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 론
1-1.연구 목적
19세기 말 이후 한국 근대 도시와 건축의 모습을 이해 하는데 있어 사진자료는 현재 존재하지 않거나 변형된 과 거의 정황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한국의 도시는 지난 백 여 년 간 엄청난 변화를 겪어와 건축과 도시의 과거를 시각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쉽지 않은 바, 알려지지 않 았던 옛 사진의 발견은 학술적 관심의 대상이 된다. 본 연구는 미국 뉴저지 럿거스 대학에 소장되어 있는 그리피 스 컬렉션의 한국 관련 사진 중 근대 인천과 한성의 도 시, 건축의 모습을 담은 자료를 소개하고 그 속에 담긴 역사적 정보를 해석함으로써 개항기 한국의 근대 초기 모 습을 시각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 유용한 사료를 제공하고 자 한다.
1-2.연구 대상 및 방법
본 사진자료를 수집한 윌리엄 그리피스 (William Elliot Griffis 1843-1928)는 1882년,「은자의 나라 한국 (Corea: the Hermit Nation)」을 발표하여 우리나라를 서구에 소개한 미국의 대표적 동양학자이자 저술가로서, 한국과 관련된 다양한 형태의 자료를 광범위하게 모아 연 구했다. 그리피스가 죽고 난 뒤 가족들은 자료를 그의 모 교인 럿거스 대학교의 도서관에 기증하였으며, 이는 ‘그리 피스 컬렉션(Griffis Collection)’으로 명명되어 보관되어 있다.2) 여기에는 그가 생전에 모은 잡지, 책자, 인쇄물, 사진, 편지, 스크랩북, 서신과 쪽지들이 있는데 일본에 관 한 자료가 다수를 차지하며, 대략 1/4 정도가 한국과 중 국에 관한 자료들이다.
그가 수집한 자료 중 일부는 사진들로서, 이 중 일부는 이미 알려진 사진과 동일하나 300여장이 넘는 사진들은 그동안 국내에 공개된 적이 없는 사료들로서 상당한 학술 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최근 그리피스 컬렉션의 한국관 련 사진자료에 대한 연구3)가 진행되어 그 역사적, 학술적 의의가 드러난 바 있다.
선행 연구에서 소개된 그리피스 컬렉션의 사진들은 풍 경, 풍속, 유적 및 인물 등 다양한 생활상에 걸쳐 있지만, 본 연구는 이중 인천과 한성의 도시와 근대 건축의 모습 을 보여주는 사진에 대해 집중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연구의 진행을 위하여 먼저 그리피스 컬렉션 중 근대 인천과 한성의 도시 모습 및 근대 건축물들을 찍은 미공 개 사진들을 골라 분류하고, 해당 건축물에 관한 도면 및 문서 자료 등을 함께 비교, 분석하였다. 또한 사진 속에 포함되어 있는 다양한 시각적 정보들을 해석함으로써 이 를 통해 근대 한국의 도시와 건축의 모습을 근사하게 유 추하고자 하였다.
2.그리피스 컬렉션의 근대 도시·건축자료 현황
그리피스 컬렉션의 한국 관련 사진들 중 근대 인천 및 한성의 도시, 건축에 관련된 미공개 사진은 총 23장이다. 이들은 인천 제물포 개항장, 경성이사청 등의 공공시설, 한성전기회사 등의 민간시설, 그 외 교육시설의 모습들로 서, 그 분류는 아래 표와 같다. 본 논문에서는 흐릿한 채 색 사진이나 기존에 존재하는 사진과 거의 동일한 사진 등 4장을 제외한 19장의 사진을 소개, 고찰하였다. 본고 에서 사진의 이름에 부가되어 있는 괄호 속의 표기는 럿 거스대학 그리피스 컬렉션의 소장 위치를 지칭하는 기호 다.
3.사진자료 분석
3장에서는 위의 <Tab.1>에서 정리된 네 가지의 분류 에 따라 대상 사진들을 분석할 것이다. 촬영 대상의 유사 성에 따라 분류된 사진들을 각 절로 묶어 고찰하는 것이 근대 초기 한국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유추하는데 있어 보 다 유용한 틀이 될 것이다.
3-1.근대 인천과 한성의 도시 사진
근대 도시의 풍광을 다룬 사진들은 인천 제물포를 찍 은 것들과 한성 시내에 위치한 명동성당의 모습을 담은 사진 등 총 7장이 있으며 여기에서는 내용이 흐릿하거나 단순한 풍광으로서 학술적 가치가 낮다고 판단한 두 장을 제외한 다섯 장의 사진을 고찰하였다.
<Fig.1>은 인천항 전경으로 사진의 화각으로 보아 월 미도 정상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1875년의 한일수호 조약과 뒤이어 체결된 제물포 조약으로 1883년 1월에 인 천항이 개항되었다. 이 사진 하단에는 ‘인천항전경(仁川港 全景)’이라는 설명이 달려 있으며, 대형 선박들이 항구를 드나들고 있는 모습이 생생하다. 사진의 해상도 또한 선 명하여 확대하면 당시의 근대 건축물을 확인할 수 있다.
<Tab.2>의 ①은 1888년에 설립된 대불호텔의 모습이 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호텔로, 인천을 통해 한국으 로 들어오는 외국인들을 맞이했던 대불호텔이 항구 가까 이 위치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②부분을 확대하면 일본 깃발이 꽂혀 있는 모습까지 식별되는데, 이곳이 1833년 개항과 함께 2층의 목조 건축물로 건립된 일본 영사관이다. 오늘의 인천 중구청 자리에 해당한다. 사진 오른쪽, ③의 위치에 보이는 건물은 1884년에 설립된 세 창양행 사옥이다. 세창양행은 독일의 무역회사인 마이어 상사의 제물포 지점이다. 이 건물들의 존재로 보아 사진 은 1888년 이후에 촬영된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연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근대 문물이 밀려들어오던 개항장 인천 의 현장을 근대식 건축물의 모습과 함께 보여주는 생생한 자료다.
아래의 <Fig.2>는 인천항의 파노라마 사진으로, 왼쪽 의 섬들은 월미도와 소월미도이며, 오른쪽으로는 개항의 중심이 되었던 제물포의 모습이 보인다. 개항과 함께 빠 르게 근대식 건축물이 건립되어 개항장을 채워나갔던 정 황을 보여주는 사진자료다.
다른 사진 자료들과 달리 파노라마식 촬영 방식이 당 시 항구의 모습을 좀 더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근대 인천의 모습을 부감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주고 있다.
<Fig.3>은 제물포항에서 월미도 방향으로 찍은 사진으 로, 조선의 재래식 나룻배와 서구의 근대식 기선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개항기의 과도적 상황에 놓여있던 인천항 의 단면이 인상 깊게 드러난 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Fig.4>는 우리나라 천주교를 대표하는 명동성당의 모 습을 원경으로 담아낸 사진으로 근대 한성의 도시 가옥을 함께 확인할 수 있는 자료다. 명동성당 본당은 당시 국내 유일의 순수한 고딕양식의 연와조 건물로, 1892년(고종 29)에 착공하여 1898년에 준공하였다.
사진의 화각으로 보아 남산 줄기가 충무로 쪽으로 뻗 어 내려온 ‘진고개’ 언덕에서 명동성당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그리피스는 사진의 뒷면에 ‘1898년 서울의 모습’이라고 메모해 두었는데,5) 그렇다면 이 사진 은 준공된 바로 그 해 겨울의 명동성당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성당의 앞쪽으로 현재 충무로 2가에 해당하는 지 역의 모습이 보이는데, 조선에 외래 문물이 밀려옴에 따 라 재래의 도시 한옥들과 근대식 건축물이 혼재되어 있는 당시 한성 시가지의 변화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명동 성당 본당의 왼편으로는 주교관의 모습도 보이는데, 이 건물은 아래 사진 <Fig.5>에도 나타난다.
<Fig.5>의 위쪽으로 보이는 건물이 명동성당의 주교관 으로 1888년 7월 착공하여 1890년 준공된 건물이며, 우리 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축물이다. 1979년 새 주교관이 건립되면서 개수를 거쳐 현재 사도회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원형은 많이 훼손된 상태이다.
3-2.공공기관
구 러시아 공사관, 경성이사청, 평리원 등 총 8장의 공 공 시설물 사진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 중 기존에 알려진 사진과 거의 동일한 것들을 제외한 6장의 사진을 살펴보 겠다.
<Fig.6>은 구 러시아 공사관의 남서측 모습으로 언덕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고 찍은 사진이다. 러시아공사관은 한·러 수호조약이 체결된 1885년에 착공해 1890년(고종 27)에 완공한 르네상스식 건물로 러시아인 사바찐 (Afanasy Seredin-Sabatin 1860-1921)이 설계했다. 사진 앞쪽으로 위병들로 보이는 러시아 인들이 입구에 서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Tab.3>은 사진에서 보이는 건물들과 배치도 자료에 나타난 건물들을 비교한 것이다. ①의 건물은 공사관 본 관으로 정동 언덕의 꼭대기에서 매우 이국적이면서도 위 압적인 외관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전쟁 으로 주요부분이 파괴되었으며 현재 탑 부분만 복원되어 현존한다. 본관의 남동쪽에 있는 ②번 건물은, 일자형 한 옥으로 공사관비서가 사용했었으며, ③의 위치에 있는 담 장 또한 배치도 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Fig.7>은 현재의 충무로 1가 자리에 세워졌던 경성 이사청의 모습이다. 1896년 일본 공사관으로 건립된 후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경성이사청(1906-1910)이 되었으며 부제가 실시되면서 그대로 경성부청(1910-1926) 으로 쓰였다. 위 사진에 보이는 경성이사청은 벽돌로 건 립된 2층의 르네상스식 건물로, 중앙 현관을 아치로 구성 하고 있다.
<Tab.4>는 경성이사청의 담장 공사도와 배치도(1915 년)로서, 배치도에 표기된 관리실 역할의 ‘문위(門衛)’를 사진 오른쪽 담장 상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존에 알려 져 있는 경성부청의 사진들과는 달리 입구 기둥 위의 조 명장치나, 오른쪽 담장 앞의 게시판이 놓여있지 않은 것 으로 보아 이들보다 앞선 시기의 외관을 보여주는 자료이 다.
<Fig.8>은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던 시기, 최고의 사법 기관이었던 평리원(공소원. 경성재판소의 전신)의 사진이 다. 원본의 사진틀 테두리에서 ‘평리원(平理院)’이라는 한 자가 확인된다.
평리원은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조선시대 의금 부 터였던 공평동 부지에 이전, 신축할 것을 결정하여 1908년 8월 1일에 공소원으로 개편, 개청된다. 아직 부지 정리가 덜 끝나 있는 사진 속의 상황으로 보아 1907년에 서 1908년에 이르는, 개청 직전의 시기에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은 중앙의 돔을 축으로 엄격한 좌우 대칭 형의 입면을 가지고 있어 사법기관으로서 권위적인 외관 을 추구하였음을 드러낸다.
<Tab.5>는 1906-07년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평리원의 정면도 및 정면상세도이다. 사진은 위 도면에 의해 건축 공사가 거의 완료된 상태의 현장의 모습을 그 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일부 석재의 장식 정도를 제외하 고는 도면과 차이 없이 시공된 모습을 두 자료의 비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Fig.9>는 앞의 사진과 동일한 건물로서, 사진 속의 정황이나 ‘경성재판소(京城裁判所)’라고 기록된 사진 하단 부의 표기 및 문주에 걸려 있는 ‘고등법원(高等法院)’ 표 기로 보아 통감부령으로 명칭이 변경된 1909년에서 1912 년 사이의 모습으로 추정된다. 앞 사진으로부터 수 년 정 도 지난 뒤의 상황으로, 건물 외벽 곳곳에 난방을 위한 연통이 부가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Tab.6>은 재판소의 담장과 입구 및 법원의 공고를 내어 붙이는 게시장의 신설 도면으로, <Fig.9>의 사진 속에서 담장의 모습과 그 밖의 게시장의 모습으로 확인된 다.
<Fig.10>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미상의 건물을 보여주고 있다. 유사한 사진이나, 건물의 명칭은 물론 건 물의 존재를 알려주는 사료조차 알려져 있지 않아 본 사 진과 그리피스의 메모에 기대어 당시 건립되었던 이 건물 의 위치, 용도 및 성격을 유추하고자 한다. 이 사진의 뒷 면에는 ‘임페리얼 하이웨이 상에 있는, 황제가 머무는 건 물13)’이라고 쓴 그리피스의 기록이 남아있다. ‘임페리얼 하이웨이’는 명성황후의 묘를 청량리에서 금곡(현재의 홍 유릉)으로 옮기기 위해 고종이 한성전기회사에 위탁하여 1900년 9월에 착공, 1901년 초에 건설한 폭 15.24m, 거리 약 20.9km에 이르는 신도로14)이다. 이로써 유추하면 이 건물은 황제가 홍(유)릉을 행차하는 경우 머물 수 있도록 당 도로 상의 금곡 인근의 위치에 건립된 ‘행궁(行宮)’에 해당하는 건물로 추정할 수 있다.좀 더 나아가 당 건물의 건축가를 찾아보는 것도 가능하다.
<Tab.7>은 덕수궁의 정관헌과 당 사진 속 홍릉 행궁 으로 추정되는 건물의 사진들을 비교한 것이다. 두 건물 모두 서구적인 양식과 전통적인 기법이 혼합되어 사용되 었으며 건물의 규모나 장식의 품격으로 보아 황제와 관련 된 건축물이라는 것도 드러나고 있다. 정관헌이 정면 7칸, 측면 5칸의 규모임에 비하여 행궁으로 추정하는 건물은 정면 9칸, 측면 3칸으로 크기가 다르지만 지붕의 스타일 과 입면에서 나타나는 얇은 열주 및 난간의 처리 등에서 매우 흡사한 양식을 보여주어, 덕수궁의 정관헌과 구 러 시아 공사관을 설계한 사바찐의 작품이라고 추정할 수 있 다. 정관헌의 설립이 1900년이며, 사바찐이 1904년까지 한국에서 활동하였으므로 이 건물의 건립과 시기적으로도 일치한다. 기능에 있어서도 정관헌이 황제의 연회나 유식 에 사용된 것으로 행궁의 역할과 유사하며, 당시 고종의 그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던 것을 고려하면 사바찐이 이 건물을 설계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추가로 발굴되는 사료를 통해 이 건물의 존재와 정확한 위치 및 연혁 등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기를 기대한다.
<Fig.11>은 탁지부 청사로 알려진 정부 내각 건물로, 1907년 4월 기공하여 12월에 완공되었다. 해방 이후까지 법원으로 사용하다가 1970년에 철거되었다.
평리원이나 이사청 등 다른 공공기관과 유사한 좌우 대칭의 평면과 권위적인 면모를 강조하는 입면을 가지고 있으며, 아치로 강조된 입구와 그 위에 얹어진 돔이 눈에 띈다. 건물 앞의 허술한 조경이나 정리되지 않은 진입로 의 상황으로 보아 건물의 완공 직후인 1907년 말에서 1908년 초에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3-3.교육기관
이 절에서는 한성사범부속보통학교, 한성외국어학교 그 리고 수원농림학교로 추정되는 사진 등 총 3장의 자료를 고찰하겠다.
<Fig.12>는 한성사범학교부속보통학교의 모습으로, 1895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관립 교원양성학교에 딸려있 던 초등 교육 시설이었다. 규칙적으로 창호가 배열되어 있는 모듈의 배치로 보아 층당 3개의 교실이 있었던 것 으로 보이며, 건물 왼쪽 날개 부분의 1층에 두 쪽짜리 입 구가 눈에 띈다. 외벽은 목조 판벽으로 마감되었고 각 교 실마다 연통구멍이 있으며, 1층 창호 상단에 눈썹지붕을 설치하고 있는 것도 우천 시를 고려한 배려로 보인다. 보 통학교의 우측 뒤로 보이는 다른 2층 건물이 한성사범학 교 교사인 것으로 추정된다.
<Fig.13>은 한성외국어학교의 사진이다. 1906년 학제 개혁에 따라 기존의 외국어 학교들을 전부 통합하여 한성 외국어학교가 설립되었다. 운현궁 건너편에 위치해 있었 으며, 1911년 폐지되어 그 자리에 경성여고보가 들어서게 된다.
단층의 근대식 건물에 박공지붕을 씌운 현관이 중앙에 자리하고 있으며 외벽은 목재판벽으로 마감되었다. 사진 을 찍고 있는 인물들의 다양한 복색으로 보아 외국어학교 라는 특징이 드러나고 있어 흥미롭다.
<Fig.14>의 외곽 상단에는 ‘농장에 딸린 농업학교(The Agricultural School attached to the farm)’라고 기록되 어 있는데, 시기적 정황으로 보아 1907년 이전 건립된 수 원농림학교(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의 전신)에 일치한다.
<Tab.8>의 수원농림학교 본관평면도와 비교해 보면 건물의 규모, 평면 형태 및 돌출 현관의 배치 등이 모두 동일하여 이 건물이 그 본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단층 의 목조 건물로, 수직의 창호가 규칙적응로 배열되어 있 는 교육시설의 일반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동안 형태를 알 수 없었던 수원 농림학교의 초기 모습을 시각적으로 알려주어 의미 있는 사진자료로 평가된다.
3-4.민간 건축물
여기에서는 한성전기회사, 인천제일은행, 서울병원, 서 울 Y.M.C.A 등 민간 건축물들의 사진 5장을 다루겠다.
<Fig.15>는 1898년 전차·전등·전화 사업을 위해 설립 된 한성전기회사의 사옥으로 현재의 종로2가 8-4에 위치 해 있었으며 미국인 H.콜브란과 H.R.보스윅이 운영하였 다. 1902년 1월 5일에 건물이 불타 그 해 7월에 다시 개 건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17) 사진 속의 건물에서는 돌 출된 아치형의 현관과 그 상부로 중앙의 시계탑을 볼 수 있는데, 당시 시계가 희귀하였음을 감안하면 매우 주목 받는 건물이로서 회사의 상업적 지향을 표방한 외관이었 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사진의 시계탑에 시계가 설치 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1902년 화재 이후 재건된 직후 촬영한 사진으로 추정된다.
<Fig.16>은 이 건물 내 보스트윅의 사무실 사진으로 창문의 모양과 위치로 보아 건물 2층의 모서리에 놓인 방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속에 보이는 책상이나 의자, 램프 및 도기 등으로 당시의 집무환경을 짐작해 볼 수도 있는데, 방 중앙에 걸려있는 액자 모서리에 걸쳐있 는 성조기에서 보스트윅의 성향이 엿보이기도 한다.
<Fig.17>은 현재 인천광역시 중구 중앙동 1가에 남아 있는 인천일본제일은행 건물로서 탁지부 소속 일본인 건 축가 니이노미(新家孝正)가 설계하였다. 1897년(광무 1) 8월에 착공하여, 2년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1899년 7월에 준공되었다.
이 건물은 현관부의 아치나 건물 중앙부에 돔에서 르 네상스 풍이 느껴지며, 견고한 석재의 사용으로 은행 건 물다운 중후함을 추구하고 있다. 미국인 존(Jones, G. H.) 박사는 1900년 당시의 제물포를 소개한 기고문에서, “한 국에서도 가장 훌륭하고 견고한 석조(화강석) 사옥을 가 졌으며, 또 막대한 거래(은행업무)를 하고 있는 제일은행 (일본 동경에 본점이 있음)이 제물포에 있다”고 소개하기 도 하였다.18)
<Fig.18>은 당시의 대한의원으로, 현재 서울대학교병 원 부설 병원연구소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이다. 1907년 3 월에 착공, 이듬해 5월에 준공되었으며, 축조 당시에는 규 모가 더 컸으나 현재는 본관 건물만이 남아 있다.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상태로 보아 사진은 1908년 초의 모습 일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 전면부에 설치되어 있는 가설 구조물과 건물 앞에 널린 각종 자재들에서 당시 공사 현 장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으며 한 인부가 카메 라를 쳐다보고 있는 모습 역시 인상적이다.
<Fig.19>는 기독교청년회(Y.M.C.A)의 건립 당시 모습 이다. 당 건물은 1908년에 준공되었으므로 사진의 촬영시 기는 준공 이전의 시기로 추정된다. 사진에서 보이는 건 물은 6·25전쟁으로 소실되었다.
사진 속에서 공사 현장의 주변으로 가림막을 치고 있 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분주히 걸어 다니는 행인들과 인 력거, 마차들에서 당시 종로의 생기를 읽을 수 있다.
4.건축물 현황 분석
4장에서는 앞에서 다룬 19장의 사진들의 추정 촬영일 자, 당시와 현재의 건물 사용용도의 변화 및 존재 여부 등을 조사하고 과거 도시의 모습을 현재에 투영, 비교해 볼 것이다. 현재 완전히 철거되지 않고 일부 이상 남아 있는 건물들로는 총 5개가 있으며 사진들은 대부분 1890 년 후반에서 1910년 초반까지 다양한 기간에 걸쳐 촬영 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부분은 철거하고 다른 건물을 신 축하였거나 한국 전쟁 때 파괴되었으며 또한 건물을 사용 하던 기관이 해체됨에 따라 철거된 경우도 있다.
먼저, 인천항 전경을 촬영한 <Fig.1>은 1888년도에 지 어진 대불호텔을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1888년 이후에 촬영된 사진임을 추측할 수 있다. 같 은 방식으로 명동 성당일대와 주교관을 촬영한 <Fig.4>, <Fig.5> 또한 1898년에 준공된 주교관을 사진에서 확인 함으로서 촬영 일자를 추측해 볼 수 있다. 명동성당과 주 교관은 지금까지 남아있는 몇 안 되는 건축물 중 하나로 서 주교관은 현재 천주교 서울 대교구청으로 사용하고 있 다. 구러시아 공사관의 모습을 담고 있는 <Fig.6>은 사 진 뒤편에 적혀있는 메모19)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1905 년 6월 3일 촬영하였으며, 공사관 본관과 부속 건물들은 한국전쟁 당시에 파괴되고 지금은 탑 부분만 남아있다. 현재는 그 주위로 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맞은편에 뉴질 랜드 공사관이 위치해 있다. 경성이사청을 촬영한 <Fig.7>은 설립 이후 경성부청이라고 이름을 바꾸기 전 까지의 시기인 1906-1910년 사이에 촬영했을 것으로 추 정된다. 1930년에 건물을 허물고 미쯔코시 백화점을 건설 하였고, 현재는 신세계 백화점으로 사용하고 있다. 재판소 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Fig.8>과 <Fig.9>는 사진에 서 보이는 건물의 상태나 주변의 모습으로 미루어보아 각 각 1907-1908년, 1909-1912년에 촬영하였을 것으로 보인 다. 건물은 1957년에 신신백화점을 건설하며 사라졌고, 지금은 그곳에 제일은행 본점이 자리하고 있다. 임페리얼 하이웨이 상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행궁의 모습을 담은 <Fig.10>은 고속도로 건설 사업을 시작한 1900년 이후에 촬영하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현재에 확인 가능한 건물의 잔재나 문서자료의 부족으로 지금은 존재하지 않 는 것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한성전기회사의 모습을 담고 있는 <Fig.15>는 1902년 화재 이후에 촬영했을 것 으로 추정되며 당시 위치가 현재 종로 2가 8-4번지임과 회사가 1909년까지 존재하였음을 고려해 보았을 때 1907 년에서 1909년까지 경성재판소와 약 200m의 거리를 두 고 나란히 종로에 위치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인천일본 제일은행을 촬영한 <Fig.17>은 1899년 이후 촬영된 것으 로 추정되며 건물은 현재 인천개항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Fig.18>에서 확인할 수 있는 대한의원은 현재 대 한의원본관으로 계속 사용하고 있다.
밑의 <Tab.9>에서 위와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역사적 보전 가치가 뛰어나거나 지금까지 같은 기관에 서 사용하는 건축물들은 외장이나 구조물의 보수를 통해 여전히 이용하거나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박물관 등으 로 사용하고 있다. <Tab.10>
명동성당은 완공 이후 구조보수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1974년과 1984년의 대규모 보수공사와 2002년의 부식된 벽돌을 대대적으로 교체하는 공사 및 2010년의 그 일대 를 개편하는 ‘명동성당 종합계획’ 등을 거치며 현재의 모 습으로 바뀌었다.
주교관 또한 각종 구조보수공사와 2010년 ‘명동성당 종 합계획’의 일부로 대수선을 거치며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Tab.11><Tab.12>
구 러시아공사관은 한국전쟁 당시에 건물의 대부분이 멸실되었고, 탑 부분만 남아있으며 현재 그 주위에 정동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Tab.13>
인천일본제일은행은 2000년 지붕마감, 창호, 외부벽체, 금고 내부 벽, 2층 사무실 바닥과 천장 등의 대대적 보수 를 거쳐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Tab.14><Tab.15>
대한의원 본관은 1979년의 탑시계 보수와 1981년과 2001년의 두 번의 보수공사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 게 되었다.
위와 같은 내용을 <Tab.10>에서 현재 남아있는 건물 들이 당시와 현재에 어떠한 차이를 보이는지, 어떠한 변 화를 거쳐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는지를 나타내었다.
사진 속 건물들의 성격이 대부분 정부기관이나 공공기 관, 또는 중요한 문화공간이었기에 인천에 위치한 은행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종로나 명동 등 서울 시내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현재의 도시에서도 중요한 노드23)(Node, 혹은 결절점) 에 자리했기 때문에 그 위치에 백화점이나 은행 등의 건물이 세워지거나 성당이나 박물관 등 중요한 도시 의 역사적 요소 혹은 랜드마크로 역할하고 있는 것을 확 인해 볼 수 있다.
5.결론
이상 본고에서 살펴본 그리피스 컬렉션에 포함된 19장 의 근대 인천 및 한성의 도시·건축 사진들로 통하여 개항 당시 인천 제물포항의 상황과, 각종 공공건물, 근대 교육 기관 및 민간시설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본 사진 들은 대부분 기존에 알려진 사진들보다 시기적으로 앞서 1890년대에서 1910년대 초에 촬영된 자료들로서 구한말 에서 일제 강점기의 시작 시기에 이르는 근대 초기의 도 시 모습을 시각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 사료적 가치가 주목된다.
각 유형별로 보아 인천항의 사진들은 개항 초기 제물 포의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공공시설의 사진 들에서는 1900년대 초 일제 강점 초기에 식민지배시설이 이 땅에 뿌리내리기 시작하던 정황이 확인되었다. 특히 홍릉 행궁으로 추정되는 건물은 지금까지 문헌으로도 알 려지지 않았던 것으로 그 존재와 용도 및 사바찐의 설계 임을 추론한 것에 뒤이어 추후 상세한 연구로 뒷받침되기 를 기대한다.
교육기관의 사진들은 공통적으로 왕대공 형식의 박공 지붕과 목재 판벽으로 마감된 입면을 보여주었으며, 건립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신설 건물의 외관이 그대로 드 러났다. 또한 수원농림학교의 1907년 이전 건립 당시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확인한 것도 지적할만하다. 마지막 유 형인 민간건축물들에서는 대한의원과 Y.M.C.A 건물의 건립 현장을 사진자료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었다.
본 연구를 통해서 그동안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그 리피스 컬렉션에 포함되어 있는 근대 인천, 한성의 도시 건축 사진자료들을 상세히 고찰할 수 있었다. 사라져버렸 거나 변형된 근대 도시 건축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재현하 는 데 있어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구한말 에서 근대 초기에 걸친 한국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본 사진 자료들이 지닌 학술적 가치를 평 가할 수 있다고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