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al Search Engine
Search Advanced Search Adode Reader(link)
Download PDF Export Citaion korean bibliography PMC previewer
ISSN : 1598-1142(Print)
ISSN : 2383-9066(Online)
Journal of architectural history Vol.24 No.3 pp.7-16
DOI : https://doi.org/10.7738/JAH.2015.24.3.007

A Study on Daniel Libeskind’s Jewish Museum in Berlin viewed from critical theory

Kyoung-Chang Lee
January 25, 2014 June 30, 2015

Abstract

It is not easy to clarify the historical perspective of architect through his architecture. Exceptional cases, it will be the time to design a history museum. As an institution, a Museum already became an apparatus to represent the history to it itself. Libeskind’s Jewish museum Berlin has been presented as the controversial case most of all. In particular, in that it instead of dealing with history positive, that contains a tragic history, this building is a building that history a unique interpretation of the architect has been a problem. Therefore, it is difficult to find a suitable example to Libeskind’s Jewish museum in Berlin to try and look at the problem of the history of contemporary history and interpretation of the architect. In this paper, I am trying to interpret Libeskind’s Jewish Museum Berlin through the aesthetics and history philosophy of Theodor Adorno and Walter Benjamin. They are Jewish and the central figures of the Frankfurt School, known as ‘critical theorists’. Their critical theory was formed based on the experience of the Jewish genocide and war.


비판이론을 통해서 본 리베스킨트의 베를린 유태인 박물관 연구

이 경 창
명지대학교 건축공학과 박사

초록


    1.서 론

    이성에 대한 맹신 속에 역사의 객관성을 믿었던 서구 근대문명과 계몽사상은 한계에 직면하였고, 이 거대서사 가 직면한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징후가 서양 학자 들에겐 바로 세계 1,2차 대전과 유태인 대학살이었다. 료타르는 유태인 대학살을 지진에 비유한 바 있다. 이 지진은 “살아 있는 생명체, 건물과 물건을 파괴할 뿐 아 니라 지진을 측정하는 도구조차 직간접적으로 파괴한다 .”1) 지진을 측정하는 도구란 바로 역사학을 의미하는 것 이다. 유태인 대학살은 유태인의 삶의 기록 즉 역사적 기록마저 말살하려하였기에 역사학에 대한 근본적인 위 기를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역 사학자들의 담론을 “권력의 강화하기나 아니면 권력 정 당화의 효과를 갖는 것”이라고 말하며, 역사의 전통적인 기능은 “권력의 정당성을 말하고, 그 광채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푸코에 따르면, “역사란 권력의 담론이며, 권력이 사람들을 굴복시킬 때 사용하 는 도구인 의무의 담론”2)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포스트 모던 역사가들은 ‘역사’를 모든 차이를 부정하고 전체로 묶는 ‘거대서사’로 생각하였고, 이 거대서사가 힘을 잃은 곳에서 공백을 메꿀 대체자로서, 주관적이며 파편적인 ‘기억’이 힘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기억의 문제가 대두 된 것은 자기중심적으로 타자를 억압해온 서구 근대문명 과 계몽사상에 대한 저항에서 나온 것이다.3) 그간 역사 라는 공적인 영역에서 억압되거나 무시되어왔던 사적인 기억들이 새롭게 조명 받게 되며, 이미 기성화된 역사를 넘어서 과거의 다양한 재현방식과 다양한 정체성들을 포 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개인의 개별적인 기 억이라는 담론이 새롭게 역사를 대체하는 담론으로 부상 되었듯이 박물관은 공식 역사를 일방적으로 보여주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체험이라는 요소를 도입하기에 이른 다. 리베스킨트의 유태인 박물관도 다르지 않다. 개별 주 체의 참여와 경험을 강조하고 있다. 해체적 형태와 지그 재그 공간을 통한 방향감각의 상실, 지속적인 서사적 역 사에 대한 몰입의 방해와 보이드를 통한 경험은 관람객 에게 비극적 역사를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되어 있다. 그 러나, 기억담론이 지닌 문제는 역사학의 위기를 알리는 증상에 대한 대안이기도 하지만, 주관적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역사 뿐만 아니라 기억 역시 권력의 힘 에 자유롭지 않다는 점이다.Fig. 1

    건축분야에서 건축가가 건축물을 통해 어떻게 역사관 을 드러낼 것인가는 역사박물관을 대할 때 중요하게 마 주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해 가장 논쟁적으로 제시된 사 례가 있다면 역시 리베스킨트의 베를린 유태인 박물관이 다. 이 건물은 긍정적인 역사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유 태인 대학살이라는 비극적인 역사를 담고 있다는 점에 서, 건축가의 독특한 역사 해석이 이슈가 된 건물이다. 특히 건축가의 역사관이 파격적인 형태로 구현되었으며, 건축에서 역사의 해석에 대한 문제와 비극적 역사를 어 떻게 재현할 것이냐에 대해 좋은 본보기가 되는 해법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본 논문은 리베스킨트의 유태인 박물관을 비판 이론의 입장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비판이론4)이란 통상 세계 대 전 전후 독일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이론을 지칭하는 것 으로, 본 논문에서는 그 중 발터 벤야민과 테오도르 아 도르노의 역사관과 미학을 중심에 두고 해석하려 한다. 이 둘은 프랑크푸르트학파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세계 대전을 경험한 전쟁 세대로서, 전쟁과 유대인 대학살의 경험을 철학적, 미학적 기반으로 삼았다. 따라서 필자는 유대인 대학살을 다루는 박물관을 이 두 명의 철학자의 철학적 개념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한 다. 특히 두 가지 논점에 집중할 것이다. 첫째는 벤야민 의 역사관과 비교하여 유태인박물관에 드러난 역사관을 살펴볼 것이며, 둘째는 아도르노가 주장한, 비극적 역사 에 대한 예술의 재현 (불)가능성이라는 아포리즘과 관련 하여 리베스킨트 건축을 고찰하려 한다. 이로써 비판이 론이 건축에 미친 영향을 반추하게 될 것이며, 또한 건 축에서 역사의 문제를 다시 생각할 수 있으리라 본다.

    세부적으로 본 논문은 2장에서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 학에서 드러나는 “폐허”와 “미로”의 모티브가 어떻게 리 베스킨트의 건축에 반영되었는지를 살펴보고, 3장에서 아도르노의 미학이론에서 ‘부정성’의 미학이 어떻게 리베 스킨트의 건축에 반영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4장에는 비판이론의 현대적 맥락에서 이 건물에 대한 재해석을 종합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2.발터 벤야민의 “파편”과 “미로”를 통해본 유태인 박물관

    2.1.발터 벤야민의 “파편”적 역사

    유태인 대학살을 경험하면서 역사학에 드려진 근본적 위기를 포착한 발터 벤야민(1892~1940)은 1940년 「역사 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과거를 역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이 ‘원래 어떠했는가’를 인식하는 일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5)고 못박았다. 이 말은 레오폴트 폰 랑케 (Leopold von Ranke)식의 역사주의 방법론6)을 거부한 것이다. 벤야민에게 과거라는 실체는 결코 완전히 재현 할 수 없는 것이며, 과거의 재현으로서 역사란 역동적인 사회적, 정치적 입장과 권력이 개입되는 현재의 입장에 서 서술되는 것이다. 심지어 벤야민에게 “역사는 구성의 대상”7)이다. 벤야민은 당시의 주류 역사관이었던 객관적, 실증적 역사관을 비판하면서 역사가의 능동적 현실개입 을 강조했다. 주류 역사는 승리자의 입장에서 쓴 “야만 의 기록”일 뿐이며 올바른 역사가의 임무란 승자의 관점 에서가 아니라 피해자의 관점에서 역사를 쓰는 것 즉, “결을 거슬러 역사를 솔질하는 것”8)이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인류의 역사가 진보의 역사라는 등식을 깨는 것이 중요했다. 벤야민은 역사는 진보의 성취가 아니라 수많은 잔해 위해 또 잔해가 쌓여가는 파국적 역사라는 모델을 제시했다. 벤야민에게 역사는 공허하고 균질적인 시간에서 존재하는 연속적인 시대의 연대기가 아니라, 파편화된 폐허로서의 역사이다.

    벤야민의 폐허 또는 파편이라는 사유이미지는 역사에 관한 은유뿐 아니라 1928년 교수자격논문인 <독일 비 애극의 원천>에서 제시한 바로크 알레고리 이론에서도 등장한다. 그는 여기에서도 역사를 영원한 삶의 과정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쇠락의 사건으로 바라보았 다.9) 즉, ‘파편’ 또는 ‘폐허’라는 사유이미지는 벤야민의 지적 경력 전반을 관통하는 것으로, 초창기 바로크 비애 극 연구에서 바로크의 우울한 세계관을 살피는 도구일 뿐 아니라 후기 역사철학에서 역사적 유물론을 위한 비 판적 도구가 된다. 이는 현대에 대한 인식과 연관되는데, 벤야민에게 현대는 파시즘의 도래에 따른 지옥의 시간이 며 “생산력의 발달은 이전 세기의 소망상징들을 표현하 는 기념비들이 붕괴되기도 전에 그러한 상징들을 산산조 각 내버”10)린 시기이다. 이런 파국적 상황에서 역사가는 “진정한 비상사태를 도래시키는 것”11)이 목표가 된다. 따라서, 벤야민에게 역사는 비극이자 폭력과 파괴의 과 정인 부정적인 역사이며 재앙적 현실과 재앙적 역사에 대한 해체를 통해서만 구원의 가능성을 도출할 수 있는 것이다.

    리베스킨트의 유태인박물관은 유태인 대학살 이후 역 사학이 직면한 문제들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 애초 주 류 독일의 긍정적인 역사를 다루는 박물관이 아니라 유 태인 대학살이라는 재앙의 역사를 다룬다는 점에서 기존 의 박물관과는 다른 접근을 요구한다고 볼 수 있다. 1988년 새 박물관 디자인 공모전을 개최한 베를린 시 당국은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대한 전후 반성의 일환으 로, 베를린 박물관 옆에 유태인 박물관을 새롭게 건설하 는 국제 공모전을 개최하였다. 해당 공모전 요강에는 유 태인 박물관은 베를린 박물관을 확장하는 것이며 베를린 박물관에 통합된 것인 동시 에, 자율성을 가져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1933년 이후 유태인의 유물이 체계적으로 소실되었음을 강조하고 이용 가능한 소재를 가지고 느슨 하게 연대순으로 구성되길 제안하였다. 공모요강에 이 미 역사적 과오에 대한 반성 과 치유의 문제, 유물의 소 멸이 뜻하는 역사학의 아포 리즘을 묻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건축에서 역사적 비 극의 재현 가능성을 물었다 고 볼 수 있다. 1989년 6월 25일 공모전 결과, 165개의 입선작이 발표되었으며 최종 리베스킨트의 디자인이 선정되었다. 건립을 둘러싼 찬반 논란12)과 베를린장벽의 붕괴 등 사회여건의 변화와 재정 적 문제 등의 우여곡절 끝에 리베스킨트의 당선안은 애 초 기울어진 벽체를 모두 곧게 세우고 건물 외부에 여러 개의 보이드도 하나만 남긴 채 모두 없애버린 계획의 대 대적 수정을 가한 후, 1992년 11월에 건설이 시작되어 1999년에 완공되었다. 그리고 2001년 9월 정식 개장되기 까지 2년 동안 전시물 없이 건물만 공개되었다. 건물만 보기위해 35만명의 사람들이 5DM의 관람료를 내고 관 람하였을 정도로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당선작으로 선정된 리베스킨트의 해법은 첫째 피해자 의 관점에서 박물관을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며, 둘째 많 은 역사적 사료마저 삭제되어버린(그 자체로 역사를 삭 제해버린) 현실에서 그 공백 자체를 역사에 대한 체험의 모토로 삼는다는 것이다.13)Fig. 8

    우선, 건축가는 유태인 박물관에 별도의 출입구를 두 는 대신 베를린 박물관의 지하를 통해 진입하게 계획하 였다. 베를린 박물관을 통해 진입한다는 것은 베를린의 역사와 베를린에 살았던 유태인의 역사는 뗄 수 없는 관 계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리베스킨트는 오선지에 써낸 프로젝트 개요에서 “베를린 시의 박물관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시민들 위한 장소가 되어야 하며, 그들의 공통 유산과 개인적 희망을 발견해야 한다”고 말하며, 이 프로젝트의 핵심적 개념은 유태인의 비극적 삶과 가해자 인 독일인의 운명을 “공통된 운명”으로 바라본 것이라고 말한다.14) 그리고, 베를린 박물관에서 지하로 진입한다 는 것은 유태인의 역사는 베를린 역사의 숨겨진 부분 또 는 부정적인 역사의 한 부분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리베스킨트는 프로젝트를 ‘선들 사이’로 이름 붙이면서 독일과 유태인 역사를 상징하는 두 가진 선들의 뒤얽힘 에서 나왔다고 말한다.15) 지그재그형태로 꺾이지만 연속 되는 선은 독일 역사를 상징하고 유태인의 역사는 직선 이지만 단절되는 선으로 표현된다. 리베스킨트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그 선들은 뒤얽히면서 서로를 파편화시키 고 있다. 연속되는 선은 가시적 역사를 상징한다면, 단절 되는 직선은 비가시적 역사, 즉 사라진 역사, 부재한 유 태인의 역사가 된다. 베를린의 역사가 연속되는 주류의 역사라면 이런 연속성을 파탄 내는 것은 그 핵심 즉 건 물의 척추에 해당하는 곳에 있는 보이드로 표현되는 유 태인의 역사이다. 이 보이드는 유태인박물관의 핵심적 공간으로, 주류의 역사가 지닌 심연을 상징하는 동시에, 단절을 말하고 있다. 보이드는 곧 기록되지 못한 역사이 다. 그래서 보이드는 유태인 대학살이 불러온 역사에서 의 공백을 구현한 것이자 역사학의 근본적 한계(과거에 대한 재현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벤야민의 파편에 대한 역사 개념의 유비는 유태인 박물관 의 형태에서 직접적으로 드러 난다. 우선 입면에서 무수한 파편을 볼 수 있다. 유리창은 내부공간과는 무관하게 자율 적인 모습으로 디자인 되었다. 마치 날카롭게 새겨진 상처처 럼 외피를 자르고 있기 때문 에 역사의 비극을 연상시킨다. 이 유리창의 디자인은 베를린 지도위에 사라진 유태인들 의 주소를 표시하고 이를 연결하여 만든 파편적인 선들 에서 나왔다고 한다.16) 또 다른 파편의 모티프는 지그재 그의 건물형상에서 볼 수 있다. 번개와 같은 형상은 다 비드의 별에서 유추된 것으로, 다비드의 별은 나치에 의 한 차별의 표식이자 동시에 유태인 스스로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도식이다. 리베스킨트는 베를린 지도상에 여러 유명인들의 주소를 표시하고 이를 연결하였을 때 다비드 의 별 형상이 나타났다고 말한다. 이것이 마치 깨어진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다비드의 별이 깨어졌다는 것은 차별의 종식, 유태인의 해방을 의미한다. 그리고, 번개와 같은 형상은 처음엔 짧은 변을 가지다가 점차 긴 변을 가지면서 확장되는 모습을 띠고 있다. 이런 지그재 그 형상은 역사가 결코 ‘완결된’ 것이 아니라 과거와의 의미 있는 관여와 해석에 영구적으로 ‘열려’있음을 의미 한다. 열려 있음은 유대인 대학살을 의미하는 나치의 ‘최 종해결(Endlösung)’을 거부한다는 뜻이 된다.

    파편화된 형태를 지닌 유태인 박물관은 승리자의 시각 에서 역사를 기록하는 전통적 기념비(특히 나치 건축의 거대망상증과 균제의 형태미)의 완결된 형태와는 달리, 어느 장소에서도 완결된 형태로 인식될 수 없다는 점에 서 반기념비적 형태를 띠고 있다. 나오미 스테드는 이런 점에서 리베스킨트의 유태인 박물관은 “메타서사적 역사 를 박물관 내에서 전복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스테드의 평가에 따르면, “유태인 박물관은 기념비성, 완결, 통일 의 거부로서 역사학에서 결말의 불가능성을 건축적으로 반영한다. 자신의 프로세스와 실무, 복합성과 이데올로기 를 인식하는 자기 반성적 박물관으로서 유태인 박물관은 역사의 기념화와 미적 재현에서 뿐만 아니라 역사학 기 구 자체에 대한 비판에 참여함으로써, 현대 역사박물관 의 모델을 비판적 제도로서 제시한다.”17) 따라서, 유태 인 박물관의 특히 승리자가 아닌 피해자의 관점에서 역 사를 파편적으로 인식하여 이를 형태적으로 구현했다는 점에서 리베스킨트의 건축은 벤야민 역사관의 영향을 받 았다고 볼 수 있다.

    2.2.벤야민의 “미로”

    리베스킨트는 계획의 네 가지 출 발점으로 다비드의 별, 아놀드 쇤 베르그의 미완성 오페라 <모세와 아론>, 당시 베를린에서 추방된 유 태인의 이름과 사망 날짜, 장소가 적힌 2권의 인명록, 마지막으로 유 태인 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일방 통행로』를 들고 있다. 리베스킨트 는 발터 벤야민의 『일방통행로』 를 “묵시론적 안내서”라 부르며 60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을 본 따 “지그재그를 따라 60개 장의 끝 없는 연쇄”로 표현하였다고 말한다. 발터 벤야민의 『일 방통행로』는 도시의 가로를 걸으며 만나게 되는 대상을 통해 사유를 전개한 몽타주적 책이다. 일방통행로라는 제목은 책표지의 이미지처럼 그 자체로 일방향으로 소외 와 물화를 추동하는 자본주의 합리화 과정에 대한 비유 로 읽힌다. 벤야민에게 도시의 가로는 ‘미로’로 구성되어 있다. 대도시의 미로는 상품 물신이 품어내는 ‘환등상’을 만들어내지만, 또한 초현실주의자의 산보를 가능하게 하 는 양면성을 지녔다. 이것은 다양한 참여의 가능성을 가 진 문화의 다공성을 만들어내기에, 새로운 집단적 실천 을 가능케하는 조건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를 상 품 물신이라는 하나의 방향으로 몰아세우는 현대 사회속 에서 벤야민은 새로운 집단적 실천의 가능성을 포착하려 고 한 것이다.18)

    벤야민의 미로 개념과 유사하게 리베스킨트의 지하통 로는 미로 또는 수평갱도를 닮았다.19) 유태인 박물관의 지하로 들어가면 세 가지 길이 제시된다. 천장의 선형 조명에 의해 강조되는 3가지 축은 유태인의 운명을 상징 하며, 서로 겹쳐지고 엇갈림으로써 운명의 우연성과 엇 갈림을 만들어낸다. 각각의 길은 두 번의 교차점을 통해 엇갈리며 만나게 된다. 관람객은 각각의 길 을 선택함으로써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유태인의 운명을 체험하게 된다. 가장 짧지만 가장 넓은 길 은 홀로코스트의 축이다. 막다른 골목으로 끝이 나며 육중한 콘크 리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약 27m 높이의 홀로코스트 타워로 들어설 수 있다. 차가운 노출콘크리트에 아무런 조명이 없는 홀로코스트 타워는 죽음을 상징하는 엄숙한 공간으로, 폐쇄적이며 텅 빈 공간이다. 그 다음 짧은 길은 추방과 이민의 정원으로 나가는 길이다. 추방 과 이민의 축은 유일하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다. 통로의 끝은 투명유리창으로 바깥세상의 밝은 햇빛이 스 며들게 되어 있다. 이곳은 나치의 탄압으로 추방당한 사람들의 운명을 상징한다. 49개의 콘크리트 기둥이 숲 을 이루며 조성되어 있는데 지면과 기둥 모두 약 12도 경사져 있다. 49개의 콘크리 트 기둥은 묘비석처럼 보이기도 하고 내부에 흙을 채웠 다. 각각은 23피트 높이에 4*5피트의 사격형이며 3인치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다. 기둥이 높고 간격이 좁아 압박 감을 느끼게 되며 방향감각을 잃고 교란시킨다. 추방과 이민을 통해 만나게 된 곳은 약속된 땅이 아니라 낯선 (unheimlich), 이상한 장소인 셈이다. 가장 좁고 긴 연속 성의 축은 베를린의 연속적인 역사를 가리키고, 이 축은 끝 부분에 계단실로 연결된다. 위층 전시실로 연결되는 이 계단은 아래쪽에 창문이 없으며 제일 위층과 천창을 통해서만 햇빛을 받아들여 장엄한 공간으로 진입하는 극 적인 느낌을 부과한다. 마치 어두컴컴한 길에서 빛을 향 해 올라가는 모습이 연출된다. 이는 미지의 세계로 안내 하는 끝없는 계단, 마치 성경 속 천국과 통하는 야콥의 사다리를 연상시킨다.

    지상층의 전시공간 또한 미로와 같은 공간이며 파편화되어 있다. 전 시공간은 연속되지 않고 바닥, 벽, 천정이 검게 칠해진 박스 공간에 의해 분절된다. 보이드를 가로지르 는 브릿지에 해당하는 곳으로 이곳 은 전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벽에 는 세로로 된 작은 창이 있어 보이 드 공간을 내다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이곳은 유태인의 부재를 의미 하며 연대기적 역사의 흐름을 가로막고 관객의 몰입을 방해한다. 연속되는 지그재그의 선이 지배적인 역사 또 는 연속되는 역사라면 이 역사는 끝없이 파편화된 보이 드 공간에 의해 단절되며 관람객의 몰입을 차단하는 장 치가 된다.

    3.아도르노의 “아우슈비츠 이후의 시”

    3.1.계몽의 변증법과 유태인 박물관

    아도르노에게 유태인 대학살은 계몽 프로젝트의 비극 적 실패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아도르노는 호르크하이머와 쓴 『계몽의 변증법』에서 서구 사회에 서 계몽의 전개 과정은 역설적으로 계몽이 신화로 전락 해버린 과정이었음을 폭로한다. 그들은 그 원인을 도구 적 합리성에 두고 있다.20) 이들에 따르면, 도구적 합리 성의 근저에 깔린 원리는 모든 질적인 차이를 하나의 잣 대아래 환원시키는 동일성 원리이다. 아도르노에게 유태 인대학살은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가기 때문에 이런 동일 성 사고의 가장 극단적인 예다.21)

    리베스킨트는 아도르노의 용어를 정확히 사용하며 다 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건축을 포함하여 문화는 베를린에서 독일인-유태인 관 계와 같은 운명에 고통 받고 있다. 동시대 문화는 홀로 코스트로 이끄는 동일성 사고에 물들어 있다. 그것은 두 가지 다른 생각이 아니다. ‘동일성 사고’란 일종의 합리주의, 조직화, 관료주의와 행정을 뜻한다. 이를 따 로 떼어 놓을 수 없으며 어떤 건 좋고 어떤 건 나쁘다 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건축이 어떤 기능과 구속을 따 른다고 믿지 않는다.22)

    리베스킨트는 건축에서 근대의 이런 동일성 사고가 적 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건축의 모든 요소를 기능이나 경제성으로 환원시키는 기능주의적 사고였다고 보는 것 이다. 유태인 박물관은 철저히 기능주의적 사고를 거부 한다. 파편적 형태의 창문은 기능적 요구에 묶이지 않는 다. 특히 보이드 공간은 아무런 기능을 담지 않는다. 어 떤 기능도 갖지 않은 채, 단순히 비워진 공간일 뿐이다. 하지만, 아무 기능을 갖지 않는 이 공간이야말로 유태인 박물관의 핵심적 공간이다. 리베스킨트는 “건축가로서 해 야 하는 일은 이 보이드가 채워지는 것을 막는 일”23)이 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는 아도르노가 말한 물화된 세상 과 거리를 두는 예술의 자율성 전략과 상통한다. 아도르 노는 예술은 본래 자율적이고 또 자율적이어야 총체적으 로 사물화된 사회를 비판할 수 있다고 보았다.24) 또한 예술은 대립물의 미메시스가 되어야 한다.

    예술은 사회적 현실에 따라 이것을 강요받는다. 예술이 사회에 저항하는 까닭에 사회를 벗어난 입장을 견지할 수 없다. 예술은 자신이 저항하는 것과 동일화를 통해 서만 저항할 수 있다.25)

    이렇게 볼 때, 기능주의에 저항하며, 파편화된 리베스 킨트의 건물은 곧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미메시스로 볼 수 있다. 그럼으로써 사회의 총체성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리베스킨트의 유태인 박물관은 인류의 말살 로 끝이난 계몽의 삐뚤어진 형태에 대한 은유이다. 보이 드는 진보에 대한 믿음이 남긴 죽음의 흔적인 셈이다.26)

    3.2.‘아우슈비츠 이후의 시’

    아도르노는 유태인 대학살이후 현대가 처한 문화적 곤 경을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 다. 그것은 또한 오늘날 시를 쓰는 것이 왜 불가능해졌 는지를 말하는 인식조차도 잠식한다”27)는 말로 표현한 바 있다. 이 유명한 말은 유태인 대학살이후 현대 문화 와 예술의 곤경을 대표하는 아포리즘으로 여겨져 왔다. 처음에 이 말은 인간성의 죽음이후 인문학이 여전히 가 능한가를 묻는 물음이었다. 즉 처음엔 동시대 인문학의 존재 가능성에 관한 물음이었지만 이후 예술의 재현 가 능성에 대한 물음으로 확장된다. 아도르노의 이 말은 샤 르트르의 ‘참여 예술Commitment’에 대한 반박에서 다시 등장하는데, 아도르노는 “나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라고 한 말을 누그러뜨릴 생각이 없 다.”28)고 말한다. “현실에 대한 과도한 고통은 어떤 망 각도 용납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러한 고 통은 그것을 금하는 예술의 전진적 지속”을 요구한다고 말함으로써,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예술은 계속되어야 한 다고 말한다. 즉, 아우슈비츠 이후의 예술은 현실의 고통 을 망각하지 않는 동시에 그것을 치유할 수 있어야 한다 는 말이 된다. 아도르노는 참여 예술의 한 예로서 쇤베 르크의 <바르샤바의 생존자들>을 비판하면서, 이 작품 이 유태인 대학살을 너무 직접적으로 그리고 있으며, 역 사적 고통을 ‘이미지’로 변환하고, 희생을 예술작품으로 만들고 있다고 꼬집는다. 미적인 재현은 필연적으로 어 떤 미적 쾌를 전달하는 것이고 이것은 희생자의 입장에 서 부당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도르노는 유태인 대학 살의 미적 재현은 윤리적으로 온당치 못한 것으로 보고 있다.

    대신 그는 예술작품은 어떤 미적 즐거움이나 의미의 추출을 엄격하게 방지하는 방식으로, 즉 현실의 비극을 부정적으로 재현해야 한다고 말한다. 마치 감기에 걸리 지 않기 위해 감기 바이러스를 주입하듯, 예술은 사회의 물신화된 모습을 재현한다. 따라서 올바른 예술작품은 현실의 긍정적인 이미지나 유토피아의 긍정적 이미지를 직접 구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올바른 예술작품이 만들 어내는 이미지는 현실의 부정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부정 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아도르노의 입장에서 유태인 대 학살을 묘사한 가장 좋은 예는 사무엘 베켓의 <마지막 게임Endgame>이다.29) 사무엘 베켓은 전통적인 미적 즐거움을 거부하는 엄격함 속에서 형식적 금욕성과 절제 를 통해 이런 부정성을 드러내었다.30) 그러고 간접적인 재앙의 환기에 한정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아도르노의 아우슈비츠 이후 현대예술이 지녀야할 재현의 윤리가 된 다. 즉, 어떤 화해된 상태에 대한 금지, 또는 어떤 형상 또한 금지함으로써.31) 예술은 도래할 유토피아적 미래를 은연중에 내보여야 하는 것이다.32)

    이후 아도르노는 1966년 『부정변증법』에서 앞서의 정식을 다시 거론한다. “고문당하는 자가 비명 지를 권한 을 지니듯이, 끊임없는 괴로움은 표현의 권리를 지닌다. 따라서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시를 쓸 수 없으리라고 한 말은 잘못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덜 문화적인 물 음, 즉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살아갈 수 있겠는가, 우연히 그것을 모면했지만 합법적으로 살해될 뻔했던 자가 제대 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은 잘못된 것이 아니 다.”33) 아도르노는 여기에서 앞서의 정식을 수정하고 있 지만, 여전히 재현을 둘러싼 현대 예술의 윤리성을 가늠 하는 잣대가 되었다. 제네 레이에 따르면, 예술이 긍정적 재현가능성을 거부해야한다는 아도르노의 매우 특수한

    요구는 결국 재현에 관한 지배적인 윤리의 위상을 이루 었다.34) 1980년대 중반이후 10여 년간은 이런 윤리가 지배적이 되고 점차 관습화된 시기였다. 기념비가 권력 자의 시각을 정당화하는 것이라면, 1980년대 이후 예술 가들은 반(反)기념비적 형태로 파시즘과 홀로코스트의 트라우마에 대응하려 했다. 이런 흐름은 주로 문학과 미 술, 영화 분야에서 주도적으로 일어났지만 건축계에서도 1980년대 이후 재현은 지속적인 도전을 받아왔다. 특히 나치의 신고전주의 건축을 국가 사회주의의 기념비로 활 용한 것은 건축에 기념비성의 위기를 낳는 하나의 계기 가 되었다. 건축사에서 나치식의 과대망상증과 신고전주 의 건축은 강력한 비판을 받아왔으며, 아울러 리베스킨 트의 스승이었던 피터 아이젠만은 현대건축에서 재현은 허구라고 주장한 바 있다.35) 이런 흐름의 대표적인 건축 작품을 꼽자면, 마야 린의 <베트남 전몰 기념 비>(1980~82)와 요헨 게르츠의 <사라지는 기념 비>(1986~91)를 들 수 있다.

    리베스킨트의 유태인박물관 또한 이런 반-기념비적 성향을 보여준다. 파격적인 형태의 유태인박물관은 이런 물신화된 비극적 현대에 대한 은유로 읽을 수 있으며 전통적 기 념비의 형태전략에 대한 거부로 볼 수 있다. 아울러 전통적 기념비가 하나의 완결된 형태를 지향한다면 유태인 박물관은 어떤 특권적 소실 점이 없다. 또한 유태인박물관의 가 장 핵심적 공간이 파편화된 보이드라는 점을 꼽을 수 있 다. 약 27m의 높이로 150m가 넘는 전체 건물에 걸쳐 있는 5개의 보이드와 홀로코스트 타워를 통해 리베스킨 트는 전쟁의 참상, 즉 “공동체가 송두리째 사멸되었거나 개인의 자유가 짓밟혔을 때, 삶의 구조 전체가 비틀리고 변형되어 삶의 연속성이 무참히 단절되어버렸을 때 생기 는 거대한 공허함”36)을 표현하려고 했으며, 이것은 지배 적인 역사가 남긴 흔적에 해당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 다.37) 제일 앞의 보이드는 홀로코스트 타워와 윤곽이 비 슷하고, 두 번째 보이드는 베를린 박물관에서 내려오는 계단실과 동일하다. 제일 마지막에 있는 보이드는 가장 큰 보이드로, “기억의 보이드memory void”라 불리는데 1층에서 진입할 수 있다. 여기에는 메나세 카디슈만 (Menashe Kadishman)의 설치작품, ‘낙엽(Shalechet)’이 있다. 보이드 내부는 노출콘크리트로 이루어져 있어 그 자체로 유태인의 부재를 상징하며 침묵의 공간이다. 리 베스킨트는 이 보이드의 금욕적인 효과를 극대화 하기위 해 콘크리트의 이음매를 없애려고 했다. 중간에 콘크리 트를 끊어 치지 않고 한 번에 시공한 것이다. 유태인 박 물관에서 중심은 보이드에 있다. 가시적인 것보다 비가 시적인 것에 중점을 둠으로써 이 공간은 근대 프로젝트 의 비극적 실패를 재현하는 동시에 전쟁의 참사로 인한 인간의 희생을 추념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리베스킨트의 보이드는 이런 역사의 부정성을 표현하고 있으며, 아도 르노의 금언을 따라 침묵적 공간으로 추상화되어 역사의 재현 불가능성에 대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하 자면, 그는 아도르노의 윤리를 침묵과 부재의 공간인 보 이드를 통해 이루어냈다.

    4.유태인 박물관에 대한 최근의 재평가

    리베스킨트의 유태인 박물관은 지배자의 역사에 맞선 피해자의 역사를 드러내는 것으로 많은 호평을 받았으나 오늘날 이 평가는 변화를 맞고 있다. 이런 변화는 홀로 코스트라는 말이 지나치게 규범화, 신화화되었다는 지적 과 연결된다. 이에 대한 최초의 의문을 제기한 역사학자 노빅과 핀켈슈타인은 홀로코스트가 ‘신비’ 종교화되는 점 을 우려하고 있다.38) 무엇보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 는 유태인만을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로 간주하고 집시를 비롯한 타 민족의 죽음을 등한시 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 다는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현재 정 치적 사건에서 특정 한쪽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할 수 있 다는 점이다.

    리베스킨트의 유태인 박물관도 다르지 않다. 1980년 대 박물관 건설 붐을 따라 진행된 여러 나라에서 건립된 유태인 박물관은 이민족을 배제한 유태인만을 위한 박물 관이었다. 에스라 아칸에 따르면, 실제로 베를린 유태인 박물관이 자리잡은 장소 부근은 터키 이주민이 주로 기 거하던 장소였으며 이들은 박물관 건립에 철저히 소외되 었다.39) 또한 은연중 이스라엘 건립에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49개의 기둥으로 표현된 <추방과 이민 의 정원>에 대해 리베스킨트는 “경사진 정원은 49개의 기둥을 갖고 있다. ... 이 중 48개는 베를린의 흙으로 채 워져, 이스라엘 정부의 탄생을 의미한다. 하나는 베를린 도시를 대표하는데, 예루살렘의 흙으로 채워졌다.”40)고 말한 바 있다. 은연중 이스라엘 정부의 정당성을 옹호하 는 논리를 유포한 셈이다.

    또한, 역사학자 이와 도만스카는 “리베스킨트가 우리 에게 제시하는 역사의 건축적 경험은 ‘좋은 옛 시절’(콜 레지언하우스가 만들어진 18세기)에서 연결되어 지하로 의 날카로운 하강(나치 시기)을 통해 세 가지 가능한 방 향(생존, 추방, 죽음)으로 갈리는 직선적, 목적론적인 연 대기적 이야기”라고 말하며,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유대 인의 신학적 역사라는 부호화된 플롯에 따라 전개된 다”41)고 비판한다. 이와 도만스카의 결론은 데리다의 해 체주의적 건축을 표방하고 있지만, “역사자체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을 강화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게다가 재현의 미학적 전략도 아도르노의 재현 에 대한 윤리적 기준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위험하다. 도만스카에 따르면,

    프로젝트의 핵심을 형성하는 부재, 보이드, 미로 같은 부정적 범주는 미적 범주로서 긍정적 차원을 획득한다. 미적인 것은 대량학살을 승화시키고 부재의 극히 연상 적 재현은, 미적 경험을 통한 과거의 재현을 역사학에 서 과거의 재현보다 더욱 위험하게 만든다.42)

    보이드가 과연 아도르노가 말한 재현으로서 윤리를 따 르고 있느냐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 엇갈린다. 특히 철학 자 데리다는 리베스킨트와의 대화에서 유태인 박물관의 보이드를 비결정적 장소가 아니라 유태인 대학살이라는 역사로 가득 찬, “역사적으로 결정화되거나 한정된 보이 드”라고 말한다. 또한 리베스킨트가 보이드를 침묵과 연 관시키지만, 침묵에는 말을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침묵과 말을 하고 싶으나 할 수 없는 침묵으로 구분할 때 이 보이드는 “말로 가득한 곳”이라고 꼬집었다.43) 즉, 데리다는 이 건물이 반기념비를 표방하지만, 여전히 홀 로코스트에 대한 의미가 고착된 ‘기념비’를 만들 뿐이라 고 의심한다. 데리다의 말은 보이드에 관객의 참여가능 성이 제한되어 있음을 지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역사 에 대한 간접적 경험과 참여를 말하면서도 여전히 건축 가가 제시하는 틀에 묶여 역사를 바라보고 경험할 수밖 에 없는 것이다. 도만스카와 데리다의 주장을 다시 말하 자면, 지배적 역사 대신에 관객의 기억과 참여를 내세웠 지만, 이 역시 권력의 작용에 자유로울 수 없음을 말하 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유태인박물관을 통해 세계적 건축가로 올라선 리베스킨트는 오스나브뤼크의 펠릭스 누스바움 하우스, 코펜하겐의 덴마크 유태 인 박물관, 샌프란시스코 현대 유 태인 박물관에서 유사한 주제를 가다 듬었다. 이후 뉴욕의 WTC 공모전에 당선되며, 국제적 명성 을 이어갔는데, 여기에도 역시 유 태인박물관의 아이디어와 비슷한 개념을 도입했다. WTC 공모전 프로젝트의 두드러진 특징은 썬 큰 광장이다. 썬큰 광장은 파괴된 쌍둥이 빌딩의 슬러리 벽을 그대 로 노출하고 있다. 슬러리 벽은 유태인 박물관의 보이드와 유사 한 역할을 하지만, 유태인 박물관 의 보이드가 나치의 폭력과 이에 따른 희생을 마주하는 공간이라면, 이 슬러리 벽은 건축가의 마음속에서 “민주 주의의 기초”로 상징화되는데, “무슬림 공격”에 대해 서 구의 자유세계를 지키는 영웅적 저항을 의미한다. 이로 써 리베스킨트는 베를린의 나치의 유태인 대학살이 초래 한 비극을 아랍의 미국에 대한 공격과 동일시하고, 유태 인과 미국을 희생자로 동일시하며, 인류애를 승리적 애 국주의로 바꿔버린다.44) 나치의 억압에 맞선 소수자의 입장이 미국의 지배이데올로기를 옹호하는 입장으로 변 한 것이다. 이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당성을 문제시함으로써 더 나은 세상에 대 한 비전을 구성하려했던 비판이론의 중요한 전제에서 벗 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5.맺음말

    리베스킨트의 유태인 박물관은 벤야민의 파편적 역사 개념과 미로의 개념에 영향을 받아 매스 형태와 입면, 그리고 일관된 몰입을 차단하는 전시 평면에서 구현되었 다. 또한 아도르노의 비극적 사건에 대한 재현불가능함 이라는 예술의 윤리성 요구에 대해 보이드를 통한 침묵, 그리고 이를 통한 역사적 비극의 간접 체험으로 대응하 였다. 이는 해체주의 건축의 백미라 불러도 손색없는 면 모를 보여주었던 셈이다. 나치가 총체성을 강조한다면 리베스킨트의 해체적 건축은 지그재그적 형태로 어디서 든 완전한 투시도적 조망을 허용하지 않으며, 희생된 피 해자에 대한 부재의 환기를 통해, 지배적인 주류 역사에 대한 심연을 드러내었다. 이로써, 반기념비의 전형을 보 여줬다.

    하지만 나치가 물러나고 이스라엘과 미국의 동맹이 세 계를 주도하는 지금, 홀로코스트의 유일무의성의 강조는 유태인의 선민주의와 연결되며 이스라엘을 정당화하는 것을 보게 된다. 현재의 정치적 환경에서 지난날 피해자 가 새로운 가해자가 되는 현실을 볼 때 새로운 문제제기 를 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리베스킨트의 베를린 유태 인 박물관에 대한 비판적 재평가가 제기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 있다. 이것은 건축가들의 비판이론의 잘못 된 전용과 비판이론의 위기라는 현대 담론의 상황과 같 이 논해야 할 것이다. 벤야민의 역사관과 아도르노의 아 포리즘은 1945년 이후 새로운 역사적 조건에 대한 비판 적 대응이었지만, 현실의 정치적 상황 변화에 따라 과거 의 저항담론, 비판 이론은 새로운 지배담론이 되거나 이 에 흡수되어 버리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이는 비판 이론이 관습화되고 규범화되면서 이를 맹목적으로 쫓거 나 비판적 힘을 잃어버리는 현상일 수도 있고, 비판이론 의 가치가 훼손되었다기보다는 새로운 조건에 직면하였 다고 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역사가 지닌 결정적, 객관 적 가치가 의심받고 있는 현대에, 지난날 호평을 받았던 건축또한 새로운 상황아래 새로운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발터 벤야민과 아도르노의 비판이 론이 제기한 중요한 물음이자, 리베스킨트의 베를린 유 태인 박물관 계획의 전제였기 때문이다.

    Figure

    JAH-24-7_F1.gif

    Jewish Museum, first-floor plan (출처 : Peter Eisenman, Ten Canonical Buildings 1950-2000, Rizzoli, p.247)

    JAH-24-7_F2.gif

    Star Plan, Jewish Museum Berlin, © Studio Daniel Libeskind

    JAH-24-7_F3.gif

    The Book Cover of Benjamin’s One Way Street in 1928

    JAH-24-7_F4.gif

    Garden of Exile

    JAH-24-7_F5.gif

    Undergroung Roads © Bitter Bredt

    JAH-24-7_F6.gif

    Main Staircase © Bitter Bredt

    JAH-24-7_F7.gif

    Memory Void © Bitter Bredt

    JAH-24-7_F8.gif

    WTC slurry wall © Studio Libeskind

    Table

    Footnote

    Reference

    1. Daniel Libeskind (2000) The Space of Encounter , Rizzoli,
    2. Daniel Libeskind (1997) Radix-Matrix: architecture andwritings, Prestel,
    3. Daniel Libeskind (1999) Jewish Museum Berlin : Between the Lines, Prestel,
    4. Daniel Libeskind , Ha Youn-Hee (2006) Breaking Ground, trans , MaumSanchaek,
    5. Esra Akcan (2010) Apoogy and Triumph: MemoryTransference, Erasure, and a Rereading of theBerlin Jewish Museum , New German Critique, Vol.37 (2) ;
    6. Magdalena Zapedowska , Ewa Domanska Edward Wang , Franz L Fillafer (2007) “Let the Dead Bury the Living” , Daniel Libeskind’s Monumental Counter-History”, trans. Magdalena Zapedowska, History of Historiography Reconsidered, Berghahn Books,
    7. Gene Ray (2003) Mirroring Evil , Third Text, Vol.17 (2) ;
    8. James Russell (1999) Project Diary : Daniel Libeskind’s Jewish Museum in Berlin , Architectural Record, Vol.187 (1) ;
    9. Naomi Stead (2000) The Ruins of History: Allegories of Deconstruction in Daniel Libeskind’s Jewish Museum , Open Museum Journal, Vol.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