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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 1598-1142(Print)
ISSN : 2383-9066(Online)
Journal of architectural history Vol.24 No.4 pp.7-18
DOI : https://doi.org/10.7738/JAH.2015.24.4.007

A study on a reconstruction of Gwanghwamun and fluctuation of boulevard in front of Gwanghwamun

Nan-hyoung Kang, In-Ho Song*
Corresponding author : inos@uos.ac.kr
April 15, 2015 June 24, 2015 August 27, 2015

Abstract

Gwanghwamun was dismantled and displaced to the east side of the palace, at that time, the Chosun Government General Building was constructed in the Gyeongbokgung palace. After the Korea war, it remained as a stonework as a result of the fire. In 1968, The Gwanghwamun came back in front of the palace. Then, why it was rebuilt in the 3rd Republic period? What was the reason for selecting concrete? Since the May 16 coup, the military regime had been utilized palace and surrounding urban space to show a visible practice of modernization. Attempting the combination of modern technology in the 1960s and traditional cultural property and reconstructing a city as a pretext called Cultural Heritage conservation was a typical mechanism of the 1960s. In this study, I start by assume that reconstructing Gwanghwamun(1968) was a part of project to change the surrounding urban space of Gwanghwamun than to preserve cultural assets. Two main contributions of the study are following. First, I collect availabe data on the reconstructing surrounding urban space of the Gwanghwamun and re-organize them in chronological order to make them as fragments of a map. Second, I analysis and identify the nature and phase of the Gwanghwamun reconstruction.


1960년대 광화문 중건과 광화문 앞길의 변화

강 난 형, 송 인 호*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 박사과정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초록


    1.시작글

    1-1.연구의 배경과 대상

    광화문은 조선총독부가 경복궁에 신축되는 시기, 경 복궁의 동측으로 해체이건(1926.7-1927.4) 되었다. 그리 고 한국전쟁의 결과 불에 타 육축만이 남아있었다. 수 난을 겪은 광화문이 다시 경복궁 앞으로 돌아온 것은 1968년이다. 제3공화국시기에 왜 광화문을 다시 중건 하였을까. 그리고 콘크리트로- 목조보다 비싸게, 복잡 한 형상의 거푸집을 제작하여- 궁궐의 정문 광화문을 지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5.16 쿠데타 이후 정권을 잡은 군부세력에게 경복궁 과 주변도시공간은 근대화라는 가시적인 ‘형적’을 보여 주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1960년대의 기술(’손질’)로 근대적 기술과 전통 문화재의 접합을 시도하고,1) 문화 재 보존이라는 명분으로 도시를 건설하는 것2)은 1960 년대의 대표적인 매커니즘이었다. 이는 전쟁으로 폐허 가 된 문화재를 영구히 복구할 수 있고, 도시의 경관 을 고층화할 수 있는 재료이자, 새로운 생활양식의 도 구로써 문화적 의미3)가 부여되었던, ‘1960년대의 콘 크리트’라는 재료의 활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연 구는 3공화국의 광화문중건(1968)은 유구를 복구하는 측면보다, 광화문 앞길의 도시 공간 변화를 꾀한 시 도였다는 가설에서 시작된다.

    연구의 대상은 군정시기를 포함한 3공화국기 (1961-1972)의 광화문과 광화문 앞길4)로 한정하였다. 이 시기에 광화문 앞길의 폭이 53미터에서 폭 100미터 로 넓혀졌고, 광화문이 건춘문 북측에서 경복궁 정면 으로 이건 되었다.

    1-2.연구의 목적과 방법

    연구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광화문 앞길 의 변화를 시기적으로 정리하고, 파편의 자료들을 참 고하여 지도로 만드는 것이다. 아직 1960년대 광화문 앞길의 변화를 지도화한 시도가 없다. 물리적으로 사 회적으로 가장 큰 변화가 있던 시기이므로 연구가 필 요하다. 둘째, 1960년대 사료발굴을 통해 지도와 함께 분석하고, 광화문 중건의 성격과 위상을 규명한다.

    광화문 앞길의 변화과정을 파악하기 위한 방법으로 항공사진(1966)과 지적도(1967, 1977), 군사혁명1주년 산업박람회 도면(1962), 국립종합박물관 배치도(1972), 국가기록원 소장 도시계획공문서를 활용했다. 광화문 중건 전후과정을 3개의 지도(1962-1964, 1964-1967, 1967-1968)로 작업하여 구 조선총독부, 광화문, 경복궁 의 사적경계 등을 표기하였다. 광화문 중건 이전에 구 광화문 유구와 앞길이 어떻게 이용되었는지는 3공화국 시기에 생산된 신문기사 등의 사료를 최우선으로 검토 하였다. 또한, 지도 작업을 서울시가 발표했던 청사진, 건축가가 게재했던 건축잡지 글, 논쟁기사들과 함께 분석하여 광화문 중건의 성격을 도시공간 안에서 해석 하고자 했다.

    2.1960년대 초 구 광화문과 그 앞길의 성격

    2-1.선행연구를 통해 본 1960년대 이전 광화문 앞 길의 성격

    경복궁과 권력에 대한 연구는 조선시대부터 식민지시 기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경복궁 안의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부터 박람회까지 조선총독부 철거 이후 경 복궁 복원작업과 관련된 보고서와 논문들이 이를 말해 준다.5) 예술, 정치, 건축 분야에서 해방 전후 경복궁을 다룬 것은 최근이다.6) 광화문 또는 경복궁에서 벌어졌 던 국가프로젝트에 대한 연구는 공통적으로 정치권력 이 어떻게 ‘전통’을 기획하였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 으며, 최근에는 ‘새로운 사적‘ 만들기로 논의가 진전되 고 있다.7)

    광화문 앞길에 대한 대표적인 연구자로는 홍순민 (2015), 이순우(2011), 하상복(2010)등이 있다. 이들은 시기적으로 조선시대/ 일제 강점기/ 해방 후를 중심적 으로 다루고 있다. 광화문 앞길에 대한 선행연구는 몇 가지를 중심으로 진행되어왔다.

    첫째, 도성조영과 운영을 통해 연구되었다. 조선시대 연구자들은 동아시아에서 경복궁 앞 광화문 앞길을 특 이한 계획으로 인식했다. 김동욱(2008)은 조선 초기, 6 조대로(광화문 앞길)를 임금의 거둥이 시작되는 장소 이자 백성에게 의도적으로 노출되는 정치적 공간으로 정의했다. 홍순민(2015)은 이와 달리 고종시기, 광화문 앞길을 폐쇄적인 광장으로 규정했다. 실록, 승정원일기 의 기록을 통해 실질적 운영(병문 설치 등)을 이유로 들었다. 이상구(2008)는 육조대로(광화문 앞길)를 동아 시아 도성형식 전통위에 새롭게 형성된 집중관아구역 으로 설명했다.

    둘째, 광화문 앞길의 변화를 정리하였다. 식민지 조선 이후의 연구를 중심으로 대한제국기와의 비교가 이루 어졌다. 이순우(2011)는 식민지 조선의 육조앞길(광화 문 앞길)의 관아배치와 처소변경을 두 장의 지도(光化 門外諸官衛實測平面圖(1907-1909)와 京城光化門通官有 地一覽圖(1917-1922))를 중심으로 실증적인 사료 연구 가 이루어졌다.

    셋째, 공간의 정치학으로 통사를 정리하였다. 하상복 (2010)은 기존의 역사, 건축논문의 사료를 이용하여 광 화문이라는 공간에 드러난 국가권력의 정치성을 시대 순으로 설명하였다. 예를 들면, 강한 국가 권력을 장악 한 박정희가 전문행정기술 관료체계를 동원해 근대화 를 선도하였으며, 개인의 식견과 열정에 의해 구상되 고 작동되었음을 주장했다.

    본 연구는 광화문 앞길을 연구하면서 선행연구의 많 은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기존의 연구는 조선시대 사 유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중심으로 역사연구가 시기적 으로 집중되어 이루어져 왔다. 해방이후 광화문 앞길 에 대한 연구는 다른 시각이 필요했다. 1960년대 광화 문 앞길의 변화는 전후복구시기 문화재 보존보다는 도 시건설의 명분이 더 컸던 시기였다. 광화문이 종합박 물관의 정문에서 광화문 앞길로 이건을 결정되는 과정 을 분석할 필요가 있었다.

    2-2.구 광화문 유구활용: 군사혁명1주년 산업박람회

    구 광화문과 경복궁의 활용은 정권의 인식을 단적으 로 보여준다.8) 경복궁에서 열린 5.16 군사혁명 1주년 기념 산업박람회가 그 예이다.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정권9)에게 미국과 군정비판세력은 빠른 시 일 내에 군정을 끝낼 것을 요구하였지만, 군정은 이를 거부하였고, 적극적으로 정치선전을 위하여 박람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한다. 국가의 기술과 경제발전을 선전 하는 이벤트는 다분히 미국의 대한 정책을 의식한 것 으로, 당시 케네디 행정부에서 ‘발전의 시대(Decade of Development)’라는 구호를 내걸고 제 3세계에서 공산 주의에 대한 우월성을 군사력보다는 경제적인 부흥으 로 보이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창경궁에서 1억 6천만원 규모로 계획했던 산업 박람회를 10억 규 모로 확대하면서 경복궁으로 장소를 바꾼다. 61년 11 월말부터 박람회를 계획하고 2월에 규모를 정리하여 광화문을 정문으로 진입하는 구선원전 자리에서 박람 회가 개최된다.(그림1) 이외에도 경복궁의 운영에 있어 서 30경비대대가 서북쪽 태원전 일대에 자리잡아 20만 여평의 일대와 더불어 신무문이 폐쇄되고 경회루의 출 입도 금지되었다. 경복궁의 내부공간은 남측과 북측 그리고 중앙으로 나뉘어 활용된다. 이는 일제시기 시 정50주년기념조선박람회 개최 시, 남측에는 총독부와 박물관, 북측에는 관사(구선원전)그리고 중앙에 조선박 람회(1929)로 활용된 것과 유사했다.Tab. 1

    일제시기와 1960년대가 주체가 다름에도 궁 안에서 박람회를 개최하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의도에 있 어서 차이를 갖는다. 식민시기 박람회는 조선총독부의 이전과정에서 기획된 것이다. 먼저, 조선황실 공간이었 던 경복궁의 전각을 해체, 매각하고 경복궁 궁역은 새 로운 발전상을 선전하는 전시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이 에 반하여 1960년대의 박람회는 구정권 또는 식민시설 과 대결하거나 지우기 위해 개최된 것은 아니었다. 한 국전쟁이후 폐허가 된 중앙청을 앞에 두고 육축만 남 은 광화문을 통해 진입했다. 이는 기존의 방식을 고수 해서라도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한 방식이었다.Fig .2

    2-3.파괴된 중앙청과 광화문 앞길

    제1공화국기(1948-60)에 중앙청은 독립한 대한민국의 상징적인 장소로, 국가적 행사(대통령취임식, 3.1절, 광 복절 행사 등)가 이루어지는 대표적인 장소였다. 그러 나 정부청사 겸 의사당으로 사용되었다가 환도이후 (1954)부터는 태평로의 국립극장(구 경성부민관)을 임 대하여 사용한다. 6.25전쟁이후 중앙청의 화재피해10)를 복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부터 중앙청 은 일제의 통치에 대한 극복과 새로운 정부수립을 상 징하는 공간에서 반공을 강조하는 장소로 쓰인다.11)

    중앙청을 정면에 두었던 광화문 앞길의 성격은 주로 혁명의 거리로 설명되었다. 1960년대의 신문기사를 살 펴보면, 광화문 중건 계획이 있기 전까지는 경복궁 또 는 광화문의 역사에 대한 기사가 적었다.12) 오히려 전 쟁의 수난을 많이 받았던 대표적인 궁과 사라진 옛 도 시풍경으로 묘사된다거나13) 3.1운동에서부터 4.19와 5.16까지 이어지는 혁명의 거리로 설명되는 등 ‘새 서 울’의 이미지가 재현되었다.14)

    광화문 앞길에는 광화문이 없었다. 광화문 앞길로 이건하자는 논의도, 문루를 중건하자는 논의도 없었다. 논의의 시작은 중앙청 복구가 시작된 이후였다.Fig .3

    3.광화문 중건과 광화문 앞길의 변화

    3-1.근대유산으로 중앙청15)의 복구

    군사혁명이후 곧바로 구 중앙청사 복구기술위원회 (1961)를 구성했고 청사 복구공사16)가 시작되었다. USOM과 나란히 있던 정부청사의 재무부, 경제기획원 은 내각수반실, 내각사무처, 법제처 등과 함께 중앙청 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조선총독부청사를 중앙청으로 변용하기로 결정한 근거는 5가지였다.17)

    첫째, 동양굴지의 서구식 근대건물이며 둘째, 침수 붕괴로 인한 피해 손실이 매년삼천만환에 달한다. 셋째, 동청사와 동등한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뿔룩’건물을 신축할 경우에는 약 칠십억환이 드는데 비해 이를 복구 완성하면 건물가치는 약 삼백억환으로 평가되고 수리비는 총평가액의 일할내외로 완전 복구시킬 수 있으며 넷째, 이를 철거하려면 칠억환이 소요된다. 다섯째, 수리사용으로 국민부담이 경감하고 분산 되어 있는 중앙기구를 한 청사 내에 집중 수용할 수 있다.

    즉, 신축공사비용, 철거비용, 수리비용이라는 경제적 인 요건이외에도 중앙청은 아시아 내에 지어진 서구식 높은 기술력의 건축물로써의 가치 때문에 다시 사용되 었다. 광화문 앞길의 변화는 광화문이 아닌 중앙청의 복구로 시작되었다. 후에 중앙청 돔은 광화문 앞길을 확폭하는 중심축이자, 광화문의 방위와 위치를 결정하 는 근거가 된다.Fig .4

    3-2.광화문 앞길을 ‘중앙청로’로

    중앙청을 복구한 이후 광화문 앞길(세종로)은 국가상 징도로 또는 중앙청로(Capital Street)로 명명되었다. 동상을 세운다거나, 퍼레이트 행렬을 위한 지하도계획 은 광화문 앞길의 새로운 기념비적 성격을 염두했음을 보여준다.

    (1)중앙청에서 남대문까지 애국선열동상

    3공화국이 광화문 앞길에 했던 새로운 시도는 상을 세우는 것이었다.18) 중앙청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중간 녹지대에 석고상 37점을 학생들을 동원하여 세웠다. 중앙청에서 세종로까지는 21개의 상이, 시청에서 남대 문까지는 16개의 상이 설치되게 되었다.19)(그림 5) 석 고상들은 도시 기념비를 설치하기 위한 사전 모형이었 다. 그렇기 때문에 애국선현의 석고상(1964.5.11-1966 .7.20.)이 철거된 다음날 바로 애국선열조상위원회20)가 구성되었고, 이 석고상의 위인들을 다시 제작하여 도 심 내에 배치하게 된다. 첫 도심 내 동상 작업은 광화 문 앞길의 이순신21) 동상이었다.

    (2)광화문 앞길의 확폭(80미터)과 광화문 지하도

    1960년대 초의 광화문 앞길은 각종 정치선전 공연과 시가행진이 많은 장소였다. 중앙청 복구 이후 기존의 53미터에서 서측으로 80미터로 확장된다.22) 또한 수도 상징도로의 광화문 앞길에서 열리는 각종 행렬의 통과 와 도시미관을 감안하여 광화문 지하도23)(1966.4.19.~ 1966.9.30.)를 계획했다. 이 계획으로 군사퍼레이드와 차량 행렬을 위하여 도로 위를 통행하던 보행인들은 지하로 흡수되었다. 다른 이면에는 비역사적인 태도24) 가 엿보인다. 거대한 토목공사는 기존도시의 물길(청 운천)을 지우고, 칭경기념비전을 인근녹지대로 옮기는 등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림 7)

    서울시의 청사진(1966)을 통해 광화문 앞길의 성격을 읽을 수 있다. (그림 6)광화문 사거리에서 백악산을 바 라보는 시선으로 그려진 투시도에서, 중앙청은 소실점 으로 광화문 앞길의 주인공이다. 광화문 앞길에는 여 전히 광화문을 이건하고자 하는 논의는 없었고, 민족 문화센타 건립사업의 일환으로 종합박물관의 출입문으 로 사용하기 위해 그 자리에 복원설계가 시작되었다.

    (3)광화문 앞길의 이순신동상

    광화문 앞길(세종로)에는 다름으로 계획된 것은 이순 신동상이었다. 이순신이라는 인물을 택한 것은 중앙청 (구 조선총독부) 앞에 놓인 위치와 관계로 설명하기엔 무리가 있다. 이미 중앙청의 활용은 기정사실화되어 있었기에 “왜적을 물리친 행동” 때문에25)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 동상의 제막식, 박정희의 연설문에서 그 이 유를 찾을 수 있다. 조국과 겨레를 위해 모든 것을 희 생한 정신만 강조되어, 이를 1960년대 정신26)으로 규 정하고 있다. 그는 광화문 앞길에 건설의 역군상을 세 우고 싶었고, 세종대왕상보다는 이순신동상이 더 적절 했다. 이순신동상의 완공예정일(1967.10.)이 다가오자 설계변경이 이루어졌다. 설계변경 내용은 높이를 4미 터에서 6.4미터로 더 크게 제작하는 것이었다.27) 이 기 간 동안에 서울시의 새로운 계획발표가 진행되었다. 하나는 광화문을 종합박물관 정문에서 중앙청 정문으 로 위치를 변경하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로의 2차 확폭으로 광화문 앞길이 100미터가 될 것이라는 계획이었다.Fig .8

    3-3.중앙청 앞의 광화문 중건

    (1)광화문 앞길의 새로운 청사진

    광화문과 광화문앞길의 과거 사진이 등장한 것은 66 년부터 광화문 복원계획이 발표되면서이다. 백악산을 배경에 두고 있는 경복궁과 그 정문, 광화문 그리고 광화문 앞길의 사진(조선고적도보)은 서울시계획에 대 한 보도기사28)와 함께 실었다.(그림 9) 수난을 겪었던 광화문을 드디어 복원하게 된다는 계획이었다.Fig .9

    이와 함께 광화문 앞길의 청사진29)도 바뀌었다. 서울 시가 광화문을 중앙청 정문에 복원하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림10) 당시 육축만 남아있던 광화문에는 정치적으로 갈등이 많았다. 서울시는 민족 문화재로써, 시민과 관광객들이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으로 옮기는 ‘복원’사업30)을 문화재 관리국은 경복궁 담장과 동구 릉, 건원릉 보수 공사와 함께 진행되는 ‘보수’공사31)로 주장했다. 다음해에는 복원계획으로 뜻이 모아지기는 했으나, 복원될 위치와 방식에 있어서 두 가지 다른 의견이 발표되었다. 예산 1억 2천만원을 들여 중앙청 앞에 콘크리트 구조로 광화문을 복원시키겠다는 서울 시와 달리 문화재 관리국은 7천만원의 예산으로 종합 박물관의 정문으로 목구조의 광화문을 복원할 계획이 었다.32)

    광화문은 실제로 66년 12월 초부터 68년 12월 11일 완공되기까지 두 개의 안이 진행되었다. 당시 종합박 물관과 함께 광화문 복원을 진행하던 국보건설단 강봉 진33)은 처음에는 석축 위에 나무 누각을 목조로 복원 설계를 진행하였고, 이미 납품까지 진행한 상황이었다. 그에게 다시 중앙청 정문에 콘크리트 구조의 광화문 설계가 요청된다.34)Fig .10

    변경과정에서 그려진 청사진은 2장이었다. 하나는 중 앙청을 배경으로 한 광화문의 근경투시도이고, 다른 하나는 광화문 앞길의 투시도였다. 두 번째 청사진에 서 광화문은 뒤로는 중앙청과 미술관을 두고 전면에는 두 개의 고층빌딩 사이의 80미터 도로를 마주보고 있 다. 광화문은 백악 앞의 경복궁 정문이 아니다. 월대가 없어 3개의 홍예문은 중앙청을 진입하는 차량의 진출 입구로 계획되었다.

    광화문을 콘크리트로 중건이 실현가능했던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35) 첫째, 경복궁의 축소된 사적경계로 중앙청 정문자리는 사적지역이 아니었다. 문화재 관리 국은 1963년 당시 경복궁을 문화재로 사적117호로 지 정하였고, 그 영역에는 구 광화문이 포함되어있었다. 그러나 중앙청, 경무대 구역과 현대건축물(미술관, 박 물관 등)을 제외한 지역을 지정하였기 때문에 서울시 는 경복궁 안에서도 콘크리트 광화문 복원이 가능했 다. 서울시의 의견은 결국, 광화문을 경복궁의 사적 경 계 밖으로 옮기는 작업이었다.

    둘째, 고건축 양식을 콘크리트로 번안하는 것에 문화 적 의미가 부여되었다. 광화문 앞길에 다시 중건된 광 화문은 1960년대의 기술을 통해 고건축양식의 진보를 상징했다. 문화재관리국은 기존의 육축을 해체복원하 고 상부의 문루를 콘크리트로 재현함으로써 ‘특수문화 건설사업36)’으로 정의하였다.

    (2)광화문 계획37) 논의의 성격

    광화문 계획이 발표된 시점부터 신문기사38)에 예술인 들의 논평이 이어졌다. 크게 3가지의 이야기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광화문 복원의 당위성을 주체성의 문제 로 설명한다. 민족문화재로써 광화문을 지어야한다는 논리이다.39) 둘째, 양식과 기술(재료)을 기준으로 비판 또는 옹호를 하는 입장이다. 없어진 고적은 만들어도 죽은 고적이니 복원을 반대하는 의견40)과 양식은 그 시대에 기술을 사용하여 가장 흔한 재료를 사용해야하 므로 시멘트의 사용은 자연스럽다는 의견41)등이 있었 다. 복원 추진 위원회가 ‘영구성’과 ‘목재난’을 들어 콘 크리트 구조로 문화재를 재현하는 것에 대한 해명을 비판하는 시인 서정주와 미술평론가 수도륜, 추진위원 회의 건축가 정인국의 의견이 실려 있는 1967년 3월 20일자 경향신문의 글은 광화문의 새로운 인식이 드러 났다. 건축가 정인국은 광화문을 보존을 위한 문화재 의 성격보다는 ‘1968년 시점의 광화문을 본뜬 콘크리 트 모뉴먼트’로써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 는 유산과 장소의 문제를 논의함에 있어서도 드러난 다. 즉, 광화문의 복원을 현대적 기념물로 서울의 어느 위치에 지을 것인가의 고민을 나누는 장이 형성되었 다. 동아일보 1967년 5월 15일자에서 고고인류학과 김 원룡42) 교수는 ‘서울의 상징’으로서 공항에서 시청 앞 중앙청 사이에 고유한 전통 유적을 배치하는 것을 제 안했는데 이때 외국인에 대한 한국 고유미를 위해 중 앙청과 세종로 네거리 사이의 위치에 복원 하는 것을 제안한 것이다.

    광화문이 광화문 앞길에 중건하는 것이 결정되었을 때는 이미 중앙청의 축을 중심으로 도로폭이 확장된 시기였다. 광화문은 중앙청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앞길 로 이건을 결정하면서, 문화재이면서 도시기념비로써 의 역할이 부여된다.43)

    (3)광화문 중건설계와 신정부청사

    강봉진은 광화문을 콘크리트로 중건하는 것에 의미를 두었다. 처음 목구조로 광화문의 설계가 맡겨졌을 때 에도 ‘백년대계의 견지로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광화문 을 제안했었으며44), 이후에도 양회공업의 잡지를 통해 서도 광화문을 ‘고전식(classic style)’이라 하여 고층건 물의 한 유형으로 편입시켰다.45) 또한, 광화문의 방위 와 위치에 있어서 경복궁보다는 중앙청과의 관계가 중 요시되었던 것은 그의 글에서도 알 수 있다.Fig .11

    광화문을 만일 조선시대의 위치로 놓았을 경우 광화 문과 중앙청 건물과의 내정이 비뚤어지고, 전면도로에 도 어긋나게 되어 도시미관이 좋지 않다는 이유였 다.46)Fig .12

    광화문의 복원 위치 뿐 아니라 광화문 앞길의 물리적 크기와 성격에 있어서도 중앙청은 기준이 되었다. 중 앙청을 복구한 이후 국가 상징거리로 축 상에 도시기 념비만을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앞길로 중앙청 뿐 아 니라 중앙청 맞은 편 동과 서에 정부종합청사를 계획 하고 지하를 연결할 예정이었다. 실제로 광화문 공사 는 정부종합청사 공사가 함께 진행되었다.47) 정부종합 청사는 중앙청 맡은 편 대지로 1,2차로 나누어 지을 예정이었지만, 수도분산정책으로 2차는 무산되었다. 광 화문 앞길은 66년 서측 도로를 확폭하고 70년 동측 도 로를 확폭하는 시간차를 갖고 100미터의 광장으로 변 화되었다. 광화문중건(1968)은 국가중앙행정부의 계획 과 함께 100미터를 확폭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광화문의 중건은 또 한 번의 광화문 앞길의 변화를 의 미했다.48) 광화문이 이건된 이후 국가도로로써 장방형 의 광화문 앞길(세종로 광장)주변은 특별구획정리를 통해 경복궁과 후원을 중심으로 한 대통령부 이외에도 서울에 흩어진 행정부서를 모으는 정부종합청사의 계 획이 시작되었다.

    4.맺음글

    1960년대 광화문 앞길의 변화를 정리하여 광화문 중 건의 성격은 몇 가지로 도출될 수 있다. 광화문을 포 함한 앞길의 변화는 주어진 큰 그림에서 시작되지는 않았다. 앞길의 변화를 중심으로 광화문 중건, 이순신 동상, 도로의 확폭 등이 사건들을 정리해보면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처음 인식의 변화가 있었던 1기(1962-1964, Fig4)에는 중앙청(구 조선총독부)의 전용이 앞길 변화의 동인이 된다. 해방 전후 대한민국의 상징적 공간이었던 중앙 청은 한국전쟁이후 화재로 인해 피해를 입은 상태였 다. 파괴된 공간에서 반공이 강조되던 장소는 3공화국 에 의해 미국의 원조를 받아 중앙청으로 복구된다. 이 때 중앙청은 과거의 식민통치시설로써 건립주체가 문 제되지 않았고, 오히려 근대유산으로 가치가 부여되었 다. 이러한 유산의 활용은 군사혁명1주년 산업박람회 도면(1962)에서 보듯이 구 광화문에도 해당되었다. 경 제재건과 발전상을 극대화하기 위해 유산의 보존보다 는 활용이 중요시 된 것이다.

    2기(1964-1967, Fig8)에는 광화문 앞길의 성격이 변화 된다. 광화문 앞길이 중앙청의 앞길이 되면서 도시기 념비의 성격이 부여되었다. 처음으로 광화문 앞길에는 동상(애국선열동상(1964-1966),이순신동상(1967.9.19..-1 968.4.27))이 계획되고 국가의 퍼레이드를 감안하여 보 행동선을 수정하는 광화문 지하도(1966-1971)가 계획 되었다. 이 시기까지 광화문은 앞길과 관계가 없었다.

    오히려 앞길의 폭을 확장하는 기준은 중앙청이었다.

    3기(1967-1968,Fig13)에는 광화문의 위치와 재료가 변 화된다. 광화문은 두 번의 설계가 진행되어, 종합박물 관의 정문에서 중앙청 정문으로 위치가 변경되었다. 이 과정에서 콘크리트 중건으로 계획된다. 국가기록원 공문서와 설계건축가의 글은 콘크리트로 세우는 것에 문화적 의미가 부여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또한 신문 기사의 논의를 통해 광화문은 문화재와 도시기념비 사 이의 인식이 혼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2기 의 과정(앞길의 도시기념비성의 시도)이 기반이 되었 을 것이다. 또한 서울시가 경복궁 안에서도 콘크리트 광화문 복원이 가능하였던 것은 축소된 사적경계 때문 이었다. 사적 경계 밖의 광화문은 ‘유산의 현대화‘라는 서울시의 의도를 가능하게 했다.

    마지막으로 다시 광화문 앞길의 물리적 크기가 변화 된 4기(1968-1972)이다. 서울시의 새로운 청사진은 수 도상징거리의 일환으로 이건된 광화문을 암시한다. 앞 길에 국가의 행정기구(중앙청과 2개의 고층빌딩)를 집 중하고자 100미터로의 2차 확폭을 예정하고 있었다. 광화문 이건 결정이후 이순신동상의 크기도 높아지는 등 중앙청- 광화문-광화문 앞길-이순신 동상의 관계 가 만들어졌다.

    광화문은 건축물이기도 하지만, 경복궁이 도시와 만 나는 영역이다. 특히 광화문의 앞길은 도시공간의 역 사적 경험이 누적되어 있는 소중한 장소이다. 식민지 와 전쟁의 경험으로 기록을 통한 복구와 도시공간의 재편이 반복되어왔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 광화문의 건축적 분석보다는 광화문 앞길의 변화라는 외부적 조 건을 중심으로 성격을 정리하였다. 중앙청의 중심축은 광화문 앞길 변화의 기준이 되었다. 앞길의 폭에서부 터 광화문, 이순신동상의 위치, 방위 등은 근정전이 아 닌 중앙청 돔을 중심으로 계획되었다. 광화문 앞길의 새로운 성격에 맞추어 광화문은 중건되었다. 광화문 중건(1968)은 유산의 보존보다는 유산의 현대화가 중 요한 가치로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Fig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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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dustrial fair in the first anniversary of Military Revolution(1962.4.20.~6.5) ⓒSeoul Museum of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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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dustrial fair in the first anniversary of Military Revolution (ⓒThe Kyunghyang Shinmun,1962,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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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oulevard in front of Gwanghwamun (ⓒThe Dong-A Ilbo,1962.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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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luctuation of boulevard in front of Gwanghwamun (1기: 1962-1964) ⓒKang Nan H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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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tional Heroes 37statue (애국선현37인조상) ⓒNational Arch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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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bird’s eye view of Gwanghwamun underpass planⓒSeoul Shinmun 1966.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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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wanghwamun underpass plan (1966.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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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luctuation of boulevard in front of Gwanghwamun(2기:1964-1967) ⓒKang Nan H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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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oulevard in front of Gwanghwamun (ⓒThe Kyunghyang Shinmun.1967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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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rspective drawing of Gwanghwamun restoration planning Seoul Metropolitan Government announced (ⓒSeoul Museum of History,1967.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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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wanghwamun Floorplan(ⓒkang, bong-jin,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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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wanghwamun Ceremony and Government Complex ⓒNational Arch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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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luctuation of boulevard in front of Gwanghwamun(3기: 1967-68) ⓒKang Nan Hyoung

    Table

    change of Gwanghwamun and boulevard in front of Gwanghwamun (1960년대 초 광화문과 광화문 앞길의 변화)

    Footnote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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