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 론
1-1.연구의 목적과 의의
오래된 건축물은 창건 후 여러 가지 필요에 따라 보수 와 개축, 증축 등을 거쳐 변화하기 마련으로 창건 당시 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건물은 매우 드물다. 따라서 건축에 대한 연구는 현재 남아 있는 모습도 중요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상을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 하다. 특히 주거건축은 생활상의 요구에 따른 변화의 폭 이 다른 어떤 유형의 건축보다 크다. 따라서 건축사 연 구에 있어서 연구대상이 되는 건물에 대한 원형과 변화 과정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는 건축사 뿐 아니라 모든 역사 연구에서 기본이 되는 사항이다. 이처럼 연구의 대상이 되는 사료의 원형과 변화과정, 가 치와 의미 등을 평가하는 것을 史料批判이라 한다.
경주 독락당과 그 일곽2)은 현존하는 오래된 주택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인 16세기에 창건 된 주택으로 한국건축사, 특히 주거사에서 중요한 가치 를 지닌다. 특히 조선 전기 성리학의 대가이자 무첨당과 향단을 조영한 회재가 조영한 주거건축으로 특정인의 건 축관을 분석함은 물론 동일인에 의해 건축된 건물들을 비교함으로서 건축사의 내용을 보다 풍부하게 할 수 있 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가치로 인하여 독락당과 그 일곽은 일찍부터 많은 연구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회재 가 독락당과 살림채, 계정을 조영하는 과정과 창건 당시 의 모습, 회재 사후의 증축과 개축에 따른 변화상에 대 해서는 아직 많은 의문이 존재한다. 따라서 독락당과 그 일곽에 대한 보다 정확한 연구를 위해서는 회재에 의한 독락당과 그 일곽의 조영, 그리고 회재 사후의 변화과정 을 밝히기 위한 연구, 즉 사료비판 측면의 연구가 필수 적이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기존 연구에서 활용되지 않았던 문헌기록의 발굴과 2002년 문화재청의 실측조사를 통해 밝혀진 사실 등을 토대로 회재에 의한 독락당과 계정의 조영과 그 이후의 변화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본 연구 결과는 독락당과 그 일곽에 대한 연구를 진행함에 있어 서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보다 정확한 1차 자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독락당과 그 일곽에 대 한 기존의 연구가 지니고 있는 한계와 문제점을 인식하 고 건축사 연구의 방법에 있어서 사료비판의 중요성을 일깨우는데 일조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1-2.연구의 방법과 한계
역사적 건축물은 어떠한 형태로든 건물의 역사에 대한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그 흔적은 크게 두 가지 측면 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그 건물과 관련된 각종 기 록과 문헌 및 후손들의 증언, 사회와 건축적 상황 등과 같은 간접사료들이다. 여기에서 건물과 관련된 기록은 건물의 역사를 밝히는데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된다. 또 하나는 건물 자체의 배치와 평면, 구조, 형태 등과 같은 물리적인 실체로서의 직접사료이다. 어떠한 역사적 건축 물도 이 두 가지 사료를 통해 확인된 내용이 일치할 때 그 원형과 변화과정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건축사 연구에서 어려운 점은 충분한 문헌자료 의 확보가 어렵고, 간접사료와 직접사료의 내용이 일치 하는 건물이 드물다는 점이다. 독락당도 마찬가지로 지 금까지 밝혀진 문헌사료가 매우 적고 단편적이며, 창건 과 이후의 변화과정에 대한 대부분의 내용을 집안에 전 해져오는 口傳에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락 당과 그 일곽의 조영과 변화과정을 정확히 밝힌다는 것 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기존의 연구 성과와 이 미 확인된 문헌기록에 대한 면밀한 검토, 새로운 문헌기 록의 발굴, 그리고 현존하는 건물의 평면과 구조, 형태 등에 대한 비교분석을 통하여 회재가 조영한 독락당과 계정의 모습과 그 이후의 변화과정을 밝힐 수 있을 것으 로 생각한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우선 기존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 고 그동안 밝혀진 문헌기록을 재검토함과 동시에 2002년 문화재청의 실측조사 때 확인된 독락당과 안채 사이 마 루방의 상량문 등을 검토하였다. 다음으로 지금까지 확 인되거나 인용되지 않았던 독락당과 그 일곽 관련 문헌 기록을 찾고자 시도한 결과 몇 가지 새로운 기록을 확인 하였고 그것에 대해 분석하였다. 마지막으로 실측조사보 고서와 현장답사를 통해 현존하는 건물의 평면과 구조, 형태 등을 면밀히 검토하고 이를 기존의 연구 및 문헌기 록을 통해 밝혀진 사실과 비교하였다.3) 이를 통해 독락 당과 계정의 창건 당시 모습과 이후의 변화과정을 밝혀 보고자 하였다.
독락당 일곽은 독락당과 계정 외에 살림채를 비롯하여 사당과 어서각, 공수간 등 여러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독락당과 계정, 살림채는 회재에 의해 조영되 었으므로 살림채의 창건과 그 이후의 변화과정은 독락당 과 그 일곽 연구에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살림채에 대 해서는 문헌자료가 거의 없을 뿐 아니라 아직 정밀실측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 창건과 이후의 변화과정을 밝히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살 림채를 제외하고 독락당과 계정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 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본 연구가 지니는 한계이다. 추후 살림채에 대한 정밀실측조사와 더 많은 정보의 축 적을 통해 그 창건과 이후의 변화과정을 밝힐 수 있는 연구가 진행되기를 기대한다.
2.기존 연구와 문헌기록의 고찰
2-1.기존 연구의 경향
독락당과 그 일곽은 한국건축사, 특히 주거사에서 차 지하는 가치와 의의가 매우 높아 많은 학자들의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되어 왔다. 따라서 정인국의 ⌈한국건축양 식론⌋(일지사, 1978)을 비롯하여 주남철의 ⌈한국주택건축 ⌋(일지사, 1980), 신영훈의 ⌈한국의 살림집⌋(열화당, 1983) 등과 같이 한국건축을 개괄적으로 다루고 있는 대 부분의 글에서는 부분적으로나마 거의 빠짐없이 독락당 을 다루고 있다. 이밖에도 독락당과 직간접적으로 관계 있는 글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 중에 서 독락당과 그 일곽을 직접 주제로 삼은 연구는 다음과 같이 십 여 편에 이른다.
① 김관석, <조선시대 주거 독락당 일곽에 관한 연구 Ⅰ> ⌈ 대한건축학회지⌋ 28권 121호, 1984.12.
② 김관석, <조선시대 주거 독락당 일곽에 관한 연구 Ⅱ>⌈ 대한건축학회지⌋ 29권 122호, 1985.2.
③ 이창훈, <독락당 개구부의 복원에 관한 연구> 영남대석 사학위논문, 1991.6.
④ 김봉렬, <은둔을 위한 미로들 – 독락당과 옥산서원> ⌈ 이상건축⌋, 1996.8.
⑤ 김성원 김진균, <한국 전통건축에서 ‘둘러쌈’에 의한 ‘비 움’과 ‘채움’ - 독락당 일곽의 담과 마당을 중심으로> ⌈대 한건축학회학술발표논문집⌋ 제17권 제2호, 1997.10.
⑥ 이창업 임충신, <독락당과 향단의 건축적 특성에 관한 비교 고찰 – 계획과정의 개별성을 중심으로> ⌈대한건축 학회학술발표논문집⌋ 제18권 2호, 1998.10.
⑦ 박해성, <독락당의 공간표현과 사상에 관한 연구> 중앙 대석사학위논문, 1999.12.
⑧ 최수영 김광현 홍대형, <관가정과 독락당 계정의 자연경 관 도입방식에 관한 비교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계 획계⌋ 17권8호(통권154호), 2001.8.
⑨ 윤일이, <회재 이언적의 건축관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 학회논문집-계획계⌋ 18권11호(통권169호), 2002.11.
⑩ 김석수 최효승, <독락당 일곽의 조영과 공간구조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계획계⌋ 19권11호(통권181 호), 2003.11.
⑪ 권태일, <독락당 일곽과 향단의 해체예술론적 고찰> ⌈건 축역사연구⌋ 제15권 4호, 통권48호, 2006.10.
독락당과 그 일곽에 대한 기존 연구의 경향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배치와 평면, 건축형태 등, 독락당과 그 일곽의 물리적 현황을 파악하고자 하는 연구로 김관석의 1984년 연구와 이창훈 의 연구가 이에 속한다. 연구논문은 아니지만 2002년에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독락당 실측조사보고서⌋도 이 유 형에 속한다. 둘째, 독락당과 그 일곽의 공간이 지닌 특 성을 파악하고자 하는 연구이다. 김관석의 1985년 연구 를 비롯하여 김봉렬, 김성원, 최수영, 김석수 등의 연구 가 이 유형에 속한다. 셋째, 독락당과 그 일곽의 공간과 건축계획의 특성을 회재의 생애 및 사상과 연결시키고 회재가 건축한 일련의 건축물들과 함께 비교함으로서 회 재의 건축관과 조영의식, 그리고 회재가 건축한 건물들 의 특성과 개별성을 조명하고자 하는 연구이다. 김관석 의 1985년 연구에서 처음으로 회재의 건축관에 대한 언 급이 있었으며, 이후 김봉렬의 연구를 계기로 김성원, 박 해성, 윤일이, 김석수, 권태일 등의 연구가 이어졌다.
한편 이들 기존 연구들은 연혁 파악의 중요성에 주목 하여 연구에 앞서 건축적 현황을 파악하고 그 조영과 변 화과정을 조명하고자 시도하고 있다.(Tab.1) 기존 연구 에서는 각 연구의 초점에 따라 다루고 있는 건물의 내용 에 차이가 있으나 연혁과 관련된 내용은 대부분 1984년 김관석의 연구와 2002년 문화재청에서 발간된 ⌈독락당 실측조사보고서⌋에 실린 연혁을 따르고 있다.
2002년 ⌈독락당 실측조사보고서⌋가 발간되기 전까지는 모두 김관석의 연구를 따르고 있다. 김성원과 윤일이는 이를 근거로 독락당과 그 일곽의 조영과 변화과정을 제 시하고 있다. 특히 김성원은 독락당 일곽 담장의 조영 순서를 추정하고, 그에 따른 도면을 제시하였다.4) 윤일이 역시 김관석의 연구에 근거해서 독락당의 성립과정을 네 단계로 구분하고 그에 따른 도면을 제시하였다.5)
그러나 김관석의 연구는 독락당의 조영과 어서각 조영 을 제외하면 모두 문헌기록이 아닌 傳言에 따른 것이라 는 점에서 한계가 존재한다. 또한 전언인 경우에는 전언 이라고 명시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연혁 추정의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2002년에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독락당 실측조사보고 서⌋는 김관석의 연구에 비해 독락당과 그 일곽의 연혁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몇 가지 점에서 두드러진 차이를 보인다. 우선 계정의 초창에 대하여 1515년에 회 재가 草廬三間으로 亦樂齋라는 이름의 안채를 처음 지 은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안채를 비롯한 부속채의 연 혁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연혁을 추정한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선행연구에 대 한 참고나 비교도 거의 없어 신뢰하기 어려운 면이 있 다.6) 한편 傳言을 바탕으로 1555년에서 1556년 사이에 독락당의 동툇간이 우물마루로 개조되었음을 밝힌 점과 안채와 독락당 사이 책방에서 상량문을 확인한 점은 보 고서에서 밝힌 새로운 사실이다.
이상 살펴본 것처럼 대부분의 연구가 근거로 삼고 있 는 독락당과 그 일곽의 연혁에 대한 연구는 그 추정의 근거가 제시되지 않은 것이 많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한편 독락당과 그 일곽의 연혁은 많은 부분이 傳言에 의 지하고 있다. 傳言에 의한 연혁 추정은 물론 의미가 있 지만 보다 분명한 근거, 즉 문헌기록과 현존 건물의 분 석을 바탕으로 독락당과 그 일곽의 연혁에 대한 보다 심 도 있는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2-2.관련 문헌기록의 고찰
회재의 독락당 창건 사실은 ⌈晦齋集⌋ 附錄의 < 晦齋 先生年譜>와 <行狀>에 잘 기록되어 있다. 이밖에 독락 당과 계정의 건축적 상황을 기록한 글로 ⌈海東雜錄⌋과 ⌈松巢集⌋, ⌈海隱遺稿⌋가 있다.7) 이와 함께 2002년 문화 재청의 실측조사 때 독락당과 안채 사이에 있는 마루방 (책방) 상부 가구에서 상량문이 확인되어 독락당의 변화 과정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① ⌈晦齋集⌋과 ⌈海東雜錄⌋
⌈晦齋集⌋ 附錄의 <行狀>은 1566년에 퇴계 이황이 撰 한 것으로 기록 내용은 다음과 같다.
“卜地於州西北紫玉山中愛其巖壑瑰奇溪潭潔淸築室 而居之名其堂曰獨樂益樹以松竹花卉日嘯詠釣游於其 間謝絶世故端坐一室左右圖書硏精覃思靜中下功夫 比之前時尤深且專”8)
⌈晦齋集⌋ 附錄의 <晦齋先生年譜>는 1574년에 盧守 愼이 撰하였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十一年壬辰先生四十二歲築獨樂堂于紫玉山卽良佐 洞西二十里蓋先生之考亭也先生自少愛其巖壑瑰奇溪 潭潔淸至是始構堂溪上數十間窮不能辦久而後成名曰 獨樂堂有五臺曰濯纓澄心觀魚詠歸洗心又立小亭 于觀魚上第一間曰靜觀齋第二間曰溪亭亭之前後益樹 以松竹花卉日嘯詠遊釣於其間謝絶世紛端坐一室左右 圖書靜中下工夫比之前時尤深且專.”9)
竹所權鼈의 ⌈海東雜錄⌋10) 3 <本朝> 李彦迪항목에 도 회재가 독락당을 지은 사실이 간략하게 행장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생이 金安老를 논박하다가 파직되고, 고향에 돌아 와 紫玉山안에 자리를 잡았는데 바위와 구렁이 기이하 게 둘러있고 시내와 못이 청결한 것을 사랑하여 그곳에 집을 짓고 살며, 이름을 獨樂堂이라 하고, 소나무와 대나 무, 화초를 심고, 좌우에 책을 쌓고 세상일을 사절한 채 모두 7년을 고요한 가운데서 학문에 전념하였다.〈행 장〉”11)
이들 기록은 모두 회재가 김안로를 논박하다 파직된 후 1532년에 향에 돌아와 玉山의 紫玉山자락에 독락당 을 지었다는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회재가 이 곳에 자리 잡은 이유를 풍경이 뛰어나고 아름다우며, 깨 끗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상 <行狀>과 <晦齋先生年譜>를 통해 회재가 1532 년 낙향하여 독락당과 계정을 조영하였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회재가 조영한 독락당과 계정의 건축 상황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은 거의 없고 계정은 두 칸 이상의 정자로 靜觀齋와 溪亭이라고 불렀음을 확 인할 수 있을 뿐이다.12)
② ⌈松巢集⌋
1811년 간행된 松巢權宇(1552~1590)의 문집인 ⌈松 巢集⌋의 松巢先生文集卷之一<詩> 訪玉山書院二絶 幷序에 16세기 후반 독락당과 계정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송소가 을유년 9월 18일에 옥산서원과 함께 독락당을 방문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을유년을 송소의 생몰연도와 비교하면 1585(선조18)년이 된다. 기 록 내용 중 독락당과 계정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九月十八爲玉山之行……(중략)…… 同坐院北溪壇月 欲吐要歸其家卽先生舊宅距院一里坐獨樂堂堂合六間 少頃月上東峰登溪亭亭臨溪上合三間而房一間堂二間 皆舊制也……(후략)……“
송소가 묘사한 독락당은 여섯 칸 규모로 전체가 堂,즉 대청이었다. 이는 8칸으로 되어 있는 현재의 규모와 차이가 있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보면 회재가 1532년 창건한 독락당은 여섯 칸 규모였으며, 창건 이후 송소가 이곳을 방문했던 1585년에는 전체가 마루로 되어 있었음 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여주이씨 옥산파 18대 종손은 “회재의 아우 농재가 죽고 그 상례를 이곳에서 치루고, 삼년상 이후 전면 벽체와 창호를 없애고 마루를 들여 개조하였 다. 이때가 1555~1556년 사이라고 전한다.”고 증언하였 다.13) 이로 미루어 회재가 창건한 독락당은 여섯 칸 규 모로 방이 있었으며, 송소는 방이 마루로 변화된 독락당 의 모습을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송소는 계정을 전체 세 칸으로 대청 두 칸, 방 한 칸 이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회재가 계정을 창건한 후 송소가 이곳을 방문할 때까지 사이에 별다른 변화가 있 었다는 기록이 없는 상황에서 1585년 송소가 이곳을 방 문하여 기록한 계정은 회재가 창건할 때의 모습을 유지 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③ 마루방의 上樑文
안채와 독락당 사이에 있는 한 칸 규모의 마루방(이하 책방이라 함) 상부 부재에 “崇禎紀元後三年己未二月十 一日未時立柱巳時上樑嘉慶十四年二月也重修”라고 쓴 상량문이 있다.14)
숭정기원후 3년은 1630(인조8)15)년에 해당한다.16) 입 주와 상량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독락당 서쪽 툇간 과 독락당과 안채 사이 마루방의 증축 사실을 기록한 것 으로 보인다. 한편 가경14년은 1809(순조5)년에 해당하는 데, 이 기록만으로 이때의 중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 확히 알 수 없다.17)
④ ⌈海隱遺稿⌋
⌈海隱遺稿⌋는 海隱姜必孝(1764~1848)의 문집으로 1895년에 간행되었다. 이 문집에 해은이 戊寅年옥산서 원과 함께 자계, 독락당과 계정을 방문하고 기록한 내용 이 있다. 해은 생존 당시의 戊寅年은 1818년에 해당한 다. 독락당과 계정 관련 기록 내용은 다음과 같다.
“是日到玉山……(중략)……往溪亭亭卽先生燕居之所而 先生庶子潛溪之後主之卽退溪先生所撰行狀末段玉山別 業全仁奉守云者此也亭凡五間東西三間爲室南北二間爲 堂堂揭溪亭扁韓石峯筆也室曰養眞菴退翁筆也亭北有 大廳八脊四間中四間爲獨樂堂鵝相筆也楣揭玉山精舍 退翁筆也軒曰仁智石峯筆也兩頭各爲房西二間先生奉 母夫人之室東二間先生燕閒之室而扁以隱求矣及其親年 彌卲 則先生以各房寢處不便於奉養乃於西房隔以障子 以爲夙夜侍膳之地今其堂室牖戶遺躅宛然亭及堂多先 輩題詠而不能盡記亭前兩岸有石臺東曰詠歸西曰觀魚 臺上步武……(후략)……”
우선 독락당에 대해 ‘八脊四間’이라 했는데, ‘八脊’의 의미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장의 내 용으로 보아 당시 독락당은 도리통 네 칸, 양통 두 칸으 로 총 여덟 칸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동쪽과 서 쪽 툇간은 모두 室이라고 하였는데, 동쪽 툇간이 마루로 되어 있는 현재의 모습과 차이가 있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해은이 독락당을 방문했던 1818년에는 동쪽 툇간이 방이었다고 하는 점이다. 결국 동쪽 툇간은 회재 창건 시 방이었다가 1555~56년경에 마루로 개조되었으며, 이 후 1818년 해은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에는 다시 방으로 개조되었다. 그리고 다시 이후 언젠가 다시 현재와 같이 마루로 개조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해은은 서 쪽 툇간의 방 중간에 장지가 설치되어 있었음을 기록하 고 있는데, 이는 현재의 모습과 일치한다.18)
해은이 기록한 계정은 전체 규모가 다섯 칸으로 동서 방향으로 세 칸의 室, 남북 방향으로 두 칸의 堂, 즉 대 청이 있는 모습으로 평면의 규모와 형태가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회재 창건 시와는 모습이 변화된 상태였다.19)
3.독락당과 계정의 건축현황과 변화의 흔적들
회재에 의해 창건된 독락당과 계정이 창건 이후 여러 차례의 변화가 있었던 흔적은 현존하는 건물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앞서 살펴본 문헌기록의 내용과 비교하여 현존 독락당과 계정의 건축 현황과 그 속에 남겨진 변화의 흔적들을 살펴봄으로서 창건 당시의 모습과 이후의 변화 과정을 규명할 수 있는 보다 명확한 근거를 마련하고자 한다.
3-1.독락당의 평면과 주간 및 지붕
독락당은 도리통 네 칸, 양통 두 칸으로 서쪽에 도리 통 한 칸, 양통 두 칸의 온돌방이 있으며, 동쪽의 여섯 칸은 모두 마루를 깐 대청이 있다. 또한 서쪽 온돌방 옆 에는 안채와의 사이에 한 칸 규모의 마루방이 있는데, 책방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21) 온돌방 서측면의 중앙 기둥은 다른 기둥의 도리 방향 기둥 열과 일치하지 않는 다. 이는 통내간21)의 이용을 위해 안채 기둥 열에 맞추 어 마루방을 설치하면서 발생한 증축의 흔적으로 보인다.1
⌈독락당 실측조사보고서⌋(문화재청,2002)에 제시된 주상과 주하를 기준으로 한 주간 실측값의 평균값을 이용 하여 주간을 분석하였다. 이에 의하면 주간은 도리통 정 간과 양통 각 주간을 동일하게 설정하였고, 도리통 툇간 은 이보다 약간 넓은 주간으로 설정하였다.22) 그런데 X1 주열의 양통 전체 길이는 주하가 4,978㎜, 주상이 4,991 ㎜로 다른 주열의 양통 전체 길이에 비해 길이가 길다. 더욱이 X2 주열을 제외한 X3에서 X5 주열의 양통 전체 길이와 비교하면 차이는 더욱 크다. 서쪽 툇간을 증축하 면서 X1 주열의 양통 전체 길이가 기존 건물의 양통 길 이에 비해 길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시대에 사용되었던 세종 영조척(312.4㎜)과 ⌈경국 대전⌋ 영조척(312.1㎜), 영조26(1749)년의 英祖改尺 (312.2㎜)을 바탕으로 각 간에 적용되었을 척도를 완척으 로 추정하면 다음과 같다.
도리통 : 9.0+8.0+8.0+9.0=34자
양통 : X1 이외의 주열 8.0+8.0=16자
X1 주열 9.0+7.0=16자
이렇게 추정한 척도를 근거로 용척을 추정해 보면 X1주열의 Y1-Y2’ 주간을 제외한 모든 間에 사용된 용척은 307.2~308.2㎜로 비슷한 값을 보이지만 X1 주열의 Y1-Y2’에서 추정할 수 있는 용척은 314.9㎜로 전혀 다 른 값을 보이고 있다. 이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X1 주열 의 양통 전체 길이가 긴 것과 함께 X1 주열이 후대 증 축되면서 용척도 다르게 적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의 미한다. X1 주열의 Y1-Y2’ 주간을 제외한 부분에 적용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용척은 평균 308.1㎜로 지금까지 밝혀진 조선시대의 공식적인 영조척보다 약간 작다.23)
지붕은 동측이 팔작지붕, 서측이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처마는 모두 홑처마이다. 독립된 채로 이루어진 건물에서 양쪽 지붕을 다르게 만드는 것은 매우 드문 현상이다. 안채에 너무 근접해 위치한 독락당의 지붕이 안 채와 겹치기 때문에 만들어진 현상으로 보인다. 독락당 을 안채와 동시에 짓거나 안채를 지은 후에 지었다면 일 어나기 어려운 현상이다. 따라서 독락당 서쪽 지붕이 안 채 지붕과 겹치면서 맞배지붕으로 만들어진 것은 ⌈송소 집⌋의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원래 도리통 세 칸이 었던 독락당의 서쪽 한 칸을 이후 언젠가 증축하면서 일 어난 현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3-2.독락당의 가구와 기둥 상부 짜임
기둥은 외진주 12개, 내주 2개로 외진주는 모두 원주 이며, 내주는 방주이다. 이밖에 동남쪽 귓기둥 바깥으로 서까래를 받치고 있는 방형기둥이 있다.
외진주 중에서 X4Y1과 X5Y1 기둥은 근래에 교체된 것이라고 한다.24) 외진주는 약간 배흘림 수법의 경향도 보이지만 민흘림 수법이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입면 형 태에 있어서 일부 단면이 빠진 부분이 있는 것이 있으나 원목을 비교적 충분히 치목하여 일정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교체된 기둥을 제외한 기둥의 굵기를 비교해 보면 귓기둥 중에서는 동북쪽 귓기둥(X5Y3)이 가장 굵고 서 북과 서남의 귓기둥은 이보다 가늘다. 외진 평주 중에서 는 X3Y3 기둥이 가장 굵고 전면의 것에 비해 후면과 서측면의 것이 약간 가늘다. 이상 살펴본 것처럼 외진주 는 형태적인 차이는 거의 없으나 기둥 굵기는 서쪽의 기 둥이 전반적으로 약간 가늘다.
내주 중 동쪽의 것(X4Y2)은 단면 크기가 222×230㎜ 로 상중하 부분의 단면 크기가 동일하다. 반면에 서쪽의 것(X2Y2)은 민흘림이 적용되었고 중앙부 단면 크기가 212×244㎜로 단면 비례가 동쪽의 것과 많은 차이가 있 다.
이상 기둥의 형태와 굵기로 보아 교체된 기둥을 제외 하면 서쪽과 후면의 기둥들은 전면과 동쪽 부분의 기둥 과 시대를 달리하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
건물 밖 동남쪽 모서리에는 단면 크기가 180×140㎜로 작은 방주가 있다. 그리고 이 기둥과 동남 모서리 귓기 둥 사이에는 상하에 각 하나씩 수평으로 놓인 각재로 연 결되어 있다. 1931년 간행된 ⌈조선고적도보⌋의 사진에 의하면 하부 수평재 아래에는 고막이가 설치되어 있는데, 현재 고막이는 없어진 상태이다. 방주 상부는 추녀 아래 를 받치지 않고 서까래 옆면에 못으로 고정되어 있어 활 주는 아니다. 이에 대해 판장을 끼워 가벽을 만들어 독 락당 뒤편에 있는 계정과 계류의 시선을 차단하고자 한 것이라는 추정이 있다.25) 그러나 현존하는 수평 각재와 기둥에서 판장을 끼웠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독락당 을 제청으로 사용하면서 거적 등을 설치하기 위한 시설 로 설치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으나 현재로서 정확 한 용도는 알 수 없다.
기둥상부 짜임은 초익공식으로 창방이 설치된 부분에 는 창방뺄목이 익공을 대신하고 있다. 창방뺄목을 포함 한 익공 외단은 수서형과 교두형의 두 가지가 사용되었 으며, 교두형은 모두 단부를 직절한 것으로 하부는 원호 형으로 굴린 것(교두형A)과 사절한 것(교두형B)의 두 가 지가 사용되었다.2
수서형은 牛舌의 길이가 짧고 위로 올라가다 끝에서만 아래로 약간 내려온 형태이며, 기둥과 만나는 부분에서 는 연화두형에 순이 있는 형태의 초각을 하였다. 수서의 형태는 앙서형으로 치켜 올라가다 끝에서만 약간 아래로 꺾인 모습으로 독락당만의 독특함을 지니고 있다. 창방 뺄목이 아닌 경우 익공 내단은 양봉형으로 초각되어 있 는데, 양봉형과 수서형의 초각은 모두 조선 후기의 정형 화 된 모습을 이루기 이전의 양상을 지니고 있다.26) 교 두형은 모두 창방뺄목으로 단부는 모두 直切하였으나 하 단은 원호로 돌린 것과 斜切한 두 가지가 사용되었다. 교두형A는 서쪽의 온돌방 부분에 사용된 반면 교두형B 는 X2Y1을 제외하면 모두 동쪽 부분에 사용되었다. 한 편 서측면 중앙 기둥(X1Y2) 상부는 익공 없이 주두만 사용하였다.
익공(창방뺄목 포함)의 형태와 수법으로 볼 때 독락당 은 창건 후 최소한 두 번에 걸친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대청 중앙과 전면 부분의 수서형 익공(창방뺄 목 포함)이 가장 오래된 형식으로 창건 당시의 것으로 추정된다. 교두형A와 교두형B 사이의 선후관계는 명확 하지 않으나 형태가 다르고 형태에 다른 사용 위치가 다 른 것으로 보아 시대적인 차이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가구는 오량가로 대청 중앙 부분은 通間이며, 양 측면 부분은 중앙에 내주를 사용하였다. 내주가 있는 부분에 서는 대량을 맞보 형식으로 걸었다. 가구 부재의 구성과 형태, 치목상태는 가구 열에 따라 차이가 있다.
대량은 단면 크기나 치목 상태, 보머리의 형태 등이 모두 다르다.(Fig.3) X3 가구 열의 보는 단면 크기가 충 분히 크고 직선적인 형태로 잘 가공되어 있으며, 수장폭 으로 돌출한 보머리도 간단하나마 초각이 되어 있다. 반 면에 다른 가구 열의 보는 직선적으로 가공했으나 단면 의 크기가 지나치게 작거나 자연목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으며, 보머리의 형태도 모두 다르다. 결국 X3 가구 열 의 보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원형이 가능성이 높으며, 이를 제외한 대량은 모두 후대의 보수와 증축을 거치면 서 교체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X2 가구 열의 정면 보머 리는 X3 가구 열의 보머리 초각과 비슷한 모습을 지니 고 있어서 舊材를 재활용하였을 가능성도 있다.4
X4-X5 주간의 Y2 가구 열에 사용한 퇴량은 자연목을 활용한 월량 형식으로 단면은 옆면이 약간 배부른 형태 이며, 수장폭으로 돌출한 보머리는 직절하였다. 단면 크 기나 치목 수법 등으로 보아 X3 가구 열의 대량과 통하 는 면이 있다. 직절되어 있는 보머리는 길이가 매우 짧 은데, 후대에 보수를 하면서 원래 초각되어 있던 보머리 를 잘라 재활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X1 가구 열의 종량을 제외한 종량은 모두 비슷한데, 직선적인 형태로 잘 가공된 입면, 옆면이 약간 배부른 형태이고 하부는 약간 곡선으로 처리한 장방형 단면을 지니고 있다. 보머리는 X3 가구 열의 것만 초각이 되어 있는데, 창건 당시의 것일 가능성이 있다. X2와 X4 가구 열의 종량은 보머리가 짧고 단부가 직절되어 있다. X4 가구 열의 종량은 단부를 제외하면 X3 가구 열의 종량 과 거의 동일한데, 보머리가 매우 짧은 것으로 보아 원 래 초각되어 있던 보머리를 잘라 재활용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X2 가구 열의 종량은 단면 형태가 약간 달 라 교체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X1 가구 열의 종량은 자연목 상태로 휜 입면의 형태나 장방형에 가까운 단면의 형태가 다른 종량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후대에 변형 또는 교체된 것으로 보인다.
동자기둥은 X3 가구 열만 화반동자 형식으로 되어 있 다. X2와 X4 가구 열은 동일하게 장방형 판재를 사용하 고 있으며, X1 가구 열은 동자주 형태로 전혀 다른 모습 이다. 화반동자 형식의 동자기둥은 임진왜란 이전에 주 로 사용되었던 형식으로 창건 당시의 원형으로 추정된다.
대공도 위치에 따라 다른 구조와 형식에 차이가 있다. X3 가구 열은 상부를 사절한 동자주 옆에 복화반 형식 으로 초각한 부재를 보강하였다. 또한 동자주 위에 소로 를 올려 장혀와 도리를 받도록 하였는데, 운공을 사용하 여 보강하였다. 이러한 대공의 구성은 15세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산 맹씨행단이나 1574(선조7)년 창건 된 도산서원 강당(전교당) 등과 거의 비슷하며, 다른 부 분에 비해 가장 오래된 형식으로 창건 당시의 것일 가능 성이 높다. X2와 X4 가구 열의 대공은 동일한 구성으로 상부를 사절한 동자주 위에 소로를 두어 장혀와 종도리 를 받쳤으며, 종도리 좌우에 직선형의 소슬합장을 사용 하였다. X1 가구 열의 대공은 동자주와 소슬합장으로 구 성되어 있다. 동쪽 팔작지붕 합각부 아래의 퇴량 상부에 는 초각한 화반과 행공을 십자로 결구한 위에 소로와 두 어 외기도리와 장혀를 받고 있으며, 운공으로 결구를 보 강하였다.5
이상 살펴본 바에 의하면 독락당의 가구는 창건 이후 여러 차례의 보수를 통해 많은 변형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대청 중앙 X3 가구 열의 가구가 창건 당시의 원 형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으며, 측면 합각 아래 X4-X5 주간 Y2 가구 열의 가구도 비교적 원형을 간직한 것으 로 보인다. 변형된 부분은 신재 또는 구재를 재활용하여 보수되었는데, 부재의 사용과 치목 수법 등이 비교적 치 졸하여 보수 당시 상황이 여유롭지 못했거나 정성을 다 해 보수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3-3.독락당의 창호와 수장
중앙 두 칸과 동쪽 한 칸의 마루를 깐 방향이 다르다. 동쪽 칸의 마루는 측면 평주와 내주 사이에 장귀틀을 걸 고 여기에 의지하여 건물의 앞뒤 방향으로 동귀틀을 걸 었다. 대청과 동쪽의 방 사이에 있던 하방을 그대로 놓 은 상태에서 마루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하방 은 동쪽 툇간에 마루를 설치하기 전부터 존재하였던 것 으로 볼 수 있다. 이로부터 원래 방이었던 동쪽 툇간이 마루로 고쳤다는 사실을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다.
서쪽 온돌방에는 우물반자를 설치하였으며, 대청은 연 등천장이다. 연등천장으로 구성되는 대청의 합각 아래 외기 부분에는 눈썹천장을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독락당에는 이를 설치하지 않았다. 원래 온돌방이었던 것을 대청으로 개조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대청은 전면을 모두 개방하였으며, 대청 후면과 동측, 대청과 방 사이 후면 간에는 모두 띠살의 영쌍창을 설치 하였다. 영쌍창은 15세기 주택에서 대청 또는 마루방에 널리 사용되었으며, 온돌방에서도 사용하였던 형식으로 27) 현존하는 독락당의 영쌍창은 대부분 창건 당시의 원 형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온돌방 전면에도 띠살의 영쌍 창을 설치하였으나 문하방을 덧대어 만든 머름의 구성과 문설주와 문상방에 의한 문얼굴의 짜임, 창호의 크기가 다른 영쌍창과 차이가 있다. 이밖에 온돌방 후면에 띠살 의 외여닫이창을 설치하였고, 서측과 대청과의 사이 전 면 간에는 띠살의 외여닫이문을 설치하였다.
중앙부 네 칸의 마루를 에워싸는 전면과 동쪽 기둥에 는 기둥에 붙여 주선이 설치되어 있고,28) 주선과 같은 단면 폭을 지닌 하방이 바닥보다 높게 설치되어 있다. 현재 문상방은 없으나 상부에 창방이 있다. 따라서 대청 후면과 동쪽의 창호 구성과 동일한 방식의 문얼굴 구성 이 가능하며, 주선이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柱間전체에 걸쳐 창호를 설치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3-4.계정의 건축 현황
계정은 독락당 뒤편에 담장으로 구획된 곳, 觀魚臺라 부르는 너럭바위 위에 위치하고 있다. 평면은 ㄱ자형으 로 모두 다섯 칸이며, 양통은 한 칸이다. 남쪽에 자계를 바라보면서 동향시킨 두 칸 대청이 있는데, 대청 남쪽 대량에 ‘溪亭’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대청 북쪽에 는 한 칸 규모로 ‘仁知軒’이라는 이름의 온돌방이 있다. 여기에서 서쪽으로 꺾여 ‘養眞菴’이라는 이름의 온돌방 한 칸과 창고 한 칸이 이어진다.
동-서 방향 주간은 서쪽부터 2,800, 2,510, 2,800㎜이 며, 남-북 방향은 남쪽부터 2,460, 2,440, 2,520㎜이다. 이 로부터 완척을 추정해보면 동-서 방향은 9자, 8자, 9자, 남-북 방향은 모두 8자로 계획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가정에 따라 각 주간에 적용된 용척은 동-서 방향이 311.1, 313.8, 311.1㎜, 남-북 방향이 307.5, 305.0, 315.0 ㎜로 추정된다. 동-서 방향의 용척은 비슷하지만 남-북 방향은 이것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마당에서 볼 때 계정은 막돌을 이용해 쌓은 외벌대의 낮은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그러나 자계 쪽에서 보면 반석 위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일부에만 높은 누 하주를 세우고 누하주 면에 맞추어 석축을 쌓았다. 초석 은 막돌초석이며, 기둥은 모두 12개로 원주와 방주를 혼 용하였다. 두 칸의 대청 중 북쪽 간을 감싸는 네 개의 기둥에 방주를 사용하였고 나머지는 원주를 사용하였다. 원주와 방주는 모두 목재를 충분히 치목하여 빠진 부분 이 거의 없으며, 외관상 민흘림을 준 것으로 보인다.6
납도리집으로 가구는 모두 삼량가이다. 대량은 모두가 거의 완전한 직선으로 치목되었으며, 단면은 장방형의 모서리를 둥글게 모접기 하였다. 대공의 구성은 대청과 양진암 부분이 다르다. 대청을 포함한 전면 부분에는 상 부를 사절한 동자주 좌우에 낮게 초각한 판재를 추가하 여 복화반 형식으로 만들고 소로를 올린 다음 운공과 장 혀를 두어 종도리를 받도록 하였다. 독락당 대청 중앙부 대공과 동일한 구성이다. 양진암과 창고 부분에는 동자 주 형태의 대공을 사용하였다.
지붕은 맞배지붕이고 처마는 홑처마이다. 박공부 처마 깊이는 대청 부분이 창고 부분에 비해 깊다. 박공은 풍 판을 설치하지 않고 박공널만으로 마감하였다. 대청부분 은 회벽으로 마감한 연등천장이며, 두 온돌방에는 우물 반자를 설치하였다.
대청은 자계 쪽 정면과 마당 쪽 배면이 완전히 개방되 어 있다. 자계를 향한 동쪽에는 대청 전면 두 칸과 인지 헌 전면까지 연결하는 쪽마루를 두어 공간을 확장하였으 며, 그 끝에 계자난간을 설치하였다. 투각까지 더해진 계 자각과 궁창은 잘 초각되어 있는 모습이 형태에는 약간 차이가 있으나 무첨당 누마루의 계자난간과 통하는 면이 있다. 쪽마루의 남쪽과 북쪽 끝에는 홍살을 설치하였다.7
대청 남쪽에는 회벽으로 마감한 벽 가운데 쌍여닫이 판문을 설치하였다. 판문은 영쌍창 형식이고 바닥에서 높게 설치한 하방에 붙여서 문하방을 다시 설치하여 나 지막한 창턱을 만들었다. 인지헌 동쪽과 북쪽에도 쌍여 닫이 영쌍창을 설치하였는데, 동쪽의 것은 띠살, 북쪽의 것은 판문이다. 인지헌과 대청 사이에는 들어열개가 가 능한 맹장지 삼분합을 설치하였고, 인지헌과 양진암 사 이에는 들어열개가 가능한 사분합을 설치하였다. 따라서 모든 창호를 들어 열면 대청과 인지헌, 양진암이 하나로 통합된 큰 규모의 공간이 된다. 양진암은 남쪽에는 띠살 의 쌍여닫이창을 설치하였는데, 영쌍창 형식이 아니며, 창 아래 자진머름을 설치하였다. 창고는 남쪽에만 띠살 의 외여닫이문과 정자살의 창을 설치하였다.
이상 살펴본 바에 의하면 계정은 대공의 구성과 창호 형식에서 동쪽의 세 칸, 즉 대청과 인지헌 부분이 동일 한 모습을 지니고 있으며, 회재 창건시의 것으로 보이는 독락당의 오래된 형식과 통한다. 반면에 양진암과 창고 부분은 대공과 창호의 구성 방식에 차이가 있고 시대적 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4.독락당과 계정의 원형과 변화과정
회재는 1532년 옥산에 정착하기 전부터 이곳과 인연을 맺고 있었다. 일설에는 이미 옥산에 부친인 이번의 정자 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한다.29) 이번은 1500년에 사망하 였으므로 그의 정자가 이곳에 있었다면 그것은 15세기 말이 된다. 또한 ⌈회재집⌋ <晦齋先生年譜>에 의하면 회 재는 1504(연산군10)년 옥산의 정혜사에서 수학하였다고 한다. 한편 이러한 사실은 훗날 회재가 이곳에 독락당과 계정, 살림채를 조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독락당의 살림채는 1515년 창건설 과 1532년 창건설이 있으며, 후자의 경우에는 1515년에 회재가 이곳에 안채로서 一자형 초려삼간인 역락재를 지 었다고 한다.30) 그러나 부친의 정자나 초려삼간 역락재 의 존재여부와 관계없이 1532년 독락당과 계정을 조영할 때 살림채는 동시에 조영되었거나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회재의 독락당 조영은 別業의 성격과 함께 둘째 부인과의 살림을 위한 살림채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건축계획에서 살림채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앞서 살펴본 바를 토대로 1532년 회재가 창건할 당시의 독락당과 계정의 원형과 이후의 변화과정 을 추정해보도록 한다.
4-1.회재가 창건한 독락당과 계정
⌈송소집⌋의 기록을 통해 회재가 창건한 독락당은 도리 통 3칸, 양통 2칸으로 도합 6칸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여주이씨 옥산파 18대 종손의 증언과 기둥의 배열, 기둥 상부 짜임과 대량과 종량의 형태, 그리고 마루 구 조와 외기천장이 설치되지 않은 서쪽 툇간의 천장 구조 등을 통해 회재 창건 시 독락당은 서쪽 2×2칸이 대청이 었으며, 동쪽 1×2칸은 온돌방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가구는 오량가로 현존 독락당의 X3 가구 열에 있는 가구가 원형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즉 대량과 종량은 거의 직선적이고 단면은 장방형으로 하부를 원호 로 돌린 형태이다. 대량 위에는 화반동자를 사용하였고, 대공은 동자주형과 복화반, 운공이 조합된 형태이다. 독 락당 다른 위치의 가구에는 소슬합장이 사용되었으나 비 슷한 시기에 소슬합장 없이 독락당 X3 가구 열과 거의 같은 대공이 사용된 예가 여럿 있고 현존하는 계정 대청 부분의 대공형식으로 보아 독락당에도 소슬합장이 사용 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기둥 상부의 짜임은 현존하 는 X3Y1, X4Y1, X5Y1(보방향) 및 X3Y3에 남아있는 초익공식 짜임이 창건 당시의 모습일 것으로 보인다.8
회재가 창건할 당시 도리통 세 칸이었던 독락당은 안 채와 충분한 거리가 확보되므로 굳이 양쪽의 지붕을 다 른 형식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 따라서 서쪽의 지붕도 동쪽과 같은 팔작지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팔작지붕 형성을 위한 외기의 구성은 현존 독락당 동쪽 온돌방 상 부의 가구가 거의 원형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며, 서쪽에 도 같은 형식의 가구가 사용되었을 것이다.
대청의 전면과 서측면, 동쪽 온돌방의 정면과 후면, 동 측면에는 현존하는 것과 같은 영쌍창이 설치되었던 것으 로 보인다. 대청과 온돌방 사이, 그리고 대청 전면에는 주선과 바닥보다 약간 높게 설치된 하방으로 보아 분합 문을 설치하였을 것으로 보인다.31)
1532년 창건 당시 계정도 현재와 달리 도리통 3칸, 양 통 1칸의 一자형 평면으로 두 칸의 대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현존하는 계정은 1620년경에 소실되었던 것을 1650(효종원)년에 재건하였다고 한다.32) 그러나 직선적인 보의 사용이나 독락당 대청 중앙의 것과 동일한 대공의 구성으로 보아 현존하는 계정에서 양진암과 창고를 제외 한 부분은 회재 창건 당시의 모습일 가능성이 높다.33) 계정 전면 계자난간의 계자각과 궁창이 지닌 초각 수법 이 무첨당과 통하는 점이 있음도 그 가능성을 높여준다. 1650년에 재건하였다고 하더라도 현존 대청과 인지헌 부 분은 최소한 창건 당시의 모습을 복원적 관점에서 조영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붕은 현재와 같은 맞배지붕이 었으며, 현재 인지헌의 양진암과 연결되는 부분에는 원 래 현존 인지헌 정면과 같은 영쌍창이 설치되었을 것으 로 보인다.
독락당과 계정은 사랑 공간으로 접객과 학문을 닦고 강론을 하는 장소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창 건 당시 독락당과 계정의 목적과 기능에는 차이가 있었 던 것으로 보인다. 계정은 자계를 향해 놓인 대청의 전 면과 후면을 완전히 개방시켜 자계의 풍경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따라서 계정은 자연과 함께 호흡하면서 공 부하기 위한 정자 성격이 이 강하다. 반면에 독락당은 자계 쪽인 동쪽에 온돌방을 두고 대청도 사방에 창호를 설치하여 폐쇄적인 구성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독락당 은 별당 사랑채로서 起居用으로서의 성격이 보다 강했다 고 할 수 있다.
4-2.회재 사후 독락당과 계정의 변화
1555(명종8)년 회재는 강계 유배지에서 병으로 사망하 고 독락당과 그 일곽은 서자 전인이 물려받게 된다. 이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독락당과 계정은 여러 차례에 걸 친 개조와 증축이 있었으며, 그 변화과정은 다음과 같다.
① 독락당 동쪽 온돌방의 마루 개조
1585년 송소가 독락당을 방문했을 때에 독락당의 동쪽 온돌방은 이미 마루로 개조되어 있었다. 그 시점은 집안 에 전해져 오고 있는 것처럼 1555년과 1556년 사이일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온돌방을 마루로 개조한 것은 제례와 연관된 것으로 추정된다. 회재의 아들 잠계는 1553년 회재 생전 에 독락당에서 동생 농재의 상을 치렀다. 이어 같은 해 에 회재의 상을 치르게 된다. 회재와 농재는 모두 적자 가 없어서 양자를 들여 적통을 이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잠계는 서자이지만 오랫동안 부친과 숙부의 제례 뿐 아니라 회재의 부친인 이번과 모친 손씨, 부인 박씨 등의 제례를 독락당에서 지냈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독락당은 오랫동안 회재와 그 선친 및 동생과 일가족의 제례를 담당하였으며, 家族事의 중심이었을 것이다. 따라 서 많은 인원이 모일 수 있는 祭廳의 필요성으로 인해 온돌방을 마루로 개조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독락당 동 쪽 귓기둥 바깥에 설치된 방주도 이 무렵에 제사와 관련 하여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별당 사랑채를 奉 祀廳으로 활용한 사례는 양동 무첨당에서도 볼 수 있다.
② 독락당 서쪽 온돌방과 책방의 증축 – 4×2칸으로 의 변화
독락당 서쪽의 안채와 연결되어 있는 책방의 상량문에 따르면 독락당이 현재처럼 도리통 4칸으로 개조된 시점 은 1630년일 가능성이 높다. 이때 도리통 3칸의 독락당 서쪽에 기둥을 세워 온돌방을 들이는 동시에 독락당과 안채를 연결하는 책방을 증축하였을 것이다. 현재 독락 당 서쪽 온돌방의 측면 기둥이 안채 기둥 열에 맞춰서 설치된 것은 이러한 증축의 상황을 반영한다. 또한 서쪽 측면의 양통 길이가 원래 독락당의 양통 길이보다 길게 된 것도 이 증축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안채 와의 관계 속에서 독락당 서쪽의 지붕도 팔작에서 맞배 지붕으로 바뀌게 되었다.
온돌방과 책방의 증축은 봉사청의 역할을 하던 독락당 에 대청만 있고 온돌방이 없었던 상황과 연관되는 것으 로 보인다. 이에 따라 온돌방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을 가 능성이 있다. 한편 마루방은 책방이라고 하는데 살림채 에 책방이 있는 상황에서 또 다시 책방을 지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독락당이 봉사청으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마루방을 빈소방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었을 가능성을 열어놓을 필요가 있다. 한편 무첨당에서도 동쪽 온돌방 바깥으로 장안이라 부르 는 두 칸의 마루방을 후대에 증축하고 있는데, 이와의 관련성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③ 계정의 복축 또는 증축 – ㄱ자형 다섯 칸 규모로 의 변화
1818년 해은이 독락당을 방문했을 때 계정은 다섯 칸 의 ㄱ자형 평면으로 변화되어 있었으나 기록이 없어 정 확한 변화 시점은 알 수 없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1620년 경 소실되어 1650년 경 복축되었 다는 선행연구 결과를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1650년 의 공사는 기존 건물에 현재의 양진암과 창고 부분을 증 축하는 공사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복축되었다고 하더라 도 현재의 대청과 인지헌 부분은 회재 창건당시의 원형 을 상당히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④ 조선말기 이후 독락당의 변화
1818년 해은이 독락당을 방문했을 때 독락당은 양쪽 툇간이 방이었다고 한다. 마루였던 동쪽 툇간이 다시 온 돌방으로 바뀐 것인데, 그 시점은 동쪽의 방을 대청으로 바꾼 1555~56년과 1818년 사이 어느 시점일 것이다. 책 방 상량문에 의하면 이 사이에 독락당은 적어도 두 번, 즉 1630년과 1809년에 수리가 있었다. 한편 앞서 살펴 본 독락당 기둥 상부 짜임에서 서로 시대를 달리 하는 교두형와 교두형B가 각각 서쪽과 동쪽 부분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쪽에 집중되어 있는 교 두형A는 1630년 서쪽 온돌방과 책방의 증축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이다. 따라서 동쪽에 교두형B가 집중되어 있는 것은 1630년의 수리와는 관계없는 별도의 수리에 의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마루였던 동쪽 툇간 이 다시 온돌방으로 바뀐 시점은 1809년 공사에 의한 변 화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렇다면 동쪽 툇간이 다시 현재와 같은 대청으로 만 들어진 것이 언제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이 역시 현 재로서는 그 시점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1931년 조 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고적도보 11⌋의 사진에 의하 면 동쪽 툇간이 대청과 함께 마루로 되어 있다. 따라서 해은이 독락당을 방문한 1818년에서 20세기 초 사이 언 제인가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던 것으로 보인다.
있다. 현재의 단청은 1976~78년에 보수하면서 칠한 것이다. 그러나 1931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朝鮮古 蹟圖譜⌋의 사진에는 단청이 없다. ⌈독락당 실측조사보고 서⌋에서는 近思齋朴啓賢(1524~1580년)가 1568년에 쓴 시 <獨樂堂>의 “丹碧非奢獨樂堂……”이라는 구절을 근 거로 16세기 후반에 단청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 다.34) 근사재의 시에서 ‘丹碧’은 단청을 의미하는 단어임 이 분명하다. 그러나 단순히 ‘화려함’이라는 뜻으로 해석 할 수도 있어 이 시구만으로 당시에 단청이 있었던 것으 로 단언하기는 어렵다. 1970년대에는 문화재를 보수하면 서 일종의 성역화 사업과 연관시켜 진행하는 경우가 많 았다. 따라서 단청이 없던 건물에 단청을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독락당도 원래 단청이 없었던 것을 1976년에 보수를 진행하면서 작위적으로 단청을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5.결론
지금까지 알려진 문헌자료의 재분석과 새로운 문헌자 료의 발굴과 분석, 현존 건물에 대한 분석, 그리고 기존 연구와의 비교를 통해 본 연구에서는 회재가 창건한 독 락당과 계정의 모습과 이후의 변화과정을 비교적 구체적 으로 규명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회재 창건시의 독락당 과 계정은 현재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으며, 여러 차 례의 변화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 다. 본 연구에서 밝힐 수 있었던 독락당 창건 당시의 모 습과 이후의 변화과정에 대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532년 회재에 의해 창건된 독락당은 도리통 세 칸, 양통 두 칸으로 서쪽 두 칸은 대청, 동쪽 툇간은 온돌방 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계정은 도리통 세 칸의 一자형 평면으로 두 칸의 대청과 한 칸의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후 독락당은 동쪽의 온돌방이 마루로 개조되었는데, 그 시점은 1555년에서 1556년 사이로 추정된다. 다시 독 락당은 1630년에 서쪽에 온돌방을 들여 도리통 네 칸으 로 확장되고 안채와의 사이에 책방이 증축되었다. 이때 원래 팔작지붕이었던 서쪽의 지붕이 안채와의 관계로 인 해 맞배지붕으로 변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一자형 평 면으로 도리통 세 칸이었던 계정도 온돌방 두 칸을 추가 하여 다섯 칸 규모의 ㄱ자형 평면으로 개조되었는데, 기 존의 연구 성과를 근거로 그 시점은 1650년경으로 추정 하였다. 한편 기존연구에 의하면 이때 계정은 1620년경 소실되었던 것을 1650년에 復築하였다고 하나 회재 창건 당시의 건물에 두 칸을 증축시킨 것일 가능성이 높은 것 으로 추정하였다.
1630년 증축 이후 독락당은 1818년 사이에 동쪽 툇간 을 다시 온돌방으로 개조하였다가 1931년 이전 언젠가 다시 마루로 개조하는 변화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현재 독락당의 단청은 1976년에 칠해진 것으로 원래는 단청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상 살펴본 것처럼 독락당과 그 일곽은 1532년 회재 에 의해 창건된 이후 많은 변화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많은 변화를 거친 만큼 창건 당시 독락당과 그 일 곽의 모습과 그 이후의 변화과정을 밝히는 것은 사료비 판의 측면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 독락당과 그 일곽의 연구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 자료의 부족으로 회재 창건 당시 살림채의 모습과 변화과정은 밝힐 수 없 었으나 본 연구를 통해 독락당과 계정의 창건 당시 모습 과 변화상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었다는 점은 독락당과 그 일곽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생각하며, 이후 독락당과 그 일곽 연구를 위한 기초자료 로서 활용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본 연구가 건 축사 연구에 있어서 사료비판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계기 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