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 론
성직자, 인문학자이자 건축가였던 레온 바티스타 알베 르티(1404–72)는 회화론 (De pictura, 1435), 가족론 (Della famiglia, 1434)을 비롯하여 인문학적, 종교적 주 제의 여러 저작을 남겼다.1) 그의 저술 가운데 건축론 , 또는 짓는 것에 대하여 (De re aedificatoria)는 서양 에서 기원전 1세기 말 비트루비우스의 건축십서 (De architectura) 다음으로 처음 쓰인 체계적 성격의 건축문 헌이다.2) 알베르티 자신은 이 텍스트의 서문에서 건축 이 지닌 여러 가지 중요성들을 설명하고 건축을 중 요한 학문분야로서 재설정하고자 하는 뜻을 내보였 다.3) 그는 6권 1장에 밝히기를, 건축의 주제에 대해 쓰는 작업이 상당히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은 까닭이 “훌륭한 선조가 중시한 이 학문분야가 완 전히 사라지는 것을 학식 있는 자 누군가는 막아야 한다 는 사명감” ( 건축론 , 6.1) 때문이었다고 밝힌다. 이 텍 스트의 의의에 대해서는 이후 지금까지 여러 가지 관점 에서 해석되어 왔다. 즉, 단지 비트루비우스적 지식의 복 원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가에서부터 인문학적 내지 인류 학적 관점에서 건축의 가치와 원칙을 적극적으로 재규정 한 작업이라고 높이 사는 입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해 석이 걸쳐 있다.4)
본 연구자가 이 텍스트를 다시 읽으며 주목하는 점은 건축론 에서 ‘짓는 일’(res aedificatoria)의 범위가 건물 뿐 아니라 전체로서의 ‘도시’(urbs)를 짓는 일을 포함한 다는 점이다. 즉, 이 텍스트의 4권인 ‘공공적 작 업’(universarum opus)에는 도시의 입지, 터, 윤곽, 도시 내부의 시설들의 배치 등, 오늘날의 관점에서 도시계획 내지 도시설계에 해당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이후 성속의 건축물들에 대한 각각의 설명이 도 시사회적 관계에서 일관성을 가지고 이루어 진 것이 사 실이다.5)
건축론 에 담긴 도시적 관점에 대해서도, 그것이 과 연 고대적 지식의 단순한 복원적 성격에 지나지 않는지, 아니면 새롭고 전면적인 기획인지는 우리가 새롭게 판단 해 볼 여지가 많다. 그 판단을 위한 한 가지 시도로서, 이 논문에서는 알베르티의 건축론 에 담긴 도시적 상 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그것의 형성배경이 무엇 인지, 그 상에 전제된 논리가 무엇인지 이 텍스트에서 도출하고자 한다.
2.건축론 의 도시론적 성격
물론 비트루비우스도 건축십서 (De architectura)에 도 도시건설을 다루었고, 개별 건축물들을 도시적 차원 에서 다루었다. 비트루비우스 자신의 말대로, 건축십서 제1권만 해도 “건축의 기능과 예술의 범주 뿐 아니라 성곽(moenia)과 성곽 내 건축물들의 분할배치에 대해 대 략적으로 기술했다.”6) 하지만, 비트루비우스의 텍스트와 비교할 때, 알베르티의 건축론 이 지닌 도시적 차원의 서술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훨씬 새로운 수준의 것이 다.
알베르티의 건축론 을 일차적으로 도시론적 관점에 서 부각시킨 현대의 연구들을 살펴보자.7) 우선 멈퍼드 는 건축론 을 “지테(Camillo Sitte) 이전의 가장 탁월 한 도시이론저작”으로 평가했다. 멈퍼드는 알베르티를 전형적인 중세적 도시주의자로 봤는데, 즉, “굽어지며 이어진 길과 부드럽게 막혔다가 끝없이 바뀌는 경관을 정당화함으로써, 알베르티는 선조들이 인정하고 가치 를 부여한 것을 의식적으로 표현했다”고 평가했다. 또 한 알베르티가 도시에 대해 “자연조건과 기능적 요구, 생물적, 경제적 측면을 강조했고 인문주의적 공간을 편성함에 있어서 현대적 개념을 새롭게 표현하기보다 르네상스의 관점에서 중세적 개념을 공식화했다”고 평 가했다.8) 멈퍼드가 알베르티의 도시론에서 현대성보다 는 중세적 전통을 더 읽어낸 것에 비해, 다른 연구자 들은 르네상스 도시문화의 맥락 안에서 알베르티의 입 장이 가진 현대성을 부각시키기도 했다.
아르간이 설명하듯이, 일반적으로 13-14세기 유럽도 시들은 수공업자와 상인이 도시 삶의 중심이었고 다양 한 정치활동이 결여되어 있었다. 도시의 군사시설도 방어성벽에 국한되었다. 그러다가 15-16세기에 이탈리 아 도시들은 심각한 변화과정을 겪음으로써 16세기에 이르면 기존과 전혀 다른 질서와 외관을 지니게 되는 데, 도시는 효과적인 정치체제가 되었고 통치자의 주 거는 생산구역과 뚜렷이 구분되었고 길의 위계가 뚜렷 이 구분되었다. 이러한 도시적 변모과정을 만든 여러 가지 도시적 입장들 가운데 알베르티의 입장의 특징은 고대도시를 부활시키려 했으며 건축물의 기념비적 성 격과 의미를 매우 민감하게 여기고 중시했다는 점, 그 래서 대칭, 투시도, 비례의 규범 같은 미학적 차원을 중시했다는 점에 그 차별적 특징이 있다고 아르간은 주장한다.9)
우리가 알베르티의 도시론을 더 면밀히 파악하려 할 때 문제되는 점은 알베르티의 건축론 에서 이상도시 의 모습은 뚜렷이 전면에 드러나 있기보다 텍스트 안 에 심층적으로 들어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알베르티 이후 필라레테(Filarete)와 프란체스코 디 조르조 마르 티니(Francesco di Giorgio Martini) 등이 이상도시의 도식을 더 뚜렷이 제시한 것과 대조적이다.10) 더구나, 건축론 이 가문통치에 대하여 (De Iciarchia, 1468) 에 앞서서 쓰여 진 것임을 생각할 때, 건축론 이 담 은 도시사회에 대한 해석은 결코 단순할 수 없다. 도 시사회에 대한 알베르티의 관점이 복합적이라는 점 때 문에 건축론 에 담긴 알베르티의 도시이상을 일의적 으로 다루기란 쉽지 않다.
3.모범적 도시의 제안
3-1.현실도시의 성찰
알베르티는 건축론 을 저술하면서 북부이탈리아의 피렌체, 페라라 등지를 여행한 경험, 1440-50년대 로마 체류기의 경험과 정보 따위를 종합했을 것이다. 이탈 리아 도시들 가운데 알베르티에게 주요한 삶과 학문의 배경이 되었던 피렌체와 로마는 15세기에 정치적 지위 가 높아지면서 도시적 삶에 부합하는 새로운 정치사상 이 발전했다. 로마는 15세기 초만 해도 낡은 상태였다. 초기 기독교제국의 교회들은 폐허상태였고 교황좌는 비어 있는 혼란기였다. 그러다가 15세기 중반 인본주 의자 교황 니콜라우스 5세(재위 1447-1455)가 분파를 종식시키고 로마교회의 권위를 재확립하고 교황좌를 도시로마에 되찾아오면서 회복의 기운을 되찾았다.
피렌체에서는 문학혁명과 시각혁명과 더불어 역사와 정치에 관한 새로운 사상들이 일어났다. 1425년 이후 브루니(Leonardo Bruni, 1370-1444), 포조 브라치올리니 (Poggio Bracciolini, 1380-1459), 알베르티(L. B. Alberti, 1404-1472) 같은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이른바 ‘인본주의 도시이념’이 본격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했 다.11) 브루니는 현실의 피렌체를 이미 질서 잡힌 사회 로 칭송하면서 다른 도시들이 따라야할 모범임을 내세 웠다. 그는 피렌체가 “처음부터 위대한 분별력의 원리 를 지켜왔다”고 썼고,12) “피렌체에 다가갈수록 그 도 시의 위대함에 대해 점점 더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즉, 빌라보다 교외가, 교외보다 도시가 더 아 름답도록)” 위대했고, 마치 “별들이 둘러 싼 달처럼” “둥근방패의 손잡이처럼, 모든 궤도의 중심이 되어” 도시성관 안팎으로 세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도시라고 칭송했다.13) 도시 안에서도 “건물외관을 장식하고 있 는 것과 마찬가지의 화려함과 웅장함이 그대로 유지되 어 있다”14)고 칭송했다. 나아가 그는 추상적인 기하학 형태와 연관된 통합된 물리적 실체로서의 도시가 가진 조화가 피렌체의 정치제도들의 조화와 유사하다고 봤 다.
알베르티의 입장은 이와 달랐다. 그의 다른 저작들 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는 당대 현실도시의 모순을 깊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에게 이탈리아 도시에서의 삶은 부정적인 측면으로 가득했다. 다른 작품에서 묘사 했듯이, “부정하고 그릇되고 불신 넘치고 무모하고 철면 피고 탐욕스러운 도시는 광폭의 풍경으로서, 인간군상, 의견갈등, 심정 차이, 관습에의 도착, 윤리의 애매함, 가 치의 애매함이 점차 커지는 가운데, 동요하고 있다.”15)
알베르티는 당시 이탈리아 도시의 개발 분위기와 운명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즉,
어떤 사람들은 별의 운행이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준다 고 한다. 그래서 삼사백 년 전 대단한 종교적 열정이 일어나서 인간의 탄생목적이 오로지 종교건물을 짓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 보였다. 지금 세어보니 로마에는 2 천5백 채가 넘는 종교건물이 있고, 그 절반 이상이 폐 허 상태다. 눈앞을 보라. 이탈리아가 온통 경쟁적으로 새로 지어지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전 부 목조로 지어졌던 도시들이 이제는 얼마나 많이 대리 석으로 바뀌었는가? ( 건축론 , 8.5.)
이 상황에서 “고대 신전과 극장들이 모범으로 남아있 어서 많은 점에서 가장 뛰어난 교사가 되고 있지만, 슬 프게도, 이 건물들은 매일 더 망가지고 있고 (...) 건설자 들은 오늘날의 부조리함에서 영감 받을 뿐, 인정되고 더 선호된 방법에서는 영감을 받지 않고 있다. 이 모든 우 리 삶과 앎의 결과가 다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은 아무 도 부인 못할 일”이라고 알베르티는 통탄했다.16)
이런 현실에서 알베르티는 현실도시의 많은 측면들 을 부정하고 그 대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물론 알베르 티는 피렌체 같은 현실도시의 ‘긍정적’ 능력을 인정했 다. 예를 들어, 방어, 교역, 산업의 측면 등에서 당대 현실도시의 성과와 요청을 충실히 반영했는데, “포룸 은 화폐, 야채, 가축 목재의 시장 등으로 쓰일 수 있 다. 포룸의 각 유형에 도시 내 고유한 장소를 할당해 야 하고 차별된 장식을 적용해야 한다. 그러나 화폐시 장이 가장 멋져야 한다” ( 건축론 , 8.5)고 쓴 것도, 유 럽의 금융과 산업을 주도하는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위상과 요구사항을 충실히 반영한 태도로 읽을 수 있 다.
복잡하고 통탄할 만한 현실도시에 대해 건축론 에서 제시한 대안은 과연 전체적으로 어떤 모습인가? 알베르 티는 그 도시의 실용적 조건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우리 도시를 위해 정해야 할 조건은 이렇다. 1권에서 개괄한 약점들이 전혀 없고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고, 영토는 건강하고 넓고 땅은 단조롭지 않고, 친근하고 풍요롭고도, 방어가 자연스레 되고, 과일과 샘이 풍부한 곳이어야 한다. 강과 호수가 있고 바다로 쉽게 통할 수 있어서 물자가 부족하고 넘칠 때 수출입이 가능해야 한 다. 마지막으로, 견고하게 방어할 수 있고도 시민적이고 군사적인 안정감이 크도록, 시민을 보호하고 도시를 장 식함에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 동맹도시에게는 즐거움 을, 적들에게는 두려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내 생각에 는 적이 있어도 제 영토의 많은 부분을 경작할 수 있는 국가라면 어디나 괜찮을 것이다. ( 건축론 , 4.2)
3-2.과거를 향한 미래적 시선
현실도시와 공간적으로 겹치되 시간적으로 동떨어진 고대도시는 알베르티에 많은 참조가 되었다. 건축론 에 서 건축물에 대한 많은 설명은 역사적 조사와 해석에서 가져왔고, 이 점은 개별 건물 뿐 아니라 도시적 측면에 도 마찬가지다. 알베르티는 고대 도시로마를 지도로 정 확하게 그리는 작업을 수행했고 중세 지층까지 파악했다. 그런데 알베르티는 유적조사보다 고대저자들로보다 더 많이 배웠다고 스스로 밝혔다. 건축론 에서 알베르티 는 건축과 도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뒷받침할 때 플라 톤, 키케로, 바로 같은 고전작가들의 입장을 즐겨 사용했 다.17) 그는 건축론 곳곳에서 선조의 지혜를 찬탄하면 서 동시대인의 무지와 현실도시의 실체를 비판했다. 예 를 들어, 당대에 흔히 시행되던 대로, 교회 안에 무덤을 두는 관습을 그는 부패의 위험 등을 들어 비판하고 화장 을 옹호하는 등, 로마를 비롯한 다양한 고대의 사례를 들었다( 건축론 , 8.1).
알베르티가 도시의 모범을 추구하면서 참조한 작가들 중 플라톤은 특히 주목할 만한데, 알베르티는 플라톤을 들어, 도시를 어디에 위치시킬 것인가의 문제보다는 그 도시가 어떤 유형을 가지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플라톤의 사례를 쫓는 것이 가치 있을 것이다. 플라톤 은 자신이 꿈꾼 위대한 도시를 어디에 지을 수 있을지 질문받자 “그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더 관심 있는 것은, 어떤 유형의 도시를 가장 고려해야 할지다. 무엇보다도 이 이상에 가장 닮은 도시를 추구해야 한다”고 답했다. 우리도 모범의 방식으로 도시를 기획해야 하고, 이 모 범은 학식 있는 사람들이 모든 면에서 좋다고 판단할 만한 것, 그렇지만 세월과 필요성의 요청에 부합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 건축론 , 4.2)
분명, 알베르티는 가장 좋은 도시의 유형, 그 유형적 모범(exemplum)을 설정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 모범을 설정함에 있어서 고대인의 지혜에만 기대지 않았는데 고 대인의 지혜를 존경하되 그 권위를 무조건 인정하지는 않았다. 도시의 모범은 현대인들의 판단에 의해 설정되 는 것이었다. 그 모범은 ‘학식 있는 자들’이 다방면으로 좋다고 인정하는 동시에 ‘세월과 필요성’의 요청에 부합 하는 것이었다.
철학자들의 말로부터, 도시가 그 기원과 존재에 있어서 도시거주자들이 평화로운 삶을 누리고 가능하면 불편과 해악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라고 우리가 올바로 결론 내릴 수 있다면, 도시의 배치, 대지, 윤곽을 가장 철저 히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다. ( 건축론 , 4.2);
도시의 입지에 관해서는 “도시가 어디에 놓이건 간에 각 땅의 장점은 누리되 단점은 취하지 말라”( 건축론 , 6.2)고 제안함으로써, 선택적 상황에서 최대한의 활용성 을 찾을 것을 주장했다. 도시 입지에 대한 알베르티의 자세한 지침은 선택가능한 한도를 설정한 것이되 그 원 칙들은 유연한 적용이 가능한 것들이다. 그 유연한 입장 은 도시의 윤곽과 내부구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즉, “(성곽을 놓음에 있어서도)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한 가지 수단만 있는 것은 아니다.”( 건축론 , 4.3)
알베르티는 플라톤의 법률 을 자주 인용했고 또한 종 종 그 관점을 받아들였는데, 그중에서도 도시민의 사회 구성에 따라 도시의 영역을 세부적으로 구획한다는 생각 을 뚜렷이 받아들였다. 즉, 도시중심과 주변농촌을 열 두 구역으로 나누고 구역마다 크고 작은 사원을 두자는 플 라톤의 대표적 주장을 알베르티는 받아들였다.
우리는 이런 선례를 염두에 두고 도시를 구역으로 나누 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방인들을 그들에게 적합하고 시 민들에게도 불편하지 않은 곳으로 분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시민들도 자기 직능과 서열에 따라 알맞고 편 리한 구역으로 분리될 수 있다.18) (건축론 , 7.1)
알베르티의 모범적 도시는 시민과 이방인이 구분되어 있고 또한 시민들도 직능과 서열에 따라 구분되어 사는 도시였다. 이와 더불어 그 도시는 성과 속이 위계적으로 조화된 도시였다. 즉, 알베르티는 “다양한 건축물들이 거 의 무한해진” 도시건축물들을 성속과 공공성과 기준으로 건축유형을 나누었다.
다른 모든 시민들은 이성의 범위에서 지도층에게 신의 를 베풀고 그들이 바라는 바를 존경해야 한다. 아마 이 런 증거들이, 일부 건축물은 사회전체에 적절하고, 또 어떤 건물은 최상의 시민들에게, 또 다른 건물은 일반 시민에게 적절해야 한다는 점을 증명하는 데 충분할 것 이다. ( 건축론 , 4.1)
알베르티에게는 세속건물보다 성스러운 건물이 더 중 요하고, 세속건물에서도 시민 모두가, 즉, 귀족과 평민이 함께 쓰는 공공건물이 우선이다. 특정계층 또는 개인의 사적 건물이 마지막이다. 이 위계는 건축론 의 편제에 뚜렷이 반영되어 있다. 8권에서 공적인 세속 건축들을 다룬 대목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알베르티는 여기서 “본연의, 손때 묻지 않은” 도시를 묘사하는데,19) 교외로 부터 도심의 공공건물들에 이르기까지 순서대로 묘사한 다. 즉, 성곽 밖의 집과 빌라, 언덕과 강, 자연경관을 지 나, 유력가문의 무덤과 영웅의 기념비들, 묘지, 도시의 망루를 지나 도시에 들어서면, 성문과 교량, 길을 따라 걷고 광장과 포티코, 개선문, 시장들을 만나게 된다. 극 장과 유보장을 지나, 이윽고 정신적·정치적·지적 중심에 서게 되는데 거기서는 회합장소, 기념비와 명문, 도서관 의 책들이 두드러져 있다. 여기서 도시는 ‘기억의 장소’ 내지 기념비로서의 가치가 강조되고 있다.20)1
세속적 공공건축의 장식에 대해 설명한 8권의 내용은 고대도시의 형태를 파편적으로 복구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개선문이라든지 관람건물(spectaculum) 같은 고대적 시설들을 도시 안에 둘 것이 제안되어 있 다. 특히 15세기 상설극장이나 경주장이 없이 갤러리나 개방된 가설물에서 공연을 관람했던 당대도시에서, 상설 극장, 경기장, 원형극장 등의 관람건물같이 고대의 건축 유형을 사원, 성소, 바실리카와 더불어 복원하려 한 것이 다. 이 시설들의 공적 가치는 도시민들을 서로 만나게 하고 모이게 하는 데 있었다. 관람건물이나 욕장 등 도 시민의 육체적 대면과 즐거움도 표현되어 있다.
선조들이 관람건물을 도시 안에 만든 것은, 기능적 이 유만큼이나 축제와 즐거움을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이 점을 잘 생각하면, 우리는 그토록 뛰어나고 유용했던 시설이 이제는 옛 것이 되어버린 것을 내내 안타깝게 여긴다( 건축론 , 8.7); 나는 이 건물들[관람건물]이야말 로 특히 공공적이라고 여긴다. 여기서 귀족과 평민은 자주 자유롭게 만난다. 그러나 어떤 공공건물들, 코미티 움, 쿠리아, 의회건물은, 더 높은 시민들과 공공의 일에 관련된 사람들만 쓸 수 있다. ( 건축론 , 8.8)
이렇게 도시는 도시민의 각종 덕목들이 표현되고 기억 되는 장소로 그려져 있다. 건축론 에서 재현된 도시는 고대도시의 단편을 당대의 현실도시와 겹친 새로운 대안 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도시형태 개념을 이끄는 본 질적 요소가 ‘폐허 속 위대한 고대도시’라는 생각이라고 흔히들 간주하지만, 알베르티가 ‘도시로마 재 건’(restauratio urbis Romae)을 문자 그대로 추구했다 고는 볼 수 없는 까닭이 있다.
4.모범적 도시의 미적 논리
4-1.‘우아함과 품위’, 그리고 ‘장식’
도시미학적 측면에서 알베르티는 당시의 일반적 미학 과 다른 측면이 있었다. 가령 두 지점을 잇는 길고 곧은 길 끝에 랜드마크를 두는 식의 계획을 선호되던 당시의 경향과 대조적으로, 알베르티는 길이 굽어 있어서 보행 자에게 앞의 광경이 언뜻언뜻 보이고 변화하다가 마지막 에 예기치 못한 극적인 광경이 나타나는 식의 길 구성을 더 선호했다.21)
미적 차원에서도 알베르티는 고대인에 대해 현대인 의 능력을 믿었는데, 즉, 고대건축에 대한 존중과 수학 적 비례의 타당성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고대건축의 전통을 더 발전시켜 “우리 자신의 발명품을 낳고 고대 인들보다 더 나은 칭송을 받고자” 추구했다. 알베르티 는 품위 있는 시민의 품위 있는 행동을 위한 품위 있 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22)
도시의 아름다움, 특히 위계적 조화에 대한 알베르티 의 관점은 건축론 의 전체 맥락에서 재해석해야 한다. 알베르티의 도시미학을 설명하자면, 건축론 전체를 관통하는 원칙을 함께 봐야 한다. 알베르티는 1권에 서, “건축의 모든 문제는 리네아멘타(lineamenta)와 스트룩투라(structura)로 이루어진다”고 밝힌다( 건 축론 , 1.1).23) 알베르티가 리네아멘타의 개념을 가 지고 설명하는 실질적 내용은 지금의 관점에서 보 면 다분히 전통적이다.24) 리네아멘타의 개념이 가진 중요한 측면은, ‘정확하고 확실한 관계’를 강조한 데 있다. 도시차원에서도 알베르티는 ‘리네아멘타’라는 용어를 쓰므로, 도시적 구성에서도 정확하고 확실한 관계를 상정했다고 기대할 수 있다.
건축론 에서, 모든 건물은 세 가지 조건에 부합해 야 한다. 즉, 우선 “쓰임새에 알맞고, 구조가 견실해야 한다.” 그중 “가장 고상하고도 가장 필수적인” 세 번째 조건은 “우아하고도 즐거움을 자아내는 외관”(ad gratiam et amenitatem patissima)을 가져야 한다는 조건이다. 건축론 텍스트의 후반부는 바로 이 방법에 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25) 그 으뜸 목적 또는 가치가 어떻게 실행될 수 있는가를 설명한 개념이 ‘아 름다움(pulchritudo)과 장식(ornamentum)’이었고, 이 두 개념에 대한 설명은 특히 제6권 2절에 명시되어 있 다. 즉, 알베르티는 우아함과 즐거움은 아름다움과 장 식에 의해서만 도출된다고 설명한다. 즉, 아름다움은 축조물에 우아함(gratia)과 품위(dignitas)를 부여하고, “사물의 꾸밈(장식)에 결함이 있으면 사물의 우아함과 품위에서 멀어진다.” 반대로, 성공적인 장식을 통해 우 아함과 품위가 얻어지면, 이로 인해 “작품을 훼손되고 파괴되지 않게 보호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 건축론 , 6.2).26) 그런데, 아름다움과 장식은 서로 구 별된다. 즉,
너무 많거나 적어서 아름다움의 법칙에 부합하지 못하 는 형태가 있다. 이 경우 그림을 그리거나 추함을 가리 거나 매력적인 점을 손질해 닦으면, 덜 불쾌하게, 더 유 쾌하게 만들 수 있다. 이 점을 인정한다면, 장식은 분명 아름다움의 보조광이자 보충과 비슷한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름다움은 고유한 특질로서 아 름답다 할 수 있는 몸체에 두루 퍼져 있고, 장식은 고 유한 것이기보다 덧붙여 부착된 것이다. ( 건축론 , 6.2)
이 설명에 따르면, 아름다움은 본연적이고 고유하다.27) 자연법칙에 본질적으로 속하는 콘키니타스(concinnitas) 야말로 이 아름다움을 해명하는 또 다른 개념이다. 즉,
아름다움에 대한 전반적인 이론을 이루는 세 가지 주요 구성요소로서 우리가 물을 것은, 수[numerus], 윤곽 [finitio], 위치[collocatio]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세 가지를 조합하고 연결 짓는 것은, 미가 완전한 모습으로 발하 는 다른 특질에 의해서다. 이것을 콘키니타스라고 부르 자. 콘키니타스는 온갖 우아함과 장려함으로 넘쳐난다. 콘키니타스의 역할과 목적은 본성상 서로 멀리 떨어진 요소들을, 무언가 정확한 법칙에 따라 조합하여, 외관적 으로 서로 조응하게 하는 것이다. 전체에 있어서도 부 분에 있어서도 콘키니타스가 가장 넘치는 것은 자연이 다. 하여 나는 자연을 영혼과 이성의 한 쌍이라고 부르 겠다 ... 자연이 만드는 모든 것은 콘키니타스의 법칙으 로 제어된다 ... 이 점을 인정하면 이렇게 결론 낼 수 있다. 자연의 절대 근본 법칙인 콘키니타스가 하라는 대로 결정된 수, 윤곽, 위치에 따라 부분들이 한 몸체 안에 공조하는 형태를, 우리는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 다. 이것이 건축술의 주된 목적이며, 건축의 품위와 매 력, 권위, 가치의 원천이다. ( 건축론 , 9.5)
그런데, ‘아름다움의 법칙에 부합하지 못하는 것’을 바 꿀 수 있는 실행방법은 무엇인가? 알베르티에 따르면, “장식하는(꾸미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래서 그는 건축론 제6권 이후 줄곧 “어떻게 장식하는가”를 건축유형별로(종교적, 세속적, 공공적, 사적 건축)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 장식 자체는 완전한 아름다움을 담보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꾸미는 방식은 미의 근본적 원 칙, 즉, 수, 윤곽, 위치의 올바름을 보정해 주는 방식과 근본적으로 똑같다. 알베르티는 ‘본연적인’ 아름다움에 비 해 ‘부가적인’ 장식은 보조적이라고 설명했지만, 사실상 실행에서 장식의 중요성은 아름다움에 뒤지지 않는다. 오히려 건축론 에서는 우아함과 즐거움이라는 건축의 최고 목적을 위한 실행방법으로 아름다움보다 장식에 집 중했다.
4-2.도시의 장식
도시의 장식은 어떤 방식으로, 어떤 범위에서 이루어 지는가? 개별 건축물의 장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살 펴보면, 회화, 조각28), 기둥 같은 전통적 건축요소를 가 지고 장식할 수 있다. 그런데, 장식은 반드시 건축적 형 태이거나 건축구축적인 것만은 아니다. 고정되어 있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기둥”이기도 하고, 성소의 “촛대”, 도시 옆의 “숲”, 심지어 도서관의 “책”이기도 하 다.29) 즉,
어떤 도서관도, 으뜸가는 장식은 고대인들의 학식을 끌 어 온 희귀장서집이 바람직하다. 포시도니우스가 고안 했다는 일곱 행성이 궤도를 도는 산술기구 같은 것도 장식이 된다. 또는 아리스타르쿠스가 전 세계 지역들을 금속판에 새겼다는 지도도 말이다. 티베리우스는 도서 관에 고대시인들의 조각상을 두어야 한다고 했는데 옳 은 말이다(8.9); 필요나 즐거움에서 유래한 것이 도시에 장식이 되고 높은 품위를 제공한다는 점이 곳곳에서 드 러났다. 아카데미아 근처에는 신들에게 바친 아주 아름 다운 숲이 있었다고 한다 (...)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 제는 자신의 욕장 옆에 숲을 두었고, 안토니우스의 욕 장 옆에는 근사한 수영장 몇 개를 추가했다. ( 건축론 , 8.9)
장식의 리네아멘타 즉 수학적, 기하학적인 ‘수, 윤곽, 위치’는, ‘기둥’과 같은 건축요소들을 넘어서서, 도서관 의 책이나 도시의 숲의 경우 얼마나 엄격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인가? 여기에는 장식의 질적 내용이 전제된 다. 즉, 이때 문제되는 것은 장식하는 것의 질적 내용 과 장식되는 것의 질적 내용 간의 관계다. 장식행위에 서 위계가 있다는 알베르티의 주장은 이런 측면에서 이해된다.
모든 건물에 다 똑같은 장식이 필요하지는 않다. 신성 한 건물 특히 공공건물은 온갖 기예를 다 부려서라도 가능한 한 장식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세속건물은 품위 가 덜 하므로, 신성한 건물에 양보해야 하지만 나름대 로 장식해서 고상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 건축론 , 8.1)
모든 건물에 다 똑같은 장식이 필요하지는 않다. 신성 한 건물 특히 공공건물은 온갖 기예를 다 부려서라도 가능한 한 장식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세속건물은 품위 가 덜 하므로, 신성한 건물에 양보해야 하지만 나름대 로 장식해서 고상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 건축론 , 8.1)
건물의 가장 작은 부분이라도 적절한 곳에 놓이면 매력 을 더한다. 하지만 이상하고 천박하고 부적절한 곳에 놓이면 고상한 것의 가치마저 깎아버리고 무엇이건 망 쳐버린다. 자연의 작품을 보라. 강아지가 이마에 당나귀 귀가 있다거나, 발과 손은 큰데 다른 것은 작다면 이상 해 보일 것이다.
회화, 조각, 건축, 기타 세공과 조경을 포함하여, 각 전문분야의 예술적 실행이 서로 조응하는 근거는 서로 장식하는 관계를 통해 설명된다.30)
도시의 리네아멘타에 대해, 알베르티는 제4권 ‘공공건 축에 대하여’에 도시의 배치, 터, 윤곽 등 도시계획상의 제반 고려사항을 제시했다. 공공건축을 통해 도시를 어 떻게 장식하는 가에 대해서는 제7권과 제8권에서 설명한 다. 그는 도시가 지녀야 할 덕목으로 건강, 방어, 품위 등을 꼽는다. 가령, “도시를 언덕 위에 자랑스럽게 두면, 품위와 매력이 커지고, 건강과 방어에 도움된 다”고 설명했다.( 건축론 , 4.2) 시민들이 도시에 대 해 품을 자부심이야말로 도시를 짓는 일의 궁극적 가치에 속한다고 그는 설명했다. 근에게 도시를 장식 하는 요소는 회화, 조각, 그리고 개별 건축물, 또는 그 밖의 어떤 것도 될 수 있다. 특히 조각이 건축물의 장 식이자 도시의 장식으로 중시되었다.31) 또한, 개별 건 축물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장식으로 인해 우아함과 품위를 달성할 수 있는 동시에, 그것들이 다시 도시를 장식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한 건축물이 도시에 대해 장식이 되려면 도시자체의 아름다움을 보충해 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길, 광장, 개별 건축물들은 도시를 장식하면서 도시의 본연적 아름다움을 보완하고,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도시의 편의와 품위를 높이는 데 이바지한다.
스미르나는 길 배치와 건축물 장식이 아주 아름다웠을 것을, 배수로가 없어서 오물을 처리하지 못해서 이방인 들이 볼 때는 그 오물이 불쾌했다고 한다.(4.7); 어떤 도 시도 장식의 핵심은, 길, 광장, 개별 건물들이 어떻게 놓이고, 배치되고, 구성되고, 배열되는가에 있다. 그 각 각은 쓰임새, 중요성, 편의에 따라 알맞게 계획하고 배 치해야 한다. 질서 없이는 편리하고 우아하고 고귀한 것이 결코 없다(8); 도시는 주택이나 그 밖의 핵심적인 것들의 관점에서만 계획될 것이 아니라, 도시의 업무에 대한 관심을 떠나 장식과 여흥을 위해 남겨 둔 위락장 소와 공지, 즉 경주장, 정원, 유보장, 수영장 등을 두어 야 한다. ( 건축론 , 4.3)
5.맺음말
알베르티의 건축론 은 고대건축의 원칙을 순수하게 복원하기 위한 책으로만 볼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텍스트에 나타나 있는 도시의 이상도 단순히 고대도 시의 복원이 아니다. 예술을 특히 건축술이 역사에 따라 발전하는 것으로 파악한 알베르티가 추구한 도시의 이상 은 고대도시를 참조하되 그것을 당시 도시현실에 따라 변형한 것이다. 그것은 당시 도시공동체에 대해 복잡한 해석물로서 도시현실을 적극 개조하려는 현대적 기획의 결과물이었다.
알베르티는 후세에 남겨질 만한 아름답고 영예로운 모 범적 도시를 발견하고 구성함에 있어서 당시의 새로운 인문적 전망을 종합했을 것이다. 그 인문적 전망의 많은 부분은 알베르티에게 고유한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 지만,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그 도시적 모범이 알베르티 자신의 고유한 미적 원칙에 크게 의존했다는 점이다. 즉, 개별 건물들을 비롯한 도시의 여러 구성요소들은 ‘장식’ 의 원칙을 통해 조화되고 끊임없이 보완될 수 있는 것으 로 이론적으로 설정되었다. ‘장식’은 아름다움이라는 가치 를 위한 방법이되, 도시의 여러 구성요소들이 연속되고 일관된 관계를 맺는 근거이기도 했다. 즉, 서로 장식하는 관계를 통해 조화와 아름다움을 함께 키워 나아갈 수 있 을 것이라는 논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