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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 1598-1142(Print)
ISSN : 2383-9066(Online)
Journal of architectural history Vol.24 No.1 pp.61-70
DOI : https://doi.org/10.7738/JAH.2015.24.1.061

A Study on the Construction of Stupa in Heungcheon-Temple which represents Buddhism in Early Joseon Era

Bue-Dyel Kim*, Jeong-Sik Cho
Corresponding Author : namu50@seoul.go.kr
December 13, 2014 February 28, 2015

Abstract

This is a study on the construction of the Heungcheon-Temple. The results are follows. 1) The Heungcheon-Temple was anticipated to be the Jeongneung. However, when completed, the Heungcheon-Temple was symbolized Buddhism; moreover, there was a stupa enshrined sarira. The stupa was a land mark in Hanyang. While king Sejong repaired the stupa, it disappeared during the regin of King Jungjong. Before it disappeared the stupa signified a Buddhist event and a rite of good fortune. 2) The stupa was constructed using a double-frame, and there was a stone-stupa in an octagonal multi-layer temple. This single location consisted of a sarira space and a worship space. 3) Buddhist Relic(Sarira) worship was to witness holiness and therefore reics could be moved according to need. It appeared as though Buddhist Relic worship occurred in Southeast Asia. 4) The Heungcheon-Temple stupa was considered a new and superior architectural-symbol to comfort people and recognize the new order of Ming and neo-Confucianism. Therefore, the stupa was a good alternative to politics, religion, and external relations during the early Joseon era.


조선 초기 修禪本寺興天寺사리각 영건에 관한 고찰

김 버 들*, 조 정 식
(서울시립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사)
(동국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

초록


    1.서 론

    興天寺는 貞陵을 수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선개국 후 도성 내에 창건되었다. 흥천사가 완공되자마자 조계종 총 본사로 지정되었으며, 국가의 祈禳儀禮를 주관하는 곳이 되어 조선이 유교를 國是로 건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 가적으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였다. 특히 이 사찰에는 이전에 없었던 특이한 구조의 사리각이 있어서 외국사신 의 접대장소로 활용 되거나, 선비들 및 도성 안 부녀자들 에게도 대표적인 유람장소가 되었다.1)

    그 후 1409(태종9)년에 도성 밖 성북구 정릉동으로 이 전되었다. 흥천사는 정릉의 이전과 함께 享祀기능이 상실 되어 마땅히 폐사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연산군대까지 왕실사찰로서의 위상이 지속되었다.

    현재는 건축뿐만 아니라 터 자체가 소멸되어 당시의 모습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실록에 나타나는 흥천사의 창 건과 사리각 중수 기사 및 조선시대 문인들이 남긴 유람 기를 통해 사리각을 비롯한 건축의 분위기를 유추할 수 있다. 특히 흥천사 사리각 보수과정에서 불거진 重修논쟁 을 통해 조선 초기 불교정책과 그에 따른 사찰건축의 일 면을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본 연구는 조선 초기 도성 내 대표사찰이었던 흥 천사의 전각들 중, 독특한 구조와 남다른 위상을 지녔던 사리전각의 문헌기록을 통하여 그 구조를 파악하고, 다른 사리보장처 건축과 비교하여 그 특징을 규명하는 것을 연 구의 목적으로 한다.

    2.흥천사 관련 기록

    흥천사는 祖宗의 寺刹로서 조선 초기 왕이 行幸하는 의례를 담당하였고, 修繕本寺로서 조선의 불교행정을 총 괄하는 대표적인 사찰로 실록과 지리지에 자주 나타난다.

    『朝鮮王朝實錄』의 흥천사 기록은 국가의 祈禳儀禮 나 사신접대와 같이 흥천사 운영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으 로 건축적 사실보다는 흥천사 조성 이후의 경영과 그 기 능변화를 살피는데 유리하다.

    『國朝寶鑑』은 실록 중 성리학적 입장에서 역대 임금 들의 귀감이 될 부분을 추려낸 것이다. 따라서 유교질서 를 확립하려는 입장에서 기술하였기 때문에 흥천사 파괴 와 소실 건을 위주로 다루고 있다.2)

    조선 초 선비들의 遊紀, 遊詩등의 문집에 나타나는 흥천사는 억불정책에 따른 대표적인 廢寺의 대상으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개국 초기 흥천사는 사대부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3) 특히 왕실과 재상가의 자제들이 출사이 전에 자연스레 만나서 인맥을 형성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당대의 선비들이 남긴 유람기를 통하여 보면 흥천사가 도 성 내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짐작할 수 있으며, 흥천사 주변 의 변화 및 흥천사 내 전각사용의 일면도 파악 할 수 있다.

    본 연구는 <Tab.1>에 나타난 흥천사 관련기록 중 실 록의 기사를 중심으로 하여 흥천사 사리전각의 영건과 그 변화를 살펴본다.

    3.흥천사 영건

    흥천사 공역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정확한 일시는 알 수 없다. 다만, 貞陵의 願刹로 지어졌기 때문에 神德王后 가 卒한 후 정릉공사와 함께 기획되었을 것이다.

    조선의 첫 국상과 관련된 왕릉과 원찰, 두 役事를 모두 감독한 사람은 金師幸이다. 김사행은 이미 고려왕실의 恭 愍王陵과 影殿건축을 통하여 그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 문에 자연스레 정릉과 흥천사를 감역할 수 있었다.4) 흥천 사의 공역 중 사리전은 김사행과 監役提調金湊가 함께 하였고, 왕자의 난으로 김사행이 숙청당하자 흥천사 사리 각은 김주5) 혼자서 완공하였다.

    태조는 정릉공사보다 흥천사 공사에 더 집중하였다. 실 록에 의하면 정릉과 궐내의 料物庫공사보다 흥천사 공 사를 더 우선시 하였다.6) 이는 유교를 국시로 하는 조선 에서 도성내 사찰 건립에 대해 태조가 부담을 느꼈기 때 문이다. 또한 그만큼 흥천사의 위상과 규모가 처음과 달 리 원찰이상으로 확대되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흥천사는 정릉의 移轉과 관계없이 祖宗의 建築으로서 그 위치에서 존속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연산군대 화재로 흥천사 사 역의 대부분이 소실되었고, 중종대 사리전각마저 전소되어 현재는 그 터도 남아 있지 않다. 신덕왕후의 신원회복과 함께 정조대 다시 지어졌지만, 현재 남아있는 건물들은 대 부분 철종과 고종대에 지어진 것이며, 터까지 옮겨졌기 때 문에 김사행이 주관하였던 건축당시의 모습은 알기 어렵 다. 그러나 실록 및『陽村集』의 기록을 통해 전각명과 규모의 대강을 살펴볼 수 있다.

    병자년(1396, 태조5) 가을 8월 무술일에 우리 小君顯妃 康氏께서 薨하매, 상께서 마음에 애도하시어, 유사에게 명하여 追尊하는 諡號를 올리되 ‘神德王太后’라 하고, 왕 궁 서남쪽 몇 리 안 되는 가까운 곳에 장사 지내니, 산 세가 감아 돌아 지리가 길하게 호응되었다. 그 이듬해 정축년 정월 갑인일에 貞陵에 안장하고, 또 묘역 동쪽에 興天寺를 창건하니, 명복을 빌기 위함이었다. 돌이 못 되어 일이 끝나니, 佛堂ㆍ僧寮ㆍ대문ㆍ행랑ㆍ부엌ㆍ욕실 [湢] 등 무릇 칸수 세어서 1백 70여 칸인데, 서까래와 기 둥에 금빛 채색이 찬란하였다. 期年이 되어 小祥을 지내 고 法采를 베풀어 落成을 하고, 밭 1천 結을 내려 供養 하는 비용에 충당하게 하고, 曹溪宗本社를 삼아 僧堂을 설치하고 坐禪공부 하는 것을 영구한 규정으로 하도록 하였다.(『陽村集』제12권,「貞陵願堂曹溪宗本社興天寺造成記」)

    흥천사는 불당과 승방, 대문, 행랑, 부엌, 욕실을 갖추 어 정릉의 제사를 모시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게다가 완 공 당시 이미 170여칸 규모의 대찰이었다.7) 조계종 본사 로 삼아 승당을 설치하였고, 좌선을 영구 규정으로 삼았 을 정도로 큰 사찰이었다. 또한 흥천사와 정릉주변은 1백 보 이상 넓은 공지를 확보하여 사역과 그 주변을 보호하 고 있었다.8)

    흥천사는 김사행의 감독 하에 정릉의 享祀공간과 불교 의 행정을 담당하는 공간이 1차로 완성되고, 태조의 의지 를 담은 사리전각이 김주에 의해 완공되면서 수선 본사로 서의 공간이 완성되었다. 그 외에 啓聖殿, 객관, 보물고 등 왕실과 국가의 공식의례가 행해지는 전각들이 추가되 었다. 이상을 바탕으로 흥천사의 사역구성은 <Tab.2>와 같이 추정할 수 있다.

    태조는 흥천사가 단순히 왕실사찰이거나 불교행정기구 에 머물기를 바라지 않았다. 개국시조인 자신과 桓祖의 추모공간을 함께 두어 왕실과 조선을 대표하는 장소로 만 들었다. 이로서 흥천사는 태조사후에도 흥천사의 공역을 반대하고, 사원철폐를 주장하는 관료들에게 개국조의 추 모공간이자 遺勳이라는 명분을 만들어 줌으로서 지탱할 수 있었다.Tab.3

    흥천사가 한창 공사 중인 1396년, 통도사의 진신사리가 이미 흥천사로 옮겨 봉안되었다.9) 따라서 흥천사 조성 시, 이미 사리각의 자리를 염두한 계획이 진행 중이었으 며, 실록에 나타나는 1398년 사리전 터 시찰은 태조가 사 리각 터를 확정짓는 수순이었다.Tab.4

    흥천사 사리전은 본 사역과 조금 떨어져 높은 곳에 위 치하여 사역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있었다.10) 그리 고 회암사 사리전과 같이 별도의 담장을 둘러 독립된 영 역을 구축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4.흥천사 사리각

    4-1.흥천사 수리기록

    실록에는 흥천사 수리에 대한 기사가 있지만, 그 범위 와 내용은 상세하지 않다. 다만 태조와 태종이 啓聖殿에 들릴 때면 사리전각에서도 예불을 드렸고, 세종은 흥천사 사리전의 수리에 대해 신하들이 불만을 토로하자 아예 흥 천사와 흥덕사의 수리를 법식으로 정하였기 때문에 그 이 전에도 정기적인 수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11)

    실록기사 중 사리전각의 수리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흥 천사 사리전각은 세종21년 크게 중수하였고, 그 전에 이 미 두 번의 대대적인 수리가 있었다.

    첫 번째 수리는 태종10년부터 11년의 수리이다. 10년 5 월 수리 시는 工曹判書朴子靑이 공사를 총괄하고 李仁 壽가12) 준공하였다. 태종은 태조께서 지으신 사찰이라는 명분으로 공사 중에는 代言朴習도 공사를 董督하게 하 여 공사내용을 일일이 보고하게 할 정도로 관심이 컸다. 당시 공사의 범위를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지금 형세가 기울어져 무너지게 되었다.” “장마가 지기 전에 수즙하여 공역을 끝내는 것이 소원이다.”라는 기사로 볼 때 전각이 심하게 기울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장마를 대비 한 긴급 보수를 우선 시행한 후, 곧바로 탑이 기울어지는 것을 바로잡기 위한 해체수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3) 태종은 공사 이후에 종3품 提擧內官을 보내 승려들이 흥 천사 사리전각을 사용하는 것을 감독하게 하여 공식적으 로 흥천사를 관리하였다.

    두 번째 수리는 세종11년 2월에 있었다. 사리탑전의 表刹이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표찰은 탑의 상륜을 뜻한 다.14) 이 때에는 상륜부를 잡아주는 골조층에 문제가 있 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석공과 목공의 기술자는 선공감 에서 직접 차출하였고, 조성도감을 설치하여 감역관을 임 명하는 국가주도의 공사였다. 기술자 이외의 공사인력과 재원 일부는 신도들의 시주와 승려들에게 도첩을 발행하 여 충당하였다.Tab.5

    세 번째 중수는 세종17년에 있었다. 사리각이 또 다시 기울어져 위태하였는데 목공이 이번에 고친다하여도 다시 위태로워진다고 하자, 세종은 아예 사리각을 헐고 새로 세워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코자 하였다. 사리를 봉안한 석탑을 감싸고 있는 목조전각을 헐어서 별도로 세우고 사 리탑은 뜰에 세우는 계획이다. 이렇게 되면 사리봉안 방 식과 그에 따른 공양도 바뀌어야 하기 때문에 사리각 내 의 석탑까지도 구조가 변할 수 있다. 이러한 계획은 현존 하고 있는 진신사리 보장처의 구조와 흡사하다.<Tab.6>

    공사 진행은 창건 시와 마찬가지로 도감을 설치하고 判 中樞院事安純과 知中樞院事成達生을 提調로 임명하였 다. 공사전반은 선공감을 통해 국가에서 관리하였고, 인부 는 승려를 동원하였다. 안순과 성달생은 관료출신이기 때 문에 실질적인 공사진행은 승려 學專도 참여하여 보완하 였다.15)

    당시 塔殿철거를 위한 기계까지 준비하였다는 기사로 보아 실제로 철거가 이루어졌으며, 선공감에서 공사의 마 감까지 감독하게 하여 역시 官주도로 진행하였다. 완공 후에는 權採에게 勸文을 짓도록 하고 사리각에서 법회를 크게 열었다. 그리고 관리를 더욱 철저히 하고자 近仗軍 士로 하여금 항상 지키도록 하고, 공사이후에도 公廨시설 처럼 국가에서 관리하였다.

    이 때 중수는 창건할 당시만큼이나 공기가 길었다. 사 리각 공사를 명하고 나서 철거하기까지 1년, 철거이후 목 공사만 2년여가 걸리고, 이후 단청과 구리로 만든 부시망 을 제작하는 등 기타 잡공사에 다시 2년여가 걸려서, 사 리각 경찬회는 1440년에야 행할 수 있었다. 경찬회는 불 상이나 법당이 새로 조성되면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루 어지는 법회로서, 오늘날의 낙성법회와 같은 개념이다. 그 러나 실록기사에는 경찬회를 반대하는 신료들의 의견에 대한 내용은 많지만 경찬회에 대해서는 단 한 줄로만 전 하고 있다.16)

    경찬회 이후에도 수리는 계속되어 1442년 재차 흥천사 사리각 경찬회가 있었다. 이때의 법회는 5일간 지속되었 으며, 세종은 說禪文과 慶讚疏文도 미리 준비하였다. 이 날의 실록 기사에는 남수온이 지은 설선문의 일부가 전하 고 있어 사리전각 수리내용의 일부를 짐작할 수 있다.17) 또한 흥천사와 흥덕사 수리를 법식화 하여 선공감 4품 이상 관원 2인을 배치함으로서 창덕궁 종루를 관리하는 것처럼 제도화 하였으며, 비상시 즉시 수리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4-2.사리각의 명칭과 이중구조

    (1)명칭

    흥천사 사리전의 규모와 구조, 명칭은 사료마다 조금씩 다르게 전한다. 가장 오랫동안 사용된 명칭은 ‘사리전’이 다. 태조가 처음 지을 당시부터 세종대까지 지속적으로 불리었다. ‘사리각’은 세종대 처음 기록에 나타나며 중종 대 화재로 소실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세종대 사리각 중 수와 관련한 기사가 많기 때문에 사용빈도는 가장 높다. 이 외에 ‘탑전’, ‘층각’, ‘누각’, ‘부도’ 등 다양하게 불리었 다. 이중 ‘부도’라는 명칭은 사리전각 내의 사리석탑을 의 미하는 것으로 보인다.18) 태조가 1398년 흥천사에 거둥하 여 부도탑을 구경하였다는 기록과19) 1399년 흥천사 사리 전이 낙성되었다20)는 기록으로 볼 때, 사리전 내의 석탑 이 먼저 완성되고, 이후 목조전각이 완성되었으며, 전자를 부도로 칭한 것이다. ‘층각’은 사리탑을 감싸고 있는 목조 건축만을 가리키는 용어로 추정된다.21) 즉 사리전각 내의 사리탑만을 칭할 때는 부도로, 사리탑 외부의 목조전각만 을 칭할 때는 층각으로 표기한 것이다.22) 이에 본 고에서 는 흥천사 사리탑과 목조전각을 포함하여 칭할 때는 사리 전각으로 통일하며 목조전각 안의 사리탑은 사리석탑으로 표기한다.

    (2)이중구조

    흥천사 사리전각은 사리를 모시는 석탑과 사리에 경배 하는 공간이 서로 병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공간 안에 공존하는 독특한 구조이다. 실록에는 흥천사 사리전 각의 이중구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①興天寺의 舍利殿은 태조께서 창건하신 것이다. 이제 들 으니 기울어져 위태하므로 중들을 모집하여 수리하려 한 다 하니, 度牒을 주어 수리하게 하고, 石手와 木工은 繕 工監에서 주장하고, 監役官은 造成都監에서 이를 주관하 는 것이 좋겠다.(세종11년 2월 5일)

    ②이 탑전이 체제와 형성이 높고 위태하여, 오랜 세월의 풍우에 기울어지기가 쉽다. 근일에 절의 중이 와서 말하 기를 “썩고 기울어진 것이 전보다 더욱 심하니, 만일 層閣 이 갑자기 무너진다면 石塔도 따라서 무너질 것은 뻔합니 다.” (중략)일으켜 수리하려고 생각하여 신하들에게 의논 하고 목공에게 물어 보니, 모두 말하기를, “이 집이 처음 에 지은 이래로 40년이 못 되었는데 두 번이나 수리를 하 였으니, 무궁하게 전하지 못할 것은 분명한 일이니, 지금 비록 고쳐 수리한다 하더라도 또한 오래 가지는 못할 것 이라.”고 하니, 그 말이 일리가 있다. 지금 塔위의 閣을 없애고 앞에 새 전각을 지어 層閣에 대신하면, 거의 聖祖 의 남긴 뜻을 배반하지 않고 자주 수리하는 폐단도 없을 것이다.(세종17년 5월 20일. 권채의 권문)

    ③本寺의 舍利塔殿은 太祖께서 창건하신 것인데, 체제가 높고 우뚝하기 때문에, 무인년에 창건한 이후로 두 번이나 일으켜 바루었으나, 날로 점점 기울고 위태하여지니, 만일 무너진다면 石塔이 염려되옵니다. 청하옵건대, 탑전을 헐 고 거기에 모셔 둔 大藏經은 새로 別殿5,6간을 석탑 앞에 세워서 옮겨 두면, 거의 석탑도 완고할 것이요, 聖祖의 發 願하신 뜻도 무궁하게 전할 것입니다.(세종17년 5월 21일)

    층각이 무너진다면 석탑도 무너지게 된다는 기사와 ‘탑 위에 전’이라는 언급을 통해, 겉에서 보면 목조전각 한 동 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 사리를 모시는 사리석탑이 있었음 을 알 수 있다. 또한 초창이후 40년도 안되어 두 번이나 대수리를 하였고, 더 이상의 수리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는 기사를 통하여, 목조전각의 기울어짐이 심하고 그것을 바로잡기가 매우 어려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목탑의 경우 심주와 사천주로 이루어진 골조가 힘을 받을 수 있는데 반해, 흥천사 사리전각은 다각의 평면 한 가운 데에 사리를 모시는 석탑을 두었기 때문에 보수 또한 쉽 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흥천사 사리전각처럼 팔각전각 내에 사리탑을 둔 이중 의 구조는 이성계가 조선개국 직전에 발원한 은제도금라 마탑형사리기를 참고할 수 있다. 이성계발원사리기는 8각 당형 외함 내에 라마탑형 내함 사리기를 두었다. 사리장 치 중 라마탑형 사리기의 명문에는 이성계와 부인 康氏 만 있으며, 은제도금팔각당형 사리기에는 제작한 장인 중 에 박자청의 이름이 올라있다.23)

    (3)규모

    사리전의 평면은 세종대 기록에 의해 8각평면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각의 층수에 대한 부분은 시기별, 혹은 같은 임금의 시대에서도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3층, 4층, 5층과 함께 혼용되다가 중종대 소실시의 마지막 기록은 ‘5층 사리각’으로 전하고 있다.

    ①임금이 興天寺에 가서 舍利殿3층을 흥천사의 북쪽에 건축하도록 명령하고…(태조7/5/1)

    ②병자년에 興天寺를 貞陵곁에 창건하여 국도의 서쪽에 있는데, 제도가 크고 웅장하다. 위에는 浮屠를 세우고, 인 하여 八面四層의 전당을 지었는데, 까마득하게 높아서 東 國고래에 일찍이 없던 것이다.(세종11/2/5) ③흥천사 사리각은 본래 5층이었는데 이번에 規制를 개조 하여…(세종20/3/16)

    ④이 興天寺의 탑은 실로 祖宗이 경영하신 것입니다. 세 월이 오랜 까닭으로 대들보가 기울어지고 집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우리 主上殿下께서 先王 의 뜻을 미루어 받들어서 옛 모습대로 복구하시니 삼층의 고운 용마루가 빛났으며 노을 빛 무늬가 높게 번쩍이고, 千函의 불경[竺典]을 收藏하였으니 칠보 牙籤은 별같이 비 칩니다. 이에 淸淨한 佛徒들을 맞이하여 처음으로 慶讚의 모임을 열었습니다(세종24년 3월24일)

    ⑤ 興天寺, 皇華坊에 있는데, 禪宗에 속한다. 3층탑이 있 고, 釋迦如來의 舍利를 안치하였다. 태조가 세우고 밭 2백 50結을 주었다.(세종실록 지리지)

    ⑥이날 밤에 貞陵寺5층 舍利閣에 불이 났다.(중종5/3/28)

    흥천사 규모에 관한 실록기사를 보면 석조로 지어진 사리탑은 3층임을 알 수 있으나, 목조층각의 경우는 실록 만 하여도 3, 4, 5층의 기록이 다 있어서, 어느 것으로도 뚜렷하게 단정 짓기 어렵다. 특히 세종대에는 3, 4, 5층의 설명이 한꺼번에 나타나고 있다.

    이 중 태조대의 3층은 기획과정의 기록이기 때문에 실 제 건축과정에서 변화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3층 의 기록은 기단부를 제외한 목조층각의 탑신부만을 표현 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 중수이후의 기록과 소실시의 기 록까지 살펴보면, 5층의 기록이 가장 많고 4층은 세종대 에 “八面四層之殿”으로 평면의 형태와 함께 나타난다.

    흥천사 사리전각의 층수에 대해서는 학자들도 일정한 견해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진홍섭은 석탑은 3층이고, 석탑을 감싸는 목탑은 5층이지만 4층과 3층 기록이 섞여 있어 3층과 4층의 가능성을 함께 설명하였고24), 강병희는 초창당시 3층 혹은 5층이었다가 태종대 보수하면서 구조 의 변동이 있어 4층으로 변경되고, 세종대 5층으로 다시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25) 또한 조선 초기 석탑의 사례 로 목조전각보다는 석조사리탑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외 부 목조건축은 누각의 형태로 설명한다. 그리고 이강근은 연복사의 예를 들어 내부는 3층 외부는 5층이었을 가능 성을 예시로 8각 3층 목탑으로 설명하고 있다.26)

    건물의 층수에 대한 옛 기록을 보면, 흥천사뿐만 아니 라 圓覺寺, 敬天寺의 10층 석탑을 13층으로 전하고 있 다.27) 이것은 기단부와 탑신부를 구분하지 않고 기단부를 함께 층수로 인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연복사의 경우는 5층이라는 기록에도 불구하고 내부 봉안물에 따라, 내부 공간을 기준으로 상·중·하층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태조2 년(1993)에 낙성한 연복사탑은 권근의 조성기에 “5층”이 라고 기록되어 있고, ‘불탑이라 함은 5층 이상이어야 한 다’28)는 당대의 인식에도 불구하고 연복사의 상층은 불사 리를, 중층은 대장경을, 하층은 비로자나의 초상을 모셨다 는 설명에 의거 3층으로도 설명하는 것이다.29) 연복사탑 은 불전을 갖춘 거대한 목탑으로 조선건국 직후 한양 신 도읍이 정비되기 전까지, 국왕과 신료들이 내왕하여 불교 행사와 기양의례를 하던 곳이다. 흥천사의 경우도 목조전 각부에 표찰이 있었고, ‘塔殿’이라는 설명과 함께 볼 때, 석탑을 둘러싸는 외부의 목조전각 또한 탑의 형태로 건축 되었으므로 5층으로 기획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현존하는 기사 중에는 5층의 기록이 가장 많으며, 소실시 의 기록 또한 5층으로 전하는 점을 볼 때, 당시 기단부를 포함하여 층수에 산입하는 인식에서는 5층 목조탑의 표현 이 일반적인 것이다. 즉, 흥천사 사리전각의 5층이라는 표현은 기단부를 포함한 개념으로 생각된다. 2층의 기단 부와 3층의 탑신부의 층수를 합한 것이다. 특히 ④의 기 사 중 5층 사리전각에 대하여 ‘3층의 용마루’ 라는 기록 은 목조전각의 탑신부가 3층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30)

    (4)흥천사 사리전각의 의장

    흥천사 사리전각 및 사리석탑의 의장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다만『陽村集』및 實錄의 기사와 당시 흥천사 사역 내 건물들의 위상을 통해 볼 때, 궁궐의 제도에 맞춘 修飾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권근의 흥천사 조성기에는 김사행에 의해 1차 완공될 당 시 서까래와 기둥에 금빛단청을 하여 매우 웅장하고 화려하 였다고 전한다.『고려사』에 나타난 고려시대 단청의 기록 중에, “金碧丹靑”이라는 용어가 있다.31) 금벽단청이란 금이 사용된 화려한 단청을 뜻한다. 고려시대에는 일반 私家에서 도 단청을 하였지만, 금단청의 기록은 없다. 궁궐건축에서 화려한 금단청을 하였으며, 흥천사의 경우는 기둥만이 아니 라 서까래까지 금단청을 하여 매우 화려하였음을 알 수 있 다. 또한 외부틀인 목조전각에 표찰을 세워 겉에서 보면 상륜 이 있는 목탑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흥천사와 함께 조선의 양종을 대표하며 이성계에 의해 영 건된 흥덕사 수리 기사 중에는 가공된 돌을 사용하여 기단 을 구성하고 화공과 초공을 ‘전과 같이’ 그대로 허용하여 중 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전과 같이 라는 기록의 의미와, 같 은 시기 공사 중이었던 흥천사의 상황으로 보면, 흥천사 또 한 기단부와 계단에 가공석을 사용하고 화공과 초공을 사용 한 포작의 구조로 건축하였을 것이다.32) 또한 기와와 취두를 사용하였는데, 가공석과 화공 및 취두를 사용하는 등의 이유 로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이는 경국대전에 의한 궁궐의 제도를 따랐기 때문이다.

    4-3.흥천사의 사리보장 방식

    ‘사리’는 불교에서 사장 귀한 것이며 그로 인한 의례와 행위 등이 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사리를 모시는 공간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에 의해 이루어지며, 진신 사리를 모시는 건축 또한 최고의 기술과 장엄이 요 구되었다.

    전통적인 한국의 사리탑은 사리기를 제작하여 누각식 석탑 혹은 목탑에 매납하는 방식으로 정착되어 왔다. 특 히 석탑제도가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존 건축제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흥천사를 지은 건축 가들은 탑과 탑을 에워싸는 보호공간의 이중구조를 고안 하여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사리보장처를 만들었다. 따라 서 흥천사 사리전각 조성에는 기존 사리 보장처의 건축사 례 이외에 새로운 구조를 도입하기 위하여 이전의 건축과 는 다른 기술이 요구되었다.33) 여기에는 일반적인 사리봉 헌과 달리 사리를 친견할 수 있는 사리보장방식이 필요하 였기 때문이다.

    (1)일반적인 사리봉헌방식

    사리를 여러 겹으로 봉안하 는 법식은 설가모니 열반 후, 시신을 4중의 관에 안치했다 는 기록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데,34) 사리봉헌은 겹겹의 사리장치를 만들고 탑을 세우 는 것으로 완결된다. 인도에서 는 탑을 세우기 전 누각에 봉 안하여 사리를 공개하는 공양 을 하였다.35)<Fig.2> 실제로 중국의 경우 남북조시대에는 사리를 탑 내에 안치하는 대 신 전각에 안치하고 공양을 드렸다는 문헌이 전하며, 탑 에 안치하는 경우 탑 아래, 즉 땅 속에 매납하느냐〔地 宮〕, 탑신에 매납하느냐〔天宮〕로 나뉜다.

    하지만 사리는 탑에 안치하는 것이 현재까지 전해지는 일반적인 방식이다.36) 우리나라도 탑에 사리를 봉안하는 것이 보편적인 공양이었는데, 사리보장의 형식을 현존사 례를 기준으로 보면, 4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사리를 땅속에 매납하는 地宮이다. 오대산 상원 사 사자암이 그 예이다. 지궁 앞에는 적멸보궁 편액의 목 조전각이 있으며, 적멸보궁 안에는 불상이 없고, 대신 유 리창 밖으로 보이는 지궁에 예불을 드린다. 사자암의 지 궁 앞에는 5층의 누각식탑이 새겨진 석비가 있다. 사리점 유공간과 목조배례공간이 구분 되어 있는 것이다.

    둘째, 사리를 탑 안에 봉안하여 탑을 해체하기 전에는 볼 수 없는 구조이다. 현재 봉정암 적멸보궁, 정암사 수 마노탑, 법주사 세존사리탑의 예가 남아 있다. 이 중 법 주사 세존사리탑은 고려 공민왕11(1312)년에 봉헌된 것으 로 회암사 사리전37)과 함께 흥천사 사리탑의 형태를 유 추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예이다. 봉정암은 연꽃이 새겨 진 자연암석의 기단위로 5층탑신을 구성하고 그 앞에 목 조전각을 두었다. 정암사 수마노탑은 석재를 벽돌모양으 로 가공하여 만든 7층 석탑이며 전각과 조금 떨어져서 다소 높은 곳에 위치한다. 낮은 곳에 있는 적멸보궁에도 불상은 없으며, 역시 사리공간과 배례공간이 구분되어있다.

    셋째, 사리봉안처를 석종과 계단의 형태로 꾸미고 그 앞에 배례 공간을 두는 방식이다. 통도사, 도리사, 금강 사가 대표적인 예이다. 석종과 계단의 양식은 신라 때부터 사리봉안의 보편적인 형태였던 것으로 보인 다. 8세기 일본 동대사도 금강계단과 석종의 형태로 사리 를 봉안하였다. 마지막으로 지궁과 부도가 결합한 것으로 법 흥사 적멸보궁이 그 예에 해당한다.

    위 사례들로 고찰하면, 사리공간과 사리에 예불을 하는 경배공간은 별도로 분리되어 있으며, 사리봉헌방식은 석종 형의 탑과 계단의 구조가 일반적이다.

    이 중 법주사 세존사리탑38)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리 탑과 달리 금당과 떨어져 별도 의 구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회 암사 삼화상의 부도와 같이 球 刑의 탑신을 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사리탑은 고려시대 변상 도에도 나타나고 있어, 당시 라 마교의 영향과 기존 선종의 흐 름에 의한 둥근 탑신의 형태가 사리탑에 적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39)

    (2)흥천사의 사리봉헌방식

    흥천사 사리전각의 사리봉헌은 기본적으로 탑에 사리 를 봉안하고 배례공간을 함께 구성하는 것이다. 가장 큰 특징은 사리를 親見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사리를 꺼내 고 다시 넣는 등 사리의 봉안이 자유로운 구조였다. 기존 의 사리보관처와 같이 땅속에 묻거나 석탑 내의 사리공에 두어 탑을 해체하지 않는 이상 꺼낼 수 없는 단순한 사 리보관처의 구조가 아니었다.40)

    ①엄이 부처에게 공양드리고 승려에게 잿밥을 먹였다. 舍 利閣에 들어가서 석탑에 올라 사리를 열어 보고 친히 손 수 봉해 두고 돌아왔다.(세종 원년 9/1)

    ②이명덕·원숙·원민생 등이 황엄을 좇아 흥천사에 가서 부처에게 공양을 올리고 승려에게 시주하고, 석탑을 열고 석가여래의 정수리 뼈와 사리 4개를 내어서 태평관으로 받들고 돌아갔다.(세종 원년 9/8)

    ③전에 태조께서, 속설로서 전하는 석가 여래가 세상에 살아 있을 때에 이[齒]에서 나온 舍利네 개와, 頭骨과 貝 葉經과 袈裟등을 興天寺석탑 속에 두게 하였는데, 내시 金龍奇에게 명하여 밤에 석탑에서 옮겨다가 내불당에 두 게 하고, 그 대신 석가여래 두골에서 나온 사리 네 개를 탑 속에 두게 하였다.(세종실록, 세종1/8/23)

    중국 사신이 석탑에 올라 사리를 열어보았다는 것은 흥천사 사리전각이 단순히 사리를 보관하는 곳이 아니라 사리를 충분히 친견할 수 있는 구조였음을 뜻한다. 따라 서 古例와 달리, 접근이 용이한 사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도 사리석탑의 보호장치로서 목조전각이 필요했을 것이 다. 또한 흥천사 사리전각의 사리석탑은 올라가서 문을 열었다는 정보로 유추하건데 기단부에 계단을 두고 탑신 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사리보장 방식은 사리 전유공간(지궁, 탑, 석종과 계단 등)과 배례공간으로 이분화 되어 있다. 따라 서 흥천사 사리전각도 사리 전유공간과 사리를 경배하는 공간으로 구분하여 기획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흥천사 사 리전각은 기존의 사리 보장처와 같이 두 공간을 별도로 조성한 것이 아니라, 사리전각 내에 사리탑을 둠으로써 쉽게 사리를 친견할 수 있는 사리보장방식을 취하였다. 이와 같이 흥천사의 사리전각은 진신사리를 쉽게 친견할 수 있는 구조였기 때문에 好佛君主였던 明永樂帝의 끊 임없이 사리 헌납요구가 있었다. 한편 사리전각은 표찰을 세운 거대한 목탑이면서도 내부에 석탑을 배치하였기 때 문에 구조적으로 취약하였으며, 수리방식에도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明皇帝의 사리 헌납요구와 구조적 문제와 같은 불편한 상황을 수용하면서까지 접근이 쉽고 사리용기 개폐가 용이한 구조를 건축한 이유는 무엇일까.

    흥천사는 승려뿐만이 아니라 한양을 유람하는 선비들, 도성내의 아녀자들 및 아동들의 학습장소로 많은 사람들 이 모이는 곳이었다. 법궁 및 궐외각사와 가까운 것도 이 유가 되겠지만,41) 부처의 사리를 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처음부터 일반 백성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장소로 기획 되었음을 뜻한다. 중국도 마찬가지로 역대 진신사리 공양 은 순수한 종교적 목적보다는 민심의 慰撫와 왕권의 정 당성 홍보를 위한 정치적인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사리공양과정에서의 의례와 사리의 분신과 같은 異蹟은 백성들에게 왕의 권위를 입증하는 효과가 있었다.42) 조선은 비록 유교를 국교로 하였지만, 개국 초 기에는 백성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하여 일상을 지배하 고 있는 불교의 힘이 필요한 시기였다. 불교적 일상에 살 고 있는 백성들이 자연스레 사찰에 모여서 신왕조의 보물 과 위패가 모셔진 공간에 관심을 두도록 함으로써, 백성 들에게 매우 상징적인 장소로 남을 수 있었다.43) 그렇기 때문에 3차 중수 시에는 사리탑과 전각을 분리하는 사리 봉헌방식이 제기되었지만, 태조에 의해 세워졌던대로 사 리친견이 가능한 봉헌방식을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44) 따라서 사리의 친견과 수납이 용이하도록 의도된 흥천사 사리석탑의 구조와 형태는 당시의 불교계의 흐름 및 시대 적 상황 연결 지어 추정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 이다.45)

    5.결론

    이상의 고찰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유교국가 조선에서 흥천사가 中宗대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祖宗의 사찰이라는 상징성과 東國에 유 례없는 건축물인 사리전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사리 전각 안에 친견공양이 가능한 부처의 진신사리를 두어 명 과 왜에까지 유명한 한양의 랜드마크였다.

    둘째, 흥천사 사리전각은 8각 층각과 석조탑으로 구성 된 이중의 틀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형태와 규모에 대한 기록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아 그에 따른 해석이 다양하 다. 본 연구에서는 건물의 층수에 대한 옛 견해에 미루어, 겉틀은 이중기단위에 3층 탑신을 두고 표찰을 세운 탑의 형태였으며, 내부에는 계단이 있는 이중기단의 석조사리 탑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셋째, 일반적인 사리 공양은 사리 장엄구를 갖추어 탑의 탑신 혹은 찰공 내에 보관함으로써 사리를 친견이 불가능 하였다. 그러나 흥천사 사리전각은 사리친견 뿐만 아니라, 필요에 따라 사리의 이동도 가능하였다. 따라서 일반적인 사리보장처와 달리 사리전유공간과 경배공간이 공존하고 있었으며, 사리의 공개공양이 가능하였다.

    넷째, 흥천사는 역성혁명으로 출발한 조선이 개국 초기 민심을 수습하고, 新舊세력이 융합하기 위한 곳이었다. 또한 유교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명의 사리요구와 祖宗의 사찰임을 내세우며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 서는 이전의 사리보장처와 다른 새로운 형식의 사리봉안 방식이 요구되었고, 그것을 건축으로 구현한 것이 사리전 각이다. 따라서 흥천사 사리전각은 당시 정치적 배경, 외 교적 상황, 불교의 흐름 및 대외적 교류관계 속에서 최고 의 대안을 찾아 구현된 조선 초기 대표적인 건축이었다.

    Figure

    JAH-24-61_F2.gif

    Mogao Caves No.323(출처;중국고대불사리 장엄연구,p66)

    Table

    Documents of Heungcheon-Temple

    Space Organization of Heungcheon-Temple

    Construction list of Heungcheon-Temple

    The name of Heungcheon-Temple in Sillok

    Story and name list of Heungcheon-Temple

    Sarira offering method before Heungcheon-Temple

    Footnote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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