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 론
懶翁惠勤(1320∼1376)은 동시대의 수평적으로는 太古普 愚(1301∼1382)·白雲景閑(1298∼1374)과 더불어 麗末三師1) 로 칭해지는 인물이다. 또 수직적으로는 指空禪賢(1300∼ 1361)·無學自超(1327∼1405)와 함께 證明三和尙으로 일컬 어진다. 麗末三師와 證明三和尙에 공통으로 위치하는 것이 나옹뿐이라는 점은, 나옹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확보하는 인물인지를 잘 나타내준다. 또 나옹에게는 다른 선승들과는 다른 歌辭文學을 통한 민중불교적인 양상도 존재한다. 이러 한 중요도로 인하여, 나옹과 관련해서는 약 100여종이나 되 는 학계의 선행연구들이 존재하고 있다.
나옹연구에 대한 중요한 부분은 문학·불교학·사학 쪽에서 의 박사학위논문 4편과,2) 李鍾君3)·전재강4)·李哲憲5)·姜好 鮮6)·金昌淑7)·黃仁奎8)·許興植9)을 필두로 하는 일련의 연구 들이다.10) 그러나 이와 같은 많은 연구들이 존재함에도 불 구하고, 나옹의 회암사 修造명분 및 이의 대두이유에 관해 서는 이제까지 크게 이렇다할 연구가 진행되지 못하였다. 이는 종래의 회암사와 관련된 연구가, 회암사의 수조의미 보다는 寺址및 浮圖에 대한 것이 중심을 이루었기 때문이 다.11) 회암사의 수조명분과 관련된 연구는, 許興植이 『高 麗로 옮긴 印度의 등불』, 「第3章檜巖寺」에서 다루고 있는 일부가 유일하다.12)
회암사의 수조(1374년, 恭愍王23, 禑王元年)는 功夫選 의 主盟과 王師임명을 통해서 상징적인 國師가 되는 보우 를 제치고 실질적인 고려불교의 1인자가 되는 나옹이, 새로 운 불교재편의 이상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또 회암사의 수조과정에서 나옹이 탄핵을 받아 마침내 의문 의 열반에 이르고 만다는 점에서, 회암사의 수조는 나옹에 대한 정당한 이해정립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확보 한다.
본고는 제Ⅱ장을 통해서 회암사 수조배경으로서의 三山 兩水之記를 검토하고, 이의 의미가 확대되는 양상에 대해서 검토해 보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나옹의 회암사 수조 당위성 및 나옹의 열반과 관련된 문도들의 위기의식을 읽어볼 수가 있게 된다.
또 제Ⅲ장을 통해서는, 나옹의 회암사 수조에서 확인되는 일련의 구조들이 자장의 문제의식 및 해법과 상호 유사하다 는 점에 대해서 밝혀 보았다. 이는 나옹이 2차례나 주석하 는 오대산불교의 영향이자, 신라 말이라는 위기의 시대를 산 자장과 고려 말 변화기의 나옹이 상호 유사한 관점에서 의 해법도출을 시도한 것으로 판단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또 이를 통해서 우리는 나옹이 오대산불교에 영향을 받고 있는 측면에 관한 한 단면을 인지해 보게 된다.
회암사는 여말선초 불교의 최대 핵심사찰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보다 분명한 이해는, 나옹과 그 문도 및 여말선 초 불교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타당한 연구의의를 확보 한다고 하겠다.
2.회암사 修造배경과 三山兩水之記
2-1.지공의 授記와 나옹의 수조배경
懶翁惠勤(1320∼1376)은 20세 때인 1339년(忠肅王後8)四佛山大乘寺에 속한 妙寂菴의 了然門下로 출가한다.13) 이후 제방을 유력하다가 1344년(忠惠王4) 양주 회암사에 도착한 뒤, 4년간의 長坐不臥수행 끝에 25세가 되는 1347 년(忠穆王3) 마침내 悟道하게 된다. 깨달은 직후에 나옹은 곧장 入元認可遊學을 떠나, 指空禪賢(1300∼1361)이 머물 던 大都法源寺에 入房한다.14) 이후로 나옹은 만 10년이라 는 장기간의 입원생활을 보내게 된다.
이 과정에서 1350년(忠定王2) 8월 江南五山佛敎淨 慈寺의 平山處林(1279∼1361)에게 臨濟法脈을 받고,15) 3년 뒤인 1353년(恭愍王2)에는 法源寺에서16) 지공의 인가를 증득한다.17) 그리고 1358년(공민왕 7) 3월 13일 지공과 마 지막으로 작별할 때, 지공으로부터 소위 ‘三山兩水之記’를 받게 된다. 三山兩水之記는 회암사의 수조와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므로, 이의 해당 부분을 적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정유년(1357년, 공민왕 6)에 (광제선)사에서 물러나 燕 지역의 명산을 유력했다. (그러다가) 도로 법원사로 왔 다. 지공에게 묻기를, “제자는 마땅히 어디로 가야할까 요?” 하였다. 지공이 말했다. “자네가 본국으로 돌아가 三山兩水의 사이를 택해서 거처한다면, 곧 불법이 자연 히 흥할 것이네.”18)
무술년(1358년, 공민왕 7) 봄에 지공의 授記를 얻어서 동쪽 (고려로) 돌아왔다.19)
지공이 나옹에게 삼산양수의 수기를 주는 일을 「나옹행 장」에서는 1357년이라고 기록하였지만, 李穡은 <나옹비 문>에서 1358년의 일로 적고 있다. 나옹이 지공을 만나서 이 말을 들은 것은 최후 만남 때의 일이다. 또 이 말이 작 별과 관련된다는 점 및 나옹이 1358년 3월 23일에 지공과 헤어지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1358년 으로 기록하고 있는 <나옹비문>의 기록이 더 타당하고 판 단된다. <나옹비문>의 기술방식상 이색이 나옹의 문도들에 게 1차 자료를 받아서 작업했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색이 기술과정에서 이 부분을 타당성에 입각해 수정한 것 이 아닌가 판단된다.
여기에서 삼산양수가 가리키는 곳이 후일 나옹에 의해서 회암사로 비정된다. 삼산양수에서의 ‘삼산’과 ‘양수’가 각각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회암사와 관련해서 이색은 두 강물이 합류하여 風氣가 저장되고, 뭇 산들은 빙 둘러 있다는 언급을 하고 있어 주목된다.20) 또 이와 관련해 石顚朴漢英(1870∼1948)은 「楊州天寶山遊 記」에서, 삼산은 三角山이고 양수는 臨津江과 漢江으로 비정하고 있다.21) 그의 이와 같은 주장은 오늘날까지도 대 체로 용인되고 있다.22)
그런데 나옹은 귀국 후 곧장 회암사를 찾아서 방법을 강 구하지 않고, 무려 14년이 경과한 1372년(공민왕 21)에야 비로소 지공의 수기를 떠올려 회암사의 修造를 결심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와 관련된 내용을 적시해 보면 다음과 같 다.
① 임자년(1372년, 공민왕 21) 가을에, 스승은 우연히 지 공의 ‘三山兩水之記’를 생각하고는 회암사로 옮겨서 주 석할 수 있도록 (上께) 청하였다.
… 云云…
갑인년(1374년, 공민왕 23) 봄에, 또 近臣尹東明을 보내 어 그 절(회암사)에 주석하기를 청하였다. 스승이 말했 다. “이곳은 내가 처음으로 道에 들어간 곳이요, 또 先 師(지공)의 靈骨을 봉안한 땅이다. 게다가 先師께서 일 찍이 내게 授記하신 (장소)이니, 어떻게 무심할 수 있겠 는가!” 하였다.23)
② 임자년(1372) 가을에, 우연히 지공의 ‘三山兩水之記’ 를 생각하고는 회암사로 옮겨서 주석하기를 바랐다. 마 침 (공민왕의) 부름을 받고 이 절의 법회에 나아갔다가 청하여 거처하게 되었다. 스승은 ‘先師지공이 일찍이 직접 (이 절을) 重營하였는데, 병란에 燒失되어 버렸으 니 어찌 감히 그 뜻을 잇지 않으리오!’ 하고는, 이에 대 중과 모의하여 전각들을 넓혀서 확장하였다.24)
지공의 수기를 귀국 후 14년 뒤에야 떠올린다는 것도 특 기할만한데, 그것도 두 자료 모두에 공통되게 ‘우연히(偶)’라 는 말이 들어가 있어 이색적이다. 나옹은 이 수기를 떠올리 기 전해인 1371년(공민왕 20) 8월 26일에 王師에 책봉되고, 그 직후에는 왕명에 의해서 東方第一道場松廣寺에 주석하 게 된다.25) 또 전해인 1370년(공민왕 19) 9월 16일에는, 淸 平寺에서 功夫選의 主盟으로 고려불교계의 실질적인 1인자 로서 확실한 두각을 나타낸다.26) 즉 나옹이 삼산양수를 우 연히 떠올릴 때, 나옹은 공부선의 주맹과 왕사 및 사굴산문 수선사계의 대표가 되면서, 실질적인 조계종의 수장이자 고 려불교의 최고인물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필 이 무렵에 우연히도 삼산양수지기를 떠올렸다는 것은, 이것이 단순한 지공의 수기에 대한 자각만으로 볼 수 없는 이유가 된다.
특히 나옹은 회암사 修造를 262칸이라는 막대한 규모로 진 행하고 있다.27) 이는 고려 말이라는 혼란의 시대상황에서 볼 때,28) 이 절을 왕사의 下山所로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분 명 과도한 측면이 있다.29)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 나옹의 불교개혁과 관련된 구상이 존재한다고 판단해 볼 수가 있게 된다.
위의 인용문 ①에는 나옹이 회암사의 修造를 결정하는 이유가 총 3가지로 나타나 있다. 그 첫째는 나옹이 회암사 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점. 둘째는 지공의 영골을 모셨다 는 점. 셋째는 지공이 수기한 곳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이 중 첫째와 셋째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러므로 둘째에 관해서만 설명하면, 이는 1370년(공민왕 19) 1월 1일에 司徒達睿가 지공의 영골을 받들어 회암사 에 온 것에서 시작된다.30) 지공은 1361년 11월 29일에 대도 天壽寺31) 歸化方丈에서 열반한다.32) 그러나 당시는 元·明 교체의 혼란기였기 때문에, 이 소식은 6년 후인 1367년 겨 울에야 비로소 普菴에 의해 고려의 나옹에게 전달될 수 있 었다. 이때 보암은 지공이 맡긴 가사와 手書를 전해주었 다.33) 지공의 유해는 團塑肉身즉 丸彫塑像의 等身佛로 만 들어지게 된다.34) 이는 티베트 라마불교의 영향에 의한 것 으로 판단된다.
1368년은 明太祖朱元璋에 의해 南京에서 明이 건국되 고, 이듬해인 1369년에는 원의 대도가 함락되는 해이다.35) 이와 같은 원·명교체의 혼란과정에서 지공의 等身佛은 1368 년 가을에 兵臨城으로 옮겨져 다비된다.36) 지공의 등신불을 지키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자, 결국 문도들이 다비를 택하 게 된 것이다. 이때 지공 영골은 4등분 되어, 문도인 達玄· 淸慧·法明·張祿吉이 나누어 모시게 된다.37)
1369년 지공의 문도인 달예는 달현과 함께 고려로 오면 서, 청혜가 모신 것의 일부까지 가지고 와서, 개경을 거쳐38) 1370년 1월 1일 아침에는 최종목적지인 회암사에 도착한 다.39) 이로써 지공 영골의 2/5가량이 고려로 오게 된 것이 다.40) 이 영골을 3월에 나옹이 예배하고, 9월 26일에는 나 옹의 주관으로 지공의 영골이 회암사의 북쪽 봉우리에 모셔 지게 된다.41) 둘째에서 지공의 사리와 영골을 회암사에 모 셨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내용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용문②에는 ①에서 살펴지는 3가지 이유 이외에도, 지 공이 회암사를 중영했으나 병란에 소실되었다는 내용이 더 있다. 여기에서의 전란은 홍건적의 침입에 의해서 개경이 함락되는 1361년(공민왕 10)의 일을 뜻하는 것으로 판단된 다. 또 나옹에 의해서 회암사가 재건이 아닌 修造되고 있다 는 점에서, 이때의 소실은 완전소실은 아니었던 것으로 이 해된다.
2-2.회암사 수조 당위성의 확대
지공이 회암사를 중영했다는 것은, 晉宗(泰定帝)의 御香 使로 金剛山에 왔을 때의 일을 다소 과장해서 기술한 것으 로 판단된다.42) 이와 관련된 내용을 「天寶山檜巖寺修造 記」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① 다만 이 절로 말하자면, 철산이 전에 편액을 썼고, 지공이 뒤에 땅을 측량했던 곳이다. 그 ‘山水之形이 완 연히 西天竺의 蘭陀之寺와 같다’고 한 것이, 또 지공이 스스로 한 말이다. (그러므로) 그 福地가 됨이 너무나도 분명하다.43)
이와 유사하면서 보다 종합적인 기록은, 1452년 세조비 貞熹王后에 의해서 13개월 동안 회암사가 重創된 내역을 적고 있는 金守溫의 「檜巖寺重創記」에서 살펴진다.44) 이를 적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② 옛적 天曆年間(1328∼1329)에45) 서천 제납박타(薄伽 納提)존자가 이 절의 터를 보고는, ‘서천 阿蘭陁寺와 똑 같다.’고 말했다. 또 말하기를, ‘迦葉佛때에 이미 大道 場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에 줄을 잡고 땅을 측량하여 그 위치를 정하는데, 그때 賢劫이전의 주춧돌과 섬돌 을 발견했다. 당시에는 임시로 屋宇자리를 덮어서 그 대체적인 것을 알 수 있도록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후에) 玄陵의 王師인 普濟尊者가 지공에게 ‘三山兩水之記’를 받아 와 드디어 이곳에 와서 거처했 다. 이에 크게 중창코자 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필요한 )棟梁을 나누어주어 분주히 募緣하였다. (그런데) 功이 반에도 미치지 못했는데, 왕사가 서거하였다. 그 문도 윤절간 등이 왕사가 마치지 못한 뜻을 생각하여, 이를 계승해서 그 공적을 마쳤다.46)
①과 같은 경우는 나옹의 부도와 비석이 건립된 이후의 기록으로, 「나옹행장」이나 <나옹비문>에 비해서 성립시 기가 조금 늦다. 그런데 여기에는 「나옹행장」이나 <나옹 비문>에서는 살펴지지 않는 회암사의 수조 당위성을 강조 하는 논리가, 3가지 더 첨가되어 있다. 그 첫째는 鐵山紹瓊 이 편액을 남겼다는 점. 둘째는 지공이 회암사지를 측량했 다는 점. 셋째는 산수가 인도의 난타사와 똑같다는 점이 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들이 공통으로 강조하는 것은, 회암사가 희대의 福地라는 주장이라고 하겠다.
이 중 첫째를 검토하면, 鐵山紹瓊은 조계종에 많은 영 향을 미친 蒙山德異의 제자 혹은 계승자로47) 뱃길로 해서 1304년 7월에 와서 1306년 9월 이후에 떠난 인물이다.48) 즉 1326년에 고려를 찾는 지공보다 약 22년 앞서 고려를 방문했던 것이다.
철산은 고려불교에 대한 몽산불교의 강력한 영향에 의해 서, 후일 圓明國師가 되는 修禪社冲鑑(1274∼1338) 등에 의해서 초청되어 고려로 오게 된다. 고려에서 “釋迦之長子” 로까지 존중되는 극진한 대우를 받다가,49) 금강산의 法起道 場을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강화 普門寺의 3본 대장경 중 許評부부가 봉안한 것을 구하여 大仰山으로 옮겨간다.50) 철산은 고려 체류기간 중 금강산에 가는 도중에 회암사에 들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①에서 이와 같은 철산을 거론한 것은, 회암사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회암사수조기」는 나옹이 회암사 修造과정에서 臺官(司憲府)과 都堂의 탄핵에51) 의해서 돌 연히 열반에 이르는 것을 목도한 뒤의 기록이다.52) 그러므 로 회암사의 입장에서는 나옹 이외에도 회암사의 당위성을 세워줄 또 다른 고승이 필요했고, 이 중 임제종 양기파의 몽산 계승자로 고려불교의 신뢰가 두터웠던 철산을 부각시 키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이 기록에서 확인되는 철산과의 인연은 엄밀하게 말하면, 편액 글씨를 받은 정도에 그칠 뿐이다. 이는 당시 회암사의 상황이, 이와 같은 부분마저도 부각해야할 정도로 불투명한 현실 속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는 점에서 주목 된다.
둘째 지공이 회암사터를 측량했다는 것은, 앞선 <나옹비 문>의 기록에 ‘지공이 회암사를 중영했으나 소실되었다’는 내용과는 또 다른 것이다. 지공이 인도승려로 고려에서 1326년 3월부터 1328년 9월까지 2년 7개월을 머물기는 했 지만,53) 원래 목적이 금강산 법기도량의 참배였고 수도인 개경에서도 상당기간을 머물렀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다 면,54) 지공의 회암사 중영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철산과 마 찬가지로 금강산에 가는 도중에 회암사에 들렸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서 修造불사가 이루어진 정도가 아마도 전부일 것이다. 그러므로 회암사를 중영했다는 것은 좀 과장된 내 용이다.
이 같은 점을 고려하여 「회암사수조기」에는, 지공이 회 암사의 대대적인 修造와 관련된 정지작업을 한 것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또 나옹이 회암사의 대대적인 修造와 관련되어 탄핵을 당하고 열반한다는 점에서, 나옹의 당위성과 회암사를 보전하기 위해 고려인에게 ‘붓다와55) 달 마의 再來’로까지56) 숭앙받는 지공에게로까지, 修造의 근원 을 끌어 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즉 이 기록은 회암사의 대대적인 修造가 나옹의 판단만이 아닌, 붓다와 달마의 재래인 지공이 먼저 측량한 것을 기준으로 한 것이 므로, 나옹의 개인적인 관점만이 아니라는 점을 변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서, 문도들은 회암사 修造 의 당위성과 나옹의 과도한 修造에 대한 비판을 희석시키 고 있는 것이다.
셋째, 회암사의 산수지세가 인도의 난타사와 같다는 것 역시, 회암사의 당위성과 신성성을 강조하는 주장이다. 회암 사의 ‘산수지형’을 말하는 것은, ‘삼산양수’와 관련된 언급이 전부이다. 지공은 나옹에게 삼산양수지기를 주지만, 이는 나 옹이 그곳에 주석하면 고려불교가 발전하기 때문이라는 것 이지, 그곳이 곧 회암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 런데 여기에서는 지공의 입을 통해서, 삼산양수를 회암사와 직결시켜 말하고 있다. 또 이와 함께 회암사는 인도의 난타 사와 지세가 같아 기운이 통하는 사찰이라는 주장이 전개되 고 있다.
난타사는 ②를 통해서도 확인되는 阿蘭陁寺로 인도의 나 란타사(Nālandā-saṃghārāma, 施無厭寺)를 의미한다. 중국 불교는 한자 ‘阿’자에 특별한 뜻이 없다는 이유로, 음사임에 도 불구하고 阿字를 자주 생략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는 阿 羅漢(arhat)을 羅漢으로 阿彌陀(Amita)를 彌陀로, 그리고 阿蘭若(araṇya)를 蘭若로 축약하는 등의 예를 통해서 확인 해 볼 수 있다.57) 물론 이러한 음사에 대한 축약이 ‘阿’의 원어인 부정사 ‘a’를 삭제해서, 원뜻을 반대로 왜곡시키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중국불교의 특징은 무비판적으로 동아시아불교 전체로 확대되면서, 고려불교 역시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므로 여기 에서 난타사를 阿蘭陁寺로, 그리고 이것을 인도의 나란타사 로 이해해도 큰 문제는 없다.
나란타는 지공이 출가하여 수학한 곳이자58) 붓다가 3개 월 동안 설법한 곳의 대스투파가 존재하는 곳으로,59) 비크 라마쉴라(Vikramaśīla, 超戒寺)·오단타푸리(Odantapuri, 普 利寺)사원과 더불어 인도불교를 대표하는 최대 사찰이자 대 학이다.60)
인도불교사에서 일반적인 인도불교의 최후는, 1203년 비 크라마쉴라 사원의 파괴를 잡는다.61) 이는 인도불교에서 비 크라마쉴라 사원이 차지하는 위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 나 비크라마쉴라 사원은 동아시아 전통불교에서는 인지도가 낮다. 이에 비해서 나란타사는 살아서 이미 신화화되기에 이르는 玄奘에 의해서62) 최대의 권위를 가진 사찰로 알려 지게 된다. 바로 이 점이 회암사의 권위를 나란타와 연결시 키는 진정한 이유가 아닌가 한다.
그런데 동아시아불교에서 가장 권위 있는 나란타사가 바 로 회암사와 같다는 것이다. 이는 곧 회암사가 고려불교의 최고·최대의 성지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사찰은 당연히 修造되고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며, 나옹은 이러한 당연함을 구현한 인물이라는 주장이 성립된다. 이는 대간과 도당의 탄핵에 대한 회암사 측의 종교적인 변증이라고 하겠 다.
「회암사수조기」를 보다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나옹 행장」이나 <나옹비문>과 비교해보면, 우리는 회암사 修造 의 당위성과 聖地주장이 매우 강조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나옹이 회암사의 대대적인 修造를 이유로 탄핵 을 받아 열반에 든 것을 강하게 의식한 것으로 판단된다. 즉 우리는 여기에서 나옹문도들의 위기의식을 읽어볼 수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天寶山檜巖寺修造記」에는, 나옹의 돌연한 열 반 이후 회암사가 해체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기록된 부 분이 있어 주목된다.63) 이는 당시의 분위기가 얼마나 험악 했는가를 잘 나타내준다. 또 회암사가 나옹에 의해서 新創 이라고 할 정도의 대대적으로 중창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修造라고 소박하게 표현한 이유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나옹 의 열반 이후 불어 닥친 회암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회암사 측은 나옹 이외에도 회암사를 보호할 수 있는 방어 기제가 더 요청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철산’과 ‘지공’, 그리고 ‘나란타’였던 것이다.
그런데 ②를 보게 되면, 흥미롭게도 ①의 회암사 修造 당위성과 성지주장이 보다 진일보되어 확정되고 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②의 시대는 세조 때이므로, 나옹의 급거와 관련된 위기의식이 작용할 때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처음에는 위기의식에 의해서 회암사의 당위성이 강조되던 것이, ②에 이르면 위기의식과는 무관하게 이것이 어느덧 정착단계에 이르러 신비화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해 보게 된 다.
②에서 살펴지는 ①과의 차이점은, 회암사가 가섭불 때의 사찰터 즉 前佛時代의 절터로 지공이 측량과정에서 그 유 적을 발견했다는 내용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회암사에 대한 당위성과 聖地인식이 마침내 신비화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불시대 伽藍址라는 것은, 신라불교에서 살펴지는 최고의 성지개념이다.
또 이러한 전불시대의 성지주장은, 신라를 석가모니의 西 天竺을 능가하는 東天竺으로까지 만들었다. 이와 같은 내용 을 우리는 『삼국유사』의 「阿道基羅」조나64) 「朗智乘 雲普賢樹」65) 및 「皇龍寺丈六」이나66) 「迦葉佛宴坐 石」조를67) 통해서 확인해 볼 수가 있다.68) 즉 지공의 삼산 양수 수기가 침소봉대되어, 결국 회암사를 전불시대 가람지 로까지 만들고 있는 것이다.
전불시대 가람지라는 것은, 최고의 성지이자 사찰이라는 명예 및 당위성과 관련된 측면이다. 통일신라의 불국사와 같은 경우도 『佛國寺事蹟』에 전불시대 7처가람지에 준하 는 500禪刹의 첫째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69) 즉 불국사 조차도 전불시대 가람지의 위상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회암사는 고려를 넘어서 조선에 이르러, 마침내 전 불시대 가람지라는 한국불교 최고의 위상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3.회암사 修造의 당위성과 五臺山의 자장
3-1.오대산을 통한 자장의 영향
나옹의 회암사 修造와 관련된 일련의 상황들 속에는, 溟 州의 오대산불교를 통한 자장의 영향이 살펴진다. 이는 나 옹의 회암사 수조목적의 이해와 관련해서 크게 주목되는 부 분이다.
나옹이 첫 번째로 오대산을 찾은 것은 1360년(공민왕 9) 가을로, 원에서 고려로 돌아온 직후의 불확실한 위치 속에 서였다. 그러나 두 번째로 오대산을 찾을 때인 1369년(공민 왕 19) 9월은,70) 지공의 靈骨이 회암사에 도착하고 나옹이 공부선의 주맹이 되는 1370년의 전해이다.
이때 나옹은 이미 공민왕 등의 왕실 귀의를 얻고 있었던 상황인데,71) 갑자기 병을 핑계로 오대산 靈感菴(현 五臺山 史庫址임)으로 은거하는 모습을 보인다.72) 나옹은 混修처럼 은거를 선호했던 인물이 아니다.73) 이런 점에서 나옹이 오 대산으로 은거한 것을, 우리는 당시 집권자였던 辛旽과의 충돌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1370년 나옹의 재등장 은 신돈의 급격한 내리막길과 궤적을 같이하며,74) 신돈은 결국 이듬해인 1371년 주살되기 때문이다.75) 또 신돈과 迦 智山門의 普愚사이에는 강하게 충돌하는 양상도 존재한 다.76) 이는 나옹과 신돈의 충돌에 대해서도 시사받아 볼 수 있는 한 측면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오대산에서 나와 1372년부터 회암사를 수조하는 나옹의 명분은, 오대산의 개산조인 자장의 명분론과 구조적 으로 매우 유사한 모습을 모이고 있어 주목된다.
오대산은 자장에 의해서 개착되어 산 전체가 文殊華嚴聖 地가 되는, 우리나라 최초의 성지를 넘어선 聖山이다.77) 또 오대산 불교는 고려시대에 들어서도 태조의 후원을 필두로 하여 성세를 구가하게 된다.78) 이는 현재 『삼국유사』에서 가장 많은 기록이 남아 있는 곳이 황룡사와 더불어 오대산 이라는 점을 통해서도 판단해 볼 수가 있다. 더구나 황룡사 와 같은 경우는, 「皇龍寺丈六」·「皇龍寺九層塔」·「皇龍 寺鐘芬皇寺藥師奉德寺鍾」·「迦葉佛宴坐石」로 황룡사 종이나 가섭불연좌석과 같은 유물까지도 포함한 것이다. 이 렇게 놓고 본다면, 「臺山五萬眞身」·「溟州(古河西府也) 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臺山月精寺五類聖衆」·「五臺 山文殊寺石塔記」로 되어 있는 오대산이야말로 『삼국유 사』를 통틀어 가장 큰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는 최대의 성 지라고 하겠다.79)
또 오대산과 같은 경우는 나옹이 머물기 1세대 전쯤, 전 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가람이 일신되는 상당한 규모 이상 의 중수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철산·지공과 도 관련이 있는 민지가, 향전의 『오대산사적』을 정리하여 한문으로 바꾸는 과정의 『오대산사적기』기록을 통해서 인식해 볼 수 있다.80) 특히 『오대산사적기』의 처음에 등 장하는 「第一祖師傳記」는 오대산의 개창자 자장에 대한 내용이다.81)
자장은 『삼국유사』에서 원효나 의상과 같은 신라의 대 표적인 고승들을 제치고, 가장 많이 등장하는 비조격 인물 이다.82) 이와 같은 측면으로 인하여 자장에 대한 「제1조사 전기」는 매우 잘 정리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道宣 의 『續高僧傳』「慈藏傳」과 『삼국유사』「慈藏定 律」조의 문제점을 해결해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83) 즉 이를 통해서 우리는, 나옹 당시 오대산에 개산조인 자장에 대한 이야기가 널리 회자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자장과 관련된 남쪽의 보궁은 황룡사· 태화사·통도사의 세 곳이나 있었지만, 북쪽 보궁은 오대산 중대가 유일했기 때문이다.84)
물론 당시 고려왕실의 十員殿좌측 小殿에는, 의상이 발 의해서 도선이 빌려온 제석천이 모셨던 佛牙가, 북송 徽宗 (재위 1100∼1125) 때의 도교숭배와 관련해 배척되는 과정 에서 고려로 전래되어 있었다.85) 그러나 이와는 별도로 문 수에게 전해 받은 자장의 불사리 역시, 전통이라는 넘볼 수 없는 권위를 확보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대산에 자장에 대한 이야기가 풍미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나옹과 같은 경우는 이러한 오대산불교의 정서를 통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자장을 접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과 정에서 자장이 삼국통일 직전의 혼란상을 불교적인 관점으 로 극복하려고 했던 방식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자장과 나옹이라는, ‘삼국에서 통일신라’와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사회적인 격변기 속의 종교수장이 취할 수 있는 공통된 문제의식과 고민의 결과라고 하겠다. 즉 양 자는 단순 모사가 아닌 비슷한 환경 속에서 파생되는 영향 관계인 것이다.
3-2.회암사 수조배경의 유사성 정리
나옹의 회암사 修造에서 시작되는 일련의 내용들은, 자장 의 행적과 구조적으로 매우 흡사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 는 크게 ‘나옹에 의한 것’과, ‘나옹의 열반 이후 위기의식을 느낀 문도들에 의한 것’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두 가지의 층차 모두가 전체적으로 자장의 궤적과 일치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는 양자가 주장배경에는 차이가 있지만, 두 가지 모두 나옹에게서 비롯된 자장의 구 조 속에 존재하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이 중 먼저 나옹에 의한 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자장은 선덕(여)왕 치세의 위기상황에 따른 우환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문수보살이 자장에게 ‘여자를 왕으로 삼아서 덕은 있으나 위엄은 없다’고 말하는 내용을 통해서 잘 나타난다. 그리고 이의 대안으로 제시받는 방법이 바로 황룡사에 9층목탑을 건축하는 것이다.86) 9층목탑의 건립과 관련해서는, 문수보살이 아닌 終南山圓香禪師에게 들은 것이라는 기록도 전하고 있다.87)
9층목탑 건립이 중요한 것은, 이 탑이 세워지게 되면 주 변나라들이 모두 항복하게 되기 때문이다.88) 이는 종교를 이용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으로, 9층목탑은 眞興王 代의 皇龍寺丈六尊像과 眞平王의 용으로 만들어진 天賜玉帶 와 더불어 신라의 三寶로까지 확립된다.89) 즉 이를 통해서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과거의 종교성을 이용한 타당성을 인지해 볼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90)
그런데 나옹 역시 고려 말 격동기의 시대상황과 배불의 확대로 인한 우환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 입원해서 지공 에게 삼산양수지기라는 불교가 길이 흥할 방법을 받아오고 있다. 지공은 고려에서 붓다 및 달마의 재래로까지 평가되 는 고승이다. 이런 점에서 이는 자장이 문수 혹은 원향선사 에게 건탑 수기를 받은 것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나옹은 1372년 갑자기 지공의 수기를 기억하고 회암사의 修造라는 대규모 토목공사에 돌입한다. 회암사는 이후 여· 말선초에 비견될 수 없는 최대사찰로 자리매김하게 된다.91) 이 역시 백제에서 공장 阿非知를 초청해서야 겨우 완성되 는, 동아시아 최대의 황룡사9층목탑의 건조92) 및 이것이 신 라 삼보로 편입되는 것과 구조적인 유사성이 확보된다.
다음으로는 나옹문도들에 의해서 추가되는 것이 있는데, 이를 정리해 보면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회암사에 대한 나옹문도의 인식에, 나옹이 삼산양 수지기를 통해서 고려에 두루 이익을 베풀었다는 주장이 살 펴진다는 점이다.93) 이는 자장이 황룡사9층목탑을 건립하여 삼국통일에 기여했다는 인식과 유사하다.
둘째는 황룡사가 중국오대산 태화지 용의 맏아들이 수호 하는 전불시대 가람지로 불리는 곳이자,94) 가섭불이 참선했 던 연좌석이 있던 성지 중의 성지라는 점이다.95) 그런데 회 암사 역시 최고의 성지로 주장되며, 마침내는 가섭불의 전 불시대 가람지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마지막 셋째는, 한국오대산이 개창되는 이유가 중국오대 산의 문수보살이 자장에게 현신하여, 우리나라의 명주지방 에도 중국오대산과 통하는 문수주처가 존재하므로 찾으라고 말한 것에서 시작된다는 점이다.96) 이것이 원인이 되어 귀 국한 자장에 의해서 한국오대산이 개창되고,97) 이후 성산으 로까지 확대·발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회암사가 인도 의 나란타사와 지세가 통한다는 주장과, 이와 같은 당위성 에 의해서 나옹과 문도들에 의해 대가람으로 면모가 일신하 고 있는 것과 구조적인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이외에도 회암사는 붓다의 후신인 지공의 영골과 사리를 모신 곳이다.98) 이는 자장이 문수에게서 전해 받은 사리를 오대산 중대에 모시고,99) 또 황룡사·통도사·태화사를 통해서 한국불교 사리신앙의 토대를 확보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상호 유사관계가 확보된다. 실제로 지공의 영골은 고려로 전해졌을 때, 공민왕이 직접 머리에 頂戴하고서 이운했을 정도로 존숭 받고 있다.100) 더 흥미로운 것은 이때 붓다의 사리도 함께 이운되고 있다는 점이다.101) 즉 지공의 영골은 붓다의 사리에 필적할 정도의 존숭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 렇게 놓고 본다면, 나옹이 지공의 영골을 회암사에 모시고 이후 사찰을 修造하는 구조는, 자장의 행적과 매우 유사하 다는 것을 인지해 볼 수가 있다.
나옹은 당시 東京인 경주를 방문한 기록이 없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나옹의 행동양식에서 자장과 매우 유사한 구조 가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오대산을 통한 자장 의 영향으로 이해해 볼 수가 있다. 즉 오대산을 통한 자장 은, 나옹의 관점정립과 행동양식에 있어서 매우 많은 영향 을 주고 있다는 말이다.
이상의 유사구조를 통해서, 우리는 지공이 직접 회암사를 지칭한 것도 아닌 삼산양수지기라는 다소 애매한 말이 회암 사로 확정되고 대대적인 修造로 변화하는 과정에는, 오대산 을 통한 자장의 영향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해 볼 수가 있 다. 즉 나옹은 회암사 수조를 통한 새로운 대안제시와 관련 해서, 자장과 유사한 모종의 해법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이다.
4.結論
이상을 통해서 우리는 회암사의 수조배경이 되는 삼산양 수지기가 어떻게 확대되면서 회암사가 신성화되는지, 그리 고 이와 같은 과정에 오대산불교를 통한 자장의 존재하는 측면에 관해서 검토해 보았다.
나옹이 산 고려 말은 중세와 근세가 교차하는 격동기였 다. 또 중국에서는 원·명교체기이자 우리나라는 여말선초의 전환기였다. 그리고 사상적으로는 중세의 지배이데올로기인 불교가 신유교 성리학에 점차 밀려나는 상황이었다. 이 외 에도 민족적으로는 몽고족 우위 상황이 한족의 약진과 더불 어, 몽고에 의한 거대한 세계관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러한 거대한 변화 속에 인도적인 지공불교와 같은 부분까지 존재 한다는 점에서, 나옹의 시대는 매우 특징적이고 복잡한 동 시에 많은 문제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시대배경 속에서 공민왕의 후원에 의해 일약 고려불교의 1인자로 부각하게 되는 나옹에게는, 고려불교를 부흥시켜야만 하는 시대적 요청이 주어져 있었다. 이의 해 결책으로 제시된 유형적인 양상이 바로 회암사의 수조이며, 그 과정에서 명분으로 대두되는 것이 지공의 삼산양수지기 이다. 그러나 공민왕의 돌연한 훙거로 인하여 정국이 급전 환하면서 나옹이 열반하게 되자, 회암사의 수조 당위성 역 시 철산과 지공 및 나란타사와 같은 양상으로까지 확대되게 된다. 또 이와 같은 변화는 결국 조선에 이르러 더욱 신성 화되어, 회암사는 전불시대 가람지라는 한국불교 최고의 위 상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또 나옹의 회암사 수조에 있어서의 명분구조에는, 오대산 불교를 통한 자장의 영향이 살펴진다. 이는 자장이 살던 신 라 말의 상황이 나옹이 처해있던 고려 말과 상호 유사한 측 면에서, 두 사람 모두 불교의 수장으로서 종교적인 해법을 도출해야만 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즉 종교적인 문제해결 방식에 있어서 양자 사이에는 유사구조가 인식되는 것이다. 이는 나옹과 그 문도들의 회암사 수조구조를 이해하는 한 해법이 된다. 즉 우리는 자장과 나옹간의 종교적인 해법의 유사구조와 삼산양수지기에 대한 보다 분명한 이해를 통해 서, 회암사 수조와 관련된 측면을 보다 명확하게 조명해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