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론
창덕궁 인정전 일곽은 중요한 의식과 행사를 거행하던 조선왕조의 중심 공간이었다. 이 인정전 일곽은 1405년 창건 이래 여러 차례 피재와 재건을 반복하며 그 공간의 구성이 변화해왔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 창덕궁과 인정 전 일곽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 성과를 축적해왔다. 그렇 지만 선행 연구들은 정조(正祖) 시대나「동궐도」, 「동 궐도형」, 『궁궐지』와 관련한 내용에 주로 관심을 두 어 왔다.1) 그리하여 20세기 전반에 일어난 인정전 일곽 의 변화는 이른바 ‘건축사 연구의 사각지대’에 속해 온 경향이 있다고 볼 수 있다.2)
2009년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이 발간한 『근대건축도면집』은 이러한경향을 불식시킬 수 있는 실증적인 자 료가 되고 있다.3) 전체 174종의 도면 중에 122종이 궁궐에 관한 도면이고, 창 덕궁 관련 자료는 101종에 달한다. 이 자료를 토대로 몇 편의 논문들이 발표 되었지만,4) 인정전 일곽의 개조에 관해 서는 더욱 상세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1900년대 이후 인 정전 일곽의 변화를 다룬 2012년의 논 문이 참고가 되는데, 이 논문은 역사학 의 시각에서 이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 룬 것이다.)5 그러므로 이 연구의 목적 은 『근대건축도면집』의 자료와 관련 논문들의 성과를 토대로 삼아서, 건축학의 시각에서 인 정전 일곽의 개조를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2.개조 관련 신문기사와 도면의 검토
순종은 1907년 7월 19일에 황제로 뒤에 창덕궁으로 이어하기 위해서 그 해 10월 7일에 그 수리를 궁내부에 맡겼다. 이 수리는, 고종이 1885년에 창덕궁을 떠난 이래 방치되어있던 궁궐을 재정비하기 위한 것으로, 불과 한 달 만에 완료되었다. 순종과 순정효황후, 황태자는 1907 년 11월 13일에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 <Fig.1>의 도 면은 이 당시의 모습을 전하는 것인데, 그 구성은 「동 궐도」와 커다란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통감부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그 일파는 ‘궁정의 존엄을 유지하여 국왕의 은혜를 백성들에게 보여주어 야 한다’는 명목 아래 궁전의 조영과 박물관, 식물원, 동 물원을 신설할 것을 진언하였다. 순종은 이를 받아들여 1908년 봄에 궁내대신 민병석 자작 및 차관에게 궁전 조 영을 위한 기공식을 거행하도록 명했고, 1909년 봄에 그궁전이 준공을 하였다.6) 이 궁전 조영 공사의 내용과 지 향을 관련 신문기사와 도면의 검토를 통해 살피면 이하 와 같다.1
2-1.개조 관련 신문기사의 검토
1908년 7월과 8월에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공립신보>에서 인정전 일곽의 개조와 관련한 신문기사 4건을 찾을 수 있었다. 이들 신문은 각각 1904년, 1898 년, 1905년에 창건한 이래, 대중을 계몽하고 국권회복에 노력하였기에,7) 그 기사내용은 신뢰할 수 있다고 판단하 였다. 먼저, 1908년 7월 7일 <대한매일신보> 기사 (<Fig.1>)에서 ‘재작일부터’라고 쓴 것으로 보아서, 1908 년 7월 5일에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 다. 이 신문의 같은 해 7월 19일 기사(<Fig.2>)로부터는 이 공사에는 반양제8)로 수리하였고 원래의 월랑은 훼철 되었다는 것과 12만 8천환 가량의 역비가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해 7월 21일 <황성신문>의 기사 (<Fig.3>) 중에, ‘한인은 도무소용이오 전히 일본인으로 담역케 한다더라’와 8월 12일 <공립신보>의 ‘일인(日人) 이 아니면 할 수 없나 (중략) 일본인에게 도급을 주어 일인 리광소삼랑이가 역부 수 백 명을 통솔하고 방금 역 사 한다더라’(<Fig.4>)로 미루어서, 이 공사를 전적으로 일본인들이 맡았음을 알 수 있다.9) 이 기사에 등장하는 리광소삼랑10)은 토시미츠 코사부로[利光小三郞]라고 추 정한다. 그는 토목회사 신궁상행(新宮商行)의 대표였다. 그 공사부는 토가와 카네쿠라[戶川金藏]11)가 맡았다. 이 들은 1906년 통감부와 통신관리국 설치를 담당하기도 하 였다.
2-2.관련 도면의 검토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이 소장한 인정전 일곽의 개 조에 관련한 도면의 목록은 <Tab.2>와 같다.12) 여기서 특이한 점은, 12종의 도면 중에서 5종이 ‘알현소(謁見所)’ 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본래 인정전이 외국 사신의 접견, 신하들의 조하, 세자의 책봉식, 왕실의 큰 잔치, 과거시험 등이 열렸던 공간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 ‘알현소’라는 명칭은 그 공간의 기능을 ‘알현’으 로 축소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표기는 1888년 도쿄의 메이지궁전13) 준공 평 면도에서도 사용된 것이다. <Fig.5>에서는 ‘表宮殿/ 1. 謁見所14)’라는 전각 표기를 볼 수 있는데다가, 알현소 가 행각을 통해서 그 앞의 현관으로 연결되고 있는 모습 을 살필 수 있다. 이 모습은 개조된 인정전 일곽과 흡사 한 것이다. 더욱이, 메이지궁전의 조영을 주도한 인물은 당시의 궁내경(宮內卿) 이토 히로부미라고 한다.15)
인정전 일곽과 알현소 일곽이 흡사한 배치를 취하고 있다는 점은 이 연구의 시발점이다. 인정전 개조공사를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발의하였다는 것과, 메이지궁전 조영을 궁내경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하였다는 것은, 이 두 공사의 연관성을 살피는데 주요한 실마리가 아닐 수 없다. 이토 히로부미의 통감부가 인정전 일곽을 개조할 때, 메이지궁전의 알현소 일곽을 일종의 전범(典範)으로 삼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3장에서는 1908년 인정전 일 곽의 개조 양상을 1888년 메이지궁전 알현소 일곽의 모 습과 비교하면서 그 유사성을 살펴볼 것이다.
3.인정전 일곽의 개조 양상
3-1.인정전과 좌우 행각의 연결
개조 이후의 인정전 일곽 평면도인 <Fig.8>의 「第一 號謁見所及附屬建物平面圖」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 는 기존의 전각과 행각을 잇는 월랑16)을 신설했다는 것 이다. 이로 인해 인정전 일곽은 메이지궁전의 알현소 일 곽(<Fig.10>)과 매우 흡사한 배치를 갖게 되었다. 메이 지 궁전 알현소 일곽은 전정을 가운 데 두고 위쪽에 알현소가 놓고 아래 쪽에 현관을 두었는데, 알현소와 현 관은 행각이나 월랑으로 연결되었다. 이러한 배치는 교토 어소[京都御 所]17)(<Fig.11>)의 영향을 받은 것 이라고 한다. 한 일본의 연구서는 이 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교토 어 소를 모범으로 한 메이지 궁전은, 외 부는 화풍(和風)이지만, 내부 특히 의식이나 외국의 빈객이 알현하는 오모테궁전[表宮殿]은 몇 가지 형상 의 격천정(格天井)이나 융담부(絨毯 敷)을 비롯하여 난로와 유리의 문이 나 건구(建具)를 넣고, 샹델리아를 매달고, 외국에서 수입한 조도품(調 度品)이 늘어선 화양절충형식으로, 교토 고쇼와는 다른 실내공간이 되 었다. 궁전의 건물배치에 대해서는 시신덴[紫宸殿]을 참고로 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18)
다른 일본 연구서의 표현을 빌면, 이러하다. 메이지궁전의 오모테궁전 은 근대가 아니면 없는 <양풍>의 의례에 대응할 수 있는 내부공간을 지향하였고, 또 각 건물의 기능이나 평면에 대해서는 선행하는 근세의 다이리[内裏, 京都御所]를 참고로 하 였다.19)
이러한 절충은 일본 근대의 특수 한 사정을 반영한 것이며, 그 결과 도출된 의장을 ‘근대화풍(近代和風)’ 이라고 부른다.20) 메이지궁전 등의 일본 황실 관련 건축 은 그 정점에 놓이며, 이를 담당한 건축가들은 궁내성(宮 內省) 내장료(內匠療)에 속해 있었다.21)
개조된 인정전 일곽에서는, 그 공간의 성격도 바뀌었 다. 신설된 월랑이 행각과 직각으로 만나는 부분에 화장 실을 새로 만들었다.(<Fig.13>) 이 화장실의 위치도 메 이지궁전의 그것과 같은 곳에 두었다. <Fig.5>의 전각 주기 8번(東化粧の間)과 9번(西化粧の間)은, 이를 말해 주고 있다.
동 서행각의 용도도 바뀌었다.22) 원래 향실과 내삼청 이 있던 서행각은, 전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가 한일병 합 이후에는 식당과 휴게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23) 향 실은 궁중 제사에 쓰이는 향과 축문을 담당하는 기관으 로, 그 서쪽 가까이에 (구)선원전24)이 있었기 때문에 생 겨났다.
통감부는 선원전을 비롯한 궁궐의 진전을 축소 통합하 려고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25) 향실을 차제에 이전시 키려고 했었던 것 같다. 내삼청은 국왕의 곁에 두어 국 왕을 호위하고 궁궐을 수비하는 기관이었다. 통감부는 인정전 일곽의 개조를 빌미로 향실과 내삼청을 동시에 없애서 제사와 호위라는 왕실의 기능도 축소하는 효과를 보려고 했을 것이다.
인정전 동행각은 이왕가(李王家)를 위한 공간으로 쓰 였다.26) 내부에는 당구대와 커튼박스, 난로와 카펫, 테이 블, 의자 등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서양식 설비가 갖 춰져 있었다.(<Fig.12>4)
<Fig.8>과 <Fig.22>의 도면들에서는 동서행각의 가 운데가 끊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원래 문무백 관의 출입문이던 동행각의 광범문과 서행각의 숭범문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자동차의 출입을 위한 대문을 설치 하였기 때문이다.27)
였다.26) 내부에는 당구대와 커튼박스, 난로와 카펫, 테이 블, 의자 등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서양식 설비가 갖 춰져 있었다.(<Fig.12>)
3-2.인정문과 좌우 월랑의 변화
인정문의 좌우에서는 원래의 월랑을 변형하였다. 인정 문의 좌우 월랑은 <Fig.14>과 같이 바깥쪽만 벽으로 막 히고 안쪽은 기둥만 있던 것을, <Fig.17>과 같이 안쪽도 벽으로 막아 실내공간으로 만들었다.
인정문 자체에서도 역시 기둥의 위치를 옮기고 벽체를 세워 그 안에 실내공간을 만들었다. <Fig.14, Fig.15, Fig.16>에서 볼 수 있듯이, 원래 정면 3칸이 모두 개폐 가능하였는데, 개조 후에는 <Fig.17, Fig.18, Fig.19>과 같이 정면의 어칸과 배면의 좌우 협칸 만이 개폐 가능하 게 되었다. 또 그 앞에 계단을 새로 놓았다. 개조한 인정 문의 정면이 <Fig.23>이다. 또, 인정문 내부에는 좌우 월랑으로 연결되는 출입구가 생겨났다.(<Fig.17>)
이로써 인정문에서 인정전까지가 실내를 통해서 연결 되는 구성을 갖게 되었다. 1915년에 잡지 『신문계(新文 界)』제3권 제8호에 실린 최찬식의 「창덕궁 배관기」 에는, 이렇게 새로 연결된 공간들을 통과하여 인정전을 관람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글의 필자는 인정문으로 들어가서 서쪽의 익랑 복도를 따라서 식당과 휴게소를 지난 뒤에 정실로 들어갔다는 것이었다.28) 인정문은 본 래 인정문 전정과 인정전 전정을 매개하던 대문이었는데, 개조 후에는 인정전 전정과 행각을 매개하는 역할을 맡 게 되었다. 그래서 그 명칭도 ‘현관(玄關)’으로 바뀌었 다.(<Fig.17>)1819 ‘현관’이란 명칭은 일본의 건축용어에서 온 것이다.29) 메이지 궁전의 현관은 <Fig.20>과 <Fig.21>과 같으며, 실내에서 좌우 월랑과 연결된다.
알현소 현관 좌우의 월랑 모서리 부분에는 탈모소(脫 帽所)가 설치되어 있었는데(<Fig.5>의 전각 주기 10번 과 11번: 東脫帽所 西脫帽所), 개조된 인정전 일곽에서 도 같은 기능의 공간이 생겨났다. <Fig24>의 벽면에는 우산꽂이와 모자걸이가 설치된 것을 볼 수 있다. 이 사 진에서는 양측에 창문이 연이어 나있는 긴 복도로 보아서, 이곳이 인정문 좌우의 개조된 월랑이라 고 짐작할 수 있다.30) 인 정전 내 탈모소의 위치도 역시 메이지 궁전의 알현 소를 따른 것으로 보인 다.
이처럼 인정전 일곽은 메이지궁전 알현소 일곽과 유사 하게 개조되었다. 이 개조는 우산, 모자와 같은 서양식 생활방식과, 자동차와 화장실과 같은 근대적 설비가 궁 궐 안으로 도입되는 계기이기도 하였다.31)
3-3.인정전 내부의 변화
당가(唐家)는,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좌탑(座榻), 오봉 병(五峯屛), 곡병(曲屛)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 다.(<Fig.26>) 당가는 어좌 공간을 구성할 뿐만 아니라 정전의 공간 배치에서도 핵심으로 기능한다.32) 당가는 어도로 생겨나는 중심축의 끝인 어칸의 정 중앙에 위치 하여,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는 것이다.
1908년의 인정전 개조 공사에서 당가도 역시 개조되었 다. <Fig.25>에서부터 <Fig.32>까지를 비교하여 살펴보 면, 당가의 개조 양상을 알 수 있다. 개조하면서, 당가의 상부구조는 유지되었지만 휘장이 둘러쳐졌고, 그 하부구 조는 철거되고 대신 단차를 두고 카펫 위에 어좌를 놓았 다. 이러한 개조를 통해 인정전 당가는 메이지궁전의 어 좌와 비슷하게 바뀌었다. 1925년의 신문기사를 따르면, 이 개조로 제거된 이전의 옥좌(좌탑)가 후원에 보관되어 있었다.33)
인정전을 메이지궁전 알현소와 비슷하게 개조한 일은, 특히 인정전의 어좌를 메이지궁전의 어좌 형식과 유사하 게 바꾼 일은, 일본이 순종에게 일본 황족에 준하는 시 설을 만들어주었음을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 다. 이는 고종과 순종을 이태왕과 이왕으로 봉하여, 일본 황실의 일부로 인정해 주는 것처럼 보이게 한 일에 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황실은 ‘왕족’ ‘공 족’으로 구분되어 일본 황실의 ‘황족’ ‘화족’과는 다른 특수한 신분인 채로 일본의 화족제도에 편입되었다.34)
이러한 차이는 인정전 어좌 의 구성에서도 드러난다. 좌 탑의 배경에서 <일월오봉도> 는 <봉황도>(<Fig.33>)로 교체되었다. <Fig.26>과 <Fig.27>의 <일월오봉도>는 국왕이 천명을 받은 존재임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를 <봉황도>로 바꿈으로써, 그 격을 낮춘 셈이다.35)5
인정전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궁궐의 정전에는 전통적 으로 전[塼]돌이 깔려있었다. 그 이유는 조선왕조의 의식 에서는 정전의 정면을 완전히 개방하여 정전의 내부공간 과 그 전정(前庭)인 외부공간을 연결시켜 사용하는 경우 가 많았기 때문이다. 정전의 내부공간은, 의식에 따라서 반(半) 외부공간이 되기도 하는 곳으로, 신발을 신은 채 출입하였다. 정전의 전돌은 전정의 박석과 더불어 장중 한 분위기를 연출해냈다.
통감부는 1908년에 인정전의 전돌 바닥을 메이지궁전 알현소와 같이 마룻바닥으로 교체하였다. <Fig.37>은 바 닥공사를 위한 상세도이며, <Fig.38>은 이 마룻바닥이 지금도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사진이다. 메이지궁전 알 현소가 마룻바닥이었던 까닭은, <Fig.39>처럼 일본 황실 이 주로 실내에서 서양식으로 행사를 치렀기 때문이었 다.36)
인정전 개조 후에 대한제국 황실도 실내에서 행사37)를 치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기존의 전돌 바닥에 서도 충분히 실내 행사가 가능했었을 것이므로, 인정전 의 전돌을 마루로 교체한 것은 다른 어떤 이유보다도 메 이지궁전 알현소를 따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6
인정전에서 거행하던 신년연회나 탄신일 기념행사 등 은 인정전 개조 이후에 차츰 축소되었다. 이 행사들은 한일병합 이후에 동행각이나 희정당에서 거행하였다.38)
3-4.인정전과 그 일곽의 입면 변화
인정전 입면에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정면 창호일 것이다. 본래 인정전은 어칸과 좌우 협칸에 분합문을 달 았고, 퇴칸에는 아랫부분을 전돌로 낮게 쌓고 그 위에 분합창을 달았다. 그래서 인정전은 전면을 전부 개방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Fig.40>에서 <Fig.42>) 인정전을 개조하면서 정면의 어칸을 제외한좌우 협칸과 퇴칸 총 4칸에 모두 머름을 달았고, 이 4칸 은 문의 기능을 잃고 창으로써만 쓰였다. (<Fig.43>에서<Fig.45>, <Fig.53>) 또 <Fig.42>와 <Fig.45>를 비교 하면, 이러한 변화가 정면에서 뿐 아니라 측면과 후면에 서도 일어났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인정전의 내부공간 은 외부공간과 뚜렷하게 분리되었다. 이로써 인정전에서 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의식을 거행할 수 없게 되었다.
한편, 이는 월대와 기단을 통해서 내부공간과 외부공 간을 매개하였던 인정전의 공간구성을 통감부가 이해하 지 못한 채 일본식 정전의 공간구성에 맞추어 인정전을 개조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일본 교토 어소의 정전인 시신덴[紫宸殿](<Fig.49>)은 정면의 창호를 모두 개방하더라도 내 외부가 자연스럽 게 이어지지 않는 구조를 갖고 있었다. 이 정전에서는 계단으로 연결되는 가운데 3개 칸만이 주출입구로 이용 된다. 개조된 인정전도 계단으로 연결되는 어칸만을 출 입구로 사용하는 것이다.7
개조된 인정전 정면의 창호는 여닫이였다. 창호가 안 으로 접어 열리게 되었고, 그 안쪽에는 상하개폐식 유리 창을 달았다.(<Fig.54>) 또한 <Fig.43>과 <Fig.48>을 살피면,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인 오얏꽃 문양들이 용마 루에 다섯 개가 부착되었고, 네 개의 연통들이 1층 지붕 앞에 설치되었다. 오얏꽃 문양들과 연통들은 인정문 입 면에서도 볼 수 있다. (<Fig.18>, <Fig.19>)
3-5.인정전 전정의 변화
인정전 전정은 원래 자연이 배제된 인공적인 공간이었 다. 전정에는 의식이나 행사를 위해서 어도를 제외하고 모두 박석(薄石)을 깔았다.40) 이는 우천시를 대비한 장치이기도 하였다. (<Fig.50>)
통감부는 인정전을 개조하면서, 이 박석들을 전부 철 거하였다.41) (<Fig.53>) 이후 인정전 전정은 화초를 심 어서 정원처럼 꾸몄고, 이는 1928년의 사진(<Fig.51>)에 서 확인할 수 있다.8
이러한 변화로 인하여 인정전 전정에서는 과거 와 같은 행사들을 거행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인정전 기단은 <Fig.54> 와 같이 테이블과 의자 를 놓아 테라스처럼 쓰 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 정전 전정의 변화는 <Fig.52>의 메이지궁전 향연소(饗 宴所) 모습을 연상시킨다. 통감부는 인정전 전정의 성격 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4.결론
이상에서 신문기사들, 도면들, 사진들의 검토를 통하여 1908년 인정전 일곽의 개조를 살펴보았다. 1908년에 통 감부가 주도한 인정전 일곽의 개조 공사는 일본인만을 참여시켰던 점과 계획 도면에서부터 ‘알현소’라고 표기하 고 있는 점, 이토 히로부미가 관련하였다는 점으로 미루 어 보아 통감부는 처음부터 메이지궁전의 알현소를 일종 의 전범으로서 염두에 두었던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그리하여 이를 입증하기 위하여 3-1.과 3-2.에서는 인 정전 일곽의 배치 평면도를 메이지 궁전의 알현소 일곽 과 비교하여 유사성을 살폈으며, 3-3.과 3-4., 3-5.에서는 인정전의 내부 장식과 입면, 인정문의 입면, 앞마당의 모 습이 서양식이 가미된 일본식으로 변화하였음을 살펴보 았다.
그리하여 이를 입증하기 위하여 3-1.과 3-2.에서는 인 정전 일곽의 배치 평면도를 메이지 궁전의 알현소 일곽 과 비교하여 유사성을 살폈으며, 3-3.과 3-4., 3-5.에서는 인정전의 내부 장식과 입면, 인정문의 입면, 앞마당의 모 습이 서양식이 가미된 일본식으로 변화하였음을 살펴보 았다.
이처럼 통감부가 추진한 인정전 일곽의 개조는 조선왕 조의 위엄과 권력을 축소시키기 위한 것이며, 또 일본 황실 산하에 이왕가를 두기 위한 것이라고도 추정할 수 있지만, 그 의도나 목적에 대한 직접적인 문헌기록을 찾 지는 못하였다. 그것이 이 연구의 한계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신문기사들과 도면들과 사진들을 살피고, 건 축의 변화를 메이지 궁전과 비교 고찰함으로써, 통감부 가 1908년 인정전 일곽의 개조를 메이지궁전 알현소를 일종의 전범으로 삼아서 진행하였음을 밝힐 수 있었다. 이 점이 이 연구의 의의가 될 것이다. 이 연구의 착목은 1920년 창덕궁 내전 일곽의 재건을 살피는데도 실마리가 될 것인데, 이는 후속연구의 과제로 남겨둔다. 앞으로 20 세기 전반기 창덕궁의 변천에 관하여 보다 많은 연구가 축적되어, 그 성격이 더욱 밝혀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