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 론
1-1.연구 목적
조선후기 2백년 이상 東萊는 최접경의 군사요충지로서 뿐만 아니라 조선통신사와 倭使의 입·출국, 초량왜관의 개시 업무까지 맡았다. 그런 만큼 堂上官이 府使로 파견되는 등 여느 도호부에 비해서 위상이 높았다. 또한 읍 성의 규모도 대단히 컸으며, 기본적인 행정업무 뿐만 아 니라 외교업무를 위한 대규모 관아시설들도 많았다.1) 그 러나 1876년 부산항의 개항에 이어 갑오개혁과 군대해산 령으로 많은 관아건물들이 기능을 잃거나 다른 용도로 轉用되었다. 급기야 일제강점기에는 동래부의 관아 대부 분이 철거되거나 옮겨짐으로써 동헌을 비롯하여 객사, 군영, 향청 등 각종 영역도 완전히 해체되고 말았다.
그나마 동헌 일곽의 몇몇 건물들이 오늘날까지 남겨져 옛 면모를 어렴풋이 상상케 해준다. 그러나 동헌 정청이 었던 충신당만 제자리에 있을 뿐, 동헌 일곽의 정문인 망미루와 충신당의 외대문이었던 독진대아문은 아무런 연고도 없는 2km 떨어진 금정산 숲속으로 옮겨져서 지 금까지 존치되었다. 도로 개설이나 일본인 상업시설 부 지 확보 등 여러 이유 때문이었지만, 移轉의 이면에는 식민통치에 큰 걸림돌인 옛 관아 일곽을 해체하려는 의 도가 더 컸다.
日帝에 의한 일련의 조치는 동헌 일곽의 완전한 해체 를 초래했다. 그리하여 동헌 일곽과 건물들의 해체 과정 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필자들에 의한 동헌 일곽의 복원 고찰을 통해서 종전의 관아건물 배치 가 밝혀졌다. 최근에는 해체과정을 엿보게 하는 몇 편의 사료도 발견되었다. 구한말 <官報>와 일제강점기의 <地 方廳建物臺帳> 등이다. 이를 기존의 동래읍성 관련 도 면 등과 대조, 분석을 통해서 동헌 일곽의 해체 배경과 과정을 규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에 동래부 동헌 일곽의 건물들이 식민통치시설로 轉用되거나 도로 개설, 일본상인에게 불 하됨으로써 소멸되고 해체되어 간 일련의 배경과 과정을 규명하는 데 목적이 있다. 먼저 읍지와 옛 그림, 지적원 도 등을 분석하여 옛 동헌 일곽의 건물과 배치를 규명한 다. 그리고 동헌 일곽의 해체 과정을 한말 지방제도의 개편과 관아의 혁파, 일제강점기 식민통치를 위한 관공 서로의 전용을 통해 살핀다. 또한 市區改正에 의한 도로 개설과 법인 및 개인에 대한 국유지 필지 불하에 따른 일곽의 해체 과정도 함께 규명한다.
이를 통해서 지금은 도시화로 인해 형해만 남은 동헌 일곽의 원래 면모를 복원 고찰할 수 있다. 나아가서는 日帝가 품었던 식민지 조선의 전통 관아건축의 해체의도 와 과정을 소상히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는 동래부 동헌 일곽의 공간과 관아건물을 대 상으로 일제에 의한 철거와 전용, 이건에 따라 지방 동 헌 일곽의 공간과 관아건물들이 어떻게 해체되고 소멸되 어 갔는지를 밝히고자 하는 기초작업으로서 의의가 있다.
1-2.연구 범위와 방법
동래부 동헌 일곽에 대한 조선후기 지리지로는 1740년 의 『東萊府誌』를 시작해서 이후 여러 차례 제작된 읍 지류가 있다. 또한 고을의 위상이 높았던 때문인지 읍성 과 관아를 그린 고회화류도 적지 않게 남아 있다. 1800 년대 초 일본 사절단의 도착과 접대 등 일련의 과정을 10폭의 병풍으로 그린 「東萊府使接倭使圖」가 대표적 이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직전 사이에도 『동래부읍지 (1899)』등이 있고, 그 무렵으로 추정되는 몇 장의 사 진들도 남아 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다양한 사료들 이 발굴된다. 먼저 1912년에 처음 작성된 <지적원도>를 비롯해서 이후에 제작된 시기별 <지적도>, <조선총독부 관보>, <토지대장>, <지방청건물대장> 등 다양한 공식 문서가 있다. 또한 시구개정에 따라 1920년대 중반 동래 군청에서 작성한 <東萊邑城內排水並道路整理計劃平面 圖>, 그리고 이 사업과 관련해서 제기된 읍성 내 상인들 의 민원을 기사화한 <동아일보> 기사가 있다. 그 무렵 에 촬영된 다양한 사진자료들도 동헌 일곽의 건물들이 철거되거나 이건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이다.
조선후기 동헌 일곽의 모습은 읍지와 옛 그림을 통해 살펴보고, 이를 지적원도와 토지대장과의 대조를 통해 지번을 확인한다. 일제강점기 동헌 일곽의 상황은 사진 자료와 폐쇄 지적도(1970년대까지 改造되었으나 현재 사 용되지는 않음), 신문기사 등을 활용하여 비교, 분석한다. 이러한 자료들을 중첩해서 활용함으로써 동헌 일곽의 공 간이 어떻게 해체되어 갔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옛 동헌 일곽의 건물과 배치
2-1.읍지와 옛 그림에서 보는 동헌 일곽
영조 7년(1731) 동래부사 鄭彦燮에 의해서 대대적으로 증 개축된 동래읍성과 관아건축으로 형성된 공간구조는 구한말까지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당시 건물의 상대 적인 위치와 칸수는 『동래부지(1740)』 와 『동래부읍지 (1795)』에 잘 나타 나 있다. 官舍, 樓亭, 廳舍, 倉庫등 네 종 류로 구분하여 도합 56개의 주요건물들과 141개의 부속건물들 이 망라되어 있다.2)
그 중에서 부사의 집무처인 동헌 일곽 은 忠信堂10칸, 大 門3칸, 東翼廊2칸, 西翼廊4칸, 外大門 3칸, 緩帶軒8칸, 篤 敬堂6칸, 贊籌軒18 칸, 晦息堂6칸, 靖遠 樓12칸, 望美樓6칸 등이 기록된다. 이후 고종 8년(1871) 동래부사 鄭顯德에 의해서 대대적인 증, 개축이 이뤄졌다. 충신당 26칸, 南 廊5칸, 東廊8칸, 東·西歇所각 1칸 등이 증축 또는 신 축되었는데, 전체적인 공간구조는 종전과 변함이 없었 다.3)
이러한 건물들로 구성된 동헌 일곽의 모습은 옛 그림 들에서 대체적인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1817년의 「동 래부사접왜사도」<Fig.1>와 1905년의「동래부산도병」 <Fig.2>이 대표적이다. 동래부사가 왜사를 접견하는 일 련의 과정을 그린「동래부사접왜사도」에는 충신당의 좌, 우로 연심당과 독경당이 자리 잡고, 뒤편에 완대헌 등이 서 있으며, 앞마당의 좌, 우, 남쪽으로 행랑채와 대 문 등이 그려져 있다. 서쪽에는 일곽의 정문 역할을 한 망미루, 정원루 등이 표기된다. 「동래부산도병」는 건물 들을 소략하게 표현했지만 충신당에 해당하는 팔작지붕 의 건물을 ‘東軒’으로, 2개의 중층 누각건물을 각기 ‘靖遠 樓’와 ‘望美樓’로 구체적인 건물명을 부기했다.
2-2.지적원도로 보는 동헌 일곽의 필지
동래부 동헌 일곽의 건물들은 1906년 동래부청이 부산 항으로 이전되면서 고유의 기능을 잃게 되었다. 특히 1907년의 군대해 산령으로 軍營 일곽과 守城업 무 관련 시설들 이 혁파되었다. 옛 동래군 소유 의 토지와 건물 들의 관리권은 중앙관서였던 度 支部로 넘어갔 다.4) 사실상 설 립 목적과 그 기 능을 상실한 지 방 소재의 관청 건물들에게 적절 한 유지·관리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볼 수 없으므로 옛 동래부 관아시설 일곽은 급격히 퇴락되었다.
한편 1912년에 작성된 「지적원도」에서 동헌의 소재 지는 ‘壽安洞421垈(國)’으로 표기된다. 지적 2,754坪에 달하는 이 지번을 흔히 ‘동헌 일곽’으로 부르지만, 동헌 뿐만 아니라 作廳등 다수의 부속 관아시설들이 포함되 어 있다. <Fig.3>에서 보듯이 남문에서 객사 일곽으로 이르는 중앙로 등 읍성 내의 가로망은 예전과 다를 바 없으며, 객사와 동헌 일곽은 각기 복천동 229번지와 수 안동 421번지로서 큰 면적의 단일 필지로 나타난다. 두 필지의 지번 말미에 공통적으로 ‘(國)’으로 부기한 것을 보면 여전히 관아건물들은 존속되고 있었다.
1912년 전후로 동래부 관아건물들에 대한 사료로는 『동래부읍지(1899)』5)와 『동래군지(1937)』6)가 있다. 『동래군지』의 경우 「지적원도(1912)」가 작성된 이후 의 사료라 언급된 관아들은 잔존했던 건물들이다. 그러 나 1605년 이래 동래부 관아건물들은 新建, 重建및 重 修를 거치면서 1870년에 이르면 도합 56개의 주 건물과 141개의 부속 건물들이 소재했던 점을 고려한다면, 이미 건물 상당수가 소멸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군 영, 향청, 수성청 일곽들은 한층 작은 필지들로 분할되어 있고, 동헌과 객사 외에 ‘(國)’을 부기한 경우는 5개 필지 정도에 불과하다. 1912년을 전후로 전래의 수백 칸에 달 했던 관아건물 들 중에서 극히 일부만이 국가 재산으로 남고 나머지는 퇴락 되어 소멸되었 거나 혹은 아무 런 증빙 없이 은밀히 개인에 게 소유권 이전 이 이루어 졌다 고 볼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자료들을 바탕 으로 최근 필자들에 의해서 동헌 일곽의 공간구조가 밝 혀졌다.7) <Fig.4>에서 보듯이 일곽은 남문에서 시작해 서 객사 앞에 이르는 중앙광장 동쪽의 일곽에 자리 잡았 다. 서남단의 망미루를 거쳐서 서쪽으로 오다가 다시 북 쪽으로 꺾어져서 외삼문→내삼문→충신당→완대헌으로 이르며, 그 동쪽으로 연심당, 공수청, 내아가 자리 잡고, 서쪽에 독경당, 찬주헌, 정원루 등이 자리 잡았다. 그런 데 지금은 충신당과 연심당, 내삼문 만이 제자리에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철거되거나 이건되고 일곽은 옹색하게 좁아진데다 기형적으로 변해버렸다. <Fig4.>에서 회색으 로 칠해진 동서로 비스듬하게 가로지르는 도로의 신설과 같은 日帝에 의한 일련의 조치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3.동헌 일곽의 해체 과정
3-1.지방제도의 개편과 관아의 혁파
1876년 작은 포구에 불과했던 釜山浦가 개항되면서 대도시로 발전된 반면 오랜 행정중심지였던 동래는 그 위상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1890년 개항장을 관리하는 東萊監理署가 설치되었는데, 이는 초량왜관을 오랫동안 관리하던 동래부와는 별개의 기관이었다.8) 여기에다 부 산항에 일본인전관거류지가 형성되고, 독자적인 행정 사 법권을 행사하는 일본영사관이 설치되면서 동래부는 종 전의 권한들을 대거 잃게 되었다. 그나마 1895년 갑오개 혁으로 전국 8도를 23부로 개편할 때 동래·양산·기장·울 산 ·언양·경주·연일·장기·흥해·거제 등 10개 군을 거느리 는 관찰사영으로 격상되기는 했다.9) 그러나 1899년 <칙 령 제15호>에 의해 동래감리서가 일본인전관거류지와 인접한 부산으로 이전되었다.10)
동래감리서의 이전으로 동래부의 행정권 일부가 이전 된 한편으로, 일본인전관거류지가 있는 부산이 새로운 행정중심지로 부상했다. 위상이 축소된 탓인지 1903년 동래군으로 환원되고, 다시 1906년 9월 동래부로 회복되 지만 부청은 동헌 일곽이 아닌 부산의 감리서 자리로 이전되 었다.11) 이른바 <칙령 제48 호> 이후 동래읍성 내 동헌은 더 이상 동래부청이 아니었다. 이는 1909년 1월에 있었던 순 종황제의 西南巡行에 대한 <官報> 號外宮廷錄事1909 년 1월 8일자 기사(Fig.5) 등 에서 잘 확인된다. 당시 統監 을 대동하고 순행에 나선 순종 황제가 경부선 철도로 부산역 에 도착해서 부내 백성들을 만 났다는 동래부청은 동래읍성 내에 있던 동헌이 아니라 부산역 근처에 있던 감리서 자리에 있었다.12)
이처럼 부청의 위치가 새로 옮겨진 곳은 동래 외에도 전국에 걸쳐 10개 군에 달했다. 대부분 개항장이나 개시 장 혹은 조계지가 설치된 곳이었다. 日帝가 통감부를 내 세워서 일본인들이 다수 거주하던 지역을 행정중심지로 형성할 의도였음을 알 수 있다. 당연히 오랫동안 행정중 심지 역할을 해 왔던 동헌 일곽의 위상은 빠르게 행정권 과 위상을 상실할 수 밖에 없었다.
3-2.식민통치를 위한 관공서로 전용
1)동래군청사로 전용
1906년 동래부 동헌은 동래부청의 이전으로 행정관청 의 기능을 상실했다. 그러다가 1914년부터 동래군으로 출범과 함께 군청사로 다시 사용되기 시작해서 일제강점 기 내내 식민통치를 위한 시설로 활용되었다. 동래군청 사로 전용된 일부 건물과 배치에 대해서는 <地方廳建物 臺帳>(1917)13),「東萊邑城內排水並道路整理計劃平面 圖」(1920년대 중반), 「東萊郡郡勢要覽(1929)」및 『東 萊郡誌(1937)』14) 등의 자료를 통해서 어느 정도 확인이 가능하다.
먼저 1917년 조선총독부 내무국이 작성한 <地方廳建 物臺帳>은 2쪽에 걸쳐 동래군청 구내의 전체 면적과 건 물들의 명칭과 구조, 면적, 동수가 기재되어 있다. <Tab.1>은 이를 재작성한 것으로, 여기에는 도합 8개 동의 건물 중에서 7동은 조선식 건물이며, 1915년 12월 에 신축되었다는 창고 1동 만이 일본식 건물이라고 했 다. 본관을 비롯한 7개의 옛 동헌 일곽 건물들이 여전히 군청사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 건물들 중 옛 건물과의 대조가 가능한 것은 본관과 회의실로 각기 충신당과 정원루에 해당하며, 나머지는 대조가 불가능하다. 새로 지어진 일본식의 창고 외에 나 머지 건물들은 충신당에 부속된 숙직실을 비롯하여 물치 실에 변소가 딸려 있었으며. 신주실, 장적고, 사령간, 서 주인실 정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그 무렵 동헌 일곽이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해서 는 「東萊邑城內排水並道路整理計劃平面圖」(1920년대 중반)에서 확인 할 수 있다. <Fig.6>이 그 것으로 시구 개 정 사업 차원에 서 읍성 내의 간선도로를 개 설하고, 배수로 를 정비할 목적 으로 작성되었 다. <Fig.7>은 이 도면의 점선 부분 만 재작성한 것으로 여기에는 ‘郡 广’, ‘法院’, ‘金融組合’ 및 ‘郡舍宅’으로 표기된 건물들이 보인다. 군청사는 충신당과 동쪽의 연심당, 앞마당 좌, 우 및 남쪽의 행랑과 내대문, 북쪽의 약사청과 정원루, 옛 내아를 전용한 군사택 만이 남아 있고, 찬주헌 자리 에는 법원이 들어서고, 동헌 외대문(독진대아문) 맞은편 에 금융조합이 들어서 있다. <Fig.4>에서 보이는 옛 동 헌 일곽이 절반 이상 이나 해체된 상태임 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많은 건물 들이 철거 또는 전용 됨에 따라 1919년에 수안동 421번지로 단 일필지였던 동헌 일 곽은 421-1번지와 421-2번지로 분할이 이뤄진다. 군청사로 축소되어 사용되는 필지는 421-1번지이며, 금융조합으로 바뀐 부지는 421-2 번지로 명기되었다. 그나마 421-1번지 건물들은 1920년 대 후반 동래읍성 내 배수로와 도로 신설계획에 따라 다 시 일부가 훼손되었다. 가뜩이나 축소된 군청사 일곽이 다시 기형적으로 나눠지게 된 것이다.
한편 식민통치를 위한 군청사로 사용되면서 종전의 건 물은 상당부분 변개되었음이 확인된다. <Fig.8>은 1921 년 무렵 군청 본관으로 사용되던 충신당 앞에서 찍은 사 진이다. 전출되는 직 원을 위한 송별기념 사진인데, 좌측에 보 이는 팔작지붕의 큰 건물이 충신당이다. 용마루에는 양성바름 한 것이 보인다. 그 런데 우측 2칸의 벽 면 하부는 벽체로 막 히고 상부는 격자살 유리창이 설치되었다.
충신당 우측 뒤편에 팔작지붕의 약간 작은 건물은 연 심당이며, 앞마당 우측에 충신당과 직교해서 서있는 건 물은 동행랑이다. 이 건물의 벽체도 회벽 마감에 격자살 유리창이 설치되어 있다. 전면이 퇴칸이나 대청으로 개 방되었을 건물들이 내부공간으로 바뀐 것이다. 그 무렵 대부분의 건물에 사용되는 일본식으로 변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동래의 정신을 함축하고 있던 정원 루는 동래군청의 회의실로 전용되었다. <Fig.7>의 좌측 상단에 표기된 12칸의 누각건물로서 1446년에 객사 북쪽 에 처음 지어졌다. 임진왜란 때 부사 宋象賢이 여기서 순절한 탓에 이곳에 그를 기리는 宋公壇이 설치되고 대 신 1708년에 동헌 서북쪽, 즉 수안동 421번지에 새로 지 어졌다.15) 1917년의 <지방청건물대장>에는 군청회의실 로서 면적 22坪이라 했으며, 그 대지는 1932년 421-7번 지에서 분할되어 421-9번지가 되었다가 1974년 421-7번 지와 다시 합필되면서 지번이 말소되었다.
<Fig.9>의 우측 사진은 1930년대의 모습이다. 중층 누각으로 지붕이나 가구는 변함이 없으나 상층 벽면에 격자형 유리창이 달리는 등 내부공간으로 변했다. 그나 마 남겨진 건물은 식민통치를 위한 군청사 부속 건물로 전용되면서 지붕과 기본 골조 외의 벽체 등은 일본식으 로 변개된 것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관아건물들이 식민지 치하의 행정청사로 사용된 사례는 전국적으로 적지 않게 나타난 다. 여러 연구 결과들을 참조한다면, 협의의 의미로 동래 부의 경우처럼 동헌 건물이 식민 치하에서 지역 행정시 설로 활용된 사례로 영천군의 동헌이 영천군청으로, 안 동부의 동헌이 안동군청으로, 순천부의 동헌이 순천군청 으로 사용된 일례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위 사례의 경우 건물들은 훗날 철거되어 그 부지 위에 일본식 신식건물 이 들어섬으로써 현재까지 보존되지 못했다. 반면에 동 래부 동헌 건물은 비록 동래군청으로 해방 이후까지 사 용되었지만 훼철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남겨짐으로써 본 연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기에 연구대상으로 의의가 있 다고 생각한다.
2)부산지방법원 동래출장소로 전용
동래에 부산지방법원 동래출장소가 처음 설치된 것은 1919년 총독부훈령에 근거를 둔다. 일제는 1912년 토지 조사사업이 본격화되자 <朝鮮不動産登記令>을 공포하 고 토지조사가 완료된 지역부터 법원, 즉 등기소를 설치 해서 재판과 함께 등기업무를 맡게 했다. 동래에서의 등 기업무는 1916년부터 시작되었는데, 당시는 부산지방법 원 양산출장소가 맡았다.16) 그러다가 3년 후에 동래출장 소가 설치되면서 沙上面, 沙下面, 龜浦面을 제외한 동래 군 전역을 관할하게 되었다.17)
조선후기까지 동래부에서의 재판은 부사의 주관 하에 동헌에서 이뤄졌고, 등기업무는 작청 일곽에 있던 호적 소에서 취급했다. 그러나 일제는 동헌에서 제법 떨어진 호적소를 轉用하지 않고 군청사로 사용되던 동헌 일곽에 일본식 건물을 지어 사용했다.
새로 지어진 부산지방법원 동래출장소 건물의 위치는 앞서 <Fig.6> 및 <Fig.7>의 「東萊邑城內排水並道路 整理計劃平面圖」(1920년대 중반)에서 확인된다. ‘法院’ 으로 부기된 평면형태가 그것으로 이를 통해서 대체적인 윤곽을 그릴 수 있다. 즉, <Fig.6> 및 <Fig.7>에는 충 신당 서행랑 서쪽으로 ㄷ자형의 건물을 표현한 후 ‘法院’ 이라 부기했는데 바로 이 건물이다. 부속건물은 제외하 고 주 건물만 표기했지만, 그 위치는 얼마 전까지 찬주 헌이 있던 자리이다. 찬주헌은 부사의 막료인 裨將들의 집무처로서 14칸의 주 건물 외에도 南廊5칸, 西廊3칸 으로 충신당 서쪽에 큰 영역을 형성하고 있었다.18) 찬주 헌 일곽의 전체 모습은 알 수 없다. 그러나 <Fig.10>의 왼쪽 구한말의 사진에는 망미루 왼쪽으로 낮은 담장 안 의 한식기와지붕이 보이는데 찬주헌의 행랑채이다. 그런 것이 1920년대 초반 사진인 오른쪽 사진에서는 전형적인 일본식 담장과 박공지붕이 보인다. 1919년 무렵 찬주헌 을 헐고 새로 일본식의 부산지방법원 동래출장소 건물이 들어선 것이다.
이상의 도면과 사진에서 보는 부산지방법원 동래출장 소 건물은 1920년대 중반의 시구개정에 의한 도로 개설 로 다시 철거되어 다른 곳으로 이건되었다. 1931년 동래 읍성 밖 수안동 166-5번지의 293坪국유지에 일본식 신 식건물을 새로 지어서 옮겨진 것이다.19) 동래출장소가 떠난 자리는 충신당 일곽의 지번인 수안동 421-7번지에 서 분할되어 <Fig.1> 과 같이 지적 185坪의 수안동 421-10번지가 되고, 일부는 도로에 편 입되었다. 나머지 필지 는 군청 공터로 남아 있다가 해방 후 개인에 게 불하되었다. 동헌 일 곽의 찬주헌이 식민통 치를 위한 법원으로 바 뀌면서 건물들이 없어 졌고, 다시 시구개정에 의한 신설 도로에 포함됨으로써 부지의 흔적조차 사라지 고 말았다.11
3-3.시구개정에 의한 도로의 개설
앞서 <Fig.6>에서와 같이 시구개정에 따른 동래읍성 내의 배수로와 도로개설은 1920년대 중반에 이뤄졌다. 여기서 보듯이 일제는 이미 남문에서 객사 앞 중앙광장 에 이르는 중앙로를 넓히고 직선화하고, 중앙광장에서 일본인들이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온천장 쪽의 대각선 방향으로 도로를 낸 상태였다. 다시 빨강색으로 직선도 로 표기하고 이를 ‘昭和三年度施工線’이라 하여 1928년 에 개통하겠다는 것이다.
이른바 ‘소화삼년도시공선’은 원활한 도시가로망을 만 드는 데 필수적이지만 군청사로 사용되던 동헌 일곽을 통과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옛 관아건물들과 민가가 철거되어야 했으므로 반발이 없을 수 없었다. <東亞日 報>의 1928년 10월 10일자 ‘市區變更反對東萊市民大 會’라는 기사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東萊面은 점점 발전함에 따라 도시의 면목을 향상시킬 필요가 있다 하여 얼마 전 面당국에서 市區개정 노선 을 확정하고…금번 西門에서 東萊普校에 이르는 東西線 을 확정하고…주민의 가옥은 물론 철거하였거니와 오직 東萊郡廳의 숙직실과 정문이 철거된다는 이유에서 직통 선을 실현하지 못하고 이를 우회하여 市區의 미관은 고 사라고 일종의 독특한 도로를 만들어 금방 공사 중에 있는데…20)
당시 동래군청 관리들은 군청사로 사용되는 동헌 일곽 의 일부 건물이 철거되면 곤란하므로 직통노선 대신 우 회시키고자 했으나, 이 과정에서 지역 주민들의 반발이 발생한 것이다. 반발했다는 주민은 다름 아닌 읍성 내 중심지를 점유한 상인 및 유지들로서, 이미 자신들의 대 지와 건물이 도로부지에 포함되었으므로 군청의 희생도 강요하면서 반대한 것이다. 이는 15일 뒤의 <동아일보> 기사에 잘 나와 있다.
동래면 市區改正線變更反對有志大會가 지난 7일에 개 최되어…군 당국의 고집도 있어서 부득이 하게 군 당군 의 의향대로 허가원을 제출하여 지금에 이른 것이라는 변명 비슷한 경과 설명이 있었는데, 군 당국의 소위 고 집의 이유라는 것은 현 郡廳舍는 古代건물로 지금의 정문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官舍로서의 體裁가 되는 동 시에 官廳으로서의 위신도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이며, 또 하나의 이유는 이미 정한 대로 직통도로가 된다면 그로 말미암아 지금 정문은 물론 숙직실, 창고가 없어 지는 바, 그 건축비는 국고에서 판출되는 것이므로 지 금으로서는 도저히 예산이 없는 즉, 기어이 우회하여 달라는 것인데…21)
<Fig.12>에서 보듯이 중앙광장에서 서쪽으로 비스듬 히 직통으로 그어진 가는 노랑색 선이 원래 계획도로였 다. 그러나 군 당국은 이대로 시행하면 전통 건물의 일 부가 철거되고 따라서 관청으로서의 위신도 보존할 수 없다 하여 도로선을 변경했다. 그 아래 붉은색으로 그어 진 이른바 ‘昭和三年施工線’이었던 ‘郡廳前線’이 그것이 다. 그런데 이를 반대하는 주민들은 집회를 개최했고, 신 문도 이를 부추기는 논조를 실었다. 어떻든 그들의 주장 대로 가는 노랑색 도로선이 개통되었고, 다른 용도로 사 용되고 있었지만 형체는 남아 있던 내대문과 외대문, 남· 서행랑 마저 사라지기에 이른다.
그 결과 동헌 앞마당은 비스듬하게 개설된 도로로 인 하여 기형적인 모습으로 변했 다. 1973년경 동 래군이 양산군 으로 소속된 후 충신당이 양산 군보건소 동부 지소로 사용되 고 있던 시절의 사진에서 이를 살필 수 있다. <Fig.13>에서 보듯이 남행랑 과 내대문은 사 라지고 그 대신 전면으로 비스 듬하게 블록담 장이 쳐졌다. 중 앙광장 쪽으로 연결되는 도로 와의 레벨을 맞 추기 위해선지 충신당 앞 도로의 레벨은 크게 낮아져 있다. 1928년의 시구개정에 따른 도로 개설로 기형적인 공간으로 변했을 뿐 아니라 지형까지 왜곡된 것이다.
3-4.법인과 개인에 대한 필지 불하
일본인들은 1899년 이곳에 감리서가 설치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거주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1876년에 개항 된 부산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1910년 강제 합병 이 후로는 많은 일본인들이 조선총독부 관리나 상인으로 일 하고 있었고, 이곳에서 2km 거리의 동래온천장에는 많 은 수의 일본인들이 거주했다. 지역 사회로 침투하기 시 작한 이들은 조합을 결성하여 중심지의 옛 관아건물과 부지를 불하받을 수 있었는데 동래금융조합, 동래학교조 합 등이 대표적이다.
1)동래금융조합
1912년 1월 4일 업무를 시작한 동래금융조합(慶尙南 道東萊地方金融組合)22)이 동헌 일곽에 자리 잡은 것은 1919년이었다. 그간 어느 옛 관아건물을 사용하다가 조 선총독부로부터 부지를 불하받아서 새 건물을 지어 사용 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래금융조합을 비롯한 전국의 지방금융조합 창설은 1907년 5월 <칙령 제33호 지방금융조합규칙>에 근거를 두었다. 탁지부 고문이었던 메가다 타네타로(目賀田種太 郞)의 주도로 중앙은행 중심의 국고제도를 장악 운영하 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전래의 지방관이 갖고 있던 고유의 징세권이 유명무실해지고 지방재정이 악화되자 이를 해소할 요량으로 민간법인으로서 금융조합을 설립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23)
1910년 일제는 강제합병 후 전국에 걸쳐 지방농민금융 기구를 설립해 나갔다.24) 그 무렵의 동래금융조합은 경 상남도 여러 지역금융조합 중에서도 양호한 재정 상태를 유지했다.25) 어떻든 동래금융조합은 동헌 일곽에 들어서 게 된다. 외대문 바로 맞은편 작청 일곽의 상당 부지를 불하 받아서 일본식 건물을 지어 입주하게 되었다.
동래금융조합이 민간 법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유지 를 차지하게 된 배경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1913년 강 원도의 경우 지방장관이 조선총독부의 정무총감에게 역 둔토를 지방금융조합 부지로 요청했고, 이에 300坪정도 의 사용을 허가받은 사례가 확인된다.26) 조선총독부가 국유지를 불하하는 등 지방금융조합의 설립에 많은 특혜 를 주었다. 그런 만큼 동래금융조합의 사정도 크게 다르 지 않았을 것이다. 옛 동헌 일곽의 맞은편이자 작청 일 곽에 상당하는 건물을 철거한 자리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앞서 <Fig.7>의 「東萊邑城內排水並 道路整理計劃平面圖」(1920년대 중반)에 충분히 확인된 다. 군청사로 사용되던 충신당 남쪽 ‘昭和三年施工線’이 라 표기한 빨강색의 계획도로 아래에 ‘金融組合’이라 표 기한 부지 내에 세 채 의 건물이 그려져 있 다. 새로 개설될 도로 에 면해서 두 채가 서 있고, 그 아래쪽에 한 채가 그려져 있다. 특 히 부지는 수안동 421 번지에 있던 작청 일 곽의 절반에 이르는 대단히 큰 면적으로 엄청난 특혜를 받는 것이다. 동래금융조합 이 들어서면서 필지도 분할되었다. 원래 수안동 421번지로 통합되어 있던 것이 동래금융조합 자리가 421-2번지로 분할되어 지번이 부여 되었다(Fig.14 참조). 이후 차츰 각종 관청과 시설들이 들어서면서 하나의 필지였던 동헌 일곽의 부지는 차례로 분할되기 시작된다.
한편 동래금융조합 건물의 면모는 <Fig.15>의 1920년 대 사진에서 일부를 볼 수 있다. 망미루 의 누하주 사이로 보이는 점선이 쳐진 건물이다. 충신당으 로 진입하는 도로 좌측에는 자리 잡은 부산지방법원 동래 출장소 건물이 보이 고, 저 멀리 길 건 너편에 보이는 2층의 일본식 조적조 건물이 동래금융조 합이다.
동래금융조합 부지는 광복 이전에 기존 421-2번지 외 에 도로 개설로 인하여 2필지를 더 추가되었으며, 이는 현재까지도 유지된다. 동래금융조합은 1962년 동래군농 업협동조합에 소유권이 넘어갔다가 1971년 부산시농업협 동조합을 거쳐 지금의 NH농협은행 동래지점으로 사용되 고 있다.
2)동래학교조합
동래학교조합은 1909년의 <학교조합령>을 근거로 하 여 설립된 민간단체로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자녀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27) 외형상 민간법인이었지 만 조선총독의 허 가를 받아 설치되 었고, 관청의 감 독을 받는 등 준 행정관청의 성격 을 지니고 있었 다.28)
만 조선총독의 허 가를 받아 설치되 었고, 관청의 감 독을 받는 등 준 행정관청의 성격 을 지니고 있었 다.28)
민간법인인 동래학교조합이 국유지를 불하받은 것도 동래금융조합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조선 총독부가 <학교조합령>에 따라 전국에 걸쳐 심상소학교 를 건설하고, 일본인들의 생활기반 확보를 도와주기까지 했다. 학교 운영을 위한 기본 재산으로서 옛 관아건물과 부지를 불하해 준 것이다.
1920년대 객사 앞 중앙광장에서 망미루와 作廳일곽 을 바라보고 촬영한 <Fig.16>에서 보듯이 421-3번지에 는 일본식 조적조 건물 좌측으로 망미루와 접하는 한식 기와지붕이 보인다. 동래학교조합이 불하받은 옛 작청 건물이다.
동래학교조합은 이 건물을 사용한 지 2년 후에 校洞 으로 조합사무소를 이전하면서 일본인 마에노 마사노리 (前野昌則, 山口縣거주)에게 팔아 넘겼다. 마에노는 이 부지를 시구개정 사업이 본격적으로 착수되던 1928년에 동래의 상인과 유지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東萊銀行에 되팔았다. 그리고 다시 이 부지는 1934년경 동래은행이 경영 악화로 광주의 湖南銀行과 합병되자 부지 소유권도 함께 이전되었다.
이후 1942년 호남은행이 東一銀行에 합병되면서 다시 소유권이 넘어갔다. 1943년 동일은행은 漢城銀行과 합병 한 후 朝興銀行으로 개편되었는데, 광복 이후 이 부지를 우리은행에 팔았다. 동래학교조합으로 전용된 옛 동래부 작청 일곽에 지금은 우리은행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3)동래산업조합
동래산업조합은 1920년대 중반 시구 개정사업 때 동헌 일곽 앞으로 신설 도로가 개설되면서 대지로 지목이 바 뀐 옛 도로의 여러 필지를 불하받은 대표적인 민간법인 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역유지들의 반대로<Fig.5>의 ‘昭和三年施工線’ 대신 충신당 앞을 비스듬 하게 가로지르는 도로가 개설되었다. 그 결과 망미루에 서 충신당 외대문으로 이르는 옛 도로와 충신당 남쪽 일 부 부지 중 수안동 421-11, 421-14, 421-16, 421-19번지 는 대지에서 도로로 지목이 변경되었다. 옛 도로인 421-18번지와 도로 개설로 지번 분할된 421-15, 421-17. 421-20번지는 신설 도 로와 접하는 대지로 바 뀌었다. 가장 규모가 컷 던 421-18번지는 다시 421-21에서 421-27번지 까지 총 7필지로 소규모 분필되었다. 도로로 편 입된 4개 필지를 제외하 고 신설 도로와 접하게 된 필지들은 법인이나 개인에게 불하되었다. 이는 <Fig.17>에서 확 인된다.
옛 도로가 유명무실 해짐에 따라 신설 도로와 접하게 된 지번 중 개인에게 불하된 421-15번지와 421-21번지는 다시 동래금융조합 에 매도되어 기존의 421-2번지에 합필되었다. 합필 과정 에서 독진대아문이 철거되어 이전되었다. 나머지 421-15, 421-17, 421-20, 421-21, 421-22, 421-23, 421-24, 421-25, 421-26번지 등 9개 필지는 동래산업조합에 불하 됨으로써 동헌 일곽의 진입로였던 옛 도로가 없어지고, 정문 역할을 했던 망미루와 외대문(독진대아문)이 철거 되어 금강공원으로 이건되는 사태까지 초래했다.
옛 도로의 폐지로 가장 많은 필지를 불하받은 東萊産 業組合은 의외로 조선인들이 결성한 회사였다(Fig.18 참 조). 1933년 5월에 인가를 받아 동래읍에 주소지를 두고 출범했는데,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1933-1939)에는 煙管(담뱃대), 匙箸(수저), 莚繩(새끼줄) 등을 주로 판매 하고, 비료나 연관제작 재료 등을 중개 구매하며 가마니 제작에 활용할 수 있는 작업소 및 창고 등을 제공하는 회사로 기록된다.30)
동래산업조합이 일본인 조합이 아니었음에도 군청사 정면 맞은편의 옛 도로 부지를 불하받을 수 있었던 데는 사장 金秉圭의 역할이 컸던 것 같다. 그는 동래고등학교 와 동래은행 설립에 관 여했고, 동래읍회의원에 도 선출되었으며 지역청 년회를 조직해서 운영하 기도 했다. 당시 여러 분 야에 걸쳐 영향력이 컸 던 지역의 유력인사로서 일본인 관리들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31)19
한편 동래산업조합이 불하받은 이 부지들은 얼마 안 가서 몇 개의 작은 필지로 분할되어 개인에게 팔려나갔다. 예컨대 수안동 421-26과 421-27번지는 동래 읍회의원을 지낸 車光洙(수안동 거주)에게 넘겨졌다. 그 리고 수안동 421-17번지는 일본인 井谷義三郞(부산부 거주) 등 3인에게 넘겨졌다가 인접 5 개 필지를 합필되 었다.32) 그 무렵 형 성된 지번과 필지 의 형태가 지금까 지 유지되는 것이 다.20
그러나 이 불하 과정에서 가장 큰 손실은 뭐니 해도 독진대아문과 망미 루가 철거되어 연 고도 없는 金剛公 園숲속으로 옮겨 진 일이다. 2층 누 각인 망미루는 영 조 18년(1742) 동 래부사 金錫一이 세운 동헌 일곽의 정문이었다. 2층 마루에 북을 설치해 서 인정과 파루, 4대 성문을 여닫는 시각과 정오 시각을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한 명실상부한 동래부를 상징하 던 건물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일제는 망미루 방면으로 계획된 ‘昭和三年施工線’ 도로를 개설하지 않았으면서 건물을 일본상인의 정원을 가꾸는 데 쓰도록 불하하고, 그 부지 또한 개인에게 양도해 버렸다.21
일제강점기에 동헌 일곽은 식민통치를 위한 관청사로 전용되거나 도로 개설로 인하여 옛 모습을 잃어갔으며, 때로는 일본인, 민간 법인이나 개인에게 불하됨으로써 지금은 형해만 남게 된 것이다.
4.결론
본 연구는 동래부 동헌 일곽의 해체 과정을 건축물의22 전용과 도로의 개설, 필지의 분할 등 여러 관점을 통해 고찰하였다. 이는 한말부터 진행된 지방 읍치 공간을 비 롯하여 그 소재 관아시설의 해체 과정이 도시 및 건축사 에 있어서 끼친 영향을 규명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연구 결과를 요약하여 그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읍지와 옛 그림, 지적원도 등의 자료를 통해 조 선후기 동래부 동헌 일곽의 공간구조가 밝혀졌다. 동헌 이었던 충신당과 연심당, 내삼문 만이 오늘날 제자리에 있을 뿐 관아시설 대부분 철거되거나 이건되어 오늘날 동헌 일곽은 기형적인 형태로 변해 있다.
둘째, 한말 지방제도의 개편과 관아 혁파 그리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동헌 일곽의 관아시설은 식민통치를 위한 관공서로 전용되었다. 동헌 정청인 충신당은 동래 군청으로 전용되어 오늘날까지 남아있지만, 동래금융조합 으로 전용된 작청 일곽과 부산지방법원 동래출장소로 사 용되었던 찬주헌의 경우 전용 및 도로 개설이 이어지면 서 부지의 흔적조차 사라졌다.
세째, 동래읍성 내 시구개정에 의한 도로 개설로 옛 동헌 일곽의 대문 및 행랑 등이 훼철되었다. 또한 대지 를 비스듬하게 관통한 신설 도로는 대지와의 지형 레벨 까지 왜곡시켜서 동헌 일곽은 기형적인 공간이 되었다.
넷째, 동래거주 일본인들의 편의를 위해 설립된 동래 금융조합과 동래학교조합 등에게 국유지였던 관아건물 및 그 부속 공터가 제공되었다. 이주 일본인들의 재정 및 교육을 담당했던 이들 법인들에 대한 옛 관아시설 및 국유지의 전용·불하는 일종의 특혜였으며 기존 관아건물 의 해체도 수반되었다.
다섯째, 동래지역 조선인들이 설립한 동래산업조합은 일본인 산업조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중요 국유 지를 불하받았는데, 이는 사장 김병규의 역할이 컷다. 그 는 당시 여러 분야에 걸쳐 활동한 지역의 유력인사였고 일본인 관리도 무시 못했던 존재였다. 동래산업조합은 시구개정에 의한 도로 개설로 새롭게 접하는 필지들을 불하받아서 곧 일본상인을 비롯한 민간인에게 매도하였 다. 이 과정에서 불하된 필지 내에 위치했던 망미루와 독진대아문이 철거 및 이건 되었고, 개인에 의한 필지의 분·합필의 과정을 거치면서 해체되어 오늘날 형해도 알 아보기 힘든 부지 형태가 유지되고 있다.
본 연구는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던 동래부 동헌 일곽 의 공간 해체 과정을 사례 연구로써 고찰하였다. 제한된 사료를 통한 규명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겠지만 건물과 필지를 대상으로 하나씩 구체적으로 추적하여 해체 과정 을 밝히려 한 점에 연구의 의의를 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