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 론
조선시대 수혈주거지에 관한 연구는 2000년대 이후부 터 현재까지 고고학분야에서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고 고학분야에서 이루어진 연구는 주거지의 형식분류와 편 년에 대한 연구가 대부분으로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 지 연결되는 주거사에 대한 건축학적 연구가 미흡하다.
발굴된 조선시대 수혈주거지들은 땅을 파서 공간을 마 련하고 지붕은 풀이나 짚과 흙을 덮어 조성한다는 점에 서 선사시대 주거지와 별 차이가 없다.
그렇지만 서울․경기지역에서 조사된 조선시대 수혈주 거지는 내부에 온돌을 사용하면서 공간의 기능적 분할이 이루어지고, 거주인의 편의와 생활상태, 주변 환경에 따 라 다양한 평면을 구성하며 발전한다. 그리고 공간의 결 합과 확장으로 다양한 평면형을 완성해 간다.Fig.1
본 연구에서는 서울․경기지역의 조선시대 수혈주거지 가운데 내부에 온돌을 갖추고 있는 수혈주거지를 대상으 로 하였다. 조선시대 수혈주거지의 평면유형을 분석하여 공간의 발전과 전개를 검토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조선 시대 민가의 형성과 발달과정을 이해하고 그 상관관계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2.조선시대 수혈주거지 연구와 현황
2-1.문헌의 검토
『조선왕조실록』에는 백성들의 주거는 土室․土宇 등의 용어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土室․土宇는 단어 의 뜻이나 문헌기록의 내용으로 보아 수혈주거의 모습으 로 추론된다.
Tab. 1의 기록을 보면, 土室․土宇등은 백성의 주거 로 추위를 피하기 위해 겨울철에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산성 내 주거 및 방어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다음은 정조가 화성에 건설한 신도시를 둘러보고 나서 민가의 모습을 묘사한 내용이다.
“이번 행차에 수원부를 두루 살펴보니, 새 고을의 관청 은 틀이 잡혔으나 민가는 아직 두서가 없다. 그 가운데 대략 지어놓은 집이라 할 만한 것은 움막도 아니고 참 호도 아니어서 달팽이 껍질 같기도 하고 게딱지같기도 하다. 지금 헤아려보건대, 집들이 즐비하고 거리가 번창 하여 서울 근처의 큰 도회지가 되는 것은 짧은 시일에 기대하기 어렵다.”(정조실록 14년(1790) 2월 11일)2)
위 기록에서 ‘민가’는 ‘窨’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는 ‘움’, ‘땅속에 묻다’는 뜻으로 수혈주거 형태를 의미한다. 이를 볼 때 조선의 수도였던 서울지역 외에는 서민들의 주거형태로 수혈주거지가 대다수 존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수혈주거 조선시대까지 서민의 주거로 일반 적으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다음은 고려도경에서 묘사한 개경의 모습이다.
“… 백성들 거처의 형세와 높낮이는 벌집이나 개미구멍 같으며 띠를 베어 지붕을 엮어 겨우 비바람을 피할 정 도이다. 집크기는 서까래 두 개를 세워놓은 정도에 불 과하다.…”(고려도경 권3 城邑民居)3)
“서민들은 대부분 흙 침상인데, 땅을 파서 온돌(火坑)을 만들고 그 위에 눕는다.…”(고려도경 권28 供張1 臥 榻)4)
고려시대 수도였던 개경의 백성의 주거는 대부분 수혈 주거였음을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즉, 수혈주거는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오랜 기간 동안 서민들의 주 거형태로 존재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수혈주거지의 빈도와 밀집도에서도 증명된다.
종전까지 수혈주거지는 빈민층, 하층민, 장인계층, 묘 막살이, 산성 내 주거 등 특정한 계층 또는 특정 목적을 위해 기거하는 주거로 한정하였다. 조선시대 서민은 가 난한 농노가 대부분으로 기존 연구에서 빈민층 또는 하 층민으로 분류한 대상은 대부분 서민에 해당된다. 결국 수혈주거지는 주거의 지상화와 민가로 발전하기 이전까 지 사용된 서민들의 주거의 모습이라 생각된다.
지금까지 조사되거나 분류 고찰된 민가는 대부분이 18, 19세기의 것들로 민가의 가장 원형적인 형태가 어떤 모습인지는 알기 어렵다5). 따라서 수혈주거지에서 보여 주는 다양한 평면구성과 실의 분화 등은 민가의 평면구 성의 전개와 발전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2-2.선행연구의 검토
2000년대 이후 신도시 개발, 택지개발 등의 따른 대규 모 구제발굴이 성행하면서 조선시대 수혈주거지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가 증가하고 있다. 이와 함께 조선시대 수 혈주거지에 대한 연구도 고고학자에 의해 본격적으로 이 루어지게 되었다.
김성태․이병훈6)은 『조선왕조실록』,『화성성역의궤』의 주거 관련 용어를 검토하고 수혈주거지와 관련된 용어는 ‘토실(土室)’이라고 불렸을 것으로 보았으며. 수혈주거지 가 고려․조선시대를 거쳐 근대까지도 빈민층의 주거지 로 사용되었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경복․전경아는 조선시대 수혈주거지를 움집이라 지 칭하였으며, 움집의 구조를 살펴보고 평면형태와 구조, 내부시설 등 고고학적 조사결과와 문헌을 대비하여 비교 하였다. 이를 토대로 움집의 복원을 시도하였는데, 움집 은 가운데 기둥을 하나 세우고, 그 기둥에 의지하여 서 까래를 놓고 벽은 진흙을 바르고 지붕을 풀로 덮은 형태 로 추정하였다. 또한 움집 내부에서 출토되는 유물을 분 석하여 15세기 초〜16세기 후반에 움집에 온돌시설이 등 장하고 16세기 이후 온돌시설이 확산된다고 하였다. 또 한 움집에 사는 사람들은 신분에 의해 구분되지 않고, 경제적 빈민층에 해당된다고 하였다7). 그러나 온돌의 등 장시기에 대한 견해는 『고려도경』이나 고려시대 유적 에서 온돌이 확인되고 있어 온돌의 사용에 있어 일부 지 역적인 차이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8).
이후 이경복은 수혈주거지의 온돌에 주목하여 온돌이 도입된 시기9)에 대한 연구를 하였는데,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을 분석하여 임진왜란 이후 유이민들에 의해 움집 내에 온돌이 갑자기 증가한다고 하였다. 또한 온돌의 조 사방법론10)에 대한 연구를 통해 조선시대 움집에만 존재 하는 구들의 고래기울기, 구들장, 토층조사 등에 대한 조 사방법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각 지역별로 고고학 연구자들에 의해 조선시대 수혈주 거지를 대상으로 주거지의 형식분류와 편년에 대한 연구 가 집중되었다. 박한재11)는 경기지방에서 조사된 주거지 180동. 오준혁12)은 대전지역에서 조사된 사례를 바탕으 로 각 지역의 주거지의 특성을 검토하였다. 논문의 주요 내용은 주거지의 평면형태와 내부시설에 따른 형식분류 와 출토유물을 바탕으로 한 주거지의 조성 및 사용시기 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졌다. 임영호․정여선13)은 경기․ 충청․경상지역의 주거지를 분석하여 평면형태와 내부시 설을 바탕으로 수혈주거지의 구조를 복원하고 시기별 변 화양상을 파악하였다. 이외에도 각 지역에서 조사된 조 선시대 수혈주거지에 대한 연구가 중점적으로 이루어졌 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수혈주거지의 평면형태, 내부시 설 등의 세부적인 형식분류와 시기에 따른 변화양상, 주거지의 성격 등을 파악하였다.14)
이처럼 고고학분야에서 이루어진 연구는 대부분 지역 별로 주거지의 형식분류와 편년을 통해 시기별 변화양상 을 분석하고 그 결과 15〜17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사용 되었을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또한 주거지의 성격은 고 려․조선시대를 거쳐 근대까지도 빈민층의 주거로 사용 되었고, 묘막, 공방지, 유이민 또는 화전민의 주거지 등 으로 성격을 정의하고 있다15).
고고학에서 이루어진 조선시대 수혈주거지의 연구는 사용 및 사용시기에 대해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지만 주거지의 구조와 공간구성 등에 대한 연구는 미진한 실 정이다.
3.수혈주거지의 평면유형과 공간구성
서울․경기지역에서 조사된 조선시대 수혈주거지는 다 양한 평면형을 보인다. 선사시대부터 계속적으로 이어져 온 수혈주거지는 주거지 안에서 거주인의 편의와 생활상 태, 주변 환경에 따라 다양한 평면을 구성하며 발전한다.
조선시대 수혈주거지는 선사시대의 것과 달리 내부에 온돌이 있다. 물론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 수혈주거 지에서도 온돌이 확인되고 있으나 조선시대의 온돌과 구 조적으로 차이를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의 수혈주거지는 방형 또는 원형의 평면 으로 벽가를 따라 ‘一’자형 또는 ‘ㄱ’자형의 온돌로 고래 의 수는 외줄 또는 두 줄 고래로 규모가 크지 않다. 아 궁이 바닥은 주거지 바닥면을 얕게 파내어 마련하였다.
조선시대 수혈주거지는 주거지 바닥면보다 낮게 20〜 30㎝의 깊이로 아궁이를 만들고 바닥면 위나 바닥면보다 약간 높여 고래를 쌓고 돌을 올려 온돌을 구성한다. 고 래의 수는 3〜4개 정도로 규모가 커져 두 세 사람이 누 울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지며 방의 역할을 한다.
수혈주거지는 일실(一室)형의 구조이다. 실(室)이란 벽 따위로 막아 만든 공간을 의미한다. 즉, 수혈주거지는 원 룸형의 공간구조를 보이지만 기둥의 배열과 온돌의 시설 에 의해 다양한 공간을 갖추게 된다. 조선시대 수혈주거 지는 온돌이 설치된 바닥에 의해 공간분할이 이루어지고, 아궁이가 설치된 공간이 여유가 생기면서 부엌이 마련된 다. 또한 주거지의 규모가 커지면서 내부의 기둥을 세우 고 이를 통한 적극적인 공간 분할을 통해 공간의 효율적 사용이 이루어진다.
본 장에서는 조선시대 수혈주거지의 조사현황을 살펴 보고 수혈주거지의 평면유형 분류 및 주거지의 빈도를 확인하였다. 수혈주거지의 평면유형은 수혈주거지의 규모 와 내부 구성에 의해 달라진다. 평면유형은 주거지의 공 간이 한줄로 배치되는 홑집형과 두줄 또는 세줄로 배치 되는 겹집형으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규모에 따라 각 유 형을 세분하여 수혈주거지의 평면유형을 분석하였다.
3-1.조선시대 수혈주거지 현황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최근까지 조선시대 주거지 를 비롯한 생활유적의 조사가 증가하고 있으며 전 지역 에서 고르게 확인되고 있다. 특히 서울․경기지역에서는 주거지 조사 자료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서울․경기지 역에서 확인된 유적 가운데 주거지가 10기 이상 모여 취락단위를 구성하고 있는 유적의 현황은 다음의 Tab.2 와 같으며 10기 미만의 소규모 군집을 이루는 조선시대 수혈주거지도 많이 확인된다.
이처럼 조선시대 수혈주거지의 조사가 증가하면서 서 울경지기역 뿐만 아니라 타 지역에서도 방대한 양의 자 료가 축적되고 있다.
조선시대 수혈주거지는 대부분 구릉의 사면부에 입지 한다. 주거지는 방형, 장방형, 원형, 日자형의 평면형태를 보이는데 방형계의 주거지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내부시설은 부뚜막과 온돌, 주공 등이 확인되는데, 온돌 을 갖춘 주거지는 대부분 방형의 평면유형을 보이고 있 다16).
본 연구는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조선시대 수혈주거지 가운데 주거지 내에 온돌을 시설하고 있는 주거지를 대 상으로 하였다. 조선시대 수혈주거지는 유적별로 온돌을 갖춘 주거지의 비율이 차이를 보인다. 이는 유적의 잔존 상태 등의 변수가 작용하므로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고 판단된다. 주거지 폐기 과정에서 온돌 등이 결실된 것으 로 판단되는 주거지는 분석대상에서 제외하였다.
다음의 Tab.3은 수혈주거지의 현황을 평면 유형에 따라 분류한 표이다.
Tab.3의 분류에 의하면 10개 유적에서 수혈주거지 내 부에 온돌을 갖춘 주거지는 모두 144기로 확인된다. 수 혈주거지의 평면유형에 따른 비율을 보면 각 유적별로 [2×1]형17)과 [2×2]형이 비율이 높게 확인되며, 전체비율 이상의 분류 결과를 바탕으로 조선시대 수혈주거지를 평 면유형별로 살펴보고 공간의 전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 살펴보도록 하겠다.은 각각 65%, 37%를 차지하고 있 다. 조선시대 수혈주거지는 구릉 사면부에 대부분 조성 되는데 이러한 지형적 조건과 함께 이 평면유형을 선호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주거지의 면적은 공간의 결합이 이루어진 평면유형일수록 규모가 크다.
이상의 분류 결과를 바탕으로 조선시대 수혈주거지를 평면유형별로 살펴보고 공간의 전개가 어떻게 이루어지 는 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3-2.홑집형
홑집은 방들이 한 줄로 배치된 가옥을 말한다. 조선시 대 수혈주거지에서도 홑집의 공간 구성을 보이는 주거지 들이 확인된다. 홑집형 수혈주거지는 규모와 장축방향에 의해 [1×2], [1×3], [2×1]의 평면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①[1×2]형
[1×2]형 수혈주거지는 내부에서 2개의 공간이 구성된다. 온돌과 1개의 아궁이로 구성된 주거지는 온돌에 의해 방이라는 공간이 형성되고 아궁이에 의해 부엌이라는 공 간이 만들어진다. 비록 이를 구분하는 ‘벽’의 시설은 없 지만 기능에 의해서 공간의 사용이 나뉜다. 온돌로 구성 된 공간은 취침과 생활 등의 용도로 사용되고 부엌으로 구분된 공간은 취사, 작업 등 취침 이외의 주거 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생활을 담당한다. 대부분의 수혈주거지 에서는 온돌과 아궁이에 단차를 두어 공간을 분할하여 사용한다.
Fig.2는 온돌 1개와 아궁이 1개가 구성된 주거지이다. 평 면형태는 장방형이고 장축방향은 능선과 평행하게 두었 으며 온돌의 진행방향이 등고선과 나란하게 진행한다. 그리고 온돌바닥에 비해 낮아지는 아궁이에 의해 공간이 구분되어 방과 부엌으로 나뉘는 평면형태를 보인다. 아 궁이는 2〜3개의 고래를 담당하여 불을 지핀다. 온돌의 전체의 너비는 보통 1.5〜2m정도이고 길이는 2〜3m 내 외로 두 세 사람이 누울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Fig.2 ⑤,⑥은 아궁이 2개로 구성된 주거지이다. 온돌 의 아궁이 외에 별도로 아궁이(부뚜막)이 설치되어 난방 과 취사 용도의 아궁이가 각각 조성되었다. Fig.2 ⑤는 장방형의 평면형태로 일실형의 공간에 바닥의 단차를 두 어 방과 부엌의 공간을 구분하였다. 그리고 온돌 옆에 별도의 부뚜막을 바로 붙여 설치하였으며 온돌의 연도부 분에서 합쳐져 배연하도록 하였다. Fig.2 ⑥은 난방용의 아궁이는 주거지 밖으로 돌출시키고, 주거지 내부에는 취사를 위한 부뚜막만 시설하여 부엌공간으로 사용하였 다. 취사용 부뚜막은 주거지 벽 모서리에 설치하여 배연 에 용이하게 조성하였다.
②[1×3]형
주거지는 장방형의 평면으로 기둥에 의해 3칸으로 공 간 분할이 이루어졌다. 주거지는 일실형으로 내부에서 벽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지만 기둥에 의한 공간의 분할 로 3칸의 공간을 구성한다.
Fig.3 ①은 장축 벽에 2개의 기둥을 세움으로서 공간 이 구분된다. 1칸은 온돌을 시설하여 방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아궁이가 설치된 가운데 칸은 부엌, 그리고 방형 의 수혈이 조성된 나머지 칸은 작업공간으로 사용하였다. 주거지의 규모는 길이 527㎝, 폭 255㎝이다18). 주거지 내부 기둥의 간격은 240㎝정도이다.
Fig.3 ②는 지상식에 가까운 주거지이다. 주거지는 ‘L’ 자형으로 대지를 조성하였는데, 대지의 규모는 길이 1,292㎝, 너비 702㎝, 깊이 126㎝이다. 대지 내부에 굴립 주식의 기둥을 세워 1×3의 홑집을 구성하였다. 주간거리 는 198㎝ 정도이다. 중앙칸에 온돌을 시설하여 방을 구 성하였는데, 온돌의 크기는 길이 405㎝, 너비 162㎝이고 아궁이는 건물 밖에 마련하였다19). 방을 중심으로 우측 칸에 부뚜막을 별도로 두어 부엌으로 사용하였다. 이는 하절기 불필요한 난방을 피해 부뚜막의 위치를 온돌에서 거리를 두고 설치한 한 것으로 보인다.
Fig.3 ②는 지상식에 가까운 주거지이다. 주거지는 ‘L’ 자형으로 대지를 조성하였는데, 대지의 규모는 길이 1,292㎝, 너비 702㎝, 깊이 126㎝이다. 대지 내부에 굴립 주식의 기둥을 세워 1×3의 홑집을 구성하였다. 주간거리 는 198㎝ 정도이다. 중앙칸에 온돌을 시설하여 방을 구 성하였는데, 온돌의 크기는 길이 405㎝, 너비 162㎝이고 아궁이는 건물 밖에 마련하였다19). 방을 중심으로 우측 칸에 부뚜막을 별도로 두어 부엌으로 사용하였다. 이는 하절기 불필요한 난방을 피해 부뚜막의 위치를 온돌에서 거리를 두고 설치한 한 것으로 보인다.
③[2×1]형
[2×1]형 수혈주거지는 [1×2]형과 공간구성은 같으나 장축방향이 지형의 능선과 직교하는 주거지이다. [2×1]형 은 홑집형 중에서 가장 많은 주거유형으로 분석대상 144 개 주거지 가운데 日자형과 함께 많이 확인된다(Tab.3 참조).
조선시대 수혈주거지는 구릉 사면부에 대부분 조성되 는 데 이러한 지형적 조건과 함께 이 평면유형을 선호하 였던 것으로 보인다.
주거지는 온돌(고래)과 아궁이로 구성되었는데, 평면은 장방형이고 장축방향은 지형의 등고와 직교하게 조성되 었다. 위쪽에는 온돌을 아래쪽에 아궁이를 조성하여 공 간을 구성하였다. 온돌의 진행방향은 주거지의 장축방향 과 같으며 고래부분은 약간의 경사를 두어 배연에 유리 한 구조로 조성하였다. 그리고 고래 끝에는 개자리를 만 들고 벽쪽에 돌출부를 만들어 배연하였다.
Fig.4의 ④,⑤,⑥ 주거지는 온돌과 연결된 아궁이가 2 개인 주거지로 아궁이 하나는 고래 한 줄에 연결되어 난 방보다는 취사를 목적으로 설치한 것으로 보이며 난방과 취사를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전체 온돌(방)의 너비는 보 통 폭 2〜3m 정도이고 길이는 3〜3.5m 내외로 8.75㎡(3 坪) 남짓의 온돌방이 구성된다.
④日자형
日자형 주거지는 고고학자들에 의해 呂자형으로 평면 분류가 이루어진 경우가 많으나 철 기〜삼국시대 呂자형 주거지와 구분 하기 위해 본 글에서는 日자형으로 구분하였다. Fig.5는 呂자형 주거지 로 수혈주거지에 출입구가 붙은 형 태이다. 출입구와 주거지는 통로로 연결되어 조선시대 日자형 주거지와 공간구성, 구조적인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日자형 주거지는 [2×1]형 주거지 와 평면형은 같으나 조성방법과 구조에서 차이가 있다. 기본적으로 수혈하여 공간을 조성하는 방법은 동일하지 만 [2×1]형은 다른 수혈주거지와 같이 주거지 전체 바닥 을 수혈하고 바닥면 위에 고래를 놓아 온돌을 조성하는 반면, 日자형은 방과 부엌 사이의 25〜30㎝ 정도의 둑을 경계로 상단부는 온돌이 설치되며 하단부는 부엌을 구성 하고 터널식의 아궁이를 축조한다. 온돌 부분은 아궁이 바닥에 비해 20〜40㎝정도 높다. 내부공간이 아궁이가 있는 둑을 중심으로 방과 부엌으로 명확하게 구분되며 이실형(二室型)의 공간구조를 갖는다.
주거지의 규모는 길이 200〜300㎝, 폭 350〜400㎝정 도에서 많이 분포하고 온돌부분의 면적은 주거지 전체면 적의 절반정도로 3.5〜6㎡ 정도의 방이 형성된다. 고래의 수는 보통 3〜4개 정도이나 방부분에 전체적으로 설치되 므로 전면온돌로 조성되었다.
Fig.6 ②,④의 주거지는 난방을 위한 아궁이 외에 부뚜 막을 별도로 두고 있는데, 아궁이 반대편 단벽이나, 아궁 이에서 가까운 벽가에 설치하여 벽을 따라 배연할 수 있 도록 배연부를 돌출시켰다. 이러한 구조는 온돌과 아궁 이로 구성된 기본형에 부뚜막이 따로 시설되는 것으로 이를 통해 수혈주거지 내에서 난방과 취사의 기능을 분 리하려는 시도를 확인할 수 있다.
3-3.겹집형
겹집은 방들이 두 줄로 배치된 가옥을 말한다. 겹집형 수혈주거지는 일실형의 구조이나 내부의 기둥과 온돌 등 에 의해서 내부공간이 상․하 두 줄로 구분된다. 평면은 [2×2], [2×3]의 겹집형 주거지들이 확인된다.
①[2×2]형
수혈주거지는 온돌과 기둥 등에 의해 공간이 구분되며 2×2의 평면구성을 보인다. 주거지의 온돌은 지형의 능선 과 직교하여 세로방향으로 진행하는데, 아궁이가 설치되 는 부엌공간을 남쪽에 둔다. 온돌과 아궁이가 세로축으 로 배열되고 부엌과 온돌의 우측 또는 좌측에 공간이 결 합되며 [2×2]형, 소위 양통형의 평면을 구성한다.
결합된 공간은 기둥과 level 차이에 의해 출입을 위한 공간과 주거지 내 취침 이외의 기타 생활과 작업 등을 위한 공간으로 구분된다. [2×2]형에서 전면에 부엌과 나 란히 배치된 공간은 주거로의 진입 등과 관련된 마당 또 는 봉당 등의 역할을 하고, 후면의 방과 나란히 배치된 공간은 민가의 마루의 기능을 담당하는 공간으로 사용되 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Fig.7의 ①,②,③을 보면 주거지 내 단벽 중앙과 장벽 중앙에 기둥을 세워 공간을 분할하였는데, 가구 구조상 3량집의 구조를 이루며 민가 가구 구조의 기본형을 형성 한다. Fig.7 ③은 2개의 아궁이가 설치되었는데, 우측의 것은 3줄의 고래를 담당하고 있고 좌측의 것은 1줄의 고 래를 담당하고 있다. 전면온돌을 조성하였지만 하절기에 불필요한 난방을 피해 난방과 취사용으로 아궁이를 구분 하여 사용한 것을 보여준다.
[2×2]형 수혈주거지의 규모는 길이 400〜500㎝, 폭 250〜350㎝정도이지만 길이가 600㎝ 이상, 주거지의 전 체 규모나 30㎡ 이상의 것도 확인된다. 방의 면적은 전 체면적의 1/4정도로 보통 2.5〜4.5㎡ 정도 차지한다.
②[2×3] / [3×2]형
수혈주거지는 규모가 커지면서 주거지 내에 온돌과 부 엌 등의 공간이 늘어나면서 [2×3], [3×2]의 평면을 구성 하는 주거지도 확인된다.
Fig.8 ①은 2개의 온돌이 내부의 양측에 배치되면서 2 개의 온돌방과 2개의 아궁이 그리고 중앙의 공간으로 [2×3]형으로 구성되었다. 수혈주거지는 앞줄에 좌우의 아 궁이가 설치되어 부엌이 형성되고 중앙의 공간은 level을 고려하면 주거지로의 진입 등 전실부분으로 봉당 또는 마당과 같은 기능을 하는 공간으로 보인다. 뒷줄에는 좌 우에 온돌방이 배치되는데, 방 사이의 공간은 민가의 마 루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공간으로 보인다.
주거지의 규모는 길이 540㎝, 폭 377㎝이다20). 온돌부 분의 면적은 좌 2.25㎡, 우 2.38㎡ 정도이다. 아궁이 하 나가 담당하는 고래의 수는 2〜4개로 많지는 않으나 방 전체에 시설되면서 전면온돌을 조성하였다.
Fig.8 ②는 Fig.11 ①과는 반대로 방과 부엌을 중심으 로 양쪽에 작업공간을 배치하였다. 내부에 기둥을 세워 [2×3]형을 완성하였다. 주거지의 규모는 길이 740㎝, 너 비 540㎝이다21). 아궁이는 세 개를 조성하였는데, 온돌은 길이 504㎝, 너비 168㎝정도22)로 면적이 8.5㎡로 생활공 간이 만들어진다. 주거지의 남쪽 장벽을 보면 단이 조성 되어 있는데, 아마도 이곳으로 출입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주거지의 바닥 level은 주거지 전면부가 낮으며 온돌이 설치된 방과 방의 좌우 공간은 level이 거의 같 은데, 하절기 침상과 마루 등의 기능을 하는 공간으로 생각된다.
Fig.8 ③은 3×2의 평면형으로 구성되었다. 주거지의 규모는 길이 430㎝, 너비 524㎝이다23). 아궁이는 두 개 를 조성하여 취사용 부뚜막을 따로 두었다. 온돌은 길이 200㎝, 너비 130㎝정도로 면적이 2.6㎡의 방이 만들어지 고 굴뚝을 주거지 밖으로 길게 빼었다. 주거지 전면부의 공간에는 단이 조성되었는데, 이곳으로 출입이 이루어지 며 부엌공간 및 전실 등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4.수혈주거지와 민가의 상관성
4-1.수혈주거지의 발전과 전개
수혈주거지는 온돌의 사용과 함께 부엌에 의한 공간 분할을 시도하면서 난방과 취사가 분리되었고, 공간의 결합과 분할 등은 주거의 확장에 영향을 주게 된다.
①난방과 취사의 분리
수혈주거지는 일실형 구조인 주거지 내에서 취침, 식 사, 생활 등 모든 삶의 행위를 해결한다. 식침의 해결은 주거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결국 온돌과 부엌은 생존 을 위한 필수공간이다. 주거지의 아궁이는 취사, 난방 외 에도 조명, 제습 등의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조선시대 수혈주거지에서 확인되는 취사․난방시설은 주거지 내부에 부뚜막만 설치한 것과 온돌과 연결된 아 궁이를 설치한 것으로 구분된다24). 또한 취사․난방시설 의 다양화를 확인할 수 있다. 취사․난방시설의 변화와 발달은 단순히 난방기술의 발전이 아니라 기거양식의 변 화, 공간환경의 개선이라는 측면에서 의미있는 변화를 시사해준다25).
Fig.9 ①은 주거지 밖으로 아궁이를 빼 내어 설치한 사례이다. 내부에서 취사를 위한 부뚜막은 별도로 확인 되지 않았지만 주거지 밖 인근에서 화덕이 설치되었다. Fig.9 ②는 아궁이와 부뚜막을 따로 설치하였는데, 아궁 이와 부뚜막이 개자리 부분에서 모여 밖으로 배연하였다. Fig.9 ③은 아궁이는 주거지 밖으로 빼 내어 설치하였고, 부뚜막은 주거지 벽 모서리에 붙여 조성하였다.
Fig.9 ④는 아궁이 인근 장벽부분에 벽 밖으로 돌출하 여 설치하였다. Fig.9 ⑥은 아궁이를 나란히 조성하였는 데, 우측의 것은 2줄의 고래, 좌측의 것은 1줄의 고래를 담당하고 개자리에서 모여 배연한다. 이는 하절기 불필 요한 난방을 위해 취사를 위해 아궁이와 부뚜막을 분리 하여 시설하였다. 취사․난방시설의 분리는 주거지의 규 모가 커지면서 공간 사용에 다양성을 가져오고 이는 수 혈주거지의 다양한 공간구성을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Fig.9 ④,⑤의 부뚜막은 민가로 발전되면서 부엌에 나란 히 설치되는 아궁이 외에 한데부엌의 개념으로 전개되며, Fig.9 ①,③은 부엌과 연결되지 않은 방의 경우 난방을 위해 아궁이를 별도로 두는 함실아궁이로 발전되었을 것 으로 보인다온돌이 정착하게 되면서 수혈주거지의 공간은 방과 부 엌으로 기능적인 분할이 이루어진다. 부엌은 취사기능에 난방기능을 담당하게 되며, 독립된 공간으로 발전한다. 온돌이 놓이면서 부엌바닥은 낮게 만들어지면 바닥이 낮 고 독립된 공간이 되고 방과 이질적인 동선이 되며 아궁 이 부뚜막을 가지는 독특한 부엌을 가지게 된다26).
②주거지의 확장
주거지의 확장은 거주인의 변화, 생활환경, 경제적 상 황 등의 변화에 의해 이루어진다.
Fig.10는 [1×2]형에서 [1×3]형의 주거지로의 결합․확 장을 보여주는 홑집형 주거지의 모식도이다.
[1×2]형은 온돌+부엌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으로 인간 의 생존에 가장 중요한 공간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공간 의 확장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된다.
Fig.10 ①은 부엌을 중심으로 양쪽에 방을 두거나 한 쪽은 방, 한쪽은 기타공간으로 구성한 것이고, Fig.10 ② 는 부엌과 방에 연이어 공간을 마련하여 구성한 것이다. 이러한 평면형은 조선시대 민가의 ‘오두막집’과 ‘초가삼 간’이라는 서민 주거의 평면형과 비교될 수 있다.
다음 Fig.11는 수혈주거지를 확장하여 사용한 사례이 다. 2차주거지(나중에 조성된 주거지)는 1차주거지를 일 부 재사용하면서 확장하였다. 2차주거지는 1차주거지 바 닥에서 40㎝정도 깊게 파고 조성하였다. 2차주거지는 내 부에 기둥을 세우고 온돌을 배치하여 [2×2]형으로 공간 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1차주거지의 바닥면에 부뚜막을 설치하고 2차 바닥면에 온돌의 아궁이를 두어 부엌을 단 차를 이용하여 공간을 구분하였는데 이는 수혈주거지 내 에서 공간의 확장을 보여준다.
Fig.11과 같은 확장방법은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서만 밝힐 수 있으나 보통 주거지의 확장은 장축방향과 온돌 의 진행방향에 맞춰 확장하여 1차의 바닥면을 그대로 재 사용하므로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서도 그 흔적을 확인하 기는 어렵다. 다만, Fig.11의 사례를 통해 수혈주거지에 서 규모의 확장과 공간의 분할에 의해 주거지의 확장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추정할 수 있다.
Fig.12는 [2×1]형에서 [2×2], [2×3]형으로 결합․확장 을 보여주는 겹집형 주거지의 모식도이다.
홑집형이었던 수혈주거지는 주거지 내부에 기둥을 세 우거나 온돌을 확장시켜 겹집으로 확장이 가능하다. [2×1]형에서 장축방향에 맞춰 방과 부엌의 옆으로 바닥 면을 조성하고 기둥을 세워 공간을 형성한다. 거주인의 조건에 따라서 필요한 공간만큼 확장이 가능하다.
4-2.수혈주거지와 민가의 상관성
주거의 역사는 선사시대 수혈주거지에서 조선시대의 민가로 연결된다. 지금까지 조사되거나 분류 고찰된 민가 는 대부분이 18, 19세기의 것들로27) 민가의 원형적인 형 태가 어떤 것인지 현재로써는 알기 어렵다.Fig.13
다만, 17세기 정도까지 서민층의 주거가 어떤 모습인 지 우리는 문헌을 통해 그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조 선왕조실록』에는 백성들의 주거는 土室․土宇등의 용 어로 사용하였는데, 土室․土宇는 수혈주거의 모습으로 추론된다. 조선시대 수혈주거지는 빈민층 또는 산성 내 주거, 가난한 서민의 주거로 기록하고 있어 수혈주거지 의 성격은 빈민층 또는 장인집단 등 특수 목적을 가진 주거로 한정하는 연구가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발굴조 사를 통해 확인된 수혈주거지는 빈도와 밀집도로 미루어 볼 때 14〜17세기 대부분 가난했던 서민의 주거로 사용 된 것으로 생각되며 조선후기까지 이어져 빈민층이 사용 하여 온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시대 수혈주거지가 어떠한 변화 발전 과정을 거쳐 조선시대 민가를 완성하였는지는 수혈주거지의 공간구성 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 수혈주거지 를 살펴보면 일실형인 수혈주거지 내에서 다양한 평면유 형이 확인되는데 조선시대 민가의 평면형과 밀접한 관련 을 갖는다.
조선시대 민가에 대한 연구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 들에 의해 기본적인 연구가 이루어졌고 1960년대 평면유 형에 의한 외통집, 양통집의 분류28)와 1970〜80년대 민 가의 지방별 평면 분류29)가 정리되었다. 이후 많은 학자 들이 지역별, 평면유형별 등으로 구분하며 한반도 민가 의 형식을 분류하였다. 민가는 일실일주거(一室一住居) 형태인 수혈주거에서부터 식침의 분리에 의하여 부엌과 방으로 분리된 이실일주거(二室一住居)를 이른 후 이로 부터 다양한 평면유형이 완성되었다고 정리되어 왔다30).
민가에서 부엌이라는 공간은 기단면보다 낮게 조성되 고 바닥면은 흙바닥으로 노출되면서 마치 수혈주거지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민가의 형태는 지상주거에서 그 출 발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수혈주거지에서 온돌을 도입하 게 되면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겠다. 일실형(一室型)의 수혈주거지는 주거지 내에 온돌을 시설하여 방과 부엌으 로 공간이 구분된다. 수혈주거지 안에서 하나의 아궁이 로 난방과 취사를 다 해결하다가 편의에 따라 취사를 위 한 부뚜막이 별도로 설치되기도 하고, 난방용 아궁이는 함실아궁이형으로 주거지 밖으로 돌출되는 등 거주자의 편의와 생활환경에 따라 다양한 평면형을 형성하였다.
조선시대 가옥의 규모는 초가의 경우 안방의 규모가 2.5〜3.5m 이내로 면적은 7.7〜9.5㎡ 정도였다. 『慶尙南 道家戶案』을 분석한 내용을 보면, 경상남도 가옥의 경 우 35.6%는 1〜2칸이고, 58.17%는 3〜4칸여서 전체 가 옥의 약 94%가 4칸 미만의 소형주거로 1칸은 부엌도 없 이 단칸방으로 이루어진 가옥으로 난방은 한데 아궁이를 이용하였다고 한다31). 이는 한반도 다른 지역과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주거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은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하 는 것이다. 즉 온돌과 부엌은 생존을 위한 필수공간으로 주거를 구성하는 기본공간이다. 조선후기 평안도 지방의 서민주택이나 현대에 지어지는 원룸은 방과 부엌으로 기 본 구성을 이룬다. 이러한 최소 규모의 주택은 시대 및 지 역과 관계없이 공통된 형식을 보인다32).
본 연구는 서울․경기지역의 조선시대 수혈주거지를 대상으로 공간의 발전과 전개를 분석하였는데, 본 절에 서는 수혈주거지와 지역별 다양한 평면형을 보이는 민가 를 비교하여 조선시대 수혈주거지와 조선시대 민가와의 상관관계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①홑집형
[1×2], [1×3]의 홑집형으로 분류되는 수혈주거지는 민 가의 ‘오막살이집’, ‘초가삼간’과 평면유형이 비슷하다. 오 막살이집은 부엌-방-(방)으로 구성된 가장 기본적인 주 거의 모습으로 이는 수혈주거에서 지상주거로 발전되는 첫 단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수혈주거에서 온 돌(방)+부엌의 결합은 주거의 지상화와 함께 민가의 평 면구성에 그대로 이용되며 온돌과 부엌사이에 벽이라는 구조물이 세워지면서 원시적인 민가를 완성해간다.
‘함경도형’ 민가33)는 부엌과 방 사이에 정주간이라는 공간을 두는 데, 이는 수혈주거지 [1×2], [2×1], 日자형의 온돌과 부엌으로 구분되는 공간구성과 비교된다. 수혈주 거지 내 온돌이 설치된 부분은 정주간과 비교되며 이 공 간은 아궁이에서 때는 불의 열기로 가장 따뜻한 공간이 되기도 한다. 정주간은 평상시에는 식당으로 이용되다가 겨울에는 침실로 사용되기도 한다. 또한 부인들의 작업 공간, 친목공간 등 다목적 공간이 되는데, 조선시대 수혈 주거지의 공간도 다양한 성격으로 사용되었다.
온돌방과 부엌으로 이루어진 일자형 홑집형의 민가형 태는 한반도에 널리 분포한다. 1970년대에 조사 보고된 민가 가운데, 중부지방의 경우는 2,777호의 민가 가운데 21.8%가 온돌방과 부엌으로만 구성된 평면형을 보였다. 또한 전남 승주군 성내마을의 경우 전체 민가 154호 중 33호, 경북 안동군의 의인․섬마을 취락조사에 의하면 마을 전체 민가 69호 가운데 33호의 민가가 이러한 공간 구성을 보이고 있다. 물론, 一자형 홑집형의 민가형태는 지역에 따라 다소 다른 특징을 보이기는 하지만 온돌 구 조가 그 밑바탕이 된다.34) .
수혈주거지는 방과 부엌으로 기능적인 공간분할이 이 루어졌지만 주거지가 지상화되고 기둥 사이에 벽을 구획 하면서 실의 분화가 이루어진다. x
Fig.14 [1×3]형의 ①은 부엌-방-방의 구성으로 온돌 진행방향으로 공간을 확장한다. 확장된 공간은 민가의 마루로 변용되거나 건넌방 개념의 공간으로 전개된다. Fig.14 [1×3]형의 ②는 부엌을 중심으로 양쪽에 방을 배 치하거나, 한쪽은 방 또는 한쪽은 기타공간으로 구성한 평면형으로 중앙에 부엌을 두어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 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평면형은 안동지방의 독특한 민가의 양식인 ‘도토마리집’의 공간구성과 유사하다. 이러 한 공간구성은 겨울철 난방, 부엌의 사용, 가축의 관리 등에 있어 공간의 사용에 있어 효율적인 평면형이다.
②겹집형
[2×2]형은 [2×1]형과 함께 가장 많이 확인되는 주거형 이다. 수혈주거지는 대개 장축방향이 등고선과 평행하게 진행되는데, 이 유형의 수혈주거지는 장축방향이 등고선 과 직교하게 조성되었다. 주거지의 구성은 장축방향에 따라 방이 위쪽에 부엌이 아래쪽에 구성된다.
Fig.15 [2×2]형은 아궁이가 2개 설치되면서 하절기의 불필요한 난방을 피해서 취사가 용이한 장점이 있다. 이 는 주거지의 규모가 커지면서 주거지의 확장에 유리하고, 내부에 벽을 구획하면서 겹집형 민가로의 발전이 가능하 다.
[2×3]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6칸집의 겹집의 평면 과 비교가 된다. 이러한 공간구성은 안동지역에 분포하 는 소위 안동형이라 불리는 민가와 공간구성이 유사하다. 안동형 겹집은 보통 정면 중앙에 있는 문을 들어서면 바 닥을 흙으로 처리한 봉당이 있고 봉당 한쪽에는 정지가, 다른 한쪽에는 마구(외양간)가 나란히 앞줄에 배치되어 있다. 뒷줄에는 중앙에 마루가 놓이고, 안방은 부엌 쪽에 상방은 마구 쪽에 배치되는 형식이다35).
Fig.15 [2×3]형 수혈주거지는 온돌부분이 큰방과 상방 으로 아궁이가 있는 부엌공간이 하나는 정지(부엌), 하나 는 마구공간으로 변용된다. 그리고 수혈주거지의 중앙공 간은 흙바닥으로 사용하였지만 전면부는 출입 등으로 사 용되며 민가의 봉당으로 계속적으로 비슷한 모습과 성격 으로 사용되고, 후면부는 마루와 결합하게 되면서 민가 의 중심공간으로 전개된다.
③‘ㄱ’자형36)
‘ㄱ’자형 민가는 세로축에 방과 부엌을 구성하고 방 에 연이어 가로축에 마루와 방을 구성하는 평면특징을 보인다. 중부형 민가의 발전단계를 상정해 본다면 방과 부엌으로 구성된 수혈주거지 형태에서 마루가 더해지고 방이 더해지면서 ‘ㄱ’자형 민가형태로 발전해 왔다고 추 정해 볼 수 있다.
Fig.16 [2×1]형은 방+부엌을 세로축에 구성하고 방 옆 에서 마루와 결합하면서 ‘ㄱ’자형 민가로 전개된다. 한편 Fig.16 [2×2]형은 세로축에 구성된 방과 부엌 옆에 규모 가 커지면서 식침 이외의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났는데 이 공간은 민가로 전개되면서 마루와 마당으 로 변용되어 ‘ㄱ’자형 민가로 전개되는 것을 가정해 볼 수 있겠다.
2․3장에서 언급했듯이 조선시대 수혈주거지에서 [2×1], 日자형의 빈도수가 높은데 이는 서울․경기지역 의 지역적 특성으로 볼 수 있으며, 주거지의 지상화와 민가형이 완성되면서 ‘ㄱ’자형 민가의 지역성에 영향을 준 것으로 판단된다.
5.결론
본 연구는 서울․경기지역에서 조사된 수혈주거지를 대상으로 수혈주거지의 평면구성을 살펴보고 민가와의 상관성을 도출하였다.
수혈주거지는 선사시대부터 계속적으로 이어져 온 주 거형태로 주거지 안에서 거주인의 편의와 생활상태, 주 변 환경에 따라 다양한 평면을 구성하는데, 내부에 온돌 을 도입하게 되면서 공간의 분할, 주거의 확장, 그리고 지상화 과정을 거쳐 조선시대 민가로 발전하게 된다.
조선시대 수혈주거지는 일실(一室)형의 구조이지만 주 거지 내부의 공간구성에 따라 홑집형과 겹집형으로 구분 되면서 다양한 평면형을 보인다.
홑집형은 규모와 장축방향에 의해 [1×2], [1×3], [2×1] 의 평면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온돌이 있는 공간은 방, 아궁이가 있는 공간은 부엌으로 기능적 분할이 이루어진 다. 또한 내부에 기둥을 세우거나 바닥의 단차를 두어 공간을 분할하였다. 아궁이를 2개 설치하여 난방과 취사 용을 구분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겹집형은 내부의 기둥과 온돌 등에 의해서 내부공간이 상․하 두 줄로 구분된다. 평면은 [2×2], [2×3]의 겹집형 주거지들이 확인된다. 주거지 내부의 공간은 기둥과 level 차이에 의해 부엌과 방, 출입 공간, 기타 생활과 작업 등을 위한 공간 등으로 구분된다.
즉. 수혈주거지는 온돌의 사용과 함께 부엌에 의한 공간분할을 시도하면서 난방과 취사가 분리되었고, 공간 의 결합과 분할 등은 주거의 확장에 영향을 주게 되며 민가의 형태로 발전․완성하게 된다.
민가를 살펴보면, 부엌은 기단면보다 낮게 조성되고 바닥면은 흙바닥으로 노출되면서 마치 수혈주거지의 모 습을 연상케 한다. 민가의 형태는 지상주거에서 그 출발 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수혈주거지에서 온돌을 도입하게 되면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다.
민가는 주거의 지상화와 함께 수혈주거의 평면구성이 그대로 온돌과 부엌사이에 벽이라는 구조물이 세워지며 원시적인 민가를 완성해간다. 부엌-방-방의 구성은 온돌 진행 방향에 따라 공간이 확장되었으며, 확장된 공간은 민가의 마루로 변용되거나 건넌방 개념의 공간으로 전개 된다.
이상 서울․경기 지역 수혈주거지의 평면 분석을 통해 민가와의 연관성을 살펴보았다. 조선시대 수혈주거지에 대한 연구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후기 민가까지 공백 기로 남아있는 주거사를 연결하는 실마리를 제공할 것으 로 기대된다.
이번 연구는 서울․경기지역에서 조사된 수혈주거지로 한정하여 진행되었는데, 충청지역․강원지역․영남지역 의 경우에도 수혈주거지는 거의 비슷한 형태로 확인되고 있다. 이는 앞서 설명하였던 주거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 인 생존을 해결하는 기본 공간은 시대 및 지역과 관계없 이 공통된 형식을 보여주는 것을 뒷받침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추후 타 지역과의 비교를 통해서 수혈주거지 의 지역성을 검토하고 이를 통해 다양한 민가의 공간 구 성방법과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 지 고찰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