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론
가회동 백인제 가옥(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22호)이 2015.11월 역사가옥박물관(Historic House Museum)으 로 개관한다. 본 가옥은 2009.12월 서울시 SH공사에서 매입한 이후 제2의 북촌문화센터 및 서울시장 공관으로 의 조성 추진 등의 과정을 거치며 많은 변화가 있었고 그 결과 근대기 상류층의 선구적 작품한옥이라는 건축적 성격을 잃어버린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었었다.
이에 새로운 운영주체인 서울역사박물관은 본 가옥의 훼손된 원형을 되찾아 본래의 특성을 가진 근대한옥으로 회복시킴과 동시에 근대기 상류층의 생활상을 담아 역사 가옥박물관으로 조성하기로 하고 부분적 원형회복공사와 전시연출 과정을 거쳐 시민들에게 열린 문화공간으로 개 방하기로 하였다.
이 글은 제2북촌문화센터로 조성하던 기존 개보수공사 로 인한 가옥의 변화사항과 금회 부분원형회복공사의 내 용에 대한 기록 및 기존연구2)에서 누락되었거나 이번 역 사가옥박물관으로 조성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밝혀진 사 실들을 알림과 동시에 기존연구보다 확대된 분석범위에 따라 근대한옥으로서의 특성을 재고再考하고, 유지관리 시의 구조안전을 당부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2.가옥의 연혁
시기별로 정리한 가옥 관련 주요연혁은 다음과 같다. 1913.초봄~7.3. 친일실업가 한상룡 건립 및 입주. (1913.4.15. 안채 및 사랑채 상량).3)
1913.10.17. 초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 초청연회.
1917.5.27. 2대 하세가와 요시미치 총독 초청연회.
1920.6.25. 3대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부인 사이토 하루코 초청연회.4)
1928.6.29. ㈜한성은행 소유권이전.
(1928.11?~1930.5? 진주의 갑부, 친일실업가 및 관료 김기태 임차.
1930.6.~1935.1? 천도교 도령 최린 임차, 천도교도 숙소 사용).5)
1935.1.19. 문화사업가 최선익 소유권이전.
1935.5.11. 최선익 95번지(현 도로변 출입마당 영역) 매입.
1935.5.14. 최선익 현 솟을대문채 건립/상량.6)
1935.9.17. 최선익 93-3번지 분할매각(현 대지경계는 이때 형성됨).
1944.9.1. 외과의사 백인제 소유권이전.
1950.7.19. 백인제 흥사단원 박현환의 집에서 피랍7) 후, 이날 새벽 노부老父작별 차 자택 방문 시 동생 붕제와 함께 피랍. 9.28서울수복 시 납북.8) 이후 부인 최경진 및 가족 거주/관리.
1976.12. 서울시 도성내민속경관지역조사연구.
1977.3.17. 서울시 민속자료(현 민속문화재) 제22호 지정 ~ 문화재보수공사 수 회.
2008.11. 문화재보수공사(창호, 외부도장 외).9)
2009.8.13. 백인제가옥 매입 및 활용 계획 수립 (시방침 제370호).
2009.12.28. 서울특별시(SH공사) 매입.
2010.3. 문화재보수공사(중문간채)
2010.3.8. ~2011.3. 제2북촌문화센터 개보수설계용역.10)
2011.6. ~ 2012.2. 개보수공사11) 진행/중단.
2012.11.1. ~ 2013.10.30. 시장공관 조성계획 추진/철회.
2014.8.22. 개보수공사 준공.
2014.12. 역사가옥박물관 조성 및 운영예산 편성.
2015.4.1. 인수인계(시 한옥조성과 > 서울역사박물관).
2015.5. ~ 2015.10. 역사가옥박물관 조성공사.12)
2015.11. 역사가옥박물관 개관.
3.기존 개보수공사와 가옥의 변화
이 절에서의 기존 개보수공사(이하 ‘기존 공사’)는 서 울시의 매입 이후 제2북촌문화센터로 조성하기 위한 설 계와 시공 단계를 지칭한다. 이 단계는 2010.3월부터 2012.2월까지 진행되다가 서울시장 공관으로의 조성계획 이 추진되면서 공사를 중지하고 대기하게 된다. 그러나 드센 반대의 여론과 시장공관으로의 설계내용이 문화재 현상변경심의에서 연속 불허되면서 2013.10월 조성계획 이 철회됨에 따라 중지중이던 공사가 재개되고 2014.8월 준공하는 과정을 겪었다. 이 공사는 내부에서 현대식 생 활이 가능하도록 추가적 단열과 냉난방 처리를 했음은 물론, 외부의 환경도 방문객을 맞이하기 위한 단장을 하 며 고급스런 현대식 한옥처럼 꾸몄는데, 이 과정에서 기 존 상태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특히 근대요소에 변화가 생긴 것은 근대식조적조의 사 랑중문과 담장의 제거, 사랑채 내의 사랑방 사방의 창호 포함 벽체 제거, 사랑방과 연접한 집사방의 서측 복도로 의 2짝문 제거 후 근대식 목문을 남측에 밀착시켜 설치 및 남측 사랑방 쪽으로 집사방의 중간부분에 4짝미서기 문으로 벽체 구성, 사랑방의 평천장을 우물천장으로 변 경, 사랑대청 천장의 격자천장 제거, 안대청 천장의 우물 천장 제거, 사랑채 굴뚝의 다른 모양, 낮은 높이, 다른 재료로의 복원, 사랑채 뒤쪽의 근대식 조적조 일각문 및 안행채와 중문간채 사이 근대식 조적조 일각문의 다른 재료로의 복원, 사랑마당 전면부 식재 제거 및 사랑중문 에서 접근하는 징검돌 선형변경, 사랑채 뒤쪽 일각문에 서 별당으로 가는 징검돌 제거, 안마당 잔디와 식재 제 거, 별당 및 별채 하부의 견치석 석축과 시멘트블록담장 을 화강석장대석 석축 및 한식 와편담장으로 교체, 대지 경계선의 시멘트블록 및 일부 붉은 벽돌 담장을 한식담 장(지대석+사고석+전벽돌+기와얹기)로 교체, 골목변의 동측에 있던 화강석혹두기마감의 기둥에 달려있던 검은 색의 큰 철문과 서측에 있던 기존 대문 및 한옥관리동을 철거하고 서측에 낮은 목재의 차량대문 및 동측에 새로 운 한옥관리동 신축 등을 들 수 있다.
향후 원형회복 작업이 진행되더라도 이 단계에서의 변 화사항이 모두 회복되기는 어려울 것이므로, 변화시점을 판단할 기준과 흐름 파악을 위해 공사전반의 내용을 <부록1>로 첨부하였다.
4.부분 원형회복
4-1.새로 확인된 사항과 건축요소별 분석
(1)한상룡의 출생과 사망일자
출생: 1880.11.14.(음력10.16.) 경성부 수표정 49번지.13) (주소는 1940년 한상룡의 구술 당시 기준임).
사망: 1947.10.29.(음력09.16.) 돈암동 자택, 오전8시.14) 그간 한상룡의 사망일자 는 여러 사전에서도 정확 히 표현되지 않고 않았으 나, 사망소식을 보도한 신 문기사를 발견함에 따라 정확한 사망일자가 확인되 었다.그림 .1
(2)화양절충식 건물의 존재
사랑채의 근대성 수용과 부분요소의 증명 및 일본식 화양절충식 주택을 추가로 지어 접객용도에 활용한 사실 을 알 수 있는 사진이 발견되었다.
건립 후 만 7년이 된 사랑채는 처음부터 있었던 처마 홈통과 일본식 창살 및 유리창에 바른 창호지, 그리고 고막이의 붉은 벽돌은 여전하고, 목재에 칠한 검은 도장 은 일부 희끗해진 것을 볼 수 있다.
열린 유리창 사이로 보이는 사랑대청에는 입식가구의 일부가 실루엣으로 보이고 밖으로 내온 의자의 종류도 5 가지로 확인된다. 그리고 사랑방에서 사랑대청 쪽으로 들어 올린 분합문들이 들쇠에 걸려있는 것도 보인다.
오른쪽엔 사랑채 뒤편에 일본식 화양절충식 주택이 지 어져있고 앞을 정원으로 가꿨음이 선명히 보인다. 입면 구성과 대지에서의 확인을 통해볼 때 이 집은 한옥기준 으로 정면3칸, 측면1.5칸 정도의 작은 규모였고 2층은 베 란다가 있는 공간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이 있는 형태로 보이는데, 그 용도는 전망을 즐기며 차를 대접하는 보조 적 또는 개별적 접객공간으로 추정된다.
그림 2. 1920.6.25. 사이토 하루코(齋藤春子) 총독부인의 방문 기념사진.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총독부인이고 가운데가 한상룡의 부인 이용경, 그 오른쪽이 守屋榮夫(조선총독부 총 독관방 비서과 비서관)의 부인으로 보이며, 그 외 이완용, 이 재극, 한창수 등의 부인들. 뒷줄은 몸종들로 보임. (출처: 국사 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이 일본식 주택과 조경은 이미 3년 전에 방문했던 하 세가와 총독의 기념사진에서도 똑같이 존재했음을 확인 할 수 있는데, 당시의 사진엔 건물의 일부만 나와 그 존 재만이 확인되고 어떤 양식인지는 판별되지 않았었는데 이 사진으로 파악이 가능해졌다. 그 이전 초대총독의 기 념사진에서는 화각이 사랑채로만 향하여 이 주택의 존재 유무는 확인할 수 없다. 따라서 일본식 화양절충식 주택 의 존재는 늦어도 가옥건립 후 4년 정도의 시점부터 확 인할 수 있고, 한상룡은 이사 가는 1928년까지 이 구성 을 유지하며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근대기 상류층의 주거소유유형이었던 한옥에 살면서 양 옥이나 화양절충식 주택을 상징처럼 가졌던 그 흐름의 단면도 엿볼 수 있다.그림 .3
일본식 주택은 1930.6월 최린의 수선시기 아니면 1935.5월 최선익의 솟을대문간 건립시기 중 한 때에 철 거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최린의 임차와 수선행위를 보 고한 종로경찰서장의 보고서에 ‘서양풍 2층 건물’이 언급 된 것을 보면 이때까지 그 존재가 지속되고 있었고, 최 린이 임차인의 입장에서 사용을 위해 수선하는 정도였기 때문에 한성은행의 재산인 건물까지는 없애지 못했을 것 이므로 일본식 화양절충식 주택은 최선익에 의해 철거되 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3)취성각, 취성원, 삼파문
가옥 준공 후 한상룡의 큰 매형인 한문학자 윤희구尹 喜求(1867~1929.3.16.(사망일자는 한상룡의 구술에 의함)) 가 사랑채에 관한 기록을 남겼는데 여기에 사랑채의 당 호가 있었고, 또한 1920년 당시에 사랑채와 정원을 합한 호칭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경학원 부제 학이던 윤희구가 이 사랑채에 관한 기록인 「취성각 기聚星閣記」를 남겼는데, 그에 따 르면 마쓰나가 다 케요시(松永武吉) 평안남도 장관이 이 집을 들러 보 고 칭찬하며 이름 을 ‘취성聚星’이라 지어주었고, 데라 우치 총독이 취성각으로 추정되는 세 글자를 현판에 써 주었다고 한다. 한편 1920.1.18.일자 매일신보에 따르면 한상룡이 자신의 저택인 ‘취성원聚星園’에 유력한 금융 인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열었다고 하는데 , 이로 미루 어 보면 사랑채의 당호는 취성각聚星閣이었고, 가옥과 정원 전체를 합하여 취성원聚星園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15)
한상룡의 성향으로는 총독이 당호를 현판에 써 주었다면 당연히 자랑스레 걸었을 텐데 아직 그 증거는 없다.
또 1914.11.6.일에 동양척식주식회사 의 총재 초대연에 참석한 자리에서 데 라우치 총독이 아마쿠사 신라이(天草 神來) 화백에게 시켜 이 집의 가문家 紋으로 삼파三巴를 그리게 하고, ‘삼파 는 세 별을 의미한다‘는 설명을 직접 적어 하사했다는 한상룡의 구술이 있 다.16)그림 .4
이 도안을 받은 것은 가옥 건립 후 1년이 지난 시점이었지만, 현재의 흔적 과 같이 한상룡은 곧바로 사랑채의 합 각과 안마당의 사랑채 벽에 가문의 상 징문양으로 새겨 넣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상룡이 받은 것은 이미 일본에서 사용되어오 던 카몬(家紋)의 한 종류였고 특별히 한상룡 집안을 나 타내기 위해 창작한 도안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 삼파문 은 가옥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우리 고유의 삼태극三太 極으로 변해버렸다.
한국은 삼색(靑, 赤, 黃)의 색채를 사용한 삼태극 문양으 로 표현되어지나, 중국의 삼태극과 일본의 삼파문은 형 태로는 유사하나 색채가 없이 음양(黑白)으로만 표현되 어진다.17)
선형의 변형으로 성격이 바뀐 것은 물론, 안마당쪽의 것은 아예 삼태극의 색상이 입혀져 있다. 이 색깔은 처 음부터 있었던 건지 아니면 그 후에 입힌 건지는 현재로 선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현재 삼태극으로 존재하는 도 안의 처음 의도는 삼파문三巴紋이었음이 드러났다.그림 .5,6,7,8
(4)상량문
본 가옥에서 발견된 상량문은 사랑채, 안채 및 솟을대 문간의 3곳에 있다. 사랑채와 안채 두 곳은 기존 연구18) 에서 소개되었으나, 사랑채의 정확한 날짜가 규명되지 못했었는데 이번의 연구에서 안채의 상량일과 일치함을 발견하였다. 또한 솟을대문간의 상량문은 위에 덧칠된 검은 도장에 의해 식별이 어려웠다가 기존 공사 시 도장 이 제거됨에 따라 이번에 확인이 가능하였다.
사랑채의 상량문은 사랑채의 중심위치인 사랑방 상부 의 종도리 옆면에, 별도의 각목에 묵서로 쓰여 부착된 무나후다(棟札)라고 부르는 일본식 상량문이다. 크기는 약 가로6㎝, 세로4.5㎝, 길이1.3m 가량이며 길이방향으로 절반 정도를 반으로 갈라 그 사이에 둥근 검은색 종이를 윗부분에 끼우고, 그 아래와 위를 새끼로 묶었고, 허리 약간 아래와 끝부분에는 각 세줄 씩의 먹줄을 나무둘레 를 따라 그은 모양이다. 상량문은 “大正二年四月十五 日”(대정2년 4월15일)로 간략하게 기록되어있다. 일본은 1868 메이지유신 이후로 양력을 사용해왔으므로 이 일본 식 상량날짜는 양력 1913.4.15.일에 해당하며, 이를 음력 으로 환산하면 1913.3.9.일이 된다. 그림 .9, 10
안채의 상량문은 안대청 종도리장여 옆면에 전통식으 로 표현되어있고 “大正二年癸丑三月初九日未時上樑丑 坐未向”(대정2년계축3월초9일미시상량 축좌미향)으로 쓰 여 있다. 사랑채의 비중에 밀렸는지 상량문의 기본문구 를 갖추지 않고 약식으로 처리되어있다. 이 날짜는 사랑 채와 다른 1913.3.9.일로 기록되어있으나, 한옥의 상량일 은 음력으로 표기되어 왔던 것을 감안하여 양력으로 환 산하면 사랑채와 같은 1913.4.15.일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랑채와 안채는 같은 날 같은 시각인 미시 (오후1~3시)에, 일본식과 전통식의 각기 다른 상량문을 올리고, 동시에 상량식을 치렀음을 알 수 있다.그림 .11
솟을대문간의 상량문은 종도리장여 옆면에 “乙亥四月 十二日卯時立柱上樑”(을해4월12일묘시입주상량)이라고 표기되어있다. 을해년은 1935년을 가리키며 음력 4.12.일 은 양력5.14.일로 환산된다. 즉, 1935.5.14.일에 이 솟을대 문간이 상량된 것인데, 이는 최선익이 향후 93-3번지를 분할매각하기 위해 1935.5.11.일에 95번지(현 도로변 출 입마당 영역)를 매입 등록한 바로 3일 뒤의 날짜이며, 이 때 이미 기초를 놓고 치목된 부재를 조립한 위에 상량문 을 걸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를 통해 땅 매입을 확정하 는 동안 이미 솟을대문간을 지을 사전공사를 하고 있었 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존에 ‘솟을대문의 대 들보에 기록된 1874년 4월’이라는 건립연대에 대한 오류 는, 세 곳의 상량문이 확인됨에 따라 이곳 상량일이 가 옥 전체가 아닌 솟을대문간에 국한된 것이었고 그것도 가옥의 연령을 한 갑자 더 본 실수가 있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5)사랑방 뒷벽의 3단 높이 하인방
사랑채의 일본식 상량문을 통해서도 건립자가 처음부 터 사랑채를 일본식 접객공간으로 구상했음을 알 수 있 고, 본인이 구술했던 “신축건물은 조선 주택으로는 보기 드물게 일부가 2층으로 되어있고, 일본식 방(日本間)도 마련하여 낙낙하게 지은 주택입니다.”19)의 그 ‘일본식 방’ 이 넓게는 사랑채 및 접객영역 전체를 지칭했던 것이라 고 분석된다.
그 중 사랑방에 남은 부재를 통해서도 일본식 공간 조 성을 추론할 단서가 있다. 사랑대청에서 들여다볼 때 주 인이 등을 지는 벽의 하부에 한옥부재인 하인방이 방바 닥 위로 2단 높이나 솟아있어 어떤 다른 용도로의 이유 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데, 한옥 가구법에서 이 경우 처럼 그 뒤편이 같은 레벨의 바닥이면서 실내공간일 때 설치할 구조적인 이유가 없음에도 일부러 하인방을 3단 높이까지 겹쳐 시공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그림 .12
만약 한상룡이 사랑방을 일본식 방으로 꾸몄다면 일본 식 응접공간을 대표하는 자시키를 응용해 바닥에는 다다 미를 깔고 사랑방의 정면격인 벽에는 바닥을 한 단 높여 야 하는 도꼬노마와 찌가이다나를 설치했을 것이다. 그 럴 경우 하인방의 제1단은 여느 부재처럼 바닥 밑의 구 조재로, 제2단은 도꼬노마를 설치하는 단의 높이로, 남은 제3단 한 단만이 노출되어 구조적 테두리 또는 마감을 위한 부재로 활용될 수 있어, 그 용도에 적합한 구조를 갖춘 흔적이 3단의 하인방일 때에는 그 구조적 존재의 당위성이 성립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사랑채는 당시 의 최신 흐름인 화양和洋의 절충을 전격적으로 수용하 여, 장마루를 깐 사랑대청에는 테이블과 의자로 구성된 서양식의 입식접객시설(그림2 참조)을 갖추고, 사랑방은 일본식 자시키로 꾸몄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이 실내시설은 한상룡의 손을 떠나 한성은행 소유시절, 천 도교 도령 최린이 가옥이전을 목적으로 임차하여 수선20) 공사를 했던 1930.6월에 제거되었다고 추정된다.그림 .13
(6)머름을 넘는 출입과 사라진 방
사랑손님채는 긴 복도에 방 두 개가 면해 있는데, 가 운데 반침 및 아궁이가 있는 좁은 칸을 사이에 두고 있 다. 이 두 방으로의 출입구는 복도 쪽 외에는 없는데, 모 두 출입문 하부에 머름을 두고 있다. 전통한옥에서 머름 이 있는 곳은 창이 되며 넘나들지 않았고, 출입문은 따 로 두었는데, 이곳에는 머름을 두고 넘나들게 한 구조를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첫째, 머름의 상부가 사랑채의 바닥레벨과 같음을 볼 때, 배치상의 가옥별 위계상 사랑채보다 사랑 손님채의 지붕이 낮아야 되고, 낮아진 지붕에서 천장높 이를 확보하기 위해 바닥을 낮추면서 그 단차이가 머름 으로 나타난 것으로 분석된다. 이 경우 낮아진 바닥은 자연스레 사랑채와 공간적 위계를 가지게 되고, 머름은 넓은 사랑마당 지면에 너무 가까이 있는 느낌이 들지 않 게 포근히 감싸는 역할을 한다.
둘째, 사랑손님채는 한상룡이 수용한 화양절충식 저택 에서의 접객영역을 구성하는 객실채에 해당하는 곳인데 이 방에는 다다미가 깔렸었다고 추정된다. 왜냐하면 다 다미를 깔기 위해선 출입문 하부에 일정높이의 턱이 필 요하고 머름이 그 역할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식 정원을 꾸미고 그곳을 바 라보는 곳에 복도에 면한 방을 열 지어 배치하고 다다미 를 깐 구성과 접객공간 및 이들을 연결한 선적 복도의 수법21)은, 일본인이 지은 근대무가저택 양식으로 유명한 화양절충식의 군산 히로쓰 가옥(1925)과 사실상 같다.
따라서 한상룡의 사랑채영역은 사랑방과 2층 다다미방 은 물론 연결된 사랑손님채에도 다다미를 깔았음을 알 수 있고, 일본풍의 격자천장과 바닥의 장마루, 일본식 창 살의 근대식유리창 등의 일본식 주택요소로 꾸며, 기본 건축양식은 한옥이되 그 속의 전체 공간은 일본식 접객 공간으로 구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복도의 남쪽 끝 공간은 1976년 「도성내민속경관지역 조사연구」당시 ‘마루‘로 표기되어있다. 이는 다른 대청 들이 사랑마루, 안마루 등으로 표기된 것을 볼 때 ’대청 ‘으로 해석이 된다. 문화재로 지정 후 이 공간은 간이부 엌과 실내화장실로 개조되어 사용되다가 기존 공사에서 1976년 당시로 회복되었다.(그림14)
그런데 이 공간 내에 조사연구 도면에서 누락되었던 기둥들이 나타났다. 개조하여 사용 당시에는 마감재에 싸여있어 보이지 않았던 기둥들이다. 이 기둥들에는 인 방재가 결구되었던 홈이 남아있다. 조사결과 이 흔적들 은 이 공간이 원래는 복도로 둘러싸인 방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복도에 면해 따라오던 머름은 연속되고 있었고, 방향을 턴 남측에선 어미동자의 흔적이 없고 상 인방의 흔적만 있는 것으로 볼 때 이 방의 출입문은 머 름을 넘지 않는 정상적인 형태였다. 이 출입문은 사랑마 당과 90도로 틀어져 있어 직접 노출되지 않기 때문이다.그림15
즉, 기존 조사연구에서의 마루(대청)는 구조재를 남기 고 방의 벽을 터서 복도와 합해진 하나의 공간이었던 것 이다. 따라서 사랑손님채의 원형은 방이 두 개가 아닌 세 개였고, 복도는 끊겼던 것이 아니라 남쪽 끝까지 내 려와서 서쪽으로 다시 꺾인 형태였다.
(7)다다미의 흔적
한상룡이 ‘2층의 다다미방과 일본식 방’을 장식했던 흔 적을 엿볼 수 있는 다다미가 2010.3. 제2북촌문화센터 개 보수설계용역이 시작되던 때의 현장조사에서 발견되었다.
주변에 ‘서기1964년’이 인쇄된 포장지 종류가 남아있는 것으로 볼 때 이곳에 방치된 지는 꽤 오랜 세월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다다미가 한상룡이 사용하던 것을 다음 거주자가 별채로 옮겨 방치시킨 것인지 아니면 마지막 거주자도 초기 일정동안 사용하다가 별채로 옮긴 것인지는 모르지 만, 이 흔적은 실제 이집에서 다다미가 사용되었던 것을 증명하는 것이며, 기존 공사에서 제거되었다.그림 .16, 17, 18
(8)우물반자와 격자천장
사랑채와 안채는 모두 주위 퇴칸보다 가운데 대청의 천장이 높은 층단반자의 형태를 하고 있다.그림 .19, 20
안채는 반자대에 소란을 대서 그 위에 반자판을 얹은 전형적인 한식 우물반자이고, 사랑채는 반자대 자체를 경사지게 깎고 소란대 역할의 볼록한 두 줄 모양의 쇠시 리를 한 위에 반자판을 얹은 격자천장이다. 사랑채가 굳 이 안채와 다른 천장을 적용한 것은, 자시키의 격자천장 과 같이 사랑채에 일본풍을 많이 적용하고자 했던 조영 의도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9)검은색 도장과 주련
<그림21, 22>와 같이 모든 가옥에는 건립 당시부터 외부의 목재 면에 검은색의 도장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그 위의 주련은 일본풍을 추구한 사랑채에는 없고, 한식 의 안채에만 적용한 것을 알 수 있다.
한상룡이 검은색을 선택한 것은 일본의 유력가들의 저 택을 방문해 본 경험을 살려 그들이 즐겨 쓰는 장엄한 분위기를 본인의 가옥에 도입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 1976년 문화재지정조사 당시에도 유지되고 있었고, 이후에도 지속되다가, 2008.11.개보수후의 사진에서 사랑 채와 안채의 도장이 제거된 상태를 볼 수 있고(별당도 이때 제거된 것으로 추정), 2010.3.월까지 검은색 도장이 남아있던 건물은 입구의 관리동, 솟을대문간채, 중문간채 및 별채(한상룡 처가채)였는데, 중문간채는 곧바로 전면 개보수에 들어갔고 외부도장은 이때 제거되었다.
그리고 남아있던 건물들의 검은색 도장은 기존 개보수 공사(2011.6.~2014.8.)에서 모두 제거되었다.그림 23, 24
(10)솟을대문채의 창호
솟을대문채는 정면 7칸, 측면 1칸의 규모로 맞배지붕 으로서 가운데 어칸이 솟아있고 어칸의 서쪽 한칸은 내 외문 기능의 빈 공간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림 25, 26
2010.3.월 당시 기준으로 서쪽의 남은 두 칸은 하나의 공간인 방으로 사용되고 있었고 칸마다 디딤돌이 있었다, 오른편 동쪽 3칸은 대문쪽의 두 칸이 방이고 제일 우측 칸은 광이었다. 디딤돌은 대문쪽 칸에만 있었고 두 칸의 방은 가운데 벽이 있고 두짝미서기문으로 구획되어있었 다. 북측 출입부분의 모든 칸에는 목재 널문이 덧문으로 설치되어있고 내부의 살문은 <그림27, 28>과 같은 일본 식 창살을 가지고 있었다. 방 구획용 미서기문의 흔적은 없었다. 그리고 광에는 덧문만 있을 뿐 내부용 살문은 없었다. 기존 공사 후에는 모든 칸에 디딤돌이 놓였고, 모든 칸에 내부용 살문이 재설치 되었는데 창호의 살은 본채의 것과 같은 아자살문으로 설치되어있다. 그리고 동측 3칸은 대문쪽 1칸, 그 우측 2칸을 하나의 방으로 구성하여 구획이 바뀌었고, 미서기문이 있던 이 위치의 벽은 막힌 벽으로 대체되어있다.
이 솟을대문채는 한인언론사 사주이면서 신간회의 발 기인이었던 최선익이 새로운 대문으로 지은 것인데 일본 식 문살을 적용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따라서 분 할매각할 땅에 이미 있던 기존의 대문채를 이축移築하여 활용하는 과정에서 그대로 적용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11)대청 출입문의 겹문구조
문화재관리시기로 추정되는 때에 사랑방과 안방 및 건 넌방의 대청문이 원래의 형태와는 다르게 임시로 설치되 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랑방의 것은 기존 공사로 제거된 상태이고 안방과 건넌방의 것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세 곳의 문들은 모두 대청에 면한 출입문이고 모두 홑 문 구조인데, 사랑방 문은 띠살문이었고 안방과 건넌방 문은 아자살亞字箭로 된 덧문의 울거미를 하고 있다. 그 리고 세 방의 창들은 모두 띠살의 덧창과 아자살의 영창 으로 구성되어있다. 여기에서 세 문의 모순이 나타나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외부 쪽의 창들이 겹창이 면 방의 창호가 겹문구조라는 뜻인데, 대청 쪽만 홑문이 라는 것은 창호구성법식과 맞지 않다.
둘째, 한옥에서 대청에 면한 문은 겹문구조일 경우 대 청 쪽은 불발기문, 방 쪽은 살문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세 문 모두 대청 쪽은 덧문구조에 살이 적용된 형태고, 안방과 건넌방 문은 내부창호에 적용된 아자살이 끼워져 있다. 이것은 장소별 문짝구성법에도 맞지 않는다.
셋째, <그림2>에서 이미 그 존재가 확인되었듯이, 세 곳의 덧문은 분합들문의 기능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 모 두 들 수가 없도록 되어있고 또 문의 상부나 인방에 삼 배목이 박혔던 흔적이 없다.
따라서 현재의 세 곳의 문은 겹문구조 방식이나 장소 별 창호의 종류와 구성법 그리고 기능에 어긋나므로 원 형이 아님이 증명된다. 원형의 문들은 위 세 가지 조건 이 충족되어야 하며 조건별 분석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서울시가 숭례문화재사건 이후 준비한 「재난대 비문화재도면」22)에 겹문구조의 표기가 존재한다.
그리고 문화재지정당시의 사진에서도 겹문구조가 확인 된다. <그림29>의 건넌방 문틀의 구조를 보면 대청 쪽 덧문을 떼놓은 문틀의 턱과 방 쪽의 아자살문의 존재가 겹문구조였음을 확인해준다. <그림31>의 별당 누마루 출입문엔 겹문구조가 아직까지 존재하며, 사랑방 출입문 의 문형태를 따랐을 툇마루의 문(그림32)과 아랫방의 불 발기(그림33)도 겹문구조의 덧문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림30
둘째, 대청 쪽의 불발기는 <그림31, 32, 33>의 현재 남아있는 불발기와 흔적이 있으므로 격자살을 가진 사각 불발기였음을 알 수 있고, 방 쪽의 살문은 <그림29, 36 확대의 대청문>의 예에서도 보이듯이 내부 창들의 아자 살과 동일한 살을 가진 아자살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그림34, 35
그런데 <그림30>에서 확인되는 사랑대청의 불발기는 문 길이의 1/3만큼의 가운데가 약간 돌출된 부분이 있어 사각불발기의 돌출부분임을 알 수 있는데, 창호지로 감 싼 부분 아래로 궁창널(굽널)의 존재가 확인된다. 이것은 높은 문높이에 대한 구조적 보완 및 접객용 입식생활에 대한 출입문 하부의 보호장치로 분석된다. 그리고 이 형 식은 같은 문높이의 안대청 양측의 두 문에도 같이 적용 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그림36, 37, 38
셋째, <그림2>의 건립자가 생활할 당시 모습에서 확 인되듯이 대청에 면한 불발기는 분합들문이었음이 확인 되었다.
(12)아궁이와 굴뚝
본채영역에는 최소 6개 이상의 굴뚝이 있었고, 별당에 는 1개의 굴뚝이 있다.그림42
본채에는 사랑채굴뚝(원형회복), 사랑손님채굴뚝1, 2가 현존하며, 온돌의 구조상 안채굴뚝, 아랫방굴뚝, 안행랑굴 뚝의 존재가 추정된다.(그림43, 44, 45)
사랑채굴뚝은 사랑방과 건넌방의 구들과 연결되며, 사 랑방아궁이는 안마당쪽 화초벽 하부 안쪽에 있고, 건넌 방아궁이는 건넌방누마루 하부 안쪽에 있다.
사랑손님채굴뚝1은 사랑채 쪽의 방 안마당 쪽 모서리 에 밖으로 돌출된 형태이고 기와지붕 위로 배연구가 삐 져나와있다. 사랑손님채굴뚝2는 반대쪽 남측 방에서 중 문간채 앞마당을 건넌 대지경계선상에서 위로 솟아있다. 두 방의 아궁이는 안마당 쪽에서 출입하는 두 방 가운데 지점의 작은 아궁이방 양측에 각각 존재한다.
안채굴뚝은 안방과 웃방을 연결하는 선상의 북쪽 뒷마 당에 있었고, 위치는 다른 굴뚝의 재료와 같은 붉은 벽 돌의 잔해가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이 굴뚝에는 안방 과 웃방, 그리고 부엌방의 구들이 연결되는데, 면적이 넓 어 아궁이가 두 개다. 안방아궁이는 부엌의 부뚜막 위치 이고, 부엌방아궁이는 마루방인 찬방의 하부공간에 따로 있다.
안채 아랫방굴뚝은 온돌구조를 고려할 때 아궁이가 있 었던 부엌에서 가장 멀고 외부에 면한 서쪽 기단부분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안행랑채굴뚝은 방의 북서쪽 모서리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아궁이가 조적조 일각문이 있는 남쪽의 벽장 하부에 있었기 때문 이다. 이 부분은 오픈된 형태였는데 기존 공사에서 벽을 설치하여 막아버렸다. 별당의 굴뚝은 별당의 서북쪽, 담 장 앞에 위치하며, 아궁이는 누마루 하부 안쪽에 있다.
현존하는 굴뚝은 모두 붉은 벽돌로 쌓았고 꼭대기는 위계에 따라 장식성을 주었음을 볼 수 있다. 그림46
(13)사랑중문과 담장
붉은 벽돌로 쌓은 조적조의 이 문과 담장은 한상룡이 방문객들에게 본인의 근대성을 표방한 과시적 장치이기 도 하다. 세부적인 디테일을 확인한 결과 사용된 벽돌은 230x110x60mm 크기이다. 일각문 형태이며, 전체크기는 폭2.63m(돌출부 포함), 높이2.78m이다. 각 기둥은 폭 1.5B, 두께1.0B이고, 출입구의 크기는 프레임을 포함하여 폭1.62m, 높이2.13m이다. 지붕부분은 입면 및 단면상으 로 위로 갈수록 넓어지며, 상부는 경사지붕처럼 처리하 였다.
출입문은 목재판문이며 정면 에 W82xT15의 세로 목재판을 가로로 배열하고, 뒤쪽에 W105xT45의 띠장을 테두리와 세로4등분 지점에 댔다. 목재면 에는 가옥과 같은 검은 색의 도장을 했고, 광두정으로 띠장 을 고정하고 간단한 근대식 철 재손잡이를 달았다. 출입문 하 부에는 W200xT80의 화강석으 로 턱을 설치했는데 오른쪽에 80x80의 배수홈을 주었다.
담장도 같은 벽돌로 쌓았다. 담장의 면은 0.5B 치장쌓 기로서 얇고, 아래와 위 그리고 좌우에 두껍게 1.0B로 기둥 및 테두리의 기능을 주었다. 문이 있는 부분은 중 문의 기둥이 담장의 기둥역할을 겸하고, 우측면은 길이 가 길어 가운데 부분에 기둥 하나가 추가되어있다.그림53, 54
(14)안채-안행랑채 사이벽의 도리연결
안채와 안행랑채 사이에는 안행랑채의 도리 위치에서 안채의 기둥으로 연결한 도리 두 개가 있다. 이 부재들
(17)도배 및 조명
현재 확인이 가능한 근거로는 문화재지정당시의 사진 인데, <그림29>의 건넌방 내부를 통해서 도배는 현재처 럼 실내의 목재를 노출한 것이 아닌 전면도배방식을 적 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23, 29>을 통해서는 실 내의 공적공간의 조명등은 불투명 볼 전구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4-2.부분원형회복과 향후의 과제
기존 공사를 통해 가옥은 생활이 가능하도록 새 단장 되었고 이 공사로 보수가 필요했던 모든 부분이 정비되 었다. 하지만 이 과정을 거치면서 본 가옥만이 간직했던 근대한옥으로서의 특성이 훼손되거나 변형된 부분들이 다수 발생하였고 중요한 요소는 크게 다음과 같다.그림55, 56
첫째, 사랑중문과 담장이 제거되었다. 이 요소는 한옥 을 근간으로 한 이 가옥에서, 사대부가의 배치형식에 따 라 행랑영역에서 사랑채영역으로의 구획과, 남성영역으로 의 출입을 의미하던 시설이며, 근대식 조적조로 만들어 져 시대적 표현기법을 보여주는 의미를 가졌다. 이 요소 의 제거는 가옥의 배치형식 자체가 바뀜을 의미함과 동 시에 근대라는 시대성을 잃어버림을 의미한다.그림57, 58
둘째, 사랑방이 제거되고 천장이 바뀌었다. 사랑방을 구성하던 벽체가 제거되어 기둥만 남아있고, 연접해 있 던 집사방도 반으로 나뉘어 탕비실로 변했고, 사랑방의 천장은 평천장에서 우물반자로 대체되었다. 바깥주인의 주공간이었던 사랑방의 존재 없이는 사랑채의 구성 자체 가 성립되지 못한다.그림59, 60
셋째, 사랑대청과 안대청의 천장이 제거되었다. 사랑대 청에는 일본풍을 의식한 격자천장, 안대청에는 한식의 우물반자로 공간의 성격에 따라 각각 다른 천장이 적용 되었었고, 또 삐져나온 추녀 뒤초리나 2층 구조를 위해 종보에 올라탄 기둥을 가리기 위해서라도 천장은 필수로 설치된 요소였다. 즉, 천장 속의 구조부재들의 구성은 천 장의 설치를 전제로 설치된 것이었다.
넷째, 사랑채 굴뚝과 가옥 내 일각문의 복원이 다르다. 색이 다른 재료와 다른 줄눈으로 인해 원래의 느낌이 바 뀌었고, 굴뚝은 모양도 다르고 높이는 처마 아래로 낮춰 졌다.
다섯째, 사랑마당 및 안마당의 조경이 다수 제거되었 고 뒤뜰의 석축과 담장이 바뀌었다. 석축과 담장은 자연 스럽고 누추하던 느낌에서 인위적이고 고급스럽게 변했 다. 조경요소는 별도의 연구를 통한 개선방안이 있어야 한다.
위의 요소들은 본 가옥의 성격을 규정지었던 근대식 장치들이어서 사라지거나 변형되어서는 안 되는 부분들 이다. 지금 이 바뀐 상태가 바로잡히지 않고 그대로 유 지된다면, 이 가옥이 가졌던 원래의 의미가 사라질 뿐 아니라 시대성이 왜곡된 역사로 이어질 것은 자명하다.그림61, 62
따라서 많은 변화 중에서도 근대한옥으로서의 특징을 보여줬던 이 건축적 요소들은 회복되어야 하며, 이를 통 해 가옥의 특성 회복은 물론 올바른 사실을 후세에게 전 하는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번 부분원형회복 공사는 가옥의 특성을 회복할 수 있는 가장 시급한 최소범위를 우선으로 시행하였다. 해 당요소는 사랑중문과 담장의 회복, 사랑방 회복, 사랑채 굴뚝의 회복이다. 그리고 실내도배는 전면도배를 실시하 고 조명등은 불투명 볼 전구로 대체하였다. 역시 최소범 위에 속하는 사랑대청과 안대청의 천장 복원과 안방과 아랫방의 대청문의 복원 및 집사방의 복원은 내년에 연 이어 회복시킬 예정이다.그림63
위 항목 외에도 아직 특성회복을 위한 요소가 남아있 지만 예산의 문제가 따르기 때문에 순차적 회복을 통해 본 모습을 되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5.역사가옥박물관 조성
역사가옥은 역사적 인물과 그들이 거주했던 주거와 활 동범위를 대상으로 하며, 인물의 삶과 의식, 당대의 생활 및 주거문화를 접할 수 있고, 후대에 전해지는 문화유산 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왜곡 없는 사실성 과 당대라는 시대성, 그리고 모두가 공유하는 공공성을 바탕으로 한다.
본 가옥은 한상룡-한성은행 및 천도교-최선익-백인제 및 가족으로 이어지는 인물들의 흐름과 역사, 그리고 근 대기 한옥이 변화하던 시기의 선구적 가옥이라는 점에서 역사가옥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세 가지의 주요방향으로 역사가옥박 물관을 조성하였다.
첫째, 가옥의 근대성에 주목하고, 근대기 상류층의 특 징 있는 한옥 그 자체를 전시의 대상으로 한다.
둘째, 가옥 건립 당대인 근대기 상류층의 주생활상住 生活相전시를 목표로 하였다. 연출의 공간적 대상은 사 랑방-바깥주인, 안방-안주인, 건넌방-며느리, 아랫방-할 머니, 사랑손님방-아들, 별당-바깥주인으로 배분하였고, 가족구성원별 및 공간별로 가구와 생활소품을 세밀하게 구분하여적용하였다.
셋째, 가옥의 특징과 가옥의 주인들에 대한 정보를 제 공하기 위해 가옥 초입의 대문간채를 이용하여 영상전시 등 최소한의 전시기능을 적용하였다.
이와 같은 근대기 최상류층의 가옥과 주생활상 전시를 주제로 한 역사가옥박물관으로의 활용은, 근대라는 역사 를 오늘에 잇고, 시도지정문화재로서 시민들에게 개방하 고 공유한다는 측면에서 역사가옥의 의미와 활용방향에 부합한다.
6.근대한옥으로서의 특성 재고再考
가회동 백인제 가옥은 건립자 한상룡이 일본 경제의 아버지라 불리는 실업가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교훈인 ‘일생일업一生一業’을 화두로 삼고 관계官界진출을 마 다하고 오직 실업가로 살기 위해26) 34세 때 지은 근대 기 조선 최고위 실업가의 접객기능 중심의 저택이다.
한상룡의 사용행태를 통해 이 가옥을 계획한 의도를 읽을 수 있는데 이는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된다. 먼저 수 많은 이권과 관련된 회합과 연회를 위한 접객영역의 구 성을 중심으로 하고, 그 다음에 본인과 가족이 거주할 주택의 기능을 덧붙이고, 그리고 이 모두를 조선의 주거 문화를 보여주는 주생활住生活전시장으로서의 상징적 볼 거리로 구현하려 한 것이다.
이런 의도는 가옥의 기본 건축형식을 한옥양식으로 택 하게끔 하였고, 5개의 레벨을 가진 대지 전체를, 5개 성 격의 영역으로 구분한 위에, 전통한옥의 기능적 공간적 위계와 진입체계를 갖춘 배치형식을 취하게 하였다. 본 채는 역기역자로 꺽인 안채와 역니은자로 꺾인 부속채로 구성된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튼ㅁ자 배치 유형을 바탕으 로 하고 있는데, 여기에 사랑채의 건립목적에 따라 사랑 채가 안채와 부속채 사이에 끼어들며 전체적인 내부동선 을 연결하는 근대적 배치수법이 생겨났다.
이는 전통적 배치 유형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일본 근 세 무가저택 형식인 쇼인즈쿠리(서원조書院造)에서 유래 하여 당시의 화양절충식和洋折衷式주택에서도 계승되던 접객영역 중심의 배치개념을 접목한 것이다. 대문을 들 어선 초입에 마련했던 손님채가 이 화양절충식의 식당과 객실의 건축화로 해석될 수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 접객중심배치의 의미로 중심영역에 본채27)를 두면 서 다시 그 중심에 접객기능을 갖춘 정전正殿으로서의 사랑채를 배치한 것이었고, 3면으로 이를 둘러싼 사랑마 당은 일본풍의 관상용 정원으로 꾸며 일본 자시키 개념 의 우물천장과 장마루를 깐 사랑대청에서 바라보며 즐길 수 있게 하였다. 더불어 사랑채에 길게 연결되어 정원을 감싼 사랑손님채에서도 복도의 유리창 너머로 정원의 관 상을 공유하게 하였다.
본채의 평면적 기능으로는 사랑채 영역을 포함하여 독 자적인 5개의 영역으로 공간을 구획시켰는데, 각 영역은 모두 별개의 대청이나 누마루 또는 툇마루를 가져 공간 적 독립성을 가진다. 특히 사랑채 영역은 안채 건넌방 위의 2층에 별도로 다다미방을 마련하여 사랑채의 기능 인 접객과 로비에 맞춘 특화된 공간까지 구비하였다. 전 통한옥과는 다르게 이들 모든 영역은 긴 복도로 서로 연 결되고 있고 각 영역의 경계마다에는 여닫이 목문을 두 어 공간적 구획을 분명히 하고 있다.
실내영역을 모두 연결하는 이 복도를 만들기 위해 안 채는 꺾인 아랫방영역까지 툇마루구조를 적용하였고, 안 채에서 사랑채를 지나 사랑손님영역 끝까지 이어지는 복 도는 사랑채의 구조를 이용하지 않고 사랑채의 왼쪽인 동측 벽에 덧붙인 형태로 처리하였다. 그러다보니 사랑 채 처마보다 돌출되어 따로 부섭지붕을 덮어야 했고, 이 부섭지붕은 사랑채 처마 서까래 아래까지 바짝 붙여 처리하여 서까래만 겨우 보였다가, 문화재관리시기에 이 부분마저 덮어버려 어색하게 겹쳐진 채 마무리되어있다. 또한 이 복도를 툇마루구조 삼아 결합된 사랑손님채는 채 자체가 동편으로 밀려 용마루 선형도 사랑채의 내림 마루와 연결되지 못하고 추녀마루와 어색하게 맞닿게 되 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처럼 가옥의 양식인 한옥의 목구조나 지붕의 연결방 식까지 어색하게 되는 점을 감수하면서까지 실내를 연결 하기 위한 복도를 도입한 것은, 한옥으로 건립하면서도 기능은 정형적인 옛 방식을 넘어 근대적 생활방식에 맞 는 기능적 평면을 도입하려했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기능의 평면 구성은 가옥 건립 당시에 일 본에서 근대식 주택으로 이미 성립되었던 화양절충식 주 택과 놀랍도록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주택양 식은 서양식 접객공간이 중심이 되며 일본식 주거공간과 는 복도를 도입하여 연결하면서도 중문을 두어 구획하는 평면이 특징인데, 큰 집의 경우 접객영역의 현관과 생활 영역의 현관을 따로 마련하였고, 접객영역에는 식당과 손님이 머물 객실까지 구비하는 형식이다. 구조는 일본 식 목구조로 뼈대를 짜고 서양식 입식 응접실의 도입과 특히 유명한 목재 비늘판벽과 경사지붕으로 입면을 꾸민 것으로 유명하다. 접객공간으로는 서양식 응접실 또는 일본식 자시키와 가족의 식사와 단란을 위한 공간인 차 노마, 그리고 이들을 연결하는 외부쪽 툇마루격인 엔가 와 또는 내부의 속복도가 주요 구성요소인데,28) 이 요소 들이 본 가옥에서는 응접실 또는 자시키를 한옥의 접객 공간인 사랑채로 극대화시키고, 차노마는 가족의 생활공 간인 안채로, 그리고 엔가와 또는 속복도는 이들을 연결 하는 복도로 치환하였다고 볼 수 있는 평면구성방식의 일치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유사성은 한상룡이 당시 일본의 최신 주택이었던 화양절충식 주택의 특징을 조선의 한옥으로 재해석하여 본인의 가옥 건립에 적용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는 실마 리를 보여준다. 이 관점을 보완하는 증거로는 본 가옥의 준공 얼마 뒤에 실제로 일본식 화양절충식 주택을 사랑 채 오른쪽에 지어 접객용도에 추가로 사용하였다는 사실 이며 이로보아 한상룡이 이 주택의 형식을 선호했던 것 을 알 수 있다. 또한 한옥에다 기존에는 적용하지 않았 던 근대적 기능을 담자니 전통적 구조법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 여기저기 남아 있는 한옥 목구조의 어 색한 흔적도 근대적 평면을 담아내려 했던 도전에 의한 결과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한상룡이 당시 동아시아의 주역이라고 생각한 일본에서까지도 최신이었 던 화양절충식 주택 평면형식의 특징을 자신의 조선식 한옥에 적용하여 조선 최고의 근대식 한옥을 구현하려 했음을 알 수 있고, 특히 접객영역인 사랑채영역에 근대 화된 일본식 요소를 집중하여 처리했음을 볼 수 있다.
안채영역에는 전통적 사대부가에서는 동북부의 산간지 방이나 제주도를 제외하곤 드물었던 칸間의 중첩이 나타 나는데, 이로 인해 방들이 겹쳐 공간이 깊어진 겹집화 현상이 보인다. 이것은 전통한옥의 안방에는 벽장이나 개흘레 정도만 두고 쓰던 것과는 달리, 근대시기의 생활 방식과 늘어난 살림살이를 수용할 추가적 공간 확보의 필요성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또한 田자 모양으 로 방이 중첩되는 것은 일식 주택평면의 특징이라 일식 의 영향이라 볼 수도 있겠으나, 조선에도 특정지역에 이 형식이 있고 또 궁궐의 침전에는 흔한 것이며 궁의 호칭 을 받은 사대부가의 최고 위치를 차지했던 운현궁에도 있기 때문에, 이는 전통적 생활에서부터 바뀌어가는 근 대기의 생활방식을 주택 내에 담기 위한 주택평면의 기 능적 변화 중의 한 현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지 전체를 통해 한상룡은 골목에서 가옥에 출입하는 시작위치에서부터 느끼게 되는 점진적 인상과 공간적 감 흥을 위해 여러 가지 건축적 장치를 부가하였다. 먼저 가옥에 도착하는 초입에 자동차를 주차할 수 있는 광장 과 솟을대문채 및 그 뒤에 숲에 가린 손님채를 두어 넓 고 큰 첫인상을 주고, 본채로 가기위한 계단을 타고 오 르게 하여 경성 시내가 보이는 전망마당에서 시선을 트 이게 해 정서적 충격을 주고, 사랑채와 안채로 가기위한 행랑마당에 해당하는 이곳에 근대식 붉은 벽돌로 구획한 담장과 사랑중문을 설치 해 자신의 근대성과 안목을 뽐 냈다. 최신식 사랑중문을 올라서면 넓고 잘 식재된 정원 에 또 한 번 인상을 받게 하고 그 안쪽에 우뚝 서있는 사랑채의 위용은 진입과정의 클라이맥스가 되게 하였다. 이 사랑채는 테이블과 의자를 둔 입식 응접실로 꾸미고, 근대식 유리와 일본식 창살을 적용하여 근대적 친근감을 느끼게 하였고, 내부의 대청이나 복도에는 격자천장을 달고 장마루를 깔아 일본 서원조에서 유래한 접객공간 자시키의 분위기를 담았다. 사랑채를 넘어 더 높은 레벨 의 후원 속 별당으로 가는 길은 이제까지 와의 공적성격 과는 다르게 한상룡의 개인적인 동선이자 사적인 정양공 간으로 꾸며졌다.
따라서 배치형식과 건축양식은 조선의 한옥을 근간으 로 하고 여기에 선구적인 평면형식과 친근한 근대식 입 면을 적용하여 시대적으로 앞선 자신을 표방하고 과시적 의도를 내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여러 단차이 가 있는 대지 전체를 통해 단계적으로 진입시키면서 방 문객이 최종 목적지인 사랑채에 닿기 까지 점진적으로 여러 인상을 받게 하기 까지는 공적 공간의 성격을 띠게 하였고 더 높은 뒤쪽 후원으로는 본인만의 사적공간으로 구분한 것도 이 집의 단면적 공간 활용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한상룡은 당시의 시대성과 본인의 실업가적 입지에 따라 전체 대지와 가옥건축에 필요조건 을 반영하였고, 그 결과 조선식과 근대화된 일본식 요소 를 병치倂置시킨 선구적 근대한옥을 탄생시키게 되었다. 그 핵심시설은 대사회적 과시와 사업목적의 연회 및 접 객공간을 중심으로 한 사랑채와 이를 둘러싼 정원이었고, 이 사랑채영역은 당초에 한상룡이 목적한 과시적이고도 근대식 접객기능을 극대화시킨 최신식 사교의 장이었다.
현재 우리가 접하고 있는 가옥의 구성으로 변화시킨 것은 한상룡이 한성은행으로 양도한 이후 이 집의 새 주 인이 된 당시 31세의 젊은 문화사업가 최선익이었다. 거 액의 유산을 상속받아 개성의 청년갑부로 이름난 그는 20세 때부터 언론계에 몸담았는데 조선일보를 거쳐 조선 중앙일보를 운영하던 중 경영난과 새 출자자의 등장에 의한 입지 상의 이유로 신문사를 떠나게 된다.29) 이후 최선익은 본 가옥에서 은거생활을 지속하게 되는데 본 가옥을 매입한 시점은 신문사를 떠나는 시점과 맞물려있 다.
최선익은 가옥의 규모나 건축양식이 자신의 생활과 취 향에 맞지 않았는지 크게 3가지의 변화를 주었다. 매입 후 4개월 만에 현재 도로변의 출입마당 부분인 95번지를 추가로 매입하고 불과 3일 후에 현재의 솟을대문채 상량 을 하였다. 그리고 다시 4개월 뒤에는 대지의 오른쪽에 위치했던 기존 출입광장과 대문채 및 손님채가 있던 출 입 및 손님영역을 93번지로 분할시켜 매각하였다. 이것 은 93번지 영역의 용도가 은거목적인 자신에게는 필요 없고 면적까지 넓어 처리할 목적으로 미리 도로로 출입 할 95번지를 준비한 뒤 분할시켰던 흐름으로 파악된다.
또한 한상룡이 사랑채 오른편 정원 위에 추가로 지었 던 화양절충식 주택도 이 시기에 철거한 것으로 보인다. 이 행위는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의 발기인이기도 했고 일제에 협력하지도 않았던 그의 행적30) 및 ‘조선 사람의 생활에는 조선식 건물 양식이 이상적 가옥제도’31)라고 한옥에 대한 생각을 밝혔던 그의 면모를 볼 때 집안에 일본식 주택을 둘 수는 없었던 결과로 볼 수 있다.
이 같은 대지분할과 가옥 정리 작업은 한상룡이 조성 했던 길고 극적이었던 출입체계를 현재와 같이 짧고 직 접적인 출입동선으로 바꿔놓은 것은 물론 직접적 일본식 요소는 배제시킨 결과를 낳았다.
그 이후 백인제 및 그 가족이 소유할 동안에는 부분적 인 변경은 있었으나 최선익 당시의 구성을 현재까지 유 지하였고 그 공으로 가옥의 문화재 명칭이 ‘가회동 백인 제 가옥’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상의 시기별 변 화과정을 통해볼 때 건립 당시에는 근대기 일제하라는 시대성을 반영하고 또 사회적 입지와 필요에 의한 기능 으로 건립하면서 선구적, 실험적, 과시적, 작품적, 일본 요소와의 병치 등으로 묘사되는 특성을 갖고 있었으나, 뒤 이은 변화에 의해 대지와 가옥의 축소 및 단순화가 이루어지면서 그 성격이 일부 약화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변화 역시 소유자의 사회적 입지와 필요성에 의해 이 루어졌지만, 이 경우에는 주거에 대한 보수적 관점이 가 옥 구성의 방향을 바꾼 주요 요인이었기 때문에, 가옥의 성격과 공간은 건립자의 사회적 입지와 주거관에 따라 좌우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가옥의 건립의도와 근대적 구성방식 및 시기별 변화의 과정을 통해 재고한 결과, 비록 건립 당 시보다 축소된 상태이긴 하나 현재 여전히 근대한옥으로 서의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본 가옥은 다음과 같이 그 특징을 재정립할 수 있다.
첫째, 가회동 백인제 가옥은 1913년 근대기 최고위 실 업가 한상룡의 사업목적에 맞춘 접객용도 중심의 저택으 로 지어졌다. 1928년 한성은행 소유 시기에는 미미한 수 리 외에 별다른 변화가 없다가, 1935년 이후 최선익 시 기에는 대지가 분할되고 출입체계가 바뀌는 큰 변화를 겪어 현재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1944년 이후 백인제 및 가족이 가옥을 보존하며 유지해 오다 2009년 서울시 에 편입되었다.
둘째, 중부지방의 튼ㅁ자 배치형식과 전통한옥의 공간 체계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당시의 일본식 화양절충식 주택에서도 계승되던 접객영역 중심의 배치개념을 접목 하여, 사랑채를 대지의 중심에 둔 접객중심의 개념을 배 치형식에 반영하였다. 또한 가옥 건립 직후 사랑채 오른 쪽 뒤편 정원 위에 일본식 화양절충식 목조주택을 추가 로 지어 사랑채영역의 접객용도를 강화하였다.
후에 최선익에 의해 화양절충식 주택 및 동측의 대문 채와 손님채 영역이 사라지고 기존 전망마당에 대문채를 다시 건립하면서 저택 규모의 접객중심 배치형식은 약화 되었으나 사랑채 중심의 배치구성은 유지되고 있다.
셋째, 본채는 한옥을 근간으로 하되 근대화된 일본식 화양절충식 주택의 평면구성 형식을 수용하였다. 접객공 간인 사랑채를 중심에 두고 긴 객실채를 연결하여 일본 식 정원에 면하게 하면서, 그 배후에 가족의 주거공간을 배치한 다음 모든 영역을 복도로 연결한 형식을 취하였 다. 본채 내부는 5개의 독자적인 영역으로 구획하였고 이들 전체는 복도로 연결되며 복도상의 각 구획 경계마 다에는 목문을 설치하여 영역의 경계를 확실히 하였다.
넷째, 대지 내 모든 한옥의 공적공간에 해당하는 대청 과 툇마루를 막아 실내화 시킨 현상이 나타났다.
규모 있는 사대부가의 안대청은 6칸이 보통인데 이 집 은 4칸 규모로 좁다. 이것은 중요한 사랑채를 영역의 중 심에 둔 것과, 부엌으로도 실내동선을 확보하려 안방 옆 에 위치시키려는데, 대지경계선에 막혀 더 이상 밀 수 없었던 결과로서 이 또한 공간의 실내화가 원인이다.
안방의 칸의 중첩에 의한 겹집화 현상도 반침, 벽장, 다락 및 바깥의 부속채를 이용하던 전통적 수장방식을, 내부공간에서 모두 연결하여 해결하려했던 것에서 기인 하는 실내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섯째, 일본식 접객공간을 지향했던 사랑채 영역에 집중되어 일본식 상량문, 가문家紋의 장식, 격자천장, 장 마루, 다다미 등 일본식 요소가 많이 사용되었고, 가옥 전체에 걸쳐 사용된 근대식 재료는 일본식 창살을 사용 한 유리창과 고막이나 부속채들의 측벽 그리고 상징적인 조적조의 사랑중문과 그 담장에 사용된 붉은 벽돌이다.
또한 전 가옥의 목구조체에는 일본식 무가건축에 적용 되었던 검은 톤의 도장을 적용하여 장중한 분위기를 추 구하였다. 현재는 개보수 과정에서 모두 제거하였으나 일부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여섯째, 사랑채는 5량가로서 사랑방 주위 3면에 마루 를 둘렀고, 외진주는 180x180mm 사각기둥이며 높이는 3.1m, 수장재의 폭은 75mm를 사용하였다. 안채도 5량가 이며 전후 퇴를 가진 구조인데 겹집현상 부분은 6량가이 다. 외진주는 190x190mm 사각기둥이며 높이는 3m, 수 장재의 폭은 75mm를 사용하였다. 두 경우 모두 구조재 가 가늘고 길어진 세장화細長化현상을 보이며 이는 근 대기에 사용된 구조부재의 규격이다.32)
조선의 한옥 중에서 같은 구조형식으로서 같은 평면을 가진 가옥을 찾아보면 운현궁이 나타나는데 사랑채는 노 안당과 같은 구조와 같은 평면형식이고 안채는 노락당과 같은 평면형식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노안당의 기 둥은 230~215x230~215mm 사각기둥이며 노락당의 기둥 은 255x255mm 사각기둥이다. 반면 높이는 2.6m, 2.7m 이다. 이것만 봐도 높이 대비 단면적의 비율이 얼마나 세장해 졌는지를 알 수 있다. 이처럼 높고 깊고 넓은 공 간을 추구한 반면 이를 구성하고 지탱하는 목구조재의 크기는 반대로 줄어든 현상을 볼 수 있다.
일곱째, 이 가옥에는 한옥의 구조로 근대적 평면을 수 용하면서 미처 목구조로 세련되게 마무리 짓지 못한 여 러 군데의 어색한 흔적들이 남아있다. 이런 흔적도 전통 과 근대가 접하며 생길 수밖에 없었던 과도기적 현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근대한옥의 특징이 될 수 있다. 이에 더해 목재의 치목수법이나 가구법이 투박한 점을 보면 목수도 아주 빼어난 실력을 가진 이는 아니었던 듯하다.
여덟째, 구조재로 사용된 목재의 종류에 대해서는 건 립자가 집적 언급하거나 남긴 기록은 없다. 단지 문화재 로 지정하기 위해 「도성내민속경관지역조사연구」가 진 행되던 기간 중에 가옥을 소개하기 위한 신문의 기사33) 에서 ‘재목은 모두 압록강에서 뗏목으로 운반한 흑송’이 라고 소개된 것이 최초의 기록일 뿐이다. 만주지방에서 벌채하고 압록강변에서 운반했다면 정확한 수종은 ‘만주 흑송’이라고 기존 연구34)에서 밝혀졌고, 이 만주흑송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압록강 연안의 목재 채벌권 을 탈취하고 1907.9.1.일부터 열린 경성박람회에 대표 전 시품으로 선보인 바 있다.35) 이때 건립자 한상룡이 경성 박람회의 한국측 평의원이었고 본 가옥을 짓기 위해 주 변의 땅들을 사들이던 준비단계였기 때문에 집지을 재목 으로 만주흑송을 마음에 새겼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어 보인다. 흑송이라는 재목이 강조되는 이유는 한상룡이 처음부터 일본무가저택 분위기로 목재 위에 검은색의 칠 을 해서 가옥이 장중하게 보였기 때문에 또 낯설었기 때 문에 그 분위기를 풍기는 나무의 수종이 있는 줄 알고 강조하여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주흑송이나 그 이남 의 흑송은 줄기껍질의 색이 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지 껍질 속은 검지 않다.
아홉째, 건립목적에 맞춰 가옥을 지으면서 외부공간을 적절히 활용한 수법이 돋보인다. 출입광장-대문-전망마 당-사랑중문-사랑마당-사랑채로 이어지는 진입동선을 구 성하는 외부공간은 넓었다가 좁아지고 트였다가 막아서 는 강약의 리듬으로 구성시켜 방문자에게 가옥의 넓은 규모와 감정의 기복을 경험하게 하였다. 또한 넓게 비어 있는 사랑마당의 배경에 사랑채가 우뚝 선 효과를 내게 끔 외부마당 크기를 조절하여 그 상징성을 부각시키고, 안마당은 돌출된 사랑손님채로부터 안행랑채로 그어지는 보이지 않지만 느끼게 되는 경계선으로 인해 안마당과 안행랑마당을 공간적으로 분화시킨 수법을 사용하였다.
열째, 현재의 조경은 이전의 최경진 시기의 조경과 다 르고, 그 이전의 한상룡-최선익 시기의 조경은 또 달랐 다. 본 가옥은 전통적 한옥의 조경에서 건립자의 필요성 과 취향에 따라 근대식 조경으로 옮아간 중요성을 가진 장소이기 때문에, 시기별 관련자료36)를 바탕으로 전문조 경가에 의한 연구와 함께 최소한의 범위일지라도 근대식 조경으로의 회복을 꾀하여야 할 것이다.
열한째, 이 집엔 철근콘크리트구조의 방공호가 존재한 다. 현 안중문으로부터 안채 쪽으로 지하에 긴 장방형 평면으로 설치되었고 출입계단은 안중문의 쪽문을 들어 선 앞부분에 있다. 이 시설은 일제가 인도차이나로 진주 후 확전에 대비하여 1941년 초에 대대적으로 방공호 건 설을 독려하던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최 선익 시기에 해당한다.
열두째, 이상과 같은 변화와 특징을 간직한 본 가옥은 한옥과 일본요소 및 근대식 요소가 모두 병존하는 특색 있는 근대기의 저택이며, 근대시기에 전통한옥이 새롭게 변화하기 시작했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 다. 또한 건립자나 소유주의 입지나 성향에 따라 한옥에 거주하면서 일본식 최신 주택을 따로 보유하는가 하면 반대로 일본식을 제거하고 한옥만으로 이루어진 집으로 의 변화를 추구한 예를 통해 근대기 최상류층의 주거보 유성향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가옥의 가치는 근대기의 시대적 변화를 수 용한 선구적 행위의 산물이라는 점과 근대기 최상류층이 최신의 기능을 담아 완성한 명물한옥이라는 점, 그리고 우리가 그 수준을 접할 수 있고 가늠해 볼 수 있다는 점 에 있다. 아울러 이 가옥의 주인들, 곧 한상룡-한성은행- 최선익-백인제-서울특별시로 이어지는 소유자의 변화와 그 과정도, 가옥의 변화와 가옥의 특성과 함께 근대에서 현대까지의 흐름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역사라는 관점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8.결론
지금까지 본 가옥이 근대한옥으로서의 특징을 훼손당 하거나 변형이 유발된 기존 공사의 내용을 기록하고, 이 를 최소한이나마 회복하여 역사가옥박물관으로 개관하기 위한 과정에서 새롭게 밝히거나 확인된 사항을 살펴보고, 이에 의해 기존연구에서 누락된 사항은 반영하고 재고해 야 할 특성들은 재정립하였다.
가옥의 달랐던 상량일이 사실은 같은 날에 이루어졌다 는 것과 대문간채 건립일자의 의미와 본 가옥에서의 변 화시점을 분명히 한 점, 특히 사랑채 영역이 화영절충식 주택을 모델로 하고 그 구성방식을 수용했다는 점은 괄 목할만한 성과다. 기타 여러 부분적인 요소를 통해서는 가옥의 구성방식을 명확히 추적할 수 있는 근거를 밝혔 음에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번에 행해진 부분원형회복 의 내용도 기록하고 역사가옥박물관으로의 조성방향도 살펴보았다. 원형회복이 부분적이나마 시작되고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은 서울역사박물관의 문화재에 대한 안목과 이해가 바탕이 되었다. 예산상의 이유로 최소의 범위로 만 원형회복이 이루어진 것은 아쉽지만, 아직 최소범위 에 속한 내용은 내년에 꼭 실행되길 바란다. 역사가옥으 로의 활용은, 역사적 의미를 가진 특징 있는 근대한옥을 잘 보존하고 문화공간으로 조성하여 시민들에게 개방함 은 물론 근대역사문화교육의 장으로 제공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앞으로 역사가옥으로의 운용과정에서 근대한옥으로서의 특징에 해당하는 요소는 꼭 보존 유지 되길 바라며, 가옥 주인들의 흐름 자체도 근대로부터의 역사성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함께 역사적 문화적 내용으 로 전달되길 바란다.
끝으로 유지관리 시의 유의점으로 구조안전과 관련된 계측관리를 제안하고자 한다. 현재 건넌방 누마루 북측 변이 동측으로, 별당의 누마루 동측변이 남측 방향으로 변위가 발생한 것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변화 량은 1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쌓여 고착화된 결과이겠지 만, 육안으로 확인되는 상황이니만큼 만일의 경우를 대 비하기 위해서라도 계측기를 설치하여 그 변화가 고정된 것인지 아니면 진행 중인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만약 진행이 계속되고 있다면 정밀구조안전진단을 하고 그 결 과에 따라 구조보강 등의 조처를 취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