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al Search Engine
Search Advanced Search Adode Reader(link)
Download PDF Export Citaion korean bibliography PMC previewer
ISSN : 1598-1142(Print)
ISSN : 2383-9066(Online)
Journal of architectural history Vol.24 No.5 pp.21-32
DOI : https://doi.org/10.7738/JAH.2015.24.5.021

The Revision of Sajik Ritual System during the early Ming Dynasty and the Debates about National Sajik Altar Alteration during the early Joseon Dynasty

So-Hun Baik*

이 논문은 2014년도 명지대학교 신임교수연구비 지원사업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Corresponding author : baeksohun@hanmail.net
April 15, 2015 October 2, 2015 October 30, 2015

Abstract

Sajik, the altar of land and grain was treated as one of the most important national ritual facilities by the Joseon dynasty and the Ming dynasty because it symbolized the legitimacy of a dynasty, and its architectural ordonnance was arranged strictly by the government. But when the Joseon government considered to reconstruct its national Sajik altar in Hanyang during the Sejong period, they found the new architectural ordonnance for local Sajik altars recorded in 『Hongwulizhi(洪武禮制)』had been published by the Ming government was hard to adopt, because it was too narrow and totally different from the traditional style. Above all things, they doubt of there was other architectural ordonnance for kingdoms, not for local governments. King Sejong ordered to investigate the origin form and former examples, and tried to get other ritual documents of authority published by the Ming government such as 『Damingjili(大明集禮)』. After several academic researches and intense debates, they decided to create a new architectural ordonnance for their national Sajik altar, its form was in accord with the traditional style and its size was in accord with the new ordonnance. But they did not know there had already been the architectural ordonnance for the kingdom in the Ming dynasty. Because the first emperor of the Ming dynasty had changed its Sajik ritual system several times, even the whole country of the Ming dynasty also had gone through chaos on this issue even after his death. Consequentially, the official documentation works had been made partially, there was no a complete document on this issue even in the Ming government.


명 초 사직단 제도 개정과 조선 초 사직단 논쟁

백 소훈-*
명지대학교 건축대학 조교수

초록


    Myongji University

    1.서 론

    사직단(社稷壇)은 토지신인 사(社)와 곡식신인 직(稷) 을 모시는 제단으로서, 고대 책봉제도 하에서 종묘와 함 께 왕조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제례시설로 여겨졌다. 특히 유교를 건국의 기틀로 삼은 조선은 개국 초 사직제를 포함한 국가 예제 건설에 심혈을 기울였다.

    조선왕조의 예제는 통상 3단계의 검증을 거쳐 결정되 었는데, 첫째 경전에 전해 내려오는 의례의 원형과 기본 원리를 밝히고, 둘째 사서에 전해 내려오는 역대 왕조들 의 전고(典故)를 통해 의례 시행사례를 고찰하며, 셋째 명나라의 현행 예제 등급체계를 참조하여 후왕(侯王)으 로서 위계를 맞추는 것이었다.

    이는 사직단에도 적용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세종14 년(1432) 조선 조정은 당시 추진 중이던 사직단 개축을 둘러싸고 심각한 논쟁에 휩싸이게 된다. 논쟁의 발단은 명에서 입수한 『홍무예제(洪武禮制)』라는 책이었다.

    이 책에 기록된 명나라 신규 사직단 제도는 전통을 무 시하고 사단과 직단을 하나의 단으로 통합하는 등 급진 적 변화를 요구하였다. 이를 자국에 어떻게 반영할 것인 지에 대한 논의는 예조와 집현전 사이에서 예학 논쟁으 로 번졌는데, 『세종실록(世宗實錄)』은 이 과정을 상세 히 기록하여 조선 사직단 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 료를 제공해 준다.

    이런 이유로 기존 조선 사직단에 관한 연구들은1) 자 연스럽게 『세종실록』사직단 기사를 중심에 두고 전후 실록의 관련 기사들을 대조하여 사직단 건축 및 제례의 변화를 규명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문제는 이들이 상 술한 3단계 검증 중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에만 관심을 두고, 정작 사직단 논쟁의 원인을 제공했던 세 번째 검 증의 핵심 근거인『홍무예제』2)에 기재된 명 사직단 제 도에 대해서는 별다른 의구심을 품지 않았다는 데 있다.

    명 초 사직단 제도는 2011년 발표된 장지영의 「조선 초 중앙 사직단 단제의 형성과 그 성격」3)에서 비로소 비중 있게 다루어졌다. 이 논문은 엄밀한 사료 해석을 통해 기존 연구들의 오류를 밝혀내고 조선 태조부터 세 종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조선 국가 사직단의 형제가 어 떻게 점진적으로 완성되었는지를 밝혔을 뿐만 아니라, 사료의 범위를 『명사(明史)』,『대명집례(大明集禮)』, 『대명회전(大明會典)』등 『조선왕조실록』사직단 기 사들에서 언급되지 않은 명대 문헌들까지 넓혀, 명 초 제정된 사직단 등급제도를 규명하고 그 틀 속에서 조선 의 사직단이 어떤 위계로 자리 잡았는지 설명하고자 시 도 했다. 다만 아쉽게도 이 논문은 사료 확보의 미흡으 로 명 왕국사직단의 형제 규명에 오류를 범하였다.4)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중국 측 연구를 살펴볼 필요 가 있다. 중국 학계 역시 기존에는 몇몇 대표적 사료만 을 근거로 명대 사직단 제도를 비교적 단순하게 보았으 나5), 2009년 포지우가 명대 북직례(北直隸) 지역의 성시 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명의 사직단 등급제도가 수차례 개정되었음을 발견하고 다양한 문헌을 검토하여 전체 개 정과정을 처음으로 규명하였다.6) 그의 논문은 새로운 관 련 문헌기록들을 발굴하였지만, 성시연구의 하부요소의 하나로 사직단을 다뤘기 때문에 분석의 깊이가 얕고 여 전히 일부 문헌을 누락하는 등의 문제를 안고 있다.7)

    이에 본 논문은 장지영과 포지우의 연구를 기반으로 보다 다양한 역사문헌을 발굴 분석하여, 명 초 사직단 제도의 제정, 개정, 반강(頒降) 및 출판 과정을 명확하게 기술하고, 이것이 조선 한양사직단 제도의 제정 및 개정 과정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연구하고자 한다. 특히 이 과정에서 조선 전기 사직단 논쟁이 명나라 사직단 제도 에 대한 정보부족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히고, 나아가 세 종 때 개정된 사직단 제도가 명의 초기 사직단 형제를 참조하였을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2.조선의 국가 사직단 형제

    2-1.사직단의 일반적 건축 구성

    사직단 형제에 대한 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직단의 건축적 구성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나라 의 사직단은 『주례(周禮)·동관고공기(冬官考工記)』“장 인영국(匠人營國)”에 기록된 “좌조우사(左祖右社)”의 원 칙에 따라 궁전 앞에 종묘와 함께 좌우에 나란히 배치되 며 좌향은 사(社) 신의 속성에 맞춰 북향을 취한다.

    높은 담장인 원(垣)으로 둘러싸인 사직단 경역은 크게 제사영역과 준비영역으로 나뉜다. 제사영역은 단(壇)을 중심으로 유(壝)를 둘러 경계를 표시하고 유의 사방에는 각각 극문(戟門)을 설치하며 모서리에는 제물을 묻는 예 감(瘗坎)을 둔다. 또 준비영역에는 신위를 모시는 신주 (神廚), 제기를 보관하는 고방(庫房), 희생을 준비하는 재생방(宰牲房) 등을 둔다. <Fig. 1>

    주의할 점은 안담인 유(壇)와 바깥담인 원(垣)은 유래 와 형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유는 춘추전국시기 왕과 제 후들이 야외에서 회합할 때 임시로 두르는 낮은 흙담에 서 유래되었고 왕이 제후들에게 분봉하는 사(社)에도 유 가 있었다.8) 때문에 원형을 중시한 송대 주희는 사직단 에 대한 의견을 피력한 「답사단설(答社壇設)」에서 사 직단 둘레에 반드시 유를 둘러야 함을 주장하고 유의 높 이는 밖에 설치된 재청(齋廳)에서 안이 보이도록 단과 같은 3척이 적당하고 흙벽이 비에 취약하기 때문에 안팎 을 벽돌로 쌓을 수 있으나 기와를 올리는 것은 유의 유 래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9). 반면 원[혹은 장 (牆)]은 후대에 사직단 전체 경역을 보호하기 위해 추가 로 설치한 담장으로 형식에 구애가 없어서 유에 비해 높 게 만들 수 있고 기와를 얹어도 무방하다.10)

    단의 형식은 사단과 직단을 좌우에 배치하는 별단(別 壇) 형식이 전통으로 내려오다가, 명 초 두 단을 통합하 는 합단(合壇) 형식이 출현하였다. 합단 형식은 『홍무예 제』를 통해 국내에 소개 되었는데, 이 책은 명 태조 때 제정된 부(府)·주(州)·현(縣) 지방관아의 예제를 요약 정 리한 것으로, 사직단의 경우 지방 행정단위인 부·주·현이 동일하게 합단 형식을 취하고 단의 치수 역시 동일하게 영조척11) 기준 나비 2장5척, 높이 3척으로 규정하였다. Fig .2

    2-2.조선 전기 한양사직단 형제의 형성과정

    앞에서 설명한 사직단의 건축적 구성을 염두에 두고 조선 전기 한양사직단의 건설과정을 살펴보자. 한양사직 단의 제도는 총 3단계 걸쳐 완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데, 각 단계를 사료와 기존 연구 성과들을 기초로 정리 하면 다음과 같다.

    1단계는 태조대 창건기이다. 천도를 위해 태조3〜4년 (1394〜1395)에 한양에 사직단이 창건되었는데, 사단과 직단을 분리한 별단 형식으로 단의 나비는 영조척 기 준12) 2장5척이었으며 유를 두르지 않는 대신 사방에 장 (牆)을 두르고 문을 내었다.13)

    2단계는 태종대 증축기이다. 태종14년(1414)에 사직단 의 둘레에 유를 설치하였고,14) 태종16년(1416)에는 재관 이 거하는 재실(齋室)을 만들었다.15)이때 건설된 유는 송『정화오례신의(政和五禮新儀)』에 근거하여 나비25보 로 하였는데, 세종 14년 집현전 측량결과 영조척이 아닌 주척(周尺)을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즉 주척 기준 15 장16)으로 영조척으로 환산하면 10장에 못 미쳤는데, 이 로써 태조 때 건설된 단은 영조척을 사용하고 태종 때 건설된 유는 주척을 사용한 모순된 국면이 남게 된다.

    3단계는 세종대 개축기이다. 『세종실록』을 보면 세 종9년(1427)과 12년(1430)에 사직의 단과 유가 모두 지 나치게 협소한 문제가 지적되었고, 13년(1431)에는 황희 와 맹사성이 사직신 위패의 칭호를 각각 명 황실에서 쓰 는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에서 후왕급에 해당하는 “국사(國社)”와 “국직(國稷)”으로 바꾸도록 건의하였으 며, 14년(1432) 7월과 9월에 예조와 집현전을 주축으로 사직단 제도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를 실시하였다. 단 은 나비가 영조척 기준 2장5척으로 태뢰(大牢)를 겨우 진설(陳設)할 수는 있었으나, 집례(執禮)와 등가(登歌) 악공들의 자리가 부족하고 신위와 지나치게 가까워 보기 에 불경하였다. 또 유는 한 변 길이가 영조척 기준 10장 이 채 안되어 안쪽에 헌가(軒歌) 악공들을 배치한 상태 에서 친제하는 왕의 악차(幄次)를 설치하기에는 지나치 게 좁았다.<Tab.1>

    이에 집현전에서 수정안을 제시하고 예조를 포함한 조 정 대신들이 검토하여 최종안을 제시하였는데, 그 형제 는『세종실록·오례(五禮)·길례서례(吉禮序例)·단유(坛 壝)』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등에 기록되어있다.

    먼저 『세종실록·오례·길례서례·단유』에는 “사직단은 남쪽에 앉혀 북을 향한다. 나비2장5척, 높이3척이고 사면 에 계단을 내는데 각 3단이다. 방위 색의 흙으로 꾸미고 황토로 덮는다. 석주는 길이2척5촌, 나비1척이고, 그 위 는 뾰족하게 하고 그 아래 반을 흙에 묻어 단 위 남쪽 계단의 위에 세운다. 유는 둘인데 각 유는 25보이고 장으로 셈하면 6척이 1보이니 즉 15장이다. 척은 영조척을 쓴 다.”17)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단의 면적은 넓히지 않고, 유는 주척 대신 영조척을 적용하여 한 변의 길이를 기존 10장에서 15장으로 늘리기로 결정했음을 알 수 있다.

    세종 때 편찬을 시작하여 성종5년(1474)에 완성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사직에 관한 기록을 보 면18) 『세종실록·오례·길례서례·단유』와 거의 동일한데, 추가로 사직단도가 있어 세종대 논의를 통해 결정된 모 습을 보다 명확하게 확인 할 수 있다. 이 그림을 보면 제사영역은 여전히 사단과 직단을 분리하고 있고, 유 밖 에 원을 둘렀다. 서측 원 밖에 신주, 악기고, 제기고, 재 생정, 우물 등을 포함하는 제사준비영역이 증설되는 것 을 확인 할 수 있다.<Fig.3>

    그러나 이러한 최종안이 실제 모두 공사로 이어졌는지 에 대해서는 의문이 드는데 1985년 현황조사 결과 단 사 이의 거리와 유의 치수가 태종 때와 변화가 없기 때문이 다.19) 단 적어도 단과 유를 제외한 제사준비영역의 증설 과 전체적인 정비는 시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추가로 기존 연구들에서 주목받지 못하였던 내용을 몇 가지를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태조대 사직단 창건 당시 『홍무예제』가 이미 국내에 도입되어 있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태조 조 는 고려 및 당·송 사직단20)의 전통을 계승하여 별단 형 식을 유지하는 동시에 명의 제후국임을 자처하면서 단의 나비를 고려시대의 5장에서 2장5척으로 줄였다. 이는 단 순히 제후의 사직단 나비는 천자의 절반으로 한다는 사 직단 제도의 원형을 따른 것 일뿐만 아니라 당시 명으로 부터 막 입수하였던 『홍무예제』속 명의 부주현사직단 제도를 고려한 조치였던 것으로 보인다.21)

    조선시대 문헌기록에서 『홍무예제』의 명칭은 정종2 년(1400) 12월22일 기사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세종실록』14년(1430) 9월1일 기사에는 “맹사성이 말 하기를 처음에 주자의 설에 의거하여 주척25척으로 단의 나비로 하고, 주척25보로써 유 안쪽의 상거(相去)로 하려 하였는데, 진설할 때에 단상이 좁아서 찬기를 용납할 수 가 없으므로, 부득이 『홍무예제』에 의거하여 영조척 25척으로써 단의 나비를 삼은 후에야 겨우 찬기를 용납 할 수가 있었습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사직단의 단은 태조 청건 당시의 것 그대로였고, 맹사성은 태조 재위 시 예부에서 근무하였으므로 여기서 “처음”은 태조 때 사직단 창건당시를 가리킨다. 뒤에 언급하겠지만 『홍무예제』는 홍무26년(1393)에 반강되었던 것으로 추 정되고 조선은 이 책을 참고하여 1394년부터 한양사직단 건설을 시작하였으므로, 이 책은 정식 반강되고 얼마 안 되어 조선에 도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의 세종 조 와 마찬가지로 태조 조에서도 『홍무예제』속 낯선 합단 형식에 대해 관련자들 사이에서 논의가 있었겠지만 아쉽 게도 건국 초 실록 기록이 후대만큼 치밀하지 않아 상세 한 내용은 확인할 수 없다.

    둘째, 세종대 개축 논의에서 역대 사직단 제도에 대하 여 면밀한 고증을 실시하였는데, 실록에 의하면 『백호 통(白虎通)』에 기록된 진씨(陳氏)의 설(設), 한 광무제 의 사직제도, 당·송 대사(大社) 행사의(行事儀), 당 주현 사직의, 주자의 주현사직설, 고려 사직제도 그리고 마지 막으로 명 『홍무예제』의 부주현사직 제도가 그 대상이 었다.22) 세종 조는 한양사직단에 명 부주현사직단에서 제시된 합단의 적용은 전혀 고려치 않고 별단을 견지하 였는데, 이는 문헌 고증과정에서 별단이 사직제의 원형 에 속하고 역대 왕조들에 의해 계승되어 온 전통이라는 점을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태조 가 정한 사직단 형제를 대대적으로 수정하는 것에 대해 도의적․정치적으로 적지 않은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라 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23)

    셋째, 『세종실록·오례·길례서례·단유』의 사직단 제도 원문과 해석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우선, 석주에서 “方一丈”은 “方一尺”의 오기이다.24) 또 “培其下半當坛上南陛之上”는 “培其下半, 當坛上南陛 之上”로 끊어 읽고25) “培”는 원래 흙을 북돋는다는 의미 이지만 여기서는 매설로 보아26) “그 아래 반을 흙에 묻 어 단 위 남쪽 계단 위에 세운다.”로 해석함이 적합하다.

    다음으로 “两壝, 每壝二十五步”의 해석이 어려운데27), “两壝”는 내유인 유(壝)와 외유인 원(垣)을 의미하고28), “每壝二十五步”의 뒤에 “장으로 셈하면 6척이 1보이니 즉 15장이다”라는 부연설명이 있으므로 “每壝”는 내유와 외유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내유의 동서남북 각 변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29) 즉 “유와 원을 겹으로 두르 는데 유의 나비는 25보이다”로 번역하는 것이 가능하다. 단 이 구절은 송 『정화오례신의』단유편의 관용표현을 그대로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데,30) 정작 『정화오례신 의』의 “两壝, 每壝二十五步”는 내유의 나비는 25보이고 외유는 내유로 부터 25보 떨어져 있다는 의미로 해석해 야 할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오례』에 관한 기존 연구와 『세종실록·오 례』의 서문에 의하면 길례의 서례와 의식 부분은 태종 이 허조(許稠)에게 명하여 기록하였고, 세종 대에는 나머 지 4례의 조목을 추가하였다고 알려져 있다.31) 그러나 길례에 속하는 사직제의 단유제도에 세종14년(1431) 집 현전이 건의한 유의 길이를 기존 주척 기준에서 영조척 기준으로 바꾸자는 건의가 수용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세종실록·오례·길례서례·단유』는 기존 학설과 달리 세종14년(1431) 이후에 수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단, 신위의 명칭을 세종13년(1431) 황희와 맹사성이 건의한 대로 “國社”와 “國稷”로 바꾸지 않고 여전히 “大社”와 “大稷”으로 기록하고 있는 점과32) 『국조오례 의』에서 명확히 별단 형식임을 천명한 것과 달리 단의 형식이 합단인지 별단인지 모호하게 기술하고 있다는 점 에서, 이 글이 세종대 사직단 논쟁이 아직 완전히 정리 되지 않은 시점에서 기록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2-3.『대명집례』의 왕국사직과 조선 사직단

    여기까지의 상황만을 두고 보면, 조선 조정은 전통적 인 별단 형식을 유지하는 대신 단의 규격을 줄여서 당· 송·원의 태사직단(길이5장, 높이5척)과 명의 신규 부주현 사직단 사이에 위치하는 왕국사직단을 독자적으로 창조 한 셈이다. 또한 조선은 이미 태종 6년(1406)에 전국 각 고을에 『홍무예제』의 부주현사직단 제도, 즉 합단 형 식에 따라 사직단을 건설하도록 지시한 상태였기 때문 에33) 이로서 조선의 사직단 체계는 별단 형식의 중앙 사 직단과 합단 형식의 지방 사직단들이 공존하는 형국을 이루었다. 즉 한양사직단과 지방사직단은 단의 규격은 같으나 한양사직단만 단이 2개인 형국이었다.

    그런데, 태종 및 세종실록의 사직단을 포함한 단유 관 련 기사들을 살펴보면, 이상하게도 당시 대신들과 집현 전 학사들은 명나라 현행 단유제도에 관해서는 오직 『홍무예제』에만 의존하고 있다. 이 책은 명 조정이 지 방의 부, 주, 현급 관아를 대상으로 각 급 관아에서 시행 해야 할 제례의식과 영건해야할 제례시설의 표준을 정리 하여 배포한 것으로, 조선 대신관료들에 의해 후왕급인 조선의 국가 사직단에 적용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누차 지적된 바 있다.34)

    사직단 등의 예제를 둘러싼 장기간의 소모적 논쟁을 경험한 세종은 명에 왕국사직단 제도가 별도로 존재하는 지 공식적으로 질의하지 않는 대신35) 비공식적 경로를 통해 명의 예제를 기록한 보다 체계적인 서적을 확보하 려고 시도하였는데, 이는 태종 때 명나라 예부에 요청했 다가 거절당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36) 세종22년(1440) 세종은 김하(金何)가 전년(前年)에 명 예부를 방문하였 다가 예제를 총 정리한 『대명집례』를 본 적이 있다고 아뢰자 인맥을 통해 이 책을 구입하거나 필사하려고 시 도하였으나37) 실패하였고,38) 대신 명 예부에 여러 차례 김하 등 조천사(朝天使)를 보내어 필요한 내용을 열람하 게 하였다.39) 이들이 열람한 내용은 늦어도 세종의 아들 인 세조2년(1456)부터 조금씩 조선의 예제에 적용되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40) 그렇다면 기록은 없지만 세종은 조천사로 하여금 『대명집례』에서 사직제 부분 을 확인하게 했고 그 결과가 성종5년(1474)에 완성된 『국조오례의』사직단도에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대명집례』의 사직단 제도를 살펴보자. 이 책은 원 래 명 홍무 2∼3년(1360∼1361)에 총 50권으로 편찬되어 명 예부에 비장(祕藏) 되어 반포되지 않았다가, 명 가정 (嘉靖) 9년(1530)에 정식으로 간행되었을 때는 악(樂) 3 권을 더하여 총 53권으로 증편되었다. 현재 전하는 명 가정 판본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이 서적은 8∼10권에서 사직제를 크게 “국조사직(國朝社稷)”, “왕국사직(王國社 稷)”, “군현사(郡縣社)”의 3등급으로 나누어 각각의 건축 형제와 제사의식을 설명하고 있다. 이들 중 “왕국사직”은 바로 조선에서 찾던 등급으로 건축형제는 아래와 같다.Fig .4

    “무릇 나라를 건국하면 그 사직 을 세운다. 그 단 의 제도는 천자의 절반으로 나비 2 장5척이고 각 그 방위의 색으로 흙 을 받아 황색 흙 으로 덮는다. 단 을 만들면 모두 나무를 세워 그 곳을 표시하고 또 따로 석주를 만들어 신을 상징한다. 희생은 소뢰를 쓴다.”41)

    살펴보면 『대명집례』의 왕국사직단은 별단 형식이고 각 단의 너비는 천자 즉 국조사직의 절반인 2장5척으로, 조선 『세종실록』및 『국조오례의』의 한양사직단과 단의 형식(별단)과 규격(2장5척)에 있어서 동일하다.

    만약 세종이 조천사를 통해 『대명집례』의 사직단 제 도를 확인하게 하였다고 가정하면, 정황상 세종 조는 장 기간의 논의를 통해 자체적으로 전통적인 별단 형식을 유지하고 단의 규격 역시 태조 때에 천자의 절반인 2장5 척으로 만든 최초의 형제를 그대로 유지하며 원활한 제 례의 진행을 위해 유의 너비만 넓히는 것으로 잠정 결론 을 지은 상태에서, 후에 『대명집례』의 국사직의 형제 가 자신들이 자체적으로 만든 잠정안과 유사함을 확인하 고 이를 확정하였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가설도 한 가지 약점이 존재한다. 『대명집 례』는 3등급의 사직단을 모두 별단 형식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명 홍무년간에 정해진 예제를 기록하고 있는 서로 다른 두 서적 『홍무예제』와 『대명집례』가 부주현사 직단에 대해서 각기 합단과 별단으로 상반된 규정을 하 고 있는 것이다. 세종 후기에 김하 등의 조천사가 『대 명집례』사직단 부분을 열람하였다면 왕국사직단은 자신 들의 잠정안과 유사하나, 부주현사직단은 자신들이 『홍 무예제』를 통해 알고 있던 제도와 다르다는 사실을 발 견했어야 한다. 『홍무예제』와 『대명집례』안에는 홍 무년간의 제도라고만 기술되어 있고 정확한 편찬년도는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열람만으로는 부주현사직단 이 원래 별단이었다가 나중에 합단으로 개정되었는지 아 니면 원래 합단 이었다가 나중에 별단으로 개정되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하지만 명 예부 관원에게 물어보면 두 책의 제도 중에서 『대명집례』의 것이 먼저이고 『홍무 예제』의 것이 개정안이라는 사실을 알아내는 것이 어렵 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세종 조 입장에서는 명나라 의 경우 왕국사직단은 별단을 유지하고 부주현사직단만 나중에 합단으로 개정 되었으리라 추측했었을 수도 있다. 때문에 이 가설의 가능성은 여전히 열어둘 필요가 있다.

    3.명 초 사직단 제도

    조선 초 사직단 제도를 정비해 나가는 과정에서 겪었 던 혼란은 애초에 명 태조가 주도했던 국가 예제 건설 과정 자체의 혼란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건국 초 주원장은 명의 건국을 모든 백성에게 알리고 왕조의 상징적 지위를 공고하기 위한 수단으로 원의 지배 기간 동안 약화되었던 예제를 복원하기로 결정한다. 특히 고 대 분봉제도의 상징인 사직단은 명의 건국을 전국에 상 징적으로 확인시키는 중요한 제도적 장치였기 때문에, 주원장은 송대 이후 유명무실해진 지방 사직단 제도를 복원하고자 하였다. 문제는 주원장이 재위기간(1369∼ 1398) 동안 수차례 관련 제도를 개정했다는 데 있다. 명 태조시기 사직단은 크게 황조(皇朝)42), 번왕(藩王)43), 지 방의 3등급이 있었는데 사료마다 그 명칭이 다르기 때문 에 본문에서는 사직 신위의 명칭을 기준으로 태사직단 (太社稷壇), 왕국사직단(王國社稷壇), 부주현사직단으로 부르고자 한다.

    3-1.명 태조 시기 태사직단과 부주현사직단 형제

    명 태조 시기 태사직단과 부주현사직단의 형제는 동일 한 과정을 거쳐 개정되었다. 포지우의 연구를 바탕으로 저자가 추가로 발견한 사료들을 더하여 그 과정을 정리 하여 보았다.

    태사직단 형제는 명 태조 조에서 한 차례의 개정을 거 쳤다. 주원장은 칭제에 앞서 오(吳) 원년(1367)에 궁성 남서쪽에 태사직단을 건설하여44) 홍무원년(1368) 개국과 함께 친제하였고, 같은 해 2월에는 중서성 좌승상 이선 장(李善長)과 한림학사 도안(陶安) 등으로 하여금 사직 을 포함한 제사제도를 연구하여 올리게 하고 이를 받아 들이는 형식을 취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전국에 사직 단을 건설하고 제사를 실시하라는 칙령을 내렸다.45) 이 러한 건국 초의 예제 건설 결과는 곧바로 2년 후인 홍무 3년(1370)에 『대명집례』로 정리되었다.

    그러나 내각의 주도하에 총망중에 결정된 국가예제는 오류가 있고 번잡하여 명 태조의 불만을 야기하였고, 홍 무 8년부터 태조는 자신의 주도하에 국가 예제를 대대적 으로 개혁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홍무8년(1375) 종묘를 “도궁별전(都宮別殿)”형식에서 “동당이실(同堂異室)”형 식으로 바꾸고, 홍무10년(1377)에는 교례(郊禮)에 해당하 는 하늘제사와 땅제사를 원구(圜丘)에서 함께 시행하도 록 하는 등 주요 제사를 간소화 하였다.

    같은 해에 사직제 역시 개혁하였다. 먼저 태조가 사와 직을 따로 제사하는 것이 부당하고, 황제가 친제하는데 인귀(人鬼)에 지나지 않는 구룡(勾龍)과 후직(后稷)을 배 사(配祀)하는 것이 맞지 않음을 지적하자, 예부 상서 장 주력(張籌厯)등이 문헌고증을 통해 곡식의 신 직은 땅의 신 사를 따르는[從] 것이 순리이기 때문에 함께 제사함 이 마땅하니 사단과 직단을 합할 것을 건의하였고, 구룡 과 후직 두 인물은 각각 토목과 농사에 공이 있다는 이 유로 당나라 때부터 배사하여 왔는데 정해진 결론이 아 니기 때문에 태사직단에는 이들을 배사하지 않고 태조의 부친인 인조(仁祖)를 모셔 배향(陪享)하도록 건의하였 다.46) 이를 근거로 태조는 사직제의 등급을 중사에서 대 사로 승격하고, 명을 내려 오문 오른쪽에 새롭게 태사직 단을 건설하였는데 합단 형식에 단은 2층으로 상층 나비 는 5장, 하층 나비는 5장3척, 높이는 5척 이었다.47)

    부주현사직단 제도는 태사직단 제도를 따라 태조때 한 차례 개정되었다. 『대명집례』를 보면 최초의 부주현사 직단은 태사직단을 따라 별단으로 결정되었는데, 이는 앞서 홍무원년(1369) 12월에 이미 천하에 공포되었던 것 이다.48) 홍무11년(1378)에 태사직단을 합단으로 바꾼 후 첫 봄제사가 성공리에 마무리되자 곧바로 명 조정은 부 주현사직단 역시 합단으로 바꾸도록 지시한다.49) 이후 부주현사직단의 형제는 번복 없이 합단으로 고정된 것으 로 보이는데, 이는 홍무26년(1393)에 반강된 『홍무예 제』에50) 별단형식을 담고 있고, 명청대 전국 각지 부주 현의 지방지(地方志)에 기록되어 있는 사직단의 형제가 모두 합단 형식이라는 점에서 판단 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원의 통치 기간 동안 크게 감소했던 부주 현 사직단은 명 태조 원년에 그 제도가 복구되었지만 정 국 불안으로 실제로 시행되지 못하였다가, 홍무11년 (1378)부터는 제사의 편의를 위해 합단 형식으로 통일되 어 점차 전국에 보급되었고, 홍무26년(1393)에는 홍무11 년에 정해진 합단 형식을 중심으로 제사의 상세한 절차 까지 정리되어 전국에 다시 한 번 반강되었다.

    3-2.명 태조 시기 왕국사직단 형제

    조선 세종시기 조정은 『홍무예제』에 기록된 부주현 사직단 형제를 한양사직단에 적용하는 문제를 두고 장기 간 소모적인 논쟁을 벌여야 했다. 하지만 실은 명의 사 직단 등급체계에는 엄연히 왕국사직단이 존재하였다. 명 의 일부 부(府)급 성 안에는 부 관아 외에 번왕의 왕궁 이 건설되었는데, 그 궁문 오른쪽에는 황제로 부터의 분 봉을 상징하는 왕국사직단이 설치되었다. 즉 번왕의 왕 부가 설치된 부급 성에는 성 안 왕부 안의 왕국사직단과 성 밖 북서쪽 교외의 부급 사직단이 공존하였던 것이다.

    포지우는 왕국사직단의 형제가 명 태조 재위 기간 중 한 차례 개정되었다고 보았으나, 연구 결과 명 태조시기 에만 총 3차례 개정되었음을 발견하였다. 특이하게도 태 사직단 및 부주현사직단과 달리 최종적으로 합단이 아닌 별단 형식으로 고정되었다.

    건국 직후 제정된 왕국사직단의 형제는 완전하지 못했 다. 홍무3년(1370)에 완성된 『대명집례』의 “왕국사직” 부분을 살펴보면, 삽도를 통해 최초의 태사직단 형제를 따라 별단 형식으로 규정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단이나 유의 치수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오직 왕국사직의 유래 와 형제 원리를 설명하는 “총서(總叙)”부분에서 “무릇 방국을 세울 때 그 사직을 세운다. 그 단의 제도는 천자 의 절반으로 나비는 2장5척이다”라는 고대의 형제 원리 를 밝혔을 뿐인데,51) 이는 당시 아직 본격적으로 왕부들 의 건설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제도의 틀만 마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왕국사직단의 형제가 구체적으로 정해진 것은 홍무4년 (1371)에 이르러서이다. 이 때 왕국사직단의 제도를 별도 로 정한 이유는 바로 몇 개월 전인 홍무3년(1370) 7월에 황제가 왕부를 건설하라는 칙령을 내렸기 때문이다.52) 몇 개월 후 왕부 설계 과정에서 핵심 예제시설인 왕국사 직단의 형제가 필요하였는데 한 해전에 편찬된 『대명집 례』에는 왕국사직단의 제도가 명확하게 정해져 있지 않 은데다, 기술된 대로 제후는 천자의 절반이라는 원리에 맞춰 만든다면 결국 왕국사직이 보다 등급이 더 낮은 부 주현사직단과 규모가 같아져 버리는 문제가 발생할 것이 다. 이러한 등급질서의 혼란은 『대명집례』“왕국사직” 과 『예부지고(禮部志稿)』“번례(藩禮)”부분에서53) 지적 하였듯이 당나라 때부터 분봉제의 미실시로 왕국사직단 을 만들지 않고 대신 그 제도를 주․현 등의 지방사직단 에 적용하여 건설하였다가, 명나라에 이르러 중앙 집권 제도의 틀 안에서 형식적이나마 번왕을 임명하는 봉건 제를 병행하면서 왕국사직단과 부주현 사직단이 공존하 게 되었고 이들 사이에 등급 차이를 둘 필요가 새롭게 대두되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대명집례』가 완성되고 바로 이듬해인 홍무4 년(1371)에 왕국사직단의 나비와 높이를 부주현 사직단 (2장5척, 3척)에 비해 조금 크게 각각 3장5척과 3척5촌 으로 정하여 “위로는 태사직의 형제와 다르고 아래로는 군읍의 제도와 다르게”하게 하자는 예부의 간언이 있었 고 황제가 이를 받아들였다.54) 이때까지 왕국사직단은 여전히 별단 형식을 유지한 상태였다.

    그 후 홍무10년(1377) 태사직단이 합단으로 바뀌자 이 듬해인 홍무11년(1378)에 예부에서 간언하기를 “태사직 은 이미 하나의 단에서 함께 제사를 지내니 왕국 및 각 부․주․현 역시 단을 함께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국사 국직의 신이라고 칭하고 배위(配位)를 설치하지 않게 하 소서”하니 태조가 윤허하였다.55) 즉 태사직단이 합단으 로 바뀌면서 왕국사직단과 부주현사직단 역시 형제의 일 관성을 위해 합단으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합단으로 바뀌고 2년 후인 홍무13 년(1380)에 태사직단, 왕국사직단, 부주현사직단 중에서 왕국사직단만 별단으로 번복되는 일이 발생하였다.56) 사 료에는 그 원인을 밝히고 있지 않으나 정황 상 당시 왕 부들의 건설 시기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홍무 11년(1378)에 진민왕(秦愍王) 주상(朱樉)은 서안부(西安 府)에, 진공왕(晋恭王) 주강(朱棡)은 태원부(太原府)에 각각 취번(就藩)하였고, 연왕(燕王) 주체(朱棣)의 북평부 (北平府) 왕궁은 홍무12년(1379)에 완공되었으며, 홍무13 년 당시에는 주정왕(周定王) 주숙(朱橚)의 개봉부(开封 府) 왕궁이 완공을 앞두고 있었다. 즉 이미 다수의 왕궁 이 홍무4년에 공포된 형제에 의거하여 완공이 된 직후이 거나 혹은 완공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왕국사직단 제 도를 합단으로 바꾸려 했다가 애초의 별단형식으로 번복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왕국사직단을 포함한 명의 모든 사직단 형제가 최종적 으로 합단 형식으로 고정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 다.57) 이는 『명사(明史)』“단유지제(壇壝之制)”부분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사직단을 등급에 따라 태사직단, 제(帝)사직단58), 왕국사직단, 부주현사직단의 4 등급으로 나누어 각각의 형제를 설명하고 있는데, 가정 (嘉靖)년간에 새롭게 추가 되었다 다음 조에서 폐지된 제사직단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명 가정년간의 기록임을 알 수 있다.

    그 내용은 “태사직단은……사직을 하나의 단으로 합 하였는데 2층으로 상층의 나비는 5장 하층의 나비는 5 장3척 높이는 5척이며……. 제사직단은……. 왕국사직단 은 높이와 나비를 태사직의 십분의 삼을 줄인다. 부주 현사직단은 나비를 십분의 오를 줄이고 높이는 십분의 사를 줄이며 3단 계단을 낸다. 후에 모두 경사(京師)처 럼 같은 단에 함께 제사하는 것으로 정하였다.”59)라 하였는데 문맥상 왕국사직단 역시 합단 형식으로 바뀌었 다고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문장구조상 “모두”는 전국 부 주현사직단들에 한정된다. 또한 제사직단은 애초부터 별 단이 아닌 합단 형식으로 건설되었기 때문에 “모두”에 속하지 않는다. 부족하다면, 명 태창원년(1620)에 편찬된 『예부지고』속 「왕국의 제사 제도를 정하다(定王國祀 制」60)편을 증거로 제시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오늘날 친왕사직단을 정하니 나비는 3장5척이고 높이는 3척5촌 이며 사방에 계단을 내고 두 단의 거리는 역시 3장5척 으로 하였다.……”라고 하여 왕국사직단의 최종 형제가 별단 형식이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정리하면 왕국사직단의 형제는 별단(2장5척,3척/1368) →별단(3장5척,3척5촌/1371)→합단(1378)→별단(1380)의 순으로 개정되었다.61)

    3-3.명 초 사직단 제도 개정과 조선 한양사직단

    이상 확인한 바와 같이, 조선 초 유입된 『홍무예제』 속의 부주현사직단 제도는 한차례 개정을 거쳐 1393년에 확정되어 전국에 반강된 것이었다. 이 책이 어떤 경로로 조선에 유입되었는지는 불확실하나 마침 한양으로의 천 도를 계획하고 있었던 이성계는 이 책을 적시에 획득하 여 1394년 한양사직단 창건당시 전례와 근거가 없는 생 소한 합단 형식은 거부하고 제시된 영조척 기준 나비2장 5척의 단의 크기가 제후의 사직단 나비는 천자의 절반으 로 한다는 옛 원칙에 부합하다고 판단하고 그 치수만을 적용하여 별단형식으로 한양사직단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당·송·고려의 전통과 명의 신규 제도를 절충한 결과였다.

    이후 태종시기에 단의 주위에 유를 둘렀으나 송대 주 희의 학설에 따라 주척을 기준으로 나비15장으로 결정하 는 바람에 대사(大祀) 규모의 제례를 수용하기 힘들어서, 세종대에 들어서 사단과 직단 사이의 거리를 넓히거나, 유를 넓히거나 혹은 태조 때처럼 아예 유를 없애 버리자 는 등의 의견이 개진되면서 수년간 사직단 형제에 대한 논의를 반복하게 되었고 이는 나중에 예조와 집현전 사 이의 예학 논쟁으로까지 비화되었다.

    이에 세종은 사직단 등의 예제를 둘러싸고 발생하는 소모적 논쟁의 막기 위해 『홍무예제』보다 체계적인 명 의 현행 예제서를 수소문 하다가, 김하를 통해 『대명집 례』의 존재를 알게 되어 구입이나 전사를 시도하였으나 당시 이 책이 명 예부에 비장(祕藏)되어62) 있던 관계로 실패하였다. 사료를 통해 이후의 정황을 살펴보면, 세종 은 포기하지 않고 조천사들로 하여금 틈틈이 명 예부에 들러 『대명집례』를 열람하게 하고 그 내용을 조금씩 조선으로 들여왔던 것으로 추측된다.

    『대명집례』에는 조선이 찾던 왕국사직단 제도가 그 림과 함께 개략적으로 설명되어 있었는데, 만약 세종이 조천사를 통해 이 책의 사직단 제도를 파악하였다면, 명의 왕국사직단이 공교롭게도 조선 태조가 창안한 한양 사직단처럼 별단형식을 취하고 단의 나비 역시 천자의 절반을 원리로 하는 점이 일치함을 확인하였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는 세종이 한양사직단의 최종 형제를 결심하는데 일정부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런데 명의 실제 왕국사직단 제도는 『대명집례』의 기록과는 달랐다. 3차례의 개정과 번복을 거쳐 최종적으 로 별단으로 고정되었으며 단의 등급을 부주현사직단 보 다 높게 만들기 위해 나비3장5척, 높이3척5촌으로 결정 하였는데, 이는 조선과 마찬가지로 전례 없는 새로운 형 제였다. 사직단 논의에 휩싸여 있던 조선 세종 때에 명 나라에서는 이미 이 제도가 정착되어 있었지만, 그 내용 은 당시 명의 대부분의 관련 문헌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 았고63) 오직 『오례통고』와 『예부지고』의 관련 내용 을 비교 검토해 보아야 알 수 있었는데 당시에 이들은 아직 출판되지 않았거나 조선에 유입되지 않은 상태였으 며, 또한 왕국사직단의 경우 잦은 제도개정으로 명의 관 원들조차 명확하게 파악하기 힘들었을 것으로 보이기 때 문에 조선 세종 조 입장에서는 정확한 실정을 파악하는 것은 지난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사실 조선이 반드시 명이 일방적으로 정한 사직단 등 급체계에 구속될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조선은 명 황실로부터 영토를 분봉 받은 제후국 이 아니라 외국으로서 외교형식상 명 황제를 천자로 인 정하는 것 뿐 이라는 인식이 강했다.64) 다만 조선으로서 는 명과의 불필요한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당시 명의 예제를 일정부분 존중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 에 국가적 차원에서 명의 사직단 제도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을 경주하였다. 하지만 명 태조 조가 왕국사직단 형 제를 3차례나 개정하였기 때문에 명나라 내부에서도 혼 란을 겪었고, 더욱이 명은 사직단 제도를 외교적으로 전 파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관련 서적의 간행 역시 매우 더디게 진행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입장 에서는 명의 현행 사직단 제도를 즉시적으로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 했다.

    마지막으로, 조선 조정이 태조, 태종, 세종 3대에 걸쳐 전통형식과 명의 신규형식을 종합하여 만들어낸 한양사 직단만의 독특한 형제가 결코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님 을 밝히고자 한다. 송대 문헌 중에 제후국의 제사제도를 기술한 『후국통사의례(侯国通祀仪礼)』라는 책이 있었 다고 전해지는데, 이 책에 기록된 왕국사직단은 별단 형 식에 각 단은 나비2장5척, 높이3척이고 유는 나비25보로 써65) 만약 영조척이라면 조선 한양사직단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석주 나비 1척을 “1장”으로 오기한 것도 조선『세종실록·오례·길례서례·단유』의 사직단 기 록과 일치한다. 아쉽게도 이 책은 오늘날 단유부분만 원 대 지방지에 수록되어 전해져 내려오며 조선에 입수되었 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 책과 이 책이 수록된 지방지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이 책 이 고려에 입수되었다가 그 내용이 인용이나 발췌 등의 경로를 통해 조선에 이어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Fig .5Table 1

    4.맺음말

    본 연구의 사직단 관련 주요 성과를 요약하자면 첫째, 명 태조시기 왕국사직단 제도의 개정과정 및 개정원인을 규명하고 조선에 전해지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였다. 둘 째, 『홍무예제』와 『대명집례』등의 사직단 기록이 명 태조시기 사직단 개정과정 중 어느 단계의 성과물인지를 밝히고 이들이 어떻게 조선 전기 사직단 제도 형성에 영 향을 주었는지 설명함으로써 장지영의 연구를 보완하였 다. 셋째, 조선 세종 후기에 사직단 형제를 결정하는 과 정에서 『대명집례』를 참고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이 가설은 직접적 기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사 료와 당시 여러 정황을 대조하여 밝힌 것으로 상당한 개 연성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부수적 성과를 요약하자면 첫째, 사료를 교차 분석하 여 『대명집례』가 처음 어떤 경로를 통해 조선으로 유 입되었는지 밝혔다. 둘째, 『홍무예제』의 반강년도를 규 명하고 이 책이 반포되자마자 조선 태조에 의해 입수되 었음을 밝혔다. 셋째, 기존 연구들에서 인용한 『홍무예 제』의 내용은 모두 『대명회전』에 부분 발췌되었던 것 이었는데, 저자는 『홍무예제』원서를 분석하여 『대명 회전』에는 『홍무예제』의 반강년도가 기록되어 있지만 원서에는 반강년도가 기록되어 있지 않음을 발견하였다. 『대명회전』의 초판은 명 효종 홍치15년(1502)에 처음 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에, 조선은 『국조오례의』가 편찬 되는 1474년까지 『대명회전』을 볼 수 없었고 따라서 그들이 사직단 연구에 참고한 『홍무예제』는 년도가 표 기 안 된 원서였음을 확인 하였다.66) 넷째, 기존 연구들 에서는 다뤄지지 않았던 『예부지고』,『왕국전례』, 『속통지』,『오례통고』등의 서적에 명 사직단 제도 관 련 내용이 포함되어 있음을 찾아냈다.

    향후 한양사직단 관련 연구는 세종대 개축안과 현황의 불일치 원인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고 본다.

    Figure

    JAH-24-21_F1.gif

    Fromal plan of Sajik altar (Left: separate d alters(別壇) Right: integrated alter(合壇)), dra wn by author

    JAH-24-21_F2.gif

    Local Sajik altar in 『Hongwulizhi(洪武禮 制)』, the Ming dynasty

    JAH-24-21_F3.gif

    Sajik altar in 『GukjoOryeui(國朝五禮 儀)』, the Joseon dynasty

    JAH-24-21_F4.gif

    Kingdom Sajik altar in 『M ingjili(明集禮)』,the Ming dynasty

    JAH-24-21_F5.gif

    The relationship between Ming and J oseon Sajik architectural ordonnance

    Table

    Records on the architectural issue for Sajik Altar in 『Sejong chronicles』, the Joseon dynasty

    Footnote

    • 한형주,『朝鮮初期國家祭禮硏究』,일조각, 2002. 김해영,『朝鮮 初期祭祀典禮硏究』집문당, 2003.
    • [明]張卥『皇明制書』,『續修四庫全書』卷788·史部·政書類,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13
    • 장지영, 「조선 초 중앙 사직단 단제의 형성과 그 성격」, 서울 학연구 제43호(2011년 여름) p.103〜148
    • 장지영은「조선 초 중앙 사직단 단제의 형성과 그 성격」p.114에 서 “당시 명의 사직단은 태사태직단 휘하 왕국사직단과 부현사직단 등이 모두 별단이 아니라 동단으로 건설되었기 때문이다”라 보았지 만 당시 명의 왕국사직단은 별단 형식이었다.
    • 亞白楊,『北京社稷建築硏究』, 天津大學博士學位論文, 2005
    • 包誌禹, 『明代北直隸城市平面形態與建築規制硏究』, 淸華大學博 士學位論文, 2009. p.139〜180
    • 포지우 논문의 사직단 부분은 발굴 문헌기록과 도상자료들을 시 기 순으로 나열하는데 그쳤다. 제도의 개정원인, 문헌 기록간 모순 된 내용에 대한 대조검증 등이 체계적인 분석이 부족하다.
    • 『周禮·天官』“冢宰. 掌舍掌王之會同之舍. 設梐枑再重. 設車宮轅 門, 為壇壝, 宮棘門, 為帷宮, 設旌門. 無宮, 則共人門. 凡舍事則掌之.” 『周禮·地官』“封人. 掌設王之社壝, 爲畿封而樹之.”
    • [宋]朱熹『매암선생문공문집(晦庵先生朱文公文潗)』권68「답사단 설(答社壇設)」: “四角築土為壝, 高三尺許, 使壇上與齋廳相望得見. 壝 上不用瓦蓋, 但以磚兩面砌之, 使其走水, 尤為堅固.”
    • 고문헌에서도 유와 원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한형주, 김해영 등의 연구에서도 유와 원[장]의 개념을 혼동하는 오류가 보인다.
    • 원문에는 “관조척(官造尺)”이라 하였다.
    • 주희의 학설에 따라 주척 기준 2장5척으로 만드는 방안도 검토 하였으나 제기를 모두 수용할 수 없어 영조척 기준으로 바꿨다.
    • 사직단의 창건 형제는 『태조실록』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세종실록』14년 9월1일에 기록된 사직단 개축논의 과정에서 그 형제가 설명 되어있다. 이는 장지영이 처음으로 밝힌 것이다.
    • 이는 장지영이 밝힌 것이다.
    • 『태종실록』16년 9월10일: “원단·사직·풍운뢰우·선농의 여러 단 에 재실을 지었으니, 예조의 계문에 따른 것이었다.”
    • 세종 14년 집현전 측량 결과
    • 社稷坛. 坐南向北, 方二丈五尺, 高三尺, 四出陛各三级, 饰以方色 土, 盖以黄土. 石主, 长二尺五寸, 方一丈(尺의 오기), 剡其上培其下半, 當坛上南陛之上. 两壝, 每壝二十五步. 以丈计之, 六尺为步, 则为十 五丈也. 尺用营造尺.
    • 社稷社土神稷穀神壇在都城內西. 社在東, 稷在西. 兩壇各方二丈五尺, 高三尺, 四出階, 各三級, 壇飾隨方色, 燾以黃土, 社有石主長二尺五寸, 方一尺, 剡其上培其下半, 當壇南階之上, 四門同一壝方二十五步,以丈 計之六尺爲步則十五丈也. 尺用营造尺.
    • 장지영은 1985년 『서울사직단 고증조사 및 복원기본계획 보고 서』를 근거로 현존 사직단 단 사이의 거리는 영조척 5척으로 태조 때와 동일하고 유의 한 변의 길이는 영조척 10장으로 태종 때와 동 일함을 지적하고 세종대 사직단 최종안의 제사영역 부분은 논의만 되고 실현되지 않았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 『명집례』권8·단유(壇壝)·당송사직단: “唐社稷壇廣五丈, 稷壇如 社之制, 四靣宫垣華飾, 各依方色, 靣各一屋, 三門, 每門二十四㦸, 四 隅皆連飾, 浮思在南, 無屋.……宋政和三年儀禮局定太社壇, 廣五丈, 髙 五尺, 四出陛, 社東, 稷西, 四門, 同一壝, 二十五步, 壇飾各隨方色, 覆 以黄土於大社, 壇内設北牖, 以備親祠, 南向答隂之義.”
    • 료가 있어 그의 추정은 틀린 듯하다.정경희는 『조선전기 예제 예학 연구』p.2 각주7에서 『고려 사』권64 지18 예6 오복제도 “공양왕 3년(1391) 5월 경자일에 관복 제도를 개정하니 일괄적으로 대명률 복제식을 따랐다” 및 권136 열 전 제49 “(1387년)명나라 제도에 의거하여 백관의 관복을 제정하였 다”에 근거하여 고려 말에 『홍무예제』가 도입되었다고 추정하였 으나, 하지만 『홍무예제』는 홍무26년(1393)년에 반강되었다는 사 료가 있어 그의 추정은 틀린 듯하다.
    • 『세종실록』14년 9월1일 기사에 언급 되어있다.
    • 『세종실록』14년 9월1일: “예조에서 아뢰기를……태조(太祖) 시대에 쌓은 사직단의 규모도 오히려 보존될 것입니다.”
    • 성종 때 간행된 『국조오례의』와 정조 때 간행된 『사직서의 궤(社稷署儀軌)』에서는 모두 “方一尺”으로 바르게 기록되어 있다.
    • 문맥상 “其上培其下半, 當坛上南陛之上”와 “其上培其下, 半當坛 上南陛之上”이 가능한데, 명『태조실록』권37 홍무 원년(1368)에 공포 부주현사지단 제도에 “社以石爲主,……剡其上, 培其下之半, 在 壇之南.”이라는 구절이 있어 전자가 타당함을 알 수 있다.
    • 역대 문헌을 보면 사직단 석주의 설치방식을 “培”와 “埋”의 두 가지 동사로 표현하여 혼동을 초래하여 『문헌통고(文献通考)』82권 사직고15 사직편, 명『태조실록』홍무10년(1377) 사직단 기사 등 에서 이에 대해 특별히 고증을 하였을 정도이다. 송 『후국통사의례 (侯國通祀儀禮)』, 명『태조실록』홍무원년(1368) 12월 기축일 사직 단기사, 『대명집례』권49에 기록된 홍무2년(1369)의 사직제도에서 는 “培”를 썼다가, 이후 명『태조실록』권140 홍무10년(1377) 8월 계축일 “命改建社稷坛……『韩诗外传』云‘天子社主长五尺, 方二尺, 剡其上以象物生, 方其下以象地体, 埋其半以象根在土中而本末均也.’ 宋初, 祭社稷正配位用神位, 版大社又以石为主, 其形如钟, 长五尺方二 尺, 剡其上培其下半, 其中植槐, 是则木主, 石主前代盖兼用矣.……遂命 改作社稷坛于午门之右. 其制:社、稷共为一坛, …….石主崇五尺, 埋 坛之中, 微露其末”에서 고증을 통해 명확하게 매설로 규정하였는데 절반만 묻는 것이 아니라 뾰족한 끝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모두 매 설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홍무26년(1393)년에 반강된 『홍무예제』 에서도 이를 따라 “埋於壇南正中, 去壇二尺五寸, 止露圓尖, 餘埋土 中”라 하여 끝만을 남겨 놓은 채 완전히 매설하는 방식으로 상세하 고 명확하게 규정하였다. 반면 조선은 『홍무예제』를 입수했으나 여전히 『세종실록·오례』와 『사직서의궤』등에서 “培”를 썼다.
    • 장지영은 논문 p.134에서 “사직단의 제도가 모두 ‘양유’라고 거 론되어 있으며 거리가 25보씩 떨어진다고 나오나 현재 사직단의 규 모나 형식은 이에 부합하지 않는다.”라고 해석의 문제를 지적했다.
    • 고문헌에서 垣을 종종 外壝로 표기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원사(元史)』지(志)제27·제사5·태사태직: “二坛周围壝垣,……内壝 垣棂星门四所,外垣棂星门二所……外壝内北垣下屋七间……”을 보면 바깥담을 가리키는 단어로 外壝와 外垣을 혼용하고 있다.
    • 『원사』권72·지23·제사1·교사(郊祀) 상편의 원 황실 남교단(南 郊壇) 기록을 보면 “外設二壝, 内壝去壇二十五步, 外壝去内壝五十四 步, 壝各四門”라 하여, 외유의 치수는 내유로 부터의 거리로 표현됨 을 확인 할 수 있다. 송『정화오례신의』의 용례도 이와 동일한 의 미일 것으로 추측된다.
    • 송『정화오례신의』권1 단유에는 여러 단유들의 형제를 요약 정리하면서, 유를 “三壝, 每壝二十五歩”, “两壝, 每壝二十五步”, “ 一 壝二十五歩”등으로 일관되게 기록하고 있다. 三壝, 兩壝, 一壝는 담 의 겹 수를 직관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축약 표현으로 보인다.
    • 강제훈, 「조선 『世宗實錄』「五禮」의 편찬 경위와 성격」, 사학연구 제107호 (2012년 9월) p.169-227 중 p.186
    • 『세종실록·오례·길례서례·신위(神位)』:“社稷壇, 祭大社以后土氏 配, 祭大稷以后稷氏.” 장지영이 논문 p.134에서 지적하였다.
    • 『태종실록』6년 6월8일: “예조에서 아뢰기를……『홍무예제』 를 상고하건대, 부주군현에 모두 사직단을 세워 봄가을에 제사를 행 하고, 서민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이사(里社)에 제사를 지낸다고 하 였습니다. 이 제도에 의하여 개성 유후사 이하 각도 각 고을에 모두 사직단을 세워 제사를 행하게 하소서하니, 윤허하였다.”
    • 『세종실록』8년 4월25일 국가 풍운뇌우단의 제도를 논하는 과 정에서 閔義生, 朴堧, 安崇善, 辛引孙등은 『홍무예제』의 예제가 부주현급 제례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후왕급 예제가 아니 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지적은 후에도 여러 차례 등장한다.
    • 『세종실록』5년 4월23일 기사를 보면 참찬 黃喜가 명 사신 楊 善에게 여러 제사제도에 관해 질문하면서, 『홍무예제』사직제의 절차 문제를 물은 적은 있으나 제단 형식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이 외에 조선이 명에 사직제에 대해 문의한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 『태종실록』1년 12월9일 기사를 보면 명나라에 사신으로 이 서와 안원이 돌아와 “명나라의 예제를 예부에 청하였더니, ‘중국의 예제는 번국에서 행할 수 없다’라 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 『세종실록』22년 1월 8일: “김하 등에게 전지하기를, 지금 마포 10필을 보내 김신의 말을 들어서 『대명집례』를 사오게 하라.”『세 종실록』22년 2월 24일: “임금이 하(何)에게 이르기를, 네가 요동에 도착하거든 허지에게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예제는 한결같이 조정의 체례(體例)에 의함으로, 무릇 조정 예제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반드 시 얻으려고 힘씁니다. 내가 지난해 북경에 갔을 적에 예부에 나아 갔더니, 본부의 낭관이 『대명집례』한 부를 내어 보였는데, 28책 으로 장정되었습니다. 그 서적에 기재된 것은 모두가 예제인데, 내 가 그때에 그 서적을 얻지 못하고 왔습니다. 이제 내가 또 그 서적 을 얻으려고 하는데, 그대가 이제 북경으로 가니, 만약 이미 반강 (頒降)하였거든 그 서적을 얻어서 주고, 만약 본문을 얻지 못하거든 전사(傳寫)하여서 가져오면, 내가 후히 보답할 것입니다. 만약 조정 에서 비밀히 하여 일찍이 반강하지 않았으므로, 그대의 몸에 연루된 다면 그대가 반드시 구할 것 없고, 나도 역시 다시는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하라.”
    • 세종 이후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명나라 사신들이 조선 의 일부 예제가 『대명집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이에 조선 측에서는 그 책이 정식으로 조선에 배포된 적이 없다고 반론 하였다는 기사가 다수 발견된다. 조선 조정은 이 책의 입수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실록에 의하면 연산군1년 (1495)까지는 아직 입수하지 못하였고 광해군 1년(1609)에 문례관 이성(李惺)이 처음으로 이 책의 내용을 근거로 명 사신의 지적에 대 해 답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 책은 명의 예부에서 비장하고 있 던 것으로 명 가정9년(1530)에 정식으로 간행되었다. 따라서 이 책 은 1530∼1609년 사이에 조선에 정식으로 들어왔을 것으로 보인다.
    • 『세조실록』2년 3월 21일: “(김하가 아뢰길) 신이 세종조에 있 을 때 여러 번 북경에 나아가 『대명집례』를 상고하였습니다.”
    • 『국조보감(國朝寶鑑)』제10권을 보면 세조 2년의 정월 초하루 에 세조가 원구에서 천제를 지내었는데 “영신하는 때부터 망료 때 까지 『대명집례』에 따라 협종궁(夾鐘宮)으로 연주 하였다”라 기록 하고 있다. 즉 세종의 아들인 세조 초에 이미 국가 예제에 『대명집 례』를 적용하고 있음을 보아 세종조 후반에 이미 『대명집례』의 내용을 파악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 청 문연각『사고전서(四庫全書)』판 『명집례(明集禮)』권10 길례10 왕국사직 총서(總叙) : “凡建邦國, 立其社稷. 其壇制半於天子, 廣二丈五尺, 受土各以其方之色, 冒以黄. 為壇皆立樹以表其處, 又别為 石主以象神, 牲用少牢.”
    • 명대 문헌에서는 통상 “국조(國朝)”라고 부른다. 국조는 현재의 황조를 가리킨다.
    • 왕으로 임명되더라도 따로 분봉하여 번(藩)이라는 영토를 별도 로 할당 받지 못하면 번왕이 아니었다. 번왕의 왕부만이 분봉을 상 징하는 사직단을 갖추고 있었다.
    • 명『태조실록(太祖實錄)』오원년 8월 계축일: “오원년 8월 계축 일에, 원구, 방구 및 사직단이 완성되었다.……사직단은 궁성의 서남 쪽에 있으니 모두 북향으로 사가 동쪽에 직이 서쪽이다.”
    • 명『태조실록』홍무원년 12월 기축일: “천하군읍에 사직단제도 를 반포하니 단은 모두 성의 서북쪽에 설치하였다.”
    • 명『태조실록』홍무10년 8월 정미일에 기사에 명 태조가 사직 단의 개축을 지시하는 사건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 『명사(明史)』지23·예1·단유지제: “홍무10년에 (사직)단을 우문 오른쪽으로 옮기니 사와 직을 합해 하나의 단으로 2층[成]으로 만들 었다. 상층은 나비5장이고, 하층은 나비 5장3척이며, 높이는 5척 이 었다. 밖의 유(壝)는 높이가 5척이고 네 면이 각 19장이 조금 넘었 다. 밖의 원(垣)은 동서로 66장이 조금 넘고, 남북으로 86장이 조금 넘었다. 원 북쪽에는 3문을 내고, 문밖에는 제전(祭殿)을 만들고, 그 북쪽에는 배전(拜殿)을 만들었다. 밖에는 다시 3문을 두었다. 원의 동, 서, 남쪽은 문이 각 하나였다.”
    • 명『태조실록』홍무원년 12월 기축일: “천하군읍에 사직단제도 를 반포하니 단은 모두 성의 서북쪽에 설치하였다.”
    • 청 문연각『사고전서』판 『오례통고』권45·길례45·사직: “예부 관원이 간언하기를 “태사직은 이미 하나의 단에서 함께 제사를 지 내니 왕국 및 각 부․주․현 역시 단을 함께 하는 것이 마땅합니 다.……(태조께서) 윤허하셨다.”
    • 명 유여집(俞汝楫) 『예부지고』권30·유사사전하(有司祀典下): “홍무26년에 기록되기를 천하 부주현은 풍운뇌우, 산천, 사직, 성황, 공자 및 제사 없는 귀신 등에 합제하도록 명하였는데………체식은 『홍무예제』에 자세히 기록되었으니 지금 뒤에 열거하는 바이다. 사직은 부,주,현 동일 단의 형제는 동서 2장5척, 남북 2장5척, 높이 3척이고……”
    • 청 문연각『사고전서』판 『명집례』권10·길례10·왕국사직·총서: “(왕국사직은)당에서 송․원대에 이르기 까지는 봉건제를 시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형제가 없다.”
    • 명『태조실록』홍무3년 7월 신묘일: “뭇 왕부를 건설하라 명하 였다.”
    • 『예부지고』권77·종번비고(宗藩備考)·번례에 「왕국의 제사 제 도를 정하다[定王國祀制]」편에서 홍무4년 국사직단의 형제를 결정 한 배경과 최종 형제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 청 문연각『사고전서』판 『흠정속통지(欽定續通志)』권112·예 략(禮畧)·길례(吉禮)·사직: “(홍무)4년에 왕국사직의 제를 정하니, 왕 궁 문의 오른쪽에 세우고, 단은 정방형으로 나비는 3장5척, 높이는 3척5촌이며 네방향으로 계단을 내니, 그 형제가 위로는 태사와 다르 고 아래로는 군읍의 형제와 달랐다.”
    • 청 문연각『사고전서』판 『오례통고(五禮通考)』권45·길례45· 사직
    • 청 문연각『사고전서』판 『오례통고』권45·길례45·사직: “(홍 무)13년 9월에 처음처럼 두 단이 한 유 안에 있게 다시금 제도를 정하였다.” 명 『태조실록』13년 11월 경자일: “왕국사직 및 산천단 의 형제를 다시 정하였다. 사직 두 단간의 거리는 2장5척이고, 단의 나비는 2장5척이며 높이는 3척5촌이고 사방에 계단을 낸다.”
    • 장지영은 「조선 초 중앙 사직단 단제의 형성과 그 성격」, 서 울학연구 제43호(2011년 여름) p.117에서 “조선이 건국된 시기에 명 에서는 이미 사단과 직단을 합한 同壇구조의 사직단 제도를 채택 하고 있었으며, 특히 고려 우왕대 명 사신이 고려의 사직단을 답사 했을 때도 명은 이미 동단 구조의 사직단 제도를 채택한지 10년이 된 시점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명 사신들은 齋廬가 없다는 점만을 지적했을 뿐 별단 구조의 사직단 등에 대해 언급하였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그들이 동단 구조를 강요하지는 않은 듯하다.”라 하였다. 하지만 고려 우왕 때 명 사신이 고려사직단의 형제를 지적 하지 않은 이유는 당시 명의 왕국사직단이 별단이었기 때문이다.
    • 명 가정년간에 북경 서원(西苑) 안에 새롭게 추가되었으나 다음 조에서 폐지되었다,
    • 『명사』권47·지23·례1·길례1·단유지제
    • 『예부지고』권77·종번비고·번례·번사(藩祀).
    • 별단(2장5척,3척/1368)→별단(3장5척,3척5촌/1371)→합단(1378) →별단(1380) 중에서 포지우는 굵은 글씨로 표시된 과정만 규명하였 다. 『明代北直隸城市平面形態與建築規制硏究』p.165
    • [명]종방(鐘芳)『균계문집(筠溪文集)』권18,「걸은균분제서이편 전수사(乞恩均頒制書以便典守事)」: “『대명집례』는 우리 태조 고 황제께서 군신을 소집하여 전대의 제도를 널리 모으고 당시의 요구 를 더하여 모아서 편찬하여 만세의 가르침으로 삼으셨으나, 숨겨서 비밀로 하니 본 자가 드뭅니다.”
    • 심지어 명대 주근(朱勤)이 왕급 예제만을 따로 모아 집필한 『왕국전례(王國典禮)』에도 왕국사직단의 형제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 『태종실록』16년(1416) 6월 1일 기사에 실린 경승부윤 번계량 이 올린 글을 보면 : “우리 동방은 단군이 시조인데, 대개 하늘에서 내려왔고 천자가 분봉(分封)한 나라가 아닙니다.……신은 하늘에 제 사하는 예를 폐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내용이 있다.
    • [원]탈인(脱因)『지순진강지(至顺镇江志)』권13·단유:“按『侯国 通祀仪礼』载, 其坛壝之度, 社以后土句龙氏配, 稷以后稷氏配. 社方二 丈五尺,高三尺,四出陛. 稷在西,如社之制. 社以石为主,其形如 钟,长二尺五寸,广一丈(尺의 오기),剡其上培其下. 稷坛如社坛之制. 同一壝二十五步.”
    • 조선시대에 유입된 『홍무예제』는 보물 제1079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

    1. [朝鮮]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朝鮮王朝實錄),
    2. [朝鮮]Xin Suk-ju (1474) GukjoOryeui , GukjoOryeui(國朝五禮儀),
    3. [朝鮮] (1909) Guk J o Bo Gam(國朝寶鑑) ,
    4. [戰國]Zhou Li (2011) Zhongzhouguji press, 周 禮
    5. [宋]Zhu Xi (2006) Mei An Xian Sheng Wen Gong Wen Ji, Chinese national library press, 朱 熹 (2006) 晦庵先生朱文公文潗,
    6. [元]Tuo Yin Zhi Shun Zhen J iang Zhi, 脱 因 至顺 镇江志,
    7. [明] (1966) Emperor of the Ming Dynasty record, Institute of history and philosophy, academia sinica, 明實錄,
    8. [明]Zhang Xi (2013) Huang Ming Zhi Shu , Xu Xiu Si Ku Quan Shu, Shanghaiguji press, 張 卥 (2013) 皇明制 書 , 續修四庫全書,
    9. [明]Xu Yi-kui Da Ming J i Li, 徐一夔 大明集禮,
    10. [明]Da Ming Hui Dian, 大明會典,
    11. [明]Zhu Qin Wang Guo Dian Li, 朱 勤 王國典禮,
    12. [明]Yu Nv-zhi Li Bu Zhi Gao, 俞 汝楫 禮部志稿,
    13. [明]Zhong Fang Jun Xi Wen Ji, 鐘 芳 筠溪文集,
    14. [淸]Ji Huangi Qin Ding Xu Tong Zhii, 嵇 璜 欽定續通志,
    15. [淸]Qin Hui-tian Wu Li Tong Kao, 秦 蕙田 五禮通考,
    16. Han Hyeng-Ju (2002) A study on the national sacrificial rites in the early J oseon period, Ilchokak, 朝鮮初期國家祭禮硏 究,
    17. Kim Hae-yong (2003) A study on the sacrificial rites in the early J oseon period, Jipmoondang, 朝鮮初期祭祀典禮硏究,
    18. Zhang Ji-yong (2011) “Formation of the Institution of Ha M.A. thesesnseong Capital city’s Sajik-danAltar in th e early days of Joseon, and its meaning” , The Journal of Seoul Studies, Vol.43 ; pp.103-148
    19. Ya Bai-yang (2005) The research on the architec ture of the temple of Sehji, Tianjin Univ, 亞 白楊 北京社稷建築硏 究,
    20. Bao Zhi-yu (2009) Research on city shape and ar chitectural ordonnance of Beizhili’s prefecture, depar tment and county in Ming dynasty, Tsinghua Univ, 包 誌禹 明代北直隸城市平 面形態與建築規制硏究,
    21. Joeng Kyong-hee (2000) A study on the ritual institution and the ritual science in the former Chosun dynasty , Seoul Univ,
    22. Kang Jae-moon (2012) Review on the first appendix “five rites” of Sejong-chronicle in J oseon , The Review of Korean History September, Vol.107 ; pp.169-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