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 론
서울특별시가 2000년부터 시작한 ‘북촌 가꾸기 사업’의 베이스캠프이자 핵심시설은 ‘북촌문화센터(등록문화재 제 229호/서울 계동 근대 한옥)’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시 가 사업의 일환으로 매입하여 문화센터로 활용하고 있는 이 가옥은 현재 개보수와 용도변경을 거쳐 북촌의 역사 와 문화재 안내, 전통문화강좌 및 문화행사기획 등의 역 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 가옥은 건립 후 몇 단계의 변화 를 거치며 원형이 변했고, 현재는 내부의 기능이나 진입 영역 자체가 아예 원형과 다르게 재구성되어있는 상태이 다. 본 연구는 최초건립 후 ‘민재무관댁’ 또는 ‘계동마님 댁’으로 불리어 온 이 가옥이 알려진 내용과 달리, 건립 자의 며느리 이규숙이 구술한 건립당시의 건축 관련 기 록과 대조해 볼 때 현재 잘못 알려져 있는1) 건립자 및 건립시기 부분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고, 또한 근대기에 전통한옥으로 건립하면서도 북촌의 도시구조에 잘 적응 하고 실용적으로 재구성한 중규모의 근대도시한옥이란 점과, 궁궐요소를 주택에 차용한 독특한 경우로서의 조 영의도에 주목하고자 한다. 또한 단편적으로 나눠져 알 려지고 있는 본 가옥에 대해 건축분야의 자료를 통합하 여 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연구의 대상은 가옥이 건립된 당시의 상태에 두기로 하며, 따라서 가옥의 변화 를 추적하여 원형의 상태를 추정 복원하고 이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며, 이를 통해 연구가옥의 사용행태 및 건축계획적 특성을 우선 파악하고자 한다. 더불어 본 가옥에 적용된 궁궐요소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왜 민 간가옥에 궁궐요소를 차용했는지에 대한 건립자의 조영 의도까지를 해석해 보고자 한다. 본 논문에서 지칭할 가 옥의 호칭은 최초 건립자의 이름을 반영하여 ‘유진경 가 옥’으로 칭하기로 한다.
2.건립 관련 기록
본 가옥에 대한 건립 관련 기록은 건립자의 며느리가 양반가의 80평생을 구술한 책 『이‘계동 마님’이 먹은 여 든 살』(Fig.1, 이하 『구술기록』)2)에 담겨있다. 제목에 서의 이‘계동 마님’은 본 가옥의 기존 건립자로 알려진 민형기의 집안에 시집온 며느리 이규숙을 말한다. 이규 숙은 민형기와 유진경의 외동아들인 민경휘와 열두 살인 1916년 정혼하고 1921년 열일곱 살에 당시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다니던 남편과 대례를 올렸다. 그 리고 스무 살인 1924년 계동의 시 댁(본 연구 가옥)에서 합례를 치 루고 이때부터 시집에서 살기 시 작하여, 남편이 학교친구였던 감 제룡3)에게 집을 매각한 후 재동으 로 이사하는 1935년까지 본 가옥 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생활하였 던 장본인이다. 시집와서 50년을 모신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전한 내용 중에서 본 가옥의 건립의도와 건립내용이 언급되고 있는데(『구술기록』163~165쪽), 이 증언으로 건립자는 기존에 알려진 민형기가 아니라 그의 부인 유진경임을 알 수 있고 건립년도는 1921년 추석직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건립자 유진경과 건립배경
3-1.유진경兪- (1879~1973)의 배경과 이력
며느리가 여중군자라고 표현한 유진경(Fig.2)은 대범하 면서 실천력을 가졌고,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합리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다. 취침과 기상 및 식사 등 본인의 기 준을 생활 속에서 실천했고, 집안일은 알 때까지 포용하 며 철저히 가르쳤다. 특히 양반의 체면과 관련된 종부의 역할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 했다.(『구술기록』89 쪽) 이런 점들을 통해 본 유진경은 본인 및 살림 전반에 걸쳐 자기 특유의 기준을 적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융통 성이 있고 실천성이 강한 종부이자 과부로서, 본인중심 의 틀과 생활성향을 지닌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가 옥건립 당시의 유진경은 노론 집안의 종부이자 과부였고 여성가장이었다. 남편 민형기 (1881~1913)는 조선말엽에 여 주 영릉에서 능령 벼슬을 했고, 그 뒤 재무행정의 중앙관청인 탁지부의 재무관을 지냈는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됐을 당시 삼촌인 민병석이 협조한 것에 화를 내며 곧바로 사직했 다고 한다. 이후 일본에 가서 농업을 공부하고 돌아와 서울 역 뒤 청파동의 선산 일대에 농사를 경영하다가 33세로 일 찍 졸卒하였다. 민형기의 생전의 직업 때문에 그의 집안 은 ‘재무관댁’이라고 불렸고(60쪽) '계동마님댁‘이란 호칭 은 그의 사후 시집온 며느리 이규숙이 불린 호칭이다.(66 쪽) 자녀는 독자 민경휘(1903~1978)와 그 밑에 요절한 두 딸을 두었다.(95쪽) 시댁은 명성황후의 척족으로서 세 도가이던 여흥 민씨의 집안이었고, 초대 이왕직 장관과 중추원의관을 지낸 민병석(1858~1940)이 시숙이었다. 2 대독자인 남편이 일찍 요절하자 집안의 남자라곤 3대독 자인 아들이 있었으나 당시 11세여서 어렸다. 이후 남자 가 없는 집안에 어른 노릇을 한 사람은 시숙이었고 대소 사가 있을 때마다 남자어른의 역할이 필요할 때면 늘 하 인을 시켜 기별하고 민병석이 그 역할을 해 주었다. 실 제로 본 가옥을 지을 때도 신축 조언과 경제적 분담을 져준 이가 민병석이었다. 따라서 남편 민형기가 요절할 당시까지의 집안 재력이 있었다고는 하나 일제강점시기 를 거치면서도 양반의 삶을 그대로 영위할 수 있었던 것 은 시숙의 배경과 영향이 강하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 다. 유진경의 사회활동은 집안 살림 외에 안국동의 안동 교회를 다닌 것이 전부이다. 교회를 가게 된 계기는 1925년 당시 18세인 첫딸이 심장병으로 요절하기 직전에 교회를 다니면 딸이 죽어서 손각시가 되지 않는다는 권 유 때문이었다. 다만 눈에 띄는 이력은 계동 가옥의 건 립을 주관한 것인데, 이점은 남편이 요절하고 집안에 남 자가 없어 본인이 이끌 수밖에 없는 가장의 입장과 상황 에 따라 대범성과 추진력이 강한 개인적 성향이 작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3-2.가옥 건립배경과 과정
1905년, 남편 민형기가 재동에 집을 구입하여 청파동 에서 이사를 온 집은 사랑채와 안채가 거꾸로 배치된 집 이었다. 유진경은 ‘사랑채가 안대들보를 누르면 안 된다’ 는 옛말을 떠올리며 처음부터 맘에 들어 하지 않았고 민 형기는 재동 집에서 3년 만에 병이 나고 5년을 투병하다 1913년에 요절했다. 이후 1916년에 아들 민경휘를 정혼 시킨 뒤, 1921년 정월에 시어머니가 위독하시어 돌아가 시려고 하자 유진경은 “내가 와서 외아들을 그렇게 어머 니 앞에 돌아가시게 했는데, 너를 아버지 돌아가실 때도 테두릴 씌웠는데, 할머니 돌아가실 때 또 테두릴 씌우면 남이 어떻게 보겠니.”하며 급하게 아들을 혼인시키려 한 다. 그런데 이사 올 때부터 싫었고 남편까지 먼저 보낸 재동 집에서는 며느리를 얻고 싶지 않았던 유진경은 이 사를 결심한다. 계동의 ‘홍 판서 집’4)이 매물로 나왔다는 전갈을 받고 찾아가 보니 집이 매우 낡은 상태였지만 새 로 지으면 되지 하며 터만 보고 구입하였다고 한다. 그 런데 기존 재동 집이 바로 팔려서 새로 산 계동 집으로 바로 이사를 하고자 했으나 워낙 낡아 여기저기 수선해 도 자꾸 탈이 생기자, 시숙인 민병석이 경제적 지원약속 과 함께 신축을 권해 아예 새로 짓기로 한 것이 건립동 기가 되었다(『구술기록』163쪽). 공사기간 동안에는 시 숙의 교동 자택 산정채에 머물면서 공사를 독려하였고 이런 급한 상황 때문에 계동가옥은 1921.5월에 낡은 집 을 매입하고 철거 후 약3개월의 짧은 공사기간을 거쳐 8 월 추석을 본 가옥에 입주하여 지냈다고 한다.
4.유진경 가옥의 원형추적
4-1.현 북촌문화센터로의 수선내용
서울시는 ‘북촌가꾸기사업’의 전략적 거점으로 활용하 기 위해 본 가옥을 2001.4.4일 매입5)하였고 대수선, 일부 개축 및 용도변경6)을 거쳐 2002.10.29일 북촌문화센터 로 개관7)하였다. 이 사업은 「북촌가꾸기 기본계획」의 틀에 의해 추진되었고 이 계획에는 본 가옥을 포함한 매 입한옥에 대한 활용방안과 수선에 대한 비용검토 및 설 계지침이 포함되어있다. 기존 가옥의 변화에 대해서는 수선 설계 및 한옥심의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현재 상태 (Fig.3, 4)8)로의 안중문 위치 이동, 내외담 높이 낮추기, 안채 부엌 바닥 및 출입구 조정, 일식 목욕실 철거, 바깥 행랑채 철거 및 문간채 신축 등의 추진경위가 밝혀져 있 다.9) 실제 사업에 참여했던 관계공무원10)은 다음과 같 이 수선 후의 내용을 밝히고 있다. 가. 전체 목구조와 지 붕, 창호 등은 원형을 보존했다. 나. 안방 아래 부엌이 있었고 단차가 있었으나 사무실로 개조하며 없어졌다. 다. 현 정자는 신축한 것이며 기존에는 사당이 있었다. 라. 뒤편 화장실도 새로 건축하였으며 기존에는 측간/목 욕실 기능의 채가 있었다. 마. 남측의 긴 행랑채는 전체 적으로 보존하였으나 내부를 전시장으로 바꾸면서 바닥 단차 및 창호 등을 새 기능에 맞게 고쳤다. 바. 문간채 일부에 문화상품가게(북촌상회)를 들였다. 여기에서 문간 채는 <Fig.5>에서 확인되듯이 기존의 바깥행랑채 영역 전체를 철거하고 새로이 전면마당을 가진 구성으로 신축 한 것이나 이 글에서는 언급이 없다. 이상의 수선 결정 및 수선내용은 수선 전 가옥의 기록과 현 상태로의 변화 를 대조해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런데 현황도면에 서는 정자 서측의 담장이 대지의 지적경계를 따라 꺾여 표현되어있으나 실제 현장은 일직선의 담장으로 구성되 어 있어 다르므로 이 부분은 수정이 되어야한다.
4-2.수선 전의 가옥
서울시의 「북촌 가꾸기 기본계획」에는 수선되기 전 본 가옥의 상태를 기록한 당시의 도면(Fig.5, 6)과 사진 (Fig.7~15)이 실려 있다.11) 배치평면도에서는 기존 한옥 전체의 칸잡이를 확인할 수 있고, 현재 멸실되어 문간채 가 들어선 자리의 기존 바깥행랑채의 존재 및 2001년 기 록당시까지 원형에 덧붙이거나 수선해서 사용하던 흔적 을 찾을 수 있다(Fig.5). 바깥행랑채는 구술이 있던 1984 년 당시 전자오락실로 사용되었었고(『구술기록』8쪽), 1993.5.31.일자로 근린생활시설(대중음식점)로 용도변경되 어12) 서울시에 매각할 때까지 식당으로 운영13)되었다. 이때까지 바깥행랑채는 벽체들의 변경은 있었지만 구조 체인 목기둥과 기와지붕은 유지되고 있었음이 도면 (Fig.5)과 사진(Fig.7)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사랑채 부분 이 식당의 확장공간으로 개조되어 활용되었는데. 쪽마루 일부와 툇마루가 실내공간화 되었고, 사랑대청도 방이 되었고, 큰 사랑방 북측에 기와지붕 밖으로 튀어나간 작 은 방을 덧붙인 흔적이 그것이다. 안채는 안대청의 북측 을 기와지붕 밖으로 확장하였고, 건넌방은 반침벽을 제 거하여 방을 확장시켜 사용한 흔적이 보인다. 뒷마당의 중앙엔 화단을 조성하였고, 뒤행랑채의 동측 날개채는 지붕밖으로 확장 돌출시킨 쪽마루를 실내화시켜 현관 및 복도로 바꿨고, 방들과 대청의 경계벽들은 모두 제거하 고 남측에 돌출시킨 화장실을 덧달아 원룸구조처럼 꾸며 사용한 흔적을 볼 수 있다.
이 배치평면도는 수선 전 가옥의 상태를 보여주는 귀 중한 자료이나 실측도면집의 납품내역에서 ‘대지경계(지 적)는 실제와 다를 수 있다‘고 표현한 것으로 볼 때 지적 경계는 고려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고 그 때문에 현장 측량 결과 서남서 방향으로 3.85도 기울어진 남측 행랑 채를 수평으로 표현한 오차를 보이고 있다. 그보다 큰 오류는 측간/목욕간채의 평면도와 입면도의 칸수가 서로 다른 것인데, 평면도는 정면3칸이나 입면도는 정면2칸으 로 그려져 있어 서로 맞지 않는다. 이것은 현장의 폭을 측정한 결과 입단면도와 같이 2칸의 정면 폭을 가질 때 안채와 연결된 통로까지 배치가 가능한 것으로 보아 평 면도를 작도할 때 오류가 생겼던 것으로 보인다. 입단면 도(Fig.6)에서는 지금은 없어진 장독대와 안방 뒤의 조적 조 굴뚝, 그리고 안채의 침방가퇴와 연결된 중층의 측간/ 목욕간채를 볼 수 있고, 수선되기 전 안채 부엌의 기존 입면도 확인할 수 있다. <Fig.7, 8>을 통해서는 현재 사 라진 기존 바깥행랑채를 포함한 가옥의 지붕이 확인된다. 솟을대문 자리의 지붕은 이때에도 이미 제거되어있다.
<Fig.9>에서는 평대문인 안중문과 우측에 반화방벽을 가진 광도 확인되며 <Fig.12, 16>에서는 안채의 안방과 부엌의 관계 및 안대청에서 보이는 부엌의 입면을 통해 입단면도(Fig.6)와 일치함이 확인된다. <Fig.10, 14>는 안행랑채 광 부분의 화방벽과 마루광, 안행랑방 및 부엌 의 존재를 보여주며 <Fig.11>에서 안채 부엌의 서측 입 면과 안방을 두른 가퇴 및 북측의 측간/목욕간채의 존재 와 관계를 볼 수 있다. <Fig.15>는 뒤행랑채 광 부분의 지붕과 벽체 부분, 측간/목욕간채의 일부분 및 마당의 화 단이 확인된다. 디지털한양14)에는 수선 전의 사진
(Fig.16~18) 및 기존 가옥의 항측도(Fig.19)와 함께 복원 을 시도한 조감도 및 배치평면도(Fig.20, 21)가 있다. <Fig.17>에서는 사랑채의 우진각 지붕과 처마홈통, 벽과 쪽마루가 확인된다. <Fig.13, 18>에서는 현재의 신축 정 자로 대체된 자리에 있던 기존 사당의 모습이 보이며, 사당은 정면2칸에 칸마다 4분합띠살청판문이 달렸고, 맞 배지붕에 처마홈통을 달았고, 남측벽은 조적식 화방벽을 가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항측도(Fig.19)에서는 기존 가옥 전체의 배치와 지붕선 을 볼 수 있는데 <Fig.7, 8>의 실물사진과 비교해볼 때 바깥행랑살림채 지붕의 꺾인 부분은 항측도처럼 모서리 에서 꺾인 형태가 아니고, 일자형태의 맞배지붕에 대청 부분의 지붕이 삽입되는 형태로 만났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에 복원을 시도한 조감도(Fig.20) 및 배치평면도(Fig.21)에서 바깥행랑채의 지붕들을 모두 연 결하여 하나의 지붕으로 처리한 것은 오류이며, 구술에 의해 부엌의 존재가 확인된(『구술기록』71쪽) 사랑중
문 옆의 칸을 행랑방으로 표현한 것도 오류가 되었다. 또한 솟을대문이 있던(『구술기록』8쪽) 칸의 지붕도 일각문으로 처리한 오류가 보이며, 사랑채의 툇마루를 덮었던 창호와 안대청 북쪽의 확장된 공간 및 창호가 여 전히 잔류하고, 뒤행랑채의 복도로 넓혔던 쪽마루의 폭 도 수정되지 않았다. 측간/목욕간채는 실측평면(Fig.5)과 같이 정면3칸으로 처리된 오류가 이어졌고 평면적인 기 능은 기존에 안채 가퇴와 이어졌던 측간/목욕간채의 존 재를 부정하고 측간과 광으로 구성된 독립채로 대체시켰 는데 이 변화의 근거는 찾을 수가 없었다.
4-3.『구술기록』에 의한 가옥
가옥 건립 관련 구술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가. 계동 가옥은 구술자의 시어머니 유진경이 지었다. 나. 창 덕궁 후원의 연경당을 모델로 하여 도면작성을 요구하였 다. 다. 향후의 손자 여럿과 지낼 것을 고려해 안방을 크 게 6칸으로 하였고 내부구획은 장지로 하였다. 라. 마루 는 3칸 규모였다. 마. 대궐목수가 지었다. 기초는 돌을 사용한 적심돌지정이었고 그 위에 숯을 한 섬씩 넣고 다 진 뒤 주춧돌을 놓았다. 바. 건립 시기는 구술자가 시집 오기 3년 전인 1921년이며 5월부터 시작하여 8월 추석 때 입주하였다. 사. 건넌방은 두 칸, 복도를 나가면 큰 사랑, 작은 사랑, 작은 사랑 마루가 있고, 부엌 쪽에 내 려서면 광이 죽 있고 그 뒤로 마루 둘, 방 하나 있음, 하 인들 방은 바깥채에 있음.(이상 164쪽) 아. 바깥행랑채엔 방과 부엌이 있었다.(71쪽) 자. 사당이 있었다.(75, 124 쪽) 차. 집안에 목욕시설(목간, 목간통)을 갖추고 살았 다.(92, 173쪽) 카. 변소는 안방 뒤쪽에 있었고 구술자 거주 당시 한 채를 더 지어 4군데(사랑 변소, 안 변소, 행랑 변소)였다. 거름장수가 뒷대문으로 들어와 수거해갔 다.(173쪽) 타. 식수는 수돗물로 새벽에 물장수가 길어 와 부엌의 독에 채웠고 그 외는 우물이 있어 우물물을 사용하였다.(171쪽) 파. 가마와 인력거가 있었다.(78~79 쪽) 하. 정기적 반입 수확물은 추수 때 벼 백여 석과 계 절마다의 채소와 과일이 있었고 하인 십여 명이 거의 소 모하였다.(74쪽) 거. 겨울땔감은 소나무 장작 5트럭 정도 와 숯 20가마였고 소나무를 자르고 장작을 패고 쌓는 작 업은 뒷마당에서 행해졌다.(173쪽) 너. 갑오개혁 후 시아 버지 민형기는 사당모시는 사람 한 명 및 모친과 부인의 몸종 두 명만 두고 나머지 노비는 모두 속량하였 다.(70~71쪽) 1913년 요절 전에 부인 유진경에게 향후 월급 하인에 의존하지 않게 직접 일을 배워 스스로 자립 하라고 당부하였다.(75쪽) 더. 며느리 이규숙이 시집 온 1924년 당시의 거주인원 및 가옥사용행태와 관련된 내용 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주인식구 중 시할머니는 건넌 방에서 상지꾼과 생활, 시어머니 유진경은 상지꾼과 안 방 사용, 남편 민경휘는 사랑채 사용, 며느리이자 본인 이규숙은 시할머니가 건넌방을 사용한 관계로 상지꾼과 아랫방(안행랑방) 사용, 그리고 어린 시누이가 둘 있었는 데 공간사용은 언급이 없으나 안방 또는 윗방에서 유진 경과 생활한 것으로 추정된다. 월급제 거주하인으로는 동자치와 행랑사람을 두었는데, 동자치는 밥과 설거지를 담당하였고 남편은 마당 쓸기, 불 때기, 심부름을 하였는 데 자식 4~5명과 함께 바깥방(뒤행랑 큰방으로 추정)에 서 기거하였다. 행랑사람은 빨래와 청소, 놋그릇 닦기를 담당하였고 그 남편은 평소엔 바깥에서 생선장수 등 자 유롭게 활동을 하다가 유사시에 동자치 남편과 함께 방 아를 찧었다고 하며 이들 가족은 큰 대문 들어서며 방과 부엌 있는 행랑(바깥행랑)에 기거하였다. 기타 하인으로 는 뒷방 뚝 떨어진 방(뒤행랑 작은방으로 추정)에 거주 하는 다듬이 하는 할머니, 가마를 메던 교군,15) 애 봐 주 던 늙은 여자와 젊은 여자, 여름 대청에서 부채 부치는 열댓 살 지지배 등이 있었다.(71~74쪽)
4-4.원형추정
가옥의 원형을 추정한 기준은 다음과 같다. 가. 현 북 촌문화센터로 수선되기 전의 상태를 기록한 <수선 전 배치평면도, 입단면도 및 사진>(Fig.5, 6, 7~18)을 기준으 로 한다. 특히 이 시점까지의 수선에도 잔존했던 목구조 를 기존 간살잡기의 기준으로 보았다. 나. 기존에 복원을 시도한 배치평면도(Fig.21) 중 수선 전 자료 및 구술기록
에서 확인이 되지 않는 사항은 준수하였다. 다. 대지경 계는 변동이 없었으므로 현황을 따랐고 대지경계를 벗어 난 담장은 수선 전 자료와 복원배치평면도, 현황도면 및 현장답사와의 비교를 통해 조정하였다. 라. 『구술기록』 에서 명확히 확인되는 사항은 다른 자료에 우선하여 반 영하였다. 마. 기존 자료에 없는 사항 중 한옥의 구성원 리로 설명이 가능한 부분은 근거제시와 함께 보완하였다. 바. 확인할 수 없는 사항은 기존 자료의 해당내용을 유 지하였다. 사. 현황도면 및 북촌가꾸기사업에서 사용된 채의 호칭이 구술자가 안채 뒤의 영역을 뒤, 뒤란 또는 뒷방(『구술기록』72, 173쪽)이라고 한 것과 남측 행랑 을 아래, 아랫방(『구술기록』164쪽)이라고 부른 것, 큰 길에 면해 있는 채를 바깥에 있다(『구술기록』165쪽) 라고 한 것, 그리고 목욕실을 목간(『구술기록』92, 173 쪽)이라고 표현한 것과는 서로 반대되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구술내용을 기준으로 ‘길쪽행랑채’는 ‘바깥행랑채’ 로, ‘뒤행랑’이라고 표현한 남측 행랑은 ‘안행랑채 또는 아래채’로, ‘안행랑이’라고 표현된 북측 행랑채는 ‘뒤행랑 채’로 바로잡고, ‘일식목욕실 또는 측간및목욕실’로 부른 호칭은 ‘측간/목욕간채’로 통일했다.
(1)바깥행랑채 및 바깥행랑살림채
현재는 사라진 바깥행랑채는 <Fig.5>에서 잔존했던 목구조와 지붕선을 확인할 수 있고 또한 <Fig.7, 8, 19> 의 사진을 통해 배치형태와 지붕모양을 확인 할 수 있 다. 특히 북측의 106번지 가옥의 목구조가 현재의 외벽 에 노출되어 잔존하고 있기 때문에 바깥행랑의 상대적 배치 및 거리에 면한 행랑간의 선형까지 확인할 수 있 다. 그리고 『구술기록』8쪽에서 “이제는 덩실한 솟을 대문이 철문으로 바뀌고 헐려나간 행랑채에는 전자오락 실이 들어서..”라고 한 바와 같이 큰길 쪽의 철대문이 있 던 자리에는 기존에 솟을대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변화는 <Fig.7, 8>에서 보이듯이 행랑의 기와지붕은 남고 측면에 위치했던 솟을대문의 칸만 소실될 수 있었 던 이유가, 솟을대문이 행랑보다 솟은 별도의 지붕체계 를 가졌던 것에 기인했음을 알 수 있다. 즉 바깥행랑채 는 솟을대문이 있는 일자형 바깥행랑채와 사랑중문을 가 진 기역자형의 살림채 두 채로 구성되었었고, 살림채의 지붕은 일자형 맞배지붕에다 대청 칸의 맞배지붕이 수직 으로 삽입되어 만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구술기록』 에 따라 ‘행랑사람’ 내외가 머물렀던 방과 부엌의 구성은 <Fig.21>과 같이 두 칸의 길이 중 한 칸 반이 살림방이 고 나머지 한 칸이 부엌의 규모일 때 기역자의 채 구성 이 타당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가마와 인력거를 보관했 던 공간은 솟을대문의 출입 칸 바로 옆의 칸에 보관했을 것으로 추정하며, 행랑의 제일 안쪽 칸은 측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그 구성은 확인할 수 없으므로 기존 복 원도(Fig.21)를 준수하였다. 다만 출입문은 판문 또는 널 문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이때 안여닫이는 무리가 있으 므로 밖여닫이로 적용해야 할 것이다.
(2)본채(사랑채 및 안채)
사랑채와 안채가 한 몸으로 연결된 본채는 <Fig.5>에 서 원형 목구조와 지붕이 보존되어 있으나 그간 수선한 흔적들이 잔존하고 있다. 식당의 확장 공간으로 사용되 었던 사랑채는 북측의 덧붙인 방과, 대청 및 툇마루를 막았던 창호 벽을 제거하고, 사랑방과 건넌방의 난방을 위한 아궁이가 있는 작은 부엌을 유지시키면서 그 남쪽 의 툇마루를 막아 사용했던 마루방을 『구술기록』의 “우리 배깥 양반은 자기두 큰 사랑이 있이니께 사랑들 씨구.. 또 복도루두 나갈 수 있구..”란 표현에 의해 툇마 루를 회복시켰다. 그리고 『구술기록』에서 ‘작은 사랑 마루‘가 의미한 사랑대청을 큰사랑방과 작은사랑방 사이 의 칸에 회복시키면 사랑채의 원형이 드러나게 된다.
안채는 안대청 북측의 처마선 바깥으로 돌출시킨 창호 부분을 제거하고 기둥이 있는 열에 분합문을 회복시키면 서 그 바깥에 처마안쪽으로 폭좁은 툇마루를 회복시켰다. 이것은 지붕선이 유지되어온 <Fig.4>를 참조할 때 서측 안방 부분의 합각지붕과 동측 건넌방의 돌출지붕 사이의 처마선 안쪽에서 창호와 마루구조가 완결되어야하기 때 문이다. 그리고 <Fig.16>에서 현대식으로 교체된 대청 남측의 3짝미서기유리문들은 보편적으로 대청을 막았던 4분합띠살궁판들문으로 회복시키기로 한다. <Fig.5>와 <Fig.21>에서 표현된 안대청과 안방 및 건넌방의 경계 문은 개폐방식이 서로 다르다. <Fig.5>의 개폐방법은 가 운데 2짝의 문이 문선 없이 반대방향으로 각각 열리게 표현되었는데 이 경우 두 문짝의 지지점이 없어서 개폐 시 떨어지게 되므로 잘못 표현된 것이다. 이는 <Fig.16> 에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기존 불발기의 모습과 돌쩌 귀의 위치로 확인되므로 수정하였다. 건넌방은 <Fig.5> 에서 2칸의 깊이로 사용되었던 흔적이 있고 <Fig.21>의 기존 복원도에서도 그 깊이가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이 공간이 건넌방이고 반 칸이 본채로부터 돌출된 구조라는 점과 『구술기록』에서 시할머니와 상지꾼 또는 며느리 와 상지꾼이 생활한 하나의 생활공간이란 점으로 볼 때 본채에서 돌출된 부분은 방의 수납공간인 반침공간이었 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연유로 방과 반침의 경계는 장지 문을 적용하였다. 안방의 북측과 서측을 감쌌던 가퇴는 <Fig.3, 5, 21> 모두가 다른 범위를 갖고 있다. 남측 경 계는 수선 전의 <Fig.11>에서 확인할 수 있고, 기존에 남측을 막았던 창호(Fig.22)도 여전이 잔존하고 있다. 그 러므로 현재의 서측 가퇴는 남측으로 한 칸 확장시킨 것 임을 알 수 있다. <Fig.5>에서 북동 측으로 돌출된 부분은 역시 돌출시 켜 사용했던 마루에 대응시킨 수선 의 결과이기 때문에 제거할 수 있고 수선전 실측야장에 웃방 북동측 모 서리 부분에 가퇴의 경계에 해당하 는 창호가 있었고 실측도면에선 누 락된 것을 볼 때 가퇴의 원형은 <Fig.21>과 같은 범위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사랑채와 안채의 영역을 나눈 내외담은 원형의 선을 유지하 고 있되 높이는 현재보다 30㎝이상 높았다. 현재의 높이 로 낮춘 것은 북촌문화센터로 수선할 때의 심의16)에서 낮추어 존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3)안행랑채 또는 아래채
이 채는 <Fig.5, 6>에 원형의 평면과 지붕 및 단면이 잘 남아있다. <Fig.9, 10, 14>의 사진을 통해 실제 입면 을 볼 수 있고 『구술기록』164쪽에서 설명한 아래채의 구성과 일치됨도 확인할 수 있다. 안중문은 안채를 시각 적으로 가렸던 내외문의 역할을 하였고 <Fig.9>를 통해 원래의 남측 담장 쪽 칸에 위치했던 것과 안쪽으로 열리 는 두 짝 여닫이 널문을 가졌음이 확인된다. <Fig.14>에 서 안중문 너머는 광 3칸이 늘어서있고 출입문이 없는 칸은 고창을 가진 화방벽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구술기 록』168쪽에서 ‘뒤주나 찬장은 저 아래 찬방’에 갖다 놓 는다는 표현을 볼 때 마루가 깔려있던 4분합정자살궁판 문을 가진 칸이 찬방이었고 그 서측의 방과 부엌은 며느 리가 시집온 해 시할머니가 건넌방을 사용하고 있어 대 신 거주했던 ‘아랫방’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4)사당
현재 신축 정자로 대체되어 멸실된 사당은 <Fig.5, 13, 18>의 자료가 남아있다. 정면2칸 측면1칸, 맞배지붕 및 4분합띠살궁판문과 일부 화방벽을 가진 것으로 확인 된다. 화방벽은 <Fig.5>에선 남측벽만 표현되었으나 실 측야장에선17) 서측벽까지 화방벽으로 실측하였고 <Fig.18>에서 남측벽엔 화방벽의 용지판이 보이는데 북 측은 용지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실측야장이 정확한 것 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Fig.5>에선 서측벽의 화방벽이 누락되었고 또 기존 복원도(Fig.21)의 북측화방벽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지붕은 <Fig.13>을 통해 중심이 서측으 로 편심 져 있었음이 확인되는데 <Fig.5>에선 지붕을 중심에 위치시킨 오류가 있고 <Fig.21>은 편심을 퇴칸 에 의한 것으로 해석하여 내부에 기둥을 설치하고 툇기 둥은 누락시켰음을 알 수 있다. 퇴의 존재는 실측야장에 도 내부의 기둥이 없는 것으로 보아 원래부터 없었다고 판단되나 지붕의 위치와 평면이 전면으로 돌출된 구성을 볼 때 기존 복원도의 해석이 올바르다고 판단된다. 다만 기둥이 전면에 위치한 것이 다르며 이로 인해 짧아진 전 면 처마를 대신해 역할을 시킨 것이 처마홈통이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사당 자리에 들어선 정자 뒤의 홍예문 은 대수선시 정자와 함께 새로 조성된 것이다. 『주자가 례』에서 사당의 배치는 정침의 동편에 3칸으로 짓고 집 을 지을 때 반드시 사당을 먼저 세우라고 했으나, 이곳 은 정침의 서편에 2칸의 규모로 축소한 점을 볼 때 도시 내에 밀집된 배치의 가옥을 지으면서 규례規例는 지키되 현실에 맞게 조정하여 적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5)측간/목욕간채
<Fig.5, 6>의 기록도면과 <Fig.11, 15>의 사진에서 확인되는 기존 측간/목욕간채의 원형 여부는 다음 구술 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구술1: “행랑 사람이라구 또 따루 있어.. 그는 어느 때 씨는고 하니 무신 때 방아 찧는 것만 해 줘. 둘이 서서 방아질 허는 거.. 둘이서 방알 빠야 하니께 둘은 둔다 구.”(『구술기록』71쪽)
구술2: “변소는 저 뒤루 허는데, 안방 뒤란에 저 뒤에 있으믄 뒷마당에서 뒷대문으루 거름 장사가 와 가지구 는 글루 쳐내. 사랑 변소, 안 변소, 또 아랫 사램이 쓰 는 행랑 변소, 변소가 싯은 있어야지. 그 전엔 나 살 땐 변소가 닛이었어. 저 뒤채루다가 하나 또 맨들어 놨었 거든.”(『구술기록』173쪽)
구술3: “그롷게 크낙한 집은 집에 목간이 있이니께 내 맘대루 밤에..”(『구술기록』92쪽)
구술4: “공동 목욕탕에는 해방허구 나서 가기 시작했지.. 큰 집 살 때는 집이서 목간통을 해 놓구 살았으니께 안 가구 해방허구 나서 집이구 뭐구 다 없어지니께 좀 댕 기구.”(『구술기록』173쪽)
기존 복원도(Fig.21)에서 수선 전에 존재했던 측간/목 욕간채를 부정하고 측간과 광으로 이루어진 독립채(전면 2칸으로 수정)로 처리한 것은 <구술1>의 ‘방아 찧는’ 공 간과 <구술2>의 ‘변소가 넷‘이었다는 조건은 충족할지라 도 <구술3, 4>에서의 ’목간‘의 존재가 누락되어있고 또 한 새로 만든 변소채가 합쳐졌을 때 변소의 개수가 4군 데가 되어야 하는 시기적 전후조건도 맞지 않는다. 특히 방아는 절구를 처마 밑이나 뒤행랑채의 광에 보관했다가 뒷마당으로 이동시켜 작업해도 가능하기 때문에 별도 공 간을 확보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크다. 그러므로 원형의 채가 가져야 할 분명한 전제로는 먼저 건립당시에는 변 소의 개수가 셋이어야 하며, 이때 목간이 존재하고 있어 야하고, 이규숙이 시집온 이후에 뒤채로 지은 변소를 합 했을 때의 변소개수가 네 군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전체조건을 충족하는 것이 허물어버린 기존의 측간/ 목욕간채인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가. 안채 침방가퇴 에 측간/목욕간채와의 연결통로 부분에 대응한 창호구조 가 잔존한다(Fig.23). 이 부분이 연결통로가 아니었다면 좌우의 칸과 폭이 비슷하므로 여타의 4분합만살궁판창으로 처리했을 텐데 굳이 칸의 가운데 부분에 별도의 문선 을 설치하고 밖여닫이 기능의 창을 설 치하고 있다. 나. 안채 침방가퇴는 건 립당시의 것이므로 측간/목욕간채와의 연결통로 부분에 잔존한 구조는 신축 당시에 했던 처리였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현재 잔존하는 창호의 투밀이 살의 단면이나 맞춤방식, 돌쩌귀의 모양, 울거미를 통과 한 문고리용 배목 꼬리의 길이나 접는 수법이 좌우의 창 들과 같다. 다만 가퇴 북측 가운데 기둥은 상하의 인방 을 고정한 여타의 기둥에서 발견되는 나무못 흔적이 없 고 높이가 높은 것을 볼 때 수선 당시에 교체된 부재로 판단되나 연결부분을 벗어난 원래 기둥자리의 것이므로 관계가 없다. 다. <Fig.6>에서 연결통로의 지붕재료가 기와가 아닌 석면슬레이트 같은 얇은 재료인 것은 기와 지붕을 구성할 수 없었던 높이의 한계 때문으로 추정되 므로 처음부터 얇은 지붕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처마 밑에 구성되는 가퇴의 윗부분과 처마앙곡으로 생긴 좁은 틈 사이에 지붕이 설치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 초 연결통로의 얇은 지붕은 당시에는 아직 석면슬레이트 가 없었기 때문에18) 목재널이나 함석으로 처리하였을 것 으로 추정한다. 라. 측간/목욕간채의 기능은 안 변소 1개 소와 목욕간이므로 바깥행랑채의 사랑 변소 1개소 및 행 랑 변소 1개소와 함께 신축 시 3개의 변소를 구성하는 조건과 동시에 목욕간을 가져야 하는 조건도 충족한다. 마. 이규숙 거주 당시 뒤채로 지어진 변소는 <Fig.5>에 서 뒤행랑채 서측의 기단이 지붕 바깥으로 넓게 돌출되 어 무언가의 기단으로 사용된 흔적이 있던 부분에 위치 했었다고 추정한다. 이곳은 공간적 기능적으로 뒤행랑채 용도의 행랑변소가 뒤채로서 들어서기에 합당한 장소이 며 기단의 폭도 행랑변소일 때 부합되기 때문이다. 따라 서 이 변소의 증축으로 인하여 변소의 합계가 네 군데가 되었음이 증명된다.
(6)뒤행랑채
뒤행랑채는 뒷골목에 면한 뒷문을 중심으로 동측은 거 주 및 작업용 채이고 서측은 2칸 규모의 광으로 구성되 었다. 동측행랑에는 동자치 내외와 자식 4~5명 및 다듬 이할머니가 거주하였고 빨래에 풀을 먹이고 두 사람까지 다듬이질을 하던 공간을 가졌었다. 뒷마당은 물장수, 거 름장수, 장작꾼 등의 잦은 출입과 소작 수확물의 반입 등 집안일로 분주한 동선을 가진 곳이었다. <Fig.5, 6> 및 <Fig.7, 8, 15>의 자료에는 원형의 목구조와 지붕이 보존되어있다. 서측의 광은 원형 그대로이나 동측 거주 및 작업채는 벽체와 내부구성이 모두 바뀌어져 있어 거 주인원과 사용행태를 고려하여 원형의 구성을 추적하였 다. 평면적인 경계는 기둥열을 벗어나 확장시켰던 북측 벽을 기둥열로 환원시키고, 남측 박공선 너머로 돌출 확 장시켰던 화장실을 제거하고, 서측 처마선 밖으로 폭을 넓혀 현관 및 실내복도로 사용하던 마루부분을 쪽마루로 되돌리면 원형의 틀로 돌이킬 수 있다. 기능적으로는 두 세대가 살았던 방과 작업공간으로 활용했던 대청을 수용 해야하는데, 동측행랑의 간살잡기에서 가운데 두 칸의 폭이 일정한 점을 볼 때 대청이 두 칸 규모였음을 알 수 있고 6~7명의 동자치 식구가 거주했던 방은 북쪽 2칸 규 모의 큰방이며 남측으로 떨어진 한 칸의 작은방은 다듬 이할머니가 거주했던 공간으로 추정할 수 있다. 뒤행랑 채에 부엌이 없는 것은 안채와 사랑채 경계부분에 뒷마 당에서 출입할 수 있고 사용할 수 있는 작은 부엌이 있 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7)우물, 장독대
Fig.21>에서 위치와 형태를 복원하였으나 형태는 원형 이 아니었고 <Fig.11>의 사진기록에서 사각형이었음을 확인하였다. 장독대는 <Fig.5, 6>에서 위치와 입면 및 단면을 확인할 수 있다. 단면에서는 콘크리트구조로 하 부저장고를 조성했고 그 위를 장독대로 사용했음을 볼 수 있는데 지하구조체의 서측벽이 상부의 콘크리트 담장 과 일체인 점을 볼 때 이는 후기에 수선된 것임을 알 수 있다. <Fig.11>은 안채 부엌의 뒤 공간인 이곳에 간이지 붕으로 네모진 우물 주위를 덮고 사용한 흔적을 보여주 고 있는데, 이를 통해 우물과 장독대 및 안채부엌과 아 래채부엌이 밀집된 이 영역이 과거에도 안살림의 중심영 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8)조경
초본류를 제외하고 다년생 목본류 중 건립당시에 식재 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모두 다섯 그루이다. 중문을 들어서면서 좌측, 작은사랑 정면에 식재된 나무는 가이 즈까향나무이고, 안마당 화단에 있는 것은 사철나무이다. 그리고 사당 오른쪽, 담장 곁의 것은 감나무인데 <Fig.7, 8, 11, Fig.13, 14, 16, 18>에서 수선 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고 이 세 그루는 지금도 제자리에 있다. <Fig.9>에서 안중문 우측에 있었던 나무는 수선 시 안중문의 위치가 이곳으로 이동되면서 제거되었고 현존하지 않는다. 수종 은 흑백사진만으로는 구별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구술 기록』에서 아들이 집을 무단매각한 뒤 사랑마당에 심었 던 나무 한그루를 파서 다니던 안동교회로 옮겨 심었다 고 했던 등나무가 있었다. <Fig.5, 15>에서 보이는 뒷마 당 중앙의 화단은 가옥이 매각된 후의 변화로 판단하고 원형에서 제외하였다. 『구술기록』의 증언처럼 뒷마당 을 이용했던 많은 사용행태는 뒷마당이 안채의 후원이 아닌 뒤행랑의 작업공간이었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9)토지합병
<폐쇄토지대장>의 소유권이전 날짜는 건립 다음해인 1922.8.29.일이며 소유자는 당사자인 유진경이 아닌 아들 민경휘 앞으로 등재되었다. 그리 고 3개월 후인 1922.12.5.일자로 북측의 108번지가 105번지에 합 병되었다(Fig.24). 108번지는 현 재 가옥의 대지범위 중 북측의 뒤행랑채 영역에 해당한다. 서류 정리가 1년여 늦었지만 108번지 는 신축당시에 이미 대지의 범위 에 포함하여 계획되고 공사가 진 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구술 기록』에서 ‘모두 신축’ 이라고 한 점, 뒤행랑 채에 부엌 이 없어 독 자적인 살 림채가 될 수 없는 점, 본채 중앙 의 작은 부엌이 108번지 영역에서 출입하도록 지어진 등 의 이유 때문이다. 108번지의 합병은 지적도에서도 확인 할 수 있는데 1912년의 지적원도에서는 독자적 지번을 가졌던 108번지가 1922.12.5.일자의 폐쇄지적도에서는 대 지경계선이 x자로 표기되어져 합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Fig.25, 26). 이 토지합병은 당시 큰 필지들이 분할 로 진행되던 시대적 흐름과는 반대되는 현상이었고 이때 합병된 대지경계는 오늘날까지 변동 없이 유지되어오고 있다.
(10)유진경 가옥의 원형
가옥의 거주인원과 사용공간 및 단계적 변화와 각 세 부적 요소를 분석하고 추정한 원형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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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자: 유진경(1879~1973)(민형기의 처), 당시 4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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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 여흥민씨 가문의 종부, 과부, 여성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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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 1921년 5월~8월 추석 직전 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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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옥의 모델: 창덕궁 연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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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옥호칭: 유진경-재무관댁, 며느리 이규숙-계동마님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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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위치: 경성부 계동 105번지(108번지 흡수합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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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면적: 697.5㎡ (211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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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용도: 단독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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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 목조와즙(적심석 지정, 초석 아래 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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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 지상1층(측간/목욕간채는 중층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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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면적/연면적: 각 280.5㎡(84.85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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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폐율/용적율: 각 4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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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마감: 목조, 회벽, 화방벽, 한지창호, 기와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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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난방: 여름구조=마루 및 부채, 겨울구조=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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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소구조: 저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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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수단: 가마(보교, 사린교), 인력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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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면적: 20.45㎡(6.19평),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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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높이: 4.75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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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규제: 1913.2.25.~ 시가지건축취체규칙.
5.궁궐요소의 차용
본 가옥에는 궁궐요소 네 가지가 차용되어있는데 창덕 궁 후원 연경당의 구성방식과 침방가퇴, 복도각 그리고 홍살협문을 들 수 있다.
첫째, 연경당의 차용근거는 다음 구술에 의한 것이다. “모냥을 시방 비원의 그 한국집모냥으루 지은 거 있잖 아. 고걸 견본으루, 도본 그려 달라구 그러셔서 그 모냥 으로 지으셨어”(『구술기록』164쪽)Fig.27
‘비원의 한국집’은 연경당을 일컬으며, 연경당은 순조 연간인 1827년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하던 해에 상 량하여 다음해인 1828년 완공한 당시의 궁집인 대군집을 모방19)하여 궁궐과는 다른 제택第宅의 형태를 띠고 있다. 창덕궁의 후원이 공원화되어 비원의 이름으로 일반에 게 공개되기 시작한 것이 1912년부터였으므로20) 가옥 신 축 당시 유진경이 연경당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신축가옥의 모델로서 궁궐내의 연경 당을 제시했다는 것은 연경당의 구성방식이 본인의 가옥 에 적합하다는 판단에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도면을 그 려달라고 부탁한 대상은 시숙인 민병석으로 추정할 수 있고 그는 솜씨 좋은 대궐목수를 수배하고 가옥신축과정 전반을 총지휘한 당사자로 볼 수 있다. 신축 당시는 아 직 한인건축가가 활동하기 전이기도 하지만 연경당을 모 델로 집을 짓는다면 당연히 한옥과 궁궐건축에 정통한 도편수를 찾았을 것이고 이 대궐목수는 요구사항의 해석 을 담은 간가도間架圖형식의 도면으로 민병석-유진경과 협의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유진경 가옥에서 차용한 연 경당의 핵심적인 요소는 안채와 사랑채가 한 몸체로 연 결되어 있되 그 가운데를 담장으로 구획하여 내외의 영 역을 구분한 구성방식이다. 그리고 긴 행랑이 본채를 감 싸는 배치 및 반빗간의 존재 또한 부차적으로 차용한 요 소라 볼 수 있다. 차이점은 유진경 가옥의 경우 안채의 비중이 커져 안채 영역이 거대해지고 반대로 사랑채 영 역이 최소의 기능만 있게 왜소해졌다는 점이다(Fig.29).
내외전內外殿의 구분이 뚜렷하고 공포栱包, 숙석熟石, 단청丹靑등으로 치장한 궁궐의 전각과 다르게 내외채를 연결시키고 담장으로 마당을 구획한 백골집白骨- 연경당 을 궁궐요소라고 표현할 수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궁궐내의 백골집은 5대궁 중 3대궁 내에서 다수 발견할 수 있는데 경복궁엔 고종의 건청궁(1873)이 있고, 창덕궁 엔 헌종의 낙선재(1847), 효명세자의 연영합과 부속채 확 여실과 영하루 그리고 정문 화청관이 있고 유여청헌(현 관물헌) 뒤 부속채들인 죽○루, 죽향소축, 완연당(?, 이상 동궐도21))이 있다. 그리고 후원엔 주합루 뒤 양쪽의 독 서처 희우정(1645)과 제월광풍관(구 천석정, 1776이후), 효명세자의 의두합(이안재(1827)와 운림거)과 연경당 (1828)이 있고 덕수궁(구 경운궁)엔 제9대 성종의 형 월 산대군의 제택第宅이었던 석어당(1593이전)이 있는 등 궁궐에는 전형적인 궁궐건축외의 민가民家건축의 요소도 많이 포함하고 있고 창덕궁 후원의 청의정(1636)처럼 초 가지붕을 수용한 경우도 있다. 시어소로 삼은 석어당을 제외한 이들 모두는 검소한 이미지인 제택第宅의 형식만 빌었을 뿐 공포나 숙석, 화려한 창호 등의 궁궐요소도 가미하여 제각각의 필요와 용도에 따라 독창적으로 건립 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궁궐 내에 위치한다는 장소성의 이유로 궁궐건축의 한 영역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그 러므로 궁궐내의 백골집들은 시대적, 정치적으로 왕조가 필요로 한 건축용도 중 사가私家의 이미지가 필요하여 부분적으로 수용한 궁궐건축의 보완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유진경이 연경당에서 차용한 것은 직접적 인 궁궐건축의 요소가 아니라 궁궐에서 수용한 제택형식 의 요소를 차용한 것이지만 민가의 입장에서 본 인식적 측면에서는 궁궐의 요소를 차용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두 번째 궁궐요소의 차용은 침방가퇴寢房假退인데 궁 궐요소인 침방가퇴는 제택에서는 그 예를 발견하기 어려 운데, 본 가옥에서는 안채 안방 주위를 감싸고 있는 침 방가퇴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Fig.30, 31). 안방의 크 기는 외부에 노출되는 면을 기준으로 서쪽이 3칸, 북쪽 이 1.5칸이어서 크기가 4.5칸이다. 이것은 유진경이 요구 했던 ‘6칸 크기의 안방’보다 작은데 이 침방가퇴를 포함 하면 6칸 크기가 된다. 이것은 유진경의 요구와 구술내 용이 일치하며 가장 중요했던 요구사항이 실제 적용되었 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침방가퇴는 연경당에는 없는 것이어서 시숙의 배려나 궁궐 가퇴의 용도를 아는 대궐 목수의 제안에 의한 작품임을 짐작할 수 있다. 가퇴假退 란 궁궐의 침전寢殿이나 궁집宮家에서 볼 수 있는 것으 로, 건물 정면의 기둥으로 구획된 툇마루와는 달리 건물 의 후면이나 측면의 처마 아래 공간에 설치한 좁은 바깥 툇마루를 말한다. 대청 후면의 가퇴는 난간이 설치되거 나 그냥 노출되는 등 벽이 구성되지 않지만, 침방부분에 는 간이구조와 만살창호로 상인방 높이까지 벽을 구성하 여 침방을 둘러싸며, 바닥 및 천장은 장마루를 쓰는22) 본체 바깥의23) 덧구조체로 형성된다. 침방을 감싼 가퇴 는 침전이 직접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막아주는 완충공 간이자 보호공간이며 수발을 위한 통로 및 온돌방 주위 의 열손실방지공간24)이기도 하다. 본 논문에서는 침방을 감싸며 공간을 형성하는 가퇴를 대청 쪽의 노출된 가퇴 와 구분하기 위하여 ‘침방가퇴寢房假退’로 칭했다. 침방 가퇴가 적용된 궁궐 침전의 예는 경복궁 건청궁 영역의 곤녕합 침전 정시합과 집옥재와 연결된 협길당, 창덕궁 의 대조전 및 함원전, 흥복헌, 경훈각 일원, 특히 동궐도 에서는 희정당의 우측벽에도 보인다.25) 그리고 덕수궁의 석어당, 즉조당, 준명당, 함녕전 등에 존재하며 궁집의 예로는 운현궁의 노안당, 노락당, 이로당에서 볼 수 있다. 제택에서는 거의 예를 찾기가 어려운데 유진경 가옥을 제외하면 옥인동 윤씨 가옥(1919?) 한 곳을 발견할 수 있다. 운현궁의 경우에는 고종의 잠저潛邸이자 흥선대원 군의 사저로서 왕으로의 등극(1863)와 함께 교지를 받아 궁이 되었고, 같은 시기에 진행된 경복궁의 중건 (1865~1868~1872)과 함께 경복궁의 공간구성체계를 기본 으로 단계적으로 확장되어26) 사실상 궁궐의 침전모습을 갖춘 궁집이 되었기 때문에 침방가퇴의 적용은 자연스러 운 것이었다. 그러나 제택에서 발견되는 두 곳의 적용 예는 특수한 경우로서 이는 시대적 상황 및 생활주체의 입장과 관련이 깊다. 유진경 가옥은 민병석의 조카며느 리 집이고 옥인동 윤씨 가옥은 윤덕영 측실側室의 집이 다. 두 사람은 1910년 경술국치 당시 민병석은 궁내부대 신, 윤덕영(1873~1940)은 시종원경의 품계로 내각총리대 신 이완용을 도와 조약체결에 적극 협력하였고 그 대가 로 모두 자작의 작위를 받고 일제강점시기 조선귀족으로 서 최상류층의 권세와 재력을 누렸던 이들이며 특히 윤 덕영은 순정효황후의 백부이기도 했다. 침방가퇴는 두 사람이 조카며느리와 측실의 집을 지어주는 총책임자들 로서 경운궁과 창덕궁을 출입했던 이들에게는 익숙한 것 이었고 과부댁과 측실의 침방을 보호하는 장치로서 이들 이 먼저 요구하였거나 대궐목수가 두 가옥의 생활주체에 적합한 장치로 제안하여 적용한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소박한 이미지의 유진경 가옥과는 반대로 옥인동 윤씨 가옥은 초각이 잘된 초익공과 보머리 및 장여의 귀뺄목 도 초익공과 조화롭게 초각한데다 궁궐침전에 많은 운공 까지 적용한 멋을 부려 그 정도가 높다. 이것은 윤덕영 이 송석원松石園일대를 매입(1910)하여 경영한 벽수산 장 영역 내에 주불 주차공사였던 민병찬에게서 구한 프 랑스 귀족 별장의 설계도로 지어 ‘한양 아방궁 또는 조 선 제일의 아방궁‘으로 불린27) 벽수산장碧樹山莊의 바로 뒤에 위치했던 만큼28) 궁궐요소까지 도입하여 그 위상을 높여 건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때의 궁궐요소의 모 방은 제재할 나라가 없어졌고 두 사람의 권세에 침방가 퇴같은 작은 건축요소로 문제제기할 대상은 없었기 때문 에 가능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유진경 가옥에는 침방가퇴와 연계된 한 칸 길이 의 복도각이 있다.(Fig.6 참조) 이것은 북쪽의 측간/목욕 간의 중층레벨과 연결하여 안채 전용의 화장실 및 목욕 공간으로 통행하기 위한 은밀한 복도로 설치된 것이다. 복도각은 궁궐의 침전에서 오로지 통행의 용도로 지어진 복도채를 말하며, 경복궁 건청궁 장안당-곤녕합 사이, 팔 우정-집옥재-협길당 각 사이, 창덕궁 희정당 좌우의 전 후, 대조전-경훈각 사이, 덕수궁 즉조당-준명당 사이, 함 녕전-형복당 사이 등에서 볼 수 있다. 운현궁에선 노락 당-행각-이로당을 잇는다. 민가의 제택에서는 순수 통행 용 복도각을 찾기는 어려우나 본 가옥에는 적용됐었던 걸 볼 수 있다. 측간/목욕간채는 격자유리창과 판재를 댄 외벽과 내부에 복도를 가지는 일제강점기의 근대식 건축 수법이 반영되었고, 무엇보다 중층의 구조형식을 취한 것이 특징이었다. 중층의 이유는 침방가퇴에서부터 연결 되는 바닥레벨의 시작점이 높았기 때문이고 이는 기단이 높은 궁궐침전에서 주변과 연결되는 복도각이 높고 그 하부를 띄워 통행용 필로티로 구축한 예로도 설명이 된 다. 또한 은밀한 안방 전용의 기능을 담은 채가 집안일 로 분주한 뒷마당에 위치하는 대신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바닥레벨을 높일 필요가 있었고 이것이 높은 레벨로 시작되는 복도각의 레벨과 부합할 뿐만 아 니라 그 하부는 겨울을 나는 많은 장작과 숯을 보관할 공간으로 활용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넷째, 궁궐에서 보이는 홍살협문29)을 들 수 있는데 이 요소는 주로 가퇴의 끝을 막아 영역의 경계를 표시하는 상징적 장치 및 처마와 가퇴가 담장과 동시에 만나는 위 치의 완충장치 또는 건물에 붙은 협문의 기능으로서 목 구조체와 어울리게 목재로 꾸며지며 2단의 홍살과 2단 또는 1단의 안상을 가진 궁창으로 장식한 것이 특징인데 문은 울거미가 있는 골판문이며 용도에 따라 설치한 것 도 있고 없기도 하다. 이 문은 경복궁 교태전 정면 좌우, 건청궁 장안당, 곤녕합, 창덕궁의 낙선재, 수강재, 연경당, 운현궁 등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역시 제택에서는 보 기가 어려운데 본 연구가옥과 남산골 한옥마을이 아닌 남겨진 원래의 옥인동 윤씨 가옥에서는 볼 수 있다. 유 진경 가옥에 적용된 홍살협문은 영역의 경계 및 협문의 기능은 갖되 마당을 분리하는 담장의 선형과 연속된 형식으로 가퇴가 아닌 툇간 툇마루에 적용된 것이 다른 점 인데 이것은 한 몸체로 연결된 안채와 사랑채를 내외의 영역으로 구분하고자할 때 마당의 담장은 건물까지만 설 치가 되기 때문에 남은 툇간의 공간을 막기 위한 장치로 그 용도를 응용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진경 가옥에는 의도적인 궁궐요소의 차용이 있었고 그 의미는 다음과 같이 축약 할 수 있다. 첫째, 연경당을 가옥의 모델로 삼은 것은 내 외채가 나란히 붙어있으면서 담장에 의해 내외의 공간으 로 분리된다는 특징 때문인데, 이점은 아직 어린 아들을 둔 과부종부이자 가장으로서의 입장에서 아들을 최대한 곁에 두고자 했던 의도에 부합하며 또한 크지 않은 중규 모의 대지에 많은 부속채들까지 들여야 하는 도시적 제 약을 해결하기 위해 집약적 평면을 가진 사례를 차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본 가옥 및 옥인동 윤씨 가옥 에서 침방가퇴를 차용한 두 경우는 근대시기 두 권세가 가 보호대상인 두 여인의 침방을 보호할 장치로 궁궐요 소를 차용한 특수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셋째, 복도각은 안방전용의 화장실 및 목욕 공간을 내밀히 왕래하기 위 해 뒷마당의 작업공간으로부터 은폐된 통로로서 도입되 었다. 이 복도각의 레벨 때문에 측간/목욕간채의 바닥레 벨도 높여져 중층의 구조가 되었다. 넷째, 홍살협문은 내 외영역을 구분하기 위한 장치로 담장이 마당을 막고 남 은 툇간을 막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다섯째, 유진경이 필요로 하고 요구한 것은 사랑채가 곁에 있는 집약된 본 채와 큰 안방에 국한된 것이었고, 그 외의 전체 배치와 궁궐요소의 도입 등 디테일한 것은 시숙의 지휘능력 및 대궐목수의 안목이 큰 몫을 담당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계획적인 면뿐만이 아니라 아무리 조선후기에 건축 기술이 발달하고 분업화 및 자재상이 생겨 물품조달이 쉬워져 공사기간이 짧아졌다고 해도,30) 7채를 2~3개월 내에 공사하려면 숙련된 시공능력과 엄청난 관리능력 및 자금조달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 라서 이 속성공사는 당사자인 유진경이 많은 관심과 재 촉을 했음은 물론, 시숙의 지휘력과 자금력이 작용했고 또한 공사를 맡은 대궐목수도 제대로 역할을 해냈기 때 문에 가능했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6유진경 가옥의 건축특성과 조영개념
유진경 가옥의 배치특성은 안채를 대지의 중심에 두고 부속채들을 에워싸게 배치한 안채 중심의 계획, 즉 ‘안채 의 중심성’에 있다(Fig.32). 그리고 안채를 감싸며 불규칙 한 대지경계에 적응 한 행랑들은 외부에 대한 경계와 시각적 차폐기능을 가지는 ‘도시적 대응과 적응 성’을 보여준다. 또한 행랑마다 각각의 외 부공간을 부여해 독 자적 생활영역을 형 성시킴으로서 ‘행랑의 발달과 영역화’란 특 성을 띤다(Fig.33). 구조적인 면에서 본채의 기둥이 162mm 각으로 가늘고, 안채는 1고주5량, 사랑채는 3량 으로서 기둥+보/도리+서까래로만 구성된 가장 단순한 민 도리 구조를 적용하고 있다. 또한 기단도 양반가에 어울 리지 않게 외벌대를 적용하여 집이 낮고 아담하며 의장 적 요소는 기본적인 한옥구성요소만 있는 ‘최소의 구조 와 의장’적인 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솟을대문의 행랑측 칸배치, 사당의 규모약화와 서측배치 등은 도시 내 좁은 대지에 적응하기 위한 ‘규범 내 합리성 추구’로 해석되며, 무엇보다도 밀집된 배치를 가 진 가옥의 외부공간과 동선 문제를 해결한 것은 마당과 길을 일체화시키며 5개의 영 역을 조성한 수법이며 이는 ‘대지 속으로 끌어들인 도시의 길’로 나타났다(Fig.33). 그리 고 제택에 ‘궁궐요소를 차용’한 근대시기 건축수법의 한 예를 보여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를 통해 주된 조 영 요소들을 관통하는 계획적 의도는 안채의 중심성과 보호성이 강조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유진경 가옥의 주된 조영개념은 ‘안채의 보호’였다고 할 수 있다.
7결 론
『구술기록』에 의해 현 북촌문화센터의 최초 건립자 는 민형기(1881~1913)가 아닌 그의 부인 유진경 (1879~1973)이었고, 민형기가 요절한 8년 뒤인 1921년 추석직전에 준공되었음이 밝혀졌다. 며느리 이규숙은 준 공 후 3년째인 1924년에 본 가옥으로 시집을 왔고 이들 은 1935년까지 거주하다가 아들의 단독매각으로 이사하 였다. 가옥의 건립자는 민형기가 탁지부에서 재무관으로 근무했었던 경력 때문에 그의 사후에도 유진경에 대한 호칭은 ‘재무관댁’이 되었고 이 호칭 때문에 건립자에 대 한 오해가 있어왔다. 유진경은 청파동에서 이사 올 때부 터 싫었고 남편을 떠나보낸 기존 재동의 집을 떠나 새집 에서 며느리를 얻고 싶었고, 많은 자손을 기대하며 본인 의 의도를 반영시켜 안방과 안채가 강조된 본 가옥을 건 립하였다. 아직 여성의 활동이 수동적이었던 1921년의 시대상황에서 집안의 상황과 본인의 바람을 담아 신축가 옥의 모델로서 궁궐의 연경당을 제시하고 필요요소 및 규모를 요구하며 가옥의 건립과정에 관여한 것은 과부로 서 가장의 역할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고 추진력 있는 성 격이 있어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진경의 기본적인 요구사항 외에 항상 집안일을 상의하던 시숙인 당시의 권세가 민병석이 가옥의 건립과정을 지휘했을 것으로 보 이며 안목과 능력이 있었던 대궐목수의 활약이 있었기 때문에 짧은 기간 내의 속성공사와 궁궐요소의 도입이 가능했을 것이므로 두 사람의 역할도 큰 몫을 차지한다 고 볼 수 있다. 이런 협동으로 나타난 가옥의 특징은 안 채에 사랑채가 붙은 집약된 평면의 본채를 채택한 점과 안채를 중심에 두고 부속 행랑들이 둘러싸는 안채 보호 적 배치를 구현한 것이다. 특히 안방이 외부에 면하는 부분을 궁궐의 침전에 적용하는 침방가퇴寢房假退를 차 용함으로서 안채 보호의 의도를 심화한 점, 복도각을 도 입함에 따라 안방 전용의 측간/목욕간채가 중층의 구조 를 취한 점, 내외공간을 분리하기 위해 툇간에 홍살협문 을 적용한 수법 등은 제택에서는 이례적인 것이다. 이러 한 궁궐요소의 차용은 과부종부가 생활주체인 소박한 제 택으로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옥을 특징 있게 만든 요 인이 되었고 이는 근대시기 권세가의 배경이 있어 가능 했던 드문 경우였다고 보인다. 따라서 유진경 가옥은 전 통한옥의 형식으로 도시에 밀집되게 적응하며 중심성과 보호성이라는 배치개념을 실현하면서 궁궐의 요소를 가 미한 특별한 제택으로 건립되었고 그에 따른 행랑건축의 발달을 보여주는 근대기 상류층 한옥의 한 특수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근대기에 도시양반가에서 전통적인 살림에 필요했던 최소의 행랑을 갖춘 형식을 보여주는 살림중심형의 한옥으로 지어진, 전통성 기반의 실험적 한옥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