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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 1598-1142(Print)
ISSN : 2383-9066(Online)
Journal of architectural history Vol.24 No.4 pp.65-74
DOI : https://doi.org/10.7738/JAH.2015.24.4.065

A Study of Architectural Activities in China Jichang(吉長)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Dong-soo Han**
*
Corresponding author : dsharn@hanyang.ac.kr
July 28, 2015 August 31, 2015

Abstract

This paper deals with architectural activities related to Korean society in Jichang district in North East China, focused on the articles of Manseon-ilbo published ther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Construction-related contents in the area closely connected with topical interest, publicity, and enlightenment as a local media source provide positive grounds about pending issues in colonial situations.

This paper handles with articles issued in the 1940’s newspapers just before the Pacific War. At that time Japanese enter in the Chinese continent, and construct a stable basis in the intimate association with Germany and Italy, countering against the United State.

Among articles regarding architecture, most of contents are based on healthcare and public facilities, and urban planning. Overwhelmingly the most popular articles are about new constructions of educational facilities and residential matters. The shortage of goods and the excessive concentration of population resulted in urban and house problems, which were particularly much more serious in Korea society. Such social atmosphere made all activities regarding building constructions, in particular educational facilities, in civil level rather than the helps of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Thus, through education and house matters we can read a slice of Korean society to survive in the colonial environment of Jichang district.


일제강점기 길장지구 한인 관련 건축활동과 시설에 관한 연구*

이 논문은 2011년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
원을 받아 연구되었음(NRF-2011-32A-A00008)


-만선일보의 기사를 중심으로-

한 동 수**
한양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초록


    Ministry of Education
    NRF-2011-32A-A00008

    1.서 론

    1-1.연구 배경 및 목적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 길장지구에서 간행된 대표적인 신문인 《만선일보(滿鮮日報)》의 기사를 중심으로 이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사회와 관련된 건축 활동을 살펴본 것이다. 그동안 길장지구의 한인사회와 관련된 연구는 대부분 독립운동 내지 이주라고 하는 개념을 기반으로 한 한인들의 일반적인 사회조직과 구조, 생활실태 등 주 로 역사학이나 인문학적인 연구가 주류를 이루어왔으며, 《만선일보(滿鮮日報)》에 대한 연구 역시 인문학 쪽에 서의 연구 성과가 나와 있을 뿐이다. 이와 관련된 대표 적인 연구 성과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Fig .1

    김려실, 조선영화의 만주 유입: 『만선일보』의 순회영 사를 중심으로, 한국문학연구 제32집, 2007년

    김화선, 『滿鮮日報』에 수록된 일제말 아동문학 연구, 비평문학 제19호, 2004년

    변옥정, 일제 강점기 만주 유이민 소설 연구: 「만선일 보」수록 소설을 중심으로, 영남대 석사학위논문, 1997년 오양호, 滿鮮日報文藝欄硏究, 인천대 학술논문집 제20 집, 1995년

    오양호, 1940年代超現實主義詩考察,1 :<滿鮮日報> 所 在詩를 중심으로, 인천대 학술논문집 제16집, 1991년

    정진석, 滿州의 한국어 言論史연구; 滿州日報(1919)에서 滿鮮日報(1945)까지, 신문연구 제47집, 1987년

    만선일보(滿鮮日報)》는 이러한 인문학에서의 접근 이외에도 그 기사 가운데 우리가 주목해 볼만 한 것으로 는 150만에서 200만 명에 이르는 한인과 직접 또는 간접 적으로 관련된 이 지역의 건설 활동에 대한 보도라고 할 수 있다. 건축은 정치, 사회, 문화를 담아내는 종합적인 구축물이므로 이러한 건설 활동에 대한 체계적인 조명은 기존의 연구 분야가 규명할 수 없는 다양한 사회적 층위 의 모습을 밝혀 낼 수가 있다.

    특히, 언론매체로서의 신문이 가지고 있는 시사, 홍보, 계몽 등의 기능으로 볼 때 건축에 대한 조명은 일제의 길장지구 한인 통치에 대한 또 다른 문제의식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 학계에서 는 길장지구를 포함한 만주국 내 한인 사회와 관련 건축 전반에 관한 실태조사는 물론이고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기반도 세워져 있지 않다. 다만 개별적인 건물을 통한 간헐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대부분의 연구 성과 역시 농촌취락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대표적 인 연구 성과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김일학, 중국조선족 농촌주거공간의 특성과 변천에 관 한 연구, 한양대 박사학위논문, 2010년

    임금화, 두만강 북안 조선족 농촌마을 공간구조 및 주 거형태의 변천, 청주대 박사학위논문, 2008년

    김정호, 동북지구 전통민거와 거주문화연구, 중앙민족학 원 박사학위논문, 2004년

    김준봉, 중국 동북지역 한인동포 전통민가 평면의 분류 와 특성, 충북대 박사학위논문, 2000년

    따라서 본 연구는 당시 《만선일보(滿鮮日報)》라는 언론매체의 주목을 받은 길장지구를 포함한 만주국 일대 의 한인 관련 주요 건설 활동을 조명함으로써 일제가 이 지역에서 한인 사회를 어떻게 식민지 공간으로 편입하여 조직화 시켰는지 그 물리적인 양상을 규명해 보는데 의 의가 있다.

    1-2.연구의 범위와 방법

    본 연구는 기본적으로 길림, 장춘 지역을 연구의 대상 지역으로 삼았으나 자료의 성격과 내용에 따라 가능한 범주에서는 이 지역을 이탈하더라도 그 성격과 중요도에 따라 만주국 전반에 걸친 공간을 대상으로 다루었다. 그 이유는 본 연구의 가장 기초적인 분석 자료인 《만선일 보(滿鮮日報)》의 기사 가운데 상당 부분이 길장 지구에 국한되지 않고 만주국의 타 지역 경내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의 기초자료를 확보하기 위하여 일차적으 로는 국립중앙도서관 전자도서관에서 확인해 볼 수 있는 《만선일보(滿鮮日報)》한인 관련 기사 12542건을 검토 하여 4520건의 어느 정도 연관성이 높은 기사로 확인 되 었으며 이 자료를 바탕으로 건축, 토목, 도시 관련 기사 를 328건을 추출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이 가운데 1940 년대의 기사 118건을 중심으로 분석을 하였다. 그리고 신문기사로서 내용이 미흡하거나 확인을 요하는 것은 당 시 만주토목건축협회에 의해 길장 지구에서 간행된 건축 관련 유력 잡지인 《만주건축협회잡지(滿洲建築協會雑 誌)》와 《만주기술협회지(滿洲技術協會誌)》, 일제강점 기 국내에서 간행된 유일한 건축 관련 잡지인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의 내용을 보조 자료로 사용하였다.

    2.만선일보의 설립 배경1)

    만선일보는 만주국 수도였던 신경(新京:지금의 長春) 에서 발행되고 있던 친일적 한국어 신문 《만몽일보(滿 蒙日報)》가 용정(龍井)에서 발행되고 있던 역시 같은 친일적 한국어 신문 《간도일보(間島日報)》를 통합하여 1937년 10월 21일 당시 단일지로 발간하면서 제호를 바 꾼 것이다. 《만몽일보》는 1933년 만주사변 후 지금의 창춘[長春]인 신경에서 창간된 일간신문이다.

    당시 만주에는 150만에서 200만 명에 이르는 한국인 이 살고 있었다. 정책적으로 이들을 대상으로 언론을 조 작하고 통제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던 일제는 만주에서 발행되고 있던 두 한국어 일간신문를 통합함으로써 언론 통제정책을 단행하였다. 일제는 이 신문을 통하여 그들 이 정치구호로 내세우고 있던 '만선일여(滿鮮一如)'를 달성하고, 5족협화(五族協和)2)를 도모하려고 한 것이다.Fig .2

    만선일보로 새로 출발한 다음해인 1938년 말에는 일제 로부터 많은 자금을 보조받아 조·석간을 발행하고, 국내 에도 지국을 설치하는 등 사세를 확장하였다. 초기에는 사장에 이용석(李容碩), 역대 고문에 진학문(秦學文)·최 남선(崔南善), 편집국장에 염상섭(廉想涉)·홍양명(洪陽 明), 기자로 안수길·박팔양·이석훈 등 유명 언론인과 문 인들이 참여하는 등 한국인이 취임, 활동하였으나 1940 년대에 들어와서는 일본인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1945년 광복 때까지 만주지방 유일의 한국어 신문으로 발행되었다. 박영준(朴榮濬)·염상섭·안수길(安壽吉) 등이 이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였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다수의 한국어 신문이 폐간된 상 황에서 한국어로 발간된 만선일보는 민족문학을 유지 계 승했다는 측면도 갖고 있었다. 긍정적 측면을 강조하는 이러한 지적에는 만선일보가 한국어 신문으로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에 대하여 한국민에게 자주성을 부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재만 한국인에 대한 만주국의 계몽적 필요성 때문이라는 반박이 있다. 만선일보는 1945년 태 평양 전쟁 종전으로 후원자인 일본 제국이 패망하면서 폐간되었다.Fig .3

    3.1930년대 재만 한인의 직업 현황

    농업은 이 지역의 한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직 업이었으나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그 비율은 축소되는 추세였다. 일본의 만주 지역에 대한 통치가 뿌리를 내림 에 따라 이와 관련된 업종의 한인들이 늘어났다. 장춘지 역에는 일본 장춘영사관 관내 6개 현의 조선이주민은 1922년에 2350가구, 11750명인데 농업을 제외하고는 쌀 장사, 돈장사를 위주로 하였으며 다음으로 특산물상, 잡 화상, 운수업 등에 40명, 여인숙업에 6명, 요리점에 5명, 약재상에 2명, 정밀업에 2명 정도였다. 1934년도에는 관 내 조선인주민은 2661가구, 시가지 거주민은 1224가구였 으며 이들 가운데 일본측 및 위만주국측의 관리 및 은행 직원으로 일하는 조선이주민이 늘어나고 있었으며 거류 민이 대부분은 소장본의 상공업자, 점원, 직원이었다. 또 한 신경, 장춘에서 정미업은 조선이주민의 독점업종이었 으나 이후 일본 대자본의 충격을 많이 받았으며 사평가 는 대 한국물산수출상으로 한때는 만주에서 꼽는 지위에 있었으나 평제선 오지의 개발로 인하여 과거의 명성을 잃고 말았다.3)(Tab.1참조)4)

    그리고 길림지역에는 화전, 몽강, 반석, 액목, 돈화, 서 란, 쌍양 각 현의 조선이주민은 1922년에 2430가구, 11796명이며 유벌업에 종사하는 자가 많았다. 일반 상업 으로는 곡물매매와 여관업을 경영하는 자가 15가구, 이 밖에 요리점, 잡화상, 의사 등이다.5) 1934년이 되면 이

    지역의 조선이주민 2800가구 가운데 약 90%가 농업에 종사하고 상업은 잡화상, 요리점, 여관업, 음식점을 위주 로 하였으며 요리점은 상당히 활기를 띠고 있었다.6) (Tab.2 참조)7)

    여기서 건축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된 공사청부업에 종 사하는 가구는 1934년에 169호, 2년 뒤인 1936년에 221 호로 32%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는데 농업과 관련된 업 종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 외의 다른 업종에 비하여 증가의 폭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37년의 통계자료8)에 따르면 반대로 공사청부업은 187호로 오히 려 감소하고 있어 공사청부업의 부침이 심했음을 보여준 다. 만주국의 상황을 심도 있게 연구한 윤휘탁은 조선인 들의 직업에서 공사청부업과 같은 서비스업의 종사자와 지식인 집단의 비중에 매우 낮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것은 다시 말해서 건축 관련 업종에 한인의 역할이 매우 빈약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며 1940년 1년간 만선일보 의 기사 가운데 건축업에 종사하는 인물로 소개된 것은 단 1건9)에 불과했다는 것만을 보더라도 그 상황을 미루 어 짐작해 볼 수 있다.

    4.1940년 만선일보의 한인 관련 건축 기사

    1940년을 전후로 한 시기는 일제가 중국 침략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도발하고 조선을 침략 전쟁의 병참기지로 만들기 위해 인적, 물적 자원을 착취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한반도를 비롯한 만주국 지역 내에서도 극도의 물 자부족에 내몰리고 있었으며 일상생활은 일본화를 강요 하는 한편, 창씨개명을 비롯한 식민지 전역에 걸쳐 신사 가 설치되어 신앙과 정신까지도 통제를 하였다. 이러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현상은 만선일보의 기사 속 에 그대로 반영되어 드러나고 있다.

    4-1.만선일보 건축 관련 기사의 특성

    만선일보는 조간과 석간이 동시에 발행되었는데 1면은 당연히 당시 가장 중요시 되던 일제의 전쟁 동향과 세계 각국의 정치, 군사, 경제적인 측면에 대한 것으로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그 상황을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반면 건축 관련 기사는 조석간의 2, 3면에 보도가 되다가 점 차 북만(北滿)과 간도(間島) 부분이 별도의 지면으로 할 애 되면서 이 부분으로 옮겨가게 된다.10) 이후 신문의 면수가 대폭 증가 되고 편제에 변화를 가져오면서 북만 (北滿), 남만(南滿), 지나(支那) 지역을 포괄하는 종합판 (綜合版)과 간도동만판(間島東滿版)이 고정된 지면으로 정착되자 여기서 간헐적으로 확인이 된다.11)

    물론 다른 기사의 양으로 보면 건축 관련 기사는 매우 빈약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나마 보도의 내용도 대부분 매우 간략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건축 분야의 모순과 불합리한 점을 들춰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정부 당국에 의해 원만하게 해결되고 있음 을 강조하는 하고 면이 보인다. 따라서 오늘날 신문을 비롯한 언론매체가 가지고 있는 권력과 금권, 부패에 대 한 견제 기능 보다는 일종이 홍보와 선전, 선동의 기능 이 돋보인다고 하겠다. 또 하나의 특징은 하나의 기사를 지속적으로 소개하는 것이다. 건축 관련 기사의 경우는 준비, 착공, 준공의 시차적인 차이가 있는데 이러한 것을 지속적으로 추적하여 보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용정(龍井)의 개척의학원(開拓醫學院) 같은 보도의 예가 그러하다.12)

    4-2.만선일보 건축 관련 기사의 유형

    1940년 만선일보에 보이는 한인 관련 건축 기사는 주 로 3가지 측면으로 크게 구분이 된다. 하나는 교육시설 과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택문제에 관한 것이며 세 번째로는 공공시설에 관한 기사라고 할 수 있다. 교 육시설은 재만 한인들은 물론 식민지 교육에 열을 올리 던 일제가 가장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건축 관련 기사의 절대 다수를 점유하고 있다. 그리고 주택문 제는 당시 만주국의 건설과 조선반도로부터 한인들의 이 주로 인한 각 지역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가 초래한 것이 다. 게다가 전시 총동원에 따른 물자의 부족은 원활한 주택 물량을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사회문제가 되었다.

    (1)교육시설에 관한 기사

    이와 관련된 기사들을 살펴보면 교육시설은 용정의 개 척의학원(開拓醫學院)처럼 학교 자체를 새로 신설하는 것13)에서부터 왕청현의 신흥초등학교처럼 교실을 증축하 는 것14), 연길 국민고등학교처럼 부지를 이전하여 새로 짓는 것15) 등 다양한 양상들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 가 운데 흥미로운 것은 도광국민우급학교(道光國民優級學 校)에 관한 기사로 연길현 태양촌에 각지에 흩어져 있는 각 분교를 이전하여 한 곳에 모아 학교를 설립하게 되었 다는 내용이다.16) 또한 학교의 유형도 유치원에서부터 국민우급학교, 국민고등학교 의학원아l나 농학원, 훈련소 와 같은 전문교육기관 등 현지의 실정이나 필요에 부응 하는 학교시설들이라고 하겠다.

    교육시설에 관한 보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특이한 현상의 하나는 대부분 필요한 재원이 지역의 한인 유지 와 일반 민중들의 기부금에 의하여 조달되고 있다는 점 이다. 보도 내용의 귀절을 인용해보면 “...현민의 힘으 로...”, “...지방의 제씨가 단언궐기야 학교건축 기부금 모 집에 착수하야...”, “...우리들의 열의와 노력으로...기금을 갹출...”, “...여기저기서 쟁선하여 설립자금을 거출하는 데...”, “...학부형들의 열성...” 등등의 표현이 보인다. 이는 한인들의 강력한 교육열을 일제가 신문이라는 보도 매체 를 통해 교묘하게 이용하여 각지 행정 당국의 재정적인 부담을 줄이고자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주택에 관한 기사

    이와 관련된 기사는 대부분 당시 길장지구를 포함한

    만주국 전반에 걸친 것17)으로 인구의 증가에 따르지 못 하는 주택공급의 한계를 여실히 전해주고 있다. 과격한 표현이지만 “구가(求家)에 현상금을 거는 기현상”18)이라 든가 “주택지옥 비난에 房産의 변명”19)이라는 기사의 제 목이 말해 주듯 주택난의 심각성은 사회문제화 되고 있 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인들의 주택난은 더욱 고통 스러운 것이었다. 1940년 6월 8일자의 시평(時評)은 그 것인 단순히 물량의 문제에만 있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 기사의 제목은“주택난과 선계(鮮系) 자판책여하(自辦 策如何)”인데 그 내용을 일부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현재의 내지인이나 만계 주택 소유자가 선계 사람들에 게 주택 임대를 기피하는 것은 조선인의 생활과 풍속에 적당하도록 조선식 온돌 기타 양식으로 개조되고 있다 는 사실이다...선계에 대한 임대 기피의 한 원인인 것도 물론이다. 조선인의 생활에 맞는 주택을 공급하는 것이 필요하다...”20)

    이것은 한인들의 독특한 주거문화가 이질적인 주거공 간과 손쉽게 융합하지 못하는 한인만의 강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외에도 주택난의 해소를 위해 물자부족에 시달렸던 이 시기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여 일부 대도시 지역에 서는 철근 연화제의 주택만을 허가해 주던 방침을 바꾸 어 흙벽돌이나 토장조(土藏造)의 건축도 일정한 조건하 에서 허가하는 편법까지도 동원하고 있다.21) 건축 자재 난은 급기야 지옥(紙屋)22)이라고 불리는 기이한 유형의 주택도 출현시켰다. 이 뿐만 아니라 청부업자들에 의한 주택공사의 부실로 인한 한인의 피해도 종종 기사로 등 장하고 있다.23) 반면 보다 적극적인 타개책으로 일부 장 춘, 봉천 등의 대도시에서는 조선인주택조합을 결성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주택문제의 해결에 나서기도 했다.

    이 같은 몇 가지의 기사를 보더라도 당시 “살인적, 지 옥”이라는 주택난의 표현은 절대로 과장된 것이 아니었 고 그 피해는 한인들이 고스란히 떠안고 있었으며 그것 을 해결하기 위해 온갖 고육지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 다.

    (3)공공시설에 관한 기사

    공공시설에 관한 기사는 매우 드물게 보이는데 이는 아마도 당시 한인사회가 대부분 농촌경제에 뿌리를 두고 있고 도시기반 시설에 대한 투자가 미흡한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현재 찾아진 기사의 내용으로 보면 방송국, 도서관, 공회당, 시민운동장, 박물관24), 공원 등에 관한 것이다. 다른 기사에 비하여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다. 이 가운데 몇 차례 연속적으로 보도된 것은 연길의 시민운동장과 공원에 관한 기사인데 비교적 상세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25) 특히 공원의 계획은 이 를 담당한 기사의 이름까지 밝혀져 있는데 그는 일본인 하라다(原田)였다. 그 외에도 도시의 미화를 위한 시민은 동원한 대청소 행사라든가 식목행사 등과 같은 계몽적 활동에 대한 기사도 간혹 보이고 있다.

    (4)기타

    그밖에 한 가지 주목할 현상 가운데 하나는 당시 국가 총동원이라는 시국과 관련하여 만주국의 국도 신경, 즉 장춘의 건설과 관련하여 흥아근로봉사단(興亞建設奉仕 團)이 조선 반도 내에서 선발되어 파견되고 있다는 사실 이다. 1940년 4월 10일자 만선일보에는 조선 전국 260개 부군도(府郡道)로부터 대표를 1명씩 선발하고 학생대표 와 합하여 388명이 1개월간 봉사를 하게 되었다는 내용 을 보도하고 있다. 뒤를 이어 1940년 5월 31일자 만선일 보에는 만주건설의 봉사에 조선학생대도 참가를 한다고 보도 하면서 특기반 11교, 보통반 12교26)의 참가를 전하 고 있다. 이는 일제가 광산이나 공장에서 일하는 징용과 군입대를 하는 징병 이외에도 건설 현장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장소에 학생들을 봉사라는 미명하에 동원하고 있 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5.한인 관련 주요 건축 시설

    5-1.장춘 속의 한인 거리

    장춘은 그 내부에 4개의 상이한 지역이 서로 시기적으 로 발전하여 어우러진 도시이다. 4개의 지역이란 구도시, 만철부속지, 상부지(외국인 교역장소), 신시가지이다. 특 히 장춘은 1932년 3월 만주국의 수도로 정해지면서 신경 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37년 12월에는 만철부속지를 병 합하여 1942년 현재 신시가지구 10개, 농촌지구 6개로 확장되었다.27)Fig .4

    신경의 대표적인 한인거리는 매지정(梅技町), 조일통 (朝日通), 영락정(永樂町) 등이 그 지구로 형성되어 있었 다. 이 부근 일대엔 거주하는 한인의 숫자는 1938년 7월 현재 2000여명 정도(그 나머지 지역에 12,000명이 산재) 였다. 이곳에는 한인 이외에도 일본인, 몽골인, 약간의 러시아인이 혼합되어 거주하고 있었다. 이 지구내에는 일본 영사관을 비롯하여 신경조선인협화회분회, 신경조선 인협화문화부, 신경조통학교, 기타 사회 각 단체 등 한인 인사회의 친목단체와 만주국지도단체가 몰려 있었다.28)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 이 지역은 대부분 기존의 시설을 철거하고 대규모의 도시개발이 진행되어 과거의 모습은 남기고 있는 영사관 등 몇몇 시설에 불과하다.29)

    5-2.영사관 등의 외교 관련 시설

    용정 일본 총영사관건물은 일본 외무대신의 지휘를 직 접 받아 건설되었다. 영사관의 편제는 총영사 1명, 영사 (사법영사) 2명, 부영사 2명, 통역 1명, 문서 5명, 무전기 사 3명으로 이루어졌다. 나가다기 요다로가 초기 대리 총영사로 부임되었으며 총영사관 산에는 경찰부를, 각 영사 분관에는 경찰서를 설치하고 300여 명의 경찰을 배 치하였다. 영사관 내에는 영사실, 경리실(회계실), 무전실, 법정, 경찰서, 감옥 등이 망라되었다. 용정의 일본 총영 사관은 외교 사무를 떠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기구였 다.30)

    1922년 11월 27일 이 건물들이 모두 화재로 소실되자 20여 만엔을 쏟아 부어 3년여 간 청사의 재건을 추진하 여 1926년에 청사가 준공되었다. 전체 대지 면적이 42944㎡이고, 건축면적은 2397㎡, 부속건물의 면적은 4300㎡이었다. 청사의 주변에는 높이가 2m가 넘는 담장 으로 둘러쌌으며 주요 청사는3층으로서 청사바닥은 철근 콘크리트, 벽은 붉은 벽돌, 외벽에는 미황색의 타일을 사 용하였으며 지붕에는 녹색페인트를 바른 양철지붕이었다. 지하실에는 감옥이 설치되었다. 청사 건물은 현재 용정 시 인민정부 사무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5-3.은행 등 금융 관련 시설

    조선이주민의 금융업 가운데 봉천 협제회사(協濟會社) 가 일본 독점자본의 부축 하에 등록자본 100만원을 가지 고 있었고 그 외에 간도흥업, 훈춘흥업, 투도구식산, 국 자가무역, 남만 안동 협성은행 등은 모두 10만원 이하의 소규모 자본업체들이 있었다.31)

    그리고 조선반도와 연결 지어 재만 한인에게 가장 친숙한 것은 조선은행 장춘지점으로 철도부속지의 중 심지인 남광장에 위치했으며, 1920년에 건설된 2층 벽 돌조건물이다.32) 입면은 기단부-본체-지붕상층부의 전 Fig .5

    형적인 3단 층 쌓기로 구성되어있다. 기단부에는 발코 니가 둘러져있으며, 개구부사이의 벽체에는 기둥모양 으로 오려진 판재가 지붕 상층부까지 세워져 있다. 이 러한 기둥모양의 판재는 개구부사이에 규칙적으로 나 열되었다. 기둥은 가려져있지만 벽기둥을 연상시키고 있다. 또한 지붕상층부는 장식된 사각판재로 마감되었 다. 1층 창문은 3부분이 세로로 분절된 장방형창호이 며, 상부창호는 기하학적 곡선의 상인방을 가졌으며 창문은 3부분이 세로로 분절되었다. 건물입구는 2개의 단순한 사각기둥이 세워졌으며, 기둥 사이를 연결하는 창방에는 서아시아의 식물문양이 조각되었다. 벽기둥 을 연상시키는 기법은 후기르네상스 매너리즘에서 유 행하던 방식이지만 원형에 충실한 전통어휘를 사용하 면서 장식어휘에 의한 벽기둥의 해체를 시도했다는 점 에서 아르누보(세제션)방식을 따르고 있다. 이것은 하 얼빈지점의 지붕 상층부에서도 시도되고 있다.

    나카무라 요시헤이가 설계한 이 건물의 특징은 그의 스승인 다츠노 긴고의 건축에서 빈번하게 사용했던 ‘전기 다츠노식’으로 불리는 붉은 벽돌과 백색띠로 벽 면을 구성하고 있다33). 나카무라 요시헤이는 서울의 조선식산은행(1919년)과 천도교중앙교회(1921년), 그리 고 예산의 호서은행(1921년) 등에서 다츠노와 세제션 의 입면디자인방식을 적용했다. 조선식산은행과 예산 호서은행의 경우, 건물상부에만 벽돌을 이용해서 건물 전체를 2개의 띠로 둘러싸고, 벽돌을 교대로 쌓고 있 다는 점에서 다츠노식의 후기양식에 해당된다. 이에 반해서 장춘지점은 상하부에 전체적으로 흰색의 화강 암 또는 벽돌과 붉은 벽돌을 교대로 쌓았다는 점에서 다츠노의 후기양식이라기 보다는 전기에 해당한다.34)Fig .6

    사실 조선은행의 해외 지점 가운데 만주와 중국 동 북부에는 장춘지점을 포함해서 모두 21개의 지점, 파 출소, 출장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장춘 조선은행 지점 과 달리 간도 용정촌에 설치된 조선은행 지점은 처음 에는 출장소로 시작하여 이후 지점으로 승격되었다. 건축물에 관해서는 현재 전경 사진이 하나 소개되어 있을 뿐인데 이 사진을 통해서 외관을 살펴보면 석재 를 조적직으로 쌓아 올리고 간략한 처마 끝에 코니스 를 돌려 간략하게 처리 하였으며 긴 창문의 상부는 둥 글게 처리한 다음 키스톤을 두었다. 또한 입구 부분을 강조하기 위하여 합각면을 설치하였다. 대체로 간결하 면서도 은행으로서의 위용을 보여준다.

    5-4.조선인민회 관련 시설

    조선인민회는 일본영사관의 기치 하에 조직된 친일단 체로서 표면적으로는 자치단체를 표방하여 한인들의 교 육, 위생, 권업, 민생, 생활개선, 풍속전승 등의 공공사업 에 종사하는 것을 표방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각 지역의 일본영사관을 보조하는 기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 건축의 형태는 각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Tab.3>와 같이 재료, 구조, 지붕형태 등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간도지역의 경우는 초기 에는 목조구조의 형식이나 지붕의 모습이 일본식의 풍격 을 따르는데 이는 당시 한반도 등의 지역에서도 보편적 으로 나타나고 있다. 위만 시기에 접어들게 되면 이 지 역의 조선인민회 건물은 화양절충식의 건축 풍격을 보이 고 건설비용 역시 높아지는데 이는 다른 지역에 비해서 자금이나 규모에서 유세한 지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남만지구를 보게 되면 이곳은 가장 이른 시기 에 조선인민회가 세워지지만 전반적인 건물의 신축은 간 도지역보다 늦어 대부분 1931년 이후라고 할 수 있다. 건물의 형식은 통상 러시아식이나 근대 양풍 혹은 화양 절충식의 풍격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북만지구의 경우 는 러시아식, 만주식, 개량된 조선민가식의 세 가지 유형 이 나타나는데 그 가운데도 전자의 두 가지가 다수를 점 유한다. 원인은 만주국이 세워지기 이전에 북만주지역은 러시아의 관할에 구역으로 도시의 모습이나 건축형태는 러시아식의 경향을 따라 지어졌을 뿐만 아니라 만주문화 의 발원지였기 때문이다. 만주국이 세워지고 난 이후에 는 북만주 지역에 이주한 한인개척민이 증가하여 각지에 는 50여개의 조선인민회가 만들어져 수량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많지만 그 규모는 작아서 건축물의 규모에 직접 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아마도 조선인민회의 건축물은 가장 두드러지게 이 지 역 한인사회의 건축 활동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

    으나 조선선축의 풍격을 결코 구현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만주식, 화양절충식을 채용함으로서 식민지 통치의 야심 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5-5.조선 농민 개척훈련소 관련 시설

    만척은 조선 농민에 대하여 훈련소를 개설하여 일본국 에 입각한 정신과 실무에 관한 훈련을 실시하였다. 훈련 소는 선만척식훈련소와 강밀봉개척훈련소 두 개소가 있 었다. 이 시설은 “개간민으로서 중견인물을 양성한다.”고 하는 목적으로 세워졌는데 전자는 강원도 평강군 고삽면 세포리에 1938년 1월 21일 처음으로 개학식을 거행하였 다. 반면 후자는 길림 영길현 강밀봉에 장소를 선정하고 농민훈련소를 개설하여 1939년 11월 21일에 문을 열었 다. 이 훈련소에서는 훈련생 모두를 기숙사에 수용하고 식비 및 기타 일체를 지불하였다.35)

    6.맺음말

    이상 길장 지구를 중심으로 만주국내의 한인 건축 관 련 만선일보의 기사를 살펴보았으며 이와 더불어 주요한 한인 관련 건축 시설에 대하여 분석을 해 보았다. 만선 일보의 기사는 주로 학교시설과, 주택문제에 관한 것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는 당시 한인의 사회 상과 시국의 특수성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들은 제공해 주고 있다.

    특히 학교시설의 건립에 있어서 한인들의 자금을 동원 하여 조달하고 있는 점은 일제의 치밀한 식민 정책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재만 한인이 보여준 고유의 주거습관에 대한 강한 집착이 이질적인 문화의 공존을 어렵게 할 뿐만 아니라 주택문제를 야기하는 하나의 원 인이었다고 하는 점은 오늘날 신한옥의 필요성을 외치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다음으로 주요 한인 관련 시설에 있어서는 가장 돋보 이는 것이 조선인민회의 건물들로서 만주국 전역에 걸쳐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이는 한인을 일제 식 민통치의 공간 속으로 편입시키는데 가장 큰 구심점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금융기관, 훈련소 등 의 시설 역시 식민공간 속에서 재만 한인의 삶과 의식을 자연스럽게 식민사회로 편입 시키는 주요한 기능을 발휘 하였다.

    향후 본 연구의 연속선상에서 만선일보의 기사 이외에 도 광고 부분에 주목을 해 본다면 당시 재만 한인 사회 의 구조를 이해하는 또 다른 기초자료가 될 것이다.

    Fig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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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춘에 있던 만주토목건축협회 신경 분관의 전경(1933년, 2008년, 2012년 현재), 2008년도의 사진을 보면 일 개층이 증축되 었음을 알 수 있으며 현재는 철거되었다. [출처: 長春近代建築圖鑑(2011년, 좌와 중), 필자촬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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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4년 5월 13일자 동아일보에 소개된 만선일보의 창 간준비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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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장춘(長春)의 동지가(同志街)에 있던 만선일보 사 옥 전경(좌)과 현재 철거되어 변화된 모습(우) (출처: 中國記憶論壇, www.memoryofchina.org, 필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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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인과 일본이이 함께 거주하던 조일통 부근 지역의 1930년대 모습과 재건축을 위해 대부분 철거된 현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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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춘 조선은행 지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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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도 용정촌 조선은행 지점 전경 (1931년 10월 21일자 아사히신문 보도사진)

    Table

    1937년 만주 전역 및 길림성, 신경(장춘) 지역 성별조선인 직업분포

    1934년, 1936년 재만조선인 직업분포

    한인관련 주요 건축 시설의 현황 –조선인민회

    Footnote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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