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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 1598-1142(Print)
ISSN : 2383-9066(Online)
Journal of architectural history Vol.24 No.4 pp.55-64
DOI : https://doi.org/10.7738/JAH.2015.24.4.055

A Study on the Brick-constructed Platform of the West hall in Hwangnyongsa temple site

Sookyung Kim
Corresponding author : sk2kim@hotmail.com
June 15, 2015 August 27, 2015

Abstract

This paper aimed to identify architectural historical meaning of the brick-constructed platform of the west hall in Hwangnyoungsa buddhist temple site based on studying published the excavation survey report and comparing with other platforms of Silla remains. Mass and height of the building has a hierarchical structure within a buddhist temple site, this is applicable in Hwangnyongsa. So in case of a rank equal to or lower buildings than the west hall, those of platforms were built of brick-constructed. As stone relics, jidaeseoks are very narrow, I think that wooden pagoda and main hall's platform were built of brick in first construction period. West hall's platform was built at the late 6th~the mid of 7th century, these brick-remains were considered as a quite earlier construction period relics. Because in west hall there is no jidaeseok under bricks, and all bricks relics have a rectangular shape.


황룡사 서금당 전축기단 연구

김 숙 경
국립문화재연구소 건축문화재연구실 황룡사복원정비사업단 선임연구원

초록


    1.서 론

    황룡사지 발굴조사(1976~1983) 결과, 각 건물지에는 초석과 초석 적심석군 외에 석조 기단유구 일부가 남아 있었다. 목탑지와 금당지에 남아있는 지대석은 상면이 평활한 장대석으로 적심석 위에 설치되어 있었고, 석조 디딤석과 계단 지대석 일부가 제 위치에서 남아있었다.

    발굴조사보고서(1984)에는 이러한 유구를 토대로 각 건물의 기단 복원안1)을 제시하고 있는데, 목탑은 석조 가구식 기단, 중금당은 석조 가구식 이중기단, 서금당은 전축 이중기단, 동금당은 장대석 한단 기단으로 추정하 였다.

    그런데 위와 같은 기단 복원안 대로라면 나란히 서 있 었던 세 금당이 기단의 구조와 의장에서부터 상당히 다 른 형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당시에 이 러한 건축계획이 있었다고 받아들이기는 어렵고, 오히려 각 건물지의 기단 유구에 대해 좀더 면밀한 고찰이 필요 하다고 생각되었다. 서금당지는 기단 동측면에서 부전(敷 塼)시설과 2단의 전축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황룡사지에 서 유일한 전축 이중기단으로 밝혀졌다.

    최근 조사된 경주 사천왕사(679 창건) 유적2)에서는 회 랑내곽에서 전축기단3)의 유구가 상당수 있었으며, 전축 기단의 구조와 축조방법도 다양한 양상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에 황룡사지 서금당의 전축기단 구축은 신라시대에 이미 보편적인 고대건축의 일면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 한다. 중국의 고대 회화와 유구에서 전축구조는 쉽게 찾 아볼 수 있으나 우리나라 고대 기단은 주로 석조 가구식 기단을 중심으로 다루어져 왔기 때문에4) 전축기단은 연 구대상으로서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천왕사지의 전석축기단과 감은사지나 불국사 에 남아있는 석조 가구식 기단 등을 통해서, 석조 가구 식 기단이 전축기단보다 더 고급스러운 기술로서 중요한 건물에 채택될 수 있었다거나, 또는 전축기단으로 처음 조성되었다가 재료의 내구성 보완이나 기술적인 발달로 점차 석조기단으로 중수되어가는 경향이 있었다고 가정 해볼 수 있다면, 지금 황룡사 서금당지에 남아있는 부전 시설은 우리나라 고대건축에서 더욱 의미있게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본 연구는 황룡사지 기단 유구에 대한 일차적인 조사 와 신라 유적지의 기단 유구를 비교․검토5)하여 전축기 단의 구성, 축조기법 등 건축적 특징을 밝히고, 그 결과 황룡사 서금당의 전축기단이 갖는 건축사적 의미를 규명 하고자 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2.황룡사지 기단 검토

    2.1.각 건물지의 기단 유구

    황룡사지 각 건물지는 기단토 토층단면 조사를 통해 수차례 중건 또는 중수한 흔적이 발견되나, 남아있는 기 단 유구는 최종시기의 것이며 기단의 선대 유구는 대부 분 확인하기 어렵다.6)

    각 건물지에 남아있는 기단 지대석은 대부분 한단 턱 이 있는 장대석이며 상면은 평활하였다. 즉 부재를 받기 위한 홈이나 조출흔적은 없었다.7) 한단 턱이 있는 지대 석은 신라 유적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서 보통 턱은 폭 5~6㎝, 높이 10~11㎝이다.

    중금당과 목탑의 경우, 기단 외주(外周)로 일정한 폭 의 답도가 갖추어져 있는데, 전돌이 깔려있는 답도의 바 깥 면은 방형 단면의 장대석으로 마감 처리되어 있다. 중금당은 이 답도(폭 약 2.3m)에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 워 상층기단 위의 건물과 연결되는 구조이나, 목탑은 초 석이 없이 답도로서만 두 겹으로 설치8)되어 있었다.(제1 답도 폭 약 1.65m, 제2답도 폭 1~1.15m <Fig.1, 2>)

    각 건물지에서 지대석 외에 면석이나 갑석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다른 유적의 자료를 참고하여 복원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중금당은 답도면과 기단상면에 부전시 설이 확인되었으며, 이외 동․서금당에서도 지대석과 부 전시설이 확인되었다.

    중심사역을 둘러싸는 위치에 있었던 강당, 강당 동․ 서편건물, 동․서회랑, 남회랑 등은 모두 장대석 한단 높 이(24~30㎝)의 기단이었으므로 복원안을 재고할 필요는 없다. 따라서 기단에 대한 복원적 고찰은 이 건물들을 제외한 목탑, 중금당과 동․서금당, 종․경루(추정), 중문 등이다. <Tab.1>은 각 건물지에서 출토된 기단 유구 현 황을 정리한 것이며 <Fig.3>은 지대석 실측도이다.Tab.2

    2.2.서금당지 기단 유구

    서금당지의 기단 유구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최종 시 기의 건물에 해당한다. 이 유구는 서금당지 자체로서는 최종시기의 것이나, 동편에서 익랑으로 연결되는 원서회 랑지 유구보다 앞서고 있기 때문에 황룡사지 전체 조영 기간에서는 상당히 이른 시기에 해당하며 목탑 창건기인 7세기 중반이 그 하한이라고 할 수 있다.9)

    발굴조사 결과를 참고하면, 서금당 최종 건물은 정교 한 판축공법의 온통기초로 축조되었기 때문에 선대 건물 의 기초 유구가 있었다고 해도 대부분 파괴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온통기초의 굴광선 바깥쪽에서 확인되는 원형 적심석들은 선대 유구이나, 축조법이나 주열이 맞지 않 기 때문에 선대 건물에 대해 규명하기는 어려운 상태이 다.(<Fig.4>)

    기단토 위에 남아있는 초석을 통해 서금당의 최종 건 물은 전면 7칸, 측면 4칸의 평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단의 규모는 건물지 외주에 남아있는 적심석열을 토대 로 동서 약 35.75m, 남북 약 20.3m 규모로 추정할 수 있으며 계단지는 발견되지 않았다.<Fig .5>

    기단의 동측과 남측 상면에 깔려있는 전돌은 대체로 38×19×7㎝ 내외 크기의 장방형 무문전이며 단면은 직절 한 형태이다. 서금당지 기단 동측면을 보면 전돌 6열이 남북방향으로 길게 줄눈을 맞추어 배치되어 있다. 그리 고 이것은 초석 적심석군이 위치한 건물 내측으로 한단 이 포개어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발굴조사 당시 기단면에 남아있는 것은 전축 두 단이 지만, 초석의 높이(약 37~45㎝)10)를 고려한다면 최소한.

    5~7단 정도 쌓아올려서 구성한 전축기단 유구였다고 판 단되었다. 남측면에서도 마찬가지로 전돌 장변이 동서방 향이 되도록 깔고 두 단이 포개어진 상태로 남아있었다. 전돌이 포개어진 상태로 발견된 위치는 외진주 주열선 (적심석군의 중심위치를 연결한 가상의 주열선)에서 밖 으로 약 1.1~1.2m 위치이다.

    보고서에는 서금당의 기단이 ‘2중적 전(塼)기단시설 ’11)이라고 기술되어 있고, <Fig.6>과 같이 복원도가 제시되어 있다. 서금당지에서 나타난 이러한 전축기단 축조법은 황룡사지에서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먼저 신라 의 다른 전축기단 사례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서금 당지의 유구는 신라 건축에서 보이는 가구식 전축기단의 축조법보다 더 단조롭고 문양전을 사용하지도 않았으며, 단순한 전축이라고 하더라도 하단에서 지대석으로 받거 나 내쌓기를 하는 방법도 나타나지 않았다.

    2.3.기존 기단복원안(1984) 재검토

    발굴조사 당시 황룡사지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인 중금당과 목탑은 초석과 지대석 일부가 남아있었는데, 기단토의 사면만 노출되자 지대석 위에 면석과 갑석을 갖춘 석조 가구식 기단으로 추정하였다. 아마도 통일신 라시대 대표적인 불교사원 유적(감은사지, 불국사 등)의 실례를 감안한 것 같다.(<Fig.7>)

    기단 유구는 발굴조사를 통해 유적에서 일차적으로 확 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한 사원내에서 건물의 중요도에 따라 건물의 규모와 의장적 요소는 건축적 위계를 갖고 계획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초석 이상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목조건물의 유적지에서 건축적 위계는 기단의 높이와 구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황룡사에서 금당 조성(584년, 기단고 110㎝) 이후 세 워진 목탑(645년, 기단고 157.4㎝)의 기단이 중금당보다 더 높게 조성된 것이나, 서금당 기단(기단고 85㎝)이 중 문(기단고 82㎝)이나 종․경루(추정) 기단(기단고 78㎝) 보다 더 높은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12)

    황룡사 목탑 기단이 감은사지 금당지와 같이 석조 지 대석 위에 탱주석 없이 면석과 갑석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면, 면석이 상당히 커지게 되기 때문에 이를 지지하 는 지대석도 단면이 충분히 확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 나 목탑지 지대석 실측결과, 10개 부재 중 8개 부재가 지대석 상면 폭이 23~31㎝13)로 한단 턱의 폭(4~4.6㎝) 을 빼면 19~26㎝인 것을 알 수 있다. 즉 약 1m 정도의 면석을 지지하기 위한 지대석 폭으로는 다소 좁은 편이 라고 생각된다. 이것에 대해서는 3장에서 다시 검토해보 도록 할 것이다. 또한 각 건물지에 남아있는 지대석 위 에 면석을 세우는 것 외에, 전돌을 놓아 쌓게 되면 전축 기단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한편 동금당지는 기단의 상면이 상당히 손상된 상태였 으나 적심석군의 배치를 통해 3차례 중건된 사실과, 최 종 건물이 서금당처럼 전면 7칸 측면 4칸의 건물이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남편에서 계단지 3개소(적 심석열)가 확인14)되며 기단 상면에 서금당지와 같은 크 기의 전돌(19.37×38.33×6.66㎝)이 깔려있는 것이 발견되 었다.15)(<Fig.8>(1))

    그러나 보고서에는 이 같은 조사 내용에 대해서 동금 당지 기단과 관련한 유구로 취급되지 않았고, 계단이 설 치될 필요가 없는 매우 낮은 기단으로 복원․정리하는 (<Fig.8>(2)) 오류를 낳았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동․서 금당 기단의 형태는 오히려 비슷하게 구성되었을 가능 성16)도 고려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황룡사내에서 서금당을 제외한 모든 주요 건물의 기단이 석조 가구식 기단이었다고 생각했던 것은 이제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당시 전축기 단이 석조 가구식 기단보다 계획적, 기술적으로 보다 쉬 운 선택적 상황이었을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해볼 필요 도 있다고 생각한다.<Fig .9>

    3.신라 유적지 기단유구 비교검토

    3.1.주요 검토 대상

    황룡사와 기단 유구를 비교 검토하려고 하는 대상은 황룡사와 동시대에 존재했고, 기단 조사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것에 한정하였다. 주된 검토 내용은 위의 [2.2] 및 [2.3]절에서 제기한 전축기단 축조기법과 석조 가구식 기단의 지대석 폭이다.<Fig .10>

    기단에서 전축조가 남아있는 유적은 사천왕사지, 고선 사지, 법광사지 등이며 이들 사례를 통해 다양한 전축기 단 축조법을 검토할 수 있다. 이 외 발해 및 고려시대 유구에서 전축기단 사례도 참고자료로서 활용하고자 한 다. 지대석과 면석의 결구를 확인할 수 있는 가구식 기 단은 사천왕사지, 감은사지, 불국사의 주요 건물지이며 그 외에는 대부분 지대석만 남아있는 실정이다.

    지대석 외주에 설치된 부전시설은 주로 금당지, 목탑 지의 답도로서 확인된다. 이것은 기단의 구조와 직접적 으로 관련짓기는 어렵지만, 고대건축에서 전돌의 사용 범위18)와 부전기법 등은 확인할 필요가 있다.

    3.2.전축기단

    사천왕사지 발굴조사 결과, 동․서탑지의 기단은 창건 때부터 가구식 전석축기단으로 축조된 것이 확실하게 밝 혀졌다. 지대석 위에 일정한 간격(약 70㎝)으로 탱주석을 세우고 그 사이를 ·당초문전+녹유신장벽전+당초문전· 이 하나의 세트로 채우는 형식이다.19) 지대석은 폭이 42 ㎝내외인데 한단 턱(폭6㎝, 높이11㎝)이 있고, 상면에는 탱주석을 지지하기 위해 폭19~20㎝, 깊이1~2㎝의 홈이 있었다.

    또한 사천왕사지 강당지, 강당 서편건물지, 동회랑지에 서는 판판하게 가공한 할석(20~50㎝내외)위에 장방형 무문전(33×16.5×5㎝) 1단이 남아있어 초석 높이까지 몇 단 이상 쌓아올리는 전축기단 건물이었던 것으로 확인되 었다. 특히 이들 건물지에는 계단도 판석 위에 전돌(보상 화문전과 무문전)을 쌓아 구성하고 있어 매우 특징적이 다. 이러한 계단시설은 발해 상경성 제2궁전지에서 확인 할 수 있다.20) 아래 <Tab.3>에서 보는 것처럼 사천왕사 지는 건물의 위계에 따라 계단 높이를 정하였고 석조 기 단이 전축 기단보다 위계가 높다고 볼 수 있다.

    진평왕대에 창건된 법광사지 큰 법당지에는 많은 초석 과 불상좌대 등이 남아있는데, 이 법당의 남면 계단 우 측편에서 전축기단 유구가 확인되었다. 지대석 위에 7단 의 전축이 남아있는데 전축 뒷채움 흙속에서 고려 또는 조선시대 기와조각이 발견되므로 이후에 고쳐 쌓은 것으 로 판단된다.22)(<Fig.11>)

    7세기 후반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선사지는 금당 지 기단유구가 잘 남아있는데 지대석에서 초석까지의 높 이 차이는 72㎝로23) 그리 높지 않다. 금당지는 아래 그 림과 같이 기단 지대석과 답도가 시설된 것을 알 수 있 다. 발굴조사 당시의 사진 중 지대석 위에 장방형의 무 문전이 남아있어 보고서에서 기술하고 있는 통일신라시 대 전형적이며 일반적인 석조 가구식 기단24)과 달리 전 축기단으로 보아야할 필요가 있다. 이때 전돌을 받고 있 는 지대석 상면의 너비는 20㎝이며 전돌 실측치는 없었 다. 다만 지대석 외주의 답도에는 31×15×4.9㎝의 전돌을 3열로 깔아놓고 있어 비슷한 크기로 추정된다. 이처럼 고선사지 금당지는 지대석 위에 면석이 아니라 전축조를 구축한 사례로 판단되어 주목된다.(<Fig.12>)

    3.3.석조 기단부재 결구25)

    감은사지는 통일신라시대 석조 가구식 기단의 대표적 인 유구라고 할 수 있다. 금당지부터 회랑지까지 전 건 물이 지대석 위에 탱주석 없이 면석을 맞대어 이었다.

    지대석 상면의 폭은 금당지는 24㎝, 강당은 15㎝이며 이 지대석에는 면석을 지지하기 위한 홈이 없다. 금당 기단의 각 부재 높이(지대석+면석+갑석)를 합산하면 기 단 높이가 140㎝(30+71+39), 지표면에서 119㎝이다. 강 당의 경우 높이는 68㎝(22+25+21), 지표면에서 59㎝이고 서회랑은 지표면에서 45㎝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아래 <Tab.4>26)에서 보는 것처럼 건물의 위계에 따 라 기단의 높이가, 또 그에 따라 면석의 크기가 결정되 고, 이것을 지지하는 지대석 폭에 영향을 주게 된다고 생각한다.27)

    황룡사지 각 건물지의 기단 지대석의 상면 폭(턱을 뺀 지대석 상면 폭)은 중금당지 18~22㎝, 목탑지 19~26㎝ 정도, 경루지 16~20㎝이다.28) 황룡사지 중금당의 기단 고는 지표면에서 110㎝, 목탑은 157㎝이다. 황룡사의 목 탑이 감은사지 금당지와 같은 석조 가구식 기단으로 조 성되었다고 한다면, 지대석과 갑석의 높이를 제해도 면 석이 30㎝이상 더 커지는데 목탑의 지대석은 더 작은 부 재인 셈이 되기 때문에29) 황룡사지 각 건물지의 지대석 이 작게 계획된 이유가 전축기단일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천왕사지 금당은 면석과 탱주를 세운 석조 가구식 기단이나, 폭 45~50㎝의 지대석 상면에는 동․서탑지와 같이 폭22~27㎝의 장방형 홈과 그 홈을 재가공해서 T 자형 홈을 만들어 탱주석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있다. 탱 주홈의 간격이 일정치 않은 것은 금당을 증축하는 과정 에서 부재를 재사용한 결과로 보이므로30) 창건시에는 가 구식 전석축기단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31)

    사천왕사지의 주요 건물에는 탱주, 우주 홈이 있고, 계 단 지대석에도 홈이 있었다. 금당지는 석조 기단으로 중 수하면서 탱주석을 T자형으로 가공하여 양 끝단으로 면 석을 고정하도록 계획하였다. 황룡사지 사천주 초석 아 래에서도 이러한 단면과 유사한 탱주석 부재가 출토된 바 있었다.32) 그런데 그 단면 폭이 27.5㎝로 지대석 폭 보다 크기 때문에33) 목탑 기단의 것이었다고 보기는 어 렵다.

    분황사지, 동궁과 월지, 천군동사지, 전 인용사지 등 신라 유적지에서 출토된 기단 지대석은 감은사지의 것처 럼 한단 턱이 있고, 상면이 평활한 것이 대부분을 차지 하고 있다. 사천왕사지 금당지가 전축기단이었던 건물을 석조 기단으로 변경, 중수한 사례를 일반화할 수는 없어 도, 황룡사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또한 불국사 대웅전, 극락전 등의 기단은 통일신라시 대(8c중반)의 것으로 생각되는데, 탱주석과 면석을 별석 으로 축조한 것도 있지만 면석에 탱주석을 조출하여 일 체화시키기도 하였다.34) 석조 가구식 기단 부재는 간략 화 되고 결구법이 단순해지는 방식의35) 발달과정으로 이 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3.4.답도 부전시설

    기단 외주의 답도는 황룡사지 금당지나 목탑지 등 주 요 건물에만 설치되어 있는데, 사천왕사지 금당지, 동․ 서탑지, 동․서단석지와 고선사지 금당지, 천군동사지 금 당지, 감은사지 금당지, 전 인용사지 십자형건물지 등에 서도 발견되었다.

    답도는 석재와 전돌 두 가지 재료가 사용되었는데, 대 부분의 답도면은 방형 또는 장방형의 전돌을 열을 맞추 어 깔고 바깥 면에는 방형 단면의 장대석이나 장방형 전 돌을 세로로 바닥에 반쯤 꽂아서 마감 처리하기도 하였 다. 특히 천군동사지 금당지는 답도 바깥면에 전돌을 세 워 황룡사 목탑지와 같이 2중으로 답도를 설치하고 있는 데36), 전돌을 답도의 연석 대신 사용하는 사례는 사천왕 사지 남면37)과 서단석지, 전인용사지 십자형건물지38) 등 에서도 확인이 된다.39)(<Fig.13>)

    감은사지 금당지에서 답도에 장대석을 2열로 깐 것을 보면, 기단과 답도에 모두 석조 부재만을 가공하여 설치 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이에 반해 고선사지 금당지는 황 룡사지 서금당지와 같이 전축기단에 부전 답도가 설치되 어 있는 것이어서 기단에 사용된 건축 재료간의 통일성 이 계획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4.신라 전축기단 축조법

    4.1.가구식 전축기단

    가구식 전축기단은 석조 가구식 기단과 구성방법은 같 다. 단, 면석 대신 전돌을 쌓아 그 간격을 메워 넣는 방 식이고 문양을 이용한 장식적 효과가 커질 수 있다. 또 한 대형 면석을 가공하지 않기 때문에 시공상 유리한 점 도 있다. 지대석 위에는 전돌 위치에 홈은 별도로 없었 다. 대표적인 사례는 사천왕사지 탑지와 합천 죽죽리 폐 사지 A건물지의 기단40)이다.

    사천왕사지 탑지 지대석의 폭은 23㎝의 전돌을 그 위 에 쌓을 수 있도록 계획된 것이며, 전돌은 측면에만 당 초문이 있는 제형(梯形)으로 기단축조에 유리하게 제작 되었다.(<Fig.14>(3))

    합천 죽죽리 폐사지는 통일신라시대 불교유적지이다. 가구식 전축기단이 남아있는 A건물지는 통일신라시대 건물을 고려시대에 증축한 것이다. 전축기단은 잘 가공 된 지대석을 하단에 놓고 그 위에 5.5, 5.2m간격으로 탱 주석을 세웠다. 전축이 6단까지 남아있었지만 탱주석의 높이로 볼 때 11단까지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탱주석의 간격이 넓기 때문에 원래 전축기단이었는데, 탱주석과 우주석을 세워 보강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Fig.14> (2))

    출토된 전돌의 형태가 특이한데, 처음에는 방형으로 제작하였다가 뒷부분의 모서리를 따내어 다각형으로 만 든 것으로 탱주석에 면하는 부분에는 그 반절을 사용하 였다.(<Fig.14>(4)참조) 전축기법은 전돌을 장변(32~33 ㎝)이 밖으로 향하도록, 층단이 서로 물리도록 엇쌓기하 였다. 이 전돌의 단면형태는 뒷채움흙과 전축조가 일체 화되는데 도움을 주어 구조적으로 더욱 유리해질 수 있 도록 고안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4.2.전축기단

    전축기단은 전돌을 가구식 기단부재의 구조틀이나 층 간재 없이 층층이 쌓고 기단면을 완료하는 것이다. 이때 평적식, 수직식 쌓기가 있을 수 있다.

    전축조를 구축할 때는 하단에 적심석을 놓고 판석이나 지대석으로 평활면을 만든 다음 층단이 서로 물리도록 엇쌓기로 축조한다. 유구에서는 기단의 완성된 형태를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석조기단에 비해 특히 모서리 부분이 취약한 구조를 해결할 수 있는 축조법이 강구되 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축기단은 사천왕사지 단석지 및 강당지 등과 황룡사지 서금당지, 고선사지 금당지, 포 항 법광사지 큰 법당지, 단양 일명사지 목탑지41) 등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일본의 경우, 7세기 후반 미야노마에 하이지(宮ノ前廢寺) 탑지나, 8세기 타나베하이지(田邊廢 寺) 동탑지 등에서도 확인된다.42)

    단양 일명사지 목탑지 전축기단은 판석 위에 전돌을 쌓아올려 축조한 것인데 대체로 2단까지는 계단식으로 내쌓기하고 3단 이상부터 바로 쌓기를 하였다. 전축조 이면에는 자연석과 흙을 혼합한 적심으로 뒤채움되어 있 었다. 이때 전돌의 규격은 세 가지 종류43)이며, 높이는 16단까지 추정된다.(<Fig.15>(1))

    일본 타나베하이지 동탑지 전축기단은 자연할석 위에 전을 축조한 것인데, 전돌 1단은 내밀기 하고 2단부터 바로 쌓기를 하였다. 상하단이 서로 엇갈리도록 전 나누 기를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모서리부분은 정방형 지대석을 놓고 층단과 반대로 상하단이 어긋나게 쌓아서 보강하고 있었다.(<Fig.15>(2))

    또한 전돌을 평적과 평적 사이에 한 단을 수직식으로 쌓아 기단을 구축한 경우를 미야노마에하이지 탑지에서 볼 수 있다. 수직으로 세워 마구리면이 아닌 넓은 면이 보이도록 하고 있는데, 전돌이 마치 석조기단의 면석과 같이 보이도록 고안한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4.3.황룡사 서금당 전축기단

    서금당의 전축기단은 장방형의 전돌을 층층이 쌓아 축 조한 기단이다. 하부에 판석이나 지대석으로 지지하지 않고 부전시설 위에 겹쳐 쌓고 있는 것으로 보아 평적식 전축기단 중에서도 매우 초기적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서금당지 기초가 매우 정교한 판축으로 구축되었 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천왕사지 의 전축기단은 판석을 설치하면서 그 하단에 적심을 두 고 있으므로 평활한 면이 구축되지 않으면 전축조는 구 축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서금당지 기단토 표면의 상태 를 짐작할 수 있다. 답도면과 전축기단 입면이 같은 크 기의 전돌로 이어서 설치된 점과 문양전이나 방형전44)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중금당 답도의 경우, 원래 장방형으로 설치된 것이었 으나 중수 시 하층기단의 소초석을 재설치하면서 그 주 변에 방형전으로 교체한 흔적이 보이므로45) 황룡사지에 서 장방형 전돌을 사용한 기단축조는 다소 이른 시기의 것이라고 여겨진다.

    또한 건축계획적 측면에서 서금당지보다 기단고가 낮 고, 위계가 낮은 건물지는 창건시에 전축기단으로 구축 하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지대석 폭이 석조 면석을 지지하기에 충분치 않다는 판단을 근거로 중금당과 목탑 까지도 전축기단 복원안을 상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 만 다른 건물지에 서금당지와 달리 지대석이 설치된 것 은 고선사지 금당지와 같이 전축기단의 구조적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발전단계에 있다고 해석할 수 있으며, 향 후 석조기단으로 중수되어 가는 과정이 있었다고 하더라 도 기존 전축기단의 지대석을 재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5.결론

    고대 유적지에는 기단 지대석까지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이때 석조 부재이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전형적이 고 일반적인 석조 가구식 기단으로 추정하는 경향이 있 었다고 생각한다. 본 연구는 황룡사 서금당의 전축기단 이 갖는 특징을 재검토하고 각 건물지 기단의 유일한 유 구인 지대석의 속성을 재조명해 보면서, 황룡사 전축기 단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았다.

    또한 건물의 기단높이와 구조는 한 사역 안에서 위계 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황룡사지에서도 적용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서금당보다 위계가 같거나 낮은 건물은 전축기단으로 축조되었다고 생각되며 중금당과 목탑도 지대석의 폭으로 보건대 창건 시에는 전축기단으로 구축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서금당의 전축기단은 황룡사지내에서도 매우 초기의 유구라고 볼 수 있으며 7세기 후반 경부터는 지대석을 설치하여 전축기단을 구축하였다고 생각된다. 전축기단을 설치한 주요 건물은 부전 답도를 갖춤으로써 재료를 통 일시켜 구조적 의장적 계획성을 엿볼 수 있다.

    전축기단은 신라시대에 많이 건축되었고 기단을 화려 하게 장식하거나 빠른 시간안에 구축할 수 있다는 장점 으로 활용되었으나 구조체의 취약함 때문에 불교사원이 나 고급건축에서는 점차 석조 기단으로 중수되어가는 경 향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황룡사지에서도 그런 과정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이때 지대석을 재사용하였다고 판단된다. 앞으로 지대석만 남아있는 유적의 기단구조와 의장에 대한 복원고증은 전축기단의 가능성까지 고려해 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전축기단과 전돌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유구 가 부족하고 쉽게 도괴될 수 있는 재료적 한계 때문에 고대건축사에서 큰 비중을 갖지 못하였다. 고대건축사 연구는 유구에 대한 건축적 조사에 기초하고 있는데 실 측치와 출토지가 확보되어야 연구를 시작할 수 있다는 일면이 있다. 따라서 앞으로 유적지에 남아있는 건축적 자료에 대해 보다 면밀한 조사결과가 축적된다면 더 풍 부한 고대 건축의 현상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Fig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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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mains of main hall in Hwangnyongsa temple site (Report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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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mains of wooden Pagoda in Hwangnyongsa temple site (Report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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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rawings of each buildings platform remains (지대석, Report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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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cavation plan of west hall in Hwangnyongsa temple site(Report 1984, coloring and 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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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cavation plan with tiled on the west hall remains(Report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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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Remains and restoration drawing of the west hall platform (Report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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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storation drawings of main buildings platform (Report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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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mains and restoration drawings of the east hall platform (Report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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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mples of platform relics in Silla building rema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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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mains of brick-constructed platform in Sacheonwangsa temple site(Report 2012,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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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mains of main hall platform in Pohang Bubgwangsa temple site(Report 1993)

    JAH-24-55_F12.gif

    Remains of main hall platform in Gosunsa temple site(Report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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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mples of tile construction in Silla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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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mples of the post-lintel brick-construction platform(Report 2013,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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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mples of normal brick-construction platform (Report 1984, 1973)

    Table

    Platform remains in Hwangnyongsa temple site(Report 1984) (● relic remain ○ relic was out but trace remain)

    List of Silla buddhist temple site to compare relics

    Characters of each Building’s platform in Sacheonwangsa temple site(Report 2012, 2013) (dimension cm

    Size of Gameunsaji building’s platform relics (Report, 1997) (dimension cm)

    Footnote

    Reference

    1. Cultural Property Preservation Bureau(文化財管理局) Gyeongju Historic Site Management Office(慶州史蹟 管理事務所) (1977) 『Excavation Survey Report of Gosunsa temple site(高仙寺址發掘調査報告書)』,
    2. Cultural Property Preservation Bureau(文化財管理局)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文化財硏究所) (1984) 『Excavation Survey Report of the Hwangnyoungsa Ⅰ(皇龍寺遺蹟發掘調査報告書Ⅰ)』,
    3. Gyeongju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1997) 『Excavation Survey Report of Gameunsa temple site(감은사 발굴조사보고서)』,
    4.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City of Gyeong-Ju (2009) 『Architectural research on the Hwangnyoungsa features(황룡사 유적의 건축학적 고 찰)』Series of Hwangnyoungsa research 1(황룡사연구총서1),
    5.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City of Gyeong-Ju (2010) 『Research on the Foundation of Main hall in Hwangnyoungsa temple(황룡사 금당 기 초 연구)』Series of Hwangnyoungsa research 5(황룡사연구총서5),
    6. Gyeongju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2012) 『Sacheonwangsa Ⅰ : the sites of main hall, excavation survey report(四天王寺Ⅰ : 金堂址발 굴조사보고서)』,
    7. Gyeongju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2013) 『Sacheonwangsa Ⅱ : the sites of inside corridor, excavation survey report(四天王寺Ⅱ : 回廊 內廓발굴조사보고서)』,
    8.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City of Gyeong-Ju (2013) 『The 1st Deepning Research Report on the Hwangnyoungsa temple(황룡사 복원 제1차 심화연구)』Series of Hwangnyoungsa resea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