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 론
개항이후 한국이 서구근대에 포섭된 이래 한국건축이 직면한 과제는 한국건축의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근대화를 이루는 일이었다. 한국 전통건축의 고유성을 현대에 계승하는 일은 전통의 이론화와 이에 근거한 지 속적 실천을 통해서 가능하다. 하지만 개항이후 한국은 전통건축의 고유한 아름다움과 원리에 대한 체계적인 생 각을 발전시킬 틈도 없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해방 후에는 압축적 근대화과정을 거치면서 전통과 급격히 단 절됨으로써, 전통의 현대적 계승이라는 한국건축의 과제 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있다. 해방 직 후 자주 적인 전통의 계승과 현대화에 대한 건축계의 자각과 반 성이 있었지만 이렇다 할 성과 없이 서양건축을 따라가 기에 급급했던 것처럼2) 지금도 한국건축은 여전히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서양이 주도하는 현대건축의 흐름을 쫓아가기에 바쁘다. 그 사이 한국건축에서 전통과 현대 의 간극은 좁혀지기는커녕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다.
본 논문은 지금까지 한국건축의 고유성을 발견하여 현대에 계승하려는 노력이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이유가 전통의 이론화에 대한 철학적, 인식론적 성 찰의 부족에 있다고 본다. 즉, 한국 전통건축에 내재한 고유한 원리는 있는가? 만일 있다면 이미 서구건축의 인 식체계와 실무방식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한국 전통건축 의 고유성은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가? 또 그것은 여전 히 유효한가? 본 논문은 위와 같은 질문에서 시작하여, 지금까지 한국건축의 고유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현대건 축에 적용하려는 시도들이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 그 접근방식들을 범주화하고 각각의 특성과 한계가 무엇인 지 분석하고자 한다. 그 다음, 전통의 이론화가 가진 근 본적인 인식론의 문제를 제기한 후, 전통의 이론화를 접 근하기 위한 인식론적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2.초기 한국건축의 고유미에 대한 이론; 직관 과 감각
한국건축의 고유미에 대한 최초의 연구는 일제 강점기 야나기 무네요시, 고유섭과 같은 서양미학의 영향을 받 은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한국의 예술에 남다른 애 정을 갖고 있었던 일본인 학자 야나기 무네요시는 한중 일의 예술과 건축을 비교하여 조선의 고유한 미를 한국 건축의 처마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곡선의 미, 그리고 민예품에서 볼 수 있는 무작위의 미로 정의했다.3) 최초 의 한국인 미술사학자이자 미학자인 고유섭은 조선건축 에 대해서 별로 독창성이 없는 중국의 아류로 평가하면 서도4) 조선의 고유한 미를 구수한 큰 맛, 질박, 담소, 무 기교의 기교, 곡선의 미, 무관심성, 비균제성과 같은 어 휘로 정의했다.5) 이들은 한국의 예술과 건축이 서양미학 의 관점에서 접근하기에는 어려운 독특성이 있음을 인식 하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고유한 개념어를 제시했지만, 이들에 의해 정의된 한국건축과 예술의 고유성은 어떤 객관적 원리가 아니라 주관적으로 체험되고 감상적 언어 로 설명되며 직관적으로만 접근할 수 있는 모호한 것이 었다.
해방 후 한국건축의 고유미에 대한 설명은 그 내용 이 더욱 풍부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론화의 관점에서 보 면 일제 강점기 학자들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예컨대 고유섭을 사사한 최순우는 한국건축의 고유미를 관조의 미, 순리의 미, 검박 미6) 등으로 정의했는데 이 러한 설명은 식민지 시대의 학자들보다 한국건축의 본질 에 좀 더 근접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역시 모호한 감상 적 언어로 표현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러한 고유 성은 객관적 원리가 아니라 즉각적 체험을 통해서 이해 되며 안목과 깨달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최순우는 “연경당의 아름다움은 바로 겸허와 실질과 소 박의 아름다움이며 그 속에 우리는 그다지 흥겨울 것도 없는 그다지 초라할 것도 없는 한국적인 품위와 조국에 대한 안온한 즐거움 같은 담담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 다”7)고 하고 연경당이 현대 한국건축의 모범이 되어야한 다고 했지만, 이것을 건축적으로 매개할 이론이나 방법 은 없고 단지 개인적 직관과 감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 다. 이와 같이 초기 한국건축의 고유성 이론은 감상적 언어를 넘어서 공리적으로 이론화되지 못했다. 이러한 한국건축의 고유미는 감각적으로 혹은 즉각적 체험을 통 한 깨달음을 통해 그 본질에 접근할 수 있을 뿐 체계적 인 원리나 규범으로 적용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전쟁이후, 한편으로는 건축계 내 의 자의식의 발로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적 필요에 의해 전통의 계승이라는 과제를 해결해야 했던 한국근대 건축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 로 활동하기 시작한 한국의 근대건축가들은 당시 보편적 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근대적 재료와 구법으로 한국건축 의 정체성을 구현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고 이들은 콘크리트로 전통건축 형태를 추상화하여 표현함으로써 전통과 현대를 연결하고자 했다.8) 이들이 전통건축의 고 유미를 현대적으로 번안하는데 의존한 것은 역시 직관과 감각이었고 이를 매개할 체계적 이론이나 방법론은 없었 다. 재료나 구법이 바뀌어도 형태를 이어가는 전통은 건 축의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연스런 문화의 지속성 이지만, 전통적 형태가 변형되고 추상화될 때 그것이 개 인적 표현성을 넘어서 보편성에 이르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사회적 동의를 획득하고 관습적 규범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9) 하지만 한국 전통건축에서 근대건축 으로의 변화는 과거 역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구축의 방식과 미적 수용태도에서의 급진적인 변화를 수반한 것 이어서 단순한 형태 이미지의 연속성으로 전통을 이어가 려는 시도는 근본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10) 결국 1960-70년대 건축가들의 개인적 직관과 감성에 의존한 전통의 형태적 표현은 소수의 탁월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한국건축의 고유성을 표현하는 체계적인 언어나 규범의 정립에는 이르지 못했고 “전통구현의 무능” 또는 “서술 언어의 미숙”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11) 1970년대 형태 중심의 전통논의에 대한 당시 젊은 세대 건축가들 의 반발과 비판은 여기에 근거를 둔다.12)
3.전통건축의 형식적 이론화
3-1.비례와 기하학적 분석
한국 전통건축의 고유미를 현대건축에 체계적으로 적 용하기 위해서는 직관과 안목에만 의존하지 않는 고유성 의 보편적 원리에 대한 이론화가 필요하다. 이것은 전통 건축에 대한 체계적 연구를 통해 일관된 원리를 발견하 고 그것을 적용할 방법론을 모색함으로써 가능하다. 1960년대 여의도 국회의사당 건립을 위한 기본설계연구 로 진행된 전통건축양식연구는 이러한 필요에서 시작되 었다.13) 이 연구는 “한국에 현존하는 고건축에 대한 조 사 연구를 통하여 보다 민주적인 건축문화의 전통을 살 릴 수 있는 한국고유의 건축물을 발굴하고 이를 분석하 여 국회의사당 건립계획 및 설계에 긴요한 참고자료를 얻고자”14) 했던 것으로, 주로 전통건축의 배치와 평면, 입면에서 비례와 장식체계의 분석에 집중했다.15) 이러한 관점은 비례와 기하학적 질서를 바탕으로 한 서양건축 이론과 그것을 한국의 고건축과 도시에 적용했던 일본 관학파의 연구에 영향 받은 것이다. 하지만 한국건축은 서양고전건축과 같은 이상적 비례와 기하학적 질서를 원 리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일관된 형식규범이 한 국 전통건축에 나타날 가능성은 별로 없다.16) 따라서 이 러한 연구는 실증적으로도 잘 맞지 않았고 한국 전통건 축의 고유한 미의식이나 의미를 밝혀내지도 못했다.17) 결국 “한국 전통건축의 직접적인 모방을 지양하고 전통 건축에서 도출한 배치, 평면, 입면의 비례를 현대건축에 이용하고자”18) 했던 이러한 연구는 국회의사당의 사례에 서 보듯 부분적인 장식적 모티브의 적용 외에 실제 현대 건축의 설계에 활용되지 못했다.19)
3-2.외부공간형식의 분석
형태와 비례가 아닌 외부공간에 주목하여 한국건축의 원리를 체계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는 안영배에 의해 처 음 이루어졌다.20) 그는 한국건축의 고유한 특징이 외부 공간에 있다고 보고, 한국건축의 외부공간을 구성하는 요소들(건물, 담장, 석탑 계단, 석등, 석교)과 서로 다른 성격의 외부공간(과정공간, 주요공간, 부공간, 매개공간, 승화공간)을 정의한 후, 그것들이 서로 연결되는 다양한 기법과 유형을, 관찰을 통해 시지각적으로 체험되는 공 간구성 형식으로 분류했다.21) 이 연구는 그의 표현을 빌 면 “체험적 감각과 지각”으로 한국건축을 접근하여 한국 인의 특수한 공간의식을 발견하고 그것을 “국제공통언어 로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22)
안영배의 연구는 한 마디로 서양건축의 공간개념과 문법체계를 한국 전통건축에 적용하여 한국건축의 외부 공간 구성원리를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간구성 형식이 한국 전통건축의 고유한 조성의도나 원 리, 또는 전통건축이 지어질 당시 한국인의 특수한 공간 의식과 인식체계를 반영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그가 찾 고자 한 한국인의 “선험적 공간형식(A Priori Spatial form)“23) 자체가 이미 서구건축의 폐쇄적 공간개념을 반 영하는데 한국건축의 공간은 이런 닫힌 볼륨으로서의 공 간개념 자체가 약하고 경계가 유동적이며 발생적인 시공 간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24) 안영배는 ‘한국 외부공 간의 정의’에서 지붕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벽에 의 해 정의되는 서양건축 과의 차이를 강조했지만25) 사각형 다이어그램으로 표기된 공간개념과 형식은 지나치게 서 구적이라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전통건축이 지 어진 당시 한국인의 공간인식체계에 근거하지 않은 한국 건축의 공간형식 분석은 주관적 해석에 근거한 추론에 그칠 가능성이 많다.
안영배의 분석은 당시 사람들이, 지금 현대 건축가의 입장에서 경험적, 시각적으로 관찰하여 분석한 공간구성 형식과 동일한 인식체계에서 집을 지었을 것이라는 믿음 에 근거한다. 다시 말하면 그의 분석은 역사와 장소를 초월한 순수 시지각의 보편성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한 국 전통건축이 서구건축과 같은 근대적 순수시각을 적용 한 공간지각 원리에 따라 체계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보기 는 어렵다. 이러한 시지각적 경험과 관찰에 의거한 추상 화된 공간구성 유형은 문화적 의미가 배제된 순수형식으 로서 한국건축의 고유한 조성원리와 정신을 설명하기 어 렵다. 따라서 이런 방식으로 전통건축의 고유성을 발견 하여 현대건축에 적용하는 데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26)
안영배의 연구는 한국건축의 고유성을 탐구하기 위해 외부공간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전 통건축의 실제 조성원리와는 무관한 서구적 관점에서의 전통건축의 고안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전통건축은 서 구와는 다른 인식체계와 정신에 근거한 것으로, 순수 시 지각의 틀을 통해 공간구성의 형식을 분석하는 방식으로 는 한국건축이 담고 있는 고유성을 드러내기 어렵다.
4.인문학적 관점의 전통건축 이론화
4-1.김수근의 전통건축 공간론
한국건축의 고유한 공간개념을 형태나 형식이 아닌 정 신, 즉 인문적 관점에서 처음 이론화한 건축가는 김수근 이다. 1964년 부여박물관의 왜색 논쟁 이후 김수근은 전 통의 현대화를 위한 방편으로 형태에서 공간으로 관심을 돌리고, 형태적 모티브가 아니라 전통건축에 담겨 있는 고유한 공간개념과 정신을 발견하여 현대건축에 적용하 려고 했다. 그가 제시한 궁극공간(Ultimate Space, 1976) 과 네가티비즘(Negativism,1980)은 이러한 이론화의 시 도였다. 김수근은 궁극공간을 거주(제1공간)와 생산(제2 공간)을 목적으로 하는 기능공간이 아닌 제3공간, 즉, 해 프닝이 발생하는 여유공간으로 정의하며 전통주거의 문 방공간과 정자를 그 예로 들었다.27) 문방과 정자는 인간 의 모든 감각과 자연이 친교를 하며 일과 놀이가 동시에 발생하는 궁극공간으로 현대건축에 이런 공간이 필요함 을 역설했다. 나아가 한국전통공간에 나타나는 소극성, 적정공간, 가변성, 공유공간과 같은 태도를 서양의 기능 주의적이고 포지티브한 관점과 대비시켜 네가티비즘으로 정의했다.28) 어떤 상황의 상호보완적 이면을 함께 보는 네가티비즘이야 말로 전통적인 유불교 사상의 근저에 있 는 한국 고유의 문화적 태도이자 정신이라고 주장했다.
한국건축의 고유성에 대한 김수근의 이론은 서양의 기능주의적 근대건축과 대비되는 전통건축의 정신과 공 간의 성격을 잘 설명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현대건축에 적용할지는 역시 막연하다.29) 전통의 이론화는 실제 건 축설계에 적용할 수 있는 도구적 방법과 형식적 원리로 설명되어야하는데 궁극공간과 네가티비즘은 추상적 개념 에 불과하고 건축의 형식원리로 쉽게 번역되거나 설명되 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궁극공간과 네가티비즘은 여전 히 직관과 감각에 의존하는 모호한 본질주의적 접근이라 고 할 수 있다.
4-2.설계도구로서의 개념어
한국근대건축의 2세대라고 할 수 있는 4.3 그룹의 건 축가들은 1990년대 초 전통의 이론화 문제를 새롭게 접 근했다. 이들은, 근대건축조차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상 태에서 등장한 탈 근대건축의 영향으로 한국건축이 심각 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 편으로 전통건축의 정신적 가치에 새삼 주목했다. 그들 은 전통건축의 형태요소보다 공간과 정신에 주목하고 한 국건축의 고유성을 감상적 관점이 아니라 근대성 안에서 발견하려고 했다. 즉, 물질과 합리성에 지배되는 서양 과 대비되는 한국 전통건축의 본원적 가치는 오히려 진 정한 모더니즘의 정신과 연결될 수 있다고 믿었다.30) 그 러나 그것을 보편적 원리로 설명하기보다는 주관적 관점 에서 직관적 확신을 바탕으로 한 개념어로 환원하여 자 신의 설계작업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삼았다. 예컨대 비움, 길, 마당, 마을, 풍경31)과 같은 어휘는 전통건축의 정신을 담는 주제어로 이전 세대의 고유성 이론에 비해 자신의 설계에 활용할 수 있는 도구적 개념으로서 장점 이 있지만, 직관적 개념화 과정에서 전통건축의 의미를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왜곡하는 문제가 있다.32) 일례로 그들은 한국 전통건축의 마당을 비움, 없음, 침묵, 무의 공간으로 정의했지만 마당은 실제 통로로 사용될 뿐 아 니라 다양한 행위가 일어나는 이벤트 공간의 성격을 갖 는다. 따라서 이들의 전통건축의 고유성에 대한 개념화 는 현대건축가의 입장에서 본 전통건축의 주관적 고안에 불과한 것으로, 실제 전통건축이 담고 있는 고유한 성격 을 드러낸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들의 전통건축 이론화는 건축가가 설계에 활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개념어로 고안되었다는 점이 특징이지만 추상적 개념화가 전통건축의 고유성에 대한 체계적 이론 이나 그에 근거한 디자인 원리로 발전되지 못하고 개인 적이고 감각적인 언어의 수준에 머문다는 한계가 있다.
4-3.전통건축의 현대적 발견
전통건축의 설계원리와 의미를 정신적, 인문학적 배경 과 건축적 관점에서 폭넓게 해석한 시도로 김봉렬의 연 구가 있다.33) 그의 해석은 인문 사상적 배경과 시지각적 관점이 복합된 절충적 성격을 갖는다. 유교와 불교 교리 를 배경으로 건축물의 역사와 정신을 설명하기도 하고 시지각적 관점에서 설계의도를 분석하기도 하고, 서양건 축과 예술사의 여러 개념들을 전통건축에 직설적으로 적 용하기도 하면서 한국 전통건축에 대한 풍부하고 직관적 인 해설을 제공한다. 하지만 역시 전통건축의 고유한 원 리를 체계적이고 일관성 있게 설명하는, 말하자면 전통 의 이론화를 위한 체계적 접근이 아니라는 점에서 한계 가 있다. 물론 그 중에는 사실에 가까운 것도 있겠지만 어떤 해석은 실제의 설계원리나 조성의도라기보다는 현 재적 관점에서의 추정과 추론일 가능성이 많다.34) 예컨 대 서양건축의 낭만주의와 고전(합리)주의 개념이 한국 의 전통건축 조성의도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지는 의 문이다.35) 또, 리듬이나 통일성과 같은 서양고전건축의 미적 원리가 한국 전통건축의 미적 체험을 규정하는 원 리가 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때로 유교나 불교사상이 특정 건축물의 상징체계와 구성 원리에 어떻게 적용되었 는지 설명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 건물에 관한 배경적 지식에다 서양건축의 개념을 적용하여 추론한 것이지 실 제 한국건축에 체계적 규범이나 기율로 적용된 원리나 개념은 아니다.
서양건축의 개념을 한국 전통건축에 직설적으로 적용 하거나 서양건축에 훈련된 현대 건축가의 눈으로 전통건 축을 해석하는 것은 전통의 이론화라기보다는 현재의 관 점에서 전통건축을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즉, 김봉렬의 연구는 다양한 전통건축의 의미에 대한 직관적이고 독자 적인 해석에도 불구하고 한국건축의 고유성에 관한 보편 적 원리의 이론화라기보다 현대 건축가의 관점에서 전통 건축을 주관적으로 발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전통건축의 고유성에 대한 이론화는 현재의 관점에서 발 견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어진 당시의 맥락과 인식체 계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
4-4.전통사상을 통한 전통건축의 원리적 해석
한국 전통건축의 고유성을 당시의 맥락에서 이해하려 는 시도로서 유교, 도교, 불교 등 이 복합된 세계관과 원 리가 전통건축 공간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를 원리적 으로 규명하려는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36) 하지만 이러 한 원리는, 규명된다 해도, 당시의 세계관이 더 이상 유 효하지 않은 현대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되기 어렵다. 특정 전통건축에 그러한 세계관이나 관념적 원리가 반영 되었다 해도 그것을 현대건축에 적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전통건축의 원리가 현대에 적용되려면 과거의 특 정기능이나 생활세계의 한계를 넘어서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건축의 언어와 원리를 찾아야 한다.37)
최근에는 전통건축 공간에 반영된 동양사상과 원리를 감각적 체험을 통해, 경험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하려는 시도도 이루어졌다. 임석재와 김개천은 최근의 저서에서 공, 진여, 연기 등의 개념이 전통건축의 공간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경험되는지를 설명했다.38) 하지만 한국 전통 건축 공간이 실제로 이렇게 심오하고 어려운 불교나 유 교사상을 설계개념으로 하여 의도적으로 조성되었다고 볼 만한 근거는 없다. 한국에서는 건축물 자체를 어떤 사상과 원리를 표상하는 지각적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았 기 때문에, 불교나 유교의 특정한 사상과 원리가 한국 전통건축공간에 체계적으로 적용되어 지각적으로 경험된 다는 것은 과도한 해석일 가능성이 많다.
유불교의 사상과 원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한국 전 통건축의 설계에 적용되었는지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한국인의 사상적 기반이 유불도와 샤머니즘에 뿌리를 두 고 있고, 그것이 한국인의 공간의식에 복합적으로 영향 을 미쳤으며 암암리에 한국건축에 반영되어 있다는 점은 쉽게 동의할 수 있다. 즉, 한국의 전통사상인 샤머니즘과 도교, 유교, 불교에 바탕을 둔 일관된 공간관, 자연관, 우 주관이 있고, 이에 근거한 인간과 자연, 그리고 환경과의 관계에 대한 인식과 가치체계가 복합적으로 한국 전통건 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건축의 정신 은 수천 년의 진화과정에서 면면히 스며들어있는 어떤 정신과 원리로 보아야 하고, 그것은 결국 유불도를 바탕 으로 한 복합적 미의식이라 할 수 있다.39) 그러한 바탕 위에서 특정한 목적의 사찰이나 서원을 지을 때 불교 또 는 유교의 교리와 사상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집 을 지을 때 공간을 구축하는 방식, 경계를 만드는 방식, 자연을 대하는 방식 등으로 나타나며, 우리가 문장을 구 성할 때 쓰는 언어체계와 같이 오랜 문화에서 형성된 무 의식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건축의 고유성을 설명하 기 위해 공, 진여, 연기와 같은 어려운 사상과 교리에 정 통할 필요는 없다.
설사 특정 건축물이 유교나 불교, 도교의 심오한 사 상을 담고 있다 해도 어려운 교리에 의한 해석은 지나치 게 현학적이고 신비주의적 설명에 의존하게 된다. 그렇 게 되면 전통건축의 원리는 결국 즉각적 체험과 깨달음 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객관화하거나 논증할 수 없 는 종교적 도그마가 되고 만다. 전통건축의 고유성이 현 대에 계승되려면 그 지식을 모든 사람이 배워 따를 수 있게 체계적 원리로 이론화해야 한다. 일상의 경험을 통 해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으며 현대건축에도 적용 가능 한 도구적인 언어로 말해져야 한다. “신비한 주술이 아 니라 지금의 언어 속에 학습, 전달, 교육 가능한 낱말로 다음세대에 전수될 수 있어야 한다.”40) 말하자면 현대건 축의 언어와 문법, 개념과 방법을 빌려서 전통건축의 원 리를 설명하고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건 축의 전통과 원리가 과거의 유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 라 현재에도 유용한 건축의 원리로 작동할 수 있다.
5.서양건축의 인식틀을 통한 전통의 이론화
5-1.한국건축 고유성 해석의 인식론적 문제
한국 전통건축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한국 고유의 풍토 와 사상을 반영하며 발전되어온 많은 지혜가 담겨있다. 그런데 그것이 구체적 의도를 갖는 체계적 지식과 이론 또는 원리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 다. 과거 선비들과 장인들의 세계관과 가치관, 생활방식 이 집 짓는데 반영되었지만, 그것이 체계적인 언어와 공 리적 이론을 통해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서 양과 달리 집 짓는 일이 하나의 독립된 지식체계를 갖는 독자적 학문으로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41) 한국건축 에 적용된 규범과 원리는 유교적 정치제도의 일부였고 전통건축에 담겨있는 지혜는 공리적 원리를 통해서가 아 니라 경험적으로 전수되었으며, 그것을 습득하는 것은 체계적 학습이 아니라 일종의 깨달음을 통해서였다.
그러므로 한국 전통건축의 고유성은 실재한다 해도 그 내용이 공리적 원리나 이론으로 드러나 있지 않은 상 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자체로는 접근할 수 없는 인식론적 한계가 있다. 말하자면 한국 전통건축의 고유 성은 전통이 우리의 의식 속에 온전히 살아있는 현재의 일부일 때 경험되고 전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42) 하지만 전통적인 삶의 양식과 집짓는 방식은 이미 과거 가 되었다. 현재 우리는 근대적 환경에서 서구화된 삶을 살고 있고 서양에서 발전된 방식에 따라 건축 실무를 한 다. 이미 전통에서 멀리 벗어나 있는 지금 우리는 서양 의 틀에 의존해서 건축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떻게 과거로 돌아가서 전통건축이 담고 있는 지혜에 접근할 것인가? 어떻게 한국건축전통에 내재한 원리를 찾아내서 현재 소통 가능한 언어로 이론화할 것인가? 이 런 점에서 전통의 이론화는 근본적인 인식론의 문제를 안고 있다. 그래서 전통건축의 고유성을 내재적으로 접 근하여 설명하려는 노력은 직관과 감상적 언어에 의존하 는 모호한 본질주의에 빠지게 되고 공리적 이론화의 어 려움에 직면한다.43) 반면, 현대적 관점의 전통건축 이론 화는 당시의 맥락 안에서 한국건축의 고유성에 접근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한국건축의 정체성을 탐구해온 많 은 건축가와 학자들은 이 같은 딜레마에 빠져있다. 그렇 다면 전통건축의 고유성은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가?
현대사회는 이미 서양건축의 인식체계와 실무방식에 의해 지배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벗어나서 한국건축의 전통에 직접 접근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역설 적이지만 한국 전통건축의 고유성을 접근하기 위해서는 서양건축의 인식 프레임을 통할 수밖에 없다. 언어화되 지 않은 한국 전통건축의 원리를 현대에 소통 가능한 개 념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서양건축의 언어와 이론적 체 계를 활용할 수밖에 없다. 건축을 음식에 비유하면 감각 과 손맛, 경험에 의존하던 조리법을 서양식으로 계량화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국음악을 체계화하는데 서양 의 악보를 이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문제는 서양건축 의 인식 틀을 통해서 어떻게 전통을 해석할 수 있는가이 다.
5-2.한국건축과 서양건축 원리의 형식적 비교
서양건축의 인식적 틀을 이용해서 한국건축을 체계적 으로 설명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서양건축의 이론을 한국건축에 그대로 적용하여 비교함으로써 한국건축의 내용을 해석하는 것이다. 임석재의 연구는 이런 입장을 취한다.44) 그는 한국의 전통, 혹은 고유성의 재창조는 먼 저 서양 것을 철저히 익혀서 서양과 동등한 수준에 이르 고 그 다음 건축가의 독자적 창조력에 의해 전통을 해석 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즉, 서양건축을 충분히 이해한 후 서양건축의 틀을 통해서 그것을 극복해야 한 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서양건축은 이제 보편적이고 동등한 기준이 되었기 때문에”45) 그리고 동서양건축은 이제 우열이 없는 하나이기 때문에, 한국건축도 “서양과 전통 모두를 포함하는 공동의 기준에 따라 작품을 해야 하는 시점에 와있기 때문”46) 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임석재는 서양건축과 한국 전통건축의 형식적 유사성을 비교하여 한국건축의 원리를 설명하고 나아가 그것이 동서양 건축이 공유한 보편적 원리임을 주장한다. 예를 들면 전통건축의 입면에는 몬드리안의 추상회화의 미학이 있고, 그것이 서구모더니즘의 추상미 학보다 더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또 휜 자연 상태의 부 재를 그대로 사용한 전통건축에는 해체주의의 원리가 이 미 존재한다고 말한다.47) 그러나 전통건축과 서양건축의 형식적 유사성에 근거하여 한국건축의 원리를 주장하는 것은 한국건축의 고유성이란 측면에서 보면 아무런 의미 가 없다. 무엇보다도 한국에서는 건축을 시각적 조형예 술로 보지 않았고 건축입면을 회화적 구성으로 접근하지 도 않았다. 데 스틸의 추상구성과 유사하게 보이는 한국 건축의 입면은 내부 기능을 고려한 구조 분할의 결과이 지 추상구성 자체가 의도는 아니다. 물론 집의 지을 때 어떤 구성적 의도(예술의지)가 개입하겠지만 그것은 몬 드리안의 구성과 같은 비물질화된 순수 추상, 혹은 기하 학적 구성이 아니라 구축성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현대 인의 입장에서 그걸 휴머니즘적 추상으로 정의하고 그런 관점에서 한국 전통건축의 입면을 감상할 수는 있지만 추상입면구성이 한국 전통건축의 고유한 원리이며 한옥 이 그걸 선취했다고 주장하는 데는 동의하기 어렵다.
서양 모더니즘 건축을 동서양 건축의 혼종(Hybrid)로 보는 관점도 마찬가지다.48)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서양 모 더니즘에는 이미 한국건축의 고유한 원리가 담겨있다. 말하자면 전통의 현대화는 서양 모더니즘 건축에서 이미 성취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서양의 모더니즘이 동양건축 의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고, 서양건축이 자신의 문제 를 해결하기 위해 동양에서 해답을 찾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모더니즘 자체가 동양건축의 고유성을 담고 있다 고 할 수는 없다. 서양의 모더니즘 건축가들이 이해한 동양건축은 서양의 관점에서 동양건축을 창조적으로 해 석한 것이지 동양건축 자체의 고유한 원리라고 볼 수 없 다. 이러한 입장은 한국건축 자체의 고유성보다는 한국 건축에서 발견되는, 그러나 실제로는 서양의 관점에 의 해 틀 지워진 건축의 보편성에 방점을 두는 것이다. 이 러한 해석은 궁극적으로 현대사회에서 서양건축의 지배 적 권위를 인정하고 영속화하는 역할을 한다.
한국건축은 서양건축과는 전혀 다른 미적 인식체계의 산물로, 근본적으로 다른 심미적 원리와 수용체계에 의 해 지어지고 체험되었다. 그러므로 현대 서양건축의 이 론과 원리를 한국건축에 직설적으로 적용하는 방식으로 한국건축의 고유성을 드러내기는 어렵다.
6.전통의 현대적 번역과 차이
6-1.전통의 현대적 번역
앞서 언급했듯이 전통건축의 고유성은 그것이 지어졌 던 그 당시의 사회적 맥락과 인식체계 속에서 이해되어 야 한다. 전통의 이론화는 그러한 전통건축의 고유성을 현대의 시점에서 이해되고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현대적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다.
김용옥은 동양학 연구에서 고전의 번역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49) 그에 의하면 고전의 번역은 과거를 현재로 바꾸는 일이다. 중국고전의 번역은 한문 문화권에서의 학문적 성취를 한글문화로 옮기는 일이다. 이러한 번역 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과거는 현재로 이행되지 못한 채 과거에 매몰될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타이지를 태극으로 번역하는 우리보다 The supreme ultimate(최 고의 궁극적인 것)라고 번역하는 서양 사람들이 타이지 의 본래 뜻에 더 가까이 접근한다고 주장한다.50)
전통건축의 현대적 번역은 동양철학을 서양 언어로 설 명하는 것과 같다. 또는 고대어로 쓰인 고전을 현대어로 번역하는 과정과 같다. 고대어는 현대사회에서 소통되지 않기 때문에 현대어로, 현재적 의미로 번역해야 한다. 예 컨대 ‘도’, ‘허’, ‘진여’, ‘원융’과 같은 어려운 전통사상과 개념으로 한국건축을 설명하는 것은 마치 I go to school을 I는 School에 go한다고 번역하는 것과 같다.51) 전통건축에 녹아있는 지혜는 지금 우리가 이해하고 사용 할 수 있는 현대건축 언어로 번역될 수 있어야 한다. 이 런 관점에서 ‘원융’보다는 김수근의 ‘네가티비즘’이 더 유 용한 전통건축의 이론화라고 할 수 있다. 네가티비즘은 도교나 불교의 철학적 태도를 현대적으로 잘 설명한다. 한국건축에 나타나는 부족함의 지혜, 강한 형태와 명확 한 경계가 아닌 사이 공간, 허공, 관계의 생성과 같은 것 은 모두 네가티비즘을 반영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건축 의 원리와 규범이 아닌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의 선 언에 그치는 데 한계가 있다.
한국건축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앞 에서 강조했듯이 전통건축이 만들어진 당시의 맥락 속에 서, 당시 사람들의 인식체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근 대 이전, 전통건축이 우리의 의식 속에서 완전히 살아있 는 현재일 때 그것은 번역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었지만, 지금 전통은 과거가 되었기 때문에 떠나버린 과거를 현 재와 잇는 작업이 필요하다. 즉, 현재의 의식 속으로 과 거를 불러오는 것이다. 김용옥에 의하면 “번역은 최소한 문자라는 매개를 빌어 가사상태라도 보존된 것을 다시 살려내는 것이다. 프로이드의 표현을 빌리면 무의식에서 의식으로의 이행을 뜻하는 것이다.”52)
이런 점에서 한국 전통건축은 해석돼야 할 텍스트다. 한국 전통건축은 문자로 표현되는 사상체계나 이론은 아 니지만 집단적 지혜를 담고 있는 텍스트라고 할 수 있 다. 우리 선조들이 집을 지을 때 활용했던 많은 지혜가 있지만 그것이 언어화되거나 문법으로 체계화되지 않았 을 뿐이다.
텍스트의 해석은 그 당시의 문맥에서, 그들의 의식 또 는 무의식에서 작동했던 원리를 현재의 언어로 밝히는 것이다. 그런대 해석학(Hermeneutics)의 관점에 의하면 텍스트는 작품이 만들어진 상황에서 이해해야 하지만 동 시에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의 관점(지평)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예를 들면 고대 그리스로 이동하여 아리스토텔 레스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현재의 지평 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이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 간의 지각은 이미 의미를 포함하며 그러한 읽기는 관찰 자의 지평에 의해 사전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해석학 적 관점에 의하면 그러므로 모든 이해(Understanding) 는 지평의 융합을 의미한다.53)
문제는 한국 전통건축이 현재 우리의 건축에 관한 의 식과 개념을 지배하는 서양건축과는 전혀 다른 인식체계 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언어로 치면 서로 다른 어족이라 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 서양건축의 개념과 언어, 문 법을 통해 직접 한국건축의 전통에 접근할 수는 없다. 즉, 전통을 현대 언어로 번역하는데 있어서 단순히 어떤 용어의 문자적 동일성(유사성)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예 를 들면 중국에서 인도불교를 받아들일 때 불교의 핵심 개념인 니어바나(Nirvana)를 당시 중국의 노장사상에서 많이 쓰는 무위(無爲)로 번역하여 사용하다가54) 그 개념 적 차이가 커서 점점 음역에 가까운 열반(涅槃)으로 바 뀐 사례가 있다. 한방을 서양의학으로 번역할 때 문자적 동일성에 의거해 번역함으로써 많은 개념적 오류가 발생 한 것도 마찬가지다. 의미의 소통은 단순한 문자적 의미 의 전달이 아니라 삶의 모든 체험의 전달이다. 따라서 번역과정에서 용어의 유사성을 넘어서 의미의 공간성, 즉 두 문화의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55)
6-2.한국건축과 서양건축의 차이
서양의 아키텍쳐(Architecture)가 번역될 때도 의미의 변용이 생긴다. 서양에서는 건축물이 시지각적 감상의 대상으로 발전했지만 한국에서 건축물은 생활을 통한 득 도의 도구인데 이러한 차이는 영조(營造)라는 용어에서 나타난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건축(建築)이라는 단어를 통해 공유하는 개념은 서양의 아키텍쳐와 거리가 있다. 미적 체험의 방식도 서양건축은 주로 시각에 의존하지만 한국은 오감과 행위를 통한다. 이것은 동양의 미의 특징 으로 언급되는 내면과 외면의 조화, 소통의 미와도 관련 이 있다. 또, 한국건축과 서양건축은 공간의 개념, 경계 에 대한 생각, 안과 밖의 구분, 개체와 집합의 관계 등에 서 근본적인 생각의 차이를 보인다. 그러므로 한국건축 의 고유한 원리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한국건축과 서양건 축의 인식체계의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김성우는 한국건축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일련의 연구 에서 이러한 동서양건축의 차이에 주목했다. 그는 동양 정신에 바탕을 둔 한국건축의 고유성을 찾기 위해서는 서양의 건축개념과 건축관을 완전히 벗어난 동양의 새로 운 정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56) 예를 들면 건축이 아 닌 비(非)건축, 형태가 아닌 기(氣)와 같은 한국건축의 고유한 관점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57) 그러나 한국 건축이 현재 지배적인 서구건축의 언어와 개념적 틀을 온전히 벗어날 수 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해석학적 순환에 의하면 편견 없는 이해는 없다. 또 현재의 시점에서 한국 전통건축의 고유성에 접 근하여 그것을 세계로 발신하기 위해서도 소통 가능한 현대건축의 개념적 틀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 국 전통건축은 서양건축과 전혀 다른 인식체계의 산물이 기 때문에 서양건축의 언어와 개념을 통해 그 의미를 온 전히 드러낼 수는 없다. 따라서 번역의 과정에서 서양건 축의 개념을 한국건축에 직설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 라, 그것과 한국건축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 다.58)
예를 들면, 서양건축의 중정과 한국건축의 안마당, 서 양의 픽쳐프레임과 한국의 차경(취경)은 문자적 유사성 에도 불구하고 근본적 의미의 차이가 있다. 서양의 중정 은 채광과 조망, 환기를 위한 폐쇄적 공간이지만, 한국건 축의 안마당은 동선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다양한 행위 가 일어나는 생활공간으로 안과 밖의 구분이 모호한 성 격을 가지며 그 경계 또한 유동적인 경우가 많다. 또 서 양건축의 픽쳐 프레임은 밖의 경치를 액자의 그림으로 틀 지워 감상하는 것으로 주체와 대상의 시각적 거리를 전제로 하지만, 한국건축의 차경(취경)은 건물이 자연 속 에 놓임으로써 자연이 건물의 내부로 들어오고 감상자와 자연과의 거리가 소멸된다. 따라서 마당과 중정을, 차경 과 픽쳐프레임을 동일한 개념으로 번역하면 안된다. 축 의 개념도 마찬가지다. 서양건축에서는 축이 시각적 질 서를 부여하는 중요한 구성 원리이지만 한국건축은 시각 적 감상의 대상으로서 오브제적 성격이 약하기 때문에 이러한 시각 축이 분명하고 일관된 원리로 적용되지 않 는다.
요컨대 공간(space), 축(axis), 보이드(void), 중정 (courtyard), 구성(composition)과 같은 서양건축의 개념 들은 한국건축 전통을 접근하는 통로가 되지만 한국건축 의 내용과 의미를 온전히 포획해 내지는 못한다. 이러한 번역 불가능성은 ”두 문화 간의 건널 수 없는 갭을 드러 낸다. 그러나 이러한 갭은 공허가 아니라, 문화적 의미가 끝없이 협상되고 재구축되는 공간이다.”59) 즉, 이러한 차 이는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전체 환경에 이르는 문을 열 어줌으로써 한국건축의 맥락을 드러내고 한국건축의 고 유성을 접근하기 위한 이론적 공간을 제공한다. 말하자 면 서양건축과 한국건축의 차이를 통해 전통건축이 담고 있는 고유성에 접근하는 통로가 열리는 것이다. 그 차이 를 통해서 우리는 모호한 본질주의를 피하면서 한국건축 의 고유한 미적 체험 구조와 원리를 재구성해 낼 수 있 는 가능성을 갖는다. 이러한 번역은 해석학적 행위다. 이 러한 번역은 지속돼야 하고 공론장의 검중과정을 거쳐 집합적 주체, 혹은 간(間)주체가 공유하는 집단지성의 형 태로 정착될 수 있다. 나아가 이러한 전통의 이론화는 서양이 지배해온 건축개념을 확장하고 서구건축을 넘어 서는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는다.
7.맺음말
급격한 전통의 단절과 근대화 과정을 겪은 한국건축은 전통의 이론화와 현대적 계승이라는 숙명적 과제를 안고 있다. 본 논문은 일제 강점기부터 지금까지 전통의 이론 화를 위한 다양한 시도가 어떻게 이루어 졌으며 그 인식 론적, 도구적 한계가 무엇인지를 직관적 접근, 형식적 이 론화, 인문학적 해석으로 범주화하여 정리하고 각각 그 특성과 한계를 분석했다. 이를 통해 기존의 연구들이 전 통에 관한 모호한 본질주의나 전통의 맥락에서 벗어난 현재적 관점의 고안에 머물렀음을 지적하고 그 이유가 전통건축을 접근하는 근본적인 인식론적 문제에 있음을 밝혔다.
본 논문은 전통건축의 고유성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현대 서양건축의 인식 틀을 통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전통을 현대에 소통가능한 언어로 번역해야 함을 주장했 다. 그러나 한국 전통건축의 고유성을 현대적 언어로 번 역하는 과정에서 서양건축의 개념과 원리를 한국건축에 직설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차이에 주 목해야 함을 강조했다. 이러한 차이는 한국 전통건축의 맥락을 드러내고 고유성에 접근하는 이론적 공간을 열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다 구체적인 주 제들에 관한 상세한 연구는 추후의 과제가 될 것이며, 그 성과들이 축적되어 궁극적으로 전통의 이론화에 이를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한국건축 전통의 이론화는 서양 이 지배하는 현대건축에 의해 가렸던 한국건축의 고유성 회복과 함께, 현대 서양건축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건축 의 보편적 개념과 원리를 지향한다는 점 또한 간과되어 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