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 론
1-1. 연구의 배경 및 목적
驛의 유래는 중국 周代의 驛傳制度에서 비롯되었는데, 宋代의 遞鋪, 元代의 站赤, 明代의 驛遞制度로 발전하 였다. 이와 같은 역참제도는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끼쳐 신라 炤知王9년(487)의 郵驛설치 이후 삼국시대의 군 현 정비 및 중앙집권 체제의 확립과 더불어 제도화 되었 다. 신라의 5通5門驛과 고려의 6科및 22驛道제도를 거 쳐 조선시대에 들어와 41驛道와 543屬驛체제가 확립되 므로 전국적인 驛路網이 구축되었다.
조선시대 행정체계 속에는 驛이 있었다. 역은 중앙과 지방간에 왕명과 공문서를 전달하고, 進上ㆍ貢賦등의 공공 물자를 운송하며, 사신 왕래에 따른 迎送支待숙박 편의를 제공하고 심지어는 통행인을 검문하는 등의 여러 가지 기능을 담당하였다.1) 따라서 역은 중앙집권적 통치 기구를 유지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기 위하여 驛民을 편성하였고, 역 민들은 驛役을 담당하기 위하여 역의 소재지를 중심으로 마을을 이루어 거주하게 되는데 이곳을 역촌이라 한다.
본고에서 살펴 볼 부평역촌은 굴화역ㆍ간곡역과 함께 조선시대 울산군에 소속되었다. 부평역촌은 지리적으로 慶尙左道兵馬節度使營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며, 북쪽 으로는 경주지역, 서쪽으로는 언양ㆍ양산지역을 연결하 는 중요한 길목에 위치한다.
최근 역사적 기록으로만 알려졌던 조선시대 울산군 부 평역촌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확인 되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驛誌」ㆍ호적자료ㆍ고지도 등 문헌자료를 통해 다루어졌던 역촌의 연구에서 벗어나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촌락 내 건물의 형태와 출토유 물을 분석하여 위치와 구성ㆍ규모 등을 검토해 볼 필요 성이 있다고 생각되어 본고를 작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본 연구의 목적은 첫째, 부평 역촌의 위치를 검토하여 부평역촌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 이고 둘째, 발굴자료를 분석하여 역촌의 구성과 존속시 기ㆍ규모ㆍ배치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하는데 있다.
1-2.연구의 범위 및 방법
본 연구는 조선시대 울산군 부평역촌을 대상으로 한 다. 이를 위해서 부평역촌으로 추정되는 여러 유적 중 특히 울산약사동평산유적ⅠㆍⅡ2)의 발굴조사 보고서 분 석과 문헌자료를 병행하여 살펴보겠다.
연구방법은 먼저 부평역의 연혁과 문헌자료, 유적에서 확인된 건물지와 유물을 검토하여 부평역의 위치를 살펴 보겠다. 다음으로 역촌의 구성요소 특히 건물의 평면형 태, 면적, 축조방법 등을 분석함으로 건물의 형태를 분류 하여 규모와 특징을 검토하겠다. 또한 출토유물 중 자기 류와 기와류의 문양을 비교ㆍ검토하여 촌락의 존속시기 를 살펴보겠다. 마지막으로 건물의 형태별 기능을 파악 하여 역촌의 규모를 추정하고 전체배치도를 분석하여 촌 락의 건물 배치상태를 살펴보겠다.
지금까지 驛이나 驛村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역사학 분야ㆍ문화지리학ㆍ민속학에서 연구되어 왔으며, 연구 성과는 역촌 구성원의 신분과 驛制, 역촌 민속의 양상 등 역촌의 편제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룬다. 그러나 본 연구는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실물자료의 분석을 통해 역 촌을 이루고 있는 건물의 형태와 형태별 배치 등을 연구 하는 것으로 추후 관련 연구의 기초자료로서 활용되기를 기대한다.
2.부평역의 위치와 특징
2-1.부평역 연혁
부평역이 위치하는 울산 약사동은 동쪽이 서동, 북쪽 이 성안동, 서쪽이 복산동, 남쪽이 남외동과 각각 경계를 이루고 있다. 약사동은 肅宗34년(1708)에 富平里와 若 洞里로 갈라져 있었다. 英祖41년(1765)에는 부평리와 약사동리로, 正祖때는 부평리로, 高宗31년(1894)에는 부 평동ㆍ내약동ㆍ외약동으로 개편되었다. 1911년에는 평산 동ㆍ내약동ㆍ외약동으로 갈라져 있었다가 1914년의 행정 구역 개편 때 이를 합하여 약사리라 하였다.3)
약사동 평산마을은 조선시대에 부평이라는 이름이었으 며, 조선시대 부평에는 역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부평 역은 慶尙左道兵馬節度使營(태종 15년, 1415)이 축조된 뒤에 새로 생긴 역으로 위치상으로 볼 때 동쪽의 특수한 목적의 관청인 병영성과 남쪽의 울산읍성을 연결하는 중 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역에는 대마(大 馬) 1필, 중마(中馬) 1필, 짐을 나르는 복마(卜馬) 9필, 노(奴) 13인, 비(婢) 5인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4)
부평역은 조선시대 울산군에 속하였던 역 중의 하나로 병영성의 서쪽에 위치해 있었고,5) 세종 5년(1423) 경상 도의 황산도에 속하였다가6) 세조 8년(1462) 역제 개편으 로 인해 경상좌도 장수도에 속하였다.7)
Tab.1 Post road connecting system in Gyeongsangdo province during the Saejong rule21
2-2.발굴조사 현황
부평역촌으로 추정되는 울산 약사동 평산유적ⅠㆍⅡ는 한국토지주택공사 부산울산지역본부에서 건립하려는 울 산혁신도시부지에서 발굴조사된 유적 중 하나이다.
발굴조사에서 청동기시대 주거지 65동, 삼국시대 석곽 묘 1기, 목곽묘 18기, 석실묘 2기, 고려시대 묘 2기, 주거 지 2동, 조선시대 수혈건물지 32기, 지상건물지 78기, 수 혈 134기, 화덕 55기, 화장묘 1기 등 청동기시대~조선시 대까지 여러 시기에 걸쳐 취락ㆍ무덤 등 다양한 유구와 유물이 출토되었다.23
2-3.위치 검토
부평역의 위치와 관련된 고지도와 문헌기록을 살펴보 면 다음과 같다.
약사동 평산마을은 조선시대에 부평이라는 이름이었으 며, 조선시대 부평에는 역이 있었다.8)
부평역은 조선시대 울산군에 속하였던 역 중의 하나로 병영성의 서쪽에 위치해 있었고ㆍㆍㆍ9)
병영성의 서쪽에 부평역이 있으며, 부평역 서쪽 십오리 에 굴화역이 있으며, 굴화역 서쪽 삼십구리에 간곡역이 있다.10)4
위에서 살펴 본 문헌기록과 고지도에 나타난 부평역은 慶尙左道兵馬節度使營서쪽에 위치한 것이 분명한 것으 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慶尙左道兵馬節度使營서쪽에 위치한 울산약사동평산유적ⅠㆍⅡ에서 역이나 역촌과 관 련된 건물지와 유물이 출토되어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210호 초석식건물지는 규모(정면 9칸×측면 1칸)와 촌락 내에서 위치하는 입지의 우월성, 석축 배수시설로 견고하게 축조된 점 등이 다른 건물지와는 분명히 차별 성이 확인된다. 따라서 촌락 내에서 일반 민가 건물이 아닌 驛舍와 관련된 건물일 가능성이 높다.<Fig.5>
그리고 100호 건물지와 258호 수혈에서 출토된 철기류 와 200호 건물지에서 출토된 열쇠 등은 말과 관련된 유 물로서 건물지의 성격이 말을 보관하던 곳이나 관리하던 시설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6
평산유적ⅠㆍⅡ는 현재의 울산 중구 약사동 804번지 일원 평산마을에 위치하며, 慶尙左道兵馬節度使營에서 서쪽으로 약 600~800m 떨어진 곳에 있다. 그리고 부평 역에서 서쪽으로 15리(6km) 떨어진 곳에 굴화역이 위치 한다는 기록과 앞에서 살펴 본 고지도, 발굴조사에서 확 인된 건물지, 출토유물의 양상으로 볼 때 현재의 평산유 적ⅠㆍⅡ에서 확인된 촌락이 부평역 또는 역과 관련된 역촌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2-4.지리적 특징
부평역은 지리적으로 앞서 살펴 본 것과 같이 慶尙左 道兵馬節度使營과 서쪽으로 근거리에 위치하고 있기 때 문에 매우 밀접한 관계일 것으로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역과 역 사이의 거리이다. 원칙적으로 역과 역사 이의 거리는 매 30리마다 하나가 설치되는 것이지만, 굴 화역과 부평역의 거리는 15리로 매우 짧은 거리에 해당 한다.
둘째 축조시점이다. 부평역이 설치되는 시점은 慶尙左 道兵馬節度使營(태종 15년, 1415)이 축조된 뒤에 새로 생긴 역으로 기록되어 있다. 역촌은 철저하게 국가의 계 획 하에 형성되고 성립된 마을인 것을 감안한다면 역과 역사이의 짧은 거리와 축조시점으로 볼 때 부평역은 慶 尙左道兵馬節度使營이라는 특수한 목적의 관청과 관련 된 역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했을 것이다.
셋째 평산유적 200호 건물지에서 출토된 기와류 중에 서 범자가 새겨진 막새기와가 출토되어 주목된다. 범자 가 새겨진 막새기와는 평산유적에서 인접한 경상좌병영 성의 백화당 건물로 추정되는 곳에서도 출토되었다. 막 새기와에 새겨진 글자는 서로 다르지만 범자 명문 막새 가 양 지역에서 동일하게 출토되었다는 것은 건물의 지 붕에 올려진 기와가 동일한 형태일 가능성이 높다는 증 거이다. 따라서 慶尙左道兵馬節度使營의 설치와 함께 부평역을 축조하여 경상좌병영성과 울산읍성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7
3.역촌의 구성요소와 존속시기
취락은 협의적 의미와 광의적 의미로 정의된다. 협의 적 의미의 취락은 한 지역을 점거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 간이 세운 건조물이며, 인류의 공동생활의 단위인 가옥 의 모임을 총칭하는 개념이다. 광의적 의미의 취락은 주 거지를 중심으로 주변의 경작지, 도로망, 패총과 같은 쓰 레기터, 분묘, 요지, 사회 공동건물지, 제사유적과 같은 의례 장소 등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11)
취락은 건물지와 주거지를 중심으로 여러 구성요소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본 장에서는 취락의 광의적 개념에 기초를 두고 검토를 하고자한다.
평산유적에서 확인된 조선시대 유구는 건물지, 주거지, 수혈, 화덕, 삼가마, 화장묘, 경작유구 등 촌락에 있어서 갖추어야할 구성요소 대부분이 확인되었다.
3-1.입지
평산유적은 행정구역상 울산광역시 중구 약사동 840번 지 일원에 위치하며, 중구청에서 북동쪽으로 250m 정도 떨어져 있다. 북쪽으로는 함월산(해발 200m)과 성안동이 위치하며, 남쪽으로는 북부순환도로가 접해있다. 이 도로 의 남쪽은 시가지 및 택지가 조성되어 있다.
평산유적의 지형은 함월산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구 릉과 그 사이의 계곡에 해당하며, 약사동 평산마을이 일 부 포함된다. 현재 이 지역은 북부순환도로에 의해 절개 ㆍ분리되어 있지만 원래는 북부순환도로의 남쪽 주택가 까지 하나의 구릉으로 연결된 지형이다. 그러나 평산유 적 남쪽에서 조사된 울산 약사동 861유적12)에서는 조선 시대 취락과 관련된 유구는 주거지 1동과 수혈 1기가 확 인되었다.13) 이것으로 볼 때 평산유적 조선시대 취락의 중심은 북부순환도로 북쪽에 위치하는 평산유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촌락 내 건물의 입지는 규모와 기능, 역민의 신분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지상건물지는 크게 5개 군으로 분 류되며, 200ㆍ205ㆍ210호 건물지가 위치한 곳이 촌락 내 에서 중심이 되는 곳이다. 건물의 분포 위치는 구릉부 중에서도 일조량이 풍부한 정남ㆍ남동ㆍ동향이 전체 74 기 건물지 중에서 70기를 차지한다. 나머지 4기는 남서 ㆍ서향에 입지한다. 수혈건물지는 배치 상으로 볼 때 지 상건물지가 입지한 곳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구릉의 평탄면과 평지와는 거리가 먼 산 정상부 가까운 곳에 입지한다.14)8
3-2.지상건물지
지상식건물은 수혈식건물과는 대비되는 성격이 강하 며15), 床面을 지면에 마련한 ‘地面式’과 지상에 마련한 ‘高床式’으로 구분할 수 있다. 상부 구조물이 잔존하지 않은 상태에서 지면식과 고상식을 구분하는 것은 어렵지 만, 床面에서 아궁이의 흔적과 저장 수혈 등으로 추정이 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16)
평산유적에서 확인된 지상건물지는 床面에서 확인되는 아궁이, 저장 수혈과 외부시설인 배수구 등을 통해 지면 식과 고상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1)지면식
지면식은 총 54기가 확인되었다. 지면식은 구릉 상단 부에 ‘ㄱ'자형 또는 ‘╔’자형의 배수구로 구획한 후 내 부에 건물이 설치되는 형태이다. 내부시설에서 아궁이의 확인 유ㆍ무와 기둥자리 축조형태에 따라 구분된다. 건 물지의 장축방향은 등고선과 평행하며, 동쪽과 서쪽 사 면에 위치한 일부 건물지를 제외하고 대부분 남향에 가 깝다.9
건물지의 평면형태는 크게 一자형과 ㄱ자형으로 구 분17)할 수 있으며, 一자형 건물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一자형 건물은 정면이 1칸~9칸, 측면이 1칸~2칸으로 확인되며, <Fig.10>을 살펴보면 정면 2칸×측면 2칸 건 물이 8기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다음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건물이 7기를 차지한다.
건물지의 기둥자리는 축조형태에 따라 굴립주식과 초 석식으로 구분된다. 굴립주식은 기둥 가장자리의 보강 재료와 축조방법에 따라 2가지 형태로 세분되며, 초석식 은 초석 아래 적심석의 유무에 따라 2가지 형태로 세분 된다.
2)고상식
고상식은 총 19기가 확인되었다. 지면식과는 달리 구 릉 상단부에 배수구와 내부에 아궁이가 확인되지 않는다. 건물지의 장축방향은 등고선과 평행하며, 대부분 남향에 가깝다.11
건물지의 평면형태는 一자형이며, ㄱ자형은 확인되지 않는다. 一자형 건물은 정면이 1칸~4칸, 측면이 1칸~2 칸으로 확인되며, <Fig.12>을 살펴보면 정면 1칸×측면 1칸 건물이 9기로 전체에서 45%를 차지하고 다음으로 정면 2칸×측면 1칸 건물이 7기로 35%를 차지한다. 건물 지의 기둥자리 축조형태는 굴립주식(A식)만 확인된다.
3-3.수혈건물지
수혈건물지는 총 44동이 확인되었다. 평면형태는 원형, 타원형, 방형, 말각방형 등이다. 건물지 내부시설은 벽로, 벽주구, 기둥자리, 온돌의 하부시설인 고래 등이 확인되 며, 외부시설은 배수구가 설치된 형태가 확인된다.
벽로는 건물지 내부 벽면에 붙여서 설치된 형태이다. 타원형 또는 장타원형의 벽로 가장자리에 봇돌18)을 세우 고 그 위에 이맛돌을 덮어 연도부와 연결한 형태이다. 연 도부의 평면형태는 ‘∩’모양으로 건물지 외부로 돌출되어 있다. 봇돌과 굴착면 사이에는 점토나 기와편 등을 사용 하여 보강하였다. 건물지에서 벽로의 기능은 설치된 형태 와 위치로 볼 때 취사보다는 난방과 조명의 역할이 높았 던 것으로 판단된다. 온돌이 확인된 건물지는 1동이며, 평면형태 一자형의 3줄 고래이다. 상부구조인 구들은 확 인되지 않는다.13
기둥자리는 건물지 床面에서 확인되지 않는 형태가 대 부분이다. 이러한 것은 건물 구조의 단순화로 주혈을 굴 착하지 않고 건물지 상면에 기둥을 받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3-4.수혈 및 기타시설
수혈은 총 148기가 확인되었다. 구조적으로 볼 때 저 장시설이나 매납(진단구), 저수시설 등의 기능으로 판단 된다.
저장용 수혈은 상부 삭평으로 인해 깊이는 다양하게 확인되며, 최대깊이는 60cm 정도이다.<Fig.14> 이러한 수혈들의 특징은 내부에 대형옹기가 定置되어 출토되었 으며, 18호는 수혈 바닥에 판석 1매를 깔고 그 위에 옹 기를 정치시킨 형태이다. 옹기 상부에 천석이 함몰양상 으로 확인되는데, 구조적으로 볼 때 천석은 옹기 상부에 木蓋를 덮고 그 위에 올렸던 용도일 것이다.14
매납용 수혈은 粉靑沙器小甕과 蓋가 2set로 확인되 는 형태와 圓頭釘과 이형철기가 여러 점 출토된 수혈의 형태가 확인된다.
저수시설로 추정되는 수혈은 평면형태 원형이며 직경 120cm, 깊이 300cm이다. 깊이와 바닥에 토탄층이 두껍 게 퇴적되어 있는 점으로 볼 때 저수용 수혈일 가능성이 높다.
3-5.촌락의 존속시기
촌락의 존속시기는 출토유물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평산유적에서는 건물지와 주거지, 수혈 등에서 청자, 분 청사기, 백자, 기와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청자 는 고려 말기 청자의 대표적인 기형인 팔각접시가 출토 되었고, 문양은 보상화문, 연판문 등 인화상감문이 시문 되어 있다. 분청사기는 상감청자의 영향을 받은 초기분 청과 내ㆍ외면에 가득 거치문을 시문하는 늦은 단계의 분청사기도 출토되었다. 백자는 18세기에 유행하던 동체 하단에 각이 뚜렷하게 지는 기형은 출토되지 않는 것으 로 볼 때 하한은 17세기대로 추정된다. 기와에 타날된 명문과 문양도 자기류와 편년은 유사하다. 따라서 촌락 의 존속시기는 14세기 후반~17세기까지 존속했을 것으 로 생각된다.
그러나 고지도 등에서 부평역은 18~19세기까지 표시 되고 있기 때문에 역의 기능이 약화되어 역촌이 축소되 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수혈건물 지가 주를 이루는 조선시대 하층민 촌락은 17세기가 되 면 급격히 줄어든다. 이러한 이유는 임진왜란의 폐해와 현종 4년(1663)에 화전을 금하는 禁令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19). 따라서 부평역촌의 존속시기도 이와는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4.역촌의 규모와 배치
4-1.역촌의 규모
울산약사동평산유적ⅠㆍⅡ의 촌락에서 확인된 건물의 형태에 따른 분류를 통해 계층을 검토한 후, 촌락의 중 심시기인 15세기 중반~17세기 전반까지의 규모를 검토 하겠다.
1)건물형태별 계층 검토
건물의 형태는 크게 瓦家, 草家, 土室로 분류할 수 있 으며, 기둥자리의 축조형태와 지붕의 구조, 건물지 내부 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문헌기록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먼저 와가와 초가는 기둥자리 축조형태와 출토유물을 통해 추론할 수 있다. 기둥자리 축조형태는 굴립주식과 초석식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지붕의 구조는 기둥자리 축조형태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발굴자료에서는 건물 지의 상옥 구조는 유실되었기 때문에 배수구, 화덕, 수혈 등에서 출토되는 유물을 통해 추정이 가능하다. 즉 초석 식건물지의 床面과 퇴적층, 배수구에서 다량의 기와와 소토덩어리가 확인되는데, 이러한 현상은 지붕의 재료인 기와나 점토가 화재 또는 폐기 등으로 인해 무너져서 수 혈식으로 굴착된 배수구 내부에 잔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초석식건물지의 지붕 재료는 기와를 사용 한 와가일 가능성이 높으며, 상옥에 기와를 사용할 경우 건물의 하중을 견디기 위해 초석식을 채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굴립주식건물지의 배수구와 퇴적토에서는 기와가 출토되는 예가 거의 없다. 따라서 굴립주식건물지의 지 붕 재료는 기와가 아닌 짚이나 억새 등을 사용한 초가일 가능성이 높다.
토실은 문헌기록을 통해 건물형태를 추론할 수 있다. 토실과 관련된 문헌기록은 다음과 같다.
춘천(春川) 사람 이격(李格)은 아비가 죽은데다가 그 어 미 김씨(金氏)가 빈궁하였다. 격(格)이 옷을 팔아서 달고 맛있는 것을 봉양하고, 매양 명절을 당하면 성찬(盛饌) 을 베풀어 어미에게 헌수(獻壽)하였는데, 하루는 김씨가 혼자 토실(土室)에 들어갔다가 실화하여 화염[煙焰]이 매 우 성하여 김씨의 머리털이 다 탔었다. 격(格)이 불을 무릅쓰고 들어가서 옷을 벗어 어미를 싸 가지고 나왔으 므로, 향리의 사람들이 효자라고 칭찬하였다.20)
평안도 조전 절제사(平安道助戰節制使) 강순(康純)이 하 직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였다. 무릇 방어하는 준비와 군사를 훈련시키는 일은 항시 거듭 힘쓰게 하고 혹시 조금이라고 태만해서는 안 된다. 또 북쪽 지방은 바야 흐로 날씨가 추우니 그대들이 추위를 무릅쓰고 변방을 지키는 것을 매우 염려한다. 모름지기 토실(土室)을 만 들어 군사들로 하여금 들어가 거처하도록 해서 동상(凍 傷)에 이르지 말게 하라.21)
경주(慶州)의 도적은 신들이 남에게 전해들은 소문이 아 니고 모두가 확실한 일이므로 감히 아뢰었는데 그 방자 한 형상은 매우 심합니다. 지난 정월에 어떤 경산(慶山) 사람이 경주 도적을 지목한 일이 있는데 한밤중에 도적 이 그 움집에 들어가 목을 베어갔습니다.22)
위에서 살펴 본 기록을 통해 토실은 발굴조사에서 확 인되는 수혈건물지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화성성역의 궤23)의 기록이 참고가 된다. <Tab.3>에서는 화성을 건 립하면서 수용된 집에 대한 보상액을 기록한 것이다.
위 기록에서 집의 종류도 와가, 초가, 토실로 구분하고 보상액은 와가는 1칸당 15냥, 초가는 1칸당 3냥, 토실은 1칸당 1~1.5냥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러한 문헌기록과 촌락에서 확인되는 건물의 규모와 형태, 출토유물을 통하여 와가→초가→토실 순으로 계층 의 상ㆍ하관계를 설명할 수 있으며, 특히 토실의 경우 신분적으로 최하층민의 건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 다.
2)역촌 규모
역촌의 규모를 추정하기 위해서는 건물의 형태별로 촌 락에서 나타나는 중복관계를 고려하여야 하며, 건물의 기능 또한 검토해야 한다.
평산유적ⅠㆍⅡ 유구배치도에서 건물의 형태별 중복관 계는 지면식건물지는 서로 간의 중복이 5기, 지면식과 고상식건물지는 서로 간의 중복이 2기이다. 그리고 수혈 건물지는 서로 간의 중복이 2기이며, 지상건물지와 중 복은 3기이다. 위의 중복관계를 통해 볼 때 동시기에 해 당하는 유구는 지면식건물지가 49기, 고상식건물지가 18 기, 수혈건물지가 40동으로 추정된다.4
다음으로 건물의 형태별로 기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 다. 지상건물지는 사용목적에 따라 주거용, 창고, 공공건 물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주거용은 건물지 내부시설에서 난방ㆍ취사시설(아궁이)이 반드시 갖추어 져야 한다. <Fig.15>과 같이 전통 민가의 평면도에 부엌 과 정지로 표시되어 있는 부분이 건물지에서 확인되는 아궁이가 속한 공간과 동일하다.15
따라서 아궁이 위치가 기둥자리와 기둥자리 사이에서 확인된다면 건물지와 아궁이가 하나의 세트관계가 확실 하므로 촌락 내에서 주거용으로 판명해도 좋다고 생각된 다.
<Tab.5>와 같이 촌락 내에서 주거용으로 판단되는 건물지는 지면식건물지의 굴립주식 중에서 69%가 주거 용 건물이며, 나머지 31%와 초석식, 고상식건물지는 주 거용일 가능성이 낮다. 창고는 지면식건물지 중에서 내 부에서 아궁이가 확인되지 않는 굴립주식과 특히 고상식 건물지는 지면식과는 달리 배수구가 설치되지 않았고, 규모에 있어서 1×1, 2×1의 소형건물 비율이 80%를 차 지하며, 독립적으로 배치하는 특징으로 볼 때 촌락 내에 서 창고나 마구간 등의 용도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 다. 공공건물은 기둥자리 형태가 초석식으로 와가일 가 능성이 높기 때문에 촌락 내에서 일반적인 주거용이나 창고와는 규모나 구조에 있어서 차별성이 확인된다.
수혈건물지는 일반적으로 주거용으로 사용된 건물로 이해하고 있으며, 촌락 내에서 확인되는 수혈건물지 역 시 내부에 난방ㆍ취사시설이 모두 확인되는 것으로 볼 때 주거용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위에서 살펴 본 촌락 내에서 건물지의 중복관계와 건 물의 기능(주거용, 창고, 공공건물)을 고려할 때 부평역 촌은 지상건물지 33~40가구, 수혈건물지 40~45가구, 창고 또는 다른 용도의 건물이 15~30동, 공공건물이 5~7동으로 구성된 규모일 것으로 생각된다.
4-2.역촌의 배치
촌락 내에서 건물의 배치는 입지와 규모, 기능에 따라 달라진다. 건물형태별 배치를 살펴보면 지상건물지는 크 게 5개 群으로 분류된다. 200ㆍ205ㆍ210호 건물지가 위 치한 곳이 瓦家가 밀집되어 있으며, 건물지의 규모와 입 지의 특성상 촌락 내에서 중심이 되는 곳으로 볼 수 있 다. 산 정상에 가까운 북쪽에 위치한 群은 지형 훼손으 로 잔존상태가 양호하지 않지만 더 많은 가구수가 존재 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대부분 초가집으로 건물지 내 에서 아궁이가 확인되는 것으로 볼 때 주거용으로 생각 된다. 동쪽에 위치한 群은 소 계곡을 사이에 두고 중심 이 되는 群과 마주하고 있으며, 건물지 내에서 농공구류 의 철기가 출토되는 특징이 있다.1718
건축역사연구 제23권 1호 통권92호 2014년 2월
배치상의 특징은 각 群별로 정면×측면 칸 수에서 4×1, 4×2, 5×1, 9×1의 대형건물을 중심으로 2×2, 3×1 등 의 소형건물 3~6기가 배치되는 양상이다.
수혈건물지는 크게 2개의 군으로 분류된다. 특징적인 점은 촌락의 중심이 되는 200ㆍ205ㆍ210호 건물지 주변 에는 분포하지 않는 것이다. 산 정상에 가까운 북쪽에 위치한 群은 배치상태에서 지상건물지의 부속된 주거일 가능성이 높으며, 동쪽에 분포하는 群은 지상건물지와는 상관 없는 8~10동 정도의 가구가 군집을 이루고 있는 특징이 있다.
수혈건물지의 기능과 성격을 기존의 연구에서는 주거 용, 묘막지, 공방지 등으로 추정하고 있다. 본 촌락에서 확인되는 수혈건물지는 묘막지나 공방지와 관련된 흔적 이 확인되지 않는 점으로 볼 때 하층민이 거주하는 주거 용의 건물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지상건물지의 기능과 더불어 배치상에서 지상건물지의 구획을 침범하지 않는 상태에서 군집을 이루거나 서로 공존하는 배치상태를 보 인다.19
5.맺음말
이상으로 조선시대 울산군 부평역에 대한 발굴조사 자 료를 분석하여 위치를 검토하여 특징을 살펴보았으며, 역촌의 구성과 존속시기ㆍ규모ㆍ배치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하였다. 이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역의 위치는 고지도와 문헌기록을 통해 볼 때 慶尙左 道兵馬節度使營서쪽에 위치한 것이 분명하다. 울산약사 동평산유적의 210호 초석식건물지와 건물지 내에서 출토 된 철기류 등은 평산유적이 부평역 또는 역과 관련된 역 촌이었음을 증명해준다.
역촌의 구성은 지상건물지, 수혈건물지, 수혈, 화덕, 삼 가마, 화장묘, 경작유구 등 촌락에 있어서 갖추어야할 구 성요소 대부분이 확인되었다. 지상건물지는 총 54기가 확인되었으며, 수혈건물지는 총 44동이 확인되었다. 수혈 은 총 148기가 확인되었다. 구조적으로 볼 때 저장시설 이나 매납(진단구), 저수시설 등의 기능으로 사용되었다.
역촌의 존속시기는 건물지와 주거지, 수혈 등에서 출 토된 청자, 분청사기, 백자, 기와 등의 편년으로 볼 때 14세기 후반~17세기까지 존속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역촌의 규모는 촌락 내에서 건물지의 중복관계와 건물 의 기능(주거용, 창고, 공공건물)을 고려할 때 지상건물 지 33~40가구, 수혈건물지 40~45가구, 창고 또는 다른 용도의 건물이 15~30동, 공공건물이 5~7동으로 구성된 규모일 것으로 생각된다.
역촌의 배치는 지상건물지는 크게 5개 群으로 분류되 며, 200ㆍ205ㆍ210호 건물지가 위치한 곳이 건물지의 규 모와 입지의 특성상 촌락 내에서 중심이 되는 곳으로 볼 수 있다. 배치상의 특징은 각 群별로 정면×측면 칸 수에 서 4×1, 4×2, 5×1, 9×1의 대형건물을 중심으로 2×2, 3×1 등의 소형건물 3~6기가 배치되는 양상이다. 수혈건물지 는 크게 2개의 군으로 분류되며, 지상건물지의 구획을 침범하지 않는 상태에서 군집을 이루거나 서로 공존하는 배치상태를 보인다.
현재 부평역과 역촌으로 추정되는 평산유적ⅠㆍⅡ는 울산 혁신도시 개발로 인해 모두 사라졌지만, 발굴조사 를 통해 남아 있는 사진과 도면 등을 통해 조선시대 울 산지역 도로와 통신망을 복원할 수 있는 연구를 위한 자 료로 활용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