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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 1598-1142(Print)
ISSN : 2383-9066(Online)
Journal of architectural history Vol.24 No.2 pp.35-44
DOI : https://doi.org/10.7738/JAH.2015.24.2.035

A Study on the Korean-Chinese Residential Spaces of Wu-lin Village in Jiao-he, China

Yun-Sang Jung*, Jin-Hua Lin
Corresponding author: hakgul@anu.ac.kr
February 15, 2015 April 9, 2015 April 30, 2015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its residential spaces through the analysis of exterior space and interior space at Wu-lin Village(烏林屯) in Jiao-he, China.

The method of this study is to search for documentation, interview, residents, make a survey of these villages about immigration history, surroundings, topographical keynotes, administration system, residential number, residential style, site composition, etc.

The residents moved from Yen-bien and Jiao-he in China etc. The ancestor moved from North of Gyeong-Sang Province in South of Korea, North of Ham-Gyeong Province in North of Korea etc. The main road divides the village into two parts: the north quarter, Wu-lin Village, typified by the Chinese house, and the south quarter, You-Yi Village(友誼村), typified by the Korean-Chinese house. The houses is compose of main building and an accessory building. The main building looking south. The vegetable garden is around main buildings.

The main building is compose of an On-dol room(a hot-floored room) and a kitchen, a corridor etc.


중국 오림향 조선족 주거공간에 대한 연구

정 연상*, 임 금화
국립안동대학교 건축공학과 부교수
중국 연변대학교 공학원 건축계

초록


    Ministry of Education
    NRF-2011-32A-A00008

    1.서 론

    1-1.연구의 배경 및 목적

    20세기 많은 지식인들은 근대기 아시아의 변화와 국제 정세 변화의 중심지로 중국 북부 만주를 언급했다.1) 그 리고 그들은 근대 이후 ‘동북아 질서변화의 핵’이었던 만 주(滿洲)를 흔히 아시아의 화약고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청조 말엽 이후 하얼빈(哈爾濱)을 중심으로 하는 북만주, 심양(瀋陽)을 중심으로 하는 남만주는 각기 러시아와 일 본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했던 지역이다. 그 중간에 위 치한 길림성의 옛 성도(省都)였던 길림(吉林)과 현 성도 인 장춘(長春)을 아우르는 길장지구(吉長地區)는 러·일 양대 세력의 접점이자 완충지대로서 남·북만주와 다른 발전과정을 겪어왔다. 길장지구는 한(漢)·몽(蒙)·만(滿)· 한(韓)·일(日) 등 여러 민족이 뒤엉켜 생활하면서 문화변 용(文化變容)이 강력하게 나타난 곳이다.

    길장지구는 간도(間島)와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본 연구자는 길장지구를 주목하게 되어 본 연구 를 진행했다. 길장지구는 한인(韓人)들의 이주와 정착과 정을 엿 볼 수 있으면서, 한인들의 최초 집단 거주지인 연변(延邊) 일대에서 남·북만주로 진출하는 길목으로 만 주 내지로 이주한 한인의 사회문화와 주생활문화의 변용 을 고찰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본 연구자는 이런 관점에서 조선족의 주생활문화와 그 들의 삶과 가치관 및 조형의식이 녹아 있는 중국 길장지 구 조선족의 주거공간을 살펴보았다. 우선 본 연구는 중 국 농촌지역의 현대화 바람으로 사라지고 있는 조선족 주거공간 기록화에 목적을 두고 조사연구를 시작했으며,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중국 길장지구의 농촌지역 조선족 의 주거공간 및 실 구성방식의 특징을 밝히고 자 했다.Tab 1.

    1-2.연구의 대상 및 방법

    본 연구는 중국 길림성 교하시 오림조선족향 우의촌을 중심으로 인근지역 조선족 가옥 중 현재 조선족들이 살 고 있는 마을과 가옥을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 조선족의 주거공간을 살펴보기 위해 본 연구자는 마을의 입지 및 구조를 살펴보고, 조선족 가옥의 배치, 평면과 실 구성 방식을 살펴보았다.

    마을의 입지 및 구조는 먼저 마을의 주변 인문 자연환 경을 살펴보고, 마을 내 가로 구성방식과 공공시설 위치 를 살펴보았다. 가옥들의 배치는 가옥의 향과 채들의 구 성방식, 외부공간을 고찰했다. 가옥 평면 및 실 구성은 거주공간인 방과 부엌으로 구성된 본채의 유형과 실 구 성 방식의 특징을 서술했다.

    본 연구자는 중국 현지 연구자와 공동 조사를 통해 연 구에 필요한 기초 자료를 수집 공유하여 연구를 진행했 으며, 또한 건축분야 이외 역사분야의 연구자들의 도움 을 받아 인문적 배경을 정리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본 연구자는 현지 마을과 가옥을 방문하여 거주자와 면 담을 통해 자료를 보완했으며, 또한 마을과 가옥의 배치 및 평면도를 작도하여 본 연구의 기초 자료로 삼았다.2)

    본 연구의 주요 대상지 교하시 오림조선족향 우의촌에 는 초기 정착할 때 조영한 가옥들이 현재 거의 없으며 대부분 70년대를 지나면서 조성한 가옥들이 있다. 현재 이들 가옥 또한 현재 거주자의 이농과 고령화로 급속도 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1-3.길장지구에 대한 이해

    길장지구는 만주족(滿洲族)ㆍ몽고족(蒙古族)ㆍ조선족 을 비롯한 다양한 북방민족과 한족(漢族) 문화의 접점으 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지역이다. 길장지구는 중 국뿐만 아니라 몽고 등 북아시아, 한국, 일본 그리고 꾸 준히 남진정책을 추구해온 러시아 세력의 교차점이다. 청조와 중화민국 및 만주국시기 통치방침의 변화는 길장 지구의 변화와 발전, 사회적 구조에 영향을 끼쳤다.3) 길 장지구는 만주족의 발흥지인 동북지역의 중심지로 후금 (後金(淸朝))의 전략적 요충지로서 군사기지로서, 구한말 과 일제강점기 억압을 피해 온 한인(韓人)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따라서 길장지구는 기존의 전통 문화 와 현지 사회와의 융합과정에서 나타난 문화변용이 진행 중인 곳이다.

    제정러시아의 동진, 중일갑오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일 본의 승리와 같은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된 일련의 상황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을 가져온 중요한 사건 들이었다. 러시아와 일본의 침략에 의한 정세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청조가 펼친 봉금정책의 해제와 이민의 증가, 개발의 촉진, 성제(省制)의 단행은 길장지구의 변 화와 발전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길장지구는 구한말과 일제시기 한인(韓人)의 해외 이 주사 연구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지역이다. 만주국 성 립 이후 공업화 정책 속에서 농업 위주의 생활을 영위하 였던 길장지구 한인의 경제활동과 거주지의 특징, 여타 민족과의 관계, 길장지구 한인단체의 성격을 살펴보면, 길장지구는 간도(間島)와 다른 이주 과정을 엿 볼 수 있 다. 구한말 이후 간도지역을 주된 활동무대로 삼았던 이 주 한인들은 본격적으로 20세기 초엽부터 길장지구로 진 출했다. 길장지구로 이주한 한인들은 이주 시기와 이주 노선에 따라 서로 다른 형태의 마을을 형성하면서 현재 까지 살아 왔다. 현지 중국인과 지방정부의 견제와 압박 속에서도 한인들은 전통 문화를 지키면서 현지 사회와의 융합과 조화를 이루었다.

    한인들의 후손인 조선족의 주거에 대한 연구는 1992년 한⋅중 수교 후 한국학자들과 중국학자들에 의하여 활발 히 진행되었으나, 일부 지역에 국한된 연구가 주류를 이 루었다. 그러나 현재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중국에서 이들 마을과 가옥들은 하나 둘씩 사라지거나 기타 민족 들로 융합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 럼 길장지구 조선족 주거공간 연구는 지속적으로 진행하 여 연구 결과가 축적될 때 조선족 주거 공간과 주생활 문화, 이주사를 정리할 수 있으므로 가치가 있다.

    2.길림지구 조선족에 대한 고찰

    2-1.길림지구 조선족의 활동

    조선족들이 길림지구로 이주해온 가장 빠른 시기는 청 조 건륭 12년으로 영길현에 조선인이 2,713명이 이주했 다.4) 청조정부는 길림에 청을 설치하였다가 후에 부로 승격시켰고, 1913년 민국정부는 길림현을 설치하였다가 1929년 영길현으로 개명하였다. 1936년부터 위만주정부 는 이곳에 길림시를 설립하였다.5) 조선족들이 본격적으 로 길림지구에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길림에 황무국이 설립되어 개간민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후였으며, 1910 년 이후 최고점에 이르렀다. 특히 벼 재배 농사의 가능 성이 확인 된 이후 많은 이주민들은 길림지구로 이주하 게 되었다.

    1945년 해방이후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그 곳에 정착한 한인들은 귀국하지 않았다. 중국 인민공화국이 설립된 이후 1953년 전국 제 1차 인구조사에 의하면 길림시의 조선족 인구수는 8,188명이었고, 근교의 인구수는 1,536 명, 영길현 2,048명, 반석현은 1,120명, 화전현은 815명, 교하현은 978명, 서란현은 1,549명으로서 전 길림지구에 총 16,234명이었다.

    이주 한인들의 중요 활동 중 하나는 교육관 련 시설 및 환경 조성 이었다. 길림시에 제일 먼저 세워진 조선족 학 교는 ‘계명학교’로서 1921년 건립되었으며6), 이 학교는 길림 주재 일본영사관의 압박으로 1925년 11월에 문을 닫 았고, 1928년 조선족들 은 다시 ‘구신학교’를 건립했으나 얼마 못가 문을 닫았다. 일본이 동북지역을 강점한 후 일본인들은 조선족들의 문 화교육을 통제하였으며, 이후 1932년 조선인거류민회에 서 건립한 ‘동영학교’를 압박하여 길림지구 조선족 문화 교육을 통제했다.Fig .1

    길림지구 조선족의 경제활동은 주로 벼농사인데, 1800 년대 말 김씨 성을 가진 조선 이주민이 정착하면서 벼농 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영길현지(永吉縣誌)>에 의하 면, 1903년에 한인들은 농경지를 개척하였다고 한다. 동 북지역의 벼농사가 빠른 속도로 발전한 것은 벼에 대한 한족 농민의 높은 관심과 한인 농민들의 논농사를 적극 지지했기 때문이다. 1916년 이후 벼농사에 대한 밝은 전 망의 확산으로 한인 농민들은 길림부근으로 이주하여 대 대적으로 논농사를 지었다. 1980년대 말 조선족 이주민 들이 개발한 수전면적은 167만 여 묘(畝)에 달하고, 벼는 길림지구의 주요한 농작물이 되었다. 그러나 현재 많은 조선족들이 해외 및 대도시로 이주하여 근대 한인 이주 민들이 애써 가꾼 수전은 한족들이 임대하여 옥수수와 콩 등의 한전으로 바뀌고 있다.

    2-2.오림조선족향 마을의 지리적 환경

    본 연구의 주요 대상지인 우의촌은 중국 길림성 교하 시 오림조선족향에 위치하고 있다7). 교하시는 길림성 성 도 장춘의 동측에 있으며, 교하시 동측은 연변조선족 자 치주를 면하고 있다. 교하시는 7개소 진과 11개소 향으 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 오림조선족향이 조선족향이다. 오림조선족향에는 조선족 마을 팔가자둔, 태평둔, 우의촌, 소신립둔이 있다. 오림조선족향은 교하시 중부지역 동쪽 에 위치하고 있다.8) 오림조선족향의 서쪽은 평지이고, 중 부는 구릉지역이고, 동쪽은 산지다.Fig .2

    오림조선족향을 흐르는 하천은 가야하(嘎呀河)와 오림 구하(烏林溝河)가 있다. 가야하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 르며 토문자(土門子)를 거쳐 한구촌(厂溝村)에서 서쪽으 로 꺾여 오림, 팔가자(八家子)를 거쳐 교하진에 흘러 들 어간 후 납법하(拉法河)와 합류한다. 오림구하는 동쪽으 로부터 서쪽으로 흐르며 류가점(刘家店), 나권위자(羅圈 崴子), 오림구, 한구(厂溝)등 마을을 거쳐 가야하와 합류 한다. 오림조선족향의 연혁은 아래와 같다.9)

    • 1909년 청조선통원년(淸朝宣統元年)부터 1932년까지 액목현이구(額穆縣二區)에 속함.

    • 1933~1937년 일본 강점시기에는 액목현 오림보(烏 林保)에 속함.

    • 1938년 액목현 오림보를 액목현 오림촌으로 개명함. • 1939년부터 1945년까지 교하현 오림촌에 속함.

    • 1946년 오림구를 설된 후 1953년까지 속함.

    • 1954년 오림구를 취소하고 오림과 오림구(烏林溝) 두 개 촌으로 나눔.

    • 1956년 촌 정부는 향인민위원회(鄕人民委員會)로 개 칭, 1958년까지 오림향에 속함.

    • 1958년 8월 두 개의 작은 향을 합병하여 오림조선족 향을 만들고, 그 해 10월 교하인민공사(蛟河人民公社) 시기에 오림 관리구(管理區)로 칭함.

    • 1959년 7월 교하인민공사를 취소하고 오림인민공사 를 설립함.

    • 1983년 정사(政社)를 분리하여 오림향으로 칭함. • 1984년 4월 오림조선족향으로 회복됨.

    오림10)의 옛 명칭은 니주구자(泥珠沟子)인데 언제 오 림으로 바뀌었는지 확실치 않다. “오림(烏林)”은 만주족 어로 “재물(財)이란 뜻이다. 마을은 청조 옹정 30년(淸朝 雍正-1735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으며 청조 가경 원년(淸朝嘉庆元年-1796년)에 둔(屯)을 형성하였다. 마 을 사람들은 1936년 집단부락을 조성할 때 대묘둔(大庙 屯)에서 현재의 오림둔으로 이사하였다. 1982년 인구조 사에 의하면 가구 수가 563호, 인구수가 2,940명, 그 중 조선족이 1,829명, 만족4명, 나머지는 한족이었다고 한다.

    3.오림향 마을의 공간 구성

    3-1.마을의 공간 구조

    오림조선족향의 오림촌과 우의촌은 동⋅서로 난 주도 로가 경계이며, 이 도로를 중심으로 북쪽에 오림촌이 있 으며 현재 한족들이 대부분 거주하고 있다. 남쪽은 우의 촌으로 주로 조선족들이 살고 있다. 우의촌은 오림조선 족향의 서쪽, 가야하 하류 좌안(左岸)에 위치하고 있다. 우의촌의 마을 명칭은 민족단결이 잘 되어 있는 우호 마 을이란 뜻으로 ‘우의촌(友誼村)’이라 하였다. 오림은 마을 에 백양나무가 많고 까마귀가 많이 날아와 오림이라 지 었다고 한다.

    마을은 한족들이 먼저 터를 잡고 살았다. 조선족들은 인근 산골에서 살다가 1940년 전후로 몇 가구가 4∼5곳 에 농막을 짓고 살았고, 이후 조선족들이 모이기 시작하 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집단마을로 마을 주위에 담이 있 었고, 동쪽, 북쪽, 서쪽에 포대(砲臺)가 있었다. 1952년도 이 마을의 일부 한족들은 땅굴에서 살았다고 한다.11)

    1953년 공사(公社)가 형성되는 시기에 조선족 대대(大 隊)가 따로 나오면서 북쪽 한족마을은 오림둔(烏林屯)이 라 하고, 남쪽 조선족 마을은 우의촌(友誼村)이라 하였다 고 한다.Fig .3

    우의촌은 1959년 오림 관리구에 속했고, 1962년 우의 대대(友誼大隊)로 분리 되었다. 다시 마을은 1983년 말 에 대대를 촌으로 개명하였으며 오림촌의 일부 주거와 한 개의 자연 마을을 관리하였다. 1982년 조사에 의하면 마을 가구 수는 399호, 인구수는 1,979명, 한족 10명이고 그 이 외에 모두 조선족이었다.12)Fig .4

    마을의 터는 평지이며 주변에 가야하가 마을 북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마을의 가로 구조는 동서 난 주도로에서 남북방향으로 난 가옥의 진입로와 안길로 구성되어 있다. 오림향의 현재 가로 구조는 일제 강점기 집단마을을 조성하면서 구획된 격자형 도로망 체계의 결 과이며, 현재도 마을은 이 도로 구조를 바탕으로 확장하 고 있다. 동⋅서 방향으로 난 주도로 양쪽에는 마을의 공공시설과 상가들이 자리하고 있으며13). 이 외에 많은 상가들과 식당들이 있었다. 동서 도로와 직각으로 난 남 ⋅북의 마을 안길 주변에는 상업시설이 거의 없으며, 이 안길의 남측에는 교하시삼림분국(蛟河市森林分局), 학교, 구락부(具樂部) 등 공공시설이 있다. 과거 학교와 구락부 의 공간은 마을의 중심 공간이었다. 마을 내 학교는 학 생들이 없는 이유로 현재 폐교되어 개인의 가구공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마을 남쪽 끝에 자리 잡고 있는 구락부 역시 개인 소유로 현재 사용하지 않고 있다.Fig .5

    현재 거주하는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광복 전 마을 은 학교 옆에 오래 된 느티나무로부터 서쪽구역까지가 초기 범위였으며, 광복 이후 마을은 동쪽으로 확장하여 현재의 마을 규모를 갖추었다. 현재 우의촌의 중심 영역 은 오림향 노인문화회관과 그 주변이며, 이 공간은 농촌 사회의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 문화회관은 2010년에 향정부의 도움으로 준공 된 것으로 여름에는 춤, 노래와 같은 주민들의 다양한 문화 활동을 행하는 장소로 사용 되고 있다. 문화회관의 주 건물은 오림조선족향의 성격 과 조선족 민족문화의 특성을 살려 벽체를 흰색으로 마 감하고 지붕에 합각지붕을 올렸다. 옆의 부속 건물은 흙 과 짚을 꽈 엮어서 흙집형태로 축조하고 옛 창살무늬 창 문을 달아 초기 가옥의 특성을 그대로 살렸다. 현재 이 마을은 사회주의 새 농촌 건설 성급시범촌(省級示范村) 으로 지정되어 있다.

    3-2.마을 주민의 이주 경로 분석

    본 연구자는 우의촌 주민들의 면담을 통해 우의촌 구 성원들의 이주 경로와 경위를 고찰했다. 본 조사연구에 응한 우의촌 조선족의 이주 일세대의14) 고향은 경상북도 (6명), 함경북도(5명), 강원도(2명), 경상남도(1명), 충청 남도(1명) 순으로 경상북도와 함경북도가 제일 많은 것 으로 나타났고 경상남도와 충청남도가 제일 적게 조사되 었다. 16명 중 자기 태생에 대하여 잘 모르는 분 1명을 제외한 15명중 한국에서 태어나 어릴 때 중국으로 이주 한 사람이 3명, 중국에서 태어난 사람이 12명으로 그 중 고향이 연변인 사람이 6명, 중국의 기타지역인 사람이 6 명이다.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고향은 경상북도 1명, 충청남도 1명, 강원도 1명 등이다. 중국에서 태어난 사람 들 중 연변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고향은 돈화(敦化-1명), 용정(龍井-1명), 연길(延吉-1명), 화룡(和龍-1명), 훈춘 (琿春-1명) 등이다. 중국 기타지역에서 태어난 사람의 고향은 길림지구의 교하(3명), 오림(1명), 서란(舒蘭-1명) 과 흑룡강성(黑龍江省) 오상(五常-1명)으로 다양하다. 이들이 이주하게 된 이유는 형제를 따라 온 경우, 결혼 으로 온 경우, 더 좋은 환경을 위해 이사 온 경우, 자식 따라 온 경우 등으로 각자 이유가 다양했다.

    현재 우의촌의 젊은이들은 모두 한국, 북경, 천진, 상 해 등 외국 혹은 대도시로 이주한 상태로 마을에 아이들 이 적어 오림향 학교는 현재 폐교하여 공장으로 사용하 고 있다. 남아 있는 몇몇 학생들은 교하시에 있는 학교 를 다니고 있다. 현재 마을의 젊은 조선족들은 외국 혹 은 외지에 나가 있으므로 많은 조선족들의 토지15)는 한 족들이 일구고 있다.

    4.거주공간에 대한 고찰

    4-1.가옥의 배치 및 외부 공간

    본 연구에서 가옥의 배치 및 외부공간에 관한 고찰은 먼저 대지 내에 있는 개별 채의 유무와 그 채들의 배치 를 살펴본 후 주요 건물의 향과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 공간을 살펴보았다. 대부분 가옥들은 전후로 긴 장 방형 터 위에 ‘一’자형 본채를 중심으로 부속채가 딸린 배치를 하고 있다. 본채는 집주인과 가족들이 주로 거주 하는 방과 부엌 등으로 짜여 있다. 부속채는 창고, 화장 실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들 본채와 부속채 주변에는 넓은 텃밭이다.

    거주 공간인 본채는 대부분 대지 안쪽에 위치하여 남 향을 하고 있으며, 부속채는 향과 관계없이 대문 주변이 나 본채와 대문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본채의 향을 남 향으로 잡은 것은 겨울철 태양광을 최대한 많이 받아드 리기 위한 것으로 대부분 전면에 창문을 달고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텃밭은 본채 전면 또는 후면에 꾸며 놓았다. 텃밭은 여름철 다양한 채소 등 먹을거리를 거주자에게 제공한다. 본채 정면 텃밭은 가옥으로 출입하면서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면서 관리가 용이하며, 또한 수확 이후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 배면의 텃밭에는 외부 화장실을 꾸며 사용하고 있다.Fig .6

    외부와 경계가 되는 담장은 대부분 적벽돌로 둘렀으며 이 외에 나뭇가지 울타리를 둘렀다. 출입은 담장에 난 대문을 이용 하는데, 마을의 동서 대로보다 대로에서 가 옥쪽으로 난 마을 안길을 이용하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 출입문은 마을 안길에서 대지의 측면과 정면에서 진입을 하도록 배치되어 있다.

    4-2.본채의 실 구성

    본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가옥들은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대부분 본채를 중심으로 부속채와 비교적 넓은 텃 밭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 연구자는 주거공간 구성방식 을 살펴보기 위해 본채를 구성하는 실과 실 배열에 대하 여 고찰했다. 오림향 가옥의 본채는 대부분 1970년 이후 지은 것들로 조적조 벽체 구조 위에 붉은 기와를 올린 맞배지붕, 팔작지붕, 우진각지붕을 하고 있다. 본채의 내 부 공간은 기본적으로 방과 정지간(부엌), 복도, 창고 등 으로 구성되어 있다.

    1970년대 이전 초기 정착 당시 조성한 오림지역 조선 족 가옥은 대부분 흙집 혹은 흙벽돌집이었는데, 1970년 대 말부터 즉 중국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이 끝난 후 점차 벽돌집으로 바뀌었다. 대부분 가옥들은 1980년대 들어서 조적조 벽돌집으로 교체 되었다.16) 조선족들의 흙집은 원래 나무와 짚으로 벽체구조를 만든 후 흙으로 미장하여 마감했는데, 한족들의 흙벽돌 제조 및 시공방 법을 수용하여 점진적으로 흙벽돌(土坯)집으로 바뀌었다.

    현재 대부분의 가옥은 벽돌집으로 방과 정지, 복도로 구성되었는데, 최소 단위로 구성된 기본형,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일반형, 일반형의 규모를 확장한 확장형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현지조사와 문헌조사 한 가옥은 21가옥이며, 이 중 기본형은 2가옥, 일반형은 17 가옥, 확장형은 2가옥이다.

    ①기본형

    본채는 ‘一’자형으로 방과 부엌을 기본으로 실을 구성 하고 확장한다. 남강자촌 임길동 가옥은 1980년대 조적 조로 지은 가옥으로 방과 정지간(부엌)만으로 구성된 최 소 단위의 실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방과 정지간은 좌 우보다 앞뒤로 긴 직사각형의 실 평면을 하고 있다. 방 과 정지간 사이는 벽체를 쌓아 공간을 구획을 하였다.Fig .7

    임길동 가옥의 평면은 연변지역 한족 가옥에서 볼 수 있는 분간형이다. 현재 소실되어 그 모습을 알 수 없는 우의촌 남태군 가옥의 본채(1940년대 건축)를 보면, 임길 동 가옥 본채와 같은 공 간 구성방식으로 짜였다. 남태군 가옥은 한족 가 옥처럼 구들방에 띠방을 꾸몄지만, 띠방에 한족과 달리 캉발을 설치하여 신발을 벗고 거실로 사 용했다.17) 신을 벗고 생 활하는 주생활방식은 조 선족 주생활문화로 한족 의 주생활문화 전혀 다 른 모습이다.

    외부에서 내부로의 출입은 정지간 정면에 있는 출입문 만을 이용한다. 방과 정지 사이 벽체에는 창과 출입문을 달아 놓았다. 벽체 중앙에는 자그마한 창문을 달아 두 공간의 통로 역할을 하도록 하여 음식이나 간단한 물건 을 실내로 드리는 통로로 사용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벽체 구조가 없이 열려 있는 정지간의 연변지역 조선족 의 통간형 민가 평면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18)

    임길동 가옥의 온돌방은 바닥 전체에 구들을 꾸미지 않고 전면 일부에 신을 신고 들어 갈 수 있도록 띠실(띠 방, 바당)을 꾸몄다. 이와 같은 모습은 한족들의 주거공 간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온돌방을 넓게 꾸민 점은 조 선족가옥의 실 구성 방식을 따랐다고 할 수 있다. 따라 서 임길동 가옥은 규모가 작은 최소 단위의 주거공간이 지만 두 민족의 주거 공간 구성 방식의 변화와 상호 융 합된 결과다.Fig .8

    ②일반형

    일반형 본채는 기본형과 같이 ‘一’자형인데, 중앙의 정 지 또는 복도를 중심으로 좌우측면에 방을 배치하는 구 성방식을 하고 있다. 중앙 복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 방을 구성하고 복도 안쪽 온돌방 뒷면에 정지(부엌)와 창고를 꾸민 가옥은 조사한 21가옥 중 13가옥으로 가장 많으며, 정지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꾸민 예는 4 가옥이다.Fig .9-10

    정만식 가옥은 1996년 조적조로 지은 ‘一’자형 가옥이 다. 이 가옥은 기본형의 정지간 측면에 방을 덧붙인 형 태로 중앙의 정지간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배열하 고 서측 끝에 별도의 창고를 배치했다. 좌측 방 뒤편에 는 창고를 꾸며 다용도 저장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좌 우 온돌방은 남측에 창문을 달아 빛을 최대한 많이 받도 록 했다. 이 가옥은 정지간 정면의 출입문을 들어서면 정지 내부가 한 눈에 들오는 구조다. 이런 공간 구성은 외기와 직면하고 있으므로 난방의 효율성이 떨어지기 때 문에 일부 가옥은 별도로 출입문 안쪽에 복도 또는 현관 을 만들어 외기를 직면하지 않도록 했다. 따라서 전면에 복도를 꾸밀 경우 가옥의 정지는 규모가 작아지지만 외 부의 시선과 외기를 차단할 수 있고 동시에 부엌의 독립 성이 확보된다.Fig .11

    복도 중심의 구성방식으로 실 배치한 가옥은 복도 좌 우에 온돌방을 꾸미고, 좌우 방으로의 출입은 복도에 면 한 미닫이문을 통해 출입한다. 복도 중심의 가옥은 기단 위에 복도 바닥과 부엌바닥을 같은 높이로 바닥을 마감 하고, 한족의 띠실처럼 사람이 걸 터 앉을 수 있을 정도 의 높이로 온돌방 바닥을 복도 바닥보다 높게 꾸민다. 그리고 온돌방은 조선족 가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면 온돌구조를 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한족들의 전형적인 캉 구조와 다른 모습이다. 이와 같은 실 구성방식은 조 선족 온돌방의 좌식생활 방식과 한족 띠실의 입식생활 방식이 결합된 형태다.Fig .12

    박시욱 가옥은 1971 년에 조성된 가옥으로 통로 기능을 하는 중 앙의 복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꾸미 고 북측 뒤 열에 정지 간을 꾸였다. 이 가옥 은 뒤 열의 정지 구성 으로 겹집형태의 평면 구성하게 된다. 통로 기능을 하는 복도는 한족들의 분리형 주거 공간의 캉에 딸린 띠실(띠 방, 바당)과 같 은 기능과 형 태를 취하고 있다. 다만 캉 앞의 띠실은 하나 실에 딸 린 띠실이지만 박시욱 가옥의 복도는 두 방에 딸린 띠방으로 미닫이문을 달아 공간을 분리하여 공간의 이용 효율성을 높인다. 온돌방은 조선 족의 좌식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로 꾸몄다. 따 라서 이와 같은 실 구성방식은 정지의 독립성을 확보하 고 내부 벽을 공유할 수 있어 겨울철 난방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또한 복도 전면과 배면에는 문을 이중으 로 달아 겨울철 외기의 출입을 막도록 했다. 이 외에도 정면 출입문 안쪽에 두꺼운 천을 걸어 외기가 들어오는 것을 막도록 했다.Fig .13

    복도를 중심으 로 좌우에 온돌방 을 구성한 가옥은 뒤 열에 정지를 꾸밀 경우 전후 폭을 넓히는데 한 계가 있으므로 좌 우 폭을 최대한 사용한다.19) 따라 서 대부분 가옥은 정지를 꾸밀 때 좌우측 온돌방 배면에 일자로 길게 꾸미거나 한쪽 온돌방을 작게 하여 한쪽으 로 정지를 몰아 공간을 좀 더 넓히고자 한다. 이때 가옥 은 큰방과 작은 방이 필연적으로 생기는데, 큰방은 안방 으로 부부가 사용하고 작은방은 자녀들이 사용한다.

    일반형 본채의 실 공간 구성방식은 중앙에 통로와 부 엌을 꾸미고 좌우에 온돌방을 꾸미는데, 대부분 남측 전 면에 온돌방을 꾸미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본채는 향을 남향으로 배치하고 온돌방의 남측 면에 창문 내어 겨울 철 햇빛을 최대한 받아드리도록 했다. 실내 가구는 대부 분 창과 문이 없는 측벽에 놓아 외기의 찬 기운을 막도 록 했다. 그리고 온돌방은 정지의 아궁이 솥이 걸린 쪽 으로 창문을 달아 정지와 안방이 통하도록 하여 음식과 그릇 등의 통로로 사용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조선족의 개방적 공간 이용 방식과 한족들의 독립적 공간 이용 방 식이 결합된 결과다.

    좌우 온돌방 사이의 복도는 대부분 좌우 온돌방을 따 라 앞뒤로 긴 직사각형을 하고 있다. 거주자는 좌우 온 돌방의 방문을 열고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으로 한족 가옥의 띠방에서 볼 수 있는 입식생활이 가능하도 록 했다. 그리나 이들 가옥은 현관 앞에 신을 벗고 생활 하므로 내부의 청결을 유지할 수 있는데, 이런 모습은 조선족의 주생활문화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1970년 이 후 지어지는 가옥들은 한족의 주생활 방식과 조선족의 주생활 방식이 융합된 결과라 할 수 있다.Fig .14

    ③확장형

    확장형은 일반형을 기본으로 하여 좌우측에 온돌방과 부엌, 창고 등과 같은 저장공간을 꾸며 확장한다. 이위연 가옥은 중앙 복도 중심의 구성방식으로 실을 배열한 후, 창고 기타 부속공간을 꾸몄다. 평면은 겹집구조로 중앙 의 복도 좌우에 방이 있고, 복도 배면에 정지가 있고, 온 돌방 측면으로 창고가 있다. 중앙 복도 서측에는 자그마 한 세면실이 있는데 겨울에는 이용하지 않고 여름에만 이용한다.Fig .15

    동측 방은 전면 온돌방이고, 서측의 방은 전면에 띠방 과 후면에 캉을 꾸몄다. 서측 띠방은 한족과 달리 조선 족들의 습관처럼 신을 벗고 생활하도록 바닥을 꾸며 놓 았다. 즉, 이 가옥은 띠방이 있는 한족의 실 구성방식과 전면 온돌 구조의 조선족 실 구성방식이 결합된 형식이 지만, 조선족의 주생활방식을 따라 공간 이용을 할 수 있도록 꾸몄다.Fig .16

    5.맺음말

    본 연구는 농촌지역 현대화 바람으로 급속히 살아지고 있는 중국 길장지구의 오림향 및 인근지역 조선족의 주 거공간을 조사 연구하였다. 특히 본 연구를 통해 본 연 구자는 많은 조선족들의 도시로의 이농과 한국으로의 출 국, 한족의 유입 등으로 기존 조선족 주거공간의 변화가 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본 연구는 중국 길림성 교하시 오림조선족향 우의촌을 중심으로 조 선족 주거공간의 특성을 살펴보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길림지구의 조선족 이주는 1903년 한인들이 농 경지를 개척하면서 본격화되었으며, 특히 1916년 벼농사 에 대한 좋은 전망이 널리 인식되면서 조선족들은 길림 지역으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논농사를 짓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족의 이주와 논농사의 이면에는 벼농사에 대 한 한족의 관심과 지지가 있었다.

    둘째, 오림조선족향 우의촌과 오림촌은 수전을 고려하 여 하천이 있고 농경지가 있는 인근에 터를 잡았다. 두 마을은 동서 난 도로를 중심으로 남북에 자리하고 있으 며, 마을의 가로 구조는 일제 강점기 집단마을의 격자형 도로망 체계를 하고 있다. 중심도로에는 상업시설과 공 공시설이 있고, 개별 가옥은 중심도로에서 남북으로 난 안길을 따라 진입하도록 계획되어 있다.

    셋째, 마을의 이주 일 세대 조선족의 고향은 경상도와 함경도 등이며, 현재 거주 조선족은 이 세대가 대부분으 로 연변과 서란시, 교하시 등 다른 곳에서 이사를 왔다. 우의촌으로 이주하게 된 동기는 형제나 자식을 따라 온 경우, 시집을 온 경우, 더 좋은 환경을 찾아 온 경우 등 이다.

    넷째, 가옥은 대부분 남향을 한 본채와 부속채로 구성 되어 있고, 본채 정면과 배면에 넓은 텃밭의 외부공간을 갖고 있다. 본채는 주거공간으로 사용하고, 부속채는 창 고와 화장실 등 저장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텃밭은 옥 수수와 채소 및 기타 농작물을 공급하는 공간으로 사용 하고 있다.

    다섯째, 본채는 ‘一’자형으로 온돌방과 정지간(부엌), 복도, 창고, 화장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일반적 인 본채는 중앙의 복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꾸 미고, 온돌방과 복도 배면에 정지를 배치한 겹집 평면을 하고 있다. 이 외에 가옥은 정지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 돌방을 꾸몄다. 그리고 가옥의 확장은 일반형 평면을 바 탕으로 창고와 실을 좌우에 꾸며 확장했다.

    여섯째, 복도 중심의 평면은 복도에서 각 실로 출입하 기 때문에 각각의 실은 독립성을 갖도록 계획되었다. 실 의 세분화로 내부 공간의 규모는 작지만 외기를 막을 수 있어 실내 난방의 효율성이 높다. 실 구성방식은 온돌 중심의 좌식생활을 따른 주거공간 구성방식과 일부 띠실 과 같은 입식생활을 따른 주거공간 구성방식이 상호 결 합되어 있다.

    일곱째, 본채의 온돌방은 정지와 공간 분리를 원칙으 로 계획했으며, 내부는 대부분 전면 온돌구조로 되어 있 다. 온돌방과 정지 사이 벽에는 창문을 달아 두 공간이 소통하도록 했다. 복도 중심의 가옥은 실내에서 신을 벗 고 실 공간을 사용하는 조선족의 주생활문화를 따라 현 관 앞에서 신을 벗고 생활하도록 되어 있다.

    이상으로 본 연구는 중국 길장지구 내 오림향 우의촌 과 주변 조선족의 주거공간을 살펴보았다. 추후 본 연구 는 타 지역 조선족 주거공간에 대한 지속적인 조사 연구 가 필요하다고 본다. 이를 통해 본 연구자는 주거 공간 뿐만 아니라 중국내 조선족의 주생활문화에 대한 정리가 가능하다고 본다.

    Fig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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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p of Ji-lin and Jiao-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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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p of Wu-lin Village(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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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te plan of Wu-lin and You-Yi Village(①~ ⑩:The house of research, ⑪: School, ⑬: Old man h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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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ew of south r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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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esent view of old man h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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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te plan of Sa Cheong-nyong’s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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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loor Plan of the Lim Gil-dong’s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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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ew of the Lim Gil-dong’s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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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loor Plan of the Jung Man-sik’s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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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ew of the Jung Man-sik’s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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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loor Plan of the Bae Gyu-seok’s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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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loor Plan of the Park Si-uk’s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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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itchen of the Park Si-uk’s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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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loor Plan of Sa Cheong-nyong’s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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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loor Plan of Lee Wi-yeon’s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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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ew of Lee Wi-yeon’s House

    Table

    House of research

    Footnote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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