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 론
1-1.연구의 목적
안동문화권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 진 조선시대의 대표적 ㅁ자형 양반 가옥인 뜰집1)은 그 형성과 변천과정에 관한 연구2)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본 연구에서는 그 중 조선 중기 이후 영남학파에 서 퇴계의 학통을 잇는 중심적 역할을 수행한 문중인 재 령이씨(載寧李氏)의 뜰집들을 대상으로 그 변천과정을 분 석하고자 한다. 이는 문화적 소통이 가장 활발히 이루어 진 씨족들이 공유한 주거유형의 특성을 분석함으로써 그 공통적 속성을 보다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는 동일 씨족의 뜰집을 분석하는 일련의 지 속적 연구의 일환으로, 이들의 종합을 통하여 뜰집의 전 모를 밝히기 위한 과정이기도 하다.
안동권에 정착한 대표적인 씨족 중 재령이씨 문중은 갈암 이현일(葛庵李玄逸, 1627~1704)을 비롯한 7山林3) 으로 불리는 집안으로 석계, 갈암, 밀암을 통해 3대에 걸 쳐 퇴계의 학통을 이어간 영남학파의 명문가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재령이씨가 안동문화권에 입향하고 분파한 과정 및 뜰집의 건축 및 변화과정을 분석함으로 써, 재령 이씨 뜰집의 변천과정을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통하여 안동문화권 뜰집의 전반적인 변천과정 을 분석하는 한 기틀을 마련하고자 한다.
1-2.연구의 방법 및 대상
본 연구에서는 우선 재령이씨 영해파가 안동문화권에 입향하고 분파한 과정을 분석하기 위하여, 문화인류학적 접근 방법인, 우리나라 家系의 가장 대표적인 기록유산인 氏族의 族譜의 가계를 기반으로 한다. 이는 전통주거의 변천과정을 분석함에 있어서 첫 단계인 정확한 건축연대 를 밝히기 위한 것이다. 뜰집을 포함한 많은 전통주거들 은 명확한 기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족보에는 가계의 분파과정이 정확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를 바탕 으로 하여 가계의 구조를 파악함으로써 뜰집 건축과정의 전후 맥락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뜰집의 건축 연원을 확인하되 건축연대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의 기준을 족보의 분파를 통해 구축할 수 있기 때문 이다. 이를 바탕으로 재령이씨 뜰집의 시기별4) 형성과정 과 공간적 변화과정을 분석함으로써 안동문화권 뜰집의 변천과정을 파악하는 중요한 근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 다. 다만 이 과정은 대부분 후손이나 거주자의 구전에 의 한 것이며, 한 문중의 변천을 분석하는 것이므로 유형적 변천의 분석은 제외하였고, 주거유형의 입지와 환경적 배 경을 분석하는 것은 선행연구5)에서 이미 다루어졌기 때 문에, 본 연구의 범위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따라서 뜰집 의 변천을 분석하기 위한 본 연구의 진행은 재령이씨의 계보를 파악한 후, 전기․중기․후기의 시기로 나누어 뜰 집의 형성 시기별로 어떤 특성이 있는가를 분석하고 그 이후 어떤 변화과정을 거쳤는지를 분석한다.
재령이씨는 안동문화권에서 동쪽지역인 영덕과 영양을 중심으로 정착하였는데, 이들은 영덕(구 중심 지명은 영 해)로 처음 입향한 이애(李璦, 1480~1560)의 후손으로 영해파라 한다. 본 연구에서는 안동문화권의 재령이씨 영 해파 뜰집의 변천과정을 연구대상으로 한다. 이들은 영덕, 영양을 중심으로 17채의 뜰집을 건축하였는데, 6.25때 원 리의 2채가 소실되었고, 현재 15채가 남아있다. 또한 석 계고택의 경우는 二字집이지만 분석의 자료로 연구에 포 함 하였다. 이들을 본 연구의 분석 대상(Tab.1 참조)으로 한다.6) 본 연구의 도면 자료는 연구자가 작성한 선행 연 구의 자료이며, 족보의 조사 및 탐문7)은 2013년~2014년 에 이루어졌다.
2.재령이씨의 안동문화권 입향과 분파과정
2-1.재령이씨의 안동문화권 입향
재령이씨는 고려 성종 때의 공신인 이우칭(李禹稱)8)이 황해도의 재령을 식읍으로 받아 이후 황해도와 수도인 개 성일대에 거주했겠지만, 조선이 개국하자 불사이군(不事 二君)의 충신들이 두문동에 들어갈 때, 3世모은 이오(茅 隱李午)9) 또한 동참하다, 경남 함안군 산인면 모곡 리에 이주해 고려동(高麗洞)이라 했다. 그의 손자 5世중 현(仲賢)은 영해 부사를 역임하였는데, 이 때 조카인 애 (璦, 1480-1560)를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나라골에 입향 하도록 했다. 그가 영해파의 파조가 되어 안동문화권에 처음 정착했다. 재령이씨의 안동문화권으로의 입향은 이 렇게 이루어졌다.10) 본 연구에서 분석대상으로 하는 재령 이씨의 뜰집은 모두 淸溪公후손의 주거이다. 이후 그의 손자 8世함(雲嶽, 涵)은 재령이씨의 영해파를 크게 번성 시켰다.Tab.2
2-2.재령이씨의 안동문화권 분파
재령이씨 6世璦가 16C초에 삼촌인 영해부사 李仲賢 을 따라 와서 영덕군 영해면 인량리 나라골에 입향했고, 璦의 손자 8世함(涵, 1554~1632)은 진성이씨를 배위로 맞아 다섯 아들을 두어 집안이 번성했다. 涵의 3남 석계 이시명(石溪李時明, 1590~1674)11)은 퇴계의 학통을 이 은 경당 장흥효(敬堂張興孝)의 문하에 들어가 학행을 닦았고, 안동 장씨를 배위로 맞아 모두 7형제를 두었는데, 이들을 7현자(七賢者)12)라 한다.Tab.3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과 후학의 교육에만 전념했던 석계(石溪)는 중년(51세)에 영양군 일월면 원리 두들마을 로 이거13)했고, 石溪의 둘째 아들 10世존재 이휘일(存齋 李徽逸, 1619~1672)과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葛庵李 玄逸, 1627~1704)은 부친의 고향인 나라골에서 더 깊은 계곡인 영덕군 창수면 오촌리로 입향했다. 이조판서를 행 한 葛庵은 만년(1700)에 귀양에서 돌아와 안동의 임하면 금소리에 정착14)해 후학을 가르쳤다. 갈암의 셋째 아들 밀암 이재(密庵李栽, 1657-1730)도 이곳에 자리 잡았지 만, 뜰집을 건축하지는 않았는데, 금소에서의 후학들이 갈 암과 밀암을 추모하여 후에 뜰집(재실)을 건축했다. 비록 재령이씨가 건축한 뜰집은 아니지만 갈암의 강학지를 추 모하여 건축한 뜰집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할 수 있다.Tab.4
석계의 중형인 우계 이시형은 인량에서 동촌 분가하여 뜰집을 건축하였다. 그의 손자인 11世櫂(做谷, 1636-1712)이 영양 두들마을의 이웃인 주남리로 이주하 여 뜰집을 건축하였지만, 1830년대에 두들마을로 이건하 여 후손들이 이 마을에 모여 살게 되었다.
인량에 살던 17世震榮은 19C 중반에 갈암의 후손이 살던 오촌으로 들어와 뜰집을 지었고, 오촌에 살던 갈암 의 종손 20世철호는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로 이주하였 다가 이곳이 임하댐의 건설로 수몰지역에 포함되자, 다시 인량으로 뜰집을 이전했다.
따라서 안동문화권에서 재령이씨가 건축한 뜰집이 있 는 마을은 영덕의 나라골과 오촌, 영양의 두들마을로, 세 마을이다. 안동문화권에서 재령이씨가 분파한 지역은 그 렇게 넓은 지역으로 볼 수는 없으며, 많은 마을을 형성하 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씨족이 흩어져 분파하기 보다는 서로 가까이 모여 살기를 더 선호하여, 형제가 동시에 마 을 개척하거나, 인척이 있는 마을로 주거를 이건하는 등 의 공통성을 보여 고향에 대한 회귀성 혹은 근원지에 집 착한 특성을 살펴볼 수 있다.Fig .1
2-3.재령이씨의 안동문화권 통혼
인량 나라골에 입향해 충효당을 건축한 재령이씨 5世 애(璦)는 진보백씨를 배위로 맞아 정착하였고, 璦의 손자 함(涵, 1554~1632)은 진성이씨(진성이씨 9世종손 이희 안의 딸)를 배위로 맞아 다섯 아들을 두었다. 퇴계의 집 안과 영해에서 통혼을 맺은 것은 그 동안의 지역적 기반 이 두터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15) 璦의 3남 석계 이시명 (石溪李時明, 1590~1674)은 퇴계의 학통을 이은 경당 장흥효(敬堂張興孝)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이것 또한 영 해에서 멀리 안동으로 유학갈 수 있었던 것은 외가로부터 의 인연이 학문적 계승으로 이어진 것을 의미한다. 석계 는 첫 부인의 사후에 경당의 무남독녀인 정부인 장씨를 맞아들여 7현자를 낳은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경당이 있던 안동의 외가(안동시 서후면 성곡리)에서 태어나거나 교육받았다고 한다.16) 이로써 서애와 학봉을 사사한 경당 의 학문은 석계를 거쳐 갈암에게 이어지고 다시 그의 아 들 밀암 이재(密庵李栽, 1657~1730)로 이어졌다.Tab.5
따라서 재령이씨가 안동권에서 번성할 수 있었던 기반 은 사족의 지위에서 안동으로 이주하였고, 이후 안동문화 권의 저명한 문중과 통혼을 통하여 기반을 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Tab.6
3.재령이씨 뜰집의 형성과정
3-1.전기(16C)의 뜰집 형성과정
재령이씨가 뜰집을 처음 건축한 것은 정확하지 않지만, 16C초에 이애(1480-1561)가 나라골에 입향하여 충효당 (사랑 별당)을 건축하였고, 16C말에 현재의 터전으로 이 전한 것으로 전하므로, 그의 손자인 8世이함(李涵)이 하 였을 것으로 볼 수 있고, 본채(A1) 건축의 최 하한선을 이 때라 할 수 있다. 涵은 퇴계문중인 진성이씨 종손의 따님과 결혼함으로써 진성이씨의 살림채 공간인 뜰집을 영덕으로 도입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본채에 포함된 사랑채의 증축은 그 후대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이것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이렇게 지 역 중심 문화공간의 역할을 했을 충효당과 같은 큰 규모 의 사랑채와 영덕에서 가장 빠른 뜰집을 건축한 것은 지 역기반이 약한 재령이씨가 짧은 시간에 지방의 토호로 성 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반에는 지방 수령의 후손이라는 것에 통혼을 통한 인맥적 교류가 작용하였을 것이다. 지역민과의 문화교류를 위하여 사랑별당을 건축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과의 동화를 보여주는 토착화 의 최종 결정판은 뜰집을 건축하는 것이었다. 퇴계의 학 맥을 잇는 대부분의 제자들은 뜰집의 건축을 통해 공간적 유대감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Fig .3
초기에 건축한 재령이씨의 뜰집은 단 한 집이지만, 규 모면에서도 사랑 별당과 함께 종가로서의 충분한 가치를 가진다. 비록 이전하여 개축하였다 하더라도 뜰집의 속성 을 충분히 가진 주거로서 재령이씨의 주거를 대표하는 뜰 집이라 할 수 있다.
3-2.중기(17~18C)의 뜰집 형성과정
임난이 지난 조선 중기에 들어서면서 석계(石溪)의 내 자인 장씨부인의 두들마을의 개척과 그 아들들의 학문적 위업의 결과 재령 이씨의 위상은 크게 신장되었고, 영덕 을 너머서 안동의 중심 문중이 되었다. 또한 뜰집의 건축 이 급격히 늘어나 4채의 뜰집을 구축했다.
우선 석계가 영양으로 이주하면서 두들마을에 뜰집의 태동적 공간을 보여주는 二字집(C3)을 건축(1640년경)하 였고, 종가인 충효당 앞에는 석계의 중형인 우계(遇溪, 1587~1612)가 분가한 후에 그의 후손이 소규모의 원형 적 공간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뜰집(B1)을 건축(1660년 경)했다. 이어 석계의 두 아들 존재(存齋)와 갈암(葛庵)이 인량에서 가까운 오촌으로 이주하여 두 채(C1, D1)의 뜰 집을 건축(17C중반)했다. 또한 우계의 손자인 주곡(做谷) 이 두들마을 인근의 주남마을에 이주하여 전형적인 구성 의 뜰집(B2)을 건축(17C후반)했다.Fig .4-5
17C에 비하여 18C는 그간의 안정과 달리 매우 어려운 시대였다. 기근과 질병이 심하여 농가의 호수도 줄었 다.17) 당연히 뜰집의 건축도 어려웠겠지만, 18C 중반에 들어 오촌에 있는 존재의 후손들이 두 채의 뜰집을 건축 했다. 이 과정을 보여주는 유형이 냉천고택(D2)이다. 일 시에 뜰집의 건축을 할 수 없을 경우에 진행되는 시차(時 差)18)적 건축과정을 보여주는 세 채로 구성된 뜰집을 지 은 것에서 잘 나타난다. 더구나 완전한 뜰집의 구성이 이 루어지기 전에 건축의 매도(賣渡)되었고, 그 후 공간이 증축되면서 뜰집의 초기적 구상이 유지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뜰집의 형성과 변천과정의 다양 성을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Fig .6
3-3.후기(19~20C)의 뜰집 형성과정
19C에는 농법의 개량과 농지의 확대 등으로 경제적으 로 많은 호전이 있었고, 가장 많은 건축 활동이 이루어졌 는데, 재령이씨는 모두 7채의 뜰집을 건축했다.
인량리의 충효당 후손인 17世震榮은 19C초에 오촌으 로 분가하여 뜰집을 건축했는데, 오촌에는 모두 다섯 채 의 뜰집이 형성되었다.
석계고택에서 석계의 부인인 장씨부인을 모시고 살던 석계의 셋째아들인 항재의 후손들이 19C 후반에 6채의 뜰집을 지었는데, 6.25에 두 채가 훼손되었다.
영양의 주남마을 있던 주곡고택(B2)을 두들마을로 1830년대에 이전했다. 뒤에 주남마을에는 유우당(B3)이 건축되었지만, 20세기 초에 이 집도 두들마을로 이전했다. 주곡의 후손이 19C말에 두들마을에 도사고택(B4)을 지었 다. 현재 두들마을에는 주곡 후손의 뜰집이 3채, 항재 후 손의 뜰집이 4채 보존되어 있다. 이렇게 하여 두들마을은 모두 7호의 뜰집이 형성되어 재령이씨를 대표하는 집성촌 이 되었다.
20C에 들어 뜰집의 건축 활동은 급격히 줄었는데, 다 만 오촌에 있던 갈암의 주손이 1910년에 청송의 광덕마 을로 이주하여 뜰집(C2)을 새로이 건축했는데, 1992년에 임하댐 건설로 그곳이 수몰지역에 포함되자 재령이씨의 안동권 본향인 영덕의 나라골로 뜰집을 이전했다.
이러한 건축 활동으로 보이는 후기의 재령이씨 뜰집 형성의 독특한 특성으로 뜰집의 이축(移築)을 들 수 있는 데, 두들마을과 나라골로의 집합이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Fig .7
4.재령이씨 뜰집의 변화과정
4-1.전기(16C)의 뜰집 변화과정
전기의 유일한 뜰집인 영덕 충효당은 입향시인 1470년 경 건축된 사랑 별당을 마을 위쪽의 현 부지로 이전하면 서 조성된 것이라 한다. 살림채인 뜰집도 이전한 것이라 하나 건축연대를 확인할 수 없다. 입향 100여년 후에 지 역 중심역할을 했던 충효당과 살림채를 인접하여 조성할 필요성에 의해 이들을 합하여 새로운 부지에 주거를 경영 한 것이다. 강당인 충효당이 인접하자 사랑채 및 안마당 의 공간적 요구가 더 커졌을 것이고, 이를 위해 행랑을 한 칸 더 넓혀 서쪽으로 증축하였다. 그 구조적 차이는 사랑과 중문간 옆의 행랑채 결합부 목구조의 차이로 나타 난다. 이러한 뜰집의 구조적 불일치가 나타나는 부분은 많은 사례에서 그 시차19)의 흔적을 남김으로써 명확히 드러난다. 물론 재료의 시대 차이가 육안으로 관찰되기도 하지만, 정확한 시기를 추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전시 증축한 것인지, 그 후의 건축행위인지에 대한 확증은 없 다. 명확한 것은 교육의 기능을 했던 충효당을 사랑별당 으로 자리잡게 하고, 본채를 한 곳으로 모음으로써 영역 의 명확성을 구축하려했던 의도가 임난 전후의 시기에 이 루어진 것으로, 공간적 작위성이 매우 이른 시기에 드러 난 것으로 볼 수 있다.
4-2.중기(17~18C)의 뜰집 변화과정
뜰집이 아닌 주거의 건축행위로는 석계가 두들마을 입 향시에 건축한 소박한 주거를 그의 셋째 아들인 항재(恒 齋, 1631-1698)가 二字의 기와집으로 신축한 점이다. 이 는 그의 모친인 정부인 장씨를 모시기 위함이라고 한다.
중기의 건축적 변천은 그렇게 활발하지 않았다. 17C에 적극적이던 신축의 활동은 18C에는 매우 줄었고, 신축의 위축과 함께 건축적 변화 또한 거의 없었다.
4-3.후기(19~20C)의 뜰집 변화과정
조용했던 중기의 건축변화와 달리 후기에 들어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 시기의 변화는 두 가지 관점에서 이루 어지는데, 외적인 변화인 이축(移築) 및 증개축과 내적인 변화라 할 수 있는 집 주인의 변환이 이루어졌다.
뜰집의 이축은 19C 전반부터 시작되는데, 먼저 1830년 에 주남마을에 있던 주곡고택을 두들마을로 이전한 일이 다. 뒤이어 주남마을에 1833년에 지어진 유우당을 다시 20C초에 두들마을로 이전하면서 사랑채도 증축하였다. 이 로써 영양으로 이주한 재령이씨의 뜰집이 모두 두들마을 로 집합하는 판도를 이루어 뜰집이 집중적으로 형성되면 서 두들마을이 안동문화권 재령이씨의 중심 터전으로 부 상하게 되었다.
20세기의 주거 이전은 갈암종손의 청송으로의 이주를 들 수 있는데, 기존의 건축은 매각하고 1910년에 신축하 였다. 그러나 광덕마을이 임하댐의 건설로 수몰지역에 편 입됨으로써 1980년대에 영덕의 인량마을로 이전하였다. 따라서 갈암의 주손도 결국 재령이씨가 사는 마을로 이주 한 것이다. 재령이씨의 주거 이전은 이렇게 씨족끼리 모 여 사는 형국으로 정리되어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축과 함께 증축도 이루어졌는데, 19C 중순에 건축된 석간고택에는 사랑별당을 신축하였고, 19C말에 건 축된 도사고택도 20C초에 사랑채를 증축하였다. 이로써 후기에 들어 두들마을에는 세 뜰집에 사랑채가 증축됐다.
20C 후반의 개축으로 오촌의 이재곤가옥(A2)의 사례가 특이한데, 1965년에 안마당 정면의 대청마루공간을 방으 로 개조하고, 안방의 위치에 부엌을 들이는 개조를 했는 데, 현대적 생활의 변용이 반영되어 뜰집의 수명을 연장 하려는 노력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19~20C에 이루어진 재령이씨 뜰집의 변화는 공간적인 변화보다는 내적인 변화인 매매로 더 많은 움직임이 일어 났다. 이러한 변화는 우선 중기인 18C에서부터 이미 나 타났는데, 먼저 인량마을의 충효당에서 동촌 분가하면서 건축했던 우계 이시형(愚溪李時亨, 1587~1612)의 뜰집 (B1)이 후대에 타 문중으로 소유권이 넘어갔지만, 근년에 다시 우계의 주손이 매입하여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아 왔 다.20)
오촌의 존재 증손인 13世냉천 이유원(冷泉李猷遠, 1695~1773)은 뜰집을 건축했지만, 이를 그의 동생인 면 운재(眠雲齋李周遠, 1714~1796)의 후손에게 매각하고 청송의 광덕리로 이주했다. 후대에 갈암의 종손도 광덕으 로 이주하게 되었다. 갈암종손이 이주할 때 갈암구택을 면운재의 후손이 매입하였다. 18C말에 오촌으로 분가해 뜰집을 건축했던 충효당의 후손인 17世진영(震榮)의 아 들은 사촌에게 매각했다.
영양의 두들마을에서의 내적인 변화는 더 많았는데, 우 선 뜰집은 아니지만, 항재가 개축했던 석계고택도 손자대 에 이미 석계고택을 매매했다. 두들마을에는 석계의 넷째 아들인 항재 이숭일(恒齋李嵩逸)의 후손 중 17世와 18 世연간에 6채의 뜰집이 건축되었지만, 영감댁을 제외하 고 모두 주인이 바뀌었고, 6.25에 두 집이나 소실되었다. 이러한 저변에는 오촌의 경우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21) 을 하기 위하여 집을 비우는 등 관리에 소홀한 경우도 있었고, 원리에는 월북한 뜰집의 주인도 2집이나 있었던 이유 등으로 많은 혼란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 다.(Tab.6 참조) 근래의 특이한 공통점은 오촌의 우계종 손과 같이 석계의 종손이 근년에 뜰집을 매입한 점이다. 동일한 뜰집은 아니더라도 종손의 가치를 뜰집의 보유와 동일시하는 문화라 할 수 있다.
재령이씨 뜰집의 매매는 모두 7집에서 이루어졌다. 구 전에 의하면 한 주거의 거래가 여러 번 있었던 경우도 있기 때문에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거래는 한 집을 제외하고는 모두 동족 간에 이루 어진 것으로, 최소한 타 씨족에게 조상의 주거를 넘기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는 의지로 파악될 수 있다.
4.결론
본 연구는 안동문화권 재령이씨의 뜰집을 대상으로 그 변천을 조선 초기~현대까지의 기간을 크게 삼분하여 전 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 분석한 결과 다음과 같은 특성 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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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인 16C에는 안동문화권의 외연부인 영해의 인 량 나라골로 입향함으로써 소박한 씨족의 정착이 이루어 졌지만, 뜰집의 건축과 지방 중심 사족과의 통혼을 통하 여 재지사족의 기반을 닦은 시기라 할 수 있다. 짧은 기 간에 빠른 정착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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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기인 17~18C에는 퇴계학을 계승하는 학문적 성 취와 중앙 정계로의 진입을 통해 확고한 지역기반을 잡은 시기로 인근의 오촌마을과 영양의 두들마을을 개척함으로 써, 씨족의 세력을 점차 넓혀 나갔다. 뜰집은 모두 여섯 채가 건축되었다.
그 중 석계와 갈암을 중심으로 한 17C에는 활발하였던 건축활동이 영남학파의 쇄퇴와 환경적 궁핍이 심했던 18C에 건축활동이 급격히 떨어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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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의 초반인 19C에는 18C에 있었던 부진을 극복 해 적극적인 건축활동을 통하여 많은 뜰집이 조성되었으 며, 특히 주거의 이전을 통하여 분산된 씨족을 모아 집합 적 씨족의 결집력을 다지려는 노력이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아 건축주가 많이 바뀌는 불안 정도 보여주고 있다. 조선 말기의 시대적 혼돈과 20C 전 반의 국가적 위기를 재령이씨의 뜰집도 같이 격고 있었다 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 씨 족에게 조상이 건축한 뜰집을 양도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잘 드러남을 볼 수 있다. 또한 20C 후반에 들어 문중을 보종하기 위한 움직임과 전통적 가치를 보존하기 위한 노 력으로 뜰집을 큰 훼손 없이 잘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재령이씨는 안동문화권에 정착한 중규모의 문 중임에도 불구하고, 퇴계의 학통을 잇고 많은 인재를 낳 아 지역에서 안정된 기반을 구축함으로써 씨족의 재지기 반을 돈독하게 형성하였다. 그 기반으로 뜰집을 중심으로 한 건축적 위상을 견고히 확보하고 유지해온 안동문화권 의 대표적 가문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