까래를 매달게 된다.42) 이때, 서까래의 크기는 시공성 때문에 설계된 치수(200mm) 가 154mm로 변경되었다.43)

    해체된 광화문 실물을 보면, 서까래의 후 시공을 위해 일체형 구조면도 변경된 것을 알 수 있다. 서까래가 등 간격으로 매달기 위해 처마도리 위쪽 벽에 미리 원 형 홈을 만들어 위치를 고정하였다.

    (3)표면 텍스처

    서까래의 제작에 있어 나무의 질감이 중요했듯이 각 부재의 시공과정에서 염두에 두었던 부분은 표면질감 이었다. 현장감독이었던 구일옥에 따르면44) 구축과정 에서 질감은 전통건축미의 중요한 특징으로 인식되었 다. 한국건축의 독특한 질감은 자귀질에 의한 것이며, 자귀질의 표현을 위해 여러 번의 시행착오로 거푸집이 제작되었다.

    4-4.소결

    광화문을 콘크리트 구조로 번안하는 작업은 전통형태 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에 있지 않았다. 구축방식의 설 계과정, 실현에 있어서 기술은 중요한 중심요소였다.

    첫째, 콘크리트 건축물이지만 장인을 통해 전통양식 의 미를 담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尺을 단위로 사용한 것은 형상을 제작하는 것은 전통목수의 몫이라 는 생각이 담겨있다. 다케우치도면의 단위였던 曲尺을 營造尺으로 환산하고 실측하여 미터법이 아닌 尺으로 도면을 그리고, 실제로 공포제작 등의 거푸집을 도목 수가 제작하였다.

    둘째, 복원단위 기준으로 주고(柱高)를 변형되지 않는 수평적 기준으로 삼았다. 초석부터 용마루까지의 높이 가 아닌 중앙고주의 높이가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나 무에서 콘크리트로 재료가 변경되면서 상대적으로 목 구조에서 지붕의 주요한 구조요소였던 도리와 서까래 의 관계는 다시 해석되었다. 결과적으로 다른 높이와 물매를 허용하는 설계가 이루어졌다.

    셋째, 구축과정은 새로운 단위요소의 고안으로 가능 했다. 전통기술을 분할된 새로운 단위요소에 적용하였 다. 전통 목수가 나무거푸집을 PC로 제작하게 되었다. 그는 전통목구조 조립기술을 이용하여 부재를 결합하 였으며 그가 제작한 현촌도는 철근을 연결할 위치를 표기했다. 60년대는 부재의 집합을 구축단위요소로 옮 기기에는 대형양중장비와 용접작업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 단위요소를 분리하여 인력으로 이동가능하게 하였 다. 대표적인 부분은 반턱맞춤으로 제작된 공포로, 포 벽 내외부로 분리하여 부착하게 된다. 이를 유형의 대 량생산과 공업화로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70년 대 이후 공장제작방식으로 부재요소들의 산업이 만들 어지는 단초가 되었다.

    이처럼, 광화문 중건에 있어서 건축가에게 전통형태 의 표현보다 중요한 것은 기술에 대한 사고였다. 전통 목수의 손으로 새로운 기술에 적응하고, 그의 전통 기 술을 적용하는 것이 전통을 계승하는 방식이었다. 그 러나 구축과정에서 감각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건축의 보이지 않는 비례, 기준보다는 표면에 대한 논의에 집 중했다.

    5.맺음글

    건축가 강봉진의 계획과정과 구축방식을 정리하여 광화문 중건(1968)의 성격은 몇 가지로 도출될 수 있 었다. 광화문 중건은 처음부터 콘크리트 구조로 계획 된 것은 아니었다. 목구조에서 시작된 설계가 변경되 면서 건축가 강봉진은 전통 건축물에 대한 새로운 분 류방식을 사고하게 되었다.

    첫째, 강봉진은 콘크리트로 문화재를 건설하는 방식 에 대한 개입을 했다. 상대적으로 고급기술인력 없이 도 쉽게 건설 산업을 일으킬 수 있는 재료였던 콘크리 트는 국가와 기업에게 환영받는 재료였다. 경제개발 5 개년계획의 발표와 외자도입으로 일시적으로 만들어진 시멘트 산업과 국가적인 건축공급정책에 숙련기능공에 대한 위기, 건축생산방식의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다. 전통목수의 개입을 의도하는 것, 도면에 尺을 단위로 표기한 것은 이에 대한 대응으로 보인다.

    둘째, 광화문 중건설계는 목구조의 다케우치 도면을 콘크리트 구조의 도면으로 해석하고 설계하는 과정으 로 만들어졌다. 1963년 문화재 이양으로 국가의 고건 축 실측조사를 하던 건축가 강봉진이 그 설계를 담당 하게 되었다. 그는 주고(柱高)를 변경되지 않는 기준으 로 설정하였다. 이미 원위치에 세우는 문화재가 아니 었고, 새로운 축에 맞추어 새로운 설계가 이루어졌다. 중앙고주의 높이가 기준이 되면서, 도리 상부의 목구 조 지붕부분은 다르게 설계되었다. 지붕의 주요한 구 조체, 도리와 서까래의 관계는 다시 해석되어 결과적 으로 다른 높이와 물매의 광화문으로 변용이 이루어졌 다.

    셋째, 구조해석의 변화로 새로운 유형으로 건축단위 요소가 고안되었다. 시대의 생산방식으로 유형을 분류 했던 건축사로써의 강봉진의 생각은 구축과정에도 이 어졌다. 단위요소는 도목수의 전통 목구조 조립기술을 이용하여 10회 사용가능한 거푸집으로 사전제작이 이 루어졌다. 대표적인 부분은 반턱맞춤으로 제작된 공포 로, 포벽 내외부로 분리하여 부착하게 된다. 이때 단위 요소는 생산을 위한 구성요소로써 유형이 되어 복제가 능한 요소의 조합이 이루어졌다.

    광화문 중건(1968)은 새로운 산업재료와 기술에 대응 했던 건축의 생산방식이었다. 그는 새로운 기술을 이 용하여 지역과 문화적 가치가 포함될 수 있다고 생각 했다. 또한 기술 중심적으로 해석되었던 근대와 전통 에 대한 사고를 보여준다. ‘전통’(Tradition)은 ‘진화 (Evolution)‘해야 할 대상으로 사유되었다.

    Fig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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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luctuation of boulevard in front of Gwanghwamun 地籍原圖(1912)+ 朝鮮古蹟圖譜(1907-1915)+ 閉鎖地籍圖(1967-1983) ⓒKang, nan-h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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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rmanent Property list in Gyeongbokgung palace(1960.9.30.), land allotment according to the management authority.(1970.12.9.) ⓒ久皇室關係法令및 財産目錄集(1992)+久土地臺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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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lope of a roof (左: 光化門(1968) 右: 光化門(1865)ⓒKang, nan-h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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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precast concrete molds and hole- marking ⓒGu, Il-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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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struction unit-Kongpoes between colums(柱間栱包) ⓒKang, nan-h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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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Sungakpan part ⓒKang, nan-h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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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reversed beam and seokkaraes ⓒKang, nan-h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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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ble

    Permanent Property Building list in Gyeongbokgung palace(1960.9.30.)

    kang, bong-jin’s survey and restoration design list

    kang, bong-jin’s Classification 1960s building type

    [표]1960년7월23일 고적지정

    (출처: (대한민국)관보, 1960.7.23. 문교부고시130호)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제1조에 의하여 고적으로 지정된 사항을 동령시행 규칙제1조에 따라 다음과 같이 고시한다.

    [표]1963년1월23일 사적지정

    (출처: (대한민국)관보, 1963.1.23. 문교부고시174호)

    Footnote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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