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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 1598-1142(Print)
ISSN : 2383-9066(Online)
Journal of architectural history Vol.24 No.4 pp.29-44
DOI : https://doi.org/10.7738/JAH.2015.24.4.029

The construction classification of coastal castles in the early Joseon period and the background on their relocation

Soon-Kang Kwon1), Ho-Yeol Lee
Corresponding author : ksk@wooricp.or.kr
April 15, 2015 July 15, 2015 August 25, 2015

Abstract

Coastal eupseongs, which are mainly built in the period of late Goryeo and early Joseon period, are essential materials in studying the history of Joseon period eupseongs.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connect the annexation of local districts with the relocation of local government office, so as to categorize the types of coastal-eupseongs and examine the background of their constructions and relocations. Coastal eupseongs are mainly divided into ‘maintenance type’ and ‘Mergence type’ according to the annexation of local districts, and maintenance type is broken down into fortress type and non-fortress type in accordance with the existence of old eupseongs(fortresses). Coastal eupseongs can also be categorized into ‘application type’ and ‘relocation type’ depending on whether ex-local government offices were reutilized or relocated. Maintenance type is ‘fortress-application type’(Gimhae·Gosung·Old Ulsan-eupseong), ‘non-fortress-application type’(New Ulsan-eupseong), ‘fortress-relocation type’(Dongrae․Kijang․Geojegohyunseong․ Ulsan(Jwabyeongyoung)-eupseong), ‘non-fortress-relocation type’(Sacheon․ Hadong·Jinhae-eupseong·Geojesadeongseong) are differentiated by type. Mergence type is divided into ‘Merger of Villages after Castle Relocation Type(Changwon·Namhae·Gonyang-eupseong)’, ‘Merger of Villages before Castle Relacation Type(Ungcheon-eupseong)’.

Coastal-eupseongs are moved to other places in need of more affluent water supply(Gimhae·Gijang-eupseong) and wider usable area(Namhae·Gohyunseong-eupseong). Eupseongs were enlarged owing to the population growth, caused by annexations of local districts.(Ungcheon-eupseong) ‘Seonso’(navy yard) is a unique feature which cannot be seen in inland eupseongs.


조선전기 남동부 연해읍성의 축조유형 구분과 이건배경

권 순 강1), 이 호 열
부산대학교 건설융합학부 건축학전공 교수
부산대학교 건축학과 박사수료, (재)우리문화재연구원 건축고고과장

초록


    1.서 론

    1-1.연구 배경 및 목적

    조선시대 남동부 연해지역에 위치한 군현의 치소는 남 북국시대 혹은 고려시대의 치소를 이용하기도 하기도 하 지만 대부분이 조선의 통치이념과 효율적인 방어를 위해 새로운 장소에 치소를 조성하였다. 남동부 연해지역의 치 소는 삼별초와 여말선초에 왜구의 침입으로 연안의 도시 를 내지로 이동시키면서 행정구역의 변화가 특히 많은 지 역이다. 이후 연해지역이 안정되면서 각 군현마다 읍성을 축조하여 왜를 방어하는데 이 연해읍성은 남북국시대 혹 은 고려시대의 고읍성과 비교하면 입지와 규모, 읍성의 축조 재료와 수법, 내부 공간구조도 다르게 축조된다.

    郡縣制는 삼국시대부터 도입되어 정착·발달되어 왔으 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태종조에 본격적인 정비작업이 시작되었다. 이원적인 고려의 道制을 일원적인 팔도체제 로 개정하고 신분적이고 계층적인 군현체계를 행정구획으 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屬縣과 향·소·부곡 등 任內를 정 리, 小縣의 병합과 이에 따른 명칭변경 등이다.1) 고려·조 선시대 군현의 구획은 삼국시대의 國·城·村이 그대로 주· 군·현으로 개편되는 경우도 있고 수 개 이상의 城또는 향·부곡 등을 領有하여 하나의 고을이 되기도 하였다.2)

    조선시대 연해읍성은 고려 우왕대부터 축조되어 조선 성종대까지 축조되는데 이 시기는 내지읍성 축조 전에 해 당하여 조선시대 읍성제도 수용과 발달 연구에 있어 중요 한 자료지만 이에 대한 연구 성과는 많지 않다.3) 특히 남 동해안에 위치한 연해읍성을 대상으로 행정구역의 변천과 고읍성과 비교하여 연해읍성의 유형구분과 이건배경에 대 한 연구는 미진하다.

    이 연구의 목적은 연해읍성의 유형분류, 축조 및 이건 배경, 선호입지, 규모 등을 군현의 변천사와 고읍성과 비 교를 통해 규명하는데 있다.

    1-2.연구대상 및 연구방법

    연해읍성은 왜구의 내지 진출 저지와 해로를 차단하기 위해 양항이나 수운 가능한 강 하구에 건립된다. 이 연해 읍성중 일본과 가장 인접한 울산, 부산, 경남역의 14개소 17기의 연해읍성을 대상으로 선정하였다.4)(Fig.2. Tab.1) 분석시기는 고읍성이 축조되는 통일신라말에서 본격적인 읍성이 축조되는 임진왜란 이전까지를 대상으로 하였다.

    분석방법은 조선왕조실록과 지방지를 통해 연혁을 중 점적으로 분석했으며, 발굴조사보고서를 통해 현황을 참 고하였다. 제원과 입지분석을 위해 항공사진과 일제강점 기에 제작된 지적원도를 분석하였다. 이 지적원도를 오토 캐드 프로그램으로 디지털화하고 현재의 지형도와 구글어 스프로에 탑재하여 분석하였다. 지적원도에서 성벽이 확 인되지 않은 경우는 발굴조사와 선행연구를 통해 분석·보 강 완성 하였다.

    2.군현의 위상변화와 고읍성 사례

    2-1.군현의 위상변화(Tab. 2)

    읍성은 전략적 중요도, 왜사신의 왕래도로, 군현의 위 계에 따라 축조여부와 규모가 결정된다. 이중 규모는 변 방의 군사적 목적으로 건립한 군현을 제외한 일반 군현에 서는 군현의 위계와 밀접한 상관성이 있다. 군현은 시대 적 상황에 따라 성장 및 쇠퇴를 반복 하는데 분석대상인 연해읍성의 남북국시대부터 조선시대 세종조까지의 변화 는 Tab. 2 와 같다.

    삼국시대에는 남해안의 해상교역의 중요성으로 인해 연해 군현이 발전하여 연해지역에 비교적 큰 군현들이 경 영되고 있었다. 하동군, 고성군, 남해군, 거제군, 의안군, 동안군(生西良), 동래군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중 김해와 고성은 금관가야와 소가야의 도성이 있어 남북국시대에는 9주의 하나인 진주와 5소경 중 김해소경이 설치되어 운 영되었다.

    고려시대에는 5도 양계의 행정구역 개편되지만 남북국 시대와 큰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 김주(김해)는 의안군과 함안군을 속현으로 두었으며 울주도 동래현과 헌양현(현 언양읍)을 속현으로 두어 위상이 강화되고 사천도 泗州로 승격되었다. 반대로 하동군과 의안군은 주읍에 속군이 되 고 동래군은 현으로 강등되었으며 고성군은 속현이 없어 져 모두 남북국시대보다 위상이 낮아졌다. 거제군, 남해 군, 기장현은 위상이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고려후기 거제, 남해, 창선의 주현과 속현은 삼별초와 왜구의 침입으로 邑治出陸정책을 실시하여 진주목 예하의 군현에 교거하 僑寓하였고 거창과 군현과 병합을 거쳐 세종 4년(1422)에 복설하였다. 남해군은 공민왕 7년(혹은 6년, 1357, 1358) 에 진주 임내인 大也川部曲에 교우하였으며 이후 여러 차례 타 군현과 병합을 거쳐 세종 19년(1437)에 복설되었 다.6)

    조선시대에는 8도제를 시행하면서 고려시대에 비해 많 은 변화가 있었다. 김해부가 도호부로 위상이 낮아진 반 면 의안군(의창현)이 합포현(회원현)에 병합하여 창원도 호부로 성장했다. 곤양군은 군명현이 남해와 병합하여 곤 남현으로 되었다가 남해현이 복설되면서 분리된다. 다시 곤명현은 세종의 어태를 안치하여 진주 任內金陽부곡과 병합하여 곤양군으로 승격되었다. 반면 울주는 울산군으 로 하동군, 고성군, 거제군, 남해군은 현으로 강등되었다. 동래현과 기장현은 위상의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2-2.김해고읍성(Fig.1, Fig.2)

    김해는 문헌과 현재까지 발굴성과를 보면 금관가야의 궁터로 알려진 봉황대 유적(사적 제2호), 수로왕릉(사적 제73호), 원삼국시대부터 가야시대까지의 고분군(사적 제 341호) 등이 있어 가야의 수도로 알려져 있다. 또한 남북 국시대에는 김해소경이 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금주가 되 어 2개의 속군과 3개의 속현을 가진 큰 도시였다. 김해고 읍성의 발굴조사결과 남북국시대에서 고려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7)되어 있으며 문헌에서는 토성 혹은 분성(盆 城)이라 했으며 가야 수로왕이 축조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8) 김정호과 관련이 있는『大東地志』와 『輿圖備 志』에는 박위(朴葳:?~1398)가 고려시대에 읍성을 축조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분산성 축조기록으로 보인다. (Fig.1, Fig.2)

    김해고읍성은 현재 도시화로 인해 원형이 훼손되었지 만 발굴조사와 선행연구 그리고 1954년에 촬영된 항공사 진으로 원형을 유추할 수 있다. 고읍성의 축조시기는 남 북국시대(7C 중후엽)에서 고려시대(11-12C)까지 사용된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아주 완만한 경사가 있는 평지에 남북을 흐르는 호계천의 수계와 수로왕릉 그리고 낮은 구 릉인 봉황대를 포함하여 축조되어 있다. 둘레는 약 5.4㎞ 로 추정되며 『大東地志』에서는 8,683尺으로 기록되어 있다.9) 흙으로 쌓은 토성이며 성벽하단에는 3단의 석재로 마감되어 있으며 성체 내부에서는 영정주(永定柱)와 횡장 목(橫長木)이 결구된 체로 확인되기도 하였다.10)

    2-3.동래고읍성(Fig.1, Fig.4)

    동래고읍성은 김해고읍성과 마찬가지로 도시화로 인해 원형을 알 수 없지만 1950년에 촬영된 항공사진과 발굴 조사보고서를 통해 형태와 둘레를 파악할 수 있다. 동래 고읍성은 남북국시대 8C 중반에 축조되어 고려 현종대에 1차 수축이 있었다. 고려 중기 13C 중반이전에 2차 수축 이 있었으며 14C 중반에 폐기된 것으로 보고되어 있 다.11) 동래군은 남북국시대에 동래군으로 동평현과 기장 현의 두 속현을 두고 있었다. Fig.4

    고읍성의 위치는 현재 부산지방 병무청일원으로 동래 읍성에서 동남쪽으로 약 3.5㎞이다. 낮은 구릉과 구릉말 단부 그리고 평지에 축조된 평산성이며 성내에는 2기의 방천이 흐르고 있다. 둘레는 『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4,430尺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실제 길이는 항공사진과 지 형도에서 오버랩하면 둘레는 약 2,129m이다. 성벽의 축조 방법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동남은 석축으로 쌓고 서북은 토축으로 쌓았다고 되어 있으며 발굴조사에서는 서북쪽에서만 실시되었는데 흙으로 축조된 것이 확인되었 다.12)

    2-4.남해고현성(Fig.1)

    남해고현성은 설천면 비란리 정태마을 뒷산인 성산(火 金縣山, 76.8m)에 위치해 있는 산성으로 문헌에는 火金 縣山城으로 기록되어 있다.13) 그리고 『해동지도』, 『1872년 지방지도』, 『여지도』, 『지승』에서는 ‘古縣 城’으로 기록되어 있고 『대동여지도』에서는 산성표시를 해놓고 ‘古縣’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1395년경에 축 조14)된 고읍성으로 추정된다. 남해읍성에서 북쪽으로 약 5㎞정도 이격되었으며 성벽하부에 고려시대 이전의 토성 이 존재할 가능성도 제기 되고 있다.15)

    남해는 통일신라부터 고려시대까지 남해군으로 蘭浦縣 과 平山縣두 속현이 있었는데16) 속현과 주읍은 1530년 의 왜구의 침입 때문에 남해섬에 1358년에는 진주 임내 인 大也川部曲에 僑居하였다. 두 속현은 인적 손실로 자 연스럽게 주현에 병합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현성은 남해 에 한시적으로 복설하면서 축조한 읍성으로 보인다.

    낮은 구릉의 정상부와 북쪽 계곡을 포함한 포곡식 산 성이다.『新增東國輿地勝覽17)에서 둘레는 1,740尺이라 되어 있으며 『慶尙道續撰地理志』에서는 둘레가 1,749 尺이며 높이 10尺, 폭이 11尺으로 되어 있다. 현재 둘레 는 약 600m이다. 현재 많이 훼손되었지만 잔존한 성벽을 보면 조선시대 읍성축조방법과 매우 유사하게 쌓은 것을 알 수 있다.

    2-5.기장 고읍성(Fig.1)

    기장고읍성은 기장읍 교리에 있으며 기장향교 뒷산과 셋드산의 북쪽구릉사이의 하천과 곡저평야를 둘러싼 평산 성이다. 기장읍성에서 북쪽으로 직선거리로 약 958m로 이격되어 있다. 축조시기는 일부지역만을 표본시굴조사를 실시하여 축조시기를 단정하기에는 이르지만 출토된 기와 를 보면 최소한 통일신라 후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되었 다.18) 한편『大東地志』에서는 고려 현종 2년(1011)에 축조되었지만 우왕 2년(1376)에 왜인들이 기장을 소진하 면서 고읍성이 훼손되었다. 공양왕 3년(1391)에도 기장성 을 축조하였으며 세종 7년(1425)에 기장읍성을 완공하여 이건하여 폐성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19) 또 임진왜란때에 왜구가 고읍성 성벽의 석재를 왜성축조에 사용하면서 대 부분20) 폐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는 타원형이며 둘레 는 『新增東國輿地勝覽』과 타 문헌에서 3,208尺으로 기 록되어 있다. 항공사진으로 보면 약 1.6km로 추정된다.

    2-6.창원 회원현성(Fig.1, Fig.5)

    창원 회원현성지(이하 회원현성, 경상남도 기념물 제88 호)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자산동 일원에 입지해 있는데 낮은 구릉인 자산(143.8m)과 평지를 둘러싼 평산성이다. 자산에 축조되어 있어 ‘자산성’ 혹은 ‘환주(還珠)산성’이라 고도 불리기도 하는데 자산에서 ‘자’자는 우리말로 성을 일컫는 ‘잣’을 일컫는데 여기서 연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말에 여몽고군이 일본정벌을 위해 주둔하기도 했으 며21) 합포성지(경상병마절제사영, 右兵營, 內廂城)로 이 건하기 까지 절도사영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22) 둘레는 약 1.4km로 추정23)되고 성내에는 작은 계곡이 흐르고 있 다. Fig.5-6

    발굴조사 결과 축조시기는 초축층에서 ‘宜春’이라는 연 호가 확인되어 축조시기가 10C경까지 올라가고 개축한 층위에서 ‘正豊二年丁丑’의 명문와가 확인되어 11C에 수 축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또 ‘南面’이라는 기와편 이 확인되어 또 한 번의 수축이 더 있었던 것으로 추정 하고 있다.24)

    2-7.울산 고읍성과 울산읍치 이동(Fig. 3)

    울산고읍성은 현재 유구가 확인되지 않아 문헌으로 밖 에 검토 할 수밖에 없다.『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고읍 성은 계변성(신학성)의 서쪽에 축조하였는데 둘레는 315 步이다. 성균사예 李文和(1358~1414)가 주축이 되어 1384 년에 축조되기 시작하여 元帥겸 都巡問使박위의 명으로 울산지주사 金及의 참여로 1390년에 완성하였다.25) 위치 는『鶴城誌』와『嶺南邑誌』에서는『新增東國輿地勝 覽』와 달리 계변성의 東쪽에 축조한 것으로 되어 있는 데 앞의 두 문헌의 기록 오류인지 알 수 없다.26) Fig. 3

    태종실록에서도 울주읍성의 기록27)이 확인되고 있어 고읍성을 읍성으로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1416년에는 울산군성을 축조하였는데 수개월이 안 되어 頹落하여 사 헌부에서 죄를 청한 기록에서 울산고읍성의 개축사실을 알 수 있다.28) 1425년에 새롭게 축조된 내상성(경상좌도 병영성)에 읍치를 이건하여 관리와 백성 그리고 물자를 지키려 하였다. 하지만 내상성안에 무관직인 종2품 절제 사와 문관인 종4품 군수가 성내에 공무를 함께 보게 되 어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이에 절제사와 軍馬는 구 (울산)읍성으로 옮기고 군수와 백성은 내상성안으로 옮겨 사용하였다.29) 읍치는 1년 뒤 1426에 내상성(병영성)의 서쪽 7里지점 즉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병영성도 창 원 합포로 합속된다.30) 1476년에 울산과 창원은 연해의 큰 고을이지만 성보가 없어 사변을 대비해 읍성을 축조하 기 시작하여 1477년에 완성하였다.31)

    울산읍성은 복잡한 이건과정을 보이는데 이는 울산이 방어의 중요성으로 인해 수령뿐만 아니라 절제사가 파견 되어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상급자인 병마절제사가 수령직을 겸직을 하기도 했으며 행정과 방어 본연의 업무를 위해 분리되기도 하였는데 필 요에 따라 겸직과 복설을 반복하였다. 이런 읍치의 복잡 한 이건 때문에 고읍성을 이용하는 ‘구울산읍성기’, 병영 성에 잠시 교거하는 ‘좌병영성교거기’, 지금의 치소에 이 건하여 사용하는 ‘신울산읍성기’로 구분하였다.

    3.조선시대 읍성 축조유형

    3-1.조선시대 읍성축조 유형구분(Tab.3)

    연구대상이 속한 조선시대 군현에는 통일신라 및 고려 시대와 달리 빠짐없이 읍성을 축조하여 왜구를 방비하였 다. 읍성의 축조유형을 군현제의 병합 유무, 읍치의 이건 여부, 고읍치와 신읍치의 성곽 유무의 기준을 통해 읍성 축조유형을 구분하였다. 군현의 병합여부는 군현의 위상 변화와 관계없이 속현의 이탈만 있을 뿐 기존의 읍치가 그대로 유지되는 ‘유지형’과 속현 혹은 인근의 군현이 병 합되는 ‘병합형’으로 크게 구분된다. Tab.3

    유지형은 조선시대 신읍치가 고읍치의 활용여부와 이 건여부에 따라 ‘活用形’과 ‘移建型’으로 구분된다. 이 두형 은 다시 성벽의 축조 여부에 따라 구분된다. 즉 활용형에 서 고읍성 내외에 신읍성을 축조하는 ‘고읍성 활용 읍성 축조형’이며, 고읍치에서 읍성을 축조하는 ‘고읍치 활용 읍성축조형’ 두 가지로 구분된다. 이건형을 보면 고읍치에 서 이건하여 읍성을 축조하는 ‘고읍치에서 읍성축조후 이 건형’과 고읍치에서 읍성을 축조하지 않고 읍치만 이건하 는 ‘고읍치에서 읍치 이건형’으로 나눌 수 있다. ‘고읍치에 서 읍치 移建型’은 연구대상에서는 보이지 않고 있다. 읍성축조 없이 이건한 유형은 울산이 유일한데 이는 읍치 를 자주 이건한 결과이다.

    병합형은 군현을 먼저 병합하고 후에 읍성을 축조하는 ‘先郡縣竝合, 後邑城築造型’과 읍성을 먼저 축조한 후에 주위의 군현을 병합하는 ‘先邑城築造, 後郡縣竝合型’으로 구분된다. 이때 군현이 병합되면서 읍성은 기존의 큰 군 현의 치소나 방어가 긴요한 군현에 설치된다.

    3-2.고읍성 활용 읍성축조형

    ‘고읍성 활용 읍성축조형’은 김해, 고성, 울산구읍성이 이에 해당한다. 또 성벽 축조 장소에 따라 ‘獨立縮小型’, ‘部分縮小型’, ‘繼承型’으로 구분된다.

    ‘독립축소형’은 고읍성 내부에 고읍성의 성벽과 이격하 여 별도의 읍성성벽을 축조하는 유형으로 김해읍성이 이 에 해당한다. 김해읍성은 둘레가 약 5.4㎞인 김해고읍성 안에 축성되는데 둘레는 약 1,934m이다. 이는 김해의 위 상이 낮아진 결과로 추정된다. 고읍성과 읍성의 평면형태 는 말각방형이며 읍성의 위치는 고읍성 내부에 축조되었 다. 고읍성 내부에 축조된 읍성은 정중앙이 아닌 동편에 편중되어 있는데 이는 고읍성 내부에 남북으로 흐르는 호 계천 수계를 이용하려는 의도와 낮은 독립구릉인 봉황대 (46.5m), 수로왕릉과 같은 구릉과 묘역을 제외하여 평지 에 축조하여 토지 이용 효율을 높이려는 의도로 추정된 다.(Fig 2)

    ‘부분축소형’은 고읍성 내부에 읍성을 축조하는데 읍성 성벽이 고읍성의 성벽을 일부 사용하는 유형으로 고성읍 성이 이에 해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고성읍성의 경우 소 가야의 도성32)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고성읍성의 서남쪽 성벽부분을 발굴조사결과 성터하부와 성내에서 원삼국시 대(기원전 2C 전후로)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유물이 확인되 었다.33) 이런 발굴성과와 주변의 송학동 고분군(사적 제 119호)을 보면 기원전부터 고려시대까지 고성의 중심치소 로 비정되고 있다. 고성읍성의 서북쪽인 서외리 49번지에 서 고읍성(토성)의 일부가 남아 있는데 발굴조사결과 토 성은 9C전반에 축조되어 3차례에 거쳐 수축이 있었다. 이 토성의 장축방향을 동쪽으로 연장하면 고성읍성의 북 쪽성벽과 접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보면 고읍성의 일 부 영역과 성벽을 전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성 고읍성 의 연구와 발굴조사가 극히 일부분에만 실시하여 제원에 대해 알 수 없지만 김해읍성처럼 고읍성내에 축조될 가능 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현재로써는 부분축소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두 읍성은 가야의 도성으로 추정되는 곳에 축조된 공통점이 있다.(Fig.5)

    ‘계승형’은 고읍성의 성벽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수축하 는 유형으로 구울산읍성이 이에 해당한다. 울산은 고려시 대에 비해 군현의 위상이 낮아져 작게 축소되어야 하나 고려말에 고읍성을 축조하면서 계변성의 일부를 이용하여 축소 축조되는 과도기를 거쳤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3-3.고읍치 활용 읍성축조형

    ‘고읍치 활용 읍성축조형’은 신울산읍성이 이에 해당하 는데 신울산읍성은 1476년에 신울산읍치에 읍성을 축조 하였기 때문이다. 신울산읍성은 含月山(201m) 남사면 말 단부에 남향하여 자리잡고 있어 지형은 남저북고형의 경 사지형을 이루고 있다.(Fig.3) 추정 남문지에서 남쪽으로 약 313m 앞에는 태화강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있다. 지적원도와 현장에서 성벽읍성이 보이지 않는데 성벽을 왜구가 울산왜성을 축조하면서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지 적원도에서 추정 공해시설 외곽에 국유대지가 環狀으로 둘러져 있는데 이곳은 성벽과 해자사이의 공간으로 추정 된다. 이를 토대로 대략적인 둘레를 측정하면 약 1.688㎞ 로 추정된다.(Fig.7)

    3-4.고읍성에서 읍성축조 후 이건형

    ‘고읍성에서 읍성축조 후 이건형’에 해당하는 읍성은 동래·기장·(거제)고현성·울산읍성(좌병영성교거기) 모두 4 기이다.

    동래읍성은 동래고읍성에서 1387년에 이건축조34)되었 고 1446년에 수축(修築)되었다.35) 동래읍성은 수영강의 지류인 온천천의 중류역에 입지한 마안산 남사면 말단부 에 입지하고 있다. 동쪽 성벽에 대해 고고학적인 조사가 실시되지 않아 위치를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평면형태 는 공해시설의 배치를 보았을 때 사각형에 가까운 타원형 이며 둘레는 약 1,400~1,500m로 추정된다.(Fig.7의 동래 읍성) 성내는 평지에 가까우며 동쪽 성내에는 작은 계곡 이 포함하여 축조되어 있다. 임진왜란이후 1731년에 확장 증축되었다.36)

    기장읍성은 고읍성에 샘(泉)이 없어 농성에 불리하여 세종 3년(1421)에 축조공사를 시작하여 세종 7년(1425)에 완공하여 이건하였다.37) 양달산의 동쪽 능선의 남사면부 에 남향하여 자리잡고있다. 이로 인해 성내는 남저북고형 의 경사면을 이루고 있다. 남벽 내부에는 용소골에서 발 원한 청강천(죽성천의 지류)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있 다. 읍성의 평면형태는 타원형에 가까운 오각형이며 돌로 쌓았는데 둘레는 약 1.04㎞이다.

    고현성은 거제 사등성(이하 사등성)이 완공된 후 3년 뒤인 문종 1년(1451)에 고정(古丁)부곡으로 이건하였 다.38) 1448년에 완공된 사등성이 법식에 맞게 축조되지 않아서 낮고 협착하고 또한 샘이 모자라는 이유로 이건하 였다. 반면 이건 될 고현성은 주변에 넓고 평평하여 경작 지와 마을을 조성할 수 있고 성내 면적이 넓기 때문이다. 또한 골짜기가 깊고 우물과 샘이 있어 방어하기 유리하며 주변의 진성과의 방어의 효율성 그리고 고성의 당포를 조 망 할 수 있는 군사적인 이점의 이유로 이건 되었다.39) 계룡산의 동사면부 말단부에 구릉에 입지하여 서고동저형 의 지형이다. 읍성은 구릉의 지형에 맞게 축조되어 동서 축이 긴 육각형의 형태(전통배의 평면형태와 유사)이고 둘레는 약 1.37㎞이다. 고현성은 사등성에서 동쪽으로 약 6.5㎞지점이며 동쪽 약 2㎞지점에는 조선 초기 치소인 수 월리가 있다.

    구울산읍성은 1425년에 축조된 내상성(경상좌도병영성) 에 1426년 신읍치 이건 전까지 교거하거 하였다. 이렇게 잠시 내상성을 사용하는 것은 읍성의 축조목적에 맞지 않 게 축조된 이유와 1426년 11월 12일에 도절제사를 혁파 하여 첨절제사를 지울산군사로 겸직40)하면서 내상성을 鎭으로 사용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41)

    3-5.고읍치에서 읍성축조 후 이건형

    ‘고읍치에서 읍성축조 후 이건형’에 해당하는 읍성은 거제 사등성, 사천, 하동, 진해읍성 4기이다. 사천의 고읍 치는 사천강의 우안에 있는 평야에 자리잡고 있는 동면 고읍리에 있었다.『조선후기지방지도』에서도 ‘古邑’의 지 명이 보인다.42) 고읍리는 사천읍성에서 동남쪽으로 약 1.86㎞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는 ‘古邑’, ‘옥터’, ‘성벽터’라 는 지명만 전해지고 있다.43) 그러나『新增東國輿地勝 覽』에서는 사천현에 성이 없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고읍치에는 성벽이 없는 무성벽형식임을 알 수 있다. 사 천읍성은 세종 24년(1442)에 고읍리에서 북쪽 4리 즉 현 읍성자리에 이건하여 축성하였으며 乙丑년(1445)에 완공 하였다.44) 하지만 문종 1년(1451)의 기록을 보면 해자가 설치되지 않았는데45) 단종 즉위년(1452)에 사천(읍)성을 감독해 쌓은 기록을 보아 해자를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 다.46)

    고려시대 거제의 치소는 둔덕면 거림리 일대로 추정되 고 있다.47) 거제도는 원종말 혹은 충렬왕 초에 삼별초에 대응한 거제도에 대해 징벌적 조치를 취하기 위해 주민과 치소를 내지로 이건하는데 主縣인 거제현은 가조현(현 거 창군 가조면)으로 이건 되었다.48) 이후 거제현은 거창현 과 병합하여 제창현(濟昌縣)이라 하였지만 다시 혁파되었 었다. 세종 4년(1422)에 深浦의 水月平(현 수월동 주변) 에 목책과 관사를 설치하여 복설하였다. 하지만 이 치소 는 농장이 협소하여 사람이 모여살 수 없고 땅이 낮고 습하며, 3면이 산이 압림(壓林)하여 수호하기 곤란하고 적의 배가 쉽게 들어 올 수 있어 고읍(거림리 일대)으로 이건하는 안에 대해 논의 되었다.49)

    이에 경차관 허성이 읍성터를 살펴본 결과 사월포(현 사등성)로 지정한다. 그 이유는 백성들이 사는 마을과 멀 지 않고 유사시 입보하기 쉽고 적선들이 숨은 섬들과 멀 고 또한 농장과 가까기 때문이다.50) 무엇보다도 육지와 연결되는 견내량과 가장 가까운 평지에 축조하려는 의도 로 보인다. 사등성은 백암산의 북쪽에 위치한 사등천 하 류의 좌안에 위치한 곡저평야에 입지하고 있으며 돌로 쌓 았는데 둘레는 약 0.9㎞이다. 사등성은 수월동에서 서쪽 으로 약 8.6km 이격되어 있다

    고려시대 하동의 치소역시 알려져 있지 않은데 하동향 교의 기록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51) ‘향교는 현의 동 쪽 3里에 있는데 1459년에 현감 崔承宗옛 읍터에 건립 했다.’라는 기록에서 고읍치가 향교터임을 알 수 있고 하 동읍성이 이건한 것으로 알 수 있다. 하동은 1404년에 남 해와 병합하여 河南縣이라 하였으며 1415년에 남해와 분 리하여 하동현으로 복설되었다.52) 2년 후인 하동읍성이 축조되는데 처음에 성벽이 없었는데 1417년 양경산아래 에 돌로 쌓았는데 둘레는 약 1.3㎞이다.53) 이를 종합하면 조선초기에 향교터에 성벽이 없는 읍치를 두었다가 하동 현이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시점인 1417년에 현재의 터에 읍성을 축조하여 읍치를 이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의 진해현의 치소는 ‘고현’이라는 지명으로만 위치를 추정하고 있다. 현재도 고현리라는 지명이 사용되 고 있으며 이 고현의 지명은 1786년에 편찬된 『鎭海縣 邑誌』54)에서 확인되며 『1872년 지방지도』등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이 지명만으로 고려시대의 치소로 비정되 기도 한다.55) 고현리 인근에는 성곽이 알려져 있지 않지 만 고현리 북쪽 즉 진해읍성의 북서쪽에 800m 지점에 사 동리 토성이 있다. 사동리 토성도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시기와 성격을 규명할 수 없지만 지표에 노 출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기와들이 다량으로 확인되고 있어 축조시기는 남북국시대에 축조되어 고려시대까지 사 용된 추정된다.56) 이 토성을 고읍성으로 볼 수 있으나 진 해현이 고려초에 설치됨으로 치소를 보호하기 위한 치소 로는 보기 힘들고 유사시 입보하는 군사적 목적에 조성된 산성으로 추정된다. 진해읍성은 태봉천과 진동천 하류 사 이 평지에 돌로 쌓았는데 둘레는 약 0.64㎞이다.

    3-6.선 군현병합, 후 읍성축조형

    선 군현병합 후 읍성축조형에 해당하는 읍성은 창원, 남해, 곤양읍성 3기이다. 창원은 태종 8년(1408)에 의창 (義昌)과 회원(會原) 두 현의 뒤 글자를 취하여 창원이라 하였고 창원부로 승격되었다.57) 회원현의 위치는 규명되 었지만 의창현의 위치는 규명되지 않았다. 의창현은 현재 의창구, 성산구일대로 주변의 산성(簾山城, 劍山城)을 보 았을 때 현재의 자리일 가능성도 있다. 태종 을미년 (1415)에 창원도호부로 승격58)되었으며 세조 3년(1457)에 칠원과 진해 두 현을 합속시켜 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59) 창원읍성은 성종 8년(1477)에 지금의 자리에 축조되는데 진산인 염산의 사면 말단부에 돌로 쌓았는데 길이는 약 1.7㎞이다.

    남해현은 1395년경에 남해도로 복설되지만 1414년에 河東과 병합하여 河南縣으로 되었다. 1415년에 진주임내 金陽部曲과 병합하여 海陽縣이 되었으며 1417년에는 남 해현으로 복설되었다. 1419년에 昆明縣과 병합하여 昆南 軍으로 승격되었으며 1437년에 남해현으로 복설되었다.60) 수 차례의 군현의 병합과 분리가 끝나고 2년 후인 현이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1439년에 죽산리(현재의 위치)로 이 건 하였다. 이러한 행정병합 후 2년에 읍성을 축조하는 유형은 하동읍성과 유사하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는 약 1.29㎞이다. 이건배경에는 땅이 좁고 경사져 험한 산성의 불편함을 이유를 들고 있지만 속현이 없어져 치소를 남해 도의 중심에 두어 행정의 편의를 도모한 의도로 보인다.

    이후 1486년에 대지가 좁고 샘이 없는 이유로 退築하려 는 논의도 있었다.61)

    곤양은 고려시대 顯宗대에 진주에 속한 곤명현이였지 만 세종 1년(1419)에 세종의 어태를 안치하면서 남해현과 병합하여 昆南郡으로 승격되었다.62) 곤남군으로 승격되기 전의 고읍성은 광여도를 보면 ‘金城古邑’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곳은 현재 사천 금성리 토성지(경상남도 기념물 제177호)로 추정되고 있으며 토성은 현재 곤양읍성에서 북쪽으로 약 9.5㎞ 이격되어 있다. 축조시기는 삼국에서 남북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낮은 구릉과 계곡을 포함하여 축조된 평산성이으로 둘레는 약 2㎞이 다.

    군현의 병합 2년 후인 1421년에 곤남(곤양)읍성을 축 조63)하였지만 이후의 기록에서 마치지 못한 기사가 확인 되어 읍성의 축조가 순조롭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64) 1430년에 읍성의 큰 골격은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1437년에 남해현이 복설되면서 昆明郡으로 명했지만 진 주의 金陽部曲을 합하여 昆陽郡으로 개명되었다.65) 곤양 읍성은 곤양천과 무고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작은 구릉사이 평지에 건립되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는 약 1.64㎞이다.

    3-7.선 읍성축조, 후 군현병합형

    ‘선 읍성축조, 후 군현병합형’은 읍성을 축조하여 주변 의 치소를 병합하는 유형으로 웅천읍성 1기가 이에 속한 다. 웅천은 신라시대 웅지(熊只)현으로 불리우다가 경덕 왕때 웅신(熊神)현으로 개명하였다. 고려 현종(顯宗)때에 금주(金州, 김해)에 속했지만 웅천읍성은 삼포의 하나인 제포왜관을 통제하기 위해 1437년에 웅신현을 웅신진으 로 만들고 김해 부사를 첨절제사로 겸직하여 임명하였다. 세종 17년(1435)부터 읍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여 세종 19 년(1437)에 완공되었다.66) 문종 1년(1451)에 웅신, 완포 (莞浦), 천읍(川邑) 3현과 창원의 산려(山餘) 3里를 합하 여 웅천현으로 통합하였다.67)『大東輿地圖』에서 완포현 을 보면 고현(古縣)과 고산(高山)에 성곽표시가 있는데 위치는 진해시 현동 일대이다.68) 고현의 축조 시기는 알 수 없으며 고산성은 고려 우왕 10년(1384)에 석축으로 쌓 았으며 둘레는 약 1,268m이다. 축조 후 단종 1년(1453)에 병합으로 인해 鎭에서 縣으로 승격되었지만 이에 맞는 공해와 군영을 세울 수가 없고 샘이 적어 읍성을 증축하 였다.69) 웅천읍성은 동천하류 우안에 위치한 평지에 돌로 쌓았는데 초축때의 둘레는 약 0.77㎞이고 증축때의 둘레 는 약 1.09㎞이다.

    4.조선시대 읍성의 이건 배경

    4-1.군현의 위상변화와 읍성축조 시기(Fig.7)

    동남연해지역 읍성의 축조시기는 축조양상에 따라 크 게 ‘태동기’, ‘전개기’, ‘완성기’, ‘선소부가기’ 4기로 구분하 였다. 태동기는 1385~1395년까지로 고려말 조선초로 울산 고읍성, 동래읍성, 남해고현성이 축조된다. 고읍성과 읍성 을 축조하여 연해의 군현들이 점차 복귀하는 시기이다. 하지만 남해안에 위치한 큰 섬들인 거제와 남해가 내지로 僑寓하였다. 이 때의 고읍성들은 토성에서 석성으로 전환 되는 시기여서 조선시대 읍성 태동기로 명하였다. Fig.7

    전개기는 1417년부터 1453년까지로 태종에서 단종대까 지로 조선 개국 후 정국이 안정되고 적극적으로 왜를 방 어하는 시기이다. 그래서 연해지역 각 군현마다 읍성이 본격적으로 축조되어 조선시대 연해읍성의 전개기로 명하 였다. 거제와 남해가 복설되어 사등성과 남해읍성이 축조 되고 웅천읍성은 1426년에 삼포개항으로 제포가 개항되 어 이를 견제하기 위해 축조되기도 한다. 또한 동래읍성 과 울산고읍성이 개축되기도 하며 웅천읍성이 주변의 현 을 병합하여 증축하기도 하였다. 34년간 11기의 읍성이 축조되고 3기의 읍성이 증축 및 개축된다. 연간 0.4기의 읍성이 축조되거나 증·개축되어 매우 활발한 축성활동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축조순서는 군현의 통합과 관련이 있는데 군현 병합 후 고읍성 혹은 고읍치를 떠나 거나 방어가 요긴한 곳에 새로운 읍성을 축조한다. 경상 좌·우도 병마절도사가 있는 울산과 창원을 제외한 읍성이 축조되는데 군현의 위계와 관계없이 축조되는 양상을 보 이고 있다. 기존의 읍치와 비교하여 보면 김해읍성과 고 성읍성이 고읍성내에 축조되며 거의 모든 읍성들이 새로 운 장소에 이건 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Fig .7

    완성기는 1477년 성종대이며 연구대상 중에서 연해읍 성이 마지막으로 축조되는 시기이다. 방어가 시급한 연해 읍성이 끝나고 내지읍성 그리고 수군들이 사용하기 위한 진성들이 양항에 축조되는 시점과 겹치는 시기이기도 하 다. 경상좌·우도병영성이 축조되어 있어 전개기에서 축조 하지 못한 울산읍성과 창원읍성을 축조하였다. 경상좌도 (울산)병영성은 1425년에 축조되었고 경상우병영성(현 합 포성지)은 1430년에 현재의 자리에 축조되었다. 그래서 軍資倉과 의창이 병영성내에 위치하고 있고 유사시 백성 들이 입보하기 어렵지 아니하여 축조를 미루었지만 군현 의 규모가 크고 연해 방어의 중요성의 이유로 읍성을 축 조하게 된다.70)

    선소부가기는 완성된 읍성인근에 선소를 부가하는 시 기로 1510년 삼포왜란 이후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연해읍성의 외형적인 방비가 완료하여 1592년 임진왜란을 맞게 된다.Fig .8

    4-2.군현의 위상변화와 읍성의 규모(Fig.9)

    군현의 위계, 호구수 및 인구수, 읍성 규모의 상관관계 는 Fig. 9와 같다. 군현의 위계와 호구수 및 인구수는 연 해읍성이 축조되는 시기에 기록된 『世宗實錄地理志』와 『新增東國輿地勝覽』을 참고하였다. 읍성의 규모는 일 제강점기에 측량·제작된 지적원도에서 성벽의 평면 중심 간의 거리를 측정하였는데 지적원도에서 확인되지 않은 경우 발굴조사결과로 유추하였다. 읍성의 둘레는 0.6㎞에 서 1.93㎞사이이며 도호부성은 1.7~1.93㎞이며 군성은 1.64~1.68㎞이다. 현령이 통치하는 현성은 0.9~1.5㎞이고 현감이 통치하는 현성은 0.64~1.34㎞다. 현령이 통치하는 현성이 현감이 통치하는 현성보다 조금 큰 것을 알 수 있다.

    사등성과 남해고현성은 현령이 통치하는 현임에도 불 구하고 0.9㎞와 0.6㎞로 작게 축소된다. 이는 사등성의 경 우 거제현이 복설된 초기여서 호구(153호) 및 인구수(423 명)로 현감이 통치하는 현과 비슷했기 때문으로 추정 된 다. 남해고현성의 경우는 행정변화가 많은 시기에 구라량 만호 임덕수(任德秀)가 남해 현령을 겸하여 축조한 것으 로 추정된다.71) 그래서 방어력 증대를 위해 규모가 작고 높은 곳에 축조한 것을 알 수 있다. 또 진해읍성과 0.64 ㎞과 웅천읍성이 0.77㎞로 작게 축조되는데 역시 현의 규 모가 작아서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소형의 읍성들은 규모가 작아 이건이나 증축 등 의 논의의 배경으로 자주 언급되며 실제 진해읍성을 제외 한 읍성들이 이건·증축된다. 이 읍성들은 1㎞미만으로 규 모가 작아 늘어난 인구와 이로 인해 발생하는 공해시설들 을 수용할 수 없었던 이유로 추정된다.

    읍성의 둘레는 도호부(종3품)와 군(종4품)이 유사하여 하나의 계획단위로 볼 수 있으며 현령(종5품)과 현감(종6 품)이 통치하는 현은 비슷하여 하나의 단위로 볼 수 있 다. 그래서 이 단위의 구분은 1.4㎞전후로 추정 된다. 현 감이 통치하는 현은 1㎞미만의 소형 읍성이 건립되지만 읍성은 농성과 공해시설을 수용할 수 있는 최소 1㎞이상 되어야 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규모를 알 수 있는 고읍성과 조선시대 읍성의 규모를 비교하면 김해, 동래, 곤양, 기장읍성이 축소되는 반면 복 설된 거제, 남해는 초기 고읍성보다 크게 확대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군현의 위상변화와 규모를 검토하면 김해는 위상이 낮아진 반면 동래와 기장은 유지 된다. 반면 곤양 은 오히려 승격이 되었는데 작게 축조한 이유는 어태를 안치하여 명목적인 위상만 군으로 유지했을 가능성이 높 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읍성의 규모는 고읍성에 비해 전 체적으로 작게 축조되는 양상으로 확인되고 있다.

    4-3.선호 입지변화

    14기의 고읍성과 고읍치에 대한 입지를 보면 평지 고 읍성은 김해, 고성이며 평지 고읍치는 사천 1기로 모두 4 곳(21%)이다. 평산성은 동래, 회원, 기장, 곤양 4곳(29%) 이며 산성은 남해, 거제 2곳(14%)이다. 나머지 울산, 웅 천, 의창(창원), 진해, 하동 5곳(36%)은 자세한 위치를 비 정할 수 없어 분석에서는 제외하였다. 그래서 미확인된 고읍성이나 고읍치의 위치의 선호 입지를 단정 지울 수 없지만 확인된 고읍성과 고읍치의 입지는 평산성, 평지성, 산성 순으로 확인되었다.Fig .10-11

    한편 경남, 부산, 울산 지역의 연해읍성 14기에서 평지 성은 김해, 창원, 고성, 남해, 거제 사등성, 웅천, 진해 모 두 7(50%)곳이다. 평산성은 동래, 울산, 곤양, 사천, 거제 고현성, 기장 모두 6곳(43%)이며, 산성은 하동이 1곳 (7%)이다. 사등성(1448년 완공)은 1451년 고현성으로 이 건하는데 평지성에서 평산성에 이건 되었다. 산성, 평산 성, 평지성 모두 사용되었지만 평지성이 50%로 비중이 조금 높다. 하동의 경우 삼국시대 혹은 남북국시대의 산.

    성처럼 해발고도가 높은 산이 아니라 낮은 구릉 정상부이 다.

    입지의 선정에서도 조선시대 읍성이 고읍성의 입지를 따르는 경우가 있다. 평지성인 김해·고성읍성은 고읍성과 읍성이 모두 평지에 입지하고 있는데 이는 읍성이 고읍성 영역에 축조되기 때문이다. 평산성의 경우도 동래, 기장의 경우도 고읍성과 마찬가지로 조선시대 읍성이 모두 평산 성에 입지하고 있다. 물론 남해읍성의 경우 산성에서 평 지로 이건 되거나 사천읍성의 경우 평지에서 평산성으로 이건 되는 경우도 있다.

    김해, 울산, 동래, 하동읍성은 강 하구에 입지하고 있는 데 이는 강을 통제하려는 의도와 양항을 이용하려는 의도 로 추정된다. 동해는 해안선이 발달하지 않아 양항이 발 달하지 못하였는데 이런 강과 접한 부분을 항으로 이용된 다. 동래와 울산 읍성들은 고읍성이 위치한 곳에서 강 상 류로 이건 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한편 김해읍성의 경 우 김해평야가 고김해만이였을 때인 양항이였지만 고려 조선시대의 경우 육지화 되면서 항만의 기능이 다하고 선 소는 읍성과 이격된 곳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읍성과 입지를 비교하여보면 고읍성의 읍치를 비정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 단순한 비교는 어렵지만 뚜렷한 변화는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4-4.용수확보

    일정 규모이상의 평지읍성은 대량의 용수확보와 유사 시 성내에서 발생된 오수와 가벼운 오염물질을 성외로 배 출시키기 위해 자연 계곡이나 방천을 포함하여 축조한다. 반면 작은 읍성의 경우 지하수에 의존하여야 하는데 지하 수가 부족한 경우 외부에서 인공수로를 설치해 외부에서 용수를 가져와야 농성에 유리하다. 그래서 용수확보를 위 해 현재의 읍성자리로 이건하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로 작용된다. 용수가 부족하여 이건하는 읍성은 기장, 고현 성, 웅천읍성이 대표적이다.

    먼저 고읍성들 중에서 평지에 입지한 김해고읍성이 이 러한 원리에 충실히 따르고 있다. 평산성의 경우 동래고 읍성, 기장고읍성, 회원현성이 계곡을 포함하여 축조된 포 곡식산성으로 용수확보에는 염두 해 둔 것을 알 수 있다. 평지 읍성인 김해·창원읍성에서 방천이 설치되어 있고 평 산성에서는 동래·기장읍성에서 방천이 설치되어 있다. 전 자는 규모가 제일 큰 도호부급의 읍성이고 후자는 크지 않은 성임에도 불구하고 방천을 설치하는 것을 알 수 있 다.

    김해읍성의 경우 고읍성내에 축조되어 축조되는데 그 다. 호계천을 읍성 남북 중앙에 두지 않고 동쪽 1/3 지점 에 두어 나머지 서쪽 대지는 공해터로 사용하기 편하게 하였다. 창원읍성도 읍성내 방천이 남북으로 흐르고 있으 며 역시 성내의 공간 배치를 위해 방천을 서쪽에 편중하 여 배치한 것을 알 수 있다.

    기장읍성의 경우에도 고읍성에 샘이 부족하여 방천이 있는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기장 고읍성의 경우도 포곡식이지만 계곡의 유역면적이 좁아 상대적(약 129,974 ㎡)으로 유역면적이 넓은 용소골(약 1,745,233㎡) 하류에 이건한 추정된다. 동래읍성도 작은 계곡을 하나를 인입하 여 용수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진해읍성과 거제 사등성의 경우도 성내에 지하수가 부 족하여 외부에서 물을 끌어 들여 성내에 용수를 보충하였 다.84) 이러한 예는 삼국시대에 축조된 진해 진해구산성에 서도 확인되고 있어 이러한 축조방법은 고대부터 사용된 기법으로 확인되고 있다.85) 이런 용수체계를 보면 조선시 대 읍성은 고읍성과 삼국시대 산성의 성제를 따른 것을 알 수 있다.

    4-5.조선시대 연해읍성과 선소(Fig. 1, Tab. 4)

    연해읍성과 내지읍성과의 구분은 수군의 운영에 여부 이다. 그래서 병선과 전선을 접안 하고 수리하는 선소(船 鎭, 船津)와 군례를 치르는 누각(주로 대변정)이 설치된 다. 수군 진성과 별도로 축조되는데 船所, 舟師所, 船鎭 등으로 불리우고 있다.

    연해읍성에 선소의 건립시기는 중종 5년(1510)에 실시 에 실시되었으며 지위체계도 병마절도사가 수군절도사를 겸하게 된다. 이후 중종 17년(1522)에 병사가 수군을 겸 한 것은 수군들이 폐단을 받게 되어 겸하는 것을 폐지한 다. 명종 즉위년(1545)에 다시 병사와 수사를 겸하게 된 다. 이후 『수군조련도』에서 보면 연해읍성의 수령들이 훈련에 참가하여 조선후기 까지 계속사용된 것으로 보인 다. 문헌에서 조선전기의 문헌에서는 확인되지 않으나 조 선후기 문헌에서 선소에 대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선소의 위치는 Tab.4와 같다. 선소는 읍성에서 최대 15.4㎞정도 이격되어 있고 최소 1.3㎞이내에 입지하고 있 다. 주로 5㎞이내에 분포하고 있다. 입지는 배를 선박을 운항하기 위해 해안에 위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김 해, 울산, 하동, 동래의 경우 큰 강을 끼고 있어 하구에 선소가 위치해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5.결론

    이 연구는 조선시대 남동부(경남, 부산, 울산) 연해지역 에 위치한 14기의 연해읍성의 이건·축조배경과 축조유형 을 군현제의 변천사와 고읍성과 비교하여 고찰하였다.

    연구대상지는 고려시대 삼별초와 여말선초의 왜구의 침입으로 이를 대응하기 위해 해안의 군현을 내지로 이동 하였다. 특히 거제와 남해와 같은 큰 섬들은 邑治出陸정 책으로 말미암아 연해지역과 내지로 교거하면서 거창과 진주에 속한 군현에 행정변화가 특히 많았다. 조선개국 후 지방통치가 안정되면서 군현제도가 이전처럼 복구되고 이후 2년 이후에 읍성축조가 진행된다.

    읍성의 축조는 4기로 구분되는데 전개기(1385~1395)는 울산 고읍성과 동래읍성 남해고현성이 축조되는 시기이 다. 태동기(1417~1451)에 하동, 진해, 기장, 곤양, 웅천, 김 해, 남해, 사천, 고성, 사등성, 거제 고현성 순으로 신축되 고 울산고읍성과 동래읍성이 개축된다. 완성기(1477년)는 울산과 창원이 축조되는데 이 군현은 경상좌·우도병영성 이 축조되어 있어 축조의 필요성이 적어 미루어 왔지만 연해의 방어의 시급성으로 인해 별도로 축조된다. 선소부 가기는 1510년에 삼포왜란으로 인해 수군의 업무를 겸하 여 읍성근처 해안이나 강가에 선소를 축조하는 시기이다.

    군현의 위상은 남북국시대 혹은 고려시대와 비교하면 마찬가지로 그대로 유지되는 군현도 있지만 창원과 곤양 처럼 발전되기도 하지만 김해와 고성처럼 쇠퇴를 하는 군 현도 발생하기도 한다. 읍성의 규모는 군현의 위상에 비 례하여 축조되는데 도호부성과 군성은 1.64~1.93㎞이고 현령과 현감이 현성의 경우 0.64~1.34㎞이다. 이 기준은 1.4㎞로 추정되고 읍성의 최소규모는 0.64㎞로 확인되었 다. 1㎞미만인 읍성은 규모가 작아 이건 및 증축의 논란 이 되었고 진해읍성을 제외한 읍성은 실제로 증축과 이건 이 된다. 이를 보면 읍성의 기능을 하기위해서는 최소 1 ㎞이상으로 축조하여야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 읍성과 읍성의 규모를 비교하면 작게 축조되는 경향을 보 이고 있다.

    새롭게 축조된 읍성은 군현의 병합여부에 따라 유지형 과 병합형으로 크게 나누어지고 유지형은 고읍치의 활용 여부와 이건여부에 따라 활용형과 이건형으로 구분하였 다. 그래서 유지형은 ‘고읍성 활용 읍성축조형’, ‘고읍치 활용 읍성축조형’, ‘고읍성에서 읍성축조 후 이건형’으로 구분된다. 고읍성 활용 읍성축조형에는 김해읍성, 고성읍 성, 구울산읍성이 이에 해당하는데 전자의 두 읍성은 가 야의 도성에 건립되었다. 고읍치활용 읍성축조형은 신울 산읍성이 이에 해당한다. 고읍성에서 읍성축조 후 이건형 에는 동래읍성, 기장읍성, 거제고현성, 좌병영성교거기 울 산읍성이 이에 해당한다. 고읍치에서 읍성축조 후 이건형 은 거제 사등성, 사천읍성, 하동읍성, 진해읍성이 이에 해 당한다. 병합형은 ‘선 군현병합 후 읍성축조형’과 ‘선 읍성 축조 후 군현병합형’으로 구분된다. 전자의 경우는 창원읍 성, 남해읍성, 곤양읍성이 이에 해당하고 후자는 웅천읍성 에 이에 해당한다.

    연해읍성의 입지는 산성과 평산성, 평지상 모두 사용되 었는데 산성은 1기(7%, 하동읍성)이며 평산성은 6기 (43%)이고 평지성은 7기(50%)로 평지를 조금더 많이 선 호되었다. 고읍성 및 읍치의 위치를 36%를 파악 할 수 없어 고읍성과의 단순 비교는 무리이지만 뚜렷한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읍성의 이건 및 증축의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가 용수 의 부족인데 기장고읍성, 사등성, 웅천읍성이 대표적이다. 또한 대량의 용수확보를 위해 김해, 창원, 기장, 동래읍성 은 성내에 자연 방천을 포함하도록 읍성을 축조하였고 진 해읍성과 사등성은 읍성의 규모도 작고 입지적으로 용수 를 확보할 수 없어 성외부에서 암거와 같은 수로를 설치 하여 성내로 인입하여 사용하였다. 이렇게 자연 방천을 이용하거나 인공방천을 이용하나는 방법, 인공수로를 개 설하는 방법은 삼국시대 혹은 남북국시대에 사용된 성제 를 수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연해읍성의 특징은 병사와 수사를 겸하여 선소를 운영 하는데 있다. 선소는 주로 5㎞이내에 위치하며 해안에 주 로 위치한다. 그러나 김해, 울산, 동래, 하동은 낙동강, 태 화강, 수영강, 섬진강의 하구에 위치해 있어 양항을 이용 하려는 의도와 김해는 낙동강 수운을 통제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Fig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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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ocation of Study 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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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ongnea goeupseong(An aerial photograph in the 195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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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ewonhyeon Fortress(An aerial photograph in the 195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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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oseong Goeupseong and Goseongeups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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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hift of the Ulsaneupchi(蔚山邑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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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imhae goeupseong and eups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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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struction time and time division of eups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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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upseong in the cadastral map(S=1/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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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cording to the size of the Eupseong of gunh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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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Old eupseong's lo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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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The eupseong's location

    Table

    Study list and Specifiations

    ○flatland fortress(평지성),
    ⊥Mountain fortress(山城),
    ⦹flatland and Mountain fortress(平山城),
    ∞Pogok(包谷),
    ∝rivulet(防川),
    §Artificial a ditch(人工溝)

    Changes in age-specific hierarchical administrative district

    Type classification of Eupseong

    The Location of navy yard(船所)and literature contnet

    Footnote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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