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al Search Engine
Search Advanced Search Adode Reader(link)
Download PDF Export Citaion korean bibliography PMC previewer
ISSN : 1598-1142(Print)
ISSN : 2383-9066(Online)
Journal of architectural history Vol.23 No.2 pp.81-90
DOI : https://doi.org/10.7738/JAH.2014.23.2.081

A Study on the Hermitage of Gimuryon-sa

Youn-soo Do*, Dong-soo Han
Corresponding Author : doyounsoo@gmail.com
February 15, 2014 April 9, 2014 April 20, 2014

Abstract

This study aims to comprehend architectural peculiarity of the hermitage as the one of Buddhist architectural type in Korea. Although it has not defined properly, it has been demanded the architectural respondence according to the environment of times since the introduction from other countries. Gimryong-sa temple, founded in 1635, and the hermitages are the most appropriate objects for analysis because there are many documents still remained. It is possible to find out that there are some architectural peculiarity after review of the document and the field survey about Geumseon-am(金仙庵=金仙臺), Hwajang-am(華藏庵), Daeseong-am(大成庵), Yangjin-am(養 眞庵). In the late of Joseon Dynasty, the group of buddhist proceeded the economical development and the extension of authority based on the family culture. The hermitage functioned for the self-discipline, the meeting of family, the enshrinement of portraits, the memorial ceremony of family at this point. In response to that, the architectural space which had combined residence and rite became preferred such as Inbeopdang(因法堂). And a Large Ondol room called Daejungbang(大重房) was applied and Ru(樓)-Maru was added as the place for rest.


김룡사(金龍寺) 산내암자(山內庵子)에 관한 연구

도 윤수*, 한 동수
한양대학교 건축학과 박사과정
한양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초록


    1.서 론

    1-1.연구 배경 및 목적

    한국건축사에서 불교건축에 관한 연구 성과는 주로 사 찰의 배치에 관한 연구와 주불전의 의장, 구조 등에 관 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는 반면 요사(寮舍) 및 암자 (庵子) 등과 같은 종속 건축유형에 대한 연구는 다소 미 진한 면이 있다.1) 그 이유는 이들 건축물이 종교건축의 상징성보다는 보편적인 거주의 기능물로 파악되기 때문 에 종교건축으로서 평가받지 못하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요사나 암자의 경우 규모나 구조가 소략하고 쉽게 쇠락하면서도 빈번히 재건되거나 중창되기 때문에 초창 당시의 원형을 파악하기 힘들고 비교적 사찰 내 주요 건 축물에 비해 연대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아 다른 불전건 축과 연계된 고찰이 어려운 면이 있다.

    이러한 여건에서도 요사에 대해서는 일정 정도 연구 성과가 발표되고 있다. 개괄적인 요사와 관련된 연구성 과를 살펴보면 중정을 중심으로 불전과 양쪽의 요사가 상호 연계된 중심공간 구성을 살펴본 연구와 요사를 승 려의 수행공간으로 파악하고 생활의 변화에 따른 공간의 대응을 살펴본 연구, 고려말 선원청규와 관련된 승원 구 성의 고찰 등을 들 수 있다.2)

    그러나 암자에 대한 연구는 입지특성3)과 개별 건축물 의 평면유형4)에 대한 접근은 시도되었지만 건립배경이나 당대의 용도와 기능을 파악하고 이를 통해 건축적 형태 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이뤄지지 않아 암자라고 하는 건 축유형의 개념정립도 아직까지는 다소 부족한 면이 있다.

    본 연구는 ‘암자라는 불교건축의 한 유형을 건축적으 로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라는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이 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례에 대한 종합적인 분 석이 요구되지만 현재까지 암자에 대한 정의조차 명확하 지 않은 상태에서 보편적인 암자의 특성을 도출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에 소수의 사례라도 다각적인 분석을 통 하여 일정정도의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 급선무라 판단하 여 문헌기록과 건축물의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김룡 사의 산내암자를 대상으로 건립목적과 유지과정을 살펴 보고, 이를 통해 당시 암자에 요구되던 기능과 그에 따 른 건축형태를 고찰해보도록 한다.

    1-2.연구대상 및 방법

    본 연구의 대상은 문경 김룡사의 산내암자로 한정하였 다. 김룡사는 기존의 연구가 많지는 않지만 조선후기 사 찰의 갑계활동을 바탕으로 급성장하여 일제강점기에는 31본산의 지위에 있던 사찰이다. 18세기에 화엄학으로 높이 평가 받는 괄허 취여(括虛取如, 1720∼1789)의 활 동기반이면서 18∼19세기 진영제작 화승집단인 사불산화 파(四佛山畵派)의 근거지로 조선후기 문파불교의 특징을 잘 보여주어 불교사적으로나 회화사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최근에는 방대한 양의 불사관련 문헌기록 을 바탕으로 김룡사와 산내암자의 영건활동을 살펴보는 연구가 진행되어 건축사적 의미도 검토되었다.5)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암자 중 임진왜란(1592∼1598) 이전 즉 17세기 이전의 건물은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6) 조선후기의 암자라도 창건과 중창과정이 기록되어 있는 사례 역시 널리 알려진 바가 없다. 이런 상황에 비춰볼 때 한 사찰과 그 사찰의 산내암자에 대한 기록이 풍부하 게 남아있어 상호 교차검토가 된다면 개별 암자의 발생 과 변화과정 뿐만 아니라 여러 암자들의 상호관계, 사찰 과 암자의 관계 등도 입체적으로 파악될 것으로 기대된 다. 이러한 면에서 김룡사와 산내암자에 관한 기록들은 충분히 분석해 볼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연구방법은 문헌조사와 실측조사가 병행되었다. 문헌 조사는 각 암자의 창건과 중창과정을 연대기적으로 재구 성하여 암자들이 발생하고 분화되어가는 과정을 살펴보 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실측조사를 통해서는 문헌으로 파악한 암자의 건립배경과 기능이 어떤 건축적 형상으로 나타나는지를 검토하였다. 김룡사의 개별사례를 검토하기 앞서 선행학습의 차원에서 암자의 건축유형과 관련 용어 에 대해 별도로 살펴보도록 한다.

    본 연구에서 검토한 기록물은 직지사성보박물관 소장 『史要蒐集』(1913)에 대부분 수록되어 있고, 일부 기록 물은 『大成庵華藏庵養眞庵金仙臺兜率庵史料』 (1930년대) 및 『한국사찰전서』, 『한국불교전서』등 에서도 발췌하였다. 각 암자별 기록물은 금선대가 3건, 대성암이 9건, 양진암이 11건, 화장암이 11건이다. 기록 물의 현황 및 해제는 기존연구7)로 대신한다.

    2.암자의 유형과 용어 검토

    암자에 대한 여러 사전의 정의를 보면 몇 가지 공통된 개념이 제시되는데 첫째는 소수인원의 수행을 위한 소규 모 건축물 또는 임시 거처라는 의미가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기능적으로 수행이 강조되는 반면 법회 등 예불의식은 언급되지 않는 다는 점이다.8)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암자의 경우 위의 사전적 정의와 는 다소 다른 모습이 나타나는데 우선 규모측면에서 보 면 작은 거주용 건축물 1동으로 구성된 경우도 있지만 불전과 요사가 별도로 갖춰진 경우도 다수이며, 기능적 으로도 소수의 수행뿐만 아니라 대중적 불교의식이 치러 지는 곳도 상당수에 이른다. 이와 같이 사전적 정의와 실상의 괴리는 인문학적으로나 건축사적으로 시대별 기 능변화를 감지하지 못한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기존 암자의 유형분류는 건물의 동수에 따라 소암자 (一자형: 인법당형), 중암자(ㄱ자형, 1동에 불전과 요사 구분), 중대형 암자(2∼3동), 대형암자(독립된 불전설치, ㅁ자형 배치)로 구분하거나9) 불전(佛殿)의 독립 여부에 따라 ‘독립불전의 배치유형’과 ‘인법당을 지닌 암자의 배 치유형’으로 구분하고10)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부분은 불전의 설치가 암자의 유형구분에 큰 의미를 가지고 있 다는 점이다. 불전이 독립되어 있는 암자 중에는 은해사 백흥암이나 선운사 참당암처럼 소속된 사찰보다 역사가 오래되거나 독립된 사찰이었다가 암자로 귀속된 경우가 다수이고, 봉정사 영산암과 같이 다불전의 경향 속에서 본사에서 소화하지 못하는 불전이 별원과 같이 조성된 사례도 있다. 반면에 통상 인법당(因法堂, 人法堂)이라 불리는 암자들의 경우 사찰에서 별도의 수행 또는 기도 처로 건립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독립된 불전의 조성 여부에 따라 암자의 유형을 구분하는 것은 기능과 건립 배경 측면에서도 어느 정도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 러나 승방(僧房)에 불상을 봉안한 형태를 정의하는 ‘인법 당’이라는 표현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인법당은 ‘불전이 없는 작은 절에서 중이 거처하는 방 에 불상을 봉안한 곳’11)으로 정의되지만 중국과 일본은 물론 우리나라 승려의 문집을 총괄해 놓은 한국불교전 서 에서도 용례가 확인되지 않는다. 한국고전번역원의 D.B.에서는 강항(1567∼1618)의 기문12)에 이 단어가 쓰 이지만 이는 건축물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승려의 당호 로 보인다. 이렇듯 ‘인법당’이라는 단어의 용례가 확인되 지 않아 그 기원과 출전이 상당히 의구스럽지만 문화재 설명과 논문, 실측조사보고서에서는 별다른 고증 없이 위의 사전적 정의로 통용되고 있다.13)

    인법당이 승려의 거처에 불상이 봉안되어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면 옛 문헌에서는 ‘승당(僧堂)’이 동일한 형태의 건축물로 파악된다. 송대 선종사찰의 승당과 중료(重寮) 에는 ‘성승(聖僧)’이라 표현한 불보살상이 봉안되었고14) 1254년에 간행된 고려판중첨족본선원청규(高麗板重添足 本禪苑淸規) 에 승당 내 성승상을 공양하는 시자의 직무 가 규정되어 있다.15) 고려말 오대산 상원사의 승당도 승 려의 거처로 불상을 봉안하고 있었으며16), 조선시대에 들어 임진왜란 직후인 1600년에 기록된 운주사의 승당은 8칸의 대형 온돌방으로 불단이 마련되어 있었다.17) 이들 은 사찰 내 승당이라 부르는 건축물에 대한 기록이지만 승려의 거처와 불단의 설치라는 두 가지 요소만 본다면,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승당에 불단을 마련하는 것 은 다분히 보편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승당은 일반적으로 요사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조선후기 요사에 관한 기존연구18)에서 수행공간인 승당과 생활편의시설인 요사는 기능적으로 다른 시설로 규정하고 있다.

    이상의 고찰을 바탕으로 인법당이라는 용어를 재고해 보면 수행공간인 승당이라는 건축물의 형태에 대해 승당 과 요사의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승당을 대체하는 새로운 건축적 개념으로 인법당이라는 단어가 제시되었을 가능 성이 있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인법당이라는 용어의 전거와 용례가 명확하지 않은 면이 있어 암자의 건축적 유형을 지칭하는 단어로서 적절하다고 하기는 어 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자의 경우 수행공간인 승당 과 편의시설인 요사가 한 건물로 통합되어 나타나고 있 어 단순히 ‘승당’이라고 표현하기도 애매한 부분이 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이미 불교계에서 널리 통용되고 각 종 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인법당’이라는 단어를 새로운 용어로 대체하여 제시하기보다는 ‘불상이 봉안된 승방’이 라는 단순한 형태적 의미가 아닌 ‘불전과 승당, 요사의 기능이 하나의 건축물로 통합되어 나타나는 건축유형’으 로 재정립하여 사용하기로 한다.

    3.김룡사 산내암자 연혁과 현황

    3-1.김룡사의 창건과 문헌 속의 소속암자

    경북 문경시에 소재하고 있는 김룡사는 1624년 혜총 (惠聰)선사가 제자 광제(廣濟), 묘순19)(妙淳), 수헌(守軒) 과 함께 창건한 사찰이다.20) 이후 1643년 화재로 대부분 의 건물이 소실되어 1649년부터 1670년까지 중창이 진행 되고, 그이후로 개별 건축물의 중수와 중창이 반복되지 만 화재 등의 재난 기록은 보이지 않아 20세기까지 큰 틀은 유지된 것으로 파악된다.

    17세기 중반의 창건과 17세기 후반부터 진행된 중창과 정은 김룡사적(金龍事蹟) (1744)의 사적기(寺蹟記) (1725)와 추록(追錄) (1744)에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그 속에는 다수의 암자들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 어 있다. 사적기 와 추록 에서 확인되는 김룡사의 소 속암자21)는 모두 14개소이며, 이중에서 산내암자는 백련 암(白蓮庵), 중암(中庵, 후대 華藏庵으로 개칭), 운수암 (雲水庵), 금선암(金仙庵=金仙臺), 내원암(內院庵), 취진 암(聚眞庵), 양진암(養眞庵), 신장암(信莊庵), 명적암(明 寂庵) 등 9개소가 언급되고 있다. 이후 19세기에 들어 대성암(大成庵)과 도솔암(兜率庵), 상원암(上院庵)이 새 로 건립되어 산내암자는 문헌상 모두 12곳으로 확인된 다. 이들 중 운수암, 내원암, 취진암, 신장암은 개별 기록 이 없으며, 그 위치조차 확인되지 않는다.

    건축물이 남아있어 유지되고 있는 암자는 대성암과 양 진암, 화장암, 금선대 등 4곳으로 이들은 모두 대중방22) 에 불단이 구성되어 있다. 한편, 도솔암과 상원암은 폐사 되어 터만 확인된다. 김룡사와 암자, 암자터를 지도상에 서 확인해보면 <Fig.1>과 같다.

    3-2.금선대

    금선대는 여러 기록에서 신라의 운달조사가 창건하였 다고 하지만, 그 내용을 좀 더 살펴보면 무영(無影)이 주 도한 1752년 삼창(三創)이 실질적인 창건으로 파악되며, 이후 1817년부터 1822년까지 지붕보수와 불상개금, 탱화 조성, 단청불사가 진행된 것으로 확인된다.23) 1864년에는 염불계의 활동을 바탕으로 혼성(渾性)이 쌀 100여두와 금 삼백(냥)을 마련하여 암자를 중수하였다.24) 19세기 이 후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사중의 증언25)에 의하면 1965년경 당시 김룡사 주지인 성철스님의 주도로, 폐허 로 남아있는 건물을 해체하고 수습된 부재를 재활용하여 현재와 같이 축소된 규모로 고쳐지었다고 한다.23

    암자가 위치한 곳은 운달산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형성 된 중암골 옆 높은 능선부로 정면과 좌우측면이 모두 가 파르고 정면으로 계곡이 한 눈에 들어오는 자리이다. 김 룡사로부터 약 2.4km 떨어져있다. 대지는 막돌쌓기를 한 2단 석축으로 조성되었고, 이곳에 ‘금선대(金仙臺)’ 편액 이 걸린 인법당 1동과 부엌 겸 창고 1동이 배치되어 있 다. 아래쪽 진입로상에는 화장실이 있다. 인법당 주변으 로는 조선후기로 편년되는 수파문과 집선문 계열 와편이 다수 확인되지만 17세기 이전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현 건축물은 20세기에 중수되어 창건 당시의 모습은 확인할 수 없지만 증언에 따르면 중앙에 대중방을 두고 양쪽으로 방과 부엌이 배치되는 평면형식은 과거와 같은 제도라 한다. 중앙의 대중방은 3×2칸 규모로 후면에 불 단이 구성되어 있으며, 불단을 바라보고 왼쪽에는 신중 단이 간략하게 마련되어 있다. 건물의 전면에는 툇마루 가 구성되어 있고 둥근기둥에 연봉이 새겨진 초익공이 결구되어 있다. 전면과는 대조적으로 측면과 후면은 모 두 모기둥에 납도리로 결구되어 있어 건물의 정면에만 의장성이 강조되어 있다. 이러한 모습은 금선대 뿐만 아 니라 다른 암자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금선대는 20세기 이후 선방(禪房)으로 사용되고 있지 만 19세기에는 삼문수학(三門修學)26) 중 염불수행이 활 발하게 이뤄졌던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룡사금선암 염불계기 (1822)27)에는 혜월(慧月)이 1818년 김룡사 대 성암에서 염불계를 조직한 후, 1822년에 금선대로 옮겨 염불수행을 지속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의 금선대 가 현재보다 큰 규모였다고 해도 300명 가까운 계원을 동시에 수용하지는 못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상당수의 인원이 금선대를 근거지로 삼아 염불수행을 진행한 것은 사실로 판단된다. 금선대의 대중방은 이러한 계원의 집 회장소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3.화장암

    화장암은 양진암과 함께 김룡사의 암자 중 오랜 역사 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사적기 에는 ‘중암(中庵)’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창건 연대는 확인되지 않지만 18세기의 중창기록은 다수 확인되고 있다. 기록을 통해 화장암의 연혁을 정리해보면 1758년 중수시 암자의 이름을 중암에 서 화장암으로 개칭하였고,28) 1768년에는 영파 성규(影 波聖奎, 1728∼1812)가 스승인 함월 해원(涵月海源, 1691∼1770)의 진영을 봉안하기 위해 영당(影堂)을 신축 하였다.29) 1868년에는 지장보살상을 주존으로 하는 중단 (中壇)이 설치된다.30) 이러한 중단의 설치는 암자가 과 거 선종사찰의 승당처럼 성승상을 봉안한 개개인의 수행 공간에서 점차 불전과 같이 의례기능을 수용하는 과정으 로 이해된다. 20세기 이후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증 언에 의하면 18세기에 건립된 영당은 1960년대에 퇴락하 여 철거하였고, 1980년대에 그 자리에 요사채를 건립하 였으며, 화장암의 본채인 인법당은 1970년대 말 건물이 기울어져 드잡이로 수리하면서 전면의 차양칸을 철거하 였다고 한다.

    암자가 위치한 곳은 중암골과 운달계곡이 합류하는 지 점의 북서쪽 산기슭으로 김룡사로부터 약 1.4km 떨어져 있다. 계곡의 양안에 3m 높이의 막돌쌓기한 석축으로 남 동향의 평탄지 3단이 조성되어 있다. 건물이 들어서 있 는 곳 외의 다른 평탄지는 모두 암자에서 경영하던 경작 지로 증언되고 있다. 인법당 주변으로는 조선중 후기로 편년되는 집선문 와편과 수파문 와편이 다수 산포되어 있지만 경작지로 증언되는 평탄지에서는 극히 소수의 와 편만 확인되고 있어 건물지는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45

    현재 화장암은 3단의 평탄지 중 중단에 건물이 들어서 있는데 ‘중현문(重玄門)’이라 편액된 3칸짜리 대문채 1동, ‘화장암(華藏庵)’ 편액이 달린 인법당 1동, 요사 1동, 해 우소 1동이 남아 있다. 인법당은 전체 6×2.5칸 규모로 홑처마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중앙에 3×2칸의 대중방을 두고 양옆으로는 2×3.5칸 크기의 부엌과 1×2칸의 방이 배치되어 있다. 건물의 전면은 툇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대중방에 설치된 불단은 벽 뒤쪽으로 함입되어 있는데 원래는 앞쪽으로 돌출된 형태였다고 한다. 대중방 오른 쪽의 온돌방은 1×1칸 규모의 방 2개를 1970년대에 벽을 터서 하나로 재구성한 것으로 증언되고 있으며, 현재도 그 흔적이 육안으로 확인된다. 부엌에는 대중방쪽으로 2 기의 아궁이가 있고 상부에는 다락이 구성되어 있으며, 찬마루를 통해 툇마루로 출입이 가능하다. 건물에 쓰인 기둥은 전면과 부엌쪽 측면은 둥근 기둥으로, 방쪽 측면 과 후면은 모기둥으로 처리하였다. 금선대와 마찬가지로 건물의 전면에만 익공이 구성되어 있다. 다만 금선대는 초익공으로 연봉만 초각된데 비해 화장암은 이익공으로 살미첨차에 연봉과 연화를 위아래로 초각한 차이가 있다.

    화장암은 현재 불휴스님의 폐관 수련처로 사용하고 있 지만 18세기 중반에는 화엄강론이 이뤄지던 곳이다. 기 록3)에 의하면 1753년에 환응당(喚應堂)32)이 경북 예천 명봉사에서 중암으로 옮겨와 강(講)을 열었으며, 이즈음 에 이루어진 개칭의 배경도 화엄경의 화장(華藏)33)을 취 한 것이라 하였으며, 1765년에는 괄허의 주도로 <화장회 상도(華藏會上圖)>34)를 조성하여 봉안하였다.35) 이러한 모습을 통해 당시 화장암은 삼문수학 중 강론 특히 화엄 강론의 장소였음을 알 수 있다. 화장암의 건축제도는 금 선대와 동일하게 ‘대중방+방+부엌’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공간의 쓰임은 화엄강론을 위한 강당과 염불계의 집회장 소로 상이한 모습이다.

    3-4.대성암

    대성암은 김룡사의 산내암자 중 비교적 늦은 시기에 창건되었다. 기록을 보면 1799년 겨울부터 영월(穎月)의 주도로 김룡사 청하전(靑霞殿)을 이건하면서 대성암의 창건이 시작되지만 1807년에서야 기와를 새로 굽고 단청 을 칠하는 등 마무리가 이루어진다.36) 이때 불사를 마무 리 한 사람이 후에 대성암과 금선대에서 염불계를 조직 한 혜월이다. 이후 1886년 대대적인 중수가 진행된 것으 로 기록37)되어 있다. 대성암의 모체가 되는 청하전은 별 도의 기록이 확인되지 않지만 대성암초창기 의 말미에 청하전의 옛 기록을 보니 개창이 3번 정도 되고 초창상 량문은 1740년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대성암의 인법당은 이미 3차례 이상 중수된 청하전을 이건하여 다시 여러 차례 중수하였는데 이 과정이 단순한 수리를 의미할 수 도 있지만 현재 모습으로는 기록되지 않은 증개축이 여 러 번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암자의 위치는 김룡사에서 불과 500m 정도 떨어진 곳 으로 운달계곡과 양진암골이 합류되는 지점의 둔덕부이 다. 근래까지 계속 부지를 확장하여 원지형과 석축은 확 인하기 힘들다. 현재 남아 있는 건축물은 ‘조계문( [= 曹]谿門)’이라 편액된 솟을대문 형식의 대문채 1동, ‘침계 루(枕溪樓)’와 ‘대성암(大成庵)’ 편액이 걸려있는 인법당 1동, 해우소 1동, 산신각 1동이 있다. 인법당은 증언에 의하면 4동이 서로 연결된 ‘ㄹ’자형이었다고 하며, 현재 는 요사와 연결된 끝부분이 철거되어 3동이 결합한 ‘乙’ 자 형태를 하고 있다. 건물의 각 부분은 건축적인 형태 와 기능이 각기 다르게 구성되어 있다. 가장 북쪽의 침 계루 부분은 접대공간과 주지실로 사용되고 있으며 루의 아래 부분도 방을 꾸며 사용하고 있다. 침계루의 서쪽에 서 아래쪽으로 구성된 대중방 부분은 3×2칸으로 불단은 벽체 뒤쪽으로 함입되어 있다. 이러한 함입된 불단은 화 장암과 양진암에서도 확인되는데 모두 근대기에 대중방 내부를 넓히기 위해 변경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는 후면 쪽마루와 불단 구성부분에서 보이는 이질감에서도 알 수 있다. 남쪽의 요사부분은 1×2칸, 1×1칸의 방 4개와 부엌 으로 구성되어 있다. 2칸 규모 온돌방의 경우 앞뒤로 모 두 문이 구성되어 있고 방 중간부분에 벽체 흔적이 있어 화장암의 승방과 마찬가지로 1칸 규모의 방 두 개를 터 서 재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부엌은 최근까지 개보수가 진행되어 원형을 파악하기는 힘들다. 대중방과 요사의 승방부분에는 전후면에 모두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건물의 의장을 보면 침계루부터 요사부분까지 공통적 으로 전면에만 익공을 올리고 후면은 도리집으로 구성하 고 있지만 침계루와 요사에는 이익공이, 대중방 부분은 초익공이 구성되는 차이가 있다. 사용된 기둥의 형태도 침계루와 요사의 경우 정면에는 둥근 기둥을, 후면에는 모기둥을 사용했지만 대중방은 전후면 모두 둥근 기둥을 사용하고 있다. 지붕의 높이는 불단이 설치되어 있는 대 중방 부분이 가장 높고 침계루와 요사 부분은 거의 동일 하여 대중방 부분이 불상이 봉안된 가장 높은 위계의 공 간임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익공의 격식에서는 대중 방보다 침계루와 요사가 더 높이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이건된 청하전과 증축부의 차이로 판단되며, 19세기에 증축된 부분이 좀 더 장식적 요소가 강하게 표현된 것으 로 보인다. 즉, 대중방이 김룡사에서 이전해온 청하전 본 채부분이고 침계루와 요사는 후대 증축부로 추정된다.

    대성암에는 화장암처럼 별도의 진영각이 건립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증언에 의하면 침계루의 북쪽에 구 성된 3×1칸 규모의 창고와 욕실부분이 원래 진영을 봉안 하던 곳이라 한다. 침계루 외각에는 청판에 태극문양이 단청되어 있는 분합문이 있는데, 2006년38) 당시에는 침 계루 내부의 벽장 쪽에 설치되어있던 것이다. 즉 태극문 양의 분합문이 설치된 벽장이 진영을 봉안하던 감실로 판단된다. 그러나 후대 진영들이 관리상의 문제로 박물 관으로 이안되고 나서 감실은 창고로 변형되었고, 이곳 의 분합문도 침계루 외곽으로 옮겨졌다.39)

    대성암은 금선대의 기록을 통해 1818년부터 1822년까 지 염불계가 활동한 상황이 파악되지만 그 외의 용도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몇 가지 건축적 특성을 통해 유추해 볼 수는 있다. 대성암은 김룡사 암자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대중방을 가지고 있으며, 침계루라는 대 형 누마루와 비교적 많은 승방이 구비되어 있다. 봉안된 진영의 수도 가장 많았으며, 진영봉안 공간 역시 가장 넓게 마련되어 있다. 이러한 건축적인 면 외에도 금선대 와 화장암에서는 보이지 않는 시판(詩板)이 침계루에 걸 려 있다. 이런 시판은 통상 사대부들이 유람 후 남긴 시 를 모아서 제작한 것이다. 이상의 모습들을 통해 대성암 은 진영봉안에 따른 문중의 집회 장소로 사용되면서, 접 객공간으로도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3-5.양진암

    양진암은 사적기 에 터만 남아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1725년 이전에 창건과 폐사를 이미 한 차례 거친 것으로 파악되는데 이와 관련된 세부내용은 기록마다 조금씩 차 이를 보이고 있다. 이를 후대에 권상로(1879∼1965)는 ‘1658년 설영이 창건하고, 1749년 환월선사 중건, 1771년 무영선사 중건, 1822년 해운 경봉 양 선사 중건, 1840년 정봉화상 중건’으로 정리하였다.40) 이후 1927년에 대대적 인 수리가 진행되고 1980년대 이후 시멘트 블록으로 건 물 후면부를 크게 중축하였다.89

    양진암이 자리한 곳은 대성암에서 서쪽, 즉 양진암골 상류방향으로 600m 정도 떨어진 곳이다. 가파른 산기슭 에 축대를 쌓아 대지를 조성하였으며, 대지와 건축물 모 두 남동향을 하고 있다. 양진암의 본채인 인법당과 보광 전 등 2동의 건축물이 들어서 있는데 보광전은 1980년대 에 산신각이 있던 자리를 넓히고 신축한 건물이다. 별도 의 대문채는 남아 있지 않다. 인법당의 평면 구성을 보 면 ‘누마루-대중방-부엌’이 결합되어 있으며, 누마루가 돌출되어 형태적으로 ‘ㄱ’자형을 하고 있다. 누마루에는 ‘정해루(靜海樓)’라 편액이 걸려있다. 대중방을 제외한 정 해루와 부엌부분은 변형이 심하여 평면의 원형이 거의 남아 있지 않으나 부분적인 흔적과 증언을 토대로 재구 성해 보면 정해루는 원래 2×2칸의 누마루로 3면이 개방 되어 있었고 후면은 벽을 구성하여 진영을 봉안하던 공 간이었다. 부엌부분은 기존의 대중방 오른편의 온돌방과 부엌을 합쳐 현재와 같이 2×2칸으로 확장한 것이다. 대 중방 부분은 3×2칸으로 화장암과 동일하게 전면의 툇마 루와 후면 벽체에 함입된 불단을 가지고 있다. 대중방 양 옆으로 1칸 규모의 온돌방 4개가 배치되어 있었지만 왼쪽의 방들은 2칸을 터서 하나의 방으로 개조하였고, 오른쪽의 방은 부엌과 합쳐졌다. 부엌의 오른쪽(북동쪽) 으로는 5×7m 규모의 내실(內室)이 증축되어 있다.

    건물의 의장을 살펴보면 대중방 전면과 정해루의 대중 방 방향에는 이익공이 결구되어 있으나 정해루 전면과 남서쪽 측면, 대중방의 후면과 부엌 부분 측면은 도리집 으로 구성되어 있어 불상이 봉안된 대중방 앞쪽만 장엄 을 한 것으로 보인다. 기둥의 형태는 대중방 전면과 정 해루 부분은 둥근 기둥을 쓰고 나머지는 모기둥을 사용 하였다. 지붕의 높이는 대성암과 동일하게 불상이 봉안 된 대중방 부분이 높게 처리되어 있다.

    양진암의 건립목적과 활용모습은 기록상에서 확인되지 않지만 건축형태가 대성암과 상당히 유사한 부분이 많고 정해루에도 침계루와 마찬가지로 시판이 걸려있다는 점, 암자의 위치가 김룡사와 지근거리에 있는 점에서 대성암 과 유사한 집회와 접객의 기능이 큰 비중을 차지했을 것 으로 추측된다.

    4.김룡사 산내암자의 기능과 건축형태

    금선대, 화장암, 대성암, 양진암의 문헌내용과 현상, 사 중의 증언을 취합해 보면 김룡사 산내암자의 기능은 크 게 수행, 진영봉안, 접객 및 집회로 축약할 수 있다. 이 러한 기능들은 각 암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부분도 있고 개별적으로 특화된 기능도 있다. 또한 각 암자와 본사인 김룡사와의 관계에서도 공통된 기능과 특화된 기 능이 대별되고 있다.

    4-1.수행처의 기능

    암자의 기원이 수행자의 임시거처로 정의되는 만큼 수 행처의 기능은 기본적인 암자의 고유기능이라 할 수 있 다. 그러나 조선후기 들어 확립된 삼문수학에 근거한 수 행의 방법과 그에 따른 건축형태는 일반적으로 참선만 생각하는 불교의 수행법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금선대와 대성암의 경우 앞서 살펴보았듯이 염불수행 의 장소였다. 이런 염불수행에는 흔히 염불당이라 부르 는 공간에 다수의 인원이 모여 염불을 외는 행위가 이뤄 지고 이에 따른 건축적 대응으로 대방건축이 주목되었 다.41) 그러나 기존연구의 대방건축과 김룡사의 경우는 조금 다른 측면이 있다. 우선 19∼20세기 서울 경기지역 사찰의 대방은 암자보다는 사찰에 형성되는 경우가 절대 적이지만 김룡사의 경우 본사에서 염불계가 조직된 정황 은 확인되지 않으며, 산내암자에서만 염불계의 결성이 확인된다는 점이다.42) 또 한 가지 차이점은 서울경기지 역의 경우 불전 전면, 누의 위치에 대방건물이 세워지지 만 금선대와 대성암에서는 법당과 승방, 요사가 하나로 결합된 인법당 자체가 그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이다. 이 러한 차이점은 지역적 차이일 수도 있지만 사찰의 규모 와 관련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김룡사처럼 산내암자를 다수 거느리고 있는 대형사찰은 염불방이라는 새로운 기 능을 이미 정형화된 배치를 가지고 있는 본사에서 수용 하지 않고 암자를 통해 해소하는 반면, 단독으로 경영되 는 경우가 많은 서울 경기일원의 소형 사찰은 그 기능을 사찰 내에서 수용하면서 누의 기능과 형태가 변화한 것 으로 보인다.

    금선대와 대성암이 염불수행의 장이었다면 화장암은 삼문수학 중 강학의 장소였다. 17세기에 중암으로 불리 던 화장암은 18세기에 들어 환응당과 괄허당에 의해 화 엄강론의 중심지로 변모하였다.43) 이 시기는 본사인 김 룡사에 이미 대웅전을 비롯하여 극락전, 명부전, 선승양 당, 범종루, 회전문, 홍화문(일주문) 등 많은 건축물이 세 워지며 대형 사찰로 성장한 시점으로 강학공간 역시 구 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엄강설이 암자에서 진행되는 모습은 당시 암자가 단순히 외딴 곳 의 임시수행처가 아니라 개별적인 수행방법론에 따라 특 화된 수행처로 분화하였음 보여주는 것이다.

    수행처로서의 기능과 관련하여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염불수행 공간과 강학 공간이 건축형태적으로 거의 동일 하다는 점이다. 물론 두 암자가 서로 다른 성격으로 불 단을 조성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3×2칸 규모의 대형 온돌 방이라는 형태는 서로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후기 대중방 또는 대방의 확산이 특정 수행방법에 적합해서가 아니라 다양한 행위를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융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융통성은 온돌과 툇마루로 사계절에 대응할 수 있고 다수의 인원 을 수용할 수 있는 무주공간(無柱空間)이라는 건축형태 에서 확보된 것이다. 대중방 내 불단위치의 이동도 이러 한 대형실내공간을 지향하는 경향으로 해석된다.

    4-2.진영봉안의 기능

    김룡사에는 진영을 봉안한 기록이 확인되지 않지만 화 장암, 양진암, 대성암에는 많은 수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 었다. 산중영각추원록(山中影閣追遠錄) (1910, 직지사성 보박물관 소장)에는 화장암 20점, 대성암 33점, 양진암 25점의 봉안목록이 기록되어 있다. 세 암자 중 화장암에 만 영각이 별도로 세워졌고 대성암과 양진암에는 화장암 에 없는 건축장치인 누마루에 진영봉안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누마루에 진영이 봉안되는 모습이 문헌으로 기록 되어 있지는 않지만 앞서 대성암에서 살펴보았듯이 누마 루의 한쪽 면에 감실형태로 진영봉안공간을 마련한 것으 로 확인된다. 조선후기 이전의 진영봉안은 조사선의 전 통 속에서 개산조 또는 중흥조를 중심으로 이뤄지지만 법통설이 강화되고 승려사회 내 문중문화가 발전하는 조 선후기에 들어서는 해당 문중의 법맥을 표현하는 수단으 로 여러 인물의 진영이 다수 제작되고 봉안된다. 이러한 진영봉안의 의미 변화는 이전 시기와는 다른 양상으로 조선후기 불교건축의 새로운 변화라 할 수 있다.44)10

    4-3.접객 및 집회의 기능

    대성암과 양진암에는 불사관련기록 외에도 많은 시판 이 걸려있고 이에 대한 목록이 사요수집 에 별도로 취합되어 있다. 시판은 시회(詩會)를 열고 그곳에서 작성 한 시를 편액으로 제작한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승려 보다 사대부의 시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내용적으로는 대성암과 관련된 시가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시회와 시판은 조선시대에 크게 유행하는 사대부들의 유 람문화를 보여주는 것이다.45) 시회나 유람객의 방문은 사찰에 적지 않은 피해를 주기도 하지만 이들이 사찰의 사회활동과 경제활동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시판의 시들을 보면 시기적으로는 5월과 9월을 선호하고 공간적 으로는 물소리가 시원한 계곡이나 경관이 좋은 누각을 선호하고 있다. 여기에 따른 접객기능이 사찰에서는 대 웅전 전면의 누각에서, 암자의 경우 부설된 누마루에서 수용된 것으로 판단되며 김룡사의 경우 대성암과 양진암 이 이러한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파악된다.46) 반면에 화 장암에는 시판이나 관련 시문(詩文) 또한 확인되지 않는 데 이는 화장암에 별도의 누각이나 누마루가 설치되지 않은 건축적 상황으로 설명된다.

    5.결 론

    지금까지 김룡사 산내암자들의 건립과정 및 기능 그리 고 건축형태와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이를 통하여 조선 후기 김룡사 산내암자의 특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후기 김룡사 산내암자의 기능은 크게 수행, 진영봉안, 집회 및 접객으로 축약되고 이에 대응되는 건 축공간으로 대중방과 누마루가 발달하였다. 수행처 측면 에서는 삼문수학의 확산으로 다양한 수행방법이 수용되 면서 건축공간도 이에 대응하여 융통성이 큰 대중방이 선호되었다. 한편, 조선시대 유람문화의 확산으로 사찰의 사대부에 대한 접객기능이 요구되었으며, 이에 대한 대 응으로 암자의 누마루가 적극 활용되었다.

    둘째, 서울 경기지역의 대방건축과 김룡사 산내암자는 염불방의 수용과 접객공간의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공통 점을 보이고 있으나, 해당 건축물의 위치가 사찰과 암자 라는 차이점 또한 보이고 있다. 이 부분은 향후 좀 더 많은 사례로 고증하여야 하는 문제이지만, 현 단계에서 는 단독으로 경영되는 소형 사찰이 다수인 서울 경기지 역은 불전과 요사, 누각이라는 배치 방식에서 누를 대방 건축으로 대체하는 경향이 나타나지만 지방의 대형 사찰 은 기존의 배치를 변형하기 보다는 비교적 운영이 손쉬 운 암자를 통해 이를 해소하는 경향의 차이로 보인다.

    셋째, 조선후기 불교계에 문중문화가 확대되면서 기존 의 조사당 또는 국사전과는 다른 차원의 진영봉안공간이 발생하였다. 문중의 단위가 사찰에서 암자로 세분화되면 서 진영봉안은 암자의 기능으로 수용되었으며 자연스럽 게 문중의 집회 역시 암자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 다. 진영봉안공간은 화장암과 같이 별도의 진영각으로 건립되기도 하고, 대성암이나 양진암과 같이 누마루에 감실을 설치하는 방식도 확인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김룡사 산내암자의 모습은 조선후기 불교건축의 한 단면임에도 불구하고 통상적인 암자에 대 한 인식과 다른 차이점이 다수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차이점은 향후 조선후기 암자에 대한 이해의 기반이 될 수 있다는 면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암자에 대한 연구가 아직 초보적인 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현 상 황에서는 성급히 다수의 사례를 유형화하여 분석하기보 다는 소수의 특정사례라도 체계적으로 검토하고 그 결과 물을 누적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특수사 례가 누적된다면 향후 다른 연구자에 의해서라도 좀 더 일반화된 설명과 이론수립을 위한 기반이 조성될 수 있 을 것이다.

    Figure

    JAH-23-81_F1.gif

    Map of Gimryong-sa’s Hermitage

    JAH-23-81_F2.gif

    Geumseon-am(金仙庵) (2014)>

    JAH-23-81_F3.gif

    Geumseon-am Plan (2014)

    JAH-23-81_F4.gif

    Hwajang-am(華藏庵)

    JAH-23-81_F5.gif

    Hwajang-am Plan (2014)

    Daeseong-am(大成庵)

    JAH-23-81_F7.gif

    Daeseong-am plan (2006)

    JAH-23-81_F8.gif

    Yangjin-am(養眞庵)

    JAH-23-81_F9.gif

    Yangjin-am plan (2014)

    JAH-23-81_F10.gif

    Shrine of Daeseong-am and Yangjin-am

    Table

    Footnote

    Reference

    1. 『金龍事蹟』,
    2. 『括虛集』,
    3. 『史要蒐集』,
    4. 『大成庵華藏庵養眞庵金仙臺兜率庵史料』,
    5. Kwon , Sang-Ro 『Hanguk Sachal Jeonseo(한국사찰전서)』 , Seoul: Dongguk Univ. press,
    6.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 Research (2009) Institute of Buddhist Cultural Heritage , 『Research Report: Buddhist Relics in Gyeongsangbuk-do ProvinceI, II』, 2008,
    7. Han Gimun , Ung Seon , Kim Hyeongsu , Kwon Daeung (2012) 『Undalsan Gimuryonsa(운달산 김룡사)』 , Mungyeong-si: Mungyeong-si Department of cultural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