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 론
1-1.연구의 배경
인천의 구도심에서 무엇을 보존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 는 의문의 여지도 없이 개항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었 다. 인천에 대한 많은 기존연구도 그러하였고, 등록되어있 는 문화재 분포상황을 보아도 그러하다. 관공서, 은행, 무 역사무소 등의 관리시설들을 중심으로 연구되어 왔었고, 이러한 관리시설 배후의 근대 주거 생활 및 노동환경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근대시기 산업지역에 대한 연구는 매우 부족하다.
한국에서 이러한 산업 지역에 대한 관심이 시작된 것은 1998년 ‘문화산업진흥기본법’을 제정하여 문화산업진흥을 위한 법률적 기반을 조성하게 되면서, 버려진 역사공간을 활용하고자 하는 활발한 움직임이 나타난 것을 그 시작으 로 볼 수 있겠다. 특히 문화관광부에서 진행하는 예술창 조벨트사업은 산업유산을 재활용하여 문화적 창작공간을 육성하는 대표적 사업으로, 역사자원인 문화재와 도시재 생 그리고 문화적 활용을 함께 고려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프로젝트이다. 그러나 산업유산의 이러한 점적 형 태의 활용은 총체적인 장소성의 인식이 결여된 채 행정이 나 예술 프로젝트 중심의 운영방식으로서의 한계를 벗어 나지 못하고, 역사와 생활의 대상이 아닌 문화 예술의 거 점으로 인식되면서 지역근대자산으로서의 가치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 산업유산은 건물 하나만으로서는 관공서 건 물처럼 그 의미를 인정받기 어렵지만, 특정산업의 유통을 지원하던 철도나 항만, 인력파견업, 노동자숙소등의 통합 적인 도시구조가 남아있다면, 산업유산의 당시 산업프로 세스와 관련 인문, 사회학을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지역자원이 된다. 산업유산은 특히, 다른 유산에 비해 물류의 이동을 기반으로 한 지역과의 유기적인 관련 성을 갖기 때문에, 이러한 장소성이 연구되지 않은 상황 에서 건축물만의 구조적 혹은 양식적 가치 등으로만 건물 의 보전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산업유산의 경 우는 특히 일제강점기의 조선인 노동자의 삶의 장을 보여 주는 사택이나 공동숙박소등과 같은 생활공간들과 함께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더욱 중요하다. 장소성에 맞지 않는 용도로 활용하거나 관계없는 문화 프로그램에 기반한 산 업유산의 개별적 보전은 역으로 개항도시의 정체성을 잃 은 도시재생을 만들어가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산업유산의 가치는 공장 건물자체가 아니라 도시를 형 성하는 건물과 건물의 관계성에 있다. 어떠한 이유와 어 떠한 과정으로 그러한 분포를 갖게 되었는지에 대한 통합 적 분포상황을 밝히는 것이 다른 문화유산과는 다른 산업 유산의 중요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통합적 보전의 방향성은 이미 1975년의 암스테르담 국제회의의 통합적 문화재 보전(Integrated Hertiage Conservation)에 서 언급되기 시작하여, 지속적으로 문화재와 그 주변의 사회, 문화적 관계, 그리고 관련된 사람들의 삶을 함께 알 수 있는 환경까지 통합적으로 보는 관점, 그리고 보존 뿐 아니라 관리에까지 더 포괄적인 영역으로 확장되어 오고 있다.2)1
이러한 통합적 보전은 특히 산업유산의 경우 지형적 특 징, 지원 인프라 위치에 따라 관련 산업시설들이 분산되 어 분포되어 있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관련 시설 들을 함께 통합적으로 보전하는 정책이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흐름을 매우 잘 보여주는 사례로 2007년의 일본 경제산업성의 ‘근대산업유산군 33’의 리스트를 들 수 있 다. 작성을 주관한 니시무라 유키오(西村幸夫) 교수는 역 사적 환경중에서도 특정한 역사적 경관에 관하여 개개의 건조물 그 자체가 특별히 중요하다고 평가되지 않는 장소 에 있더라도 일정한 건축양식을 공유하는 건조군이 주변 과 일체가 되어 특유의 분위기를 형성하고 지역에 건축적 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는 집합적 건조군 의 평가를 위한 새로운 평가기준이 필요하다고 말하였 다.3)
즉, 산업유산은 물리적인 인프라의 개발과, 생산물을 만 들어낸 공장시설군의 결과물일 뿐만 아니라, 생산을 하기 위한 프로세스를 보여주는 과정, 그리고 그 속에서 노동 운동으로 장소성을 만들어간 한국 노동 커뮤니티의 발전 을 보여주는 장소였다는 점에서도 그 가치가 있다. 근대 건축문화유산들에 대해 서구문물의 유입이나 일본 근대시 설의 유입이라는 수동적이고 기능적인 접근이 아닌, 당시 한국의 노동자들과 일본인 관리자들의 갈등관계의 핵심이 되었던 정미업, 정유업과 같은 근대시설에 연구가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이에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 정미업을 중심으로 한 공 장, 철도, 지원시설등을 통합적으로 살펴보고 그 지리적 분포 특성과 현황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정미업의 전체적인 유통과정을 파악하고, 정미업의 산업 특성이 가장 잘 들어나는 통합적 산업유산군의 형태를 찾 아내는 것이 이 연구의 목적이다. 특히 인천에서도 중요 하게 다뤄지지 못했던 배후서민지역이 조계지지역과 연계 하여 어떤 산업경관을 가지고 있었는지 정미소를 중심으 로 한 산업시설군의 통합적 도시구조를 밝히고자 한다.
1-2.연구의 범위 및 대상
연구의 시간적 범위는 정미소가 설립되기 시작한 개항 시기에서 활발한 확장기를 거쳐 점차 사라져간 해방이전 까지이며, 공간적 범위는 인천의 구제물포인 중구와 동구 로 한정한다. 정미산업의 역사적 확장과정을 살펴보고, 구 제물포의 도시구조와 연계하여 그 분포의 특성을 밝히어 유통과정 및 정미산업의 특성을 도출하고자 한다.
특히 인천에서는 Table 1과 그림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구도심의 개항조계지지역(붉은색표시)과 그 배후 서민주거지(철도윗부분)가 철도와 도시발전과정상에서 매 우 단절적으로 형성되어 왔기 때문에, 도시보전 정책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개항조계지역 중심의 서구문화와 일본 관리자 문화에 집중되어 진행되어 왔음을 Table1 과 같은 문화재 등록상황이나, 2011년에 지정되었던 역사문화지구 지정이 개항장 주변에만 국한되어 있는 현황을 통해 알 수 있다.
특히, 인천역 앞에 위치하는 인포메이션 센타에서 공급하 는 지도를 보아도 개항장을 중심으로 한 근대문화재를 위 주로 안내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개항당시의 서양인과 일본 관리자인등의 외국인 생활 및 관리시설에 국한된 문 화지구에 한정된 것으로, 당시 조선인 노동자의 삶과 인 천 산업유산의 통합적인 구조를 보여주기에는 불충분한 구역설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인천의 개항지 배후 지역이라 할 수 있는 동구는 산업유산을 둘러싼 교통 및 주거 환경, 상업 및 유통 시설의 통합적 역사자원들이 상 대적으로 많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보존과 활용 에 있어 매우 제각각이고 단발적으로 조사되어 있기 때문 에 도시적인 통합적 구조형태를 파악하고 그 보존정책을 수립하는 것은 매우 시급한 과제라 할 수 있다.
특히 산업유산의 경우는 생산을 담당하는 공장 건물 뿐 아니라, 저장 및 유통과정에 관여하는 기타 부속건물 및 시장, 철도, 노동자 지원숙소등 다양한 생활시설들이 함께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통합적 공간을 함께 보전하 는 것은 당시 인천 산업유산의 유통과 노동자의 삶을 전 달하는 문화재로 작동할 수 있는 중요한 필수조건이다.
연구방법으로 문헌자료와 옛 지도들을 기반으로 정미업 관련시설들의 옛주소를 정리하여 당시의 통합적 배치 상 황을 분석하고 현지 답사를 통해 현재 존재유무와(지도상 으로 현재 건물이 남아있는 경우는 면표시, 남아있지 않 은 경우는 점선으로 구분표시)하고 활용상황을 조사하였 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쓰여졌던 인천의 대표적 문헌들과 당시 신문 사료등을 바탕으로 정미업을 중심으로 벌어진 인문, 사회적 사건들도 함께 조사하였다. 이처럼 정미업의 유통과정과 관련 시설을 통해 구제물포의 산업도시를 구 성해나가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인천 정미업의 배치 특 성 및 그 장소성을 파악하고자 한다. 이는 산업유산을 중 심으로 분산된 자료들을 장소 중심으로 종합하여 정리하 고 한 장소에 어우러진 정미업 관련 지원시설들을 함께 찾아봄으로써 근대시기 조선 노동자의 서민생활의 중심이 었던 정미업 관련 산업유산의 통합보전을 위한 유기적 공 간구성을 찾아보는데 그 의의가 있다.
1.3.용어정리
현재의 제물포역(1959년 준공)의 위치는 원도심의 옛 지도에 표현되는 원래 제물포에 해당했던 현 중구와 동구 지역과 차이가 있다. 제물포는 원래 지금의 자유공원을 중심으로 넓게는 중구와 동구 지역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1959년에 신설된 새로운 역에 제물포라는 인천 구도심의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이에, 원래 개항지의 중심이었던 중구, 동구 일대의 제물포지역과는 다르므로4) 본 논문에 서는 이러한 혼란을 없애기 위해 본 논문에서는 구제물포 라는 용어로 통일하여 사용하도록 하겠다. 공장이름의 경 우는 해방이후 여러번 이름을 바뀌었으나 많은 경우 일제 강점기시대의 공장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일제강 점기 시기의 대부분의 자료가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본용어로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다. 또한 나가야 와 같이 일제강점기에 일본형식으로 지어진 주거건물에 대해서는 조선시대의 장옥과 구별하기 위하여 나가야라는 일본식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2.인천 산업유산군으로서 정미업의 특성
2-1.인천 산업유산에서 정미업의 의의
민족상인들의 자본을 바탕으로 한 근업소(1907년설립) 는 민족 상인협회인 신상협회(객주)와 협력하여 쌀의 유 통을 주도적으로 담당하였다. 조선총독부의 도량형규칙5) (1905)가 공포로 1908년 일본인 협회인 조선곡물협회가 만들어지면서 1912년의 도량형법개정을 통해 전국적으로 통일적인 곡물유통이 시작되었고, 6) 조선인 정미업과 일 본인 정미업간에 강한 대립관계가 형성되어 갔다. 조선인 정미업은 이후 점차 유통세력을 잃어가다가 조선총독부의 곡물검사제(1935)가 실시되면서, 조선정미업의 중심이었던 근업소는 문을 닫게 된다.7) 이후 정미업은 급격한 쇠퇴기 에 접어들지만, 60~70년대까지 그 명맥을 이어왔었다. 인 천의 정미업이 1889년 인천정미소를 필두로 시작되었음을 감안할 때 인천 산업에서 매우 장기간의 역사를 갖는 산 업으로서 의미가 있다. Table2 표에서 알 수 있듯이, 1897 년의 주요 수출품의 수출액을 살펴보면, 쌀을 통한 수출 액이 압도적으로 컸으며, 당시 소가죽을 제외하고 대부분 의 수출품이 곡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3
상공회의소90년사에서는8) 1910년에 겨우 6개소에 불과하 던 정미소가 1932년에는 32개소로 확장하였다고 적고 있 다. 이처럼 20년대에 매우 급격한 성장과 팽창을 보여주 는 산업이 정미업이다. 특히, Table2의 1934년의 인천부 내 중요품 생산고를 살펴보면9) 이중 산미증식계획에 따 라 1920년대 중반에 들어온 제분업10)을 제외하고는 정미 업이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다음으로 양조 업, 장유업등이 생산고의 주요한 품목임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많은 자료에서 정미업의 발전과 통계적인 수치 들을 통해 정미업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인천의 구도심에 형성되었던 정미업의 소유주와 옛 주 소들에 대한 자료는 여러 자료에서 분산적으로 보여 지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정미업의 공간적인 그리고 장소적인 분석은 기존연구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2.2.정미산업의 입지특성
니시오카 히사오(1976)11)는 공장의 입지 결정의 삼단계 를 1) 목표시장결정 2) 출하하는데 합리적인 지리적 단위 의 결정 3) 그 단위속에서 원재료등을 고려해서 지점선택 이라는 세 가지로 설명한 바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인천 정미업의 경우엔 원료지향형 산업이긴 하지만, 이러 한 일반적인 공장입지 결정단계보다는 지방에서 곡물을 옮겨와 인천에서 가공하여 해외로 반출시키기 위한 목적 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일반적 이론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 다. 또한 개항도시에서의 정미업의 입지는 개항 후 기본 적인 인프라가 만들어진 직후 들어온 매우 초창기 산업이 기 때문에 50년대 이후의 공장들이 도시 외곽지역에 뻗어 나가는 일반적 현상과는 매우 다르다. 구도심 중심지역에 서 확산되어갔던 개항이후 정미업의 입지를 살펴보기 위 해 정미업이 가장 활성화되었던 1910-20년대에 크게 확장 되었던 신흥동 및 만석동의 입지를 기준으로 정미업의 입 지 특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산업적 특성에 따른 입지론이다. 산업의 속성에 따라 원료지향형(생산지 가까이에 위치)인가, 유통중심의 시장지향형인가, 아니면 운송지향형(교통이 편리한 곳에 위치)인가로 나눌 수 있다. 정미업과 같은 농림수산물은 가공하게 되면 그 원료가 중량감소하여 부피가 줄어들게 되며, 시간에 따라 부패되기 쉽고, 결과물에 비해 초기 운 송비가 많이 든다는 어려운 특성이 있다. 결국 이러한 특성 때문에 정미공장은 원재료에 가깝게 입지하거나 철 도에서 멀지않은 곳에 위치하여 운송비를 최소화하는 것 이 입지에 가장 유리하다고 파악된다. 즉, 정미업은 쌀의 집산지로서항구에 가까워야한다는 특성과 가공산업에 필 요한 철도인프라와 시장의 입지, 특히, 출하하기 위한 인 천항과의 위치설정이나, 재료를 운반하기 위한 경인선 철 도와의 최적위치가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천 정미업의 경우도 초기 운송비를 되도록 줄일 수 있 는 항만이나, 철도와 근접하고 세관창고 시설에서 가까운 위치인 신흥동에 정미공장을 배치하는 것이 효율적이었으 며, 인천에서 가장 활발하게 정미산업이 분포하고 성장해 나간 공간이라는 점은 이러한 이유라고 볼 수 있겠다. 또 한 만석동 역시 철도 및 항만 인프라와 매우 가까웠다. 이러한 정미업의 입지는 매립의 역사와 함께한다. 1895년 의 첫 번째 매립인 인천역 주변에 이어, 1899년 중구 앞 해안간척을 통한 창고시설군의 설비를 갖추면서 산업을 위한 인프라를 갖추게 된 인천은 이어 1905년의 만석동 매립에 이어 각국 조계지앞 해안일대를 매립하면서, 일본 상인을 중심으로 정미업을 만들게 된다.
두 번째로, 정미업은 출하 및 운반에 필요한 노동인 력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위치에 그 입지를 선정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기존에 존재하던 조선인마을과의 관계성에 서 그 근거를 찾아 볼 수 있겠는데 고종황제 때 서해안 방어를 위해 형성된 화도진 마을은 만석동과 그 위치가 가까우며, 또한 해안주변에 위치하였던 어촌 마을과의 관 계도 그러하다. 신흥동 주변에는 탁계현이라는 옛이름이 남아있고, 인천사정에서 언급하길, 첫 번째 영국 교회가 조선인과 중국인들을 위해 1885년에 무료 의료봉사를 실 시했다는 기록이 나온다.12) 이처럼 정미업은 운송을 위해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기존 조선인들이 살 던 마을 주변에 형성되어있던 인프라와 수송자원, 그리고 노동인력을 활용하여 확장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조 선인의 노동력을 바탕으로한 정미업의 위치는 초창기에는 외국인 거류지에 가깝게 위치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 차 배후지로 확장되어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곧 일 본인의 생활중심지가 조선인 생활지역까지 팽창되어오는 과정과 병행한다. 이러한 정미업의 공간은 일본인 관리자 의 삶과 노동자의 삶이 대립적으로 함축되어 있는 공간의 반영으로서 가치가 있다.
세 번째로 산업은 그 유통과정에 있어 유리한 지리적 입지를 선호한다. 조선시대 시장의 규모는 하루왕복거리 인 30~40리에 하나씩으로 인천 전체 중에 부평 황허장터 에 있었다는 고종실록의 기록을 고려할 때, 정미소가 처 음 생길 당시 유통의 거점으로 고려할 만한 곳은 없었다. 이에 중국인과 서양인들의 거주가 많았고 중국인 상권이 활성화되었던 인천역 부근보다는 노동공급에 수월하도록 조선인 마을에 근접하고, 유통과 시장형성(당시 큰 어촌시 장으로 발달했던 신포시장)에 유리한 신흥동이 더 적합했 다고 보인다.
이러한 유통망의 형성 특성에 대해 아카하네 다카유키 교수는 내재적 관성13)이란 용어로 설명하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지방의 공장분포를 설명하는 경우 중요한 것은 공장의 입지가 역사적 과정속에 지리적 관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한 지역의 지리적 현상은 처음에는 유리한 조건 에 의해 생기지만, 그 다음부터는 시대의 변화에 의해 결 정적인 입지조건이 달라진다고 하더라도 그 전통-공장시 설, 기술, 노동력 등을 유지하고 있는 지역에 존속하는 경 향이 있다.14) 이러한 경향은 개항이후 신흥동에서 형성된 일본인 운영자들에 의한 정미업 산업의 지속적 발전경향 과 내리를 중심으로 지속되었던 조선인 정미업자들의 장 소적 관성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처럼 운송, 교통수단의 미발달 단계에 작은 시장을 대상으로 입지한 공장도 그 이후 역사적 변화속에서 유통망의 유사성이나 교통수단의 발달 및 친분관계 형성등의 이유에 의해 일정기간 지속적 으로 입지해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근대이후에는 냉동기술이나 운송수단의 발달에 따라 원료의 유동성은 커지고 있지만, 여전히 입지의 역사적 관성이 작용해 그 관련성이 남아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특성에 의해 정미업은 초기에는 인천의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간척지 위에 설립되었지만, 급격한 환경 및 교통변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미공장의 입지와 유통과정은 신흥동지역 주 변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해나가며 관련 부속 시설들을 생 성해나갔다.
2-3.인천 정미업의 전체적 분포
인천 도시의 발달과정에 따른 해안매립의 상황, 노동조 합의 설립과 정미관련 조직 및 공장설립의 상황, 그리고 그 입지에 따른 분포상황등을 종합해 볼 때, 정미업의 전 개에 대한 시기구분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이러한 세 가지 시기분류는 명확히 지역에 따라 나누어지 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정미업 설립 초기에는 입지에 유리한 장소로 결정되지만, 그 이후부터는 앞에서 언급한 내재적 관성의 이유, 인천의 예에서는 일본인 정미소는 일본인 소유자들간의 친분관계로 주변에 모이게 된다거 나, 관리를 용이하기 위해 입지하는 등의 다른 이유들로 지속적으로 새로운 정미소들이 유입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친분관계는 상공회의소의 회 장인 오쿠다 테이지로15) 와 같은 대표 멤버들이 정미업에 관련있는 일본 상인들이라데서 드러난다. 30여 년 간 정 미업에 종사했던 온 오쿠다 테이지로(奧田貞次郞)의 말에 따르면, 1888년에 한국이 흉작으로 먹을 쌀 공급이 부족 함이 알려지자, 일본에 거류하는 쌀 취급업자들 중에는 일본으로부터 현미를 수입해 오는 일조차 있었다고 한다. 다음해인 1889년에 일본이 흉작이 되자, 조선쌀이 수출되 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출은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 다.16) 이러한 수출의 증가와 함께 더 많은 일본 사업가들 이 들어오게 되었고, 1890년대말부터 1900년대 초는 이러 한 초창기 일본인 정미소 설립과 함께 기반시설이 정비되 는 시기로 판단된다.
첫 번째 시기는 송학동 정미기반시설정비기로 인천정미 소, 타운센트 정미소, 리키다케 정미소등이 설립되는 시기 이다. 인천항에서의 정미업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도 운송과 저장의 필요성, 그리고 노동력 확보라는 요인 에 의해 정미소의 위치가 결정되었다. 처음 인천에서 자 리잡은 인천정미소나 타운센트 정미소도 지금의 지형으로 서는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내륙에 위치하지만, 이 지역의 매립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개항 당시의 지형을 고려하면 항구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 시기는 신흥동 정미소로의 확장이며, 해안을 매립하게 되면서 빈정의 리키다케 정미소를 필두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던 가토 정미소를 비롯한 정미소군이 들 어서게 되면서 배후 산업도 이곳을 중심으로 들어서게 되 었다. 지금도 신흥동 1가, 2가에는 그 당시의 정미업의 영 화를 보여주는 창고군들이 많이 남아있는데 신흥동 2가에 있었던 정미소 창고군은 거의 빌라로 변하였으나 아직 남 아있는 창고들이 다른 용도로 사용되면서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 시기에는 대표적인 사례인 신흥동 이외에도 북 성동, 만석동 지역을 들 수 있는데 1905년에 만석동 매립 을 계기로, 1910년대 중반에서 20년대초 사이에 츠지가와 (1914), 소노다정미소(1927), 등이 북성동에 아리마정미소 (1919), 사이토정미소(1919), 아오키정미소(1925) 등이 만 석동에 세워지게 된다. 1921년 조선총독부훈령에 의해 산 업조사회 17)가 설치되고 상공회의소 설치의 기틀이 마련 되면서, 조직적인 일본인의 정미업 진출이 두드러지게 나 타났다. 새롭게 매립한 땅에는 일본 사업가들을 중심으로 정미업들이 세워지게 되고 인천곡물상조합이 창설되어 정 미업은 활황기를 맞게 된다18)
1903년도에는 인천미곡동업자들이 협의에 의하여 해외 수출필요상 검사를 진행하기로 하였는데, 이것이 조선에 서의 미곡검사의 효시다. 19) 1902년 설립된 공익조는 쌀 매매조합이기는 하나, 앞의 수출조합과는 다르게, 인천에 한해 한국인들로부터 쌀을 대량 매입하여 이것을 경매에 부처 이윤을 취하는 단체20)였다. 향토조사자료는 이 공익 조가 곡물협회(1908.03) 의 전신으로 언급하고 있다. 21) 이 시기에는 조선인이 설립한 정미소도 눈에 띄게 많이 증 가하는 것을 다음 페이지의 표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이유 는 1914년에는 「회사령」의 시행규칙을 개정하여 회사설 립의 허가조건을 완화22)하여 그동안 정미업을 열고자 하였 던 조선인들이 갑작스럽게 허가를 받으면서 급증한 것으로 해석된다. 23)
세번째 시기는(1920년대이후) 이흥선 정미소, 대륙정미 소, 주명기 정미소를 필두로 조선인이 소유주인 정미소가 유동에 모이는 시기가 된다. 이전의 두 번째 시기가 조직 적 일본인 정미소, 그리고 분산적인 조선정미소가 세워지 는 시기라고 본다면 이 세 번째 시기는 회사령개정과 함 께 급격힌 증가한 조선인의 자본이 장소적으로 모여들어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시기로 볼 수 있다. 당시 조선 인이 정미소를 세울 수 있었던 이유로는 1920-1924년의 조 선총독부의 조선산미증식계획에 의해 급속히 정미소가필요로 했던 시기였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Fig2.지도에서 표시된 조선인 마을 위쪽지역의 화평동지역에도 조선인소 유주인 김태훈 정미소 등이 세워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1938년 동아일보에 따르면, 인천부내에 산재한 조선인 경영인 백미소매상인은 70여명의 다수에 달하여 업자간의 공동공영을 도모하기 위해 공업조합령에 따라 인천정미동 업조합을 창설하게 되었다고 한다. 24) 즉, 이러한 세 번째 시기에 집중적으로 발전되게 되는 민족자본의 정미소는 이러한 정미동업조합을 기반으로 하는 노동조합을 형성시 키는 중요한 기반이 된다. 이는 초창기에 민족 자본이 객주를 기반으로 한 포목상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흐름을 바꾸는 중요한 변화로 정미업과 장유업중심으로 민족자본의 흐름이 재편되는 것을 의미한다.
2-4.인천 정미소군의 유통과정
인천 정미소군은 전체적인 유통경로를 살펴보자면, 쌀 의 생산지는 경기도 및 황해도, 충청북도, 강원도 일부가 있고, 이러한 원산지에서 쌀 및 대두를 사들여 무게별로 포장하고 이를 기차 또는 연안선으로 인천에 모아, 일부 가공한 후에 대부분은 내지에 이출하였다.25)
소비지는 경성, 용산, 인천 등 조선각지 및 북청( 北 清)26)이었다. 특히 1905년 이후의 상황은 각지에서 정미 기관 창설의 결과, 점차 감소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북청일대의 수요가 매년 증가하고 있어 인천항에서 따렌 으로 수출하는 조선백미의 양은 전혀 감소하지 않았다.27) 개항지에서 쌀을 매매하는 경우의 유통과정에 대해서 1939년의 동아일보에서 언급하고 있다. 쌀이 인천으로 들 어오는 경로는 전국에서 쌀을 싣어 철로를 통해 인천으로 운반하여 세관구내로 전용 화차에 실어 보관한후, 검사소 에서 검사를 거쳐, 다시 선적하여 정미소로 운반하는 과 정을 거쳤다고 한 다. 이러한 운반 과정에는 모군청이라 는 인력파견에 관계하는 기관에서 담당하였는데, 이중 영 신조는 외항선 하역에 종사하는 노무자들로, 창신조는 국 내 연안선, 인신조는 철도역 창고 등에서 미곡운반 종사 하던 노무자들로 각각 구성되었다.28) 또한 그 수출 이출 의 곡물은 일반 곡물과 함께 지방원산지에서 보내온 것 을 일단 해안의 두량장(斗量場)29)에 올려서 이곳에서 두 량 포장으로 바꾸어 수출하는 형태이다. 이때 배에서 육 지를 옮기는 운반비용 및 도량한 후 정미소로 옮겨가는 비용은 전부 구매측이 부담하였으며 철저한 품질감정이 필요없는 검사품인 경우는 배에 적재한 상태로 취인하여 구매인이 끌고 정미소까지 가져갔다는 기록이 있다. 30) 쌀을 이출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정미소에서 선적하여 일 주일간은 세관의 미곡창고에 무료로 보관할 수 있었기 때 문에, 구매인은 세관창고에서 백미를 사서 다음의 배편까 지 보관하는 것도 비교적 용이했다. 또한 항구에서 선적 을 할 경우에는 미곡창고에 입고한 경우나 직접 선적한 경우나 취인가가 동일하였기 때문에, 미곡창고를 많이 이 용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3.인천 정미업군의 형성과정
3-1.제1기: 송학동 해안동 정미소군- 무역시설 인접형 정미업 형성기
맨 처음에 송학동에 정미공장이 자리한 이유는 제물포 항에서 가까웠고, 세창양행(1883)이 있었기 때문에, 그 당 시 무역활동의 중심이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이후, 1899 년 중구청앞 해안 간척사업을 통해 창고 시설 및 정미소 길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곡물 수출을 위한 기반시설로써, 곡물검사소 및 두량장등이 생성되고, 1896년 미두취인소 를 시작으로, 고려정미소, 리키다케 정미소 등이 최초로 생기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상공회의소 90년사에 따 르면 인천정미소는 효고현(兵庫縣) 사람인 신도 시카노스 케(進藤鹿之助)가 1889년 3월에 설립하였다. 처음 인천정 미소가 세워졌을때는 앞의 큰길도 없었고, 바다로 덮여있 었다.31) 인천정미소는 가와바타 창고로 알려진 붉은벽돌 건물이며,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얼마전까지 레스토랑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비어있는 상황이다. 1899년 이후 해안 동 해안가 매립에 의해 해안동의 창고군과 무역시설군이 형성되었고 이어 신흥동 정미소길도 만들어졌다. 인천 정 미소는 여러 대의 증기기관을 갖추고 밤낮 없이 작업을 하였으며, 개업 이후 정미한 쌀이 수 만석을 넘을 정도로 32) 근대적 기술력과 생산력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인천 의 초창기 산업유산으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현존하는 것은 굴뚝과 부속건물 뿐이다. 현재 부속건물은 개인집으 로 사용되고 있다. 그 당시의 인천정미소의 굴뚝은 초창 기 산업도시의 풍경을 대변하는 역사적 상징물로서 가치 가 있으므로 현재 남아있는 굴뚝과 그 부속건물을 부분적 으로나마 보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
경인철도가 완공되자 철로를 선거의 안까지 통할 수 있 도록 인천항 역으로 연결하면서 좀 더 수송이 원활하게 되었고, 해안을 매립하여 리키다케 연탄공장이 설립되면 서 철도가 공장 바로 앞까지 연결되었다. 초창기의 정미 업은 절구를 사용하는 수준이었지만 증기기관이 들어오면 서 수출산업으로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증기기 관의 연료로 석탄이 중요한 연료로 사용되었고, 1905년 전기가 공급이 되면서 전기의 공급이 우선적으로 정미공 장으로 배분될 정도로 정미업은 인천을 대표하는 산업이 기도 하였다.
정미업의 대표적 일본인 기업가 리키다케는 1884년 3월 인천에 도항해 무역업에 종사하여 재산가가 된 후, 부산 에서도 일한 정미소를 창립하여 사업하다가 1904년 인천 에 리키다케 정미소를 설립하여 해안동(海岸町)에 본점을 두고, 따렌과 평텐(奉天), 잉커우(營口)에 각각 지점을 개 설하였다. 인천의 정미소에는 미국제 최신식 마찰 기계를 들여놓아 1개월에 1만5천석 이상을 정미할 정도로 대규모 로 확장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고 한다.33)
당시 해안동은 정미업 뿐 아니라, 근대시설의 금융, 무역, 상업시설의 중심지역이었기 때문에 많은 유통 회사들과 창 고들이 함께 위치하였다. Fig3에서 빨간점은 오쿠다, 타운 센트 정미업등 송학동의 대표적 정미업군을 표시하며 해안 동 무역창고군 사이에 파란색으로 위치하는 것이 나가야34)이다. 일본 근대시기의 산업유산의 경우 주변에 그 기업에 서 지은 사택(社宅)이나 부영(府営)주택들이 함께 위치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 나가야에는 해안동의 금융, 관청등에 근무하였던 관리자들이 살았던 집으로 추정 된다. 또한 위 그림에서 주명기 정미소가 세워진 위쪽에 영 신조라는 노동조합이 있다. 이는 조선인이 세운 세 개의 대 표 노동조합 중 하나로서 정미업의 중간과정에서 필요한 운 송관련 업무를 보았다. 초기 인천의 현미가공업은 족답기 (足踏機), 혹은 수접기(手摺機)에 의해 운영되었으나, 이후 정미업은 전력을 응용하고 신식 기계력에 의해 경영하는 모 습을 보인다. 인천향토조사사항은 이러한 변화에 있어 다니 모또(谷本)와 후지모또(藤本) 두 현미가공소 및 유군성(劉 君星), 이시영(李時永)의 근대식 기계가 인천 생산의 중요 한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적고 있다.35)456
3-2.제2기 : 신흥동/ 북성, 만석동 정미업군- 해안간척 을 통한 일본인 자본중심의 정미업 형성기
제 2기에 해당하는 일본인 자본중심의 정미업형성기는
장소적으로 크게 두 지역, 신흥동 정미업군과 북성동, 만석동 정미업군으로 나뉜다. 신흥동 정미업군은 1899년 에 이르러 중구청 앞 해안 간척사업을 통해 창고 시설 및 정미소 길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Fig7의 지도는 1926년의 지도로 그당시 간척되었던 매립지에 리키다케, 가토, 다카노, 오쿠다등 일본인 자산가들의 이름이 보인 다. 이 정미업은 원료지향형 산업의 하나이지만, 인천은 그 당시의 전국에서 오는 쌀의 집산지로서의 역할을 했 기 때문에, 철도인프라가 편리하고 선적 출입이 용이한 신흥동은 집산지로서의 특성과 가공산업, 그리고 출하라 는 세 가지 특성을 겸비하는 장소로서 최적의 곳이었다 고 생각된다.
Fig8 그림(1931년지도)에서 붉은색으로 표시되어 있는 곳이 간척사업으로 새롭게 새워진 일본인 정미소자리이 며, 당시 일본의 상공회의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일 본 상인들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바로 위에 파란 색으로 흩어져있는 곳이 당시의 공동주택으로 보이는데 현재에도 남아있다. 일본인들이 공장을 지을 때 공장소 유주들이 주변에 사택을 짓는 것이 관례인 것을 고려할 때 이 공동주택도 공장에서 지은 사택으로 일본인 관리자 및 조선인 관리자를 대상으로 한 시설이라고 추측된 다. 당시 일어났던 사건들로는 1920년대에 활발히 일어났던 정미소 노동파업을 들 수 있다. 인천부사의 1926년 3월에 대한 언급을 보면, 리키다케(力武) 정미소노동자들 의 동맹파업이 일어난 이후 인천의 일본인이 경영하는 11개 정미소 남녀노동자 3,000여명이 굶주림과 부당한 임금에 반하여 임금인상, 직공대우, 8시간노동제, 작업 중 면회허용, 잔업수당의 지불 등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일 제히 동맹파업에 돌입하였다는 문구가 나온다. 이에 동 참한 정미소는 조선정미주식회사, 제물(濟騰)정미소, 나 오노(直野)정미소, 리키다케(力武)정미소, 가토(加騰)정미 소 등이었다. 1931년중외일보는 나오노정미소의 노동파 업단이 공장을 점령하였다고 언급한다. 이들 노동자들은 리키다케정미소의 노동자들과 협력하여 휴업등을 결행하 였다는 것을 미루어 당시 이 지역의 노동자들은 일본 관 리자들에 대항하여 투쟁하고 정미업을 기반으로 노동자 세력을 시켜나갔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가토정미소는 현 재 택배회사들 창고로 쓰이고 있으며, 나오노정미소는 인 천등기소옆 주변 창고가 남아있다. 일본인 정미업 네트워 크에 대하여 인천항 에 언급되어 있는데 다른 업체에 비 해 매우 큰 영업세액 규모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 타나고 있다.91011
인천향토사료조사사항(1915)은 조선인 자본가 가운데, 유 군성에 대하여 중요시 다루고 있는데, 그의 최초공장은 1906년 9월에 세워졌고, 전국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던 27 곳의 동종분야가운데 최고의 자본금을 보유했다고 한다. 이는 이 업체가 병행하고 있던 물산객주업의 규모가 매우 컸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당시의 물산객주업 은 전통 민족상인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영위되고 있었으 나, 유군성의 경우 인천신상협회의회원명부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흥미로운 점은 아리마 정미소의 경우 역주 인천항 자료 에 의하면 당시 세금을 868원을 낸 것으로 확인되지만, 사이토정미소의 경우 상공인 명부에 세금확인이 되지 않 고 있다. 사이토 정미소의 규모가 아리마 정미소에 비해 훨씬 큼에도 불구하고 세금을 내지 않은 것은 당시 군수 물자등의 일본 정부정책를 위한 정미업시설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된다. 일본인 정미업의 성장기인 2기 시기에 있어 또 다른 두각을 보였던 지역이 있는데 바로 만석동 지역이다. 만석동 지역으로 1929년 지도에서 확인하면 경 인철도에서 정미소를 써포트하기 위한 지선이 분리되어 나오고 있다. 현재 지선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으나 현 장에 찾아가보니, 지선이 분리되는 지점에 사택군들이 남 아있었고, 아리마 정미소는 현재 밀가루 공장으로 남아있 었다. 특히 아리마 사택군들은 그곳에 관심이 있는 주민 이 하나씩 사들여 당시건물 그대로 입면만 리노베이션하 여 노인을 위한 임대주택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사이토 정미소는 주물공장을 거쳐 현 자동차 세차장 및 싱크대 공장등으로 사용되고 있었다.121314
3-3.제3기 : 조선인 정미업 지역- 노동집약형 조선자 본중심의 정미업 형성기
1925년 전후에 조선인 정미소의 갑작스런 증대가 눈에 띄는데, 주명기, 이흥선이 유동에, 목재상으로 성공한 유 군성이 신흥동에, 만석동에 김신 정미소, 화수동에 김태훈 정미소등 이 연달아 건립되었다. 김태훈은 동구 화수동 (화수285~288)에서 정미소를 운영했으며, 급부상한 신생부 호로 1939년 영업세 납부실적(당시 화폐로 6백10원을 납 부)하여 업계 2,3위를 차지한 것으로 나온다. 36). 그러나 30년대에 번성했던 조선인 정미소는 일본정부의 배급제 시작과 함께 점차 군수산업으로 대체되면서 사라져갔다. 주명기는 1901년부터 도정. 정미업에 종사함과 동시에 미 상조합창립(1914), 조선인상업회의소 정의원. 인천상업회 의소 평의원, 인천부협의원, 인천미상(米商)조합장, 인천금 융조합감사, 인천상업회의소 부회장, 인천학교평의원, 인 천담배원매팔조합 간사를 역임37)하였다고 한다. 한국인 소유주의 정미소로서는 주명기 정미소가 최초이며, 이후 근대식 설비를 갖춘 조선인의 정미소로서는 유군성 정미 소가 최초라고 유추된다. 기존 내리동에 있던 주명기 정 15미소가 없어지고 옮긴건지 있는 상태에서 확징된 것인지 는 알 길이 없으나, 이를 시작으로 1920년대에 들어 유동 지역에 급격히 조선인의 정미업이 늘어나게 된다. 이는 조선총독부에서 1920에서 24년사이에 실시했던 식량증산 계획의 영향으로 보이며, 이러한 정미소의 증가를 중심으 로 그 주변에 조선인 곡물유통관련 상가들이 밀집하게 되 었다. 특히 이흥선은 일본인 미두거래소에 취직하여 10여 년간 근무하다가 퇴직금으로 인흥정미소를 차리고 1944년 까지 경영하였으며, 1936년에는 석유와 곡물업을 겸한 인 흥상사를 경영해 인천의 10대부호에 들게 된다. 38) 당시 유동(유동 25-30)의 주소사이에 정미업. 미곡무역, 조선주 판매, 조선양조판매, 쌀, 잡곡 도소매, 설탕, 새끼줄, 가마 니, 미곡류도매, 겨판매 등 쌀의 부산물을 중심으로한 조 선서민들의 상가가 밀집해 있었다. 39) 또한 1937년의 ‘월 미’창간호에서 임가삼이 언급하기를 앞에 제1기에서 언급 161718하였던 최초의 조선인 정미업계 대표인 유군성은 조선인 측 최고 납세자이며, 덕망이 높아 인천의 원로로 숨은 자 선행위가 한이 없는 겸손한 사람으로 표현되어있다. 당시 한국인을 위한 학교설립을 인정하지 않던 시대에 동산중,고등학교등의 한국인 학교설립에 공헌하였던 인물중에 유 군성, 이흥선등이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보면 한국인 정미 소 사업가들은 사업을 하면서 동시에 일제강점기의 핍박 받는 한국인들을 위한 교육, 복지사업에 많은 관심을 가 졌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 당시의 이러한 조선인 중심의 정미업 커뮤니티가 생 기는데 있어서는 노동조합의 배경도 한몫했다고 추측된 다. 인천노동연맹이 1922년 설립되었으며, 이는 기존 노동 단체들이 친목과 상부부조를 목적으로 한데 비해 노동조 합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노동연맹이 결성된 이후 인천에도 직업별 노동조합들이 속속 조직되어 노동 자의 권익을 지키기위한 활동을 벌여, 1924년 당시 인천 의 13개 정미소 여공 3,000여명이 조합을 결성하기도 하 였다. 결국 이러한 직업별노동조합 중에서도 정미소의 노 동조합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 듯 정미업은 일본인 업자간 조선인 업자간의 대립적인 상 황과 엇물려 그들간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중심공간으로 형성해 나갔다.
이러한 산업공간의 형성은 연계적으로 유통지원시설들 과 노동지원시설들을 형성해나갔고, 생활공간과 연계되어 공간적으로 확장되어 나갔다. 정미업 자체의 존속은 20 년대까지의 정미업 확장을 마지막으로 30년대 중반의 군 수산업중심의 방향전환을 시점으로 점차쇠퇴하게 되지만 몇몇 정미업은 해방이후 한국운영업자로 바뀌어 60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운영을 계속해왔다.
4.인천 정미업군의 형성과정
4-1.정미 유통 지원시설
1)세관창고 및 미곡 창고군
3장에서 살펴보면, 정미업을 서포트하는 핵심 유통지원 시설들로 미두취인소, 세관창고와 미곡창고군이 있다. 인 천 미두취인소는 1899년 5월 창업으로 대표는 카쿠 에이 타로였으며, 당시 취인소는 다른 한국거류지에 아직 창립 되어있지 않았고, 인천항에 가장 먼저 세워졌다. 40) 이는 다른 지역에 비해 인천이 이러한 쌀유통에 우세한 지위를 차지함에 따라 미두취인소가 우선적으로 세워졌음을 보여 주며, 결과적으로 유통 및 관련 상업 및 금융기관을 빠르 게 발달시킨 촉진제가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편재된 이출의 시기조정과 계절적 잉여 이출량의 조절을 위해 1931년 7월 ‘조선농업창고업령’을공포하고 이에 따라 건설된 농업창고에 대하여 그 건설비 의 70%이내 및 3년간의 경영비를 매년 1,500원가량 보조 하였다. 이에 1930년 11월에 조선미곡창고가 설립되어 경 성에 본점 및 인천, 진남포, 부산, 군산등에 지점을 두었 다.41) 이러한 창고의 확장은 곧 쌀이출의 빠른 성장을 촉 진하였으며, 이를 지원하기 위한 인부지원시설 또한 급증 하였다. 미곡창고는 그 내용에 따라 2종으로 나누어 그중 하나는 주요한 쌀의 생산지에 소규모 창고를 다소 보급하 는 것이며, 이 경우에는 주로 농민이 생산하여 가을에 방 매하는 쌀을 대상으로 하였다. 또 다른 형태로는 주요한 쌀의 이출지에 비교적 대규모의 창고를 건설하여 주로 농 민이 방매한 쌀의 일시적 내지 이출을 목적으로 한 유형 이 있다.42) 인천의 경우는 이중 후자의 이출조절을 위한 대규모 창고설비시설로 판단되며 쌀의 이출에 편리한 매 립한 해안지역이자 기존 정미업군이 형성된 해안동과 신 흥동에서 가까운 장소에 이러한 대규모 창고군이 형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인천에서는 물건주인이 세관구내까지 운반하고, 그 뒤 는 대리점에서 선적을 하는 상습이 있다. 즉, 판매인이 자 기전속의 운반자를 가지고, 영신조, 창신조등의 인부공급 소에서 인부를 사서, 열차에서 꺼내서 현물을 수취한 증 거로 날인하면, 판매하는 정미소가 이를 구매자로부터 대 금을 수주하도록 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천의 모든 정미업과 관련된 판매자와 구매자가 이러한 세관의 미곡 창고에서 만나서 물품을 교환하며 미곡창고의 위치는 정 미 유통의 중심공간이 되었다.
그림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항동 2,3,4,5가를 중심으로 곡물검사소, 인천세관창고군, 미곡창고, 미두취인소가 줄 지어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정미업 유통망은 상업문화 및 유흥공간을 형성시켰고, 이를 발판으로 신흥동의 거대 19정미업군이 형성되었다. 현재 미곡창고군과 곡물검사소 의 일부 창고시설, 인천 세관창고 3동이 현존하고 있다. 이는 당시 정미업의 유통과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정미업 의 통합적 유산군의 가치를 가지며, 해안으로 향하는 거 점임을 고려해 보다 적극적인 활용방안을 구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곡물검사소
앞의 2-1에서 언급하였듯이, 조선총독부의 곡물검사제 (1935)가 실시되면서, 그전까지 민족상인의 쌀유통을 주도 적으로 담당했던 근업소(1907년설립)는 문을 닫게 된다. 1917년 부령제 62호로 미곡 및 대두검사 규칙을 발표하고 당시 인천외 5군데의 도내 주요지에 검사소를 설치했다. 그간 가마니 검사는 1917년 전국의 10군에서 가마니 조합 을 설치해 검사해왔지만, 1927년 가마니 검사 규정 발표 와 동시에 곡물검사소에서 같이 설치, 시행하게 되었다.43) 1930년까지도 인천항의 수출총액에 대한 쌀의 수출액은 64%에 상당하고 조선전체 비율에 비해 매우 큰편이었다. 44) 비록 이러한 검사시스템의 시작에 따라 조선자본의 주 20요 원천이었던 곡물경제가 일본으로 귀속되게 되어버린 전환기가 되었던 이 곡물검사소는 현재에도 부속건물이 남아있다. 그 장소가 갖는 중요도에 비해 아무런 관리 없 이 버려져있는 상황이며, 앞의 미곡창고군과 함께 보전하 여 쌀의 일제강점기의 쌀 유통과정을 보여주는 박물관이 나 체험장으로의 활용이 가능할 것이다.
3)곡물협회
곡물협회는 1908년에 창설된 37명의 일본상인 단체가 모인조직으로 당시 민족협회인 신상협회에 대응하여 만들 어진 단체이다. 당시 미곡과 우피를 중심으로한 조선의 수출입에 대하여 대표적 조합조직으로 45) 이곳의 회장은 오쿠다 테이지로로 정미업계의 대표적인 상인이었다. 동 아일보의 1935년 06월13일자 신문을보면, 인천부두 노동 자 천여명의 총파업사태에 대한 기사가 나오는데, 곡물협 회와 선항회사(조선항운회사)간의 분규로 인천부두 노동 자 일천여명의 총파업의 사태 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파 업을 단행한 인신조, 창신조, 영신조, 복도조(후쿠시마쿠 미)등의 오백여명과 부두지게노동자 오백여명이 합세해 축항문에서 파업을 하였고, 이는 인천축항안의 화물운반 은 정지시켜버리는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46) 이는 당 시 부두에서 정미소간에 곡물을 운반하던 노동자들의 저 렴한 임금에 대한 문제를 보여주며, 1924년 가토 정미업 에서 일어났던 노동 파업등 당시 정미업 유통과정에 종사 한 노동인력에 대한 처우가 적절치 못했음을 보여준다.
4)창고업
1931년 당시 해안동의 창고업은 주로 조선창고 주식회사 인천지점 및 조선상업은행 인천지점에서 벽돌창고 21동 2,246평을 소유하고 그 밖에 각 은행, 해운업자 및 개인소 유의 창고가 56동 7,684평이었다. 이중 개인창고는 자가용 또는 임대 창고로 제공하는데 그 어느쪽이나 입고화물은 곡 물을 주로 하며, 잡화류가 그 다음이다.47) 이러한 창고군은 조계지의 해안동지역(중국인 조계지와 일본인 조계지가 만 나는 지역의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다. 중구는 2003년에서 2008년에 걸쳐 해안동의 13개 창고군을 활용해 인천 아트 플랫폼으로 리노베이션하고, 인천문화재단 문화프로그램의 중심지로 탄생시켰다. 그러나 그 프로그램과 활용에 있어 중구와 동구의 지역내부의 문제 및 지역리더양성에 집중하 기 보다는 국제적인 예술인재양성에 초점을 두고 있어, 대규모의 공간이 좀 더 다양하게 활용되지 못하는 한계를 갖 고 있다. 또한 조계지를 둘러싼 근대역사문화지구지정(2010 년)은 오히려 그 배후지역과의 단절감을 부추겨 역사적 가 치를 왜곡시킬 수 있는 위험요소를 안고 있다. 해안동의 창 고업이 결국은 동구와 중구지역의 배후공간에 분산되어있는 정미업, 양조업, 장유업 등의 제조업들과 항만거점들을 연계 하는 유통망이었음을 감안할 때 보다 통합적인 공간해석상 의 지구지정이 필요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4-2.노동지원 시설
1)인력파견업
앞의 2.4절의 정미업의 유통과정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미곡의 운반 과정에는 이러한 인력파견업이 매우 밀접한 관 계를 가지고 있다. 1905년의 구한국외교문서에는 인천항모 군의 청부 특권과 한강 강안 모군청부특권을 일본공사의 요 청에 따라 취소된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는데,48) 1905년을 기준으로 곡식을 운반하는 모군청의 권한이 조선에서 일본 으로 넘어갔음을 보여주고 있다. 비슷한 시기 모군청(응신 청)이 민간화되면서, 영신조, 인신조, 창신조로 나누어졌다. 인부들에 대한 관리는 인력파견에 관계하는 기관에서 담당 하였는데, 이중 영신조는 외항선 하역에 종사하는 노무자들 로, 창신조는 국내 연안선, 인신조는 철도역 창고 등에서 미 곡운반 종사하던 노무자들로 각각 구성되었다.49) 특히, 인 천과 인천항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기차에서 물건을 내리고 육양하여 운반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영신조, 인신조 창신조의 인력이 활용되었다.50) Table4에서, 운반시 임금 상황을 살펴보면, 화차에서 운반하는 품목의 종류를 곡물과 잡화, 그리고 개인품목으로 나누고 있다. 이 를 통해 인천항에서 화차에서 창고로 옮겨지는 많은 양이 곡물이었음을 추축할 수 있다. 또한 당시 철도규정에 의하 면 화차도착 후 여섯시간 내에 화차에서 내려놓아야 하는 데, 여섯시간이 초과하면 한시간에 정체료를 징수하게 된다. 51) 이러한 상황들을 감안하면 지방에서 싣고온 쌀을 빠르 게 화차에서 창고로 옮기기 위해서 매우 많은 인부들을 써 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5
그러므로 대규모의 정미업군인 신흥동 정미업군의 주변 임과 동시에 일본인과 조선인 주택가가 근접했던 율목동 지역에 근업소를 포함한 인부공급소인 노동조합군이 모이게 된 것은 자연스러 운 귀결이라 할 수 있겠다. 이와는 달 리 일본인 노동조합 사무실의 경우는 조계지 주변에 자리잡아 창고 및 해운 업과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이중 일본인 노동조합인 야마토노동조 합과 요시다노동조합은 당시 창고업, 운수업, 하역청부에 걸쳐 매우 큰 영향 력을 갖고 있던 노동조합으로 그중 야 마토 노동조합은 지금도 현존하며, 현 재 내부리노베이션을 거쳐 마을 까페로 활용 중이다.21
2)근업소
근업소는 1906년 일본정부에서 정식 영업허가를 받은 민족상인들이 미두취인소에 대항하여 만든 인천 최대의 쌀 중개업체였다.52) 근업소는 곡물조합 및 객주조합을 통 하여 수요와 공급을 이어주는 중개업을 위주로 한 기관으 로, 본소는 율목동에 출장소는 항동에 두었다. 국내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에 수출하는 것을 주요 업무로 주로 위탁판매방식으로 진행했고, 국내 대지주들이 팔고자 하는 쌀을 근업소에 맡기면 근업소는 시세의 판매대금을 지주 에게 전달하였다.53) 이처럼 근업소는 판매자인 국내지주 와 구입자인 일본 미곡상 양쪽으로부터 수수료로 수입을 챙겼다. 당시 곡창지대인 전라도와 충청, 경기지역 지주들 이 날마다 쌀을 싣고 근업소를 찾았고, 일본 미곡상 등 역시 필요한 쌀을 확보하기 위해 근업소 주변에 진을 치 고 있었다고 한다54) 이러한 번성했던 민족자본에 근거한 근업소가 갑자기 쇠퇴기를 걷게되는 것은 1930년대이다. 1937년 의 동아일보기사에서는55) 당시 인천의 곡물매매알 선의 유일한 기관이었던 인천객주조합이 곡물의 격감으로 중간소비를 배제하기 위하여 창립이래40년간 손잡아온 근 업소와 연을 끊게 되었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는 일 본으로 수출하는 미곡에 대한 검사를 위한 조선총독부의 곡물검사제가 1935년에 실시되는 것56)으로 미루어보아 이 후는 이러한 매매 알선까지도 일본상인들에 의해 잠식되 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3)인력파견 노동조합
1924년의 개벽지57)에서는 인천의 노동조합과 관련된 사항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이중 정미소와 직접적인 관련 은 없지만, 그 유통과 관리단계에서 영향을 미쳤을 법한 노동조합은 일본인중심으로는 곡물협회, 정미업조합, 물산 객주조합이있으며, 한국인측으로는 근업소, 미상조합, 인 천객주조합등이 있다. 58) 이러한 조선정미업은 조선관류 출신 네트워크와 인천항의 물산객주의 힘을 바탕으로 점 차 확대되어 나갔다. 59) 이러한 기반이 있었기에, 30년대 의 곡물검사제 실시 이전까지 지속적인 활동이 가능하였 으며, 노동조합을 중심으로한 조선인 커뮤니티의 핵심시 설로 자리잡을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공동숙박소와 직업소개소
율목동에 소재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공동 숙박을 목적 으로 인천부가 경영하는 곳이다. 1920년 8월 5일부터 사 무를 시작하여 25칸, 변소 1동 등으로 하루 50명까지 수 용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추었다. 1930년 당시 숙박 인원은 221,118명, 경영일 수는 7,348일에 이르고 있다. 공동숙박소 의 부대사업으 로 공동숙박소 안에 있다.60) 1931년의 동 아일보61)를 보면, 종전공동숙박소는 폐지하는 동시에 직 업소개소를 신설하여 그전 공동숙박소를 부속하게 한다. 이후, 율목리의 공동숙박소는 폐지되고, 인천내리 84번지 에 직업소개소를 신축하기로 해서 공동숙박소도 함께 병 설하게 된다.62) 주변에 위치하고 있는 또 다른 노동지원 시설로 공동우물이 있는데, 인천개항25년사63)에서 언급하 기를, 공동우물은 일본 거류지 혹은 거류지 소속지역 내 8곳에 설치하여, 거류지의 공비로 관리하여 공동사용 할 수 있도록 제공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인천부시료소라는 부립부영시설은 율목동에 위치하며, 그 당시 139명 수용인원이 있었고, 그때까지 2,552명 수용되어있 었다고 한다.64) 당시 이러한 관련 근린시설 때문인지, 이 율 목동 근처의 상가 현황 을 보면, 미잡곡 중개업, 물산객주업 이나 전당포, 금전대부업이 성행했다. 결국 이 지역은 일본주 거지인 율목주거지와 조선인 주거지인 내리지역을 연결하는 매개공간으로 노동지원시설인 노동조합이나, 위생시설, 그리 고 공동숙박소등이 정미업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맺음말
본 연구는 도시 역사적 관점에서 인천의 문화재 보존에 서 소외되어있는 구도심 배후지역을 중심으로 정미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유산의 가치있는 공간들을 찾아내고, 실 제적인 주소를 기반으로 도시적 장소성을 분석하고자 한 첫 시도로서의 의의를 갖는다. 본 연구로 알 수 있었던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인천 정미업의 입지는 일본의 일반적인 입지 론과는 달리 생산지나 유통거점이라는 입지성 보다는 수 송을 위한 해안과 교통의 입지, 그리고 노동력확보라는 점이 입지설정에 강하게 작용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화도 진 주변의 만석동 정미업군이나 탁계현 주변의 신흥동 정 미업의 형성과정을 보면 기존 조선인 마을이 있었던 위치 함으로써 노동력확보가 용이하고, 기존 지역자원을 활용 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설명될 수 있겠다.
둘째로, 일련의 정미업의 설립과정을 통해 확인한 분포 의 위치변화인데 초창기 제1시기 정미업이 내부해안가인 송학동에서 형성되었으며, 지속적인 해안 매립을 통해 제 2시기에는 해안가인 신흥동과 만석동으로 그 중심이 옮겨 지게 되었다. 이후 20년대 중반에 이르러 조선산미증산계 획에 의한 회사령에 따라 내륙지역에 갑자기 증가하는 제 3시기의 조선인 중심의 정미업지역이 형성됨을 확인할 수있었다. 일본인의 경우는 정미업의 주된 목적이 이출입조 절 및 해외 반출이었기 때문에 운수, 해운업과 함께 해안 가 중심으로 정미업을 발전시켜갔다. 반면, 조선인 정미업 과 같은 경우는 판매, 도정, 탈곡과 같은 내수 유통중심 의 소매였으며 기존의 물산객주와의 긴밀한 관계속에서 그 유통망을 키워갔기 때문에 내륙을 중심으로 그 영역을 키워갔음을 추측할 수 있었다.
세 번째로 각 유산군이 갖는 장소적 특성은 각 위치에 따른 형성원인과 함께 유기적으로 확장해나간 주변 지원시 설들의 관계성으로부터 각각 다른 정체성을 형성해나갔음을 알 수 있었다. 송학동, 해안동 정미업군은 초기 기업자본들 이 들어오면서 형성된 공간으로 이후 정미업 관련 주택시설 이 형성되었으나 주변 해안무역창고군의 급격한 성장과 금 융지원시설들의 성장, 그리고 신포어시장등의 확장으로 인 해, 정미업은 더 이상 확대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신흥동 정미업군의 경우는 그 입지상 인프라와 부두와의 접근성으 로 빠르게 인천 최대의 정미업군으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초기 해안매립투자가들이 일본자본가란 점을 미루어 일본 기업가의 활동거점으로 성장하였으며, 해방이후에는 급격한 산업의 변화의 영향을 크게 받아 무역관계 유통시설들이 자 리 잡아 지속적으로 활용되어왔음을 알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조선인 마을 근처에 형성된 사이토,아리마 정미업군 은 주변의 방직공장이나, 밀가루공장등의 군수관련시설들과 함께 성장하였고, 해방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제조공장군의 중심적 공간으로 활용되어 오고 있다. 마지막으로 유동의 조선인 정미업군의 경우는 판매와 소매를 겸업했던 정미업 의 특성으로 점차 주택지역으로 바뀌어갔으며, 현재는 학교 정원이나 교회등의 주거근린시설로서 변화되어있는 양상을 살펴볼 수 있었다
정미 유통 지원시설군에서는 세관창고군의 경우 그 대규 모 스케일과 군집성으로 인해 현재까지 유통 및 제조 공장 군으로 활발히 사용되고 있다. 반면 소규모 분산형 거점을이루었던 노동지원시설군은 조선 정미업군과 비슷하게 생활 주택시설로 편입해갔음을 알 수 있다. 정리하자면, 해안가이 며 거대규모의 공장군이 형성되었던 신흥동지역, 사이토아 리마지역, 세관창고지역등은 아직까지도 그 통합적 특성들 이 남아있으며, 지속적 활용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활용이 역사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일 반용도로서 쓰이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인식시킬 수 있는 표지판설치나 역사자원으로서 활용할 수 있는 제안들이 필 요한 상황이다.
끝으로, 인천의 통합적 정미 산업유산군의 유형은 크게 정미업공장군, 정미유통지원시설군과 노동지원시설군으로 나눌 수 있었다. 유통지원시설의 경우는 초기형성된 송학동 해안동 정미업 인프라를 기반으로 형성되어 해안과 철도시 설의 근접성을 기반으로 빠르게 확장되어나갔다. 반면 노동 지원시설은 일본인 정미업 확장된 20년대와 창고업이 확장 된 30년대를 통해 급격히 성장하였고, 크게 일본인 생활중 심의 주거시설과 조선인 정미업 커뮤니티의 중심이 되는 두 가지 노동지원거점을 형성시켰다. 일본인 소유의 정미업이 신흥동과 만석동에서 확산되어 성숙되어가는 과정을 거치는 시기에 운송업 및 하역업과 관련된 일본인 노동조합의 세력 이 성장하였고, 조선인 정미업도 그 근업사라는 유통조직을 통해 그 세력을 함께 확장해나가며 대립적인 관계를 유지했 었다는 점이다. 이는 결국 1920년대에 정미소 노동파업과 유동 지역의 조선인 소유의 정미업 커뮤니티를 형성을 이끌 게 되는 보이지 않는 민중의 의식의 성장을 이끄는 원동력 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인천의 정미업은 일제강점 기의 일본인과 한국인사이의 자본잠식에 의한 긴장과 갈등양상을 보여주며 그 속에서 주체적으로 민족자본을 형성하 고자 했던 노동자들의 삶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특히, 초기형성에 의해 일정기간 내재적 관성을 갖고 발전해가는 산업 지역의 특성을 보여주며, 특히 상공회의소나 노동조합과 같 은 인적 네트워크가 강하게 작용하여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일본인과 조선인 소유주의 공장군이 점차 분리해나가는 현 상을 볼 수 있었다.
산업유산은 공장이나 창고등의 건물만이 아니라 그 주변 에 산재되어 있는 시설과의 관계성과 유통과정상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유기적인 통합적 공간구조를 보여준다. 근 대 산업유산의 보전 정책을 세우는데 있어서도 이러한 산업 특성을 잘 보여주는 통합적 환경이 잘 남아있는 지역을 선별하여 보전, 활용하는 전략이 필요하겠다. 현재 남아있는 중구 동구의 정미업군에서는 만석동 정미공장(사이토,아리 마)주변의 사택군지역, 그리고 신흥동 정미공장거리, 항동7 가의 세관창고군 등은 정미업의 각각의 특성들을 보여주는 통합적 경관이므로 이들을 지속적으로 활용 또는 보전할 수 있도록 체계적인 계획이 필요할 것이다.
산업유산은 건축물 자체의 완성도나 의장적 가치로 평가 되기 보다는 그 군집성과 당시 사회성의 반영이란 측면에서 재평가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통합적 산업군의 보전 양 상 및 역사적 사건과 인문학적 가치들이 함께 고려되어 건 축유산을 평가할 수 있는 지표에 대한 개발이 차후 연구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현재 남아있는 산업유산군에 대하여 물리적 보존 상태, 특히 구조적 안전성의 문제등의 정밀한 현장 조사가 필요할 것이며, 근대 문화재로 등록이 되지 못하나 활용가치가 있는 산업유산군에 대해서는 그 소 유주와 관리상태, 그리고 현재 지역과의 관계성 등을 검토 하여 지역성에 맞는 적극적인 활용방법들에 대한 검토가 필 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