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 론
1-1.연구의 배경 및 목적
관영 건축조직은 국가 시설의 재료, 규모, 양식, 기법 등 건축물의 전반적인 형식을 결정하는 주요한 주체이다. 전통시대에는 국가의 건축활동이 당대 건축의 흐름을 주 도하였기 때문에, 건축조직은 건축의 시대적 변화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한국건축에서도 전근대시대에서 근대 시대로 이행하는 시기에 관영 건축조직이 크게 변화하면 서 건축 형식의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조선시 대의 건축조직인 선공감(繕工監)은 공조(工曹) 소속으로 전반적인 국가의 건축활동을 담담하였다.1) 하지만, 갑오 개혁 이후 내각과 궁내부로 국가조직이 분리되면서 국가 의 건축활동은 두 기관에서 각각 양분하여 관리하게 된 다.2) 내각에는 공무아문(工務衙門) 건축국(建築局)을 비 롯한 각부에 건축과 수리를 담당하는 기구가 조직되었다 가, 1906년에 대부분의 건축 업무가 탁지부 건축소로 통 합되어 관리되었다. 선행 연구에 따르면, 내각의 업무가 이전 시대와는 다른 근대적인 기능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들 건축조직에서는 주로 근대적인 건축시설을 신축하거나 기존의 전통시설을 개조하여 근대적 기능에 맞게 활용하는 건축활동을 하였다. 이에 따라 건 축조직의 인적구성도 일본인 기술 인력 중심으로 변화하 였고, 소수의 근대적인 건축교육을 받은 한국인 기술 인 력이 추가되는 양상을 보인다.3) 내각의 건축조직과는 달 리 기존의 관영 건축조직인 공조의 선공감을 계승한 궁 내부의 건축조직은 주로 전통시설의 건축과 수리를 담당 하였다. 내각의 건축조직이 새로운 기술과 시설의 도입 에 집중하였다면, 궁내부의 건축조직은 기존의 왕실 건 축을 유지하거나 새로운 기능에 맞추어 증축, 개축, 이축 등을 주로 시행하였다.4)
이러한 근대이행기 건축조직의 양분화는 근대적인 건 축기술의 도입과 전통적인 건축 형식의 유지라는 대립된 양상을 보이면서 한국 건축이 점차 서양 또는 일본의 근 대적인 형식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 다. 그러나, 내각의 건축조직에 대해서는 “해관-탁지부- 조선총독부”로 이어지는 건축조직의 변화와 건축활동이 선행연구를 통해 구체적으로 밝혀졌지만,5) 궁내부의 건 축조직에 대해서는 전반적인 조직의 구성 이외에 근대적 인 건축활동을 포함한 건축조직의 변화 양상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연구가 수행되지 않았다.6) 궁내부의 건축조직 은 왕실 건축을 최후까지 담당하면서 근대적인 방향으로 변화를 주도하였다. 따라서, 궁내부 왕실 건축조직의 변 화를 통해 가장 보수적인 궁내부의 전통 시설이 점차 근 대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살필 수 있을 것이며, 동시에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만든 인적 구성을 통해 구체적 인 건축조직의 변화 과정도 함께 살필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는 이와 같은 궁내부 왕실 건축조직의 재편 과정 을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2.연구의 범위와 방법
본 연구의 범위는 1905년에서 1910년의 통감부 시기 로 한정하였다. 이 시기에 통감부가 대한제국의 주도권 을 장악하고 빠르게 일본의 식민지 체제로 변화를 추진 하였으며, 이에 따라 궁내부의 건축조직도 이전과는 매 우 다른 양상으로 변화하였다. 비교적 짧은 기간의 변화 이지만, 선공감과 영선사의 전근대적인 건축조직이 식민 지 체제의 왕실 기구인 이왕직(李王職)의 건축조직으로 전환되는 과도기적 단계로서 밀도 높은 변화의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통감부 시기의 왕실 건축조직의 재편을 살피기 위해 본 연구에서는 먼저 갑오개혁 이후 궁내부의 영선사에서 내장원 토목과,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이왕직의 건축조직 으로 변화하는 행정 구조의 변화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나서 영선사와 내장원 토목과의 조직 구성 및 건축활동 을 각각 살펴보았다. 이러한 연구를 위해 각 조직의 인 적 구성을 확인할 수 있는 1차사료를 최대한 활용하였 다. 선행 연구에서는 이러한 1차사료의 부족으로 『관 보』를 주로 활용하였지만, 본 연구에서는 궁내부와 이 왕직에서 편찬한 『직원록』과 관련 자료를 확보하여 건 축조직의 인적구성을 상세히 확인하였다.7) 또한, 궁내부 의 건축도면, 『대한제국관원이력서』를 비롯한 개인 이 력 관련 자료, 그리고 『관보』와 신문기사 등을 통해 궁내부의 건축조직과 건축활동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고자 했다.
2.왕실 건축기구의 변화 과정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왕실과 정부가 분리되어 궁내 부와 내각이 각각의 운영을 담당하게 되었다. 궁내부와 내각의 분리에 따라 궁내부에는 기존의 관영 영선조직이 었던 공조의 선공감을 계승하여 왕실 관련 시설의 영선 을 담당하는 전각사(殿閣司)가 설치되었다.8) 전각사는 1895년 4월에 제용원(濟用院)의 영선사로 편입되어 왕실 의 “토목, 영선 사무를 담당”하게 되었고,9) 1896년 1월 에는 궁내부 직속의 영선사로 다시 개편되어 “왕실에 속 한 토목, 영선 사무를 담당”하였다.10) 1894년부터 1896 년까지 왕실 건축기구의 명칭과 편제는 바뀌었지만, 이 전 시기의 선공감 등에서 지속해 온 왕실의 토목과 영선 업무에는 크게 변화가 없었다.11)
하지만,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점차 강화되 면서, 궁내부는 재정고문 메가타 타네타로(目賀田種太 郞)의 주도로 ‘황실재정정리’를 추진하게 된다. 이에 따라 궁내부에는 1904년 이후 ‘제실제도정리국(帝室制度整理 局)-제도국(制度局)-제실재산정리국(帝室財産整理局)’으 로 이어지는 황실재정정리 기구들이 만들어지고, 이들 기구에서 궁내부의 역할을 제한하는 한편 왕실시설에 대 한 조사와 측량 업무까지 담당하게 되었다.12) 이러한 과 정에서 영선사가 담당하는 건축사업은 대폭 축소되었고, 영선사는 1907년 12월에 궁내부의 재정 담당 기관인 내 장원(內藏院)의 토목과(土木課)로 편입되었다.13) 서무과, 토목과, 회계과로 분과되어 공사관리 뿐 아니라 문서관 리와 회계관리도 함께 담당했던 영선사의 조직은14) 궁내 부의 재정기관에 부속되어 공사관리만을 담당하는 조직 으로 축소된 것이다.15)16)
1910년 한일병합 이후에는 궁내부의 업무가 이왕직으 로 이관되면서, 내장원 토목과의 업무는 이왕직의 회계 계(會計係) 영선실(營繕室)에서 담당하게 되었다.17) 이후 영선실은 1915년 3월에 이왕직 직속의 주전과(主殿課)로 독립되었고,18) 1918년 6월에는 영선과(營繕課)로 개칭되 어19) 1920년까지 이왕직의 건축조직이 다소 확대되는 모 습이 확인된다. 하지만, 창덕궁 복구가 끝난 직후인 1920 년 11월부터는 다시 회계과로 편입되어 건축조직은 크게 축소되었고,20) 1945년 해방 때까지 큰 변화없이 지속되 었다.
이와 같은 왕실 건축조직의 변화에서, 영선사에서 내 장원 토목과로의 재편과 한일 병합 이후에 이왕직의 건 축조직으로의 재편은 대한제국이 점차 일제의 식민지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행정 구조적 변화이다. 이 러한 왕실 건축조직의 변화과정은 왕실 건축의 직접적인 주체의 변화를 의미하며, 이를 통해 이 시기에 왕실 건 축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는 원인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3.1905년 이후 영선사 조직의 변화
3-1.영선사 조직의 개편
1894년 갑오개혁으로 궁내부와 내각이 분리되었지만, 이후 추진된 고종의 강력한 근대화 정책은 오히려 궁내 부의 기구를 확대하여 정부의 근대화 사업을 주도하였 다.21) 러일전쟁 이후 한반도의 주도권을 획득한 일본은 이러한 궁내부의 권력을 축소하기 위해 1904년 10월 일 본인 재정고문 메가타 타네타로의 부임과 함께 황실재정 정리를 추진하였고, 궁내부에 설치된 제실제도정리국은 궁내부의 조직을 개편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 기구의 활동을 바탕으로 1905년 3월에 궁내부 관제가 개 정되어 궁내부는 실제로 정부의 업무와는 엄격히 분리된 궁내부 관할의 업무만을 담당하게 되었다.22)
궁내부 소속의 영선사 역시 1905년 이후에는 “궁궐을 비롯한 왕실시설, 그리고 궁내부에 속한 여러 관청의 영 선에 관련된 사무와 이에 필요한 회계 업무”만을 담당하 게 되었고,23) 왕실 이외의 건축사업에는 더 이상 관여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의 영선사 직원은 영선사장 1명, 기 사 3명, 기수 2명, 주사 5명이었고,24) 이중 건축공사와 직접 관련된 기술직은 기사와 기수를 합하여 5명이다. 1906년의 <영선사분과규정>에 의하면 영선사는 서무과, 토목과, 회계과로 분과되어 있었는데,25) 기수와 기사는 모두 토목과에 속해 직접 공사를 담당하였을 것이고, 5 명의 주사는 서무와 회계의 행정업무를 담당하였을 것으 로 보인다.
『궁내부관안(宮內府官案)』,26) 『궁내관리등급(宮 官吏等級)』,27) 『승등안(陞等案)』,28) 『관보』등 궁 내부 관리의 인사기록을 통해 1905년 이후 내장원 토목 과로 편입되기 이전까지 영선사 관원의 재직 현황을 파 악해 볼 수 있다. (<Tab.2>)
2년 8개월 동안 영선사에 재직하였던 기술직인 기사와 기수 12명 중에서 이연응과 강태균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통적인 기술관료들이다.29) 채현식, 오윤묵, 박봉양, 이 필영 등은 행정관료로 시작하여 오랫동안 영선사, 통신 사(通信司) 등의 기술 관련 부서에서 근무하다가 기술관 료가 된 인물들이고, 최재붕, 이종운, 송계창, 박계홍 등 은 장인 출신으로 여러 왕실 건축공사에 참여하다가 기 술관료가 된 인물들이다.30) 또한, 기수 이연응은 관립법 어학교 출신으로 일본 오사카 관서법률학교(關西法律學 校)에서 유학을 하고 궁내부의 영선사 기수로 근무하게 된 인물이고,31) 강태균은 관립일어학교 출신이다.32) 두 명 모두 근대적인 교육을 받았지만 기술교육을 받지는 않았기 때문에, 건축 업무보다는 통역 업무를 담당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행정직인 주사33)를 지낸 인물들은 대부분 궁내부의 여 러 관청을 순환하며 영선사의 주사를 담당하였지만, 예 외적으로 기수 조한정과 유해종은 같은 영선사의 주사로 옮겨 근무한 경력이 있다. 한편, 정식 관제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위원(委員)으로 임명된 관원도 일부 확인이 된 다. 영선사 위원 박계홍, 길완근, 이종운 등은 모두 장인 출신이고,34) 박계홍과 이종운은 각각 정식 기술관원인 기수와 기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또한, 길완근은 군인 출 신으로 궁내부 공사에 참여하였다가 잠시 영선사의 위원 으로 근무를 하게 되는데,35) 파견 근무의 형식으로 군부 와 관련된 공사를 담당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영선사 위 원의 경력이 모두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확인된 위원은 대부분 현장 기술직으로 영선사의 기술직 관원인 기사와 기수를 보충하는 관제 외 임시직으로 판단된다. (<Tab.3>36))
3-2심의석과 영선사의 건축활동
영선사의 기술직 및 행정직 관원들의 재직 현황에서는 이전 시기에 비해 특별한 변화를 발견하기 어렵다. 기존 의 체제가 그대로 유지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영선사 의 책임자인 영선사장에서는 특별한 변화의 모습이 확인 된다. 강봉조, 조남승, 이보영, 남정규, 김영진 등의 영선 사장은 12일에서 13개월여의 임기를 지냈으며, 평균 6개 월도 되지 않는 매우 짧은 기간 동안 영선사장을 역임하 였다. 이들은 모두 궁내부의 행정 관료 출신으로,37) 각종 공사의 감동(監董)을 맡기도 하였지만 기술직이 아닌 행 정 책임자로서의 역할이었다.38) 하지만, 1907년 8월에 영 선사장이 된 심의석의 경우는 이전의 인물들과는 다른 경력을 갖고 있다. 그는 선행연구를 통해 잘 알려진 바 와 같이 내부 기사로 오랫동안 재직하면서 전통 목조 기 법과 서양의 석조 기법에 두루 능통한 기술자이자 관원 이었다.49) 그는 장인 출신으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한 전통적인 기술 관료로서 내부기사를 거쳐 영선사장이 되었고,50) 1907년 11월 영선사가 내장원 토 목과로 이관된 이후에도 내장원 토목과의 유일한 ‘기사’ 로서 기술직을 총괄하였다. (<Tab.4>) 특히, 그가 궁내 부 소속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영선사의 책임자가 되었다 는 점은 그의 기술적인 능력이 매우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심의석이 영선사장이 된 1907년 8월 은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하기 위해 창덕궁을 수리하는 계획이 세워지고, 그 절차가 진행되고 있었던 시점이 다.51) 또한, 순종의 이어와 함께 내각, 중추원, 궁내부 등 의 관청도 창덕궁으로의 이전이 결정되었으며,52) 창덕궁 앞 좌우에 각 관청을 양제(洋製)로 신축하고 창덕궁에서 통감부에 이르는 도로를 정비하겠다는 계획도 마련되었 다.53) 이러한 대규모 계획의 창덕궁 공사는 기존의 창덕 궁 건물의 보수를 위한 전통적인 건축 기술이 필요하기 도 했고, 양식의 새로운 관청을 신축하기 위한 근대적인 건축 기술이 필요하기도 했다. 따라서, 심의석은 궁내부 밖의 기관인 내부 소속이지만, 궁내부 영선사의 전통적 인 기술 관원의 능력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창덕궁 공사를 위해 특별히 초빙된 것으로 판단된다.
영선사장이 된 심의석은 약 두 달 반의 준비과정을 거 쳐 10월 13일에 창덕궁 수리를 시작하였고,54) 정확히 한 달 만인 11월 13일에 순종 황제가 창덕궁으로 이어하였 으며 내각은 12월 15일에 창덕궁으로 이전하였다.55) 이 공사의 공로로 심의석은 1908년 2월에 3등 팔괘장의 훈 장도 받게 된다. (<Tab.4>) 1907년의 창덕궁 공사는 짧 은 공사기간으로, 일부 기존의 전각을 철거하고 인정전 영역과 내전 영역을 정비하는 수준으로 마무리되었다. (<Fig.1>)56) 하지만, 전통적인 요소와 근대적인 요소가 Fig.1 Site Plan of Tomokgwa (1908.1) Chandeokgung and Changgyeonggung in Oct. 1908 (『국립문 화재연구소 소장 조 선왕실건축도면』, 2013, p.61) 결합된 창덕궁 공사의 책임자로서 심의석이 발탁된 것은 궁내부의 전통 관료 중심의 건축조직인 영선사가 점차 근대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시발점으로 볼 수 있다.
4.내장원 토목과 조직의 변화
4-1.김윤구 체제의 내장원 토목과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한 직후인 1907년 12월에 영 선사는 내장원 토목과로 편입되었다.57) 내장원 토목과의 인적 구성은 1908년 1월의 직원록을 통해 심의석, 김우 식, 유해종, 조한정, 박계홍 등을 확인할 수 있다.58) 무엇 보다도 기술직 6명을 포함하여 11명의 영선사 관원이 내 장원 토목과에서는 기술직 4명과 행정직 1명의 5명으로 대폭 축소되었다. 내장원에 소속되어 회계와 서무의 행 정 업무가 줄었다고 하더라도, 영선사장을 포함하여 기 사 4명, 기수 2명의 기술직이 기사 1명, 기수 3명으로 축 소된 것이다. 영선사장 심의석은 내장원 기사로 지위가 떨어졌고, 10명의 관원 중에서 주사 김우식과 기수 유해 종, 조한정, 박계홍 만이 내장원 토목과로 이임되었다. 이들의 이력을 살펴보면, 김우식은 영선사 주사, 내장사 주사, 영선사 서기랑을 거쳐 내장원 토목과 주사가 되었 다.59) 유해종은 농상아문 주사를 역임한 이후 10년간 건 축공역 견습을 받은 기술 관료로서, 영선사 기수, 영선사 주사, 영선사 서기랑을 거쳐 내장원 토목과 기수가 되었 다.60) 조한정은 영선사 기수, 영선사 주사, 영선사 서기 랑을 거쳐 내장원 토목과 기수가 되었다.61) 박계홍은 장 인 출신으로 1904년 53세에 영선사 위원으로 각종 왕실 관련 공사에 참여하였고, 영선사 기수를 거쳐 내장원 기 수가 되었다.62) 이처럼 내장원 토목과 직원들은 모두 영 선사 출신으로서, 1907년 11월의 궁내부 관제 개편에 따 라 영선사 조직이 축소되어 내장원 토목과로 옮겨온 것 이다. 행정 사무를 담당한 김우식을 제외하고, 전통적인 기술직 관원으로 구성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내장원 토목과의 인적 구성은 1908년 2월이후 기존의 영선사 인력 구성과는 다르게 개편되었다. 먼저 탁지부 건축소 기수인 일본인 후지모토 만죠(藤本万蔵) 가 2월에 촉탁으로 임명되어,63) 처음으로 일본인 기술자 가 한국의 왕실 건축조직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4월에는 주사 김우식이 관립일어학교 출신의 박순회와 이겸성으 로 교체되었고,64) 기사 심의석이 ‘통명전 공사비 횡령 사 건’에 책임을 지고 내장원 기사직을 사임하였다.65) 공석 이 된 토목과 과장의 자리는 6월에 내부 기사 김윤구가 옮겨오게 된다.66)
김윤구는 관립일어학교 출신으로 일본 경응의숙(慶應 義塾) 특별 보통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정부의 체신성 철도국에서 2년 4개월 정도 견습을 한 일본 유학파 기술 자이다. 대한제국에서는 궁내부 철도원 기수와 기사를 거쳐 서북철도국장과 농상공부 철도국장을 지냈으며, 1906년부터는 내부 치도국에서 심의석과 함께 기사로 재 직하였다.67) 그는 일본에서 철도기술을 습득한 이후 줄 곧 철도 관련 업무를 담당했으며, 이와 관련하여 한국정 부와 일본 정부로부터 각각 훈장을 받기도 했다.68) 철도 기술자인 김윤구는 내장원 토목과로 발령받기 직전까지 전국의 도로와 철도 등 토목 관련 업무를 담당해 왔 다.69) 이러한 경력의 김윤구가 1908년 6월에 심의석의 뒤를 이어 내장원 토목과를 총괄하게 된 것이다.
이후 1908년 8월에는 궁내부의 제실재산정리국이 폐지 되고, 측량과의 기수 강성국, 이계홍, 최규환 등이 내장 원 토목과로 옮겨오게 된다.75) 결국, 내장원 토목과는 일 본 유학파 토목 기술자 김윤구를 비롯하여, 일본인 촉탁 후지모토 만죠, 관립일어학교 출신 주사 박순회와 이겸 성, 근대적인 측량 교육을 받은 강성국과 이계홍 등 기 존의 전통적인 행정 또는 기술직 관원과는 전혀 다른 인 적 구성을 갖추게 되었다. 특히, 내장원 토목과에서 건축 기술직은 일본인 촉탁 후지모토 만죠 뿐이었다. (<Tab.7>76)) 따라서, 건축 기술 업무는 후지모토 만죠 에 의해 주도되었을 것이고, 제실재산정리국 측량과 출 신의 강성국, 이계홍, 최규환은 김윤구를 도와 측량 업무 를 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 영선사 출신의 유해종, 조한정, 박계홍 등은 근대적인 기법의 건축 업무보다는 기존 전각의 유지와 보수를 담당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밖에 관립일어학교 출신의 주사 박순회와 이겸성은 일 본인 기술자와의 의사소통과 행정 사무를 담당했을 것으 로 생각된다.77)
1909년 7월에 내장원 토목과는 다시 한번 조직이 개 편되었다. 기수 마에노 미네도(前野峯土), 히로타 사나에 (廣田早苗), 카츠마타 코타로(勝又甲太郞), 유부네 젠키 치(湯舟善吉), 노무라 키쿠지로(野邑菊次郞)와 주사 소 엔 다츠노스케(桑原辰之助) 등의 일본인 촉탁이 대거 충 원되었고,78) <Tab.8>79)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일본인 기 술 인력 중심의 건축조직이 되었다. 한일병합 이전까지 왕실 건축 업무를 담당한 내장원 토목과는 행정직 주사 4명를 제외한 12명의 기술직 중에서 강한규, 조한정, 최 규환을 제외한 9명이 근대적인 건축 또는 토목 교육을 받은 인물들이다. 그 중에서도 과장 김윤구의 책임하에 후지모토 만죠를 비롯한 일본인 촉탁 기술자들을 중심으 로 실무가 운영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전의 왕실 건 축 조직인 영선사 출신은 조한정 한 명 뿐으로, 1908년 이후 내장원 토목과는 완전히 새로운 조직으로 변모하였 다.
4-2.내장원 토목과의 건축활동
내장원 토목과에서는 심의석의 주도로 진행된 1907년 창덕궁 공사의 후속 공사로서, 인정전 영역의 개조 공사 를 늦어도 1908년 5월부터 계획하였다. 인정전과 부속 행각의 개조 도면이 1908년 5월부터 7월에 걸쳐 제작되 었으며,80) 7월부터는 공사를 시작하여81) 12월 이전에 완 료하였다.82)23
인정전 영역 개조 공사의 시기와 내장원 토목과 관원 을 비교해 보면, 심의석이 사임한 4월을 전후로 하여 2 월과 6월에 내장원 토목과에 각각 옮겨 온 후지모토 만 죠와 김윤구가 인정전 개조 공사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 던 것으로 보인다. 기사 김윤구와 촉탁 후지모토 만죠는 1908년의 인정전 개조공사의 공로로 각각 4등 태극장과 5등 팔괘장의 훈장까지 받았다.83) 기사 김윤구는 내장원 토목과의 책임자이자 토목 기술자로서, 공사 전반의 계 획과 진행을 총괄하면서 건축 공사보다는 측량과 토목 공사에 깊이 관여했을 것이다. 건축공사는 후지모토 만 죠가 주로 담당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다른 일본인 기 술 인력의 도움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1908년 5월에 서 7월에 제작된 인정전 개조공사의 도면에 “K.K”, “S.H”, “紅”, “N.J” 등의 제작자를 추정할 수 있는 정보 가 기록되어 있다. 이 중에서, “K.K”와 “S.H”는 각각 카 츠마타 코타로와 히로타 사나에의 약자로 판단되고, 창 경궁에 동물원, 식물원, 박물원을 계획한 『창경궁급비원 평면도(昌慶宮及秘苑平面圖)』에는 1908년 4월의 제작 시기와 함께 제작자 마에노 미네도가 표기되어 있다.84)
따라서, 1908년 4월 이후 내장원 토목과에는 후지모토 만죠만이 정식 촉탁으로 근무했지만, 도면 제작을 위해 카츠마타 코타로, 히로타 사나에, 마에노 미네도 등 여러 임시직의 일본인 기술인력이 고용되어 있었고, 이후 1909년 7월에 이들이 내장원 토목과의 촉탁으로 정식 발 령을 받은 것이다.85)4
1908년의 인정전 영역 개조공사 이후, 1909년에는 창 덕궁의 궁내부 청사를 신축하는 한편,86) 창경궁을 동물 원, 박물원, 식물원으로 개조하여 일반에 공개하였다.87) 이들 공사에서도 1907년 7월에 내장원 토목과 촉탁으로 임명된 기수 마에노 미네도, 히로타 사나에, 카츠마타 코 타로, 유부네 젠키치, 노무라 키쿠지로 등이 큰 역할을 하였다. 히로타 사나에가 궁내부 청사와 제실박물관의 도면을 작성하는 등 내장원 토목과의 일본인 촉탁 기사 들을 중심으로 건축 공사가 이루어졌다. 특히 노무라 키 쿠지로는 식물실 건축 공사의 공로로 1910년 1월에 훈장 을 받기도 했다.88)
이와 같이, 내장원 토목과에서는 1908년에서 1910년 사이에 창덕궁의 인정전 영역과 궁내부 청사, 그리고 창 경궁의 동물원, 식물원, 박물원 등의 공사를 진행하였다. 이러한 건축활동은 통감부 체제에서 새로운 황궁의 주요 시설인 알현소, 관청, 공원을 조성하는 공사였다. 일본의 근대적인 황실 시설을 모방한 형태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개별 건축물에서도 인정전 행각, 궁내부 청사, 제실박물관 등에서 서양식 트러스를 도입한 일본의 화양 식(和洋式) 목구조가 주로 사용되었고, 벽돌과 콘크리트 등의 새로운 재료들도 사용되었다.89) 특히 궁궐 건축의 구성에서도 일본의 메이지 궁전을 모방하는 등90) 전반적 인 왕실 건축의 양식, 재료, 기법 등이 일본의 영향을 받 게 되었다. 일본인 건축 기술 인력이 궁내부 건축조직에 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왕실 건축에서도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1910년 한일병합 이전에 이미 식민지 체제의 주요 왕실시설의 틀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었으며, 이것들이 일본인 기술 인력의 주도로 계획되 고 시행되어 갔다.56
5.맺음말
1910년 8월 한일병합 이후, 내장원 토목과에서 주된 역할을 했던 일본인 촉탁 후지모토 만죠, 마에노 미네도, 히로타 사나에 등이 해임되고,91) 이어서 1911년 2월에 궁내부가 이왕직으로 개편되면서 내장원 토목과는 회계 계 영선실로 편입되었다. 본격적인 식민지 체제에서는 일본인 주임 사무관 하야시 후미타로(林文太郞)를 비롯 한 이왕직의 새로운 건축조직으로 다시 재편된 것이 다.92)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식민지 체제가 갖추어지기 이전인 통감부 시절부터 궁내부의 영선사와 내장원 토목 과를 거치면서 왕실 건축조직이 재편되는 과정을 고찰하 였다.
궁내부 건축조직의 재편에서 가장 주목되는 변화는 영 선사의 심의석 체제에서 내장원 토목과의 김윤구 체제로 의 전환이다. 두 인물은 내부 치도국에서 함께 기사로 재직하기도 했고 토목건축주식회사에 함께 참여하기도 했지만, 경력에서 크게 대조된다. 심의석은 장인 출신으 로 무과에 급제하여 각종 왕실 건축 사업에 참여하였고, 여러 국가 사업을 통해 근대적인 건축 기술도 익히게 된 경험 많은 전통 건축 기술자이다. 이에 반해 김윤구는 일어학교 출신으로 일본에서 근대적인 철도 기술을 배웠 고, 국내에서도 철도 관련 업무에 종사한 젊은 유학파 토목 기술자이다. 이러한 상반된 경력의 두 인물은 영선 사에서 내장원 토목과로 재편되는 궁내부 건축조직의 변 화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왕실 건축의 근대이행이 전통 장인 중심의 심의석 체제에서 일본인 기술인력 중 심의 김윤구 체제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 에 심의석 체제의 영선사 출신 관료들은 심의석과 마찬 가지로 김윤구 체제에 남지 못했고, 일본인 기술 인력으 로 대체되고 말았다. 특히, 김윤구가 건축 기술자 출신이 아닌 토목 기술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일본 기술 인력의 역할이 커질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내장원 토목과 이후의 왕실 건축은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심의석과 김윤구 모두 주요한 사업으로 추진했던 1907 년 이후 창덕궁의 개조사업은 궁내부 건축조직의 인적 구성 변화에 따라 크게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심의석이 추진했던 1907년의 사업에서는 기존 전각을 일부 철거하 고 과거의 건축 형식을 그대로 유지하였지만, 1908년 이 후 김윤구와 일본인 촉탁 중심으로 추진된 창덕궁의 개 조는 서양의 근대적인 구조 기술을 바탕으로 한 일본의 화양식 목구조 중심으로 시행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궁 궐의 구성 형식도 일본의 메이지 궁전을 모방하는 등 일 본 건축 기술의 강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본 연구는 이상과 같은 궁내부 건축조직의 재편 과정 을 고찰하여, 구체적인 궁내부의 인적구성을 밝혔으며 이를 통해 통감부 시기 왕실 건축의 변화에 대한 원인을 추론할 수 있었다. 다만, 일본인 기술 인력의 경력을 확 인하지 못한 점은 본 연구의 한계이고, 이 연구를 통해 관련 연구자들의 관심을 기대한다. 본 연구는 한국 근대 이행기의 왕실 건축의 변화에서 건축조직의 변화라는 하 나의 단서를 제공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을 것이다. 후속 연구로서 궁내부를 계승한 이왕직의 건축조직과 궁내부 와 이왕직을 포함한 왕실 건축조직에서 시행한 건축사업 의 실체를 규명하여 근대이행기 왕실 건축의 모습을 보 다 구체화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