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al Search Engine
Search Advanced Search Adode Reader(link)
Download PDF Export Citaion korean bibliography PMC previewer
ISSN : 1598-1142(Print)
ISSN : 2383-9066(Online)
Journal of architectural history Vol.23 No.1 pp.33-50
DOI : https://doi.org/10.7738/JAH.2014.23.1.033

Beginning and Characteristics of Stone pagoda in Jeonnam Region

Deuk-Youm Cheon*
Corresponding Author : dycheon@hanmail.net
December 12, 2013 February 28, 2014

Abstract

Formative and structural characteristics of stone pagoda in Jeonnam area are known in largely two flows. One is that characteristic of stone pagoda in Jeonnam area of the Unified Silla is shown in eastern Jeonnam and some southern Jeonnam. But it is not shown in surroundings of Yeongsan river. Another is that besides stone pagoda in Silla style where social aspects of Goryeo are reflected, stone pagoda in Baekje style appeared. On the other hand, stone brick pagoda and non-typical stone pagoda appeared. These stone pagodas were developed mainly in north and west of Jeonnam, and could be classified in pure Baekje style and a cross style according to formative and structural characteristics. Stone brick pagoda is extant in Wolnamsa site and Woonjusa in Chungcheong and Jella areas which are old places of Baekje.


전남지역 석탑의 출현과 특성

천 득염*
(전남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초록


    1.서언: 전남지역 불교건축의 출발과 성격1)

    언제 전남지역에 불교가 도입되었을까? 백제에 불교가 도입된 침류왕 원년(384년) 이후 불교는 점 차 남하하면서 영향력이 증대 되었고, 광주. 전남지 역에까지 세력이 다다르게 되었을 것이다. 가설적으 로 백제가 마한을 통합(근초고왕 24년, 369년)하고 나서 불교가 유입된 것은 분명하지만 구체적으로 언제인지 불명하다. 다만 불교도입 초기에 위례성이 수도였던 만큼 당시 상황으로 보아 한반도 아래쪽 까지 널리 포교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수도가 웅진과 사비로 점차 이동하면서 성왕을 비롯한 제 왕들의 불교장려책으로 사찰들이 전북지역에 까지 지어지게 되었다. 전북 익산의 미륵사를 비롯한 각 종 석탑과 사지가 이를 대변하고 있으나 전남에서 는 백제시대의 불교유물이 아직 학계에서 공인될 정도로 확실히 나타나지 않고 있고 통일신라시대의 것만 나타나고 있다. 특히 불교가 우리나라에 도입 된 이래 약 400년 가까이 전남지방에는 백제불교미 술의 뚜렷한 잔재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특이한 사항이다.

    이처럼 전남지역에는 고구려와 백제에 불교가 들 어오고 난 후로 좀 늦게 도입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영산강유역에 마한이라는 강력하고 문화적으 로 주체적인 세력이 자리하고 있었고 백제의 중심 세력권으로부터 다소 떨어져 있어서 불교의 도입이 늦어진 것이라 생각된다. 전남지방의 현존 사찰 중에서 영광 불갑사, 나주 불회사는 침류왕 원년 마 라난타 창건이라 하나 근거가 희박하다. 이는 당시 의 기록이 아닌 조선후기의 기록에 나타나기 때문 이다. 선암사는 26대 성왕 7년(529) 아도화상 창건 이라 하지만 아도화상의 생존연대가 맞지 않아 문 제가 있고 백양사는 30대 무왕 33년(633) 如幻大師 가 창건하였다 하나 이 또한 분명한 근거가 없다.

    이들 뿐만 아니라 무위사, 대흥사, 화엄사, 곡성 관 음사, 개천사, 나주 죽림사 등이 백제시대에 창건된 사찰이라고 한다.2) 그러나 근자에 월남사지 등 몇 몇 사지가 발굴되었고 그곳에서 백제시대의 것으로 짐작되는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어서 장차의 연구결 과가 기대된다. 또한 전남지방에 백제시대의 불교가 전파되기는 하였으나 그것이 지역의 거점에만 전파 되었기 때문에 많은 불교 유물, 유적이 발견되지 않 은 것으로 여겨진다3)는 견해도 있다.

    한편 통일신라시대에는 선종이 성행하여 5교 9산 으로 대별되어 불교가 발전하였는데 9산중 가지산 문의 보림사, 동리산문의 태안사 등이 전남지역에 자리하여 불교진흥에 일익을 담당하였고 전국적인 입장에서 보아도 가장 번성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고려시대의 불교종파로는 화엄종을 비롯하여 자 은(법상), 남산(계율), 조계(선종), 천태, 법성, 열반, 시흥 등 12종가가 있었다. 이 중에서 활약상이 큰 것은 조계종, 화엄종, 자은종, 천태종이었는데 특히 전남에서는 조계종이 현 송광사를 근본도장으로 펼 친 선불교 중흥을 위한 定慧結社를 일으켰고, 화엄 사상을 펼치기 위하여 천태종이 강진 만덕사(현 白 蓮寺)를 중심으로 한 백련결사를 일으켜 불교중흥 을 꿰했다. 이 운동은 고려시대 불교 중흥의 대표적 양 주류로서 전남이 중심이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한 불교의 탄 압으로 불교세력은 위축될 수밖에 없어 산지불찰로 그 명맥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태조나 세조의 개 인적인 好佛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사찰은 축소 통 폐합을 거듭하였으며 임진왜란 직후에는 이전의 법 통을 유지한 사찰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 시대의 전남지역 사찰도 예외는 아니어서 사 찰은 깊은 산에서만 볼 수 있었다. 악조건 속에서도 전남지역에는 고승 및 고찰들이 많이 있어 그나마 불교의 줄기를 이어 갈 수 있었다. 임란 의병장으로 활약한 서산대사가 대흥사에 가사와 바리때를 전하 여 보관하게 하였거니와 나중에는 이 절에 초의선 사가 자리 잡음으로써 불도의 맥을 잇게 하여 선풍 이 면면히 이어져 왔다. 특히 승려들의 왕성 출입을 금지하고 전국에 선종과 교종의 사찰 18개씩만을 남기는 정책으로 불교를 억압하여 승려들이 왕성에 서 멀리 떨어진 외진 곳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던 조선시대에도 그들은 풍토적으로 신앙심이 두터운 전라남도로 많이 찾아들었다.

    전남에는 이른바 사찰 21본산 가운데 5대 본산이 있으며 특히 禪門이 많다. 선문이라면 흔히 九山을 들지만 그 가운데 三山이 이 고장에 있으니 가히 선종의 태자리라 할 만하다. 선문은 장흥의 보림사, 지리산의 실상사, 곡성의 태안사 등이다. 뿐만 아니 라 16국사를 낸 승보사찰 송광사를 비롯하여 유서 깊고 뼈대 있는 큰절이 많고 비록 작고 쇄락하였으 나 반듯한 법통을 지닌 절들이 골골에 자리 잡고 있다.

    전남지역의 사찰건축은 삼국시대 초기 사찰과 같 은 정형적인 형태는 찾을 수 없다. 즉 8각의 목탑을 중심으로 3금당이 주위에 배치된 고구려식 가람배 치나 중문, 탑, 금당, 강당, 회랑이 중심축 상에 배 치된 백제와 신라식 가람배치형식은 전무하다. 또한 백제식과 신라식 가람배치에 1탑이 2탑으로 변한 형식인 통일신라식 가람배치 형식이 이 지역에서는 많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4) 그 이유는 전남지역이 왕도에서 많이 떨어진 곳이라는 점과 사찰의 창건 이 다소 후대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가람의 형 식이 변모되었고 지역적 환경에 적응한 것이라 짐 작된다. 아니면 전남지역 특유의 토착문화가 있어 불교문화가 도입되는데 다소 거부감을 느꼈을 수도 있겠다. 삼국시대 초기사찰이 왕도를 중심으로 가까 운 곳에 건립되고 평지에 교종의 교리에 따라 세워 졌으나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창건된 전남지역의 사 찰들은 왕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선종의 교 리에 따라 산속 깊숙이 산지에 세워진 경우가 많았 기 때문이다. 특히 고려시대 이후의 사찰들은 도선 국사의 영향을 대부분 받아 풍수사상의 원리에 입 각하여 입지하였기 때문에 산중의 요처가 될 수밖 에 없었다.

    산중의 계곡에 사찰이 입지하면 자연히 대지의 조건이 협소하고 불리한 곳이 된다. 따라서 대지의 형상이 방형이 아닌 불규칙한 형태가 되고 경사가 급한 계곡에 위치하기 때문에 여러 단의 축대를 쌓 고 점점 상승하면서 각종 전각이 배치된다. 또한 중 심축의 개념이나 중정의 성격이 약화되어 대지의 형상에 따라 유리한 곳에 편리하게 위치하였다. 더욱이 창건당시의 모습은 그대로 유지되지 않고 중 창할 때마다 새로운 전각들이 부가되어 복합적이고 불규칙한 형식을 지니게 되었다. 특히 임진왜란이나 한국전쟁 등으로 유명한 전각들이 불에 타 최근에 복원하였으니 원래의 모습을 더욱 잃고 있는 것이 다.

    따라서 사찰의 본래의 기능을 갖는 전각들 이외 에 전쟁과 관련된 건물들도 사찰의 경내에 건립되 어 있다. 또한 기복신앙과 무속신앙에 따라 전각들 도 부가되어 경내에는 수십 개의 전각과 요사채, 승 방, 선방, 칠성각, 산신각 등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 다.

    2.전남지역 석탑의 출현

    현존하는 한국의 석탑은 7세기 초의 미륵사지석 탑을 효시로 하고 있음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우리 나라에 불교가 수입된 것은 4세기 후반부터이지만 적어도 현존하는 유물에 관하는 한 전남지방에서 확인되는 불교미술품은 8세기 중엽의 화엄사 사사 자삼층석탑으로 부터 출발되고 있다. 물론 전라남도 내에 몇 사찰이 문헌상으로는 백제시대에 창건되었 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으나 조선시대의 기록에 의 존하고 있어 신뢰성이 부족하다.

    또한 전남지방은 백제 근초고왕(369) 대까지 마한 에 속하였으나 그 후 백제가 망할 때까지 약 300년 간은 백제의 문화권에 있으면서 이때의 불교유물은 물론 고려조에 접어들어서도 백제계양식의 문화적 재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다만 통일신라시대에는 신라양식의∙불교미술이 전 라도 지역에 널리 나타나고 있음은 명백한 사실이 다.

    그렇다면 왜 전남지역에서는 삼국시대의 석조 불 교문화유적이 나타나지 않는가? 이러한 현상은 석 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 가에 대해서는 별도의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우선 이 지방 전통문화 자체에 불교를 수용할 수 없는 어떤 요인이 있었지 않았나 하는 견해도 나오 고 있다.5) 무언가 불교수용을 지체시키는 요인이 있었을 것인데 이는 전남의 지리적인 위치와 토착 성이 강한 문화적 특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즉 이 지역의 토착세력이 기존문화에 대한 애착이 강하여 지배세력의 문화에 대하여 거부감을 갖지 않 았나 하고 추정 되는 것이 다.1

    또 왜 통일신라시대에는 백제의 고토에 백제적인 문화현상이 나타나지 않은 가? 이는 고려시대에는 백 제의 문화를 재현하려는움직임과 함께 여러 가지 유구에서 백제적인 양상들 이 보이고 있음과는 비교가 된다할 것이다. 아마 신 라에 의한 통일은 백제의 옛 영토에서 백제의 정치, 문화적인 잔재가 남아 있기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 문이 아닌가 한다.

    위와 같은 논의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 음과 같은 의견이 가능하다.

    -전남은 당시의 국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이어 서 아무래도 불교문물의 도입이 늦어졌을 것이다. 또한 백제가 익산의 도읍경영을 끝으로 대규모 가 람을 조성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공주와 부여지역, 그리고 전북 익산까지는 그 영향력을 미치나 전남 지방까지는 내려 올 여유가 없었던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근자에 백제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 물들이 발굴되고 있음은 주목할 대상이다.

    -다른 논거로는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백제의 영향력이 전남지방에 까지는 미치지 못하였을 것이 라는 추정이다. 즉 근초고왕 24년(369)에 마한의 잔 재세력이 백제에 소속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 제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전남지역에서는 그 나름대 로의 독자적인 집단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과거 전남지방의 제반 문화양상이 한강유역이나 금강유역에서 발달한 백제문화와는 크게 다른 모습 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묘제의 독자성을 들 수 있는데 백제의 묘제로서 대표적인 석실분과 전남지방의 대표적인 묘제인 옹관묘와의 강한 대비성을 지닌다. 즉 이 지역의 전통묘제인 옹 관묘 문화를 이루고 있던 집단이 백제의 정치적 영 향권 내에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문화형태를 고집하 여 불교문화를 수용함에 있어 폐쇄적이며 배타적인 경향을 보인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할 수 있겠다.1

    -이러한 강한 전통에의 집착은 오히려 이 지방의 문화적 기반이 백제보다는 마한문화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이들 문화의 기반은 백제의 중심문화와 대 립할 만큼 강하고 토착적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 같 은 문화적 기반이 불교의 수용을 쉽게 용인하지 않 았을 것이며, 마침내는 이들 옹관묘 사회가 붕괴되 기 시작한 6~7세기가 지나고 나서 7~8세기에 이 르러서야 서서히 느린 속도로 불교문화의 전파가 가능했을 것으로 풀이된다.6) 결국 신라의 새로운 영토가 되고 나서 신라 왕경의 불교문화가 전남지 역으로 서서히 파급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이 때 백제의 문화적 잔재를 용인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결국, 9세기에 접어들면서 선종의 유행을 따라 당 유학에서 돌아온 고승들이 중앙왕권 또는 신라 귀족인 지방영주의 비호를 얻어서 주로 지리산 주 변에다 화엄사, 실상사, 태안사 등의 가람을 일으킴 으로써 소위 구산선문을 형성하게 되고 이에 따라 전남지역에 탑의 건립이 시작된 것이다. 결국 사찰 의 건립이 선종의 유행이후 당 유학파들에 의해 이 루어졌기 때문에 당연히 늦어졌을 것이라는 것이다.

    3.전남지역 탑파의 분포 상황

    전남지역 석탑의 분포는 크게 몇 가지 흐름으로 파악할 수 있다. 먼저 8세기 중반이후 나타나는 신 라식석탑을 비롯하여 통일신라 말기의 약화된 양식 으로 변화하는 과정 중에서 보여지는 신라양식의 흐름이 몇 가지 유형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역적으 로는 영산강 주변지역을 제외한 지역, 즉 전남지역 의 동부와 남부의 일부 지역(순천, 광양, 보성, 장흥 등)에서만 석탑이 나타나는 분포적 특성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영산강 지역의 토착문화라 여겨지는 옹관묘 분포지역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마 백제의 옛 영토라기보다는 백제의 불교 를 받아들이기엔 껄끄러운 마한의 문화적 상이성과 배타성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고려시대의 특징은 우선 석탑건립이 前代에 비해 전국적으로 확산 분포된 점으로 신라의 석탑이 경 주지역의 부근에 밀집되어 나타나는데 반해 고려의 경우 왕도인 개경부근이 우세하긴 하지만 전국으로 확산되어 나타나는 특성을 보인다. 이러한 분포상의 변화는 시대상의 변화에 따른 것으로 호국적인 왕 실불교에서 세월이 지남에 따라 대중화된 경향을 보이는 점이다. 따라서 호국불교적인 성격을 띠는 국가종교로서 전국적인 형태의 사찰 조영이 이루어 지게 되는데 고구려, 신라, 백제의 舊都邑지역에 새로운 탑파를 다수 건립한 것 등이 그러한 점이라 하겠다.7)

    또 다른 논거로서 고려시대의 조탑 활동에 순수 한 지방세력 내지는 민중이 대거 참여했다는 사실 이다. 경북 예천의 개심사지 오층석탑의 명문, 경복 궁에서 대구박물관 앞뜰로 옮겨진 淨兜寺址五層石 塔내에서 발견된 造成形止記등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 는 많은 경우 그 지 역민의 발원에 의해 석탑이 건립되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이러한 사실들은 고 려 석탑의 양식상의 변화를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 는데 前代의 왕도 중심의 일률적인 건탑양식에서 벗어나 각 지방의 토착세력이 건탑에 관여했을 때 일률적인 규범보다는 각기 나름대로의 지역적 특징 이 반영되어 다양한 형태의 건탑이 이루어졌을 것 으로 추측된다.8)2

    전남지역에서 나타 나는 또 하나의 흐름 은 고려시대 석탑에서 나타나는 백제적인 요 소의 출현이다. 따라서 백제의 고토였던 충청 지역과 전북지역에서 는 고려시대에 들어와 정림사지 석탑을 모방 한 백제전형양식의 석탑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전남 지역에도 이의 한 흐름이 되고 있는 백제양식계 석 탑들이 나타나고 있다.9) 이들 중 전남지역에서 나 타나는 백제양식계 석탑들은 주로 전남지방의 북부 와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전개되고 있는데 백제양식계 석탑들 중 비교적 신라양식 탑의 형식 을 상당부분 절충하는 의장적 특징이 나타나고 있 다. 이들은 담양, 곡성, 남원 등 전남의 북부지역과 그 인근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나타나는 탑신 을 받고 있는 받침대가 유난히 강조된 모습이 특징 적인 하나의 부류와 나주, 화순, 보성, 진도 등 전남 의 서부와 남부지역에 분포되어 나타나는 탑의 높 이에 비해 초층 탑신이 지나치게 높고 전반적으로 좁은 폭을 갖는 또 하나의 부류를 들 수 있다.3

    그렇다면 전남, 광주지방에 산재해 있는 탑들은 어떤 것들이 있고 그 양식상의 특징은 어떠한가? 현재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석탑들은 국보가 3기, 보물이 29기, 지방유형문화재가 19기, 문화재자료가 14기로 총 65기이다. 시기적으로는 통일신라 탑이 15기이고 나머지는 모두 고려시대 탑이라고 추정되 고 있다. 통일신라시기의 석탑들은 여느 신라양식 탑과 같은 전국적 양상을 지닌 전형적인 모습을 보 여주고 있지만 고려시대의 석탑들은 전남지방의 지 역적 특성이 뚜렷이 나타난다.

    4.전남지역 불탑의 조형특성

    4.1.전남지역의 통일신라시대 석탑

    7세기 초에 출발한 한국의 석탑은 후대로 내려 갈수록 변화 양상이 뚜렷하다. 삼국에 있어서도 각 기 나름대로 독특한 모습을 보인다. 즉 고구려는 1 탑3금당형식에서 비롯한 8각형석탑이라 짐작되며 백제는 목조건축을 번안하면서 남조적인 여성적인 모습의 우아한 방형다층석탑으로, 신라는 백제와 비 슷한 형식이나 전탑이 지니는 강건하며 남성적인 모습으로 각각의 지역적 특징을 지닌다.

    특히 통일신라석탑은 8세기 후반부터 변화하기 시작하여 9세기에 들어서면서 후기 석탑양식을 나 타내게 된다. 전대의 탑에 비해 규모가 더 작아지고 외관이 섬세해지며, 탑신석이나 기단의 면석 등에 불상, 사천왕상, 천인상, 십이지상 등을 조각하여 장 식적으로 된 것들이 많다. 또한 옥개석의 끝이 보다 얇아지며, 추녀의 끝 면이 날카롭게 경사진 각을 이 루게 되고, 옥개받침부분이 얇아지며, 종래의 5단이 4단, 혹은 3단으로 줄어든 것이 많다. 또한 옥개석 위의 탑신받침도 2단에서 1단으로 작아지고 각형에 서 호형으로 변하였으며, 층수도 삼층탑에서 오층탑 으로 되는 경우가 많고, 전체적인 규모 역시 중형, 소형탑으로 바뀌는 변형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현 상은 9세기에 들면서 일부 변형이 나타나고 9세기 후반에는 현저한 변화를 보이게 된다.10) 특히 기단 의 저석과 중석이 하나의 돌로 되었고, 상층 기단의 탱주가 2개에서 1개로 줄어든 것이 많다. 또한 기단 을 돌덩어리 모습의 大形石으로 쌓아서 건축물의 기단과 같이 만들기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는 전남지방 불교미술의 여명기라 할 수 있다. 전남지방은 신라에 병합되고 나서 많은 사찰들이 건립되었다. 9산선문의 본거지인 보림사와 태안사, 화엄사, 쌍봉사, 연곡사 등에서 국보급 불교 조형물들이 조영되었다. 특히 8세기 중반 이전의 불 교적 조형물은 찾을 수 없 고 8세기 중반부터 나타나 기 시작한다. 그 분포지역 을 보면 전남의 동북부지역 인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을 비롯하여 각황전 앞 석 등, 동서 오층석탑, 곡성 태 안사의 적인선사 승탑, 화 순 쌍봉사의 철감선사 승탑 및 탑비, 광주의 동오층석 탑과 약사암의 석조여래좌 상 등이다. 또한 전남의 남 해안을 잇는 광양 중흥사삼 층석탑, 보성의 유신리 마애불 및 우천리 삼층석탑, 순천 선암사의 동서삼층석탑, 장흥 보림사의 철조비 로자나불좌상과 동서삼층석탑, 보조선사창성탑 및 탑비, 해남 대흥사의 삼층석탑 및 북미륵암 마애여 래좌상, 은적사 철조비로사나불좌상 등이라 하겠 다.11)4

    전남지역에 석탑이 나타나게 되는 것은 통일신라 시대부터이다. 전남지역은 삼국시대에 백제에 속했 던 곳이나 백제시대의 불탑이 아직까지 1기도 보이 지 않는다. 그러나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의 중심 세력들에 의해 섬진강을 건너 전남의 동부지역에서 사찰건립이 시작되었고 이에 동반하여 신라석탑도 자연스럽게 건립되었을 것이다. 즉 전남지역에서의 불교미술의 발흥은 경주중심의 불교전개가 화엄종 과 선종 위주로 이루러지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경로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12) 더욱이 이 는 전남의 서부지역에서 통일신라시대 사찰이나 건 탑의 흔적을 발견하기 어려운 점을 보면 이를 짐작 하게 한다.

    현존하는 전남지방의 석탑은 화엄사 사사자삼층 석탑이 그 효시가 된다. 이는 비단 석탑에서뿐만 아 니라 전남의 불교미술품으로서도 가장 우수한 작품 이라 평가되고 있다. 화엄사에 건립된 사사자 삼층 석탑은 전남지역에서는 유일하게 볼 수 있는 8세기 석조물인 점에서 가야산이나 가지산보다 먼저 불사 가 이루러져 전남지역 불교미술의 발달에 촉진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13) 특히 근년에 발견된 국 보 白紙墨書華嚴經券의 발문14)에 따르면 경주 황룡사의 승려인 緣起가 호남을 중심으로 사경활동 을 전개한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는 바, 이 연기가 바로 화엄사를 창건하였다고 기록된 煙氣와 동일인 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신라사경의 조성연대가 天寶年間, 754-755이어서 신라 경덕왕대에 해당되는 바 이것은 화엄사의 창건연대라 알려진 6세기경(진 흥왕 5년, 544년)과 관련시켜 볼 때 2백년의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신중히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주목되는 점은 이 묵서 화엄경이 화엄사의 사사자 삼층석탑에서 발견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만 일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 묵서 화엄경의 제작연 대가 경덕왕 13년부터 14년, 즉 754부터 755년 사이 의 일이므로 탑의 조성도 이때를 전후해서 화엄경 불사와 함께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 다.15)

    그렇다면 통일신라시기인 천보년간에 황룡사의 승려인 연기가 화엄사를 창건하고 그의 공적에 의 하여 전남지방의 최고석탑인 화엄사사사자석탑이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신라석탑은 경 주를 중심으로 7세기 초기에 발생하여 발전하였고, 신라의 삼국통일로 전남, 광주지방인 백제의 영토에 신라석탑이 나타나게 된다. 8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신라식 석탑의 전형은 이후 오랫동안 지켜진 형식 으로16) 방형평면의 기본양식과 중층형식은 한국석 탑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17)

    통일신라시기인 9세기전반 으로 보이는 광주 지산동오층 석탑(광주 동오층석탑)은 이 중기단을 갖춘 전형적인 신라 하대형식의 탑이다. 탑의 받침 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는 여 러 개의 돌을 짜 맞춰 구성하 였으나, 탑신부의 몸돌과 지붕 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 어졌다. 하층기단의 면석에는 귀기둥인 우주와 버팀기둥인 탱주가 2주 있고 몇 개의 판 석으로 짜여 있으며, 상층기단 의 중석도 역시 몇 개의 판석으로 되었다.5

    탑신부에 있어서 탑신과 옥개석은 각각 1석인데 각층의 탑신면에는 우주가 모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추녀 사이가 좁아져 두꺼우며, 轉角에 이르도록 직 선이고 상면에서 반전되고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과 복발이 남아 있으나 파손이 심하다. 1955년 해체 수 리시 4층 옥개석 윗면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그 후 1961년 다시 수리를 하여 일부 석재를 보완 하였다.

    탑신을 비롯해 각부가 고준하게 보이는 탑으로 신라석탑의 기본형을 잃지 않은 신라 하대의 대표 적인 석탑이다. 특히 지붕돌 밑면의 옥개받침이 1층 은 5단인데 비해 2층부터는 4단으로 줄어들어, 제작 연대가 통일신라 후기로 내려옴을 알 수 있다.

    9세기 전반의 작인 대흥사 응진전 앞 삼층 석탑에서도 변화가 생 기고 점차 작아지는 경 향을 나타내는데 옥개 받침이 5단이었던 것이 4단으로 줄고 탱주의 수는 하층기단은 2주, 상층기단은 1주로 줄어 들었다. 옥개석 위의 탑신받침은 각형 2단을 유지하 고 있다. 또한 이 지역과 가까운 남원 실상사 동∙서 삼층석탑(실상사 창건 826)은 상하기단의 탱주가 각 각 1주이고, 옥개받침의 수도 4단으로 줄어드는 보 다 약화된 형식이 나타난다.6

    통일신라 말기로 내려오는 9 세기 후반에는 석탑의 규모가 작아지고 구성요소들이 보다 약화된 현상이 나타나며 현저 한 변화를 보인다. 특히 전남 지역에서 나타나는 통일신라시 대의 석탑들 중 상당부분이 9 세기 후반에 해당되는데 화엄 사 동서 오층석탑을 제외하고 는 모두 다 삼층석탑으로 규모 가 작아지고 약화된 구성요소 들의 특징을 보인다. 대표적인 석탑은 장흥 보림사삼층석탑, 중흥산성삼층석탑, 선암사삼층석탑, 금둔사지삼층석 탑, 증심사삼층석탑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석탑에 나타나는 특징으로 하층기단의 탱주 수는 주로 1주 인데 예외적으로 3주, 2주 또는 아예 없는 경우 등 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반면 상층기 단의 탱주 수는 1주로 고정되었다. 옥개받침은 주로 4단인데 예외적으로 5단과 3단도 나타난다. 또한 탑 신받침은 1층이 호형, 2층이 각형 2단으로18) 나타나 고 주로 각형 1단으로 고정되었다.7

    이외에도 8세기 중반이후 나타나기 시작한 異形 석탑들이 전남지역에서도 일부 출현하고 있다. 8세 기 중엽 이후 전반적으로 건축적 결구의 표현이 단 일화된 부재에 조각적 표현으로 나타나는 동시에 석탑 자체에 장식적인 모습이 강하게 나타남으로써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이형식 석탑이 출현하게 된다. 이 시기에 건조된 석탑의 장식적 경향은 비단 석탑 뿐만 아니고 신라 중대 후기의 문화적 경향으로 경 덕왕대(742-764)를 중심으로 하는 여러 유구의 장 식적 표현에 그 논거를 두고 있다.19)

    이 지역에서 나타나는 이형석탑으로서는 부재의 결구방식이 전형양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특이한 형 태를 보이는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외 화엄사 원 통전 앞 사자석탑이 대표적인 예이다. 외형은 신라 전형양식인 방형, 중층의 기본 틀을 갖추고 있으나 기단 및 탑신부의 각 면에 천인상, 안 상, 팔부중상, 십이지신상, 사 방불, 불보살, 인왕상 등 여러 상을 조각하여 표면장식이 화 려한 장식적인 석탑으로 변모 하였다. 이러한 예는 구례 화 엄사 서 오층석탑, 인근지역인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광양 중흥산성 삼층석탑, 순천 금둔사 삼층석탑 등에서 특징 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의 출현은 특이하게도 지리산을 중심으로 하는 전남의 동부지역에 집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8

    이상에서 나타나는 통일신라시대의 전남지역의 석탑은 신라전형양식 뿐만 아니라 이의 변화과정 중 나타나는 약화된 형식들이 지리산을 중심으로 하는 전남의 동부, 그리고 남부의 일부지역에서 보 여 지고 있다.

    한편 상기한 바와 같이 영산강을 중심으로 하는전남의 서남부 지역에는 사찰의 건립이 드물게 나 타났기 때문에 석탑 역시 조영되지 않았으며, 이는 영산강 수계권역에 있는 마한이나 옹관묘 집단이라 는 기존의 토착문화와의 배타적인 입장에서 관련성 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 라불교문화의 영향력은 영산강을 중심으로 한 수계 권역, 그러니까 전남의 서부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 에 전파되어 8세기중반 이후부터 신라석탑의 활발 한 전개를 이루게 되었다고 보여 진다.

    4.2.전남지역 통일신라석탑의 세부양식20)

    전남지역에 산재한 통일신라시대석탑을 보다 구 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우선 부재상호간 의 높이 체감비, 옥개와 기단부를 중심으로 형태나 세부적인 사항, 가공과 조립방법 등에 대하여 고찰 해 보기로 한다.

    가.체감비

    전남의 대표적인 통일신라시대석탑 10기를 실측 조사한 결과 절대 높이는 낮아졌으나 체감비는 불 국사 3층석탑보다 0.12 커서 오히려 높아져 보인다. 하층기단은 대체적으로 높아지고 상층기단은 다 높 아졌다. 1층 옥개석은 낮아지고 2층 탑신은 대체적 으로 높아졌으며 2층 옥개석은 모두 다 낮아졌다. 3 층 탑신은 9기가 낮아지고 1기만 높아졌다. 3층 옥 개석은 10기 다 낮아졌다. 이상으로 보아 전체적으 로 높이의 체감이 경주를 중심으로 한 전형적인 통 일신라시대 석탑에 비하여 더 커서 細長한 느낌을 주고 옥개석은 얇아져 안정감을 찾고 있다.

    나.기단부

    통일신라 말기에 나타나는 하나의 변화는 일반형 석탑에서 보이는 이중기단이 단층기단 또는 삼층기단(삼 단형)으로 변화되는데 단층 기단은 보성 우천리삼층석탑 이고 구례 연곡사삼층석탑은 삼층기단에 속한다. 단층기단 은 낮은 하층기단이 생략되 어 지대석 위에 바로 상층기 단이 놓이게 된 형식으로 목 조건축의 기단이 단층이고 목조건축을 번안한 백제계석 탑들이 단층기단인 점과 아 울러 서로 관련이 있는지 고 려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21) 특히 구례 화엄사 동오 층석탑에서 단층기단의 약화된 모습이 나타나고 있 는데 이러한 양식들은 이후 고려시대 석탑건조 양 식에 크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9

    다.옥개석 낙수면

    흔히 석탑에 있어서 옥개석의 상부 지붕면에 해 당하는 부분을 낙수면이라고 한다. 건립시기에 따라 낙수면의 경사도와 길이가 조금씩 다르다. 일반적으 로 시대가 앞설수록 길이가 길고 경사가 완만하다. 목조건축에 있어 지붕선이 처마 끝에 이어서 솟아 오르는 형상과 유사하다.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에서 는 전각의 반전이 날렵하고 경쾌하나, 고려시대 이 후의 석탑에서는 완만하여 둔중한 감을 주고 있다.2

    옥개석의 경우는 낙수면과 전각의 반전에서 시간 이 흐를수록 더욱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곡선미를 보이고 있어, 석재를 다루는 기술력이 향상되고 있 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변화는 석탑을 건립함에 있어 목조건축의 지붕을 재현하고자 했던 의지의 소산이라 생각된다. 9세기에 이르러 건립되는 부도 에서는 낙수면의 기왓골과 더불어 암∙ 수막새기와 는 물론 처마와 전각의 반전, 추녀에 이르기 까지완벽하게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석조건축에서 지붕 의 표현은 석탑에서 처음 시도되어 부도에서 완성 을 이룬 것으로 볼 때 석탑의 옥개석은 목조건축을 충실히 재현하고자 노력했던 결과로 보여 진다.

    전남의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낙수면은 <표2> 에 서 보는 것과 같이 대체적으로 평박하거나 완만하 다. 그에 반해 전각의 반전은 완만하기 보다는 뚜렷하여 경쾌한 것이 대부분인데 다소 심한 반전의 형 태를 보이고 있는 것도 있다.

    라옥개석 물끊기 홈

    물끊기 홈은 옥개석 밑면에 옥개석에서 흘러내리 는 빗물 처리를 위하여 가공된 것으로 목조건축에 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석탑만이 갖고 있는 세부 가 공 기법이라 할 수 있다. 물끊기 홈은 석탑 조영 초 기에는 별도로 고려되지 않았으나 통일신라 이후 석탑에 있어 정형화가 진행되면서 발전된 가공기법 으로 그 형태에 따라 어느 정도 유형을 분류 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물끊기홈의 위치나 폭 등은 다양한데 옥개석 밑면에 별도로 가공하는 기법에서 점차 옥개받침석과 연결되는 의장적 표현으로 변하 였을 가능성이 있다.3

    특히 별도로 가공되는 경우는 물끊기홈의 단면 형 태가 원형인 것과 각형인 것으로 구분되는데 이러 한 단면형태는 실상사 동서삼층석탑에서 볼 수 있 듯이 동일한 사찰내에 조성되는 석탑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장인이 보유하고 있는 기법 의 차이가 아닌가 생각된다.22)

    전남지역의 통일신라시대 석탑에서 물끊기 홈은 <표 3> 에서보는 바와 같이 총 11기의 석탑에서 보이는 데 대표적인 석탑은 대흥사 응진전 앞 삼층석탑(9 세기전반), 보림사 삼층석탑(870년), 영광 신천리 삼 층석탑(9세기후반)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전남지 역에서 해남, 장흥, 영암으로 전남서부에 해당하고, 시기적으로 9세기 전후반에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마풍탁공(風鐸孔)

    풍탁공은 석탑의 주요 장엄을 위하여 옥개석의 모서리부분에 풍탁을 달아매기 위해 판 조그마한 구멍이다. 전남의 석탑중에서 18기정도에서 나타나 는데 통일신라시대 석탑에는 7기 정도 보인다. 풍탁 공의 유형은 천공형과 삽입형으로 구분할 수 있으 며 삽입형의 경우 정혈의 위치와 개수에 따라 다양 한 형식으로 세분된다. 전라도 지역석탑에서 많이 나타나는 삽입형 풍탁공은 유형은 옥개석 전각면 양측 모서리에 1개씩으로 1면에 2개의 정혈이 가공 되는 형식이다.23) 통일신라시대 석탑에서 풍탁공이 나타나 있는 석탑으로는 광주 동 오층석탑, 중흥산 성 삼층석탑, 선암사 삼층석탑, 보성 우천리 삼층석 탑, 연곡사 삼층석탑, 금둔사지 삼층석탑이다. 이를 지역적으로 구분해 보면 광주, 광양, 순천, 보성, 구 례로 대체적으로 전남동부지역에 나타나고 있다. 시 기적으로는 대체로 9세기 후반이다. 특히 정형에서 많이 이탈한 운주사석탑에서도 풍탁공이 나타나고 있다.4

    바탑신받침과 노반받침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은 8세기 이후 시대가 내려 가면서 부분적인 변화가 생기며 점차 작아지는 경 향을 나타내는데 옥개석 위의 탑신받침(혹은 탑신 괴임)도 2단에서 1단으로 작아지고 각형에서 호형 으로 변한다.

    <Table 5> Style of Tapsin and Noban Stand (탑신받침과 노반받침양식)

    전남의 통일신라기 석탑의 탑신받침은 2단 각형 이 6기, 1단 각형이 4기로 대체적으로 2단 각형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 혼합형을 보이는 것 도 있다. 보림사 삼층석탑은 3단으로 角形∙ 弧 形∙ 角形으로 되어있으며 선암사 삼층석탑은 기단 의 갑석 위의 받침은 3단으로 각∙호∙각으로 되어 있는 반면 옥개석 위의 받침은 2단의 호형∙각형을 보인다. 특히 보림사 삼층석탑에 있어 3단의 경우는 맨 아랫단이 아주 낮아 잘 구분이 않될 정도이지만 선암사 삼층석탑의 기단갑석은 뚜렷하다.

    노반받침의 경우는 1단 각형이 6기, 2단 각형이 4 기로 대체적으로 1단 각형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탑신받침에서혼합형으로 나타나는 것은 노반받침에 서 역시 혼합형을 그대로 보인다.

    4.3.전남지역의 고려시대 석탑

    신라에서와 같이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석탑은 불교의 가장 중심적인 예배 대상이었다. 따라서 석 탑은 그 수에 있어서나 조형 미에 있어서 당시 불교적인 조형미술의 중심을 이루었다. 특히 오늘날에도 많은 고려석 탑의 유례를 볼 수 있다. 이는 수적으로는 개경 부근이 보다 많이 분포한 면이 없지 않지 만 그 유례는 전국적으로 나 타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러한 분포 변화는 시대상의 변화에 따르는 것으로 일반적 인 추세는 왕실 불교적 입장 에서 출발한 한국의 불교가 수 백 년을 지나면서 보다 보편화된 결과라 할 수 있다.10

    고려의 석탑 건립에 있어서 먼저 주목되는 것은 국가적인 조영이라 하겠다. 고려시대 역시 불교가 국가적 종교, 왕실불교로서 번영하였음은 물론, 전 대로부터 이어지는 호국 불교적 성격은 국가 생성 초기부터 많은 국가적 사원의 창건을 이루게 되었 다. 국가적 조영의 경우 역시 수도인 개경이 우세한 데 개경의 법왕사와 왕륜사 등 10사찰의 건립과 수 많은 불사가 있었다는 기록 등은 불교국가로서 변 모를 보인다. 태조 왕건의 훈요10조에도 반영되고 있듯이 국가적인 조 영이 전국적인 모습 으로 행해졌음을 나 타내게 하여준다. 대 체로 개경의 칠층석 탑의 건립과 연관되 는 것으로 믿어지는 고구려의 옛 서울인 서경의 구층탑 건립, 신라의 옛 서울인 경주의 황룡 사 구층목탑의 중수, 백제 구도 부근의 거대한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그리고 후백제군을 격파한 곳에 천호산 개태사를 건립한 것 등은 모두 그러한 면을 전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11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 중의 하나는 우선 석탑 건 립이 왕도를 중심으로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대에 비하여 전국적으로 확산 분포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지역민의 발원에 의하여 여러 석탑이 건립되었으며 이 때문에 오히려 석탑이 전 국적으로 분포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고려 시대 석탑의 전국적인 분포나 그 建塔에 있어서 토 착세력의 참여의 가능성은 바로 고려 석탑의 양식 상에 다양한 변화를 초래케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다분함을 짐작케 한다. 즉 前代의 王都중심의 일률 적인 건탑양식에서 벗어나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각 지방의 토착세력인 지역주민이 건탑에 관여했을 때, 과거 왕경중심의 일률적인 규범보다는 각기 제 나름대로의 지역적인 특징이 반영되어 곧 다양성 있는 석탑양상을 보일 것이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자 고려는 정치적인 관용 을 베풀어 널리 인재를 등용하여 새 왕조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문화면에 있어서도 신라문화양식을 계 승하면서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양식도 수용하여 재 구상 했다.24) 즉 고대국가의 모순을 정리하여 새로 운 국가로 질서체계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태조 왕 건은 지방호족들을 중앙에 포섭하는 동시에 이들의 자치적 기반인 경제력과 정치적 권한을 인정했다. 이는 모든 지방호족을 중앙에서 다스릴만한 국가권 력이 미흡했던데 기인하며 이러한 현상은 고려의 지방제도 정비과정에서도 나타나고 있다.25)

    이러한 과정에서 고려의 조형미술은 지방색을 띄 게 되었고, 탑파건축에 있어서도 고구려의 옛 영토 에 영명사 팔각오층석탑을 비롯하여 율리사지 팔각 오층석탑, 광법사 팔각석탑, 평양 간사정 팔각칠층 석탑, 보현사 팔각십삼층석탑 등을 건립하였고26) 백 제의 고토에도 왕궁리 오층석탑, 비인 오층석탑, 장 하리 삼층석탑, 계룡산 남매탑 등을 비롯한 다수의 석탑이 건립되었다. 전남지역에는 담양 남산리오층 석탑과 곡성 가곡리오층석탑, 강진 월남사지삼층석 탑, 일부 운주사석탑 등에서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 고 있다.

    결국 이러한 고려사회의 정치, 종교적인 경향에 대한 영향으로 전남지방의 석탑조영에 있어서도 다 양한 형식을 보인다. 전남, 광주지역의 고려시대석 탑 중 현재 문화재로 지정되어 파악된 것은 54기이 다. 이들을 양식적으로 구분하면 순수 신라양식계승 형식의 석탑과 백제양식을 계승하는 형식, 그리고 백제적요소와 신라적 요소가 혼합, 절충된 절충형식 석탑으로 구분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나 타나고 있는 신라양식계 석탑들은 신라석탑에서 약 간 변모된 모습을 보이는데 삼층에서 오층으로 높 아지고 고준해지며, 장식화 되고 세부수법이 간략화 되는 양식상의 변화를 보인다. 신라양식계의 대표적 인 석탑으로서는 (전)광주 성거사지오층석탑을 비롯 하여 나주 북망문 밖 삼층석탑, 해남 대흥사 북미륵 암 삼층석탑, 구례 논곡리 삼층석탑 등을 들 수 있 다.

    또한 백제의 구영토인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지방 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러 백제계 석탑양식이 등장하 게 된다. 이러한 석탑양식의 형성은 고려의 불교가 신라시대에 비해 보다 대중화되고 불사건축과 미술 작품이 아울러 전대인 신라의 중앙집권적인 경향에 서 벗어나 지방에까지 파급되고 순수한 지방세력 내지는 민중이 참여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토착적 인 특색이 두드러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백제의 옛 영토에 대한 고려 중앙정부의 정치적 관 용과 문화적 수용에 의하여 백제시대의 향수를 느 끼게 하는 석탑들이 재현되어 다시 나타나게 된 것 이다.

    고려시대 건립된 석탑 중에서 백제석탑의 요소를 계승한 탑들은 이들이 갖는 조형적, 구조적 특성에 따라 계승한 순수백제계승양식과 백제와 신라탑의 요소를 부분적으로 절충한 백제신라절충양식의 흐 름으로 파악할 수 있다.27) 백제양식석탑은 먼저 지 역적으로 백제의 중심무대였던 부여지역을 중심으 로 인근지역에서 나타나는 탑들이다. 이들은 부여지 역과 전라북도 북부지역에 분포된 탑들로서 서천 비인오층석탑, 부여 장하리삼층석탑, 계룡산 오층석 탑, 정읍 은선리 삼층석탑, 김제 귀신사지삼층석탑, 옥구 죽산리삼층석탑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정림 사지 오층석탑을 충실히 모방한 것이거나 신라적인 요소와 함께 조영되었으나 백제적인 의장요소가 더 욱 강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고려시대에 건립된 백 제계승 양식 중 연대가 가장 앞선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 석탑의 조형 적 특징은 모두가 단층기단으로 평평 하고 얇으며 넓은 즉 平博廣大한 옥개 석이 囲字形8개석 으로 조립되거나, 田字形4개석으로 구성되었다. 옥개석 의 밑에는 계단모양 으로 각진 형식과 경사진 斜菱形옥개받침이 각각 별석재로 조립되어 있으며 지붕돌인 옥개석의 단부 에서 경쾌한 들림이 이루어진 反曲이나 옥개석 상 부의 내림마루의 두툼한 隅棟형태, 탑신의 급격한 체감으로 인한 고준한 모습, 다수의 별석재를 조립 구성한 목조가구의 수법 등에서 목조건축적인 수법 을 지닌 백제석탑의 전형적인 특징이 나타나고 있 다. 그러나 전남에서는 월남사지삼층석탑이 외형적 인 모습에서 차이는 나지만 가장 근사한 형태를 지 닌 탑이며, 담양 남산리오층석탑과 곡성 가곡리오층 석탑, 담양 연동사지삼층석탑, 일부 운주사석탑 등 에서 백제미술적인 석탑조형양식의 잔재가 나타나 고 있다.12

    한편 전남지역에 있는 고려시대석탑은 부분적으 로 신라석탑의 특징을 절충한 것들이 대부분을 차 지하고 있는데 이를 그들이 갖는 외형적인 특성에 따라 탑신받침대형과 細長∙高峻形으로 나누어28) 살 펴볼 수 있겠다.

    이들 중에서 하나는 탑신을 받고 있는 받침대가 유난히 강조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탑신받침대형29) 이라고 할 수 있다. 담양 남산리오층석탑, 곡성 가 곡리오층석탑, 담양 연동사지폐탑, 남원 만복사지오 층석탑 등으로 전남의 북부지역과 그 인근에 집중 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각층 탑신하부에 탑 신보다 넓고 두터운 탑신받침대가 별석으로 놓여있 는 점이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전반적 으로 정림사지석탑의 약화된 모습을 나타내며, 신라 전형탑의 이중기단과는 다른, 즉 우주와 탱주가 생 략된 모습의 약화된 기단이나 2단 내지 3단의 뚜렷 한 각형 옥개받침, 얇고 넓은 단일석에 모서리부분 의 반곡이 뚜렷한 옥개석, 내림마루인 우동의 호형 단면 등에서 전반적인 백제양식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 유형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석탑이 갖는 외형적인 모습이 가늘고 높은 형태로 나타나는 세장∙고준형30)이다. 나주 송 제리 오층석탑, 화순 운주사칠층석탑, 보성 옥마리 오층석탑, 진도 금골산오층석탑 등 백제양식을 부분 적으로 모방한 석탑들로 지역적으로는 백제의 중심 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정치적으로도 신라말기 고려의 중심세력과 교류가 빈번했던 지역에 분포한 다. 이들 석탑은 이중기단이나 백제식 단층기단을 겹쳐놓은 듯하며, 초층 탑신이 매우 높고 2층 이상 의 탑신은 초층에 비해 급격한 체감비율을 보여 가 늘고 높은 형태를 띠고 있으며, 옥개석은 단일석으 로 좁고 두툼하며 여러 개의 각형 옥개받침과 경사 가 급한 낙수면을 이루고 모서리에서 가벼운 반곡 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탑신을 비롯한 전반적인 모습에서는 백제양식의 영향을 느낄 수 있으나 옥 개석에서는 신라적 특징이 나타나고 있어 전형적인 백제양식에서는 다소 벗어난 형태라 생각된다.

    한편 하나의 장소에 다양한 형태의 석탑들이 무 리를 이루고 있는 화순의 운주사는 고려시대 이형 석탑의 보고라 할 수 있다. 3기의 폐탑을 포함 21기 의 석탑이 방형, 원형, 원구형, 모전계열, 석주형 폐 탑 등의 형식으로 나타나고31) 있으나 전형적인 석 탑의 규범에서 벗어나 이들 양식에 많은 의견이 있 다. 이들 석탑들은 짧은 시기에 집중적으로 건립된 것이 아니라 12세기부터 15세기까지 3~4차례에 걸 쳐 석탑의 건립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는데32) 이 석탑들의 조형특성을 통해서 몇 가지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다.

    하나는 방형석탑에서 보이는 백제계석탑의 양식 적인 수법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백제신라 절충양식 중 세장∙고준형에 해당하는 석탑들이 다 수 나타나고 있어서 이 지역 역시 인근의 나주, 보 성지역에서 출현된 석탑들과의 관련성을 추측해 볼 수 있겠다.

    또 하나는 신라 경주지역을 중심으로 다수 건립 되었던 모전석탑의 형식이 운주사에서도 2기나 나 타난다는 점이다. 이 형식은 벽돌로 내쌓기와 들여 쌓기를 하면서 옥개석을 형성한 분황사 모전석탑을 시원으로 하는 전탑형식을 모방하고 있으나 실제의 모습은 의성 탑리오층석탑과 유사한 조형적 특성을 보이며 단일석재를 전탑과 같이 모각하는 기법이 사용되었다. 백제의 고토인 충청∙전라지역에서는 강진 월남사지와 이곳 운주사에서만 그 예가 나타 나고 있어서 이 또한 보다 신중한 검토와 고찰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운주사에서 다수의 이형석탑의 출현 을 들 수 있는데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원형석탑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형 식의 탑신은 十角形이나 옥개석이 원형으로 이들 석탑들은 옥개석이 원구와 비슷한 주판알 혹은 떡 시루 형태를 한 원구형과 옥개석이 얇고 넓은 원판 형태를 한 원판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원형 석탑형식은 한국석탑에서는 흔치 않으나 중국에서 는 당나라 때부터 원형의 불탑이 나타나고 있어 중 국의 영향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박경식은 석굴암 삼층석탑에서 원형석탑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33)

    5.전남지역석탑의 특징

    “전남지역의 석탑”이라 는 용어가 썩 어울리는 것 은 아니다. 우리나라는 우 선 면적이 좁아 지역적 특 성이 뚜렷한 전통유구가 많지 않을 것이고 지역적 특성을 찾고자 하는 노력 이 그다지 의미가 있는 일 이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 문이다. 전남이란 자연조건 으로는 노령산맥에 의하여 전북지방과 경계를 이루고, 동쪽은 소백산맥이 남북으 로 달리면서 경남지방과 경계를 짓고 있어 개념적으로는 막연한 지역의 의 미를 가질지 모르나 결국 하나의 행정상의 규약일 뿐이다. 그러나 불탑의 지역적 특성을 찾고자 한다 면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13

    -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전남지방 석탑의 효시는 750년경에 건립된 화엄사 4사자삼층석탑이 다. 이 탑의 건립은 불교가 도입된 후 약350년가량 이 지난 일이다. 즉 전남지방에는 삼국시대의 석탑 은 없고 통일신라시대의 것이 그 祖形이라 하겠다. 그 다음은 여러 가지 양식으로 보아 광주 동5층석 탑이 아닌가 생각된다.

    -통일신라시대 전남지방 석탑의 분포는 영산강의 주변을 제외한 지역에만 나타나고 있다. 이는 강한 토착성을 지닌 옹관묘 분포지역에서 백제와 불교문 화가 쉽게 도입되기가 그다지 용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정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즉 정치적이 며 문화적인 배타성이라 할 수 있겠다. 한편 섬진강 주변에는 영산강에 비하여 오히려 많은 佛寺와 석 탑조영이 이루어졌다.

    -전남지방에서 나타나는 통일신라시대 석탑양식 은 뚜렷한 지역적 특성을 찾기가 어렵다. 즉 통일신 라시대 일반적인 석탑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강한 중앙집권적 통치로 문화현상에서 지역성이 도출될 여유가 없었던 것으 로 보인다. 오히려 전형적인 신라석탑양식이 이 지 방에 널리 출현한다.

    - 전남지역의 통일신라 시대 석탑은 9세기 전반의 작품이라고 생각되는 대흥 사 응진전 앞 삼층석탑에 서 나타난 바와 같이 세부 적인 부분에서 전형적인 신라석탑에 비하여 변화가 생겼다. 즉 전체적인 규모 가 점차 작아지는 경향을 나타내고 옥개석의 받침이 5단이었던 것이 4단으로 줄어들었으며 기단에 있어 탱주의 수가 하층기단은 2주, 상층기단은 1주로 줄 어들었다. 또한 옥개석 위의 탑신받침은 각형 2단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남원 실상사 동∙서 삼층석탑 (826년 실상사 창건)은 상하기단의 탱주가 각각 1주 이고, 옥개받침의 수도 4단으로 줄어드는 보다 약화 된 형식이 나타난다.

    -. 통일신라 말기로 내려오는 9세기 후반에는 석 탑의 규모가 작아지고 구성요소들이 보다 약화된 현상이 나타나며 기단부가 변화하였고 이형석탑이 건립되는 등 현저한 변화를 보인다. 이 지역에서 나 타나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들 중 상당부분이 9세 기 후반에 해당되는데 화엄사 東西오층석탑을 제외 하고는 모두 삼층석탑으로 규모가 작아지고 약화된 구성요소들의 특징을 볼 수 있다. 이들 석탑에 나타 나는 특징으로 하층기단의 탱주 수는 주로 1주인데 예외적으로 3주, 2주 또는 아예 없는 경우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반면 상층기단의 탱주 수는 1주 로 고정되었다.

    통일신라 말기에 보이는 또 하나의 변화는 일반 형 석탑에서 보여지는 이중기단이 단층기단 또는 삼층기단으로 변화된 모습을 나타내는데 보성 우천 리삼층석탑과 구례 연곡사삼층석탑이 이에 속한다.

    단층기단은 낮은 하층기단이 생략되어 지대석 위에 바로 상층기단이 놓이게 된 형식으로 목조건축의 기단이 단층이고 목조건축을 번안한 백제계석탑들 이 단층기단인 점과 아울러 서로 관련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 전남지역 통일신라기 석탑 옥개부의 양식적 특징은 먼저 옥개석의 낙수면은 대체적으로 평박하 거나 완만한 반면 전각의 반전은 경쾌하고 심한 반 전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물끊기홈은 대흥사 삼층 석탑(9세기전반), 보림사 삼층석탑(870년), 신천리 삼층석탑(9세기후반) 등 3기에서 나타나고 있다. 물 끊기홈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몇 기 안되지만 지역 적으로 구분해 보면 해남, 장흥, 영암으로 전남서부 에 해당하며, 시기적으로는 9세기 전∙후반에 나타 남을 알 수 있다.34)

    풍탁공이 나타나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탑은 총7 기로 광주 동 오층석탑, 중흥산성 삼층석탑, 선암사 삼층석탑, 보성 우천리 삼층석탑, 연곡사 삼층석탑, 금둔사지 삼층석탑이다. 이를 지역적으로 구분해 보 면 광주, 광양, 순천, 보성, 구례로 대체적으로 전남 동부지역에 나타나고 있다. 시기적 보면 대체로 9세 기 후반이다.35)

    탑신받침(혹은 탑신괴임)은 2단 각형이 6기, 1단 각형이 4기로 대체적으로 2단 각형을 보이고 있다. 노반받침의 경우는 1단 각형이 6기, 2단 각형이 4기 로 대체적으로 1단 각형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특 이하게 보림사 삼층석탑 탑신받침과 노반받침에서 각각 3단 의 호∙ 각∙호형, 2단의 호∙ 각형의 혼 합형이 나타나 있다. 한편 선암사 삼층석탑은 기단 부는 뚜렷한 3단으로 호∙ 각∙호형으로 되어 있으 나 옥개는 호∙각의 2단으로 되어 있다.36)

    옥개받침은 초기에는 받침의 수가 5개였다가 후 기로 오면서 줄어드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와 같은 경향이 전남지역 통일신라기 석탑에서 그대로 반영 되어 있어 대체적으로 옥개받침의 수가 5단에서 4 단으로 줄어들고 있다. 3단인 경우는 중흥산성 3층 석탑이다.

    이와 같이 옥개부의 형식은 대체적으로 통일신라 기 석탑의 변화 경향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간혹 특이한 양식을 보이는 것도 있어 이에 대해서는 보다 깊은 고찰이 이루어져야 이 지역 석탑의 특성을 추출 할 수 있으리라 기 대된다.14

    -. 그러나 고려시 대에는 고려시대 미 술품의 전반적인 경 향처럼 전형적인 규범에서 벗어나 석탑조형의 다양 성을 보인다. 운주사석탑의 파격적인 다양성이나 해 남 북미륵암석탑 기단부, 보성 봉천리오층석탑의 탑 신에 나타난 것처럼 즉 지역인들의 참여에 의한 풍 토적이며 토착적인 다양한 형태의 탑이 지방의 오 지에까지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석탑의 일 반적인 모습이다.

    -. 고려시대 전남지방의 석탑에서는 백제적인 요 소가 나타나고 있음은 주목되는 현상이다. 백제의 고토에는 고려시대에 들어와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모방한 백제전형양식의 석탑들이 충청도와 전북지 방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전남지방에도 약간 변모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탑신에 비하여 옥개석이 유난히 넓고 얇으며 네 귀의 반전으로 인한 경쾌함이나 곡 선적인 면모, 목조건축에서 나타나는 가구적인 구성 수법 등에서 백제적인 요소가 나타나고 있다.

    -. 고려시대 전남지방에서는 월남사지 삼층석탑 과 운주사모전석탑 등처럼 모전석탑이 출현하고 있 다. 전탑은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출 현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데 이 지방에서 모전석탑 이 나타나는 것은 경상도지방과의 관련을 의미한다 고 볼 수 있다.

    -. 운주사의 석탑은 한 장소에 다양한 모습의 석 탑, 특히 원형석탑과 모전석탑이 나타나고 있어 특 이한 현상이다. 종래 우리가 갖고 있는 석탑의 일반 적인 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있다.

    -. 김정기교수는 이 지방석탑의 특징을 타 지역 에 비하여 오층탑이 많다는 점과 상륜부가 크다고 하였는데 주목해 볼 만 하다.37) 다만 통일신라시대 의 오층석탑이라야 광주 지산동 오층석탑과 화엄사 동∙서 오층석탑의 3기에 불과하여 일반적인 사항으 로 보기에는 다소 미흡하다.

    6.결어

    이상에서 전남지역을 중심으로 석탑의 분포현황 그리고 조형적, 구조적 특성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전남지역의 석탑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을 시원 으로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파악된다. 하나는 통일 신라시대 전남지역의 석탑의 분포로서 신라전형석 탑의 변화과정 중 나타나는 몇 가지 약화된 유형들 이 전남의 동부 그리고 남부의 일부지역에 나타나 고 있는 것으로 전남의 서부지역 즉, 영산강의 주변 지역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현상이다. 이 과정 중 나 타나는 석탑의 특징은 옥개석의 받침이 5단에서 3~4단으로 약화되거나 상층기단의 탱주가 2주에서 1주로 줄어드는 약화된 모습을 들 수 있고, 부재의 결구방식이 전형양식에서 완전히 벗어나거나 기단 및 탑신부의 각 면에 여러 상을 조각하여 표면장식 이 화려해진 이형석탑의 출현을 그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또 하나의 흐름은 고려시대 사회상이 반영된 신 라양식석탑 이외에 백제양식계 석탑들의 출현이다. 주로 전남의 북부와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이 석탑들은 탑이 갖는 조형적, 구조적 특성에 따라 순수백제계승양식, 백제신라절충양식으로 구분할 수 있고, 이중 특히 이 지역에서 많은 수를 차지하는 백제신라절충양식을 탑신받침대형, 세장∙고준형으로 세분하여 살펴볼 수 있겠다.

    먼저 전남의 북부지역과 그 인근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탑신받침대형은 각층 탑신하부에 탑 신보다 넓고 두터운 탑신받침대가 별석으로 놓여있 는 점이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전반적 으로 정림사지 탑의 약화된 모습을 나타내며, 우주 와 탱주가 생략된 모습의 약화된 기단이나 2단 내 지 3단의 뚜렷한 각형 옥개받침, 얇고 넓은 단일석 에 모서리부분의 반곡이 뚜렷한 옥개석, 내림마루의 호형단면 등에서 전반적인 백제양식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 유형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전남의 서부와 남부의 일부지역에서 나타나는 세장∙고준형이다. 이들 석탑은 이중기단이 나 백제식 단층기단을 겹쳐놓은 듯하며, 초층 탑신 이 매우 높고 2층 이상의 탑신은 초층에 비해 급격 한 체감비율을 보여 가늘고 높은 형태를 띠고 있으 며, 옥개석은 단일석으로 좁고 두툼하며 여러 개의 각형 옥개받침과 경사가 급한 낙수면을 이루고 모 서리에서 가벼운 반전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탑 신을 비롯한 전반적인 모습에서는 백제양식의 영향 을 느낄 수 있으나 옥개석에서는 신라적 특징이 나 타나고 있어 전형적인 백제양식에서는 다소 벗어난 형태라 생각된다.

    또 한편으로는 모전석탑과 이형석탑의 출현을 들 수 있다. 모전석탑은 백제의 고토였던 충청∙전라지 역 중 강진 월남사지와 화순 운주사에서만 그 예가 나타나고 있어서 이 양식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던 지역과의 관련성을 검토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형석탑은 화순 운주사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한 장소에서 다양한 무리의 석탑들이 나타 나는 점이나 우리나라 석탑에서는 보기 드문 원형 석탑의 출현, 기존의 일반적인 개념의 석탑의 형태 에서 벗어난 조형적 특성 등 보다 면밀한 분석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Figure

    Hwaeomsa Four Lions-3 story Stupa (화엄사 四獅子三層石塔)

    Jeongdosa site 5 Story Stupa 정도사지 오층석탑)

    Kyungju namsanri 3 story stupa (경주 남산리 석탑)

    Borimsa 3 Story Stupa (보림사삼층석탑)

    Kwangju East 5 Story Stupa (광주 동오층석탑)

    3 Story Stupa front of Daeheungsa Eungjingeon (대흥사 응진전 앞 삼층석탑)

    Silsangsa 3 Story Stupa (실상사 동서삼층석탑)

    Silsangsa Beakjangam 3 Story Stupa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Woocheonri 3 Story Stupa (보성 우천 리삼층석탑)

    Bohyeunsa Octagonal 13story Stupa (묘향산 보현사 팔각십삼층 석탑)

    Wanggoogri 5 Story Stupa (왕궁리 오층석탑)

    Gokseoung Gagokri 5 Story Stupa (곡성 가곡리 오층석탑)

    Ball shape Stupa in Unjusa (운주사의 球形 석탑)

    Bosung Bongcheonri 5 Story Stupa(보성 봉천리오층석탑)

    Table

    List of Stupa in Jeonnam Region (전남지역의 석탑 목록)

    Style of Falling Water Face (낙수면과 전각형식)

    Style of Cutting Water Hole (물끊기홈 형식)

    Style of Pungtak Hole (풍탁공 형식)

    Style of Tapsin and Noban Stand (탑신받침과 노반받침양식)

    Footnote

    Reference

    1. Kang In-G(u강인구) (1982) Culture of Baekje and Honnam(백제의 문화와 호남) , Kwangju Museum,
    2. Sung Chun-Gung(성춘경) (1992) Why is not there C ulture of Baekje in Chonnam? , Keumho Culture (금호문화),
    3. Sung Chun-Gung(성춘경) (2006) Buddhist Statue of Chonnam , Hakyounmunhwasa(학연문화사),
    4. Go Yoo-seob(고유섭) (1964) Brief Art History of Chosun Dynasty(조선건축미술사 초고),
    5. Jeong Young-Ho(정영호) (1989) Beauty of Korea-St one Stupa(한국의미-석탑) , Joongang Daily News(중앙일보사),
    6. Jeong Young-Ho(정영호) (1989) Stone Stupa , Daewe unsa(대원사),
    7. Park Kyung-Sik(박경식) (2002) A Study of Stone A rt of Silla Dynasty(통일신라 석조미술 연구), Yeakyung Publishing Company (예경출판사),
    8. Jang Choong-Sik(장충식) (1987) A Study of Silla S tone Stupa(신라석탑연구) , Ilgisa(일지사),
    9. Cheon Deuk-Youm(천득염) (2006) Stone Stupa Of C honnam 1,2,3(전라남도의 석탑-1,2,3) ,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Heritage(문화재 연구소), Vol.50;
    10. Cheon Deuk-Youm(천득염) (2000) A Study of Baek je Style Stupa(백제계석탑연구), Chonnam National University Press(전남대학교출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