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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 1598-1142(Print)
ISSN : 2383-9066(Online)
Journal of architectural history Vol.23 No.2 pp.25-37
DOI : https://doi.org/10.7738/JAH.2014.23.2.025

A Study on the Evolutionary Process of Ddeulzip in Euisung Kim's Family at Andong Area

Hwa-Bong Kim*
Corresponding Author : woorizip@gntech.ac.kr
December 13, 2013 April 19, 2014 April 24, 2014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nalyze the evolutionary process of Ddeulzip. The subject of this study is a clan family of Euisung Kim in Andong Area. Ddeulzip's evolutionary process in the construction and management is divided into largely three periods. The establishment and changing process of Ddeulzip for Euisung Kim's family are analyzed according to three periods called the early (15~16C), mid(17∼18C) and late(19∼20C).

The characteristics of the early period are that they created their own ancestral building form of Ddeulzip. Those of the mid period are in their strong will not only to preserve their on ancesteral housing but also to make additional construction of Ddeulzip. And during the late period, although the construction of new Ddeulzip was started in the early stage, no more formation of Ddeulzip was made as it approached toward the late stage. And most important point is smaller construction space (gan) dan first time.

The residential Ddeulzip of Euisung Kim's family created at the start of Chosun Dynasty can be regarded as an representative example that shows a typical form of housing by noble residents at the time.


安東圈義城金氏뜰집의 變遷過程

김 화봉*
경남과학기술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초록


    Gyeongnam National University of Science and Technology

    1.서 론

    1-1.연구의 목적

    전통 주거문화는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유형의 주거가 변천해 왔다고 볼 수 있는데, 어떤 유형의 변천을 파악하 기 위해서는 그 주거의 형성, 발전, 변화, 쇠퇴의 과정을 모두 파악하여야만, 그 생명력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안동문화권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조 선시대의 ㅁ자형 양반가옥인 뜰집2)도 이와 유사한 변천 을 거쳐 왔을 것이다. 따라서 뜰집도 초창과 증개축 및 이들 행위의 쇠퇴를 포함하는 건축 조영의 변천과정을 파 악하는 함으로써 뜰집의 유기적인 생명력을 분석할 수 있 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뜰집이 변천되어온 과정은 연구 자의 선행연구에서 일부 수행되었지만, 지역이 다른 두 마을의 한 씨족3)이거나 좁은 지역에 집중된 씨족4)에 그 쳐 보다 전반적인 변천과정을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었 다. 본 연구는 뜰집의 변천과정을 보다 포괄적으로 분석 하기 위한 일환으로 조선시대에 안동권에서 보다 광범위 한 지역에 번성한 씨족의 뜰집을 대상으로 그 변천과정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는 문화적 소통이 가장 활발히 이루 어진 씨족간의 뜰집의 변천을 분석함으로써 그 특성이 보 다 잘 드러날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안동문화권5)에 광범위하게 정착한 대표적인 씨족으로 는 당연히 가장 많은 뜰집6)을 보유한 씨족인 의성 김씨 (義城金氏) 문중을 들 수 있다. 이들은 壬亂에 경상관찰 사를 수행했던 학봉 김성일(鶴峰金誠一, 1538~1593)을 대표로 하는 문중이며, 임난 이후 안동권에서 광범위한 지역에 뜰집을 형성하였다. 이들 의성 김씨 청계공파(淸 溪公派)7)는 안동시의 동쪽지역인 임하면 천전리 내앞마 을을 기반으로 인근에 이들의 뜰집이 많이 분포할 뿐 아 니라, 안동시의 서쪽지역에도 적지 않은 뜰집을 보존하고 있으며, 봉화군 지역(14호)에도 적지 않은 씨족마을을 형 성하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의성 김씨 청계공파가 안동권에 정 착한 입향과정과 뜰집의 건축과정 및 변화과정을 분석함 으로써, 의성 김씨 뜰집의 변천과정을 파악하는 것을 목 표로 한다. 이를 통하여 안동문화권 뜰집의 전반적인 변 천과정을 분석하는 한 기틀을 마련하고자 한다.

    1-2.연구의 방법

    균분제이던 고려시대까지의 재산상속법이, 봉제사를 규 범으로 하는 유교를 국교로 한 조선시대에는 중국의 봉건 적 규범인 宗法制8)를 적극적으로 도입함으로써, 장자우 대 상속체계로 변경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양반주거 는 종손을 중심으로 한 문중의 사회적 체계가 행정적 통 제보다 더 우선한 규범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것을 여실 히 보여주는 속설이 ‘안동에서는 종손이 벼슬보다 낫다’는 말이며, 이는 族譜를 통해 체계화되었다.1

    본 연구에서는 의성김씨 청계공파가 안동권에 정착하 게 된 입향과 분파과정을 분석하기 위하여, 문화인류학적 방법론에 의거, 우리나라 家系의 가장 정확한 기록유산인 氏族의 族譜를 통해 변천과정을 추적하고자 한다. 족보에 는 일반적으로 건축 유구에 명확히 나타나 있지 않는 가 계의 분파과정이 정확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를 바탕으 로 하여 가계의 구조를 파악함으로써 뜰집의 전후 맥락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뜰집의 건축 연원을 확인하되 건축연대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의 기준 을 족보의 분파를 통해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의성 김씨 뜰집의 초창과 증개축의 조영활동을 전기․중기․후기의 시기별9)로 나누어 안동권 뜰집의 변 천과정을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증․ 개축되어진 개별 뜰집의 공간적 변화에 대한 분석10)2 제외하고, 주거유형의 배치11)의 분석만 포함하였다. 따라 서 뜰집의 변천을 분석하기 위한 본 연구의 진행은 의성 김씨의 계보를 파악한 후, 전기․중기․후기로 나누어 각 시기별로 어떤 조영적 특성이 있었는지, 즉 건축 활동 및 배치와 평면 구성의 변화를 분석한다.

    의성 김씨는 안동권만 아니라 봉화군 지역12)으로도 이 거하였는데, 본 연구에서는 안동권의 의성김씨 청계공파 만을 대상으로 한다. 안동권의 의성김씨의 문중에서는 27 호의 뜰집이 건축되었는데, 그 중 안동댐 및 임하대의 건 설로 9호가 멸실되어, 연구대상인 뜰집은 18호이다. 본 연구의 도면 자료는 연구자가 작성한 선행 연구의 자료이 며, 족보의 조사 및 탐문13)은 2012년~2013년에 이루어 졌다.

    2.의성 김씨의 안동 입향과 분파과정

    2-1.의성 김씨의 형성

    의성 김씨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넷째 아 들14)이자 고려 태조의 외손자인 의성군 석(義城君錫)을 시조로 한다. 8世공우(公瑀)의 아들 대에서 크게 번창하 였는데, 장자인 용비(龍庇)15)가 태자첨사(太子詹事)을 지 냈고, 차자 용필(龍弼)은 수사공(守司空)을, 막내 용주(龍 珠)는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16) 이후 4파로 분파 되었고, 첨사공의 후손이 안동문화권에 정착하였다.

    2-2.의성 김씨의 안동 입향과정

    의성 일원에 거주하던 9世龍庇의 후손 중 한 갈래가 안동에 입향하게 된 것은 공양왕 무렵 13世거두(居 斗)17)와 그의 아들 천(洊)18)이 함께 벼슬을 버리고 안동 풍산현(豊山縣)에 이주해 정착한 이후이다. 고려가 망한 이후 洊은 안동의 안동 읍내로 이거하면서 마을 이름을 방적동(邦適洞, 현 율세동)이라 하였다.19)

    그로부터 洊의 증손이 되는 17世만근(萬謹)20)이 처가31 인 해주오씨의 세거지인 임하(臨河) 부근에 풍광도 아름 답고 생활의 조건도 좋은 내앞(천전, 川前)으로 옮겨와 정착했다고 한다.21) 따라서 14C중반에 의성에서 안동으 로 이주한 의성김씨 첨사공파의 한 갈래는 15C 후반에 안동권의 동쪽으로 이동해 이곳 내앞마을에 입향하여 가 문의 터전을 잡은 이후 후손들이 중흥되었다.

    2-3.의성김씨의 분파과정

    내앞마을에 입향한 17世萬謹의 후손은 19世璡(靑溪 公)의 아들 5형제가 모두 退溪의 문인으로 영남학파의 중심적 역할을 함으로써 가문의 명성이 남게 되었으며, 본 연구에서 대상으로 하는 의성 김씨는 모두 淸溪公후 손의 주거이다.

    이들 다섯 형제 중 첫째와 둘째는 내앞마을에 세거했 으며, 셋째는 인근의 신덕마을(처가 입향)에, 넷째는 안동 서쪽의 금계마을(처가 입향)에, 다섯째는 예천의 금곡(처 가 입향)으로 이주했다. 내앞마을을 벗어난 세 아들은 모42 두 처가로 이주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증손대인 23世에 또 분파가 이루어졌는데, 첫째 藥峰의 증손인 방걸(邦杰)22)은 인근의 지촌으로 분파하 였고, 둘째 龜峰의 증손인 후(煦)는 안동 서쪽 율촌의 처 가로 입향했다. 또 셋째 雲巖의 증손인 방찬(邦贊)은 신 덕에서 임하로 분파하였다.

    따라서 내앞을 기점으로 하는 의성김씨의 분파는 시기 적으로 20世와 23世에 크게 분파가 이루어졌으며, 지역적 으로는 내앞마을 인근으로 이루어진 분파와, 안동 관아를 지나 서쪽으로 멀리 이주한 분파로 구분할 수 있다.

    20世의 세 분파는 모두 처가로 입향한 공통성을 가지 고 있다. 또한 내앞마을 인근의 임하면 일대로 분파한 경 우는 뜰집의 건축(13호)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멀 리 안동의 서쪽으로 분파한 경우는 뜰집의 건축(5호)이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5

    3.의성 김씨의 뜰집 형성과정

    의성김씨가 안동에 정착한 이후에 안동권에서 건축한 27호의 뜰집 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구는 18호가 있다. 이들의 각 시기별 뜰집의 건축 사례(Tab.4 참조)는 전기 (15~16C) 1호, 중기(17~18C) 11호, 후기(19~20C) 6호 로 그 시작은 미약했지만, 중기에 곧 급격히 확장되어 전 성기를 누리다가, 후기에 들어 현저히 건축 활동이 줄어 진 것을 알 수 있다.

    3-1.前期(15~16C)의 뜰집 형성과정

    조선 초에 안동의 율세동으로 이주하여 100여년 세거 한 뒤, 17世萬謹이 내앞마을로 입향한 것은 그가 進士 試에 합격한 1477년 이후라 볼 수 있다. 이때 건축된 주 거23)는 최소 二字型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둘째 아 들인 18世金禮範이 1540년경에 70여칸의 살림집을 건립 하였다고 학봉의 쓴 묘갈명24)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만으로 1540년경의 주택이 뜰집이었는지는 알 수 없 지만, 당시의 규모로 보아 안동의 임청각25)과 비교될 수 있는 유일한 주택이었을 것이므로, 뜰집으로 보아도 무방 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내앞마을로 입향한 이후 의성김씨의 건축 활동 은 16C전반까지는 한동안 적극적으로 이루지 못하였던 잠재기였다고 할 수 있고, 1567년에 현재의 규모로 증축 하였는데, 화재 직후인 1588년에 鶴峰의 주도로 70여 칸 의 종가를 복원한 것이 현재 남아있는 의성김씨 문중 최 초의 뜰집인 것이다.

    3-2.中期(17~18C)의 뜰집 형성과정

    내앞종가를 제외하고 의성김씨가 뜰집에 가장 먼저 거 주하게 된 사람은 1630년경 靑溪의 둘째아들인 龜峰의 후손인 23世김후(金煦)로서, 처가인 율리로 입향하면서 장인이 건축해준 뜰집인 율리종택(B4)26)을 물려받게 된 것이다. 율리는 靑溪의 둘째아들인 鶴峰이 입향한 금계와 인접한 곳이기도 하지만, 풍산지역의 풍부한 건축적 기 반27)이 형성되어 있던 곳이다. 이러한 지역에서 건축된 율리종택은 17칸의 완결형으로 규모와 구성 면에서 가장 일반적인 뜰집의 전형28)을 잘 보여주는 주거라 할 수 있 을 뿐 아니라, 원형이 변화되지 않고 유지된 초창당시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또한 靑溪의 다섯째 아들인 南岳이 예천으로 분가하여 宗宅(E1)29)으로 사용하고 있는 뜰집이 1634년경 건축되3 었는데, 원래 이 가옥도 의성김씨의 일가가 영위하고 있 던 뜰집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의성김씨의 뜰집 건축에 적지 않은 자극제가 되었을 것이다. 종가인 내앞종가야 종중의 중심 으로써 그러한 구성은 당연했었겠지만, 지차(之次)의 주 거가 뜰집으로 번듯하게 조영된 것은 17C의 의성김씨 내 앞 문중의 건축적 활동에 큰 자극적 계기를 마련해 주었 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반증하듯이 율리종택의 지척에 있는 금계에서는 鶴峰의 손자인 김시추(金是樞)가 17C 중반에 종가30)를 건축했다. 그러나 이 집은 水害후 1762년 移築하였기 때문에 초창 당시의 원형은 알 수 없다.

    또한 내앞마을 인근에서 뜰집의 건축 활동을 보면, 1660년에 淸溪의 둘째아들의 종가인 龜峰종택(B1)이 건 축되었고, 23世방걸(邦杰)31)이 지촌으로 분파한 뒤 41세 인 1663년에 지촌종택(A3)을, 1678년에는 지촌에서 분가 한 오류헌(A4)이 건축되었다. 그 이전의 기간과 비교하면 매우 활발한 건축 활동이었다.

    이러한 분위기가 지속된 18C에 건축된 뜰집은 모두 5 채이다.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16C말에 분가했던 운암종택 (C1)의 건축과 17C에 건축되었던 학봉종택(D1)이 수해 이후에 이전하여 현재의 뜰집으로 건축된 것이다. 이들은 모두 처가 입향한 곳이지만, 파종가로서의 위상을 확보하 기 위한 노력이 명확해지면서 뜰집의 필요성이 제기되었 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내앞(A7김시화)과 지례(A5국탄댁, A6치헌)에서는 지속적인 뜰집의 건축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조선 중기인 임난 이후부터 정조까지의 기간 동안에 의성김씨의 뜰집 건축은 모두 11채로 매우 적극6 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안동문화권에서 명확한 지도층 으로서의 자리매김을 한 청계공파의 사회적 지위와 이들 의 적극적인 경제활동의 결과로 볼 수 있는데, 뜰집을 이 상적 주거건축으로 명확히 받아들인 시기라 할 수 있다.

    3-3後期(19~20C)의 뜰집 형성과정

    조선 후기인 19C에는 5채의 뜰집이 건축되었는데, 2채 의 증개축을 포함하면 백 년 동안의 건축 활동으로는 가 장 적극적인 뜰집의 건축 활동 시기라 할 수 있다. 이 때 내앞마을에서는 세 채(A2, B2, B3)의 건축이 이루어졌는 데, 뜰집의 규모는 작지만, 전반적인 저변의 확대라는 의 미에서 뜰집의 보급화가 이루어진 시기라 볼 수 있다.

    또한 지례로 분가한 지촌파의 후손들도 지속적으로 뜰 집을 건축하여 지촌에 모두 6채의 뜰집을 구축하였는데, 이 시기에는 한 채(A8)가 건축되었다.

    금계로 분가한 학봉의 후손들은 종가를 몇 번 이전하 면서 보종에 노력을 많이 기울였고, 후손들이 두 채의 뜰 집을 이 시기에 더 건축했다.

    그러나 20C에 들어와서 뜰집의 건축은 더 이상 진행되 지 않았다. 이는 신축을 요구하는 건축적 요구가 미약했 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제강점과 근대기의 사회적 변혁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뜰집을 조영하기 위한 전반적인 건축 활동을 보면, 전 기인 16C중반에 시작된 뜰집의 건축은 17, 18, 19C에 평 균 5~6채 정도 신축되었으나, 20C에 들어와 더 이상 건 축되지 않았다. 즉, 의성김씨의 뜰집 건축은 조선 전기에 태동하여, 조선 중․후기에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다가, 근 대 이후로 그 생산 활동이 멈추었다고 볼 수 있다.

    4.의성 김씨의 뜰집 변천과정

    4-1.前期(15~16C)의 뜰집 변화과정

    임난 이전에 이루어진 가장 괄목할 만한 건축적 성과 는 내앞종가가 뜰집으로 건축된 것이다. 내앞마을로 입향 한 15C후반 이후로부터 70여년 뒤인 1540년경에 의성 김 씨 18世金禮範이 70여칸의 주거를 건축한 것이 뜰집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지만, 이는 화재로 소실되었다.

    1587년 11월 23일 화재로 소실된 내앞종가의 복원을 주도한 사람은 鶴峰이었으며, 다음 해 완공했다고 그의 행장에 기록되어 있다.32) 당시 鶴峰(41세)은 전년에 사은4 사겸 종계주청사(謝恩使兼宗系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 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향리에 머물던 시기였다. 구전 에 鶴峰이 중국 북경에서 본 상류층 주택의 도본을 그려 왔는데, 내앞종가가 불이 나자 그 형식으로 건축했다고 한다.33) 그러나 학봉문집는 이 집에 대해 ‘一依舊制稍寬 廳事以復行事(옛 모습 그대로 지었다. 다만 대청만은 조 금 넓게 하여 일을 치르는데 편하게 하였다)’34)고 기술하 고 있다.35) 정확히 대청의 증축은 언급하고 있지만, 타 공간의 변화는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1728년 바깥사랑채가 철거되고 이 부재로 안대청 을 다시 개축하였으며, 1890년에 다시 작은 사랑채가 건 축됨으로써 현재의 모습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36) 따라 서 학봉이 완성한 구성은 방형의 안채와 재청으로 볼 수 있으며, 이후 바깥사랑채와 작은 사랑채의 변화로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랜 세월동안 많은 변화를 거치면서 주거의 생명력을 유지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앞종택의 유형적 근거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 다. 그 당시 안동권 및 경주권에는 이미 규모 큰 몇 채의 뜰집 사례37)가 존재하고 있었으나, 내앞종가는 지척의 임 청각과 같은 특수형을 모방하지도 않았다. 규모 큰 바깥 사랑채의 철거 이후에 안대청 일부를 용도에 맞게 증축한 것38)으로 파악된다. 그러므로 이미 口字形의 안마당을 갖 는 뜰집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으며, 鶴峰당시 에는 뜰집과 재청이 존재했었고, 바깥사랑채가 큰 규모로 있었으며, 바깥사랑채를 철거한 이루 작은 사랑채를 건축 하면서 현재와 같은 규모가 완성되었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근거는 학봉의 다섯 형 제가 모두 퇴계의 문인39)이었다는 사실인데, 이미 퇴계가 태어난 종택이 뜰집이었던 사실과 연관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존경하는 스승의 문중인 진성이씨 문중40)에는 이미 적지 않은 뜰집이 있었다는 것은 이들에게 주거유형의 기 본형으로서 뜰집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인가는 충 분이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다.

    4-2.中期(17~18C)의 뜰집 변화과정

    임난 이후의 혼돈 속에서 뜰집의 건축에 부심했던 의 성김씨의 뜰집은 이 시기에 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단독 주거의 변화과정은 적게 이루어졌지만, 대표적인 변화는 鶴峰종가(D1)와 南嶽종가(E1)의 변화를 들 수 있다.

    鶴峰종가는 풍수적 터잡기를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대가 낮아 水害를 본 이후, 1762년에 인근의 대지로 이 건하였다. 이후 1842년에 현재의 규모로 개축되었으며, 1964년에 원래의 터전을 토목공사로 높인 후 다시 이전 했다.41) 16C에 입향하고, 17C에 터전을 잡은 이후, 비록5 이웃이지만, 300여년을 떠나 있다, 20C에서야 다시 원 터 전으로 돌아온 것이다. 의성김씨의 뜰집 변천과정 중 가 장 오랫동안 많은 변화를 거친 주거라 할 수 있다. 현재 는 원래의 주거에 사당 및 행랑을 더하고, 별당인 풍뢰헌 (風雷軒)을 옮겨와 대 장원의 구성을 이루고 있다. 원래 의 터전으로 다시 복귀하려는 이전 과정에서의 건축적 계 획의 기록은 家圖42)에 상세히 전하고 있으므로 이것은 학봉 및 그의 손자 김시추의 위업을 기린 후손의 건축적 염원이 구현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6

    청계의 다섯째 아들인 南嶽은 처가인 예천권씨의 터전 인 금곡으로 입향하였고, 南嶽의 원래 사당은 예천권씨 종택(1589년 건축된 뜰집)이 있는 인근의 죽림리 내에 있 었다고 한다. 현재의 종가는 병자호란에 공을 세운 불구 당 김주(不求堂金辵主, 1606-1681)의 생가였다고 하는데, 그는 남악의 종질(從姪)이다. 즉 당시 의성김씨가 이 터 에 먼저 뜰집을 경영하고 있었던 것인데, 전주이씨가 매 입하여 태종의 10남 희령군 타(熙寧君袉)의 사당인 이 정사(夷靖祠)를 종가 동측에 건축한 것이 1792년이고 보 면, 그 즈음 전주이씨에게 매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한 이들이 증축한 사랑채도 그 당시 건축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뒤 전주이씨가 1945년경 가옥을 매도할 편이 되었을 때, 원래의 주인 집안인 의성 김씨에게 넘 기고자 했다고 한다. 현재의 종손 부친이 이렇게 하여 전 주 이씨로부터 남악종가를 매입했다.43)

    따라서 조선 중기의 전반기에는 자연재해에 의한 이전 과 매도 등으로 인한 변화과정을 복잡하게 거친 시기이기 도 하지만, 문중이 자리를 잡게 되는 중반 이후에는 뜰집 에 대한 건축적 가치와 문중의 의지가 성숙되어 가장 왕 성한 건축 활동을 한 시기라 할 수 있다.

    4-3.後期(19∼20C)의 뜰집 변화과정

    19세기에 들어 뜰집의 신축은 주로 소규모로 이루어졌 지만, 뜰집의 개축는 대규모와 소규모의 뜰집에서 모두 이루어졌다. 우선 학봉종가(D1, 1842년)와 귀봉종택(B1, 1888년)의 개축은 파종가의 위상에 맞는 규모로의 변천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결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그 후손 의 번성을 반영하고 있다. 이 두 집은 모두 사랑채의 증 축이 이루어졌는데, 파종가의 공간에 있어 사랑채의 공간 적 요구가 가장 많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78

    내앞마을에서는 재산종택(A2)이 1860년경 증축되는데, ㄷ字型안채의 전면에 사랑채를 포함한 행랑이 붙혀지어 진 것이다. 이 때 익랑의 칸 중앙에 행랑의 기둥 열을 세 운 증개축의 전형적인 구성으로, 기존의 공간에 추가할 때 나타나는 건축 時差44)의 대표적 예인데, 이는 ㄷ字型 주거에서 뜰집으로 변천하는 사례의 구조적 근거를 제시 하는 유형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 뜰집의 변화는 전반기에 있었던 사랑채 의 증축(A3, A4)만을 들 수 있는데, 이미 전반적으로 뜰 집의 신축이 멈춘 상황에서 생긴 소극적인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일제강점으로 인한 전통적 농경사회의 해 체를 통한 사회조직의 변화와 근대화로 인한 인구의 변동 등을 원인으로 하여, 뜰집과 같은 상류주거가 더 이상 요 구되지 않는 상황의 결과로 볼 수 있다. 더구나 1970년대 에 안동지역에서 대대적으로 건설된 안동댐과 임하댐의 건설은, 몇몇 문화재급 뜰집의 이전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뜰집 유구를 수몰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로 인해 의 성 김씨(지례리, 수곡리 9호)와 진성 이씨(의인리) 및 광 산 김씨(오천리) 등의 주거지에 있던 많은 뜰집이 수몰되 었는데, 문화재로 지정된 일부 건축물들은 고향을 떠나 이주지로 옮겨졌다.

    반면 20C 후반기의 학봉종택(D1)의 원 주거지로의 移 轉(1964년)과 같은 변화는, 위와 같은 악조건의 건축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시기에도 보종(報宗)을 위한 의지가 원래의 종가터로 원상복구하게 한 매우 보기 드문 결과를 낳았는데, 이는 마치 전기에 내앞종가가 화재를 당하였을 때 전 문중이 협력하여 복구했던 결과와 동일시 할 수 있는 문중의 일대 역사로 볼 수 있다. 그만큼 의성 김씨의 뜰집에 대한 애착은 초창기부터 현재까지 각별했 다고 할 수 있다.

    4-4.의성 김씨의 뜰집 변천과정

    우선 안동문화권의 뜰집을 대상으로 분석한 선행연구 를 통해 유형적 기준을 보면 뜰집의 변천은 다양한 요인 의 분석을 통하여 파악할 수 있다. 우선 배치의 구성유형 의 변천을 분석한다.

    선행연구를 기반으로 배치유형을 구분45)하면 완결형 10호(56%), 연결형 2호(11%), 분리형 6호(33%)이며, 전 기에는 완결형만, 중기에는 완결형과 분리형이 비슷하게 등장하다, 후기에는 완결형이 많이 나타나고 연결형이 증 장하는 특성이 드러난다.(Tab.8 참조) 이는 전반적으로 완결형의 건축경향이 우세하지만 중기에 분리형으로 변화 를 모색하지만 결국 완결형으로 정착되어가는 경향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분리형은 주거의 변용 즉 증축과 매 우 관련이 있는 것으로 후기의 연결형도 이와 같은 맥락 으로 보면 기존의 채를 증개축하려는 의지가 배치에 반영 되어 드러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적극적인 건축 활 동이 배치의 변형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평면의 변화는 조선 중기 이후의 일반적인 특징인 툇 집 혹은 겹집화의 경향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뜰집과 같 은 큰 규모의 구성에는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특징으로 보 기 어렵다. 왜냐하면 가장 초기에 만들어진 내앞종가에서 이미 겹집과 툇집의 공간 구성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 다. 이는 조선 전기에 이미 규모 큰 주거에서는 겹집의 구성을 취했다는 것으로 조선 이전에 이미 겹집의 구축적 기법이 축적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겹집은 가계의 규모에 따른 선택적 요인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안채의 구성유형에 따라 민가형(一字型, 4호)과 중부형(ㄱ字型, 12호)46)으로 구분되는데, 이 또한 규모의 특성에 따른 구성이라는 속성 이외에는 어떤 의미를 찾기 어렵다. 안채의 변화는 화재나 이전 등으로 인한 완전 개 축 이외는 변화가 된 사례가 없으므로 거의 변천이 없는 고정적 공간요인으로 보아도 무방하므로 안채의 구성요인 이 뜰집의 변천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 므로 공간의 변화는 앞에서 고찰한 사랑채의 증개축에 따 른 배치의 변화가 가장 큰 유형적 변화의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랑채는 유형적 변천에 가장 많은 변화의 요 인을 가진 공간으로서 초장(1634년) 이후 사랑채의 증축 (1792년)이 가장 먼저 이루어진 남악종택(D1)의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19C 중반 이후인 조선 후기에 사랑채의 증축이 이루어졌다.(A1, A3, A4, B1, D1, Tab.7에서 증 축이전의 평면을 점선으로 표시) 따라서 사랑채의 변천은 뜰집 변천의 가장 중요한 유형적 변천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의 특징은 A계열을 제외하면 모두 파종가(派宗家)의 뜰집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결국 뜰집 변천의 중요한 변 화는 종가 및 파종가의 사랑채 증축으로 귀결될 수 있다.

    이러한 사랑채의 변천은 초기의 소규모 사랑채에서, 중 기 이후에 종법제의 정착으로 종가 및 파종가의 역할이 커지면서 奉祭祀와 賓接客을 위한 사랑공간의 요구가 적 극적으로 건축 활동에 반영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Tab.10의 각 시대별 큰 규모의 뜰집이 모두 종가 및 파 종가인 A1, B1, C1, D1 E1이 모두 25칸 이상의 큰 규모 의 뜰집인 것으로도 잘 드러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30칸인 A4 또한 파종가로거의 역할을 한 규모 큰 뜰집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의성 김씨 뜰집의 변천에 따른 시대 적 요인은 뜰집의 신축 규모의 변천을 들 수 있다. 뜰집 의 변천에 있어 공간유형의 변화가 주는 의미보다 신축 규모의 변천의 분석은 보다 의미 있는 결과를 제시한다. Tab.10에 나타나는 백년 단위로 본 가장 큰 규모의 뜰집 은 50>40>30>22칸으로 나타난다. 건축 규모의 평균으로 보더라도 17~19C의 규모가 26>18>16칸으로 변천해 가 는 것은 상기의 조선 후기에 부농층의 확대와는 전혀 다 른 방향으로 변해가는 것으로서 매우 특이한 변천이라 할 수 있다. 즉 뜰집의 신축 규모가 점차 작아진다는 것이 다.47) 조선 전기에 50여 칸의 규모로 시작했던 뜰집의 규모를 점차 축소하여 건축한다는 것은 매우 재미있는 특징 이다. 이는 종가(혹은 큰집)로부터 分家한 之次의 집들이 건축되면서 큰 집 보다 작은 집을 건축할 수밖에 없는 종법제에 따른 分財의 특징이 평균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의성김씨의 뜰집의 변천의 특징은 종가 및 파 종가의 사랑채 확장과 분가 규모의 축소로 볼 수 있다. 이는 안동권의 지도적 역할을 했던 의성김씨 문중이 조선후기로 갈수록 중앙에서 세력권을 확장하기 보다는 향리 를 중심으로 세족이 정착되면서 종가 및 파종가들의 역할 이 강화되면서 주거 내에서 사랑채의 규모가 커지는 일 면, 지손들의 분가가 이루어질 때에는 점차 소규모로 건 축하면서 향반(鄕班)화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5.결론

    본 연구는 안동권 의성 김씨 청계공파의 뜰집을 대상 으로 그 변천을 조선초~현대까지의 기간을 대략 2세기 씩 삼분하여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 분석한 결과 다 음과 같은 특성을 얻을 수 있었다.

    1. 전기인 15~16C에는 입향과 분파에 의해 씨족의 정 착이 완성된 시기라 할 수 있다. 15C에는 주로 입향과정 을 거쳤고, 16세기에는 종가가 있는 내앞마을로부터 의성 김씨 20世의 파종가들이 분파되면서 주거영역의 확장이 이루어졌다. 그 세력은 종가를 중흥시키는 힘이 되어 비 로소 의성 김씨 문중 최초의 뜰집인 내앞종가가 완성되었 다. 이 뜰집은 의성 김씨의 사회적 위상을 표상하는 최고 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짧은 기간 동안 초창과 중창이 이루어진 것으로, 뜰집의 공간적 가변성을 보여주 는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2. 중기인 17~18C에는 다시 23世의 분파가 심화되면 서 각 계파에서 뜰집의 초창과 중창이 활발히 일어난 시 기로, 대부분 파종가의 형성이 이루어진 시기라 할 수 있 다. 이는 종법제의 적극적인 수용으로 종가 및 파종가에 씨족의 중심 역할이 집결되어지는 유교적 사회체제의 영 향으로 볼 수 있다. 이때의 건축적 특징으로는 배치 유형 의 완결형과 분리형이 모두 활발히 이루어진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뜰집의 건축적 욕구가 매우 적극적이었던 결 과로 볼 수 있는데, 그만큼 뜰집의 주거유형의 전형으로 적극적으로 선택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건축적 요 구의 계기는 陽으로는 퇴계학파를 잊는 학문의 맥을 통 하여 뜰집이라는 주거의 전형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 고, 陰으로는 통혼을 통하여 처가 및 외가의 건축적 분위 기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3. 후기인 19~20C에는 점진적 쇠퇴기로 볼 수 있다. 19C에는 중기와 비슷한 건축 활동이 적지 않게 지속되었 지만, 내용적으로는 이미 왕성한 활동기를 넘은 소규모의 신축활동과 사랑채를 위주로 한 증축이 많았던 시기이다. 20C에 들어서면 완전한 쇠퇴기로 신축 활동은 없어지고, 증축 위주의 소극적 건축 활동이 있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이는 근대기에 들어 사회적․기능적 요구가 거의 다한 뜰집의 말년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과정을 종합하여 다음과 같은 변천의 특성 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에 강력한 문중의 구심점으로서 의 종가가 형성되어 유형적 모본으로서 조선 중기에 지속 적으로 뜰집을 구축해 나갔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초 창 건축 규모의 축소 경향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조선 후기에 의성김씨가 지방 토호로 정착하면서도 더 이상의 세력의 확장이 이루어지지 못하였지만, 가계의 번성을 통하여 저변의 확대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 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문중의 구심점인 종가 및 파종 가들은 사랑채의 증축을 통하여 규모를 확장함으로써 강 력한 건축 의지를 조선 후기까지 지속적으로 표출하였다.

    따라서 의성 김씨 청계공파의 뜰집은 조선과 함께 그 명맥을 유지했던 대표적인 안동권의 상류주거인 뜰집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Fig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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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義城金氏入鄕過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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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義城金氏分派過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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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栗里宗宅(B4) 平面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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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川前宗家(A1) 平面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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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鶴峰宗宅(D1) 平面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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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南嶽宗宅(E1) 平面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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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龜峰宗宅(B1) 平面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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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齋山宗宅(A2) 平面圖

    Table

    List of research

    義城金氏Ddeulzip 建築時期(現況平面)

    入鄕家繼

    分派家繼

    義城金氏詹事公派家繼

    List of building process(문화재는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를 ‘국민속’으로, 도지정 문화재자료는 ‘도자료’로 표기했다. 초창 의 기호는 원형이 뜰집인지를 알 수 없는 것을 [ ], 뜰집이 지어진 초창을 ■로 구분했다.)

    List of Inner Spacial Construction

    List of Site Plan Type

    義城金氏Ddeulzip 變遷過程(점선으로 표시한 초기형은 고증을 바탕으로 한 추정 형태임.)

    List of Spacial Average of Constructed Year

    Footnote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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