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 론
황룡사는 진흥왕 14년(553년) 초창 이후 고려 고종 25 년(1238) 몽고전란으로 소실되기까지 신라 대표 사찰로 학술적 가치에 대한 많은 연구가 지금까지도 진행되고 있다. 그 중 목탑지 심초석 상부 방형대석1)에 대해서는 ‘몽고전란 이후 사리장엄을 보호하기 위한 鎭護石과 상 부 찰주를 받는 巨石’ 크게 두 가지 견해로 1980년대 일 부학자에 의해 제기된 이후 후속연구가 답보된 상태였으 나, 최근 과거 선행연구를 보완하여 방형대석 용도에서 대해서 새로운 근거로 하부의 사리장엄을 보호하기 위한 鎭護石으로 추정한 논문2)이 발표되어 주목이 된다. 하지 만 필자는 위 논문을 보면서 다소 의문점이 있어 본 논 문을 통해서 논하고자 한다.
2.선행연구
2-1.발굴조사
황룡사 목탑지 심초석 조사는 1964년 12월 불법자(不 法者)의 손에 의해 도난을 당하는 수난을 겪은 이후 조 사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1966년 10월부터 진행되었다.3)
심초석은 동서 최대길이 435㎝, 남북 최대길이 300㎝ 로 동편이 서편보다 둥근 부정형으로 재질은 화강암이고, 무게는 약 30ton에 달한다. 또한 심초석 상면 중앙부에 는 일변 49㎝ 전체높이 34.5㎝의 2단으로 처리된 사리공 이 있고, 그 상단 사방으로 두께 8.5㎝, 일변길이 49㎝의 사리공 뚜껑돌을 안전하게 덮기 위한 일단 받침 턱받이 가 있다. 사리는 턱받이 아래로 깊이 26㎝, 폭 29㎝의 공간 홈 높이에 안치 되어 있었으며, 사리공 외곽에는 사방 11㎝ 거리에 폭 7㎝, 깊이 2㎝의 周構를 돌려 사리 공의 내부로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처리되었다.
또한 철제촉은 周構동쪽과 서쪽에 11㎝ 떨어져 심초 석 사리공 동서 중심선에 서로 대칭되게 밑지름 8.5㎝, 높이 8㎝로 심초석 상부 방형대석 바닥에 대칭되게 뚫린 두개의 구멍에 꼽히고, 꼽히는 철제촉은 없지만 사리공 남쪽과 북쪽에도 대칭되게 지름 10㎝, 깊이 12㎝ 圓孔이 있다.4) 보고서에는 사리공 뚜껑이 닫힌 상태에서 그 상 면 중심으로 직경 90㎝의 원형기둥이 놓여 있었던 주좌 흔적으로 보아 심초석 상면에 놓여있는 방형대석은 원형 기둥이 멸실된 이후 놓여져 사리공을 보호한 이차적인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5) Figs 1,2,3Table 1
2-2.방형대석 관련 선행연구
황룡사 목탑지 중앙에 위치한 방형대석에 대한 선행연 구자는 황수영, 김정수, 남시진, 한정호6)가 있으며, 그 연 구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수영은 現방형대석 원형을 지금보다 더욱 크고, 상 면은 平坦하였던 것이 오랜 세월에 파손된 것으로 보았 다. 또한 일부 연구자에 의하여 심초석으로 추정되는 점에 대해서는 부정하였으며, 그 용도를 고려말 몽고군에 의한 전소 후 그 밑에 안치된 舍利寶를 보호하기 위한 鎭護石 으로 추정하였다. 그 근거는「三國遺事」卷3 宴坐石條 중 “幢立而平頂” 문구를 기존 ‘깃대처럼 서있고 위는 평 평하다. 또는 우뚝 서있고 위가 평평하다.’라는 일반적인 해석과 달리 ‘깃대(幢)가 서있고 위는 평평하다.’로 해석하 여 방형대석 上面圓孔은 舍利孔이 아니라 幢7)을 세우기 위한 장치로 방형대석과 가섭불연좌석을 동일한 것으로 판단하였으며, 이는 몽고전란 이후 연좌석을 목탑지 중앙 으로 옮겨 사리공에 안치된 舍利寶를 보호하고, 외부에 노 출 멸실됨을 막음으로 황룡사의 二大神聖體인 연좌석과 창 건이래의 사리구가 동시에 보호될 수가 있었다고 하였다.
김정수는 방형대석이 삼국유사와 동국여지승람에 기록 된 가섭불연좌석이 아니라는 조건하에 방형대석을 상부 찰주를 받는 巨石으로 추정하였다. 이는 방형대석 상부 圓孔은 찰주를 받는 용도로 구조적으로 찰주가 하중에 의해 밀려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며, 찰주의 밑뿌 리 직경은 방형대석 남쪽 頂上面의 圓形의 탄화흔적을 통해 83㎝로 가정하였다.8) 또한 문헌에 언급된 가섭불연 좌석의 형태는 불전 뒤에 있는 하나의 謁焉石9)으로서 신라시대 석등과 유사한 형태로 추정하여 연좌석이 방형 대석과 일치하지 않음을 간접적으로 언급하였다.10)
남시진은 방형대석을 처음부터 사리공을 덮은 개석으 로 그 용도는 찰주를 받는 巨石으로 추정하였다. 이는 심초석과 개석이 2개의 철촉으로 고정되고, 사리공 주위 습기를 배출하기 위한 얕은 배수구를 심초석 표면에 판 점, 그리고 상면에 마련된 직경 17㎝, 깊이 18㎝의 용도 가 찰주를 고정하기 위한 것 등을 들었다.11)
한정호는 현재 목탑지 심초석 위에 놓인 방형대석 출 현 시점과 용도에 대해 목탑의 창건 또는 중수와는 관련 이 없으며, 고려 25년(1238) 몽고전란 이후 사리장치 보 호를 위해 설치한 鎭護石으로 추정하였지만, 그 원형에 대해서는 선행연구에서 언급된 가섭불연좌석과 동일성에 대해서는 관계성이 부족하다고 하였다. 이는 황수영이 추정한 “불전 후면에 위치했던 가섭불연좌석을 몽고 전 란 이후 鎭護石용도로 목탑지 중앙으로 옮긴 것”에 대 해 삼국유사 저자 일연이 가섭불연좌석을 목격한 당시에 는 땅에 묻혀 있었고, 문헌에 묘사된 가섭불연좌석 규격 이 방형대석과 큰 차이점을 보인다는 점을 들었다. 또한 방형대석이 “찰주를 받는 용도” 라는 일부 주장에 대해 서는 현재 심초석 상면에 남아있는 직경 약 147㎝ 원형 綠痕이 시기적인 차이는 있지만, 일본 동대사 대불전 기 둥의 사례에 비추어 볼 때 이는 찰주의 밑둥을 둘렀던 철테의 흔적으로 추정되므로 찰주 직경 원형은 방형대석 상면보다 넓어 巨石이 상부 찰주를 받는점은 구조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점과 2차 중수 이전에 심초석 위에 방형대석이 설치되어 있었다면, 심초석 주변에 배치된 四天柱와의 거리를 감안하였을 때 공간상 대석을 옮기거 나 들어서 사리장치를 확인하기에는 불가능하고, 방형대 석의 규모나 무게를 감안할 때 대석을 심초석 위에 설치 하기 위해서는 재건에 준하는 대규모 공사가 진행되어야 하지만 경문왕 이후 고려시대에 있었던 3차례의 중수에 대한 문헌기록을 보았을 때 재건수준 공사로 추정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는 점을 들었다. 또한 현재 봉안된 유물을 보았을 때, 경문왕 이후 사리장엄구가 추 가 봉안 된 적이 없다는 점과 현재까지 확인된 이와 유 사한 국내 사례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12) 등을 통해 방 형대석의 용도가 찰주를 받는 구조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하였다.
3.방형대석 재검토
현재까지 방형대석에 대한 연구는 사리장엄을 보호하기 위한 鎭護石과 목탑 창건 당시 상부 찰주를 받는 巨石으 로 크게 두 가지로 의견이 나뉜다. 위 선행연구에 제시된 방형대석 용도를 추정하는 대표적인 근거를 살펴보면, 첫 번째로 가섭불연좌석과 관계성이고, 두 번째로 방형대석 출현시점과 재건수준의 수리공사 유무이며, 세 번째로 보 편적인 사리장엄구 추가 봉안 문화와 국내외 유사사례 유 무 등이 있다.
첫 번째로 방형대석과 가섭불연좌석의 관계성은 다음과 같다. 삼국유사에는 가섭불연좌석 상태에 대해 “흙에 파묻 혀서 겨우 땅과 편편해져있었다.”13)라고 하였으며, 위 묘 사 시점은 충렬왕 7년(至元, 1281)14)으로 추정된다. 또한 형태는 높이 약150~160㎝, 둘레 약180㎝15)임을 추정할 수 있다.16) 이를 종합하여 보면, 문헌에서 언급된 가섭불 연좌석 형태는 평면을 원형으로 가정하면 직경 53.7㎝로 상하로 긴 원통형이지만, 방형대석은 평면 최소 길이가 117㎝인 직육면체로 형태적 차이점을 보이며, 그 출현시점 에 대해서도 지금까지의 방형대석 출현시점에 대해서 창건 또는 몽고전란 이후로 본 것과는 달리 충렬왕 7년(至元, 1281)까지도 가섭불연좌석은 땅속에 묻혀 겨우 그 흔적만 이 노출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시기적인 차이가 보인다. 다 시 말해서 문헌기록과 현황 비교를 통해 보았을 때 방형 대석과 가섭불연좌석이 동일한 것으로 보기 힘들다. 다만, 가섭불연좌석의 원형에 대해서는 필자는 가섭불연좌석의 위치가 불전 뒤에 있었다는 점과 문헌 묘사형태를 종합해 보았을 때, 이는 불전이나 불당 앞에 세워 부처의 공덕을 나타내는 일종의 石幢또는 石經으로 栢栗寺石幢(이차돈 순교비, 818)과 유사한 형태로 생각된다.17)Fig 4
두 번째로 방형대석의 출현시점과 재건수준의 수리공사 유무는 다음과 같다. 출현시점에 대해서는 발굴조사보고서 에 보고된 심초석 상부에 찰주 흔적으로 추정되는 90㎝ 원형 柱痕이 방형대석 하부에서 발견된 점을 주목할 필요 가 있다.18) 원형 柱痕이 巨石하부에 존재한다는 것은 최 소한 거석이 놓이기 이전에 심초석 상부에는 목재 찰주(심 주)가 존재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추론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충분히 방형대석이 창건당시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것 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없을 것이다. 다만, 언제 목 재 찰주가 사라지고 巨石이 출현했는지에 대해서는 위 자 료만으로는 알 수 없으므로 다른 문헌기록을 살펴볼 필요 가 있다. 이에 황룡사 목탑 수리와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목탑은 선덕왕 12년(643)에 당나라 유학승 자장법사의 권 유에 의해서 창건계획과 사리장엄이 시작되어19), 동왕 14 년부터 15년까지 건축공사가 진행되었다.20) 이후 6차에 걸 친 크고 작은 수리공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연 혁은 1차 효소왕7년~성덕왕19년(698~720), 2차 문성왕□ 년~경문왕13년(□~927), 3차 경애왕4년~정종4년(927~ 949)21), 4차 광종4년~현종13년(953~1021)22), 5차 정종2 년~문종18년(1036~1064), 6차 헌종1년~숙종1년(1095~ 1096)과 같다. 여기서 방형대석의 무게, 크기 등을 고려하 였을 때, 설치를 위해서는 재건수준 또는 완전해체 수리공 사가 진행되어야 하며, 이에 총 6차에 수리공사 中재건 수준 공사로 다소 객관적23)으로 추정할 수 시점은 2차 문성왕□년~경문왕13년(□~927)과 4차 광종4년~현종 13년(953~1021) 정도로 압축된다. Fig 5,6
먼저 2차 수리공사는 문성왕대에 탑이 기울어 쓰러질 까 염려되어 고쳐 세우고자 재목을 모은지 30년이 되었 으나 수리하지 못하고, 경문왕 11년에서 비소로 공사를 시작하였다는 점에서 최소 목탑 기울음 현상과 목재 수 급이 진행된 시점으로부터 40년간은 수리하지 못하고 존 속되었을 것이며24), 황룡사찰주본기 中“낡은 것을 없애 고 새것을 만들도록 하였다.”25)라는 기록과 순수 구조부 공사 기간이 2년(871~873) 정도인 점 등을 볼 때 재건 수준의 공사로 추정가능하다. 다만, 찰주본기 中“기둥을 들게 하고 보았더니 柱礎의 구덩이 안에 금과 은으로 만 든 高座가 있고, 그 위에 사리가 든 유리병을 봉안해 두 었었다.26)”라는 기록에서 기둥을 들었을 때 최초로 보이 는 것이 사리공(심초석 내부)이라 묘사한 점을 통해 사리 함을 보호하거나 찰주를 받치는 용도인 방형대석이 설치 되었을 것이라는 개연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당시 에는 심초석 상부에 바로 찰주를 세우는 구조였을 것이다.
다음으로 4차 수리공사는 953년 벼락과 화재로 인해 1012~1021년간 9년에 걸쳐 수리공사가 진행되었다. 9년 간에 걸친 기간은 수리공사 시간적 측면에서 볼 때 재건 수준 공사로 생각할 수 있다. 다만 공사의 전반을 보면, 재건에 사용된 재료를 조유궁(朝遊宮)을 헐어 수리 재목 으로 사용하였을 정도로 재료 수급에 어려움이 있었던 점과 삼국유사 中“황룡사 탑이 불타던 날에 (통도사 금 강계단)돌솥의 동쪽 면에 처음으로 커다란 얼룩이 생겼 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27)”라는 기록을 볼 때 당 시의 화재가 이전의 화재28)와는 달리 국가적으로 큰 화 재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953년 화재로 인해 목탑은 완전 전소에 가까운 상태였을 것이고, 재건에 필요한 재 료 수급의 어려움으로 인해 1012년 공사가 시작되기 전 까지 현재와 유사한 상태로 68년간 방치되었을 것으로 추정가능하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심초석 내 사리장엄을 목탑이라는 보호각 하나 없이 68년간이나 과연 방치하였겠냐는 점이다. 추정컨대, 아마도 사리를 주변 건물로 옮겼거나 사리장엄을 보호하 는 어떠한 장치를 설치하였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국 가적으로 중요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문헌기록에서 찾 을 수 없다는 점과 현재 목탑 사리장엄은 경문왕때 장엄 된 상태로 보존되었다는 점, 그리고 당시에는 원나라와 전쟁을 진행하고 있어 부처님 진신사리와 같은 중요한 유물을 보호하기 위한 적당한 장소를 마련하기에 어려움 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 등을 가정해보면, 사리를 옮기는 것보다는 사리를 옮기지 않고 보호시설을 설치하는 것이 더 수월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보호시설은 자연 상태 에 노출된 사리를 불법자로부터 보호하고, 경내 경관과 어울리는 형태 및 재료29)로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추정형태는 황룡사 목탑에 모셔진 진신사리와 동일인 에 의해 모셔진 통도사 금강계단과 같은 형태로 조성되 었을 것이다.30) 즉, 화재로 목재부분이 사라지고, 주변 기단부만 남았을 목탑지에 방형대석을 중앙에 설치함으 로서 통도사 금강계단과 유사한 형태를 조영하여 예를 갖춘 것으로 사료된다.31) 결론적으로 광종 4년 화재로 인해 사리를 보호하던 목탑이 기단부를 제외한 대부분이 소실되어 사리를 보호하기 위해 차선책으로 방형대석을 설치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巨石상면에 원공이 남아 있 는 이유는 1012년 수리공사에 필요한 자재 수급을 조유 궁을 헐었다는 점을 통해 현종 3년 재건공사를 하였을 때 방형대석을 제거하지 않고, 찰주를 받치는 지금의 동 바리와 같은 역할로 재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세 번째로 보편적인 사리장엄구 추가 봉안이 경문왕 이 후에 없었던 점에 대해서는「皇龍寺刹柱本記」中“871년 8월 12일부터 이전의 목탑을 헐고 새로이 세우는데, 그 중에서 철반부의 사리 봉안 방법을 변경하게 되며, 이로 부터 1년 정도가 지난 872년 7월에 수리공사가 일단락되 지만, 이 공사에서 찰주가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왕이 심초석에 봉안한 柱本舍利는 어떠한지 염려하게 되어 동 년 11월 6일에 다시 찰주를 들어올려 柱本舍利를 확인 하게 하였다. 이때 탑의 연혁에 관한 기록물이 전혀 없 음을 의아하게 여겨 동년 11월 25일 사리를 추가하여 봉 안하면서 사리함에 연혁을 기록하게 하였다.”라는 기록을 통해 이는 창건당시 목탑공사 공정과 비교하면, 경문왕 대 최상층까지 공사가 진행된 후에 왕명에 의해 기둥을 다시 들어 3개월 동안 사리장엄 재봉안 준비하였다는 것 은 건축공정 관점에서 보았을 때 비효율적이며, 납득하 기 어려운 점이 있으므로 이를 정상적인 사리장엄 봉안 과정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한 현종때에도 경문 왕때에 준하는 수리공사가 있었지만, 사리장엄을 추가 봉안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당시의 사리장엄 의식이 지금과 같은 보편적으로 추가 봉안방식으로 진행 하였을 것으로 보기에는 객관적인 근거가 부족하다. 오 히려 당대에는 지금과 같이 매 수리공사마다 사리장엄 추가 봉안보다는 특정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숭배의 대상 인 사리장치를 함부로 범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으로 황룡사 목탑 내부에 존재하는 방형대석과 유사 한 국내외 사례로는 일본 약사사 동탑이 있다. 약사사 동탑은 730년에 건립된 목탑으로 원약사사로부터 이전 축조되었다. 목탑 심초석은 화강암으로 동서 1.7m, 남북 1.8m, 두께 0.4m로 상면에는 방형으로 오목하게 새긴 다 소 넓은 홈이 있는데, 이는 正保元年32)(1664)에 심초석 과 심주사이에 생긴 틈새를 보수할 목적으로 根継石을 고정하기 위해 새긴 홈이다. 다시 말해서 약사사 동탑에 설치된 根継石은 목탑 창건 이후 필요에 의해 상부 찰주 를 받치는 용도로 설치된 석재33)로 황룡사 목탑 방형대 석 설치 개연성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자료로 충분한 사 례라고 생각된다. Fig 7, 8, 9, 10
4.결 론
지금까지의 방형대석에 대한 선행연구는 사리장엄을 보호하기 위한 鎭護石과 창건 당시 상부 찰주를 받는 巨 石으로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양립되어 왔다. 하지만 지 금까지 선행연구에서 주요근거로 제시한 점에 대해 재검 토를 진행한 결과 방형대석은 953년 화재 이후 사리장엄 구를 보호하기 위한 용도로 설치되었다가 1012년 수리공 사 당시 철거되지 않고, 찰주를 받는 용도로 변경되어 지금까지 유지되어 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방형대석 의 출현시점은 953년 이후이고, 최초에는 鎭護石용도로 설치하였다가 1012년 이후에는 사리장엄을 보호하면서 상부 찰주를 받는 복합적인 용도로 변경된 후 1238년 몽 고전란으로 목탑이 전소되어 최초의 용도인 鎭護石으로 현재까지 보존되어 왔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