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 론
중세 고딕 성당의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은 내재된 합 리적 체계를 통해 이뤄졌다고 알려져 있다. 성당의 규모 가 각기 다르듯이 각 성당의 구성 체계나 원리 또한 조 금씩 다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많은 중세 고딕성당 중, 독일 북부 쾰른 대성당(Cologne Cathedral)은 스페인의 세비아 대성당과 이탈리아 밀라 노 대성당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이다. 이 성당은 독일의 초기 고딕 성당이면서도 고딕 건축의 특 성을 완벽히 구현한 작품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1)
쾰른 대성당에 관한 연구는 중세 건축원리에 근거한 리브 볼트의 기하학적 분석2)이나 첨탑 디자인의 특성3) 등, 성당의 부분적 연구나 해석 등은 있으나 성당 전체 의 평면이나 단면의 비례관계에 대한 분석은 드물다.4)
1854년 아돌프 자이징(Adolf Zeising)은 황금비(Golden Section)에 근거하여 쾰른 대성당의 비례관계를 이해하 려 하였다.5) 1912년 사무엘 콜맨 (Samuel Colman)은 그의 저서에서 쾰른 대성당의 평면에서 중앙 신랑(nave) 에서의 기둥간격이나, 측랑 (aisle)에서의 기둥 위치 등이 사각형, 정삼각형 그리고 원과 같은 단순 기하학적 형태 의 반복으로 결정된다고 보았다.6) (그림 1) 1974년 에르 츠디오체제(Erzdiozese)는 쾰른 대성당의 평면을 모듈화 하여 성당의 구성관계를 분석하였다. 최근 울리히 테린 덴(Ulrich Terlinden)의 논문에서는 성당 평면의 주요한 크기관계를 음악의 화음관계와 연계하여 해석하였다.7)
이러한 분석 중, 특히 황금비를 이용하는 성당의 분석 은 중세시대 이후에나 나타나는 방식이거나, 현대적 관 점에서 이용되는 분석의 틀이다. 만약 이러한 방식들이 중세 성당의 분석에서 나타난다면 우연의 결과일 수 있 을 뿐, 당시 통용되던 디자인 방식과는 무관한 방법이라 고 볼 수 있다.
중세 고딕 성당의 구성 방법이나 비례체계에 대한 자 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다만 브루넬레스키와 밀란 대 성당의 축조에 관한 밀란 의회의 자료를 토대로 고딕 성 당의 공간구성에 기하학이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빌라드 드 호네코드 (Villard de Honnecourt)의 스 케치 북을 통해 조금이나마 중세에도 기하학적 디자인 원리를 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8)
이 논문에서는 쾰른 대성당과 관련된 여러 자료 및 문 헌을 바탕으로, 이 성당이 당시에 통용되던 기하학적 체 계나 상징수에 근거하여 디자인되었을 것이라는 가정 하 에, 중세의 기하학적 방법과 비례체계를 이용해 그 형태 적 구성 원리나 비례관계를 분석하고자 한다. 이 비례분 석은 울리히 바크(Ulrich Back)와 토마스 휄트켄 (Thomas Höltken)의 실측 도면을 근거로 진행하였다.9)
2.중세의 기하학과 상징수
고대 그리스인들은 형태와 수가 우주의 본질을 이루고 있으며, 창조란 추상적 형태를 물리적 실체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피타고라스는 수가 그 자체로 신성한 것이라 여겼으며 계산 도구 이상의 개별적으로 참된 실체를 지닌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는 수를 하나의 점으로 보고 기하학적으로 배열하여 삼각수, 사각수, 오 각수 등의 다각수(figurate number)라고 하였다. (그림 2) 짝수는 여성, 홀수는 남성, 그리고 최초의 여성수인 2 와 최소의 남성수인 3의 결합인 5는 결혼을 뜻하는 등의 추상적인 이미지를 상징하여 삼각형, 오각형 등의 도형 의 성질과 결합시키기도 하였다. 그의 수는 실재하는 물 질의 기본단위를 구성하는 도형의 형태를 지니고 있으면 서 상징적 이미지를 함께 공유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피타고라스의 사상은 중세 때는 수신비주의 (number mysticism)적 경향을 띠게 되었고 이러한 사 상은 숫자를 숭배하는 미신적 경향을 낳아 중세의 수학 과 여러 예술분야에서 영향을 끼쳤다. 중세의 대표적인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보에티우스(Anicius Severinus Boethius) 다른 중세의 수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수학적 계산보다는 수를 철학적으로 분류하는데 힘을 썼다. 보 에티우스는 그의 대표저서 ‘수론’을 통해 1은 신, 2는 선 과 악, 3은 삼위일체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또한 6은 1, 2, 3의 합이기 때문에 ‘완전한 수’라 표현하였다. 이렇듯 신비적인 수의 사상은 신앙 중심의 중세 사람들에게 단 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고 당시의 성당 의 건축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중세 성당의 건축원리로 모든 형태결정에 기초적인 역 할은 삼각형 분할(ad triangulum)과 사각형 분할(ad quadratum)이 담당하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대부분 당시 석공들의 주요 도구인 사각자(masonic square)와 컴퍼스(compass)와도 관련 있는 형태들이다. 그 기하학 적 도식은 각각 원에 내접하는 삼각형과 원에 내접하는 사각형의 형태를 띠고 있다. 중세의 기하학과 수의 건축 적 적용방식은 독일의 마트아우스 로릭쩌(Matthaus Roriczer)의 저서에서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책 첫머 리에서 ‘기하학으로부터 몇 가지의 유용한 항목들을 추 출할 수 있었다’고 기술하였다. 첨탑의 수정에 관한 소책 자에서 234개의 세심한 단계를 통하여 성당 첨탑의 생성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 3).10)
로릭쩌는 당시 구전으로 전해내려 오던 석공들의 비밀 스런 기술을 정리하였는데, 그의 책에서 사각형 분할(ad quadratum) 기법의 반복적 사용을 통해 고딕첨탑을 설 계하는 방법을 기술하고 있다.11) 이러한 사각형 분할 기 법에 의해 1층 평면의 기본 형태인 정사각형으로부터 입 면이 세워졌다. 전체적인 구축과정은 일련의 기하학적 조직단계를 통해 이루어졌다. 일단 기본요소의 치수가 설정되면 그 밖의 모든 것들은 이것에 따르며, 결국 다 른 요소들의 치수는 기본요소의 배수가 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모듈체계가 정립되었다. 이러한 방법이 중세의 석공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그러 므로 비례를 맞추는 기하학적 체계는 고딕건축의 구성에 있어서 표준적인 수단이었다.
기하학과 상징수는 중세 건축의 중요한 건축원리였다. 중세 이전의 상징이 주로 신화나 점성술, 자연 현상에 빗대거나 피타고라스학파 등과 관련된 것이라면, 중세의 상징수는 다소 신과 관련된 숫자나 성서에 나온 숫자들 에 관한 것이었다. 따라서 중세 성당은 신을 위한 건축 물로 신성한 공간을 구성하기 위한 산술적 비례와 상징 적인 수들이 집약되어 표현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존 코난트에 의하면, 로마네스크의 대표적 건축물인 제3차 클뤼니 수도원 성당의 건축에 사용된 상징적인 숫 자는 153이며, 이는 예수의 제자들이 티베리아드 호수에 서 잡아낸 물고기 숫자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중세의 신 학자들은 153의 비밀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 과 계명과 은총을 담고 있는 17과 삼위일체인 3을 연결 시켜 3x3x17이라 풀이했다. 실제로 제3차 클뤼니 수도원 성당은 삼위일체의 상징으로 가득 차 있어서, 한 베이당 3개의 창문들이 일정하게 배열되어 있으며 입면은 4단계 로 중첩된다. 또한 트란셉트는 3개의 볼트를 가지고 있 다. 평면은 3부로 구성되어 주요 주신부는 가로 3베이 세로 17베이를 갖는다.12)
이러한 특징은 고딕성당에서도 나타나는데 밀라노 성 당 건설과 관련한 기록을 담은 밀라노 시 의회기록을 따 르면 밀라노 성당의 입면 구성비는 피타고라스의 직각삼 각형 3:4:5으로 도출되는 24:32:40 (braccia)의 비율로 나 타나고 피어와 기둥의 두께 비도 1:3 또는 2:3의 비례가 나타나는 등 밀라노 성당에 사용된 비례들 또한 정수 비 에 국한되어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이와 같이 중세건축의 기하학적 분석 역시 신의 법칙 으로 이해되는 신성한 숫자들에 의해 분할되는 상징적 기하학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세의 건축에 있어서 수와 기하학의 상징적 형태는 위대한 신의 우주 적 정의와 그 의미를 추구하는데 기여했다. 윌리암 레다 비(William Lethaby)가 지적했듯이 중세의 건물들, 특히 교회건축들은 단순히 상징적 표현을 넘어선 천국과 우주 의 비례적 구조에 대한 축소된 모형들이며, 건물의 형태 는 신에 의해 부여된 자연형태의 일반적인 영역이 건축 형태라는 특수한 경우로 이끌리고 있다.
3.쾰른 대성당의 비례분석
3-1.쾰른 대성당의 역사
로마 카톨릭 성당인 쾰른 대성당의 정식 명칭은 성 베 드로와 마리아 대성당이며, 1996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원래 이 성당은 기독교인들이 모 여 기도하는 주택이었으나, 313년 종교자유를 선언한 밀 라노의 칙령에 따라 교회로 확장되었다고 한다. 이후, 힐 데볼트(Hildebold) 대주교에 의해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 회를 짓게 되었고, 870년 9월에 빌리베르트(Willibert) 대주교에 의해 봉헌되었다고 한다.13)
초기 이 성당은 중앙의 신랑(nave)에 두 개의 측랑 (aisle)을 가진 바실리카식 기독교 교회당 이었다. 10세 기경에는 두 개의 측랑이 추가되면서, 로마를 벗어난 지 역에서 만들어진 첫 번째의 5주랑을 가진 성당으로 알려 지게 되었다. 서측 면의 전면 부에는 큰 마당(atrium)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아헨(Aachen)의 샤를마뉴 대제의 경 당(Charlemagne's chapel) 양식을 가진 2개 층의 팔츠 경당(Chapel of the Palatinate)은 11세기 초에 남쪽 익 랑(transept)에 추가되고, 11세기 중반, 성당 동쪽 끝엔 두 개의 우뚝 솟은 아케이드(arcades)로 성모마리아연합 교회(St Mary ad Gradus)를 연결하게 된다.
1164년 대주교였던 라이날드 폰 다셀(Reinald von Dassel)이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동방박사의 유물함을 가 져와 쾰른 대성당에 전시하게 된다. 성당의 규모가 작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넘쳐나는 순례자를 수용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아, 엥겔베르트(Engelbert) 대주교는 이곳에 프랑스 고딕 양식의 새로운 성당을 건설하기로 결정한다. 그 이유로는 대규모 순례자를 수용할 만큼의 큰 교회를 짓기엔 고딕 양식이 적절했을 것이다. 쾰른은 지역적으 로 프랑스의 영향과 독일의 전통이 공존하는 곳에 위치 하고 있기 때문에 고딕 양식을 수용하기에 큰 문제가 없 었다. 또한 정치적으로 프랑스와 로마 가톨릭의 눈치를 보아야 할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면서, 동시에 고딕 양식 의 종주국 프랑스를 앞지르고 신성로마제국의 자존심을 세우기에 충분할 정도의 규모로 성당을 축조하려고 고딕 양식을 선택하였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교회 확장의 원래 의도는 기존 건물의 서쪽 수랑 (transept) 부분만 철거하고 나머지 부분은 계속 대주교 의 교회로 사용하려 하였으나, 철거과정에서 화재의 발 생으로 건물 전체가 소실되었다. 이에 따라 건축가 게르 하르트(Gerhard)의 감독 하에 완전히 새로운 성당을 건 설하기로 결정되었으나,14) 엥겔베르트(Engelbert)가 1225 년 살해되어 공사가 지연되었고, 1248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후 공사는 동쪽 끝 부분인 머리부(chevet) 에서 꾸준히 이어졌는데, 1310년에는 채 색된 창문이 설치되기도 하였고 1322년에는 제단(altar) 이 봉헌되었다. 그 이후 공사는 지속되었으나, 교구의 명 령에 의해 1560년에 공사가 중단되었다. 공사비 부족이 그 원인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때까지 대부분의 신랑 (nave)과 사면 측랑(aisle)들, 그리고 서쪽에 위치한 두 탑 중, 남쪽 탑의 주요 구조물이 완성되었다.
이후 300년이나 공사는 재개되지 못하였으나, 1815년 쾰른이 프러시아(Prussia)에 양도 되면서 공사가 시작되 었다. 마침 1814년 쾰른 남부에 위치한 다름슈타트 성당 (Darmstadt Cathedral) 지붕 밑에서 쾰른 대성당의 핵 심이라 할 수 있는 서측 설계도가 그리고, 1816년 프랑 스 파리에서 나머지 설계도가 발견되었다. 이때 칼 프리 드리히 쉰켈(Karl Friedrich Schinkel)이 1816년 이 성 당을 방문하기도 하였고, 그의 제자인 에르네스트 프리 드리히 츠비르너(Ernst Friedrich Zwirner)를 성당의 건 축가로 파견하기도 하였으나 별 진척이 이루어지지 않았 다고 한다. 1840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프러시아의 국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Friedrich Wilhelm) 4세의 재정적 도움과 여러 차례의 복권 발행 등의 노력으로 1248년 건 축을 시작한지 632년 2개월이 지난 1880년에서야 완공을 보게 되었다. (그림 4)
3-2.쾰른 대성당의 평면 분석
성당의 평면은 고딕 양식의 전형인 라틴 크로스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신랑과 머리부가 5랑식으로 구성되어 있 다. 돌출된 익랑(transept)을 가지고 있고, 입면은 두 개 의 첨탑을 가진 형태이다. 성당 내부는 프랑스 고딕 양 식의 길고 높은 회랑(arcade)으로 구성되어 있고 좁은 아치와 지붕 사이의 트리포리엄(triforium) 창문 사이로 빛이 들어오는 형식이다. 천장은 플라잉 버트레스(flying buttress)로 지지되는 장식이 없는 4분 볼트 (quadripartite vault)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쾰른 대 성당은 프랑스의 아미앙 대성당(Amien Cathedral)을 모 델로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여러 문헌을 통해 쾰른 대 성당의 초기 설계자인 게르하르트(Gerhard von Rile)는 아미앙 대성당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게 르하르트가 실제로 아미앙 대성당의 건축 과정에 실제로 참여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15)
쾰른과 아미앙 대성당의 평면을 비교하여 보면 그 유 사점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림 5) 두 성당의 평 면은 동측 단부의 툭 튀어나온 제실 부분과 서측 단부의 첨탑 부분을 제외하면 평면 모두 라틴 크로스 (Latin Cross)형태로 대체로 유사한 형태이다. 다만 쾰른 대성 당의 평면이 아미앙 대성당의 평면과 비교하여 보다 뚜 렷한 라틴크로스 형태를 띠고 있는데, 이러한 형태의 차 이는 쾰른과 아미앙 대성당의 평면 구성 방식에서 기인 한다. 아미앙 대성당은 3랑식 신랑(nave)과 5랑식 머리 부(chevet)16)로 이루어져있는데 반해 쾰른 대성당은 신 랑과 머리부가 모두 5랑식으로 동일한 크기이다. 또한 쾰른 대성당의 익랑(transept)은 아미앙 대성당의 익랑보 다 좌우로 1베이씩 더 확장된 형태로 외벽에 더 돌출된 형태가 되어 쾰른 대성당의 라틴 크로스형 평면이 강조 된다. 아미앙 대성당의 평면이 장축형의 형태라면 쾰른 대성당의 평면은 중앙집중형 형태에 더 가깝다.
3-2-1.쾰른 대성당의 평면 모듈과 실측도면
에르츠디오체제(Erzdiozese)은 1974년 발행된 저서 Almanach fur das Erzbisturn Koln에서 쾰른 대성당의 평면이 25x25의 모듈방식을 사용하여 구성되었음을 주장 한다. (그림 6) 또한 쾰른 성당은 로마 피트를 단위체계 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에르츠디오체제의 책에 서 1 로마 피트가 0.2957m로 표기하고 있다. 하지만 프 랑크 모흐닉(Franc Močnik)의 저서 Lehrbuch des gesammten Rechnens für die vierte Classe der Hauptschulen in den k.k. Staaten에 삽입된 자료를 보 면 1 로마 피트가 0.298m로 표기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중세시대의 도량형이 통일되지 않았으며 각 지역마 다 다른 치수를 사용하였다는 것을 짐작 할 수 있다.17)
에르츠디오체제의 책에 삽입된 쾰른 대성당의 평면에 는 총 세 종류의 모듈이 사용되었다. (그림 7) 가장 큰 모듈은 중앙교차부의 50x50 모듈로 1개가 존재한다. 중 앙교차부의 상하좌우로 뻗은 50x25 모듈은 총17개로 중 앙통로로 사용된다. 중앙통로의 좌우 양측으로 25x25 크 기의 정사각형 모듈이 존재하는데 신랑과 머리부는 2중 측랑(aisle) 구조로 되어있는 관계로 25x25크기의 정사각 형 모듈이 1랑씩 더 존재한다. 25x25 모듈의 총 개수는 48개이다.
2008년 울리히 바크(Ulrich Back)와 토마스 휄트켄 (Thomas Höltken)은 쾰른 대성당을 실측하여 평면도를 완성하였다. 이 실측 도면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쾰른 대성당이 에르츠디오체제가 작성한 평면과 차이가 있다 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8) 건축역사연구 제24권 2호 통권99호 2015년 04월 쾰른 대성당 평면의 중앙통로의 바로 옆에 위치하는 통로의 폭은 27 로마 피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성당의 서편 측랑 부분의 간격 또한 25 로마 피트가 아닌 26 로 마 피트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9) 이러한 차이는 공간 성격과 용도에 맞게 의도된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실제로 확장된 복도의 끝에는 출입구가 있어 통행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미 앙 대성당의 평면에도 유사한 특징이 나타난다.
실측 도면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특이점은 26으 로 등분되는 신랑 공간이다. 평면의 신랑 부분이 5개의 26 모듈로 나눠진 이유에 대한 원인은 정확히 알 수 없 다. 하지만 쾰른 대성당의 건축과정이 600년 이상 걸렸 다는 점에서 시대 상황에 맞는 모듈의 변화 가능성을 엿 볼 수 있다. 쾰른 대성당은 오랜 공사 기간 동안 몇 차 례에 나누어져 부분별로 공사가 진행되었으며 신랑 부분 의 공사가 이루어진 것은 1440년 이후로 볼 수 있다. 1440년은 르네상스시기로 건축에서는 비례, 질서, 조화가 중요시되던 시기였다. 그 결과 본래 초기 계획은 25모듈 과 30모듈로 구성이 되어있었으나, 차후 설계 변경이 이 루어져 26모듈의 구성이 되었다는 가정을 해 볼 수 있 다. 실제로 아미앙 대성당의 신랑 부분도 성가대석 (choir)을 구성하는 모듈과 유사한 크기의 모듈로 구성되 어있다. 이러한 사실로 비추어 볼 때 쾰른 대성당 또한 그림 9에서 보이는 것처럼 초기에는 25모듈로 계획이 되 었으나 추후에 설계가 변경되었을 가능성을 추론할 수 있다.18) 어떤 이유에서든 현존하는 쾰른 대성당의 공간 구성은 지금까지 알려진 에르츠디오체제의 규칙적 모듈 이 아닌 변형된 체계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비교 분석을 통해 알 수 있다.
3-2-2.쾰른 대성당의 평면 비례분석
울리히 바크(Ulrich Back)와 토마스 휄트켄(Thomas Höltken)의 실측 도면을 근거한 모듈로 쾰른 대성당의 평면을 분석해 보면 우선 성당의 장축과 단축은 √2:1의 비례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10) √2:1은 약7:5의 비율이며, 이 비율은 자와 컴퍼스만으로 손쉽게 작도할 수 있어 고대부터 많이 활용되었던 비례이다. 무 리수의 개념이 없었던 당시, 정확한 치수를 이용한 계획 보다는 기하학적 작도법에 의해 계획되었을 것이라 추측 된다. 또한 도량형이 통일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당 축조 과정에 이러한 단순 비례관계나 기하학적 도구를 사용은 당시의 필연적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쾰른 대성당의 성가대(choir), 익랑(transept), 신랑 (nave) 부분은 3:4:5의 연속적 비율관계를 보이는데 이 비례는 √2:1의 비례처럼 작도가 쉬운 비례체계 중 하나 이다. (그림 11) 3:4:5의 비례는 피타고라스(Pythagoras) 의 직각삼각형의 길이의 비례에서 발생한 것이라 생각되 는데, 아미앙 성당에서도 이들 실들의 관계가 140:100:70 의 비율로 구성되어 있고 10:7:5의 비례관계를 가진다. 이들 비례관계는 √2:1의 근사치를 가지는 비율로 구성 되게 된다. 이는 성당의 평면 구성이 사각형 분할(ad quadratum)과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주보랑(ambulatory)구성의 경우 반원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중세 성당들과 유사한 디자인으로 제 실의 수는 아미앙 성당과 같이 7개로 구성되어 있다. 쾰 른 대성당의 주보랑의 중심은 내진의 동쪽 가장자리의 중점에서 4.3m 정도만큼 이격되어 있음을 실측 도면을 통해 알 수 있다. 내진의 가장자리에 중심점을 잡고 반 원을 그려 제실을 배치할 경우, 들어갈 수 있는 제실의 수는 총 6개이다. 하지만 제실을 15도 회전하여 제실의 반지름만큼 이격시키면 중앙의 제실을 중심으로 좌우 세 개씩 총 7개의 제실이 배치할 수 있다. 따라서 쾰른 대 성당은 제실의 반지름만큼 주보랑을 이격시킴으로써 이 상적인 형태를 구성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림 12)
또 다른 측면에서 접근해보면 숫자 7은 일곱 개의 행 성을 의미하기도 하고 창세기의 바탕이 되는 한 주를 이 루는 7일을 의미하기도 한다. 실제로 성경에는 7에 대한 암시가 엄청나게 많이 존재한다. 중세 고딕건축이 많은 상징수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보랑을 7이라는 숫 자와 관련하여 구성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3-3.쾰른 대성당의 단면 비례 분석
쾰른 대성당의 서측 입면은 약 157미터 높이의 두 개 의 거대한 첨탑(spire)으로 구성된 것이 특징적이다. 서 측 입면의 첨탑은 공사가 시작된 이래로 400년 동안 완 공되지 않은 상태로 남겨져 있었으나, 이후 중세 입면 도면이 발견됨에 따라 1842년 공사가 다시 시작되게 되 었다. 쾰른 대성당의 단면 신랑(nave)의 높이와 폭의 비 례는 3.6:1 정도로 아미앙 성당이나 다른 고딕성당과 비 교해 보아 훨씬 가늘고 높게 구성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 다.19) 고딕성당의 높이나 형태, 첨두아치 및 기타 세부디 자인들의 구성에도 기하학적 법칙이 적용되었을 것이라 추론할 수 있다.
특히, 에른스트 모젤(Ernst Mössel)은 ‘고대와 중세의 비례’라는 저서에서 고대나 중세의 각 시대에 따른 그 시대의 기하학적 법칙이 존재했다고 주장하면서 쾰른 대 성당의 평면 및 단면을 분석하였다.20) 그러한 법칙으로 그는 원을 중심으로부터 일정 간격으로 규칙적 분할함으 로써 건물의 디테일의 비례 혹은 건물의 평면이나 단면 의 비례관계를 결정하는 요소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구 성은 건축물의 부분과 형태 전체의 조화로움을 이루는 기본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에른스트 모젤의 방식이 중 세 고딕 성당 디자인에 사용되었다고 알려진 바 없다. 그의 분석방식은 어떤 이론적 기초 위에서라기보다는 자 의적 해석방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림 13)
반면, 고딕 성당의 단면 구성방식에 대한 방식은 밀란 대성당의 단면계획안들을 살펴봄으로써 그 해답을 유추 해볼 수 있다. 밀란 대성당은 1386년 건설되기 시작한 건축물로 쾰른 대성당보다는 다소 늦게 지어진 건축물이 지만 쾰른 대성당의 단면 구성 방식에 대한 단서를 제공 해준다. 제임스 액커만(James Ackerman)은 1390년 안 토니오 비센쪼(Antonio do Vicenzo)의 안부터 1392년 스코날로코(Stornaloco)의 안에 이르기까지 성당의 디자 인 결정을 과정에서 비례관계나 모듈을 설정하는데 있어 다양한 변화를 거쳤다고 알려져 있다. (그림 14) 여기에 나오는 초기 계획안들을 살펴보면 쾰른 대성당에 내재된 단면 계획 원리를 추론할 수 있다.21)
쾰른 대성당의 단면 신랑의 높이와 폭의 비례를 재구 성해보면 그 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앞서 이용한 울 리히 바크(Ulrich Back)와 토마스 휄트켄(Thomas Höltken)의 실측을 근거로 한 모듈을 기초로 성당 단면 을 분석을 해 보면, 그 폭과 높이는 모두 154로 1:1의 비율에 가깝게 보인다. (그림 15) 154는 22x7의 값으로 단면의 그리드의 수직 단위를 정수비가 되게 한다. 즉 22가 수직 모듈이 되는 것이다.
평면에서 나타나는 두 개의 27 모듈의 통로 폭은 이러 한 단면을 위함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측랑의 높이는 66으로 154를 4:3으로 나누는 지점에 위치하는데, 이 단순 정수 비는 피타고라스 비례로 평면에서 사용된 비례가 단면에 그대로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볼 때 쾰른 대성당의 평면과 단면은 일정한 정수 비 체계 하에 계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세 당시 삼각형(ad triangulum)과 사각형(ad quadratum) 분할이 성당 수직 구조물의 디자인 결정에 중요한 원리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실제 이 원리가 쾰른 대성당의 입, 단면에 적용되었는지 의문이 생긴다. 따라서 건축물의 입면과 단면을 이루는 구조물의 주요지 점과 포인티드 아치(pointed arch) 등을 기준으로 성당 의 입, 단면도에 나타나는 사각형 그리드 및 삼각형 분 할(ad triangulum)그리드를 만들어 봄으로써 그 사용 가 능성을 추론 할 수 있다.
쾰른 대성당의 신랑 지붕(nave roof)에서 나타나는 사 선 요소를 연장시키거나, 건물의 입면 및 단면에서 나타 나는 사선요소를 연장시켜 연결해보면, 그 형태는 정삼 각형 형태를 띠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삼각 형 분할(ad triangulum) 그리드가 수직, 수평의 그리드 와 교차하는 지점은 측랑(aisle)의 기둥들, 포인티드 아치 (pointed arch) 그리고 구조물의 주요부위에 따라 위치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포인티드 아치 지붕 들의 위치도 이 삼각형 분할(ad triangulum)의 다이어그 램과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다. 밀란 성당의 다이어그램 에 나타나는 원리와 유사한 법칙이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16)
물론 당시의 도면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도면 치수와 실제 지어진 건물의 치수와 간극이 크게 있으리라 추측 가능하다. 삼각형 분할과 건물의 실측 값 사이에 나타나 는 어떤 간극이 존재하겠지만, 성당의 높이 및 폭의 결 정과 같이 수직적인 요소에 삼각형 분할이 깊이 관련되 어 있다고 쉽게 추론해 볼 수 있다. 이는 중세 고딕 성 당에 사용되던 삼각형 분할(ad triangulum) 원리가 이 성당에도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쾰른 대성당의 단면에는 정삼각형, 정사각형 등을 기 본으로 하는 다각수의 형상이 드러난다. 또한 각 도형은 숫자를 통해 그 의미를 부여 받았는데, 삼각형은 숫자 3 을 대변하는 도형으로 완전함의 상징이자 삼위일체를 나 타내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의미했다. 사각형은 숫자 4를 나타내는 도형으로 숫자 4는 숫자 2와 2를 곱하거나 더해도 같은 값이 나온다. 이는 곧 공평함 즉 평등을 뜻 하며 정사각형은 평등, 신뢰, 공정, 견고함 등을 의미하 였다. 또한 이 사각형은 시대와 문명을 초월하여 대지나 어머니, 지구 등을 상징하였다. 별의 형상을 한 오각형은 숫자 5와 관련된 도형으로 우월성, 권위 그리고 생명의 재생을 의미하는 도형이었다. 이러한 오각형과 관련된 성경의 상징수는 오순절과 희년으로 창조적 변환과 재생 의 상징을 내포하고 있다. 6은 3의 배수로 3이 가진 근 본 속성에 완전성에 가까운 균형 잡힌 질서가 더해진 것 으로 성경에서 창조의 질서와 구조가 완성되는 6일째 날 로 그 상징성을 표현하고 있다.22)
피타고라스학파는 수를 도형과 결부시켰는데 1, 3, 6, 10, …과 같이 정삼각형으로 배열할 수 있는 수들을 삼 각수(triangular number)라고 부르고, 1, 4, 9, 16, …과 같이 정사각형으로 배열할 수 있는 수들을 사각수 (square number)라 불렀다. 마찬가지로 오각수, 육각수 들 또한 함께 다루어졌는데, 이와 같은 숫자를 다각수 (figurate number)이라 불렀다. 이러한 다각수는 단순히 도형과 수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 이상으로 도형의 작도 나 분할에 있어서 좌표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쾰 른 대성당의 단면은 이 다각수에 의해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림 17)
5.맺음말
이 논문은 선행 연구자들의 자료와 함께 중세 당시에 사용되던 기하학적 이론, 그리고 쾰른 성당을 실측한 울 리히 바크와 토마스 휄트켄의 자료를 바탕으로 성당의 비례관계를 분석하였다. 그 결과 성당의 평면, 입면 그리 고 단면 등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는 여러 기하학이나 삼 각형 분할 등은 우연의 일치라고 설명하기는 어렵고, 이 러한 원리들이 오히려 중세 당시 성당의 축조 과정에 있 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울리히 바크와 토마스 휄트켄의 실측 자료를 바탕으로 한 평면을 보면 에르츠디오체제의 모듈이 규칙적으로 반 복되는 체계와는 달리 장축과 단축을 중심으로 한 약간 의 모듈간격의 변화가 있었다. 그 변화는 성당 공간의 성격과 위계에 따라 달라졌던 것으로도 생각되어질 수도 있고, 성당의 공사기간이 길어지며 다른 시대적 영향을 받아 합리적으로 변화되었을 가능성도 추론할 수 있다.
이 논문에서는 쾰른 대성당의 단면의 높이를 결정짓는 모듈이 평면 모듈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리고 무엇보다도 쾰른 대성당의 평면 및 단면 계획에서 사용된 비례체계와 기하학적 체계는 중세에 통용되던 삼 각형 분할이라는 기본원리에 따르는 것을 이 연구를 통 해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성당 건축에 상징적인 수를 적용하려 했던 흔적 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단면에 나타난 다각수를 통 해 각 부재의 위치 결정에 대한 추정이 가능하다. 이러 한 기하학이 가지는 이성적 사고와 수의 상징적 요소는 중세 당시의 상징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힘으로 성당 건축물에 투영되었다고 보인다. 이처럼 신앙 중심의 중 세 사회가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인 이념을 추구했을 것이 라 예상과는 달리, 이 분석을 통해 본 중세 성당건축에 나타난 기하학적 비례와 공간 구성방식을 보면 성당의 구축 과정이 이성적인 방법으로 구축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