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al Search Engine
Search Advanced Search Adode Reader(link)
Download PDF Export Citaion korean bibliography PMC previewer
ISSN : 1598-1142(Print)
ISSN : 2383-9066(Online)
Journal of architectural history Vol.23 No.4 pp.101-111
DOI : https://doi.org/10.7738/JAH.2014.23.4.101

A Study on the Survey and the Conservation of the Korean Historic Buildings in the “Seikou” published from 1937 to 1943

Min-Suk Kim*1)
Corresponding Author : baramsook@gmail.com
June 15, 2014 August 15, 2014

Abstract


『淸交』 로 보는 한국 건축문화재 조사 및 보존에 관한 연구

김 민숙*1)
(일본 와세다(早稲田)대학 이공학술원종합연구소 초빙연구원)

초록

The magazine (Bulletin) of ‘Seikou’ was made by conservation engineers to exchange information about the survey and repair work of historic buildings in Japan before World War II. This magazine has 26 volumes in total, and was published periodically four times a year from April 1937 to December 1943. Publisher is Nindokai that is supposed to the forerunner of Bunkenkyo (the Japanese Association for Conservation of Architectural Monuments). Only 3 or 4 organizations except personal possession have it now. And it has a limit to use the contents of the article as a general historical material. So, it was rare that experts and researcher used to the ‘Seikou’. However, this study focuses on the articles of the Korean historic building, which is sometimes appeared in it, although there are few.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clarify the fact-finding of the conservation for the Korean historic building in Japanese colonial period by analyzing the articles in historical records of ‘Seikou’.


    Japan Society for the Promotion of Science
    22760493

    1.서 론

    1-1.연구의 배경 및 목적

    현행 건축문화재 조사 및 보존수리공사의 시작은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선행연구를 통해 이 미 기초적인 연구사는 정리된 바 있다.1) 또한 2000년대 에 들어서면서 문화재 보존에 관한 연구 논문수의 증가 와 새로운 자료의 발굴에 따른 연구 성과가 꾸준히 뒤를 잇고 있어 일제강점기 한국의 건축문화재 수리기술자와 수리공사내용에 대해서도 조금씩 명확해지고 있다.2) 그 러나 당시의 일본인 수리기술자들을 중심으로 한 문화재 보존 현장에서의 지식 및 정보 교환 환경에 대해서는 아 직 공백으로 남아있는 부분이 많고, 당시 활동했던 인물 중 杉山信三의 회고록3)과 같은 자료들을 단서로 수리기 술자들의 담당현장과 인적 네트워크에 대해 일부 추측이 가능할 뿐이다.

    오늘날에는 건축문화재 수리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모 임으로 (사)한국문화재수리기술자협회4)와 (사)한국문화재 기능인협회5)가 존재하지만, 이들 모두 1980년대 후반에 서야 조직된 것이다. 본 연구는 근대적 문화재 보존수리 공사가 시작된 일제강점기에도 오늘날과 같은 조직이나 활동이 있었는지, 아니면 문화재보존과 관련된 모든 활 동이 조선총독부를 주축으로만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의 문에서 착안한 것이다.

    동시기의 일본의 상황을 살펴보면, 1930년대 후반이 되면 일본 전국에 산재하는 문화재 수리현장을 총괄하는 단체가 없어 기술자 상호간의 연락, 정보 교환 등이 어 려운 점을 들어 수리기술자들이 주축이 되어 친목 도모 와 연락망 구성을 위해 忍冬會라는 동호회를 조직하고 『淸交』라는 會誌를 발행한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한 국에서 활동했던 일본인 수리기술자들의 공식적인 모임 은 아직까지 보고된 바 없으나 그들은 한국으로 건너오 기 전에 일본에서 문화재 관련 일에 종사했던 경력을 가 지고 있거나 한일 양국에서 활동을 하기도 했다.

    鈴木嘉吉는 일본의 건축문화재 수리와 관련된 움직임 으로서 忍冬會의 결성과 그 기관지인 『淸交』의 발행 을 특기할 만한 것으로 꼽고 있다. 忍冬會는 수리공사 관계자들 간의 친목 도모와 연락을 위한 조직으로 처음 에는 法隆寺수리현장에 본부를 두어 발족하고 季刊誌 인『淸交』를 발행했다. 鈴木는 이 책자에 대해 ‘고건축 의 보존에 관한 의견, 기법에 관한 연구, 수리시의 발견 에 대한 자료 보고, 현장 통신 등이 게재되어 있어 수리 관계자 상호 간의 계발․능력 신장에 큰 역할을 함과 더 불어 보다 나은 수리를 충실히 행하기 위한 연대의식을 높였다.6)’라고 평가하고 있다.

    『淸交』라는 자료의 존재에 대해서는 이미 몇몇 연 구자들의 논고를 통해 확인할 수 있고7) 최근에는 일본의 文化財建造物保存技術協会의 機関誌인『文建協通信』 에서 특집8)으로 다룬 바 있다. 국내에서는 『淸交』가  1차 사료로서 주목받은 적은 없었으나 『韓國文 化財保存攷 日政期資料集成1』9)의 「1-2 한국건축 보존공사회고」에서 간접적으로 언급된 바 있다.10)

    青柳憲昌는『淸交』에 실린 일본의 고건축 보존에 관 한 의견들을 취합하여 1935년대의 문화재 수리기술자들 의 보존관에 대해 고찰한 바 있다.11) 이것은 『淸交』를 1차 사료로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선례이다.

    그러나 『淸交』는 그 사료적 가치는 학계나 문화재 계에서 인정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희소한 귀중 본12)이기에 문화재 보존에 관한 기존 연구에서는 거의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본 연구는 『淸交』가 국내에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 은 자료라는 점에서 『淸交』에 대해 간략한 개요를 소 개한 후에 『淸交』에 게재된 한국 관련 기사들을 살펴 봄으로써 1930~40년대의 건축문화재 조사에 대해 알아 보고, 수리공사와 관련된 기사를 통합 분석함으로써 일 제강점기 문화재 수리공사 현황에 대해 가시적으로 복원 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또한, 한국 건축문화재보존 사에 있어서의『淸交』의 사료적 가치에 대해 고찰하고 자 한다.

    1-2.연구방법

    일제강점기의 건축문화재 보존의 실태를 보다 명확하 게 규명하기 위해서는 단편적이나마 당시의 문헌사료로 부터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취합하여 정보간의 연결고리 를 찾아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연구자료는 『淸交』창간호(1937년 4 월)부터 최종호인 제 26호(1943년 12월)까지 모두 활용 하였다. 이들 자료 중에 한국 관련 기사를 우선적으로 검토하였고 短信과 같은 소식란 등도 적극적으로 확인하 였다. 또한, 자료의 정확성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부수적 으로 관련 참고문헌 등도 함께 살폈다.

    2.『淸交』와 한국 관련 기사

    2-1.『淸交』의 창간 배경과 ‘淸交’의 의미

    『淸交』(제 1호(1937년 4월)~제 26호(1943년 12월), Fig.1)는 忍冬會의 동인지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간행된 잡지로 불과 7년 동안만 존속했지만, 季刊誌로 총 26호 까지는 꾸준히 발행되었다.

    건축사가 太田博太郎는 忍冬會의 출발과 『淸交』의 창간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13)

    고건축의 수리현장은 전국에 널려 있다. 예전에는 현장 기술자 사이의 상호연락이 없어 이름은 알고 있어도 만 난 적은 없어 지식 교환 등은 거의 없었다. 竹原吉助씨 는 이것을 우려하여 忍冬會를 만들고 『淸交』라는 잡 지를 발간했다. 昭和12년의 일이다. 물론 등사판이었 다.『淸交』는 昭和19년14)에 26호까지 발간되고 전쟁 때문에 휴간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昭和27년에 『고 건축』으로 개명하여 부활했다. 그러나 이 잡지도 편집 담당자의 부담이 커 昭和53년에 35호를 마지막으로 휴 간하게 되었다.

    여기서 昭和12년은 1937년으로 발간인 竹原吉助는 大阪의 富田林에 있는 錦織神社의 수리에 참여하기 시 작한 때이고,15) 일본의 문화재보존사에서는 法隆寺의 昭和대수리(1934년~1985년)가 시작되면서 浅野清를 비롯한 수리기술자들의 본격적인 수리에 대한 철학이 엿 보이기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창간호는 1937년 4월에 발행되었고, 마지막 26호(1943 년 12월)까지 편집담당은 竹原로부터 日名子元雄, 古西 武彦의 순으로 바뀌었다.

    ‘淸交’의 의미에 대해 『淸交』창간호에서 阪谷精 軒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16)

    어려운 동양의 고전에서 따온 것이 아니라 위인의 금언 에도 없을 것 같다. 단지 앞에서도 서술한 바와 같이 이 잡지는 청아한 이야기(淸談)를 나누고 지식을 교환할 목적으로 만든 것이기에‘청(淸)’과‘교(交) ’의 문자 를 각각 따서 이렇게 명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2-2.『淸交』로 보는 한국 관련 기사

    『淸交』총 26권 중 12권(46.2%)에 한국 관련 기사 (제 3호, 제 4호, 제 7호, 제 8호, 제 9호, 제 11호, 제 13호, 제 14호, 제 15호, 제 16호, 제 20호, 제 23호)가 있었다.

    또한 기사의 내역별로 보면, <Fig.2>과 같이 한국의 건축문화재 수리공사에 대한 간략한 보고가 3건(제 8호, 제 9호, 제 15호), 재해와 관련된 기사가 1건(제 13호), 한국건축에 대한 논고가 4건(제 15호, 제 16호, 제 20호, 제 23호)이 게재되어 있다. 그 외에 수리현장과 담당자 등에 관한 정보(제 3호, 제 4호, 제 7호, 제 11호, 제 13 호, 제 14호, 제 16호, 제 20호)가 꾸준히 실려 있는 것 을 알 수 있다.

    우선 수리관련 기사를 보면<Tab.1>, 제 8호와 제 9호 에는 건물의 소재지, 건물의 규모와 형식, 구조 등에 관 해 간략히 보고하고 있는 것에 반해, 제 15호에서는 수 리공사 4건(成川東明館, 水原蒼龍門, 華嚴寺覺皇殿, 修德寺大雄殿)에 대해 각 건물의 기본정보는 생략하고 예산, 현장 담당자, 수리의 진척상황에 대해 간략히 보고 하고 있다. 또한 제 8호의 기사에는 언급된 수덕사 대웅 전의 내부사진이 게재되어 있으나 저자명은 기재되어 있 지 않고, 제 9호와 제 15호의 기사에는 도판은 없으나 각각 보고자가 명시되어 있었다.

    다음으로 『淸交』에는 재해로 인한 일본의 건조물 문화재의 피해상황에 대한 보고나 방재와 관련된 기사들 이 다수 있지만, 한국의 건조물 문화재와 관련해서는 『淸交』제 13호에 실린 「낙뢰가 한 일(かみなりのし わざ)」17)이라는 기사가 유일하다.

    杉山信三는 이 글을 쓴 계기에 대해, 『淸交』제11 호에 실린 「斑鳩日記」에서 法隆寺東院남문의 서까 래가 검게 탄 것으로 보이는 것은 낙뢰로 인한 피해라고 한 것을 보고 자신이 조선에서 경험했던 낙뢰의 흔적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고 밝히고 있다.

    杉山는 이 글에서 낙뢰의 흔적을 水原八達門과 成川 東明館에서 보았다고 하고 있으며 그 피해상황에 대한 조사내용을 사진게재와 함께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기사에 의하면, 水原八達門은 1938년 8월 중순에 낙뢰 피해를 입었고, 용마루의 서 쪽이 피해를 입어 용마루 부 분의 석회가 박리되었으며 상층 내부에서는 <Fig.3>의 왼쪽 끝에 있는 기둥 상부에 서 그 흔적을 발견했으나 그 기둥을 타고 이동하지 않고 <Fig.3>의 중앙에 있는 기 둥에서 번개가 지나간 흔적 을 발견했다고 하고 있다.

    成川東明館은 상층과 하 층 기둥의 목재 종류가 달라 상층은 八達門과 같은 흔적 을 남기고 있었지만, 하층 기둥은 나무결이 고르지 않 아 불규칙하게 갈라져 있고 기둥하부의 초석은 두 개로 나눠져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일본의 건조물 문화재에 피뢰침을 설치하기 시작한 것 은 明治8년(1875)으로 尾山神社神門에 설치한 예가 최초로 알려져 있다. 그 뒤를 이어 1891년에는 春日大社 本殿에 피뢰침이 설치되었고, 興福寺(1907년에 설치), 法 隆寺金堂ㆍ五重塔(1909년에 설치), 東大寺金堂등에 피뢰침이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건조물 문화재 수리공사 관련 자료에서 피뢰침 설치에 대한 언급은 찾아보기 어렵고 당시 건조 물 문화재의 낙뢰 피해에 대한 조사가 있었다는 것도 현 재로선 杉山의 이 글이 최초가 아닐까 사료된다.

    한국건축 관련 기사를 보면<Tab.2>, 米田美代治의 가람배치에 관한 고찰을 제외하면 모두 개별 건물에 대 한 소개에 그치고 있다. 清平寺極楽殿에 대해서는 건립 연대에 관한 고찰을 하고 있고, 海州文廟大成殿과 貝葉 寺寒山殿에 대해서는 보물 지정에 이르기까지의 문화재 로서의 가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 외에 한국의 건조물 수리공사에 대한 정보를 제공 하고 있는 것은 『淸交』제 3호(1937. 11.), 제 4호(1938. 4.), 제 7호(1938. 11.), 제 11호(1939. 11.), 제 13호(1940. 4.), 제 14호(1940. 7.), 제 16호(1941. 2.), 제 20호(1942. 3.)로 총 8권이다. 각 권별 기재정보는 조금씩 다르지만, 당시의 문화재의 지정구분, 건조물 문화재의 소재지, 수 리 대상과 수리에 관여한 담당자수, 예정공기 등을 파악 할 수 있다. <Tab.3>은 각 권별 정보의 기재유무와 수 리 인원수 등을 정리한 것이다. 『淸交』에서 파악할 수 있는 수리 현장은 총 9개소(華厳寺 覚皇殿, 修徳寺大 雄殿, 平壌大同門, 義州統軍亭, 清平寺極楽殿, 成川 東明館, 水原蒼龍門, 開心寺大雄殿, 長安寺四聖殿)로 수리기술자18)로서 가장 많은 인원이 등장하는 것은 제 7 호(총 18명19))이다. 이 중 제 7호의 吉川孝次를 제외하 면 각 호에서 총독부 소속으로 표기된 인물과 현장 멤버 중에 중복된 이름은 없었다.

    3.『淸交』로 보는 한국 건축문화재 보존수리 및 『淸交』의 사료적 가치

    3-1.1930-40년대의 한국 문화재 수리현장과 담당 수리기술자들 간의 상호관계

    <Tab.4>는 2-2절의 한국 관련 기사 중 건조물 수리 공사에 대한 정보20) 및 수리기술자들의 전근에 관한 뉴 스 등을 발췌하여 표로 정리한 것이다. 21) 이 표를 바탕 으로 각 수리기술자의 담당 업무 및 담당 현장 등을 정 리한 것이 <Tab.5>이다. 수리기술자는 총 21명, 혹은 22명으로22) 吉川孝次는 현장 3개소를 담당하고, 6명의 수리기술자(小川敬吉, 池田宗亀, 杉山民治, 岡田栄, 野村 孝文, 板谷定一)가 현장 2개소를 담당했음을 알 수 있으 며 현장 담당 순서도 추정하는 게 가능하다. 小川敬吉23)

    와 池田宗亀24)가 修徳寺大雄殿공사25)현장에서 開心 寺大雄殿현장으로 이동했으며, 杉山民治, 岡田栄, 野 村孝文가 平壌大同門현장에서 成川東明館현장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아 동일한 수리 현장에서 일했던 수리 기술자들이 다음 현장으로도 같이 이동했음을 알 수 있 다. 한편, 成川東明館현장에는 앞의 3명 외에도 다른 현장을 마친 吉川孝次와 板谷定一가 합류하여 5명의 수 리기술자가 있었다.

    같은 현장에 있었던 수리기술자가 다음 현장으로도 함 께 이동한 것은 공사시기에 맞춘 것으로 사료되고 공사 도중에 다른 곳으로 이동한 수리기술자는 특별히 없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宮城忠一, 小川敬吉, 野村孝文, 杉山信三26)가 각 현장의 수리감독을 맡았고, 이들은 현장감독 뿐만 아 니라 다른 업무도 겸임하였다. 野村는 경성고등공업학교 교수와 平壌大同門공사감독을 겸임하였고, 小川는 修 徳寺大雄殿공사감독과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 고적담당자이기도 했다.27) 그 외에 藤島亥次郎는 동경제 국대학 교수이면서 華厳寺 覚皇殿공사 고문이기도 하 였다.

    한편 현장 담당자에는 한국인으로 보이는 이름도 있어 華厳寺 覚皇殿에는 楊澈洙, 修徳寺大雄殿에는 鄭愚 鎮, 清平寺極楽殿에는 李漢哲28)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 다. 이 이외에도 『淸交』회비 납부자 명단에서 朴滉植 이라는 이름이 보인다.29)

    또한 『淸交』에는 수리기술자들의 전임 소식도 전하 고 있다. 清平寺極楽殿수리공사에 참여했던 李漢哲은 수리공사 완료 후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에 근무30)하게 되었고, 板谷定一는 <Tab.5>에서 清平寺 極楽殿공사 완료 후에 成川東明館현장으로 이동을 하지만, 두 공사현장 사이에 공백기 중에는 일시 귀성을 한 것 같다.31) 그 외에도 鄭愚鎮은 修徳寺大雄殿수리 공사를 퇴직한 후에는 충청남도 도청 토목과로 전임했으 며32), 小川敬吉는 1939년 8월 9일부로 조선총독부 철도 국 겸 학무국으로 소속이 변경되었고, 경성박물관 사무 소에는 杉山信三, 米田美代治, 李漢哲이 근무했음을 알 수 있다.33)

    한편, 한국의 건조물 수리에 대한 직접적인 보고는 아 니지만, 한국의 벽화 보존과 관련하여 杉山信三는 岡正 夫34)가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부석사 조사당 벽화의 보존 방법을 마련하는 일에 관여했던 인물임을 밝히고 있 다.35)

    또 『淸交』에는 杉山信三와 岡正夫, 杉山信三와 米 田美代治, 小川敬吉와 阪谷良之進의 관계를 엿볼 수 있 는 기사도 있어 한국에서 활약한 수리기술자들의 교류관 계를 유추하는 것도 가능하다. 구체적인 내용은, 3-2절에 서 고찰하도록 하겠다.

    3-2.일제강점기 수리기술자들에게 있어서의 『淸 交』의 가치

    『淸交』가 일본인 수리기술자들의 지식 교환을 목적 으로 만들어진 잡지라는 것은 앞에서 이미 밝힌 바 있 다. 이 절에서는 한국에서 활동했던 일본인 수리기술자 들에게 『淸交』가 어떤 의미를 가진 잡지였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杉山信三는 『淸交』제 2호에 이 잡지의 발행에 관해 그 소감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36)

    (전략) 내지에 있을 때조차도 전국에서 일하고 계신 분 들과 뜻을 같이 하면서도 어느 분이 어디에 계신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만, 조선에 있으면서는 더더욱, 또한 평 소에 지도를 받고 있는 분에게조차 무소식이 지나쳐 전 혀 아무런 소식도 전하지 못하고 있어 정말 죄송하기 그지없던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참에 이 기획을 보고 만약 이것을 통해서라도 평소의 결례를 용서받을 수 있 다면 더할 나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중략) 조선에도 제가 온 뒤로 많은 분들이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기 위 해 오셨습니다. 그 분들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계시리 라 생각합니다. 가능하다면, 그분들과 연계해서 忍冬會 조선지부를 만들어야 할까요? 마침 오늘 오후부터 강원 도 춘천군 청평사 극락전의 수리현장에 갑니다. 현장 주임은 筑摩神社공사를 마치고 온 板谷씨입니다. 이 기획 취지를 전하여 현장차원에서 이 기획에 찬성하고 회원으로 가입하도록 합시다. 이 출장에서 돌아오면 경 성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여 그쪽 단체 의 상황을 알게 하고 조선지부를 만들도록 힘써서 조선 의 상황도 전하는 원고를 쓰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기관지를 받아 보기 전에는 각 현장의 사진인화 교환회 라도 조직한다면 서로 도움이 될 일이 많지 않겠습니 까? 특히 조선의 건축은 내지인들에게는 드문 사례이고 내지의 건축은 조선에 있는 저희에게는 향수를 느끼게 하는 것으로 그런 기회를 만든다면 하고 생각해 보았습 니다만, 이 『淸交』를 받아보고서 제 바램은 이쪽에서 삽화라도 될 만한 사진을 많이 보내면 자연스럽게 이뤄 지리라고 생각합니다. (후략)

    杉山의 바램이 어느 정도 성취되었는지에 대해서 는 忍冬會 회원명부나 원고 집필 여부 등으로 확인 하는 것이 빠르겠으나 회원명부 확인이 되지 않아 『淸交』의 회계보고 및 회비납부자 명단을 중심으로 이 모임에 뜻을 같이 한 사람들을 살펴보고자 한 다. 당시 한국에서 활동한 수리기술자들37)의 이름을 <Tab.6>와 같이 확인할 수 있으며 동일인의 경우 는 가장 먼저 등장한 경우만 표기했다. 『淸交』제 3호가 간행된 1937년 12월의 시점에는 이미 杉山信三 와 吉川孝次가 忍冬會활동에 참가한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淸交』제 9호가 간행된 1939년 봄까지 총 11 명의 수리기술자가 이 활동에 동참을 표했음을 알 수 있 다.

    <Tab.2>에서 알 수 있듯이 『淸交』에는 비록 한국 건축에 대한 기사건수는 적으나 각 기사와 관련된 사진 이나 도면을 본문 중에 삽입하거나 삽화로서 이용한 부 분은 본 절의 서두에 소개한 杉山의 『淸交』간행에 대한 소감 인용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杉山는 시각적 자 료인 사진을 인화해서 교환하는 것을 이상적인 지식교환 중 하나라 생각한 것 같고, 『淸交』라는 매체를 이용하 여 그것을 실현하려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오늘날과 같이 정보교환이 용이한 시대에서는 당연한 방법론이지 만, 서로간의 교류가 힘든 약 7,80년 전의 상황에서는 『淸交』속에 실린 사진과 도면의 자료적 가치는 상당히 높았다고 볼 수 있다.

    3.1절에서 살펴보았듯이 수리현장에는 한국인 담당자 들도 있었으나 아쉽게도 그들이 원고를 투고한 흔적은 없다. 楊澈洙, 鄭愚鎮, 李漢哲이 忍冬會의 활동이나『淸 交』를 구독함으로써 직․간접적으로 받은 영향이 있는 지에 대해서는 현재로선 알 길이 없다.

    마지막으로 『淸交』의 忍冬會의 동인지로서의 성격 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수리현장이나 건축물에 관한 소개 이외에도 수리기술자들 사이에 어떻게 인맥이 형성되었 고 또 어떤 교류가 있었는지에 대한 회고록들이다.

    부석사 조사당 벽화 보존방법에 대한 연구 촉탁을 맡 았던 岡正夫는 杉山信三의 학교선배였고,39) 杉山信三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성불사 수리현장으로 간 米田美代 治를 대신하여 조선총독부 박물관 일을 담당했다.39) 小 川敬吉는 러일전쟁이 끝나고 난 후 1907년 여름에 일본 内務省宗教局古社寺室에서 阪谷良之進과 함께 특별 보호건조물 보존에 관련된 일을 하면서 매일 함께 도면 을 그리고 일본건축의 장래와 기술자의 포부에 대해 이 야기를 나누던 사이였다고 한다. 40) 이후 내무성에서 문 부성으로 이동했을 때에도 함께 일했던 사이였으나 각자 맡은 일이 달라져 헤어지게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한국과 일본에서 각자 고건축 보존 업무를 하였다. 小川는 내무 성 시절부터 조선총독부로 이동하고 나서도 阪谷로부터 지도 편달을 받았다고 회고하고 있는데,41) 그 중 하나가 아마도 1933년에 실시된 阪谷의 조선시찰여행이 아닐까 한다. 이 시찰여행은 조선총독부가 조선 고건축 보존사 업의 현황 시찰과 지도를 위해 阪谷를 초빙한 것으로 小 川가 기획한 것으로 되어 있다.42) 이를 정리하면 <Fig.4>와 같다.

    5.결론

    이상에서 본 연구를 통해 『淸交』에 등장하는 한국 의 건축문화재 조사 및 보존에 대하여 살펴본 바를 『淸 交』에 보이는 한국 관련 기사의 특징, 1930~40년대의 수리현장과 수리기술자의 상관관계, 그리고 『淸交』의 사료적 가치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 다.

    첫째, 『淸交』에 나오는 한국 관련 기사는 건축문화 재 수리공사에 대한 간략한 보고가 3건(제 8호, 제 9호, 제 15호), 재해와 관련된 기사가 1건(제 13호), 한국건축 에 대한 논고가 4건(제 15호, 제 16호, 제 20호, 제 23 호)이 게재되어 있다. 그 외에 수리현장과 담당자 등에 관한 정보(제 3호, 제 4호, 제 7호, 제 11호, 제 13호, 제 14호, 제 16호, 제 20호)가 꾸준히 실려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둘째, 한국의 건축문화재 수리현장은 총 9개소이고 수 리기술자는 약 20여명이며 그 중 3명은 한국인이다. 한 현장의 공사가 끝나면 그 현장에 있었던 수리기술자들은 다음 현장으로도 같이 이동하는 경향을 보였고, 이는 공 사시기에 맞춘 이동으로 보여진다. 공사감독은 일본인 수리기술자들이 맡았다.

    셋째, 『淸交』는 일본 내의 수리기술자들 뿐만 아니 라 한국과 일본의 건축문화재 보존 소식을 접할 수 있는 매체였을 뿐만 아니라 각자가 가지고 있는 정보와 지식 을 교환할 수 있는 장으로서의 역할을 한 잡지라고 할 수 있다. 杉山信三가 주축이 되어 한국의 건축문화재 보 존수리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던 기술자들도 1937년부터 忍冬會에 참가하기 시작하여 1939년에는 대부분의 수리 기술자들이 이 모임의 회원으로 가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국인 현장 담당자들은 忍冬會회원으로 가입은 한 것으로 보이나 원고 투고 흔적은 없어 『淸交』가 한국인 수리기술자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파악할 길이 없었다.

    본 연구는 아직 미흡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淸交』 라는 희소 자료를 국내에 소개하고 사료 속에 묻혀있던 1930~40년대의 한국의 건축문화재 수리를 둘러싼 각종 정보들을 취합하여 수리기술자들의 현장이동과 일본인 수리기술자들의 인적 네트워크 등을 가시적으로 복원할 수 있었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Figure

    JAH-23-101_F1.gif

    The first issue (left), the second issue (center), the 13th issue (right) of the “Seikou”

    JAH-23-101_F2.gif

    The Korean-related articles on the “Seikou”

    JAH-23-101_F3.gif

    Upper-story Inside of Paldal Gate, Suwon damaged by Thunder (“Seikou”, No.13, 1940. 4, p.30)

    JAH-23-101_F4.gif

    Interchange relation of the Japanese conservation engineers

    Table

    Construction report for the Korean historic buildings on the ‘Seikou’

    Article on the consideration of the Korean historic buildings

    Articles of conservation and repair for the Korean historic buildings in the “seikou”

    Conservation engineers and repair works for the Korean historic buildings in the “seikou”

    Activities of conservation engineers in Korea appearing in the “seikou”

    Entrant of the “seikou”

    Footnote

    Reference

    1. Architectural Institute of Japan (2001) 『DevelopmentHistory of Modern Japanese Architecture (近代日本建築学発達史)』 , 下巻, Bunseishoin (文生書院),
    2. Han Jaesoo (1987) 「A Study on the Evolvement ofScience of Architectural History in Korea」 , Graduate School of Hanyang University,
    3. Korean Association of Architectural History (2003) 『Studyon the Korean Architecture Ⅰ: Fields and Times』 , Baleon Publishing Company,
    4. (1937) Nindokai , 『Seikou』, No.1~No.26, 4.~1943.12
    5. Nobuzo Sugiyama (1984) 『Medieval Architecture in Korea(韓国の中世建築)』 , Sagamishobo (相模書房),
    6. (2010) The Japanese Association for Conservation of Architectural Monument , 『JACAM REPORT (文建協通信)』, pp.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