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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 1598-1142(Print)
ISSN : 2383-9066(Online)
Journal of architectural history Vol.24 No.4 pp.45-54
DOI : https://doi.org/10.7738/JAH.2015.24.4.045

Discourse on the Uncanny and posthistoire in Modern Architecture

Hyon-Sob Kim*
Corresponding author : archistory@korea.ac.kr
June 2, 2015 August 31, 2015

Abstract

This research aims at a critical discourse on the relation between the concepts of the uncanny and posthistoire , on the basis of descriptions in The Architectural Uncanny (1992) by Anthony Vidler. For the purpose, Histories of the Immediate Present (2008), another book by Vidler that discusses posthistoire philosophy to which he is not positive, is also investigated along with the former thesis; and various publications related to the themes by the influential writers such as Freud, Lyotard, Vattimo, and Habermas are referred to, too. Firstly, this paper will illustrate an essential understanding of the uncanny, an outgrowth of the sublime, and the history of posthistoire respectively; and then analyse contexts where the posthistoire was mentioned in The Architectural Uncanny. In the ‘Introduction’ and ‘Losing Face’ chapters of the book, this paper argues, the two concepts are connected by the notions of ‘repetition’ and ‘losing the classical facade’ as well as the uncanny as ‘a metaphor for a fundamentally unlivable modern condition’. Though Vidler’s recognition of posthistoire in the two chapters are differently interpreted, each as ‘the emptiness of capitalism’ and ‘the decomposition of representation’, both can be understood in terms of ‘modernity’ that is ‘still open’. If modernity is ‘an unfinished project’ as maintained by Habermas, who Vidler relies on, we need to continue innovative experiments and internal investigations in architectural creation beyond the categories of modernism and postmodernism.


현대 건축의 언캐니와 탈역사 논의
- 앤서니 비들러의 『The Architectural Uncanny』(1992)를 중심으로 -

김 현 섭*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부교수

초록


    1.서론

    장 프랑수아 료타르(1984)의 말처럼 현대를 규정할 수 있는 예술적 감수성이 오직 ‘숭고(the sublime)’뿐이라 면,1) 현대 건축의 ‘언캐니(the uncanny)’에 대한 탐구는 필연적이다. 불가해한 두려움과 긴장, 익숙함 속의 공포 등으로 이해되는 언캐니의 감정이 숭고와 밀접한 관계를 이루며 건축과 도시 공간에 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런 견지에서 볼 때, ‘건축의 언캐니’를 분석한 앤서니 비 들러(b.1941)의 연구는 돋보인다. 뉴욕 IAUS(Institute for Architecture and Urban Studies)의 저널 『Oppositions』(1973-84)의 공동편집인을 역임했고, 프 린스턴, UCLA 등을 거쳐 현재 뉴욕의 쿠퍼유니온에 재 직 중인 그는, 잘 알려졌듯, 프랑스 계몽기 이래의 건축 역사를 전공한 석학이다. 그는 1980년대 중반부터 숭고 와 언캐니에 관해 여러 글을 발표했고, 이를 묶어 『The Architectural Uncanny: Essays in the Modern Unhomely』(1992)라는 단행본으로 출판했다. 언캐니의 독일어 어원(heimlich/unheimlich; 영어로는 homely/ unhomely)이 ‘집’과 관계하는 만큼2) 그 의미는 건축과.

    빈번히 교차하는데, 비들러는 이 책에서 언캐니를 ‘본질 적으로 살 수 없는’ 혹은 ‘근본적 거주가 불가능한 현대 의 조건에 대한 은유(a metaphor for a fundamentally unlivable modern condition)’로 규정한다.3) 하이데거에 따르면 참다운 삶과 거주(wohnen)란 땅에 뿌리내릴 때 가능한데,4) 현대 사회의 소외와 불안은 그 같은 근원적 거주가 불가함에 대한 징표다. 현대 건축이 그런 땅의 정신을 회복해야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지만,5) 분명한 것은 사회적 소외와 불안의 가속화 속에서 건축 과 도시 공간이 언캐니의 다양한 구조와 깊이를 반영한 다는 사실이다.

    비들러의 통찰력은 현대 건축의 비판적 해석에 풍부한 자양분을 제공한다. 그 중 하나가 ‘탈역사(posthistoire; posthistory)’ 철학과의 조우다. 언캐니가 본질적 삶이 불 가한 현대의 상황을 은유한다면, 거기서 ‘역사의 종말’ 혹은 ‘역사 이후’를 떠올리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자 연스러운 귀결이다. 특히 이 책이 출판되기 직전의 수 년 동안 일었던 탈역사 논의는,6) 그가 「Introduction」 에서 이를 잠시 언급한 배경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 들러는 여기서 언캐니의 발현을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 에 대한 ‘문제적 공헌’으로 이해한다고 서술함으로써, 탈 역사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노출했다. 그럼에도 ‘탈역사 철학이 서술하는 “공백”’을 매울 역할이 건축에 부여된다 고 적었고 (물론 그의 강조점은 ‘탈역사 철학’이 아닌 ‘공 백’에 있겠지만) 이를 에른스트 블로흐의 자본주의 비판 과 슬며시 연계하고 있어, 그가 인식하는 탈역사가 무엇 인지에 대해 다소간의 의문을 남겼다. 그런데 「Introduction」에서 명확했던 그의 탈역사에 대한 입 장 및 불명확하게 노출된 탈역사의 이해 각각은 오히려 본문에 와서 반전된 양상을 띤다. 왜냐면 본문(에서 유일 하게 탈역사를 논한) 「Losing Face」장에서 고전적 재현의 해체를 탈역사 이슈와 결부함으로써 이를 일부 긍정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기 때문이고, 반면 탈역사 철학의 중심인물로 알려진 아놀드 겔렌을 직접 언급함으 로써 탈역사 인식의 근간을 명쾌히 밝혔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비들러의 텍스트는 크고 작은 두 가지 이슈를 제기한다.7) 큰 관점에서는 건축의 언캐니와 탈역 사적 현상 사이의 관계다. 비록 비들러가 언캐니와 탈역 사가 아닌 언캐니와 (위르겐 하버마스를 떠올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의 관계를 설정하고 있지만, 자본주의 의 공백이든 재현의 해체든 여전히 노출되는 탈역사의 현상은 그에 대한 언캐니의 관점으로부터의 고찰을 요청 한다고 하겠다. 작은 관점에서는 (이는 결국 큰 관점 내 로 포괄되는데) 탈역사에 대한 비들러의 입장이다. 기본 적으로 그가 탈역사 철학에 비판적임은 명백하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책 본문에서 그 입장이 모호하게 독해되 는 이유는 탈역사 논의 내적으로도 미묘하게 다른 스펙 트럼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차적으로 탈역사란 ‘역사 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하겠지만, 단적으로 말해 ‘역사의 종말 이후’는 (이것도 ‘posthistoire’인지 아니면 ‘post-posthistoire’인지 불확실하나) 가능할까? 따라서 탈역사 철학 내의 미묘한 입장 차이를 탐색할 필요가 있 겠다. 이런 상황을 인식한 연구자라면, 그가 비교적 근래 출판한 『Histories of the Immediate Present: Inventing Architectural Modernism』(2008)의 에필로 그 「Postmodern or Posthistoire?」에 관심을 갖지 않 을 수 없다. 왜냐면 그가 여기서 모더니즘 건축에 관한 역사서술론을 포스트모더니즘 및 탈역사 논의에 접목시 켰기 때문이다. 특히 탈역사 철학에 대한 그의 서술은 그간의 어떤 문헌보다도 명쾌하고 간결하다. 비록 이 저 서가 언캐니 개념을 논외로 하며 『The Architectural Uncanny』와 십 수 년의 시차를 두고 출판됐지만 탈역 사에 대한 그의 좌표를 명확히 드러내는 까닭에, 건축의 언캐니와 탈역사 철학의 맥락을 읽기 위한 유용한 발판 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 하에 이 연구는 비들러가 함의한 현대 건 축의 언캐니와 탈역사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비판적 고 찰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우선 건축의 언캐니와 탈 역사 철학 각각에 대해 먼저 탐구할 것이다. 그리고는 『The Architectural Uncanny』에 표출된 두 개념을 대질시킬 텐데, 결국 본고의 논의는 자본주의와 재현의 문제를 통해 (모던과 포스트모던을 가로지르는) 모더니 티의 이슈로 수렴될 것이다. 이 같은 연구를 위한 일차 적 분석 대상은 당연히 비들러의 두 단행본이다. 하지만 그의 입장을 상대화하기 위해 프로이트, 료타르, 바티모, 하버마스 등의 다양한 저작을 검토하도록 하겠다.

    2.건축의 언캐니와 탈역사 철학

    2-1.언캐니와 현대 건축

    이 연구가 이미 서론에서 언캐니를 ‘불가해한 두려움 과 긴장, 익숙함 속의 공포’로 요약했음을 기억하자. 그 리고 료타르의 숭고에 의거해 현대 건축에서의 언캐니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현대 건축에 나타난 숭고와 언캐니 의 중요성은 비들러 이후의 연구자인 케이트 네스빗 (1995; 1996)을 통해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8) 비들러 (1992)의 말을 직접 인용하면 언캐니란, 버크의 숭고 개 념으로부터 뻗어 나온, ‘절대 공포의 길들여진 유형(a domesticated version of absolute terror)’이다(p.3). 주 지하듯 숭고는 18세기 에드문트 버크(1757)와 임마누엘 칸트(1764)의 미학에서 ‘아름다움(the beautiful)’에 대한 변증법적 쌍이 됐는데, 전자에 따르면 숭고는 거대함, 무 한, 빛, 모호함 등의 압도적 위대함 앞에서 느끼는 공포 와 쾌락이 교차된 감정이다.9) 이 같은 구도에서 숭고는 언캐니보다 위계상 ‘상위 범주’로 위치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들러는 언캐니가 ‘더 장대하고 진지한’ 숭고 와 ‘아주 이상하게 다르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전자가 후자의 온전한 부분집합은 아님을 암시한다(p.20).10) 이 러한 언캐니의 독특성은 프로이트의 분석에서 명확했다.

    프로이트의 고전적 에세이 「Das Unheimliche」 (The Uncanny; 1919)는 언캐니의 감정이 결코 ‘새롭거 나 낯선 것이 아니라 우리 정신에 오랫동안 익숙했던 것 으로서, 오직 억압을 통해서 소외된 것’임을 주장했다. 즉, 본래적 익숙함이야말로 프로이트가 간파한 언캐니의 핵심이다.11) 이런 익숙함은 (그래서 돌아가고자 하지만 억압될 수밖에 없는 익숙함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첫 번 째 집인 어머니의 자궁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열망과 관 계한다.12) 그리고 이 같은 언캐니의 유발 요인은, 억압을 통한 ‘거세공포’ 및 ‘죽음충동’으로, 그리고 자기보존의 복 제본능이나 ‘의도치 않은 반복’을 포괄하는 ‘반복충동’으 로 전이된다. 이로써 언캐니의 익숙하고도 낯선 불안은 다른 공포와 구별되는데, 그 까닭에 비들러는 언캐니를 ‘현대적 노스탤지어’의 주요 성분이었다고 해석한다.13)

    현대 건축에 언캐니의 정서를 발현한 초기 사례는 (조 셉 리쿼트가 ‘First Moderns’로 분류한) 에티앙-루이 불 레(1728-99)와 클로드-니콜라 르두(1736-1806) 등 프랑 스 계몽기 혹은 혁명기의 건축가들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비들러는 불레야말로 버크의 숭고를 적용한 (특히 버크가 ‘절대 빛’이라 부른 것과 그것의 쌍이 되는 ‘절대 어둠’을 구현한) 최초의 건축가라고 말하는 동시에, ‘최초 의 자의식적 언캐니 건축’을 발명했다고 적는다 (pp.169-171). 한편, 산업화 시대의 인식 속에서는 피라 네시(1720-78)의 「감옥」시리즈(1750/1761)가 당대의 어둠과 언캐니를 암시한 예인데, 네스빗(1995)에 따르면, 19, 20세기 건축 담론에서 숭고/언캐니의 미학은 아름다 움에 대한 논의와 더불어 억압됐다가 비교적 근래 부활 했다.14) 료타르의 숭고 및 비들러의 언캐니와 더불어 아 이젠만의 ‘그로테스크(the grotesque)’에 대한 강조가 또 다른 촉매제였다. 그는 한 아티클(1988)에서 그로테스크 를 숭고의 물리적 구현으로 간주하며 언캐니와 크게 구 별하지 않는데,15) 그에게 그로테스크는 지난 500년의 건 축을 지배한 아름다움의 규범을 탈치할 방편이다.16) 그 럼에도 (서로간의 의견 교환도 활발했지만) ‘건축가’ 아 이젠만의 짤막한 글에 비해 ‘역사가’ 비들러의 폭넓은 연 구가 현대 건축과 언캐니의 관계를 더 잘 보여주는 예임 은 자명하다. 그가 이 주제에 천착한 바는 불레, 르두 등 에 관한 이전 연구로부터의 귀결인 듯하며,17) 전술했듯 늦어도 1980년대 중반부터 이에 대해 출판해왔다.18)

    비들러는 『The Architectural Uncanny』의 「Introduction」에서 언캐니 개념의 역사를 요약한다. 이는 물론 18세기 미학의 숭고에서 시작해 20세기 초 프 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와서 분수령을 이뤘고, 양차 대 전의 폐허를 지나 근래의 탈구조주의, 탈식민주의, 페미 니즘 등의 입장에 빈번히 전유됐다. 그는 뒤이어 이 불 안의 정서를 현대의 건축과 도시로 투사하는데, 본문의 에세이 15편은 「집」, 「몸」, 「공간」의 세 가지 섹 션으로 분류된다. 이를 통한 비들러의 언캐니한 탐험은, 예컨대, 18세기 ‘유령의 집’(Victor Hugo)과 모더니즘의 ‘집-기계’ 은유(Le Corbusier)를 경유한 후, ‘훼손된 몸’ 을 상징하는 해체주의적 건축(Coop Himmelblau)으로부 터 ‘사이보그를 위한 집’(Diller and Scofidio)과 ‘방랑자 건축’(John Hejduk)으로까지, 그리고 ‘포스트어버니 즘’(Surrealism-Situationism)으로부터 ‘사이코메트로폴 리스’(Rem Koolhaas)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자와 건 축과 도시의 텍스트를 넘나들었다. 이 모든 문자적, 현상 적 건축과 도시의 공간은 현대 사회의 언캐니를 다각도 로 반영한다. 즉, 현대 사회의 소외가 본향에 대한 노스 탤지어를 자극하지만, 본향으로의 회귀불능에 대한 자각 과 그에 따른 좌절이 바로 언캐니를 유발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유념할 바는 건물이나 공간 자체가 언캐 니한 속성을 갖는다기보다 ‘언캐니한 경험을 위한 장소’ 로서 역할 할뿐이라는 점인데, 비들러는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위해 ‘미학적 규범’을 너무 쉽게 뒤집으며 형태에 만 천착하는 것을 경계했다(pp.11-13). 전술했듯 언캐니 는 ‘근본적 거주가 불가능한 현대의 조건에 대한 은유’로 서 가장 잘 작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2-2.탈역사 혹은 역사의 종말?

    그렇다면 탈역사란 무엇일까? 앞서도 적었듯, 이는 간 단히 말해 역사가 종말을 고했다는 인식이다. 탈역사 개 념은 자체만으로도 역사가 긴데, 유대교-기독교적 종말 론의 뿌리로까지 거슬러 갈 수 있고, 19세기에 오면 헤 겔(1770-1831)의 역사철학과 니체(1844-1900)의 허무주 의에서 바탕을 발견하게 된다. 20세기 들어서는 파시즘- 나치즘의 등장과 세계대전의 어두운 그림자가 종말과 그 이후에 대한 고찰을 가져왔고, 20세기 말에 이르러 포스 트모더니즘과 후기 자본주의의 흐름이 세기말-천년말의 사조와 교합하며 탈역사 논의를 불러일으켰다고 하겠다.

    특히 후자의 상황은 비들러가 건축의 언캐니에 관해 글을 쓴 1990년 전후와 궤를 같이 한다. 예컨대 쟌니 바 티모의 탈역사 논의가 포함된 『The End of Modernit y』는 1988년(이태리어 원본 1985년), 루츠 니타머의 『Posthistoire: Has History Come to an End?』는 1992년(독일어 원본 1989년) 출판됐고, 이 연구에서 논 외로 하지만 대중적으로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논문과 단행본 「The End of History」 (1989), 『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 (1992)이 출판된 것도 그 시점이다. 한편, 패트릭 브랜틀 링어는 1998년 「Apocalypse 2001: Or, What Happens after Posthistory?」라는 논문을 통해 (비록 바티모를 빠트렸으나) 그간의 탈역사 논의를 비판적으로 개괄하기 도 했다.19) 이 모든 저작들은 제각각 다른 콘텍스트에서 탈역사를 논의하지만 (후쿠야마를 제외한) 대개가 독일 철학자 아놀드 겔렌(1904-76)을 핵심적으로 다룬다. 그 리고 그 뿌리는 헨드릭 드 망(1885-1953)과 앙투앙-오귀 스탕 쿠르노(1801-77)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특히 바티 모가 그 계보를 이 세 명으로 압축하고 있고 비들러 (2008)의 탈역사 개괄 역시 여기에 근거한다. 왜냐면 그 들의 어법이 실제의 ‘탈역사(posthistoire)’라는 말과 직 접 결부되기 때문이다. 그 용어의 창안자가 겔렌인지 쿠 르노인지는 아직 정확치 않은데, 전자가 그 말을 사용한 것과 후자에게서 개념이 등장한 것은 확실하다.20)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수학자인 쿠르노의 탈역사 개념에 대한 후대의 해석에는 차이가 있다. 니타머가 발 췌한 그의 글에 따르면 탈역사는 ‘경험과 이성’에 근거해 모든 것을 정확하게 계측함으로써 오랜 역사 시대의 혼 란을 극복할 수 있는, 당대(19세기 후반)에 막 진입하려 는 단계다. 니타머는 여기서 일종의 ‘기술관료적 프로그 램’을 떠올리며 그의 탈역사가 일반적으로 연상되는 염 세주의보다 오히려 (현대화의) 희망을 내포한다고 평한 다.21) 하지만 비들러(2008)에게 쿠르노의 탈역사는 ‘더 이상의 발전이 불가능한 단계’로서 ‘계속적 완성(endless perfecting)’의 과정만이 가능한, ‘모든 문화의 부득이한 종점’이다. 두 사람의 견해차는 각자가 쿠르노의 서로 다 른 텍스트를 참조한 데에서 기인한 듯하지만,22) 비들러 의 경우 겔렌의 비관적 생각과의 연계를 염두에 뒀을 것 이다.23) 이차대전 패전국의 보수적 사상가였던 겔렌에게 탈역사는 더 이상의 발전이 불가능한 ‘혼란스런 혼합주 의’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의 말(Zeit-Builder , 1961) 을 인용하면, ‘이제 예술 내부에서는 어떠한 내적 발전도 없다. [...] 발전의 과정은 완성됐고, 지금 나타나는 것은 이미 존재했다. 모든 양식과 가능성의 혼란스런 혼합주 의, 이것이 탈역사다.’24) 이러한 탈역사의 상태는, 이미 발전의 완성을 봤기에, 더는 기대할 바 없는 ‘문화의 결 정화(the crystallization of culture)’라는 말로도 표현됐 다.25) 그에게 ‘진보’는 ‘판에 박힌 반복(routine)’에 지나 지 않는데, 전술했듯 이 견해는 벨기에의 드 망을 통해 쿠르노에게 맞닿을 수 있다.26) 드 망은 진화론적 색채를 비치며, 유의미한 역사적 노정을 상실한 당대의 문화에 는 ‘죽음’ 아니면 ‘변이’만이 대안이라 서술한 바 있다.27)

    이 같은 탈역사 논의를 포스트모던의 세계로 끌어온 이가 바로 바티모(1988)다. 그는 탈역사를 ‘역사의 종말 에 대한 경험’으로 여기는데, 이는 ‘포스트모더니티’의 다 른 표현이다. 바티모는 그런 탈역사 혹은 포스트모더니 티를 테크놀로지와 소비주의의 일상이, 겔렌의 말처럼, ‘판에 박힌 반복’이 된 현대 가운데서 목도한다. 허나 ‘역 사의 종말에 대한 경험’이 단일한 시간적 서사 속에 놓 이지 않기에 포스트모더니티는 모더니티와 혼재해왔다고 볼 수 있는데, 그는 포스트모더니티의 뿌리를 니체와 하 이데거의 철학에서 찾는다. ‘모더니티’가 ‘진보와 극복’이 라는 두 개념을 바탕으로 ‘보편적이고 단일한 역사’를 구 성해왔다면, ‘약한 생각’의 바티모에게 (포스트모더니티의 시작을 알리는) 니체의 허무주의와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비판은 그러한 ‘강한’ 생각을 해소할 ‘긍정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셈이다. 바티모의 탈역사 개념은 기본적으로 겔렌의 암울한 생각에 바탕을 두지만 서구의 형이상학을 약화시키는 독특한 허무주의로, 그의 말을 직접 빌리면, 탈역사에 ‘긍정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28)

    하지만 비들러가 『Histories of the Immediate Present』의 마지막 장에서 바티모의 탈역사를 중요하게 다룬 까닭은 탈역사 철학 자체를 긍정해서가 아니라, 바 티모가 탈역사를 포스트모던의 담론과 접목시켰기 때문 이다. 모더니즘에 대한 이차대전 이후의 ‘역사들 (histories)’을 고찰한 비들러에게29) 이러한 다중의 내러 티브가, 장기간의 탈역사 철학의 전통 속에서, (료타르가 말하는) 이른바 ‘포스트모던의 조건’으로 이해될 수 있을 지 의문이었던 것이다.30) 결론적으로 비들러에게 탈역사 는 ‘포스트모던의 조건의 즉각적 귀결’이며, 거꾸로 말해 ‘포스트모더니즘은 탈역사 사상 가운데서의 특별한 순간’ 이다. 건축적 관점에서 보면 ‘정치적으로 퇴행적이고 이

    미지로 가득한 프레임의 탈역사’, 즉 포스트모더니즘은 지양돼야 한다. 그는 대안을, 료타르와 바티모가 비판한 단일 서사의 바탕으로서의 모더니티를 우회해, 하버마스 에 다시 발맞춘 ‘여전히 열려있는’ 모더니티에서 찾는다.

    3.『The Architectural Uncanny』에 나타난 탈 역사의 맥락

    여기서 [분명히 실재하는 영역, 즉 건축과 도시의 공간 에서] 탈역사 철학이 진술하는 “공백(void)”은 언캐니하 게 반복되며, 거기서 “편치 않은 집(unhomely home)”에 관한 의문이 가장 가슴 저미는 표현과 그만큼 골치 아 픈 해법을 발견한다. (Vidler, 1992)31)

    『The Architectural Uncanny』의 「Introduction」 말미에서 따온 위 문장은 이 연구를 추동한 핵심적인 서 술이다. 물론 그 까닭은 언캐니를 논의하던 비들러가 이 문장에서 처음 ‘탈역사 철학’을 언급했기 때문이고, 둘 사이의 관계도 암시했기 때문이다. 앞장을 통해 건축의 언캐니와 탈역사에 관한 이해가 선행됐기에, 이제 이 저 서에 병치된 두 개념을 대질시킬 수 있겠다. 「Introduction」과 더불어 본문의 「Losing Face」장 이 탈역사를 거론함은 서론에서 밝힌 바다.32) 먼저 언캐 니에 관한 서술 속에 삽입된 탈역사의 문맥을 짚어 보 고, 여기서 도출되는 둘 사이의 관계를 고찰해보자.

    3-1.언캐니 서술에 병치된 탈역사의 문맥

    (1) 「Introduction」: 위 인용문은 비들러의 언캐니 문맥에 처음 탈역사 철학이 언급된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 탈역사가 무엇인지, 언캐니와 무 슨 관계인지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오히려 복합 적 이중성을 노출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 논리를 분 석해보자. 우선, 언캐니가 유발되는 방식이 이중적이다. 즉, 비들러는 이 문장에서 ‘반복’이라는 형식의 언캐니와 ‘편치 않은 집’이라는 내용적 언캐니를 복합적으로 서술 하고 있다. 또한, ‘반복’이라는 말과 의미 역시 이중적이 다. 프로이트에게서 봤듯 반복은 언캐니의 원인일 뿐만 아니라, 앞 절의 서술처럼 탈역사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위 인용문에서는 불분명하나 뒤따르는 문장의 서술은, 특히 ‘역사의 반복’이라는 표현은 그 이중성을 더 직접 표출한다.) 언캐니와 탈역사가 말하는 반복에는 의미의 차이가 있지만 비들러는 이를 큰 구분 없이 혼재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중적 서술은 언캐니와 탈역 사의 관계를 단적으로 교차시킨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하지만 둘 사이의 관계 못지않게 이번 항에서 중요하 게 해명해야할 바는, 이 문장이 다소 모호하게 언급하는 ‘탈역사 철학’ 혹은 그것이 말하는 ‘공백’의 의미다.33) 여 전한 모호성이 감지되지만, 비들러가 (서론에서 간략히 밝힌) 블로흐의 비판적 입장을 이 콘텍스트에 언급한 것 은 그 의미의 탐색을 위한 중요한 힌트다. (또한 겔렌 (1963)이 탈역사를 더 이상 놀랄 게 ‘없는(devoid)’ 상태 로, 바티모(1988)가 진보의 ‘공동화(voiding)’로 여긴 것 도 그 힌트지만, 여기서는 그들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 다.)34) 그는 위 인용문에 뒤따르는 문장에서 현대 도시 개발의 ‘빈 공간(empty spaces)’과 ‘백지상태(tabula rasa)’가 남긴 ‘공백(voids)’을 - 결국 탈역사의 공백으로 여길 수 있는 것을 - 블로흐가 말하는 ‘자본주의의 텅 빈 공간(hollow spaces of capitalism)’과 연계하고 있 다.35) 부르주아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새로운 사회를 꿈 꾼 블로흐의 사상 및 그의 기능주의 모더니즘 비판을 생 각할 때,36) 비들러가 블로흐에게서 착안할 수 있는 탈역 사는 자본주의의 교착 상태라 자연스레 해석된다. 허면 그 공백이란 자본주의의 공허함이며, 건축적으로는 ‘상상 력’(블로흐가 비트루비우스의 ‘venustas’를 전유해 쓴 ‘imagination’)이 박탈된 기능주의의 ‘추상성’(결국 ‘tabula rasa’)에 다름 아니다. 그가 참고한 블로흐의 글 (1959)에 따르면 ‘후기 자본주의의 텅 빈 공간에서 건축 은 결코 번성할 수 없으며 [...] 새로운 사회의 시작만이 다시금 진정한 건축을 가능케 할 수 있다.’37) 비들러는 탈역사의 공백을 매울 역할, 즉 ‘사회의 “참다운” 집이 근거할 탈역사의 기반을 찾는 일’이 건축에 주어졌다고 말한다. 그에게 그러한 건축은, 형태적으로 생각건대, ‘과 거에 대한 절대 부정’과 ‘완전한 복원’이라는 양립불가해 보이는 두 극단이 부득이 만나게 되는 어느 지점에 위치 한다.38) 이런 견지에서 보면, 비들러가 비록 ‘탈역사 철 학’ 자체에는 회의적이었지만, 탈역사와 관계한 ‘공백’의 의미를 참조해 현대의 자본주의 공간이 야기한 공허함을 비판했다고 하겠다.

    (2) 「Losing Face」: 책 두 번째 섹션인 「몸」에 속하는 이 챕터에는 탈역사 철학의 중심 인물인 겔렌과 그의 아이디어가 언급돼 비들러의 탈역사 개념 파악이 비교적 수월하다. 프로이트의 거세공포가 지시하는 ‘훼손 된 몸’의 언캐니는 이 에세이에서 건물의 고전적 얼굴 (face/facade)을 상실한 제임스 스털링의 슈투트가르트 미술관(1984)으로 투사됐다(pp.84-99). ‘자칭 뵐플린주의 자’인 콜린 로우가 이 건물의 ‘얼굴 상실’을 비판한 바 있는데,39) 그 같은 로우의 주장을 다시 비판한 것이 이 에세이다. 여기서 비들러는 스털링이, 코르뷔지에를 거쳐, 슁켈의 (19세기 고대박물관의) ‘전통적 기념비성’을 해체 한 바가40) ‘재현의 역사’를 비춰볼 때 필연적이었다고 여 긴다. 그리고 이것이 의도치 않게 겔렌의 탈역사 패러다 임을 드러냈다고 주장한다(p.96). 결국 슈투트가르트 미 술관이 상징하는 탈역사는 재현의 해체인데, 이를 극단 으로 이끌면 (이 건물이 여기까지 이르지 않았으나) 재 현의 역사의 종말이라 말할 수 있다.

    비들러의 뒤이은 서술은 그 같은 탈역사의 맥락을 조 금 더 자세히 제시한다. 그의 논리를 요약컨대, 재현의 해체는 (인위적으로 구축돼온) ‘역사의 파편화’를 의미하 고, 이는 다시 (서로 다른 콘텍스트에서 그 파편들을 임 의적이고 계속적으로 사용함으로 인한) ‘기호의 끝없는 순환’으로 이어진다. 비들러가 (하버마스를 통해) 인용한 겔렌의 ‘문화의 결정화’는, 더 이상의 변화와 진보가 불 가능한 ‘끝없는 반복의 암울한 미래’를 나타낸 표현이다. 이 점은 2-2절의 서술과 대응하는 바다. 희망의 미래를 향한 타개책이라면 ‘과도한 문화적 결정화에 대한 저항’ 이며, 이는 결국 재현을 거부하는 ‘건축의 자율성’ 추구 로 수렴된다. 비들러는 그러한 현대 (박물관) 건축의 사 례로 루이스 칸의 킴벨뮤지엄(1972)과 라파엘 모네오의 메리다 로마예술박물관(1985)을 들고 있다. 이들은 ‘어떠 한 인용과 모사도 배제한’, 즉 ‘재현의 파사드’에 저항한, ‘얼굴 없는’ 자율적 건축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챕터가 말하는 비들러의 탈역사에 대한 입장은 모호하게 엇갈리 거나, 아니면 정밀한 단계설정을 요한다. 일단, 로우를 비판한 비들러는 고전적 재현을 해체한 스털링의 미술관 에 부정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는 탈역사에 비판적이다. 그렇다면 스털링의 재현 해체는 아직 탈역사의 단계에 이르지 않은 것으로 추론 가능하다. 즉, 이 건물은 ‘끝없 는 기호의 순환’ 혹은 ‘문화의 결정화’로 묘사된 탈역사 이전의 단계, 굳이 말하자면 ‘역사의 파편화’ 단계에 속 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만약 이러한 구분이 작위적이 라면 비들러의 탈역사 개념 자체가 불명확한 탓이다. 그 러나 이보다 더 모호한 바는 ‘역사의 종말’과 ‘역사의 종 말 이후’에 대한 미묘한 차이의 혼재다. ‘끝없는 기호의 순환’(탈역사)에 저항하고 이를 넘어선 것이 ‘자율적 건 축’이라면, 이는 분명 역사의 종말 ‘이후’를 지시하는 바 다. 그렇다면 이것은 ‘포스트-탈역사’인가, 아니면 이 역 시 ‘끝없는 반복’의 ‘엔드게임(endgame)’으로서 여전히 탈역사로 포괄되는가?<Figure>1

    3-2.언캐니와 탈역사의 관계

    이처럼 앞 절에서는 비들러의 『The Architectural Uncanny』에 나타난 탈역사의 문맥을 장별로 살펴봤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면은 언캐니 맥락에 나타난 비들러의 탈역사 인식을 탐색하는 데 할애됐고, 둘 사이의 직접적 관계에 대해서는 각 항의 서두에서만 간략하게 서술했다. 따라서 이번 절에서는 후자의 서술을 주제별로 조금 더 논해보자.

    첫째, 언캐니와 탈역사의 관계는 우선 ‘반복’의 개념을 통해 연결된다. 전술했듯 「Introduction」에 나타났던 이 맥락은 상당히 이중적인데, 그 까닭은 ‘반복’이 언캐 니의 원인이자 탈역사의 현상으로서 상이하게 해석되기 때문이다. 언캐니의 원인으로서의 반복을 위해 2-1절에 서 짧게 언급했던 프로이트(1919)의 견해를 다시 보자. 언캐니를 야기하는 반복은, 예컨대 다중복제된 도펠갱어 (Doppelgänger; double)든, 이집트의 미라든, 혹은 유아 기의 본능적 반복충동이든, 길을 잃고 원치 않게 동일한 장소로 계속 회귀하는 것이든, 다양한 유형이 존재한다. 한편, 탈역사의 현상으로서의 반복은 문화의 ‘결정화된’ 상태로의 끝없는 다가감이며, 더 이상 진보가 불가한 ‘무 한회귀’의 비관적 성격을 갖는다. 그렇다면 각각이 말하 는 ‘반복’의 범주는 분명히 다르다. 그럼에도 두 카테고 리의 교집합을 발견하는 것은 (비들러를 긍정적으로 수 용하고자 하든 그렇지 않든) 불가하지 않다. 프로이트가 길을 잃어 의도치 않게 왔던 길로 계속 되돌아오며 느꼈 던 기묘한 불안은, 탈출구 없이 정체돼 끝없이 반복하는 탈역사 현상과 겹치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이 둘을 연 결할 수 있는 접점의 예인데, 그 같은 미묘한 겹쳐짐 (double) 역시 언캐니하다.41)

    둘째, 언캐니와 탈역사는 건물의 고전적 파사드의 상 실을 통해 관계한다. 비들러가 비록 「Losing Face」 장에서 ‘언캐니’라는 말을 한 차례도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 카테고리는 ‘반복’의 개념보다 둘의 관계를 훨씬 긴밀 하고 손쉽게 연결할 수 있다. 우선, 고전적 파사드의 상 실은 건물 얼굴의 상실로서 언캐니의 유발을 의미한다. 이는 프로이트의 ‘거세공포’가 (호프만의 ‘모래인간’ 이야 기에 나타난) ‘안구상실’의 공포로, 그리고 ‘훼손된 몸’에 대한 두려움으로 확장됐기 때문이다. 한편, 건물의 파사 드 상실은 고전적 재현의 해체를 뜻함으로써, 앞서 자세 히 서술했듯, 탈역사의 상태를 표상한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들러의 저서에서 언캐니와 탈역사의 관계성을 텍스트의 직접적 해석에만 의존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듯하며, 앞의 두 항목은 그 본질적 관 계의 부분적 표출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면 둘 사이의 보다 본질적인 관계는 어디서 찾을 수 있 을까? 이는 역시, 앞서 몇 차례 강조했던, ‘근본적 거주 가 불가능한 현대의 조건에 대한 은유’로서의 언캐니에 서 찾아 볼 수 있다고 본고는 주장한다. 현대의 상황 가 운데 참다운 삶과 거주가 불가하다면 그것이야말로 역사 가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이며, 이를 바로 탈역사의 상 태로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언캐니와 탈역사의 개념은 텍스트의 직접적 해석의 측면과 본질적 측면 모두에서 매개가 가능하고, 그런 까닭에 비들러의 언캐니 텍스트에 탈역사 철학이 거론됐다고 용인할 수 있다. 허나 비들러가 탈역사 철학 자체에 비판적인 이상, 본고의 의의는 둘 사이의 관계성 에만 갇힐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앞 절에서 주로 살펴 봤던 비들러의 탈역사 인식에 대한 비판적 이해에 있고, 그 인식이 내포하는 더 넓은 지평에서의 의미일 것이다. 후자에 관해서는 별도의 장을 통해 논해보도록 하자.

    4.자본주의와 재현의 문제, 그리고 모더니티

    그것은 [언캐니는] 로맨티시즘,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 즘의 범주와 같은 역사가들의 시기구분을 관통하는 해 석 모델로서, 모더니티의 양상을 이해하기 위한 방편으 로서 역할 한다. (Vidler, 1992)42)

    3-1절에서 드러났듯, 비들러의 『The Architectural Uncanny』에 삽입된 두 개소의 탈역사 인식은 각각 자 본주의의 공허함과 재현의 해체 문제로 모아졌다. 전자 가 문제시한 자본주의는 경제시스템을 거쳐 정치성으로 직결되는 반면, 후자가 집중한 재현에 대한 논의는 예술 과 미학의 측면에 일차적으로 결부된다. 동일한 저서에 서술된 탈역사가 직접적 연계 없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음은, 특히 「Introduction」의 탈역사 개념이 본 문의 그것을 포괄하지 않음은 이 저작의 허점이다.43) 그 럼에도 불구하고 두 문제는, 매우 다른 각도에서지만, ‘모더니티’의 이슈로 조망될 수 있다. 비들러의 두 저서 모두가 궁극적 바탕을 여기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2장의 탈역사 논의에서는 비들러(2008)의 결론이 ‘여 전히 열려있는’ 모더니티에 대한 지속적 추구였음을 밝 혔다. 이러한 입장은 그의 변함없는 관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의 인용문에서처럼 비들러(1992)는 언캐니 역 시 ‘모더니티의 양상을 이해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기는 데, (언캐니가 그렇듯) 모더니티는 모더니즘이든 포스트 모더니즘이든 지난 수 세기의 시기구분을 꿰뚫는 특성이 다. (비들러가 이해하는 이 같은 모더니티의 특성은 그가 의지한 하버마스뿐만 아니라 하버마스를 거부한 바티모 에게도,44) 비록 서로 다른 입장에서지만, 모두 나타나는 바다. 후자에 대해서는 2-2절을 보라.) 그 시작이 과학의 혁신이든, 사상의 전회든, 미학의 도약이든, 정치와 산업 의 혁명이든, 비들러(2008)에게 모더니티는 ‘실험과 내적 탐문에 바탕을 둔, 재평가와 혁신의 지속적 기획’에 다름 아니다.45) 그렇다면 탈역사의 현상으로서 그가 인식한 자본주의의 공허함과 재현의 해체는 모더니티의 관점에 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큰 관점의 논의 는 본고의 범위를 벗어나기에, 여기서는 직접적 연결고 리만 밝히는 것이 좋겠다.

    먼저, ‘자본주의의 텅 빈 공간’에 대한 블로흐의 비판 을 보자. 그에게 기능주의의 ‘백지상태’는 자본주의의 공 허함을 은폐하기 위한 ‘위장’에 다름 아닌데, 자본주의의 조각난 현실과 분열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수법은 차라리 표현주의 작품이나 몽타주다. 이렇게 볼 때 블로흐의 자 본주의 비판에는 비들러(2008)가 추구하는 ‘파열된 순간 과 형상에 대한 재평가’라는 모더니티의 특성이 내재한 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힐데 하이넨(1999)의 연구에도 나타난다. 건축의 모더니티를 비판적으로 고찰한 그녀는 블로흐의 자본주의 비판에서 이른바 ‘반목가적 (counterpastoral)’ 모더니티를 발견했다. 그녀에 따르면 그러한 모더니티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모순을 봉합 하고 ‘진보’를 향한 공통된 노력만을 강조하는) ‘목가적 (pastoral)’ 모더니티와 달리 자본주의의 발전과 미학적 인식 사이의 근본적 괴리를 인정하는 유형이다.46) 비들 러(1998)는 이 같은 모더니티의 비판성을 결국, 언캐니를 통해, ‘정치적 함의’로 연계했었다. 아무리 허무적이고 자 족적인 시대에서도 ‘아방가르드 정치의 유령’은 완전히 축출될 수 없기 때문이다(p.14).

    한편, 재현의 해체는 모더니티의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문제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본고의 콘텍스트에서 이 해석은 부분적으로 매우 불명료해 보인 다. 3-1절에서 문제시했듯 재현의 해체 내에 미묘한 단 계의 변화가 있어 탈역사의 이해가 엇갈리는 것이 한 요 인이다. 또한, 예컨대, ‘포스트모던의 조건’을 이야기했던 료타르(1979)가 모던의 숭고 미학을 비재현과 관계시킨 것(1984)도 다른 요인으로 거론될 수 있다. 그러나 비들 러의 모더니티가 모던과 포스트모던의 구분을 뛰어넘어 혁신적 실험과 내적 재평가의 지속적 과정이라면, 그래 서 궁극적으로 재현에 대한 창조적 해체가 모더니티를 발현함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면, 이번 장의 논의 가운데 탈역사 이해의 미시적인 문제점은 극복될 수 있겠다. 흥 미롭게도 비들러(2008)는 건축적 모더니티의 발현을 반 두스부르흐로부터 아이젠만에 이르는 형태어휘의 측면과 코르뷔지에로부터 콜하스에 이르는 프로그램의 측면으로 나누어 제시했다. 물론 여기서는 그간의 재현을 혁신적 으로 해체하고 건축의 자율성을 추구한 전자의 유형에 주목하게 된다. 건축가 각각에 대한 세세한 평가는 다를 지언정, 그들의 실험이 현재 진행형으로서의 모더니티를 드러냈음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5.결론

    이 연구는 앤서니 비들러의 『The Architectural Uncanny』(1992)에 나타난 탈역사 서술에 착안해, 현대 건축의 언캐니와 탈역사 사이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고찰 하는 데 목표를 뒀다. 탈역사 철학뿐만 아니라 비들러의 역사적 입장 전반을 파악하기 위해 그의 또 다른 저서인 『Histories of the Immediate Present』(2008) 역시 유 용한 탐구 대상이었다. 본고는 먼저 건축의 언캐니과 탈 역사를 개별적으로 검토함으로써 각각에 대한 비판적 이 해를 얻었다. 그리고는 비들러의 언캐니 텍스트에 병치 된 탈역사 철학의 맥락을 짚어보고 그 의미를 찾아봤다. 결론적으로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해보자.

    첫째, 18세기 숭고 미학에서 파생해 프로이트(1919) 등을 거쳐 발전한 언캐니 개념은 비들러(1992)를 통해 현대의 건축과 도시 공간으로 투사됐다. 언캐니는 문자 적, 공간적 텍스트 모두에서 ‘근본적 거주가 불가능한 현 대의 조건에 대한 은유’로서 뜻 깊다. 둘째, 역사의 종말.

    을 의미하는 탈역사 개념은 자체로도 역사가 길지만, 20 세기 중반 독일의 철학자 아놀드 겔렌을 통해 용어와 개 념이 확산됐다. 이는 바티모에 의해 포스트모던의 콘텍 스트에서 논의됐고, 비들러(2008)는 그 논의를 종합해 (건물 자체와 역사서술론 모두에서) 건축의 포스트모던 적 현상과 비판적으로 견줬다. 셋째, 『The Architectural Uncanny』는 「Introduction」과 「Losing Face」장에서 탈역사 개념을 선보이는데, 언 캐니와 탈역사는 ‘반복’과 ‘파사드의 상실’이라는 개념 및 ‘근본적 거주가 불가능한 현대의 조건에 대한 은유’를 통 해 연계된다. 그리고 각 장에서 비들러가 인식한 탈역사 는 자본주의의 공허함과 재현의 해체로 상이하게 관계한 다. 넷째, 탈역사가 함의하는 자본주의의 공허함과 재현 의 해체는 일차적으로는 각기 비판적 정치성과 건축의 자율성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결국 두 이슈 모두 비들러가 근간하고 있는, 아직 진행 중인 ‘모더니티’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현대의 숭고에서 언캐니로, 거기서 또 탈역사와 포스 트모던을 거쳐 자본주의와 재현의 이슈를 경유했던 논의 는, 종국에는 모더니티의 문제로 회귀했다. 하버마스의 주장처럼, 그리고 하버마스를 수용한 비들러의 입장처럼, 모더니티가 ‘미완의 기획’이라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 니즘의 시기구분을 뛰어넘어 건축 창작의 혁신적 실험과 내적 재평가를 지속해야 할 것이다. 이 점이야말로 본고 가 궁극적으로 주장하는 바다.

    Fig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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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lans of J. Stirling's Stuttgart Staatgallerie (1984) and K. F. Schinkel's Altes Museum (1930), illustrated in Vidler (1992)

    Table

    Footnote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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