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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 1598-1142(Print)
ISSN : 2383-9066(Online)
Journal of architectural history Vol.23 No.4 pp.57-68
DOI : https://doi.org/10.7738/JAH.2014.23.4.057

A Study on the Historical Value and Utilization Plan of the King Kojong’s Korean Legation in Washington D.C.

Jong-Hun Kim
Corresponding Author : kjh628@pcu.ac.kr
February 15, 2014 August 7, 2014 August 27, 2014

Abstract


워싱턴 D.C 소재 ‘대됴션쥬미국공사관(美國華盛頓朝鮮公使館)’의 역사적 의미 해석을 통한 복원 및 활용 방안 연구

김 종헌
(배재대학교 건축학부 교수)1)

초록

The Korean Legation in Washington, D.C., is a proof that Emperor Kojong of Chosun Dynasty tried to establish relationship with the U.S. in 1891, that was before the declaration to establish Korean Empire. In that sense, the building is a historic place. The legation building is a symbolic place attesting to the turbulent history at the time of 1890 to 1910, when Korea had to suffer the forced treaty with Japan in 1905 and the annexation into Japan, and then to the 20th century up to the present time, 2014. The legation building can be turned into a space to host well-planned exhibits to show Korea's history and culture to local residents, foreign visitors to Washington, D.C., and overseas Koreans. The followings are the basic principles for the future use of the legation in line with the basic direction. The building's use should not be limited to museum, but should be flexible to accommodate various different practical usage. It is necessary to make the Korean Legation building that can incorporate the characters and the history through modern interpretation of the historicity of the place, the Korean culture, and historical events. The future usage of the Korean Legation building should enhance the value as a cultural heritage by linking the interpretation of the historical events and real life shown through exhibits, performance and people.


    1.서 론

    2012년 10월 18일자로 대한민국 소유가 된 워싱턴 소 재 대한제국 공사관1)에 대한 관심은 이미 1976년 5월 11일자 동아일보 기사, 12월 23일자 경향신문 기사, 1982 년 1월 6일자 경향신문 등 이미 오래 전부터 표출되었 다.2) 이후 이 건물을 되찾으려는 노력이 재미교포들 사 이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2007년부터는 정부가 적극적으 로 나섰다. 그러나 매입금액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지연 되다가 문화재청과 문화유산국민신탁의 협력을 통해 구 입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102년 만에 되돌아온 ‘대됴션쥬 미국공사관(美國華盛頓朝鮮公使館)’의 역사적 의미와 함 께 이에 대한 복원 및 활용 방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프랑스 건축가 랑팡(Pierre Charles L'Enfant; 1754-1825)에 의한 워싱턴 D.C의 초기 계획 속에서 ‘대됴션쥬미국공사관(美國華盛頓朝鮮公使館)’이 위치하고 있는 로간 서클의 장소적 의미와 로간 서클의 변화과정을 추적해볼 필요가 있다. 이와 동시에 ‘대됴션 쥬미국공사관(美國華盛頓朝鮮公使館)’의 건축적 특성을 주변의 건축물과 비교 검토하고, ‘대됴션쥬미국공사관(美 國華盛頓朝鮮公使館)’에서 기록한 주미내거안(駐美來去 案)3) 및 관련된 당시의 현지 신문과 사진 등 각종 자료 를 수집하여 역사적 의미의 해석에 따른 복원 및 활용방 안을 찾아보고자 한다.

    2.워싱턴D.C. 계획안과 로간서클의 건축물들

    2-1.로간서클과 듀퐁서클

    대됴션쥬미국공사관(美國華盛頓朝鮮公使館)’가 위치 하고 있는 로간서클(Logan Circle)의 중요성은 워싱턴 D.C를 설계한 프랑스 건축가 랑팡(Pierre Charles L'Enfant; 1754-1825)의 1791년 도면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백악관을 정점으로 서쪽 면에는 듀퐁서클 (Dupont Circle), 동쪽 면에는 로간서클(Logan Circle)을 두고 삼각형의 꼭지점을 형성하고 있다.

    랑팡(L'Enfant)의 워싱턴 D.C. 계획은 도로를 격 자형으로 만들어 놓고 백악관과 국회의사당 등 중요건물 을 중심으로 사선의 도로를 만들면서 중요건물들이 도로 가 만나는 결절점에 위치하게 하여 ‘특별한 장소(special places)’로서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로간 서클은 ‘특별한 장소’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대됴션쥬미 국공사관’ 즉 미국화성돈조선공사관(美國華盛頓朝鮮公使 館)이 지어질 무렵인 1870년대에 이르러서도 랑팡 (L'Enfant)의 이러한 개념을 부분적으로라도 구현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런 점에서 백악관의 우측 삼각지점을 형 성하고 있는 로간서클은 매우 중요한 지점으로 여겨졌다. 이에 따라 당시 워싱턴 D.C.의 커미셔너임과 동시에 위 원장이기도 한 세쓰 리야드 펠프스(Seth Ledyard Phelps ; 1824.1.13 〜1885.6.24)는 자신이 살 집을 로 간서클 내에 지었던 것이다. 이집이 바로 ‘대됴션쥬미국 공사관(美國華盛頓朝鮮公使館)’이다. 워싱턴의 도시 성 장으로 말미암아 로간서클 지역에는 10여 년간 집중적으 로 집들이 들어서게 되었다.12345

    로간서클이 개발되면서 바로 뒤를 이어 듀퐁서클 (Dupont Circle)이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윌리엄 스트워 트(William M. Stewart) 상원의원이 1875년 듀퐁서클에 자신의 집을 세웠을 때만해도 사람들은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집을 짓는 것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이 집은 청국공사관으로 1901년까지 사용되었다. 그림 4와 5는 1892년 워싱턴 D.C.의 지도로 로간서클에 한국공사관이 위치하고 있고, 듀퐁서클에 중국공사관이 위치하여 백악 관을 중심으로 삼각형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중국공사관의 위치는 한국공사관 즉 ‘대됴션쥬미국공사관 (美國華盛頓朝鮮公使館)’의 위치를 로간서클로 잡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2-2.사회적 환경에 따른 로간서클의 변화

    187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 로간서클 지역은 랑팡 (L'Enfant)의 의도를 그대로 구현시키기가 어렵게 되었 다. 남북전쟁 이후 해방된 노예들과 남북전쟁 때 북군으 로 도망 온 흑인 노예, 소위 ‘밀수품들(contrabands)’들 이 로간서클 주변 골목에서 살게 되었다. 예기치 않았던 이러한 상황은 도시 개발의 방향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4) 점차 도시의 발전 축이 로간 서클지 역에서 듀퐁서클(Dupont Circle)쪽으로 변하기 시작하였 다. 이에 따라 워싱턴 D.C. 북서쪽이 선호되면서 매사츠 세츠로(Massachusetts Avenue)가 확장되었다. 점차 재 산가들이 듀퐁서클 근처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큰 저택들이 듀퐁서클 근처에 지어지게 되었다. 결국 포트 맥 강(Portmac Liver)의 지류인 락 크릭강(Rock Creek Liver)에 다리가 놓였다. 이후 시내로의 통근을 위한 시 내전차가 부설되면서 비즈니스맨들이 워싱턴 D.C.의 북 서쪽 교외지역에서 그들의 가족과 함께 살 수 있게 되 었다. 19세기말에 이르러 전원생활에 대한 만족감은 부 동산업자나 투자자들이 새로운 커뮤니티의 개발을 독려 시킬 수 있게 되었다.5)

    이러한 변화는 로간서클의 발전에 직접적으로 영향 을 미쳤다. 워싱턴 D.C.가 북서쪽 외곽으로 확장됨에 따 라 흑인사회와 백인사회간의 차이가 심해졌다. 로간서 클에서 살던 백인들이 옮겨가기 시작하였다. 그나마 로 간서클의 편리한 위치와 지역이 갖고 있었던 명성 때문 에 세계2차대전 시기에 이르기까지 전문적인 직업을 갖 고 있는 흑인들이 로간서클에 살았다. 예를 들어 대디 그래이스(Daddy Grace)가 로간서클 11번지에서 그의 작 품들을 만들었다. 워싱턴의 대변인이었던 벨포드 앤드 마조리 로선(Belford & Marjorie Lawson)이 로간서클 8번지에서 살았다. 또 클레이튼 포웰(Clayton Powell)이 50년대에 이르기까지 살았다. 로선(Lawson)은 1958년에 서야 이곳에서 이전하였다. 터렐 스미스(Therell Smith) 는 로간서클 14번지에서 살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토마 스 스미스(Thomas Smith) 박사는 40년 동안 이 지역에 서 병원을 운영했다.6)

    그러나 로간서클 동쪽으로부터 도시 쇠락에 대한 압 박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로간서클에 남아있던 흑인 전문가들이 도심 외곽으로 이전해가기 시 작하였다. 결국 로간서클의 집들에 대한 점유 패턴도 바 뀌게 되었다. 한 건물에서 각 단위 세대가 살아가던 방 식에서 각 방(room)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이 살게 되 었고, 한 건물 내에서 여러 세대가 같이 사는 아파트먼 트형으로 바뀌게 되었다. 집주인들이 더 이상 자신의 집 에서 살지 않게 됨으로써 집들은 더욱 더 쇠락하게 되었 다.67

    로간서클이 이렇게 변함에 따라 1960년대에 이르러서 부동산개발자들은 집들을 부수고 토마스 서클(Thomas Circle)처럼 새롭게 개발하자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결국, 1967년 2월 국가수도계획위원회(The National Capital Planning Commission)는 워싱턴 D.C.에 대한 종합계획 안을 기반으로 로간서클 정비계획안을 제시하였다. 이 계획안에서는 미국의 수도로서 랑팡(L'Enfant)의 원형광 장, 4각형 광장 등 특별한 가로에 대한 도시계획의 중요 성을 강조하였다. 특히 “로간서클의 파사드”에 대한 특 별한 의미와 랜드마크(landmark)를 보존하게 되면서 얻 는 장점들을 언급하였다. 즉, 이웃주민들과의 동질감 내 지 정체성을 얻을 수 있으며, 도심 재개발에 대한 현실 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을 신속하게 추진할 수 있다는 것 이다. 도시계획위원회는 1969년에 ‘샤 도심 재개발지역 (Shaw Urban Renewal Area)’7)를 위한 기본 원칙을 다음과 같이 채택했다.8)

    • 저소득 혹은 중산층의 가족이나 개인을 위해 새로 운 주거를 신축하기 보다는 우선적으로 물리적으로 황폐해 보이는 시설물 제거한다.

    • (2)공공이든 개인소유든 모든 새로운 시설물에 양질의 도시 설계를 진행한다.

    • 3)차량에 대한 제한, 보행자 통행 개선, 역사지역 에 대한 보존, 특히 로간 서클의 역사적 건축물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개발한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도시계획위원회는 1971년에 로 간써클의 1/3 지역을 도심 재생을 위한 지역으로 지정 했다. 또 랜드마크합동위원회는 1972년 로간써클의 역사 보존지구를 랜드마크(landmark) 29)로 지정하였다. 이러 한 노력으로 로간서클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빅토리안 시대의 타운 하우스 건축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집들이 팔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 에 따라 최근 14번가를 중심으로 도시 변화에 대한 활력 이 나타나고 있다.

    2-3.로간서클 건축물들의 입면과 지붕선

    랑팡(L'Enfant)의 계획에 따른 워싱턴 D.C.의 규 정은 건축선에서 4피트를 확장하여 도로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로간서클 광장을 중심으로 도로와 부 지는 비교적 넓어 향후의 변화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하였 다. 넓은 거리는 일종의 '공원'처럼 이용되었다. 각 건축 물들의 벽면은 3면이 노출되어 돌출과 후퇴로 인하여 분 절되었다. 원형의 베이(bay)들을 통해 다양한 입면 변화 를 연출할 수 있었다. 이렇게 장식된 파사드는 벽돌과 돌, 나무, 그리고 철제의 다양한 결합을 통해 흥미로운 입면을 얻을 수 있었다. 또 외벽재료는 벽돌과 돌로 한 정시켜 풍부한 장식과 함께 통일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8

    로간서클의 집들은 지붕선의 모습을 통해서 그 특징 이 드러난다. 원뿔형의 작은 첨탑(Turrets), 교회의 첨탑 형식인 스파이어(spires), 버트레스 위에 솟아 있는 첨탑 (pinnacles), 파빌리언(pavillions), 발코니 난간 (balustrades), 도머창(dormers), 돔과 같은 둥근 지붕 (cupolas), 레이스가 달린 격자장식(lacy grillwork), 정 교하게 다듬은 굴뚝 등이 뒤섞여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 다. 이러한 지붕은 로마식, 비잔틴, 프랑스식 르네상스, 이태리식 르네상스, 바로크, 고딕, 프랑스 시골의 대저택 양식(French Chateau), 제2 제정양식(Second Empire), 로마네스크 등 다양한 유형이 혼합된 결과다. 이러한 다 양한 양식의 집들이 19세기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시기 에 지어졌다고 해서 빅토리안 건축이라고 통상 칭하고 있다. 그러나 정확한 의미에서 영국의 빅토리아 양식으 로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일종의 인터내셔널 빅토리안 양식 혹은 미국식 빅토리안 양식이라고 칭하는 것이 오 히려 바람직하다.

    2-4.카탈로그에 의해 지어진 로간서클의 건축물

    1796년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대통령 은 모든 집들의 외벽을 벽돌이나 돌로 지어야 한다는 훈 령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 훈령이 건축을 억제하게 됨으 로써 1818년에 중지되었다. 그러나 1878년 워싱턴 D.C. 건축법에 의해 방화지역 내에서의 경계벽과 외벽에 돌 이나 벽돌의 사용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워싱턴 D.C. 내에서 벽돌제조가 금지되어 대부분의 벽돌은 워싱턴 D.C. 외부로부터 가져오게 되었다. 이에 따라 벽돌 카탈 로그 등을 이용하여 주문하는 시스템으로 발전하게 된다. 카탈로그에 의해 집들이 지어지면서 독창성은 다소 부 족하지만, 그 형태를 디자인 하지 않아도 비교적 신뢰할 만한 정도의 빅토리안 파사드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로간서클은 단기간 내에 정체성 있는 미국식 빅토리안 양식의 주거단지를 구성할 수 있었다.10)

    이처럼 로간서클 역사보존지구에 있는 대부분의 집 들은 벽돌 유형과 형태, 샤시와 문의 유형, 동판과 금속 판 등 각종 회사들로부터 만들어진 카탈로그를 이용하여 건설업자에 의해 지어졌다. 즉 건축에 필요한 모든 아이 템들이 카탈로그로부터 취해진 후 평면에 맞추어 건설업 자는 집을 짓기 시작한다. 이처럼 각종 건물의 구성요소 들이 다양한 양식으로 구성되어 카탈로그를 통한 우편 주문에 의해 로간서클의 집들이 만들어 질 수 있었다. ‘대됴션쥬미국공사관(美國華盛頓朝鮮公使館)’으로 사용되 었던 로간서클 1500번지 주택과 인접한 13번가 1502번 지의 건물이 동일한 양식으로 지어진 것도 바로 이 때문 이다.910

    카탈로그에 의해 집을 짓는 방식은 급격한 인구 증 가에 따라 보다 빨리, 싸게 짓는 집들이 필요했기 때문 이다. 건물에 소요되는 재료들이 우편으로 주문되었고, 운하와 철도를 이용하여 신속하게 제공되었다. 카탈로그 에 의해 건축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전국적으로 표준화되 었다. 카탈로그가 20여 년간 사용되었기 때문에 건축물 의 각 요소에 의해 건립연도를 추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간서클 주변의 건축물들이 그 안쪽 에 위치하고 있는 건축물들의 형태를 능가하고 있다. 특 히 로간서클 1번지 건물은 주목할 만하다. 이 건물은 1871년에서 1888년 지어진 행정부 청사(Executive Office Building)보다는 오히려 렌윅 갤러리(Renwick Gallery)11)에 가깝다. 이 건물은 평평한 표면에 복잡한 트림들을 첨가하여 스페인 세비야(Seville)의 아름다운 붉은 벽돌의 바로크 건축을 연상시킨다. 2번지에는 노만 콜만(Norman Colman)이라는 농림부 커미셔너 (Commissioner)가 살았다. 1895년에서 1899년까지 베네 주엘라 공사관이 로간서클 1번지와 2번지를 사용하였다. 이후에는 제7안식교(Seventh Day Adventist)의 요양원 이 되었다. ‘대됴션쥬미국공사관(美國華盛頓朝鮮公使館)’ 역시 D.C.의 커미셔녀였던 Seth Ledyard Phelps의 집으 로 로간서클의 중요한 건물 중 하나이다.

    3.대됴션쥬미국공사관(美國華盛頓朝鮮公使館)

    3-1.세쓰 펠프스(Seth Ledyard Phelps)

    13번가와 로간서클(Logan Circle)이 만나는 곳에 위 치하고 있는 ‘대됴션쥬미국공사관(美國華盛頓朝鮮公使 館)’은 테네시강의 헨리 요새를 탈환하는 등 남북전쟁에 서 탁월한 공적을 남긴 세쓰 리야드 펠프스(Seth Ledyard Phelps ; 1824.1.13〜1885.6.24.)의 집으로 1877 년 세워졌다. 펠프스는 미 해군에서 전역 후 건축가 토 마스 M. 플로우맨(Thomas M. Plowman)과 건설업자 요셉 윌리엄스(Joseph Williams)를 고용하여 13번가 1500번지(현주소: Logan Circle 15번지)에 5500달러를 들여 은퇴 후 살 집으로 지었다. 1875년에서 1878년까지 펠프스는 워싱턴 D.C.의 커미셔너를 맡았었고, 1878년에 서 1879년까지는 커미셔너 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아서 (Chester A. Arthur) 대통령에 의해 1883년 6월 페루 특명 전권대사로 임명되어 1885년 6월 24일 사망할 때까 지 페루에 있었다.1112

    3-2.건물 외관의 특징

    ‘대됴션쥬미국공사관(美國華盛頓朝鮮公使館)’은 지하 1층 지상3층의 벽돌조 건축으로 대지면적은 381.10 m2, 건축면적은 152.43 m2, 연면적은 584.54 m2으로 최고높 이는 15.14 m에 달한다.12) 이 건물은 로간서클 쪽으로 거실 겸 응접실로 사용하고 있는 공간이 타원형으로 동 그랗게 돌출되어 있다. 이 돌출부 중앙에는 벽난로로 활 용되기 위한 굴뚝이 주요 외관을 형성하며 지붕 위까지 돌출되어 있다.1314

    또 이 집의 독특한 특징은 주철로 이루어진 철물 이다. 철물 의 효과는 집의 경계를 이루는 펜스, 3층 발코니, 지붕의 파 라핏트 등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철물장식은 건립당시 원형 으로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또 집의 인상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창호 상부의 디테일이다. 외관으로는 콘크리트처럼 보 이지만 아연판을 접은 것으로 장식적 효과가 풍부하다.151617

    그러나 이 집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진입을 위한 포치(porch)이다. 이 포치가 차도를 넓히기 위해 1928년 경 사라졌지만, 옆집인 13번가의 1502번지 집에서 그 모 습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집에 처음부터 포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진 15는 1889년 4월 ‘대됴션쥬미 국공사관(美國華盛頓朝鮮公使館)’을 개관하면서 찍은 사 진이다. 정문 앞에 이완용, 이하응, 이채연 그리고 알렌 의 모습이 보인다.15) 전면의 태극기도 흥미롭다.

    3-3.내부 공간 구성의 특징

    그림 17, 그림 18, 그림 19는 캘리포니아주 헌팅톤 도서관(Huntington Library)이 소장하고 있는 ‘대됴션 쥬미국공사관(美國華盛頓朝鮮公使館)’의 사진이다. 당시 공사관을 주로 찍은 사진가 프란시스 벤자민 죤스톤 (Frances Benjamin Johnston)이 1893년 찍은 것이다. 이 사진에 따르면 정면 포치를 지나 내부로 진입하면 중 앙 홀을 중심으로 왼편으로 응접실과 서재가 있고 오른 편에는 식당이 있다. 1층이 공공적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는 셈이다. 응접실 중앙에 설치된 벽난로와 벽난로를 구성하고 있는 세부 장식들, 그 양쪽의 창문과 창문을 감싸고 있는 덧창장식, 문 프레임과 천정의 몰딩 등은 사진 상태 그대로 남아 있다. 이 건물을 구입하기 전 소 유주인 티머시 젠킨스(Timothy Jenkins)씨에 의해 서재 로 사용하고 있는 집무실 공간 역시 큰 변화 없이 유지 되고 있다. 벽난로 역시 큰 변화없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다만 샹들리에는 변화가 있다. 사진자료를 통해 볼 때 태극무늬가 있는 쿠숀과 광화문 육조거리의 사진 그 리고 호피무늬 바닥 장식 등이 흥미롭다.18192021

    사진자료에 태극기가 걸려 있는 벽면 안쪽 공간은 식 당으로 이용되었다. 식당의 벽난로와 상부의 거울 등은 사진의 상태와 동일하다. 이에 따라 1층 공간은 여러 차 례 소유주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가구와 건 물을 구성하고 있는 문과 문틀 장식, 청정 몰딩, 벽난로 심지어 식당의 벽난로 상부의 거울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다. 2층은 침실공간으로 사진 자료가 없어서 원래 상 태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기본적인 골격은 그대로 유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흥미로운 것은 3층 공간이다. 주로 가족실이나 하인 들 침실공간으로 사용되었던 공간을 터서 무대를 설치하 는 등 연회장으로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3층 다락방의 구조로 봐서는 각 방이 그대로 나누어진 것으 로 여겨진다.16) 또한 이 건물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창 문의 목재 덧창과 문 손잡이 등 장식의 디테일이 훌륭하 다는 것이다. 특히 창문 목재 덧창은 환기와 채광을 조 절할 수 있게 하는 등 세심한 고려를 하였다.

    4.복원 및 활용을 위한 기본 자료 분석

    4-1.대됴션쥬미국공사관과 시카고 박람회

    1893년 시카고 박람회를 앞두고 각국의 공사관이 관심을 끌었다. 이에 따라 프란시스 벤자민 죤스톤은 각 국의 공사관을 촬영하여 잡지에 싣고 있다.17) 시카고박 람회 백서18)에 브라운(Sevellon Adler Brown)과 당시 주미대리공사였던 이채연이 1891년 1월 3일 시카고박람 회를 준비하는 현장에 나란히 방문한 기록은 흥미롭다. 1889년 입주한 이후 단순히 공사관의 외교적 노력만이 아니라 세계박람회의 출품준비 등 다각적 방법으로 문화 적 역량을 알리려는 노력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고종은 특히 1893년 시카고 박람회에 각별한 노력 을 기울였다. 이로 인하여 당시 출품했던 조선관은 해외 관 중 가장 놀랄만한 주목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시카고 박람회에는 모시, 종이, 면화, 가죽 등을 출품했 고, 왕의 놋쇠그릇과 담배 용품 등이 출품되었다.19) 따라 서 ‘대됴션쥬미국공사관(美國華盛頓朝鮮公使館)’의 복원 을 위한 시점으로는 1893년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가장 확실한 근거가 되는 1893년 사진 자료가 남아있고, 1893년 시카고 박람회 등을 통해 공사관에서 의 활동이 매우 활발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이후의 자료 등을 통해 부분적인 보완은 필요하 다.222324

    고종은 특히 1893년 시카고 박람회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로 인하여 당시 출품했던 조선관은 해외관 중 가장 놀랄만한 주목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시카 고 박람회에는 모시, 종이, 면화, 가죽 등을 출품했고, 왕 의 놋쇠그릇과 담배 용품 등이 출품되었다.20) 따라서 ‘대 됴션쥬미국공사관(美國華盛頓朝鮮公使館)’의 복원을 위 한 시점으로는 1893년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가장 확실한 근거가 되는 1893년 사진 자료가 남아있고, 1893년 시카고 박람회 등을 통해 공사관에서의 활동이 매우 활발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이 후의 자료 등을 통해 부분적인 보완은 필요하다.

    4-2.1898년 4월 8일 화재와 수리 내역

    1893년의 사진 자료가 있지만 그 상태가 지속적으 로 유지된 것은 아니다. 1898년 4월 8일 공사관에 화재 가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이 화재에 대하여 1898년 4월 9일자 워싱턴 포스트(The Washington Post)지는 다음 과 같이 화재 소식을 전하고 있다.

    KOREAN LEGATION ABLAZE Early Morning Fire Wrecks Third Story of the Building.

    The third story of the Korean Legation building at Iowa Circle and Thirteenth street was wrecked by fire yesterday morning. …(중략) …The members of the legation, including the Minster and his family, were in the lower part of the house when the fire occurred and did not exhibit the least excitement.21)

    즉, 이 기사를 통해 1898년 4월 8일 아침 3층에서 불 이 났는데, 2층에 공사와 가족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확 인할 수 있다. 따라서 공사관이 1893년의 사진과는 다소 달라졌다.

    1898년 화재로 인하여 수리가 필요했는데 이에 대 한 수리내역이 광무4년 즉 1900년 4월 13일자 주미거래 안(駐美來去案) (五)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22) 이 자료 는 A. J. Fisher & Co. 라는 건설회사가 이의담에게 보 낸 서신으로 각층의 공간을 어떻게 수리할 것인지를 다 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지붕과 3층 : 주석지붕을 수리하고 페인트칠함. 슬 레이트 지붕을 수리함. 지붕 용마루의 철제 장식을 수리 하고 굴뚝 상부와 내화벽을 수리

    3층 화장실 : 세면대, 수도꼭지, 에나멜 욕조를 수리하고, 목재에 페인트칠하고 벽지 새로 바름.

    3층 방 1 : 창호와 문들을 수리하고, 벽지를 새 로 바르고 목재에 바니시(varnish)를 하고 마무리 손질 을 함.

    3층 방 2 : 벽과 천정에 장식처리를 하고 백색 도료 칠함. 창호와 문을 수리하고 페인트 칠함.

    3 21) The Washington Post, 1898.4.9일자 22)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발굴자료 층 방 3 : 플라스터를 수리하고 방 도배함. 창문과 문과 바닥을 수리하고 바니시 칠함. 3층 홀 창호에 바니시 칠 함.

    2층 방 1 : 창과 문을 수리하고 바니시 바름. 방 에 도배함.

    2층 욕실 : 배관을 수리하고 창과 문 그리고 징 두리벽판을 수리하고 바니시 칠함.

    2층 서재 : 창호와 문, 징두리판벽을 수리하고 바 니시 칠함. 그리고 방에는 도배를 새로 함.

    2층 홀 : 벽지를 새로 바르고 바니시 칠함

    2층 사무실 : 창호와 문, 바닥을 수리함.

    2층 화장실과 방 2 : 창과 문 그리고 벽장의 목 재를 수선 함.

    2층 침실 : 창과 문을 수리하고 바니시 칠하고 포치의 지붕을 칠함.

    1층 홀 : 전체 벽에 도배를 하고 벽면 돌림띠를 두르고, 목재에 바니시를 바르고 지금과 같은 질의 카핏 을 깜.

    1층 접견실 : 창과 문을 수리하고 바닥을 다듬 었고, 벽면돌림띠를 두르고 지금과 같은 양질의 카펫을 깜.

    1층 접견 부속실 : 목재를 수리하고 그 사이를 긁어내어 바니시 칠하고, 벽면 돌림띠에 엷게 색을 칠함.

    1층 온실 : 창호와 벽면을 수리함. 새로운 꽃 받침대를 설치. 새로운 매트를 놓고, 천정과 벽면에 도배 함.

    1층 식당 : 목재를 수리하고 그 사이를 긁어내 어 바니시를 바름. 천정과 벽에 도배를 함.

    1층 배선실 : 덤 웨이터(dumb waiter)를 수리 하고 창호를 수리하고 페인트 칠함. 방에 벽지를 바르고 새로운 싱크대를 설치함.

    1층 뒤 홀 : 창문과 바닥을 긁어내고, 도배하고 수리함.

    1층 물탱크실 : 도배하고 목재 수리함. 위생도구 를 수리하고 세면대 아래에 새로운 트랩을 설치함. 창문 의 문틀과 벽장을 수리함.

    지하층 홀 : 징두리벽과 문을 수리하고 칠함. 벽 과 천정을 닦아내고 회벽을 칠하고 하고 새롭게 바닥을 설치함.

    지하층 보일러실 : 플라스터를 수리하고 벽과 천정에 회벽을 칠하고 배관 등을 수리함. 지하 석탄 저 장고 창문에 문지방(sills)과 상인방(lintels)을 설치하고 철제 가드 레일과 포틀랜드 시멘트로 된 콘크리트 석탄 저장소를 수리함.

    지하 당구장 : 새로 바닥을 깔고 필라스터를바 르고 벽지로 새로 바름. 목재를 긁어내고 바니시를 바 름.

    지하 주방 : 천장과 벽을 닦아내고 회벽을 바름. 싱크대에 새로운 목작업을 하고 창문에 유리를 새로 끼 우고 수리를 함. 목재에 손질을 하고 바니시 바름.

    지하출입구 : 벽을 닦아내고 회벽을 바르고 창 과 문 그리고 목재를 수리하고 페인트를 칠함.

    물탱크(water closet) : 욕조를 제거하고 물탱 크 바닥을 수리함. 방을 닦아내고 회벽을 바르고 플라스 터를 수리함. 목재를 긁어내어 수리하고 페인트를 칠함.

    지하 식료품 저장소 : 플라스터를 다시 손보고 방을 닦아내고 회벽을 침. 목재와 창과 문을 수리함.

    지하 세탁실 : 플라스터를 수리하고 방을 닦아 냄. 회벽을 바르고 새로 바닥을 깔고 문 하나를 설치함. 목재를 다듬어서 페인트를 칠하고 벽난로를 수리함. 세 탁을 위한 욕조에 수도전을 설치하고 징두리 벽을 수리 함.

    지하 뒤편 포치 : 세탁실 문 위의 포치 지붕을 수리하고 페인트를 칠함. 또한 석탄 저장고 위를 수리함. 새로운 측문을 설치하고 측면의 펜스를 수리함. 새롭게 후문을 설치하고 전자 벨을 설치함. 지붕과 거터 (gutters) 및 배수구,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차대는 곳을 수리함. 현관출입문에 베벨판유리(beveled plate glass) 을 설치하고 출입문과 문 프레임을 닦아내고 바니시 칠 함. 집 외부의 철제 레일과 나무에 도색을 하고 지금까 지와 마찬가지로 2번 도색을 칠함.

    이와 같은 수리에 따른 금액은 총 1962.80 불이다. 위에서 언급한 작업은 이 재산을 보호하는데 필수적이며 거주자의 건강을 위하여 위생상 반드시 필요한 것이 라 고 하며 강조하고 있다.23) 위 자료는 1898년 화재에 따 른 공사내역서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수리가 이루 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4-3.주미공관물품기(駐美公館物品記)24)

    주미특명전권공사 조민희(趙民熙)는 광무 6년(1902 년) 1월 5일 외부대신서리 민종묵(閔種默)에게 공사관 수리 후 수리비용을 병기하여 집기 등 물품을 정리한 물 품기를 보고하였다. 이 물품기는 광무5년(1901년) 8월에 기록된 것이다. 당시 사용된 물품을 소상하게 파악할 수 있다. 우선 고종의 어진(御眞)과 태자인 순종의 예진(睿 眞)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 외에 물품기(物品記)에 기록 된 각 공간별 주요 품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2526

    1. 정당(政堂) : 등받이와 팔걸이가 있는 의자(交椅) 3개, 주석으로 장식되어 앉아서 치는 종(錫粧坐鍾) 1개, 꽃병(華甁) 5개, 얇은 비단 커튼(紗帳) 2쌍, 두터운 비단 커튼(厚帳) 1쌍, 태양이 그려진 벽난로를 막고 있는 병풍 (火屛), 태극기(國旗) 1면

    2. 객당(客堂) : 등받이와 팔걸이가 있는 의자(交椅) 11개, 비단으로 수 놓은 병풍(繡屛) 3건, 벽난로 위의 큰 거울 1개, 벽에 걸어 놓은 서양식 액자 그림(板畵) 4건, 작은 걸상(小凳) 1개, 얇은 비단 커튼(紗帳) 11건, 두터 운 비단 커튼(厚帳) 6쌍, 대리석 탁상시계(石粧坐鍾) 1 개, 수정으로 만든 꽃병(玻璃花甁) 1쌍, 대리석으로 만든 트로피 모양의 장식품(石粧罇樣物) 1쌍, 꽃병(華甁) 1개, 철로 된 병풍(철강병) 1개

    3. 문 안쪽 통로 : 책상(方案) 1개, 수건(面褓) 1개, 이름이나 신분이 새겨진 접시(名刺碟) 1개, 식사를 알리 는 종(飯鍾) 1개, 갓을 걸기도 하고 거울을 겸하는 가구 (笠架鏡幷) 1개, 서양식 액자(板畵), 꽃병(花缸) 1개

    4. 식당 : 두터운 비단 커튼(厚帳) 1쌍, 얇은 비단 커튼(紗帳) 3쌍, 식탁 1좌, 등받이와 팔걸이가 있는 의자 (交椅) 10개, 큰 거울 2개, 음식 그릇을 보관하는 장롱 (器皿欌) 1개, 작은 탁자 1개, 받침대가 있는 차 우리는 기구(銅茶鑵具臺) 1개, 그릇을 놓아둘 수 있는 원탁(留 器圓卓) 1개, 병풍(廳屛) 1개, 유리장식(塑像俱琉璃厘) 1 쌍, 조화를 꽂은 꽃병(花甁俱假花) 1개

    5. 사무실 : 등받이와 팔걸이가 있는 의자(交椅) 5 개, 영어사전(英字典幷機) 2권, 그릇을 보관하기 위한 장 롱(挈盒欌) 2개, 책을 읽기 위한 탁자(書卓) 2개, 긴 소 파(長椅) 1개, 비단으로 수 놓은 병풍(繡屛) 1개, 선풍기 (電扇) 1개, 긴 거울 1개, 영문 인쇄기 1개, 벽에 걸어 놓은 서양식 액자 그림 1개, 벽에 걸어 놓는 시계 1개, 비단으로 만든 얇은 커튼(紗帳) 3쌍, 영문을 새길 수 있 는 기계 1개, 저울(衡) 1개, 지구의 1개

    6. 서적실 : 영문서적 622권, 궤(함)안에 27권, side table(側案) 1개, 작은 장롱(小欌) 1개, 없애지 않고 보존 하는 문건이나 안건 책자(存案) 1권, 비밀보고문서(暗報 冊) 5권,

    7. 공사방 : 침상 1기, 등받이와 팔걸이가 있는 의 자(交椅) 2개, 갓을 걸어 놓을 수 있도록 한 기구(掛笠 機) 1개, 서탁(書卓) 1개, 거울이 있으면서 물건을 아래 에 보관할 수 있는 서랍장(粧鏡) 1개, 비단으로 만든 커 튼(紗帳) 1쌍

    8. 각방 : 침상 6기, 등받이와 팔걸이가 있는 의자 (交椅) 10개, 서탁 4개, 긴 의자 1개, 작은 장롱 1개, 갓 을 걸어 놓을 수 있도록 한 기구(掛笠機) 1개, 두터운 비단 커튼(厚帳) 2쌍, 벽에 걸어 놓은 서양식 액자 그림 2개, 얇은 비단 커튼(紗帳) 4쌍, 가래나 침을 뱉는 그릇 (唾器) 6개, 여름 겨울 이부자리(衾具冬夏幷), 식사준비 용 칼(飯刀) 15개, 포크(叉子) 15개, 큰 숟가락(大匙) 15 개, 차 숟가락(茶匙)15개, 가죽으로 씌운 숟가락(加皮匙) 10개, 자기로 만든 작은 반찬 그릇(磁器甫兒) 15개, 간장 그릇(鐘子) 10개, 작은 접시(小碟) 10개, 가운데 침심이 있는 그을음이 나는 등(煤燈心鐵) 1개, 밥상을 차리는 데 사용하는 백색 보자기(食床白褓) 4건, 식사할 때 앞 에 두르는 수건(揮巾) 20개, 세수할 때 사용하는 유리그 릇(洗手琉璃器) 7기, 물을 모아두는 기구(貯水器) 1개, 은으로 만든 그릇(銀器) 6개, 은으로 만든 차를 우리는 기구(銀茶鑵) 1기, 은으로 만든 쟁반 1개, 과일을 가는 믹서기(果碎機) 1개, 굴 무늬 작은 접시(石花碟匙) 4개 와 작은 접시 6개, 술병(酒甁) 2개, 술 담는 그릇(酒碗) 1개, 술잔 12개, 삼페인(三板酒) 5병

    9. 주방 : 밥을 짓는 큰 밥솥(炊餐大爐) 1개, 긴 의 자(長椅) 1개, 등받이와 팔걸이가 있는 의자(交椅) 2개, 나무로 만든 상(木床) 2개, 물을 걸러 깨끗하게 하는 돌 항아리(濾水石缸) 1개, 돌 항아리(石缸) 3개, 빙수를 담 은 항아리(氷水缸) 1개, 알람시계(自鳴鐘) 1개, 뜸을 뜨 는 쇠(灸釗) 1개, 계란을 조리하는 기구(鷄卵調機) 1개, 떡을 굽는 기구(煮餠鐵) 1개, 음식을 부치는 기구(煎餠 鐵) 1개, 냄비(南飛) 4개, 빵 굽는 기구(麵包鐵) 1개, 약 을 다리는 통(湯鑵) 1개, 철로 만든 통(洋鐵桶) 3개, 자 기로 만든 항아리(磁器缸) 1개, 재를 치거나 숯불 등을 옮기는 조그마한 삽(火揷) 1개 등을 갖추고 있었다.

    이외에 다양한 그릇이 주방에 있었다. 흰접시(白碟 匙) 15개, 수프(soup)을 담는 접시(湯碟匙) 15개, 식초병 (醋甁) 1개, 소금그릇(塩器) 6개, 유리접시(琉璃碟匙)가 있었다. 이를 통해 전체적인 세트는 15인을 기준으로 준 비되어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10) 지하실 : 놀이할 때 기대는 방석과 큰 상(戱几 大床) 1개, 기대는 방석(几) 4개, 지팡이(杖) 24개, 사진 12본, 솔(乺) 1개, 잔디를 깎는 기구(割草機), 눈 치우는 삽(掃雪揷), 석탄을 담거나 옮기는 삽(石炭揷), 불을 때 는데 필요한 기구(火具) 1개, 배수관을 여는 열쇠(水管開 金) 1개가 구비되어 있었다.

    이러한 물품기를 통해 공사관에서의 생활은 미국식 생활도구를 갖추고 있었지만, 이와 함께 한국에서 사용 하던 여러 가지 생활도구들로 채워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지하실의 집기 등은 미국에서의 일상적인 생 활을 위한 도구로서 당시 어떻게 살았는지를 실질적으로 느낄 수 있는 자료들이라고 하겠다.

    5.결론 - 활용을 위한 기본 방향

    1) ‘대됴션쥬미국공사관(美國華盛頓朝鮮公使館)’의 역 사적 의미의 해석을 통해 복원 및 활용 방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 본 논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 ‘대됴션쥬미국공사관(美國華盛頓朝鮮公使館)’은 대한제국을 만들기 이전인 1889년 이미 조선의 고종이 미국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는 모습을 실증 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청나라의 반대를 무릅쓰고 공사 관을 개설하여 1983년의 시카고박람회 준비 등 실질적인 업무를 수행하면서 당시 미국에서 상당한 반향을 받은 것도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국 권이 일본으로 넘어가면서 우리의 재외 공관이 일본에 의해 강탈되어가는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27

    ‘대됴션쥬미국공사관’ 복원은 한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 의 국제관계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게 함에 있어 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특히 당시 주변에 같이 있었던 중국공사관과 일본 공사관이 모두 허물어지고 유일하게 한국공사관만 원래대로 남아 있는 것도 큰 강점이라고 하겠다.

    3) ‘대됴션쥬미국공사관(美國華盛頓朝鮮公使館)’의 복원 및 활용을 통한 로간 서클 지역의 활성화는 단지 한국에 관한 문제만이 아니다. 1870년대 랑팡에 의한 워 싱턴 D.C.의 초기 계획안을 환기시키며 흑인과 백인에 의해 분리된 지역 개발에 대한 문제, 구도심과 신도심의 균형적 발전을 모색해 본다는 측면에서도 매우 의미 있 는 작업이 될 수 있다. 즉, ‘대됴션쥬미국공사관(美國華 盛頓朝鮮公使館)’의 복원 및 활용에 대한 문제는 워싱턴 초기 계획안의 가치를 확인시켜주는 작업임과 동시에 흑 인과 백인의 지역적 분화를 연결시켜주는 사회적 의미 또한 크다고 할 수 있다.

    4) 미국속의 한국, 한국 속의 미국을 구현함으로써 공간, 역사, 인물이 하나로 융합되어 새로운 가능성을 모 색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역사적 공간의 장소성, 한국문화의 질적 가치, 장소에 대한 역사적 해석 등을 풀어내어 그 안에서 활동하고 업무를 수행하는 과 정에 자연스럽게 도출될 수 있도록 기획할 필요가 있다. 공간과 인물과 역사가 하나로 융합되어 현대적 해석이 드러날 수 있도록 주미 워싱턴 공사관을 만들어 내는 것 이 필요하다.

    5) 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대됴션쥬미국공 사관(美國華盛頓朝鮮公使館)’의 복원 및 활용에 있어서 현실적으로는 여러가지 한계를 지니고 있다. 충분한 면 적을 갖고 있지 못하며 주거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 서 집회 관람 시설로서 활용하는 점에 있어서는 제한적 인 요소가 많다. 주차장을 비롯해서 동시에 대규모 인원 이 관람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지역주민들로부터 민원 을 제기 받을 여지도 있다. 이렇게 될 경우 오히려 역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현재의 상태를 잘 활용하면서 소규모의 관 람을 위한 고급화된 생활형 문화시설로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1901년의 유품기의 기록을 이용하여 의복, 가 구, 생활 용품 등을 구현함에 있어서 문화적 가치를 재 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문화적 역량의 가장 궁극적인 지향점은 일상생활에 있다. 이를 통해 관람객이 그 안에 들어가면 그 공간에서 생활하는 한 주역이 되어 120여 년 전의 한국 생활에 대한 실체를 느낄 수 있도록 하여 야 한다. 역사적 현장이니 만큼 장소적 의미를 부가시 키는 행위예술을 포함한(site specific performance) 방 식의 접근도 필요할 수 있다. 버지니아주의 윌리암스버 그의 활용과 같이 장소를 드라마의 공간 배경처럼 역사 적 장소로 만들어 활용할 수 있다. 주미한국공사로부터 환대를 받고, 명장이 만든 한복을 입고, 주방에서 방금 요리한 한국 음식을 주미공사와 함께 하며, 때로는 한국 식 방에서 잠을 자보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 이러한 역사 문화 체험 활동은 미국인들 은 물론 한국 교포들에게도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다.

    Fig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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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nfant's plan for Washington 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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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upont Cir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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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ck Creek Li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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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orean Legation in Logan Circle and Chinese Legation in Dupont Circle (Washington D.C. in 1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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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orean Legation in Logan Circle and Chinese Legation in Dupont Circle (Washington D.C. in 1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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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ew of Logan Circle's in 1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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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ew of Logan Circle's 197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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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ermont Avenue of Logan Circle in the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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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ogan Circle A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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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11-15 Logan Cir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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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th Ledyard Phel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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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orean Leg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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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levation Drawing of Korean Legation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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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levation Drawing of Korean Legation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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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penning of Korean Legation in the 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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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orean Legation & Korean Fl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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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orean Legation in the 189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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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terior of Korean Legation in the 1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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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terior of Korean Legation in the 1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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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orean Legation in the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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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orean Legation in the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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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e Cha Yun & Sevellon Brown in Chicago World Fair Preparation on the 3rd of January, 1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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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e Cha Yun(New York Tribune, Feb. 4,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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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e Cha Yun’s wife(New York Tribune, Feb.4,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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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repair report for the Korean Legation in the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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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furniture list for the Korean Legation in the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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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inese Legation(1893) Fig. 28 Japanese Legation

    Table

    Footnote

    Reference

    1. Kim Hyunsook (2008) 「A Study on the Western Adviserof Korea Government in Modern Korea」 , Research Center of Korea,
    2. (2010)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of Korea , TheNational Trust for Cultural Heritage, Historic Valueand Utilization plan the Legation Building of KoreaEmp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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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1900) The Korean Legation , A repair report for the Korean Legation in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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