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 론
1-1.연구의 목적
전통 주거문화는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유형의 주거가 변천해 왔다고 볼 수 있는데, 어떤 유형의 변천을 파악하 기 위해서는 그 주거의 형성, 발전, 변화, 쇠퇴의 과정을 모두 파악하여야만, 그 생명력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안동문화권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조 선시대의 ㅁ자형 양반가옥인 뜰집2)도 이와 유사한 변천 을 거쳐 왔을 것이다. 따라서 뜰집도 초창과 증개축 및 이들 행위의 쇠퇴를 포함하는 건축 조영의 변천과정을 파 악하는 함으로써 뜰집의 유기적인 생명력을 분석할 수 있 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뜰집이 변천되어온 과정은 연구 자의 선행연구에서 일부 수행되었지만, 지역이 다른 두 마을의 한 씨족3)이거나 좁은 지역에 집중된 씨족4)에 그 쳐 보다 전반적인 변천과정을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었 다. 본 연구는 뜰집의 변천과정을 보다 포괄적으로 분석 하기 위한 일환으로 조선시대에 안동권에서 보다 광범위 한 지역에 번성한 씨족의 뜰집을 대상으로 그 변천과정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는 문화적 소통이 가장 활발히 이루 어진 씨족간의 뜰집의 변천을 분석함으로써 그 특성이 보 다 잘 드러날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안동문화권5)에 광범위하게 정착한 대표적인 씨족으로 는 당연히 가장 많은 뜰집6)을 보유한 씨족인 의성 김씨 (義城金氏) 문중을 들 수 있다. 이들은 壬亂에 경상관찰 사를 수행했던 학봉 김성일(鶴峰金誠一, 1538~1593)을 대표로 하는 문중이며, 임난 이후 안동권에서 광범위한 지역에 뜰집을 형성하였다. 이들 의성 김씨 청계공파(淸 溪公派)7)는 안동시의 동쪽지역인 임하면 천전리 내앞마 을을 기반으로 인근에 이들의 뜰집이 많이 분포할 뿐 아 니라, 안동시의 서쪽지역에도 적지 않은 뜰집을 보존하고 있으며, 봉화군 지역(14호)에도 적지 않은 씨족마을을 형 성하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의성 김씨 청계공파가 안동권에 정 착한 입향과정과 뜰집의 건축과정 및 변화과정을 분석함 으로써, 의성 김씨 뜰집의 변천과정을 파악하는 것을 목 표로 한다. 이를 통하여 안동문화권 뜰집의 전반적인 변 천과정을 분석하는 한 기틀을 마련하고자 한다.
1-2.연구의 방법
균분제이던 고려시대까지의 재산상속법이, 봉제사를 규 범으로 하는 유교를 국교로 한 조선시대에는 중국의 봉건 적 규범인 宗法制8)를 적극적으로 도입함으로써, 장자우 대 상속체계로 변경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양반주거 는 종손을 중심으로 한 문중의 사회적 체계가 행정적 통 제보다 더 우선한 규범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것을 여실 히 보여주는 속설이 ‘안동에서는 종손이 벼슬보다 낫다’는 말이며, 이는 族譜를 통해 체계화되었다.1
본 연구에서는 의성김씨 청계공파가 안동권에 정착하 게 된 입향과 분파과정을 분석하기 위하여, 문화인류학적 방법론에 의거, 우리나라 家系의 가장 정확한 기록유산인 氏族의 族譜를 통해 변천과정을 추적하고자 한다. 족보에 는 일반적으로 건축 유구에 명확히 나타나 있지 않는 가 계의 분파과정이 정확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를 바탕으 로 하여 가계의 구조를 파악함으로써 뜰집의 전후 맥락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뜰집의 건축 연원을 확인하되 건축연대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의 기준 을 족보의 분파를 통해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의성 김씨 뜰집의 초창과 증개축의 조영활동을 전기․중기․후기의 시기별9)로 나누어 안동권 뜰집의 변 천과정을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증․ 개축되어진 개별 뜰집의 공간적 변화에 대한 분석10)은2 제외하고, 주거유형의 배치11)의 분석만 포함하였다. 따라 서 뜰집의 변천을 분석하기 위한 본 연구의 진행은 의성 김씨의 계보를 파악한 후, 전기․중기․후기로 나누어 각 시기별로 어떤 조영적 특성이 있었는지, 즉 건축 활동 및 배치와 평면 구성의 변화를 분석한다.
의성 김씨는 안동권만 아니라 봉화군 지역12)으로도 이 거하였는데, 본 연구에서는 안동권의 의성김씨 청계공파 만을 대상으로 한다. 안동권의 의성김씨의 문중에서는 27 호의 뜰집이 건축되었는데, 그 중 안동댐 및 임하대의 건 설로 9호가 멸실되어, 연구대상인 뜰집은 18호이다. 본 연구의 도면 자료는 연구자가 작성한 선행 연구의 자료이 며, 족보의 조사 및 탐문13)은 2012년~2013년에 이루어 졌다.
2.의성 김씨의 안동 입향과 분파과정
2-1.의성 김씨의 형성
의성 김씨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넷째 아 들14)이자 고려 태조의 외손자인 의성군 석(義城君錫)을 시조로 한다. 8世공우(公瑀)의 아들 대에서 크게 번창하 였는데, 장자인 용비(龍庇)15)가 태자첨사(太子詹事)을 지 냈고, 차자 용필(龍弼)은 수사공(守司空)을, 막내 용주(龍 珠)는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16) 이후 4파로 분파 되었고, 첨사공의 후손이 안동문화권에 정착하였다.
2-2.의성 김씨의 안동 입향과정
의성 일원에 거주하던 9世龍庇의 후손 중 한 갈래가 안동에 입향하게 된 것은 공양왕 무렵 13世거두(居 斗)17)와 그의 아들 천(洊)18)이 함께 벼슬을 버리고 안동 풍산현(豊山縣)에 이주해 정착한 이후이다. 고려가 망한 이후 洊은 안동의 안동 읍내로 이거하면서 마을 이름을 방적동(邦適洞, 현 율세동)이라 하였다.19)
그로부터 洊의 증손이 되는 17世만근(萬謹)20)이 처가31 인 해주오씨의 세거지인 임하(臨河) 부근에 풍광도 아름 답고 생활의 조건도 좋은 내앞(천전, 川前)으로 옮겨와 정착했다고 한다.21) 따라서 14C중반에 의성에서 안동으 로 이주한 의성김씨 첨사공파의 한 갈래는 15C 후반에 안동권의 동쪽으로 이동해 이곳 내앞마을에 입향하여 가 문의 터전을 잡은 이후 후손들이 중흥되었다.
2-3.의성김씨의 분파과정
내앞마을에 입향한 17世萬謹의 후손은 19世璡(靑溪 公)의 아들 5형제가 모두 退溪의 문인으로 영남학파의 중심적 역할을 함으로써 가문의 명성이 남게 되었으며, 본 연구에서 대상으로 하는 의성 김씨는 모두 淸溪公후 손의 주거이다.
이들 다섯 형제 중 첫째와 둘째는 내앞마을에 세거했 으며, 셋째는 인근의 신덕마을(처가 입향)에, 넷째는 안동 서쪽의 금계마을(처가 입향)에, 다섯째는 예천의 금곡(처 가 입향)으로 이주했다. 내앞마을을 벗어난 세 아들은 모42 두 처가로 이주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증손대인 23世에 또 분파가 이루어졌는데, 첫째 藥峰의 증손인 방걸(邦杰)22)은 인근의 지촌으로 분파하 였고, 둘째 龜峰의 증손인 후(煦)는 안동 서쪽 율촌의 처 가로 입향했다. 또 셋째 雲巖의 증손인 방찬(邦贊)은 신 덕에서 임하로 분파하였다.
따라서 내앞을 기점으로 하는 의성김씨의 분파는 시기 적으로 20世와 23世에 크게 분파가 이루어졌으며, 지역적 으로는 내앞마을 인근으로 이루어진 분파와, 안동 관아를 지나 서쪽으로 멀리 이주한 분파로 구분할 수 있다.
20世의 세 분파는 모두 처가로 입향한 공통성을 가지 고 있다. 또한 내앞마을 인근의 임하면 일대로 분파한 경 우는 뜰집의 건축(13호)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멀 리 안동의 서쪽으로 분파한 경우는 뜰집의 건축(5호)이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5
3.의성 김씨의 뜰집 형성과정
의성김씨가 안동에 정착한 이후에 안동권에서 건축한 27호의 뜰집 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구는 18호가 있다. 이들의 각 시기별 뜰집의 건축 사례(Tab.4 참조)는 전기 (15~16C) 1호, 중기(17~18C) 11호, 후기(19~20C) 6호 로 그 시작은 미약했지만, 중기에 곧 급격히 확장되어 전 성기를 누리다가, 후기에 들어 현저히 건축 활동이 줄어 진 것을 알 수 있다.
3-1.前期(15~16C)의 뜰집 형성과정
조선 초에 안동의 율세동으로 이주하여 100여년 세거 한 뒤, 17世萬謹이 내앞마을로 입향한 것은 그가 進士 試에 합격한 1477년 이후라 볼 수 있다. 이때 건축된 주 거23)는 최소 二字型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둘째 아 들인 18世金禮範이 1540년경에 70여칸의 살림집을 건립 하였다고 학봉의 쓴 묘갈명24)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만으로 1540년경의 주택이 뜰집이었는지는 알 수 없 지만, 당시의 규모로 보아 안동의 임청각25)과 비교될 수 있는 유일한 주택이었을 것이므로, 뜰집으로 보아도 무방 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내앞마을로 입향한 이후 의성김씨의 건축 활동 은 16C전반까지는 한동안 적극적으로 이루지 못하였던 잠재기였다고 할 수 있고, 1567년에 현재의 규모로 증축 하였는데, 화재 직후인 1588년에 鶴峰의 주도로 70여 칸 의 종가를 복원한 것이 현재 남아있는 의성김씨 문중 최 초의 뜰집인 것이다.
3-2.中期(17~18C)의 뜰집 형성과정
내앞종가를 제외하고 의성김씨가 뜰집에 가장 먼저 거 주하게 된 사람은 1630년경 靑溪의 둘째아들인 龜峰의 후손인 23世김후(金煦)로서, 처가인 율리로 입향하면서 장인이 건축해준 뜰집인 율리종택(B4)26)을 물려받게 된 것이다. 율리는 靑溪의 둘째아들인 鶴峰이 입향한 금계와 인접한 곳이기도 하지만, 풍산지역의 풍부한 건축적 기 반27)이 형성되어 있던 곳이다. 이러한 지역에서 건축된 율리종택은 17칸의 완결형으로 규모와 구성 면에서 가장 일반적인 뜰집의 전형28)을 잘 보여주는 주거라 할 수 있 을 뿐 아니라, 원형이 변화되지 않고 유지된 초창당시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또한 靑溪의 다섯째 아들인 南岳이 예천으로 분가하여 宗宅(E1)29)으로 사용하고 있는 뜰집이 1634년경 건축되3 었는데, 원래 이 가옥도 의성김씨의 일가가 영위하고 있 던 뜰집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의성김씨의 뜰집 건축에 적지 않은 자극제가 되었을 것이다. 종가인 내앞종가야 종중의 중심 으로써 그러한 구성은 당연했었겠지만, 지차(之次)의 주 거가 뜰집으로 번듯하게 조영된 것은 17C의 의성김씨 내 앞 문중의 건축적 활동에 큰 자극적 계기를 마련해 주었 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반증하듯이 율리종택의 지척에 있는 금계에서는 鶴峰의 손자인 김시추(金是樞)가 17C 중반에 종가30)를 건축했다. 그러나 이 집은 水害후 1762년 移築하였기 때문에 초창 당시의 원형은 알 수 없다.
또한 내앞마을 인근에서 뜰집의 건축 활동을 보면, 1660년에 淸溪의 둘째아들의 종가인 龜峰종택(B1)이 건 축되었고, 23世방걸(邦杰)31)이 지촌으로 분파한 뒤 41세 인 1663년에 지촌종택(A3)을, 1678년에는 지촌에서 분가 한 오류헌(A4)이 건축되었다. 그 이전의 기간과 비교하면 매우 활발한 건축 활동이었다.
이러한 분위기가 지속된 18C에 건축된 뜰집은 모두 5 채이다.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16C말에 분가했던 운암종택 (C1)의 건축과 17C에 건축되었던 학봉종택(D1)이 수해 이후에 이전하여 현재의 뜰집으로 건축된 것이다. 이들은 모두 처가 입향한 곳이지만, 파종가로서의 위상을 확보하 기 위한 노력이 명확해지면서 뜰집의 필요성이 제기되었 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내앞(A7김시화)과 지례(A5국탄댁, A6치헌)에서는 지속적인 뜰집의 건축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조선 중기인 임난 이후부터 정조까지의 기간 동안에 의성김씨의 뜰집 건축은 모두 11채로 매우 적극6 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안동문화권에서 명확한 지도층 으로서의 자리매김을 한 청계공파의 사회적 지위와 이들 의 적극적인 경제활동의 결과로 볼 수 있는데, 뜰집을 이 상적 주거건축으로 명확히 받아들인 시기라 할 수 있다.
3-3後期(19~20C)의 뜰집 형성과정
조선 후기인 19C에는 5채의 뜰집이 건축되었는데, 2채 의 증개축을 포함하면 백 년 동안의 건축 활동으로는 가 장 적극적인 뜰집의 건축 활동 시기라 할 수 있다. 이 때 내앞마을에서는 세 채(A2, B2, B3)의 건축이 이루어졌는 데, 뜰집의 규모는 작지만, 전반적인 저변의 확대라는 의 미에서 뜰집의 보급화가 이루어진 시기라 볼 수 있다.
또한 지례로 분가한 지촌파의 후손들도 지속적으로 뜰 집을 건축하여 지촌에 모두 6채의 뜰집을 구축하였는데, 이 시기에는 한 채(A8)가 건축되었다.
금계로 분가한 학봉의 후손들은 종가를 몇 번 이전하 면서 보종에 노력을 많이 기울였고, 후손들이 두 채의 뜰 집을 이 시기에 더 건축했다.
그러나 20C에 들어와서 뜰집의 건축은 더 이상 진행되 지 않았다. 이는 신축을 요구하는 건축적 요구가 미약했 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제강점과 근대기의 사회적 변혁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뜰집을 조영하기 위한 전반적인 건축 활동을 보면, 전 기인 16C중반에 시작된 뜰집의 건축은 17, 18, 19C에 평 균 5~6채 정도 신축되었으나, 20C에 들어와 더 이상 건 축되지 않았다. 즉, 의성김씨의 뜰집 건축은 조선 전기에 태동하여, 조선 중․후기에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다가, 근 대 이후로 그 생산 활동이 멈추었다고 볼 수 있다.
4.의성 김씨의 뜰집 변천과정
4-1.前期(15~16C)의 뜰집 변화과정
임난 이전에 이루어진 가장 괄목할 만한 건축적 성과 는 내앞종가가 뜰집으로 건축된 것이다. 내앞마을로 입향 한 15C후반 이후로부터 70여년 뒤인 1540년경에 의성 김 씨 18世金禮範이 70여칸의 주거를 건축한 것이 뜰집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지만, 이는 화재로 소실되었다.
1587년 11월 23일 화재로 소실된 내앞종가의 복원을 주도한 사람은 鶴峰이었으며, 다음 해 완공했다고 그의 행장에 기록되어 있다.32) 당시 鶴峰(41세)은 전년에 사은4 사겸 종계주청사(謝恩使兼宗系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 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향리에 머물던 시기였다. 구전 에 鶴峰이 중국 북경에서 본 상류층 주택의 도본을 그려 왔는데, 내앞종가가 불이 나자 그 형식으로 건축했다고 한다.33) 그러나 학봉문집는 이 집에 대해 ‘一依舊制稍寬 廳事以復行事(옛 모습 그대로 지었다. 다만 대청만은 조 금 넓게 하여 일을 치르는데 편하게 하였다)’34)고 기술하 고 있다.35) 정확히 대청의 증축은 언급하고 있지만, 타 공간의 변화는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1728년 바깥사랑채가 철거되고 이 부재로 안대청 을 다시 개축하였으며, 1890년에 다시 작은 사랑채가 건 축됨으로써 현재의 모습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36) 따라 서 학봉이 완성한 구성은 방형의 안채와 재청으로 볼 수 있으며, 이후 바깥사랑채와 작은 사랑채의 변화로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랜 세월동안 많은 변화를 거치면서 주거의 생명력을 유지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앞종택의 유형적 근거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 다. 그 당시 안동권 및 경주권에는 이미 규모 큰 몇 채의 뜰집 사례37)가 존재하고 있었으나, 내앞종가는 지척의 임 청각과 같은 특수형을 모방하지도 않았다. 규모 큰 바깥 사랑채의 철거 이후에 안대청 일부를 용도에 맞게 증축한 것38)으로 파악된다. 그러므로 이미 口字形의 안마당을 갖 는 뜰집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으며, 鶴峰당시 에는 뜰집과 재청이 존재했었고, 바깥사랑채가 큰 규모로 있었으며, 바깥사랑채를 철거한 이루 작은 사랑채를 건축 하면서 현재와 같은 규모가 완성되었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근거는 학봉의 다섯 형 제가 모두 퇴계의 문인39)이었다는 사실인데, 이미 퇴계가 태어난 종택이 뜰집이었던 사실과 연관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존경하는 스승의 문중인 진성이씨 문중40)에는 이미 적지 않은 뜰집이 있었다는 것은 이들에게 주거유형의 기 본형으로서 뜰집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인가는 충 분이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다.
4-2.中期(17~18C)의 뜰집 변화과정
임난 이후의 혼돈 속에서 뜰집의 건축에 부심했던 의 성김씨의 뜰집은 이 시기에 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단독 주거의 변화과정은 적게 이루어졌지만, 대표적인 변화는 鶴峰종가(D1)와 南嶽종가(E1)의 변화를 들 수 있다.
鶴峰종가는 풍수적 터잡기를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대가 낮아 水害를 본 이후, 1762년에 인근의 대지로 이 건하였다. 이후 1842년에 현재의 규모로 개축되었으며, 1964년에 원래의 터전을 토목공사로 높인 후 다시 이전 했다.41) 16C에 입향하고, 17C에 터전을 잡은 이후, 비록5 이웃이지만, 300여년을 떠나 있다, 20C에서야 다시 원 터 전으로 돌아온 것이다. 의성김씨의 뜰집 변천과정 중 가 장 오랫동안 많은 변화를 거친 주거라 할 수 있다. 현재 는 원래의 주거에 사당 및 행랑을 더하고, 별당인 풍뢰헌 (風雷軒)을 옮겨와 대 장원의 구성을 이루고 있다. 원래 의 터전으로 다시 복귀하려는 이전 과정에서의 건축적 계 획의 기록은 家圖42)에 상세히 전하고 있으므로 이것은 학봉 및 그의 손자 김시추의 위업을 기린 후손의 건축적 염원이 구현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6
청계의 다섯째 아들인 南嶽은 처가인 예천권씨의 터전 인 금곡으로 입향하였고, 南嶽의 원래 사당은 예천권씨 종택(1589년 건축된 뜰집)이 있는 인근의 죽림리 내에 있 었다고 한다. 현재의 종가는 병자호란에 공을 세운 불구 당 김주(不求堂金辵主, 1606-1681)의 생가였다고 하는데, 그는 남악의 종질(從姪)이다. 즉 당시 의성김씨가 이 터 에 먼저 뜰집을 경영하고 있었던 것인데, 전주이씨가 매 입하여 태종의 10남 희령군 타(熙寧君袉)의 사당인 이 정사(夷靖祠)를 종가 동측에 건축한 것이 1792년이고 보 면, 그 즈음 전주이씨에게 매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한 이들이 증축한 사랑채도 그 당시 건축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뒤 전주이씨가 1945년경 가옥을 매도할 편이 되었을 때, 원래의 주인 집안인 의성 김씨에게 넘 기고자 했다고 한다. 현재의 종손 부친이 이렇게 하여 전 주 이씨로부터 남악종가를 매입했다.43)
따라서 조선 중기의 전반기에는 자연재해에 의한 이전 과 매도 등으로 인한 변화과정을 복잡하게 거친 시기이기 도 하지만, 문중이 자리를 잡게 되는 중반 이후에는 뜰집 에 대한 건축적 가치와 문중의 의지가 성숙되어 가장 왕 성한 건축 활동을 한 시기라 할 수 있다.
4-3.後期(19∼20C)의 뜰집 변화과정
19세기에 들어 뜰집의 신축은 주로 소규모로 이루어졌 지만, 뜰집의 개축는 대규모와 소규모의 뜰집에서 모두 이루어졌다. 우선 학봉종가(D1, 1842년)와 귀봉종택(B1, 1888년)의 개축은 파종가의 위상에 맞는 규모로의 변천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결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그 후손 의 번성을 반영하고 있다. 이 두 집은 모두 사랑채의 증 축이 이루어졌는데, 파종가의 공간에 있어 사랑채의 공간 적 요구가 가장 많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78
내앞마을에서는 재산종택(A2)이 1860년경 증축되는데, ㄷ字型안채의 전면에 사랑채를 포함한 행랑이 붙혀지어 진 것이다. 이 때 익랑의 칸 중앙에 행랑의 기둥 열을 세 운 증개축의 전형적인 구성으로, 기존의 공간에 추가할 때 나타나는 건축 時差44)의 대표적 예인데, 이는 ㄷ字型 주거에서 뜰집으로 변천하는 사례의 구조적 근거를 제시 하는 유형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 뜰집의 변화는 전반기에 있었던 사랑채 의 증축(A3, A4)만을 들 수 있는데, 이미 전반적으로 뜰 집의 신축이 멈춘 상황에서 생긴 소극적인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일제강점으로 인한 전통적 농경사회의 해 체를 통한 사회조직의 변화와 근대화로 인한 인구의 변동 등을 원인으로 하여, 뜰집과 같은 상류주거가 더 이상 요 구되지 않는 상황의 결과로 볼 수 있다. 더구나 1970년대 에 안동지역에서 대대적으로 건설된 안동댐과 임하댐의 건설은, 몇몇 문화재급 뜰집의 이전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뜰집 유구를 수몰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로 인해 의 성 김씨(지례리, 수곡리 9호)와 진성 이씨(의인리) 및 광 산 김씨(오천리) 등의 주거지에 있던 많은 뜰집이 수몰되 었는데, 문화재로 지정된 일부 건축물들은 고향을 떠나 이주지로 옮겨졌다.
반면 20C 후반기의 학봉종택(D1)의 원 주거지로의 移 轉(1964년)과 같은 변화는, 위와 같은 악조건의 건축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시기에도 보종(報宗)을 위한 의지가 원래의 종가터로 원상복구하게 한 매우 보기 드문 결과를 낳았는데, 이는 마치 전기에 내앞종가가 화재를 당하였을 때 전 문중이 협력하여 복구했던 결과와 동일시 할 수 있는 문중의 일대 역사로 볼 수 있다. 그만큼 의성 김씨의 뜰집에 대한 애착은 초창기부터 현재까지 각별했 다고 할 수 있다.
4-4.의성 김씨의 뜰집 변천과정
우선 안동문화권의 뜰집을 대상으로 분석한 선행연구 를 통해 유형적 기준을 보면 뜰집의 변천은 다양한 요인 의 분석을 통하여 파악할 수 있다. 우선 배치의 구성유형 의 변천을 분석한다.
선행연구를 기반으로 배치유형을 구분45)하면 완결형 10호(56%), 연결형 2호(11%), 분리형 6호(33%)이며, 전 기에는 완결형만, 중기에는 완결형과 분리형이 비슷하게 등장하다, 후기에는 완결형이 많이 나타나고 연결형이 증 장하는 특성이 드러난다.(Tab.8 참조) 이는 전반적으로 완결형의 건축경향이 우세하지만 중기에 분리형으로 변화 를 모색하지만 결국 완결형으로 정착되어가는 경향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분리형은 주거의 변용 즉 증축과 매 우 관련이 있는 것으로 후기의 연결형도 이와 같은 맥락 으로 보면 기존의 채를 증개축하려는 의지가 배치에 반영 되어 드러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적극적인 건축 활 동이 배치의 변형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평면의 변화는 조선 중기 이후의 일반적인 특징인 툇 집 혹은 겹집화의 경향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뜰집과 같 은 큰 규모의 구성에는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특징으로 보 기 어렵다. 왜냐하면 가장 초기에 만들어진 내앞종가에서 이미 겹집과 툇집의 공간 구성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 다. 이는 조선 전기에 이미 규모 큰 주거에서는 겹집의 구성을 취했다는 것으로 조선 이전에 이미 겹집의 구축적 기법이 축적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겹집은 가계의 규모에 따른 선택적 요인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안채의 구성유형에 따라 민가형(一字型, 4호)과 중부형(ㄱ字型, 12호)46)으로 구분되는데, 이 또한 규모의 특성에 따른 구성이라는 속성 이외에는 어떤 의미를 찾기 어렵다. 안채의 변화는 화재나 이전 등으로 인한 완전 개 축 이외는 변화가 된 사례가 없으므로 거의 변천이 없는 고정적 공간요인으로 보아도 무방하므로 안채의 구성요인 이 뜰집의 변천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 므로 공간의 변화는 앞에서 고찰한 사랑채의 증개축에 따 른 배치의 변화가 가장 큰 유형적 변화의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랑채는 유형적 변천에 가장 많은 변화의 요 인을 가진 공간으로서 초장(1634년) 이후 사랑채의 증축 (1792년)이 가장 먼저 이루어진 남악종택(D1)의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19C 중반 이후인 조선 후기에 사랑채의 증축이 이루어졌다.(A1, A3, A4, B1, D1, Tab.7에서 증 축이전의 평면을 점선으로 표시) 따라서 사랑채의 변천은 뜰집 변천의 가장 중요한 유형적 변천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의 특징은 A계열을 제외하면 모두 파종가(派宗家)의 뜰집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결국 뜰집 변천의 중요한 변 화는 종가 및 파종가의 사랑채 증축으로 귀결될 수 있다.
이러한 사랑채의 변천은 초기의 소규모 사랑채에서, 중 기 이후에 종법제의 정착으로 종가 및 파종가의 역할이 커지면서 奉祭祀와 賓接客을 위한 사랑공간의 요구가 적 극적으로 건축 활동에 반영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Tab.10의 각 시대별 큰 규모의 뜰집이 모두 종가 및 파 종가인 A1, B1, C1, D1 E1이 모두 25칸 이상의 큰 규모 의 뜰집인 것으로도 잘 드러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30칸인 A4 또한 파종가로거의 역할을 한 규모 큰 뜰집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의성 김씨 뜰집의 변천에 따른 시대 적 요인은 뜰집의 신축 규모의 변천을 들 수 있다. 뜰집 의 변천에 있어 공간유형의 변화가 주는 의미보다 신축 규모의 변천의 분석은 보다 의미 있는 결과를 제시한다. Tab.10에 나타나는 백년 단위로 본 가장 큰 규모의 뜰집 은 50>40>30>22칸으로 나타난다. 건축 규모의 평균으로 보더라도 17~19C의 규모가 26>18>16칸으로 변천해 가 는 것은 상기의 조선 후기에 부농층의 확대와는 전혀 다 른 방향으로 변해가는 것으로서 매우 특이한 변천이라 할 수 있다. 즉 뜰집의 신축 규모가 점차 작아진다는 것이 다.47) 조선 전기에 50여 칸의 규모로 시작했던 뜰집의 규모를 점차 축소하여 건축한다는 것은 매우 재미있는 특징 이다. 이는 종가(혹은 큰집)로부터 分家한 之次의 집들이 건축되면서 큰 집 보다 작은 집을 건축할 수밖에 없는 종법제에 따른 分財의 특징이 평균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의성김씨의 뜰집의 변천의 특징은 종가 및 파 종가의 사랑채 확장과 분가 규모의 축소로 볼 수 있다. 이는 안동권의 지도적 역할을 했던 의성김씨 문중이 조선후기로 갈수록 중앙에서 세력권을 확장하기 보다는 향리 를 중심으로 세족이 정착되면서 종가 및 파종가들의 역할 이 강화되면서 주거 내에서 사랑채의 규모가 커지는 일 면, 지손들의 분가가 이루어질 때에는 점차 소규모로 건 축하면서 향반(鄕班)화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5.결론
본 연구는 안동권 의성 김씨 청계공파의 뜰집을 대상 으로 그 변천을 조선초~현대까지의 기간을 대략 2세기 씩 삼분하여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 분석한 결과 다 음과 같은 특성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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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인 15~16C에는 입향과 분파에 의해 씨족의 정 착이 완성된 시기라 할 수 있다. 15C에는 주로 입향과정 을 거쳤고, 16세기에는 종가가 있는 내앞마을로부터 의성 김씨 20世의 파종가들이 분파되면서 주거영역의 확장이 이루어졌다. 그 세력은 종가를 중흥시키는 힘이 되어 비 로소 의성 김씨 문중 최초의 뜰집인 내앞종가가 완성되었 다. 이 뜰집은 의성 김씨의 사회적 위상을 표상하는 최고 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짧은 기간 동안 초창과 중창이 이루어진 것으로, 뜰집의 공간적 가변성을 보여주 는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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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기인 17~18C에는 다시 23世의 분파가 심화되면 서 각 계파에서 뜰집의 초창과 중창이 활발히 일어난 시 기로, 대부분 파종가의 형성이 이루어진 시기라 할 수 있 다. 이는 종법제의 적극적인 수용으로 종가 및 파종가에 씨족의 중심 역할이 집결되어지는 유교적 사회체제의 영 향으로 볼 수 있다. 이때의 건축적 특징으로는 배치 유형 의 완결형과 분리형이 모두 활발히 이루어진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뜰집의 건축적 욕구가 매우 적극적이었던 결 과로 볼 수 있는데, 그만큼 뜰집의 주거유형의 전형으로 적극적으로 선택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건축적 요 구의 계기는 陽으로는 퇴계학파를 잊는 학문의 맥을 통 하여 뜰집이라는 주거의 전형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 고, 陰으로는 통혼을 통하여 처가 및 외가의 건축적 분위 기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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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인 19~20C에는 점진적 쇠퇴기로 볼 수 있다. 19C에는 중기와 비슷한 건축 활동이 적지 않게 지속되었 지만, 내용적으로는 이미 왕성한 활동기를 넘은 소규모의 신축활동과 사랑채를 위주로 한 증축이 많았던 시기이다. 20C에 들어서면 완전한 쇠퇴기로 신축 활동은 없어지고, 증축 위주의 소극적 건축 활동이 있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이는 근대기에 들어 사회적․기능적 요구가 거의 다한 뜰집의 말년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과정을 종합하여 다음과 같은 변천의 특성 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에 강력한 문중의 구심점으로서 의 종가가 형성되어 유형적 모본으로서 조선 중기에 지속 적으로 뜰집을 구축해 나갔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초 창 건축 규모의 축소 경향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조선 후기에 의성김씨가 지방 토호로 정착하면서도 더 이상의 세력의 확장이 이루어지지 못하였지만, 가계의 번성을 통하여 저변의 확대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 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문중의 구심점인 종가 및 파종 가들은 사랑채의 증축을 통하여 규모를 확장함으로써 강 력한 건축 의지를 조선 후기까지 지속적으로 표출하였다.
따라서 의성 김씨 청계공파의 뜰집은 조선과 함께 그 명맥을 유지했던 대표적인 안동권의 상류주거인 뜰집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