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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 1598-1142(Print)
ISSN : 2383-9066(Online)
Journal of architectural history Vol.24 No.5 pp.82-92
DOI :

한국건축역사학회, 과거 현재 미래

Abstract


한국건축역사학회, 과거 현재 미래

이희봉
중앙대 명예교수

초록


    1.시작에

    이 글은 제목에서와 같이 건축역사학회의 과거를 돌 아보고 현재를 진단하며 미래를 생각해 보자는 글이 다. 건축역사학회는 건축의 역사를 대상으로 하는 학 회다. 필자는 역사가로서 ‘우리 학회’라는 집단 자체의 역사를 대상으로 논하고자 한다. 필자는 오랫동안 논 문집 논문 투고, 학술 발표, 자료편 논단 투고 등 일련 의 과정을 통하여 겪은 경험을 산발적으로 피력해 오 면서 학회에 우려의 목소리를 내 왔었는데,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 계기는 학회지 백주년 기념으로 현 논 문편집위원장이 소집한 전임 논문편집위원장들 초청 간담회였다.37) 간담회 주 이유는 논문집 논문이 점점 줄어들어 과학재단 평가에 재정지원이 끊기기 때문에 논문 편수를 늘려 논문집을 살리는 방안을 모색해 보 자는 취지였다. 그 다음 지난 9월 월례 학술발표회, ‘광복70주년 기념 한국건축역사학 돌아보기’에 참석하 고 나서38) 이 글을 꼭 써야겠다는 결심이 굳어졌다.

    필자의 진단으로 20수년 연륜의 건축역사학회는 학 계에서 역사적 사명을 다하였다. 마치 식물학회 마냥 지지부진 근근히 연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필자는 학 회의 탄생을 주도하며 한평생을 같이 한 고향과도 같 은 학회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면서 마음이 편치 않 다. 한마디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 동안 시간이 흘러 대부분의 초창기 멤버들은 세 대 교체되어 물러났기에, 지금 회원들은 잘 모를 탄생 의 역사를 그대로 회고해 보고자 한다.

    그 시작은 학술 ‘운동(movement)’이었다. 당시 건축 학계에서 작지만은 않은 큰 사건이었다. 지금은 건축 이라는 우산 아래 전공별 소 학회들이 다수 있지만 당 시 학회는 오래된 대한건축학회가 유일하였다. 지금 오해하듯 전공 한 분야를 떼 내어 독립시킨 단순한 사 건이 결코 아니었다. 당시 건축학회는 학구열에 불타 는 비교적 젊은 학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건축학회 학술발표회장에 가면 학생들만 발표장에서 발표를 하고 교수들은 바깥 로비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잡담하는 것이 늘 보는 풍경이었다. 학술발표는 대부 분 지도교수와 학생의 공동명의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교수는 딴전이었다. 필자 경험을 얘기하면 한 번은 발 표장에 앉아 질문을 자주 하였더니, 학회가 끝난 후 임원을 맡은 한 선배 교수가 질문을 삼가줄 것을 부탁 했다. 즉 학생들을 괴롭히지 말라는 것이었다. 학회 학 술발표에서 발표하고 질문받고 답변하는 것이 당연한 일련의 절차일 텐데, 문제는 학생이 답변을 잘 하지 못하니 망신만 주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질문에 고 마워해야 할 텐데. 어쩌다 참석한 공동발표자 지도교 수는 무책임하게 잘못을 학생에게 떠넘기거나, 때로는 학생을 무조건 감싸주는 중책을(?) 맡는다. 또 한 번은 특별발표하는 원로학자께 궁금하여 질문을 했었는데, 나중에 “감히 건방지게 원로에게 질문을 했다.”고 말 들이 많았다. 물론 논문집 논문을 대하는 자세와 심사 과정에서도 드러나지 않은 문제가 많았다.

    이와 같이 학술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이유는 근 원적으로 해방 후 시작된 건축학이 직능으로서만 인식 되고 학문으로서는 별 진전이 없었기 때문이라 진단한 다. 불행한 식민지 시대 당시 조선인은 하위 기능직으 로만 겨우 참여할 수 있었고 일본인이 물러난 해방 후 자동적으로 그들이 건축학의 문을 연 1세대 개척자가 되었는데, 황무지에서 학문학 철학이니 방법론이 하는 것이 바탕이 된 학문을 제대로 논할 계제가 아니었다 고 생각한다.

    이런 학술 풍토에서 뜻있는 몇몇 교수들이 뭉쳐서 “우리 학문 한번 제대로 해보자.”하고 나선 것이 발단 이 되었다. 당시 건축학계의 시끌법적한 사건이었다. 안에서 해도 되는데 굳이 밖으로 나갈 것이 뭐냐 하며 당시 원로들의 압력과 회유를 많이 받았었다.

    막 시작한 우리 학회 초창기 열기가 대단하였다. 가 득 찬 학술발표장마다 발표하고 나면 질문과 열띤 토 론으로 예정된 저녁시간을 넘기기가 일수였던 것으로 도 말해주었다. 늘 진행자가 애를 먹었다.

    지금은 슬프지만 필자의 견해로 현재 건축역사학회 는 지성이 사라진 곳, 의식이 없는 곳으로 진단한다. 천체 물리에서 별이 탄생하여 장구한 시간을 거쳐 소 멸되며 마지막 희미한 빛을 내는 것 같다.

    고대 그리스에 시지프스 신화가 있다. 신으로부터 평생 바위 덩어리를 산 꼭대기로 굴려 올려야 하는 형 벌을 받았다. 조금만 게을리 하면 바위는 골짜기 밑 으로 굴러 떨어져 내린다. 위로 올리는 일을 물리학에 서 중력에 대해 ‘일’을 한다고 한다. 만약 건축역사학 회 창립 후 20수년간 힘써 굴려 올리려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즉 가만히 있었다는 것은 계속 굴러 내려 골짜기 아래로 점점 내려가 처박힘은 당연하다. 추락 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던가?

    역사는 발전하여 현재가 과거보다 나아야 한다. 그 런데 역사는 발전만 하는 것이 아니다. 굳이 역사학자 토인비를 들지 않더라도 모든 문명은 발생-성장-최성 -쇠퇴-멸망의 과정을 보여준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 아야 하는데, 필자같이 이미 지나간 쉰 세대가 현재 활동하는 젊은 세대에게 객쩍게 충고하는 모양새는 별 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

    이 글은 창립 발기회원의 한 사람으로서 필자의 개 인적 소견이다. 가벼운 글이 아니라 역사가 학자 원로 한사람으로서 깊이 성찰한 결과물이다. 우려되어 미리 짚고 넘어갈 것은 우리학회에서 자유로웠던 논문집 자 료편의 회원 의견 개진이 언제부터인가 논문편집위원 위원장이 검열하여 어떤 때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게 재를 거부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회원으로서 필자 의 견에 만약 누군가가 내용에 동의할 수 없고 거슬린다 면, 다음 호에 반대의 비판 토론을 해 주면 된다.

    옛 우화에 ‘벌거벗은 임금님’이 있다. 알다시피 한 임금이 지어준 최상의 옷에 만족하지 못하고 재단사를 죄다 죽여 버리자, 한 재단사가 꾀를 내어 부정한 사 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천상의 옷을 제공한다. 아무 도 겁나서 말 못하는데, 한 철부지 어린애가 “임금님 이 벌거벗었다.”고 소리친다. 비슷한 얘기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라고 숲속에서 숨어서 외친 이발사 이야기가 있다. 임금이 어린애나 이발사의 입을 막고 처형한다고 해서 세상의 진실이 달라지지 않는다. 근 자에 우리 사회 정치권에서 문화예술계 작품이 비위에 거슬린다고 해서 마치 과거 군사독재시대처럼 검열을 하여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를 하는 것을 본다.

    이 글 내용은 비록 개인 의견이지만 뜻있는 원로 몇 분들이 같이 공감하고 걱정하고 있다. 한 선배 원로는 건축역사학회는 이미 역사적 수명을 다 했는데, 그만 상관하지 말고 그대로 굴러가게 내버려 두라고 조언했 다. 그러나 필자는 애착이 있기 때문에 안타까워 이런 글을 쓴다. 혹시 만에 하나 이 글이 앞으로 맡을 회장 을 포함하는 임원진이 현재를 진단해보고 미래를 개선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소용이 될 것이다. 또 어떤 후배는 지금 나이에 덕담이나 하고 조용히 지내라고 조언한다. 마치 독재시대를 지나 민 주화로 접어들 즈음 대권 주자로 나선 3김에게 한 교 수가 “이젠 그만 낚시나 하러 가라.”고 찬물을 끼얹은 사건이 생각난다. 필자는 아직은 할 일이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2.몸통부

    지금까지 한 얘기로만 그친다면 필자 개인이 회원들 을 상대로 허황되게 혹세무민 한다고 욕먹을 것이다. 그래서 진단을 뒷받침할 근거를 하나하나 제시한다. 다만 과거와 현재 누군가가 연루되었을 사건 자체를 다시 헤집어 보자는 뜻이 아니라, 필자의 상위 큰 주 장을 뒷받침할 뿐이다. 모두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에 기초한다. 필자는 개개 사실에 등장하는 분들 을 폄훼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다만 상위의 해석을 위하여 소요되는 하위 사료일 뿐이라는 점을 이해했으 면 좋겠다. 비록 본문에 실명이 등장하지 않더라도 당 사자는 과거 자신이 한 일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과거 돌아보기

    앞서 말한 이 글을 쓰게 된 직접 계기, 논문편집위 원장 소집 간담회의 주 안건인 논문 편수가 줄어들어 과학재단 등급 미달 평가를 받아 지원금이 끊긴 위기 를 타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논문편수 증가 대책으로 서, 많이 쓰도록 독려하고, 통과를 쉽게 하자는 것이었 다. 필자는 논문집 문제가 논문집 자체의 문제가 아니 라 학회의 영역 축소 문제라 발언했다. 초창기 넓었던 영역의 참가인원들이 다 떨어져 나가고 현재와 같이 한국전통건축을 전공하는 좁은 영역으로 쇠퇴하였기 때문이다. 논문집 살리기는 논문편집위원장이 주관할 것이 아니라, 위기의식을 느끼고 ‘학회 원상회복하기’, 즉 본디 영역 확대하기로서 학회장이 주관하여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원래대로의 파이 키우기가 자동적으 로 논문 숫자 증가 대책이 될 것이다. 그리고 곧 시행 될 것 같은 편법 대책으로서 논문 쉽게 통과시키기는 곧바로 학회 논문의 질을 떨어뜨리는, 학회를 죽음으 로 이끈다고 말했다.

    초창기 건축역사학회의 탄생은 계획계 건축학 전체 를 웬만큼 망라하는 큰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건축역 사는 당연히 이론과 비평이 하나처럼 붙어있었고, 또 한국건축 뿐 아니라 서양건축도 함께 있었다. 당시 학 계를 이끄는 학자들이 거의 빠지지 않고 죄다 참여했 었다. 그만큼 영향력과 권위가 있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학회의 틀이 점차 갖춰져 가는 과정에서 운동으로서의 학문성 보다 전공 영역대상으 로서의 한국전통건축 전공자들이 숫자로 많아지기 시 작했다. 어떤 면에서는 쉽게 무임승차한 셈이다. 학회 의 공식 명칭은 ‘한국건축역사학회’로 정해졌다. ‘한국 에 있는 건축역사학회’라는 뜻이다. 영어명칭에서 더 분명하다. Korean Association of Architectural History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한국건축’ 을 하는 학회로 전락해 나가버렸다. 필자는 당시 이사 회에서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가운데 점을 찍어 ‘한국ž 건축역사학회’로 하자고 제안했으나 다수가 지저분해 진다고 하여 채택되지 않았다. 현재 사회에서 한국건 축만 하는 학회로 오해받고 있고 상당수 임원진은 그 것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된다. 지금 보면 ‘대한건축학 회’처럼,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대한건축역사학회’라고 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 또한 망라하는 학회 명칭 으로 ‘한국건축역사이론학회’로서 이론을 더 넣자고 하 였으나 역시 채택되지 않았다. 학회명칭 작명은 중요 하다. 출발이 어찌되었던 세월이 가면서 오해된 이름 이 내용을 지배해버리게 되었다.

    또 하나 초창기 사건으로 학회의 사단법인 등록의 문제였다. 당시 추진하는 분들이 학회를 문화재청 산 하로 등록 추진하려고 하여, 필자는 보편적 학술 학회 로서 교육부 소관이 좋겠다고 의견을 피력했었다. 지 나고 보니 아니나 다를까 비교적 작은 부처인 문화재 청 소관으로 말미암아 학문하는데 압력과 간섭을 받게 되고 내외부에서 건축역사를 문화재로 축소해 보는 시 각이 발생하게 되었다.

    ●학회 영역이 어떻게 축소되어 갔는가?

    초창기 순수하게 ‘학문 제대로 하기’의 기치 아래 학 회를 일으켰던 여러 학자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한국건 축 전공 학자들 위주로 좁은 영역을 공고히 했다. 초 기 몇 대 회장들을 보면 한국건축을 전공하지만 그래 도 건축이론을 역사 못지않게 중시하는 포괄적인 분들 이 맡아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몇 대를 지나면서부 터 배타적 좁은 영역의 한국건축 전공자들이 점차 맡 게 되자 초기 발기 회원들이 점차 떨어져 나갔다. 나 가라고 일부러 떠밀지는 않았겠지만 발을 뻗을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앞서 말한 논문집 살리기 간담회에서 나온 대책으로서 학회 밖 학자들에게 논문 싣기를 독려하자는 의견도 있었는데, 생각해 보라. 학 자들은 자기가 활동할, 자기 학회라고 생각해야 거기 에 논문을 싣는다.

    영역이 좁아진 구체적 과정을 보면 전적으로 회장 권한인 이사진의 구성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주변 잘 아는 분들로 몇 순배 돌다 보니 결국 다른 영역을 전 공하는 초창기 구성원들은 완전 배제되게 되었다. 그 이사진이 다음 회장을 뽑게 되니 당연히 점점 더 좁아 지는 악순환이 발생했다. 쉽게 비유하자면 우리 사회 몇 대학에서 옛적 설립 시에 범국민성금으로 대학을 설립했는데 나중에 보니 어느 개인 족벌이 차지하고 있더라는 것과 비유된다.

    ●학회의 근본 목적 흔들리다.

    군대의 목적은 전투이고 대학의 목적은 교육과 연구 이다. 근자에 재벌이 대학을 점령하여 마치 회사처럼 이익 우선 집단으로 변질되기도 하지만. 학회는 두말 할 필요 없이 학문하는 곳이다. 학회에서 학문하기는 두 가지, 논문집 발행과 학술발표하기로 압축된다. 그 외는 부차적인 것이다. 그런데 학회에서 할 일이 늘어 나서 그런지 학문하기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간 구성 이사진들을 보면 학문하 기, 즉 논문 쓰고 학술발표하는 데에는 관심이 적어 보이는 분들도 상당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학회라는 조직에 사회봉사도 필요하겠지만.

    불교 사찰에 가면 우리가 뜻 모르고 쓰는 ‘이판사판’ 의 ‘이판(理判)’중과 ‘사판(事判)’중이 있다. 사판중 중 심이 되면 ‘염불은 제쳐두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다.’는 속담처럼 된다. 학회도 마찬가지로 학문 학술이 중심 이 아니면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학회가 언젠가 부터 여러 정황상 학술이 오히려 소홀히 다루어진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생긴다.

    앞으로도 계속 누군가가 맡아가겠지만 학회장의 역 할이 가장 크다. 예전에 어떤 회장은 사석이지만 ‘회장 을 해먹는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 거칠지만 현실적으 로는 가장 정확한 표현이었다. 2년 임기의 학회장 명 함이 본인의 인생 경력 관리에 도움을 주겠지만, 거꾸 로 학회의 긴 역사적 흐름 속에서 본인이 맡은 임기는 어떤 시간대에 속하는가를 성찰 한 후 무엇을 할 것이 며 다음 임기에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라 본다. 근래 회장들에 게서 필자가 너무 이상적이고 순진한 생각을 하는지 인지 몰라도 별로 그런 내용을 보지 못한 것 같다. 회 원 간의 친목을 자주 내세우는데, 적어도 무너져 내리 는 학회를 읽지 못하고 있다고 보았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학회 창립 10주년 기념 학 술대회를 성대히 하고 묶어서 책자까지 내었었다.39) 그런데 20주년은 슬그머니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우 리 학문 연구 어디까지 왔고 어디로 가는가 하는 성찰 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대부분 학회에 서 하듯, 학문 방향 설정에 도움이 될 것이다. 혹시 회 장이 잊어먹었더라도 그 많은 임원진에서도 그런 의견 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필자 진단, 거의 죽어가는, 죽은 ‘식물학회’를 뒷받침할 것이다. 우리 학회가 어디 로 가고 있는지 회장을 비롯해 아무도 모르는 것은 아 닌지?

    이 글은 무조건 ‘옛날이 좋았다’는 식의 타령이 아니 라, 학회의 본질, 학문하기의 기본으로 돌아가기를 원 하는 염원에서 비롯되었다.

    ●소통의 단절, 관료주의 권력화

    학문은 나홀로 독백이 아니다. 논문을 쓰면 동료학 자들에게 심사를 받는다. 또한 학술발표를 하면 상호 토론을 거친다. 다 알다 시피 우리 학회 초창기에 심 사 통과된 논문과 더불어 공개 심사평이 덧붙었던 것 이 큰 특징이었다. 논문 작성자와 심사자 간의 쌍방적 관계 속에서 논문의 입체적 파악이 가능했다. 논문은 길고 딱딱한데 비해 심사자가 가치를 부여해 주거나 부족한 점을 지적해 주는 것이었다. 논문 읽기 전에 심사평 먼저 읽고 보는 분도 있을 정도로 제도가 인기 가 있었다.

    물론 이 세상에 결함없는 완벽한 제도란 없다. 제도 시작 시 논문의 권위가 없어진다는 반대 의견도 있었 지만 학술 제대로 하기의 취지에 잘 맞는 제도였다고 생각한다. 심사자는 밀실에서가 아니라 심사평이 공개 된다는 데에 책임을 느끼고 신중하게 접근하였다. 그 런데 언제부터인가 점차 별 의미 없는, 하나마나한 형 식적 심사평으로 채워지더니 심사자가 심사평을 안 쓰 려고 하여 논문집 발간이 무척 지연된다는 편집위원장 의 하소연이 있었다. 아마도 처음 1인심사에서 3인심 사로 변경되면서 서로 심사평 맡기를 회피하면서 사라 진 것 같다. 물론 독자는 심사자 일개인의 심사평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본 논문과 서로 비교해 보는 참고로 유용했다. 간혹 논문작성자가 평 이 정 마음에 안 들면 다음호 토론난에 반론을 제기하 기도 하였었다. 어쨌든 학회 초기 고유했던 제도, ‘논 문과 심사평’이라는 왕복 소통이 단절되어 버렸다.

    초창기 학회 홈페이지는 회원들이 자유롭게 의견 올 리고 교환하는 마치 시끌법적한 장터 같이 학문하는 장소였다. 그때는 학회가 활발하게 살아있었다. 언제 회장 때부터인가 학회 공식적 기관지 성격의 관리자 위주로 바뀌고 말았다. 원래는 정보 교류의 공간이었 다. 사실 선후배나 스승제자의 좁은 인맥의 건축역사 학계에서 논문표절 같은 위험한 제보를 공식적으로 하 기란 엄두가 잘 나지 않을 텐데, 그 공간에서 익명이 지만 문제 제기되어 검증절차가 시작된 적도 있었다. 학문을 상호 검증하는 눈이 많으므로 건강한 학회가 될 수 있었다고 본다. 지금은 공식 관리자 위주로 변 경한 회장단이 의도한 바였겠지만 학회의 권위 강화에 는 성공했을지는 몰라도 별다른 볼일이 없으면 들어가 지 않는 딱딱한 장소 결국 죽은 장소가 되고 말았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우리 학회 논문집은 전반부가 순수 논문으로 채워지고 후반부는 자료편, 말 그대로 논문은 아니지만 유용한 자료와 더불어, 회원들의 자 유 토론과 의견이 실릴 수 있는 것이 큰 특징이었다. 초창기 별도의 얇은 학회 소식지가 학회지 자료편으로 통합되었다. 대한건축학회로 치면 ‘학회논문집’과 ‘학회 지’가 통합된 형태가 우리 논문집 ˹건축역사연구˼인 셈이다. 학회 ‘논문집’을 주로 ‘학회지’라고 부르는 이 유이다. 그런데 자유의견 개진하는 공간이 언제부터인 가 자유롭지 못한 검열 통제받는 곳이 되어버리고 말 았다.

    물론 학부생 레포트 수준의 함량미달인 원고도 간혹 보이는데, 게재 불허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그보다는 당해 편집위원장의 자의적 판단에 의해 학회장을 비롯한 임원진이나 특정인을 감싸거나 체제를 옹호하는 데에 남 용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조금이라고 껄끄럽거나 비판 적인 의견에 입을 막아서 학문하기에 오히려 짐이 되어 버린다. 이호열 위원장 시절 편집규정에 “게재여부는 편 집위원회가 결정한다.”는 규정을 신설하였다. 생각해 보 면 정규 논문은 심사의 규정이 형식적으로 잘 명시되어 있고 학자들 간 논문에 대한 보편적 인식이 어느 정도 공유되고 있다. 논문을 만약 게재불가판정을 하려면, “충 분한 근거를 명시하지 않은 채 탈락시켜서는 안 된다.” 고 연구윤리규정에(32조) 잘 명시되어있다. 그런데 반면 자료편 원고는 아무 기준 없이 마치 백지수표처럼 임의 로 판정한다는 것이 문제다. 전임 어떤 편집위원장은 “아무 권력이 없다.”라고 쉽게 말하지만 회원의 투고를 임으로 거부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막강한 권력이 된다. 그리하여 서치상 편집위원장 시절 현재의 규정, “타인의 학문적 직업적 자격과 명예를 폄훼하는 내용은 불허한 다.”(편집규정 1-(5))를 신설해 넣었다.

    그런데 ‘폄훼’라는 말이 자칫 자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40) 필자 경험상 타인의 발표나 논문에 대해 몇 차례 토론을 하였었는데 간혹 게재가 거부되기도 하였 다. 필자는 사명감을 가지고 우리 학문에서 잘못된 관 행, 일제강점기 시대부터 현재의 교과서까지도 이어오 는 정설의 오류를 지적하며 고쳐나가려 하고 있다. 학 술이니 만큼 막말이 아니라 하나하나 학문적으로 상세 히 입증하면서 참말을 하려고 노력했다. 자칫하면 기 존 학설에 대한 학문적 문제제기가 사람의 업적에 대 한 ‘폄훼’라고, 코에 걸면 코걸이식으로 판정되어 게재 거부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편집위원장 이 토론을 장려하여야 할 텐데 오히려 직권으로 토론 의 장을 아예 막아버린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학회라 면 자료편 토론이 일단 게재되고 나서 반대 진영에 속 한 분이 반대토론을 다음호에 게재하면 될 일이다. 언 젠가는 토론-반론이 차례로 게재되고 나서 반론에 대 한 짧은 원고를 투고했더니 “재반론은 금한다.”는 편 집위원장의 막강한 권력 행사를 경험하기도 했다. 필자의 과거 논단 글을 인용한다.41)

    논문도 아닌데, 회원의 자유의견 개진을 막을 수도 있다. 음 험한 시대의 ‘검열’을 떠올리게 한다. 편집위원장 본인이 옹호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인물에 대한 방어를 하게 된다. 정상적 인 사회라면 개인이 토론으로 제기한 내용에 대해 당연히 찬 반이 갈리게 마련이다. 필자의 이 글에도 독자 전체가 동의할 필요는 전혀 없다. 마음에 안 드는 분들도 많겠지만, 10%가 동의해도 그만, 양보해서 창조적 소수 1%만 동의해도 의미있 는 글이 될 것이다. ‘동의’라고 해도 전체 내용에 동의할 필요 는 없고 이 글을 통해 조금이라도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갖는 다면 대성공이다.

    최근 경험 하나 얘기하면, 어느 분의 춘계학술발표 에 대한 토론원고를 투고했다가 편집위원장으로부터 게재거부 되었는데, 통보된 공식적 게재불가 이유는 “논문이 아닌 학술발표는 토론게재 대상이 아니다.”라 는 믿기 힘든 이유였다. “지정 토론자도 아니면서”라 는 단서도 붙었다. 그간 필자는 학회의 학술발표 즉 춘추계발표나 월례발표에 대해 여러 차례 토론을 학회 지에 기고하여 아무 문제없이 게재되고 글의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고 자부한다. 추계학술발표대회 김홍식 교수의 주기론/주리론 발표를 듣고 나서 (˹건축역사연 구˼2008.12)를 시작으로 몇 개 더 있다.42)

    어떤 속내가 따로 있는지 모르지만, 논문편집위원장 이 토론 대상에 대한 임의로 제한을 가하는 것은 앞 서 본 “게재여부는 편집위원회가 정한다.”는 규정의 우려했던 바대로 막무가내의 월권이라 생각한다. 오로 지 학술적 토론임데도 불구하고, 현 규정상 나와 있는 공식 게재불가 사유인 발표자 어느 분에 대해 ‘폄훼’라 는 저촉 이유를 드는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서.

    ●논문편집위원장의 역할

    논문편집위원장은 학술 학회의 존재이유 중 가장 중 심적 역할인 논문집 발행을 책임진다. 학회장의 최고 로 중요한 인사는 학문 자체에 이해가 깊은 적합한 편 집위원장을 임명하는 일일 것이다. 단순히 전공분야 논문을 많이 썼다거나 실측조사 포함 건축 실무를 많 이 하였다고 해서 충분한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이 학문학이 덜 정립된 우리 학계에서 무엇이 논문이 되고 안 되는가에 대한 인식론적, 방법론적 기초가 있 어야 할 것이다.

    필자도 건축학회와 건축역사학회 논문편집위원, 위 원장을 역임하던 중 늘 부족함을 느껴 “건축 논문 무 엇이 문제인가?”하는 주제의 세미나를 개최하며 함께 공부하고자 하였다.43) 사실 논문편집위원장 자리에서 하는 일은 논문집을 낸다는 것 말고 누가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다. 들어온 논문들을 주제에 따라 심사위원 을 배정하고, 통과된 게재가 논문을 실으면 된다. 단순 히 이런 일이라면 교수라는 고급인력이 필요 없는 대 학원생 정도의 간사면 충분하다.

    그런데 건축학계 논문은 공학분야와는 다르게 수시 로 심사 결과에 대해 투고자가 이의제기를 한다. 이를 처리하는 것은 고도의 학문적 능력을 필요로 한다. 심 사자 ‘심사의견’과 투고자 ‘이의제기’ 둘을 나란히 놓고 공정하게 검토를 하여야 한다. 건축과 교수들은 대체 로 가부 판단하면 그만인, 선정과 탈락 이유를 제대로 알려줄 필요도 없는 설계심사에 익숙해있다. 논문 심 사에서 자주 문제 되는 것은 불성실한 심사의견이다. 남이 애써서 작성한 원고를 한두 마디로 “논문이 안 됨.”하는 경향이 있었다. 편집위원장은 이때 할 수없이 심사자가 더 소상히 게재거부 근거를 밝히도록 개입하 여야만 할 것이다. 또 투고자가 심사의견에 납득하기 어렵다면 질의할 수 있다. 이때에도 편집위원장은 투 고자의 질의 자체가 조금이라도 일리 있다면 심사자가 답변하도록 촉구해야 할 것이다. 필자 경험으로, 누군 지 모를 심사자에게 위원장을 중개로 질의하면 대부분 답변해주지 않는다. 어떤 심사자는 위원장에게 답변해 야하는 규정이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는데, 답변하지 말라는 규정 또한 없다. 우리 학회 초창기 공개 심사 평 제도의 정신은 바로 ‘논문쓰기와 심사간의 소통’이 었다. 본인 소신껏 했을 심사를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학자적 자세일 것이다. 우리 사회 정치판처럼 권한만 행사하고 책임은 회피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익명을 보 장한다고 해서 심사자가 매복한 저격수처럼 숨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답변이 없어 위원장께 촉구하였더니, 어 떤 위원장은 “답하지 않는데 난들 어쩌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또 어떤 위원장은 오해하여 “심사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우편배달부식 위원장에 다름 아니었다.

    논문심사의 이의제기에 최종 ‘소청’ 절차가 있다. 과 거 필자가 소청제기했다가 기각되었는데, 당시 소청위 원회에 비상식적으로 게재불가 심사한 심사위원 본인 들도 참가하여 셀프 판정하였었다. 최종 결과 통보 온 내용은 “심사위원을 믿고 맡겼으므로 심사내용은 검토 하지 아니하며, 검토한 결과 심사 절차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형식적으로 되어있었다. 심사내용에 대해 이 의제기 했는데 검토하지 않겠다면 소청 제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전술한 대로 학문학이 덜 성숙된 건축학계에서 심사 위원의 질은 천차만별이다. 심사위원을 무작정 믿는 것은 마치 신과 같이 ‘무오류’라는 엄청난 주장이 된 다. 일전의 건축학 논문 무엇이 문제인가? 심포지엄 발표 후 토론장에서 여러 투고자들이 심사자에게 당한 사례를 하소연하여 마치 성토장을 방불케 했었다.44) 기왕 있는 소청제도는 바로 인간이 하는 심사 제도의 오류를 바로 잡을 사후 장치인 것이다. 허수아비가 아 닌 논문편집위원장의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이의 제 기 소청의 적합하고 합리적인 처리일 것이다. 이 부분 에 대한 것은 필자 논고 논문편집위원장의 역할과 임 무 에서 논했으니 참고 바란다.45)

    ●논문 표절에 대한 처리

    편집위원장의 역할 중 중요한 일 하나가 표절에 대 한 처리이다. 학문의 기본인 정직한 글쓰기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이다. 타인의 연구나 공적을 가로챈다면 학문이 성립할 수 없다. 그래서 선행연구를 존중하여 야 하며, 만약 빌려오면 인용 주석을 통해 명확히 밝 히고, 어디서부터 본인이 독창적으로 한 것인지 구분 시켜야 하는 것이 학문세계에서의 상식이다. 그런데 학계에서 종종 표절 문제가 일어난다. 건축학회 건축 역사학회 양 학회에서 필자가 편집위원(장)으로서 몇 차례 참여한 경험으로 보면 1) 일단 제보가 들어오면 2) 엄정한 사실 확인이 가장 기본이다. 최종적으로 보 통 논문집 말미 한 면에 3) 편집위원회 명의로 조사 결과를 공표하고, 다음 면에 연이어 4) 표절자의 사과 문을 게재하는 방식이었다. 양 학회지에 찾아보면 다 나온다. 중요한 것은 객관적인 심층조사이다. 여기에 선후배 학연 같은 친분이 개입해서는 결코 안 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 제보자도 결과에 만족하게 되고 표절자도 승복하게 된다. 한 때 후임 편집위원장으로 부터의 요청으로 표절 처리의 과정에 대한 자문을 한 적도 있다.

    일전에 필자가 표절제보를 하였으나, 편집위원회에 서 제대로 사실 확인 조사를 하지 않고서 이사회에 상 정하여 “기각함”이라는 이사회 의결을 얻어낸다. 그러 고 제보자 필자에게 “이미 처리했으므로 일사부재리의 원칙”이라하고, 또 표절자가 하지도 않은 “사과와 토 론 답글에 충실히 임했음.”이라는 허위 답변 공문을 준다.46) 회장에게 공문의 허위성에 대해 해명을 요구 하는 질의를 하였으나 답변없이 임기가 끝나버렸다.

    그래서 다음 임기 회장께 질의에 대한 답변을 요청 하였으나 편집위원장이 대행한 답변에 “전임임기에 일 어난 일이므로 현 임기에 답변할 수 없다.”는 공문이 왔다.47) 공적 기관이라면 아무리 맡은 사람이 바뀌더 라도 일은 영속되는 것이 기본 상식이다. 전임 임기 것은 나몰라라 한다면, 임기 2년살이 몰역사적, 곧 하 루살이 위원장에 불과할 것이다.

    ●논문편집위원회의 독립성

    학회에 이사회라는 기구가 있고, 별도로 독립된 논 문편집위원회가 있다. 논문편집에는 학회장을 비롯해 이사들이 관여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학술학회에 서 이판은 사판과 분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사 이엔가 논문편집위원회가 마치 이사회의 하위 기구인 듯한 착각이 일어난다. 학회 논문집 속표지를 보면 상 단에 학회 이사회 기구의 명단이 회장, 부회장, 이사, 감사 순으로 죽 나오고 그 하단에 편집위원회 구성이 나온다.(그림) 초창기 학회지와 비교해 보면, 초기에는 발행인으로 학회장, 편집인으로 편집위원장 이름이 나 온다. 그리고 편집위원 명단만 나온다. 논문집이라는 책자는 오로지 편집위원장의 책임으로 편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논문집에서 필요도 없지만 굳이 학회 구성 기구표를 알리고 싶으면 논문집 제일 뒤에 별도로 학회를 소개 하면 된다. 어느 틈엔가 이사회가 편집위원회의 상위 기구인 것처럼 권력화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사회는 비록 학회 최고 의결기구이지만 학회 전반 사업을 총괄할 것이다. 논문 편집에 관해서는 사판이 아닌 이판으로서의 ‘위원장의 독립성’이 철저히 보장되 어야 할 것이다. 간략한 편집과 발간에 대한 보고와 발행예산 정도만 보고하면 될 것이다. 불행하게도 앞 서 말한 바와 같이 아주 예민한, 논문 고유의 활동인 표절에 대한 처리가 이사회에 상정되어 의결되는 불상 사가 발생했다. ‘이사회에서 결정된 사항’이니 움직일 수 없다는 권위를 내세웠다.

    ●논문편집위원회에 대한 오해

    편집위원은 편집위원장이 선임하는바, 학회 내에서 학문 자체에 가장 관심이 깊은 분들로 구성될 것이다. 분야별 안배도 물론 있어야겠지만. 현재 논문집 표지 안쪽에 있는 11인으로 구성된 편집위원은 알고 보니 각 분야를 담당하는 직능 대표 성격이었다. 그런데 우 연히 발견한 사실인데, 우리 학회 헌법인 “논문편집위 원회 및 논문심사규정”을 보니 “편집위원은 7인 이내 로 한다.”로(3조 3항)되어 있었다. 필자가 무슨 꼬투리 를 잡자는 것이 아니라 7인이든 11인이든 아무려면 어 떠냐 하고 사소한 일이라 할 지 모르지만, 만약 숫자 를 늘리고 싶으면 법을 개정해야지, 그대로 두고 법을 어긴다면 안 될 일이라 생각한다. 장관에 임명되면 법 령의 기구표를 보고 산하 국장 숫자에 맞게 발령을 내 야 할 것이다. 그만큼 최초 편집위원회가 위원장도 모 르게 편법으로 구성되어 2년 임기가 다 지나가 버린 게 아닌가 짐작한다. 편집위원 내부에서도 전혀 이상 한 점을 못 느꼈다는 것이 매우 이상하다.

    논문 편집위원은 각 직능대표로서가 아니라 학회에 서 학문에 관한 이해가 깊은 ‘소수 정예 학자’로 구성 되어야 맞다고 본다.

    ●학술이사의 역할

    학문하기의 또 하나 중요한 역할은 학회에서 학술 이사이다. 춘추계와 월례 학술발표를 담당한다. 우리 학회 창립 동기는 논문집 보다 오히려 밖으로 드러나 는 학술발표에 있었다. 발표하고 토론하기에서 제대로 된 학술을 염원하였었다. 초기에는 발표자가 몇 명 없 었는 데, 이제는 춘추계발표집이 두껍게 되고 발표논 문도 비교 안될 만큼 많아졌다. 세 확장을 축하할 일 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 만은 않다.

    과거 건축학회에서 학생이 발표하고 교수는 뒤로 빠 지는 것에서 탈피하고자 했다. 당시 학생에게 질문하 면 “교수님이 그리 하라고 해서 저는 그렇게 했을 뿐 입니다.”하는 우스꽝스러운 답변을 들어야 했다. 그리 하여 우리 학회에서는 교수가 발표하는 것을 원칙으로 정하였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다 보니 심심치않게 창립 전과 마찬가지로 교수는 뒤로 빠진 채로 학생의 변명 답변을 듣는, 학회 역사의 시계를 과거로 되돌려 놓은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내실보다 숫자를 늘리다 보니 토론 시간도 태부족이라 그저 형식적이란 감도 든다.

    매월 하는 학술발표회는 분야별로 돌아가며 주제를 택 하는 관행이 있는 것 같다. 달리 생각해 보면 "건축역사 학계에서 지금 논의할 가장 시급한 주제는 무엇인가?"로 우선순위를 정해 나간다면, 회원들이 관심을 가지고 참 여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만약 교과서적 정설을 뒤집는 새 로운 발표가 나타나면, 진위가 가려지도록 반대되는 양 주장이 서로 맞붙는 판을 즉시 만들어 주는 것이 학술의 발전을 맡는 학술이사가 우선 할 일이라 생각한다.

    학술의 본질, 발표하고 토론하기가 최대한 잘 이루어 지도록 머리를 짜낸다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 라 본다.

    ●문화재 용역에 사로잡힌 학회

    현재 학술학회의 근본을 뒤집은 것이 학회 내 소위 문화재 전공이라 생각한다. 문화재는 두말할 필요 없 이 건축역사학 대상에 포함된다. 그런데 문화재 업무 가 비정상적으로 과도하게 건축역사학을 점하게 된데 서 문제가 발생했다. 학회 초창기부터 문화재 분야는 우려스러웠다.

    한국건축역사학은 어느 사이엔가 문화재를 전문으로 다루는 학문인 것으로 인식이 굳어져 감은 부인할 수 없고, 건축역사 학자의 주 임무가 마치 정부가 하는 문화재 관계부서에만 전 문인으로 참여하는 데에 있는 것으로 잘못 인식되어 가는 실 정이다.48)

    문화재는 과거 선조들의 유산이다. 현대인 후손은 문화재가 더 이상 훼손되지 않고 현상유지 되도록 문 화재청 제정 ‘문화유산 헌장’에 잘 나와 있듯이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문화재 복원 용역”이다. 필자는 그동안 전국적으로 자행되는 문화재 복원이 문 제가 많음을 여러 차례 학술발표로 지적해 왔다.49) 필 자가 심지어 엉터리, 짝퉁, 사기 등의 단어를 동원하며 지적했으나 쇠귀에 경 읽기다. 필자가 앞장서서 경포 대 보수복원 엉터리라고 발표하고 문화재 청장께 호소 하여, 우리 학회주관 공청회성 심포지엄을 열게 되고, 그 결과 아마도 전국 최초 유일하게 원상복귀 시정된 사례가 되었다.

    문화재는 지금도 시행 공사 우선으로 예산을 따고 집행되다 보니 가장 중요한 첫 단계, "과연 복원할 수 있는 것인가?"하는 문제는 잘 다루어지지 않는다. ‘철 학’의 부재다. 임기 내 치적용으로 정치권에서 시작하 여 문화재 공무원이 앞장서고 업자들이 공사를 시행한 다. 학자들이 그 과정에서 용역으로 들러리 서서 사업 을 합리화해준다.

    과거 문화재관리국 시절 박정희 대통령이 정치에 역 사를 동원하여 문화재를 복원하였다. 경주 불국사를 필두로 현충사를 비롯한 성역화, 국방유적을 복원하였 다. 그 독재정권 시절 각하의 말이 곧 법인 상태에서 건축역사 원로들은 고증에는 소홀한 채로 무조건 지시 에 따라야 했다. 복원할 수 없는 것도 제멋대로 현대 가짜 작품으로 만들어 내놓았다. 상상 복원도를 그리 거나 축소 모형은 만들어 볼 수 있지만, 미륵사지 동 탑처럼 이미 가루가 되어 없어진 건물을 유적지를 훼 손하며 마음대로 실물 복원한다는 것은 선조들께 죄를 짓는 것이라는 것을 학자라면 누구나 다 안다. 언제나 “철저히 고증했다.”고 대 국민 거짓을 말하며, 과거 시 절의 관행에 물들어 지금도 똑같은 일이 전국적으로 벌어진다.

    학회 회원 다수가 지금도 참여하고 있는 황룡사 복 원은 아무 문화재 가치가 없는 짝퉁의 5천억짜리 규모 의 백제역사재현단지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신라역사 재현단지를 국가 기관이 아닌 관광업체에서 인근 논바 닥에 만든다면 엄청난 국민세금의 낭비도 없고 유적훼 손도 아니므로 탓할 바가 아니다. 초석만 남은 터에 문화재청이 앞장서서 실물 복원 공사를 꾀하고 있고, 학회 회원일 학자들이 아무 생각 없이 대규모로 참여 하고 있다.

    좋은 의미에서 건축역사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사회 봉사를 하는 방식 하나가 문화재 용역이다. ‘용역’이란 단어는 사회에서 오히려 철거반 깡패와 같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관변 발주 용역에서 공무원의 의 도한 결과에 거스르는 용역은 애초에 있을 수가 없다. 국민 세금 22조원을 낭비한, 지금은 거대한 잘못으로 결론 난 4대강 사업이 막무가내로 시행될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의 토목수리 전문 학자들의 용역이라는 떡 고물 때문, 이제는 책임을 회피하려 든다. 그러나 역사 의 평가를 피해 갈 수는 없다. 마치 을사오적처럼 4대 강 오적도 나돈다.

    우리 학회 회원 중 상당수가 복원사업 용역에 참여 하고 있고 문화재 전공 인력은 급팽창했다. 그러나 학 회는 용역 갑질에 망가졌다. “당신들 용역 안 할꺼 요?”하고 회장에 압력을 넣어 학술발표에 관여한 적도 있다. 사실 학회 명의 용역에서 학회에 떨어지는 오버 헤드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나, 대부분 임원일 개개인 의 이익을 위하여 학회의 발목이 잡히는 셈이다.

    일전에 문화재청이 제2 석굴암 건립을 추진하자 범 문화계가 반대성명을 냈을 때 우리 학회도 참가했다. 어느 사이엔가 건축역사학회는 문화재 분야에서 철학 과 지성이 사라지게 되었다.

    무엇보다 학회는 문화재 용역 업무의 관-산-학 마 피아 카르텔에서 벗어나, 철학과 가치를 회복하고, 학 자로서 양심을 가지고 문화재의 올바른 방향을 선도해 야 할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이미 일어난 문화재 복원 사례에 대하여 비록 원로 선배들의 잘못일 지라도 비 평을 철저히 하여 잘못의 반복 고리를 끊는 역사의 교 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비평은 폄훼가 결코 아니다. 현재 진행 중인 문제에 대해 그저 눈감지 말로 찬반 공청회성 토론 세미나를 자주 벌려야 할 것이다. 기 능직 문화재 전문가이기 이전에 역사학자로서의 사명 이다.

    ●부회장 자리 늘리기

    초기 학회는 회장 밑에 부회장 1인으로 되어있었는 데 언젠가부터 부회장 3인 체제로 바뀌었다.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텐데, 왜 확대 개정했는지 들은바 가 없다. 이미 각 이사들의 담당 영역이 정해져 있을 터인데. 보통 ‘부’자 들어간 자리는 평시에는 별 임무 가 없으나 회장 유고시 전권을 계승하는 잠정적인 자 리에 가깝다. 미국 대통령 케네디가 암살되자 부통령 존슨이 계승하듯이. 불필요한 옥상옥을 만든 것은 아 닌지? 그런데 이번에는 부회장 자리를 5인으로 늘리는 규정이 이사회를 통과했다고 하는 놀라운 소식이다. 이사들에게 물어봐도 왜 늘려야 하는지 당위성은 없고 결과만 있다. 이러다가 전체임원의 부회장화가 되는 건 아닌지?

    아무리 생각해도 자리 늘리기는 학문하기와는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이고, 깊은 뜻은 알 수 없지만 대외 활 동 시 명함에 새겨 넣을 보직 인플레가 아닌가 짐작해 본다. 아마도 전술한 문화재 용역에서 유리한 자리를 점하고자 하는 게 아닌지 짐작해 본다. 지금이라도 회 원들에게 부회장 자릿수를 다섯 분씩이나 늘린 이유를 알려주면 좋겠다.

    ●전공 세분화 쪼개기

    필자는 학회 처음부터 전공세분화의 병폐를 논하였 다.50) 건축역사학 전공을 잘게 쪼개 마치 소 왕국 성 주처럼 군림하는 위험성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세월이 지나니 말 그대로 되어버렸다. 각 역사가가 세부 전공 을 가지고 있음은 당연하나, 역사를 한다는 것은 성에 서 나와 교류하고 서로 소통하여야 한다. 현대는 통섭 융합의 시대다. 한국건축사와 서양건축사는 대상이 분 명 다르다. 그러나 역사하는 큰 철학과 방법은 같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학회 실상을 보면 한국건축사 하 는데 서양건축사 몰라도 전혀 지장이 없는 듯 살아간 다. 그만큼 폐쇄된 좁은 우물 속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한국건축, 동양건축, 서양건축의 덫과 한국건 축사의 방향 제목의 학술발표를 했다.51)

    지난 9월 광복70년 건축사 학술세미나에서 한동수 교수가 “전공이라는 분업의 병”을 일본의 예를 들어 “건축역사를 잘게 쪼개 하나의 부속품처럼 만든 것”을 언급했고52) 강혁교수가 “분과로 나누어 담론의 장을 없애버린 데” 대해 집중적으로 발표하였다 “건축역사 학자 저마다 영역 하나씩 차지하고 있다. 그러면 편하 다. 그것 하지 말자고 건축역사학회가 생겼는데.”53)라 고 언급했다. 필자 생각으로 전공 세분화는 바로 우리 학회는 지성이 결여되고 통찰이 결여된 죽은 학회가 되어버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당연히 초기 광역 회 원들을 쫓아 낸 원동력이 되었다고 본다.

    필자가 전통건축 용어 정립을 위해 학계의 잘못을 지적해 온데 대해 타 전공자의 구역에 침범한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54) 일상언어화한 주먹세계의 일본어, ‘나와바리(‘繩張り)’ 즉 “새끼줄을 쳐서 경계를 정하는” 바와 다를 것이 없는데,55) 영역 선점보다 대상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며 될 일이고, 해당 전공의 잘못을 보완 해준데 대해 감사해야 할 일이다.

    필자가 근대건축 발표자 윤인석 교수에게 질문했다. 무지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한국의 근대건축 실체가 과연 있는 것인가?” 근래 근대건축 전공자는 많아졌으 나 근대건축이 무엇인지 본질적으로 궁금하다. 서양 근대건축은 대문자 고유명사 Modern Architecture로 분명하나, 우리 근대건축은 주로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인 주도 건축이나, 그 시기 전통목조건축이 아닌 건축 을 일컫는 것 같다. 근대건축 문화재가 등록되면서 용 역과 맞물려 전공이 급팽창했다. 한편 ‘근대기’의 건축 을 지칭하는 것인가? 건축사에서 ‘근대’의 설정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이러한 필자의 무지를 정리해 주도록 소위 근대건축을 전공자들이 모여 눈앞의 용역보다도 학문적 정의를 제대로 해 주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언젠가부터 학술발표 분과에 ‘전통건축 및 생산경제’ 라고 생산경제가 사족같이 덧붙게 되었다. ‘생산경제’ 전공이 건축역사학에 필요한 분야인지, 아니면 건축시 공 전공에 필요한 분야인지 모르지만, 혹시 학문을 위 한 학문은 아닌지 의문이 생긴다. 건축 역사의 대상은 건축물이나 건축설계나 시공방법일 터인데, 지금 하듯 과거의 시공조직을 자세히 파헤쳐도 ‘건축물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말하지 못한다면 불필요한, 연구자만 을 위한 학문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별 도로 논하는 것이 좋겠다. 전공분야는 무조건 쪼갠다 고 능사가 아니라 “누구에게 왜 필요한가?”하는 의문 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학술발표장에 가보면 현역 이사들이 잘 참여하지 않 는다. 개인 사정이야 몇 분 있을 수 있지만 아마도 논 의 주제가 본인 전공이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 다. 건축역사학 모든 세부 전공은 언제나 서로 전체와 도 연결되어 있다. 이사 자신들이 바로 마치 지역구만 챙기는 국회의원처럼 전공 세분화의 한 자리를 굳건히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건축역사학의 전체성을 퇴 행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번 광복70주년 기념 건축역사학 돌아보기에 해당되지 않는 세부 전공이 단 하나라도 있을 것인가?

    문화재 분과가 독립하더니 이제는 문화재 보통방과 문화재 특별방 두 개를 점한다. 특별방을 보니 문화재 현업자 위주 배타적으로 세부 방법을 논하는 것 같았 다. 숭례문에서 문제된 단청이나 전통기와 같은 기법 은 언제나 상위의 철학을 요한다. 문화재가 일반 건축 역사에서 벗어나 밀실을 점할수록 점점 더 외곬로 빠 지게 된다. 필자는 몇 차례 문화재보수 실측조사 월례 발표회를 듣고 여러 번 공개 질의를 했으나 해당 전문 가들로 부터 답변을 전혀 들을 수 없었다.

    ●건축학계에서 건축역사학의 위치

    논문집 간담회 때 현 편집위원 어느 분이 이제는 시 대가 바뀌었다고 했다. 그러나 언제나 시대는 고정된 것이 아니고 변화하는 것이다. 5년제로 인하여 대학원 생이 줄어들고 건축역사 전공은 더 줄어든단다. 대학 에서 정년퇴임한 건축역사학 전공 교수를 충원하지 않 는다고 한다.

    필자가 논문집 창간호 논문에서 논한 건축역사학이 순수학문은 아니고 역사학의 부분도 아니며, 대학 건 축학과의 우산 아래 있음을 말하였다. 건축학의 중심 에 있어야 할 건축역사학이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것은 건축학에서의 건축역사 필요성에는 눈감고 그저 전문 분야 쪼개기, 문화재 용역하기라는 좁은 우물 속에 빠 진 채 20여년 머무른 우리 학자들의 자업자득이 아닐 까 생각한다.

    ●학문하기 자세

    앞서 언급했듯 필자는 그간 일제 강점기 때부터 그 후 1세대를 거쳐 지금까지 내려오는 교과서적 정설에 수없이 문제를 제기해 왔다.

    건축용어에서 엄연한 툇마루를 ‘쪽마루’라고 재료 지 칭 전문가 방언으로 제정해 버린, 철석같이 믿고 있는 목구조 분류되지 않는 ‘주심포식-익공식’ 분류방식, ‘밑 둥근형’이라 불러도 아무 지장 없을, 중국 부재명이 형 태명 ‘교두형’으로, 도리의 고어 ‘납’에서 비롯된 줄 모 르고 ‘납도리’를 사각도리로 호칭하는, 이 모든 잘못된 용어들이 교과서에서, 사전에서 통용되고 있어 학생들 과 전문가들에게 진실을 오도한다고 여러 차례 발표했 다.

    또한 탑 용어에서, 원래 불교의 숭배 핵심 ‘알’을 엎 어놓은 밥사발 ‘복발’이라 잘못 호칭하는 관행, 귀함의 상징 ‘양산’을 엉뚱하게 바퀴 ‘상륜’으로 호칭하는 오 류, 그 외 기단, 요도, 탑구 등의 잘못된 호칭을 여러 차례 발표했다.

    문제는 학자들의 반응이다. 그들이 쓴 논문, 교과서, 사전의 평생 믿어온 바가 틀렸다는 엄청난 지적을 하 는 데도 불구하고 그저 가만히 있다. 당연히 자기가 맞고 필자가 틀렸다는 반증을 하여야 할 터인데, 어떤 분은 “별도로 대꾸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고 회피한 다. 무엇을 믿는가? 내려오던 과거 관행을 믿고 아직 은 지지 세력이 다수라는 숫자를 믿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학문이란 무엇이고 학자는 무엇 하는 사람인 가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필자가 누차 얘기 했듯이, 모든 학문의 발전은 하나의 설이 나오면 누군가 반론 하고 다시 재반론으로 이어져서 결국은 진리가 살아남 고 사이비가 퇴출되는 연속적인 과정이다.

    서로 반대되는 설은 맞붙어서 승부가 나야한다. 그 런 점에서 살아있는 치열한 학문의 학자는 검투사에 비유된다. 검투장과는 다른, 비판과 토론의 장소를 제 공하는 것이 바로 학회다. 참고로 경포대가 엉터리로 보수복원되었다고 당시 이건무 문화재청장께 편지를 논문과 함께 보냈더니, 본인으로서는 어느 쪽이 맞는 0지 모르니 양쪽이 맞붙는 공청회성 세미나를 열어서 만약 맞다고 결론나면 원상복구하겠노라고 매우 학자 적인 합리적 제안을 해서, 결국은 경포대가 원상복구 되었다. 우리 학회에서 본받을 만한 절차이다.

    학회가 살아있다면 모순되는 두 주장이 맞붙어 진실 과 허위가 가려지도록 학술판을 열어야 할 것이다. 세 월호에서처럼 “가만히 기다려라.”는 학회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3.마치며

    글의 전개 상 초창기와 현재를 양분 대비시켰는데 사 실상 시대구분이 명확히 되는 것도 아니고 필자도 어느 시기 부회장을 역임하여 일말의 책임이 없는 것도 아니 다.

    학회의 역사를 말하기 위하여 세세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였지, 개개 사실을 파헤쳐 논하자는 것은 아 니다. 그렇지만 만약 필자가 잘못 예로 든 부분이 있다 면 지적해 주기 바란다.

    가장 요구되는 것은 회장의 역사인식이다. 다른 말로 하면 철학과 소신이다.

    그동안 많은 학자들이 세분된 전공 우물에 빠져 전체 를 보지 못한 감이 있다. 전문분야 기능직으로 전락하지 말고, 말 그대로 학자 본연의 최고 지성을 회복하도록 학회가 재편되어야 할 것이다.

    문화재 용역에 정력을 낭비하여 학문하기를 소홀히 하 는 것을 자주 본다. 문화재 관련 관변 회원들은 철학을 가지고 지금처럼 사업 공사위주의 방식에서 탈피하여 복 원 가능성, 필요성 여부에 첫 단계에 전력하여 후세에 오명을 남기지 말고 올바른 문화유산을 전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회장은 여기저기 밖의 행사에 눈 돌리기보다는 학회의 본질, 논문과 학술발표의 내실에 전념해 주기를 바란다. 학문하기의 필수인 소통, 토론을 활성화 하고 강제로 토 론을 막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학회의 본디 영역 잃어버린 고토를 수복하는 신 르네 상스를 이루기를 부탁한다. 범 건축학계에 선언해야 할 것이다. 밖으로 떨어져 나간 서양건축사, 건축이론, 비평 학자들을 대 소집하는 나팔을 불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 여 다시 건축학의 중심전공으로 자리잡아야 한다. 그것 이 학회를 다시 살리는 유일한 길임을 말하고자 한다.

    Fig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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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행 학회 속표지. 상부에 이사 진 명단, 하부에 편집위원 명단

    Table

    Footnote

    • 간담회 결과는 ˹건축역사연구˼2015.8월호. 건축역사연구 100 호 발간 기념 토론회 에 있음.
    • 광복70년 건축사학 70년 한국건축역사학회 2015. 9월 학술발 표회.
    • ˹한국건축사연구1: 분야와 시대˼˹한국건축사연구2: 이론과 쟁점 ˼발언, 2003
    • 졸고 학문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서치상 논문편집위원장 의 글에 대해 ˹건축역사연구˼2012.08. pp.141-42
    • 졸고 논문편집위원장의 역할과 임무에 대하여 ˹건축역사연구 ˼2013.12. pp.75-81
    • 문화재 제발 제대로 살리자- ‘문화재 수리의 현실과 과제’ 월 례발표회 참관기 (˹건축역사연구˼2014.04)와 ‘문화재보호법 체 계 개편을 위한 시론’ 10월 월례발표회에서의 질의와 이를 바탕으로 한 토론과 제안 (˹건축역사연구˼2014.12)가 있다.
    • 2004년 대한건축학회 춘계학술대회 논문편집위원회 심포지엄 건축학 논문 무엇이 문제인가?- 그 효용과 연구방법과 심사에 관하 여 4.24.서울대. 필자 포함 4인의 발표가 있었다.또한 2001년 건축역사학회 편집위원회 주간 ‘건축역사학 논문의 문 제’ 월례발표회에서 3인의 발표가 있었다. 이익주 한국사학 논문의 의미와 조건 , 이상해 건축역사학 논문의 기본 조건 , 이희봉 건 축역사학 논문의 학문적 검토 . ˹건축역사연구˼2001.12. pp. 111-23 에 전재.
    • 논문 심포지엄의 끝의 토론 내용과 심포지엄 결과 제안을 필자 가 정리하여 ˹건축˼2004.06. pp.103-05에 나와 있음.
    • 졸고 ˹건축역사연구˼2013.12. pp.75-81
    • ˹건축역사연구˼2013.08 p.107-08. 한국건축역사학회 제11대 제 13회 이사회 회의록
    • 이 내용에 대해서는 필자 투고 우리학회 비정상의 정상화를 위하여- 표절 사건에 대한 일련의 처리 과정에서 ˹건축역사연구˼2014.08 p.140-44에 경과가 자세히 나와 있음.
    • 이상해, ‘한국건축역사 연구의 비판과 방향 모색’ 심사평 ˹건 축역사연구˼1992.06. p.291
    • 졸고 관광복원인가 막무가내 복원인가? 경주 월정교를 통해 본 문화유적 복원의 문제 복원이라는 이름의 문화재 파괴 정말 문제다.-월정교, 경포대, 심곡서원 사례를 통하여 2011 건축역사학 회 춘계발표대회. 문화재 제발 제대로 살리자 ‘문화재 수리의 현실 과 과제’ 월례학술발표회 참관기 ˹건축역사연구˼2014.06 문화재 전문가에 의한 문화재 파괴, 이젠 그만 막아야 한다. ˹건축˼2013.09
    • 졸고, 한국건축역사 연구의 비판과 방향모색 ˹건축역사연구˼창간호. 1992.06. p.244-25
    • 졸고, 한국건축, 동양건축, 서양건축의 덫과 한국건축역사학의 방향 2008 건축역사학회 추계학술발표대회
    • 한동수, 한국건축역사연구 70년 그 과유불급 한국건축역사학 회 월례발표회. 2015.09
    • 강혁, 역사이론과 비평 한국건축역사학회 월례발표회. 2015.09
    • 서치상 이희봉 교수의 글을 읽고 ˹건축역사연구˼2012.06. pp.122-23
    • 졸고 교두형이라니? ˹건축역사연구˼2014.02. p.85

    Refer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