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 론
전통 벽체는 초벌, 재벌, 정벌 등의 다양한 순서로 공 정이 이루어지며 이에 따라 사용되는 재료와 기법도 다 양하다. 이러한 전통 벽체의 기법은 전통기법이 전승되 어 내려져오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단절되어 현재의 기법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알지 못한 채 사용하고 있다. 문화재를 보수하고 복원하는 일은 외적인 형태만 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숨어있는 기법까지 유 지해야 하는 것이 진정한 문화재의 보존이라 할 수 있 다. 이러한 면에서 봤을 때 전통 벽체 재래의 기법을 밝 히고 변화과정을 살펴보고 기술의 변화 원인과 더불어 전통기법에 대한 재고가 이루어져야 한다.
일제강점기는 양풍 및 일식풍의 건축이 흥행함으로 인 해 전통 기술이 단절되고 신식기술이 유입된 시기이다. 그럼으로 이 시기에 보수된 문화재 벽체기법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또한 이 시기의 벽체기법과 조선후기 벽체기법을 비교해본다면 벽체 기법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그 일면을 살펴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의 벽체 기법은 각종 의궤2)와 고문헌 등을 통하여 재료의 종류와 의미, 기법 등을 살펴보고, 일제강 점기의 벽체기법은 당시 보수된 문화재 중 벽체기법을 살펴볼 수 있는 기록을 참조하고자 한다. 특히 당시 전 통건축의 보수현장에서 감독관으로 종사했던 杉山信三 (스기야마 노부조)가 1996년에 출판한 『韓国古建築の保 存』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일제강점기 당시의 전통 일본 벽체 기법3)을 분석하여 일본 벽체 기 법과 조선후기의 벽체기법 및 강점기 당시 보수된 벽체 기법을 비교하여 일본 기법의 유입 여부 및 변화 요인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전통 벽체의 기법이 조선후기부터 일제강점 기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2.조선후기 벽체 기법
2-1.벽체의 명칭
벽체공사는 건축물을 마감공사 중 하나로, 뼈대(목구 조)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창호와 더불어 메꾸는 작업 이다. 전통건축의 벽체는 흙을 주재료로 사용하여 마감 했는데 이를 심벽(心壁) 구조라 부른다. 또한 벽체는 마 감재료에 따라 재사벽(再砂壁), 회벽(灰壁), 회사벽(灰砂 壁)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현재는 전통목조건축 벽체를 심벽이라 부르지만 영건 도감의궤와 산릉도감의궤에 따르면 심벽이라는 용어가 없으며 벽체는 대부분 사벽(沙壁)으로 통칭된다. 사벽이 란 모래를 사용한 벽체를 의미하는 것이며, 정벌에 모래 를 사용하여 마감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것으로 토벽(土壁)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진흙을 사 용한 벽체를 일컫는 명칭이다. 토벽에는 진흙(泥土)을 사 용하여 바르는데 곡초(穀草)를 잘게 썰어 교화(交和)하 여 사용하였다.4) 토벽은 지금의 초벌과 비슷한 것으로 보이며, 마감을 따로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종묘개 수도감의궤』(1726)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자정전 토벽이 박락된 곳을 사벽으로 고쳐 바르는 일은 2도청에서 봉심할 때 나누어 준 것이 사벽 5말이며, 이 에 들어가는 백휴지 3량, 교말 3되, 마른 숯 2말 등을 마련하여 아뢰다.5)
위 기록에 따르면 토벽으로 된 벽체를 사벽으로 고쳐 발랐다고 되어 있어, 사벽과는 다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토벽은 진흙에 곡초를 섞은 초벌과 비슷한 형태의 벽체이며, 사벽은 모래를 이용하여 마감한 벽체를 일컫 는 명칭이다. 또한 벽체는 재료뿐만 아니라 위치와 형태, 크기에 따라서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우선 기둥과 기 둥 사이의 벽체를 제외하고 처마 서까래 사이에 흙을 발 라 마감하는 것을 앙벽(仰壁)이라 한다. 앙벽은 앙사벽 (仰沙壁) 혹은 앙토벽(仰土壁)이라고도 한다. 앙토벽과 토벽은 같은 마감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앙토벽 에 사용되는 재료와 수량은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니토 (泥土)와 곡초(穀草)가 사용되는 것으로 보아 초벌상태 의 토벽과 같은 것으로 판단된다.
『종묘개수도감의궤』(1726)에는 갑벽(甲壁), 전단벽 (全單壁), 반벽(半壁)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는데 갑벽은 종묘 정전의 전면 문 상부의 벽을 지칭하는 명칭이다.6) 전단벽은 한 면이 창호 없이 모두 벽으로 이루어진 벽체 를 말하며, 반벽은 문(門) 위의 벽7)이라고 되어 있는 것 으로 보아 갑벽과 같은 의미로 추정할 수 있으나, 현재 공신당 문 위에는 벽체가 아닌 창호가 드리워져 있어 문 위의 벽이 아닌 문 옆의 벽체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반벽이라는 것은 반칸 크기의 벽체를 말한다.123
2-2.벽체 사용재료
벽체에 사용되는 재료는 기본적으로 진흙과 모래가 주 재료로 사용되고 여기에 균열방지제와 점착제(粘着劑)가 첨가된다. 점착제는 재료간 점성을 주는 현재의 풀과 같 은 재료를 말한다. 균열방지제는 대표적인 것이 짚여물 이며, 점착제로는 쌀풀이나 아교풀 등이 사용된다. 영건 의궤에 기록된 사벽의 재료는 균열방지제로 짚여물과 휴 지(休紙)가 사용되었으며, 점착제로는 교말(膠末)과 진말 (眞末)이 사용되었다.
진말은 밀가루8)를 말하며 교말은 아교(阿膠)가루를 말 한다. 밀가루에는 글루텐(gluten)이라 불리는 단백질을 함유하고 있는데, 물을 넣어 반죽을 만들 때 이 글루텐 분자들이 그물망처럼 서로 결합하여 탄력 있는 구조가 된다. 또한 조선시대에 벽면을 바를 때는 대체로 밀가루 로 풀을 쑤어 사용했다.1
우리나라 사람들은 벽면을 바를 때 대체로 밀가루를 사 용하여 풀을 쑨다. 「본초강목(本草綱目)」을 보면, ‘접 시꽃 줄기 즙이나 구목즙9)은 모두 종이에 단단하게 달 라붙는다’고 하였다. 또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에서는 ‘고사리 줄기의 중심에 있는 흰 가루는 종이에 가장 잘 달라붙는다. 따라서 지공가(종이 만드는 장인) 가 그 가루를 취하여 풀을 쑤어 상자나 바구니 같은 기 물을 접착시킨다’라고 하였다. 또 말(海蘿)이라는 물건 말린 것을 끓여서 풀을 쑤어 종이를 바른다고 하였다. 혹은 석회와 반죽하여 바른다고도 하였다. 이러한 것들 은 모두 밀가루와 반죽하여 풀을 쑬 수 있다.10)
아교 또한 점착제로 많이 쓰였으며 지금도 사용되는 재료다. 아교는 건조 전에는 부드럽고 탄력이 있으나 건 조 후에는 단단해지는 성질이 있다.11) 아교 가루는 동물 성 접착제와 천연원료를 가루형태로 혼합 제조한 것인데 사용할 때에는 물을 섞어 녹인 후에 사용한다.
사벽에 사용되는 재료 중에는 벽체를 의미하는 사벽이 아닌 재료를 의미하는 사벽(沙壁)이 있다. 재료로 사용되 는 사벽은 『경덕궁수리소의궤』(1693)부터 나타나는 데12) 그 의미를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섬용지 (贍用志)」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앙벽(仰壁)
집 상부의 서까래 사이를 치올려다 보면 산자가 그대로 노출된 곳이 있는데 그곳을 진흙으로 바른다. 흙이 마 르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누런 빛깔의 곱고 차진 모래 (黃細黏沙: 속명은 사벽토(沙壁土)이다.)를 말린 말똥(乾 馬矢)과 섞어서 진흙으로 반죽하여 벽을 바른다. 그것을 세상에서는 앙벽(仰壁)이라 부른다.13)
사벽토(沙壁土)
우리나라의 건축제도에서 온돌을 깔고 벽을 치장하는데
는 모두 붉은 찰흙(赤粘土)을 사용한다. 그런데 이 흙의 성질은 거칠어서 마르기만 하면 곧 균열이 생긴다. 이 때 노랗고 가는 모래흙(黃細沙土) 중 점착력이 있는 것 을 취해서 말똥(馬矢)과 섞어 진흙 덩어리를 만든다. 그 런 다음 이것을 붉은 찰흙 위에 엷게 발라서 그 갈라진 틈을 덮어 메우고, 평탄치 못한 부분을 평탄하게 하는 데 이를 세상에서는 사벽(沙壁)이라 일컫는다.14)
이에 따르면 누런 빛깔의 곱고 차진 모래를 속칭 사벽 토(沙壁土)라고 부르며 진흙과 황세사토, 말똥(짚여물)이 합쳐진 혼합물을 사벽(沙壁)이라 한다. 이는 현재 벽체공 사의 초벌 혹은 재벌에 사용되는 재료(沙壁土+짚여물)와 같은 것으로, 하나의 재료가 아닌 혼합재를 통칭하며 18c 중반 이후부터 계속 나타난다.
사벽에 사용되는 재료 중에 백와(白瓦)는 18c 초기까 지 나타난다. 백와는 사전적 의미로 흰색의 기와를 뜻하 는데 재료로써의 의미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여러 문헌 을 통해서 그 용도와 의미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먼저 기와와 관련된 재료로써 백와를 기와가루(瓦屑)로 해석 하는 것이다. 기와가루의 경우 회를 바르는데 사용되는 삼화회(三和灰)15) 중 하나로 기와를 굽는 가마에서 나온 못 쓰는 기와를 절구통에 넣고 빻은 가루를 체로 쳐서 사용16)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기와조각은 진흙 사이에 섞어서 흙벽을 바르는데 사용하면 바람을 막는데 효능이 있다고 하였다.17) 다른 하나는 굽기 전의 마른기와를 날 기와 혹은 백와(白瓦)라고 하는데, 마른 기와를 저장하는 곳을 백와칸이라 부른다.18) 즉, 백와를 굽기 전의 마른 기와라고 해석하여 기와를 만드는 바탕흙인 백토(白土) 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19) 그래서 조선중기에 는 백와로 기록하고 후기에는 백토로 기록하여 명칭만 다를 뿐 같은 재료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백토는 조선 초기 자기(磁器)에 사용20)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백와가 백토라는 명칭 이전에 사용된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즉, 백와와 백토는 같은 재료가 아니라 서 로 다른 재료를 의미하는 것이며, 18c 중반 이후에 사용 되는 백토는 새로운 재료의 사용인 것이다.
백와의 의미는 산릉도감의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8c 초반 이전의 산릉도감의궤의 정자각 사벽공사에서도 백와가 사용되었는데, 백와를 공급하는 담당부서가 와서 (瓦署)로 기록되어 있다.21) 와서는 궁궐을 조성하는데 소용되는 기와나 벽돌을 공급하기 위한 관서로써 주로 양질의 점토를 주재료로 다루는 기관이다. 기와를 만들 기 위한 흙은 표토층을 30~40cm 이상 파내어 점토(粘 土)를 주로 사용하는데, 검은흙, 누런흙, 붉은흙을 골고루 배합하여 구워낸다.
검은흙은 모래가 전혀 섞이지 않은 순진흙으로, 배합되 는 정도에 따라 기와의 강도가 달라진다. 만약 검은흙 (검은질)으로만 기와를 만들어 구우면 강도는 굉장히 강 하나 굽는 과정에서 많이 수축된다. 누런흙(우렁질)은 모래가 많이 섞여 있는데, 이 흙은 약해도 나중에 기와 의 수축율을 조정한다. 불그스레한 빛을 띤 붉은 흙은 모래가 약간 섞여 있다. 이 세 종류의 흙이 골고루 배 합되어야 좋은 기와를 만들 수 있다.22)
백와를 와서에서 공급한다는 것은 기와나 벽돌을 만들 기 위해 사용되었던 재료인 점토(진흙)가 백와의 의미일 가능성이 높으며, 굽기 전의 마른기와를 백와라고 부르 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 해준다. 영건의궤에는 토벽이나 앙토벽에서 진흙을 뜻하는 용어인 니토(泥土)가 사용되 었으나, 사벽(벽체)이나 앙사벽에서는 니토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다. 벽체 공사에서는 초벌에 사용되는 흙 의 종류로 응당 진흙을 사용하는데, 18c 중반 이전에는 진흙을 뜻하는 용어를 살펴볼 수 없다는 점도 백와가 진 흙을 뜻하는 근거로 볼 수 있다. 니토와 백와의 차이점 은 니토가 일반적인 진흙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백와는 이보다 입자가 더 고운 양질의 점토, 진흙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백와가 사용되지 않는 시점인 18c 중반 이후에는 사벽(재료)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는데, 이 사벽(재료)은 진흙에 짚여물을 더한 것으로 기존의 진흙 을 뜻하는 백와에 짚여물을 더한 초벌재료로 재료 혼합 에 따른 명칭의 변화로 볼 수 있다. 즉, 18c 초반 이전의 사벽공사에서 초벌 혹은 재벌은 점토질의 진흙인 백와를 사용하였으며, 이후에는 백와에 짚여물을 섞은 사벽(재 료)으로 초벌 혹은 재벌까지 한 것이다.2
사벽공사의 재료가 18c 중반 백와에서 사벽으로 전환 되는 것은 산릉도감의궤에서도 동일한 흐름을 보인다. 산릉도감의궤의 사벽공사는 백와, 휴지, 교말, 사벽이 사 용되었는데 18c 초반까지는 백와, 교말, 휴지가 사용되고 이후에는 사벽, 휴지, 교말이 사용되었다. 경종의릉산릉도 감의궤(1725)에서는 백와와 사벽이 같이 사용되었으나 이후에는 사벽만 사용되어 영건도감의궤와 그 흐름을 같 이 하고 있다.
벽체 재료 중 백토(白土)는 『진전중수도감의궤』 (1748)에서부터 나타난다. 그러나 사벽공사에 사용되는 백토는 『수은묘영건청의궤』(1764)부터 나타나지만 진 전중수도감의궤에서 화방벽 재료로 사용되기 때문에 18c 중반부터 사용된 벽체 재료라고 봐도 무방하다.23) 19c 에는 벽체에 들어가는 재료를 따로 서술하지 않고 한 동 의 건물에 들어가는 재료를 한꺼번에 서술하기 때문에 백토가 사벽공사에 사용된 재료라고 판단하기 어려운 점 이 있지만, 같은 공사에 사용된 재료를 나열식으로 서술 하는 특성 상 벽체에 사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백토는 『임원십육지』에 그 성질과 용도가 기록되어 있다.
백토는 곳곳마다 있지만 가루가 희고 점착력이 있는 것 이 좋다. 요새 사람들은 백토와 석회를 섞어서 진흙을 만들고 이를 담벽에 바르는데 기와 조각 사이에 흰 무 늬가 아름답게 생긴다. 그 중 호서의 보령(保寧)에서 산 출되는 것이 특이하여 그 지방 사람은 이 백토로 방실 (房室)의 내벽을 바르는데 그 곱기가 옥(玉)과 같고, 밝 기가 거울과 같으므로 종이로 도배를 하지 않더라고 사 방의 벽이 환하게 밝다.24)
즉, 백토는 점착력이 있어 진흙처럼 점성이 있게 만들 수 있으며 색이 희기 때문에 회벽(灰壁)처럼 벽을 하얗 게 만들 때 사용되었다. 『진전중수영건청의궤』(1772)에 는 면토(面土) 감으로 백토를 사용25)하고 있어 마감재료 인 정벌용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사벽(沙壁)공사의 재료는 18c 중기 이전에는 점토질의 진흙을 지칭하는 백와를 사 용하여 초벌 혹은 재벌을 하고, 세사에 균열방지제인 휴 지와 점착제인 교말 혹은 진말을 사용하여 정벌을 했으 며, 18c 중반 이후에는 진흙에 짚여물을 섞은 사벽(재료) 으로 초벌, 재벌을 하고, 백토를 사용하여 마감(정벌)을 했다.
3.20c 초중반 문화재 벽체 공사
일제 강점기에 이루어진 보수 공사는 고적조사를 근거 로 지정되었던 건축물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대부분 이 사찰 건축물이다. 전통건축 수리공사는 木子智隆의 감독 아래 행해진 1913년의 평양 보통문 수리공사가 그 효시이며, 그 후 부석사 무량수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에 대한 수리공사가 이루어졌다. 수리공사가 이루어진 주요 건물의 소재지와 공사 년도는 <Tab.3<와 같다.26)
이들 보존공사는 처음 5년 동안은 조선총독부 회계과 영선계에서 직접 담당하였으나, 그 후 1921년 학예국 고 적과가 신설되면서 예산을 지방청으로 돌려 집행하도록 하였다. 즉, 국유 건물의 공사는 지방청으로 예산을 분할 배분하여 지방청 회계과를 통해 시행하고, 사유 건물의 공사는 소유자에게 보조금을 주고 총독부 감독 아래 수 리를 실시하였다. 1924년 고적과가 폐지되면서 그 사무 는 종교과로 이관되었으며, 1933년 「조선총독부 보물고 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령」이 발포(發布)될 무렵에는 사 회과(社會科)에 속하였다. 그 후에도 사회교육과와 학예 과로 업무가 옮겨졌으나, 공사는 같은 절차를 밟아 실시 되었다.27) 목조건축의 보존은 긴급성이 부족하다는 이유 로 예산 확보가 어려웠고, 수리가 필요한 건물조차도 실 제 수리공사가 이루어진 것은 일부에 불과하였다.
그런 가운데 杉山信三(스기야마 노부조)은 『韓国古 建築の保存』(1996)을 출판하였다. 이 책은 부석사 무량 수전, 조사당과 성불사 응진전, 극락전의 수리공사 내용 을 모아놓은 책이다. 또한 1937년에 수리한 수덕사 대웅 전의 보수 관련 기록을 집성한 책자 『수덕사 대웅전 : 1937년 보존 수리 공사의 기록』의 사진기록 등을 참조 하여 일제강점기 시대의 벽체 관련 공사의 기법을 찾아 보고자 한다.
3.1.부석사 무량수전, 조사당 벽체
부석사 무량수전은 1916년 9월 21일부터 1919년 4월 20일까지 전체해체수리공사를 실시하였다.28) 당시 공사 내용에 관한 보고서는 발간되지 않았다. 공사는 가설덧 집 설치 후 해체하여 초석과 목재를 수리하고, 기와는 신규로 조성하여 공사하였다. 벽체는 모두 새로 설치하 였으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부석사의 수리공사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사진자료 뿐 인데, <Fig.4<에서 그나마 벽체 기법을 유추해 볼 수 있 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벽체 중 주심포 사이의 간벽(間 壁)의 벽체 일부분이 떨어져 나가 외엮기의 모습이 보인 다. 벽체는 가운데 중깃과 주심포 가까이에 2개의 중깃 이 있으며 여기에 외(잡목)를 엮어 벽체를 구성했다. 사 진의 설명에는 “수목의 줄기가 나타나고 있다.”라고 간단 히 설명하고 있으며 재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벽체의 마감은 벽화를 그리기 위해 회를 발라 마 감한 것으로 보이며 일부 균열이 나 있다.
3.2.수덕사 대웅전 벽체
수덕사 대웅전은 1933~34년 경에 小川敬吉의 조사를 통해 1935년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1937~40년에 해체수 리공사가 실시되었다. 그 내용은 杉山信三과 林泉의 논 저(杉山, 1943. 林泉, 1960) 등에 의해 일부 밝혀져 있으 나 정식 보고서는 간행되지 않았다.29) 1937년 3월 15일 에 수리 전 건물 내외를 사진 촬영하였으며, 실질적으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수리는 모든 부재를 해체하는 전면 해체수리였으며, 파손이 심한 부재는 교체하고 후세에 변경된 부분은 조사 후 당초의 모습을 복원하는 공사를 실시하였다. 보고서가 남아 있지 않아 벽체공사의 전반 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부석사와 마찬가지로 사진을 통하여 기법을 엿볼 수 있다.
수덕사 대웅전의 해체 전 벽체 상태는 매우 조악한 것 으로 보인다. 벽체가 많이 박락되어 있으며 외가 다 드 러난 상태이다. 해체 후의 사진<Fig.5<을 보면 전단벽 (全單壁)은 종 방향으로 인방이 2개 있으며, 그 사이에 외를 엮어 벽체를 구성했다. 외는 대나무가 아닌 잡목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외새끼는 조밀하지 않고 얼기설 기 엮여있다. 또한 설외는 조밀하게 짜여져 있으나 눌외 는 간격이 넓게 구성되어 바탕재로서 흙을 지탱하기에는 구조적으로 약해 보인다.
초석에 면해있는 벽체는 귀퉁이가 박락되어 외가 드러 나 있으며 갈라짐이 심하다. 해체 전의 모습에서 기존의 외엮기 모습이 보인다. 반벽(半壁) 정도의 크기인데 눌외 와 설외로 구성되어 있으며 설외는 일반 잡목(雜木)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눌외는 대나무 반쪽을 사용한 것 으로 보인다. 눌외를 먼저 설치하고 외부에서 설외를 엮 었으며, 외새끼는 이미 끊어지거나 상하여 그 모습이 명 확하지 않다.
그러나 수리 후의 모습에서는 눌외와 설외를 잡목을 사용하여 서로 조밀하게 짜여 있으며 간격은 정방형을 이룬다. 외새끼는 세승(細繩)을 사용하여 눌외와 설외를 서로 대각선으로 엮고 있다. 벽체의 마감은 부석사와 달 리 회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수덕사대웅 전수리공사실지예산명세서』의 잡공비(雜公費)에서 토벽 (土壁)으로 기록하고 있어 회벽(灰壁)은 아닌 것으로 보 인다.30)4
수덕사 대웅전의 근역성보관에는 이 때 당시 만들어 보수한 기와가 보관되어 있는데 명문이 적혀 있어 당시 공사 관계자를 알 수 있다.
명문에는 공사감독과 현장주임, 와공과 화공 등이 기 록되어 있으나 미장(泥匠)에 대한 기록은 없다. 감독과 주임은 일본인이었으나 조수와 장인들은 한국인을 고용 하여 공사를 진행했다. 이로 미루어보아 미장도 한국인 을 고용한 것으로 보인다.
3.3.청평사 극락전과 회전문 벽체31)
청평사 극락전의 보수공사는 1936~37년까지 이루어졌 다. 당시 공사감독은 杉山信三이며, 현장주임은 板谷定 一이었다. 극락전은 해체수리를 하였는데 당초의 모습 대로 복원하였다. 복원의 기준은 적심에서 나온 서까래 를 기준으로 하여 처마길이를 조정하였다. 회전문도 극 락전과 같은 시기에 공사가 이루어 졌는데 협칸의 벽체 에 현상변경이 있었다.
협칸의 벽체 변경
기둥 아래쪽에 하방이 있듯이 기둥머리에 인방이 있다. 이들에 의지하여 벽선이 세워졌으며 기둥에 고정시켰던 못자국이 남아있다. 인방의 바닥에는 벽중깃을 끼웠던 홈이 파여져 있다. 이를 근거로 하여 벽을 쳐서 마감하 기로 하였다. 들보의 대공 좌우의 삼각형상의 공간도 벽을 쳤던 듯하다. 보와 서까래에서 중깃의 흔적이 보 이기 때문이다. 협칸의 정면 칸살이에도 벽체를 쳐서 마감한 듯하다. 흔적에 따라 정리하면 문의 좌우 협칸 앞쪽 벽면과 측면의 합각 아래로는 모두 토벽이 있었던 점이 분명하므로 현재 해체한 부분은 당초처럼 토벽을 치기로 하였다.32)
이에 따르면 인방에 홈이 있어 중깃의 흔적으로 추정, 벽체를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즉, 중깃과 외엮기를 하여 토벽으로 복원한 것이다.
3.4.성불사 응진전 벽체
성불사 응진전은 1933~37년까지 이루어졌는데 훼손이 심각하여 전면해체수리공사가 진행되었다. 공사감독은 池 田宗龜였으며 조수(助手)는 총독부 내근직원 米田美代 治였다.33) 응진전은 공사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 며 특히 벽체공사(左官工事)의 방법이 기록되어 있어 일 부분을 살펴볼 수 있다.34)
벽은 초벌과 재벌, 정벌로 이루어졌으며, 흙과 균열방 지제를 혼합하여 발랐다. 초벌에 사용되는 흙은 2종류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기존에 사용했던 흙을 4 分의 눈금을 가진 체에 거른 것이고, 두 번째는 산에서 새로 채집한 흙을 5分짜리 체에 거른 것이다. 이 두 가 지 흙을 작은 풀(짚)을 잘라 넣어 충분히 섞은 후에 발 랐다.6
재벌은 강모래(川沙)라고 하는 모래를 석회와 여물(南 京苆)을 혼합하고, 진두발(角叉)을 섞었다. 진두발은 해 조류의 한 종류이며 점착제로 사용하였다. 섞인 혼합재 는 반죽으로 만들어 벽체에 평평하게 발랐으며, 대벽(大 壁)35)에는 건조에 따른 균열을 방지하기 위해 염(髯)36) 을 사용했다. 정벌은 정벌 바탕과 마감정벌로 이루어지 며, 재료 간 배합비율은 다음의 표와 같다.5
정벌에는 모래와 석회, 풀, 후노리(布海苔), 벤가라(弁 柄) 등이 사용되었다. 후노리는 풀가사리를 말하며 해초 의 한 종류로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왔으며 끓여서 해초 풀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벤가라는 홍병(紅柄), 홍각(紅 殼)이라고도 쓰며, 철회(鐵繪)에 사용되는 외 유약(釉藥) 이나 상회(上繪)에서는 흑(黑), 다(茶), 황, 청록색을 내 는 원료로 사용한다. 벽체에서는 마감정벌에서 누런색 즉, 흙색을 내기 위한 착색재료로 사용되었다. 정벌 재료 의 배합은 단위가 다르고 일본 고유의 도량제와 서양의 도량제가 섞여 있어 비교가 어려우나 재벌에서는 해초풀 이 정벌보다 조금 더 많이 사용되었으며, 마감정벌에서 는 정벌 바탕과 달리 착색재를 사용하며 모래를 사용하 지 않았다.
벽체의 바름벽 바탕은 “바닥 길이 8치를 1치 못으로 결구하고 1치5푼 간격으로 나눠서, 方立(문선), 頭貫(창 방), 地覆(하방) 등에 때려서 고정한다. 그것의 1/2을 초 벌 벽면에 뿌려 바르고, 나머지를 평평하게 바른 벽면에 바른다.”라고 되어 있는데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다.
이상 일제 강점기 시기인 20c 초반의 벽체기법에 대해 살펴본 결과 보수가 이루어진 사례도 많지 않으며, 기록 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다각적으로 살펴보기 어렵다. 그러나 몇 가지의 사례로 벽체기법을 살펴본 결과 공사 를 진행함에 있어 감독과 관리는 일본인에 의해 이루어 지며 공사를 담당하는 장인은 수덕사와 성불사37)의 기록 으로 보아 한국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불사 응진전에서 보다시피 해초풀을 사용하고 착색제를 사용 하는 것은 의궤의 기록과는 다른 내용이다. 따라서 일본 인의 감독 하에 일본의 기법이 가미되어 벽체공사가 이 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4.20c 초중반 일본 벽체 기법
일제 강점기 시기 문화재공사는 일본인의 관리·감독 하에 이루어져 고유의 벽체기법보다 일본의 기법과 재래 의 기법이 절충된 방법으로 공사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 인다. 이를 좀 더 명확히 규명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벽 체기법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현재의 일본 기법을 비교하는 것 보다 그 당시(일제강점기)의 일본 기법을 영건의궤 및 수리보고서 내용과 비교하는 것이 정확한 차이점을 도출해낼 수 있다고 판단, 昭和13년 (1938)에 출판된 『日本建築』에서 벽공사 부분을 통해 벽체기법을 알아내고자 한다.
일본의 벽은 大壁(오오카베)구조와 眞壁(마카베)구조 가 있다. 기둥의 중간에 인방을 통과시켜 욋가지를 엮어 만드는 벽을 眞壁이라 하고, 기둥의 외면에 외를 엮는 것을 大壁이라고 부른다.
외엮기 후에 초벽을 안쪽에서 먼저 발라 건조 중에는 바깥쪽을 바르지 않으며 건조한 후에 바르는데 이를 “裏 返し(우라가에시=맞벽)”라고 한다. 초벽(荒壁)에 사용되 는 흙은 보통 진흙을 사용하고 흙을 오래 짓이겨 두어야 건조 후 균열이 적으며, 흙을 물과 함께 섞어 1년 이상 을 두고 보관하여 숙성된 흙(晒土)을 사용하기도 한다.
초벽의 스사(苆)는 벽의 갈라짐을 방지하기 위해 흙 안에 혼합하는 섬유재료이다. 짚을 약 6cm 정도로 잘라 벽에 혼합한 것을 藁苆(와라스사)라고 한다. 표백한 것이 좋으며, 다다미(莚)나 섬, 새끼줄, 다다미의 바닥 등을 잘 라 쓰기도 한다. 초벽의 고름질은 맞벽을 친 이후 벽면 의 울퉁불퉁한 부분을 고르게 하기 위해 바르는 것이며, 기둥, 하인방, 상인방 등의 구석구석을 정성스럽게 발라 굳힌다.38)
고름질이 끝나면 재벌을 하는데 균일하게 시공한다. 양질의 초벌토를 체에 거른 후 점착력을 완화시키기 위 해 모래(川砂)를 약 1.5배 넣는다. 여물은 揉苆(모미스 사)를 사용하는데 모미스사는 오래된 새끼줄을 말하며 2cm 정도로 잘라 충분히 물에 담근 후 손으로 비빈 것 을 뜻한다.
정벌을 바르기 전에 地離漆喰(치리싯쿠이=회반죽)를 한다. 일본의 벽은 地離(치리)39)의 틈이 생기거나 균열 이 가는 것이 쉽다. 『普通チり決り(후츠치리사쿠리)』 로 회반죽을 바른 것을 『散漆喰(치리싯쿠이)』라 부르 며, 인방재에 시공한 것을 『貫縳(누키시바리)』이라 부 른다. 정밀한 공사에서는 삼베 또는 낡은 모기장, 종려나 무 껍질 등을 사용하여 회반죽을 바르고, 기둥에는 연침 (못)으로 고정하고, 회반죽을 벽에 발라 고정한다. 회반 죽의 조합은 려회(蠣灰) 7斗, 石灰3斗, 角叉(쯔노마타) 1貫, 濱苆(하마스사)41) 0.8貫정도이다.41)
회반죽바름(漆喰)은 석회의 응결력으로 벽 표면을 변 화시키는 목적으로 사용한다. 바름벽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왔다. 일본벽은 재벌 후에 1.5~2mm 정도의 두께로 바르고 마무리하며, 졸대 엮기 는 회반죽을 초벌, 재벌, 마무리 바름으로 3번 바르고 마 무리 한다. 회반죽은 응결제(凝結劑), 풀, 스사(苆), 착색 제(着色劑)의 4종류를 혼합하여 종류별로 회반죽을 만든 다. 응결제는 보통 석회와 려회를 사용한다. 려회는 조개 를 태운 것으로 다다미로 만든 가마니에 보통 3斗정도 이다. 회반죽을 굳히는 역할에 사용되는 것이 角叉(쯔노 마타) 또는 布海苔(후노리)이며 여기에 더해 다른 해초 류를 삶아 풀로 만든다. 쯔노마타는 약한 불로 끓이고 체에 걸러 찌꺼기를 건져낸 후 삶은 물에 스사를 섞고 석회를 넣고 반죽한 것을 회반죽에 사용한다. 후노리는 우뭇가사리(寒天)를 닮은 해초로 여름에 채취한 다음 더 운 날씨에 물과 혼합하여 가마니에 얇게 잘라 넣고 건조 시켜 그물의 모양으로 만드는데 30×60cm 로 장방형이 다. 오래된 것일수록 좋으며 끓여서 찌꺼기가 없는 것이 양질품으로 입안에 넣으면 부드럽게 녹는다. 스사는 바 름벽, 재벌에서도 필요하지만 정벌에도 벽면의 균열을 방지하는 역할도 한다. 물론 정벌에는 더 가늘고 부드러 운 것을 사용한다.
착색제는 회반죽 마무리면에 색조를 표면에 바른 것을 말한다. 『灰墨』은 검은색을 띄게 하고 油煙(그을음)으 로 제작한 분말제가 있다. 『へナ土』은 『黃土』라고도 하며 갈색을 나타내는 점토이다. 벽면에 황색을 띄게 한 다. 『川土』는 청색의 점토로 벽에 淺黃色(아주 옅은 누런색)을 나타내는데 사용했다.42)
5.의궤 및 일본 벽체 기법의 비교
일본벽의 초벌에 사용되는 재료는 진흙을 사용하며 여 기에 균열방지제인 짚여물을 첨가한다. 이는 우리나라 고유의 기법과 같은 것으로 영건의궤에 기록된 백와인 진흙을 사용하고, 곡초, 마분 등의 짚여물을 사용하거나 진흙과 짚여물의 혼합재료인 사벽을 사용하므로 일본과 조선후기의 초벽 사용 재료는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일본벽의 재벌에서는 초벌에 사용된 흙을 체에 거르고 모래를 섞어 초벌보다 작게 짚여물을 혼합하여 바른다. 이것도 역시 우리나라와 흡사하다. 영건의궤의 기록에서 는 재벌에 사용된 재료를 확인하기 어려우나 사벽(벽체) 에 사용된 재료를 종합하면 같은 재료를 사용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사벽에 사용되는 도구 중에는 마미사(馬尾篩) 와 죽사(竹篩)가 사용되어 눈금이 다른 체(篩)로 흙을 입자를 구별하였으므로 초벌과 재벌에 사용된 흙의 입자 가 달랐음을 유추할 수 있다.
정벌을 바르기 전 일본 벽체는 삼, 모기장, 종려나무 껍질 등을 재벌을 마친 후 인방재나 기둥의 틈 사이에 고정하고 정벌을 실시하는데 이것은 앞 장에서 서술한 성불사 응진전의 벽체 공사에 사용된 기법과 유사하다. 앞서 서술한 성불사 응진전(1933) 수리 시 벽체 내용 중, 는다. 바닥 길이 8치(寸)를 1寸못으로 결구하고 1치5푼 간격으로 나눠서, 方立, 頭貫, 地覆등에 때려서 고정한 다. 그것의 1/2을 초벌 벽면에 뿌려 바르고, 나머지를 평평하게 바른 벽면에 바른다.”43)6
라고 되어 있는 부분이 있는데, ‘髯(히게)’라는 재료가 재벌을 마친 후 인방재나 기둥의 틈 사이에 고정하는 삼 베와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7
이러한 기법을 貫伏せ(누키부세)라고 하는데, 누키부 세는 새끼줄을 고정하는 방식, 짚여물을 바르는 방식, 삼 베를 고정하여 바르는 방식 등이 있다. 이 중 새끼줄을 못으로 인방에 고정하는 방식을 성불사에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기둥에 연침(釘打)으로 고정하는 일본의 기법과 응진전에 사용된 1치 못도 같은 기법으로 보인 다. 또한 성불사 응진전도 정벌(회반죽)까지 바른 벽체이 므로 재벌과 정벌 사이 공정에 인방이나 기둥 틈 사이에 히게를 넣고 회반죽의 갈라짐과 균열을 방지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일본벽의 정벌 전 바름 기법과 성불사 응진 전에 사용된 기법은 서로 유사한 것을 알 수 있으며, 당 시 일본인 감독관에 의해 시행된 공사는 일본벽의 기법 이 가미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정벌(회벽)에 해당하는 일본의 회반죽바름 은 석회를 주재료로 사용하고 려회를 섞어 사용하며 점 착재로 쯔노마타 또는 후노리를 사용하며, 균열방지제로 는 재벌보다 더 가늘고 부드러운 삼여물을 사용한다. 18c 중반 이후 영건의궤에서는 사벽공사의 정벌에 사용 하는 재료로 백토를 사용했다. 영건의궤에 면토회를 담 장이나 화방벽의 줄눈으로 사용하고 있어 석회의 사용을 짐작해볼만 하지만 사벽에 들어가는 재료 중 영건도감의 궤나 산릉도감의궤에서 석회는 찾아볼 수 없다. 즉, 18c 중반 이후부터 주로 백토를 사용하여 정벌 마감한 것으 로 보인다. 또한 사벽공사에는 점착재로 밀가루풀 혹은 아교풀을 사용하고 균열방지제로는 종이여물을 사용했다. 즉, 일본과 영건의궤에서 정벌재로 사용된 재료는 전혀 다른 기법인 것이다. 그러나 성불사 응진전에는 회벽을 바르고 후노리 및 삼여물을 사용되고 있어 일본 벽체 기 술의 유입을 볼 수 있다.
6.맺음말
조선후기 벽체기법은 영건도감의궤과 산릉도감의궤를 통하여 공정 순서에 따라 사용된 재료를 개략적으로 파 악할 수 있었으며, 시기에 따라 마감재료의 변화까지 살 펴볼 수 있었다. 이에 따르면 17c에는 진흙과 짚여물을 합친 토벽이 있었으며 이후에는 모래로 마감한 사벽, 18c 중반 이후에는 백토로 마감한 백벽(白璧)이었던 것 으로 보인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회벽(灰壁)은 사용여부 를 확인할 만한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이는 선행 연구 에서도 이미 밝혀진 부분이다.44)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유입된 일본 벽체 기법은 조선 시대 벽체 기법의 변화를 가져왔다. 1933년에 수리된 성 불사 극락전에서 그 일부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벽체를 마감하는 정벌에서 나타났다. 일본 벽체는 정벌에 석회와 해초풀 등을 사용하는데 이 것은 조선시대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재료들로써 당시 공 사 감독관이었던 일본인에 의해 새로운 기법이 도입된 것이다. 즉, 회벽마감은 전통기법보다는 일본기법에 가까 운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해초풀의 사용은 더욱 그러하 다.45) 그러나 단순히 의궤에 기록이 없다고 하여 회벽이 일본 기법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회를 사 용한 것은 이미 역사가 오래 되었으며 『임원십육지』의 내용46)에서도 회를 사용한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의궤는 관건축이 중심을 이루고 민가나 사찰 벽체에서 회벽 사용여부는 아직 밝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 은 좀 더 정치한 연구가 이루어진 후에 판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상 전통 벽체 기법을 조선시대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살펴본 결과 3단계의 변화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 는 것으로 판단된다. 즉, 전통 벽체는 토벽에서 사벽으로, 사벽에서 백벽으로, 백벽에서 회벽으로 변천되었으며 일 부 일본벽체기법이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