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 론
창덕궁의 내전(內殿) 일곽은, 희정당·대조전 일곽을 가 리키며, 흥복헌, 경훈각, 함원전 등의 부속 전각을 포함 한다. 희정당 일곽은 편전이자 국왕의 거처였고, 대조전 일곽은 국왕과 왕비의 침전이었다. 희정당·대조전 일곽 은, 남북으로 인접해 있었기에 화재 시에 함께 피해를 입고는 하였는데, 1592년 임진왜란, 1623년 인조반정, 1833년과 1917년에 크게 화재를 겪고 재건되었다.1)
20세기 이전까지 내전 일곽의 중요한 변화로는, 17세 기 무렵 희정당이 편전으로 전용됨에 따라 전돌 바닥의 입식 구조에서 마룻바닥인 좌식 구조로 바뀌었다는 점2) 을 꼽을 수 있다. 1834년 재건 당시에는 그 규모와 구조, 형태를 화재 이전과 거의 비슷하게 유지하였고, 지붕의 높이, 계단의 개수 등에서만 변화가 있었다.3) 이밖에 20 세기 이전까지 창덕궁 내전 일곽에서 외형적으로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기에, 내전은 화재 후 재건할 때마다 대체로 원래와 같은 모습을 재현해왔 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4)
그러나 1917년의 화재5)(<Fig.1>) 후 창덕궁 내전 일 곽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이때의 변화에 관해서는 선행연구들6)이 축적되어 있다. 이 연구 들은 대체로 서양 건축의 영향에 주목한 것들이어서, 그 밖의 영향과 변화의 양상에 대해서는 더욱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이 연구의 목적은 1920년 창 덕궁 내전 일곽의 재건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에 있다. 이 연구의 방법은 2013년의 3개월간에 진행한 현장조사 와, 사진과 도면, <매일신보>와 <동아일보>의 기사들 (<Tab.1>)과 기타 기록들7)을 검토하는 문헌연구이었다. 이 연구를 통하여 창덕궁 내전 일곽 재건축의 계획과 진 행 과정을 살피고 완공 모습을 추정하고자 한다.
2.창덕궁 내전 일곽의 재건 과정
2-1.내전 일곽의 재건 관련 신문기사의 검토
<Tab.1>은 창덕궁 내전 일곽의 재건과 관련한 신문8) 기사들의 제목을 날짜순으로 나열한 것이다. 이 기사들 을 통해서 공사의 계획단계에서부터 진행 과정, 완공 모 습을 추리할 수 있었다. 그 내용을 2-2.부터 2-5.까지에 서 기술하기로 한다.
2-2.재건 공사에서 건축 양식과 설비
1920년에 재건된 창덕궁 내전 일곽은 절충식 전각이었 고, 이에 관한 자료로 <Tab.1>의 기사 4건을 찾을 수 있다. 화재 직후인 1917년 12월의 기사에 의하면, ‘양제 로 건축되리라는 말이 있으나 양제로 건축함은 창덕궁 안의 다른 건축물과 서로 대하여 조화가 고르지 못한 고 로 자연히 이전대로 조선식의 궁전을 건축’하기로 결정 하고 ‘목하 총독부 기사의 손에서 조사 설계 중’이었음을 알 수 있다.9)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1920년 4월에, ‘전임으로 감독을 하여오든 기사 김륜구(金倫求) 씨’의 인터뷰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건축물은 전부 구식으로 전(前) 집과 비하여 대동소이 할 것이오 침전은 될 수 있는 대로는 온돌을 폐지하고 석탄이나 가스를 이용하고 자 하였으나 아무리 생각하여도 전하께 당하여는 조선식 온돌이 제일 편하옵시겠기에 침전은 역시 온돌로 하기로 결정하였으며, 내부 장식은 전부 서양식으로 하겠지만 아무쪼록은 전하의 취미의 맞으시도록 조심’하였다. 따라 서 김윤구는, 재건공사가 건축물의 조화 이외에도 순종 의 취향을 고려한 결과라는 점을 강조하였다.10) 온돌을 폐지하려고 한 것은 화재의 위험 때문으로, ‘온돌이 필요 치 아니한 곳’, 즉 ‘왕 전하와 비 전하의 기거하시는 방 외에는 전부 증기난로 장치를 참고하여 대부분 개량’하 였다.11)
또한 ‘이왕직 영선과(李王職營繕課)의 기사들이 특별 히 고심한 점은 방화 장치와 배수 공사’였는데, ‘주요한 건축물 사이에는 견고벽돌의 방화벽을 쌓아올리고 방화 문을 달게’하였으며 ‘배수공사에도 지하 15척에 직경 3척 의 철관을 묻어서 편리하고 위생되고 안전하도록’ 근대 식 설비를 하였다. ‘이번 공사에 특별히 힘쓴 것은 내전 부근의 하수도를 『콩크리트』관으로 물이 순하게 빠지 도록 포설하여 위생에 편리하게 하였’다.12)
이밖에 1918년부터 영선과장을 맡았던 곤도 시로스케 [權藤四郞介]는 ‘전각의 양식과 구조는 화재 전 모습과 똑같이 하며 내부 장식, 설비 및 채광, 통풍 및 배수 방 식은 최신식을 취하여 조선 특유의 건축미를 현대적 기 술로 발휘해보기로 하였다’고 평가하였다.13)
2-3.재건 공사의 재료
주재료에 관해서는 화재 직후에 ‘창덕궁 내전의 다시 건축할 것은 경복궁안의 강녕전과 및 교태전으로써 이에 충용하기로 의론되었는데 (중략) 그것은 이전 총독부의 소관으로 붙여서 목하 국유가 되었으므로 총독부 당사자 의 교섭’을 통해 결정하였다.14)
경복궁의 부재를 사용하게 된 배경으로는 ‘마침 구쥬 전린 중으로 배편이 부족하고 또 이곳에 쓰는 재목은 물 론 일체의 건축 재료를 일본에서 가져옴으로 대단 곤란 하였는데 그렇다고 조선 전토 언 곳 물론 고재목 있는 곳을 수색하나 또한 소용될 만한 것은 없는’ 와중에 ‘마 침 경복궁에서 양여를 받은 전당은 소실한 전당과 한 치 한 푼도 틀림이 없는 전당이었음으로 다소간 소부분을 개량하여도 족할만한 대단히 좋은 형편’이며 그 부재들 을 ‘가격으로 볼 것 같으면 전혀 말로도 읽을 수 없는 막대한 금액에 달할 터’라고 전한다.15) 즉, 조선에는 적 당한 목재가 없었고 제1차 세계대전 중이라 일본의 목재 를 비롯한 건축 재료를 가져오기에는 배편이 부족하였는 데 마침 경복궁의 전각이 형태적으로 유사했고 비용절감 의 효과도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16)
결과적으로 ‘원 경복궁 만경전의 재목은 경훈각의 건 축 재료에 쓰고, 교태전의 재목은 대조전, 원 흠경전의 구재는 생과방, 원 강녕전의 구재는 희정당으로 하고, 그 리고 현관은 원 연생전의 구재를 사용’하게 되었다. 또 ‘부족한 재료는 전부 조선 소나무를 사용하였는데 약 삼 천 주나 들었다.’17)
그 밖의 재료는 부분적으로 입찰을 통해 공급하였으 며,18) ‘다른 공사와 달라서 일체 도급을 주면 재료에 상 관이 있을까 염려되어 재료는 이왕직에서 선택하여 주고 공사만 도급을 주는 등 여러 방면에 신중히 주의’하였 다.19) 창덕궁 내전 공사에는 양질의 재료를 사용해야 했 을 뿐만 아니라 전통 재료와 서양식 재료를 혼용하는 절 충식 전각이었기에, 그 선택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음 을 알 수 있다.
2-4.재건 공사의 배치와 면적
화재 직후에 ‘전각과 전각의 사이는 복도로서 통로를 설비할’ 계획이 있었다.20) 평면상에서 ‘내전 건축의 배치 는 얼른 말하자면 目자와 같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뒤에 대조전, 그 앞에 대조전 부속채, 그 앞에 정현관 채가 되 고 동편은 복도로 둘러서 각 전각의 교통을 편케 하였으 며 이전 내전문은 폐하고 인정전과 같이 현관제도로 고 친 것이 이번의 새 시설이라’고 전한다.21) 이는 1907년 개조된 인정전 일곽과 같은 내부 동선을 이끌어내는 것 으로, 정면의 현관으로 입장해 좌우의 복도를 통과하여 전각에 이르는 방식이다.22) 그 결과 창덕궁 내전 일곽은 입구에서 신발을 벗어놓고, 복도를 거쳐 모든 곳이 통하 며, 다시 원위치로 나올 수 있는 구성을 갖게 되었다.23)
총 평수는 그 전에 칠백오십평이던 것을 이번에는 구 백이십평으로 확대’되었는데 ‘전체가 대개 늘었지만은 희 정당 자리에 옮겨서 세울 강녕전이 희정당보다 특별이 큰 것이 제일 현저한’ 이유이며 ‘순 조선식 건축물 중에 아마 가장 큰 건물이라 할 만하니 석왕사24)의 본전보다 도 오히려 크다’라고 전한다.25) 또한 향(向)에 있어서는 ‘전에는 지상(地相)이라던가 방위(方位) 등에 구애하여 각 궁전의 방향을 다르게 하였던 배치를 이번에는 개량 하여 전부 남향으로’ 바꾸었다.26)
2-5.재건 공사의 진행과 단계, 인물, 비용
재건 공사의 진행 과정에 관한 기록으로는 신문기사 를 포함한 8건이 있다. 이 기록들을 요약하면 <Tab.2> 와 같다. 1917년 12월 25일 개기식을 시작하여 고종의 승하로 잠시 중단하였다가 약 3년 만에 완공하였다. 완 공 시기는 대략 1920년 10월 말이라고 추정된다.
공사는 <Tab.3>과 같이 총 3단계로 나누어져 각각 담당 건축기사들이 배정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조선인들 이었다. 반면 ‘양식으로 할 것은 일본인 좌동웅태랑『佐 曈熊太郞』에게, 석재 만드는 것은 소야웅삼『小野熊 三』에게, 기관실은 고도주우『高島周祐』30)에게, 온실 은 삼산구『衫山久』등에게 도급을 명하여 점차 공사 가 진행’되었다고 전한다.31) 즉 조선식을 따르기로 한 건 물의 외관은 조선인 기사에게 맡겼고, 신식 설비와 양식 등은 일본인 기사에게 맡긴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건축기사는 임길송『林吉松』씨 승우갑태랑『勝又甲太 郞』씨 김윤구『金倫求』32)씨의 삼씨’가 있었다.33) 또한 당시 영선과장이었던 다나카 센[田中遷], 총독부 토목국 의 기사 이와이 초사부로[岩井長三郞]와 쿠니에다 히로 시[國枝博]34)가 참여하였으며, 전기장치에는 체신국의 기 사인 오카모토 케이지로[岡本桂次郞]35)를 위촉하여 설계 의 방향을 정하였다고 한다.36)
비용에 관한 기록은 신문기사를 포함하여 4건이 있다. ‘재목은 모두 총독부와 왕가에서 공급하고 예산에 들은 것은 공사뿐인 고로 처음에는 오십만 원이었던 것이 물 가와 노동임금의 영향을 받아서 약 삼십만 원 내외의 부 족’이 생겼다고 전한다.37) 이 외에 ‘건축비는 모든 재료 를 제하고 약 팔십만 원’, ‘총 경비가 칠십삼만여 원’, ‘공 사비 70만 원, 그밖에 관급 재료의 견적 가격 30만 원을 더하여 약 100만 원’38) 등의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액수 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재료비를 제외한 공사비로 약 70-80만 원이, 그 밖에 관급 재료의 견적 가격으로 약 30만 원이, 소요되었다고 볼 수 있다.
2-6.소결
이상에서 문헌 기록들과 현장 조사를 통해 창덕궁 내 전 일곽 재건의 계획과 과정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를 요약하면 이러하다. 건축 양식은 한·양·일 절충식으로, 근대식 설비를 갖추었으며 경복궁의 부재를 헐어다가 사 용하였다. 평면 배치에 있어서는 이전에 없던 현관과 복 도를 신설하여 눈 목(目)자를 이루었다. 내전은 750평에 서 920평으로 확장하였다. 공사는 1917년 12월 25일 시 작되어 1920년 10월 말 완공되었는데 그 과정은 총 3단 계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3.창덕궁 내전 일곽의 완공
3-1.창덕궁 내전 일곽의 전체 모습
외관은 불에 타기 전의 전각과 대략 같’으며 ‘대조전 의 구조는 그 기초를 조선 고래의 건축법에 따라하고 또 내외의 장식은 불국식(佛國式)’, 즉 프랑스식을 가미하여 ‘매우 화미하고 가려하게’ 하였다.39) 또한 ‘내외의 신건축 의 양식을 가입하여 참작해 지은 것’인데 이는 ‘어떠한 의미로 보면 그 전각이 백여 년 후의 사람들에게 그 전 각을 지을 때에는 내선융화(內鮮融和)가 이만치 되었구 나 하는 것을 상상케도 할 것 같다’라고 하였다.40) 이 절 충식 전각을 놓고, 조선 고래의 건축법, 불국식, 내외의 신건축, 내선융화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건물의 전체적인 풍격은 ‘화려하다는 것보다는 고아한 건물’이며, 이 건물에 대해 ‘이왕전하께옵서도 최근에 그 곳으로 산보하실 때에 마침 어람을 하시고 매우 만족히 여기’셨다고 전한다.41)
3-2.대조전 일곽
대조전 공간의 용도는 <Tab.1>의 기사 4건을 통해 서 추정할 수 있다.
대조전의 ‘중앙에는 오십평 가량의 넓은 대청이 되어 그 곳에는 의자 탁자 등 실내 기구를 화려하게 장치’42)하여 알현실로 사용했다. 알현실의 모습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기사43)와 <Fig.3>를 살펴보면 편판 위에 붉은 카 펫을 깔고 화려한 의자와 탁자 등을 놓았으며 라디에이 터로 난방을 하는 완전한 입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44)
‘평상시에 늘 기거하시는 방’은 대청 동측의 흥복헌을 가리킨다. 이 밖에 대조전 일곽에 관해서는 아래와 같은 기사들이 전하고 있다.
(흥복헌의) 오른편으로는 다시 이발실, 강습소, 교수실, 창고 등의 전각이 건조될 터이오, 뒤로 서재와 변소 등이 있고 왕전하의 침실의 오른편에 다시 비전하의 의복실, 화 장실, 목욕실 등이 있으며 경훈각은 대조전 서북 높이 솟 아있으니 이곳의 전하의 서재와 오락하시는 곳이라45)
(대조전의) 동편에는 흥복헌 서에는 경의실(更衣室), 퇴 선실(退饌室), 화장실, 유희실이 있고 북편에는 어서재인 함원전이 있고46)
대조전에 접속되어 정면의 석계를 근등(謹登)한 즉 당 착(撞着)뵈되는 곳이 대청(大廳)이라 하는 광간(廣間)이 오 기우측(其右側)이 흥복헌(興福軒)이라 하는 왕전하의 어거실(御居室)이며 좌편으로 관리각(觀理閣)이라 하는 비전하의 어거실이라 배청(拜聽)된다.47)
이 기사들을 토대로 삼아 현장조사에서 확인한 공간의 용도를 현재의 도면48) 위에 표기하면 <Fig.4>와 같다
대청의 좌우에는 온돌을 놓은 좌식의 어(御)침실을 두 고 있으며 그 북측에는 서재인 함원전과 경훈각이 있다. 대조전의 좌우에는 융경헌과 흥복헌이 있어 어(御)거실 로 사용하였으며 융경헌 옆 서측에는 욕조와 세면대 등 이 설치된 어(御)욕실(<Fig.2>)이 있다. 흥복헌 옆 동측 에는 이발실과 물품보관의 용도로 쓴 듯한 청향각이 있 으며, 그 남측에는 강습소, 교수실 등으로 사용했을 것으 로 보이는 대조전 동행각이 있다. 그 밖에 기사에서 언 급하고 있지 않은 대조전 남행각과 서행각은, 화재 이전 과 마찬가지로, 상궁들과 나인들이 대기하는 곳으로나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 등으로 쓰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3-3.희정당 일곽
대조전과 ‘연(連)하야 낭하(廊下)와 접속(接續)한 희정 당 『공식접견실』이 있다.49) 희정당의 당시 사진 (<Fig.5>)을 살펴보면, 벽화를 배경에 두었고 대청 가운 데 원형 테이블과 의자들을 놓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중앙 알현실의) 좌우에는 양식실로 하여 좌에는 왕비전 하의 알현실이 될 터이다’50)라고 하였다.
『근대건축도면집』에 수록된 도면 05851)(<Fig.6>)과 도면 059(<Fig.7>)는 희정당 오른쪽 부분을 나타낸 도 면인데, 그 구성이 다소 상이하다. 곧, 도면 059의 ‘어거 간 겸 어침실’이 기둥에 맞추어 위쪽으로 넓어졌다. 이로 써 도면 058과 도면 059는 어떤 공사의 전후를 나타내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도면 058(<Fig.6>)에는 ‘어거간 겸 어침실’, ‘어경의실’이라는 표기가 있어서, 이 부분이 국왕의 공간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52)
도면 059(<Fig.7>)는 ‘어거간 가구배치’를 위한 것인 데, ‘어거간’이 침대, 탁자, 의자 등이 대조전의 어침실과 는 달리 입식으로 꾸며져 있다. 이 공간에는 라디에이터 가 설치된 흔적이 남아있다. 당시에는 난방을 위해 온돌 과 라디에이터가 함께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53), 이 는 입식 공간을 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난방방식 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희정당 일곽의 구성에 관해서는 아래 기사만이 이 전 하고 있어서 각 공간의 정확한 위치를 알기는 어려웠다.
(희정당의) 주위에는 일간이나 넘는 난간이 있고 정면 에 넓은 뜰을 사이에 두고 현관에 면하였으니 현관으로 건너가면 좌우로 통하나니 내빈의 쉬이는 집과 공전하 의 쉬시는 곳이 있고 세면소, 변소 등의 설비가 완전하 다. 다시 왼편으로 낭하를 따라가면 사장실『司長室』, 찬시사무실『贊侍事務室』, 숙직실, 식당 등이 있고 찬 시사무실 이웃으로 안으로 들어가는 현관이 있으니 그 현관으로 나아가면 대현관『大玄關』에 이른다.54)
현장조사를 통해서 <Fig.4>의 18번에 위치한 ‘욕실’ 에서 장서각 소장의 도면 086번 「내전여관용 욕실, 찬 시숙직용 욕실」과 동일한 욕조를 발견할 수 있었 다.(<Fig.8>, <Fig.9>) 이 도면은 1917년 내전 일곽이 불에 타기 전 희정당 서쪽에 짓기 위해 그렸던 것이다. 도면에는 ‘風呂浴’이라고 적혀있다. 이를 ‘어욕실’의 욕조 (<Fig.2>)와 비교하면, 이 욕조가 작고 협소하다. 그러므 로 <Fig.4>의 18번은 찬시숙직용 욕실이라고 볼 수 있 다. 욕실의 남측인 서행각(<Fig.4>의 19번)은 희정당 행 각 중에서 유일하게 온돌로 되어있다. 그러므로 이 19번 이 숙직실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 남측의 공간과 남행각의 공간들(<Fig.4>의 20번)은 숙직실과 현관과 이웃하고 있기에 찬시사무실, 혹은 사장실과 그 부속 공 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동행각에는 마룻바닥에 커튼박 스와 샹들리에가 설치된 넓은 방이 있어 내빈과 공 전하 의 휴게실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3-4.내전 일곽의 가구
당시 창덕궁 내전 일곽에 배치되어 있던 가구들은 일 부 그대로 제자리에 남아있는 경우도 있지만, 지금은 대 개 그 자리가 바뀌었다. 또 가구들은 파손되었거나 따로 보관되어 있다. 창덕궁 내전 일곽의 원래 가구 배치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현재 희정당의 알현실에 배치된 가구들은 대체로 프 랑스 루이 14세, 15세, 16세 양식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56) 이 가구들은 <Fig.10>, <Fig.12>, <Fig.14>와 같이 곡선을 갖으며, 화려함이 과하지 않다. 이밖에 현 재 희정당에는 <Fig.11>과 같이 중국식 가구들도 남 아있다.57) 대조전 알현실의 체경(<Fig.13>)도 중국에 서 수입했다고 한다.58)
1890년대부터 일본인 가구제작자들이 한국에서 공장 을 운영했던 기록59)이 있어서, 가구들이 모두 수입한 것인지의 여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오얏꽃’ 문양이 장식된 의자 등은 주문 제작인 것으로 보인다. (<Fig.14>, <Fig.15>) 거울이나 침대 등은 모두 수입 한 물품인 것 같다. 외국산 가구는 어느 한 시대의 일 정한 양식만을 도입한 것이 아니라, 여러 양식들을 도 입했다고 볼 수 있는데,60) 이 가구들은 모두 궁중에서 입식 생활로의 변화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3-5.소결
1920년 재건된 창덕궁 내전 일곽은 새롭게 다음 두 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째는 희정당 일곽의 성격이 변화했다는 것이다. 원 래 대조전은 국왕과 왕비의 침전이었으며, 희정당은 국 왕의 거처이자 집무공간으로, 기록상 ‘편전으로 일 보던 곳’61), 혹은 ‘여러 신하들을 한가로이 접견하는 곳’62)이었 다.63) 대조전은 재건 이전과 이후에서 극심한 기능 변화 를 갖지 않았지만, 희정당은 편전의 기능을 상실하고 주 로 접견을 위한 공간으로 쓰이게 되었다.64) 희정당은 좌 식의 편전으로부터 입식의 서양식 알현실로 그 기능이 바뀐 것이다.65)
둘째는 창덕궁 내전 일곽에 새로운 공간이 추가되었 고, 기존 공간의 재배치가 있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공간 으로는 근대적 설비라고 할 수 있는, 욕실, 화장실, 이발 실 등이 추가되었다. 기존 공간의 재배치로는 찬시사무 실66), 사장실, 식당, 숙직실 등이 내전의 전면에 놓이게 된 것을 꼽을 수 있다. 찬시사무실, 사장실, 식당, 숙직실 등은 1917년 화재 이전에도 대조전과 희정당 주위에 존 재했었지만, 전각 주위에 별도의 건물에 놓여서 전각들 과 복도로 연결하는 형식을 취했었다. 이 공간들이 1920 년 내전 일곽의 재건을 통해서 눈 목(目)자 배치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4.창덕궁 내전 일곽에 미친 외래 건축의 영향
3장에서 살핀 신문기사들에 따르면, 창덕궁 내전 일곽 의 재건에서 실내장식은, 특히 가구는 프랑스식(불국식) 을 가미한 것이며, 절충식 전각은 일본에서 들어온 것이 었다. 프랑스식 실내장식은 현재 남아 있는 가구들을 통 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희정당은 입식(서양식)의 ‘어거 실 겸 침실’을 갖추었고, 대조전은 여전히 좌식(조선식) 의 ‘어거실 겸 침실’을 갖고 있었다. 알현실과 같은 접객 공간은 화려한 서양식으로 꾸몄다. 이렇게 입식과 좌식 이 공존하고 서양식 접객공간이 들어선 현상은 19세기말 에 메이지궁전에서도 일어났었다. 곧, 일본의 천황과 황 후의 공간으로는, 서양식 가구로 꾸며진 입식 ‘상어전(常 御殿)’이 있는 동시에 다다미를 깐 ‘상어전’도 갖추고 있 었다. 메이지궁전의 접객 공간인 내알현소(內謁見所)와 향연소(饗宴所), 후석간(後席の間) 등은 서양식을 따랐 다.67)
이 밖에도 창덕궁 내전 일곽에는 외래 건축의 영향이 라고 볼 수 있는 요소들이 많다. 그 중에서 두드러진 내 용들을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4-1.현관
현관의 개념은 1907년에 인정전을 개조공사에서 도입 되었다. 이때는 인정문을 개조하고 그 명칭을 현관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창덕궁 희정당에는 돌출 형태의 현관 을 두었다.(<Fig.16>) 그 형태와 기능은 일본의 구루마 요세[車寄]에서 비롯하는 것 같다.(<Fig.17>)68)
돌출 현관이 창덕궁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09년에 금천교 부근에 세워진 궁내부청사에서부터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근대건축도면집』(도면편)에 실린 「궁내부 청사신축평면도」017과 018에는 ‘구루마요세[車寄]’라고 기입되어 있다.69)
지금 창덕궁에는 희정당의 돌출 현관만이 남아 있지 만, 이런 현관은 복원 이전의 낙선재 일곽에도 실제로 있었다. 희정당의 현관이 어차를 대기시키고 승하차하는 공간이었음은, <Fig.19>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70)
4-2.복도
1920년 창덕궁 내전 일곽의 재건 이후에서 가장 큰 변화는 대조전과 희정당을 일직선상에 놓고 희정당의 동 행각을 새로 만들고 복도로 연결하여 눈 목(目) 자를 형 성했다는 점이다. 이는 ‘인정전 동행각으로부터 초원(稍 遠)한 낭하(廊下)를 기절(幾折)하야’ 대조전에 이르렀다 는 1922년의 기사71)와 1935년에 항공 촬영한 창덕궁 사 진(<Fig.20>)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현관에서 각 전각까지를 이어주는 복도의 도입은 일본 건축의 영향이라 볼 수 있다. 현관과 복도의 도입은 내 전의 내부 진입 동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동선 구조 로 인하여 창덕궁 내전 일곽은 한 곳에서 출입하여 전체 로 통할 수 있게 되었다.
창덕궁 내전 일곽의 가구들은 일부 중국식을 제외하고 는 대체로 프랑스식이었고, 그 밖의 실내장식도 대부분 서양식이었다. 이는 화양절충식이었던 메이지궁전의 내부 가 역시 프랑스식이었던 것과 연관하여 고찰해야 할 것 이다. 프랑스식 가구를 비롯한 서양식 실내장식은 모두 입식 생활을 위한 것으로, 궁중 생활양식의 변화를 가져 왔다. (<Fig.21>, <Fig.22>, <Fig.24>)23
4-4.기타 내부 공간의 양상
『근대건축도면집』의 도면 058과 도면 059는 재건 된 희정당 ‘어거간실’의 내부 공간과 가구 배치를 보여 준다. 서쪽에 ‘내낭하’를 두었고 동쪽에 ‘어경의실’과 ‘어거간 겸 어침실’, 북쪽과 남쪽에 각각 ‘베란다’를 두 었음을 알 수 있다.(<Fig.25>)
이 두 도면에는 일본식 공간과 가구 표기가 되어 있 는데, 그 중 베란다[ベランダ]는 서양을 거쳐서 일본에 도입된 공간개념이었다.72) 희정당의 전체 평면에서, 이 공간을 외부에 면한 복도 혹은 마루라고 볼 수도 있지 만, ‘베란다’라는 도면표기와 ‘주괘(肘掛)의자(レ)’와 ‘환 (丸)탁자(ソ)’로 미루어 보아서, 이 공간이 베란다를 의 식하고 만든 것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Fig.26>)
이밖에 일본 전통 건축의 공간이 도입된 사례도 있다. <Fig.27>은 대조전 옆에 딸린 왕비의 ‘어거실’(<Fig.4> 의 4)인데, 이 방의 서쪽에 수납공간이 설치된 것을 볼 수 있다. 이것들은 오시이레[押入れ]라고 하는 일본식 벽 장과 치가이다나[違棚]라고 하는 일본식 선반인데, 쇼인 즈쿠리[書院造]의 중요한 특징들이다.73)23
4-5.소결
1920년 창덕궁 내전 일곽은 절충식 전각으로 재건되었 고, 조선식 외관을 유지하면서도 곳곳에서 외래 건축 양 식의 영향이 드러났다. 동선 구조와 건축 요소들에서는 일본 건축의 영향이 있었다. 먼저, 돌출 현관과 전각을 잇는 긴 복도의 도입을 꼽을 수 있다. 이것들을 통해서 내전 일곽은 모두 통하는 구성을 갖게 되었다. 또 내전 의 실내에는 부분적으로 오시이레와 치가이다나가 설치 되기도 하였다. 베란다와 프랑스식 실내 장식은 분명히 서양 건축에서 유래하는 것이지만, 당시 메이지궁전에서 도 쓰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서양의 건축 양식들도 일본을 경유한 유입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5.결 론
이상에서 현장답사와 관련 도면들과 신문기사들에 대 한 문헌연구를 통해서, 1920년 창덕궁 내전 일곽의 재건 에 관하여 살폈다. 2장에서는 재건 과정을 구체적으로 기술하였고, 3장에서는 완공한 뒤의 내전 일곽의 모습과 공간의 용도를 추정하였으며, 4장에서는 내전 일곽에 미 친 외래 건축의 영향을 기술하였다. 그 중에서 창덕궁 내전 일곽에서 공간의 용도를 추정한 <Fig.4>은 특히 이 연구의 길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창덕궁 내전 일곽의 재건과정과 그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17년의 화재로 전소한 창덕궁 내전 일곽 은, 일본인 영선과장의 지휘 아래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이는 창덕궁 내전의 중건 역사상 가장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내전 일곽은 한국의 전통적 외관을 유지하면서 근대식 설비를 갖추고 프랑스식을 가 미한 절충식 전각으로 완성되었다. 이를 당시의 기사는 ‘조선 고래의 건축법’, ‘불국식’, ‘내외의 신건축’, ‘내선융 화’라고 표현하였다. 재건 공사에는 한국인 건축기사와 일본인 건축기사, 설비기사 등이 참여하였다. 재건에 사 용한 재료는 이왕직의 협의와 총독부의 허락 아래 경복 궁 전각의 부재를 헐어 사용했으며, 그 밖의 재료는 이 왕직이 선택하였다.
대조전은 조선식 ‘어거실 겸 어침실’을 갖는 한편, 쇼 인즈쿠리의 ‘어거실’도 가질 뿐만 아니라 서양식 커튼의 공간을 갖고 있어서, 한·일·양의 양식들의 혼재와 절충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희정당은 편전에서 접객공간으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이때 온돌과 마루는 여전히 유지한 채 그 위에 카펫을 깔고 가구를 놓고 라디에이터를 설치 하는 등, 좌식 공간 구조 위에 입식의 가구설비가 도입 되었다. 그러므로 입식과 좌식의 문제가 양식들의 혼재 의 문제와 중첩되어 있다.
희정당에는 이전에 없던 동행각과 현관을 만들고 이들 을 복도로 연결하고 대조전 쪽으로 확장하여, 전체 내전 일곽 건물의 배치는 결과적으로 눈 목(目)자를 이루었다. 이로써 창덕궁 내전은 한 곳에서 출입하여 전체를 통할 수 있는 동선 구조를 갖게 되었다. 이때 내전 일곽에 새 로운 공간이 추가되고 기존 공간의 재배치가 있었다. 재 건한 내전 일곽에는 돌출 현관, 전각을 잇는 긴 복도, 베 란다, 수납공간인 오시이레와 치가이다나 등과 같은 일 본식 건축 요소들이 부가되었다. 이러한 동선 구조와 건 축 요소들에 관해서는 차후에 세밀한 연구가 필요할 것 이다. 가구와 실내장식은 프랑스 양식을 비롯한 서양식 과 중국식으로 입식 생활에 맞게 꾸며졌지만, 서양식 실 내공간은 일본의 경험을 거쳐서 유입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연구는 1920년 창덕궁 내전 일곽 재건의 과정과 결과를 통해서 근대기 궁중 생활양식의 변화와 일본의 간섭 아래 진행된 공간의 역할 변화를, 또 외래 건축 양 식의 영향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는 점에서 일정한 의 의를 가질 것이다. 이 연구는 관련 자료와 도면을 검토 하고 현지조사를 통해서 창덕궁 내전 일곽 재건의 의도 나 목적을 추정하려고 최대한 노력하였지만, 공사를 직 접 추진한 입장에서 기술한 문헌자료를 찾지는 못하였다. 또한 1917년에서 1920년까지 약 3년간에 걸친 재건 과 정에서 방화설비, 채광, 통풍, 전기, 배수 등의 설비공사 는 창덕궁 내전 일곽의 면모를 바꿔놓는 중요한 계기이 고 동인이었는데, 이 연구에서는 관련 기사를 통해서 그 개요를 언급하였을 뿐 관련 도면과의 비교 검토를 통해 서 이를 더욱 구체적으로 살피지 못하였다. 이러한 불비 (不備)함들이 이 연구의 한계가 될 것이다. 앞으로 재건 공사의 도면 자료와 문헌 자료 등과의 자세한 비교검토 를 통해서, 또 재건공사 관련 인물들의 배경을 확정함으 로써 이러한 한계가 극복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는 다음 연구의 과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