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운주사 석탑과 윤등의 의미
1-1.운주사 원형석탑 연구의 의미
전남 화순군 도암면 소재 운주사는 천불천탑 사원으로 불릴 정도로 각양각색의 많은 석탑과 석불이 있다. 그간 운주사의 건립주체, 건립배경, 건립시기에 대하여 다양한 해석이 있어왔다. 즉 왜 하나의 가람에 이다지도 많고 다양한 석탑과 석불이 조성되었는가 하는 의문에 의한 답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이 다양한 견해로 제시된 것 이다.1) 운주사 석탑은 현재 22기로 파악되고, 이중 원형 석탑은 현재 4기가 알려져 있으며 전형적인 방형탑에 대 하여 이형적인 탑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원형석탑은 탑신이나 옥개석이 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원구형과 원반형으로 구분되고 있다. 기존 석탑과 전혀 다른 양식으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파격적인 조영기 법을 보여주기 때문에 한국은 물론 인도, 중국 등 불교 문화권의 석탑에서 그 원형(原形)을 찾지 못하고 있다.
원형다층석탑은 운주사의 상징적, 공간적 중심에 위치 하고 있다. 운주사 하면 반드시 언급되는 쌍배불이 있는 석조감실 앞에 원형다층석탑(일명 연화탑)이 있으며, 마 애여래불 앞에 원형석탑(일명 명당탑)이 있다. 비보설에 의해 건립된 운주사의 중심 석탑은 원형석탑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운주사에는 많은 석탑 석불이 있음에도 사원 배치의 주요시설인 석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유는 원형석탑이 석등의 역할을 대행하였기 때문이다.
원형석탑은 연등회, 팔관회 설행시에 궁궐 구정(毬庭) 에 설치하던 윤등(輪燈)을 석재로 번안한 석조물이 된다 고 할 수 있다. 윤등은 바퀴모양의 원반을 층층이 적층 하여 여러 개의 등잔을 놓을 수 있도록 시설한 등화시설 이다. 원형석탑은 석등의 범주로서 탑의 명칭을 부여한 다면 윤등석탑으로 호칭할 수 있을 것이다.2)
석탑과 석등은 그 실체 및 상징적 위계가 다르기 때문 에 현재까지 운주사의 석탑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수밖 에 없었다. 즉 기본적으로 불교적 입장에서 미륵도량으 로서 출발하여 풍수적 비보와 도교, 밀교와 천문학적 해 석이 있었다.
본고는 운주사의 원형석탑이 윤등을 석제로 번안한 석 탑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이에 수반하여 운주사의 석탑, 석불 등에 대한 새로운 각도의 연구를 수행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운주사의 연원과 성격, 정체성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1-2.윤등의 의미와 배치 형식.
윤등은 수레바퀴 형태의 등을 일컫는다. 불교에서 수레바퀴는 법륜을 뜻한다. 법륜은 부처님이 사르나트의 녹야원에서 최초의 설법을 통해 진리를 설했던 것을 상 징한다. 또한 법륜은 태양의 상징이며 정법의 상징이기 도 하다. 동시에 삶과 죽음을 반복하는 윤회의 상징이며 왕권의 상징이기도 하다.3) 그러므로 법륜은 불교의 가장 중요한 상징물로 표현 되었다. 탑의 상륜부, 인도 아소카 왕 기념 석주의 꼭대기에 탑재되었고, 다르마-차크라 라 는 살이 여덟 개 달린 법륜의 상징물은 부처가 처음 가 르침을 설파할 때 돌렸다고 하며, 깨달음으로 가는 불교 의 팔정도를 상징하였다.4) 윤등은 부처님과 불법을 상징 하는 법륜과 등불로 구성된 다등식(多燈式) 등화기구이 다. 불교의례 및 공양 중에서 필수적인 법구가 되는 것 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우리나라에서 윤등은 고려 태조 원년 11월조의 팔관회 기록에 처음 보인다.5) 팔관회를 베풀면서 궁궐의 구정에 윤등 1개소를 설치하고 향등(香燈)을 벌여 놓아 밤새 불 을 비추었다는 기록이다. 고려 팔관회는 국가의 주요의 례로서 서경은 10월, 개경은 11월, 양경에서 매년 설행했 으며, 신라의 전통을 그대로 이은 점으로 볼 때 윤등은 신라 때 부터 설치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민가의 윤등 설치는 고려후기 4월 초파일에 집집마다 연등했다는 사례가 있다.6) 이때 설치한 연등이 소형 윤 등의 형태로 추정된다. 그 이전에는 팔관회의 구경꾼이 많았다는 기록 외에는 보이지 않는다.
중국은 불교 전래 이전부터 정월 15일 상원에 연등 풍 속이 있었으며, 남북조 시대에 불교와 습합하여 활성화 되기 시작하였다. 양나라 풍속서인『형초세시기』2월 세 시에 집에 윤등을 달고 향화를 들고 행성을 한다고 하였 다.7)
「2월 8일은 석가모니가 인간 세상에 내려온 날이다. 석가모니가 도를 깨달았을 때에 신도들의 집에서는 팔 관재계를 하고 차륜과 보개와 칠변팔회의 등을 단다. 이른 아침에 향화를 들고 성을 따라 한 바퀴 도니 이를 행성이라 한다.」8)
윤등은 석가께서 7곳의 장소에서 8번 설법했다는 화엄 경의 칠처팔회를 상징하는 차륜과 보개 형태의 모습을 하고 있다. 등불의 차륜과 보개는 부처와 불법을 상징하 고, 불빛이 사방팔방으로 비춤으로서 불법이 널리 알려 져 광명의 세계를 이룬다는 의미이다. 세시기에서 민가 의 윤등은 들고 다니거나 매다는 소형의 공예적인 윤등 임을 알 수 있다.
2.원형석탑의 위치의미 해석
2-1.운주사 원형석탑의 배치형식과 가람배치
운주사는 각양각색의 많은 석탑ㆍ석불이 산재해 있어 천불천탑 사원으로 알려져 있다.
운주사는 늦어도 11세기 초반에 창건되어, 12세기에 이르러 중심축선이 바뀌는 대규모 불사를 시행하여 사원 으로서의 모든 기능을 갖춘 것으로 조사되었다.9)
건물지는 용강리와 대초리 일대의 2개 지역으로 분포 되고 초창기 건물은 용강리에 집중되어 있다고 하였다. 대초리 건물지는 정유재란 이후 폐사 되었다가 19세기~ 20세기 초에 건립된 소규모 건물지로 확인되었다. 그러 므로 폐사전의 초창기 운주사는 용강리 건물지를 중심으 로 한 구역과 석탑, 석불이 있는 구역 2곳으로 분리 경 영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운주사 석탑은 1941년에 22기의 석탑이 있던 것으로 기록되었으나 1981년 조사에서는 18기로 파악되었다. 1991년의 조사에서는 석탑 형식을 갖춘 것이 18기, 석주 형으로 1층 탑신만 남은 것이 3기로 모두 21기의 석탑이 조사되었다. 이어 1989년 4차 발굴조사에서 원반형 폐탑 재 1기가 추가되어 모두 22기로 파악되었다. 또한 100여 개에 이르는 폐탑재 가운데 적어도 10여기의 석탑이 복 원 가능하므로 30여기 이상의 석탑이 존재했을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10) 석탑형식을 갖춘 운주사 석탑은 방형 석탑 11기, 원형석탑 4기, 모전계열석탑 2기, 석주형 폐 탑 4기가 있다고 하였다.
운주사 석탑은 진입로를 따라 남에서 북으로 산곡의 평지에 13기, 와불이 있는 서쪽 산등성이 4기, 동쪽 산등 성이 4기, 도합 21기가 배치되어 있다. 동서 좌우 산등성 이 각 1열과 중심 평지 1열로 전체 3열의 축선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배치는 삼국시대 이래 금당과 1~2기의 탑 이 남북축선을 따라 주불전을 구성하는 전통 사원배치와 는 다른 구성이 된다. 이 때문에 운주사 배치는 미륵도 량, 도교사원, 밀교사원 등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하 게 해석되고 있다.
기존 사원의 정형적인 석탑 배치를 기준으로 운주사 석탑 배치를 분석한 2가지 연구사례가 있다. 하나는 <Fig.1>의 운주사 안내도에서 ‘나’와 ‘마’ 석불군을 제외 한 다른 석불군은 뒤쪽에 석탑을 배치하여 불상과 탑이 하나의 소가람을 이루고 조성했다는 배치이다.11) 운주사 는 소규모 가람이 여럿 있는데 각기 탑과 불상이 소가람 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는 1탑 1금당이나 쌍탑 1금당처 럼 불상의 전후에 탑을 배치하는 방식을 따른 것으로 보 고 있다. 그리고 전체 사역의 정중앙 공간적 중심은 석 조불감 구역이며, 맨 뒤에 위치한 마애여래불은 조망적 중심 위치로 해석할 수 있다.
또 하나의 배치 관점으로서 박경식은 석조불감의 남쪽 에 있는 석조불감 앞 7층석탑과 서쪽 산등성이에 있는 거북바위 교차문 7층석탑을 잇는 동서 축선이 운주사 남 북 끝에 위치한 석탑과의 거리를 2등분하는 중앙축선이 된다고 하였다. 석탑간의 거리나 방위는 규칙적이지 못 하나 각각의 석탑은 계획된 조영에 의하여 7개의 축선 및 4개의 군으로 분포되었다고 하였다. 석탑이 현재의 위치에 건립되어 위치 변동이 없다고 전제하였고, 중앙 축선의 석탑이 우선적으로 건립되었으며, 이를 중심으로 각 축선의 중심 탑을 건립한 후 나머지 석탑을 사이사이 에 세운 것으로 건탑 순위를 추정하였다.12)
두 사례가 배치의 관점에서 차이는 있지만 석탑석불이 각각 구역을 이루고 분할된다는 점과 석조불감 주위 구 역을 사역의 중심으로 보고 있다.
운주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신증동국여지승 람』에서 수많은 불상, 불탑 가운데 쌍배불이 있는 석조 불감을 강조한 점 역시 이와 같은 중심적 위치에 기인한 다고 할 수 있다.13)
일반적으로 사원을 건립할 때에는 중심영역의 금당과 탑을 우선적으로 조영한다고 한다. 운주사는 비정형적인 배치와 주불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원의 성격을 추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축조물이 집합된 곳은 중심이 있으며, 중심은 크게 상징적 중심과 물리적인 공간적 중 심으로 나눌 수 있다. 운주사의 상징적 중심은 풍수지리 적인 비보성격에 부합되는 중심적 위치와 상징적 조형물 이 위치한 두 곳으로 압축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언 급한 바와 같이 석조불감 구역은 사역의 중앙에 자리하 여 공간적 중심이며 또한 상징적 중심이기도 한다.
또 하나의 상징적 위치는 마애여래불이 위치한 조망적 중심 위치로서 소위 명당지역으로 불리는 풍수지리적인 비보구역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운주사 중심 위치를 2구역으로 설정하면 각 구역의 중심시설은 결국 원형석탑이 된다. 즉 석조불 감 구역은 원형다층석탑(일명 연화탑), 마애여래불 구역 은 원형석탑(일명 명당탑)이 된다. 그리고 두 중심 구역 이 운주사의 주불전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므로 이 구역 에 있는 원형석탑은 운주사 전체의 성격과 정체성을 함 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2
2-1-1.운주사 원형석탑의 의미와 형식
원형석탑은 전형적인 방형석탑에 대하여 이형적인 탑 으로 탑신이나 옥개석이 원형을 이룬 탑을 말한다. 원형 석탑은 원반형과 원구형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한국 석 탑에서는 중국 송의 영향으로 고려 후기에 나타나는 희 귀한 유구가 된다.14)
운주사 원형석탑은 4기가 있으며, 이외의 석탑은 방형 석탑 11기, 모전계열석탑 2기, 석주형 폐탑 4기가 있다.
운주사 평지 구역에는 방형석탑과 원형석탑이 함께 배 치되어 있다. 이중에 운주사의 성격과 부합되는 중심적 인 석탑은 운주사만의 독창적인 석탑인 원형석탑이라고 추정된다.
원형석탑으로 분류되지는 않았지만 석주형 폐탑 4기 역시 원형석탑의 범주가 될 가능성이 있다. 찻집이 있는 지혜당 건물 뒤편 산비탈의 석주형 폐탑이『조선고적도 보』6권(1917년)의 사진에 원반형석탑으로 촬영되었기 때문이다.15)
이외에 원형석탑 부재가 운주사 경내에 많이 산재되어 있어 원형석탑은 더 있었을 것으로 확인이 된다. 현재 사역에 산재되어 확인이 가능한 원형석탑의 추정 부재는 원형탑신석 7개, 원구형 옥개석 1개, 원반형 옥개석 20 개, 탑신석 1개, 탑신면석 2개, 상륜부재 6개 등이다.16) 결실로 추정되는 원형석탑 부재를 모두 합하면 최소한 5 기 이상의 원형석탑을 조립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1-2.원형석탑의 배치
원형석탑 4기는 석조불감과 마주 보고 있는 원형다층 석탑(일명 연화탑), 대웅전 서쪽 계단 앞쪽의 원형석탑 (일명 실패탑), 대웅전 동편에 있는 미륵전 앞의 발형다 층석탑(일명 바루탑), 대웅전 뒤쪽의 원형석탑(일명 명당 탑)이 있다.
원형석탑 4기 모두 부분적으로 결실된 상태이지만 연 화탑과 바루탑은 층수를 제외하고 원형에 가깝게 유지하 고 있다. 실패탑과 명당탑은 원형 추정이 어렵게 보이거 나 결실이 된 실정이다. 원형석탑 중에 연화탑과 명당탑 은 각각 석조불감, 방형석탑과 짝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연화탑은 남쪽 5m 지점에 위치한 팔작지붕 형태 의 석조불감과 짝을 이루고 배치된 것으로 보인다. 석조
불감 안에는 석불좌상 2구가 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등 을 마주대고 있으며 북면한 불상이 연화탑을 바라보고 있는 형태를 이루고 있다고 하였다.17)
명당탑은 북쪽 방향으로 마애여래불이 있으며 바로 앞 에는 방형석탑이 위치하고 있다. 이 두 석탑은 짝을 이 루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또한 19세기 초 설담 자우스님 의 수리한 석탑으로 지목되고 있다.18) 이 구역이 마애여 래불의 조망적 중심에 있는 운주사의 명당지역으로서 비 보석탑을 수리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할 수있다. 연화탑 과 석조불감의 중심선을 잇는 남북축선은 약간 어긋나 있으며, 명당탑과 방형석탑도 동일하게 남북축선이 약간 어긋나 있다. 축선이 어긋난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지형적으로 배치가 어긋날 정도의 문제점은 없기 때문에 자연 암반의 기반 위치 등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겠다. 바루탑과 실패탑은 현재의 배치로는 짝 여부 파악이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라고 할 수 있다.3
2-2.원형석탑의 형태 및 구성.19)
석탑을 이루는 구성요소는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 등 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원형석탑은 그 예를 찾을 수없는 파격적인 이형석탑이기 때문에 전형적인 석탑의 구성 명 칭을 사용하면 표현이 어색하게 보일 가능성이 없지 않 다고 할 수 있다.
유사 석조물인 석등의 구성 명칭과 비교하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으로 사료되므로 이를 참조하고 하였다.20) 석탑이 다층이고 석등은 단층이라는 차이만 감안하면 그 이외의 구성은 유사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석탑의 명칭을 석등의 명칭으로 대입하면 지대석, 기 단부, 옥개석, 상륜부는 석탑과 명칭이 동일하고 기단중 석=간주석, 기단갑석=연화상대석, 탑신부=화사부가 된다 고 하겠다.
2-2-1.원형다층석탑(일명 연화탑).
원형다층석탑은 지대석, 간주석, 연화상대석, 탑신부의 탑신, 원반형 옥개석으로 구성된다. 현재 6층까지 남아 있지만 최근 공개된 조선고적도보 사진에서 7층 탑신석 이 발견되어 최소 7층으로 밝혀졌다.21)
석탑은 간주석을 제외한 구성 부재가 원형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간주석은 10각이지만 이 10각도 원에 가까 우므로 전체 석탑이 원형 부재로 구성되었다고 하였다. 구성 석재는 원형 지대석이 1석, 간주석이 5매석으로 이 루어졌으며 연화상대석, 탑신 및 원반형 옥개석은 모두 1석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연화상대석은 하면과 측면 에 앙련의 연꽃 문양이 얇게 조각되어 있다고 하였으며. 석등의 상대석과 유사한 양식 및 구조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원반형 옥개석은 원반이 평평하여 탑재형 조형물임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4
또한 흥미로운 것은 이 탑의 지대석 하부를 이룬 커다 란 부재의 형상이 마치 거북이 모습이라고 하여 주목된 다고 한 바 있다.22) 운주사의 일주문 편액은 영구산(靈 龜山) 운주사라고 되어있다. 운주사 대웅전에서 우측 산 등성이 와불 쪽으로 오르는 중턱의 넓은 암반에 세워진 2탑의 이름이 각각 거북바위 교차문 7층석탑, 거북바위 5층 석탑이라고 불린다. 이 암반의 이름이 거북바위이기 때문에 그렇게 호칭되고 있다고 하였다.23) 이는 풍수적 으로 거북이 자리를 운주사의 주 혈(穴)자리로 보고 그 자리에 석탑을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겠다. 연화 탑 지대석 하부 부재가 거북이 모습이라 함은 연화탑 역 시 영구혈에 설치한 비보성격의 탑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2-2.원형석탑(일명 실패탑)
탑의 형태가 실을 감는 실패와 닮아서 일명 실패탑으 로 부르는 원형석탑은 대웅전 옆의 서쪽 계단 쪽 앞에 위치하고 있다. 간주석, 상대석, 탑신부, 원반형 옥개석으 로 구성되었으며, 간주석은 방형이나 상대석은 장식이 없는 원형의 형태이다. 간주석은 크고 작은 장대석 판석 2매를 합쳐 세워서 석주와 같은 모습이라고 하였다. 상 대석은 원형판석 1매로서 장식이 없는 원반형이다. 탑신 부는 작은 규모의 원형 탑신석과 원반형 옥개석이 1석으 로 구성되었다.5
옥개석은 원반형으로 탑재 기능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 만 장식이 없고, 두터워 정확히 어떠한 탑인지 판단하기 어렵다고 할 수 없다. 이 석탑은 석탑 관점으로 보면 완 성된 형태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석등의 범주인 정료 대(庭燎臺)와 비교하면 완성된 탑으로 볼 수도 있을 것 이다.24)
2-2-3.발형다층석탑(일명 바루탑)
발형다층석탑은 대웅전 동편에 있는 미륵전의 단 아래 마당에 위치하고 있다.
바루탑은 탑 모양에 대한 일반적 상식을 깨뜨리는 파 격적인 모습이다. 지대석, 간주석, 상대석, 원구형 탑신 겸 옥개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방형의 지대석 상면에 3 단의 각형 괴임이 있으며 그 위에 4면의 우주가 뚜렷하 고 높직한 4개의 판석으로 짜인 간주석을 놓았다고 한 다. 상대석은 낙수면이 완만하게 기울어졌으며, 장식이 없는 원형의 1매 판석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탑신부는 상대석 위에 탑신 겸 옥개석 형태인 원구형 석괴 4석을 올려놓았다. 1층과 3층의 부재는 물동이 같 고 2층과 4층은 중심부에 1면을 만든 주판알과 같은 모 습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에 발간한『조선고적도보』 사진에 옥개석이 7개로 나와 있어 7층 석탑임이 확인 되 었다. 바루탑은 어떠한 대상물을 석재 조각으로 표현한 현대 조각미술작품과 같은 조형물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6
2-2-4.원형석탑(일명 명당탑)25)
명당탑은 대웅전 뒤쪽 암벽에 새겨진 마애여래불 아래 의 완만한 경사지에 위치하고 있다. 구성은 방형기단, 사 각 갑석 위에 1층에서 3층까지 각각 원형 탑신과 원반형 옥개석으로 이루어졌다.
탑신과 옥개석은 층이 오를수록 점차 체감되고 있으나 체감율은 일정치 않다고 한다. 석조불감 앞의 연화탑과 달리 원형의 기단부 대신 방형 기단부 형식을 취하고 있 다. 원형다층석탑의 기단은 원형이기 때문에 방형 탑신 은 어울리지 않는 구성이라고 하였다. 다른 석탑의 부재 를 혼합하여 조립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원반형 옥개석은 1~3층이 같은 형식으로 모서리를 다 듬은 원반형이며 단엽의 연화문 16판을 돌려 장식하였다 고 한다. 1991년 조사 당시에는 앞쪽의 방형석탑 지대석 위에 본 원형석탑의 부재로 추정되는 연화문양의 원반형 석재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1993년 대대적인 보수를 시행하면서 앞쪽 방형석탑의 연화문양 원반형 석재를 본 탑의 3층 옥개석으로 되돌려 2층 석탑을 3층 석탑으로 조립하였다고 한다.26) 연화탑 에 비해 탑신이 짧고 원반형 옥개석이 얇고 넓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석탑은 각층의 원반형 옥개석의 체감비 율상 5층 이상의 층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마애여래불 아래의 본 탑 주위는 명당혈로 알려져 있 어 원형석탑이 명당탑으로 불린다. 19세기 초 설담 자우 스님이 수리한 석탑으로 명당탑과 앞쪽에 짝을 이루고 있는 방형석탑이 지목되고 있으며, 원래 형태와 원래 위 치 여부는 불확실한 탑이라고 할 수 있다.
3.운주사의 원형석탑과 불교 등화시설
3-1.불교의 등화f
불교에서는 등을 등명이라 하며 ‘불·보살의 앞에 받드 는 등불’, ‘불·보살의 지혜가 밝은 것을 표시함’이라고 하 였다.27) 부처님의 진리, 설법을 법등이라 하고 스승이 제 자에게 대를 이어 전하는 것을 전등이라 하였다.
등불은 부처님, 불법의 증표로서 불교 의례의 필수적 인 법구가 되었으며, 많은 경전이 등화의 중요성과 연등 공양을 최고의 공덕으로 설하였다고 하였다.28)
이러한 등불의 중요성과 상징성은 향불, 꽃과 함께 불 전 삼족구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사원의 중심지인 중정 에 금당, 탑과 함께 주요 시설로서 배치되었을 것이다.
불교 의례용 등화구는 소형의 공예적인 등화구와 대형 의 축조 또는 가구적인 연등시설로 분류할 수 있다. 공 예적인 등화구는 불전의 등잔, 등촉구가 있으며, 연등회 에 들고 다니거나 매다는 윤등이 있다. 연등회의 소형 윤등은 원통형, 구형, 다각형의 형태로서 현대의 연등회 에서 그 맥을 잇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형 등화시설로 는 석등과 정료대가 있으며, 석등은 백제에서 처음 조영 된 이후로 사원의 중심에 필수적으로 배치하는 주요 시 설이 되었다.29) 정료대는 지대석, 기단, 중대석, 상대석으 로 구성된 옥외 등화시설로서 석등에서 화사석 이후를 제거한 형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석등과 정료대가 처음부터 석조물로 조영되지는 않았 을 것이다. 등불에 대한 신앙심은 옥외에 설치하는 등화 시설을 전천후에 구애 받지 않고 영구 보전 하도록 등불 을 석재로 건조하였으며, 이에 따라 석등이 출현했을 것 으로 추정되는 것이다.30)
석등과 정료대는 부처님과 불법을 상징하는 등화시설 로서 대부분 상ㆍ하대석에 연화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비록 공양성격이 있는 의례시설이지만 불상이 연화좌대 에 존상된 것처럼 화사석을 연화문양으로 장식된 대좌 위에 존치된 것이다.7
3-2.돈황 벽화의 윤등.
돈황석굴은 천불동 또는 막고굴로 불리며 많은 불교 관련 벽화가 있다. 수ㆍ당대의 돈황 벽화 중에 윤등을 묘사한 불화가 몇 편 있다. 이들 벽화에서 불상 전면이나 주위 에 윤등이 배치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돈황 417굴의 후벽 상부벽화는 수대(581-617)의 작품 으로 추정되고 있다.31) 중앙 불상 정면에 7층의 윤등 1 기가 배치되었다. 윤등 좌우로 6인씩 12인의 공양인이 경건하게 우슬착지의 자세로 불 켜진 등잔을 들고 윤등 을 향하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8
돈황 433굴 천정 동쪽의 벽화 역시 수대 작품으로 추 정된다고 한다. 불상 좌우 협시불 옆에 9층 윤등 2기가 배치되어 있다. 상륜부는 교차 문양의 찰주가 길게 솟아 나 있다. 윤등 주위에 등잔을 들고 열을 지은 보살 등이 공양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433굴은 윤등이 정면에 배치되지 않고 정료시설 또는 향불로 보이는 시설이 배치되어 있다. 다른 벽화에서 윤 등이 불상의 정면 배치와는 달리 특별한 배치라고 할 수 있다. 정료 또는 향불을 향하여 비천인의 공양 모습이 보이고 있다.
돈황 220호 굴은 당 정관 16년(642)으로 조성 연대가 확실하게 밝혀진 석굴로 알려져 있다. 이 석굴의 북벽에 는 중심축을 기준으로 단아래 좌우 양쪽에 1기씩 2기의 윤등이 배치되어 있는 약사경변도가 있다.
〈Fig.9〉은 전체 약사경변도 중에 윤등이 나오는 우 측의 일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명확하게 판단하기 쉽지 않지만 가설된 윤등이 3개 층으로 나뉘어 한 층에 2겹 또는 3겹으로 된 원반이 놓아져 총 7층으로 보이고 있 다. 원반 위에는 많은 등잔이 놓여 있다. 공양인이 연등 공양을 하고 있고, 다른 공양인은 무릎 꿇어 경배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윤등의 형태는 나무를 형상한 가구 형태로서 받침대가 나무뿌리처럼 여러 살로 뻗어있으며 끝 모양은 귀꽃처럼 말아져 있다. 이 벽화는 노래와 가 무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악무도(樂舞圖)라고 한다고 하였다.10
돈황 159호 굴 서쪽 후벽의 그림은 중당(781-818)시 기로 추정되는 벽화이다. 불상을 모신 금당 앞마당 가운 데 중앙축선 상에 5층 윤등 1기가 배치되어 있으며, 옥 외의 당간지주에는 번이 휘날리고 있다. 십자형 받침대 를 가진 윤등 주위에 승려로 보이는 이가 공양을 하고 있다.
돈황 벽화에 나오는 윤등은 여러 개의 바퀴 형태의 원 반을 다층으로 쌓고, 각 층에 등잔을 올려놓는 다등식 등화시설로 표현되어 있다. 윤등의 층수는 5층, 7층, 9층 으로 다양하며 불상 주위에 1기 또는 2기가 배치되고 있 다. 돈황벽화에서 윤등이 묘사된 벽화는 모두 약사경에 근거한 약사경변도이다. 윤등이 약사경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돈황벽화에 묘사된 윤등의 형태 및 배치는 문헌자료의 한계를 보완하는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 고 할 수 있다.
4.윤등과 운주사의 원형석탑.
운주사에는 전통적인 사원이라면 주불전의 중정에 배 치되어 할 석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파격적인 운주사의 성격에 비교될 수 있지만 불교에서 연등에 대한 중요성 을 감안하면 주목되는 현상이 된다고 하겠다.
운주사는 윤등을 원형석탑으로 건조하여 배치함으로서 석등을 가름했던 것이었다. 윤등은 부처님과 불법을 상 징하는 법륜과 등불로 구성된 등화로서 불교의례 및 공 양 시설 중에서 최고의 상징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운주사는 의례시설로서 최상의 등화시설을 배치했다고 할 수 있다.
윤등의 배치는 약사경에 근거하여 설치된다. 약사경에 는 팔계재를 행하고 7기의 윤등과 번(幡)을 설치하여 의 례를 행하면 소재초복(消災招福) 할 것이라고 하였다.이러한 약사경의 내용은 돈황벽화의 약사경변도에 표현 되었으며 윤등이 설치 된 것이다. 돈황벽화에 보이는 가 설 윤등을 석재로 번안한다면 운주사의 원형다층석탑과 유사한 형태가 될 것이다.
원형다층석탑은 팔관회 설행시에 한시적으로 설치하던 윤등을 영구적인 석재로 만든 의례용 등화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천후에 구애받지 않고 영구적으로 보전하려 는 의도로 윤등을 석재로 건조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원형다층석탑의 원반형 옥개석은 원반이 평평하여 그 위에 도구나 공양물을 놓는 탑재기능의 구조로 보는 것 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원반형 옥개석은 탑으로 보 면 지붕이지만 석등으로 보면 등잔을 탑재한 화사석이 되는 것이다. 등잔을 탑재하는 위치가 내부 또는 외부의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이며, 그 구조 및 형태는 석등과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원형다층석탑은 원반형 화사석을 다층으로 건조한 석탑이라고 할 수 있다.
발형다층석탑은 원구형 또는 다각형의 공예적인 등기 구(燈器具) 여러 개를 간대(竿臺)나 줄에 줄줄이 매달은 형태를 석재로 표현한 것과 유사하다. 건물의 처마나 간 대에 매다는 다층 원구형의 모습은 현대의 연등회에서 볼 수 있다.32) 이 석탑의 형태는 원반형 석탑이 등잔을 올려놓는 탑재 형식임에 비하여 내부에 등잔을 탑재한 공예형 등기구 여러 개를 그대로 취한 것이다. 탑 자체 가 별도의 등잔 없이 등이 되므로 탑신과 옥개석의 구분 이 없는 형태로 표현된 것이다. 원반형과 달리 별도의 등잔이 필요하지 않게 조영한 석등의 범주라 할 수 있 다. 이 석탑은 석탑을 만든 장인의 작품에 대한 의미부 여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규범에 억매이지 않고 석탑 을 자유롭게 창작한 것이다. 다른 지역의 석탑에 비해 단조롭고 서툴게 보이는 운주사 석조물이 결코 기예가 부족하여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예라고 생 각한다.
대웅전 서쪽 계단 앞쪽에 위치한 원형석탑인 실패탑은 정료대에서 한 층을 더 올린 형태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 고 있다. 구조적으로 연화탑과 기단이 방형인 점과 두터 운 원반 이외에는 유사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실패탑을 등화시설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등화시설은 부처님을 상징하기 때문에 연화탑이나 명 당탑과 같이 상대석이나 원반형 옥개석에는 연화문양이 있다. 실패탑의 원반에는 연화문양이나 다른 장식이 보 이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실패탑은 석등의 범주는 아니 라고 판단된다.
윤등의 재료는 둔황 벽화 등의 기록에 보이는 구조 형 태 등을 통하여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팔관회 구정의 윤등은 한시적으로 설치하는 가설재라고 할 수 있으므로 그 재료는 제작 설치가 용이한 목재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공예적인 윤등은 차륜과 보개 형태의 가볍게 매 달 수 있는 소형의 등이므로 목재 또는 대나무로 골격인 망을 만들고 외피는 붉은 깁 또는 종이를 씌웠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33)
운주사 원형다층석탑은 현대 연등회의 공예적인 윤등 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지만, 발형다층석탑은 원구 형이나 다각형 등기구(燈器具)에서 만이 그 형태를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발형다층석탑은 윤등과는 구별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34)
윤등은 팔관회 설행시에 궁궐 중정에 일시적으로 설치 하는 불교 의례용 등화시설이다. 윤등은 돈황벽화의「약 사경변도」로 그 형태를 알 수 있었으며 원형다층석탑과 거의 동일한 형태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영구적인 시설로서 윤등의 제작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그 장소로서 운주사를 선택하여 석재로 원형다층석탑을 건립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결론
운주사 원형석탑은 상징적, 공간적 중심에 배치되어 있으며 운주사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요체가 된다.
윤등은 바퀴모양의 원반 여러 개를 적층하고 그 위에 등잔이나 향등을 놓는 등화시설이다. 윤등은 부처와 불 법을 상징하는 법륜과 등불이 조합된 불교 최고의 상징 적인 의례시설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윤등을 영 구 보전하기 위하여 석재로 만든 탑이 원형석탑이 된 것 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원형석탑은 운주사의 주요 혈자리를 진압하여 안 정시키는 비보석탑 배치로 추정된다. 따라서 중심적 위 치에 자리한다.
원형다층석탑(일명 연화탑)은 운주사 영구혈의 비보석 탑이며, 원형석탑(일명 명당탑)은 마애여래불 앞 주혈의 비보석탑 배치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석주형 폐탑 4기는 원형석탑이 결실된 잔재로 보이며, 사역에 산재한 원형석탑 부재수로 볼 때 원반형 원형석 탑은 현재 보다 그 수효가 추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발형다층석탑(일명 바루탑)은 공예적인 등기구를 석재 로 표현한 7층 석탑이다. 원반형과 달리 등잔이 필요하 지 않게 조영된 석탑이라고 할 수 있다.
원형석탑(일명 실패탑)은 석등에서 화사석 이후의 부 재를 생략한 정료대에 원반 한 층을 더 올려 만든 형태 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거의 완성된 형태의 탑으로 추정되지만 다른 원형석탑과 같이 석등의 범주는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본 논문에서는 원반형 원형석탑의 시원을 윤등으로 추 정하였다. 이후로 운주사의 원반형 원형석탑 호칭을 ‘윤 등석탑’으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